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바벨론포로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바벨론포로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열왕기하 25장 구조 묵상

 열왕기하 25장 요약

열왕기하 25장은 유다 왕국의 멸망과 그 과정, 그리고 바벨론의 통치 하에서 유다 백성이 겪는 비극적인 상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가 반란을 일으키자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성을 함락시킵니다. 


성전과 왕궁은 불에 타고 예루살렘은 철저히 파괴되며, 유다의 지도자들과 많은 백성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갑니다. 시드기야는 도망치려다 붙잡혀 잔인한 최후를 맞이하고, 유다 왕국은 완전히 멸망합니다. 이후 바벨론의 총독 그다랴가 유다의 통치자로 임명되었으나, 암살당하며 남은 유다 백성들도 이집트로 도피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됩니다.


열왕기하 25장 구조

  • 예루살렘의 함락과 시드기야의 최후 (1-7절)
  • 예루살렘 성전과 성의 파괴 (8-12절)
  • 유다의 지도자 포로와 성전 기물 약탈 (13-17절)
  • 그다랴 총독의 임명과 암살 (18-26절)
  • 여호야긴의 석방 (27-30절)


1. 예루살렘의 함락과 시드기야의 최후 (1-7절)

열왕기하 25장의 첫 부분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시드기야가 반란을 일으킨 지 9년째 되던 해, 느부갓네살은 유다를 공격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2년 동안 이 포위는 지속되었습니다(1-2절). 성 안에는 심각한 기근이 발생하였고, 결국 성벽이 무너졌습니다. 시드기야는 밤에 도망치려 했으나, 여리고 평야에서 바벨론 군대에 붙잡혔습니다(4-5절).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의 두 눈을 멀게 하고 그의 아들들을 그의 눈앞에서 죽이는 잔인한 형벌을 가하며, 시드기야는 쇠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6-7절).


시드기야의 최후는 불순종의 결과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시드기야는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무시하고 정치적 계산으로 바벨론에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결국 그는 처참한 패배를 맞이하며, 이는 인간의 교만과 불순종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보여줍니다. 시드기야의 두 눈이 멀게 된 것은 그의 영적 눈이 이미 먼 상태였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그는 끝까지 하나님의 경고를 보지 못하고, 자신의 뜻을 따랐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의 경고와 인도를 무시하면, 영적 시각이 닫히고 결국 멸망의 길로 갈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경고하실 때 우리는 겸손하게 그 경고를 받아들이고, 돌이켜야 할 것입니다.


2. 예루살렘 성전과 성의 파괴 (8-12절)

예루살렘이 함락된 지 한 달 뒤, 바벨론의 느부사라단 군대 장관이 예루살렘에 도착해 성전과 왕궁, 그리고 예루살렘의 주요 건물들을 모두 불태웠습니다(9절). 예루살렘의 성벽도 무너졌고, 남아 있던 백성 중 일부는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으며, 가난한 사람들만 유다 땅에 남겨졌습니다(11-12절).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과의 언약을 상징하는 중심이었으나, 그 성전마저 파괴된 것은 하나님의 보호가 유다에서 완전히 떠났음을 의미합니다.


성전의 파괴는 단순히 물리적인 건물의 붕괴가 아닌, 하나님의 임재와 언약이 더 이상 유다와 함께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임재를 상실한 유다는 이제 더 이상 독립된 신앙 공동체로서 기능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질 때,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지를 경고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소중히 여기고, 그분의 임재를 떠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3. 유다의 지도자 포로와 성전 기물 약탈 (13-17절)

바벨론 군대는 성전의 귀중한 기물들을 모두 약탈하여 바벨론으로 가져갔습니다. 금, 은, 청동으로 만든 모든 성전의 기물들이 철저히 약탈되었고, 성전의 두 기둥과 바다라는 큰 청동 기물들도 분해되었습니다(13-17절). 이 기물들은 성전 예배의 핵심 요소들이었으며, 그들의 약탈은 유다의 신앙 체계가 완전히 무너졌음을 의미합니다. 느부사라단은 또한 유다의 모든 지도자들을 잡아 바벨론으로 끌고 갔으며, 이는 유다가 지도층을 상실하고 국가적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성전의 기물들이 약탈당하는 모습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상황을 상징합니다. 이 기물들은 단순한 장식품이 아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관련된 중요한 도구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약탈당했다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우리가 예배와 신앙의 본질을 소홀히 여기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질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성전 기물들이 사라진 것처럼,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도록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4. 그다랴 총독의 임명과 암살 (18-26절)

