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구약강해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구약강해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창세기 12장

 1. 창세기 12장 개요

창세기 12장은 성경의 시대 구분이나 창세기 안에서의 역사나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장이다. 일반적으로 창세기 1-11장까지를 창조시대로 규명하고, 12장부터는 족장시대로 구분한다. 11장에도 아브람이 등장하지만 명확한 구분은 12장에서 시작된다. 창세기 11장에서 흩어진 바벨 공동체 안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냄으로 시작한다. 마치 무에서 유를 불러내시고, 어둠에서 빛을 내게 하시고, 물속에서 마른땅을 부르시는 창조적 능력과 흡사하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생명의 약속이며, 새로운 것의 '있게 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세기 12장 서론 부분을 읽을 때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이 어떻게 사용되는가를 봐야 한다. 이제 들어가 보자.

창세기 12장 구조

1-12절 하나님이 소명과 순종하는 아브람

13-20절 기근과 애굽에서 당한 일


2. 주해

1-12절 하나님이 소명과 순종하는 아브람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신다. 앞의 '너의' 소유격은 이후의 문장을 이끈다. '너의 고향' '너의 친척'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명하신다. 떠남은 분리이며 관계없음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기 위한 첫 번째 조건으로 '떠남'으로 제시한다. 떠나지 않고 도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의'라는 표현은 지금까지 아브람이 쌓아 놓은 명성, 부, 권위, 관계 등을 벗어나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버리로 혈혈단신으로 가라는 말은 아니다. 아브라함은 부유하며 많은 재산을 가지고 가나안에 도착한다. 물론 이후 더 많은 재물을 얻기를 하지만. 1절은 '너는 독립적인 존재가 되라'라는 뜻이다.

소명은 존재를 규명하고, 존재를 한계 짓는다. 부르심으로 모호한 것이 사라지고 삶의 방향과 목적, 그리고 방식까지 정확하게 정해진다.

*아버지의 집
성경에서 아버지의 집은 다양성을 가지고 있지만 보호와 권위, 그리고 기업을 잇는다는 의미를 포괄적으로 가지고 있다. 아버지를 떠나는 아버지의 집을 떠남과 같다. 이 말은 아버지의 보호를 벗어나 유랑한다. 또는 처량한 신세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또한 아버지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 전체를 뜻하기도 한다.

  • 창세기 20장 13절 하나님이 나를 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 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  창세기 50장 8절 요셉의 온 집과 그의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가고 그들의 어린 아이들과 양 떼와 소 떼만 고센 땅에 남겼으며

창세기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2절을 약속이다. 큰 민족, 이름, 복.이 된다. 민족은 후손이고, 이름은 11장에서 사람들이 '우리들의 이름을 내자'라는 울림이다. 히브리어 셈은 이름이란 뜻인데, 노아의 아들 셈과 11장의이름(셈), 그리고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약속한 이름(셈)은 다분히 언어유희적이다. 창세기 기자는 유명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란 사실을 강조한다.

이후 모세오경은 12장 2절의 주석과도 있다. 때로는 실패한 듯보이고, 때로는 막막해 보이지만 결국 모세오경이 끝날 즈음 거대한 민족이 탄생하고, 아브라함의 이름이 존귀케 되며, 아브라함은 복의 사람이 된다. 하지만 지금은 시작이고 내일이 보지 않는다.

창세기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복을 준다'는 표현이 다시 등장한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고,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를 내린다'고 약속하신다. 아브람을 축복하는 자가 누구일까? 또한 저주하는 자는?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고, 하나님을 거절하는 자들이다. 아브람은 말씀에 순종하는 자이기에 아브람은 곧 하나님이다.
  • 마태복음 10장 25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이러한 맥락은 아브람이 이 땅에서 왕 같은 제사장처럼 살아갈 것을 말한다. 아브람과 하나님은 다르지 않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자신의 이름을 주었다. 마치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것처럼.

아브람으로 인해 땅을 복을 받는다. 아담의 창조와 타락 역시 이 부분을 강조한다. 아담으로 인해 땅이 복을 받고 저주를 받는다. 소명자들은 이땅의 운명을 지고 간다.

