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8장 주해와 강해

보이는 왕을 구하다 참된 왕을 버린 백성

사무엘상 8장은 이스라엘이 사사 시대를 지나 왕정 시대로 들어가는 결정적인 전환점입니다. 사무엘의 아들들이 정의를 굽게 하자 장로들은 다른 나라들처럼 자신들을 다스릴 왕을 요구합니다. 왕을 세우는 제도 자체가 죄였던 것은 아니지만, 백성은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눈에 보이는 권력과 군사력을 의지하려 했습니다. 본문을 통해 인간의 정당한 필요에도 잘못된 욕망이 섞일 수 있으며, 참된 왕이신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권력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원합니다.

정의를 원했지만 세상의 방식을 선택했습니다(삼상 8:1-5)

사무엘상 7장은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다고 기록합니다. 그는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를 순회하며 백성의 문제를 판단했고, 자신의 집이 있는 라마로 돌아와서도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사무엘은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이며 백성을 위해 기도하는 중보자였고, 정의를 세우는 사사였습니다.

사무엘의 지도 아래 이스라엘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미스바에서 죄를 고백하고 금식했으며, 블레셋이 공격했을 때 하나님께서 큰 우레를 발하여 승리를 주셨습니다. 사무엘은 도움의 돌을 세우고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상 8장은 “사무엘이 늙으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아무리 충실한 지도자라도 세월의 한계를 피할 수 없습니다. 사무엘은 한 시대를 이끌었지만 영원히 백성 곁에 머물 수는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사무엘 이후의 지도력과 정치적 질서를 준비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특정한 인간 지도자의 생명과 능력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모세가 죽은 뒤에도 하나님의 언약은 계속되었고,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도 하나님의 통치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일꾼은 바뀌지만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자기 백성을 다스리십니다.

교회는 신실한 지도자를 귀하게 여기되 그 사람을 하나님처럼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지도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종이지 교회의 주인이 아닙니다. 인간 지도자 한 사람이 떠났다고 모든 것이 무너진다면 그 공동체의 기초가 하나님과 복음이 아니라 사람에게 놓여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무엘은 늙자 자신의 아들들을 이스라엘의 사사로 삼았습니다. 맏아들의 이름은 요엘이었고 둘째 아들의 이름은 아비야였습니다. 요엘은 일반적으로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으로, 아비야는 ‘여호와는 나의 아버지이시다’라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두 아들의 이름에는 사무엘의 신앙고백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건한 이름이 경건한 삶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사무엘은 자신의 신앙을 이름에 담아 주었지만 아들들이 그 믿음대로 살도록 대신 결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믿음의 본을 보여야 하지만 자녀의 마음을 새롭게 하거나 구원할 능력은 없습니다.

구원은 혈통이나 가정의 전통을 통해 자동으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부모가 목회자나 장로이고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다고 해서 자녀가 저절로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야 하며 자신의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사무엘의 아들들은 브엘세바에서 사사로 일했습니다. 브엘세바는 이스라엘 남쪽 끝에 가까운 지역입니다. 사무엘은 전국을 혼자 다스리기 어려워 아들들에게 남부 지역의 재판을 맡겼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들이 아버지의 길을 따르지 않았다고 평가합니다.

사무엘의 아들들은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했습니다. ‘뇌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쇼하드(שֹׁחַד)는 재판관의 판단을 왜곡하기 위해 주는 금품이나 이익을 뜻합니다. 율법은 뇌물이 지혜로운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므로 받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재판관은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 힘 있는 사람과 연약한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판단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의 아들들은 정의를 자신의 이익과 맞바꾸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백성을 보호하라고 맡기신 권한을 사적인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사무엘은 엘리와 달리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전하고 백성을 위해 기도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길을 따르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엘리 가정의 아픔이 다시 떠오릅니다. 성경은 위대한 신앙 인물의 가정 문제를 숨기거나 미화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사무엘과 엘리의 책임을 완전히 동일하게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엘리는 아들들의 심각한 죄를 알고도 실질적으로 제지하지 않았다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책망을 받았습니다. 사무엘상 8장은 사무엘이 아들들의 부패를 알고도 방치했다거나 그들의 행동을 승인했다고 명시하지 않습니다.

사무엘이 아들들을 사사로 임명한 판단이 지혜로웠는지를 질문할 수는 있지만, 본문이 말하지 않는 그의 동기와 책임을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이 분명하게 책망하는 것은 그의 아들들이 이익을 따르고 뇌물을 받아 재판을 굽게 한 죄입니다.

