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5장 주해와 강해

 

언약궤는 사로잡혔지만 하나님은 사로잡히지 않으셨습니다

사무엘상 5장은 언약궤가 블레셋에게 빼앗긴 뒤 일어난 일을 기록합니다. 이스라엘의 군대도 제사장도 등장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홀로 다곤을 무너뜨리고 블레셋의 성읍들을 심판하십니다. 언약궤가 포로가 된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로 포로가 된 것은 블레셋과 그들의 우상이었습니다. 이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조종되거나 우상 곁에 놓일 수 있는 분이 아니며, 자신의 거룩함과 영광을 스스로 지키시는 유일한 주권자이심을 깨닫기 원합니다.

여호와 앞에 엎드러진 다곤은 다시 일어설 수 없었습니다(삼상 5:1-5)

사무엘상 4장에서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크게 패했습니다. 보병 삼만 명이 죽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전사했으며, 하나님의 언약궤마저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겼습니다. 전쟁의 소식을 들은 엘리는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죽었고, 비느하스의 아내는 아들을 낳으며 그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는 언약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고 탄식했습니다.

사무엘상 5장은 이가봇의 탄식 이후 언약궤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궤를 에벤에셀에서 아스돗으로 가져갔습니다. 에벤에셀은 이스라엘이 진을 쳤던 곳이고 아스돗은 블레셋의 대표적인 다섯 성읍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블레셋은 아스돗을 비롯하여 가사와 아스글론, 가드와 에그론을 중심으로 연합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고대 근동의 전쟁에서 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신상이나 종교적 상징물을 빼앗는 것은 단순한 전리품 획득 이상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승리한 나라의 신이 패배한 나라의 신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과시하는 행동으로 여겨졌습니다. 블레셋 사람들도 이스라엘의 언약궤를 빼앗은 일을 자신들의 신 다곤이 여호와를 이긴 증거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다곤의 신전으로 가져가 다곤 곁에 두었습니다. 언약궤를 다곤 신상 옆에 둔 것은 여호와를 다곤의 지배 아래 들어온 포로 신처럼 취급한 행동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도 이제 블레셋의 신전에 종속되었다는 승리의 표시로 삼으려 했던 것입니다.

다곤은 블레셋 사람들이 섬긴 주요 신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다곤이라는 이름의 어원을 곡식과 관련하여 이해하는 견해가 있으며, 물고기와 연결하는 대중적인 해석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의 정확한 어원과 신의 성격에 대해서는 논의가 있으므로 어느 하나를 확정하여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다곤의 외형이나 기원이 아니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다곤의 신전 안에 언약궤를 가져다 놓았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실제로 붙잡아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거룩한 표징이었지만 하나님 자신과 동일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작은 상자 안에 갇혀 이동하시는 분도 아니었습니다.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하나님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져오면 하나님을 자신들의 계획에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블레셋은 언약궤를 빼앗으면 이스라엘의 하나님까지 소유하고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민족은 서로 적대했지만 하나님을 자신들의 욕망에 따라 다루려 했다는 점에서는 닮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궤를 승리의 부적처럼 사용했고, 블레셋은 정복한 신의 전리품처럼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종교적 욕망에도, 블레셋의 승리 선언에도 붙들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어느 민족의 소유물이 아니며 인간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아스돗 사람들이 이튿날 일찍 일어나 다곤의 신전으로 들어갔을 때 예상하지 못한 장면을 보았습니다.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아 있었습니다. 다곤이 우연히 기울어진 정도가 아니라 경배하는 사람처럼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러져 있었습니다.

‘엎드러지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팔(נָפַל)은 넘어지다, 쓰러지다라는 뜻입니다. 사무엘상 3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떨어지지 않았지만 다곤은 하나님의 궤 앞에서 땅에 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굳게 서고 우상은 쓰러집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다곤 앞에 두었다고 생각했지만, 아침이 되자 다곤이 언약궤 앞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지가 뒤집혔습니다. 포로가 된 것처럼 보였던 여호와의 궤 앞에 승리자라고 여긴 다곤이 굴복했습니다.