창세기 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아브람은 곧 실행에 옮긴다.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다'는 표현은 굉장히 특이하다. 번역은 '따라갔다'라고 했지만 히브리어는 '걷다' '동행하다'의 뜻인 '할라크'이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에서꼭 외어 두어야 할 단어다. 에녹이 하나님께 동행(할라크)한 것처럼 아브라함 역시 하나님을 따랐고(할라크) 하나님과 동행(할라크)한다.

조카 롯도 함께 아브람과 동행한다. 아브람이 권유한 것인지를 확실치 않으나 결국 하나님을 따르는 삶을 함께 동참한다. 롯의 시작은 이처럼 아름답지만 결국 믿음의 길에서 벗어난다.

아브람이 소명을 길을 떠날 때 그의 나이는 75세였다.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었음에도 기꺼이 그 길을 걸었다. 하란에서 떠났다는 표현도 염두에 두자. 후에 이 부분을 다시 언급할 것이다.

창세기 12:5-6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아브람은 아내 사래와 조카 롯을 데리고 가나안에 도착한다.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란 표현은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는 것과 그가 성공한 삶을 살았다는 뜻을 의미한다. 하지만 성공적인 삶이라 할지라도 아브라함은 그곳에 안주하지 않고 믿음의 모험을 떠났다. 

1절에서 '보여줄 땅'에서 5절에서는 '가나안 땅'으로 구체화되었다. 믿음의 삶이란 처음에 모호함과 불투명만이 가득하지만 하루하루 순종의 삶을 통해 구체화된다는 점을 망각하면 된다. 우리는 모든 알고, 모든 것을 이해하고 시작하려 하지만 믿음의 삶은 그렇지 않다. 지금 내가 아는 작은 계명에 순종할 때 더 크고 원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룰 수 있다.

세겜 땅은 후에 에브라임 지파의 것이 된다. 야곱의 딸인 디나가 강간을 당한 곳이기도 하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후에 [성서지리-세겜]에서 다룰 예정이다.
  • 창세기 48:21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 창세기 48:22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세겜 땅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
출애굽 후에 가나안을 정복한 후 요셉의 뼈를 세겜에 묻는다.
  • 여호수아 24장 32절 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 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백 크시타를 주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산 밭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이 구절을 처음 읽을 때 정말 놀랐다.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지만 어느 순간 알 수 없는 답답함이 밀려왔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라고 왔는데 그 땅은 빈 땅도 아니고,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도 아니었다. 그곳에는 그곳의 땅 주인이 따로 있었다. 아브람은 평생은 나그네로 살아가야 했다. 이 부분에대해서는 히브리서 기자가 잘 표현한다.
  • 히브리서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 히브리서 11: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 히브리서 11: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창 12:7-9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가나안 땅에 도착하자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셔서 약속을 하신다.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신다는 것이다. 분명 '네 자손'이라고 했다. 아직 없는, 태어나지 않은 아들을 하나님은 미리 말씀하신다. 아브라함이 이 약속을 들었을 때 얼마나 설렜을까? 

아브람은 약속을 믿고 그곳에 제단을 쌓는다. 굳이 예배로 번역하지 않아도 아브람의 믿음이 얼마니 대단한가를 잘 보여준다. 그는 하나님을 경험한 후 그대로 멈추지 않고 예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를 표했다. 제사는 공짜가 아니다. 자신 소유의 일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양이나 염소 한마리를 현재 돈으로 환산하면 적어도 20-50만 원 정도 가격이다. 요즘이라면 매주마다 이런 예물을 가지고 간다면 아마 폭동이 일어날 것이다.

13-20절 기근과 애굽에서 당한 일


창세기 12:10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놀라운 설명이다. 약속에 땅에도 기근은 온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에 형통만 존재할 거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어쩌면 믿음 이후 더 가정이 어렵고 힘들 수도 있다. 기근을 통해 아브람은 생존 방법을 찾아야 했다. 결국 그는 애굽을 선택한다. 이 부분 역시 안타깝다. 처음 당하는 일이라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왜 기도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 일로 말미암아 아브람은 큰 어려움에 처한다.


