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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3장 주해와 강해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사무엘상 3장은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해진 어두운 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엘리의 눈은 점점 어두워지고 그의 가문은 심판을 향하지만,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소에 누워 있던 어린 사무엘을 부르시고 말씀을 맡기시며 온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세우십니다. 이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의 종을 어떻게 부르시는지, 그리고 말씀을 듣고 전하는 사람이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기 원합니다.

말씀이 희귀한 시대에도 하나님의 등불은 꺼지지 않습니다(삼상 3:1-10)

사무엘상 3장은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사무엘은 아직 어렸지만 실로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는 제사장 엘리의 감독 아래 있었으나 그가 섬기는 궁극적인 대상은 엘리가 아니라 여호와였습니다.

당시 실로의 상황은 매우 어두웠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이라는 직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호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백성이 드린 제물을 강제로 빼앗고 성소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하며 하나님의 거룩함을 짓밟았습니다. 엘리는 그들의 죄를 알고 책망했지만 실질적으로 제지하지 못했습니다.

한쪽에서는 제사장 가문이 무너지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어린 사무엘이 여호와 앞에서 자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시대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오래된 제사장 가문이 심판을 향하는 동안 새로운 말씀의 종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본문은 그때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했다고 말합니다. ‘희귀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카르(יָקָר)는 귀중하다, 값비싸다, 드물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치가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계시의 말씀이 자주 임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다”는 표현도 같은 현실을 보여 줍니다. ‘이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존(חָזוֹן)은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보여 주시는 환상이나 계시를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히 침묵하신 것은 아닙니다. 사무엘상 2장에서도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심판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전체에 하나님의 뜻을 지속해서 전할 선지자적 사역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말씀이 희귀해진 것은 단순히 선지자의 숫자가 부족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백성과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예배를 멸시한 영적 현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것은 인간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가 아니라 은혜입니다. 말씀을 거절하면서도 하나님께서 계속 말씀해 주셔야 한다고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책과 설교가 많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하게 들리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자기 생각을 확인하는 도구로만 사용하고, 듣기 좋은 부분만 취하며, 회개를 요구하는 말씀을 외면한다면 풍요 속에서도 말씀의 기근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진정한 위기는 프로그램이나 재정이 부족한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지 않고, 선포된 말씀 앞에 회개와 순종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더 큰 위기입니다. 말씀을 잃은 교회는 외형이 화려해도 방향을 잃습니다.

본문은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때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먼저 나이가 든 엘리의 육체적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야기 전체에서는 그의 영적 분별력이 흐려진 현실과도 자연스럽게 겹쳐집니다. 엘리는 한나의 간절한 기도를 술 취한 행동으로 오해했고, 아들들의 죄를 알면서도 단호하게 제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엘리를 아무런 장점도 없는 악인으로만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한나를 축복했고 어린 사무엘을 돌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 것을 뒤늦게나마 알아차리고 응답하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문제는 그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삶과 가정 안에서 끝까지 실천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부분적인 지식이 전적인 순종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능력이 있어도 자신에게 불리한 말씀에는 순종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바른 길을 가르치면서 자기 가정과 삶에서는 말씀을 외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알고 있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엘리가 자기 처소에 누워 있을 때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가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워 있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전은 솔로몬이 세운 성전이 아니라 당시 실로에 있던 성막과 그 주변의 성소 시설을 가리킵니다. 사무엘이 언약궤가 놓인 지성소 안에서 잤다는 뜻이라기보다 언약궤가 있는 성소 가까이에서 맡은 일을 수행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하나님의 등불이 아직 꺼지지 않았다”는 말은 당시의 시간을 알려 줍니다. 성소의 등불은 저녁부터 아침까지 밝혀 두었으므로 아직 새벽이 되기 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문학적으로도 깊은 의미를 전달합니다. 엘리의 눈은 어두워지고 여호와의 말씀은 희귀했지만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상황이 어두워도 하나님의 언약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사장들이 성소를 더럽혀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처럼 보여도 교회의 머리이신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과 백성을 보존하십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등불이 꺼졌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등불 곁에는 어린 사무엘이 누워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낡은 시대가 저물어 가는 동안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어둠만 바라보며 절망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사람을 세우십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하고 곧바로 엘리에게 달려갔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힌네니(הִנְנִי)는 자신의 위치만 알리는 표현이 아닙니다. 부르는 사람 앞에 자신이 준비되어 있다는 응답입니다.

사무엘은 부름을 들었지만 그 음성의 주인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엘리가 자신을 불렀다고 생각했습니다. 엘리는 부르지 않았다며 다시 누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두 번째로 부르셨을 때도 사무엘은 엘리에게 달려갔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즉시 알아듣지 못했다고 해서 그에게 믿음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사무엘이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았다는 의미라기보다 선지자에게 임하는 직접적인 계시를 아직 경험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2장은 이미 사무엘이 여호와 앞에서 섬기며 은총을 받았다고 기록했습니다.

사무엘은 성소에서 봉사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아 전하는 선지자적 소명은 아직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서는 것은 구별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한 사무엘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첫 번째 부름을 분별하지 못하자 다시 부르셨고, 두 번째에도 알지 못하자 세 번째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주권과 함께 인내가 나타납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고도 그 뜻을 한 번에 깨닫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못 해석하고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쉽게 버리지 않으십니다. 말씀을 반복하여 들려주시고 교회의 가르침과 성도의 권면을 통하여 깨닫게 하십니다.

