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언약궤 앞에서 기쁨과 두려움을 배우십시오
사무엘상 6장은 블레셋 땅에 머물던 언약궤가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과정을 기록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의 무거운 손을 견디지 못해 언약궤를 돌려보내지만, 벧세메스 사람들은 돌아온 궤를 기뻐하면서도 하나님의 거룩함을 가볍게 여겨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 숭배자에게만 거룩하신 분이 아니라 언약 백성에게도 거룩하십니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는 주권적인 은혜로 주어지지만, 그 은혜를 경외함 없이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기 원합니다.
죄책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께 온전히 돌아오지는 않았습니다(삼상 6:1-9)
여호와의 궤는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일곱 달 동안 머물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일곱 달은 영광이 떠난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언약궤를 빼앗겼고 엘리의 가문은 무너졌으며, 블레셋의 압제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에게 그 일곱 달은 자신들의 승리가 재앙으로 변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블레셋은 언약궤를 전리품처럼 가져와 아스돗에 있는 다곤의 신전에 두었습니다. 그들은 다곤이 여호와를 이겼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다곤은 언약궤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쓰러져 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다곤을 다시 세웠지만 그다음 날에는 머리와 두 손목이 끊어진 채 문지방에 놓여 있었습니다.
다곤의 손은 잘렸지만 여호와의 손은 블레셋을 무겁게 눌렀습니다. 아스돗과 가드와 에그론에 재앙이 임했고, 사람들은 독한 종기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성읍마다 옮겨 보았지만 장소를 바꾼다고 하나님의 손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자랑스러운 전리품이었던 언약궤가 이제는 누구도 곁에 두고 싶지 않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소유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언약궤로 인해 사로잡힌 상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영광을 높이려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일곱 달이 지난 후 블레셋 사람들은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렀습니다. 여기서 제사장들은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이 아니라 블레셋의 신들을 섬기던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복술자들은 여러 징조와 점술을 통해 신들의 뜻을 알아내려 했던 사람들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에게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엇과 함께 본래의 장소로 돌려보내야 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들은 언약궤를 자신들에게서 떠나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말씀을 아는 선지자나 율법이 없었으므로 자신들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방법을 구했습니다.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은 언약궤를 거저 보내지 말고 반드시 속건제를 드려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속건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샴(אָשָׁם)은 죄책, 배상 또는 죄책을 처리하기 위해 드리는 제사를 가리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임한 재앙이 단순한 불운이 아니라 여호와께 범한 잘못과 관련되어 있다고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속건제를 드리면 병이 낫고 여호와의 손이 자신들에게서 떠나지 않는 이유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제 여호와의 손이 자신들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다곤이 무너지고 성읍마다 같은 재앙이 일어났으므로 우연이라고만 설명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죄책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것과 참으로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은 다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재앙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다곤을 버리고 여호와만을 섬기겠다고 고백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인정했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지는 않았습니다.
사람은 죄의 결과가 괴로워지면 잘못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곧 회개는 아닙니다. 참된 회개는 벌만 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역한 죄 자체를 슬퍼하고 그 죄를 버리며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어떤 속건제를 드려야 하는지 묻자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은 블레셋 통치자들의 수에 따라 금으로 만든 독한 종기 다섯과 금쥐 다섯을 드리라고 합니다. 블레셋은 아스돗과 가사, 아스글론과 가드, 에그론이라는 다섯 주요 성읍을 중심으로 다섯 방백이 다스리는 연합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금으로 만든 종기와 쥐는 자신들에게 임한 재앙을 형상화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재앙의 모양을 본떠 속건제물로 드리면 여호와의 손이 가벼워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대 사회에는 질병이나 재앙의 형상을 만들어 신에게 바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던 종교적 방식으로 여호와께 배상하려 했습니다.