창세가 12:11-13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이 부분은 놀랍도 못해 경악스럽다. 물론 현대인의 관점으로 말이다. 아브람은 사래에게 당신을 빼앗으려고 자신을 죽일 수 있다고 말하며, 차라리 먼저 누이라고 거짓말 하겠다고 말한다. 후에 이삭도 부전자전이라고 그대로 따라 한다.
  • 창세기 26장 7절 그 곳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 대하여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내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내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창세기 12:14-17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결국 아브람이 걱정한 일이 그대로 이루어진다. 사실 이 부분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몇 권의 창세기 주석을 봐도 딱히 동의할만한 설명을 못한다. 사래의 얼굴이 검은색톤의 이집트 인에게 하얗게 보여 이쁘게 보였을 것이라는 황당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곳도 있다. 탈북자들이 한국에 내려와 남자의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다고 한다. 그들이 보기에 너무 젊어 보인다고 한다. 잘 먹고 잘살아서? 아니면 사래가 동안이라서? 알 길은 없다. 다만 그렇다는 것이다.

사래가 얼마나 예뻤던지 애굽 사람들이 수근거리 시작했고, 그 소문이 바로에게까지 들린다. 결국 바로가 사래를 데려간다. 대신 사래이 오빠?인 아브람에게 많은 선물을 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바로의 집에 재앙을 내린다. 아브람은 철저히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


창세기 12:18-20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와 함께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깜짝 놀란 바로는 바로 아브람을 불러 야단을 친다. 왜 거짓말을 했냐고. 결국 바로는 재앙을 겪고 나서야 아브람을 내보낸다. 후에 출애굽 사건과 너무나 닮지 않았는가. 지중해 근안에 큰 기근이 오자 야곱의 가족이 요셉의 도움으로 애굽으로 내려가고 430년 후에 모세를 통해 열 가지 재앙이 일어나고 결국 애굽을 나온다. 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많은 재물을 가지고 나온다.
  • 출애굽기 12:35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 출애굽기 12:36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

믿음의 길은 순탄하지만 않다. 때로는 폭풍우도 있고, 사막을 만나기도하고, 목마름과 갈증이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마침내 약속하신 것들을 이루실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환경에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한다.

룻기 개요 및 장별 요약

 1. 룻기 개요

룻기는 사사 시대라는 시간적 배경과 베들레헴과 모압이라는 공간적 배경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룻기의 목적은 다윗왕의 조상이 누구인가를 밝히는 데 있다. 궁극적으로 룻기는 하나님의 은혜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는 두 사람의 헌신을 통해 소망을 얻게 된다는 내용이다.

룻기는 수많은 문예가에게 영향을 줬다. 단체를 룻을 '다윗의 조상으로 온유한 여인이요 이삭 줍는 소녀'라는 표현한다. 괴테는 룻기에대해 구약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은 스토리'라고 말했다. 텅 빈 삶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채워져 가는 한 여인을 통해 암울한 사사 시대에서 번성한 왕국 국가로의 전환점이 룻이라는 한 여인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밝힌다.

2. 룻기 장별 요약

룻기 1장

베들레헴에 살던 엘리멜렉 가족은 흉년이 들자 고향을 버리고 모압으로 이사를 한다. 가족은 아내 나오미와 아들 말론과 기룐이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엘리멜렉이 사망하고 두 아들과 나오미만 남는다. 또 말론과 기룐도 결혼을 한다. 하지만 두 아들 모압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죽고 나오미와 두 며느리만 남게 된다. 두 며느리의 이름은 오르바와 룻이다. 나오미는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 어려움에 봉착한다.

나오미에게 고향 베들레헴 소식이 들려온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다시 회복되었다는 이야기다. 고향 소식을 들은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된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8절)고 말한다. 그러나 두 며느리는 거절하고 나오미를 따라간다. 그러자 잠시 후 나오미는 다시 두 며느리를 설득하여 고향으로 돌라가라 말한다. 결국, 동서인 오르바는 이별의 키스를 하고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15절) 간다. 하지만 롯을 돌아가지 않는다. 그녀는 이렇게 나오미에게 말한다.

  • 룻기 1:16-17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결국 두 사람은 베들레헴으로 간다. 나오미가 베들레헴 도착하자 수많은 여성이 나와 나오미를 환영 아닌 환영을 한다. 나오미는 자신을 나오미(기쁨)라 부르지 말고 말라 하여(고통)라 부르라고 말한다.

룻기 2장

2장이 시작되자 곧바로 엘리멜렉의 친족인 보아스가 소개된다. 놀랍게 베들레헴에 온 룻은 어머니 나오미에게 부탁해 밭으로 가서 이삭을 줍겠다고 한다. 모세의 율법에는 농사를 짓는 사람이 수확할 때 밭의 모든 곡식을 깨끗하게 거두지 않도록 당부한다. 밭의 모퉁이의 곡물을 남기거나, 베다가 바닥에 떨어진 것들은 줍지 않게 한다. 그러한 것들은 가난한 이들이 가져가도록 했다.