사무엘이 세 번째로 찾아왔을 때 엘리는 여호와께서 아이를 부르신 줄 깨달았습니다. 그는 사무엘에게 다시 누웠다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대답하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완전한 엘리의 도움도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이 엘리의 잘못을 없애 주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섭리가 인간의 한계를 넘어 일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부족한 부모와 교사, 목회자라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다음 세대를 말씀 앞으로 인도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영적 지도자의 목적은 사람을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분별하며 순종하도록 돕는 것이 바른 지도입니다. 엘리는 사무엘에게 자신만 바라보라고 하지 않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도록 안내했습니다.

사무엘이 다시 누웠을 때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사무엘아 사무엘아”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름을 두 번 반복하여 부르는 것은 친밀함과 사명의 중요성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이름 없는 도구로 다루지 않으시고 그의 이름을 아시며 인격적으로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이 먼저 선지자가 되겠다고 나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그를 찾아오시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출발점은 인간의 야망이나 자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은혜입니다.

사무엘은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듣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샤마(שָׁמַע)는 단순히 소리를 듣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의 깊게 듣고 받아들여 순종한다는 뜻을 포함합니다. 성경적인 들음은 귀에서 끝나지 않고 삶으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말씀해 달라고 기도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이 원하는 말씀만 기다릴 때가 있습니다. 위로와 축복의 말씀은 원하지만 죄를 드러내고 삶의 방향을 바꾸라는 말씀은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종은 주인의 말씀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는 고백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든 받아들이겠다는 순종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생각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과 욕망을 하나님의 말씀 아래 내려놓는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성도가 사무엘처럼 새로운 계시를 받는 선지자로 부름받은 것은 아닙니다. 사무엘의 부르심은 이스라엘 역사의 특별한 시점에 주어진 선지자적 소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먼저 은혜로 부르시고, 부름받은 사람은 말씀 앞에서 듣고 순종해야 한다는 원리는 모든 성도에게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종은 어려운 말씀도 숨기지 않아야 합니다(삼상 3:11-18)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처음 맡기신 말씀은 개인적인 축복이나 성공의 약속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의 집에 내려질 심판의 말씀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선지자로서 처음 감당해야 할 사명은 자신을 돌보아 준 엘리에게 가장 무거운 말씀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보라 내가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귀가 울린다는 표현은 그 소식을 듣는 사람이 충격과 두려움에 사로잡힐 만큼 엄중한 사건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의 집을 향하여 말씀하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루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사무엘상 2장에서 한 하나님의 사람이 이미 엘리에게 가문의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사무엘에게 주어진 말씀은 앞서 내려진 판결을 다시 확인하고 확정하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빈말로 끝나지 않습니다. 인간은 약속하고도 능력이 없어 이루지 못할 수 있고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며 신실하시므로 자신이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한 소망이고 심판의 경고는 두려움으로 받아야 할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의 집을 심판하시는 이유를 다시 설명하십니다. 엘리는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는 범죄를 저지르는 줄 알고도 그들을 금하지 않았습니다. 엘리가 아들들의 모든 죄를 직접 범한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와 대제사장으로서 그들을 제지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엘리는 아들들의 죄를 전혀 지적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앞장에서 그들의 행실이 좋지 않다고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말로만 경고했을 뿐 그들을 제사장 직무에서 물러나게 하거나 범죄를 막는 실질적인 조치를 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에서 ‘금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카하(כָּהָה)는 억제하다, 제지하다, 약하게 만들다는 뜻을 가집니다. 엘리는 아들들의 범죄를 알았지만 그들이 더는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자신의 책임과 권한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죄를 알고 말로 지적하는 것만으로 책임이 끝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의 죄를 알고도 관계가 불편해질까 두려워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지도자도 공동체의 명예와 체면을 지키기 위해 범죄를 덮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은 죄를 모른 척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사람과 공동체를 파괴하지 못하도록 진리 안에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엘리가 아들들을 제지하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보다 아들들을 더 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백성의 안전보다 가족의 관계와 아들들의 지위를 더 무겁게 여겼습니다.

우리도 입술로는 하나님을 가장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실제 선택에서는 사람의 평가와 가족의 욕망, 돈과 체면을 더 중요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잃을 때 가장 두려워하는지를 살펴보면 마음속에서 무엇을 가장 중히 여기고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 집의 죄악이 제물로나 예물로나 영원히 속죄받지 못할 것이라고 맹세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어떤 죄인도 회개하거나 용서받을 수 없다는 보편적인 선언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엘리 가문에 내려진 특별한 역사적·언약적 심판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 자체를 이용하여 범죄했습니다. 그들은 백성이 드린 제물을 강제로 빼앗고 하나님의 몫보다 자신의 욕망을 앞세웠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다시 제물을 드린다는 종교적 행위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회개 없는 제사는 죄를 덮는 마술이 아닙니다. 예배에 참석하고 헌금하며 봉사한다고 해서 완고하게 붙들고 있는 죄가 자동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종교적인 행위로 매수되는 분이 아닙니다. 참된 예배는 죄를 감추는 가면이 아니라 말씀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은혜를 구하는 자리입니다.

