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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3장 주해와 강해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사무엘상 3장은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해진 어두운 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엘리의 눈은 점점 어두워지고 그의 가문은 심판을 향하지만,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소에 누워 있던 어린 사무엘을 부르시고 말씀을 맡기시며 온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세우십니다. 이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의 종을 어떻게 부르시는지, 그리고 말씀을 듣고 전하는 사람이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기 원합니다.

말씀이 희귀한 시대에도 하나님의 등불은 꺼지지 않습니다(삼상 3:1-10)

사무엘상 3장은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사무엘은 아직 어렸지만 실로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는 제사장 엘리의 감독 아래 있었으나 그가 섬기는 궁극적인 대상은 엘리가 아니라 여호와였습니다.

당시 실로의 상황은 매우 어두웠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이라는 직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호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백성이 드린 제물을 강제로 빼앗고 성소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하며 하나님의 거룩함을 짓밟았습니다. 엘리는 그들의 죄를 알고 책망했지만 실질적으로 제지하지 못했습니다.

한쪽에서는 제사장 가문이 무너지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어린 사무엘이 여호와 앞에서 자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시대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오래된 제사장 가문이 심판을 향하는 동안 새로운 말씀의 종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본문은 그때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했다고 말합니다. ‘희귀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카르(יָקָר)는 귀중하다, 값비싸다, 드물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치가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계시의 말씀이 자주 임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다”는 표현도 같은 현실을 보여 줍니다. ‘이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존(חָזוֹן)은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보여 주시는 환상이나 계시를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히 침묵하신 것은 아닙니다. 사무엘상 2장에서도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심판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전체에 하나님의 뜻을 지속해서 전할 선지자적 사역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말씀이 희귀해진 것은 단순히 선지자의 숫자가 부족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백성과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예배를 멸시한 영적 현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것은 인간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가 아니라 은혜입니다. 말씀을 거절하면서도 하나님께서 계속 말씀해 주셔야 한다고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책과 설교가 많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하게 들리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자기 생각을 확인하는 도구로만 사용하고, 듣기 좋은 부분만 취하며, 회개를 요구하는 말씀을 외면한다면 풍요 속에서도 말씀의 기근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진정한 위기는 프로그램이나 재정이 부족한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지 않고, 선포된 말씀 앞에 회개와 순종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더 큰 위기입니다. 말씀을 잃은 교회는 외형이 화려해도 방향을 잃습니다.

본문은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때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먼저 나이가 든 엘리의 육체적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야기 전체에서는 그의 영적 분별력이 흐려진 현실과도 자연스럽게 겹쳐집니다. 엘리는 한나의 간절한 기도를 술 취한 행동으로 오해했고, 아들들의 죄를 알면서도 단호하게 제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엘리를 아무런 장점도 없는 악인으로만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한나를 축복했고 어린 사무엘을 돌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 것을 뒤늦게나마 알아차리고 응답하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문제는 그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삶과 가정 안에서 끝까지 실천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부분적인 지식이 전적인 순종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능력이 있어도 자신에게 불리한 말씀에는 순종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바른 길을 가르치면서 자기 가정과 삶에서는 말씀을 외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알고 있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엘리가 자기 처소에 누워 있을 때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가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워 있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전은 솔로몬이 세운 성전이 아니라 당시 실로에 있던 성막과 그 주변의 성소 시설을 가리킵니다. 사무엘이 언약궤가 놓인 지성소 안에서 잤다는 뜻이라기보다 언약궤가 있는 성소 가까이에서 맡은 일을 수행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하나님의 등불이 아직 꺼지지 않았다”는 말은 당시의 시간을 알려 줍니다. 성소의 등불은 저녁부터 아침까지 밝혀 두었으므로 아직 새벽이 되기 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문학적으로도 깊은 의미를 전달합니다. 엘리의 눈은 어두워지고 여호와의 말씀은 희귀했지만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상황이 어두워도 하나님의 언약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사장들이 성소를 더럽혀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처럼 보여도 교회의 머리이신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과 백성을 보존하십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등불이 꺼졌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등불 곁에는 어린 사무엘이 누워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낡은 시대가 저물어 가는 동안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어둠만 바라보며 절망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사람을 세우십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하고 곧바로 엘리에게 달려갔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힌네니(הִנְנִי)는 자신의 위치만 알리는 표현이 아닙니다. 부르는 사람 앞에 자신이 준비되어 있다는 응답입니다.

사무엘은 부름을 들었지만 그 음성의 주인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엘리가 자신을 불렀다고 생각했습니다. 엘리는 부르지 않았다며 다시 누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두 번째로 부르셨을 때도 사무엘은 엘리에게 달려갔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즉시 알아듣지 못했다고 해서 그에게 믿음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사무엘이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았다는 의미라기보다 선지자에게 임하는 직접적인 계시를 아직 경험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2장은 이미 사무엘이 여호와 앞에서 섬기며 은총을 받았다고 기록했습니다.

사무엘은 성소에서 봉사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아 전하는 선지자적 소명은 아직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서는 것은 구별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한 사무엘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첫 번째 부름을 분별하지 못하자 다시 부르셨고, 두 번째에도 알지 못하자 세 번째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주권과 함께 인내가 나타납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고도 그 뜻을 한 번에 깨닫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못 해석하고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쉽게 버리지 않으십니다. 말씀을 반복하여 들려주시고 교회의 가르침과 성도의 권면을 통하여 깨닫게 하십니다.

사무엘이 세 번째로 찾아왔을 때 엘리는 여호와께서 아이를 부르신 줄 깨달았습니다. 그는 사무엘에게 다시 누웠다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대답하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완전한 엘리의 도움도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이 엘리의 잘못을 없애 주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섭리가 인간의 한계를 넘어 일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부족한 부모와 교사, 목회자라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다음 세대를 말씀 앞으로 인도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영적 지도자의 목적은 사람을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분별하며 순종하도록 돕는 것이 바른 지도입니다. 엘리는 사무엘에게 자신만 바라보라고 하지 않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도록 안내했습니다.

사무엘이 다시 누웠을 때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사무엘아 사무엘아”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름을 두 번 반복하여 부르는 것은 친밀함과 사명의 중요성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이름 없는 도구로 다루지 않으시고 그의 이름을 아시며 인격적으로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이 먼저 선지자가 되겠다고 나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그를 찾아오시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출발점은 인간의 야망이나 자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은혜입니다.

사무엘은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듣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샤마(שָׁמַע)는 단순히 소리를 듣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의 깊게 듣고 받아들여 순종한다는 뜻을 포함합니다. 성경적인 들음은 귀에서 끝나지 않고 삶으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말씀해 달라고 기도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이 원하는 말씀만 기다릴 때가 있습니다. 위로와 축복의 말씀은 원하지만 죄를 드러내고 삶의 방향을 바꾸라는 말씀은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종은 주인의 말씀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는 고백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든 받아들이겠다는 순종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생각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과 욕망을 하나님의 말씀 아래 내려놓는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성도가 사무엘처럼 새로운 계시를 받는 선지자로 부름받은 것은 아닙니다. 사무엘의 부르심은 이스라엘 역사의 특별한 시점에 주어진 선지자적 소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먼저 은혜로 부르시고, 부름받은 사람은 말씀 앞에서 듣고 순종해야 한다는 원리는 모든 성도에게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종은 어려운 말씀도 숨기지 않아야 합니다(삼상 3:11-18)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처음 맡기신 말씀은 개인적인 축복이나 성공의 약속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의 집에 내려질 심판의 말씀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선지자로서 처음 감당해야 할 사명은 자신을 돌보아 준 엘리에게 가장 무거운 말씀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보라 내가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귀가 울린다는 표현은 그 소식을 듣는 사람이 충격과 두려움에 사로잡힐 만큼 엄중한 사건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의 집을 향하여 말씀하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루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사무엘상 2장에서 한 하나님의 사람이 이미 엘리에게 가문의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사무엘에게 주어진 말씀은 앞서 내려진 판결을 다시 확인하고 확정하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빈말로 끝나지 않습니다. 인간은 약속하고도 능력이 없어 이루지 못할 수 있고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며 신실하시므로 자신이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한 소망이고 심판의 경고는 두려움으로 받아야 할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의 집을 심판하시는 이유를 다시 설명하십니다. 엘리는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는 범죄를 저지르는 줄 알고도 그들을 금하지 않았습니다. 엘리가 아들들의 모든 죄를 직접 범한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와 대제사장으로서 그들을 제지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엘리는 아들들의 죄를 전혀 지적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앞장에서 그들의 행실이 좋지 않다고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말로만 경고했을 뿐 그들을 제사장 직무에서 물러나게 하거나 범죄를 막는 실질적인 조치를 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에서 ‘금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카하(כָּהָה)는 억제하다, 제지하다, 약하게 만들다는 뜻을 가집니다. 엘리는 아들들의 범죄를 알았지만 그들이 더는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자신의 책임과 권한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죄를 알고 말로 지적하는 것만으로 책임이 끝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의 죄를 알고도 관계가 불편해질까 두려워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지도자도 공동체의 명예와 체면을 지키기 위해 범죄를 덮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은 죄를 모른 척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사람과 공동체를 파괴하지 못하도록 진리 안에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엘리가 아들들을 제지하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보다 아들들을 더 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백성의 안전보다 가족의 관계와 아들들의 지위를 더 무겁게 여겼습니다.