이 사건은 신실한 부모에게도 불순종하는 자녀가 있을 수 있으며, 훌륭한 지도자도 후계 문제에서는 어려움을 겪을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우리의 소망을 인간 가문이나 지도자의 혈통에 둘 수 없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세습으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왔습니다. 장로들은 각 지파와 지역을 대표하는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무엘이 늙었고 그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길을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장로들의 문제 제기에는 정당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백성에게는 공정한 재판과 안정적인 지도력이 필요했습니다.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는 지도자 아래에서 고통을 참고만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어기는 지도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정당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불의를 무조건 참는 태도가 아닙니다. 교회와 사회의 지도자가 권한을 남용하고 정의를 굽게 할 때 그것을 바로잡도록 요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패를 덮는 것은 믿음도 순종도 아닙니다. 진실을 드러내고 약한 사람을 보호하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에 맞습니다.

그러나 정당한 문제의식이 항상 바른 해결책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장로들은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사무엘의 아들들이 부패했다는 실제 문제를 제기했지만 해결책은 주변 민족의 정치 체제에서 찾았습니다.

“모든 나라와 같이”라는 말이 그들의 욕망을 드러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시고 자신의 소유로 구별하신 백성이었습니다. 다른 나라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살아가는 민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통치를 세상 가운데 나타내도록 부름받은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구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부담스럽게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매 순간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왕과 제도를 갖는 것이 더 안전해 보였습니다. 주변 민족처럼 강한 왕과 군대를 가지고 싶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보다 세상의 평범한 안전을 더 부러워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하게 살아가는 길보다 세상의 방식에 섞여 사는 길을 편하게 느낍니다. 세상이 가진 힘과 성공을 바라보며 “우리도 저들처럼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세상과 다른 것은 문화적인 특이함이나 외적인 구분에만 있지 않습니다. 권력과 성공을 바라보는 기준이 달라야 합니다. 세상은 힘이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것을 성공이라고 여기지만 교회는 자신을 낮추고 섬기는 것을 위대함으로 봅니다. 세상은 숫자와 영향력을 자랑하지만 교회는 말씀에 대한 신실함을 소중히 여깁니다.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한 것 자체가 무조건 죄였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신명기 17장은 이스라엘이 장차 왕을 세우게 될 상황을 예상하고 왕에 관한 규례를 제시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야곱에게서 왕들이 나올 것을 약속하셨고, 한나의 찬송도 하나님께서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고 기름 부음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실 것을 노래했습니다.

왕정은 하나님의 구속 계획과 완전히 무관한 제도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차 다윗을 세우시고 그의 왕조를 통해 메시아의 약속을 발전시키실 것입니다. 문제는 왕이라는 제도 자체보다 왕을 요구한 백성의 동기와 방식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 때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을 다른 나라처럼 만들어 줄 왕을 요구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섬길 왕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하여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할 왕을 원했습니다. 왕을 하나님의 종으로 보지 않고 새로운 의지처로 삼으려 했습니다.

정당한 필요 속에도 우상적인 욕망이 섞일 수 있습니다. 안정된 가정과 건강, 경제적 여유와 좋은 지도자를 원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보다 더 큰 안전과 만족을 줄 것으로 기대하면 우상이 됩니다.

우리는 무엇을 구하는가뿐 아니라 왜 그것을 구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좋은 직장을 구하면서 하나님을 섬길 기회를 원하는지, 아니면 직장이 나의 가치를 증명해 줄 것으로 기대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녀의 성공을 기도하면서 그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원하는지, 아니면 자녀를 통해 자신의 자랑을 이루려 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정의를 원했지만 세상의 권력 구조가 정의를 자동으로 보장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제도를 바꾼다고 인간의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사가 부패할 수 있듯 왕도 부패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근본 문제는 제도만이 아니라 죄로 기울어진 마음에 있습니다.

좋은 제도와 법은 중요합니다. 권력을 견제하고 정의를 세우는 구조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떤 정치 제도도 인간의 마음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제도가 죄의 확산을 어느 정도 제한할 수는 있지만 인간을 의롭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궁극적인 변화는 성령께서 말씀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실 때 일어납니다.