다곤이 엎드러진 것은 생명이 없는 우상이 스스로 움직였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권적인 능력으로 다곤 신상을 쓰러뜨리셨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모두 잠든 밤, 이스라엘 군대의 도움 없이 하나님께서 홀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패했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패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심판하기 위해 언약궤가 빼앗기도록 허락하셨을 뿐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이 여호와를 다곤의 신전에 가두었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신전을 자신의 주권을 드러내는 심판의 장소로 바꾸셨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쓰러진 다곤을 다시 일으켜 본래 자리에 놓았습니다. 이 장면에는 우상의 무력함이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다곤은 자신을 믿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기는커녕 자신이 넘어졌을 때 인간의 손에 의해 일으킴을 받아야 했습니다.

참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일으키시지만 거짓 신은 숭배자가 일으켜 주어야 합니다. 참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고 붙드시지만 우상은 인간이 만들고 관리해야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신을 만들고, 넘어지면 일으키며, 깨지면 고쳐야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을 형상화한 물건에 불과합니다.

우상의 본질은 반드시 나무나 돌로 만든 형상에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고, 더 사랑하며, 내 삶의 안전과 가치를 보장해 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돈과 성공, 권력과 명예, 가족과 건강도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면 우상이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이 자신을 지켜 줄 것이라고 믿지만 실제로는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바칩니다. 재산이 나를 지켜 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재산을 잃지 않으려고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명예가 나를 높일 것이라고 믿으면서 명예가 떨어질까 두려워 진실을 숨깁니다. 우상은 약속한 자유를 주지 않고 그것을 섬기는 사람을 종으로 만듭니다.

이튿날 아침 블레셋 사람들이 다시 일찍 일어나 신전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번에도 다곤은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있었습니다. 첫날의 일을 우연한 사고라고 생각했을 수 있지만 똑같은 일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더구나 두 번째에는 다곤의 머리와 두 손목이 끊어져 문지방에 놓여 있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머리는 권위와 지배력을, 손은 능력과 행동을 상징합니다. 다곤의 머리와 손이 잘렸다는 것은 그의 통치와 능력이 완전히 무너졌음을 보여 줍니다. 다곤은 생각하고 명령할 권세도, 행동하고 구원할 능력도 없는 우상임이 드러났습니다.

전쟁에서 패한 적장의 머리와 손을 베는 행위는 승리와 완전한 정복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다곤의 머리와 손이 잘려 문지방에 놓인 장면은 다곤이 여호와 앞에서 패배한 적처럼 묘사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전리품으로 가져왔지만 실제로 전리품처럼 쓰러진 것은 다곤이었습니다.

본문은 다곤의 몸뚱이만 남았다고 기록합니다. 이 표현의 세부적인 의미와 본문 형태에 관해서는 논의가 있지만, 다곤 신상이 치명적으로 파괴되었다는 핵심은 분명합니다. 첫날에는 다곤을 다시 세울 수 있었지만 두 번째에는 온전한 모습으로 되돌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한 번에 모든 심판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처음에는 다곤을 넘어뜨리셨고, 그들이 다시 세우자 다음에는 머리와 손을 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복적인 표징을 통해 다곤의 무력함을 분명히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은 이 사건을 보고 다곤을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곤의 머리와 손이 놓였던 문지방을 밟지 않는 관습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의 무력함을 보여 주셨지만 그들은 회개하기보다 새로운 종교적 금기를 추가했습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분명한 경고 앞에서도 회개보다 다른 설명을 찾습니다. 우상이 쓰러졌다면 우상을 버려야 하지만 사람들은 우상을 다시 세우고, 우상이 무너진 자리를 또 다른 종교적 전통으로 보호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워지지 않으면 증거를 많이 본다고 저절로 믿음에 이르지 않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의 능력을 부정할 수 없었지만 여호와를 자신들의 하나님으로 섬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은 다릅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에 관한 정보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다곤과 언약궤를 같은 신전에 나란히 둘 수 없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많은 신 가운데 한 분으로 다곤 옆에 자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다른 모든 신은 거짓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과 영광을 나누지 않으십니다.

