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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10장 주해와 강해

기름부음 받은 왕은 말씀 아래 서야 합니다

사무엘상 10장은 사울이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고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공개적인 인정을 받는 과정을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징조를 통해 사울의 부르심을 확증하시고 성령으로 능력을 주시며 백성 앞에서 그를 선택하십니다. 그러나 사울은 왕이 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 종이었습니다. 이 본문을 통해 직분과 은사는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받은 은혜에 지속적인 순종으로 응답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르신 사람에게 말씀과 징조를 주십니다(삼상 10:1-8)

사무엘상 9장의 마지막에서 사무엘은 사울에게 종을 먼저 보내고 자신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 목적은 사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울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자신의 뜻대로 백성을 다스리는 절대군주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을 섬겨야 하는 언약적 통치자였습니다. 왕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이며, 왕의 권위보다 말씀의 권위가 높습니다.

사무엘은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셨느냐”라고 말했습니다.

기름을 붓는 행위는 어떤 사람이나 물건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특별히 구별하는 의식이었습니다. 구약에서는 제사장과 왕이 직분을 맡을 때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기름부음 자체가 사람에게 마법적인 능력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하고 직무를 맡기셨음을 나타내는 거룩한 표지였습니다.

‘기름을 붓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샤흐(מָשַׁח)에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뜻하는 마시아흐(מָשִׁיחַ), 곧 메시아라는 말이 나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첫 번째 인물이 됩니다.

그러나 사울이 메시아라는 명칭과 연결된다고 해서 궁극적인 구원자라는 뜻은 아닙니다. 구약의 왕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나타내는 기름부음 받은 종이었지만 모두 죄와 한계를 가진 인간이었습니다. 그들의 불완전한 통치는 완전한 기름부음 받은 왕을 기다리게 합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입을 맞춘 것은 개인적인 친밀함만이 아니라 존중과 충성, 직무의 인정을 나타내는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은 자신이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다는 이유로 사울을 경쟁자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임을 인정하고 왕의 사명을 받아들이도록 격려했습니다.

영적 지도자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데 집착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다음 사람을 축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직분을 자신의 소유로 생각하면 후계자를 경쟁자로 여기지만 하나님의 일로 생각하면 기쁨으로 길을 열어 줄 수 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을 여호와의 “기업의 지도자”라고 불렀습니다. ‘지도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기드(נָגִיד)는 앞에 선 사람, 통치자 또는 지도자를 뜻합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절대적인 소유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맡아 돌보는 지도자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사울의 기업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업입니다. 왕은 백성을 자기 목적을 위해 이용할 권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소유인 백성을 말씀과 공의로 보호하도록 위임받은 청지기입니다.

교회도 목회자나 장로의 소유가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사신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사람들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묶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먹이고 보호하는 종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앞으로 일어날 세 가지 징조를 알려 주었습니다. 이 징조들은 사울이 받은 말씀이 실제로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하나님께서 그를 왕으로 부르셨음을 확증하는 역할을 합니다.

첫 번째 징조는 베냐민 경계의 셀사에 있는 라헬의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사울에게 찾으러 갔던 암나귀들이 이미 발견되었고, 그의 아버지가 암나귀에 대한 염려보다 아들을 걱정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할 것입니다.

사울을 길로 나오게 했던 암나귀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습니다. 사울은 암나귀를 찾으러 떠났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과정에서 사무엘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이제 그가 처음 맡았던 일에 대한 염려를 내려놓고 새로운 사명을 향해 나아가도록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왕으로 부르시면서 그의 가정 문제를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암나귀가 발견되었다는 사실과 아버지가 그를 걱정한다는 소식을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역사만 다스리는 분이 아니라 한 아버지의 염려와 한 가정의 사소해 보이는 문제도 돌보십니다.

라헬의 묘실은 베냐민 지파의 정체성과 연결되는 장소였습니다. 라헬은 베냐민을 낳다가 죽었고 아이의 이름을 베노니, 곧 ‘내 슬픔의 아들’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의 이름을 베냐민, 곧 ‘오른손의 아들’로 바꾸었습니다.

사울이 라헬의 묘실 곁을 지나게 된 것은 베냐민 지파의 역사와 자신의 뿌리를 떠올리게 했을 수 있습니다. 다만 본문이 사울의 내면을 직접 설명하지 않으므로 그가 그 장소에서 무엇을 생각했는지는 단정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징조는 다볼 상수리나무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을 뵈러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염소 새끼 세 마리를 이끌고, 다른 사람은 떡 세 덩이를 가지고, 또 다른 사람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올 것입니다.

그들은 사울에게 문안하고 떡 두 덩이를 줄 것입니다. 사울은 그 떡을 받을 것입니다. 사무엘이 말한 사람들의 수와 소유물, 그들이 건넬 떡의 수까지 정확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는 우연한 추측으로 보기 어려운 구체적인 징조였습니다.

벧엘은 야곱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장소이며 이스라엘의 신앙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곳입니다. 세 사람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제물을 가지고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사울에게 떡을 나누어 주는 것은 왕으로 부름받은 그에게 필요한 양식을 공급하는 하나님의 섭리로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마련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길에서 필요한 것을 준비하고 공급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하나님의 공급이 따릅니다. 그러나 이 원리를 모든 개인적인 욕망이 자동으로 충족된다는 약속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이루는 데 필요한 것을 자신의 지혜에 따라 주십니다.

세 번째 징조는 사울이 하나님의 산에 이르렀을 때 일어날 것입니다. 그곳에는 블레셋 사람들의 영문 또는 주둔지가 있었습니다. 해당 히브리어 표현은 블레셋의 수비대나 관리가 주둔한 곳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구체적인 형태에는 견해가 나뉩니다.

이스라엘 왕으로 부름받은 사울이 첫 번째로 마주하는 현실 가운데 하나는 이스라엘 땅에 자리한 블레셋의 세력이었습니다. 사울은 바로 그 블레셋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지도자로 부름받았습니다. 왕의 사명은 개인적인 명예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압제받는 백성을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성읍으로 들어갈 때 산당에서 내려오는 선지자의 무리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들 앞에는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이 있으며 그들은 예언하고 있을 것입니다. 음악과 함께 선지자적 찬양이나 황홀한 예언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선지자의 무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인 사역을 함께 수행하거나 훈련받던 공동체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후대의 정식 선지자 학교와 정확히 같은 조직이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본문은 그들이 함께 음악을 연주하며 예언했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그때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 크게 임할 것입니다. ‘크게 임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찰라흐(צָלַח)는 어떤 사람 위에 강력하게 임하여 특정한 사명을 수행하도록 능력을 주는 것을 나타냅니다. 사사기에서는 하나님의 영이 사사들에게 임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체격이나 가문의 힘만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블레셋은 철기 기술과 조직적인 군사력을 가진 강한 민족이었습니다. 사울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적인 능력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영의 도우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인간의 재능과 조건만으로 수행할 수 없습니다. 학식과 경험, 지도력과 언변은 유익할 수 있지만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역사하지 않으시면 사람의 영혼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맡은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지 말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영이 임하면 사울은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 표현은 사울의 외모나 인격 전체가 즉시 완전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왕의 직무를 감당하도록 하나님께서 새로운 능력과 상태를 주신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는 표현을 신약에서 말하는 중생과 정확히 동일한 것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구약에서 성령의 임재는 특정한 직무와 사명을 수행하도록 주시는 능력과 관련될 때가 많습니다. 사울이 성령의 능력을 받았다는 사실이 그의 개인적인 구원과 끝까지의 순종을 자동으로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왕의 직무에 적합하도록 변화시키고 필요한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 은혜에 지속적인 믿음과 순종으로 응답해야 했습니다. 직무를 위한 성령의 은사와 거룩한 인격의 성숙은 구분되지만 결코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에도 뛰어난 은사와 신앙적인 인격을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설교를 잘하고 사람을 이끌며 특별한 능력을 보인다고 해서 그 사람의 모든 삶이 자동으로 성숙한 것은 아닙니다. 은사가 크면 그 은사를 말씀에 따라 사용해야 할 책임도 커집니다.

사무엘은 이 징조들이 사울에게 임하면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하시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사울이 자기 욕망대로 무엇이든 행해도 된다는 허락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므로 주어진 상황에서 왕의 사명에 맞게 담대히 행동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순종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므로 사울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며 책임 있게 행동해야 했습니다. 은혜는 사람을 수동적으로 만들지 않고 믿음의 행동으로 이끕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자신보다 먼저 길갈로 내려가라고 명령했습니다. 자신도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기 위해 내려갈 것이며, 사울은 사무엘이 도착하여 해야 할 일을 알려 줄 때까지 칠 일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 명령은 사울의 왕권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어도 제사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다룰 수 없었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을 기다리고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는 말씀에 순종해야 했습니다.

길갈에서 칠 일을 기다리라는 명령은 이후 사무엘상 13장에서 결정적인 시험이 됩니다. 사울은 블레셋의 위협과 백성이 흩어지는 상황을 보고 사무엘을 끝까지 기다리지 못한 채 자신이 번제를 드립니다. 사무엘상 10장에서 이미 분명한 명령을 받았으므로 뒤의 불순종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사명을 맡기시기 전에 기다림과 순종을 가르치십니다. 사람은 능력을 발휘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을 더 어려워합니다. 눈앞의 상황이 급해 보이면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판단을 앞세우기 쉽습니다.

믿음은 행동할 때를 아는 것뿐 아니라 기다릴 때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담대히 움직이고 기다리라고 하실 때는 조급함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사명의 열심도 말씀의 경계를 넘어가면 불순종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았지만 지속적인 순종이 필요했습니다(삼상 10:9-16)

사울이 사무엘을 떠나려고 몸을 돌이킬 때 하나님께서 새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말한 모든 징조가 그날 다 이루어졌습니다. 사울의 부르심은 그의 상상이나 사무엘의 개인적인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구체적인 사건으로 확증하셨습니다.

‘새 마음’이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다른 마음”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왕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사울의 내면과 능력에 변화를 주셨습니다. 이전에는 평범한 베냐민 사람으로 아버지의 암나귀를 찾던 사울이 이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준비되기 시작했습니다.

사울이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바꾼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새로운 마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데 필요한 변화도 하나님의 은혜에서 시작됩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훈련만으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새 마음’을 신약에서 말하는 구원의 중생과 완전히 같은 개념으로 단정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이후의 사울은 반복적으로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영이 떠나는 비극을 경험합니다. 여기서는 왕의 직무를 위한 특별한 변화와 능력 부여가 중심입니다.

신약의 중생은 성령께서 죄로 죽은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하시고 믿음과 회개로 이끄시는 구원 사건입니다. 반면 사울에게 주어진 다른 마음과 성령의 임재는 일차적으로 왕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주어진 직무적 은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은사와 직분을 주셨다고 그 사람의 모든 삶을 자동으로 승인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직분을 맡은 사람도 날마다 말씀 앞에서 자신을 살피고 회개해야 합니다. 과거에 받은 은혜와 체험이 현재의 불순종을 가려 주지 못합니다.

사울과 종이 하나님의 산에 이를 때 선지자의 무리가 그들을 영접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자 그도 그들 가운데서 예언했습니다. 사무엘이 말한 세 번째 징조가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울을 이전부터 알던 사람들은 그가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하는 모습을 보고 서로 놀랐습니다. “기스의 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사울은 왕이 될 만한 외모와 체격을 갖추고 있었지만 선지자적인 인물로 알려진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그가 선지자의 무리 가운데서 예언하자 사람들은 예상하지 못한 변화에 놀랐습니다.

그곳의 한 사람이 “그들의 아버지가 누구냐”라고 물었습니다. 이 표현의 정확한 의도에는 견해가 나뉠 수 있습니다. 선지자적 은사는 인간적인 혈통이나 가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는 말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선지자 무리의 출신을 따지는 것보다 그들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라는 말은 이후 이스라엘의 속담이 되었습니다. 평소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이 특별한 행동을 할 때 사용되는 표현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울에게 일어난 변화가 사람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사울이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했다고 해서 계속 선지자의 직무를 수행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일시적으로 예언 활동에 참여한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지속해서 받아 전하는 정식 선지자로 세워지는 것은 구분해야 합니다.

사울에게 성령이 임한 사건은 하나님께서 그의 왕권을 위해 실제적인 능력을 주셨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르시기만 하고 아무 도움도 주지 않는 분이 아닙니다. 맡기신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필요한 은혜와 은사를 주십니다.

그럼에도 은사를 받았다는 사실이 끝까지의 충성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사울의 생애는 강력한 영적 체험과 직분의 은혜가 말씀에 대한 지속적인 순종을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한때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고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주었어도 이후에 교만과 불순종으로 무너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특별한 체험을 신앙의 최종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눈물을 흘리고 강한 감동을 받으며 놀라운 은사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그 체험 이후 하나님의 말씀을 꾸준히 따르는 삶으로 확인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열매로 그들을 알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은사가 얼마나 화려한가보다 그 사람의 삶에 사랑과 거룩함, 겸손과 순종의 열매가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참된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을 섬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사용되어야 합니다.

사울은 예언하기를 마친 후 산당으로 갔습니다. 그의 숙부가 사울과 종을 만나 어디에 갔었는지 물었습니다. 사울은 암나귀들을 찾다가 찾지 못해 사무엘에게 갔다고 대답했습니다.

숙부는 사무엘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려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사울은 암나귀들이 이미 발견되었다는 말을 전했지만, 사무엘이 왕의 일에 관하여 말한 것은 알리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왕에 관한 일을 숨긴 이유를 본문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겸손하여 말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으며, 두려움이나 당혹감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의 동기를 확정하여 그의 성품을 평가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사울이 왕권을 자랑하며 사람들에게 떠벌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공개적으로 드러나기 전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비밀을 간직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 받은 일을 즉시 모든 사람에게 말하기보다 때를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침묵 자체가 언제나 겸손은 아닙니다. 두려움이나 책임 회피로 말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침묵과 말 모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해야 할 때 침묵하는 것도 잘못이고, 기다려야 할 때 앞서 말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사울은 개인적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여러 징조를 경험했지만 아직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공개적인 인정을 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적인 부르심과 공동체의 공적인 확인을 함께 이루실 것입니다.

개인적인 확신만으로 교회의 직분을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특별한 사명을 주셨다고 느끼는 것만으로 공동체 위에 권위를 행사할 수 없습니다. 말씀에 따른 자격과 교회의 분별, 공적인 부르심이 함께 확인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개인적으로 말씀하시고 기름을 부으신 뒤,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도 제비를 통해 그를 선택하실 것입니다. 개인의 소명과 공동체의 인정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 왕을 세우셨지만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삼상 10:17-27)

사무엘은 백성을 미스바로 불러 여호와 앞에 모았습니다. 미스바는 이스라엘이 우상을 버리고 죄를 고백했던 장소입니다. 블레셋의 공격 앞에서 사무엘이 중보하고 하나님께서 큰 우레로 승리를 주셨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온 장소에서 이제 왕을 세우는 중요한 일이 이루어집니다. 왕의 선택은 단순한 정치 행사가 아니라 여호와 앞에서 진행되는 언약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사무엘은 왕을 뽑기 전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을 먼저 선포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시고 애굽 사람의 손과 그들을 압제하던 모든 나라의 손에서 건져 내셨다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과 구원자는 이미 하나님이셨습니다. 바로의 권세를 꺾고 노예였던 백성을 해방하신 분은 인간 왕이 아니라 여호와였습니다. 사사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보내 대적의 손에서 건지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모든 재난과 고통에서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버리고 왕을 세워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사무엘은 왕을 세우는 자리에서도 백성의 요구에 담긴 죄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의 요구를 허락하셨지만 그것이 자신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행위였다는 평가를 철회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허락이 인간의 동기를 자동으로 의롭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원하는 일이 이루어졌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모두 하나님의 기쁨이었고 자신의 동기도 옳았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불완전한 선택을 허락하시고 그것을 통해 교훈을 얻게 하실 수 있습니다.

사무엘은 모든 지파를 여호와 앞에 나아오게 했습니다. 제비를 뽑자 베냐민 지파가 뽑혔고, 베냐민 지파의 가족들을 나아오게 하자 마드리의 가족이 뽑혔습니다. 마침내 기스의 아들 사울이 뽑혔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제비뽑기는 사람의 의도를 배제하고 하나님의 뜻을 묻는 방법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제비의 결과를 우연으로만 보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사울을 개인적으로 선택하셨지만 제비를 통해 그 선택을 백성 앞에서 공개적으로 확증하셨습니다.

사울이 뽑혔지만 사람들이 그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짐 보따리들 사이에 숨어 있었습니다. 사울이 숨은 이유도 본문은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겸손과 두려움, 부담과 망설임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가 짐 사이에 숨은 일을 지나치게 아름다운 겸손으로 이상화할 필요도 없고, 이 장면만으로 비겁한 사람이라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왕이라는 엄청난 책임 앞에서 두려움과 부담을 느꼈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호와께 그 사람이 그곳에 왔는지를 물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사울이 짐 보따리들 사이에 숨어 있다고 알려 주셨습니다. 사울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숨길 수 있었지만 하나님께 숨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위치뿐 아니라 마음과 두려움도 아십니다. 사명을 피하기 위해 숨는다고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모세는 말이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었고 요나는 다시스로 도망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부르신 사람을 찾아내셨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일을 하나님의 특별한 소명이라고 여기고 무조건 나서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기록된 말씀에 어긋나지 않아야 하며 교회 공동체의 분별과 확인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달려가 사울을 데려왔습니다. 그가 백성 가운데 서자 다른 사람보다 어깨 위만큼 컸습니다. 사무엘은 “너희는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보느냐 모든 백성 중에 짝할 이가 없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사울은 백성의 눈에 왕다운 모습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큰 키와 준수한 외모는 군사 지도자를 원하는 백성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을 것입니다. 백성은 “왕이여 만세하소서”라고 외쳤습니다.

개역개정의 “왕이여 만세하소서”는 문자적으로 왕이 오래 살기를 바란다는 환호입니다. 백성은 자신들이 바라던 왕을 보며 기뻐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강한 지도자를 갖게 되었다는 기대가 그들 가운데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큰 키가 영적인 충성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사울은 사람들의 기대에 어울리는 외모를 가졌지만 왕권의 성공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에 달려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외적 조건은 유익할 수 있지만 중심의 신실함을 대신하지 못합니다.