우리도 입술로는 하나님을 가장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실제 선택에서는 사람의 평가와 가족의 욕망, 돈과 체면을 더 중요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잃을 때 가장 두려워하는지를 살펴보면 마음속에서 무엇을 가장 중히 여기고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 집의 죄악이 제물로나 예물로나 영원히 속죄받지 못할 것이라고 맹세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어떤 죄인도 회개하거나 용서받을 수 없다는 보편적인 선언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엘리 가문에 내려진 특별한 역사적·언약적 심판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 자체를 이용하여 범죄했습니다. 그들은 백성이 드린 제물을 강제로 빼앗고 하나님의 몫보다 자신의 욕망을 앞세웠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다시 제물을 드린다는 종교적 행위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회개 없는 제사는 죄를 덮는 마술이 아닙니다. 예배에 참석하고 헌금하며 봉사한다고 해서 완고하게 붙들고 있는 죄가 자동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종교적인 행위로 매수되는 분이 아닙니다. 참된 예배는 죄를 감추는 가면이 아니라 말씀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은혜를 구하는 자리입니다.

짐승의 제사 자체에는 죄를 제거하는 독립적인 능력이 없었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은혜의 방편이며 장차 이루어질 완전한 속죄를 바라보게 했습니다. 궁극적인 속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단번에 제물로 드리심으로 완성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죄를 가볍게 여기게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와 참으로 연합한 사람은 성령의 역사로 죄를 미워하며 회개와 거룩함의 길을 걷습니다. 은혜는 죄 가운데 머물게 하는 구실이 아니라 죄에서 돌이키게 하는 능력입니다.

사무엘은 아침까지 누워 있다가 여호와의 집 문을 열었습니다. 밤에 하나님의 엄중한 말씀을 들었지만 아침이 되자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수행했습니다. 특별한 계시를 경험했다고 해서 일상의 책임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이 성소의 문을 여는 장면은 먼저 그가 수행하던 실제적인 봉사입니다. 동시에 말씀이 희귀했던 밤이 지나고 사무엘을 통하여 새로운 말씀의 시대가 열리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엘리의 눈은 어두워졌지만 아침의 문은 사무엘의 손으로 열리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 받은 이상을 엘리에게 알리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엘리는 그를 어린 시절부터 돌본 사람이며 제사장으로서 권위를 가진 어른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그의 가문이 심판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전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은 사무엘이 두려움을 느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종도 어려운 사명을 앞두면 두려울 수 있습니다. 믿음은 두려움이 전혀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두려움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무겁게 여기며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엘리는 사무엘을 불러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물었습니다. 그리고 한마디라도 숨기지 말고 모두 전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하나도 숨기지 않고 모두 전했습니다.

선지자는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더하거나 빼지 않고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위로해야 할 때 위로하고, 죄를 책망해야 할 때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책망해야 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것만 골라 말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성도들의 반응과 자신의 인기, 인간관계를 생각하여 불편한 진리를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말씀의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입니다. 주인이 맡기신 것을 충실하게 전달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진리를 전한다는 이유로 거칠고 무례하게 말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무엘은 엘리를 공격하거나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심판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움과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참된 설교에는 말씀에 대한 충성과 영혼에 대한 사랑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엘리는 사무엘의 말을 들은 후 “이는 여호와이시니 선하신 대로 하실 것이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에는 하나님께서 주권자이시며 그분의 판단이 옳다는 인정이 담겨 있습니다. 엘리는 사무엘을 거짓말쟁이라고 몰아세우거나 하나님의 판결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엘리의 온전한 회개로 이상화하는 것도 신중해야 합니다. 본문은 그가 아들들을 직무에서 제거하거나 가문을 회개로 이끌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의 말에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이 담겨 있을 수 있지만, 이미 내려진 판결을 체념하듯 받아들이는 모습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말이 책임을 회피하는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시겠지요”라는 말로 자신이 해야 할 회개와 순종을 미뤄서는 안 됩니다. 참된 섭리 신앙은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면서도 지금 해야 할 책임을 충실히 감당하게 합니다.

말씀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세우십니다(삼상 3:19-21)

사무엘상 3장의 마지막은 사무엘이 온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확립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라고 기록합니다.

사무엘은 한 번의 특별한 체험으로 완성된 사람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계속 자랐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성숙의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은혜로 부름받은 사람도 말씀을 배우고 훈련받으며 인내와 순종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사무엘의 사역을 가능하게 한 결정적인 힘은 뛰어난 언변이나 인간적인 매력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셨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 다윗의 사역도 하나님의 임재로 가능했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자기 능력만으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말을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는 것은 사무엘이 일상적으로 말한 모든 문장이 오류가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로서 맡기신 말씀이 헛되이 끝나지 않고 역사 속에서 성취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떨어지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팔(נָפַל)은 말이나 약속이 무산되고 효력을 잃는 모습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이 전한 말씀을 이루심으로 그가 참된 선지자라는 사실을 증명하셨습니다.

선지자의 권위는 강한 말투나 자기 확신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말씀을 맡기시며 그 말씀을 이루시는 데서 나옵니다. 오늘날 설교자의 권위도 직함이나 유명세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고 충실하게 전할 때 말씀 자체가 가진 권위로 섬기게 됩니다.

설교자는 성경 위에 서서 말씀을 평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 아래에 서서 말씀의 판단을 먼저 받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시대의 유행을 하나님의 뜻처럼 포장하지 말고 본문이 실제로 말하는 바를 성실하게 전해야 합니다.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온 이스라엘은 사무엘이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움을 받은 줄 알았습니다. 단은 이스라엘의 북쪽을, 브엘세바는 남쪽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이스라엘 전역을 의미합니다.

실로의 성소에서 조용히 부름받은 어린아이가 이제 온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로 인정받았습니다. 사무엘이 스스로 선지자임을 주장하여 지위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이루시고 공동체 가운데 그의 사역을 확증하셨습니다.

‘세움을 입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에만(נֶאֱמָן)은 확립되다, 신실한 것으로 확인되다라는 뜻입니다. 사무엘의 영적 권위는 자기 홍보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과 오랜 충실함을 통하여 세워졌습니다.

참된 영적 권위는 자신을 높인다고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리에서 말씀과 삶이 일치하도록 오랫동안 충실하게 섬길 때 공동체 안에서 확인됩니다. 권력으로 강요한 권위는 사람을 억누르지만 진리와 섬김으로 형성된 권위는 공동체를 살립니다.

여호와께서는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장의 시작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고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지만,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실로에서 계속 나타나셨습니다. 말씀의 기근이 말씀의 풍성함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변화는 사무엘의 특별한 능력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셨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이성만으로 하나님의 본질과 구원의 뜻을 완전히 알아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어 말씀해 주셔야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간의 추측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자신을 가장 충만하게 나타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달한 많은 선지자 가운데 한 사람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분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영원한 말씀입니다.

