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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편

1. 시편 2편 개요

 시편 2편 구조

1-3절 열왕들의 연합

4-6절 하나님의 비웃음과 선언

7-9절 시온의 왕

10-12 아들과 화해하라

2. 시편 2편 주해

1-3절 열왕들의 연합

시편 2:1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למה רגשו גוים ולאמים יהגו־ריק׃

시편 2편을 하나님의 놀람으로 시작한다. '아니 어떻게 된 일인가?'의 뜻이다. 이유는 나라가 분노하고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기 때문이다. 그들의 헛된 일이란 2-3절에서 설명된다. 먼저는 여호와와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는 것이며,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는 것이다. 신약적 관점으로 보면 하나님의 통치와 영향력으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다윗시대의 관점으로 읽는다면 이스라엘의 통치권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에돔과 모압, 암몬이 반역을 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들은 온전치 못하고, 본문을 분명하게 해석하기는 쉽지 않다.

누가는 사도들이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당한 일을 회상하며, 함께 기도하는 장면에서 시편 2편을 끌고 온다.

  • 행 4: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 행 4: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 행 4: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 행 4: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헤롯과 빌라도가 합하여 하나님께 종 예수를 거스른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도행전 4장은 산헤들린, 즉 유대인들이 예수 믿는 이들을 핍박한 상황 아래 아래 있다. 그렇다면 26절에서 '세상의 군왕들과 관리'들을 산헤드린을 말할 것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시편 2편을 다시 읽는다면 세상과 이방은 문자적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의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실제로 시편뿐 아니라 많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고 대적하는 이들에게 이방인과 같은 존재로 그리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 문자적으로 나라와 민족을 구분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분노는 하나님께 계명에 순종하는 것에대한 부당함이다. 죄인들은 항상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에 대한 분노가 서려 있다. 왜 우리가 당신(하나님)에게 순종해야 하지?라는 불만으로 가득한다. 고대에나 지금에나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이러한 분노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이자 반역이다.

시편 2: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יתיצבו ׀ מלכי־ארץ ורוזנים נוסדו־יחד על־יהוה ועל־משיחו׃

2절은 1절의 구체적인 해석이자 행위이다. 그들은 이제 '나선다' 앞으로 나아가서 뭔가 일을 꾸미고 있다. 

나서며

번역에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지만 히브리 원어는 '나선다'는 '아짜브'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기록되어 있다. 이 구조를 이후의 모든 내용이 이 동사가 끌고 간다는 뜻이다. 주동사로서 역할을 하는 것이다. 히브리어에서 뭔가를 강조할 때 항상 중요한 동사를 앞세운다. '아짜브'는 '서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왕들과 권련자들이 서서 회의를 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서다'라는 표현은 긴박성과 의지를 드러낼 때 사용된다.

  • 창세기 28장 13절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 출애굽기 34장 5절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에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실새

나서며 서로 꾀하여

'꾀하다'라는 히브리어는 '하사드'라는 히브리어로 '서로 말하다' '서로 조언하다'라는 뜻이다.  서로라는 말에도 유의해 보자. 이들은 누군가에 의해 강압적으로 모인 것이 아니라 자원한 것이다. 스스로 원하여 모인 것이다. '서로'는 이 점을 분명히 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다. 그들은 이것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은 자를 대적하며

그들의 분노의 대상이자 벗어나야할 대상이다. 여호와라는 단어가 이방인이나 대적을 향할 때는 심판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시편 기자는 의도적으로 엘이 아닌 여호와를 등장시킴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암시하고 있다. 

시편 2:3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ננתקה את־מוסרותימו ונשליכה ממנו עבתימו׃

2절이 생각과 언어의 문제였다면 3절은 실제적 행위의 문제로 넘어간다 .매우 짧고 간략하지만 핵심이 들어가 있다.

