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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7장 강해

 창세기 17장 개요


창세기 17장은 할례언약을 다룹니다. 이스마엘을 낳은 아브람이 구셉구셉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찾아와 모든 남자는 낳은 지 팔일이 되었을 때 할례를 받도록 합니다. 할례를 통해서 하나님과 영원한 언약 안에 머물게 됩니다. 할례 언약을 치를 때 이스마엘의 나이는 십삼 세였습니다.


창세기 17장 구조

  • 1-8절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 9-27절 할례언약과 할례식


창세기 17장 강해


1. 1-8절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구십구 세 때에 찾아오신 하나님


바로 앞절인 16장 16절에서 아브람이 이스마엘을 낳을 때가 86세였습니다. 그리고 무려 13년이 흐른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찾아 오십니다. 초기 10년 동안 수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가나안에 도착하고, 애굽에 내려하고, 다시 돌아와 롯과 헤어지고, 전쟁이 일어나 롯을 구하고, 하길을 첩으로 맞이하고,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그 후 13년 동안 성경은 그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침묵의 13년을 조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13년 동안 침묵하셨을까요? 그동안 아브람을 무엇을 했을까요? 그냥 평범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전 10년보다 더 파란만장한 삶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 보시게 13년은 그저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이것을 좋게 평가할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13년이 없었다면 99세는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3년의 기나긴 인내와 포기하지 않는 질긴 기다림이 없다면 결코 이삭은 얻을 수가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동안 아브람이 무엇을 했지는 모른다. 하지만 무의미하고 아무런 가치도 없어 보이는 날들도 견뎌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완전하라'라 명하십니다. 완전의 히브리어 '타맘'은 완전 무결한 상태를 말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무결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일부 학자들은 하갈을 취한 것처철 축접에 대한 것으로 봅니다. 말도 안 되는 해석입니다. 당시에 축접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고, 이 부분에 전혀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야곱은 네 명의 부인을 둡니다. 현대의 관점에서 3천 년전의 역사를 해석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발상입니다.


타맘(תָּמִים)이 사용된 곳을 보면 창 6:9에서 노아에게, 출 12:5 흠 없는 어린양에 대해서 사용합니다. 이러한 용례를 본다면 13년의 세월이 하나님 보시기에 분명 모난 부분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표현은 히브리어를 순서대로 직역하면

  • 걸으라(할라크) 내 앞에서 -이다. 흠이 없이(완전하게)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처럼 흠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충고는 뒤이어 나오는 앞으로 변하게 될 아브람의 사명 즉 이름과 걸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 아브람 - 큰 아버지 / 아브라함 - 많은 무리의 아버지


아브람(אַבְרָם)은 원어상 의미를 보면 '고귀한 아버지'란 뜻입니다. 이에 비해 아브라함(אַבְרָהָם) 많은 무리의 아버지입니다. 즉 자기 혼자 '나는 고귀하다'가 아니라 많은 무리의 대표가 되는 역할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완전하라는 '이제는 니 혼자만의 삶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가 되어야 하니 그에 걸맞는 삶을 살아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언약의 영원성


하나님은 7절에서 '내가 내 언약을 너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 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즉 아브라함과 맺어진 언약은 아브라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아브라함의 언약에 종속됩니다. 


2. 9-27절 할례언약


언약을 지키라


지키라는 '샤마르(שָׁמַר)'로 영어로 Keep로 번역하는데, '머물다', '그대로 행하다' '보존하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창세기 2:15에서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지키라'는 명령에 사용된 것을 보며 하나님께서 처음 만드신 그 상태로 유지하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계명 안에 머물며, 처음 약속을 저버리지 않는 상태로 계속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첫사랑'을 잃어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할례를 행하라


할례는 남자의 성기의 표피를 자르는 것입니다. 모든 남자가 받아야 하고, 태어난 지 팔일 만에 받아야 합니다.(12절) 할례를 히브리인들의 유일한 것으로 보지 말아야 합니다. 당시에도 할례를 행하는 풍습을 가진 민족들은 많았습니다. 할례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할례가 갖는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할례는 풍습의 의미를 훨씬 뛰어넘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예수님도 태어날 지 팔 때 되는 날 성전에 올라가 할례를 받았습니다. 할례는 모든 율법을 초월하여 행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안식일 계명보다 우위에 있습니다.

  • 요한복음 7장 23절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사래에서 사라로


아브람에 이어 사래도 이름이 바뀝니다. 사래(שָׂרַי)에서 사라(שָׂרָה)로 바꾸어 주십니다. 앞의 두자는 שָׂרָ는 동일하고 뒤에서 단음에서 장음으로 바뀝니다. 사래는 공주란 뜻으로, 원어를 분석하여 지배자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왕족이란 의미입니다. 하지만 사라는 '왕후' 또는 귀부인이란 뜻입니다. 공주에서 황후가 된 것이죠. 신분 상승의 의미도 있지만 '어머니'란 의미가 부여된 것입니다. 단지 남편의 사랑 받는 한 여성이 아니라 나라의 어머니로 변화된 것입니다.


창세기 장별요약 및 강해목록



창세기 16장 강해

 창세기 16장 개요


아브람은 횃불언약을 통해 약속을 다시 받게 됩니다. 사래는 아브람에게 자신의 몸종인 하갈을 첩으로 주어 아들을 낳게 합니다. 16장에서 아브라함을 통해 아들을 낳는다는 말에 사래가 자신의 몸종을 통해서도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임신한 하갈은 사래를 무시하고, 사래는 화가나 하갈을 학대합니다. 결국 하갈은 핍박을 피해 도망갑니다. 하지만 도망가는 길에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 하갈의 아들을 통해 많은 후손들이 일어날 것을 듣게 됩니다. 하갈은 약속을 듣고 다시 돌아가 아들을 낳고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합니다.


창세기 16장 구조

  • 1-6장 하갈을 아브람 첩으로 준 사래
  • 7-14절 약속을 받은 하갈
  • 15-16절 이스마엘을 낳은 하갈


창세기 16장 강해


1-6절 하갈, 아브람의 첩이 되다.


사래와 하갈


1절은 참으로 묘한 기분을 느끼게 합니다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고 애굽 사람 하갈이란 여종이 소개됩니다. 이 글을 읽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어떤 기분일까요? 하길을 아이를 낳게 됩니다. 하지만 사래는 아이를 낳지 못합니다. 이것은 하갈에게 소망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힘과 능력으로 본다면 다시 애굽은 그 어떤 나라보다 강력한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미래도 소망도 없는 그런 나라였습니다. 애굽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편하고 소망이 있습니다. 왜 사서 고생 해야 할까요? 여기에 대한 답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에 있습니다.


사래의 제안


정말 놀라운 장면입니다. 사래가 아브람을 찾아가 자신의 몸종 하갈을 첩으로 주니 아이를 낳으라는 것입니다. 고대 세계에서 흔한 일이었지만 아브람과 사래 사이에서 사래의 위치를 보면 기이한 장면입니다. 지금까지 사래는 단 한 번도 아브람을 대들거나 제안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대 처음으로 사대가 아브람에게 제안합니다.


그런데 사래의 제안이 조금 이상합니다. 그녀는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2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하갈을 당신에게 준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하지만 이 말에는 사래가 15장에서 아브라함을 통해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말에서 자신을 배제한 것이 분명합니다. 굳이 자신이 아니라도 다른 여자가 아브람의 아내가 되어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도 아브람의 후손이니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당시 주어진 계시, 사래의 믿음으로 보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잘인지를.


우리는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최선이 최악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최대한 머리를 싸매고, 가장 합리적이고, 가장 지혜로운 방법을 동원해도 그것이 가장 어리석은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언제나 부족하고 연약합니다.


가나안에 거주 한 지 십년 후


16절에서 하갈이 이스마엘을 낳을 때 아브람의 나이가 86세였으니 현재는 85세입니다. 아브람이 75세에 가나안에 도착했으니 딱 10년이 되는 해입니다. 십 년이란 참 묘한 시간입니다. 룻기에도 보면 10년이 지났을 때 나오미는 남편과 자식을 모두 잃고 홀로 남았습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닙니다. 십 년은 꽉찬 시간이고, 모든 것이 완성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십년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십 년이 되었을 때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하갈의 임신, 그리고 멸시


하갈이 아브람과 동침하고 곧바로 임신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갈은 자신이 임신한 것을 알고 곧바로 사래를 무시합니다. 아이도 낳지 못하는 여자를 자신의 주인이라고 생각한 것이죠. 여기에는 의미심장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모든 기준이 아이를 낳는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것이죠. 만약 이것이 아무리 착해도 가난한다면 그런 남자와 결혼할 여자가 있을까요? 애굽은 풍요롭고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가나안은 어떤가요? 아니 출애굽의 여정은 어떤가요? 아무리 미래도 답도 보이지 않고 고생만 합니다. 애굽과 가나안 어디를 선책하는 것이 옳을까요? 이것이 현실이냐 비젼이냐의 문제입니다.