사무엘은 엘리 집에 임할 심판을 전했지만 그 심판을 대신 짊어질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셨을 뿐 아니라 자기 백성이 받아야 할 심판을 십자가에서 담당하셨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숨기지 않고 전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주신 말씀을 온전히 전하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세움을 받았지만 예수님은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의 직분을 완전하게 이루신 중보자이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새로운 계시를 찾아 방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록된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성령의 조명을 구하며,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성경과 분리된 다른 복음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을 깨닫고 믿고 살아 내도록 역사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사무엘처럼 새로운 정경적 계시를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성경을 통하여 이미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을 겸손히 듣고 순종하겠다는 고백입니다.

교회가 시대의 관심을 얻는 데만 몰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잃으면 화려한 외형이 있어도 영적으로는 어둡습니다. 반대로 규모가 작고 세상에서 주목받지 못하더라도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고 순종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등불로 사용하십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무엘상 3장은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고 지도자의 눈이 어두워진 시대에도 하나님의 등불은 꺼지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사무엘을 이름으로 부르시고 말씀을 맡기셨으며, 그 말씀을 이루심으로 그를 온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세우셨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을 찾는 마음이 아니라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고백하는 마음입니다. 위로와 약속뿐 아니라 죄를 드러내고 회개를 요구하는 말씀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말로만 인정하지 말고 깨달은 말씀을 실제 순종으로 옮겨야 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인간의 반응을 두려워하여 진리를 숨기지 말아야 합니다. 동시에 진리를 자신의 분노를 쏟는 도구로 사용하지 말고 사랑과 겸손으로 전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사람도 자기 생각에 맞는 부분만 골라 취하지 말고 성경의 가르침 아래 자신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인간 지도자의 완전함에 있지 않습니다. 영원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성령께서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교회를 보존하십니다. 시대가 아무리 어두워 보여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습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듣고, 들은 말씀을 충실히 전하며, 삶으로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무엘상 2장 주해와 강해

거룩하신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낮추고 충실한 종을 세우십니다

사무엘상 2장은 한나의 찬송으로 시작하여 엘리 가문에 대한 심판 선언으로 끝납니다. 한나가 노래한 역전의 하나님은 실제 역사 속에서 교만한 제사장들을 낮추시고 어린 사무엘을 높이십니다. 이 장은 거룩한 직분이 인간의 죄를 가려 주지 못하며,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멸시하는 자를 심판하시고 자신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는 종을 세우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살피고, 은혜로 받은 직분과 예배를 거룩하게 지켜야 함을 깨닫기 원합니다.

인간의 높고 낮음을 결정하시는 하나님(삼상 2:1-10)

사무엘상 1장에서 한나는 아들을 달라고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기억하시고 사무엘을 주시자 한나는 약속대로 아이를 실로에 데려와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사무엘상 2장은 바로 그 자리에서 드린 한나의 기도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한나의 기도는 단순히 아들을 얻은 어머니의 개인적인 감사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의 노래는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 강한 자와 약한 자, 죽음과 생명, 인간의 교만과 하나님의 왕권을 아우르는 장엄한 신앙고백으로 확장됩니다.

한나는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라고 노래합니다. 한나의 기쁨은 사무엘 자체에만 있지 않고 사무엘을 주신 여호와께 있습니다. 그는 “아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한다”고 하지 않고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한다”고 고백합니다. 선물을 주신 하나님보다 선물 자체를 더 사랑한다면 그 선물은 쉽게 우상이 됩니다. 한나는 응답을 받았지만 응답에 머물지 않고 응답하신 하나님께로 시선을 돌립니다.

‘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케렌(קֶרֶן)은 동물의 힘과 위엄을 상징합니다. “내 뿔이 높아졌다”는 말은 한나가 다른 사람을 지배할 힘을 얻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수치 속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던 한나에게 하나님께서 새로운 힘과 존귀를 주셨다는 고백입니다. 브닌나의 조롱 앞에서 입을 열지 못했던 한나가 이제 원수들을 향하여 입을 크게 엽니다. 그러나 그의 승리는 자신이 강해진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하는 데 있습니다.

한나의 기도에는 “여호와로 말미암아”라는 고백이 반복됩니다. 한나를 높인 것은 그의 공로나 끈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는 자신의 기도 능력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서원을 지켰기 때문에 복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기쁨과 존귀와 구원이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고백합니다.

개혁주의 신앙의 중심에는 이러한 하나님 중심성이 있습니다. 인간의 구원과 회복은 인간의 가능성이나 공로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찾아오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낮은 자를 들어 올리십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이유도 믿음이 남보다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믿음 자체도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의 자랑은 자신에게 있지 않고 오직 주님께 있습니다.

한나는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거룩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도시(קָדוֹשׁ)는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시며 도덕적으로 완전하신 분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인간보다 조금 더 능력 있고 선한 존재가 아닙니다.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한 창조주이며 모든 존재와 가치의 기준이십니다.

하나님은 또한 반석이십니다. 반석에 해당하는 추르(צוּר)는 변하지 않는 견고함과 피난처를 나타냅니다. 한나의 형편은 오랫동안 흔들렸지만 하나님은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의 사랑은 한계가 있고 세상의 평가는 수시로 바뀌지만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은 변하지 않습니다. 성도의 안전은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데 있지 않고 변하지 않는 하나님께 피하는 데 있습니다.

거룩하고 견고하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교만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한나는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라고 경고합니다. 이 말은 한나를 격분하게 했던 브닌나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한나의 노래는 개인적인 복수를 위한 선언을 넘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높이는 모든 사람을 향합니다.

교만은 자신을 크게 생각하는 감정만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도 자신의 인생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태도이며, 하나님께 받은 것을 자신의 공로처럼 여기는 마음입니다. 브닌나는 자녀라는 선물을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는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제사장 직분을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는 특권으로 사용했습니다. 서로 다른 모습처럼 보이지만 모두 하나님께 받은 것을 자신을 높이는 데 사용한 교만입니다.

한나는 여호와를 “지식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겉모습만 보지 않으시고 마음과 동기를 아십니다. 사람은 행동의 일부만 보고 평가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감추어진 욕망까지 살피십니다. 사람에게 경건하게 보이면서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의 유익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직분을 수행하고 종교적 언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마음의 부패가 가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행위를 정확하게 평가하신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판단에는 편견과 실수가 있지만 하나님의 판단에는 오류가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악한 사람이 인정받고 정직한 사람이 손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의 하나님께서 모든 행동을 달아 보시므로 마지막 판단은 반드시 의롭습니다.

한나는 이어지는 노래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놀라운 역전을 선포합니다.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두릅니다. 풍족하던 자는 양식을 얻기 위해 품을 팔지만 주리던 자는 다시 주리지 않습니다. 임신하지 못하던 여인은 일곱을 낳지만 많은 자녀를 둔 여인은 쇠약해집니다.

여기서 ‘일곱’은 반드시 한나가 실제로 일곱 자녀를 낳았다는 뜻이라기보다 충만함을 나타내는 시적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본문 뒤에서는 한나가 사무엘 외에 세 아들과 두 딸을 낳았다고 기록합니다. 한나의 개인적인 경험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형편을 뒤집으시는 보편적인 통치의 표지가 됩니다.

하나님의 역전은 단순히 가난한 사람과 부자의 자리를 기계적으로 바꾸는 일이 아닙니다. 모든 가난한 사람이 자동으로 부자가 되고 모든 부자가 반드시 몰락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핵심은 인간의 힘과 현재의 형편이 영원하지 않으며 높고 낮음을 결정하는 최종 권한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지금 가진 것이 영원할 것처럼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현재의 연약함이 영원할 것처럼 절망해서도 안 됩니다. 용사의 활이 꺾일 수 있고 넘어진 자가 다시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고정된 평가와 가능성을 넘어 일하십니다.

한나는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라고 노래합니다. 스올(שְׁאוֹל)은 구약에서 죽은 자들이 내려가는 영역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이 구절은 문맥상 생명과 죽음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선언합니다. 여기에서 완성된 형태의 부활 교리를 직접 끌어내는 것은 신중해야 하지만, 죽음조차 하나님의 통치 밖에 있지 않다는 고백은 이후 성경에서 드러날 부활 소망을 바라보게 합니다.