  • 레위기 19:9-10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룻이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줍기를 할 때 마침 보아스가 일하는 하인들을 찾아오고 룻을 발견한다. 사환에게 누구냐고 묻자 나오미와 함께 모암에서 온 여인이라고 말한다.  룻을 긍휼히 본 보아스는 다른 밭에 가지 말고 여기서 주우라고 말하고, 일꾼들에게는 이삭을 일부러 흘리라고 이른다.

이삭줍기를 마친 룻은 나오미에게 간다. 나오미는 너무 많은 이삭을 보며 깜짝 놀란다. 룻이 그동안의 사연을 이야기해주자 나오미는 보아스를 소개하고 그에게 감사를 표한다. 그렇게 추수의 시가가 거의 끝나간다.

룻기 3장

추수기가 거의 마칠 때가 되자 나오니는 룻을 부른다. 추수가 마무리되면 곡식을 한곳에 모아 타작을 한다. 이날은 기쁨과 잔치의 날이다. 나오미는 이날 보아스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타작마당 한 쪽에 자리한 텐트에서 잠을 잔다는 것을 알고 룻을 그곳으로 보낼 계획을 짠다. 룻은 나오미가 시키는 대로 텐트 안으로 들어간다. 잠을 자다 인기척에 놀란 보아스가 룻을 발견한다. 룻은 보아스에게 기업 무를 자임을 밝히고 받아 주라고 말한다. 보아스는 지금은 때가 아니라 많은 곡식을 주며 돌려보낸다.

룻기 4장

보아스가 룻의 청을 받고 자신보다 우선순위가 있는 사람들에게 엘리멜렉의 기업을 무를지를 묻는다. 처음에 그가 기업을 무르겠다고 했지만, 사정을 이야기하고 아이가 자라면 모두 돌려주어야 한다고 하자 손해 보는 장사라며 하지 않겠다고 한다. 그는 기업을 무르지 않겠다는 증표로 자신의 신을 벗어 준다. 결국 보아스가 엘리멜렉의 기업을 무르기로 하고 룻과 결혼을 한다. 얼마 후에 룻이 아이를 낳고 이름을 오벳이라 한다. 오벳은 다윗의 아버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는다.

창세기 1장

1. 개요


창세기 1장은 창세기의 시작이자 서막에 해당합니다. 창세기를 읽을 때는 연대기적으로 읽으면 안 되고 반드시 출애굽의 관점에서 읽어야 합니다. 신약적 관점으로 읽으면 더욱더 좋습니다. 하여튼 창세기 1장은 바로의 질문인 '여호와 누구기에?'라는 질문의 답일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 그는 누구일까? 그 질문의 답이 창세기이고, 창세기 1장입니다. 창세기 1장을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든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2. 강해


1-2절 태초에 하나님

  •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창세기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처음에(베레쉬트)는 '처음'이란 뜻이다. 베는 히브리어 베트이며, 시간과 장소를 의미한다. 로쉬는 '머리''장자''처음' 등의 의미다. 베레쉬트에 무슨 심오한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처음'이란 뜻이다. 하지만 처음은 첫번째라는 뜻이 아닌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이란 의미로 '아루 오래된'이란 뜻이로 해석해야 한다. 모든 것이 없을 때 하나님은 '천지'를 만드셨다. 천지는 한 단어가 아니라 '하샤마임'과 '하 에레츠'로 그하늘들과 그 땅이다. 샤마임은 하늘의 복수형태이다. 이건 여러 하늘들이란 뜻이 아니라 고대 히브리인이 갖는 하늘에 대한 관념이다. 그들은 하늘들이 최소한 3층이 있다고 믿었다. 7단계로 주장하는 이들도있다.


창세기 1장을 유심히 읽어보면 지구의 창조가 없다. 곧바로 빛이 있고, 2일째는 물과 물 사이를 갈라 공간을 만든다. 과도하게 문자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이들은 대단한 오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말하고 싶다. 필자는 1절에 '그 땅(에레츠)'를 지구의 창조로 본다. 하여튼 1장의 창조는 대단히 상징적이다.


