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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3편

1. 개요

신뢰의 시

시편 23편은 시편 중의 시편이요 가장 사랑 받은 시편이다. 전체 성경을 통털어서도 가장 사랑 받는 시편이다. 헨리 워드 비처는 '시편의 나이팅 게일'이라 불렀고, 찰스 스펄전은 '시편의 진주'라는 표현을 아까지 않았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은 시편이다. 시편은 매우 단순하고 단백하다. 꾸밈이나 현학적 장치가 거의 문학적 상상력이 더해지기는 했으나 팔레스타인인의 일상적 소재를 사용했기 때문에 거부감 없이 누구나 공감을 일으킨다.

시편 23편에 담긴 내용은 일반적으로 아는 내용을 훨씬 뛰어넘는 역사적이고 신학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들로 가득차있다. 1절의 목자의 개념은 시편 23편 전체를 이끌고 있으며,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상징이다. 필자는 아래와 같이 23편의 분석했다.

시편 23편의 구조

1-3절 목자이신 여호와
4절 강한 용사이신 여호와
5-6절 잔치를 베푸시는 여호와


시편 23편 독법

시편 23편은 바벨론 포로의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 시편의 편집시기가 바벨론 포로 이기도 하지만 이스라엘은 항상 포로적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23편 역시 적들에게 쫓기는 상황에서 극한 두려움과 공포의 상황에 놓여 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저자의 현재형이다. 이후의 모든 동사들이 미완료, 즉 미래형을 사용한 것을 볼 때 장차 이루어질 구원과 회복에 대한 꿈과 희망을 노래한 것으로 봐야 한다.


1-3절 목자이신 여호와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מִזְמֹ֥ור לְדָוִ֑ד יְהוָ֥ה רֹ֝עִ֗י לֹ֣א אֶחְסָֽר׃


1절은 히브리인들이라면, 아니 목자와 양의 관계를 조금이라고 아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구절이다. 1절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단어에 모두 들어가 있다. '부족함이 없다'는 '로 헤세르'는 미완료 형이라는 사실에 주의할 필요도 있다. 23편의 한 동사만을 제외한 모든 동사는 미완료, 즉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에 대한 것이다. 유일한 현재형은 5절로 '내 잔이 넘친다'는 표현이다. 마치 고난의 광야를 걸어갈 때 집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니 아직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지금 기쁜 마음으로 광야의 길을 걷는 것과 같다.


다윗은 분명하게 선언한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기 때문에 결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라며 하나님께 신뢰를 고백하고 있다. 1절은 다윗 혼자만의 고백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의 고백이기도 하다.


히브리인들에게 목자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긴밀한 연관성을 갖는 상징적 존재이다. 산양이나 들양이 아닌 일반 양들은 지구의 창조 이후 단 한 번도 사람을 떠나 독립적으로 살아온 적이 없는 기이한 동물이다. 양에게는 야생성이 거의 없다. 목자가 양들을 돌보지 않으면 얼마 가지 않아 죽고 만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성경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서 목자와 양으로 자주 표현된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을 향하여 '나는 너희 목자다'라고 표현하기까지 한다. 신구약을 막론하고 성경 전반에 이러한 목사와 양의 관계가 설정되어 있다.


  • 에스겔 34장 15절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을 누워 있게 할지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시편 28장 9절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그들의 목자가 되시어 영원토록 그들을 인도하소서
  • 시편 80장 1절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
  • 요한복음 10장 11절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 요한계시록 7장 17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목자의 역할


목자는 양의 모든 것을 책임진다. 먹을 것, 쉴곳, 잠잘 곳 등을 모두 책임진다. 이뿐 아니라 다른 늑내나 사자들이 공격해 올 때도 목자는 그들과 대항하여 자신들을 양의 지킨다. 목자는 몇 달에 한 번씩 목장을 옮긴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목초지가 바뀌기 때문이다. 양들이 풀을 먹는 속도를 풀이 자라는 속도를 따르지 못하기 때문에, 온도와 날씨의 변화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옮겨 다닌다. 4절에서 이것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2절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부족함이 없다'는 서술의 이유를 2절에서 제공한다. 2절은 1절의 설명이자 구체화이다. 풀밭과 물가는 양들이 거하는 최적의 장소이다. 양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목자는 이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그들을 그곳으로 인도한다. 다윗은 목자가 해야할, 마땅히 양들을 위해 제공해야할 것을 제시한다.