생명은 우연히 발생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출생과 죽음, 건강과 질병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이 고백은 인간의 생명을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자신의 생명과 이웃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맡겨진 날들을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십니다. 한나는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고 궁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들어 올려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신다고 노래합니다. 진토와 거름더미는 인간적으로 가장 낮고 비참한 자리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있는 사람도 존귀한 자리에 앉히실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며 하나님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한나가 믿은 하나님은 한 가정의 문제만 해결하는 지역 신이 아닙니다. 세계의 기초를 세우시고 모든 역사를 통치하시는 창조주입니다. 한나의 기도는 개인적인 감사에서 우주적인 하나님의 통치로 확장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지만 악인들을 흑암 중에서 잠잠하게 하십니다. ‘거룩한 자들’은 죄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 안에 있는 신실한 백성을 가리킵니다. 이들이 보존되는 이유는 자신의 힘 때문이 아닙니다. 한나는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라고 선언합니다.

성도의 견인은 인간의 의지가 강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붙드시고 끝까지 지키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성도는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넘어질 때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사람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결심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를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합니다.

한나의 노래는 갑자기 왕과 기름 부음 받은 자에 대한 선언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아직 이스라엘에 왕이 세워지기 전인데 한나는 하나님께서 주실 왕을 바라봅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히브리어 메시호(מְשִׁיחוֹ), 곧 ‘그의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메시아라는 말은 기름부음을 받아 하나님께 구별된 왕이나 제사장을 가리킵니다. 이 구절은 사무엘서 전체를 여는 중요한 문과 같습니다. 사무엘은 장차 사울과 다윗에게 기름을 부을 것이며, 사무엘서는 하나님께서 어떤 왕을 세우시고 어떤 왕을 버리시는지를 보여 줄 것입니다.

한나의 노래는 인간 왕을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왕에게 힘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며 왕의 뿔을 높이시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왕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절대군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아래 놓인 종입니다. 이스라엘 왕권의 정당성은 군사력이나 혈통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과 말씀에 대한 순종에 달려 있습니다.

이 메시아적 소망은 다윗 왕조를 거쳐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힘으로 권력을 차지한 왕이 아니라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아버지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참된 왕입니다. 한나가 노래한 역전의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세상의 권력과 지혜를 뒤집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버린 돌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시고, 죽임당하신 그리스도를 부활과 영광의 자리로 높이셨습니다.

예배를 멸시하는 자와 하나님 앞에서 자라는 아이(삼상 2:11-26)

한나의 찬송이 끝난 후 엘가나는 라마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아이 사무엘은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깁니다. 아직 어린아이였지만 그가 섬긴 궁극적인 대상은 엘리가 아니라 여호와였습니다. 엘리는 사무엘을 감독하고 가르치는 사람이었지만 사무엘의 삶은 하나님께 드려진 삶이었습니다.

본문은 곧바로 사무엘과 엘리의 아들들을 대조합니다. 사무엘은 어린아이지만 여호와를 섬겼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이지만 여호와를 알지 못했습니다. 성경은 엘리의 아들들을 “행실이 나쁜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어로는 베네 벨리야알(בְּנֵי בְלִיָּעַל), 곧 ‘벨리야알의 아들들’이라는 표현입니다. 이는 무가치하고 사악하며 무법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제사장의 직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호와를 알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알다’에 해당하는 야다(יָדַע)는 단순히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소유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언약적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의 규례와 절차를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거나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종교적인 직분과 구원의 믿음은 자동으로 일치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봉사하고 성경에 관한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신앙과 직분도 자녀의 구원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엘리가 제사장이라는 사실이 그의 아들들을 자동으로 경건하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살펴야 합니다.

홉니와 비느하스의 죄는 제물을 다루는 방식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났습니다. 율법은 화목제 가운데 일정한 부분을 제사장의 몫으로 정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의 아들들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기름을 태우기 전에 고기를 요구했고, 원하는 대로 주지 않으면 강제로 빼앗았습니다.

제사에서 기름은 여호와께 태워 드려야 할 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의 몫보다 자신의 배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제사를 통해 하나님을 섬겨야 할 사람들이 제사를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채웠습니다. 예배를 맡은 사람이 예배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밀어내고 자기 유익을 차지한 것입니다.

그들의 종은 제사를 드리는 사람에게 삶은 고기가 아니라 날고기를 요구했습니다.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먼저 기름을 태운 후 가져가라고 말하면 종은 억지로라도 빼앗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순간적인 실수나 무지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규례를 알고도 반복적으로 무시한 완고한 범죄였습니다.

본문은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고 평가합니다. ‘멸시하다’는 말은 가볍게 여기고 업신여긴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제물의 일부를 더 가져간 것이 아닙니다. 제사를 자기 욕망의 도구로 만들면서 제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멸시했습니다.

예배의 타락은 형식이 조금 잘못된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배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입니다. 교회가 예배를 사람의 욕망과 명예, 돈과 권력을 위한 수단으로 바꿀 때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게 됩니다. 특히 예배를 인도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은 자신의 유익보다 하나님의 영광과 성도의 유익을 먼저 구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짐승의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구약의 제사를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배를 멸시할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예배를 자기 과시의 무대로 삼거나, 직분을 지배의 권리로 여기거나, 복음을 이익의 수단으로 이용한다면 홉니와 비느하스의 죄를 다른 모습으로 반복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다시 사무엘에게 시선을 돌립니다. “사무엘은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섬겼더라”고 말합니다. 세마포 에봇은 제사장적 섬김과 관련된 옷이지만, 여기서 사무엘이 대제사장의 모든 직무를 수행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린 사무엘이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구별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 신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제사를 멸시했고, 사무엘은 어린아이이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나이나 직위보다 그가 누구 앞에서 살아가는지를 보십니다. 사무엘을 설명하는 중요한 표현은 “여호와 앞에서”입니다. 그는 엘리와 사람들의 눈앞에서만 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섬겼습니다.

한나는 해마다 남편과 함께 제사를 드리러 올라갈 때 작은 겉옷을 만들어 사무엘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해서 어머니의 사랑과 책임을 잊은 것이 아닙니다. 한나는 서원을 지키면서도 해마다 자라나는 아들의 몸에 맞는 옷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봉헌과 사랑은 서로 대립하지 않았습니다.

한나의 작은 겉옷에는 말없는 사랑과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아들을 매일 곁에 두지는 못했지만 하나님께 맡긴 아이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하나님께 누군가를 맡긴다는 것은 무관심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으면서도 사랑과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엘리는 엘가나와 한나를 축복하며 여호와께 드린 아들을 대신하여 다른 자녀를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나를 돌보셔서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낳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헌신에 반드시 물질적·수적인 보상으로 응답하신다는 공식으로 이 사건을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본문은 한나가 하나님께 드린 일을 잃어버린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한 투자처럼 헌신해서도 안 됩니다. 한나는 더 많은 자녀를 받기 위해 사무엘을 드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약속을 지켰습니다. 이후에 주어진 자녀들은 한나의 공로에 대한 임금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였습니다.

본문은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고 다시 말합니다. 사무엘은 육체적으로만 자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반면 엘리의 아들들에 관한 소문은 점점 더 악해졌습니다. 한 장 안에서 두 방향의 성장이 나타납니다. 한쪽에서는 사무엘이 하나님 앞에서 자라고, 다른 쪽에서는 홉니와 비느하스의 죄악이 심판을 향해 자랍니다.

엘리는 매우 늙은 상태에서 두 아들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과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했다는 소문을 듣습니다. 그들의 죄는 제물을 탐한 데서 그치지 않고 성적 범죄로까지 확대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욕망은 스스로 멈추지 않습니다. 회개로 끊어 내지 않으면 더 넓은 영역을 파괴합니다.

엘리는 아들들에게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라고 책망합니다. 그는 아들들의 행동이 좋지 않으며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죄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엘리가 아들들의 죄를 전혀 몰랐거나 완전히 승인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죄를 알고 말로는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뒤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평가에 따르면 엘리의 대응은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제사장과 아버지로서 아들들을 직무에서 물러나게 하거나 실질적으로 제지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상 3장은 엘리가 아들들의 죄를 알고도 금하지 않았다고 밝힙니다. 말로 잘못을 지적하는 것만으로 책임이 끝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권한과 책임이 있는 사람은 악이 계속되지 않도록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합니다.