사래의 학대


사래를 아브람을 찾아가 항의합니다. 아브람은 당신이 좋을 대로 하라며 미룹니다. '수중에 있다'는 말은 '하갈은 당신의 종이다'라는 뜻입니다. 사래를 하갈을 종으로 대하고 학대하기 시작합니다. 종으로 돌아갈 하갈은 그제서야 자신의 신분을 알게 됩니다. '학대하다'는 '아나(עָנָ)'는 '괴롭히다' '낮아지게 하다' '괴롭게 하다'는 뜻입니다. 출애굽기 10:3에서 '겸비하다'로 번역한 것을 보면, 사래가 하갈에게 왜 내 앞에서 스스로 낮추지 않느냐고 학대한 것입니다. 


하갈은 스스로 겸비했을 때 문제가 되지 않지만 결국 강제적으로 낮아지게 됩니다. 사람은 겸손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타인들에의해 낮아지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비할 때 하나님이 높여 주십니다.


7-14절 약속을 받은 하갈


도망가는 하갈


하갈은 사래의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갑니다. 하갈은 광야의 샘물 곧 술 길 샘곁에서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게 됩니다. 자신을 낮추어 모든 것이 끝났을 터이지만 하갈은 절대 자신을 낮추지 않고 교만하여 으시대는 바람에 결국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네가 어디서 왔느냐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에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를 묻습니다. 하갈이 있어야 할 자리, 그리고 돌아가야 할 자리가 있습니다. 때로는 고통을 잊기 위해서 그곳을 떠나지만 결국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들으셨다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고, 이름을 이스마엘(Ishmael)이라 하라 말합니다. 뜻은 '하나님께서 들으신다'입니다. 들으셨다는 것은 단지 소리를 들었다가 아니라 하갈의 모든 고통과 아픔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정을 아신 여호와 하나님께 하갈을 긍휼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비록 애굽사람이고 이방인이지만 하나님은 하갈의 고통을 들으십니다. 불신자라고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도 햇빛을 비추시고 비를 내리십니다.

하갈은 깨달음을 얻고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13절)을 뵈었다고 고백합니다. 하갈은 돌아가 아이를 낳고 이스마엘이라 합니다. 그 때 아브람의 나이는 86세였습니다.


창세기 15장 강해

 창세기 15장 개요

  • 햇불언약

그돌라오멜 연합군에게서 롯을 구한 아브람은 오는 길에 살렘왕 멜기세덱을 만나 축복을 받고 십의일조를 바칩니다. 이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환상 가운데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은 자식이 없음을 말하자 하나님은 다시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은 이것을 의로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제물을 바치소도록 하고 제물 사이로 햇불 모양으로 지나가십니다. 사백년 동안 이방에서 객이 되어 다시 돌아올 것이라 예언하십니다.

창세기 15장 구조

  • 1-6절 아브람을 찾아온 여호와
  • 7-11절 땅을 약속하신 하나님
  • 12-21절 횃불언약


창세기 15장 강해


1-6절 아브람을 찾아온 여호와


환상 중에 찾아오신 하나님


'이후에'는 시간의 흐름을 말하기도 하지만 이전 사건이 어느 정도 경과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을 아브람을 환상 가운데 찾아오십니다. '환상(히, 마하제)'이란 이 표현이 참으로 이상하게 들리지만 선지자들에게 종종 사용하시던 계시의 한 방법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을 그대로 드러내시는 직설적인 계시입니다. 


그런데 하난미은 왜 찾아왔을까요?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두려워 말라'하십니다. 무엇이 두려운 걸까요? 우리는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지만 몇 가지에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복수를 당할까 두려워한 것일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많은 시간이 걸렸음에도 여전히 아들에 대한 소식이 들리지 않자 걱정이 많아져 낙심해 있을 수 있습니다.  뒤 이어 나오는 '방패'와 '상급'이라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이 두 가지가 미묘하게 섞여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더디 이루어질 때,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오지 않을 때 우리는 낙심하며서 두려움이 함께 찾아오기도 합니다. 어떤 큰 일을 했지만 그 뒤에 따라오는 낙심은 더욱 무섭습니다.


자식 없음은 한탄하는 아브람


하나님의 말씀에 아브람은 즉각적으로 자신에게 아들이 없음을 말합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약속을 하셨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자 하나님께 왜 아들을 주시지 않느냐고 투덜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자신에게 아들이 없어 자신이 기른 자가 상속자가 될 것이라 말합니다. 고대 세계에서 종이지만 어릴 때부터 자식처럼 기르기 때문에 그가 자식을 대신해 상속자가 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결국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행하지 않음을 불평하고 있는 것입니다.


후손을 다시 약속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절대 종이 상속자가 될 것이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4절)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반드시 아브람을 통해 자식이 태어나고, 그가 아브람을 장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장막 밖으로 끌고 나가 하늘의 많은 별을 보여주시고, 뭇 별을 셀 수 없듯 네 자손도 이와 같을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13:16에서 땅의 티끌처럼 많게 하시고, 이제는 하늘의 별처럼 많게 될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비유는 다르지만 같은 말입니다.


아브람의 의


아브람은 참으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 하신 것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6절은 앞으로 신약에서 중요한 문제로 대두 될 의인의 믿음에 관한 것입니다.

  • 6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의는 체데크인데, 옳다 바르다의 뜻이지만 구약에서는 율법적으로 흠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으로 통해 죄가 없는 완전한 상태를 말합니다.


  • 하박국 2장 4절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로마서 1장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갈라디아서 3장 11절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 히브리서 10장 38절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믿음의 능력이자 위대함입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믿는 아브람을 의로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7-11절 땅을 약속하신 하나님


이 땅을 네게 주어


하나님은 후손으로 그치지 않도 다시 땅의 약속으로 이어집니다. 7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신 이유를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땅이 없이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는 인생이 아니라 땅을 주심으로 평화로이 지낼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삼 년 된 제물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무엇으로 알리이까?' 다시 묻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요구하십니다. 이러한 제물들은 후에 성전에서 드려지는 제물들입니다. 수컷은 오직 속죄의 의미지만 암컷의 경우 화목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삼 년'일까요?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때가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온지 삼 년 되 해라 생각합니다. 16:3에서 사래가 하갈을 아브람에게 첩으로 줄 때가 가나안에 거주한지 10년이 되던 해입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이 제물을 드리는 시기는 10년이 지나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제물을 쪼개고


이 제물은 그냥 제물이 아닙니다. 아브람은 제물들을 비둘기를 제외하고 모두 반으로 쪼갭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럼 뭘까요? 의식입니다. 소위 언약식으로 불리는 것으로 국가와 국가가 서로 동맹이나 불가침 조약을 맺을 때 동물을 쪼개고 두 왕이 그 사이를 지나감으로 만약 이 약조를 어길 경우 이 찢어진 동물처럼 찢겨질 것이라는 엄중한 약속인 것이죠. 히브리어로 '베릿트'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아브람이 보인 행위는 하나님과 아브람이 상호조약(베릿트)를 맺는 것이죠.


12-21절 횃불언약


흑암 중에 임하신 여호와


밤이 깊어가지만 하나님은 오시지 않습니다. 아브람은 제물을 지키다 깊은 잠에 빠져들어갑니다. 흑음과 두려움이 아브람에게 임합니다.  이 부분은 마치 흑암 위를 운행하는 하나님의 영과 같고, 시내산 구름 속에서 흑암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미래에 대한 예언


하나님은 아브라함에 나타나 아브람의 자손들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사백 년을 객으로 지내다 사대 만에 돌아올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자손들을 괴롭히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벌할 것이라 하십니다. 이것은 앞으로 일어날 출애굽 사건을 말씀합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읽을 때는 반드시 출애굽기의 관점에서 읽어야 합니다. 창세기를 기록한 모세는 왜 출애굽을 해야하는 지, 가나안으로 가야하는지를 가르쳐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냥 괴로워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으로 가는 것은 운명이며, 하나님의 약속이며, 이스라엘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은 아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16절)이라 말합니다.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대로 이루실 그 때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방법으로 되지 않습니다. 참고 기다리는 것도 믿음입니다. 믿음은 소망이 전제 되어야 합니다. 소망은 약속에 근거합니다. 약속 없는 소망은 자기 속임수에 불과합니다.


횃불 사이로 지나시는 하나님


이 말씀을 마치시고 하나님은 횃불 사이를 지나가십니다. 정식적인 언약식은 두 왕이 함께 그 사이를 지나갑니다. 두 사람이 같이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아브람은 쪼개 동물 사이로 지나가지 않습니다. 하나님만 지나가십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만약 자신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시 자신이 쪼개지겠다는 확증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실현되지만 인간은 어리석은 늘 불신하고 불안해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의 관점에서 확실한 약속임을 보여주시기 위해 홀로 그 사이를 지나가신 것입니다. 인간의 연약함과 어리석음을 배려한 것입니다.




