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3장 주해와 강해

 

말씀의 등불이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사무엘상 3장은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해진 시대에 한 소년을 부르시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엘리의 눈은 어두워지고 그의 집은 심판을 향해 가지만,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사무엘을 주권적으로 부르시고 가장 전하기 어려운 말씀을 맡기시며 온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세우십니다. 이 본문을 통하여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어두운 시대에도 어떻게 자신의 말씀과 교회를 보존하시는지를 깨닫기 원합니다.

말씀이 희귀한 시대에도 하나님의 등불은 꺼지지 않습니다(삼상 3:1-10)

사무엘상 3장은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사무엘은 아직 어린아이였지만 실로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는 엘리의 감독과 가르침 아래 있었으나 그의 섬김이 궁극적으로 향한 대상은 엘리가 아니라 여호와였습니다.

이 장면은 앞장의 상황과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이면서도 여호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빼앗고 성소를 욕망의 도구로 만들었습니다. 엘리는 아들들의 죄를 알고 책망했지만 그들을 실질적으로 제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 엘리 가문에 심판을 선고하셨습니다.

그런 어두운 현실 한가운데서 사무엘은 하나님 앞에서 자라고 있었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의 죄는 점점 심각해졌고 사무엘은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한쪽에서는 오래된 제사장 가문이 무너지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말씀의 종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인간의 타락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중단시키지 못합니다.

당시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했습니다. ‘희귀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카르(יָקָר)는 귀중하다, 값비싸다, 드물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치가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계시의 말씀이 자주 임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에 그 말씀은 더욱 귀한 것이 되었습니다.

본문은 또한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상’에 해당하는 하존(חָזוֹן)은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보여 주시는 환상이나 계시를 가리킵니다. “흔히 보이지 않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계시가 널리 나타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히 침묵하신 것은 아닙니다. 앞장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말씀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전체에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할 선지자적 사역은 거의 사라져 있었습니다.

말씀이 희귀해진 상황은 단순히 선지자의 숫자가 부족했다는 의미를 넘어섭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예배를 멸시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은 당연한 권리가 아니라 은혜입니다. 말씀을 반복하여 거절하고 가볍게 여기면서도 하나님께서 계속 말씀해 주셔야 한다고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양식이 없어 주리는 기근보다 더 두려운 기근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물과 양식이 없으면 육체가 쇠약해지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영혼과 공동체가 방향을 잃습니다. 종교적 의식은 계속될 수 있고 제사장의 직분도 남아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으면 예배는 껍데기만 남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성경과 설교를 접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성경책이 많고 인터넷을 통해 수많은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풍부하게 유통된다고 해서 반드시 말씀이 풍성하게 들리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자신의 생각을 확인하는 도구로만 사용하고, 듣기 좋은 부분만 골라 받아들이며, 불편한 진리는 외면한다면 실질적으로는 말씀의 기근 속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본문은 영적 어둠을 엘리의 육체적 상태와 함께 묘사합니다.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라는 표현은 그가 노쇠하여 시력을 잃어 가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먼저 실제적인 육체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문학적으로는 이스라엘 지도자의 영적 분별력이 쇠퇴한 현실과도 어울립니다. 엘리는 한나의 간절한 기도를 술 취한 행동으로 오해했고, 아들들의 죄를 알고도 제대로 제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엘리를 아무런 장점도 없는 악인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한나를 축복했고, 사무엘을 돌보았으며, 뒤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고 계신다는 사실을 분별하여 응답하는 법을 알려 줍니다. 문제는 그가 하나님의 뜻을 어느 정도 알고도 자신의 가정과 직분 안에서 끝까지 순종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부분적인 지식과 일시적인 분별이 삶 전체의 순종을 대신하지 못합니다.