짐승의 제사 자체에는 죄를 제거하는 독립적인 능력이 없었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은혜의 방편이며 장차 이루어질 완전한 속죄를 바라보게 했습니다. 궁극적인 속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단번에 제물로 드리심으로 완성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죄를 가볍게 여기게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와 참으로 연합한 사람은 성령의 역사로 죄를 미워하며 회개와 거룩함의 길을 걷습니다. 은혜는 죄 가운데 머물게 하는 구실이 아니라 죄에서 돌이키게 하는 능력입니다.

사무엘은 아침까지 누워 있다가 여호와의 집 문을 열었습니다. 밤에 하나님의 엄중한 말씀을 들었지만 아침이 되자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수행했습니다. 특별한 계시를 경험했다고 해서 일상의 책임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이 성소의 문을 여는 장면은 먼저 그가 수행하던 실제적인 봉사입니다. 동시에 말씀이 희귀했던 밤이 지나고 사무엘을 통하여 새로운 말씀의 시대가 열리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엘리의 눈은 어두워졌지만 아침의 문은 사무엘의 손으로 열리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 받은 이상을 엘리에게 알리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엘리는 그를 어린 시절부터 돌본 사람이며 제사장으로서 권위를 가진 어른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그의 가문이 심판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전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은 사무엘이 두려움을 느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종도 어려운 사명을 앞두면 두려울 수 있습니다. 믿음은 두려움이 전혀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두려움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무겁게 여기며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엘리는 사무엘을 불러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물었습니다. 그리고 한마디라도 숨기지 말고 모두 전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하나도 숨기지 않고 모두 전했습니다.

선지자는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더하거나 빼지 않고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위로해야 할 때 위로하고, 죄를 책망해야 할 때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책망해야 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것만 골라 말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성도들의 반응과 자신의 인기, 인간관계를 생각하여 불편한 진리를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말씀의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입니다. 주인이 맡기신 것을 충실하게 전달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진리를 전한다는 이유로 거칠고 무례하게 말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무엘은 엘리를 공격하거나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심판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움과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참된 설교에는 말씀에 대한 충성과 영혼에 대한 사랑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엘리는 사무엘의 말을 들은 후 “이는 여호와이시니 선하신 대로 하실 것이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에는 하나님께서 주권자이시며 그분의 판단이 옳다는 인정이 담겨 있습니다. 엘리는 사무엘을 거짓말쟁이라고 몰아세우거나 하나님의 판결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엘리의 온전한 회개로 이상화하는 것도 신중해야 합니다. 본문은 그가 아들들을 직무에서 제거하거나 가문을 회개로 이끌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의 말에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이 담겨 있을 수 있지만, 이미 내려진 판결을 체념하듯 받아들이는 모습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말이 책임을 회피하는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시겠지요”라는 말로 자신이 해야 할 회개와 순종을 미뤄서는 안 됩니다. 참된 섭리 신앙은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면서도 지금 해야 할 책임을 충실히 감당하게 합니다.

말씀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세우십니다(삼상 3:19-21)

사무엘상 3장의 마지막은 사무엘이 온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확립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라고 기록합니다.

사무엘은 한 번의 특별한 체험으로 완성된 사람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계속 자랐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성숙의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은혜로 부름받은 사람도 말씀을 배우고 훈련받으며 인내와 순종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사무엘의 사역을 가능하게 한 결정적인 힘은 뛰어난 언변이나 인간적인 매력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셨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 다윗의 사역도 하나님의 임재로 가능했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자기 능력만으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말을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는 것은 사무엘이 일상적으로 말한 모든 문장이 오류가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로서 맡기신 말씀이 헛되이 끝나지 않고 역사 속에서 성취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떨어지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팔(נָפַל)은 말이나 약속이 무산되고 효력을 잃는 모습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이 전한 말씀을 이루심으로 그가 참된 선지자라는 사실을 증명하셨습니다.

선지자의 권위는 강한 말투나 자기 확신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말씀을 맡기시며 그 말씀을 이루시는 데서 나옵니다. 오늘날 설교자의 권위도 직함이나 유명세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고 충실하게 전할 때 말씀 자체가 가진 권위로 섬기게 됩니다.

설교자는 성경 위에 서서 말씀을 평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 아래에 서서 말씀의 판단을 먼저 받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시대의 유행을 하나님의 뜻처럼 포장하지 말고 본문이 실제로 말하는 바를 성실하게 전해야 합니다.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온 이스라엘은 사무엘이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움을 받은 줄 알았습니다. 단은 이스라엘의 북쪽을, 브엘세바는 남쪽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이스라엘 전역을 의미합니다.

실로의 성소에서 조용히 부름받은 어린아이가 이제 온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로 인정받았습니다. 사무엘이 스스로 선지자임을 주장하여 지위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이루시고 공동체 가운데 그의 사역을 확증하셨습니다.

‘세움을 입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에만(נֶאֱמָן)은 확립되다, 신실한 것으로 확인되다라는 뜻입니다. 사무엘의 영적 권위는 자기 홍보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과 오랜 충실함을 통하여 세워졌습니다.

참된 영적 권위는 자신을 높인다고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리에서 말씀과 삶이 일치하도록 오랫동안 충실하게 섬길 때 공동체 안에서 확인됩니다. 권력으로 강요한 권위는 사람을 억누르지만 진리와 섬김으로 형성된 권위는 공동체를 살립니다.