창세기 14장 강해

 창세기 14장 개요


애굽에서 돌아와 목자들이 서로 싸우는 바람에 아브람과 롯은 결별합니다. 롯은 요단들을 보고 그곳으로 떠납니다. 홀로 남은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와 다시 언약을 상기 시키시며 보이는 땅을 주시겠다 약속하십니다.  롯이 소돔성에 거할 때 시날 왕 연합군과 소돔왕 연합군과의 전쟁이 일어납니다. 전쟁에서 소돔 연합군이 패하자 소돔성에 거하던 롯도 함께 포로로 잡혀갑니다. 아브람은 소식을 듣고 에스골의 형제와 연합하여 시날 왕 그돌라오멜 연합군을 공격하여 격파합니다. 오는 길에 살렘왕이자 제사장을 만나 축복을 받게 됩니다.


창세기 14장 구조

  • 1-12절 싯딤 골짜기의 전투
  • 13-16절 아브람의 헌신
  • 17-24절 멜기세덱의 축복


창세기 14장 강해


1-12절 싯딤 골짜기의 전투


전쟁이 일어나다


사람의 앞 일은 알 수가 없습니다. 롯은 자신이 가장 지혜로운 선택을 했다고 판단했고, 그것을 실행해 옮겼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얼마 가지 않아 자신이 거하던 소돔에 전쟁이 일어납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든 패배하든 주민들은 피해를 봅니다. 가장 지혜로운 선택이 가장 어리석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싯딤 골짜기


싯딤(Shitim)은 아카시아를 말합니다. 이곳의 지명은 '아벨 싯딤'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해 북동쪽에 느보산 바로 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싯딤 골짜기는 아벨 싯딤에서 조금 떨어진 사해 남쪽 근방입니다. 이곳은 후에 지대가 낮고 역청이 많아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연합군은 시날 왕 연합군이싯딤 골짜기를 통해 들어올 것이라 예상하고 그곳에 진을 친 것입니다. 




전쟁의 원인


4절에서 전쟁의 원인이 소개됩니다. 12년 동안 시날 왕 그돌라오멜을 소돔 지역 사람들이 섬겼습니다. 하지만 제십삼년에 배반하자 그돌라오멜은 분노하여 연합군을 형성하여 제14년이 되던 때에 소돔과 고모라를 공격한 것입니다. 그 때 하필이면 롯이 소돔성에 거하게 된 것입니다.


아마도 14년 전에 소돔과 고모라는 시날 왕에 의해 식민지? 상태가 되어 계속하여 조공을 바쳐온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처음 바칠 때는 평화를 위한 대가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소돔 연합국은 서로 배신하기로 합의하여 13년 차에 조공을 바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약자를 힘을 길러야하고, 그렇지 않다면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게 됩니다. 시날 왕 그돌라오멜은 연합군을 형성하여 소돔을 공격해 왔습니다.


소돔에 거주하는 롯도 잡혀감


롯은 아브람과 헤어질 때 소돔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소돔이 가깝기는 했지만 가축을 키워야 했기에 요단들을 찾아 떠났습니다. 하지만 수년 뒤에 롯은 소돔성 안에 살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후에 롯의 아내가 소돔을 빠져 나오면서 뒤를 돌아본 사건과 연관지어 본다면, 롯의 아내가 강청하여 소돔성으로 들어갔을 것으로 보입니다.


자석이 철을 끌어 당기듯, 세상을 좋아하는 롯과 롯의 아내는 타락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소돔성에 점점 이끌려 결국 모든 것을 팔아 버리고 소돔성에 자리잡게 되었을 것이 확실합니다. 결국 롯은 소돔성과 같은 운명이 되어 소돔성이 패배하자 그도 함께 포로가 되어 끌려갑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세상과 같은 운명이 되고,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처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와 함께하며 그와 같은 운명이 됩니다. 당신의 운명은 무엇입니까?


13-16절 아브람의 헌신


아브람의 출동


아브람이 롯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이 지금까지 길러온 군사들을 이끌고 그돌라오멜 연합군을 추격하기 시작합니다. 우린 여기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아브람이 어떻게 해서 많은 군인들을 가질 수 있었는가입니다. 성경은 13절에서 가나안에 거주하는 아브람과 동맹한 사람들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즉 그들은 아브람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전쟁에 나가 목숨을 걸 정도라면 보통 사이가 아닙니다. 


아브람이 혼자 양성한 사병이 아닙니다. 그들은 가나안 주민들입니다. 아브람은 그들과 연합하여 지금까지 지내왔던 것입니다. 그들과 연합하기 위하여 아브람은 많은 재산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그들의 옷과 음식등을 꾼준히 제공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위급한 상황에서 그들은 아브람의 요청에 기꺼이 응하였습니다. 무엇이든 대가를 지불합니다. 평화에도 대가가 필요하고, 안전에도 대가가 필요합니다.


17-24절 멜기세덱의 축복


살렘 왕 멜기세덱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아브람 앞에 살렘왕 멜기세덱이 찾아옵니다. 살렘은 후에 예루살렘이 되는 곳으로 옛지명입니다. 살렘은 '평화'란 뜻입이며,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살렘 왕을 족보가 없다며 예수님과 비유하기도 합니다.

살렘왕은 아브람을 향하여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으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라고 말합니다. 즉 이 전쟁은 아브람 혼자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붙드셨고, 함께 하신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미쳐 깨닫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아브람과 함께 하셨고, 전쟁을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하셨습니다. 아브람은 자신이 얻은 것 중에서 십분의 일을 살렘왕께 바칩니다.


소돔왕의 교활한 거래


이 때 소돔왕이 아브람을 향하여 사람은 내게 돌려주고, 물건을 네가 가지라고 말합니다.(21절) 참으로 교묘한 말입니다. 소돔왕은 마치 자신이 이 모든 권리가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는 패배한 왕이고, 포로였습니다. 그를 구한 것은 아브람입니다. 그런데 마치 자신이 아브람에게 선심을 쓰는 것처럼 말합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자신과 동맹한 자들의 분깃을 나눈 후 하나도 가지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창세기 13장 강해

 창세기 12장 개요

애굽에서 큰 위기를 당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라를 다시 구하고, 많은 재물을 얻어 가나안 땅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많은 가축을 얻게 된 것이 도리어 화가 되어 조카 롯의 목자들과 아브라함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게 됩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롯을 불러 먼저 갈 곳을 정하라고 말합니다. 롯은 요단들을 보며 그곳을 선택하고 떠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헤브론으로 옮기고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 땅을 네게 주겠다 약속하십니다.

창세기 12장 구조

  • 1-13절 롯의 선택과 이별
  • 14-18절 하나님의 약속


창세기 12장 강해


1-13절 롯의 선택과 이별


다시 돌아가는 아브람과 롯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사랑을 인간의 지혜와 능력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은 분명 아브라함의 불신이며, 실책입니다. 그리고 애굽으로 내려 갔을 때 자신에게 어떤 일이 닥칠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내려갔고 정말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내 사래를 애굽의 바로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람과 함께 하심으로 많은 재물을 얻어 애굽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2절에서 아브람은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했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 전에도 재물이 있었지만 사래로 인해 많은 재물을 얻게 됩니다. 위기가 기회가 되었고, 저주가 축복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역전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전해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환경을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아브람


아브람은 가나안으로 돌아와 첫음 한 것은 다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하나님을 섬기고 제사드렸다는 말입니다. 오래 전 아담의 아들 셋이 에노스를 낳았는데 그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말합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은 섬겼다는 말입니다.


  • 창 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아브람은 언제나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서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자였습니다. 때로는 실수하고 넘어져도 그는 하나님께 돌아갔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찾았고, 구했습니다. 이것이 아브람의 힘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을 때 항상 하나님께 구하고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다투는 목자들


애굽에서 돌아와 더욱 부자가 되었지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가축이 적을 때는 몰랐지만 가축이 늘어나니 갑자기 공간이 좁아진 것입니다. 좁은 땅에서 자신들의 가축을 먹이기 위해 다투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아브람의 제안


목자들이 다투는 것을 본 아브람은 그대로 두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롯을 불러  제안합니다. 롯이 우하면 아브람은 좌하고, 롯이 좌하면 아브람은 우 하겠다는 것입니다. 서로 갈라져서 싸우지 말자고 말합니다. 우선권을 조카인 롯에게 주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당연하지만 제안이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싶은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아브람의 자산의 이득이 문제가 아니라 화평을 먼저 구했습니다. 참으로 멋진 믿음의 사람입니다. 화평의 사람은 사람을 얻습니다.


롯의 선택


롯은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봅니다. 롯의 눈에 보기에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가축을 기르기에도 너무나 좋았습니다. 성경은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10절)라고 말하니다. 그런데 기이하게 바로 앞에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기 전'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심지어 13절에는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라 표현합니다. 여기서 롯의 선택과 여호와 하나님의 판단이 극명하게 갈리고 있습니다.