본문은 블레셋 종교 지도자들의 방법을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정당한 제사 규례로 승인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속건제는 율법에 따라 흠 없는 짐승을 드리고 필요한 배상을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금으로 종기와 쥐의 형상을 만들어 바치는 일은 모세의 율법이 명령한 제사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사람들이 제한된 지식 안에서 자신의 죄책을 인정하고 언약궤를 돌려보내도록 섭리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종교적 방식이 모두 옳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불완전한 인간의 판단까지 사용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셨다는 의미입니다.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은 블레셋 전역에 내린 재앙이 같으므로 다섯 방백을 위한 속건제도 같은 종류로 드려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어느 한 성읍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작은 자와 큰 자, 성벽이 있는 도시와 시골 마을 모두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권고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여호와께서 의로우시며 능력이 크시다는 사실을 고백하라는 뜻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이겼다는 교만한 생각을 버리고 실제로는 여호와의 손 아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은 찬송의 말을 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교만과 잘못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높이는 것입니다. 죄를 숨기면서 입술로만 하나님을 높이는 것은 참된 영광 돌림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그분의 의로운 판단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복술자들은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블레셋 사람들과 그들의 신들과 그들의 땅을 누르던 손을 가볍게 하실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확신에 찬 언약의 언어가 아니라 가능성을 말합니다. 여호와를 인격적으로 아는 사람들이 아니었으므로 그분의 자비와 약속을 확실히 붙들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던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자신들의 제물을 받으실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두려움 속에서 가능성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언약 백성은 하나님의 성품과 약속을 근거로 은혜를 구할 수 있습니다. 특히 신약의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애굽 사람들과 바로처럼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을 치신 후에야 그들이 이스라엘을 보내 주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여러 세대가 지난 후에도 주변 민족들에게 알려져 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애굽에 재앙을 내리고 이스라엘을 해방하신 일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4장에서도 블레셋 군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애굽을 재앙으로 치신 분이라는 소문을 기억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을 아는 것과 그 사실 앞에서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은 다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출애굽 이야기를 알고도 여호와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내용을 알고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마음을 완고하게 할 수 있습니다.
바로는 재앙이 임할 때마다 모세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재앙이 멈추면 다시 마음을 완고하게 했습니다. 그는 고통을 피하고 싶었지만 여호와의 주권에는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블레셋 사람들도 그 길을 반복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마음을 완고하게 한다는 것은 단지 감정이 차갑다는 뜻이 아닙니다. 분명한 하나님의 경고를 받고도 자기 뜻을 굽히지 않는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을 무너뜨리고 삶을 흔들어 깨우실 때 계속 이전의 길을 고집하는 것이 완고함입니다.
블레셋의 종교 지도자들은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를 메어 보지 않은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준비하라고 합니다. 송아지들은 어미에게서 떼어 집에 가두고, 두 암소에게 수레를 메워 언약궤와 금으로 만든 속건제물을 싣도록 했습니다.
새 수레는 다른 용도로 사용되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멍에를 메어 보지 않은 암소도 일반적인 노동에 사용되지 않은 짐승이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언약궤에 대한 특별한 존중을 나타내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에는 하나님의 뜻을 시험하려는 요소도 있었습니다. 젖 나는 암소는 본능적으로 집에 갇힌 송아지에게 돌아가려 할 것입니다. 더욱이 한 번도 멍에를 메지 않은 두 소가 서로 보조를 맞추어 정해진 길로 가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일입니다.
그들은 암소들이 언약궤를 싣고 이스라엘의 벧세메스로 곧장 가면 자신들에게 임한 재앙이 여호와께서 내리신 것임을 인정하고, 그렇지 않으면 우연히 일어난 일로 판단하겠다고 했습니다. ‘우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크레(מִקְרֶה)는 뜻밖에 일어난 사건이나 우발적인 일을 의미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여러 차례 분명한 표징을 경험하고도 마지막 확인을 원했습니다. 다곤이 두 번이나 쓰러졌고 성읍마다 같은 재앙이 일어났지만 여전히 우연의 가능성을 남겨 두었습니다. 믿지 않으려는 마음은 아무리 많은 증거를 보아도 또 다른 시험을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정한 시험에 종속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원하는 표징을 제시하며 하나님께 증명하라고 요구할 권리는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실험하여 확률을 확인하는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이 특별한 상황에서 블레셋 사람들이 세운 조건을 사용하셔서 재앙이 우연이 아니며 자신이 살아 계신 하나님임을 분명히 드러내십니다. 이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를 일반적으로 허용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긍휼과 섭리를 보여 줍니다.