그들의 맨 것, 그의 결박

시편 2편 안에서 맨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을 말한다. 이들은 탐욕과 악을 즐기고 싶은데 하나님의 계명을 그것을 금지 한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끊고 싶어한다. 맨 것과 결박이란 표현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그들의 해석이라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시편 1편에서 의인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한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자신들을 구속하는 존재로 말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명을 지믕로 여기는 것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 미가 6:3 이르시기를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슨 일로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언하라

4-6절 하나님의 비웃음과 선언

두 번째 연은 하나님의 선언이다. 1-3절이 사람들의 작당과 모의, 그리고 선언이라면 이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비웃음으로 시작하며,  시온의 왕으로 세웠다고 선언하신다. 1절과 4절과 5절 초반에 대응하고, 2-3절은 5-6절에 대응한다.
사람들의 분노가 하나님의 진노로 바뀌고, 사람의 꾀와 모의가 하나님의 비웃음과  선언으로 대체된다.

시편 2:4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하늘에 계신은 신적 존재를 말한다. 군왕과 관원들은 땅에 있다. 그들의 모의와 계획이 아무리 높아도 하늘에 이르지 못한다. 인간의 지혜보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능하다.

  • 고전 1: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의 비웃음 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시편 2:5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인간들의 분노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통치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반항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의 부당한 분노에 대한 정의과 공의다. 인간의 분노는 탐욕적이고, 이기적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의 진노를 정죄한다.


시편 2: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왕을 세우신다. 그러니까 반역자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나려는 모의에 대한 분명한 선언으로, 오히려 더욱 강력한 통치를 할 것임을 선언한다. 그는 이 땅을 다스리는 왕이 될 것이다.
왕이 세워진 장소는 시온이다. 시온은 거룩한 산으로 표현된다. 원래 이곳은 성전이 세워진 작은 돌산이었다. 예루살렘에 거대한 바위산 위에 성전과 다윗의 성이 세워져 있다.


7-9절 시온의 왕

이제 세 번째 연으로 넘어간다. 세 번째 연은 시온에 왕을 세우시고, 그가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를 설명하나.

시편 2:7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하나님은 시온의 왕을 양자로 입양한다. 고대 세계에서 정통성을 가지려면 그는 신의 아들이어야 한다. 로마의 황제를 비롯하여 고대의 수많은 왕들은 조서를 내리거나 율령을 반포할 때 '나는  ~~신의 아들이다.'를 선언한 후 시작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자신의 아들로 입양한 적도 없고 선포한 적도 없다. 오직 이스라엘의  왕만이 하나님의 전정한 아들이다. 신약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되며, 예수를 믿는 자들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 마태복음 3장 17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 마태복음 4장 6절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 마태복음 5장 45절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사역은 곧 이 땅에서 왕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예수는 왕이며, 그리스도인 역시 왕으로 소개된다. 예수는 이 땅에서 왕적 능력으로 사단의 세력과 싸우며 귀신을 몰아낸다. 그리스도인 역시 예수의 이름으로 사단의 세력과 싸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의 공격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 에베소서 6장 17절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 히브리서 4장 12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시편 2:8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내게 구하라

'내게 구하라'는 응답을 약속한다. 모든 권한이 하나님께 있음을 말한다. 다른 의미에서 구하지 않으면 주지 않는다는 뜻도 포함된다. 믿음은 능동적이어야 한다. 생명이 있다면 생존의 욕구가 있고, 성장의 갈망이 있듯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선한 갈망을 가져야 한다. 영적 갈망은 거듭난 자의 본성이다.

  • 누가복음 11장 10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이방 나라를 .. 주리니
모든 세계를 갈망해야 한다. 이것은 야망이 아니다. 온 땅에 충만하여 다스리라는 소명이다. 세상의 어느 곳도 불의과 악이 있어서는 안 된다. 모든 나라와 민족들이 하나님을 섬길 때까지,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

시편 2:9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통치의 도구는 철장이며, 방식을 깨뜨림이다. '질그릇 같이'는 쉽게, 아주 쉽게 부순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들을 철장의 질그릇처럼 부서질 것이다.