롯은 눈에 보기 좋은 곳을 선택했습니다. 살기도 좋고 비전도 있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간과한 것이 있습니다. 그곳은 신앙생활 하기에 좋지 않습니다. 그곳은 악인들이 사는 곳이고,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 이끌리고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 결국 롯은 빈털털이가 되어 맨 몸으로 유황불이 떨어지는 소돔을 떠나야 했습니다.(19장 참조)


우리의 선택은 무엇이 기준입니까? 보이는 것? 아니면 미래에 대한 비전?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필요하지만 가장 먼저 고려해야할 것은 자신의 신앙입니다. 자신의 신앙을 무너뜨리는 것이라면 모든 것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먼저 고려하고, 최고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그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하셨습니다. 물질도 필요하고 성공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을 높일 때 하나님은 우리를 높일 것입니다.


  • 삼상 2:30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14-18절 하나님의 약속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믿었던 롯이 아브람을 떠났습니다. 성경은 롯이 떠난 후 아브람의 심경을 드러내지 않지만 그가 심적으로 많이 힘들어 하고 있음을 돌려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찾아오심으로 그가 얼마나 힘든가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로봇이 아닙니다.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도 사람이고, 감정이 있고, 슬프고, 우울하고 힘들어 합니다. 아프지 않은 사람 없고, 슬프지 않은 사람 없습니다. 다만 믿음으로 그것을 인내하고 참는 것 뿐입니다. 누군가의 눈물을 믿음 없음으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동서남북을 보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가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롯은 오직 '동쪽'만 봤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곳은 악인들이 사는 곳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사람은 그렇게 사는 것이 전부입니다. 


약속의 재확인


하나님은 다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십니다. 15절에서 보이는 땅을 줄 것이며, 16절에서는 자소들이 땅의 티끌처럼 많을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12장에서는 '보여줄 땅'으로 가면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그 보았던 그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땅의 약속이 추가되고, 구체화됩니다. 믿음은 시간이 지날 수록 더욱 분명해지고, 명확해집니다.


제단을 쌓는 아브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는 장막을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로 갑니다. 그곳에 도착한 아브람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람입니다. 그는 이사하면 가장 먼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우리는  가장 먼저 무엇을 하나요? 아브라함처럼 예배하나요? 아니면 나의 쾌락을 위한 것을 찾나요? 





창세기 2장 강해

 창세기 2장 개요

창세기 2장은 1장의 확장이자 사람의 창조를 상세히 다룹니다. 그러므로 2장은 1장의 마지막날 사건으로 넣는 것이 적합합니다. 전반부는 사람 없는 창조 세계와 후반부는 세계를 대리 통치하는 사람의 창조를 설명합니다.


  • 1-3절 창조의 마무리와 안식
  • 4-17절 에덴동산과 아담
  • 18-25절 여자의 창조


2장 주해 및 강해


1-3절 창조의 마무리와 안식


1-3절까지는 안식의 기원을 설명한다. 창조는 안식일까지이다. 안식은 쉼과 종말을 동시에 내포한다. 그렇다면 창세기 1장과 2장 1-3절은 역사의 전반적인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암축된 문장이라고 봐야 한다.


안식은 끝이다. 일의 끝, 역사의 끝. 이후 모든 시간과 역사는 7일과 7년을 회기로 돌아간다. 매주는 7일이며, 희년은 7*7년인 49년으로 채워지고 50으로 완성된다. 기독교의 주일과 구약의 안식은 같은 듯 다르다. 안식은 끝이지만 주의 날은 시작이다. 안식일은 완성일이지만, 주일은 모든 날이 주일임을 의미한다. 신약에서는 안식일이 없다. 모든 날이 안식일이기 때문이다.


복되다는 말은 전형적인 복을 말한다. 하지만 복과 거룩이 연결된다. 거룩은 구별되다 구분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후에 바리새인들을 '구별된 존재'로 여긴다. 바리새가 구별되다는 뜻이다.


구약에서 거룩은 하나님께 드려지다는 의미다. 여리고 성도, 성막의 기구들도 구별되어 하나님께 드려진 것들이다. 레위인 여기 구별된 존재들이다. 구별은 거룩이고, 거룩은 하나님께서만 사용하신다는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드려진 존재들이다.


4-17절 에덴동산과 아담


내력이니


톨레도트. 족보 계보의 뜻을 가진다. 어떤 학자는 이 단어에 무척 심혈을 기울인다. 하지만 아직까지 명확한 증거는 없다.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 된다. 


땅을 갈 사람도 없으므로


경작 -아바드는 명사형으로 종 노예의 뜻이고 동사는 섬기다 경작하다 (밭을) 갈다는 뜻이다. 에덴 동산은 지키고 경작되어야 한다. 사람은 땅을 경작해야 한다.(15절) 후에 아담의 첫 아들 가인은 땅을 경작(섬기는) 농사꾼이 된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흙은 '아파르'로 먼지란 뜻입니다. 땅을 의미하는 에레츠는 사람들이 기거할 땅을 의미하고, 아다마는 흙, 아파르는 먼지입니다. 사람은 흙의 먼지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먼지로 돌아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생령이 된다. 생령은 살아있는 영이다. 바울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고전 15:45에서 아담과 비교한다.

  • 고전 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에덴 동산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신다.  그냥 에덴의, 동쪽의 뜻이다. 동쪽에 있으니 그냥 에덴동산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동쪽


동쪽이 처음 등장한다. 성경에서 동쪽은 저주 받은 곳, 징계의 장소, 버려진 곳, 심판의 장소 등의 의미다. 종종 동방풍속, 동방사람들을 통해 이스라엘과 구별된 또는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을 일컫기도 한다.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나무는 매우 상징적이다. 생명과 죽음을 상징한다. 올리브 나무는 생명의 나무이다. 사람을 죽일 때 나무에 달아 놓는다. 저주의 나무가 된다.


강이 에덴에서


에덴은 생명의 근원이다. 물이 나오는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후에 시편1편과 에스겔 등에서 생명이 강이 다시 등장합니다. 이것은 에덴동산이 생명의 근원이자 시작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에덴에서 시작하는 네 개의 강이 있다. 첫째강은 비손강으로 금이 있는 하윌라를 흐른다. 둘째 강은 기혼강으로 구스를 흐른다. 세 번째 강은 힛데겔이며 앗수르 동쪽으로 흐른다. 네 번째 강은 유르라데강이다. 이 부분은 지질학자들이 유심하게 보는데, 대륙이동설과 깊은 연관이 있어 보인다.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경작하다 아바드, 지키다 샤마르. 두 단어는 아담의 소명, 즉 아담이 해야할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은 소명과도 같다. 아바드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이어가는 것이며, 샤마르는 계명을 지키는 것과 연결된다.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을 경작해야 하는 동시에 자신을 지켜야 한다. 


먹지 말라

첫 계명이 주어집니다. 계명은 본질적으로 금기입니다. 하지 말라는 금기계명은 보다 많은 자유를 전제한다. 하라는 그것만 하지만, 하지 말라는 그것만 하지 않고 다른 모든 것은 해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금기 계명은 하나님이 보다 많은 자유와 자율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모든 실과는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하십니다. 그것만 지키면 됩니다. 만약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 엄히 경고하십니다.(17절)


18-25절 여자의 창조


돕는 배필


아담은 부족한 존재입니다. 그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돕는 배필이 필요합니다.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한다면 굳이 둘이 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둘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객관화'를 위한 것입니다. 상대는 또 다른 나이며, 그 나를 봄으로 실제의 나를 바로 볼 수 있습니다. 일종의 거울입니다. 나를 알려면, 나의 주면을 봐야하고, 내가 소유하고, 가는 곳, 먹는 것 등을 보면 그것이 나입니다. 여성은 남성의 '나'입니다.


하지만 돕는 배필이 없어 드디어 아담의 갈비뼈에서 하나를 취하여 여자를 만든다. 둘 하나 였고,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돕는다는 개념은 상호보완적 존재라는 뜻입니다. 여자는 남자를 도움으로 존재의 의미가 생기고, 남자는 여자의 도움을 받아야 온전하 존재가 됩니다.


그 이름이 되었더라


배필을 언급한 이후 아담의 사역을 소개한다. 아담으로 하여금 동물들의 이름을 짓게 한다. 이름이 없다면 UFO다. 이름이 있어야 부를 수 있다. 이름은 존재의 규명이자 소명이다. 이 부분은 창세기 1장을 참조하시길. 하나님이 하시던 일을 아담은 하고 있다. 경작과 연관된다. 아담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연장선상에 있다.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

최고의 비교급입니다. 즉 최고로 좋다는 뜻입니다. 뼈는 힘과 능력, 기준을 뜻합니다. 여자는 남자에게서 나왔다. 둘은 원래 하나였습니다. 뼈는 사람을 세웁니다. 뼈가 없으면 바로 설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자는 남자의 뼈와 같은 존재입니다.


부모를 떠나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종속되어서는 안됩니다. 사람은 독립적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한 개인으로 만드셨습니다. 하지만 공동체로 살아갑니다. 부모를 떠나는 것은 의존적 존재에서 독립적 존재로의 바로서기입니다.