우리도 하나님과 우상을 마음속에 함께 모시려 할 수 있습니다. 주일에는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평일에는 돈과 성공을 최고의 가치로 섬깁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서도 내 욕망과 충돌하면 욕망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한쪽 구석을 차지하는 여러 대상 가운데 하나가 되기를 거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들어오실 때 다곤은 쓰러져야 합니다. 자아의 왕좌와 탐욕의 제단, 사람의 인정에 대한 집착이 하나님 앞에 엎드러져야 합니다. 쓰러진 다곤을 다시 일으켜 세우면서 하나님도 함께 섬길 수는 없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블레셋의 성읍들을 무겁게 누르셨습니다(삼상 5:6-9)

다곤의 머리와 손이 끊어진 뒤 본문은 여호와의 손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더하사”라고 기록합니다. 다곤의 손은 잘렸지만 여호와의 손은 능력 있게 역사했습니다.

‘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드(יָד)는 행동하는 능력과 권세를 나타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언약궤를 빼앗았고 다곤을 다시 세웠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손과 우상의 손을 넘어서는 여호와의 손이 그들을 심판하기 시작했습니다.

본문은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임했다고 말합니다. ‘엄중하다’ 또는 ‘무겁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베드(כָּבֵד)는 무겁게 누르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영광을 뜻하는 카보드(כָּבוֹד)와 같은 어근에 속합니다.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것처럼 보였지만 블레셋 땅에서는 하나님의 무거운 손이 그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볍게 여겼지만 하나님의 손은 그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웠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은 결국 그분의 심판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스돗과 그 지역을 치시며 독한 종기의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개역개정이 ‘독한 종기’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표현이 정확히 어떤 질병을 가리키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종양이나 부어오르는 질환, 몸의 특정 부위에 생기는 고통스러운 병으로 이해됩니다.

일부 고대 번역과 이어지는 6장의 금쥐 이야기를 근거로 전염병의 구체적인 종류를 추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이 질병의 의학적 명칭을 밝히는 데 목적을 두지 않으므로 지나치게 특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견디기 어려운 재앙을 받았고 그 재앙이 여호와의 손에서 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근거로 오늘날 발생하는 모든 질병과 재난을 특정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형벌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이 어떤 사건을 하나님의 특별한 심판이라고 분명히 해석할 때에는 그렇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계시받지 않은 개별적인 고난의 원인을 임의로 판단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의 상태를 그 사람이나 부모의 특정한 죄와 직접 연결하는 해석을 거부하셨습니다. 고난을 당한 사람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정죄가 아니라 사랑과 돌봄입니다. 우리는 모든 고난이 죄가 들어온 세상과 관련되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특정인의 고난을 함부로 죄의 형벌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사무엘상 5장은 블레셋의 재앙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밝힙니다. 하나님께서는 다곤을 무너뜨리는 표징을 보여 주셨지만 블레셋 사람들은 우상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계속 가볍게 여기자 심판이 사람들의 몸과 성읍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아스돗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을 보고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와 함께 있게 하지 못할지라 그의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다곤의 패배와 자신들에게 임한 재앙이 우연이 아니라 여호와의 손에서 왔음을 인정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능력을 부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믿고 다곤을 버리는 대신 언약궤를 자신들에게서 멀리 보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견딜 수 없는 위협으로 느꼈습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서 두 가지 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합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은혜를 구하거나, 하나님께 자신에게서 떠나 달라고 요구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회개보다 거리를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아스돗 사람들은 블레셋 방백들을 불러 모으고 이스라엘 신의 궤를 어떻게 할 것인지 물었습니다. 방백들은 언약궤를 가드로 옮기자고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재앙의 원인이 언약궤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문제를 다른 지역으로 옮기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죄의 근원을 제거하기보다 불편한 결과만 다른 곳으로 옮기려 합니다. 마음의 탐욕은 그대로 둔 채 환경을 바꾸고, 잘못된 선택을 인정하기보다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넘깁니다. 그러나 장소를 바꾼다고 하나님 앞에서 해결되지 않은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언약궤가 가드에 도착하자 여호와의 손이 그 성읍에도 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성읍을 치셔서 매우 큰 환난이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작은 자와 큰 자가 모두 독한 종기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작은 자와 큰 자’라는 표현은 사회적 지위나 나이에 상관없이 재앙이 성읍 전체에 임했다는 뜻입니다. 왕족과 평민,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가 모두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었습니다. 인간 사회에는 높고 낮음이 있지만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누구도 특권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아스돗 사람들이 언약궤를 가드로 옮겼지만 여호와의 손도 가드에서 역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특정한 지역에 제한된 신이 아니셨습니다. 고대 사람들은 신들의 권세가 특정한 민족과 영토에 묶여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이스라엘 땅에서만 능력을 행사하는 지역 신이 아니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블레셋, 성소와 이방 신전을 모두 다스리십니다. 언약궤가 실로를 떠났다고 하나님의 권세가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아스돗에서 가드로 옮겨져도 하나님의 손은 동일하게 역사했습니다. 온 땅은 여호와께 속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궤가 자신들의 진영에 있으면 하나님도 반드시 자신들 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블레셋은 언약궤를 자신들의 영토로 옮기면 그 안에 담긴 신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장소나 민족, 물건에 붙들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교회 건물 안에만 제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당뿐 아니라 우리의 가정과 일터, 경제와 정치, 은밀한 생각과 관계까지 다스리십니다. 예배당에서만 경건한 모습을 보이고 삶의 다른 영역에서는 자기 뜻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손이면서 죄를 심판하는 손입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는 강한 손으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지셨습니다. 같은 손이 완고한 바로와 애굽에는 심판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무엘상에서도 하나님의 손은 언약을 멸시한 이스라엘을 징계하고 우상을 높인 블레셋을 심판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 자체로 모든 사람에게 위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에게 그분의 전능은 보호와 소망이지만,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운 심판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능력이 있으신가가 아니라 우리가 그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입니다.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은혜의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무조건적인 심판 속에 버려 두지 않으시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화목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보내려는 외침은 구원의 기도가 되지 못했습니다(삼상 5:10-12)