여호와께서는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장의 시작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고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지만,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실로에서 계속 나타나셨습니다. 말씀의 기근이 말씀의 풍성함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변화는 사무엘의 특별한 능력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셨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이성만으로 하나님의 본질과 구원의 뜻을 완전히 알아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어 말씀해 주셔야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간의 추측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자신을 가장 충만하게 나타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달한 많은 선지자 가운데 한 사람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분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영원한 말씀입니다.

사무엘은 엘리 집에 임할 심판을 전했지만 그 심판을 대신 짊어질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셨을 뿐 아니라 자기 백성이 받아야 할 심판을 십자가에서 담당하셨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숨기지 않고 전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주신 말씀을 온전히 전하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세움을 받았지만 예수님은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의 직분을 완전하게 이루신 중보자이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새로운 계시를 찾아 방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록된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성령의 조명을 구하며,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성경과 분리된 다른 복음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을 깨닫고 믿고 살아 내도록 역사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사무엘처럼 새로운 정경적 계시를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성경을 통하여 이미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을 겸손히 듣고 순종하겠다는 고백입니다.

교회가 시대의 관심을 얻는 데만 몰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잃으면 화려한 외형이 있어도 영적으로는 어둡습니다. 반대로 규모가 작고 세상에서 주목받지 못하더라도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고 순종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등불로 사용하십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무엘상 3장은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고 지도자의 눈이 어두워진 시대에도 하나님의 등불은 꺼지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사무엘을 이름으로 부르시고 말씀을 맡기셨으며, 그 말씀을 이루심으로 그를 온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세우셨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을 찾는 마음이 아니라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고백하는 마음입니다. 위로와 약속뿐 아니라 죄를 드러내고 회개를 요구하는 말씀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말로만 인정하지 말고 깨달은 말씀을 실제 순종으로 옮겨야 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인간의 반응을 두려워하여 진리를 숨기지 말아야 합니다. 동시에 진리를 자신의 분노를 쏟는 도구로 사용하지 말고 사랑과 겸손으로 전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사람도 자기 생각에 맞는 부분만 골라 취하지 말고 성경의 가르침 아래 자신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인간 지도자의 완전함에 있지 않습니다. 영원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성령께서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교회를 보존하십니다. 시대가 아무리 어두워 보여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습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듣고, 들은 말씀을 충실히 전하며, 삶으로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무엘상 1장 주해와 묵상

 

눈물로 시작된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

사무엘상은 왕궁이나 전쟁터가 아니라 한 여인의 눈물과 기도에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등불이 희미해지고 제사장 가문마저 타락하던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자녀가 없어 고통받던 한나를 통하여 새로운 역사를 준비하셨습니다. 사무엘상 1장은 고난이 하나님의 부재를 의미하지 않으며, 하나님께 드린 기도는 우리의 문제만 아니라 우리 자신까지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본문을 통하여 우리의 눈물을 들으시고 가장 연약한 자리에서 구원의 일을 시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기 원합니다.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께 올라가는 믿음(삼상 1:1-8)

사무엘상 1장은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의 새로운 역사는 예루살렘의 왕궁이나 유명한 전쟁터가 아니라 에브라임 산지의 한 평범한 가정에서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역사를 움직이는 힘이 권력과 군대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름 없는 가정과 한 사람의 기도를 통하여 한 시대를 바꾸십니다.

엘가나는 여로함의 아들이며 에브라임 산지에 거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역대상에 기록된 계보에 따르면 사무엘의 가문은 레위 지파의 고핫 계열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엘가나를 에브라임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반드시 혈통이 에브라임 지파였다는 뜻이라기보다 그가 에브라임 지역에 거주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엘가나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이름은 한나이고 다른 사람의 이름은 브닌나였습니다. 성경이 일부다처제의 현실을 기록한다고 해서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승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 질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성경은 일부다처 가정에서 발생한 갈등과 상처를 숨기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서는 사라와 하갈이 갈등했고, 야곱의 가정에서는 레아와 라헬이 경쟁했습니다. 엘가나의 가정에서도 두 아내 사이의 질투와 상처가 깊어졌습니다.

브닌나에게는 자녀가 있었지만 한나에게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한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한나(חַנָּה)이며 ‘은혜’ 또는 ‘호의’라는 뜻을 가집니다. 은혜라는 이름을 가진 한나의 현실은 은혜와 정반대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름은 은혜였지만 그의 마음에는 오랜 눈물이 있었고, 가정 안에는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가 있었습니다.

우리도 이와 비슷한 모순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만 현실에서는 버림받은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은혜를 고백하면서도 고통을 겪고, 기도하면서도 응답을 기다리며, 믿음으로 살아가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결핍을 만납니다. 그러나 사무엘상 1장은 우리가 느끼는 현실의 모순이 하나님의 은혜를 부정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오히려 은혜는 우리의 결핍 속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습니다.

엘가나는 해마다 자기 성읍에서 나와 실로에 올라가 만군의 여호와께 예배하며 제사를 드렸습니다. 당시 실로에는 성막과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사사 시대의 혼란과 가정의 갈등 속에서도 엘가나는 가족을 데리고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본문은 그가 한두 번 올라갔다고 말하지 않고 “매년” 올라갔다고 기록합니다. 신앙은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라 반복되는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삶이 평안할 때만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사무엘상에서 하나님은 처음으로 “만군의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히브리어로 여호와 체바오트(יְהוָה צְבָאוֹת)입니다. 체바오트는 군대들 또는 하늘의 무리를 뜻합니다. 만군의 여호와라는 칭호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스리시는 주권자라는 사실을 선언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압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지파들은 분열되어 있었고, 하나님의 백성을 이끌 영적 지도자도 부족했습니다.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이라는 직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제사를 멸시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진정한 소망은 인간의 지도자나 군사 조직에 있지 않았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여전히 역사를 통치하고 계셨습니다.