백성은 인간 왕을 요구하며 여호와의 왕권을 거절했습니다(삼상 8:6-9)

백성이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고 요구하자 사무엘은 그 말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개역개정은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한지라”고 번역하지만 히브리어 표현은 그 일이 사무엘의 눈에 악하거나 불쾌하게 보였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사무엘은 백성의 요구를 개인적인 거절로 느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평생 백성을 다스렸는데 이제 늙었다는 이유로 다른 지도 체제를 요구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들들의 부패가 지적된 일도 마음을 아프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사무엘의 구체적인 감정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무엘이 불쾌한 말을 들은 후 즉시 백성과 다투지 않고 여호와께 기도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상처와 분노를 자기 판단으로 처리하지 않고 하나님께 가져갔습니다. 영적 지도자는 반대와 비판을 받을 때 자신의 권위를 방어하기 전에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비판을 받으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변호하려 합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찾아 되받아치거나 자신의 공로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감정을 부정하는 행위가 아니라 감정을 하나님의 판단 아래 가져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백성이 하는 말을 모두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백성이 거절한 궁극적인 왕은 사무엘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버리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아스(מָאַס)는 거절하다, 멸시하다,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여호와를 자신들의 신이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삶을 다스리는 왕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나님을 종교적인 영역에만 모시고 삶의 왕권은 자신이나 세상에 넘길 수 있습니다. 예배와 기도에서는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면서 돈을 사용할 때는 탐욕이 왕이 되고, 인간관계에서는 사람의 인정이 왕이 되며, 미래를 결정할 때는 두려움이 왕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한 부분만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 시간과 물질, 관계와 미래를 다스리는 왕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구원자로 받아들이면서 통치자로는 거절하는 신앙은 온전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요구는 갑자기 나타난 새로운 반역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구원하신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로의 노예였지만 하나님께서 강한 손으로 해방하셨습니다. 홍해를 건너고 광야에서 만나와 물을 공급받았으며,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구원받은 후에도 반복하여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겼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었고 가나안에 들어와 바알과 아스다롯을 따랐습니다. 사무엘상 7장에서 우상을 제거했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보이는 대상에 의존하려는 성향이 남아 있었습니다.

우상 숭배는 신상의 모양만 바뀔 뿐 본질은 같습니다. 과거에는 바알과 아스다롯을 의지했고 이제는 인간 왕과 군사 제도를 의지하려 합니다. 눈에 보이는 대상을 통해 안전과 풍요를 보장받으려는 마음이 계속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로의 지배에서 구원받았지만 다시 인간 왕의 강한 지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유롭게 하신 백성이 스스로 새로운 종의 멍에를 구한 것입니다. 죄인은 참된 자유보다 익숙한 노예 상태를 더 안전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말씀을 믿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므로 인간에게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눈에 보이는 왕은 당장 명령하고 군대를 모으며 결과를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믿음으로 기다리기보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권력을 선택하려 했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현실을 무시하거나 제도와 지도자를 불필요하게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지도자와 제도를 자신의 섭리적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다만 그 어떤 사람과 제도도 하나님을 대신하는 궁극적인 의지처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백성의 말을 듣되 왕의 제도를 엄히 경고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백성의 요구를 허락하시면서도 그들이 선택하려는 길의 결과를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허락은 곧 승인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고집하는 선택을 허용하시되 그 결과를 경험하게 하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욕망을 즉시 막지 않고 그 욕망이 가져오는 열매를 맛보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무관심이 아니라 사법적인 심판의 한 방식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선택은 서로 대립하지 않습니다. 백성은 자기 욕망을 따라 왕을 요구했고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잘못된 요구까지 자신의 구속 계획 안에서 사용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세우시고 그의 실패를 통하여 인간 왕권의 한계를 드러내십니다. 이후 다윗을 세우고 언약을 맺으시며 장차 오실 영원한 왕을 약속하십니다. 인간의 죄가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시키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선으로 바꾸시되 악을 행한 인간의 책임을 없애지는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의 잘못된 왕 요구가 메시아 왕국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왕과 기름 부음 받은 자에 관한 뜻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백성의 죄악 된 동기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작정과 명령을 구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역사를 주권적으로 작정하고 다스리시지만 인간에게 죄를 명령하거나 죄의 책임자가 되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자신의 욕망에 따라 죄를 선택하고 책임을 지며, 하나님께서는 그 선택까지도 거룩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십자가가 그 가장 분명한 예입니다. 유대 지도자들과 로마 권력은 악한 동기로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들의 죄는 실제적이며 책임도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악을 통하여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뜻을 이루셨습니다. 인간의 가장 악한 행동도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빼앗는 왕과 자신을 내어 주는 왕은 다릅니다(삼상 8:10-22)

사무엘은 왕을 요구하는 백성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모두 전했습니다. 그는 백성이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하지 않았습니다. 왕이 세워지면 강한 군대와 안정된 정치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장점만 설명하지 않고, 인간 왕권이 어떻게 백성의 자유와 재산을 빼앗을 수 있는지를 경고했습니다.