  • 요한계시록 2장 27절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 요한계시록 12장 5절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 요한계시록 19장 15절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10-12 아들과 화해하라

이제 마지막 경고 또는 권고다. 

시편 2:10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지어다

다시 군왕들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다. 그들을 지혜를 얻어야 한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알고, 어떻게 처신해야 바른 성공적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시편 2: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들이 배워야 할 교훈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고 떨며 즐거워해야 한다. 이질적인 세 표현은 경외라는 단어에 들어가 있다. 하나님을 얕잡아 보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로운 자들에게 복을 주니, 너희들이 의롭다면 즐거워해야 한다. 하지만 불의한 자들은 하나님을 싫어할 것이다.


시편 2:12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그의 아들은 시온의 왕이다. 입맞춤은 화해의 인사다. 만약 화해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급하게 그들에게 임하여 그들을 멸망시킬 것이다. 여기서 '길에서'라는 표현은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급작스러운 상황이다.
결론은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다.

시편 1편

 1. 시편 1편 개요

지혜시, 토라송 1편은 15편, 19편, 119편과 함께 토라시편으로 불린다.

시편 1편은 시편 전체의 서문이다. 짧지만 강력한 내용을 담고 있다.  첫절부터 마지막절까지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를 따라 작시되었다. 1편 전체는 의인과 악인을 비교하고, 대칭적으로 보여주며, 비교 한다.

시편 1편 구조

1-2절 복있는 사람

3절 복된 사람의 특징

4-5절 악인들의 운명

6절 의인과 악인의 종말


2. 시편 1편 주해

1-2절 복있는 사람

  • 시편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1-2절의 구조는

복있는 사람은 
않는다. 
1)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2) 죄인들의 길을 걷지
3) 오만의 자들의 자리에 앉지 
한다.
1)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2) 율법을 주야로 묵상

2절에서 악인의 특징은 점진적 변화이다. 그는 처음에 사람들의 꾀를 듣는다. '따른다'는 말은 한 번 시도해 본다는 말이다. 히브리어는 '동행한다'는 뜻의 할라크가 사용된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할라크)는 말과 같다. 동행은 모방, 따라 해보는 것을 말한다. 아직 몸을 담지 않는 작은 시도이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두 번째 악인은 죄인들의 길을 걷는다. '걷는다'는 단어 데레크(דֶּרֶךְ)는 '행동하다' '길' '도로' 등의 의미다. 창 6:12에서는 '행위' 창 38:12에서는 '길'로 번역된다. 길은 반복적 행위를 뜻한다. 반복된 습관에 의해 몸에 행위가 배인 상태다. 몇 번 연습?을 한 악인은 이제 그것을 본업으로 삼고 악한 행동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 습관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반복된 행동이 습관이 되고, 습관은 운명이 된다.

마지막 '오만하다'는 뜻는 '조롱하다'는 뜻이다. 히브리어 루츠(לוּץ)는 경멸하다. 조롱하다. 는 뜻이다. 누구를 향한 경멸일까? 순진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경멸이다. 악을 행하고, 도둑질을 해보니 쉽게 돈을 벌고 일이 풀리는데 어리석게 정도의 길을 걷고 말씀대로만 살려 하는 이들을 바보라고 조롱하고 경멸하는 것이다.

이제 2절에는 반대로 의인이 어떤 사람인지 설명한다. 그는 율법을 즐거워하고 묵상한다. 즐거움은 마음의 상태며, 묵상은 즐거움의 표출로서 행위이다. 율법이 너무나 좋기 때문에 그것을 계속 묵상한다.