가드에서도 큰 재앙이 일어나자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에그론으로 보냈습니다. 언약궤는 아스돗에서 가드로, 가드에서 에그론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러나 언약궤가 이동할 때마다 재앙도 따라갔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문제의 장소만 바꾸었을 뿐 하나님 앞에서 태도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언약궤가 에그론에 도착하자 에그론 사람들이 크게 부르짖었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 한다”고 외쳤습니다. 아스돗과 가드에서 일어난 일이 이미 알려졌으므로 에그론 사람들은 언약궤를 받아들이는 순간 죽음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언약궤는 더 이상 자랑스러운 전리품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다곤의 승리를 증명하는 기념물처럼 신전에 가져왔지만 이제는 누구도 곁에 두고 싶지 않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이용해 자신을 높이려 하면 그 영광은 결국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다가옵니다.

에그론 사람들은 블레셋의 모든 방백을 모아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본래 있던 곳으로 보내라고 요구했습니다. 자신들과 백성이 죽음을 면하게 해 달라고 외쳤습니다. 온 성읍에 죽음의 환난이 임했고 하나님의 손이 매우 엄중했습니다.

여기에서도 ‘엄중하다’는 말은 여호와의 손이 무겁게 임했다는 뜻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옮길 수는 있었지만 하나님의 손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임재를 물리적인 거리로 통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디에나 계시며 모든 사람의 마음과 행동을 아십니다.

죽지 않은 사람들도 독한 종기로 고통을 받았고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습니다. 블레셋 성읍의 환호는 사라지고 비명만 남았습니다. 이스라엘을 이겼다고 기뻐했던 승리의 도시는 죽음과 고통의 성읍으로 변했습니다.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다”는 표현은 그들의 고통이 극심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들이 여호와께 회개하며 구원을 구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했지만 하나님과 화목하기를 구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돌려보내어 자신들에게서 멀리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과 죄에서 돌이키고 싶은 마음은 같지 않습니다. 사람은 죄의 결과는 싫어하면서 죄 자체는 계속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피하고 싶지만 하나님을 주님으로 섬기기는 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바로도 재앙이 임할 때마다 모세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재앙이 그치면 마음을 완고하게 하고 약속을 뒤집었습니다. 그는 고통이 사라지기를 원했지만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하기는 원하지 않았습니다. 블레셋 사람들도 여호와의 능력을 경험했지만 다곤을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오지는 않았습니다.