사무엘은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는 이러하니라”고 말합니다. ‘왕의 제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슈파트 함멜레크(מִשְׁפַּט הַמֶּלֶךְ)는 왕의 관행이나 권한, 통치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왕이 실제로 행사하게 될 강압적인 통치의 모습을 경고하는 의미가 강합니다.

왕은 먼저 백성의 아들들을 데려갈 것입니다. 그들을 자신의 병거와 말을 돌보는 사람으로 삼고 병거 앞에서 달리게 할 것입니다.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세우며 왕의 밭을 갈고 곡식을 거두게 하며 무기와 병거의 장비를 만들게 할 것입니다.

백성은 왕이 자신들을 위해 전쟁해 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왕의 군대는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백성의 아들들이 징집되고 노동과 생명을 제공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안전을 얻는 대가로 자녀들의 자유와 생명을 왕에게 내어 주게 됩니다.

왕은 딸들도 데려다가 향료를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로 삼을 것입니다. 왕궁의 화려함과 편안함을 유지하기 위해 백성의 딸들이 노동해야 합니다. 강력한 왕권은 백성의 아들과 딸을 국가와 왕실의 자원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의 경고에는 ‘가져가다’ 또는 ‘빼앗다’는 말이 반복됩니다. 백성은 왕이 자신들에게 무엇인가를 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왕이 무엇을 빼앗을지를 말씀하십니다. 죄의 욕망은 언제나 얻을 것만 보여 주고 치러야 할 대가는 숨깁니다.

왕은 백성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빼앗아 신하들에게 줄 것입니다. 곡식과 포도원의 소산에서 십일조를 거두어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입니다.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청년과 나귀를 끌어다가 자신의 일을 시킬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토지는 하나님께서 각 지파와 가문에 기업으로 주신 것이었습니다. 땅의 궁극적인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백성은 그 땅을 맡아 사용하는 청지기였습니다. 그런데 인간 왕은 가장 좋은 땅을 자신의 소유처럼 빼앗아 충성스러운 신하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권력은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권력과 자원을 요구합니다. 왕궁과 군대, 관리 조직을 유지하려면 백성의 노동과 재산이 필요합니다. 왕이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서 자신을 절제하지 않으면 백성을 섬기는 통치가 아니라 백성에게서 빼앗는 통치가 됩니다.

신명기 17장은 이스라엘 왕이 말을 많이 두지 말고 아내를 많이 두어 마음이 미혹되지 않게 하며 은과 금을 자신을 위해 많이 쌓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왕은 율법을 가까이 두고 평생 읽으며 마음이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않아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왕은 백성을 자기 소유로 삼는 절대군주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서 형제들을 섬기는 언약적 통치자였습니다. 왕도 율법 위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백성이 “다른 나라들처럼” 왕을 원했기 때문에 사무엘은 주변 민족의 왕들이 보이던 전제적 통치를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권력은 자신을 제한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백성을 보호한다고 말하지만 점차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여깁니다.

마침내 사무엘은 왕이 양 떼의 십일조를 가져가고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종으로 살던 민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손에서 구원하여 자유롭게 하셨는데, 이제 그들은 스스로 새로운 인간 주인의 종이 되려 합니다.

여기에는 날카로운 역설이 있습니다. 백성은 자신들을 구원할 왕을 요구했지만 그 왕이 다시 자신들을 종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을 종살이에서 해방하시지만 인간의 죄악 된 권력은 자유인을 다시 종으로 만듭니다.

모든 인간 권력이 본질적으로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은 국가의 권세가 질서를 유지하고 악을 억제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제도임을 가르칩니다. 신실한 통치자는 정의를 세우고 약한 사람을 보호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인간 권력도 절대화해서는 안 됩니다. 왕과 대통령, 국가와 정당, 종교 지도자도 하나님의 말씀 아래 있습니다. 특정 지도자를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처럼 숭배하거나 정치적 승리를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국가 권력을 무조건 적대해서도 안 되지만 맹목적으로 추종해서도 안 됩니다. 정의를 행할 때 존중하고 협력하되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를 때에는 진리를 말해야 합니다. 교회의 충성은 어떤 정치 권력보다 예수 그리스도께 먼저 속합니다.

사무엘은 왕으로 인해 고통받는 날에 백성이 자신들이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부르짖어도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죄인의 기도를 영원히 듣지 않으신다는 절대적인 선언이 아닙니다.