사무엘은 왕의 제도를 백성에게 말하고 책에 기록하여 여호와 앞에 두었습니다. 사무엘상 8장에서 설명한 왕의 제도는 인간 왕권이 백성에게서 무엇을 빼앗을 수 있는지를 경고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여기서는 왕과 백성이 지켜야 할 통치의 원리와 권리 및 책임을 기록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왕의 권한은 무제한적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과 언약의 질서 안에서 행사되어야 했습니다. 사울은 왕이 되었지만 율법 위에 있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왕은 여호와이시며 인간 왕은 그분의 말씀 아래 놓인 종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왕의 제도를 책에 기록하여 여호와 앞에 두었다는 것은 왕권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규정되고 평가받아야 함을 보여 줍니다. 왕의 행동이 옳은지는 왕 자신의 뜻이나 대중의 인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오늘날 국가의 권력과 교회의 지도력도 절대적일 수 없습니다. 모든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위임받은 것이며 정의와 선을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지도자가 자신의 권력을 사적인 욕망과 지배를 위해 사용한다면 하나님께 책임을 져야 합니다.

사무엘은 모든 백성을 각자의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사울도 기브아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왕으로 공개적인 선출을 받았지만 당장 왕궁을 세우거나 군대를 조직하지 않았습니다. 왕정의 실제적인 출범은 이후의 사건을 통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감동받은 유력한 사람들은 사울과 함께 갔습니다. ‘마음을 감동하셨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만지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만 준비하신 것이 아니라 그를 도울 사람들의 마음도 움직이셨습니다.

지도자는 혼자 모든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역자를 붙여 주시고 공동체의 마음을 움직여 사명을 함께 감당하게 하십니다. 좋은 동역자는 지도자의 개인적인 야망을 돕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함께 이루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떤 불량배들은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고 말하며 사울을 멸시하고 예물을 바치지 않았습니다. ‘불량배’에 해당하는 표현은 베네 벨리야알(בְּנֵי בְלִיַּעַל), 곧 벨리야알의 아들들이라는 말입니다. 무가치하고 악하며 공동체의 질서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선택하셨지만 모든 사람이 그 선택을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드러나도 사람의 교만과 불신은 그것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참된 권위는 언제나 모든 사람의 즉각적인 환영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사울이 자신들을 구원할 수 있겠느냐고 조롱했습니다. 사울의 왕권과 구원 능력은 아직 역사 속에서 증명되지 않았습니다. 다음 장에서 암몬 사람 나하스가 야베스 길르앗을 위협할 때 사울은 성령의 능력으로 백성을 구원하며 왕으로서의 지도력을 보여 줄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을 멸시하는 말을 듣고도 잠잠했습니다. 개역개정은 “그는 잠잠하였더라”고 번역합니다. 히브리어 표현에는 듣지 못한 사람처럼 행동했다는 의미가 담겨 있을 수 있습니다. 즉각 분노하거나 왕의 권력을 이용해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의 이 침묵은 왕정 초기의 절제된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는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반대자들을 처벌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정당성을 말로 강요하기보다 이후의 행동으로 증명할 기회를 기다렸습니다.

지도자는 모든 비판과 모욕에 즉시 반응할 필요가 없습니다. 잘못된 비난은 진실한 삶과 충실한 사역으로 답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명예를 지키는 데 모든 힘을 사용하면 맡겨진 사명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침묵이 언제나 정답은 아닙니다. 약한 사람을 보호하고 진리를 지켜야 할 때에는 분명하게 말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분노와 자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말하고 침묵하는 것입니다.

사울의 기름부음과 공개적인 선출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장의 마지막에는 그를 따르는 사람과 멸시하는 사람이 함께 나타납니다. 왕정의 시작부터 갈등과 긴장이 존재합니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징조와 성령의 능력, 백성의 인정과 동역자들을 받았습니다. 왕의 사명을 감당하는 데 필요한 많은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이후 그의 실패를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돌릴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받은 은혜와 말씀에 그가 어떻게 응답하느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왕권을 주셨지만 왕권의 성공을 자동으로 보장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길갈에서 기다리라는 명령을 포함하여 분명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사울이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것이지만 자기 판단을 말씀보다 앞세우면 왕권은 흔들릴 것입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할 기름부음 받은 왕이었지만 궁극적인 메시아는 아니었습니다. 그의 제한된 왕권과 이후의 실패는 더 완전한 기름부음 받은 왕을 기다리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참된 메시아이십니다. 사울에게 성령이 임하여 일시적인 왕의 능력을 주셨다면 성령은 그리스도 위에 충만하게 머무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모든 말씀에 완전히 순종하셨고 죽기까지 충성하셨습니다.

사울은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큰 외모로 주목받았지만 예수님은 외적인 위엄으로 사람을 압도하여 왕이 되지 않으셨습니다. 종의 형체를 입고 낮아지셨으며 십자가를 통하여 왕권을 드러내셨습니다.

사울은 자신을 멸시하는 사람들 앞에서 잠시 침묵했지만 예수님은 모욕과 거짓 고발을 받으면서도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원수를 구원하고 죄인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셨습니다.

사울은 암몬과 블레셋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일시적으로 구원할 왕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에서 자기 백성을 영원히 구원하십니다. 모든 인간 지도자는 실패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의 통치는 의롭고 영원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무엘상 10장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부르시고 필요한 징조와 능력, 동역자까지 주셨음을 보여 줍니다. 사울의 왕권은 그의 외모나 야망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기름을 부으시며 성령으로 능력을 주신 은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은혜와 은사는 지속적인 순종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사울은 큰 체험을 하고 새 마음을 받았지만 길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직분이 높고 은사가 뛰어나도 말씀보다 자신의 판단을 앞세우면 무너질 수 있습니다.

우리도 과거의 신앙 체험과 직분을 의지하지 말고 오늘 주시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은사를 자랑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몸을 섬기는 데 사용하십시오. 높은 자리를 자신의 소유로 여기지 말고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라고 맡기신 책임으로 받아들이십시오.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은 불완전한 인간 왕에게 있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아버지의 뜻에 끝까지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참된 왕이신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말씀 아래에서 기다리고 순종하며, 받은 은혜에 충성으로 응답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무엘상 9장 주해와 강해

잃어버린 암나귀를 통해 왕을 찾으시는 하나님

사무엘상 9장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게 되는 과정을 기록합니다. 사울은 왕이 되기 위해 길을 떠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는 평범한 사건과 작은 만남을 연결하여 사울을 사무엘에게 이끄셨습니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상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며, 인간의 불완전한 요구 속에서도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고 구원의 도구를 준비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기 원합니다.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는 길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었습니다(삼상 9:1-10)

사무엘상 8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나라들처럼 자신들을 다스리고 전쟁을 수행할 왕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에게 공정한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는 정당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늙었고 그의 아들들은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으며 재판을 굽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과 때를 기다리지 않고 눈에 보이는 왕과 군사력을 의지하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요구가 사무엘을 거절한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행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백성의 요구를 허락하시고 왕을 세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사무엘상 9장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될 사람의 가문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베냐민 지파에 기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계보는 아비엘과 스롤과 베고랏과 아비아로 이어집니다. 성경은 사울의 출현이 막연한 전설이 아니라 구체적인 지파와 가문 안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임을 보여 줍니다.

기스는 “유력한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히브리어 깁보르 하일(גִּבּוֹר חָיִל)은 용맹한 전사, 능력 있는 사람 또는 재산과 사회적 영향력을 갖춘 사람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문맥상 기스가 베냐민 지파 안에서 상당한 지위와 재산을 가진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기스에게 사울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사울’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샤울(שָׁאוּל)이며 ‘구하여 얻은 자’ 또는 ‘요청된 자’라는 의미와 연결됩니다. 이 이름은 왕을 요청한 이스라엘의 상황과 묘한 울림을 이룹니다. 백성이 구한 왕이 이제 역사 속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준수한 소년이었습니다. 개역개정의 ‘소년’이라는 표현은 반드시 어린 나이를 뜻하지 않고 젊은 남자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사울은 이미 아버지의 중요한 일을 맡아 먼 지역을 다닐 수 있는 성인이었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울보다 더 준수한 사람이 없었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다고 말합니다. 사울은 외모와 체격에서 사람들의 눈을 끌 만한 인물이었습니다. 다른 나라처럼 강한 왕을 원한 이스라엘 백성의 기대에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습니다.

사울의 뛰어난 외모가 곧 잘못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건강한 체격과 준수한 용모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인간이 외적인 조건만으로 지도자의 내면과 신앙을 판단하는 데 있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키와 용모가 먼저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십니다.

사무엘상은 이후 사울과 다윗을 대조하면서 외모와 중심의 문제를 더욱 분명히 드러냅니다. 사무엘도 이새의 아들 엘리압의 키와 외모를 보고 그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왕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여호와는 중심을 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무엘상 9장은 아직 사울의 실패를 서둘러 보여 주지 않습니다. 그가 이 시점부터 교만하고 악한 사람이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사울의 장점과 순종, 겸손한 반응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우리는 이후의 실패를 알고 있다는 이유로 현재 본문이 말하는 모습을 왜곡해서는 안 됩니다.

어느 날 사울의 아버지 기스가 암나귀들을 잃어버렸습니다. 암나귀는 농사와 운송에 사용되는 중요한 재산이었습니다. 여러 마리의 암나귀를 잃어버린 것은 가정 경제에 적지 않은 손실이었을 것입니다. 기스는 아들 사울에게 종 한 명을 데리고 가서 암나귀들을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을 세우는 과정이 왕궁이나 전쟁터가 아니라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사울은 왕권을 얻기 위해 정치적 계획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여 집안의 재산을 찾으러 길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종종 매우 평범한 일 속에서 움직입니다. 우리는 기적적이고 특별한 사건에서만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일상의 책임과 우연처럼 보이는 만남을 사용하여 자신의 계획을 이루십니다. 잃어버린 암나귀도 하나님의 통치 밖에 있지 않았습니다.

개혁주의 신앙은 하나님의 섭리가 크고 중요한 사건에만 미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작은 피조물과 일상의 움직임까지 자신의 지혜롭고 거룩한 뜻에 따라 보존하고 다스리십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 아버지의 허락 없이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암나귀가 사라진 일 자체가 선하거나 편안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기스에게는 경제적 손실이었고 사울에게는 여러 지역을 헤매야 하는 수고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불편하고 예상하지 못한 일을 사용하여 사울을 사무엘에게 인도하셨습니다.

우리는 계획이 어그러지거나 잃어버리는 일이 생기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막힌 길과 지연, 손실과 수고도 선하신 목적을 위해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현재의 불편함만 보고 하나님의 섭리 전체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사울과 종은 에브라임 산지와 살리사 땅, 사알림 땅과 베냐민 사람의 땅을 두루 다녔습니다. 정확한 지명들의 위치에는 논의가 있지만, 그들이 상당한 지역을 부지런히 찾아다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사울은 아버지의 명령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러 지역을 다녔지만 암나귀를 찾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사무엘에게 인도하시면서 그 목적을 처음부터 알려 주지 않으셨습니다. 사울에게 보인 것은 계속되는 실패뿐이었습니다. 한 지역에서 찾지 못하면 다른 지역으로 가고, 그곳에서도 찾지 못하면 다시 이동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당사자에게 즉시 설명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일이 끝난 뒤에야 왜 그 길을 지나야 했는지 깨닫기도 합니다. 믿음은 모든 이유를 미리 아는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현재 맡겨진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사울과 종이 숩 땅에 이르렀을 때 사울은 돌아가자고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암나귀에 대한 걱정보다 자신들을 염려할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잃어버린 재산만 생각하지 않고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렸습니다.

이 장면에서 사울은 무책임하거나 이기적인 사람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성실하게 암나귀를 찾았고, 시간이 오래 걸리자 아버지가 자신들을 걱정할 것을 염려했습니다. 사울의 초기 모습에는 부모에 대한 순종과 책임감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함께 있던 종이 새로운 제안을 합니다. 가까운 성읍에 존경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있으며 그가 말하는 것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알려 줍니다. 그에게 가면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알려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사울보다 종이 그 지역의 하나님의 사람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본문은 사울이 사무엘을 전혀 몰랐는지, 단지 그 성읍에 사는 선견자가 사무엘인 줄 몰랐는지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울에게 신앙적 관심이 전혀 없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이 장면에서는 사회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던 종이 사울에게 올바른 방향을 제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인보다 종을 먼저 깨닫게 하여 길을 안내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지위와 신분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거나 지위가 낮은 사람의 말을 가볍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상하지 못한 사람을 통해 필요한 조언을 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말했는가만이 아니라 그 말이 진실하고 지혜로운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갈 때 드릴 예물이 없다고 염려했습니다. 당시 선지자나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갈 때 감사와 존중의 표시로 작은 선물을 준비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돈을 주고 예언을 사는 행위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사울은 그릇에 있던 음식도 다 떨어졌으므로 무엇을 드려야 할지 걱정했습니다. 그러자 종은 자신에게 은 한 세겔의 사분의 일이 있으니 그것을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리자고 말했습니다. 종은 돈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돈을 사울을 돕는 일에 기꺼이 사용하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이 가진 작은 은 조각도 섭리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에는 눈에 띄는 큰 자원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준비한 작은 물질과 사려 깊은 제안이 역사의 방향을 바꾸는 일에 사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진 것이 적어서 하나님의 일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적은 물질과 작은 친절, 평범한 조언도 선한 목적에 사용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크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시는가입니다.

본문은 옛날 이스라엘에서 하나님께 물으러 가는 사람이 “선견자에게로 가자”고 말했다고 설명합니다. 지금 선지자라고 부르는 사람을 옛날에는 선견자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선견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로에(רֹאֶה)는 ‘보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것을 보고 백성에게 전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선지자’에 해당하는 나비(נָבִי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선견자와 선지자는 완전히 다른 직분이라기보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전달하는 사역의 서로 다른 측면을 보여 줍니다. 선견자는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것을 보고,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전합니다.

사울은 종의 제안을 좋게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 성읍으로 향했습니다. 그는 종의 조언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왕으로 세워지는 길에는 아버지의 명령에 대한 순종과 종의 지혜로운 제안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우리의 책임 있는 행동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사울은 암나귀를 찾으러 실제로 걸었고, 여러 지역을 수고롭게 다녔으며, 종의 조언을 듣고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교리가 아니라 맡겨진 일을 성실히 감당하게 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보다 먼저 사무엘에게 모든 일을 알리셨습니다(삼상 9:11-17)

사울과 종은 성읍으로 올라가는 비탈길에서 물을 길으러 나오는 소녀들을 만났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성읍 밖의 샘이나 우물로 물을 길으러 가는 일은 주로 여성들이 맡았습니다. 사울은 그들에게 선견자가 그곳에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소녀들은 선견자가 성읍에 있으며 마침 오늘 그곳에 왔다고 대답했습니다. 백성이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기 때문에 사무엘이 성읍에 온 것입니다. 사울이 도착한 날과 사무엘이 제사를 위해 그곳에 온 날이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그들은 사울에게 서둘러 들어가면 사무엘을 만날 수 있다고 알려 줍니다. 사무엘이 산당으로 식사하러 올라가기 전에 성읍 안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백성은 사무엘이 제물을 축복한 뒤에야 식사를 시작할 것이므로 지금 가면 늦지 않을 것이라고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사울이 암나귀를 찾지 못한 일, 종이 하나님의 사람을 떠올린 일, 은 한 조각을 가지고 있었던 일, 사무엘이 바로 그날 성읍에 온 일, 물을 길으러 나온 소녀들을 적절한 순간에 만난 일이 하나로 연결됩니다. 어느 하나만 어긋났어도 사울은 사무엘을 만나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우연이 연속된 것처럼 보이지만 본문은 그 배후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인 표적만으로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평범한 사람과 자연스러운 대화, 시간과 장소의 일치를 통해서도 뜻을 이루십니다.

소녀들은 이스라엘 왕정의 시작을 자신들이 안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길을 묻는 여행자에게 아는 내용을 알려 주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평범한 친절이 사울을 사무엘에게 연결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역사적인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우리를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길을 알려 주는 한마디, 필요한 정보를 나누는 일, 낯선 사람에게 베푸는 작은 친절이 누군가의 삶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습니다.

성읍의 산당은 예배와 제사를 위해 사용되던 높은 장소였습니다. 후대의 열왕기에서는 산당이 우상 숭배나 잘못된 예배와 연결되어 자주 책망받습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는 실로의 중심 성소가 이전의 역할을 잃은 상태였고 사무엘이 직접 제사를 주관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 산당의 제사를 죄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후대에 정죄받은 모든 산당 예배와 동일하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의 사건은 각각의 역사적·언약적 상황 안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사울과 종이 성읍으로 들어갈 때 사무엘이 산당으로 올라가려고 그들을 향해 나오고 있었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을 찾고 있었지만 사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사울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사울이 우연히 하나님의 사람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만남을 준비하셨습니다.

본문은 전날 여호와께서 사무엘의 귀에 알리셨다고 말합니다. “귀에 알리다”는 히브리어 표현은 문자적으로 귀를 열거나 드러낸다는 뜻을 가집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감추어진 뜻을 계시하시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음 날 이때쯤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보내실 것이며, 사무엘이 그에게 기름을 부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은 암나귀를 찾는 자신의 결정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내가 한 사람을 네게 보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계획과 하나님의 섭리는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사울은 자발적으로 아버지의 명령을 따랐고 종의 제안을 받아들여 성읍으로 왔습니다. 동시에 그 모든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사울을 사무엘에게 보내셨습니다.

섭리 신앙은 인간의 선택이 가짜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욕망에 따라 실제로 선택하며 그 선택에 책임을 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선택과 여러 사건을 넘어 자신의 뜻을 정확하게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지도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기드(נָגִיד)는 앞에 선 자, 통치자 또는 지도자를 뜻합니다. 여기서는 왕으로 세워질 사람을 가리키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절대적인 소유자가 아니라 백성을 맡아 다스릴 지도자로 부르십니다.