3절 복된 사람의 특징

  • 시편 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3절은 2절의 구체적인 설명이자 서론인 1-2절의 결론에 해당된다. 1절에서 악인의 마지막 장명은 오만의 자리에 앉는 장면이었다. 고착되어 더 이상 헤어나오지 못한 상태다. 3절의 의인도 고정된 상태로 그려진다. 하지만 장소가 현격하게 다르다. 그는 나무이며, 생수의 강이 흐르는 강 곁에 옮겨 심겨졌다. '심은'의 히브리어 '샤탈(שָׁתַל)은 누군가에 의해 옮겨 심겨졌다는 뜻이다. 나무는 홀로 움직이지 못한다. 하지만 염려없다. 자신에게 필요한 물과 양분이 충분이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원하고 주야로 묵상하면 어떤 결론에 이를까?
1) 철을 따라 열매를 맺는다.
2)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다.
3)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다.

'맺는다' '마르지 않는다' '형통하다'는 세 동사가 사용된 것은 1절의 악인과 대칭을 이루기 위한 것인지 않실치 않으나 확실히 강한 자극을 준다. 

  • 열매를 맺는 것은 나무의 목적에 다다른 것이다. 존재의 목적에 합당한 삶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  이사야 5장 4절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 요한복음 15장 5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잎사귀는 종종 열매 없음의 증표지만 여기서는 그늘을 만드는 잎사귀, 또는 나무의 싱싱함을 나타내는 잎사귀이다. 즉 왕성한 활동을 하게 될 것이다.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합당한 삶을 살아낸다는 뜻이다. 요셉은 감옥에서 형통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갔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4-5절 악인들의 운명

4-5절은 강한 부정으로 시작된다. 4절은 3절에 나타난 의인들의 특징에 대해 반대적인 악인들의 특징을 소개한다. 3절과 동일하게 세 가지 특징으로 정의한다.

악인들은 
1)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2)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
3)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한다.

의인은 나무지만 악인들은 겨다. 나무는 바람에 견디지만 겨는 날아간다. 여기서 바람은 하나님의 심판이다. 시편 1편 3-5절은 마탭고음 7장 24-27절과 매우 닮아 있다.

  • 마태복음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 마태복음 7: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 마태복음 7: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 마태복음 7: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심판을 견디는 것은 세상의 지혜와 힘이 아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함으로 오는 하늘의 지혜이다.

6절 의인과 악인의 종말

마지막으로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을 보여준다.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할 것이다.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은 열왕기의 다윗의 길과 여로보암의 길과 비교될 수 있다.
  • 역대하 17장 3절 여호와께서 여호사밧과 함께 하셨으니 이는 그가 그의 조상 다윗의 처음 길로 행하여 바알들에게 구하지 아니하고
  • 열왕기상 15장 34절 바아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였더라


시편 23편

1. 개요

신뢰의 시

시편 23편은 시편 중의 시편이요 가장 사랑 받은 시편이다. 전체 성경을 통털어서도 가장 사랑 받는 시편이다. 헨리 워드 비처는 '시편의 나이팅 게일'이라 불렀고, 찰스 스펄전은 '시편의 진주'라는 표현을 아까지 않았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은 시편이다. 시편은 매우 단순하고 단백하다. 꾸밈이나 현학적 장치가 거의 문학적 상상력이 더해지기는 했으나 팔레스타인인의 일상적 소재를 사용했기 때문에 거부감 없이 누구나 공감을 일으킨다.

시편 23편에 담긴 내용은 일반적으로 아는 내용을 훨씬 뛰어넘는 역사적이고 신학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들로 가득차있다. 1절의 목자의 개념은 시편 23편 전체를 이끌고 있으며,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상징이다. 필자는 아래와 같이 23편의 분석했다.

시편 23편의 구조

1-3절 목자이신 여호와
4절 강한 용사이신 여호와
5-6절 잔치를 베푸시는 여호와


시편 23편 독법

시편 23편은 바벨론 포로의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 시편의 편집시기가 바벨론 포로 이기도 하지만 이스라엘은 항상 포로적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23편 역시 적들에게 쫓기는 상황에서 극한 두려움과 공포의 상황에 놓여 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저자의 현재형이다. 이후의 모든 동사들이 미완료, 즉 미래형을 사용한 것을 볼 때 장차 이루어질 구원과 회복에 대한 꿈과 희망을 노래한 것으로 봐야 한다.