2절로 넘어가면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다. 혼돈은 질서가 없다는 뜻이며, 공허는 텅 비어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1장의 창조가 무에서 유로, 무질서에서 질서로 나아가는 것을 본다면 혼돈과 공허는 처음을 뜻하며, 아직 사람이 살 수 없는 원시적 상태임을 말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짓고 바벨론으로 끌려 갈 때 이 단어가 사용된다. 성경 속에서 '공허'와 '혼돈'은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 또는 저주의 결과로 자주 사용된다.


  • 예레미야 4:23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 이사야  24:1 보라 여호와께서 땅을 공허하게 하시며 황폐하게 하시며 지면을 뒤집어엎으시고 그 주민을 흩으시리니
  • 이사야 34:11 당아새와 고슴도치가 그 땅을 차지하며 부엉이와 까마귀가 거기에 살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 위에 혼란의 줄과 공허의 추를 드리우실 것인즉
  • 이사야 45:18 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창조의 관점에서 공허와 혼돈은 저주가 아닌 시작의 상태로 읽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죄로 인하여 인간들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때도 저주의 사용된다는 점은 창조의 시작과 저주는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두 절을 통해서 하나님은 무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음을 읽는다. 또한 언제든지 다시 태고적 혼돈과 공허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인간의 본질이 흙이듯 창조전의 모습은 혼돈과 공허다. 창세기 7장에서 홍수로 인해 혼돈의 세계가 되었다는 점은 인간의 죄가 반(反)창조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3-5절 첫째날의 창조


  • 창세기 1: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 창세기 1: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 창세기 1: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첫째날의 창조는 '빛(오르 אור)'이다. 이 빛은 후에 나오는 광명체와는 성질이 다르다. 학자들 간의 적지 않은 논란의 중심에 3절의 빛이다. 태양이 없는 상태에서 빛으 가능할까 때문입니다. 최근들어 학자들은 북극의 오로라처럼 태양이 없어도 빛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과연 모세는 태양 없는 빛을 말하고 싶어서 3절을 넣은 것일까? 아니라고 본다. 출애굽의 재앙의 하나가 흑암 재앙이라는 점은 빛의 아들이 파라오가 가짜 신임을 드러내는 재앙이자 심판이었다. 빛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3절의 빛을 현대인의 관점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출애굽의 관점에서 읽는 것이 더 우선시 되어야 한다.


부름은 곧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존재가 있다. '빛이 되었다'가 아니라 '빛이 있었다(ויהי־אור)'는 과거형(히 미완료)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말씀은 곧 존재이다. 말씀이 전부라는 사실을 말한다. 출애굽은 신관념에 대한 혁명적 전환을 가져왔다. 애굽은 보이는 형상을 신이라 불렀다. 고대 사람들은 신이 보여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를 죽었다. 하여튼, 히브리인들은 보이는 신은 가짜이고, 말씀하시는 신이 진짜임을 믿어야 했다. 보는 종교에서 듣는 종교로의 혁명적 변환이 일어난다.


보시기에 좋았다. '좋다'는 히브리어 토브는 '선''완전' 등에 사용된다. 하나님의 완전성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피조물은 그 존재 자체로 완전한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족'해야 한다. 참 신앙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신뢰이자 만족이며 감사이다. 죄는 하나님의 베품에 대한 불만족이다. 


빛과 어둠을 나누사. 창조는 섞인 것을 분리하여 나눈다. 하나님은 계속하여 구분하여 질서를 세우고, 모든 것을 각자의 소명을 준다. 낮과 밤을 분리하듯, 이후에 물과 물을 분리하고, 물과 땅을 구분 짓는다. 구분은 차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소명을 위한 것이다. 태양은 낮을 빛을 발하고 낮을 주관한다. 달은 밤을 주관한다. 이처럼 구분은 모든 것을 체계적으로 세워나가는 건축술이다.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하나님이 부르시면 이름이 된다. 이름은 곧 존재의 규명이자 한계을 설정한다. 모든 존재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 하나님은 그들의 이름을 부름으로 이름대로 살아갈 소명을 받는다. 이것이 이름의 신학이 갖는 핵심이다. 성경 안에는 이름을 부르는 것이 종종 선택 받은 백성됨과 구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증명한다. 후에 이 부분은 따로 [ #이름의신학 ]이란 주제로 따로 다룰 것이다.