이스라엘은 사울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왕은 백성을 자기 소유처럼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맡아 말씀에 따라 돌보는 청지기입니다. 인간 지도자의 권위는 하나님에게서 위임받은 것이므로 하나님의 말씀 아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자기 백성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샤(יָשַׁע)는 위험과 압제에서 건지다는 뜻입니다. 사울이 왕으로 세워지는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블레셋의 위협에서 이스라엘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무엘상 8장에서 백성은 자신들을 위해 전쟁할 왕을 요구했습니다. 그 요구에는 하나님을 왕으로 신뢰하지 않는 죄악 된 동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그들을 블레셋의 손에서 건질 지도자를 준비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죄가 하나님의 긍휼을 완전히 막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잘못된 동기로 왕을 요구한 백성을 즉시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고통을 보시고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심판 가운데서도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되었으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돌보다’는 표현은 단순히 바라본다는 뜻이 아니라 고통에 관심을 가지고 구원하기 위해 행동하신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이스라엘은 왕을 요구하며 하나님을 버렸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여전히 “내 백성”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들의 죄를 인정하면서도 언약적 관계를 완전히 끊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자기 백성을 버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닫고 돌아오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언약에 신실하십니다. 이것이 죄를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긍휼을 깨달을수록 더욱 깊이 회개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보았을 때 여호와께서 “보라 이는 내가 네게 말한 사람이니 이가 내 백성을 다스리리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의 키와 외모만 보고 그를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계시하셨기 때문에 사울이 선택된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적인 조건에 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의 외적인 장점도 사용하셨지만 그 외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하신 것은 아닙니다. 선택의 궁극적인 근거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사울을 선택하셨다는 사실과 이후 사울이 불순종하여 버림받는 사건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역사적 왕으로 세움을 받아 특별한 직무와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왕으로 선택되었다는 직무적 은혜가 그의 개인적인 구원이나 끝까지의 순종을 자동으로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직분을 맡기신 사람도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은사와 직분, 특별한 기회는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그것을 충실하게 사용해야 할 책임이 따릅니다. 과거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험했다는 사실만으로 현재의 불순종이 정당화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 왕의 자리에 오를 수 없습니다(삼상 9:18-27)

사울은 성문 안에서 사무엘에게 다가가 선견자의 집이 어디인지 물었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찾던 사람이 바로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사무엘은 자신이 선견자라고 밝히고 사울에게 앞서 산당으로 올라가라고 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과 종이 그날 자신과 함께 먹을 것이며, 아침에는 사울의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알려 주고 보내겠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사울의 마음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본문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왕정에 관한 생각인지, 암나귀와 아버지에 대한 염려인지, 그의 미래에 관한 문제인지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사흘 전에 잃어버린 암나귀들을 염려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미 찾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아직 그 소식을 듣지 못했지만 사무엘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알고 있었습니다.

사울이 사무엘을 찾아온 표면적인 이유는 암나귀의 행방을 묻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작은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동시에 사울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더 큰 사명을 알리려 하셨습니다. 사울은 암나귀를 찾으러 왔지만 왕권에 관한 말씀을 듣게 됩니다.

우리는 눈앞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나님께 나아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문제보다 더 깊은 뜻을 보여 주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상황의 변화를 구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부르시고 새로운 책임을 맡기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일상의 문제 뒤에 반드시 특별하고 거대한 사명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울의 사건은 구속사의 특별한 전환점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시야보다 넓은 뜻을 가지고 일하신다는 원리는 기억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은 이어서 “온 이스라엘이 사모하는 자가 누구냐 너와 네 아버지의 온 집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이스라엘의 관심과 기대가 장차 사울과 그의 가문에 향할 것임을 암시합니다. 백성이 요청한 왕의 자리에 사울이 세워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울은 자신이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인 베냐민 사람이며, 자신의 가족도 베냐민 지파의 모든 가족 가운데 가장 미약한데 왜 그런 말을 하느냐고 대답했습니다. 베냐민 지파는 사사기 마지막 부분에서 벌어진 내전으로 거의 소멸할 뻔한 지파였습니다. 다른 지파보다 수가 적고 정치적 영향력도 약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가문은 앞에서 유력한 가문으로 소개되었습니다. 따라서 “가장 미약하다”는 그의 말이 객관적인 경제 상황을 정확히 설명하는지, 겸손과 놀라움에서 나온 관습적인 표현인지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분명한 것은 사울이 사무엘의 말을 듣고 즉시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사울은 자신이 왕이 될 만한 사람이라고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자신과 가문의 작음을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 태도는 중요합니다. 참으로 하나님께 부름받은 사람은 직분을 자기 능력을 증명하는 기회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처음의 겸손이 끝까지 유지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사람은 작은 자리에 있을 때 겸손해 보이지만 권력과 성공을 얻은 뒤에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분을 맡기실 때의 낮은 마음을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사무엘은 사울과 그의 종을 객실로 인도했습니다. 그곳에는 약 삼십 명의 초대받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과 종에게 가장 높은 자리를 주었습니다. 사울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사람들 앞에 특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높은 자리는 사울이 스스로 차지한 것이 아니라 사무엘이 마련해 준 자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왕권을 주시는 것도 그가 경쟁하여 빼앗은 결과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맡기시는 직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리는 자랑의 근거가 아니라 책임의 자리입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얻었다고 생각하면 사람 위에 군림하지만 하나님께서 맡기셨다고 믿으면 두려움으로 섬기게 됩니다. 높은 자리에 앉을수록 더 깊이 자신을 낮춰야 합니다.

사무엘은 요리인에게 미리 맡겨 두었던 특별한 부분을 가져오라고 말했습니다. 요리인은 넓적다리와 거기에 붙은 것을 가져다가 사울 앞에 놓았습니다. 제사 음식에서 넓적다리는 특별한 몫으로 여겨질 수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이 오기 전부터 그의 자리를 준비하고 음식을 따로 남겨 두었습니다.

사울에게는 모든 일이 갑작스럽게 일어난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과 사무엘에게는 이미 준비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도착하기 전날 사무엘에게 그를 보낼 것을 말씀하셨고, 사무엘은 식탁의 자리와 음식까지 준비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처음 발견하는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깨달음이 하나님의 계획의 시작은 아닙니다. 우리가 알기 전에 하나님께서 알고 계셨고,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필요한 자리를 준비하셨습니다.

사무엘은 그날 사울과 함께 먹었습니다. 식탁의 교제는 단순히 배를 채우는 행위가 아니라 환대와 관계, 인정의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사울은 왕으로 공개적으로 세워지기 전에 사무엘의 식탁에서 존중받고 앞으로의 말씀을 들을 준비를 했습니다.

그들이 산당에서 내려와 성읍에 들어간 뒤 사무엘은 지붕 위에서 사울과 대화했습니다. 당시 평평한 지붕은 조용히 쉬거나 대화하고 잠을 자는 공간으로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본문의 세부적인 문장 형태와 일부 고대 번역에는 차이가 있지만, 사무엘과 사울이 사람들의 소란에서 벗어나 중요한 대화를 나누었다는 흐름은 분명합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말을 했는지는 기록되지 않습니다. 본문이 말하지 않는 대화의 내용을 상상하여 사실처럼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다음 날 사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고 기름을 붓기 위한 준비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새벽이 되었을 때 사무엘은 지붕 위의 사울을 불러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을 성읍 밖까지 배웅했습니다. 성읍 끝에 이르렀을 때에는 종을 앞서 보내라고 말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네게 들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울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기 전에 먼저 들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권은 인간이 임의로 행사하는 절대 권력이 아닙니다. 왕은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서 백성을 다스려야 합니다. 왕보다 말씀이 먼저이며 왕의 권위보다 하나님의 권위가 높습니다.

사울의 외모와 체격은 백성의 눈을 끌 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왕이 될 수는 없습니다. 사무엘의 기름부음과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했습니다. 왕의 정당성은 외적인 조건이나 대중의 환호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과 말씀에 대한 순종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지도자도 말씀 위에 설 수 없습니다. 목회자와 장로, 교사는 자신의 경험과 권위로 교회를 다스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 아래에서 공동체를 섬겨야 합니다. 말씀을 듣지 않는 지도자가 능력과 영향력만으로 사람을 이끌면 결국 공동체를 자기 뜻에 종속시킬 수 있습니다.

모든 성도 역시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멈추어 서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과 감정에 따라 서둘러 움직이기 전에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계획을 승인하는 장식이 아니라 계획과 욕망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사울의 기름부음은 다음 장에서 이루어집니다. 사무엘상 9장은 사울이 왕관을 쓰는 장면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서 있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이것이 왕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자세였습니다.

사울의 미래도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선택하고 기름을 부으시며 성령으로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받은 은혜에 믿음과 순종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책임은 서로 대립하지 않습니다. 사울이 왕으로 세워지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이지만, 왕으로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사울에게 맡겨진 실제적인 책임입니다. 은혜는 순종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순종할 수 있는 자리로 부릅니다.

사울은 블레셋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지도자로 세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구원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후 그의 불순종과 몰락은 인간 왕의 한계를 보여 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 이후 다윗을 세우시고 그의 왕조를 통해 영원한 왕에 대한 약속을 주십니다. 그 약속은 마침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됩니다.

사울은 뛰어난 외모와 큰 키를 가진 왕이었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이 흠모할 만한 외적인 모양으로 왕권을 얻으신 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자신을 낮추셨으며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사울은 백성을 블레셋의 손에서 일시적으로 구원할 지도자로 세워졌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영원히 구원하십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왕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말씀을 완전히 순종하신 왕이며 육신이 되신 영원한 말씀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불완전한 요구 속에서도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사울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 왕들의 실패를 넘어 완전한 왕이신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어떤 인간 지도자의 외모와 능력에 있지 않고 자기 생명을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무엘상 9장은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세밀하고 신실한지를 보여 줍니다. 사울은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으러 길을 떠났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통해 사무엘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종의 조언과 작은 은 조각, 우물가의 소녀들과 정확한 만남의 시간까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었습니다.

우리 눈에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도 하나님의 통치 밖에 있지 않습니다. 계획이 어그러지고 찾던 것을 얻지 못할 때도 하나님께서는 다른 길을 준비하고 계실 수 있습니다. 모든 이유를 즉시 알 수는 없지만 현재 맡겨진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하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잘못된 요구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사울을 세워 블레셋의 손에서 건지려 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는 결코 가볍지 않지만 인간의 실패가 하나님의 긍휼과 구원 계획을 무너뜨리지는 못합니다.

외모와 능력만으로 지도자를 판단하지 마십시오. 높은 자리에 오르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직분과 권력은 자랑할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섬기라고 맡기신 책임입니다.

무엇보다 인간 왕을 넘어 참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어 죄인을 구원하시고 말씀으로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평범한 일상까지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말씀 앞에 멈추어 듣고 충실히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무엘상 8장 주해와 강해

보이는 왕을 구하다 참된 왕을 버린 백성

사무엘상 8장은 이스라엘이 사사 시대를 지나 왕정 시대로 들어가는 결정적인 전환점입니다. 사무엘의 아들들이 정의를 굽게 하자 장로들은 다른 나라들처럼 자신들을 다스릴 왕을 요구합니다. 왕을 세우는 제도 자체가 죄였던 것은 아니지만, 백성은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눈에 보이는 권력과 군사력을 의지하려 했습니다. 본문을 통해 인간의 정당한 필요에도 잘못된 욕망이 섞일 수 있으며, 참된 왕이신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권력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원합니다.

정의를 원했지만 세상의 방식을 선택했습니다(삼상 8:1-5)

사무엘상 7장은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다고 기록합니다. 그는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를 순회하며 백성의 문제를 판단했고, 자신의 집이 있는 라마로 돌아와서도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사무엘은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이며 백성을 위해 기도하는 중보자였고, 정의를 세우는 사사였습니다.

사무엘의 지도 아래 이스라엘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미스바에서 죄를 고백하고 금식했으며, 블레셋이 공격했을 때 하나님께서 큰 우레를 발하여 승리를 주셨습니다. 사무엘은 도움의 돌을 세우고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상 8장은 “사무엘이 늙으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아무리 충실한 지도자라도 세월의 한계를 피할 수 없습니다. 사무엘은 한 시대를 이끌었지만 영원히 백성 곁에 머물 수는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사무엘 이후의 지도력과 정치적 질서를 준비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특정한 인간 지도자의 생명과 능력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모세가 죽은 뒤에도 하나님의 언약은 계속되었고,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도 하나님의 통치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일꾼은 바뀌지만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자기 백성을 다스리십니다.

교회는 신실한 지도자를 귀하게 여기되 그 사람을 하나님처럼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지도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종이지 교회의 주인이 아닙니다. 인간 지도자 한 사람이 떠났다고 모든 것이 무너진다면 그 공동체의 기초가 하나님과 복음이 아니라 사람에게 놓여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무엘은 늙자 자신의 아들들을 이스라엘의 사사로 삼았습니다. 맏아들의 이름은 요엘이었고 둘째 아들의 이름은 아비야였습니다. 요엘은 일반적으로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으로, 아비야는 ‘여호와는 나의 아버지이시다’라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두 아들의 이름에는 사무엘의 신앙고백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건한 이름이 경건한 삶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사무엘은 자신의 신앙을 이름에 담아 주었지만 아들들이 그 믿음대로 살도록 대신 결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믿음의 본을 보여야 하지만 자녀의 마음을 새롭게 하거나 구원할 능력은 없습니다.

구원은 혈통이나 가정의 전통을 통해 자동으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부모가 목회자나 장로이고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다고 해서 자녀가 저절로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야 하며 자신의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사무엘의 아들들은 브엘세바에서 사사로 일했습니다. 브엘세바는 이스라엘 남쪽 끝에 가까운 지역입니다. 사무엘은 전국을 혼자 다스리기 어려워 아들들에게 남부 지역의 재판을 맡겼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들이 아버지의 길을 따르지 않았다고 평가합니다.

사무엘의 아들들은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했습니다. ‘뇌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쇼하드(שֹׁחַד)는 재판관의 판단을 왜곡하기 위해 주는 금품이나 이익을 뜻합니다. 율법은 뇌물이 지혜로운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므로 받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재판관은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 힘 있는 사람과 연약한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판단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의 아들들은 정의를 자신의 이익과 맞바꾸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백성을 보호하라고 맡기신 권한을 사적인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사무엘은 엘리와 달리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전하고 백성을 위해 기도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길을 따르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엘리 가정의 아픔이 다시 떠오릅니다. 성경은 위대한 신앙 인물의 가정 문제를 숨기거나 미화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사무엘과 엘리의 책임을 완전히 동일하게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엘리는 아들들의 심각한 죄를 알고도 실질적으로 제지하지 않았다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책망을 받았습니다. 사무엘상 8장은 사무엘이 아들들의 부패를 알고도 방치했다거나 그들의 행동을 승인했다고 명시하지 않습니다.

사무엘이 아들들을 사사로 임명한 판단이 지혜로웠는지를 질문할 수는 있지만, 본문이 말하지 않는 그의 동기와 책임을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이 분명하게 책망하는 것은 그의 아들들이 이익을 따르고 뇌물을 받아 재판을 굽게 한 죄입니다.

이 사건은 신실한 부모에게도 불순종하는 자녀가 있을 수 있으며, 훌륭한 지도자도 후계 문제에서는 어려움을 겪을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우리의 소망을 인간 가문이나 지도자의 혈통에 둘 수 없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세습으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왔습니다. 장로들은 각 지파와 지역을 대표하는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무엘이 늙었고 그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길을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장로들의 문제 제기에는 정당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백성에게는 공정한 재판과 안정적인 지도력이 필요했습니다.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는 지도자 아래에서 고통을 참고만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어기는 지도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정당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불의를 무조건 참는 태도가 아닙니다. 교회와 사회의 지도자가 권한을 남용하고 정의를 굽게 할 때 그것을 바로잡도록 요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패를 덮는 것은 믿음도 순종도 아닙니다. 진실을 드러내고 약한 사람을 보호하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에 맞습니다.

그러나 정당한 문제의식이 항상 바른 해결책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장로들은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사무엘의 아들들이 부패했다는 실제 문제를 제기했지만 해결책은 주변 민족의 정치 체제에서 찾았습니다.

“모든 나라와 같이”라는 말이 그들의 욕망을 드러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시고 자신의 소유로 구별하신 백성이었습니다. 다른 나라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살아가는 민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통치를 세상 가운데 나타내도록 부름받은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구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부담스럽게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매 순간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왕과 제도를 갖는 것이 더 안전해 보였습니다. 주변 민족처럼 강한 왕과 군대를 가지고 싶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보다 세상의 평범한 안전을 더 부러워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하게 살아가는 길보다 세상의 방식에 섞여 사는 길을 편하게 느낍니다. 세상이 가진 힘과 성공을 바라보며 “우리도 저들처럼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세상과 다른 것은 문화적인 특이함이나 외적인 구분에만 있지 않습니다. 권력과 성공을 바라보는 기준이 달라야 합니다. 세상은 힘이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것을 성공이라고 여기지만 교회는 자신을 낮추고 섬기는 것을 위대함으로 봅니다. 세상은 숫자와 영향력을 자랑하지만 교회는 말씀에 대한 신실함을 소중히 여깁니다.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한 것 자체가 무조건 죄였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신명기 17장은 이스라엘이 장차 왕을 세우게 될 상황을 예상하고 왕에 관한 규례를 제시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야곱에게서 왕들이 나올 것을 약속하셨고, 한나의 찬송도 하나님께서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고 기름 부음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실 것을 노래했습니다.

왕정은 하나님의 구속 계획과 완전히 무관한 제도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차 다윗을 세우시고 그의 왕조를 통해 메시아의 약속을 발전시키실 것입니다. 문제는 왕이라는 제도 자체보다 왕을 요구한 백성의 동기와 방식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 때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을 다른 나라처럼 만들어 줄 왕을 요구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섬길 왕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하여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할 왕을 원했습니다. 왕을 하나님의 종으로 보지 않고 새로운 의지처로 삼으려 했습니다.

정당한 필요 속에도 우상적인 욕망이 섞일 수 있습니다. 안정된 가정과 건강, 경제적 여유와 좋은 지도자를 원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보다 더 큰 안전과 만족을 줄 것으로 기대하면 우상이 됩니다.

우리는 무엇을 구하는가뿐 아니라 왜 그것을 구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좋은 직장을 구하면서 하나님을 섬길 기회를 원하는지, 아니면 직장이 나의 가치를 증명해 줄 것으로 기대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녀의 성공을 기도하면서 그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원하는지, 아니면 자녀를 통해 자신의 자랑을 이루려 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정의를 원했지만 세상의 권력 구조가 정의를 자동으로 보장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제도를 바꾼다고 인간의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사가 부패할 수 있듯 왕도 부패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근본 문제는 제도만이 아니라 죄로 기울어진 마음에 있습니다.

좋은 제도와 법은 중요합니다. 권력을 견제하고 정의를 세우는 구조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떤 정치 제도도 인간의 마음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제도가 죄의 확산을 어느 정도 제한할 수는 있지만 인간을 의롭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궁극적인 변화는 성령께서 말씀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실 때 일어납니다.