부끄러워

수치는 이후 계속 등장합니다. 수치를 모르는 건 두 가지다. 하나는 죄인들에게 있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수치를 가려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수치는 타락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존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의 옷으로 가려 주셨습니다. 하지만 타락 이후 빛의 옷이 가려지자 그들의 수치를 가려줄 것이 없자 그대로 드러납니다.



창세기 장별 요약 및 장별 강해


창세기 12장 강해

 창세기 12장 개요

창세기 12장은 성경 전 역사에서 창조 시대에서 족장 시대로 넘어가는 중요한 단계입니다. 창세기 11장에서 홍수 이후 사람들의 변화와 희망 없음을 보여주고, 12장에서는 한 사람을 부르심으로 그를 통해 만민이 복을 받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를 보여주십니다.


1-9절 말씀을 따라가는 아브람

10-20절 애굽에서의 위기


1-9절 말씀을 따라


말씀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21:1절은 '그가 불렀다'로 시작됩니다. '부르다'의 '아마르'는 '말씀하시다'의 뜻입니다. 이 부분은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이로운 부분입니다. 애굽의 신들은 보이는 신입니다. 사람이 만든 가짜 신입니다. 하지만 조상들이 섬겼던, 그리고 출애굽을 명한 히브리인들의 신은 말씀하시는 신입니다. 말씀은 인격이며, 존재이며, 의지입니다. 하나님을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명령하시는 하나님

두 번째 동사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떠나라'로 번역된 '레크'의 원형은 히브리어 할라크(הָלַךְ)로 보통 '동행하다' '걷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어디로부터 떠나라의 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자'의 의미가 강합니다. 1절을 다시 히브리어 순서대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 그가 말씀하셨다.
  • 야훼 에게 아브람,
  • 가라(할라크) 너의 고향 고의 가족, 너의 아버지의 집
  • 동사 없음, 그 땅으로, 내가 너에게 보내준
즉 '가다'와 '도착하다'는 동일한 '할라크'라는 단어로 묶여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내시지만 함께 하십니다. 이것의 아브람의 소명의 핵심입니다. 할라크는 성경 안에서 믿음의 조상들이 하나님과 동행할 때 사용한 단어입니다. 마치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할라크)하다 하늘로 올라간 것처럼 말이죠.

 

약속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명령으로 끝나지 않고 약속하십니다. 약속은 세 가지입니다. 
  1. 큰 민족을 이루고
  2. 이름을 창대하게 하며,
  3.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해 복을 받으리라.

아브람은 자녀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말씀은 창조이며, 존재이며, 생명이며, 미래이며, 실제입니다. 때론 약속이 더디지만 결국 하나님은 그 약속을 이루십니다. 사람의 생각과 뜻을 너머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일들을 이루십니다.

1. 큰 민족이 되고


지금은 혼자입니다. 자녀도 없습니다. 하지만 430년이 지나면 장정만 60만이 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지치고 상할 때 하나님은 종종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후손들이 하늘의 별과 같고 해변의 모래와 같을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 창 15: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마음대로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가장 적합한 시기에 이루어집니다. 그렇지만 반드시 그 약속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취소되지 않거나 헛되어 돌아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시니까요.

  • 사 55: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인내가 필요하고, 인내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2. 이름을 창대하게 하며


두 번째 약속은 '복을 주어 이름을 창대하게 하는 것'입니다. 복과 이름이 함께 붙어 있습니다. 둘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실 때 우리는 유명해집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않으면 절대 유명해지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유명해지는 것은 단순히 이름이 알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보여주는 것이며, 만사가 형통하게 되어 모든 사람들이 그를 우러러 보게되는 것을 말합니다. 즉 형통의 복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름'과 셈이 동일한 어근이라는 사실을 통해 셈의 후손인 아브라함이 유명하게 된 것은 언어유희이며, 창세기 11장에서 타락한 인간들이 스스로 이름을 유명하게 하려는 것을 조롱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즉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께서 붙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때 그 사람은 참된 능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 시 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3. 모든 민족이 복을 받으리라


세 번째 약속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것은 바울이 이방 민족들이 돌아올 것을 바라보면서 인용한 구절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 갈 3: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여기서 바울의 논리는 명확합니다. 아브라함은 원래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선택을 받고 이스라엘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복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 그 믿음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인 갈라디아 사람들도 하나님을 믿으면 아브라함처럼 복을 받고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 창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순종하는 아브라함


4절은 우리가 너무나 사랑하는 구절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아브람은 말씀을 따라갔다 말합니다. 기적은 명령과 순종이 함께 만날 때 일어납니다. 오른손과 왼손이 마주칠 때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강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하지만 순종을 통해 그 기적이 일어남을 보여줍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말씀 하실 때 순종함으로 '아멘'해야 기적이 일어납니다.


10-20절 약속의 땅을 벗어나


창세기 12장의 두 번째 단락은 참으로 기묘한 사건입니다. 앞으로 일어날 출애굽 사건의 암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잘 압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가서 위기를 겪지만 결국 많은 재물을 얻어 나오게 된다는 것을. 하나님은 모든 일에 선을 이루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약속의 땅에 기근이 들고


참으로 기어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면 모든 것이 순탄하고 좋은 일만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고통이 있고, 슬픔이 있고, 아픔도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예배하며 평온한 삶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곧 그곳에 기근이 일어나 먹을 것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애곱으로 내려갑니다. 그곳에는 마르지 않는 나일강이 있어 곡식이 풍성하기 때문입니다.


슬픔과 어려움이 닥친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고통이 있고, 슬픔이 있습니다. 그러한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을 의지하고 견디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의 제안


아브라함은 애굽에 내려가면서 사래에게 부인이 아닌 누이라고 말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남편이라고 말하면 애굽 사람들이 자신들을 죽이기 때문입니다. 고대 풍습에는 여인을 빼앗아 갈 때는 남편을 죽였습니다. 남편을 살려 두면 항상 남편을 그리워하며 도망가려 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비겁하게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아내인 사래를 누이로 속이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람의 실체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약점이 있고, 허물이 있습니다.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약점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그를 사랑하셨고, 그를 통해 역사하심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아브람의 죄가 덮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브람은 비겁하고 연약한 존재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팔려가는 사래


애굽 사람들이 사래의 아름다움을 보고 결국 애굽의 궁으로 사래가 팔려갑니다. 바로는 사래를 데려가는 대신 엄청난 양의 재물을 아브람에게 주었습니다. 아브람은 군말하지 않고 그대로 받았습니다. 참으로 비겁하고 약삭빠른 자입니다. 


애굽에 재앙을 내리신 하나님


사래가 애굽의 바로 왕에게 끌려가자 하나님은 애굽의 궁에 큰 재앙을 내리십니다. 그 재앙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 일로 애굽의 바로궁은 큰 고통을 당하게 되고 아브람을 불러 들입니다. 그리고 왜 거짓말을 했냐고 아브람에게 따집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바로의 꿈에 나타나 그를 책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풀려나는 아브람


바로는 화를 냈지만 어떻게 하지 못하고 결국 풀려납니다. 아브람이 애굽으로 내려간 이야기는 후에 야곱의 가족들이 애굽으로 내려가고, 다시 출애굽하는 과정과 정확히 닮아 있습니다.  이번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허물이 많은 아브라함을 보호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이루실 역사가 온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붙드실 것입니다.



창세기 장별 요약 및 강해 목록

창세기 11장 강해

 창세기 11장 개요

창세기 11장은 홍수 심판 이후 인류의 특징을 소개하고 있다. 바벨탄 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앞으로 인류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홍수는 사람들을 변화 시키지 못했고, 죄악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이것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사람들을 통한 시대가 도래할 것을 보여준다.


  • 1-9절 바벨탑 사건
  • 10-26절 셈의 족보
  • 27-32절 데라의 족보


1-9절 바벨탑 사건

바벨탑 사건은 상징으로 읽어야 합니다. 고고학적 차원에서 발굴한다 어쩐다의 개념이 아닙니다. 이 사건은 홍수의 심판이 있었음에도 사람들은 결코 그 죄성을 버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노아가 아무리 믿음의 사람이라고 해도 그 믿음 안에도 악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 아니 사람 안에는 절대적 선도, 절대적 악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홍수 이후 사람들의 성향이 어떻게 변했는가, 현재(출애굽 당시)의 상황이 어떠한가는 보여주려는 의도입니다.


시날 평지를 만나

여호수아서에 아간은 여리고를 공격한 후 그곳에서 시날 평지에서 얻는 것들을 숨긴다. 시날 평지는 문명아 발달한 곳이다. 시날 평지가 '동방'으로 향한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장차 이스라엘이 멸망하여 바벨론에 의해 '동방으로' 옮겨 진다는 것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동방은 하나님이 버린 공간, 죄인들의 공간이다.