실로에서 제사장으로 섬기던 엘리의 두 아들은 이미 타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엘가나는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실로로 올라갔습니다. 지도자의 타락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폐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실망했다고 해서 하나님까지 떠나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불완전함과 지도자의 부족함은 슬픈 일이지만, 그것이 예배를 포기할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자기 백성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엘가나는 제사를 드린 후 브닌나와 그의 자녀들에게 제물의 몫을 나누어 주고 한나에게는 특별한 몫을 주었습니다. 개역개정은 이를 “갑절”이라고 번역합니다. 히브리어로는 마나트 아파임(מָנָה אַחַת אַפָּיִם)이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견해가 나뉘지만, 엘가나가 한나를 특별히 사랑하여 좋은 몫을 주었다는 뜻은 분명합니다.

엘가나는 한나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의 사랑도 한나의 깊은 상처를 완전히 채워 주지는 못했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소중하지만 전능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하거나 모든 상처를 치유할 수 없습니다. 사랑받고 있으면서도 슬플 수 있고, 가족이 곁에 있어도 외로울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서 받을 수 없는 위로가 있으며 오직 하나님께서만 만지실 수 있는 마음의 자리가 있습니다.

본문은 한나에게 자녀가 없는 현실을 설명하면서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라고 기록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우리를 당황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한나의 불임을 우연이나 운명의 장난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고난까지도 하나님의 주권 밖에 있지 않다고 증언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질병이나 불임을 개인의 죄에 대한 형벌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한나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자녀를 낳지 못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는 것은 고난을 겪는 사람에게 함부로 죄의 책임을 묻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한나는 자신에게 왜 이런 고통이 주어졌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단지 한 가정에 아들을 주시는 것보다 훨씬 큰 일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닫힌 태를 여심으로써 이스라엘의 닫힌 시대를 여실 것이었습니다. 한나가 원한 것은 아들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은 한 시대를 깨우는 선지자였습니다.

성경의 구속사는 인간의 불가능에서 하나님의 가능성이 시작되는 장면을 반복해서 보여 줍니다. 사라의 태가 닫혀 있을 때 이삭이 태어났고, 리브가와 라헬의 기다림 가운데서 언약의 자녀들이 태어났습니다. 삼손의 어머니도 자녀를 낳지 못하던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자랑할 수 없는 자리에서 생명과 구원을 시작하십니다. 구원은 인간의 힘이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브닌나는 한나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했습니다. 본문의 표현은 한두 번의 말다툼이 아니라 반복적이고 의도적으로 한나의 상처를 자극했다는 뜻입니다. 특히 온 가족이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이런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예배의 자리가 한나에게는 은혜의 자리인 동시에 자신의 결핍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브닌나는 자신이 받은 자녀라는 선물을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는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감사의 이유로 삼지 않고 자신이 한나보다 우월하다는 증거로 삼은 것입니다. 은혜가 자랑으로 변하면 다른 사람을 찌르는 칼이 됩니다. 건강과 자녀, 재산과 학력, 재능과 직분은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할 근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감사하며 섬길 이유입니다.

한나는 울고 먹지 않았습니다. 그의 슬픔은 마음을 넘어 몸에까지 영향을 주었습니다. 엘가나는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고 말합니다. 이 말에는 한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 있지만 그의 아픔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한계도 나타납니다.

엘가나는 자신이 한나를 특별히 사랑하므로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상처는 논리로만 해결되지 않습니다. “좋은 것이 많은데 왜 그것만 생각합니까?”라는 말은 위로처럼 보이지만 상대방의 아픔을 축소할 수 있습니다. 참된 위로는 상대방의 슬픔을 평가하거나 서둘러 답을 주는 데 있지 않습니다.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아픔 곁에 조용히 머물러 주는 데서 시작합니다.

한나는 남편의 사랑을 받고 있었지만 여전히 아팠습니다. 이는 엘가나의 사랑이 가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사랑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만 채우실 수 있는 자리를 사람에게 요구하면 사랑하는 사람도 지치고 우리도 실망하게 됩니다. 사람은 곁에 서 줄 수 있지만 우리의 가장 깊은 공허를 채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한나의 고통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고통은 한나를 하나님께로 이끄는 길이 되었습니다. 고난 자체가 자동으로 사람을 성숙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고난을 겪으며 더 완고해지고 다른 사람을 원망합니다. 중요한 것은 고난을 누구에게 가지고 가느냐입니다. 한나는 자신의 상처를 브닌나에게 되갚는 데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을 끝없이 원망하는 데 머물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픔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마음을 쏟아 놓을 때 시작되는 변화(삼상 1:9-18)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 한나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한나가 일어나니”라는 표현은 단순한 신체 동작 이상의 울림을 줍니다. 그는 울고 먹지 못할 정도로 괴로웠지만 그 슬픔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일어났습니다. 믿음은 전혀 아프지 않은 상태가 아닙니다. 아픔이 있어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한나는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했습니다. “마음이 괴롭다”는 표현에는 히브리어 마라트 나페쉬(מָרַת נָפֶשׁ)가 사용됩니다. 이는 영혼이 쓰리고 비통한 상태를 뜻합니다. 한나는 자신의 감정을 경건한 말로 포장하지 않았습니다. 아프면 아픈 대로, 서러우면 서러운 대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개혁주의 신앙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는 것은 감정을 억누르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숙명론이 아닙니다. 성경의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고 믿었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지 않으신다면 기도할 이유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시기에 우리는 그분께 우리의 사정을 아뢸 수 있습니다.