백성은 인간 왕을 요구하며 여호와의 왕권을 거절했습니다(삼상 8:6-9)

백성이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고 요구하자 사무엘은 그 말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개역개정은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한지라”고 번역하지만 히브리어 표현은 그 일이 사무엘의 눈에 악하거나 불쾌하게 보였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사무엘은 백성의 요구를 개인적인 거절로 느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평생 백성을 다스렸는데 이제 늙었다는 이유로 다른 지도 체제를 요구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들들의 부패가 지적된 일도 마음을 아프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사무엘의 구체적인 감정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무엘이 불쾌한 말을 들은 후 즉시 백성과 다투지 않고 여호와께 기도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상처와 분노를 자기 판단으로 처리하지 않고 하나님께 가져갔습니다. 영적 지도자는 반대와 비판을 받을 때 자신의 권위를 방어하기 전에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비판을 받으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변호하려 합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찾아 되받아치거나 자신의 공로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감정을 부정하는 행위가 아니라 감정을 하나님의 판단 아래 가져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백성이 하는 말을 모두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백성이 거절한 궁극적인 왕은 사무엘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버리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아스(מָאַס)는 거절하다, 멸시하다,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여호와를 자신들의 신이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삶을 다스리는 왕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나님을 종교적인 영역에만 모시고 삶의 왕권은 자신이나 세상에 넘길 수 있습니다. 예배와 기도에서는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면서 돈을 사용할 때는 탐욕이 왕이 되고, 인간관계에서는 사람의 인정이 왕이 되며, 미래를 결정할 때는 두려움이 왕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한 부분만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 시간과 물질, 관계와 미래를 다스리는 왕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구원자로 받아들이면서 통치자로는 거절하는 신앙은 온전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요구는 갑자기 나타난 새로운 반역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구원하신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로의 노예였지만 하나님께서 강한 손으로 해방하셨습니다. 홍해를 건너고 광야에서 만나와 물을 공급받았으며,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구원받은 후에도 반복하여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겼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었고 가나안에 들어와 바알과 아스다롯을 따랐습니다. 사무엘상 7장에서 우상을 제거했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보이는 대상에 의존하려는 성향이 남아 있었습니다.

우상 숭배는 신상의 모양만 바뀔 뿐 본질은 같습니다. 과거에는 바알과 아스다롯을 의지했고 이제는 인간 왕과 군사 제도를 의지하려 합니다. 눈에 보이는 대상을 통해 안전과 풍요를 보장받으려는 마음이 계속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로의 지배에서 구원받았지만 다시 인간 왕의 강한 지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유롭게 하신 백성이 스스로 새로운 종의 멍에를 구한 것입니다. 죄인은 참된 자유보다 익숙한 노예 상태를 더 안전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말씀을 믿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므로 인간에게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눈에 보이는 왕은 당장 명령하고 군대를 모으며 결과를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믿음으로 기다리기보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권력을 선택하려 했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현실을 무시하거나 제도와 지도자를 불필요하게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지도자와 제도를 자신의 섭리적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다만 그 어떤 사람과 제도도 하나님을 대신하는 궁극적인 의지처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백성의 말을 듣되 왕의 제도를 엄히 경고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백성의 요구를 허락하시면서도 그들이 선택하려는 길의 결과를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허락은 곧 승인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고집하는 선택을 허용하시되 그 결과를 경험하게 하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욕망을 즉시 막지 않고 그 욕망이 가져오는 열매를 맛보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무관심이 아니라 사법적인 심판의 한 방식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선택은 서로 대립하지 않습니다. 백성은 자기 욕망을 따라 왕을 요구했고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잘못된 요구까지 자신의 구속 계획 안에서 사용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세우시고 그의 실패를 통하여 인간 왕권의 한계를 드러내십니다. 이후 다윗을 세우고 언약을 맺으시며 장차 오실 영원한 왕을 약속하십니다. 인간의 죄가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시키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선으로 바꾸시되 악을 행한 인간의 책임을 없애지는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의 잘못된 왕 요구가 메시아 왕국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왕과 기름 부음 받은 자에 관한 뜻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백성의 죄악 된 동기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작정과 명령을 구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역사를 주권적으로 작정하고 다스리시지만 인간에게 죄를 명령하거나 죄의 책임자가 되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자신의 욕망에 따라 죄를 선택하고 책임을 지며, 하나님께서는 그 선택까지도 거룩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십자가가 그 가장 분명한 예입니다. 유대 지도자들과 로마 권력은 악한 동기로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들의 죄는 실제적이며 책임도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악을 통하여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뜻을 이루셨습니다. 인간의 가장 악한 행동도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빼앗는 왕과 자신을 내어 주는 왕은 다릅니다(삼상 8:10-22)

사무엘은 왕을 요구하는 백성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모두 전했습니다. 그는 백성이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하지 않았습니다. 왕이 세워지면 강한 군대와 안정된 정치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장점만 설명하지 않고, 인간 왕권이 어떻게 백성의 자유와 재산을 빼앗을 수 있는지를 경고했습니다.

사무엘은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는 이러하니라”고 말합니다. ‘왕의 제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슈파트 함멜레크(מִשְׁפַּט הַמֶּלֶךְ)는 왕의 관행이나 권한, 통치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왕이 실제로 행사하게 될 강압적인 통치의 모습을 경고하는 의미가 강합니다.

왕은 먼저 백성의 아들들을 데려갈 것입니다. 그들을 자신의 병거와 말을 돌보는 사람으로 삼고 병거 앞에서 달리게 할 것입니다.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세우며 왕의 밭을 갈고 곡식을 거두게 하며 무기와 병거의 장비를 만들게 할 것입니다.

백성은 왕이 자신들을 위해 전쟁해 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왕의 군대는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백성의 아들들이 징집되고 노동과 생명을 제공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안전을 얻는 대가로 자녀들의 자유와 생명을 왕에게 내어 주게 됩니다.

왕은 딸들도 데려다가 향료를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로 삼을 것입니다. 왕궁의 화려함과 편안함을 유지하기 위해 백성의 딸들이 노동해야 합니다. 강력한 왕권은 백성의 아들과 딸을 국가와 왕실의 자원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의 경고에는 ‘가져가다’ 또는 ‘빼앗다’는 말이 반복됩니다. 백성은 왕이 자신들에게 무엇인가를 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왕이 무엇을 빼앗을지를 말씀하십니다. 죄의 욕망은 언제나 얻을 것만 보여 주고 치러야 할 대가는 숨깁니다.

왕은 백성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빼앗아 신하들에게 줄 것입니다. 곡식과 포도원의 소산에서 십일조를 거두어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입니다.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청년과 나귀를 끌어다가 자신의 일을 시킬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토지는 하나님께서 각 지파와 가문에 기업으로 주신 것이었습니다. 땅의 궁극적인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백성은 그 땅을 맡아 사용하는 청지기였습니다. 그런데 인간 왕은 가장 좋은 땅을 자신의 소유처럼 빼앗아 충성스러운 신하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권력은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권력과 자원을 요구합니다. 왕궁과 군대, 관리 조직을 유지하려면 백성의 노동과 재산이 필요합니다. 왕이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서 자신을 절제하지 않으면 백성을 섬기는 통치가 아니라 백성에게서 빼앗는 통치가 됩니다.

신명기 17장은 이스라엘 왕이 말을 많이 두지 말고 아내를 많이 두어 마음이 미혹되지 않게 하며 은과 금을 자신을 위해 많이 쌓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왕은 율법을 가까이 두고 평생 읽으며 마음이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않아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왕은 백성을 자기 소유로 삼는 절대군주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서 형제들을 섬기는 언약적 통치자였습니다. 왕도 율법 위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백성이 “다른 나라들처럼” 왕을 원했기 때문에 사무엘은 주변 민족의 왕들이 보이던 전제적 통치를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권력은 자신을 제한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백성을 보호한다고 말하지만 점차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여깁니다.

마침내 사무엘은 왕이 양 떼의 십일조를 가져가고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종으로 살던 민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손에서 구원하여 자유롭게 하셨는데, 이제 그들은 스스로 새로운 인간 주인의 종이 되려 합니다.

여기에는 날카로운 역설이 있습니다. 백성은 자신들을 구원할 왕을 요구했지만 그 왕이 다시 자신들을 종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을 종살이에서 해방하시지만 인간의 죄악 된 권력은 자유인을 다시 종으로 만듭니다.

모든 인간 권력이 본질적으로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은 국가의 권세가 질서를 유지하고 악을 억제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제도임을 가르칩니다. 신실한 통치자는 정의를 세우고 약한 사람을 보호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인간 권력도 절대화해서는 안 됩니다. 왕과 대통령, 국가와 정당, 종교 지도자도 하나님의 말씀 아래 있습니다. 특정 지도자를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처럼 숭배하거나 정치적 승리를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국가 권력을 무조건 적대해서도 안 되지만 맹목적으로 추종해서도 안 됩니다. 정의를 행할 때 존중하고 협력하되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를 때에는 진리를 말해야 합니다. 교회의 충성은 어떤 정치 권력보다 예수 그리스도께 먼저 속합니다.

사무엘은 왕으로 인해 고통받는 날에 백성이 자신들이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부르짖어도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죄인의 기도를 영원히 듣지 않으신다는 절대적인 선언이 아닙니다.

문맥상 백성이 충분한 경고를 받고도 고집하여 선택한 왕정의 고통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때로는 인간이 선택한 결과를 즉시 제거하지 않으시고 그 결과를 통하여 교훈을 얻게 하십니다.

죄를 선택한 뒤 그 결과만 없애 달라고 구하는 것은 참된 회개가 아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즉시 제거하시기보다 그 고통을 통해 잘못된 욕망을 드러내고 마음을 돌이키게 하실 수 있습니다.

백성은 사무엘의 경고를 듣고도 그의 말을 거절했습니다.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결과를 들었지만 생각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욕망은 말씀보다 강했습니다.

말씀을 듣는 목적은 정보를 더 얻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에 따라 생각과 선택을 바꾸는 데 있습니다. 이미 결론을 정해 놓고 하나님의 허락만 얻으려 한다면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백성은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그들이 왕에게 기대한 세 가지 기능을 보여 줍니다. 왕이 재판하고, 백성 앞에 나가며, 전쟁을 수행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 일들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리셨고, 광야에서 백성보다 앞서 가셨으며,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큰 우레를 발하여 싸우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하시던 일을 눈에 보이는 인간 왕에게 맡기려 했습니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신실하심보다 눈에 보이는 사람의 능력을 더 확실하게 느낍니다. 통장에 쌓인 돈과 강한 조직, 영향력 있는 사람을 하나님의 약속보다 더 의지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변하고 인간의 권력은 유한합니다.

사무엘은 백성의 말을 듣고 여호와께 아뢰었습니다. 그는 중요한 결정을 자기 판단으로 처리하지 않고 다시 하나님께 가져갔습니다. 사무엘상 8장에서 사무엘은 백성의 요구를 처음 들었을 때도 기도했고, 모든 경고를 전한 뒤에도 하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기도하는 지도자는 자신의 감정과 권위를 하나님의 판단 아래 둡니다. 백성의 요구를 무조건 따라가지도 않고 자신의 뜻을 강제로 관철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뜻을 공동체에 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백성의 요구가 자신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행위임을 분명히 밝히셨지만 그 요구를 허락하셨습니다. 백성은 자신들이 원하는 왕정의 가능성과 위험을 실제 역사 속에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잘못된 선택까지도 자신의 구속 계획에 사용하십니다. 사울의 실패를 통해 외모와 군사력만으로 참된 왕이 될 수 없음을 보여 주시고, 다윗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의 모습을 제시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도 완전한 왕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왕이었지만 죄를 범하고 가정과 나라에 큰 상처를 남깁니다. 사무엘서의 왕정 이야기는 인간 왕에게 궁극적인 소망을 둘 수 없음을 보여 주면서 완전한 왕을 기다리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이 진정으로 필요로 했던 왕이십니다. 세상의 왕들은 백성의 아들과 딸, 재산과 노동을 가져가지만 예수님은 백성에게서 빼앗기 위해 오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양들을 위해 내어 주셨습니다.

세상의 왕은 백성을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지만 예수님은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세상의 왕은 군대를 앞세워 자신의 왕국을 확장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원수를 사랑하며 하나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왕권이 약하거나 선택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참된 왕이며 우리의 전적인 충성과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것은 폭군의 종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와 사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의와 생명의 길을 걷는 참된 자유입니다. 세상의 왕은 자유인을 종으로 만들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의 종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십니다.

사무엘은 백성에게 각자 성읍으로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아직 구체적인 왕은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다음 장부터 하나님께서 사울을 선택하고 세우시는 과정이 시작됩니다. 백성의 요구는 허락되었지만 그들이 원하는 왕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역사 속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무엘상 8장은 정당한 필요도 잘못된 욕망과 결합하면 우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은 부패한 재판을 바로잡고 안정된 지도력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 다른 나라처럼 보이는 왕을 의지하려 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사람과 제도, 돈과 권력을 더 확실한 구원자로 여길 수 있습니다. 좋은 지도자와 제도는 필요하지만 그것들이 인간의 죄를 제거하거나 궁극적인 안전을 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국가도, 교회 지도자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구하는가뿐 아니라 왜 구하는지를 살피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을 섬기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불안을 덮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우상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말씀의 경고를 들으면서도 이미 정한 욕망을 고집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백성의 것을 빼앗는 왕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신 왕이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와 부활로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자기 백성을 참된 자유로 인도하십니다. 보이는 권력을 절대화하지 말고 참된 왕이신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며, 그분의 말씀과 통치 아래 기쁨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무엘상 7장 주해와 강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신 하나님

사무엘상 7장은 언약궤가 기럇여아림에 머문 뒤 이스라엘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과정을 기록합니다. 사무엘상 4장에서 이스라엘은 회개 없이 언약궤를 앞세우다가 패했지만, 7장에서는 말씀을 듣고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함으로 승리를 얻습니다. 승리의 비결은 새로운 종교적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데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참된 회개의 의미와 기도에 응답하시며 자기 백성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기 원합니다.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고 우상을 제거하십시오(삼상 7:1-4)

사무엘상 6장의 마지막에서 벧세메스 사람들은 돌아온 언약궤를 보고 크게 기뻐했지만 하나님의 거룩함을 가볍게 여겨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라고 탄식하면서 언약궤를 자신들에게서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했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기럇여아림 주민들에게 사람을 보내 블레셋이 여호와의 궤를 돌려보냈으니 내려와 가져가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에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겼습니다.

기럇여아림은 예루살렘 서쪽 산지에 있던 성읍입니다. 블레셋 평야와 이스라엘 산지의 경계에 가까운 곳이어서 언약궤를 보관하기에 비교적 안전한 장소였을 것입니다. 언약궤는 실로로 돌아가지 않고 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 집으로 옮겨졌습니다.

실로는 오랫동안 이스라엘의 중심 성소였지만 엘리 가문이 심판받고 블레셋의 침략을 겪으면서 이전의 역할을 잃게 되었습니다. 언약궤가 실로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사실은 한 시대가 끝났음을 보여 줍니다. 제사장 가문과 성소의 외형은 존재했지만 하나님의 거룩함과 말씀을 멸시한 결과 이전 질서를 그대로 유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기럇여아림 사람들은 언약궤를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았습니다. 본문의 ‘산’은 높은 지대나 언덕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아비나답의 아들 엘르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했습니다.

본문은 엘르아살이 제사장 가문의 사람이었는지 명확하게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의 혈통이나 구체적인 직무를 본문 이상의 내용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분명한 것은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그를 특별히 구별하여 언약궤를 보호하고 관리하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언약궤는 오랫동안 기럇여아림에 머물렀습니다. 본문은 궤가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머물렀다고 말합니다. 언약궤는 이후 다윗 시대에 예루살렘으로 옮겨지므로 실제로 기럇여아림에 머문 전체 기간은 이십 년보다 길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기서 이십 년은 언약궤가 옮겨진 후 이스라엘에 영적 회복의 움직임이 일어나기까지의 기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언약궤가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왔다고 모든 문제가 즉시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언약궤의 물리적인 귀환과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인 회복은 같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거룩한 상징물이 돌아왔지만 백성의 마음은 아직 하나님께 온전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패한 원인은 언약궤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우상을 섬기면서도 거룩한 언약궤를 이용해 승리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언약궤가 돌아온 것만으로 언약 관계가 자동으로 회복될 수는 없었습니다. 백성의 마음이 하나님께 돌아와야 했습니다.

우리도 외적인 종교 생활의 회복을 영적인 회복과 동일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다시 출석하고 예배의 자리에 앉았다고 해서 마음까지 하나님께 돌아온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형식을 회복했어도 마음속 우상을 그대로 붙들고 있다면 참된 회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고 말합니다. ‘사모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나하(נָהָה)는 슬퍼하다, 탄식하다 또는 간절히 뒤따르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스라엘이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슬퍼하며 여호와를 찾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십 년 동안 블레셋의 압제와 영적 공허를 경험했습니다. 언약궤는 돌아왔지만 하나님의 임재가 주는 평안과 능력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자신들의 문제를 군사력이나 언약궤라는 물건에서 찾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기 시작했습니다.

고난이 길어진다고 모든 사람이 자동으로 회개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더욱 원망하고 마음을 완고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사용하여 자기 백성의 거짓된 의지처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을 갈망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사모하게 된 것은 그들 안에 본래 선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의 은혜로 그들의 마음을 깨우고 자신을 찾게 하셨습니다. 참된 회개의 시작에도 하나님의 선행하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개혁주의 신앙은 회개와 믿음이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임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회개를 주신다는 사실이 인간의 책임을 없애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마음을 깨우실 때 우리는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했습니다.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사무엘이 선지자로서 온 이스라엘에 선포한 핵심은 회개였습니다.

‘돌아오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슈브(שׁוּב)는 방향을 돌이켜 되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회개는 단순히 잘못을 후회하거나 슬픈 감정을 느끼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죄와 우상에게서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완전히 잊고 우상만 섬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를 섬긴다고 하면서 바알들과 아스다롯도 함께 섬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기보다 하나님께 다른 신들을 더하려 했습니다. 신앙과 우상 숭배를 혼합하는 혼합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바알은 가나안 사람들이 풍요와 비, 농사의 결실을 관장한다고 믿었던 신이었습니다. ‘바알들’이라는 복수형은 지역마다 다양한 이름과 형태로 섬기던 바알 숭배를 나타냅니다. 농사를 짓는 이스라엘 백성은 비와 풍년을 얻기 위해 바알 숭배에 유혹받았습니다.

아스다롯은 아스다롯 또는 아스타르테로 알려진 여신의 여러 지역적 형태를 가리키는 복수 표현입니다. 풍요와 다산, 성적인 숭배 의식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현실적인 풍요와 번영을 얻기 위해 주변 민족의 신들을 받아들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는 단순히 신학적인 지식이 부족해서 생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보다 안정과 풍요를 더 사랑했기 때문에 생긴 문제였습니다. 여호와만 의지하기에는 불안하여 눈에 보이는 다른 보장책을 더하려 했습니다.