느부갓네살은 남아 있는 유다의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 그다랴를 총독으로 임명했습니다(22절). 그다랴는 미스바에 거처하며 유다에 남아 있던 백성들에게 바벨론에 순종하고 평화를 유지할 것을 권면했습니다(24절). 그러나 그다랴는 이스마엘에 의해 암살당하고, 이로 인해 유다에 남은 백성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이집트로 도피합니다(25-26절). 이는 유다 왕국의 멸망이 단순한 외세의 침략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부적 혼란과 폭력으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다랴의 암살은 유다에 남아 있던 사람들조차 질서와 안정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져들었음을 상징합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고 죄악에 빠지면, 외부의 압력뿐만 아니라 내부의 분열과 혼란도 피할 수 없음을 경고합니다.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의 통치에 순종하고 그 땅에 남아 있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이집트로 도망갔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두려움과 혼란스러움을 나타냅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과 멀어지면, 세상의 두려움에 쉽게 지배당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5. 여호야긴의 석방 (27-30절)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여호야긴은 바벨론 왕 에윌므로닥에 의해 석방됩니다(27절). 여호야긴은 바벨론에서 특별한 대우를 받으며, 왕과 함께 식사하는 등의 혜택을 받게 됩니다. 이는 유다의 멸망 이후에도 하나님의 자비가 여전히 남아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여호야긴의 석방은 바벨론 포로 생활 중에도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여전히 유다 백성들과 함께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 마지막 장면은 유다의 멸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언약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 아님을 암시합니다. 여호야긴의 석방은 유다 왕조의 완전한 종말이 아닌,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남아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장면은 바벨론 포로 생활 중에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그분의 백성을 기억하시고 구원의 계획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희망을 줍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도, 비록 시련과 고난 속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는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빛을 주시며, 그분의 언약을 끝까지 지키시는 분임을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열왕기하 장별요약


열왕기하 24장 구조 묵상

 열왕기하 24장 요약

열왕기하 24장은 유다 왕국의 몰락이 가속화되며, 바벨론의 침략과 포로로 끌려가는 사건들을 기록합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를 침략하고, 여호야김 왕은 그의 종이 되었으나, 이후 반란을 일으킵니다. 느부갓네살은 다시 유다를 공격하고, 여호야김은 죽고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위에 오릅니다. 여호야긴도 바벨론에 항복하고, 결국 포로로 끌려가며, 느부갓네살은 유다의 많은 지도자들을 포로로 잡아가고 성전의 보물들을 약탈합니다. 그 후, 시드기야가 유다의 마지막 왕으로 세워지지만, 유다의 멸망은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열왕기하 24장 구조

  • 여호야김의 반란과 바벨론의 침략 (1-7절)
  • 여호야긴의 짧은 통치와 바벨론에 항복 (8-12절)
  • 바벨론의 포로와 성전 약탈 (13-16절)
  • 시드기야의 즉위와 유다의 멸망 경고 (17-20절)


1. 여호야김의 반란과 바벨론의 침략 (1-7절)

열왕기하 24장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를 침략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여호야김 왕은 바벨론의 종이 되었으나, 3년 후에 반란을 일으켰습니다(1절). 이는 여호야김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정치적 계산에 의해 결정한 행동이었으며, 결국 바벨론의 보복을 불러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에 대한 심판을 이루시기 위해 바벨론뿐만 아니라 여러 주변 민족들을 보내 유다를 공격하게 하셨습니다(2절). 이는 므낫세의 죄로 인해 유다가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했기 때문에 더 이상 유다를 용서하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결정과 연결됩니다(3-4절).