한나는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라고 기도합니다. 그는 자신의 기도에서 세 번이나 자신을 “주의 여종”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요구할 권리가 있는 사람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비천함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도 고통을 숨김없이 아룁니다. 참된 기도에는 하나님을 향한 담대함과 피조물로서의 겸손이 함께 있습니다.

한나는 하나님께 자신의 고통을 돌보시고, 자신을 기억하시며, 잊지 말아 달라고 간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실제로 한나를 잊으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다는 말은 잊었던 정보를 다시 떠올리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기억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자카르(זָכַר)는 하나님께서 언약에 따라 구원하는 행동을 시작하신다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기억하셨을 때 홍수의 물이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을 때 롯을 심판 가운데서 건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라헬을 기억하셨을 때 그의 태를 여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기억하소서”라는 기도는 “주님의 언약과 은혜에 따라 나를 위하여 일하여 주십시오”라는 간구입니다.

고난이 길어지면 우리는 하나님께 잊힌 것처럼 느낍니다. 다른 사람의 기도에는 응답하시면서 내 기도에는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침묵은 망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일하시며 자신의 때에 뜻을 드러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붙들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언약의 손으로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한나는 아들을 주시면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않겠다고 서원합니다.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는다는 표현은 민수기 6장의 나실인 규례를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본문은 포도주를 금하는 것과 같은 나실인의 모든 규정을 명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무엘을 전형적인 나실인이라고 단정하기보다는 태어나기 전부터 평생 하나님께 구별되어 드려질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한나의 기도에서 놀라운 점은 그가 아들을 구하면서도 아들을 자신의 소유로 붙잡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한나는 아들을 얻어 브닌나를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상처 입은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아들을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을 평생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했습니다.

기도하는 동안 한나의 소원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헌신으로 변화되어 갔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결핍 때문에 울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쏟으면서 자신이 받을 선물을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드릴 것을 결단했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중요한 사역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설득하여 내 뜻을 이루게 하는 기술이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의 마음과 소원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새롭게 정돈되는 은혜의 자리입니다.

한나의 서원을 하나님과의 거래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아들을 하나님께 드릴 테니 반드시 아들을 주셔야 합니다”라는 흥정이 아닙니다. 한나는 자신도 하나님의 여종이고 자신이 받을 자녀도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했습니다. 참된 서원과 헌신은 하나님을 움직이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받은 은혜가 본래 하나님께 속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한나가 오래 기도하는 동안 엘리는 그의 입을 주목했습니다. 한나는 속으로 말하므로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일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엘리는 한나가 술에 취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고 책망했습니다.

이 장면에는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현실이 역설적으로 나타납니다. 제사장은 술에 취한 사람과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을 구별하지 못했습니다. 엘리는 한나의 움직이는 입술은 보았지만 그 안에 있는 상한 영혼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한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기 전에 판단부터 내렸습니다.

우리도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성급하게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말이 없는 사람을 교만하다고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믿음이 부족하다고 판단합니다. 예배 중에 표정이 어두운 사람을 은혜가 없는 사람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는 차마 말하지 못하는 고통이 있을 수 있고, 그 눈물 속에는 하나님을 놓치지 않으려는 믿음이 담겨 있을 수 있습니다. 영적인 분별은 사람을 빨리 정죄하는 능력이 아니라 그 영혼의 아픔을 오래 바라보는 사랑에서 시작합니다.

한나는 억울한 오해를 받았지만 엘리에게 거칠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라고 대답합니다.

“심정을 통하였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내 영혼을 쏟아 놓았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쏟다’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샤파크(שָׁפַךְ)는 물을 붓듯이 쏟아 내는 동작을 나타냅니다. 네페쉬(נֶפֶשׁ)는 단순한 감정의 한 부분이 아니라 생명과 영혼, 존재 전체를 가리킵니다. 한나는 종교적인 말 몇 마디를 반복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전체를 하나님 앞에 쏟았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새로운 정보를 전달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하기 전에 우리의 형편과 필요를 아십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 닫혀 있던 마음을 열어 드리고, 두려움과 상처와 소원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행위입니다.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말할 수 없습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도 끝내 설명할 수 없는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정리된 문장으로 기도하지 못해도 됩니다. 말보다 눈물이 먼저 흘러도 되고, 깊은 탄식만 나와도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문의 완성도나 유창함을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한나는 자신을 불량한 여자로 여기지 말아 달라고 말합니다. ‘불량한 여자’라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벨리야알의 딸이라는 말입니다. 벨리야알(בְּלִיַּעַל)은 무가치함이나 사악함, 무법함을 뜻합니다. 한나는 술에 취하여 무질서하게 행동한 것이 아니라 원통함과 격분됨이 많아 지금까지 기도했다고 설명합니다.