엘리는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만일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구하겠느냐”고 말합니다. 사람 사이의 분쟁에는 재판을 통한 중재가 가능하지만, 하나님을 직접 멸시한 죄는 인간의 중재로 가볍게 해결할 수 없다는 엄중한 경고입니다.

그러나 아들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본문은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더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죄 없는 사람들을 임의로 악하게 만들어 죽이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이미 오랫동안 고의적이고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했습니다. 그들이 권면을 듣지 않은 것은 완고한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사법적 심판이 나타난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그들의 책임은 대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작정하셨다고 해서 그들의 죄에 대한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따라 자발적으로 악을 행했습니다. 동시에 그들의 완고함조차 거룩하신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었습니다.

죄를 반복하면서 언제든 원할 때 회개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회개는 인간이 마음대로 꺼내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계속 무시하면 양심이 굳어지고 말씀을 듣는 귀가 닫힐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죄를 깨닫게 하실 때 미루지 말고 돌이켜야 합니다.

엘리의 아들들이 심판을 향해 가는 동안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고 기록됩니다. 이 표현은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성장을 설명하는 말과 닮아 있습니다. 그렇다고 사무엘을 곧바로 예수님의 직접적인 예표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누가는 경건하게 성장하는 사무엘의 언어를 사용하여 예수님의 지혜와 은혜로운 성장을 묘사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무엘은 완전한 구원자가 아니었지만 타락한 제사장 가문과 대조되는 충실한 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둠 속에서도 자신의 사람을 준비하셨습니다. 성소가 타락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계획까지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제사를 더럽히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어린 사무엘을 자라게 하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시대가 어둡고 교회가 부족한 모습을 보일 때 쉽게 절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인간 지도자의 능력으로 보존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자기 백성을 지키십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자리에서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사랑하고 정직하게 섬길 사람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멸시한 집을 심판하고 충실한 제사장을 세우시는 하나님(삼상 2:27-36)

한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찾아옵니다. 그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적 사명을 수행합니다. 그는 엘리 가문에 갑작스럽게 심판을 선언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 가문에 베푸신 은혜를 먼저 상기시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에게 “너희 조상의 집이 애굽에서 바로의 집에 속하였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 나타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론의 가문을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선택하여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제단에 올라 분향하고 에봇을 입으며 이스라엘 자손이 드리는 제물 가운데 정해진 몫을 받게 하셨습니다.

엘리 가문의 직분은 스스로 쟁취한 권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선택하여 맡기신 특권이었습니다. 그러나 은혜로 받은 특권에는 거룩한 책임이 따릅니다. 많이 받은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다는 사실이 죄를 가려 주는 면허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받은 은혜가 클수록 그것을 멸시한 죄의 책임도 무거워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라고 책망하십니다. ‘밟다’에 해당하는 표현은 발로 차듯이 멸시하고 업신여기는 태도를 나타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제물을 탐한 행동은 결국 하나님을 발로 차는 것과 같았습니다.

더욱 무서운 책망은 엘리가 아들들을 하나님보다 더 중히 여겼다는 말씀입니다. 엘리는 아들들의 잘못을 알고 말로 책망했지만 그들을 제사장 직분에서 제거하지 않았습니다. 아들들과의 관계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거룩함을 희생했습니다. 자녀를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그 사랑은 죄를 막지 않는 잘못된 사랑이 되었습니다.

참된 사랑은 상대방의 죄를 모른 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그 사람과 공동체를 파괴하지 못하도록 진리를 말하고 필요한 책임을 묻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의 잘못을 무조건 감싸는 것이 사랑은 아닙니다. 교회가 지도자의 범죄를 명예와 체면을 지키기 위해 덮는 것도 공동체를 보호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에게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겼다”고 말씀하십니다. ‘중히 여기다’는 말은 무겁게 여기고 존귀하게 대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영광을 뜻하는 카보드(כָּבוֹד)도 ‘무거움’이라는 의미와 연결됩니다. 엘리는 하나님보다 아들들에게 더 큰 무게를 두었습니다. 그의 선택을 결정한 기준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가족의 관계와 이익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입술로 하나님을 가장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실제 결정에서는 사람의 평가와 가족의 욕망, 돈과 성공을 더 무겁게 여길 수 있습니다. 무엇을 잃을 때 가장 두려운지, 누구의 말을 거스르지 못하는지를 살펴보면 마음에서 무엇을 가장 중히 여기는지 드러납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이스라엘이 드리는 모든 제물의 가장 좋은 것으로 자신들을 살찌게 했습니다. 제물을 통해 하나님을 높여야 할 자들이 제물로 자기 몸과 욕망을 키웠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것을 먹으면서 정작 하나님을 멸시했습니다. 외형적으로는 제사가 계속되었지만 그 중심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탐욕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엘리의 집과 조상의 집이 영원히 하나님 앞에 행하리라고 말씀하셨지만 이제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변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제사장직에 관한 약속을 죄를 지어도 자동으로 신분이 보장된다는 특권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지만 언약을 멸시하는 자에게 언약의 심판을 내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의 은혜를 사는 공로가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존중하는 삶은 먼저 은혜를 받은 사람이 보이는 언약적 반응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멸시하는 행동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와 거룩함을 실제로 업신여기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을 존중한다는 것은 종교적인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욕망보다 무겁게 여기고, 예배를 자신의 유익보다 귀하게 여기며, 죄를 합리화하지 않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일상적인 선택과 관계, 돈과 권력을 사용하는 태도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 집의 팔을 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팔은 힘과 능력, 가문의 지속성을 상징합니다. 엘리 가문에는 노인이 없게 되고, 그 후손들은 젊어서 죽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을 사적인 유익을 위해 사용한 가문은 그 직분과 영향력을 잃게 됩니다.

엘리에게 주어진 표징은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같은 날에 죽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사무엘상 4장에서 블레셋과의 전쟁 중 두 사람이 함께 죽음으로 성취됩니다. 그들의 죽음은 우연한 전쟁의 결과만이 아니라 오랫동안 하나님의 거룩함을 멸시한 죄에 대한 심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더디게 보인다고 해서 심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지만 죄를 무관심하게 바라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죄를 계속 지어도 된다는 허락이 아니라 회개하도록 주시는 기회입니다. 은혜의 시간을 완고함으로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심판 선언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소망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엘리 가문을 심판하시지만 제사장직 자체와 이스라엘을 향한 구원의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충실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에만(נֶאֱמָן)은 신뢰할 수 있고 견고하며 충성스럽다는 뜻입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자기 욕망대로 행했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실 제사장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대로 행할 것입니다. 충실한 사역자의 기준은 사람의 인기를 얻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데 있습니다.

이 약속이 역사적으로 누구에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가까운 문맥에서는 어린 사무엘의 충실한 사역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 가문의 교체라는 측면에서는 솔로몬 시대에 엘리 계열의 아비아달이 물러나고 사독이 제사장으로 세워진 사건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열왕기상 2장은 이 일을 엘리의 집에 대하여 하신 여호와의 말씀을 이루는 사건으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역사적 성취는 사무엘의 사역과 사독 계열의 확립을 함께 고려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충실한 제사장을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그가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가까운 역사적 의미에서는 사독 계열의 제사장들이 다윗 왕조의 왕들을 섬기는 모습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사장과 기름부음 받은 왕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함께 섬기는 질서가 제시됩니다.