여호야김의 반란은 하나님 앞에서의 불순종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유다에 대한 심판을 경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야김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신의 뜻을 따랐습니다. 이 사건은 인간의 교만과 불순종이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세상의 방법에 따라 살아가려고 할 때, 그 결과가 얼마나 치명적일 수 있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그분의 뜻을 구하고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2. 여호야긴의 짧은 통치와 바벨론에 항복 (8-12절)

여호야김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18세에 왕위에 올랐습니다(8절). 그러나 여호야긴의 통치는 매우 짧았고, 그는 3개월 만에 바벨론에 항복하게 됩니다(12절). 느부갓네살은 유다를 다시 침략했고, 여호야긴은 그의 가족과 함께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여호야긴의 항복은 유다 왕국이 더 이상 독립된 정치적 존재로서 기능하지 못하고 바벨론의 지배하에 완전히 들어갔음을 상징합니다.


여호야긴의 통치는 유다의 급속한 몰락을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 시점에서 유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악행으로 인해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으며,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여호야긴은 짧은 통치 동안 아무런 개혁이나 변화를 이루지 못했고, 이는 유다 백성들이 여전히 하나님을 무시하고 악행을 계속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심판은 결국 실행되었으며,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다시금 상기시킵니다.


3. 바벨론의 포로와 성전 약탈 (13-16절)

느부갓네살 왕은 여호야긴과 함께 유다의 주요 지도자들, 군사, 장인 등 1만 명 이상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14절). 이들은 유다 사회의 핵심 계층을 이루고 있었으며, 이들의 포로로 잡혀감은 유다 사회의 기능적 붕괴를 의미합니다. 또한 바벨론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귀중한 기물들을 약탈하여 바벨론으로 가져갔습니다(13절). 이는 단순한 약탈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성전은 하나님과 유다 백성의 언약과 임재의 상징이었으나, 성전이 약탈당한 것은 그 언약이 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유다는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그분의 보호를 상실했으며, 그 결과 성전까지 약탈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 장면은 성경에서 하나님과의 언약이 깨어졌을 때 발생하는 영적 황폐함을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결국 우리의 신앙의 중심마저 파괴될 수 있습니다. 성전이 파괴되고 약탈당하는 모습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상기시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보호하실 수 있었으나, 유다 백성들이 그분을 떠나고 우상 숭배에 빠져들면서 그 보호를 스스로 거부한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면, 영적 파멸을 맞이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4. 시드기야의 즉위와 유다의 멸망 경고 (17-20절)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긴 대신 그의 삼촌 시드기야를 유다의 마지막 왕으로 세웠습니다(17절). 시드기야는 21세에 왕위에 올라 11년 동안 예루살렘을 통치했으나, 그의 통치 역시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는 통치였습니다(19절).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으며, 결국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유다는 멸망의 길로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유다를 심판하시기로 결정하셨으며, 시드기야의 불순종은 유다의 멸망을 더욱 가속화했습니다.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정치적 군사적 판단에 의지하여 바벨론에 반란을 일으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결국 유다의 멸망을 초래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됩니다. 시드기야의 통치는 인간의 교만과 불순종이 어떻게 공동체의 파멸을 가져오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드기야에게도 여러 번 회개의 기회를 주셨지만, 그는 이를 무시하고 끝까지 자신의 뜻을 고집했습니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을 떠날 때, 그 결과가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경고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시드기야의 모습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경고를 무시하고 자신의 뜻을 따를 때, 그 결과는 파괴적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겸손하게 따르고 그분의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유다처럼 영적, 육적인 멸망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시편 23편

1. 개요

신뢰의 시

시편 23편은 시편 중의 시편이요 가장 사랑 받은 시편이다. 전체 성경을 통털어서도 가장 사랑 받는 시편이다. 헨리 워드 비처는 '시편의 나이팅 게일'이라 불렀고, 찰스 스펄전은 '시편의 진주'라는 표현을 아까지 않았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은 시편이다. 시편은 매우 단순하고 단백하다. 꾸밈이나 현학적 장치가 거의 문학적 상상력이 더해지기는 했으나 팔레스타인인의 일상적 소재를 사용했기 때문에 거부감 없이 누구나 공감을 일으킨다.

시편 23편에 담긴 내용은 일반적으로 아는 내용을 훨씬 뛰어넘는 역사적이고 신학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들로 가득차있다. 1절의 목자의 개념은 시편 23편 전체를 이끌고 있으며,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상징이다. 필자는 아래와 같이 23편의 분석했다.