우상은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종교적인 형태로 만들어 낸 것입니다.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긴 목적은 그 신들 자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비와 풍요, 자녀와 성적인 욕망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우상 숭배의 중심에는 하나님보다 자신의 욕망을 더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바알과 아스다롯의 신상을 세워 놓고 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고 사랑하며 그것이 없으면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대상이 있다면 그것이 우리의 우상이 됩니다. 돈과 성공, 건강과 자녀, 권력과 명예, 사람의 인정도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면 우상입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우상을 마음으로만 미워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너희 중에서 제거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회개에는 구체적인 제거가 필요합니다. 죄를 슬퍼한다고 말하면서 죄로 이끄는 환경과 습관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온전한 회개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탐욕을 회개한다면 돈을 사용하는 방식이 달라져야 합니다. 음란을 회개한다면 죄를 부추기는 관계와 매체를 끊어야 합니다. 사람의 인정을 우상으로 섬겼다면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는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해야 합니다. 회개는 마음에서 시작하지만 삶의 변화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우상을 제거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무엘은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라”고 말합니다. 죄를 버리고 생긴 빈자리를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우상을 버렸다고 하면서 마음의 중심이 여전히 자기 자신에게 있다면 다른 우상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향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쿤(כּוּן)은 굳게 세우다, 준비하다, 확정하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한다는 것은 일시적인 감정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마음을 굳게 정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그만을 섬기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신 가운데 가장 높은 신으로 섬김받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전적인 사랑과 순종을 받으십니다. 하나님과 우상을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주인으로 모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입술로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실제로는 돈과 성공의 명령에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참된 회개는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이 전심으로 돌아와 하나님만 섬기면 하나님께서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건져 주실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이 약속은 이스라엘이 우상을 제거한 공로로 구원을 산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에 따라 회개하는 백성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다는 뜻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는 값이 아니라 은혜로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이 보이는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말씀으로 백성을 부르시고 돌아올 길을 열어 주십니다. 이스라엘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겼습니다.

이 짧은 기록에는 참된 회개의 구조가 담겨 있습니다. 죄를 슬퍼하고, 우상을 제거하며,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후회만 있고 삶의 방향이 바뀌지 않는다면 아직 회개의 열매가 충분히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죄를 고백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삼상 7:5-11)

이스라엘이 우상을 제거하자 사무엘은 모든 백성을 미스바로 모으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그들을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미스바는 ‘망대’ 또는 ‘파수하는 곳’이라는 의미를 가진 지명으로, 이스라엘 공동체가 중요한 일을 위해 모이던 장소였습니다.

사무엘은 선지자로서 말씀을 전했을 뿐 아니라 백성을 위해 중보했습니다. 그는 회개를 명령하고 멀리 서서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말씀을 선포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영적 지도자는 사람의 죄를 지적하는 데서 책임이 끝나지 않습니다. 죄인이 회개하고 회복되도록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의 칼로 상처만 내는 사람이 아니라 복음의 은혜로 싸매고 하나님께 중보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날 금식했습니다. 물을 붓는 행위의 정확한 의미는 본문이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명과 마음을 물처럼 하나님 앞에 쏟는 회개를 상징했거나, 정결과 겸비를 나타내는 의식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행위를 후대의 특정 관습과 직접 연결하여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중요한 것은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죄를 인정하는 외적인 표현으로 물을 부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이전처럼 언약궤를 이용하여 하나님을 조종하려 하지 않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았습니다.

백성은 금식했습니다. 금식은 음식 자체를 악하게 여기거나 고행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 방법이 아닙니다. 자신의 죄와 영적인 필요가 일상의 즐거움과 음식보다 더 절박하다는 사실을 몸으로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금식이 회개 없는 종교적 과시로 변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진실한 금식은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는 데 도움을 주는 신앙적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금식의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낮아진 마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패배의 원인을 언약궤의 부재나 군사력의 부족에서 찾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무너뜨렸음을 인정했습니다.

참된 죄 고백에는 변명이 없습니다. “환경이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다른 민족도 그렇게 했습니다”, “지도자들이 잘못했기 때문입니다”라고 책임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했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타(חָטָא)는 목표를 빗나가다, 죄를 범하다는 뜻을 가집니다. 죄는 단순한 실수나 사회적 규칙의 위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하나님과의 언약을 거스르는 행동입니다. 모든 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범하는 죄입니다.

죄를 고백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판단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라고 느끼는 것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라고 말씀하신 것을 죄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과 시대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죄의 기준입니다.

본문은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렸다고 말합니다. ‘다스리다’에 해당하는 샤파트(שָׁפַט)는 재판하다, 판결하다, 사사로 통치하다는 뜻입니다. 사무엘은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이면서 백성을 지도하고 분쟁을 해결하는 사사의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백성의 회개와 미스바 집회 소식을 들은 블레셋 방백들은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왔습니다. 이스라엘이 미스바에 모인 것을 군사적 반란이나 전쟁 준비로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이 다시 힘을 모으기 전에 공격하려 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블레셋 사람들이 올라온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이 회개했다고 모든 두려움이 즉시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도 위협 앞에서 두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믿음은 두려움이 전혀 없는 상태가 아니라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4장에서도 이스라엘은 블레셋을 두려워했습니다. 당시에는 언약궤를 가져오면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무엘에게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라고 요청합니다.

4장에서는 언약궤를 가져오라고 했지만 7장에서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전에는 거룩한 물건을 의지했지만 이제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외적인 방법에 대한 의존이 기도와 믿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사무엘의 기도를 의지했지만 사무엘 자체를 구원자로 여긴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사무엘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주기를 요청했습니다. 구원의 능력은 사무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서 기도하는 중보자였습니다.

사무엘은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부르짖었습니다. ‘온전한 번제’는 제물 전체를 태워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는 전적인 헌신과 속죄,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의존을 나타냅니다.

사무엘과 이스라엘이 제사라는 행위로 하나님을 조종한 것은 아닙니다. 사무엘상 4장의 언약궤처럼 제물을 승리의 도구로 사용한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제사와 기도의 방법으로 나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이유는 어린 양 자체에 어떤 마법적인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구약의 희생 제사는 죄인이 자기 공로로 하나님께 설 수 없으며, 대신 죽는 제물과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무엘은 어린 양을 드리며 이스라엘을 위해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셨습니다. ‘응답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나(עָנָה)는 부름이나 간구에 대답한다는 뜻입니다.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였던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백성의 기도에 행동으로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은 백성이 완전해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두려워했고 군사적으로 블레셋보다 약했습니다. 그러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 돌아온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언약의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왔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전투 대형을 갖추기보다 회개하고 제사를 드리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셨습니다. 블레셋 군대는 이스라엘 앞에서 패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승리를 결정한 것은 군사 전략이나 병력의 수가 아니라 여호와의 개입이었습니다.

한나의 노래는 이미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라고 선포했습니다(삼상 2:10). 사무엘상 7장에서 그 노래가 역사 속에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우레를 발하여 이스라엘의 대적을 혼란에 빠뜨리셨습니다.

‘어지럽게 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맘(הָמַם)은 혼란에 빠뜨리다, 두려움에 떨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의 전쟁에서도 하나님께서 대적을 혼란에 빠뜨리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싸우시는 거룩한 전쟁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미스바에서 나가 블레셋을 추격하여 벧갈 아래까지 쳤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블레셋을 어지럽히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도 그 뒤를 따라 싸웠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이 인간의 책임과 행동을 제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셨으므로 이스라엘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대적을 무너뜨리실 때 백성은 믿음으로 나아가 추격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을 수동적이고 게으르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확신 속에서 담대히 순종하게 합니다.

사무엘상 4장과 7장의 대조는 분명합니다. 4장에서 이스라엘은 큰 함성을 질렀고 언약궤를 앞세웠지만 하나님께 패했습니다. 7장에서는 죄를 고백하고 우상을 버리며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하늘의 우레로 승리를 주셨습니다.

차이는 종교적 기술에 있지 않았습니다. 언약궤 대신 제물을 사용했기 때문에 이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달라졌습니다. 4장에서는 하나님을 자신들의 승리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려 했지만, 7장에서는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자신을 맡겼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기도와 예배도 하나님을 움직이는 기술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이용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기 위해 기도합니다. 참된 기도는 하나님을 변화시키기보다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킵니다.

사무엘이 어린 양을 드리고 백성을 위해 중보한 모습은 성경 전체의 구속사에서 더 완전한 중보자를 바라보게 합니다. 사무엘을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예표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지만 그의 중보와 어린 양의 희생은 죄인이 구원받기 위해 중보자와 희생 제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중보자일 뿐 아니라 자신을 제물로 드리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사무엘은 어린 양을 드리며 부르짖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드리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죽으셨다가 부활하시고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자기 백성을 위해 간구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사무엘에게 “우리를 위하여 쉬지 말고 부르짖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신약의 성도에게는 영원히 살아서 중보하시는 대제사장이 계십니다. 우리가 연약하고 두려울 때에도 그리스도의 중보는 중단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기도가 완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중보가 완전하기 때문에 안전합니다.

에벤에셀을 세우고 은혜의 역사를 기억하십시오(삼상 7:12-17)

승리가 끝난 후 사무엘은 돌 하나를 가져다가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돌의 이름을 에벤에셀이라고 지었습니다. 에벤에셀은 히브리어 에벤 하에제르(אֶבֶן הָעֵזֶר)로서 ‘도움의 돌’이라는 뜻입니다.

사무엘이 돌을 세운 것은 돌 자체에 신비한 능력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도움을 기억하게 하는 기념물로 세운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돌을 볼 때마다 자신들의 군사력이나 지혜가 아니라 여호와의 도움으로 승리했음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사무엘은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고 말했습니다. ‘돕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자르(עָזַר)는 위험에 처한 사람을 지원하고 구원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블레셋의 손 아래 있던 이스라엘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도우셨습니다.

“여기까지”라는 말에는 지나온 은혜에 대한 감사가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실패와 불순종으로 얼룩졌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회개하도록 말씀하시고, 기도에 응답하시며, 대적의 손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고백은 과거만 회상하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도우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언약에 따라 인도하실 것이라는 신뢰를 포함합니다. 그러나 과거에 도움을 받았으므로 앞으로 어떤 죄를 지어도 자동으로 보호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계속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에 순종해야 했습니다.

에벤에셀은 자기 자랑의 기념비가 아니라 은혜의 기념비였습니다. 세상은 인간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비석을 세우지만 사무엘은 하나님의 도움을 기억하기 위해 돌을 세웠습니다. 그 돌은 “우리가 해냈다”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도우셨다”고 증언했습니다.

우리도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에벤에셀의 고백을 해야 합니다.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실패와 눈물,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있었지만 그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시고 믿음에서 완전히 떠나지 않도록 지키셨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까지 믿음 안에 서 있는 것은 의지가 강하고 선택을 잘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붙드셨기 때문입니다. 넘어졌을 때 일으키시고 길을 잃었을 때 돌이키셨으며, 필요한 사람과 말씀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도의 견인은 하나님의 보존하시는 은혜에 근거합니다.

그러나 에벤에셀을 우상으로 만들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사용하신 방법과 장소를 절대화해서는 안 됩니다. 기념물의 목적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데 있습니다. 돌 자체를 의지하면 사무엘상 4장에서 언약궤를 부적으로 사용한 잘못을 반복하게 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에게 굴복하고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사무엘이 사는 동안 여호와의 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막으셨습니다. 앞에서는 여호와의 손이 블레셋 성읍들을 무겁게 눌렀고, 이제는 그 손이 이스라엘을 보호하십니다.

같은 하나님의 손이 대적에게는 심판이고 언약 백성에게는 구원이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 자체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의미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에게 그분의 전능은 보호와 소망이지만,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운 심판입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성읍들을 에그론에서 가드까지 되찾았습니다. 그 성읍들에 딸린 지역도 블레셋의 손에서 회복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습니다.

아모리 사람은 좁은 의미에서는 특정한 가나안 민족을 가리키지만 때로는 가나안 주민들을 넓게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여기서는 이스라엘 주변에 남아 있던 비블레셋계 주민들과 평화로운 관계가 형성되었음을 뜻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은 전쟁 한 번의 승리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잃어버린 지역을 회복하고 주변에 평화를 이루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죄는 관계와 삶의 질서를 무너뜨리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무너진 것을 회복하고 평화를 이루십니다.

사무엘은 사는 날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순회하며 그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을 재판했습니다. 그는 한곳에 머물며 백성이 찾아오기만 기다리지 않고 여러 지역을 다니며 말씀과 정의로 섬겼습니다.

벧엘은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관련된 중요한 장소였고, 길갈은 가나안 정착 초기의 기억을 가진 곳이며, 미스바는 회개와 승리가 일어난 장소였습니다. 사무엘은 이러한 중심 지역을 순회하며 백성의 분쟁을 판단하고 영적인 질서를 세웠습니다.

사무엘의 사역은 전쟁에서 승리를 얻어 주는 일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지속해서 백성을 다스리고 말씀에 따른 정의를 세웠습니다. 위기 때 한 번 뜨겁게 기도하는 것보다 평안한 날에 꾸준히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흥은 집회에서 눈물을 흘린 순간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회개 이후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과 정의에 따라 재구성되어야 합니다. 감정적인 결단이 가정과 관계, 경제생활과 공동체 안에서 구체적인 순종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사무엘은 순회를 마치면 자신의 집이 있는 라마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도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습니다. 라마는 사무엘의 일상과 사역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는 공적인 사역의 장소뿐 아니라 자신의 집이 있는 곳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공적인 자리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과 사적인 삶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경건하게 보이면서 가정에서는 말씀을 무시한다면 온전한 신앙이 아닙니다. 사무엘은 순회 사역과 일상의 자리 모두에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사무엘의 지도력은 엘리의 아들들과 대조됩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직을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사용했지만 사무엘은 백성을 위해 기도하고 여러 지역을 다니며 섬겼습니다. 참된 영적 권위는 사람에게서 빼앗는 데서 나오지 않고 하나님과 백성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는 섬김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사무엘도 이스라엘의 완전한 구원자는 아니었습니다. 다음 장에서 그의 아들들도 아버지의 길을 따르지 않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으며 재판을 굽게 합니다. 아무리 충실한 인간 지도자도 다음 세대의 신앙과 구원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사무엘 같은 신실한 인물을 보여 주면서도 인간 지도자에게 궁극적인 소망을 두지 않게 합니다. 이스라엘에는 죄가 없고 영원히 공의로 다스릴 완전한 선지자와 왕이 필요했습니다. 그 필요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하는 선지자이며 자기 백성을 위해 자신을 드린 대제사장이고 공의와 평화로 다스리는 영원한 왕이십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에벤에셀은 돌이나 과거의 체험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로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을 때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도우셨음을 보여 주는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내어 주심으로 죄와 사망의 손에서 우리를 건지셨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를 붙드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하신 구원을 끝까지 이루실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무엘상 7장은 참된 회복이 환경의 변화보다 마음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데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은 언약궤를 되찾고도 이십 년 동안 영적 공허 속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우상을 버리고 마음을 여호와께 향하며 죄를 고백했을 때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에 자리한 바알과 아스다롯을 제거해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돈과 성공, 사람의 인정과 욕망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죄를 후회하는 데 머물지 말고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 돌려 그분만을 섬겨야 합니다.

두려움이 찾아올 때 종교적 방법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오. 우리에게는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고 지금도 중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우리의 구원은 기도의 완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완전한 희생과 중보에 달려 있습니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며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고 고백하십시오. 실패와 눈물 속에서도 믿음을 지켜 주시고 다시 일으키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을 의지하여 오늘도 우상을 버리고, 말씀에 순종하며, 감사와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무엘상 4장 주해와 강해

하나님의 임재는 인간의 욕망에 붙들리지 않습니다

사무엘상 4장은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앞세우고 블레셋과 싸웠으나 참혹하게 패배하는 사건을 기록합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죽고 언약궤는 빼앗기며, 엘리와 비느하스의 아내까지 죽음에 이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블레셋의 신에게 패하신 사건이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는 백성의 종교적 확신을 심판하시고 자신의 영광을 스스로 지키신 사건입니다. 본문을 통해 신앙의 상징을 소유하는 것과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다른지를 깨닫기 원합니다.

언약궤를 앞세웠지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삼상 4:1-11)

사무엘상 4장은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이 문장은 앞장의 결론과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고,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온 이스라엘은 그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움을 받은 줄 알았습니다. 말씀이 희귀했던 시대에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다시 말씀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기록되는 전쟁에서 사무엘은 전면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을 앞두고 사무엘을 찾아가 하나님의 뜻을 묻거나 회개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임하기 시작했지만 백성은 말씀을 따라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소유하는 것과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다릅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싸우려고 나가 에벤에셀 곁에 진을 쳤고 블레셋은 아벡에 진을 쳤습니다. 블레셋은 가나안 남서부 해안 지역에 자리 잡은 강력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은 철기 기술과 조직적인 군사력을 바탕으로 이스라엘을 압박했습니다. 지파별로 흩어져 있던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군사력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웠습니다.

아벡은 해안 평야와 산지 사이를 잇는 전략적인 지역이었습니다. 이곳에서의 전투는 단순한 국경 분쟁이 아니라 블레셋이 이스라엘 산지로 세력을 확대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진 전쟁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맞서 싸웠지만 패배했고 약 사천 명이 전사했습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은 진영으로 돌아온 후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라고 질문합니다. 이 질문 자체에는 중요한 신학적 인식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은 전쟁의 결과가 군사력의 차이만으로 결정되지 않으며 이스라엘의 역사가 여호와의 주권 아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좋은 질문을 던지고도 잘못된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왜 여호와께서 우리를 패하게 하셨는가?”라고 물었다면 자신들의 죄와 언약적 불순종을 살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 회개하고 사무엘을 통하여 말씀을 구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묻는 대신 언약궤를 가져오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고 말합니다. 개역개정의 “그것으로”라는 표현은 그들이 언약궤 자체가 자신들을 구원할 것으로 기대했음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언약의 하나님을 찾기보다 언약궤라는 물건을 이용하려 했습니다.

언약궤는 이스라엘에게 매우 중요한 거룩한 상징이었습니다. 그 안에는 언약의 말씀을 기록한 돌판이 보관되었고, 속죄소 위에는 그룹들이 날개를 펼치고 있었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임재하시고 언약에 따라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언약궤가 하나님 그 자체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작은 상자 안에 갇혀 계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하나님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언약의 표징이지 인간이 하나님을 통제하는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과거 언약궤가 앞서 나갈 때 요단강이 갈라지고 여리고성이 무너진 일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의 승리는 언약궤라는 물건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백성이 그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주어진 승리였습니다.

이스라엘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방식만 모방하면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 없이 과거의 형식만 반복한다고 동일한 은혜가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의 형식을 복제할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주권을 복제할 수는 없습니다.