목자가 제공하는 것


'푸른 풀밭'(여성형 복수) '쉴 만한 물가'(남성형 복수)는 목자가 제공하는 것이다. 이 구절은 3절과 짝을 이룬다. 다윗은 여호와가 자신에게 영적 양식을 제공함으로 자신의 영혼을 소생시키고, 의의 길로 인도하여 생명에 이르게 할 것임을 확신한다. 마지막 장소는 6절에 나온대로 '여호와의 집'일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야 한다. 하지만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마침내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푸른 풀밭과 물가가 아니다. 그래서 시편 23편은 외형적 놀라운 평안함과 대비되어 내면에는 엄청난 긴장과 초조함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여성형과 남성형을 사용하여 짝을 완성함으로 완전함을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누이시다 인도하시다


'누이시다'는 히필형 동사는 히브리인들이 음식을 먹을 취하는 자세다. 우리나라는 앉아서 먹기 때문에 의아해 보이지만 음식을 먹는 것은 생존을 너머 평안과 직결된다. '인도하다'는 피엘형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고한 신뢰가 담겨있다. 히브리어에서 히필형은 '사역 능동'의 의미며, 피엘형은 '강조 능동'이다. 다윗은 두 형태를 사용하며, 일반 강조에서 강한 강조로 넘어가고 있다.


쉴만한 물가는 몇 가지 의미를 전제한다. 먼저는 '잔잔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고요있는 물은 아니다. '흐르는 물'이다. 잔잔하게 흐르는 물가란 뜻이다. 양이나 염소 등은 물이 거세게 흐름면 잘 마시지 못한다. 입과 코가 평평하게 붙어 있어서 물이 요동치며 코로 물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둘째는 쉼이란 단어가 종종 성경 안에서 평안의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김정우는 대상 28:2을 인용하며 하나님의 성전일 가능성을 제공한다. 이러한 주장이 합리적인 이유는 성전 또는 하나님의 보좌는 물이 흘러 나오는 곳이기 때문이다. 에스겔서와 계시록에도 이러한 상징성을 활용하여 생명수가 성전과 보좌에서 흘러나옴을 강조한다.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은유적으로  '쉴만한 물가'로 표현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6절의 '여호와의 집'과 잘 어울린다.


  • 에스겔 47장 1절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 내리더라
  • 요한계시록 21:5-6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3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1-3절은 23편의 1연에 해당되는 단락이다. 1절에서 시작된 목자되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고백이 3절에서 일단 마무리 된다.


소생시킨다는 표현은 돌이킨다는 뜻이다. 히브리어 슈브(שׁוּב)는 영어리의 return과 흡사하다. 180도 완전히 되돌아 간다는 뜻이다. 또는 원래의 그 모습으로 되돌려 놓는다는 뜻이다. 부흥하다는 뜻과 정확히 일치한다. 다윗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혼(나프쉬)을 처음의 상태, 원래의 자리로 돌이킬 것을 확신한다.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는 매우 중요한 상징을 갖는다. 다윗은 자신의 영혼을 소생키는 것이 하나님의 명예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믿음의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기도했다. 자신들이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께 속한 자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수치를 당하고 모욕을 당하면 하나님의 이름에 수치가 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여호수아 7장 9절 가나안 사람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 열왕기상 8장48절 자기를 사로잡아 간 적국의 땅에서 온 마음과 온 뜻으로 주께 돌아와서 주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신 땅 곧 주께서 택하신 성읍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성전 있는 쪽을 향하여 주께 기도하거든
  • 시편 79장 9절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 시편 106장 8절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셨으니 그의 큰 권능을 만인이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
  • 시편 143장 11절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살리시고 주의 의로 내 영혼을 환난에서 끌어내소서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시인을 구원하실 것이다. 시인은 그것을 확신하고 있다.


4절 강한 용사이신 여호와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4절은 시인의 현재 상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목자는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양을 인도하기 위해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야 한다. 그러나 시인은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확신한다. 왜냐하면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자신을 지켜 주기 때문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시인은 비록 자신이 성전으로 가기 위해 고난의 골짜기를 지나야 함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곳은 깊고 깊은 어둠이 지배하는 곳이며, 사망이 가득한 골짜기다. 즉 그곳은 산등성이나 산정산이 아니라 깊은 어둠의 골짜기다.