언약궤의 귀환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였습니다(삼상 6:10-18)
블레셋 사람들은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이 말한 대로 행했습니다.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었습니다. 수레 위에는 여호와의 궤와 금쥐와 독한 종기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실었습니다.
암소들은 벧세메스로 가는 길로 곧장 나아갔습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큰길을 따라갔습니다. 송아지들을 집에 둔 어미 소들은 울면서 걸었습니다. 본문이 암소들의 울음을 기록한 것은 그들이 자연적인 본능을 느끼면서도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정해진 길을 갔다는 사실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암소들은 송아지에게 돌아가고 싶은 본능이 있었을 것입니다. 멍에를 메어 본 적도 없고 수레를 끌어 본 경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두 암소는 함께 보조를 맞추어 이스라엘 땅을 향해 곧장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그들의 길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언약궤의 귀환은 이스라엘 군대가 블레셋을 공격하여 되찾은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사무엘이 군사를 일으켜 구출한 것도 아니고 제사장들이 협상을 통해 돌려받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으로 언약궤를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궤를 지키지 못했고 되찾을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언약과 영광을 스스로 보존하셨습니다. 언약궤의 귀환은 이스라엘의 공로나 군사력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구원도 이와 같습니다. 죄인은 자신의 힘으로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사람은 스스로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시고 구원의 길을 여셔야 합니다. 구원은 인간이 하나님을 되찾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죄인을 찾아오시는 은혜입니다.
블레셋의 다섯 방백은 암소들이 가는 모습을 벧세메스 경계까지 따라갔습니다. 그들은 소들이 정말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는지 확인했습니다. 암소들은 그들이 정한 조건대로 움직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자신들에게 임한 재앙이 여호와의 손에서 왔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골짜기에서 밀을 베고 있었습니다. 밀을 거두는 평범한 일상 가운데 언약궤가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눈을 들어 언약궤를 보고 크게 기뻐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영광이 완전히 떠난 것처럼 보였던 일곱 달이 지나고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언약궤가 돌아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때로 우리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중에 찾아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언약궤를 되찾기 위해 전쟁을 준비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밭에서 밀을 베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계산과 노력보다 앞서 일하시고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벧세메스는 유다 지파의 경계에 있는 성읍이며 레위 사람들에게 주어진 성읍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따라서 그곳에는 레위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본문도 레위 사람들이 언약궤를 수레에서 내려놓았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궤가 돌아올 장소까지 섭리 가운데 인도하셨습니다.
수레는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이르러 큰 돌이 있는 곳에 멈췄습니다. 이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와는 다른 인물입니다. 당시에는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 있으므로 두 사람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수레의 나무를 패고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렸습니다. 언약궤를 운반한 수레와 암소들이 곧바로 제사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들은 언약궤의 귀환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이고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레위 사람들은 여호와의 궤와 금으로 만든 물건들이 담긴 상자를 내려 큰 돌 위에 두었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그날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렸습니다. 기쁨은 자연스럽게 예배로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 보일 가장 바른 반응은 예배입니다. 은혜를 자신의 만족으로만 소비하지 않고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려야 합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밀을 거두던 일을 잠시 멈추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블레셋의 다섯 방백은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본 후 그날 에그론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암소들이 곧장 벧세메스로 가는 일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언약궤를 맞아 제사를 드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자신들의 땅에 내린 재앙이 우연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들이 여호와를 믿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증거를 보았지만 블레셋으로 돌아갔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확실한 증거를 보는 것과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믿음은 다릅니다. 믿음은 단순히 사실을 확인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금으로 만든 독한 종기는 블레셋의 다섯 주요 성읍, 곧 아스돗과 가사와 아스글론과 가드와 에그론을 대표했습니다. 금쥐들은 성벽이 있는 성읍과 시골 마을을 포함하여 블레셋 전역에 임한 재앙을 상징했습니다. 본문에는 금쥐의 수와 범위에 관한 표현이 다소 복합적으로 나타나지만, 블레셋의 넓은 지역이 여호와의 손 아래 있었다는 핵심은 분명합니다.