1-3절 목자이신 여호와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מִזְמֹ֥ור לְדָוִ֑ד יְהוָ֥ה רֹ֝עִ֗י לֹ֣א אֶחְסָֽר׃


1절은 히브리인들이라면, 아니 목자와 양의 관계를 조금이라고 아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구절이다. 1절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단어에 모두 들어가 있다. '부족함이 없다'는 '로 헤세르'는 미완료 형이라는 사실에 주의할 필요도 있다. 23편의 한 동사만을 제외한 모든 동사는 미완료, 즉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에 대한 것이다. 유일한 현재형은 5절로 '내 잔이 넘친다'는 표현이다. 마치 고난의 광야를 걸어갈 때 집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니 아직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지금 기쁜 마음으로 광야의 길을 걷는 것과 같다.


다윗은 분명하게 선언한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기 때문에 결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라며 하나님께 신뢰를 고백하고 있다. 1절은 다윗 혼자만의 고백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의 고백이기도 하다.


히브리인들에게 목자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긴밀한 연관성을 갖는 상징적 존재이다. 산양이나 들양이 아닌 일반 양들은 지구의 창조 이후 단 한 번도 사람을 떠나 독립적으로 살아온 적이 없는 기이한 동물이다. 양에게는 야생성이 거의 없다. 목자가 양들을 돌보지 않으면 얼마 가지 않아 죽고 만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성경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서 목자와 양으로 자주 표현된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을 향하여 '나는 너희 목자다'라고 표현하기까지 한다. 신구약을 막론하고 성경 전반에 이러한 목사와 양의 관계가 설정되어 있다.


  • 에스겔 34장 15절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을 누워 있게 할지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시편 28장 9절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그들의 목자가 되시어 영원토록 그들을 인도하소서
  • 시편 80장 1절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
  • 요한복음 10장 11절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 요한계시록 7장 17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목자의 역할


목자는 양의 모든 것을 책임진다. 먹을 것, 쉴곳, 잠잘 곳 등을 모두 책임진다. 이뿐 아니라 다른 늑내나 사자들이 공격해 올 때도 목자는 그들과 대항하여 자신들을 양의 지킨다. 목자는 몇 달에 한 번씩 목장을 옮긴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목초지가 바뀌기 때문이다. 양들이 풀을 먹는 속도를 풀이 자라는 속도를 따르지 못하기 때문에, 온도와 날씨의 변화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옮겨 다닌다. 4절에서 이것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2절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부족함이 없다'는 서술의 이유를 2절에서 제공한다. 2절은 1절의 설명이자 구체화이다. 풀밭과 물가는 양들이 거하는 최적의 장소이다. 양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목자는 이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그들을 그곳으로 인도한다. 다윗은 목자가 해야할, 마땅히 양들을 위해 제공해야할 것을 제시한다.


목자가 제공하는 것


'푸른 풀밭'(여성형 복수) '쉴 만한 물가'(남성형 복수)는 목자가 제공하는 것이다. 이 구절은 3절과 짝을 이룬다. 다윗은 여호와가 자신에게 영적 양식을 제공함으로 자신의 영혼을 소생시키고, 의의 길로 인도하여 생명에 이르게 할 것임을 확신한다. 마지막 장소는 6절에 나온대로 '여호와의 집'일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야 한다. 하지만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마침내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푸른 풀밭과 물가가 아니다. 그래서 시편 23편은 외형적 놀라운 평안함과 대비되어 내면에는 엄청난 긴장과 초조함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여성형과 남성형을 사용하여 짝을 완성함으로 완전함을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누이시다 인도하시다


'누이시다'는 히필형 동사는 히브리인들이 음식을 먹을 취하는 자세다. 우리나라는 앉아서 먹기 때문에 의아해 보이지만 음식을 먹는 것은 생존을 너머 평안과 직결된다. '인도하다'는 피엘형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고한 신뢰가 담겨있다. 히브리어에서 히필형은 '사역 능동'의 의미며, 피엘형은 '강조 능동'이다. 다윗은 두 형태를 사용하며, 일반 강조에서 강한 강조로 넘어가고 있다.