참된 회개는 단순히 벌을 두려워하는 감정이 아닙니다. 죄가 하나님의 거룩함과 사랑을 거스른 것임을 인정하고 죄를 버리며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죄의 결과만 제거해 달라고 구하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죄의 지배에서 구원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는 죄인에게 두려움을 일으킵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여호와의 영광을 보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의 거룩한 능력을 경험한 후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떠나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죄인을 단순히 멀리 쫓아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죄를 깨닫게 하여 은혜로 나오게 하는 데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보내라”고 외쳤지만, 복음은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내게로 오라”고 부르신다는 소식입니다. 죄인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갈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중보자를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죄인 사이의 화목을 이루셨습니다.

사무엘상 5장의 언약궤 사건을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예표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정경 전체의 관점에서 이 사건은 우상을 무너뜨리고 자신의 영광을 스스로 지키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보여 줍니다. 이 통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궁극적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세상의 권세에 패배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그분을 조롱했고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패배가 아니라 죄와 사망과 악의 권세를 무너뜨린 승리였습니다.

다곤의 머리와 손이 언약궤 앞에서 끊어진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장 해제하시고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승리는 단지 원수를 파괴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원수 되었던 죄인을 회개시켜 하나님의 자녀로 삼는 구원의 승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땅에서도 자신의 영광을 지키셨지만, 그들에게 언약궤의 거룩함을 알게 하시는 과정에서 즉시 모두를 멸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다곤을 쓰러뜨리고 재앙을 단계적으로 확대하시며 그들이 잘못을 깨달을 기회를 주셨습니다. 심판 속에서도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영원히 죄를 허용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경고를 받고도 우상을 다시 세우며 회개를 미루면 심판은 더욱 무거워집니다. 다곤이 처음 쓰러졌을 때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께 돌아왔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곤을 다시 세웠고 마침내 성읍 전체가 고통을 겪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삶의 우상을 흔드실 때 그것을 다시 세우려 할 수 있습니다. 돈과 성공에 대한 확신이 무너졌는데도 더 강하게 붙들고, 인간관계가 우상이었음을 깨달았는데도 하나님보다 사람의 인정에 더 매달립니다. 하나님께서 무너뜨리신 다곤을 다시 세우는 일은 결국 더 깊은 속박을 가져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좋은 것을 무조건 빼앗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하여 우리를 종으로 만드는 우상을 무너뜨리십니다. 우상이 쓰러지는 일은 아프지만 그것은 우리를 참된 자유와 예배로 이끄시는 은혜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을 피하려 하지 말고 그 손 아래 겸손히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심판의 손에서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못 자국 난 그리스도의 손을 붙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손은 정죄가 아니라 용서와 회복의 손이 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무엘상 5장은 언약궤가 사로잡혔어도 하나님은 결코 사로잡히지 않으셨음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모두 물러난 블레셋 땅에서 하나님께서는 홀로 다곤을 쓰러뜨리고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능력으로 유지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영광도 인간의 도움으로 보존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의 다곤을 하나님과 나란히 세워 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돈과 성공, 가족과 명예에 조금 더 보태는 종교적 장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님이 되시면 다른 모든 것은 그분의 뜻 아래 놓여야 합니다. 무너진 우상을 다시 세우지 말고 그것이 차지했던 자리를 하나님께 내어 드려야 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을 멀리 보내려 했습니다. 우리는 고통만 사라지기를 구하는 데 머물지 말고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참된 회개는 하나님의 손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 손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인간의 실패와 세상의 악이 하나님의 영광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모든 우상은 마침내 주님 앞에 엎드러질 것입니다. 홀로 영광받으실 하나님만을 예배하며, 그분의 말씀 아래 겸손히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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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약궤는 사로잡혔지만 하나님은 사로잡히지 않으셨습니다 사무엘상 5장은 언약궤가 블레셋에게 빼앗긴 뒤 일어난 일을 기록합니다. 이스라엘의 군대도 제사장도 등장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홀로 다곤을 무너뜨리고 블레셋의 성읍들을 심판하십니다. 언약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