시편 23편의 구조

1-3절 목자이신 여호와
4절 강한 용사이신 여호와
5-6절 잔치를 베푸시는 여호와


시편 23편 독법

시편 23편은 바벨론 포로의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 시편의 편집시기가 바벨론 포로 이기도 하지만 이스라엘은 항상 포로적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23편 역시 적들에게 쫓기는 상황에서 극한 두려움과 공포의 상황에 놓여 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저자의 현재형이다. 이후의 모든 동사들이 미완료, 즉 미래형을 사용한 것을 볼 때 장차 이루어질 구원과 회복에 대한 꿈과 희망을 노래한 것으로 봐야 한다.


1-3절 목자이신 여호와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מִזְמֹ֥ור לְדָוִ֑ד יְהוָ֥ה רֹ֝עִ֗י לֹ֣א אֶחְסָֽר׃


1절은 히브리인들이라면, 아니 목자와 양의 관계를 조금이라고 아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구절이다. 1절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단어에 모두 들어가 있다. '부족함이 없다'는 '로 헤세르'는 미완료 형이라는 사실에 주의할 필요도 있다. 23편의 한 동사만을 제외한 모든 동사는 미완료, 즉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에 대한 것이다. 유일한 현재형은 5절로 '내 잔이 넘친다'는 표현이다. 마치 고난의 광야를 걸어갈 때 집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니 아직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지금 기쁜 마음으로 광야의 길을 걷는 것과 같다.


다윗은 분명하게 선언한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기 때문에 결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라며 하나님께 신뢰를 고백하고 있다. 1절은 다윗 혼자만의 고백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의 고백이기도 하다.


히브리인들에게 목자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긴밀한 연관성을 갖는 상징적 존재이다. 산양이나 들양이 아닌 일반 양들은 지구의 창조 이후 단 한 번도 사람을 떠나 독립적으로 살아온 적이 없는 기이한 동물이다. 양에게는 야생성이 거의 없다. 목자가 양들을 돌보지 않으면 얼마 가지 않아 죽고 만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성경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서 목자와 양으로 자주 표현된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을 향하여 '나는 너희 목자다'라고 표현하기까지 한다. 신구약을 막론하고 성경 전반에 이러한 목사와 양의 관계가 설정되어 있다.


  • 에스겔 34장 15절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을 누워 있게 할지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시편 28장 9절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그들의 목자가 되시어 영원토록 그들을 인도하소서
  • 시편 80장 1절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
  • 요한복음 10장 11절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 요한계시록 7장 17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목자의 역할


목자는 양의 모든 것을 책임진다. 먹을 것, 쉴곳, 잠잘 곳 등을 모두 책임진다. 이뿐 아니라 다른 늑내나 사자들이 공격해 올 때도 목자는 그들과 대항하여 자신들을 양의 지킨다. 목자는 몇 달에 한 번씩 목장을 옮긴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목초지가 바뀌기 때문이다. 양들이 풀을 먹는 속도를 풀이 자라는 속도를 따르지 못하기 때문에, 온도와 날씨의 변화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옮겨 다닌다. 4절에서 이것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2절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부족함이 없다'는 서술의 이유를 2절에서 제공한다. 2절은 1절의 설명이자 구체화이다. 풀밭과 물가는 양들이 거하는 최적의 장소이다. 양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목자는 이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그들을 그곳으로 인도한다. 다윗은 목자가 해야할, 마땅히 양들을 위해 제공해야할 것을 제시한다.


목자가 제공하는 것


'푸른 풀밭'(여성형 복수) '쉴 만한 물가'(남성형 복수)는 목자가 제공하는 것이다. 이 구절은 3절과 짝을 이룬다. 다윗은 여호와가 자신에게 영적 양식을 제공함으로 자신의 영혼을 소생시키고, 의의 길로 인도하여 생명에 이르게 할 것임을 확신한다. 마지막 장소는 6절에 나온대로 '여호와의 집'일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야 한다. 하지만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마침내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푸른 풀밭과 물가가 아니다. 그래서 시편 23편은 외형적 놀라운 평안함과 대비되어 내면에는 엄청난 긴장과 초조함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여성형과 남성형을 사용하여 짝을 완성함으로 완전함을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누이시다 인도하시다


'누이시다'는 히필형 동사는 히브리인들이 음식을 먹을 취하는 자세다. 우리나라는 앉아서 먹기 때문에 의아해 보이지만 음식을 먹는 것은 생존을 너머 평안과 직결된다. '인도하다'는 피엘형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고한 신뢰가 담겨있다. 히브리어에서 히필형은 '사역 능동'의 의미며, 피엘형은 '강조 능동'이다. 다윗은 두 형태를 사용하며, 일반 강조에서 강한 강조로 넘어가고 있다.