쉴만한 물가는 몇 가지 의미를 전제한다. 먼저는 '잔잔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고요있는 물은 아니다. '흐르는 물'이다. 잔잔하게 흐르는 물가란 뜻이다. 양이나 염소 등은 물이 거세게 흐름면 잘 마시지 못한다. 입과 코가 평평하게 붙어 있어서 물이 요동치며 코로 물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둘째는 쉼이란 단어가 종종 성경 안에서 평안의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김정우는 대상 28:2을 인용하며 하나님의 성전일 가능성을 제공한다. 이러한 주장이 합리적인 이유는 성전 또는 하나님의 보좌는 물이 흘러 나오는 곳이기 때문이다. 에스겔서와 계시록에도 이러한 상징성을 활용하여 생명수가 성전과 보좌에서 흘러나옴을 강조한다.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은유적으로  '쉴만한 물가'로 표현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6절의 '여호와의 집'과 잘 어울린다.


  • 에스겔 47장 1절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 내리더라
  • 요한계시록 21:5-6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3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1-3절은 23편의 1연에 해당되는 단락이다. 1절에서 시작된 목자되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고백이 3절에서 일단 마무리 된다.


소생시킨다는 표현은 돌이킨다는 뜻이다. 히브리어 슈브(שׁוּב)는 영어리의 return과 흡사하다. 180도 완전히 되돌아 간다는 뜻이다. 또는 원래의 그 모습으로 되돌려 놓는다는 뜻이다. 부흥하다는 뜻과 정확히 일치한다. 다윗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혼(나프쉬)을 처음의 상태, 원래의 자리로 돌이킬 것을 확신한다.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는 매우 중요한 상징을 갖는다. 다윗은 자신의 영혼을 소생키는 것이 하나님의 명예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믿음의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기도했다. 자신들이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께 속한 자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수치를 당하고 모욕을 당하면 하나님의 이름에 수치가 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여호수아 7장 9절 가나안 사람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 열왕기상 8장48절 자기를 사로잡아 간 적국의 땅에서 온 마음과 온 뜻으로 주께 돌아와서 주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신 땅 곧 주께서 택하신 성읍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성전 있는 쪽을 향하여 주께 기도하거든
  • 시편 79장 9절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 시편 106장 8절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셨으니 그의 큰 권능을 만인이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
  • 시편 143장 11절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살리시고 주의 의로 내 영혼을 환난에서 끌어내소서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시인을 구원하실 것이다. 시인은 그것을 확신하고 있다.


4절 강한 용사이신 여호와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4절은 시인의 현재 상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목자는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양을 인도하기 위해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야 한다. 그러나 시인은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확신한다. 왜냐하면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자신을 지켜 주기 때문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시인은 비록 자신이 성전으로 가기 위해 고난의 골짜기를 지나야 함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곳은 깊고 깊은 어둠이 지배하는 곳이며, 사망이 가득한 골짜기다. 즉 그곳은 산등성이나 산정산이 아니라 깊은 어둠의 골짜기다.


팔레스타인의 목자들은 계절별로 양들을 이끌었는데 종종 계곡과 산을 건너야 했다. 그것은 불가피한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내리면 큰 위기에 빠지기도 한다. 많은 양들이 죽기도한다. 아무리 예측해도 팔레스타인 날씨는 예측 불허다. 또한 골짜기를 지나는 동안 의외로 강도들이 매복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양들을 훔치기 위해 매목하고 있다 양들을 훔쳐가곤 했다.