장로들은 첫 번째 전투의 패배를 회개의 기회로 삼지 않았습니다. 패배의 원인을 자신들의 영적 상태에서 찾지 않고 거룩한 상징물을 전쟁터에 가져오지 않은 데서 찾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려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사람을 실로에 보내 언약궤를 가져왔습니다. 본문은 그것을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라고 부릅니다. ‘그룹 사이에 계신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속죄소 위에서 자기 백성을 만나시고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실제로 그룹 사이의 공간에 제한되어 계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언약궤와 함께 홉니와 비느하스도 왔습니다. 이것은 매우 불길한 장면입니다. 그들은 제사장이라는 직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제사를 멸시했습니다. 백성은 거룩한 언약궤와 제사장들이 함께 오면 승리가 보장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언약궤를 따라온 사람들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었습니다.

언약궤가 진영에 들어올 때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자 땅이 울렸습니다. 백성의 함성은 대단했습니다. 두려움에 빠졌던 군대가 다시 용기를 얻었고,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는 확신이 진영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러나 큰 함성이 반드시 큰 믿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신앙의 열정은 소리의 크기로 측정되지 않습니다. 뜨거운 감정과 집단적인 흥분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크게 외치면서도 정작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배의 분위기는 뜨거운데 삶은 말씀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히브리 진영에서 들려오는 큰 함성의 이유를 묻습니다. 여호와의 궤가 진영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자 그들은 두려워하며 “신이 진영에 이르렀도다”라고 말합니다. 이어 “우리에게 화로다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라고 탄식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자신들의 다신교적 세계관을 따라 이해했습니다. 그들은 신들이 히브리 진영에 왔다고 생각하며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애굽을 여러 재앙으로 치셨다는 소문도 알고 있었습니다.

블레셋의 말에는 출애굽 사건에 대한 기억이 다소 혼합된 형태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행하신 재앙과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사건이 하나로 묶여 전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출애굽의 소문이 주변 민족에게까지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의 능력을 두려워했지만 여호와를 믿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정보를 아는 것과 하나님께 회개하고 순종하는 것은 다릅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알고 떨지만 그 지식이 구원하는 믿음은 아닙니다.

두려움에 빠진 블레셋 군대는 오히려 서로를 격려합니다. “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라”고 외칩니다. 히브리인들이 자신들을 종으로 삼지 못하도록 용기를 내어 싸우자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함성은 블레셋을 잠시 두렵게 했지만 그들의 전의를 꺾지는 못했습니다.

마침내 전투가 벌어졌고 이스라엘은 크게 패했습니다. 보병 삼만 명이 전사하고 각기 장막으로 도망했습니다. 첫 번째 전투에서 사천 명이 죽었지만 언약궤를 가져온 두 번째 전투에서는 훨씬 더 큰 희생이 발생했습니다. 인간적인 확신은 커졌지만 결과는 더 참혹했습니다.

언약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었습니다. 사무엘상 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두 아들이 같은 날 죽는 것이 엘리 가문에 대한 심판의 표징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상 3장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 집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루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전쟁의 비극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 말씀이 성취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패배는 여호와께서 블레셋의 신보다 약하셨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징계하시고 언약궤가 붙잡히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자신들의 전쟁 계획에 끌어들이려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종교적 조작을 거부하셨습니다.

언약궤를 전쟁터에 가져왔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불순종 편에 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지지하는 부족 신이 아닙니다. 언약 백성이라도 언약을 멸시하면 심판받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죄를 지어도 안전하다는 특권이 아니라 거룩하게 살아야 할 책임을 포함합니다.

오늘날 교회도 같은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성경책을 가지고 있고, 예배에 참석하며, 세례를 받고, 성찬에 참여하고, 교회 직분을 가졌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표지를 소유하는 것과 그 표지가 가리키는 은혜를 믿음으로 받는 것은 다릅니다.

세례와 성찬은 인간이 만든 빈 의식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귀한 은혜의 방편입니다. 그렇다고 의식에 참여하는 행위 자체가 회개와 믿음 없이 자동으로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께서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며 믿음으로 받게 하실 때 성례는 복음의 은혜를 확증합니다.

이스라엘은 언약궤를 존중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언약궤 안에 담긴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우리도 성경을 소중히 보관하면서 성경의 말씀에는 순종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걸어 두면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은 거절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을 소유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붙잡아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리고 그분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언약궤의 소식 앞에서 한 시대가 무너졌습니다(삼상 4:12-18)

전쟁터에서 한 베냐민 사람이 달려왔습니다. 그의 옷은 찢어졌고 머리에는 흙이 묻어 있었습니다. 옷을 찢고 머리에 흙을 뒤집어쓰는 것은 깊은 슬픔과 재난을 나타내는 고대의 표현이었습니다. 그의 모습만 보아도 전쟁의 결과가 얼마나 비참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실로에 이르렀을 때 엘리는 길 곁 자기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본문은 엘리가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마음을 떨고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엘리가 가장 염려한 것은 전쟁의 승패만이 아니라 언약궤의 운명이었습니다.

엘리는 언약궤가 전쟁터로 옮겨진 일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두 아들이 그 궤와 함께 갔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그는 아들들의 죄와 자기 집에 선고된 심판의 말씀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본문이 그의 구체적인 생각을 설명하지 않으므로 그가 무엇을 얼마나 깨달았는지는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언약궤로 인해 마음을 떨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엘리는 많은 면에서 실패했지만 하나님의 궤를 향한 경외심까지 완전히 잃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거룩한 것을 염려하는 마음이 있었으면서도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경건한 감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염려한다면 죄를 제지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행동이 따라야 합니다.

전령이 성읍에 들어와 소식을 전하자 온 성읍이 부르짖었습니다. 전쟁터에 나간 남편과 아들, 형제들을 잃은 가정들의 울음이 실로를 가득 채웠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잘못된 결정은 수많은 백성에게 고통을 가져왔습니다.

죄의 결과는 죄를 범한 개인에게만 머물지 않습니다. 특히 지도자의 탐욕과 잘못된 판단은 공동체 전체에 큰 상처를 남깁니다. 권한이 큰 사람에게 더 무거운 책임이 따르는 이유입니다. 교회와 가정, 사회에서 지도자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선택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두려움으로 살펴야 합니다.

엘리는 성읍의 소동을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묻습니다. 전령이 급히 와서 보고합니다. 당시 엘리는 아흔여덟 살이었고 눈이 어두워 보지 못했습니다. 육체적으로도 한 시대의 끝에 서 있었습니다.

전령은 자신이 전쟁터에서 도망쳐 왔다고 말합니다. 엘리가 “내 아들아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자 그는 네 가지 소식을 차례로 전합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 앞에서 도망했고, 백성 가운데 큰 살육이 있었으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었고,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습니다.

소식은 점점 더 무거워집니다. 군대의 패배에서 수많은 백성의 죽음으로, 백성의 죽음에서 두 아들의 죽음으로, 마침내 언약궤의 피탈로 이어집니다. 엘리에게 가장 마지막으로 전달된 소식은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다는 말이었습니다.

엘리는 자기 아들들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궤에 관한 말을 들었을 때 의자에서 뒤로 넘어졌습니다. 그는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본문은 그가 나이가 많고 몸이 무거웠다고 설명합니다.

‘무겁다’는 말은 히브리어 카베드(כָּבֵד)이며 ‘영광’을 뜻하는 카보드(כָּבוֹד)와 같은 어근에 속합니다. 이 어휘의 연결은 본문의 문학적 긴장을 깊게 합니다. 엘리와 그의 집은 하나님의 제물 가운데 가장 좋은 것으로 자신들을 살찌게 했습니다. 몸은 무거워졌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그 집에서 떠나고 있었습니다.

이 언어적 연결만으로 엘리의 모든 내면과 상태를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본문은 하나님보다 아들들을 중히 여기고 제물로 자신들을 살찌게 한 가문이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잃는 역설을 보여 줍니다.

엘리는 이스라엘의 사사로 사십 년 동안 다스렸습니다. 그는 오랜 시간 지도자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래 직분을 맡았다는 사실이 끝까지 충성했다는 것을 자동으로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신앙은 과거의 경력만으로 평가되지 않습니다.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엘리의 죽음은 한 개인의 생애가 끝난 사건이면서 한 제사장 시대가 무너진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엘리 집의 팔을 끊고 그 가문의 제사장적 특권을 거두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과 엘리가 같은 날 죽음으로써 그 심판은 역사 속에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더디다고 해서 심판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며 회개의 기회를 주시지만 죄를 무관심하게 바라보지는 않으십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오랫동안 제사를 멸시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정해진 때에 반드시 성취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죄에 대한 허락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심판이 보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를 인정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회개할 기회를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시간을 완고함으로 낭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엘리의 죽음은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감정과 실제 순종 사이의 간격을 돌아보게 합니다. 그는 언약궤 때문에 마음을 떨었지만 아들들의 범죄를 막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염려한다고 말하면서도 자기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우리도 교회의 위기와 세상의 타락을 걱정하면서 정작 자신의 죄는 방치할 수 있습니다. 나라와 교회를 위해 눈물 흘리면서 가정과 일터에서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막연한 종교적 염려보다 구체적인 회개와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이가봇의 시대에도 하나님의 영광은 패배하지 않습니다(삼상 4:19-22)

엘리의 며느리이며 비느하스의 아내는 임신하여 해산할 때가 가까웠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궤가 빼앗긴 것과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갑자기 진통을 시작합니다. 놀라움과 충격 속에서 몸을 구부리고 아이를 낳습니다.

그는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곁에 있던 여인들은 아들을 낳았으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아들의 출생은 가문의 계승과 어머니의 기쁨을 의미했습니다. 특히 남편과 시아버지를 잃은 상황에서 태어난 아들은 무너진 가문을 이어 갈 희망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느하스의 아내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고 마음에 두지도 않았습니다. 아들의 출생조차 그가 경험한 비극을 덮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지으며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고 말합니다.

이가봇은 히브리어 이카보드(אִי־כָבוֹד)입니다. 정확한 문법적 의미에 대해서는 “영광이 없다”, “영광이 어디 있는가” 또는 “영광스럽지 않다” 등 여러 설명이 제시됩니다. 그러나 본문 자체가 그 이름의 의미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는 말로 해석합니다.

‘영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보드(כָּבוֹד)는 무게와 존귀, 하나님의 장엄한 임재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함과 능력과 존귀를 드러내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의 영광은 군사력이나 인구, 제도에 있지 않았습니다. 언약 가운데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영광이었습니다.

비느하스의 아내는 하나님의 궤가 빼앗긴 것을 남편과 시아버지의 죽음보다 앞세워 말합니다. 본문은 그가 어떤 심리로 그렇게 말했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언약궤의 피탈이 단순히 거룩한 물건 하나를 잃어버린 사건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의 영적 재앙이라고 인식했습니다.

그는 다시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고 말합니다. 사무엘상 4장은 이가봇이라는 이름과 함께 끝납니다. 전쟁의 패배보다 더 무서운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실제로 블레셋에게 패배하여 능력과 영광을 잃으셨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본질적인 영광은 감소하거나 빼앗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영광스러우시며 피조물에 의해 포로가 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서 영광이 떠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에게 베푸시던 보호와 임재의 복을 거두어 심판하셨다는 뜻입니다. 언약궤는 블레셋의 손에 넘어갔지만 하나님께서 블레셋의 지배 아래 들어가신 것은 아닙니다. 이어지는 5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 군대의 도움 없이 다곤 신상을 무너뜨리고 블레셋 성읍들을 심판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지키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스스로 지키십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패배했다고 하나님의 능력이 약해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하는 이스라엘과 우상을 숭배하는 블레셋을 모두 심판하시며 자신만이 참된 하나님임을 드러내십니다.

언약궤가 블레셋 땅으로 들어가는 것은 겉으로 보면 포로가 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후의 이야기를 보면 언약궤는 포로라기보다 적진으로 들어가는 하나님의 심판 도구처럼 나타납니다. 다곤은 법궤 앞에 엎드러지고 블레셋 사람들은 재앙을 견디지 못해 언약궤를 돌려보냅니다.

그러므로 이가봇은 하나님의 영광 자체가 사라졌다는 선언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임재의 복을 상실했다는 슬픈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패배하지 않으셨습니다. 패배한 것은 하나님을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한 이스라엘의 잘못된 신앙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한다고 해서 모든 행동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간판과 제도, 전통이 남아 있어도 복음이 흐려지고 죄를 회개하지 않으며 사람의 욕망이 중심을 차지한다면 영적으로 이가봇의 상태에 이를 수 있습니다.

교회의 진정한 영광은 건물의 크기나 교인의 숫자, 사회적 영향력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바르게 선포되고, 말씀에 따른 회개와 사랑이 나타나며,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보다 인간의 성공을 추구하면 외형은 커져도 영광은 떠날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4장의 사건은 우리에게 종교적 상징과 하나님의 실제 임재를 혼동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언약궤는 거룩했지만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정당화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와 성례, 직분과 신앙의 언어는 귀하지만 회개 없는 삶을 자동으로 거룩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상징 자체가 아니라 그 상징이 가리키는 하나님입니다. 구약의 언약궤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임재하심을 나타냈습니다. 신약에서 하나님의 임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충만하게 나타났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자 제자들은 그분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뜻의 임마누엘이십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더 이상 특정한 상자나 장소에 갇히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보내 교회 가운데 거하시며 자기 백성을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름도 인간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종교적 도구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외친다고 우리의 탐욕과 야망이 자동으로 하나님의 뜻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내 계획에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고 자신의 뜻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세상 권력에 패배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제자들은 흩어지고 메시아에 대한 기대는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진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가장 깊이 드러난 자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활을 통하여 십자가의 패배처럼 보인 사건을 구원의 승리로 나타내셨습니다.

언약궤의 피탈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직접적인 예표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두 사건은 인간의 눈에 하나님의 영광이 패배한 것처럼 보일 때에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권적 뜻을 이루신다는 정경적 원리를 보여 줍니다. 인간의 실패와 악인의 승리가 하나님의 계획을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의 영광이 떠난 자리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엘리 가문은 무너졌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언약궤는 빼앗겼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폐기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 가운데서도 구원의 역사를 이어 가셨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무엘상 4장은 언약궤를 소유하고도 하나님을 잃어버릴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거룩한 언약궤가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신들의 승리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려 했습니다.

우리도 교회 출석과 직분, 세례와 성찬, 성경 지식과 신앙의 경력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은혜의 표지들이 가리키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외적인 형식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내 편으로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말씀 아래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궤가 빼앗기도록 허락하심으로 이스라엘의 거짓된 확신을 무너뜨리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 자체가 패배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스스로 지키시며 인간의 실패 속에서도 구원의 계획을 이루십니다.

우리의 소망은 종교적 상징이나 인간 지도자에게 있지 않습니다. 참된 임마누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이용하려 하지 말고 그분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십시오. 말씀 앞에서 죄를 살피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무겁게 여기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무엘상 3장 주해와 강해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사무엘상 3장은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해진 어두운 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엘리의 눈은 점점 어두워지고 그의 가문은 심판을 향하지만,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소에 누워 있던 어린 사무엘을 부르시고 말씀을 맡기시며 온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세우십니다. 이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의 종을 어떻게 부르시는지, 그리고 말씀을 듣고 전하는 사람이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기 원합니다.

말씀이 희귀한 시대에도 하나님의 등불은 꺼지지 않습니다(삼상 3:1-10)

사무엘상 3장은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사무엘은 아직 어렸지만 실로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는 제사장 엘리의 감독 아래 있었으나 그가 섬기는 궁극적인 대상은 엘리가 아니라 여호와였습니다.

당시 실로의 상황은 매우 어두웠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이라는 직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호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백성이 드린 제물을 강제로 빼앗고 성소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하며 하나님의 거룩함을 짓밟았습니다. 엘리는 그들의 죄를 알고 책망했지만 실질적으로 제지하지 못했습니다.

한쪽에서는 제사장 가문이 무너지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어린 사무엘이 여호와 앞에서 자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시대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오래된 제사장 가문이 심판을 향하는 동안 새로운 말씀의 종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본문은 그때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했다고 말합니다. ‘희귀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카르(יָקָר)는 귀중하다, 값비싸다, 드물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치가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계시의 말씀이 자주 임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다”는 표현도 같은 현실을 보여 줍니다. ‘이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존(חָזוֹן)은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보여 주시는 환상이나 계시를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히 침묵하신 것은 아닙니다. 사무엘상 2장에서도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심판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전체에 하나님의 뜻을 지속해서 전할 선지자적 사역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말씀이 희귀해진 것은 단순히 선지자의 숫자가 부족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백성과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예배를 멸시한 영적 현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것은 인간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가 아니라 은혜입니다. 말씀을 거절하면서도 하나님께서 계속 말씀해 주셔야 한다고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책과 설교가 많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하게 들리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자기 생각을 확인하는 도구로만 사용하고, 듣기 좋은 부분만 취하며, 회개를 요구하는 말씀을 외면한다면 풍요 속에서도 말씀의 기근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진정한 위기는 프로그램이나 재정이 부족한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지 않고, 선포된 말씀 앞에 회개와 순종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더 큰 위기입니다. 말씀을 잃은 교회는 외형이 화려해도 방향을 잃습니다.

본문은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때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먼저 나이가 든 엘리의 육체적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야기 전체에서는 그의 영적 분별력이 흐려진 현실과도 자연스럽게 겹쳐집니다. 엘리는 한나의 간절한 기도를 술 취한 행동으로 오해했고, 아들들의 죄를 알면서도 단호하게 제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엘리를 아무런 장점도 없는 악인으로만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한나를 축복했고 어린 사무엘을 돌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 것을 뒤늦게나마 알아차리고 응답하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문제는 그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삶과 가정 안에서 끝까지 실천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부분적인 지식이 전적인 순종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능력이 있어도 자신에게 불리한 말씀에는 순종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바른 길을 가르치면서 자기 가정과 삶에서는 말씀을 외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알고 있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엘리가 자기 처소에 누워 있을 때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가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워 있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전은 솔로몬이 세운 성전이 아니라 당시 실로에 있던 성막과 그 주변의 성소 시설을 가리킵니다. 사무엘이 언약궤가 놓인 지성소 안에서 잤다는 뜻이라기보다 언약궤가 있는 성소 가까이에서 맡은 일을 수행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하나님의 등불이 아직 꺼지지 않았다”는 말은 당시의 시간을 알려 줍니다. 성소의 등불은 저녁부터 아침까지 밝혀 두었으므로 아직 새벽이 되기 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문학적으로도 깊은 의미를 전달합니다. 엘리의 눈은 어두워지고 여호와의 말씀은 희귀했지만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상황이 어두워도 하나님의 언약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사장들이 성소를 더럽혀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처럼 보여도 교회의 머리이신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과 백성을 보존하십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등불이 꺼졌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등불 곁에는 어린 사무엘이 누워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낡은 시대가 저물어 가는 동안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어둠만 바라보며 절망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사람을 세우십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하고 곧바로 엘리에게 달려갔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힌네니(הִנְנִי)는 자신의 위치만 알리는 표현이 아닙니다. 부르는 사람 앞에 자신이 준비되어 있다는 응답입니다.