벽돌과 역청

기원천 2000년 전에 벽돌이 있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또한 역청을 통해 건물을 쌓는 것은 굉장히 특히하다. 하지만 역청은 녹아 내리기 때문에 높은 건물을 쌓을 수 없다. 지금도 이라크의 평지에 있는 지구라트에는 아랫 부분이 역청이 발라져 있다. 역청은 방수 역할을 한다. 이것은 이 지역이 비주기적으로 홍수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홍수가 일어나 수십미터 이상 물에 잠기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문제는 나일강처럼 주기적이지 않아 그 날을 특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귀족들은 높은 집을 짓거나 성을 쌓아 살았다. 역청을 통해 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벽을 감싼 것이다.


역청을 바르면 물이들지 않고 벽돌이 쉽게 부서지지 않아 건물이 버틸 수있고, 방수의 작용을하여 건물 안으로 물이 들어오지 않는다. 벽골과 역청은 당대의 문화가 고도로 발달한 건축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벨탑 사건은 어떤 시간이 아니라 오랜 기간의 문명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벨탑 사건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역사 속에서 수메르 문명과 그 직후의 문명인 아카드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바벨탑 사건은 적어도 기원전 3000년 전으로 돌아간다.


흩어짐을 면하자


이들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하지만 흩어짐은 하나님의 축복이자 저주이다. 흩어짐으로 번성하고, 흩어짐으로 힘이 약화된다. 가인에게 주었던 유랑의 벌은 흩어짐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이들이 흩어짐을 거부하자 하나님은 족장들과 믿음 사람들을 통해 세상을 떠돌게 함으로 인류에게 복을 주신다.


바벨이라 하다.


바벨의 어원은 여러가지지만 고대 아카드어나 수메르 언에 준하면 신의 문이다. 신의 문은 수메르어로 바빌루이며, 아카드어는 밥일리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가나인이 아닌 우르에서 왔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것은 후에 이스라엘이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곳이다. 정확한 일치는 아니지만 방향과 지역은 같은 범주에 속한다. 동에서 서로의 이동은 구원이다. 성막의 문은 동쪽에서 있다. 구원자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한다. 구원의 방향이기도 하다.


바벨을 '혼돈'으로 표현한 것은 창조의 초기 혼돈에서 질서로 나아가는 것과 동일한다. 바벨은 혼돈이고, 가나안은 질서이다. 창조 삼일 째 물 속에서 땅을 만들고, 창조는 혼돈에서 질서로 나아간다. 인류의 죄악은 땅을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게 했고, 이스라엘의 죄악은 성쪽에서 다시 동쪽으로 끌려가게 했다. 구원은 다시 서쪽으로 이동하게 한다. 이 부분은 후에 또 다룰 것이다.


10-26절 셈의 족보


셈의 족보는 셈에서 데라로 이어지는 긴 여정을 보여준다. 이 족보는 앞선 바벨탑 사건의 상징성 안으로 집어 넣어 일어야 한다. 마치 창세기 5장이 홍수 이전의 역사 속에서 읽어야 하는 것처럼. 결국 셈의 족보는 모든 인류의 타락, 그리고 극히 일부의 하나님을 찾는 아브람의 이야기로 귀결된다.


27-32절 데라의 족보


셈의 족보는 다시 데라의 족보로 이어진다. 이 족보는 12장의 아브람을 드러내는 준비작업이다. 우르에 살던 데라는 아브람, 나홀, 하란을 낳고 이들을 데리고 가나안으로 땅으로 가려고 한다. 하란은 먼저 죽고 데라도 하란에도 죽게 된다. 결국 아브람의 가나안으로 이주는 혼자 결정한 것이 아니라 데라에게서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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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0장 강해

 창세기 10장 개요

창세기 10장은 노아의 죽음 이후 세 아들의 후손들의 행적과 족보를 기록하고 있다. 족보의 목적은 현재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인지해야할 가나안 족속들과 주변 나라들의 기원을 이해하는 것이다. 핵심은 애굽과 가나안 족속들이 함의 자손이라는 것과 그들과 싸워 가나안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이 목적으로 보인다.


  • 1-5절 야벳의 자손들
  • 6-20절 함의 자손들 
  • 21-32절 셈의 자손들


1-5절 야벳의 자손들


야벳의 아들들은 고멜, 마곡, 마대, 야완, 두발, 메섹, 디라스다.

고멜은 아스그나스와 리밧, 도갈을 낳는다.

야완은 엘리사, 달시시ㅡ 깃딤, 도다님.

그 외 자녀들은 소개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고멜과 야완의 후손들이 갖는 의미 때문으로 보이니다.  이들에게서 계속 여러 나라와 백성들이 생겼고, '바닷가의 땅'이란 표현을 하는 것으로 보면, 지중해 중심의 해변가로 보인다. 


6-20절 함의 자손들

함의 자녀들

함은 구스와 미스라임, 붓과 가나안이다. 이들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인문들이다. 먼저 구스는 현재의 에티오피아 중심의 중북부 아프리카 계열이다. 미스라임은 대부분의 구약에서 '애굽'으로 번역했다. 미스라임은 애굽으로만 번역되며, 출애굽 당시의 자신들을 괴롭힌 나라에 대한 부각으로 보인다. 가나안은 가나나안 땅에 거주하는 족속들이다. 가나안에는 7족속이 들어가 살고 있었다.


니므릇

니므릇은 용사로 소개된다. 이러한 개념은 홍수 이전 하나님이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교합하여 만들어진 거인족의 이미지다. 홍수로 사라진 거인족들이 다시 세상에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묘한 느낌을 준다. 홍수로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특히하게 구스는 중-북 아프리카 지역으로 이동했지만 니므룻의 경우는 시날과 바벨, 에렉, 악갓 갈레로 소개한다. 이 지역들은 아브라함이 살았던 우르에서 멀지 않은 곳이며,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11절에서는 앗수르, 니느웨 등이 등장한다.


블레셋

미스라임에게서 가슬루힘이 나오고, 가슬루힘에게서 블레셋이 나왔다고 소개한다.(14절) 이것은 애굽과 블렛세이 같은 정신을 가진 함의 후손들임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블레셋은 두고두고 이스라엘의 원수이다. 다윗 때 가서야 겨우 완전히 정복할 정도로 수백 년 동안 괴롭힘을 당하는 족속이다.


21-31절 셈의 자손들


엘람과 앗수르

여기사 앗수르가 또 등장한다. 엘람과 앗수르는 메소포타미만 북부 문명에 속한다. 그러니까 함의 자손들과 셈의 자손들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골고루 흩어져 살았다. 아프리카는 함의 자손들이라는 ㄱ 같은 해설을 하는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성경을 한 한 번도 읽어 보지 않은 족속들이다.


욕단 하윌라

이곳은 창세기2장에서 소개된지만 현재의 아프리카다. 많은 고고학자나 지질학자들은 노아의 홍수 때 대륙의 판이 이동하면서 지중해가 생겼고, 유럽과 아프리카가 나뉘어 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창조과학은 싫어하지만 지질학적 근거를 따지면 이들의 주장은 상당히 근거가 있어 보인다. 인터넷에서 대륙이동설을 검색해 보자. 대륙 이동설은 후에 판구조론으로 발전해 지질학을 연구하고 있다.


32절 결론

32절은 노아의 후손들의 족보가 갖는 의미를 설명한다. 홍수 이후 그 땅의 백성들의 나뉘었고 흩어져 살았다는 말이다. 흩어짐은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축복과 닿아 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아담과 동일한 언약을 하심으로 노아는 제2의 아담의 의미를 갖는다. 새로운 출발, 새로운 세상을 노아가 연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노아는 새로운 시작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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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9장 강해

 창세기 9장 개요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린 노아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언약을 맺으신다. 먼저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을 주시고, 육고기를 먹도록 허락한다. 무지개를 두어 물로 심판하지 않을 것이라 약속하신다. 땅에 정착한 노아는 포도나무를 심고 포도주를 마시고 옷을 벗는 추태를 행한다. 함이 노아의 벗은 모습을 보고 형제들에게 고자질하며 놀리지만 셈과 야벳을 아버지의 수치를 보지 않고 덮어 준다. 노아는 함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한다. 950세에 생을 마감한다.


  • 1-7절 다시 언약을 맺는 하나님
  • 8-17절 심판과 무지개
  • 18-29절 술취한 노아와 죽음


1-7절 다시 언약을 맺는 하나님


하나님이 복을 주시며

이 구절은 창세기 1장의 내용을 그대로 반복한다.

  •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어떤 의민에서 노아는 새로운 아담이다. 그에게서 다시 인류가 번성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제2의 아담처럼 노아에게 아담에게 주었던 복을 다시 반복하고 있다. 사람에게뿐만  아니라 다른 피조물에 대한 통치까지 거의 비슷하게 주어진다.