엘리는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고 축복합니다. 엘리가 한나의 기도에 반드시 아들이 주어질 것을 예언한 것인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축복을 한 것인지는 본문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나가 그 말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입니다.

한나는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하고 돌아가서 먹었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다시 근심 빛이 없었습니다. 아직 아이를 얻지 못했습니다. 외적인 상황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브닌나는 그대로 있었고, 닫힌 태도 아직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나의 얼굴이 달라졌습니다.

기도의 첫 번째 응답은 때로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마음의 변화로 찾아옵니다. 기도하기 전에는 한나가 문제를 붙들고 있었지만, 기도한 후에는 그 문제를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는 응답을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기 시작했습니다.

참된 평안은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스스로 확신하는 데서 오지 않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내가 정한 방법과 시간에 반드시 응답하실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결과가 하나님의 손에 있고 그분의 뜻이 선하다는 사실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평안은 원하는 결과를 손에 넣은 데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선하신 하나님의 손에 맡긴 데서 옵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도 계속 문제를 움켜쥐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입술로는 맡긴다고 말하면서 마음으로는 수많은 결과를 계산합니다. 기도한 뒤에도 불안이 찾아올 수 있지만, 그때마다 다시 하나님의 성품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보다 지혜로우시고, 우리보다 멀리 보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나의 얼굴이 달라진 것은 상황을 가볍게 생각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아들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소원보다 하나님을 더 크게 보기 시작했습니다. 문제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문제보다 커진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가 우리 안에 일으키는 변화입니다.

기억하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삼상 1:19-28)

엘가나의 가족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라마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한나는 아직 응답을 확인하지 못했지만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 소원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예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예배했습니다. 참된 예배는 응답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응답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엘가나가 그의 아내 한나와 동침하자 본문은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에서도 ‘기억하다’라는 뜻의 자카르가 사용됩니다. 하나님께서 한나를 기억하셨다는 것은 한나의 존재를 잠시 잊었다가 다시 떠올리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한나를 위하여 은혜의 행동을 시작하셨다는 뜻입니다.

생명의 탄생에는 엘가나와 한나의 정상적인 부부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합니다. 인간의 책임과 하나님의 주권은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하신 질서와 인간의 일상적인 행동을 통하여 뜻을 이루십니다. 우리가 일하고 선택하며 책임을 다하지만 그 모든 일을 붙드시고 열매 맺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때가 이르러 한나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사무엘이라고 지었습니다. 한나는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구하다’라는 의미로 샤알(שָׁאַל)이라는 동사가 사용됩니다. 사무엘이라는 이름의 정확한 어원과 이 동사의 언어적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본문은 사무엘이라는 이름을 한나의 간구와 하나님의 응답에 연결합니다. 사무엘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께서 한나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살아 있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한나 개인의 기쁨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기도를 사용하여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이자 선지자가 될 사람을 준비하셨습니다. 한나는 자기 가정에 아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전체에 말씀을 전할 선지자가 필요함을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대부분 눈앞의 필요에서 시작됩니다. 건강을 회복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자녀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간구하며,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기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때로 우리가 구한 것보다 훨씬 넓은 목적을 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아픔을 공동체를 위한 은혜의 통로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엘가나와 온 집이 매년 드리는 제사와 서원제를 드리기 위해 실로로 올라갈 때 한나는 함께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이가 젖을 뗄 때까지 기다린 뒤 사무엘을 여호와 앞에 뵙게 하고 거기에 영원히 있게 하겠다고 말합니다. 당시에는 오늘날보다 늦은 나이에 젖을 떼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한나는 서원을 잊어서 올라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약속을 온전히 이행하기 위해 사무엘을 준비시키고 있었습니다.

믿음에는 즉각적인 순종이 필요하지만 지혜롭게 때를 기다리는 일도 필요합니다. 성급함이 항상 믿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책임을 충실히 감당하면서 약속을 실행할 적절한 때를 기다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돌보는 일과 하나님께 드리는 일을 서로 대립시키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성소에서 지낼 수 있을 때까지 사랑으로 양육했습니다.

엘가나는 한나에게 “그대의 소견에 좋은 대로 하여 그를 젖 떼기까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의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합니다. 엘가나는 한나의 서원을 존중하고 그의 헌신에 동참했습니다. 한 사람의 믿음으로 시작된 일이 가정 전체의 순종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아이가 젖을 떼자 한나는 제물과 함께 사무엘을 데리고 실로의 여호와의 집으로 올라갔습니다. 한나는 빈손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울며 기도했지만 이제 응답받은 아들과 감사의 제물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을 붙잡고 집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약속한 대로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다시 실로로 올라갔습니다.

한나는 엘리에게 “내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내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고 말합니다. 엘리는 한나를 기억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한나는 자신이 기도했던 자리를 잊지 않았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자신이 어디에서 울었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건지셨는지를 기억합니다.

우리는 응답을 받으면 고통의 시간을 너무 빨리 잊을 때가 있습니다. 응답받기 전에는 간절히 기도했지만 문제가 해결되면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흐려집니다. 그러나 한나는 기도한 자리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응답을 자신의 능력이나 우연으로 돌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들으셨음을 고백했습니다.