사무엘은 부름을 들었지만 그 음성의 주인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엘리가 자신을 불렀다고 생각했습니다. 엘리는 부르지 않았다며 다시 누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두 번째로 부르셨을 때도 사무엘은 엘리에게 달려갔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즉시 알아듣지 못했다고 해서 그에게 믿음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사무엘이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았다는 의미라기보다 선지자에게 임하는 직접적인 계시를 아직 경험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2장은 이미 사무엘이 여호와 앞에서 섬기며 은총을 받았다고 기록했습니다.

사무엘은 성소에서 봉사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아 전하는 선지자적 소명은 아직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서는 것은 구별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한 사무엘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첫 번째 부름을 분별하지 못하자 다시 부르셨고, 두 번째에도 알지 못하자 세 번째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주권과 함께 인내가 나타납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고도 그 뜻을 한 번에 깨닫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못 해석하고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쉽게 버리지 않으십니다. 말씀을 반복하여 들려주시고 교회의 가르침과 성도의 권면을 통하여 깨닫게 하십니다.

사무엘이 세 번째로 찾아왔을 때 엘리는 여호와께서 아이를 부르신 줄 깨달았습니다. 그는 사무엘에게 다시 누웠다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대답하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완전한 엘리의 도움도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이 엘리의 잘못을 없애 주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섭리가 인간의 한계를 넘어 일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부족한 부모와 교사, 목회자라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다음 세대를 말씀 앞으로 인도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영적 지도자의 목적은 사람을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분별하며 순종하도록 돕는 것이 바른 지도입니다. 엘리는 사무엘에게 자신만 바라보라고 하지 않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도록 안내했습니다.

사무엘이 다시 누웠을 때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사무엘아 사무엘아”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름을 두 번 반복하여 부르는 것은 친밀함과 사명의 중요성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이름 없는 도구로 다루지 않으시고 그의 이름을 아시며 인격적으로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이 먼저 선지자가 되겠다고 나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그를 찾아오시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출발점은 인간의 야망이나 자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은혜입니다.

사무엘은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듣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샤마(שָׁמַע)는 단순히 소리를 듣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의 깊게 듣고 받아들여 순종한다는 뜻을 포함합니다. 성경적인 들음은 귀에서 끝나지 않고 삶으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말씀해 달라고 기도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이 원하는 말씀만 기다릴 때가 있습니다. 위로와 축복의 말씀은 원하지만 죄를 드러내고 삶의 방향을 바꾸라는 말씀은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종은 주인의 말씀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는 고백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든 받아들이겠다는 순종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생각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과 욕망을 하나님의 말씀 아래 내려놓는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성도가 사무엘처럼 새로운 계시를 받는 선지자로 부름받은 것은 아닙니다. 사무엘의 부르심은 이스라엘 역사의 특별한 시점에 주어진 선지자적 소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먼저 은혜로 부르시고, 부름받은 사람은 말씀 앞에서 듣고 순종해야 한다는 원리는 모든 성도에게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종은 어려운 말씀도 숨기지 않아야 합니다(삼상 3:11-18)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처음 맡기신 말씀은 개인적인 축복이나 성공의 약속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의 집에 내려질 심판의 말씀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선지자로서 처음 감당해야 할 사명은 자신을 돌보아 준 엘리에게 가장 무거운 말씀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보라 내가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귀가 울린다는 표현은 그 소식을 듣는 사람이 충격과 두려움에 사로잡힐 만큼 엄중한 사건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의 집을 향하여 말씀하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루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사무엘상 2장에서 한 하나님의 사람이 이미 엘리에게 가문의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사무엘에게 주어진 말씀은 앞서 내려진 판결을 다시 확인하고 확정하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빈말로 끝나지 않습니다. 인간은 약속하고도 능력이 없어 이루지 못할 수 있고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며 신실하시므로 자신이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한 소망이고 심판의 경고는 두려움으로 받아야 할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의 집을 심판하시는 이유를 다시 설명하십니다. 엘리는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는 범죄를 저지르는 줄 알고도 그들을 금하지 않았습니다. 엘리가 아들들의 모든 죄를 직접 범한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와 대제사장으로서 그들을 제지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엘리는 아들들의 죄를 전혀 지적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앞장에서 그들의 행실이 좋지 않다고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말로만 경고했을 뿐 그들을 제사장 직무에서 물러나게 하거나 범죄를 막는 실질적인 조치를 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에서 ‘금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카하(כָּהָה)는 억제하다, 제지하다, 약하게 만들다는 뜻을 가집니다. 엘리는 아들들의 범죄를 알았지만 그들이 더는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자신의 책임과 권한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죄를 알고 말로 지적하는 것만으로 책임이 끝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의 죄를 알고도 관계가 불편해질까 두려워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지도자도 공동체의 명예와 체면을 지키기 위해 범죄를 덮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은 죄를 모른 척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사람과 공동체를 파괴하지 못하도록 진리 안에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엘리가 아들들을 제지하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보다 아들들을 더 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백성의 안전보다 가족의 관계와 아들들의 지위를 더 무겁게 여겼습니다.

우리도 입술로는 하나님을 가장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실제 선택에서는 사람의 평가와 가족의 욕망, 돈과 체면을 더 중요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잃을 때 가장 두려워하는지를 살펴보면 마음속에서 무엇을 가장 중히 여기고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 집의 죄악이 제물로나 예물로나 영원히 속죄받지 못할 것이라고 맹세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어떤 죄인도 회개하거나 용서받을 수 없다는 보편적인 선언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엘리 가문에 내려진 특별한 역사적·언약적 심판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 자체를 이용하여 범죄했습니다. 그들은 백성이 드린 제물을 강제로 빼앗고 하나님의 몫보다 자신의 욕망을 앞세웠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다시 제물을 드린다는 종교적 행위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회개 없는 제사는 죄를 덮는 마술이 아닙니다. 예배에 참석하고 헌금하며 봉사한다고 해서 완고하게 붙들고 있는 죄가 자동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종교적인 행위로 매수되는 분이 아닙니다. 참된 예배는 죄를 감추는 가면이 아니라 말씀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은혜를 구하는 자리입니다.

짐승의 제사 자체에는 죄를 제거하는 독립적인 능력이 없었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은혜의 방편이며 장차 이루어질 완전한 속죄를 바라보게 했습니다. 궁극적인 속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단번에 제물로 드리심으로 완성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죄를 가볍게 여기게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와 참으로 연합한 사람은 성령의 역사로 죄를 미워하며 회개와 거룩함의 길을 걷습니다. 은혜는 죄 가운데 머물게 하는 구실이 아니라 죄에서 돌이키게 하는 능력입니다.

사무엘은 아침까지 누워 있다가 여호와의 집 문을 열었습니다. 밤에 하나님의 엄중한 말씀을 들었지만 아침이 되자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수행했습니다. 특별한 계시를 경험했다고 해서 일상의 책임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이 성소의 문을 여는 장면은 먼저 그가 수행하던 실제적인 봉사입니다. 동시에 말씀이 희귀했던 밤이 지나고 사무엘을 통하여 새로운 말씀의 시대가 열리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엘리의 눈은 어두워졌지만 아침의 문은 사무엘의 손으로 열리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 받은 이상을 엘리에게 알리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엘리는 그를 어린 시절부터 돌본 사람이며 제사장으로서 권위를 가진 어른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그의 가문이 심판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전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은 사무엘이 두려움을 느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종도 어려운 사명을 앞두면 두려울 수 있습니다. 믿음은 두려움이 전혀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두려움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무겁게 여기며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엘리는 사무엘을 불러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물었습니다. 그리고 한마디라도 숨기지 말고 모두 전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하나도 숨기지 않고 모두 전했습니다.

선지자는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더하거나 빼지 않고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위로해야 할 때 위로하고, 죄를 책망해야 할 때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책망해야 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것만 골라 말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성도들의 반응과 자신의 인기, 인간관계를 생각하여 불편한 진리를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말씀의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입니다. 주인이 맡기신 것을 충실하게 전달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진리를 전한다는 이유로 거칠고 무례하게 말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무엘은 엘리를 공격하거나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심판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움과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참된 설교에는 말씀에 대한 충성과 영혼에 대한 사랑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엘리는 사무엘의 말을 들은 후 “이는 여호와이시니 선하신 대로 하실 것이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에는 하나님께서 주권자이시며 그분의 판단이 옳다는 인정이 담겨 있습니다. 엘리는 사무엘을 거짓말쟁이라고 몰아세우거나 하나님의 판결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엘리의 온전한 회개로 이상화하는 것도 신중해야 합니다. 본문은 그가 아들들을 직무에서 제거하거나 가문을 회개로 이끌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의 말에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이 담겨 있을 수 있지만, 이미 내려진 판결을 체념하듯 받아들이는 모습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말이 책임을 회피하는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시겠지요”라는 말로 자신이 해야 할 회개와 순종을 미뤄서는 안 됩니다. 참된 섭리 신앙은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면서도 지금 해야 할 책임을 충실히 감당하게 합니다.

말씀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세우십니다(삼상 3:19-21)

사무엘상 3장의 마지막은 사무엘이 온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확립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라고 기록합니다.

사무엘은 한 번의 특별한 체험으로 완성된 사람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계속 자랐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성숙의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은혜로 부름받은 사람도 말씀을 배우고 훈련받으며 인내와 순종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사무엘의 사역을 가능하게 한 결정적인 힘은 뛰어난 언변이나 인간적인 매력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셨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 다윗의 사역도 하나님의 임재로 가능했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자기 능력만으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말을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는 것은 사무엘이 일상적으로 말한 모든 문장이 오류가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로서 맡기신 말씀이 헛되이 끝나지 않고 역사 속에서 성취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떨어지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팔(נָפַל)은 말이나 약속이 무산되고 효력을 잃는 모습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이 전한 말씀을 이루심으로 그가 참된 선지자라는 사실을 증명하셨습니다.

선지자의 권위는 강한 말투나 자기 확신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말씀을 맡기시며 그 말씀을 이루시는 데서 나옵니다. 오늘날 설교자의 권위도 직함이나 유명세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고 충실하게 전할 때 말씀 자체가 가진 권위로 섬기게 됩니다.

설교자는 성경 위에 서서 말씀을 평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 아래에 서서 말씀의 판단을 먼저 받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시대의 유행을 하나님의 뜻처럼 포장하지 말고 본문이 실제로 말하는 바를 성실하게 전해야 합니다.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온 이스라엘은 사무엘이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움을 받은 줄 알았습니다. 단은 이스라엘의 북쪽을, 브엘세바는 남쪽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이스라엘 전역을 의미합니다.

실로의 성소에서 조용히 부름받은 어린아이가 이제 온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로 인정받았습니다. 사무엘이 스스로 선지자임을 주장하여 지위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이루시고 공동체 가운데 그의 사역을 확증하셨습니다.

‘세움을 입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에만(נֶאֱמָן)은 확립되다, 신실한 것으로 확인되다라는 뜻입니다. 사무엘의 영적 권위는 자기 홍보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과 오랜 충실함을 통하여 세워졌습니다.

참된 영적 권위는 자신을 높인다고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리에서 말씀과 삶이 일치하도록 오랫동안 충실하게 섬길 때 공동체 안에서 확인됩니다. 권력으로 강요한 권위는 사람을 억누르지만 진리와 섬김으로 형성된 권위는 공동체를 살립니다.

여호와께서는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장의 시작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고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지만,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실로에서 계속 나타나셨습니다. 말씀의 기근이 말씀의 풍성함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변화는 사무엘의 특별한 능력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셨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이성만으로 하나님의 본질과 구원의 뜻을 완전히 알아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어 말씀해 주셔야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간의 추측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자신을 가장 충만하게 나타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달한 많은 선지자 가운데 한 사람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분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영원한 말씀입니다.

사무엘은 엘리 집에 임할 심판을 전했지만 그 심판을 대신 짊어질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셨을 뿐 아니라 자기 백성이 받아야 할 심판을 십자가에서 담당하셨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숨기지 않고 전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주신 말씀을 온전히 전하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세움을 받았지만 예수님은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의 직분을 완전하게 이루신 중보자이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새로운 계시를 찾아 방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록된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성령의 조명을 구하며,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성경과 분리된 다른 복음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을 깨닫고 믿고 살아 내도록 역사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사무엘처럼 새로운 정경적 계시를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성경을 통하여 이미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을 겸손히 듣고 순종하겠다는 고백입니다.

교회가 시대의 관심을 얻는 데만 몰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잃으면 화려한 외형이 있어도 영적으로는 어둡습니다. 반대로 규모가 작고 세상에서 주목받지 못하더라도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고 순종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등불로 사용하십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무엘상 3장은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고 지도자의 눈이 어두워진 시대에도 하나님의 등불은 꺼지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사무엘을 이름으로 부르시고 말씀을 맡기셨으며, 그 말씀을 이루심으로 그를 온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세우셨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을 찾는 마음이 아니라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고백하는 마음입니다. 위로와 약속뿐 아니라 죄를 드러내고 회개를 요구하는 말씀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말로만 인정하지 말고 깨달은 말씀을 실제 순종으로 옮겨야 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인간의 반응을 두려워하여 진리를 숨기지 말아야 합니다. 동시에 진리를 자신의 분노를 쏟는 도구로 사용하지 말고 사랑과 겸손으로 전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사람도 자기 생각에 맞는 부분만 골라 취하지 말고 성경의 가르침 아래 자신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인간 지도자의 완전함에 있지 않습니다. 영원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성령께서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교회를 보존하십니다. 시대가 아무리 어두워 보여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습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듣고, 들은 말씀을 충실히 전하며, 삶으로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무엘상 1장 주해와 묵상

 

눈물로 시작된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

사무엘상은 왕궁이나 전쟁터가 아니라 한 여인의 눈물과 기도에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등불이 희미해지고 제사장 가문마저 타락하던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자녀가 없어 고통받던 한나를 통하여 새로운 역사를 준비하셨습니다. 사무엘상 1장은 고난이 하나님의 부재를 의미하지 않으며, 하나님께 드린 기도는 우리의 문제만 아니라 우리 자신까지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본문을 통하여 우리의 눈물을 들으시고 가장 연약한 자리에서 구원의 일을 시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기 원합니다.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께 올라가는 믿음(삼상 1:1-8)

사무엘상 1장은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의 새로운 역사는 예루살렘의 왕궁이나 유명한 전쟁터가 아니라 에브라임 산지의 한 평범한 가정에서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역사를 움직이는 힘이 권력과 군대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름 없는 가정과 한 사람의 기도를 통하여 한 시대를 바꾸십니다.

엘가나는 여로함의 아들이며 에브라임 산지에 거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역대상에 기록된 계보에 따르면 사무엘의 가문은 레위 지파의 고핫 계열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엘가나를 에브라임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반드시 혈통이 에브라임 지파였다는 뜻이라기보다 그가 에브라임 지역에 거주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엘가나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이름은 한나이고 다른 사람의 이름은 브닌나였습니다. 성경이 일부다처제의 현실을 기록한다고 해서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승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 질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성경은 일부다처 가정에서 발생한 갈등과 상처를 숨기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서는 사라와 하갈이 갈등했고, 야곱의 가정에서는 레아와 라헬이 경쟁했습니다. 엘가나의 가정에서도 두 아내 사이의 질투와 상처가 깊어졌습니다.

브닌나에게는 자녀가 있었지만 한나에게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한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한나(חַנָּה)이며 ‘은혜’ 또는 ‘호의’라는 뜻을 가집니다. 은혜라는 이름을 가진 한나의 현실은 은혜와 정반대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름은 은혜였지만 그의 마음에는 오랜 눈물이 있었고, 가정 안에는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가 있었습니다.

우리도 이와 비슷한 모순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만 현실에서는 버림받은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은혜를 고백하면서도 고통을 겪고, 기도하면서도 응답을 기다리며, 믿음으로 살아가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결핍을 만납니다. 그러나 사무엘상 1장은 우리가 느끼는 현실의 모순이 하나님의 은혜를 부정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오히려 은혜는 우리의 결핍 속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습니다.

엘가나는 해마다 자기 성읍에서 나와 실로에 올라가 만군의 여호와께 예배하며 제사를 드렸습니다. 당시 실로에는 성막과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사사 시대의 혼란과 가정의 갈등 속에서도 엘가나는 가족을 데리고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본문은 그가 한두 번 올라갔다고 말하지 않고 “매년” 올라갔다고 기록합니다. 신앙은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라 반복되는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삶이 평안할 때만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사무엘상에서 하나님은 처음으로 “만군의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히브리어로 여호와 체바오트(יְהוָה צְבָאוֹת)입니다. 체바오트는 군대들 또는 하늘의 무리를 뜻합니다. 만군의 여호와라는 칭호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스리시는 주권자라는 사실을 선언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압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지파들은 분열되어 있었고, 하나님의 백성을 이끌 영적 지도자도 부족했습니다.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이라는 직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제사를 멸시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진정한 소망은 인간의 지도자나 군사 조직에 있지 않았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여전히 역사를 통치하고 계셨습니다.

실로에서 제사장으로 섬기던 엘리의 두 아들은 이미 타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엘가나는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실로로 올라갔습니다. 지도자의 타락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폐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실망했다고 해서 하나님까지 떠나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불완전함과 지도자의 부족함은 슬픈 일이지만, 그것이 예배를 포기할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자기 백성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엘가나는 제사를 드린 후 브닌나와 그의 자녀들에게 제물의 몫을 나누어 주고 한나에게는 특별한 몫을 주었습니다. 개역개정은 이를 “갑절”이라고 번역합니다. 히브리어로는 마나트 아파임(מָנָה אַחַת אַפָּיִם)이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견해가 나뉘지만, 엘가나가 한나를 특별히 사랑하여 좋은 몫을 주었다는 뜻은 분명합니다.

엘가나는 한나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의 사랑도 한나의 깊은 상처를 완전히 채워 주지는 못했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소중하지만 전능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하거나 모든 상처를 치유할 수 없습니다. 사랑받고 있으면서도 슬플 수 있고, 가족이 곁에 있어도 외로울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서 받을 수 없는 위로가 있으며 오직 하나님께서만 만지실 수 있는 마음의 자리가 있습니다.

본문은 한나에게 자녀가 없는 현실을 설명하면서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라고 기록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우리를 당황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한나의 불임을 우연이나 운명의 장난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고난까지도 하나님의 주권 밖에 있지 않다고 증언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질병이나 불임을 개인의 죄에 대한 형벌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한나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자녀를 낳지 못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는 것은 고난을 겪는 사람에게 함부로 죄의 책임을 묻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한나는 자신에게 왜 이런 고통이 주어졌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단지 한 가정에 아들을 주시는 것보다 훨씬 큰 일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닫힌 태를 여심으로써 이스라엘의 닫힌 시대를 여실 것이었습니다. 한나가 원한 것은 아들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은 한 시대를 깨우는 선지자였습니다.