산 동물은 너희 먹을 것이

성경에서 가장 처음을 육신을 허락하는 구절이다. 하지만 이 구절이 그 전부터 육식을 먹었는지 먹지 않았는지 알게 하지는 못한다. 적지 않은 학자들은 이 구절 이전에서 육식이 있었을 것이라 말한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좀더 다른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피다. 피에 생명이 있으며, 피째 먹지 말 것을 경고하신다.(4절) 또한 피흘림에 대해 피는 피로 갚겠다 하신다. 즉 피는 생명이다.(6절)


8-17절 심판과 무지개


내 언약을

하나님의 언약은 노아와 후손들 그리고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과 땅의 모든 짐승을 포함한다.(10절) 하나님의 언약의 핵심은 모든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징계는 악을 잠시 멈출 수는 있으나 없게 하지는 못한다. 본성이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고양이를 잠깐 우리에 가둘 수는 있으나 생선을 좋아하는 습성을 바꾸지 못한 것과 같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다시는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 하신다. 결국 진정한 승리는 새로운 마음의 변화, 본성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무지개

무지개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케쉐트(קֶשֶׁת)로 직역하면 활이다. 무지개는 활처럼 초승달처럼 휘어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단어가 삼상 2:4에서는 활로 번역된다. 어떤 이들은 이 단어에 유난을 떨지만 그리 중요한 단어가 아니다. 휘어진 것을 말하는 것이다.


18-29절 술취한 노아와 죽음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9장의 마지막 단락은 노아의 실수와 죽음이 기록되어 있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는 포도원을 가꾼다. 어느 날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 옷을 벗고 눕는다. 어떤 사람은 술에 취하면 옷을 다 벗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그런데 함이 아버지의 벗은 모습을 보고 두 형제에게 고자질 한다. 셈과 야벳은 이야기를 듣고 뒷걸음쳐 가서 아버지의 하체를 덮어 준다. 수치를 가려준 것이다. 수치를 가리는 것은 인간의 타락 이후 생겨난 지식이다.


18절에서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로 소개되고, 함이 저주를 받지 않고 함의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는다. 가나안은 이스라엘이 들어가야 할 땅의 이름의 기원이 되는 이름이다. 그들은 저주 받은 백성임을 말해준다.


노아가 죽었더라

노아는 950세에 죽는다. 정말 오래 살았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 노아도 결국은 죽는다. 이것이 인생이다. 이 생은 본디 짧고 빠르다. 우리는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될까? 가장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집중하고 가치 있는 일에 투자해야 한다.



창세기 장별 요약 및 장별 강해


창세기 8장 강해

창세기 8장 개요

6장부터 시작된 홍수 이야기는 8장에서 절정을 이룬다. 7장에서는 방주로 들어가는 이야기와 홍수가 일어난 상황을 다룬다. 8장은 홍수가 일어나고 물이 줄어들어 방주에서 나와 아라랏산에서 제사를 드리는 장면까지 이어진다. 홍수로 모든 호흡하는 생물이 죽는다. 노아는 방주에서 나와 가장 먼저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드린다.


  • 1-5절 홍수가 끝이 나고 물이 줄어들기 시작함
  • 6-12절 까마귀와 비둘기를 보내 상황을 알아봄
  • 13-19절 방주에서 나오는 노아의 가족
  • 20-22절 하나님께 제사하는 노아



1-5절 홍수가 끝이 나고 물이 줄어들기 시작함


기억하사

이전에는 권념하사이다. 히브리어 '자카르'는 기억하다 마음을 채우다 등으로 생각을 지우지 않고 담아두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노아의 가족을 잊지 않으시고 항상 마음에 두셨다. 하나님께서 기억해 주시는 사람, 그는 세상에서 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이다.


바람을 땅 위에

홍해를 건널 때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종종 해로운 존재지만 이곳에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위하여 사용되고 있다.


하늘의 창문이 닫히고

참으로 멋진 시적 표현이다. 하늘에 창이 있다니.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죄를 지을 때 하늘을 닫으신다. 비를 멈추게 하시고 은혜를 멈추신다.


  • 78:23 그러나 그가 위의 궁창을 명령하시며 하늘 문을 여시고
  • 78:24 그들에게 만나를 비 같이 내려 먹이시며 하늘 양식을 그들에게 주셨나니
  • 78:25 사람이 힘센 자의 떡을 먹었으며 그가 음식을 그들에게 충족히 주셨도다


  • 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이스라엘이 우상에 빠질 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하늘을 닫기도 하고 열기도 하셨다. 이사야 61:1에서 하나님은 하늘을 가르시고 우리에게 오신다. 가르다는 히브리어 카라는 '찟다'는 뜻이다. 하늘을 찢으시고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내려오시는 것이다.


6-12절 까마귀와 비둘기를 보내 상황을 알아봄


일곱 째 달 열 이렛날

  • 호수의 시작은 둘째 달 열이렛날(7:11)이다. 5개월이 흘렀다.
  • 열째달 초하루(1일) 봉우리가 보임
  • 사십일 후 창문을 열고 까마귀를 보냄
  • 육백일 년 첫째 달 초 하룻날 물이 걷힘(13절)
  • 둘째 달 스무 이렛날(27일) 땅이 마름(14절) 방주에서 나옴(16절)
현대 태양력으로 하면 1년 10일을 방주 안에 있었다. 이스라엘 달력은 현대와 조금 다르다.


까마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까마귀다. 아직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지만 율법상 까마귀는 부정한 새다. 하지만 엘리야에게 먹이를 주었듯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하는 새다. 까마귀가 나가서 안 왔다는 말은 오류가 있다. 까마귀는 왕래했다. 즉 나가다 들어오기를 반복했다는 말이다. 까마귀가 부정한 새고 시체를 좋아해 들어오지 않았다는 억지스러운 설교는 하지 마시길...


비둘기

비둘기는 세 번 나갔다. 한 번은 발 붙일 곳이 없어 돌아왔고, 칠 일 후에 나갔을 때는 감람나무 잎을 물고 가져왔다. 생명이 움트기 시작한 것이다. 비둘기는 대한민국에서 해로운 새로 지정되어 있다. 비둘기가 해로운 균을 옮기기 때문이며 특히 비둘기 똥은 마르면서 공기 중으로 해로운 균을 옮긴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도 인간의 편의에 따른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 나갔을 때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유는 모른다. 비둘기가 살만한 환경이 만들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비둘기는 잡식성이다. 곤충이나 벌레, 과일, 곡물 등을 먹는다.


노아는 왜 까마귀와 비둘기를 보냈을까? 궁금해서이다. 언제 비가 그치는지, 땅은 마르고 있는지 등이 궁금했을 것이다.


13-19절 방주에서 나오는 노아의 가족


물이 걷힌 지라

드디어 물이 거의 사라졌다. 일년 가까이 방주에 있던 노아 가족들에게 희소식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물러나고 있는 증거이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은 참으로 안타깝다.


방주에서 나오라

물이 물러가고 땅이 말랐지만 노아는 방주에서 기다렸다.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하나님께서 드디어 노아에게 방주에서 나오도록 명령하신다. 노아는 얼마나 긴장했을까. 세상이 궁금하기도하고 두렵기도 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기까지 방주에서 나오지 않는 노아. 순종의 사람이다.


생육하고 번성하라(17절)

하나님은 아담에게 주었던 복을 노아에게 다시 준다.  하나님의 긍휼이다. 


20-22절 하나님께 제사하는 노아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첫 행위, 그것은 제단을 쌓고 제사하는 일이다. 감사와 희생의 제사였을 것이다. 번제 히브리어 '알라'(עָלָה)는 올리다는 뜻이다. 불을 피워 제물을 드리면 향이 올라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은 노아의 제사를 받으시고 약속하신다. 다시는 사람으로 인해 땅을 저주하지 않을 것이라고. 사람이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에(21절) 홍수가 사람의 본질을 바꾸지 못한다. 후에 노아도 자손들도 하나님께 범죄한다.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님이시다.


창세기 장별 요약 및 장별 강해


창세기 7장 강해

 창세기 7장 개요

6장이 홍수 이전 상황과 노아로 하여금 방주를 만드는 것까지 이야기라면 7장은 홍수의 시작과 과정을 담고 있다. 홍수는 창조 이전의 상황으로 만들어 모든 것이 혼합되고 뒤섞어 버린다. 죄는 반창조로 이끈다. 7장은 이상하리 만치 기이한 날짜가 많다.


  • 1-5절 홍수 직전의 명령
  • 6-12절 홍수의 시작
  • 13-24절 홍수의 과정들


1-5절 홍수 직전의 명령


방주로 들어가라

방주가 지어지고 홍수의 때가 가까워 오자 하나님은 노아와 가족들에게 방주로 들어가라 말한다. 믿음이 필요합니다. 과연 비가 올까? 지금까지도 힘들었지만 이젠 진짜 방주로 들어가야 한다.


내가 보았음이니라

하나님은 노아를 보았다. 우연히 본 것도 아니고 잘 못 본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숨겨진 의도와 목적까지 간파하신다. 하나님께는 비밀이 없다.

  • 4:12-1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요나서에도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자 하나님은 그들을 보시고 징계를 철회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계신다. 하갈이 사라를 피해 도망 갈때도 하나님은 보셨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보고 계시는 감찰하시는 분이시다.