  • 이사야 40장26절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 이사야 41장25절 내가 한 사람을 일으켜 북방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을 부르는 자를 해 돋는 곳에서 오게 하였나니 그가 이르러 고관들을 석회 같이, 토기장이가 진흙을 밟음 같이 하리니
  • 이사야 65장1절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 사도행전  2장21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 고린도전서  1장2절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첫째 날은 빛을 창조하심으로 어둠과 구분하신다. 빛이 없다면 어둠도 없을 것이다. 창조는 존재하게 함으로 무를 드러낸다. 무는 '아무 것도 없다'가 아니라 그냥 무인 것이다. 존재 만이 무를 드러내며, 빛을 있어야 어둠을 드러낸다. 요한은 자신의 모든 신학을 '빛'의 개념에서 설명한다는 점도 유의하여 볼 만한다. 하나님은 빛이고, 예수님을 빛으로 세상에 오셨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빛의 자녀들이다.


  • 요한복음 1장 5절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 요한복음 3장 19절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 요한복음 8장 12절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 요한1서 1장 5절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  데살로니가전서 5장 5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6-8절 둘째날의 창조


  • 창세기 1:6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 창세기 1: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 창세기 1:8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둘째 날의 창조는 궁창 즉 공간이다. 공간은 물과 물 사이에서 생겨난다.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은 위의물과 아랫물 사이에 존재하는 불안정한 장소이다. 홍수 때 두 장소의 물이 합해진다. 하지만 그 공간은 하나님께서 붙드시므로 안전하다. 무엇이 우리를 안전하게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가. 공간은 인간의 불안정한 인간의 실존을 표명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붙듬으로 안전하게 된다.


하나님은 공간을 하늘(샤마임)이라 부른다. 둘째 날의 창조는 섞인 것들을 분리함으로 공간을 만든다. 결국 이러한 이러한 공간은 다시 채워진다. 창조는 텅빔에서 채움으로 나아간다. 사람을 창조한 이후 이 땅에 번성하고 충만하라는 의미는 창조를 완성하라는 의미다.


9-13절 셋째날의 창조


  • 창세기 1:9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 창세기 1: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 창세기 1:11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 창세기 1:12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 창세기 1:1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셋째 날의 창조는 출애굽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 날은 빛을 만드시고, 둘째 날은 물을 갈라 공간을 만들고, 이젠 아랫물속에 있는 땅을 불러 내신다. 9절에 등장하는 뭍이란 표현은 히브리어로 '하바바샤브'로 말라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단어는 출애굽기 4:9과 요나 1:9에서 사용되어 사람들이 발을 딛고 있는 땅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 있을 때 절망하는 이스라엘을 위해 물 속에서 '마른  땅'을 드러내신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다. 땅은 하나님의 구원의 상징이다. 에덴 동산은 물 속에서 불러낸 땅 위에 세워진다.


10절에서는 이 뭍을 '땅(에레츠)'로 부르신다. 에레츠는 지구라는 의미와 함께 이스라엘이 조상들로부터 물려 받은 기업으로 자주 번역되는 단어로 상속되어야할 재산의 개념이 강하다. 가나안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받은 기업(에레츠)이다. 이스라엘을 에레츠이스라엘라 부르는 이유이다. 땅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그 선물을 망각하면 안 된다.


땅에게도 소명이 주어진다. 땅은 씨(제라) 맺는 식물을 내야 한다. 씨는 다음 세대를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끊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각기 종류대로는 분리와 나눔의 법칙에 속한다. 인간의 성장과 비교하면 창조의 순서와 매우 닮아있다. 처음엔 아무런 기능도 없는 줄기세포지만 분열하는 과정을 통해 각지 다른 세포로 성장한다.


14-19절 넷째날의 창조


  • 창세기 1:14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 창세기 1:15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 창세기 1:16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 창세기 1:17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 창세기 1:18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 창세기 1:19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넷째 날부터는 이전의 삼일 창조와 대칭을 이루며 채움으로 이어간다. 넷째날은 첫날과 대응한다. 첫날 빛을 만드신 하나님은 넷째날 공창에 광명체를 만드심으로 빛을 발하게 하신다. 넷째날이 되서야 드디어 우리가 아는 공전과 자전을 통해 자연의 법칙이 완성된다. 그러므로 계절과 나로가 해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징조는 약간 모호다. 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뜻을 포함하지만 어떤 의인지 부정확하다.