그러나 사무엘서와 구약성경 전체의 흐름에서 인간 제사장과 왕은 모두 한계를 드러냅니다. 충실한 제사장들도 완전하지 않았고 다윗의 후손들도 죄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약속은 역사적 성취를 넘어 완전한 제사장과 왕에 대한 필요를 일깨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론 계열의 제사장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십니다. 따라서 사무엘상 2장의 충실한 제사장 약속을 곧바로 예수님만을 가리키는 직접 예언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정경 전체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충실한 제사장직은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으로 완전해집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제물을 빼앗아 자신들의 배를 채웠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백성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몸을 제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그들은 제사장직을 이용해 백성에게서 빼앗았지만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고 도리어 섬기며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보다 욕망을 따랐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반복하여 제사를 드려야 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우리는 불완전한 인간 제사장의 공로가 아니라 완전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교회의 지도자와 직분자는 그리스도의 자리를 대신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 아래에서 교회를 섬기는 종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엘리의 남은 후손들이 와서 은 한 조각과 떡 한 덩이를 구하며 제사장 직분의 하나를 맡겨 달라고 간청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한때 가장 좋은 제물을 강제로 빼앗아 배를 채우던 가문의 후손들이 이제 한 조각의 떡을 구하게 됩니다. 한나의 찬송에서 선포된 역전이 엘리 가문의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풍족한 자가 양식을 위해 품을 팔고 주리던 자가 다시 주리지 않는다는 한나의 노래가 현실이 됩니다. 한나는 비천한 자리에서 높아지고 사무엘은 하나님 앞에서 자라지만, 자신을 높인 엘리의 아들들과 그 가문은 낮아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행동을 달아 보시며 자신을 존중하는 자를 존중하시고 자신을 멸시하는 자를 낮추십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무엘상 2장은 한나의 노래와 엘리 가문의 심판을 통하여 하나의 분명한 진리를 선포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달아 보시며, 교만한 자를 낮추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세우십니다. 사람의 신분과 직분, 현재의 힘과 풍요가 마지막 운명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높고 낮음을 결정하십니다.

한나는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자랑했습니다. 그는 아들을 얻은 기쁨에 머물지 않고 모든 생명과 역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반면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께 받은 제사장직을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가까이에서 일했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거룩한 제물을 다루면서도 거룩하신 하나님을 멸시했습니다.

우리도 교회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직분을 맡고 예배에 참여하며 성경을 안다는 사실이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고 있음을 자동으로 보장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무엇을 가장 무겁게 여기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가족의 욕망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의 체면을, 성도의 유익보다 개인의 이익을 앞세우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특히 교회의 직분과 은사를 맡은 사람은 더욱 두려움으로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직분은 사람 위에 군림하라고 주신 권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섬기라고 맡기신 책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말씀을 자신의 명예와 이익을 위해 사용한다면 엘리의 아들들이 제물을 멸시한 죄와 다르지 않습니다.

엘리의 실패도 깊이 새겨야 합니다. 그는 아들들의 죄를 알고 말로 책망했지만 그 죄를 막기 위해 필요한 책임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죄를 지적하는 말만 하고 실제로는 방치하는 것이 사랑은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중히 여기면 결국 사람도 살리지 못하고 공동체도 지키지 못합니다. 사랑은 진리와 분리될 수 없으며, 참된 사랑은 회개와 거룩함으로 이끕니다.

그러나 이 장은 심판만 말하지 않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이 예배를 더럽히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어린 사무엘을 자라게 하셨습니다. 한 가문이 무너지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킬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인간의 실패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교회가 부족하고 시대가 어두워 보여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교회의 주인은 인간 지도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보존하시며 신실하게 섬길 사람을 준비하십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자리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사무엘을 자라게 하십니다.

우리가 의지할 궁극적인 제사장은 사람에게서 빼앗는 제사장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단번에 제사를 드리셨으며 지금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과 희생을 의지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강함을 자랑하지 말고 구원의 하나님을 자랑하십시오. 받은 은혜와 직분을 자기 욕망을 위해 사용하지 말고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데 사용하십시오. 죄를 깨닫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고 즉시 회개하십시오. 무엇보다 하나님을 가장 무겁고 존귀하게 여기십시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동을 정확하게 달아 보십니다. 자신을 높이는 자를 낮추시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자를 은혜로 붙드십니다. 흔들리는 사람과 제도가 아니라 반석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우리의 왕이자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충실하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무엘상 3장 주해와 강해

 

말씀의 등불이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사무엘상 3장은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해진 시대에 한 소년을 부르시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엘리의 눈은 어두워지고 그의 집은 심판을 향해 가지만,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사무엘을 주권적으로 부르시고 가장 전하기 어려운 말씀을 맡기시며 온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세우십니다. 이 본문을 통하여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어두운 시대에도 어떻게 자신의 말씀과 교회를 보존하시는지를 깨닫기 원합니다.

말씀이 희귀한 시대에도 하나님의 등불은 꺼지지 않습니다(삼상 3:1-10)

사무엘상 3장은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사무엘은 아직 어린아이였지만 실로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는 엘리의 감독과 가르침 아래 있었으나 그의 섬김이 궁극적으로 향한 대상은 엘리가 아니라 여호와였습니다.

이 장면은 앞장의 상황과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이면서도 여호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빼앗고 성소를 욕망의 도구로 만들었습니다. 엘리는 아들들의 죄를 알고 책망했지만 그들을 실질적으로 제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 엘리 가문에 심판을 선고하셨습니다.

그런 어두운 현실 한가운데서 사무엘은 하나님 앞에서 자라고 있었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의 죄는 점점 심각해졌고 사무엘은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한쪽에서는 오래된 제사장 가문이 무너지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말씀의 종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인간의 타락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중단시키지 못합니다.

당시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했습니다. ‘희귀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카르(יָקָר)는 귀중하다, 값비싸다, 드물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치가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계시의 말씀이 자주 임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에 그 말씀은 더욱 귀한 것이 되었습니다.

본문은 또한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상’에 해당하는 하존(חָזוֹן)은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보여 주시는 환상이나 계시를 가리킵니다. “흔히 보이지 않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계시가 널리 나타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히 침묵하신 것은 아닙니다. 앞장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말씀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전체에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할 선지자적 사역은 거의 사라져 있었습니다.

말씀이 희귀해진 상황은 단순히 선지자의 숫자가 부족했다는 의미를 넘어섭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예배를 멸시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은 당연한 권리가 아니라 은혜입니다. 말씀을 반복하여 거절하고 가볍게 여기면서도 하나님께서 계속 말씀해 주셔야 한다고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양식이 없어 주리는 기근보다 더 두려운 기근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물과 양식이 없으면 육체가 쇠약해지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영혼과 공동체가 방향을 잃습니다. 종교적 의식은 계속될 수 있고 제사장의 직분도 남아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으면 예배는 껍데기만 남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성경과 설교를 접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성경책이 많고 인터넷을 통해 수많은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풍부하게 유통된다고 해서 반드시 말씀이 풍성하게 들리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자신의 생각을 확인하는 도구로만 사용하고, 듣기 좋은 부분만 골라 받아들이며, 불편한 진리는 외면한다면 실질적으로는 말씀의 기근 속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본문은 영적 어둠을 엘리의 육체적 상태와 함께 묘사합니다.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라는 표현은 그가 노쇠하여 시력을 잃어 가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먼저 실제적인 육체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문학적으로는 이스라엘 지도자의 영적 분별력이 쇠퇴한 현실과도 어울립니다. 엘리는 한나의 간절한 기도를 술 취한 행동으로 오해했고, 아들들의 죄를 알고도 제대로 제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엘리를 아무런 장점도 없는 악인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한나를 축복했고, 사무엘을 돌보았으며, 뒤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고 계신다는 사실을 분별하여 응답하는 법을 알려 줍니다. 문제는 그가 하나님의 뜻을 어느 정도 알고도 자신의 가정과 직분 안에서 끝까지 순종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부분적인 지식과 일시적인 분별이 삶 전체의 순종을 대신하지 못합니다.