암수 둘씩

생존을 위해서 최소한의 동물들을 준비하신다.


칠 일이면

곧바로 비가 내리지 않는다. 칠 일을 기다려야 한다. 10절에서 방주로 들어간 후 정확히 7일 후 그러니까 한 주의 첫 날 폭우가 쏟아진다. 칠 일은 충만한 시간이자 인내의 시간이다.


노아가 명하신대로

노아는 순종의 사람이다. 그는 오직 믿음으로 행한 사람이다. 자기부인이 없다면 순종은 불가능하다. 우리의 경험과 지식으로 우리는 종종 엄청난 실패와 불행을 맞이하기도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노아는 철저히 하나님의 명령에만 순종했다.


6-12절 홍수의 시작

육백 세

육백이란 나이가 유난히 강조된다. 하지만 홍사건 안에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호하다. 성경 안에서 육은 사람을 뜻한다. 하지만 육 백이 사람을 뜻하는지는 모호하다.


사십 주야

비가 내리는 기간은 사십일이다. 성경에서 40은 고난의 시기, 인내의 시기,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의 준비 기간 등으로 이해된다. 또한 충만을 뜻하기도 한다. 이스라엘의 40년 광야 생활과 엘리야의 40일 동안 도주, 예수님의 40일 금식 등은 고난과 역경의 시기를 뜻한다. 40일의 홍수는 인간들이 완전히 멸절하는 저주의 시간이다.


깊음의 샘 하늘의 창문

은유적 표현이다. 하지만 1장에서 둘 째날 물과 물이 나뉘었다는 것을 기억하다. 하늘의 물이 흘러 내린다면 끔찍하다. 최근들어 우리나라에도 하루에 수백mm가 내리자 도심이 물에 잠기기도 했다. 이것이 40일 동안 계속 된다고 생각해 보라. 정말 무서운 일이다. 하늘뿐 아니라 깊음에서도 물이 솟구쳐 온다면 그야말로 참사다.


13-24절 홍수의 과정들

방주에 들어갔고

방주로 들어간 사람은 노아와 노아의 아내, 세 아들과 세 며느리 모두 8명이다. 베드로 심판에 대해 말하면서 노아의 가족을 언급한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지만 영원히 참지는 않으시다. 심판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다. 물론 준비 되지 않는 자들에게만.

  • 베드로전서 3: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여호와께서 - 문을 받으시니라(16절)

방주의 문을 받은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문은 항상 열려 있지 않다. 문이 닫히면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한다. 그런데 왜 아무도 노아의 가족과 함께 방주로 들어가지 않았을까? 아마도 그들은 노아를 미친 사람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믿음의 길은 종종 미치광이로 보인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문을 닫으면 누구도 구원의 방주로 들어가지 못한다.


방주가 물 위에

엄청난 비가 쏟아지자 방주가 떠 올랐다. 구원을 뜻한다. 죄악을 행하는 모든 사람들이 죽었다. 그들은 비가 쏟아지는 순간까지 홍수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구원은 악에 대한 심판과 함께 이루어진다. 동일한 날, 누군가는 심판을 받고, 누군가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다 죽었더라(22절)

코로 호흡하는 모든 생물은 다 죽었다. 하지만 물속 생물은 죽지 않았다. 홍수 사건에서 악을 행하는 자들은 코로 호흡하는 것과 연결된다. 이 부분은 연구가 필요하다.




창세기 장별 요약 및 장별 강해




창세기 6장 강해

 창세기 6장 개요

창세기 6장부터 9장까지는 홍수 심판을 다룹니다. 5장에서 소개된 족보를 통해 수많은 인류가 지구에 거하게 된 것을 봅니다. 아담에게 주신 땅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복이 성취된 것입니다. 문제는 선의 충만이 아니라 악의 충만이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인류의 번성을 슬퍼하시고 홍수로 멸망 시키기로 하십니다.


  • 1-7절 홍수 이전의 세상
  • 8-22절 노아에게 홍수 심판을 알리고 방주를 짓도록 명령함


1-7절 홍수 이전의 세상


사람이 번성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번성했다. 심판이 홍수는 사람들이 많아짐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그들은 모이면 모일수록 악을 행합니다. 번성은 분명 하나님의 축복이지만 죄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죄를 짓는 데 사한다.


하나님의 아들들 사람의 딸들

기묘한 구절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징한다. 사람의 딸들은 이 땅의 사람들을 말한다. 아들은 기업을 무를 자며, 딸들은 순결한 자들을 말한다. 신화적 요소가 다분한 이 구절의 핵심은 '섞임'이다. 창세기 1장 창조에서 질서가 잡아가기 위해서 분리되었고, 자신의 자리에서 구분되어 소명을 감당했다. 그런데 이제는 다시 섞입니다. 죄는 자신의 자리를 떠나 타인의 자리를 침범한다.


아름다움을 보고

아름다움은 창세기 1장에서 피조물을 보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뜻의 '토브'이다.(참 창 1장 강해) 도대체 사람의 아름다움이란 뭘 말하는 것일까? 문제는 바라봄이 창세기 3장에서 하와가 선악과를 보는 것과 불길하게 닮아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6장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소유된 자들이지만 타락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땅의 사람들의 딸들을 탐하여 내려 간다.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하나님의 영이 함께 했지만 다시는 함께 있지 않을 것임을 천명하신다. 육체는 히브리어 바샤로로 2장에서 살 중의 살. 과 한 몸이란 단어에 사용된 것이다. 이 단어는 인간의 육체 자체를 뜻하기 보다는 '하나가 됨'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 즉 분리 되어야 하는데 섞여 하나가 되고 만 것이다.


백이십 년

성경에서 12는 완전수이며, 이스라엘 전체 백성을 일컫는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조성되기 전 120년은 뭘 말하는 것일까? 학자들 간의 적지 않은 논쟁이 있기는 하지만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앞의 육체와 120년은 동일한 의미일 수 없다. 즉 인간의 제한된 삶, 죽음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불쌍한 인생 말이다.


네피림

네피림은 자주 등장하게 된다. 정확히는 민 13:33에 한 번 등장한다. 이곳에서 네피림의 후손 아낙자손이 소개된다. 결국 네피림 거대한 전투적 용사들로 보는 것이 잃다. 헤라클래스와 같이. 전쟁을 위해 길러진 용병 또는 살인병기들인 셈이다.

민수기 1333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네피림은 이후 용사들과 이어진다.


항상 악할 뿐

하나님은 사람들의 깊은 내면을 보셨다. 그들의 생각은 늘 악했다. 마음속의 생각들은 악하여 늘 죄 지을 생각만을 한다. 아담의 타락 이후 죄가 사람들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 첫사람이 가인이다. 이후 사람들은 가인처럼 죄의 욕망에 이끌려 살아가는 죄인들이 되었다.


한탄하사

한탄하다 히브리어 '나함'은 깊이 고민하다 위로하다 (마음을) 되돌리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즉 후회한다는 뜻이다. 참으로 기이한 표현이다. 그릇된 조직신학에 길들여진 개신교는 신이신 하나님이 어떻게 '변질' '변화'할 수 있는가를 의아해 한다. 이것은 사람의 언어다. 하나님의 마음을 담은. 죄인들을 보시고 슬퍼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8-22절 노아에게 홍수 심판을 알리고 방주를 짓도록 명령함


노아는

8절을 직역하면 

노아는 찾았다 은혜를 여호와의 눈에 있는

히브리어와 영어는 동일한 의미다. 하지만 한글 번역은 이상하게 수동태형으로 노아가 여호와의 은혜를 입었다고 번역했다.

'입었다'로 번역한 히브리어 마짜는 찾다 가다 구하다 (일이) 일어나다 만나다 손을 잡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수동태형으로 번역을 했는지...  1-7절에서 타락한 인류를 설명하고 8절은 그들과 전혀 다른 길을 걷는 노아를 설명하니 당연히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다 찾았다는 능동형으로 번역 해야 옳다.


노아의 족보

다시 톨레도트가 등장한다. 노아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노아는 의인이며 완전한 자로 소개된다. 이 부분은 욥의 서두와 매우 비슷하다.


하나님과 동행

동행이 다시 등장한다. 에녹도 하나님과 동행했고, 노아도 하나님과 동행한다. 즉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살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놀랍다. 오직 노아에게만 말씀하신다. 반대로 말하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찾지 않고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찾고 구하면 만나 주실 것이다. 이것은 약속의 계명이다.


  • 신명기 4:29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
  • 역대하 15:2 그가 나가서 아사를 맞아 이르되 아사와 및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들아 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그를 찾으면 그가 너희와 만나게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그를 버리면 그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 마태복음 7: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너는 방주를 만들되

방주는 사각형이다. 배가 아니다. 고페르 나무는 정확히 모른다.


노아가 다 준행하였더라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방주를 짓는다.


창세기 장별 요약 및 장별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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