언약궤를 내려놓았던 큰 돌은 본문이 기록될 당시까지 여호수아의 밭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 돌은 하나님의 궤가 돌아온 사건을 기억하게 하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돌을 볼 때마다 자신들이 언약궤를 되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스스로 돌아오게 하셨음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는 것은 신앙에서 중요합니다. 인간은 고난은 오래 기억하면서 은혜는 쉽게 잊습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어떻게 인도하고 건지셨는지를 기억하면 현재의 어려움 속에서도 그분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은혜를 기념하는 표지 자체를 우상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돌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억하게 하는 수단일 뿐 하나님 자체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부적처럼 이용했던 잘못을 기억해야 합니다. 은혜의 표지는 하나님을 가리켜야 하며 그 자체가 하나님을 대신해서는 안 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새 수레에 언약궤를 실어 보냈습니다. 이것은 모세의 율법이 이스라엘에게 명령한 운반 방식은 아니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언약궤는 고핫 자손이 채를 사용하여 메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은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이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불완전한 방법을 사용하여 언약궤를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이 사건이 이후 이스라엘 사람들도 언약궤를 수레에 실어도 된다는 허락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를 받지 못한 이방인의 무지를 참으신 것과 말씀을 받은 언약 백성이 고의로 명령을 어기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받은 계시와 특권이 클수록 책임도 무겁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는 경외함으로 서야 합니다(삼상 6:19-21)
벧세메스 사람들은 언약궤가 돌아온 것을 보고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심판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벧세메스 사람들을 치셨는데, 그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보았기 때문입니다.
개역개정은 전통적인 히브리어 본문을 따라 하나님께서 백성 가운데 오만 칠십 명을 치셨다고 번역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의 숫자는 구약성경의 본문비평에서 오래 논의되어 온 어려운 부분입니다. 히브리어 표현과 일부 고대 사본 및 번역의 차이로 인해 어떤 번역은 칠십 명으로 제시하기도 합니다.
정확한 사망자 수에 관한 본문상의 문제는 신중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상당수의 사람이 심판받았으며 그 일로 백성이 크게 애곡했다는 본문의 중심 내용은 분명합니다. 숫자의 차이가 이 사건의 신학적 의미를 바꾸지는 않습니다.
언약궤를 ‘들여다보았다’는 행위의 정확한 모습에도 논의가 있습니다. 개역개정은 언약궤 안을 들여다본 것으로 번역합니다. 히브리어 표현은 언약궤를 함부로 바라보았거나 거룩한 경계를 침범한 행동으로 이해될 여지도 있습니다. 어떤 방식이었든 그들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거룩한 질서를 무시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민수기에서는 고핫 자손이라도 성물을 직접 보거나 만지면 죽을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언약궤는 인간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종교적 유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와 언약을 나타내는 성물이었으므로 정해진 방식에 따라 다루어야 했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언약궤의 귀환을 기뻐했지만 기쁨이 경외함을 대신하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돌아오셨다는 사실은 기쁜 일이지만, 돌아오신 하나님은 여전히 거룩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다고 해서 거룩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를 함부로 다루었을 때 하나님의 손이 그들을 치셨습니다. 그런데 언약 백성인 벧세메스 사람들이 언약궤를 함부로 다루었을 때에도 심판이 임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에게만 거룩하고 자기 백성에게는 가볍게 대해도 되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언약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과 거룩함을 더 많이 알았으므로 더 큰 책임을 가집니다. 선택받았다는 사실은 죄를 지어도 심판받지 않는 특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고 그 말씀에 순종하도록 부름받았다는 뜻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무지 가운데 새 수레를 만들어 언약궤를 보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수레를 사용하셨습니다. 반면 율법과 성소 가까이에 살던 벧세메스 사람들은 거룩한 경계를 침범하여 심판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맡기신 빛과 책임에 따라 판단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분을 가볍게 대할 근거가 아닙니다. 은혜를 깊이 알수록 더욱 경외해야 합니다. 값없이 받은 은혜라고 해서 값싼 은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셨다는 사실을 안다면 죄를 가볍게 여길 수 없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하나님의 큰 심판을 보고 애곡하며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무엘상 6장의 핵심 질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인이 어떻게 설 수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거룩하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도시(קָדוֹשׁ)는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시며 죄와 악으로부터 완전히 순결하신 분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그분의 여러 성품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 능력과 지혜도 모두 거룩합니다.