'징조(오트 אוֹת)'라는 던어는 영어 sign과 다른 말이 아니다. 표시 또는 징조로 해석되는 평범한 단어다. 마태는 이 구절에서 종말의 징조를 가져왔느지 모를 일이다.


  • 마태복음 24장 30절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광명체들이 하는 일은 빛을 비추는 일이다. 빛을 비춤으로 땅의 만물은 형상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빛이 없으면 모든 것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16절의 주관한다는 말은 통치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궁창의 빛 아래 두신다. 인간은 하늘의 지배를 받지 않지만 영향을 받는다. 비가 내리면 비를 피할 수없고, 어둠이 찾아오면 막을 방도가 없다.


'궁창에 두었다'(14, 17절)는 장소적 의미로 그곳을 벗어나면 안된다는 말이다. 태양은 자신의 길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가야한다. 이것이 태양의 운명이다. 운명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소명에 관련된 것이다. 넷째 날도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20-23절 다섯째날의 창조


  • 창세기 1:20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 창세기 1:21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 창세기 1: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 창세기 1:2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다섯 째날은 둘째 날과 대응한다. 둘째날은 물과 물 사이를 나누어 공간을 만들었다. 하지만 다섯 째날은 아래의 물과 물과 사이의 공간을 채우신다. 아랫물에는 물고기로 채우시고, 위의 궁창은 새들로 채우신다.


넷째 날에 번성이란 단어가 네 번이 사용되었다는 점은 더 계속하여 충만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아직 하나님의 창조는 완성되지 않았다. 남겨진 부분을 채워가는 것은 인간의 일이다. 우리는 여기서 광명체 등은 '비추라'는 소명의 의무가 주어지지만 생물에 대해서는 번성하여 충말하라는 다른 의미의 소명이 주어짐을 발견한다. 교회는 생명의 공동체이므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해야할 의무를 갖는다. 교회 성장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것이다.


24-31절 여섯째 날의 창조


  • 창세기 1:24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 창세기 1:25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여섯 째날은 동물과 사람의 창조이다. 여섯 날은 땅 위에 존재에 대해 이루어지며, 서로 닮아 있다. 먼저 동물은 식물처럼 땅에게 명령한다. 짐승도 땅에게 명령하여 종류대로 내라 하신다. 짐승과 가축, 등은 용어의 차이로 야생과 사람의 손에 길러질 가축을 대변한다. 이 또한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 창세기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 창세기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 창세기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창세기 1:29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 창세기 1: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 창세기 1: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마지막 사람의 창조는 특이하다. 지금까지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며, 이미 존재한 것으로부터 확장되어 창조된 것이다. 물론 사람도 그렇다. 하지만 창세기 기자는 의도적으로 인간은 하나님께 특별한 관심과 합의, 사랑의 결과로 창조 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형상과 모양(첼렘과 테무스)은 이후 번역을 살펴도 크게 큰 차이를 느낄 수 없는 모호함이 존재한다. 아마도 비슷한 단어를 통해 강조 또는 언어유희를 사용했을 것이라 학자들을 추측한다. 핵심은 '우리의 모양과 우리의 형상' 즉 '우리'라는 표현에 방점에 찍힌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되었다는 점이다. 이전의 피조물 설명과는 상당히 다른 표현이다.

사람의 창조 목적은 지금까지 지은 생물들을 다스리게 하는 것이다.(26절 하)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 창조 된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명한다. 이것은 동물의 창조와 비슷하다. 하지만 사람은 '땅을 정복하라'는 명령과 ...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명령이 추가된다. 즉 생물의 지배권을 갖는다는 말이다.

또한 셋째 날 창조 된 채소가 사람들의 먹을거리가 된다. 육일째의 창조는 동물에게도 사람에게도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표현을 두 번 사용함으로 둘째 날에 빠진 '보시기에 좋았더라'를 추가함으로 7번을 채운다. 이렇게 육일의 창조는 마무리된다.

창세기 장별요약 및 강해 목록


내 블로그 목록

추천 게시물

2024년 9월 29일, 주일 대표기도문

주일 낮 예배 대표기도문 믿는 자들의 위로와 희망이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9월의 마지막 주일, 저희를 주님의 거룩한 존전 앞에 불러 주셔서 예배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변화하는 계절 속에서도 변함없이 저희를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주님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