엘리가 자기 처소에 누워 있을 때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가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워 있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전’은 후대에 솔로몬이 지은 성전을 뜻하지 않습니다. 당시 실로에 있던 성막과 그 주변의 성소 시설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사무엘이 언약궤가 놓인 지성소 안에서 잠을 잤다고 이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는 언약궤가 있는 성소 가까이에서 맡은 일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등불이 아직 꺼지지 않았다”는 말은 우선 시간적 배경을 알려 줍니다. 성소의 등불은 저녁부터 아침까지 밝혀 두었으므로 아직 새벽이 완전히 밝기 전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본문의 전체 분위기 속에서 더 깊은 울림을 줍니다. 엘리의 눈은 어두워지고 하나님의 말씀은 희귀했지만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형편이 어두워도 하나님의 언약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타락한 제사장들이 성소를 더럽혔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등불을 꺼뜨리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빛을 보존하십니다. 그 등불 곁에 어린 사무엘이 누워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낡은 시대가 저물어 가는 동안 새로운 말씀의 종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교회가 어두운 모습을 보일 때 우리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지도자의 실패와 공동체의 타락을 보며 하나님의 교회에 소망이 없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생명은 인간 지도자의 완전함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자기 교회를 보존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도 말씀을 들을 사람을 준비하십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하고 엘리에게 달려갔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힌네니(הִנְנִי)는 단순히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말이 아니라 부름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표현입니다. 아브라함과 야곱과 모세도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이 말로 응답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자신을 부른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아직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엘리가 불렀다고 생각하여 곧바로 달려갔습니다. 엘리는 자신이 부르지 않았다며 다시 누우라고 말합니다. 같은 일이 두 번째로 반복됩니다. 사무엘은 다시 일어나 엘리에게 가지만 엘리는 그를 부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즉시 알아듣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의 불신앙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사무엘에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나 경건이 전혀 없었다는 뜻이라기보다,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말씀하시는 특별한 계시를 아직 경험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사무엘상 2장은 이미 사무엘이 여호와 앞에서 섬기며 은총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3장의 표현은 그가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그는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겼지만 하나님의 직접적인 부르심을 분별하는 일은 처음이었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인격적으로 서는 것은 구별될 수 있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알아듣지 못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부르셨습니다. 첫 번째에 알아듣지 못하자 두 번째 부르시고, 두 번째에도 알아듣지 못하자 세 번째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주권뿐 아니라 인내가 나타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한 번에 분명히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도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잘못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종을 성급하게 버리지 않으십니다. 말씀을 반복하여 들려주시고, 교회의 가르침과 성도의 도움을 통하여 우리를 깨우치십니다.

사무엘이 세 번째로 엘리에게 갔을 때 엘리는 비로소 여호와께서 아이를 부르신 줄 깨달았습니다. 엘리는 영적으로 많은 실패를 경험한 사람이었지만 이 순간에는 사무엘에게 필요한 도움을 줍니다. 그는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하지 않은 엘리를 사용하여 사무엘이 말씀을 분별하도록 도우셨습니다. 이것은 엘리의 모든 실패를 정당화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섭리가 인간의 불완전함을 넘어 일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부모와 교사, 목회자의 가르침도 사용하여 다음 세대를 말씀 앞으로 이끄실 수 있습니다.

신앙 공동체의 중요한 사명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자기 목소리나 세상의 목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지도자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엘리는 사무엘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들으라고 가르쳤습니다. 참된 영적 지도자는 사람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묶어 두지 않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으로 인도합니다.

사무엘이 다시 누웠을 때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름을 두 번 반복하여 부르는 것은 친밀함과 중요성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무명의 도구처럼 다루지 않으시고 그의 이름을 아시며 인격적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사무엘의 능력이나 가문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이 먼저 선지자가 되겠다고 지원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찾아오시고 부르셨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일꾼을 세우는 출발점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과 은혜입니다.

이 장면을 모든 성도의 회심이나 직업 선택과 똑같은 방식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사무엘은 구속사의 특별한 시점에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모든 신자가 사무엘처럼 직접 음성을 듣고 선지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먼저 은혜로 부르시고, 부름받은 종은 말씀 앞에서 듣고 순종해야 한다는 원리는 모든 성도에게 중요합니다.