죄인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의 공로나 의로 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대할수록 자신의 죄와 부정함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의 거룩한 능력을 경험한 후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누가 능히 서리요”라는 질문에 인간은 자기 힘으로 답할 수 없습니다. 종교적인 열심이나 도덕적인 행위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을 만들어 주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중보자와 속죄의 길을 마련해 주셔야 합니다.
구약의 제사장과 희생 제사는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중보와 속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짐승의 피는 죄를 완전하게 제거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장차 오실 완전한 대제사장과 희생 제물을 바라보게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신 완전한 속건제물이십니다. 이사야는 고난받는 종의 생명이 속건제물로 드려질 것을 말합니다. 사무엘상 6장에서 블레셋이 드린 금 형상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완전한 속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에서 인간의 죄책은 마침내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만 온전히 해결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피로 우리 죄를 씻으시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롭고 산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입고 하나님 앞에 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속죄입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정죄의 두려움에서는 해방되었지만 자녀로서 아버지를 경외해야 합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되 경솔하거나 무례하게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이어서 “그가 우리에게서 누구에게로 올라가실까”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은 “누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가”라는 바른 질문에서 시작했지만, 그들이 선택한 해결책은 하나님의 궤를 자신들에게서 다른 곳으로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도 언약궤를 자신들에게서 떠나보내려 했습니다. 이제 언약 백성인 벧세메스 사람들도 같은 반응을 보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서 회개하며 바른 관계를 회복하기보다 하나님의 임재를 다른 곳으로 옮겨 위험을 피하려 했습니다.
죄인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길을 찾기보다 하나님을 멀리 보내려 할 때가 많습니다. 말씀을 듣고 죄가 드러나면 회개하기보다 그 말씀을 전한 사람을 피합니다. 양심이 불편해지면 삶을 바꾸기보다 예배와 교회에서 멀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거리를 둔다고 죄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기럇여아림 주민들에게 전령을 보내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돌려보냈으니 내려와 가져가라고 요청했습니다. 언약궤는 다음 장에서 기럇여아림으로 옮겨져 아비나답의 집에 머물게 됩니다.
사무엘상 6장은 언약궤가 실로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실로의 제사장 체제는 이미 심판받고 있었습니다. 언약궤는 새로운 장소로 이동하고 이스라엘은 오랜 시간 영적 회복을 기다리게 됩니다. 외적인 언약궤의 귀환만으로 이스라엘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언약궤의 물리적 귀환만이 아니라 마음이 여호와께 돌아오는 일이었습니다. 이어지는 사무엘상 7장에서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분만 섬기라고 촉구합니다. 참된 회복은 거룩한 물건을 되찾는 데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는 데서 시작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무엘상 6장은 언약궤가 이스라엘로 돌아온 것이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였음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구출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암소들의 걸음까지 다스리시며 자신의 언약과 영광을 스스로 보존하셨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언약궤 앞에서 벧세메스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큰 기쁨이지만 동시에 거룩한 두려움으로 받아야 합니다. 은혜는 하나님을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허락이 아닙니다. 값없이 받은 구원일수록 그 은혜의 값이 얼마나 큰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라는 질문에 대한 복음의 대답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자신의 의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지만 그리스도의 피와 의를 의지하여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담대함은 경솔함이 아니라 감사와 경외가 담긴 담대함입니다.
고통만 피하려 했던 블레셋 사람들처럼 행동하지 말고 죄 자체를 버리십시오. 하나님의 거룩함이 불편하다고 그분을 멀리 보내려 했던 벧세메스 사람들처럼 물러서지 마십시오. 완전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며, 기쁨과 경외함으로 그분을 섬기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