팔레스타인의 목자들은 계절별로 양들을 이끌었는데 종종 계곡과 산을 건너야 했다. 그것은 불가피한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내리면 큰 위기에 빠지기도 한다. 많은 양들이 죽기도한다. 아무리 예측해도 팔레스타인 날씨는 예측 불허다. 또한 골짜기를 지나는 동안 의외로 강도들이 매복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양들을 훔치기 위해 매목하고 있다 양들을 훔쳐가곤 했다.


시인은 이러한 위기적 상황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들이 두렵지 않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위기를 극복할 방법이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와 함께 하기 때문이고,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자신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1절에서 여호와를 '목자'로 표현하고, 이제는 직설적으로 목자되신 주님이 자신을 지켜줄 것을 확신한다. 그러므로 그는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안위하시는 하나님


안위한다는 표현은 위로하다는 뜻이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할 때(사 66:13), 침대가 나를 외로할 때(욥 21:4), 주께서 외로할 때(시 71ㅣ21, 119:82) 등에서 사용된다. 이러한 용례를 통해 김정우는 '힘을 줍니다'로 번역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말한다.


5-6절 잔치를 베푸시는 여호와


5절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상을 베푸시고


드디어 하나님은 시인에게 상(밥상)을 베푸신다. 그 상은 잔치상이 분명하다. 원수 앞에서 보란 듯이 잔치상을 베푸심으로 통쾌한 복수를 한다. 지금까지 원수들에게 쫓기고 내몰리는 상황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팔을 들어 승리를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 있을 때 하나님께 '광야에서 식탁을 베푸실 수 있으랴'라고 하나님을 불신하고 조롱했다.

  • 시편 78장 19절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식탁을 베푸실 수 있으랴

시인은 목자되신 여호와가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원수 앞에서 잔치상 베푸심으로 푸른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실 것을 확신한다. '베풀다'는 동사는 미완료(미래)형이다.

이 구절을 좀 더 확대한다면 종말론적 환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의인들의 마지막 장면은 항상 잔치로 마무리 된다. 잔치는 기쁨과 보상, 회복을 의미한다. 천상에서의 어린양의 혼인 잔치로 계시록이 마무리 되듯 잔치는 모든 것의 회복을 전제로 한다.

기름을 부으시고


승리의 표는 잔치상과 더불어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기름을 왕이나 제사장에 붓는 기름이 아니라 잔치에 초대된 사람을 주인이 손님의 머리에 발라주는 기름이다. 팔레스타인은 귀한 손님에게 머리에 기름을 바름으로 최고의 대우를 했다고 한다.


'기름을 붓다'는 동사는 시편 23편에 사용된 동사 중에 유일하게 완료형(perfect)으로 사용된 동사이다. 히브리어 완료형은 과거에 이루어진 사건이 현재도 여전히 동일하게 유효한 상태를 말한다. 그러므로 현재형으로 봐도 무방하다.


기름을 성령과 하나님의 임재로 상징화 시킨다면, 비록 현재는 어둡고 암울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나에게 축제의 기분을 허락하셨다. 나는 지금 성령으로 충많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이처럼 우리는 시편 기자가 고요한 시기가 아니라 오히려 원수들에게 괴로움을 당하는 때에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표현하는 것을 발견한다. 자신의 임재와 공급을 통해, 하나님은 원수들에게 누구 편에 있는지를 보여준다. [트렘페 롱맨 3 <틴테일 구약주석> CLC]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토브와 헤세드


이제 마지막으로 나아간다. 선하심(토브)과 인자(헤세드)가 따를 것이라 확신한다. 토브라는 히브리어는 창세기 1장에서 사용된 '보시기 좋았더라'에 사용된 단어로 하나님의 행하심의 완전성을 전제하는 표현이다. 토브와 헤세드는 롬 8:28의 구절속에 잘 표현되어 있다.


  •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것이 모순처럼 보이고 부족해 보이지만 결국 하나님은 승리할 것임을 말한다.


여호와의 집


여호와의 집은 설명이 필요 없이 성전인 것을 알 수 있다. 시인이 그토록 갈망하고 가고 싶은 곳은 여호와의 집이다. 여호와의 집에 간다는 말은 장소의 개념이 아니다. 다시 하나님의 전에서 예배하는 것을 꿈구는 말이다. 확장시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어 아버지에 집에 거하기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징계의 시간이고, 고난의 시간이다. 하지만 마침내 하나님께서 자신을 다시 회복시킬 것이고, 아버지의 집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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