성경의 구속사는 인간의 불가능에서 하나님의 가능성이 시작되는 장면을 반복해서 보여 줍니다. 사라의 태가 닫혀 있을 때 이삭이 태어났고, 리브가와 라헬의 기다림 가운데서 언약의 자녀들이 태어났습니다. 삼손의 어머니도 자녀를 낳지 못하던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자랑할 수 없는 자리에서 생명과 구원을 시작하십니다. 구원은 인간의 힘이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브닌나는 한나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했습니다. 본문의 표현은 한두 번의 말다툼이 아니라 반복적이고 의도적으로 한나의 상처를 자극했다는 뜻입니다. 특히 온 가족이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이런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예배의 자리가 한나에게는 은혜의 자리인 동시에 자신의 결핍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브닌나는 자신이 받은 자녀라는 선물을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는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감사의 이유로 삼지 않고 자신이 한나보다 우월하다는 증거로 삼은 것입니다. 은혜가 자랑으로 변하면 다른 사람을 찌르는 칼이 됩니다. 건강과 자녀, 재산과 학력, 재능과 직분은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할 근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감사하며 섬길 이유입니다.

한나는 울고 먹지 않았습니다. 그의 슬픔은 마음을 넘어 몸에까지 영향을 주었습니다. 엘가나는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고 말합니다. 이 말에는 한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 있지만 그의 아픔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한계도 나타납니다.

엘가나는 자신이 한나를 특별히 사랑하므로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상처는 논리로만 해결되지 않습니다. “좋은 것이 많은데 왜 그것만 생각합니까?”라는 말은 위로처럼 보이지만 상대방의 아픔을 축소할 수 있습니다. 참된 위로는 상대방의 슬픔을 평가하거나 서둘러 답을 주는 데 있지 않습니다.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아픔 곁에 조용히 머물러 주는 데서 시작합니다.

한나는 남편의 사랑을 받고 있었지만 여전히 아팠습니다. 이는 엘가나의 사랑이 가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사랑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만 채우실 수 있는 자리를 사람에게 요구하면 사랑하는 사람도 지치고 우리도 실망하게 됩니다. 사람은 곁에 서 줄 수 있지만 우리의 가장 깊은 공허를 채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한나의 고통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고통은 한나를 하나님께로 이끄는 길이 되었습니다. 고난 자체가 자동으로 사람을 성숙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고난을 겪으며 더 완고해지고 다른 사람을 원망합니다. 중요한 것은 고난을 누구에게 가지고 가느냐입니다. 한나는 자신의 상처를 브닌나에게 되갚는 데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을 끝없이 원망하는 데 머물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픔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마음을 쏟아 놓을 때 시작되는 변화(삼상 1:9-18)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 한나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한나가 일어나니”라는 표현은 단순한 신체 동작 이상의 울림을 줍니다. 그는 울고 먹지 못할 정도로 괴로웠지만 그 슬픔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일어났습니다. 믿음은 전혀 아프지 않은 상태가 아닙니다. 아픔이 있어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한나는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했습니다. “마음이 괴롭다”는 표현에는 히브리어 마라트 나페쉬(מָרַת נָפֶשׁ)가 사용됩니다. 이는 영혼이 쓰리고 비통한 상태를 뜻합니다. 한나는 자신의 감정을 경건한 말로 포장하지 않았습니다. 아프면 아픈 대로, 서러우면 서러운 대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개혁주의 신앙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는 것은 감정을 억누르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숙명론이 아닙니다. 성경의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고 믿었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지 않으신다면 기도할 이유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시기에 우리는 그분께 우리의 사정을 아뢸 수 있습니다.

한나는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라고 기도합니다. 그는 자신의 기도에서 세 번이나 자신을 “주의 여종”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요구할 권리가 있는 사람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비천함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도 고통을 숨김없이 아룁니다. 참된 기도에는 하나님을 향한 담대함과 피조물로서의 겸손이 함께 있습니다.

한나는 하나님께 자신의 고통을 돌보시고, 자신을 기억하시며, 잊지 말아 달라고 간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실제로 한나를 잊으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다는 말은 잊었던 정보를 다시 떠올리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기억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자카르(זָכַר)는 하나님께서 언약에 따라 구원하는 행동을 시작하신다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기억하셨을 때 홍수의 물이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을 때 롯을 심판 가운데서 건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라헬을 기억하셨을 때 그의 태를 여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기억하소서”라는 기도는 “주님의 언약과 은혜에 따라 나를 위하여 일하여 주십시오”라는 간구입니다.

고난이 길어지면 우리는 하나님께 잊힌 것처럼 느낍니다. 다른 사람의 기도에는 응답하시면서 내 기도에는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침묵은 망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일하시며 자신의 때에 뜻을 드러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붙들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언약의 손으로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한나는 아들을 주시면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않겠다고 서원합니다.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는다는 표현은 민수기 6장의 나실인 규례를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본문은 포도주를 금하는 것과 같은 나실인의 모든 규정을 명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무엘을 전형적인 나실인이라고 단정하기보다는 태어나기 전부터 평생 하나님께 구별되어 드려질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한나의 기도에서 놀라운 점은 그가 아들을 구하면서도 아들을 자신의 소유로 붙잡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한나는 아들을 얻어 브닌나를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상처 입은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아들을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을 평생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했습니다.

기도하는 동안 한나의 소원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헌신으로 변화되어 갔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결핍 때문에 울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쏟으면서 자신이 받을 선물을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드릴 것을 결단했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중요한 사역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설득하여 내 뜻을 이루게 하는 기술이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의 마음과 소원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새롭게 정돈되는 은혜의 자리입니다.

한나의 서원을 하나님과의 거래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아들을 하나님께 드릴 테니 반드시 아들을 주셔야 합니다”라는 흥정이 아닙니다. 한나는 자신도 하나님의 여종이고 자신이 받을 자녀도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했습니다. 참된 서원과 헌신은 하나님을 움직이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받은 은혜가 본래 하나님께 속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한나가 오래 기도하는 동안 엘리는 그의 입을 주목했습니다. 한나는 속으로 말하므로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일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엘리는 한나가 술에 취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고 책망했습니다.

이 장면에는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현실이 역설적으로 나타납니다. 제사장은 술에 취한 사람과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을 구별하지 못했습니다. 엘리는 한나의 움직이는 입술은 보았지만 그 안에 있는 상한 영혼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한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기 전에 판단부터 내렸습니다.

우리도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성급하게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말이 없는 사람을 교만하다고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믿음이 부족하다고 판단합니다. 예배 중에 표정이 어두운 사람을 은혜가 없는 사람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는 차마 말하지 못하는 고통이 있을 수 있고, 그 눈물 속에는 하나님을 놓치지 않으려는 믿음이 담겨 있을 수 있습니다. 영적인 분별은 사람을 빨리 정죄하는 능력이 아니라 그 영혼의 아픔을 오래 바라보는 사랑에서 시작합니다.

한나는 억울한 오해를 받았지만 엘리에게 거칠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라고 대답합니다.

“심정을 통하였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내 영혼을 쏟아 놓았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쏟다’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샤파크(שָׁפַךְ)는 물을 붓듯이 쏟아 내는 동작을 나타냅니다. 네페쉬(נֶפֶשׁ)는 단순한 감정의 한 부분이 아니라 생명과 영혼, 존재 전체를 가리킵니다. 한나는 종교적인 말 몇 마디를 반복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전체를 하나님 앞에 쏟았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새로운 정보를 전달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하기 전에 우리의 형편과 필요를 아십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 닫혀 있던 마음을 열어 드리고, 두려움과 상처와 소원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행위입니다.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말할 수 없습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도 끝내 설명할 수 없는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정리된 문장으로 기도하지 못해도 됩니다. 말보다 눈물이 먼저 흘러도 되고, 깊은 탄식만 나와도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문의 완성도나 유창함을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한나는 자신을 불량한 여자로 여기지 말아 달라고 말합니다. ‘불량한 여자’라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벨리야알의 딸이라는 말입니다. 벨리야알(בְּלִיַּעַל)은 무가치함이나 사악함, 무법함을 뜻합니다. 한나는 술에 취하여 무질서하게 행동한 것이 아니라 원통함과 격분됨이 많아 지금까지 기도했다고 설명합니다.

엘리는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고 축복합니다. 엘리가 한나의 기도에 반드시 아들이 주어질 것을 예언한 것인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축복을 한 것인지는 본문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나가 그 말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입니다.

한나는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하고 돌아가서 먹었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다시 근심 빛이 없었습니다. 아직 아이를 얻지 못했습니다. 외적인 상황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브닌나는 그대로 있었고, 닫힌 태도 아직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나의 얼굴이 달라졌습니다.

기도의 첫 번째 응답은 때로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마음의 변화로 찾아옵니다. 기도하기 전에는 한나가 문제를 붙들고 있었지만, 기도한 후에는 그 문제를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는 응답을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기 시작했습니다.

참된 평안은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스스로 확신하는 데서 오지 않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내가 정한 방법과 시간에 반드시 응답하실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결과가 하나님의 손에 있고 그분의 뜻이 선하다는 사실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평안은 원하는 결과를 손에 넣은 데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선하신 하나님의 손에 맡긴 데서 옵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도 계속 문제를 움켜쥐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입술로는 맡긴다고 말하면서 마음으로는 수많은 결과를 계산합니다. 기도한 뒤에도 불안이 찾아올 수 있지만, 그때마다 다시 하나님의 성품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보다 지혜로우시고, 우리보다 멀리 보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나의 얼굴이 달라진 것은 상황을 가볍게 생각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아들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소원보다 하나님을 더 크게 보기 시작했습니다. 문제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문제보다 커진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가 우리 안에 일으키는 변화입니다.

기억하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삼상 1:19-28)

엘가나의 가족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라마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한나는 아직 응답을 확인하지 못했지만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 소원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예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예배했습니다. 참된 예배는 응답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응답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엘가나가 그의 아내 한나와 동침하자 본문은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에서도 ‘기억하다’라는 뜻의 자카르가 사용됩니다. 하나님께서 한나를 기억하셨다는 것은 한나의 존재를 잠시 잊었다가 다시 떠올리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한나를 위하여 은혜의 행동을 시작하셨다는 뜻입니다.

생명의 탄생에는 엘가나와 한나의 정상적인 부부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합니다. 인간의 책임과 하나님의 주권은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하신 질서와 인간의 일상적인 행동을 통하여 뜻을 이루십니다. 우리가 일하고 선택하며 책임을 다하지만 그 모든 일을 붙드시고 열매 맺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때가 이르러 한나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사무엘이라고 지었습니다. 한나는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구하다’라는 의미로 샤알(שָׁאַל)이라는 동사가 사용됩니다. 사무엘이라는 이름의 정확한 어원과 이 동사의 언어적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본문은 사무엘이라는 이름을 한나의 간구와 하나님의 응답에 연결합니다. 사무엘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께서 한나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살아 있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한나 개인의 기쁨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기도를 사용하여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이자 선지자가 될 사람을 준비하셨습니다. 한나는 자기 가정에 아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전체에 말씀을 전할 선지자가 필요함을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대부분 눈앞의 필요에서 시작됩니다. 건강을 회복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자녀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간구하며,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기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때로 우리가 구한 것보다 훨씬 넓은 목적을 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아픔을 공동체를 위한 은혜의 통로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엘가나와 온 집이 매년 드리는 제사와 서원제를 드리기 위해 실로로 올라갈 때 한나는 함께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이가 젖을 뗄 때까지 기다린 뒤 사무엘을 여호와 앞에 뵙게 하고 거기에 영원히 있게 하겠다고 말합니다. 당시에는 오늘날보다 늦은 나이에 젖을 떼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한나는 서원을 잊어서 올라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약속을 온전히 이행하기 위해 사무엘을 준비시키고 있었습니다.

믿음에는 즉각적인 순종이 필요하지만 지혜롭게 때를 기다리는 일도 필요합니다. 성급함이 항상 믿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책임을 충실히 감당하면서 약속을 실행할 적절한 때를 기다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돌보는 일과 하나님께 드리는 일을 서로 대립시키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성소에서 지낼 수 있을 때까지 사랑으로 양육했습니다.

엘가나는 한나에게 “그대의 소견에 좋은 대로 하여 그를 젖 떼기까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의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합니다. 엘가나는 한나의 서원을 존중하고 그의 헌신에 동참했습니다. 한 사람의 믿음으로 시작된 일이 가정 전체의 순종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아이가 젖을 떼자 한나는 제물과 함께 사무엘을 데리고 실로의 여호와의 집으로 올라갔습니다. 한나는 빈손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울며 기도했지만 이제 응답받은 아들과 감사의 제물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을 붙잡고 집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약속한 대로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다시 실로로 올라갔습니다.

한나는 엘리에게 “내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내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고 말합니다. 엘리는 한나를 기억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한나는 자신이 기도했던 자리를 잊지 않았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자신이 어디에서 울었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건지셨는지를 기억합니다.

우리는 응답을 받으면 고통의 시간을 너무 빨리 잊을 때가 있습니다. 응답받기 전에는 간절히 기도했지만 문제가 해결되면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흐려집니다. 그러나 한나는 기도한 자리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응답을 자신의 능력이나 우연으로 돌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들으셨음을 고백했습니다.

한나는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고 말합니다. 이 고백의 중심은 한나의 기도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한나는 자신이 오래 기도했으므로 아들을 얻을 자격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고 고백합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 공로를 쌓는 행위가 아닙니다. 기도는 빈손으로 은혜를 구하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많이 울고 오랫동안 기도했다고 해서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요구할 권리를 얻는 것은 아닙니다. 응답은 언제나 하나님의 자유롭고 선하신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일하시지만 기도 자체가 하나님의 주권을 지배하지는 못합니다.

한나는 이어서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구절에서는 ‘구하다’라는 말과 연결된 표현이 반복됩니다. 한나는 하나님께 구하여 받은 사무엘을 다시 하나님께 드립니다. 여기서 드린다는 것은 잠시 빌려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무엘의 평생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인정하여 온전히 맡긴다는 뜻입니다.

한나에게 사무엘은 단순한 자녀가 아니었습니다. 오랜 눈물과 기다림 끝에 받은 기도 응답이었습니다. 그런 아들을 어린 나이에 실로에 남겨 두는 일은 결코 쉬운 순종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한나가 믿음이 좋았기 때문에 아무런 슬픔도 느끼지 않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은 감정이 사라진 상태가 아닙니다. 눈물이 있어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구할 때는 간절하지만 응답받은 후에는 그것을 자기 소유로 붙잡기 쉽습니다. 자녀를 달라고 기도한 뒤에는 자녀를 자신의 뜻대로 살게 하려 합니다. 물질을 구한 뒤에는 자신의 만족만을 위하여 사용합니다. 재능과 직분을 받은 뒤에는 자신의 이름을 높이는 도구로 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받은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맡겨진 것입니다.

자녀도 부모의 절대적인 소유가 아닙니다. 부모는 자녀의 인생을 대신 살아 주거나 마음대로 결정하는 주인이 아닙니다. 자녀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도록 양육하는 청지기입니다. 자녀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반드시 목회자나 선교사가 되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직업과 자리에서 살아가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며 자신의 삶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도록 양육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장의 마지막은 그곳에서 여호와께 경배했다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한나의 기도는 자녀를 얻는 데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을 세우는 데까지 이어졌습니다. 기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의 소원을 이루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있습니다.

이 장의 표면적인 중심인물은 한나와 사무엘이지만 실제 중심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한나의 형편을 아셨고, 기도를 들으셨으며, 그를 기억하시고 태를 여셨습니다. 한나는 기도하고 서원하며 순종했지만 그 모든 과정의 처음과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가 있습니다.

사무엘상 1장은 인간의 절망이 하나님의 역사를 막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는 어두웠고, 제사장 가문은 타락했으며, 한나의 태는 닫혀 있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가장 작고 은밀한 자리에서 구원의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강한 왕과 군대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먼저 기도하는 여인과 어린아이를 준비하셨습니다. 세상은 권력과 숫자와 외적인 조건을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상한 마음과 순종하는 사람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나 세상이 주목하는 방식으로만 임하지 않습니다.

사무엘은 장차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로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가 됩니다. 그는 사울과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정 시대를 열 것입니다. 그러나 사무엘도 이스라엘을 완전히 구원할 궁극적인 구원자는 아닙니다. 그의 사역은 더 크고 완전한 선지자이며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입니다. 사무엘이 왕들에게 기름을 부었다면 예수님은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참된 메시아이십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회개하도록 불렀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내어 주시고 죄인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인간의 가능성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언약의 은혜로 우리를 기억하셨고,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구원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무엘상 1장은 우리의 눈물이 믿음의 반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한나의 눈물은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 흘린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자신의 마음을 맡길 분이 없다는 믿음의 눈물이었습니다. 그의 눈물은 하나님께로 흘러가 기도가 되었고, 그 기도는 한나의 얼굴을 바꾸었으며 마침내 이스라엘의 역사를 바꾸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아픔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응답되지 않은 기도가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평범하게 주어진 것이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결핍이 있습니다. 가까운 가족도 내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영적 지도자에게조차 오해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움직이는 입술만 보지 않으시고 그 안에서 탄식하는 영혼을 보십니다.

고난이 하나님의 부재를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에도 그분은 자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고 계십니다. 우리는 닫힌 문을 보며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닫힌 문을 통하여 더 큰 역사의 문을 여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아야 합니다. 상처를 숨긴 채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쓰지 말아야 합니다. 원통함과 두려움, 분노와 소망을 정직하게 아뢰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돈된 문장보다 진실한 마음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기도한 후에는 그 문제를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합니다. 상황이 아직 달라지지 않았어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또한 응답받은 것을 자기 소유로만 붙잡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녀와 물질, 건강과 시간, 지식과 재능을 하나님께 다시 드려야 합니다. 은혜는 소유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헌신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용할 때 우리의 작은 삶도 예상하지 못한 구원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한나는 한 아들을 구했지만 하나님께서는 한 시대를 위한 선지자를 준비하셨습니다. 한나는 자신의 가정에 임할 응답을 기다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새롭게 하실 계획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작아 보여도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시야보다 큽니다.

지금 울고 있다면 그 눈물을 하나님께 가져가십시오. 잊힌 것처럼 느껴진다면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기도하십시오. 응답받았다면 받은 것을 다시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상한 마음을 외면하지 않으시며, 인간의 불가능 속에서도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하고, 기다리며, 받은 은혜를 다시 드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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