시인은 이러한 위기적 상황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들이 두렵지 않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위기를 극복할 방법이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와 함께 하기 때문이고,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자신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1절에서 여호와를 '목자'로 표현하고, 이제는 직설적으로 목자되신 주님이 자신을 지켜줄 것을 확신한다. 그러므로 그는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안위하시는 하나님


안위한다는 표현은 위로하다는 뜻이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할 때(사 66:13), 침대가 나를 외로할 때(욥 21:4), 주께서 외로할 때(시 71ㅣ21, 119:82) 등에서 사용된다. 이러한 용례를 통해 김정우는 '힘을 줍니다'로 번역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말한다.


5-6절 잔치를 베푸시는 여호와


5절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상을 베푸시고


드디어 하나님은 시인에게 상(밥상)을 베푸신다. 그 상은 잔치상이 분명하다. 원수 앞에서 보란 듯이 잔치상을 베푸심으로 통쾌한 복수를 한다. 지금까지 원수들에게 쫓기고 내몰리는 상황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팔을 들어 승리를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 있을 때 하나님께 '광야에서 식탁을 베푸실 수 있으랴'라고 하나님을 불신하고 조롱했다.

  • 시편 78장 19절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식탁을 베푸실 수 있으랴

시인은 목자되신 여호와가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원수 앞에서 잔치상 베푸심으로 푸른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실 것을 확신한다. '베풀다'는 동사는 미완료(미래)형이다.

이 구절을 좀 더 확대한다면 종말론적 환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의인들의 마지막 장면은 항상 잔치로 마무리 된다. 잔치는 기쁨과 보상, 회복을 의미한다. 천상에서의 어린양의 혼인 잔치로 계시록이 마무리 되듯 잔치는 모든 것의 회복을 전제로 한다.

기름을 부으시고


승리의 표는 잔치상과 더불어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기름을 왕이나 제사장에 붓는 기름이 아니라 잔치에 초대된 사람을 주인이 손님의 머리에 발라주는 기름이다. 팔레스타인은 귀한 손님에게 머리에 기름을 바름으로 최고의 대우를 했다고 한다.


'기름을 붓다'는 동사는 시편 23편에 사용된 동사 중에 유일하게 완료형(perfect)으로 사용된 동사이다. 히브리어 완료형은 과거에 이루어진 사건이 현재도 여전히 동일하게 유효한 상태를 말한다. 그러므로 현재형으로 봐도 무방하다.


기름을 성령과 하나님의 임재로 상징화 시킨다면, 비록 현재는 어둡고 암울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나에게 축제의 기분을 허락하셨다. 나는 지금 성령으로 충많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이처럼 우리는 시편 기자가 고요한 시기가 아니라 오히려 원수들에게 괴로움을 당하는 때에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표현하는 것을 발견한다. 자신의 임재와 공급을 통해, 하나님은 원수들에게 누구 편에 있는지를 보여준다. [트렘페 롱맨 3 <틴테일 구약주석> CLC]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토브와 헤세드


이제 마지막으로 나아간다. 선하심(토브)과 인자(헤세드)가 따를 것이라 확신한다. 토브라는 히브리어는 창세기 1장에서 사용된 '보시기 좋았더라'에 사용된 단어로 하나님의 행하심의 완전성을 전제하는 표현이다. 토브와 헤세드는 롬 8:28의 구절속에 잘 표현되어 있다.


  •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것이 모순처럼 보이고 부족해 보이지만 결국 하나님은 승리할 것임을 말한다.


여호와의 집


여호와의 집은 설명이 필요 없이 성전인 것을 알 수 있다. 시인이 그토록 갈망하고 가고 싶은 곳은 여호와의 집이다. 여호와의 집에 간다는 말은 장소의 개념이 아니다. 다시 하나님의 전에서 예배하는 것을 꿈구는 말이다. 확장시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어 아버지에 집에 거하기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징계의 시간이고, 고난의 시간이다. 하지만 마침내 하나님께서 자신을 다시 회복시킬 것이고, 아버지의 집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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