문맥상 백성이 충분한 경고를 받고도 고집하여 선택한 왕정의 고통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때로는 인간이 선택한 결과를 즉시 제거하지 않으시고 그 결과를 통하여 교훈을 얻게 하십니다.

죄를 선택한 뒤 그 결과만 없애 달라고 구하는 것은 참된 회개가 아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즉시 제거하시기보다 그 고통을 통해 잘못된 욕망을 드러내고 마음을 돌이키게 하실 수 있습니다.

백성은 사무엘의 경고를 듣고도 그의 말을 거절했습니다.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결과를 들었지만 생각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욕망은 말씀보다 강했습니다.

말씀을 듣는 목적은 정보를 더 얻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에 따라 생각과 선택을 바꾸는 데 있습니다. 이미 결론을 정해 놓고 하나님의 허락만 얻으려 한다면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백성은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그들이 왕에게 기대한 세 가지 기능을 보여 줍니다. 왕이 재판하고, 백성 앞에 나가며, 전쟁을 수행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 일들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리셨고, 광야에서 백성보다 앞서 가셨으며,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큰 우레를 발하여 싸우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하시던 일을 눈에 보이는 인간 왕에게 맡기려 했습니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신실하심보다 눈에 보이는 사람의 능력을 더 확실하게 느낍니다. 통장에 쌓인 돈과 강한 조직, 영향력 있는 사람을 하나님의 약속보다 더 의지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변하고 인간의 권력은 유한합니다.

사무엘은 백성의 말을 듣고 여호와께 아뢰었습니다. 그는 중요한 결정을 자기 판단으로 처리하지 않고 다시 하나님께 가져갔습니다. 사무엘상 8장에서 사무엘은 백성의 요구를 처음 들었을 때도 기도했고, 모든 경고를 전한 뒤에도 하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기도하는 지도자는 자신의 감정과 권위를 하나님의 판단 아래 둡니다. 백성의 요구를 무조건 따라가지도 않고 자신의 뜻을 강제로 관철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뜻을 공동체에 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백성의 요구가 자신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행위임을 분명히 밝히셨지만 그 요구를 허락하셨습니다. 백성은 자신들이 원하는 왕정의 가능성과 위험을 실제 역사 속에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잘못된 선택까지도 자신의 구속 계획에 사용하십니다. 사울의 실패를 통해 외모와 군사력만으로 참된 왕이 될 수 없음을 보여 주시고, 다윗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의 모습을 제시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도 완전한 왕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왕이었지만 죄를 범하고 가정과 나라에 큰 상처를 남깁니다. 사무엘서의 왕정 이야기는 인간 왕에게 궁극적인 소망을 둘 수 없음을 보여 주면서 완전한 왕을 기다리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이 진정으로 필요로 했던 왕이십니다. 세상의 왕들은 백성의 아들과 딸, 재산과 노동을 가져가지만 예수님은 백성에게서 빼앗기 위해 오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양들을 위해 내어 주셨습니다.

세상의 왕은 백성을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지만 예수님은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세상의 왕은 군대를 앞세워 자신의 왕국을 확장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원수를 사랑하며 하나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왕권이 약하거나 선택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참된 왕이며 우리의 전적인 충성과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것은 폭군의 종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와 사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의와 생명의 길을 걷는 참된 자유입니다. 세상의 왕은 자유인을 종으로 만들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의 종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십니다.

사무엘은 백성에게 각자 성읍으로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아직 구체적인 왕은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다음 장부터 하나님께서 사울을 선택하고 세우시는 과정이 시작됩니다. 백성의 요구는 허락되었지만 그들이 원하는 왕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역사 속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무엘상 8장은 정당한 필요도 잘못된 욕망과 결합하면 우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은 부패한 재판을 바로잡고 안정된 지도력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 다른 나라처럼 보이는 왕을 의지하려 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사람과 제도, 돈과 권력을 더 확실한 구원자로 여길 수 있습니다. 좋은 지도자와 제도는 필요하지만 그것들이 인간의 죄를 제거하거나 궁극적인 안전을 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국가도, 교회 지도자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구하는가뿐 아니라 왜 구하는지를 살피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을 섬기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불안을 덮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우상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말씀의 경고를 들으면서도 이미 정한 욕망을 고집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백성의 것을 빼앗는 왕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신 왕이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와 부활로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자기 백성을 참된 자유로 인도하십니다. 보이는 권력을 절대화하지 말고 참된 왕이신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며, 그분의 말씀과 통치 아래 기쁨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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