엘리가 자기 처소에 누워 있을 때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가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워 있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전’은 후대에 솔로몬이 지은 성전을 뜻하지 않습니다. 당시 실로에 있던 성막과 그 주변의 성소 시설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사무엘이 언약궤가 놓인 지성소 안에서 잠을 잤다고 이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는 언약궤가 있는 성소 가까이에서 맡은 일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등불이 아직 꺼지지 않았다”는 말은 우선 시간적 배경을 알려 줍니다. 성소의 등불은 저녁부터 아침까지 밝혀 두었으므로 아직 새벽이 완전히 밝기 전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본문의 전체 분위기 속에서 더 깊은 울림을 줍니다. 엘리의 눈은 어두워지고 하나님의 말씀은 희귀했지만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형편이 어두워도 하나님의 언약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타락한 제사장들이 성소를 더럽혔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등불을 꺼뜨리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빛을 보존하십니다. 그 등불 곁에 어린 사무엘이 누워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낡은 시대가 저물어 가는 동안 새로운 말씀의 종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교회가 어두운 모습을 보일 때 우리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지도자의 실패와 공동체의 타락을 보며 하나님의 교회에 소망이 없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생명은 인간 지도자의 완전함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자기 교회를 보존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도 말씀을 들을 사람을 준비하십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하고 엘리에게 달려갔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힌네니(הִנְנִי)는 단순히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말이 아니라 부름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표현입니다. 아브라함과 야곱과 모세도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이 말로 응답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자신을 부른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아직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엘리가 불렀다고 생각하여 곧바로 달려갔습니다. 엘리는 자신이 부르지 않았다며 다시 누우라고 말합니다. 같은 일이 두 번째로 반복됩니다. 사무엘은 다시 일어나 엘리에게 가지만 엘리는 그를 부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즉시 알아듣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의 불신앙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사무엘에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나 경건이 전혀 없었다는 뜻이라기보다,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말씀하시는 특별한 계시를 아직 경험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사무엘상 2장은 이미 사무엘이 여호와 앞에서 섬기며 은총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3장의 표현은 그가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그는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겼지만 하나님의 직접적인 부르심을 분별하는 일은 처음이었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인격적으로 서는 것은 구별될 수 있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알아듣지 못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부르셨습니다. 첫 번째에 알아듣지 못하자 두 번째 부르시고, 두 번째에도 알아듣지 못하자 세 번째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주권뿐 아니라 인내가 나타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한 번에 분명히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도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잘못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종을 성급하게 버리지 않으십니다. 말씀을 반복하여 들려주시고, 교회의 가르침과 성도의 도움을 통하여 우리를 깨우치십니다.

사무엘이 세 번째로 엘리에게 갔을 때 엘리는 비로소 여호와께서 아이를 부르신 줄 깨달았습니다. 엘리는 영적으로 많은 실패를 경험한 사람이었지만 이 순간에는 사무엘에게 필요한 도움을 줍니다. 그는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하지 않은 엘리를 사용하여 사무엘이 말씀을 분별하도록 도우셨습니다. 이것은 엘리의 모든 실패를 정당화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섭리가 인간의 불완전함을 넘어 일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부모와 교사, 목회자의 가르침도 사용하여 다음 세대를 말씀 앞으로 이끄실 수 있습니다.

신앙 공동체의 중요한 사명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자기 목소리나 세상의 목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지도자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엘리는 사무엘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들으라고 가르쳤습니다. 참된 영적 지도자는 사람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묶어 두지 않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으로 인도합니다.

사무엘이 다시 누웠을 때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름을 두 번 반복하여 부르는 것은 친밀함과 중요성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무명의 도구처럼 다루지 않으시고 그의 이름을 아시며 인격적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사무엘의 능력이나 가문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이 먼저 선지자가 되겠다고 지원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찾아오시고 부르셨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일꾼을 세우는 출발점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과 은혜입니다.

이 장면을 모든 성도의 회심이나 직업 선택과 똑같은 방식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사무엘은 구속사의 특별한 시점에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모든 신자가 사무엘처럼 직접 음성을 듣고 선지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먼저 은혜로 부르시고, 부름받은 종은 말씀 앞에서 듣고 순종해야 한다는 원리는 모든 성도에게 중요합니다.

사무엘은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응답합니다. 히브리어에서 ‘듣다’에 해당하는 샤마(שָׁמַע)는 단순히 소리를 귀로 받아들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의 깊게 듣고 받아들여 순종하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성경적인 들음은 정보의 수집이 아니라 삶의 복종으로 이어지는 들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말씀하옵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사실은 듣고 싶은 말씀만 기다릴 때가 있습니다. 위로와 축복의 말씀은 원하지만 죄를 드러내고 회개를 요구하는 말씀은 피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는 고백에는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주시든 종으로서 받아들이겠다는 태도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말씀을 선택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에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자신의 생각에 하나님의 권위를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생각과 욕망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듣기 좋은 말씀만 취하고 불편한 말씀을 버린다면 실제로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종은 어려운 말씀도 숨기지 않아야 합니다(삼상 3:11-18)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처음으로 맡기신 말씀은 따뜻한 위로나 개인적인 성공의 약속이 아니었습니다. 엘리 가문에 임할 심판의 말씀이었습니다. 사무엘의 첫 번째 예언자적 사명은 자신을 돌보아 준 엘리에게 가장 무거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보라 내가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두 귀가 울린다”는 표현은 듣는 사람이 충격과 두려움에 사로잡힐 정도로 엄중한 사건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이후 열왕기와 예레미야서에서도 예루살렘에 임할 심판의 충격을 묘사할 때 비슷한 표현이 사용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의 집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루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사무엘상 2장에서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하나님의 사람이 이미 엘리 가문에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사무엘에게 주어진 말씀은 새로운 심판을 갑자기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앞서 주어진 하나님의 판결을 확인하고 확정하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빈말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말씀하신 바를 역사 속에서 이루십니다. 인간의 말은 상황에 따라 바뀌고 약속은 능력의 부족으로 실패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의 전능과 신실하심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위로가 될 때 확실한 소망이 되고 심판을 선언할 때 두려운 경고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 집을 심판하시는 이유를 다시 밝히십니다. 엘리는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는 범죄를 저지르는 줄 알면서도 그들을 금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의 죄는 아들들의 모든 범죄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이자 대제사장으로서 그들을 제지할 책임이 있었고, 그 책임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엘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는 앞장에서 아들들에게 그들의 행실이 좋지 않다고 책망했습니다. 하지만 말로 지적하는 데서 그쳤고 그들을 직무에서 물러나게 하거나 범죄를 막는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에서 ‘금하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카하(כָּהָה)는 약하게 만들다, 억제하다, 제지하다는 뜻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엘리는 죄를 알았지만 그것을 제어하지 못했습니다.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는 말 이상의 순종이 요구될 때가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의 잘못을 알고도 관계가 불편해질까 두려워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공동체의 명예를 지킨다는 이유로 범죄를 덮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은 악을 모른 척하는 감정이 아니라 죄가 사람과 공동체를 파괴하지 못하도록 진리 안에서 행동하는 책임입니다.

엘리가 아들들을 제지하지 못한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보다 아들들을 더 중히 여긴 데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백성의 보호보다 가족의 관계와 지위를 더 무겁게 여겼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의 뜻을 인정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보다 사람을 택했습니다.

우리도 말로는 하나님을 가장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실제 선택에서는 사람의 평가와 가족의 욕망, 돈과 체면을 더 중요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무엇을 잃을 때 가장 두려운지, 누구의 뜻을 거스르는 일을 가장 힘들어하는지를 살펴보면 마음에서 무엇을 가장 중히 여기는지가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 집의 죄악이 제물이나 예물로 영원히 속죄받지 못할 것이라고 맹세하십니다. 이 말씀을 어떤 죄인도 회개하거나 용서받을 수 없다는 보편적인 선언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엘리 가문에 내려진 역사적이고 언약적인 심판의 판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가문의 제사장적 특권과 지위가 희생 제물을 드리는 행위로 보존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바로 그 제사를 이용하여 범죄했습니다. 그들은 제물을 강제로 빼앗고 하나님의 몫보다 자신의 욕망을 앞세웠습니다. 그런 자들이 제물을 드린다는 종교적 행위로 심판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회개 없는 제사는 죄를 덮는 마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의 외형보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과 말씀에 대한 순종을 원하십니다.

종교적인 행위를 죄를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예배에 참석하고 헌금하며 봉사한다고 해서 완고하게 붙들고 있는 죄가 자동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종교적 활동으로 매수되는 분이 아닙니다. 참된 예배는 죄를 숨기는 가면이 아니라 말씀 앞에서 죄를 인정하고 은혜를 구하는 자리입니다.

이 말씀은 구약의 희생 제사가 인간의 완고한 죄를 기계적으로 제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짐승의 피 자체에는 죄를 제거하는 독립적인 능력이 없었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은혜의 방편이었으며 장차 오실 완전한 속죄를 바라보게 했습니다.

궁극적인 속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흠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단번에 드리심으로 자기 백성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은혜도 회개 없이 죄를 계속 지어도 된다는 면허가 아닙니다. 참으로 그리스도께 연합한 사람은 성령의 역사로 죄를 미워하고 돌이키며 거룩함을 추구합니다.