한나는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고 말합니다. 이 고백의 중심은 한나의 기도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한나는 자신이 오래 기도했으므로 아들을 얻을 자격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고 고백합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 공로를 쌓는 행위가 아닙니다. 기도는 빈손으로 은혜를 구하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많이 울고 오랫동안 기도했다고 해서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요구할 권리를 얻는 것은 아닙니다. 응답은 언제나 하나님의 자유롭고 선하신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일하시지만 기도 자체가 하나님의 주권을 지배하지는 못합니다.

한나는 이어서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구절에서는 ‘구하다’라는 말과 연결된 표현이 반복됩니다. 한나는 하나님께 구하여 받은 사무엘을 다시 하나님께 드립니다. 여기서 드린다는 것은 잠시 빌려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무엘의 평생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인정하여 온전히 맡긴다는 뜻입니다.

한나에게 사무엘은 단순한 자녀가 아니었습니다. 오랜 눈물과 기다림 끝에 받은 기도 응답이었습니다. 그런 아들을 어린 나이에 실로에 남겨 두는 일은 결코 쉬운 순종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한나가 믿음이 좋았기 때문에 아무런 슬픔도 느끼지 않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은 감정이 사라진 상태가 아닙니다. 눈물이 있어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구할 때는 간절하지만 응답받은 후에는 그것을 자기 소유로 붙잡기 쉽습니다. 자녀를 달라고 기도한 뒤에는 자녀를 자신의 뜻대로 살게 하려 합니다. 물질을 구한 뒤에는 자신의 만족만을 위하여 사용합니다. 재능과 직분을 받은 뒤에는 자신의 이름을 높이는 도구로 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받은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맡겨진 것입니다.

자녀도 부모의 절대적인 소유가 아닙니다. 부모는 자녀의 인생을 대신 살아 주거나 마음대로 결정하는 주인이 아닙니다. 자녀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도록 양육하는 청지기입니다. 자녀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반드시 목회자나 선교사가 되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직업과 자리에서 살아가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며 자신의 삶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도록 양육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장의 마지막은 그곳에서 여호와께 경배했다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한나의 기도는 자녀를 얻는 데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을 세우는 데까지 이어졌습니다. 기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의 소원을 이루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있습니다.

이 장의 표면적인 중심인물은 한나와 사무엘이지만 실제 중심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한나의 형편을 아셨고, 기도를 들으셨으며, 그를 기억하시고 태를 여셨습니다. 한나는 기도하고 서원하며 순종했지만 그 모든 과정의 처음과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가 있습니다.

사무엘상 1장은 인간의 절망이 하나님의 역사를 막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는 어두웠고, 제사장 가문은 타락했으며, 한나의 태는 닫혀 있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가장 작고 은밀한 자리에서 구원의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강한 왕과 군대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먼저 기도하는 여인과 어린아이를 준비하셨습니다. 세상은 권력과 숫자와 외적인 조건을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상한 마음과 순종하는 사람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나 세상이 주목하는 방식으로만 임하지 않습니다.

사무엘은 장차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로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가 됩니다. 그는 사울과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정 시대를 열 것입니다. 그러나 사무엘도 이스라엘을 완전히 구원할 궁극적인 구원자는 아닙니다. 그의 사역은 더 크고 완전한 선지자이며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입니다. 사무엘이 왕들에게 기름을 부었다면 예수님은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참된 메시아이십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회개하도록 불렀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내어 주시고 죄인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인간의 가능성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언약의 은혜로 우리를 기억하셨고,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구원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무엘상 1장은 우리의 눈물이 믿음의 반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한나의 눈물은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 흘린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자신의 마음을 맡길 분이 없다는 믿음의 눈물이었습니다. 그의 눈물은 하나님께로 흘러가 기도가 되었고, 그 기도는 한나의 얼굴을 바꾸었으며 마침내 이스라엘의 역사를 바꾸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아픔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응답되지 않은 기도가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평범하게 주어진 것이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결핍이 있습니다. 가까운 가족도 내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영적 지도자에게조차 오해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움직이는 입술만 보지 않으시고 그 안에서 탄식하는 영혼을 보십니다.

고난이 하나님의 부재를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에도 그분은 자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고 계십니다. 우리는 닫힌 문을 보며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닫힌 문을 통하여 더 큰 역사의 문을 여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아야 합니다. 상처를 숨긴 채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쓰지 말아야 합니다. 원통함과 두려움, 분노와 소망을 정직하게 아뢰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돈된 문장보다 진실한 마음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기도한 후에는 그 문제를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합니다. 상황이 아직 달라지지 않았어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또한 응답받은 것을 자기 소유로만 붙잡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녀와 물질, 건강과 시간, 지식과 재능을 하나님께 다시 드려야 합니다. 은혜는 소유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헌신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용할 때 우리의 작은 삶도 예상하지 못한 구원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한나는 한 아들을 구했지만 하나님께서는 한 시대를 위한 선지자를 준비하셨습니다. 한나는 자신의 가정에 임할 응답을 기다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새롭게 하실 계획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작아 보여도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시야보다 큽니다.

지금 울고 있다면 그 눈물을 하나님께 가져가십시오. 잊힌 것처럼 느껴진다면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기도하십시오. 응답받았다면 받은 것을 다시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상한 마음을 외면하지 않으시며, 인간의 불가능 속에서도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하고, 기다리며, 받은 은혜를 다시 드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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