사무엘은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응답합니다. 히브리어에서 ‘듣다’에 해당하는 샤마(שָׁמַע)는 단순히 소리를 귀로 받아들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의 깊게 듣고 받아들여 순종하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성경적인 들음은 정보의 수집이 아니라 삶의 복종으로 이어지는 들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말씀하옵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사실은 듣고 싶은 말씀만 기다릴 때가 있습니다. 위로와 축복의 말씀은 원하지만 죄를 드러내고 회개를 요구하는 말씀은 피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는 고백에는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주시든 종으로서 받아들이겠다는 태도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말씀을 선택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에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자신의 생각에 하나님의 권위를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생각과 욕망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듣기 좋은 말씀만 취하고 불편한 말씀을 버린다면 실제로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종은 어려운 말씀도 숨기지 않아야 합니다(삼상 3:11-18)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처음으로 맡기신 말씀은 따뜻한 위로나 개인적인 성공의 약속이 아니었습니다. 엘리 가문에 임할 심판의 말씀이었습니다. 사무엘의 첫 번째 예언자적 사명은 자신을 돌보아 준 엘리에게 가장 무거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보라 내가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두 귀가 울린다”는 표현은 듣는 사람이 충격과 두려움에 사로잡힐 정도로 엄중한 사건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이후 열왕기와 예레미야서에서도 예루살렘에 임할 심판의 충격을 묘사할 때 비슷한 표현이 사용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의 집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루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사무엘상 2장에서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하나님의 사람이 이미 엘리 가문에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사무엘에게 주어진 말씀은 새로운 심판을 갑자기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앞서 주어진 하나님의 판결을 확인하고 확정하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빈말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말씀하신 바를 역사 속에서 이루십니다. 인간의 말은 상황에 따라 바뀌고 약속은 능력의 부족으로 실패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의 전능과 신실하심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위로가 될 때 확실한 소망이 되고 심판을 선언할 때 두려운 경고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 집을 심판하시는 이유를 다시 밝히십니다. 엘리는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는 범죄를 저지르는 줄 알면서도 그들을 금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의 죄는 아들들의 모든 범죄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이자 대제사장으로서 그들을 제지할 책임이 있었고, 그 책임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엘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는 앞장에서 아들들에게 그들의 행실이 좋지 않다고 책망했습니다. 하지만 말로 지적하는 데서 그쳤고 그들을 직무에서 물러나게 하거나 범죄를 막는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에서 ‘금하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카하(כָּהָה)는 약하게 만들다, 억제하다, 제지하다는 뜻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엘리는 죄를 알았지만 그것을 제어하지 못했습니다.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는 말 이상의 순종이 요구될 때가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의 잘못을 알고도 관계가 불편해질까 두려워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공동체의 명예를 지킨다는 이유로 범죄를 덮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은 악을 모른 척하는 감정이 아니라 죄가 사람과 공동체를 파괴하지 못하도록 진리 안에서 행동하는 책임입니다.

엘리가 아들들을 제지하지 못한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보다 아들들을 더 중히 여긴 데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백성의 보호보다 가족의 관계와 지위를 더 무겁게 여겼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의 뜻을 인정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보다 사람을 택했습니다.

우리도 말로는 하나님을 가장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실제 선택에서는 사람의 평가와 가족의 욕망, 돈과 체면을 더 중요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무엇을 잃을 때 가장 두려운지, 누구의 뜻을 거스르는 일을 가장 힘들어하는지를 살펴보면 마음에서 무엇을 가장 중히 여기는지가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 집의 죄악이 제물이나 예물로 영원히 속죄받지 못할 것이라고 맹세하십니다. 이 말씀을 어떤 죄인도 회개하거나 용서받을 수 없다는 보편적인 선언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엘리 가문에 내려진 역사적이고 언약적인 심판의 판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가문의 제사장적 특권과 지위가 희생 제물을 드리는 행위로 보존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바로 그 제사를 이용하여 범죄했습니다. 그들은 제물을 강제로 빼앗고 하나님의 몫보다 자신의 욕망을 앞세웠습니다. 그런 자들이 제물을 드린다는 종교적 행위로 심판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회개 없는 제사는 죄를 덮는 마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의 외형보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과 말씀에 대한 순종을 원하십니다.

종교적인 행위를 죄를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예배에 참석하고 헌금하며 봉사한다고 해서 완고하게 붙들고 있는 죄가 자동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종교적 활동으로 매수되는 분이 아닙니다. 참된 예배는 죄를 숨기는 가면이 아니라 말씀 앞에서 죄를 인정하고 은혜를 구하는 자리입니다.

이 말씀은 구약의 희생 제사가 인간의 완고한 죄를 기계적으로 제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짐승의 피 자체에는 죄를 제거하는 독립적인 능력이 없었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은혜의 방편이었으며 장차 오실 완전한 속죄를 바라보게 했습니다.

궁극적인 속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흠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단번에 드리심으로 자기 백성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은혜도 회개 없이 죄를 계속 지어도 된다는 면허가 아닙니다. 참으로 그리스도께 연합한 사람은 성령의 역사로 죄를 미워하고 돌이키며 거룩함을 추구합니다.