쉴만한 물가는 몇 가지 의미를 전제한다. 먼저는 '잔잔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고요있는 물은 아니다. '흐르는 물'이다. 잔잔하게 흐르는 물가란 뜻이다. 양이나 염소 등은 물이 거세게 흐름면 잘 마시지 못한다. 입과 코가 평평하게 붙어 있어서 물이 요동치며 코로 물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둘째는 쉼이란 단어가 종종 성경 안에서 평안의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김정우는 대상 28:2을 인용하며 하나님의 성전일 가능성을 제공한다. 이러한 주장이 합리적인 이유는 성전 또는 하나님의 보좌는 물이 흘러 나오는 곳이기 때문이다. 에스겔서와 계시록에도 이러한 상징성을 활용하여 생명수가 성전과 보좌에서 흘러나옴을 강조한다.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은유적으로  '쉴만한 물가'로 표현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6절의 '여호와의 집'과 잘 어울린다.


  • 에스겔 47장 1절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 내리더라
  • 요한계시록 21:5-6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3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1-3절은 23편의 1연에 해당되는 단락이다. 1절에서 시작된 목자되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고백이 3절에서 일단 마무리 된다.


소생시킨다는 표현은 돌이킨다는 뜻이다. 히브리어 슈브(שׁוּב)는 영어리의 return과 흡사하다. 180도 완전히 되돌아 간다는 뜻이다. 또는 원래의 그 모습으로 되돌려 놓는다는 뜻이다. 부흥하다는 뜻과 정확히 일치한다. 다윗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혼(나프쉬)을 처음의 상태, 원래의 자리로 돌이킬 것을 확신한다.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는 매우 중요한 상징을 갖는다. 다윗은 자신의 영혼을 소생키는 것이 하나님의 명예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믿음의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기도했다. 자신들이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께 속한 자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수치를 당하고 모욕을 당하면 하나님의 이름에 수치가 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여호수아 7장 9절 가나안 사람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 열왕기상 8장48절 자기를 사로잡아 간 적국의 땅에서 온 마음과 온 뜻으로 주께 돌아와서 주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신 땅 곧 주께서 택하신 성읍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성전 있는 쪽을 향하여 주께 기도하거든
  • 시편 79장 9절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 시편 106장 8절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셨으니 그의 큰 권능을 만인이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
  • 시편 143장 11절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살리시고 주의 의로 내 영혼을 환난에서 끌어내소서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시인을 구원하실 것이다. 시인은 그것을 확신하고 있다.


4절 강한 용사이신 여호와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4절은 시인의 현재 상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목자는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양을 인도하기 위해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야 한다. 그러나 시인은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확신한다. 왜냐하면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자신을 지켜 주기 때문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시인은 비록 자신이 성전으로 가기 위해 고난의 골짜기를 지나야 함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곳은 깊고 깊은 어둠이 지배하는 곳이며, 사망이 가득한 골짜기다. 즉 그곳은 산등성이나 산정산이 아니라 깊은 어둠의 골짜기다.


팔레스타인의 목자들은 계절별로 양들을 이끌었는데 종종 계곡과 산을 건너야 했다. 그것은 불가피한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내리면 큰 위기에 빠지기도 한다. 많은 양들이 죽기도한다. 아무리 예측해도 팔레스타인 날씨는 예측 불허다. 또한 골짜기를 지나는 동안 의외로 강도들이 매복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양들을 훔치기 위해 매목하고 있다 양들을 훔쳐가곤 했다.