사무엘은 아침까지 누워 있다가 여호와의 집 문을 열었습니다. 밤에 하나님의 무거운 말씀을 들었지만 아침이 되자 평소에 맡았던 일을 수행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고 해서 일상의 책임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사람을 일상에서 벗어나게 하는 허영이 아니라 맡겨진 일을 더욱 충실하게 감당하도록 이끕니다.

사무엘이 성소의 문을 여는 장면도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밤의 어둠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무엘이 아침에 여호와의 집 문을 엽니다. 이는 먼저 그가 수행하던 실제적인 봉사입니다. 동시에 말씀의 새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보여 주는 문학적인 장면처럼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했던 밤이 지나고, 사무엘을 통하여 말씀이 다시 이스라엘 가운데 선포될 아침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그 이상을 엘리에게 알게 하기를 두려워했습니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엘리는 사무엘을 어린 시절부터 돌본 사람이었고 제사장으로서 권위를 가진 어른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그의 가문이 심판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사무엘이 두려움을 느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종이라고 해서 어려운 사명을 앞두고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용기는 두려움이 전혀 없는 상태가 아니라 두려움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무겁게 여기는 것입니다.

엘리는 사무엘을 불러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묻습니다. 그는 한마디라도 숨기면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기를 원한다는 엄중한 말로 모든 내용을 전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러자 사무엘은 하나도 숨기지 않고 모든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중요한 사명입니다. 선지자는 자신이 만들어 낸 생각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더하거나 빼지 않고 전하는 사람입니다. 위로해야 할 때 위로하고, 책망해야 할 때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책망해야 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게 가장 큰 유혹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것만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반응과 자신의 인기, 관계의 평안을 생각하여 불편한 진리를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은 말씀의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이 맡긴 것을 충실하게 전달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진리를 전한다는 명분으로 거칠고 무례하게 말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무엘은 엘리를 미워하거나 공격하기 위해 심판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진실한 설교에는 말씀에 대한 충성과 영혼을 향한 애통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엘리는 사무엘의 말을 들은 후 “이는 여호와이시니 선하신 대로 하실 것이니라”고 대답합니다. 이 말에는 하나님이 주권자이시며 그분의 판단이 옳다는 인정이 담겨 있습니다. 엘리는 사무엘을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하거나 심판의 말씀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고백을 완전한 회개의 증거로 이상화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본문에는 엘리가 아들들을 직무에서 제거하거나 가문 전체가 회개하도록 이끌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의 말에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신앙이 담겨 있을 수 있지만, 동시에 이미 내려진 운명을 체념하듯 받아들이는 모습도 있을 수 있습니다. 정확한 내면은 단정할 수 없으나, 적어도 본문은 그의 고백 이후에 일어난 적극적인 개혁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말이 순종을 대신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되겠지요”라는 말이 회피와 체념의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사람은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면서도 회개하고 돌이키며 지금 해야 할 순종을 감당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이루시며 자신의 선지자를 세우십니다(삼상 3:19-21)

사무엘상 3장의 마지막 부분은 짧지만 사무엘의 선지자적 지위가 어떻게 확립되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라고 기록합니다.

사무엘은 한 번의 신비한 체험만으로 완성된 사람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계속 자랐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도 시간 속에서 훈련받고 성숙해야 합니다. 부르심은 성숙의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받았다는 사실이 배움과 훈련, 인내와 순종의 과정을 불필요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사무엘의 진정한 능력은 그의 말솜씨나 인격적인 매력에 있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셨다”는 사실이 그의 사역을 결정했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와 다윗의 사역도 하나님의 임재로 가능했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자신의 재능만으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말씀에 권위를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는 것은 사무엘이 일상에서 말한 모든 문장이 오류가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로서 그에게 맡기신 말씀이 헛되이 끝나지 않고 성취되었다는 뜻입니다. ‘떨어지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팔(נָפַל)은 말씀이 효력을 잃고 무산되는 모습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이 전한 말씀을 역사 속에서 이루심으로 그가 참된 선지자임을 증명하셨습니다. 선지자의 권위는 자기 확신이나 강한 말투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그의 입에 말씀을 주시며 그 말씀을 성취하시는 데서 나옵니다.

오늘날 설교자에게도 권위가 있다면 그것은 직함이나 인격적인 영향력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고 충실하게 선포할 때 말씀 자체가 가진 하나님의 권위로 섬기게 됩니다. 설교자가 성경 위에 서는 것이 아니라 성경 아래에 서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처럼 포장하지 말고 본문이 말하는 것을 전해야 합니다.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온 이스라엘은 사무엘이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움을 입은 줄 알았습니다. 단은 이스라엘 북쪽을, 브엘세바는 남쪽을 대표합니다. 따라서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라는 표현은 온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실로의 성소에서 조용히 부름받은 한 소년이 이제 온 민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세움을 입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에만(נֶאֱמָן)은 확립되다, 신실한 것으로 확인되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사무엘은 스스로 선지자라고 선언하여 지위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성취하시고 온 이스라엘 앞에서 그를 선지자로 확증하셨습니다.

참된 영적 권위는 자신을 높이는 데서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리에서 오랫동안 충실하게 말씀을 따를 때 공동체 안에서 확인됩니다. 사람을 억압하여 얻은 권위는 오래가지 못하지만 말씀과 삶의 일치를 통하여 세워진 신뢰는 공동체를 살립니다.

여호와께서는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1절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고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다고 했지만, 마지막에서는 하나님께서 실로에서 계속 나타나십니다. 장의 시작과 끝이 놀라운 대조를 이룹니다. 말씀이 희귀했던 시대가 말씀의 시대를 향해 열리고 있습니다.

그 변화의 원인은 사무엘의 특별한 재능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셨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탐구하여 그분의 본질과 뜻을 알아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어 말씀해 주셔야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서 시작된다고 고백합니다.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귀한 선물이지만 죄로 어두워졌습니다. 우리는 자연과 양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지만,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통해서만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에게 말씀을 주셨고, 그 말씀은 성경의 구속사 속에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시대에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셨지만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자신을 가장 충만하게 나타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달한 선지자 가운데 한 분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분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영원한 말씀입니다.

사무엘은 엘리 가문에 임할 심판을 전했지만 그 심판을 대신 짊어질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셨을 뿐 아니라 자기 백성이 받아야 할 심판을 십자가에서 담당하셨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도 숨기지 않고 전했으며,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 들은 모든 것을 충실하게 알리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에 새로운 선지자 시대를 열었지만 그도 유한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선지자이자 제사장이며 왕으로서 하나님의 구원 계시를 완성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새로운 계시를 찾아 끝없이 방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록된 성경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알고, 성령의 조명을 구하며, 이미 주어진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는 고백은 오늘의 교회에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무엘처럼 새로운 정경적 계시를 받기 위해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이미 주신 말씀을 겸손히 듣고 그 말씀에 복종하기 위해 고백합니다. 성령께서는 성경과 분리된 새로운 진리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의 뜻을 깨닫고 믿고 순종하도록 우리를 조명하십니다.

말씀을 듣는 교회는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됩니다. 교회가 세상의 관심을 얻는 데만 몰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리면 화려한 외형이 있어도 영적으로는 어둡습니다. 반대로 규모가 작고 세상에서 주목받지 못하더라도 말씀을 충실히 듣고 전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공동체를 통하여 자신의 빛을 비추십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무엘상 3장은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고 지도자의 눈이 어두워진 시대에도 하나님의 등불은 꺼지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사무엘을 이름으로 부르시고 말씀을 맡기셨으며, 그 말씀을 이루심으로 그를 온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세우셨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자극이나 신비한 체험보다 말씀 앞에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고백하는 마음입니다. 위로의 말씀뿐 아니라 죄를 드러내고 회개를 요구하는 말씀까지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말에 머물지 말고, 깨달은 말씀을 실제 순종으로 옮겨야 합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은 사람의 반응을 두려워하여 진리를 숨기지 말아야 하며, 동시에 사랑과 겸손으로 전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사람도 자신의 생각에 맞는 부분만 골라 취하지 말고 성경 전체의 가르침 아래 자신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인간 지도자의 완전함에 있지 않습니다. 영원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성령께서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교회를 지키십니다. 시대가 어두워 보여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습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서서 듣고, 들은 말씀을 숨김없이 전하며, 삶으로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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