사무엘은 아침까지 누워 있다가 여호와의 집 문을 열었습니다. 밤에 하나님의 무거운 말씀을 들었지만 아침이 되자 평소에 맡았던 일을 수행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고 해서 일상의 책임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사람을 일상에서 벗어나게 하는 허영이 아니라 맡겨진 일을 더욱 충실하게 감당하도록 이끕니다.

사무엘이 성소의 문을 여는 장면도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밤의 어둠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무엘이 아침에 여호와의 집 문을 엽니다. 이는 먼저 그가 수행하던 실제적인 봉사입니다. 동시에 말씀의 새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보여 주는 문학적인 장면처럼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했던 밤이 지나고, 사무엘을 통하여 말씀이 다시 이스라엘 가운데 선포될 아침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그 이상을 엘리에게 알게 하기를 두려워했습니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엘리는 사무엘을 어린 시절부터 돌본 사람이었고 제사장으로서 권위를 가진 어른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그의 가문이 심판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사무엘이 두려움을 느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종이라고 해서 어려운 사명을 앞두고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용기는 두려움이 전혀 없는 상태가 아니라 두려움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무겁게 여기는 것입니다.

엘리는 사무엘을 불러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묻습니다. 그는 한마디라도 숨기면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기를 원한다는 엄중한 말로 모든 내용을 전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러자 사무엘은 하나도 숨기지 않고 모든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중요한 사명입니다. 선지자는 자신이 만들어 낸 생각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더하거나 빼지 않고 전하는 사람입니다. 위로해야 할 때 위로하고, 책망해야 할 때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책망해야 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게 가장 큰 유혹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것만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반응과 자신의 인기, 관계의 평안을 생각하여 불편한 진리를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은 말씀의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이 맡긴 것을 충실하게 전달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진리를 전한다는 명분으로 거칠고 무례하게 말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무엘은 엘리를 미워하거나 공격하기 위해 심판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진실한 설교에는 말씀에 대한 충성과 영혼을 향한 애통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엘리는 사무엘의 말을 들은 후 “이는 여호와이시니 선하신 대로 하실 것이니라”고 대답합니다. 이 말에는 하나님이 주권자이시며 그분의 판단이 옳다는 인정이 담겨 있습니다. 엘리는 사무엘을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하거나 심판의 말씀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고백을 완전한 회개의 증거로 이상화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본문에는 엘리가 아들들을 직무에서 제거하거나 가문 전체가 회개하도록 이끌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의 말에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신앙이 담겨 있을 수 있지만, 동시에 이미 내려진 운명을 체념하듯 받아들이는 모습도 있을 수 있습니다. 정확한 내면은 단정할 수 없으나, 적어도 본문은 그의 고백 이후에 일어난 적극적인 개혁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말이 순종을 대신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되겠지요”라는 말이 회피와 체념의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사람은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면서도 회개하고 돌이키며 지금 해야 할 순종을 감당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이루시며 자신의 선지자를 세우십니다(삼상 3:19-21)

사무엘상 3장의 마지막 부분은 짧지만 사무엘의 선지자적 지위가 어떻게 확립되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라고 기록합니다.

사무엘은 한 번의 신비한 체험만으로 완성된 사람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계속 자랐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도 시간 속에서 훈련받고 성숙해야 합니다. 부르심은 성숙의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받았다는 사실이 배움과 훈련, 인내와 순종의 과정을 불필요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사무엘의 진정한 능력은 그의 말솜씨나 인격적인 매력에 있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셨다”는 사실이 그의 사역을 결정했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와 다윗의 사역도 하나님의 임재로 가능했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자신의 재능만으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말씀에 권위를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는 것은 사무엘이 일상에서 말한 모든 문장이 오류가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로서 그에게 맡기신 말씀이 헛되이 끝나지 않고 성취되었다는 뜻입니다. ‘떨어지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팔(נָפַל)은 말씀이 효력을 잃고 무산되는 모습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이 전한 말씀을 역사 속에서 이루심으로 그가 참된 선지자임을 증명하셨습니다. 선지자의 권위는 자기 확신이나 강한 말투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그의 입에 말씀을 주시며 그 말씀을 성취하시는 데서 나옵니다.