시인은 이러한 위기적 상황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들이 두렵지 않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위기를 극복할 방법이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와 함께 하기 때문이고,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자신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1절에서 여호와를 '목자'로 표현하고, 이제는 직설적으로 목자되신 주님이 자신을 지켜줄 것을 확신한다. 그러므로 그는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안위하시는 하나님


안위한다는 표현은 위로하다는 뜻이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할 때(사 66:13), 침대가 나를 외로할 때(욥 21:4), 주께서 외로할 때(시 71ㅣ21, 119:82) 등에서 사용된다. 이러한 용례를 통해 김정우는 '힘을 줍니다'로 번역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말한다.


5-6절 잔치를 베푸시는 여호와


5절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상을 베푸시고


드디어 하나님은 시인에게 상(밥상)을 베푸신다. 그 상은 잔치상이 분명하다. 원수 앞에서 보란 듯이 잔치상을 베푸심으로 통쾌한 복수를 한다. 지금까지 원수들에게 쫓기고 내몰리는 상황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팔을 들어 승리를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 있을 때 하나님께 '광야에서 식탁을 베푸실 수 있으랴'라고 하나님을 불신하고 조롱했다.

  • 시편 78장 19절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식탁을 베푸실 수 있으랴

시인은 목자되신 여호와가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원수 앞에서 잔치상 베푸심으로 푸른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실 것을 확신한다. '베풀다'는 동사는 미완료(미래)형이다.

이 구절을 좀 더 확대한다면 종말론적 환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의인들의 마지막 장면은 항상 잔치로 마무리 된다. 잔치는 기쁨과 보상, 회복을 의미한다. 천상에서의 어린양의 혼인 잔치로 계시록이 마무리 되듯 잔치는 모든 것의 회복을 전제로 한다.

기름을 부으시고


승리의 표는 잔치상과 더불어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기름을 왕이나 제사장에 붓는 기름이 아니라 잔치에 초대된 사람을 주인이 손님의 머리에 발라주는 기름이다. 팔레스타인은 귀한 손님에게 머리에 기름을 바름으로 최고의 대우를 했다고 한다.


'기름을 붓다'는 동사는 시편 23편에 사용된 동사 중에 유일하게 완료형(perfect)으로 사용된 동사이다. 히브리어 완료형은 과거에 이루어진 사건이 현재도 여전히 동일하게 유효한 상태를 말한다. 그러므로 현재형으로 봐도 무방하다.


기름을 성령과 하나님의 임재로 상징화 시킨다면, 비록 현재는 어둡고 암울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나에게 축제의 기분을 허락하셨다. 나는 지금 성령으로 충많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이처럼 우리는 시편 기자가 고요한 시기가 아니라 오히려 원수들에게 괴로움을 당하는 때에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표현하는 것을 발견한다. 자신의 임재와 공급을 통해, 하나님은 원수들에게 누구 편에 있는지를 보여준다. [트렘페 롱맨 3 <틴테일 구약주석> CLC]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토브와 헤세드


이제 마지막으로 나아간다. 선하심(토브)과 인자(헤세드)가 따를 것이라 확신한다. 토브라는 히브리어는 창세기 1장에서 사용된 '보시기 좋았더라'에 사용된 단어로 하나님의 행하심의 완전성을 전제하는 표현이다. 토브와 헤세드는 롬 8:28의 구절속에 잘 표현되어 있다.


  •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것이 모순처럼 보이고 부족해 보이지만 결국 하나님은 승리할 것임을 말한다.


여호와의 집


여호와의 집은 설명이 필요 없이 성전인 것을 알 수 있다. 시인이 그토록 갈망하고 가고 싶은 곳은 여호와의 집이다. 여호와의 집에 간다는 말은 장소의 개념이 아니다. 다시 하나님의 전에서 예배하는 것을 꿈구는 말이다. 확장시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어 아버지에 집에 거하기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징계의 시간이고, 고난의 시간이다. 하지만 마침내 하나님께서 자신을 다시 회복시킬 것이고, 아버지의 집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는다.




내 블로그 목록

추천 게시물

2024년 9월 29일, 주일 대표기도문

주일 낮 예배 대표기도문 믿는 자들의 위로와 희망이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9월의 마지막 주일, 저희를 주님의 거룩한 존전 앞에 불러 주셔서 예배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변화하는 계절 속에서도 변함없이 저희를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주님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