오늘날 설교자에게도 권위가 있다면 그것은 직함이나 인격적인 영향력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고 충실하게 선포할 때 말씀 자체가 가진 하나님의 권위로 섬기게 됩니다. 설교자가 성경 위에 서는 것이 아니라 성경 아래에 서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처럼 포장하지 말고 본문이 말하는 것을 전해야 합니다.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온 이스라엘은 사무엘이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움을 입은 줄 알았습니다. 단은 이스라엘 북쪽을, 브엘세바는 남쪽을 대표합니다. 따라서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라는 표현은 온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실로의 성소에서 조용히 부름받은 한 소년이 이제 온 민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세움을 입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에만(נֶאֱמָן)은 확립되다, 신실한 것으로 확인되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사무엘은 스스로 선지자라고 선언하여 지위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성취하시고 온 이스라엘 앞에서 그를 선지자로 확증하셨습니다.

참된 영적 권위는 자신을 높이는 데서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리에서 오랫동안 충실하게 말씀을 따를 때 공동체 안에서 확인됩니다. 사람을 억압하여 얻은 권위는 오래가지 못하지만 말씀과 삶의 일치를 통하여 세워진 신뢰는 공동체를 살립니다.

여호와께서는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1절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고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다고 했지만, 마지막에서는 하나님께서 실로에서 계속 나타나십니다. 장의 시작과 끝이 놀라운 대조를 이룹니다. 말씀이 희귀했던 시대가 말씀의 시대를 향해 열리고 있습니다.

그 변화의 원인은 사무엘의 특별한 재능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셨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탐구하여 그분의 본질과 뜻을 알아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어 말씀해 주셔야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서 시작된다고 고백합니다.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귀한 선물이지만 죄로 어두워졌습니다. 우리는 자연과 양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지만,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통해서만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에게 말씀을 주셨고, 그 말씀은 성경의 구속사 속에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시대에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셨지만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자신을 가장 충만하게 나타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달한 선지자 가운데 한 분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분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영원한 말씀입니다.

사무엘은 엘리 가문에 임할 심판을 전했지만 그 심판을 대신 짊어질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셨을 뿐 아니라 자기 백성이 받아야 할 심판을 십자가에서 담당하셨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도 숨기지 않고 전했으며,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 들은 모든 것을 충실하게 알리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에 새로운 선지자 시대를 열었지만 그도 유한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선지자이자 제사장이며 왕으로서 하나님의 구원 계시를 완성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새로운 계시를 찾아 끝없이 방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록된 성경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알고, 성령의 조명을 구하며, 이미 주어진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는 고백은 오늘의 교회에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무엘처럼 새로운 정경적 계시를 받기 위해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이미 주신 말씀을 겸손히 듣고 그 말씀에 복종하기 위해 고백합니다. 성령께서는 성경과 분리된 새로운 진리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의 뜻을 깨닫고 믿고 순종하도록 우리를 조명하십니다.

말씀을 듣는 교회는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됩니다. 교회가 세상의 관심을 얻는 데만 몰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리면 화려한 외형이 있어도 영적으로는 어둡습니다. 반대로 규모가 작고 세상에서 주목받지 못하더라도 말씀을 충실히 듣고 전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공동체를 통하여 자신의 빛을 비추십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무엘상 3장은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고 지도자의 눈이 어두워진 시대에도 하나님의 등불은 꺼지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사무엘을 이름으로 부르시고 말씀을 맡기셨으며, 그 말씀을 이루심으로 그를 온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세우셨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자극이나 신비한 체험보다 말씀 앞에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고백하는 마음입니다. 위로의 말씀뿐 아니라 죄를 드러내고 회개를 요구하는 말씀까지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말에 머물지 말고, 깨달은 말씀을 실제 순종으로 옮겨야 합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은 사람의 반응을 두려워하여 진리를 숨기지 말아야 하며, 동시에 사랑과 겸손으로 전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사람도 자신의 생각에 맞는 부분만 골라 취하지 말고 성경 전체의 가르침 아래 자신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인간 지도자의 완전함에 있지 않습니다. 영원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성령께서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교회를 지키십니다. 시대가 어두워 보여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습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서서 듣고, 들은 말씀을 숨김없이 전하며, 삶으로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 블로그 목록

추천 게시물

사무엘상 3장 주해와 강해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사무엘상 3장은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해진 어두운 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엘리의 눈은 점점 어두워지고 그의 가문은 심판을 향하지만,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소에 누워 있던 어린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