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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0장 강해

 마태복음 10장 개요

10장은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에게 나가서 복음을 전하도록 하는 사명과 함께 주어지는 설교다. 열두 제자에게 나누어 주신 능력은 주님이 직접 행하신 기적이다. 


1-42절 열두 제자 파송설교


1절  열두 제자와 권능

주님은 제자들 중에서 특별해 열 둘을 택하셨다. 열둘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서 기원하며 완전한 공동체를 말한다. 열두 지파는 야곱의 열두 아들이지만, 레위와 요셉이 빠지고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들어가 열둘이 된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종종 요셉의 후손이란 표현을 두 지파를 묶기도 하지만 에브라임은 므낫세를 약한 지파라하며 무시한다. 이러한 정서는 므낫세 지파의 사사인 기드온이 에브라임 지파가 찾아와 항의할 때 잘 드러난다.


2-15절 열두 제자와 사역 방법

열두 제자

열두 사도의 이름은 베드로, 안드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그의 형제 요한, 빌립, 바돌로매, 도마,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 갸룟 유다이다.


베드로는 바위라는 뜻의 히브리어 페트로의 헬라식 이름이다. 원래 이름을 시몬이다.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이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형제이다.

빌립은 모호한 인물이다. 사도행전에서 사도 빌립과 집사 빌립이 겹친다. 후반부로 가면 사도인지 집사인지 알길 이 모호하다.

바돌로매는 요한복에 등장하는 나다나엘인 것으로 추측되지만 불확실하다.

마태는 세리로 소개된다. 세리와 창녀는 죄인으로 취급된다.

알패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다. 세배다의 아들 야고보는 큰 야고보이고,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작은 야고보로 불린다.

두 번째 시몬은 가나안인으로 나온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남겨진 가나안 족속일 것이다. 정말 그렇다면 그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도가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복음은 이방인에게 먼저 가지 않는다. 먼저 유대인 안에 전파된다. 잃어버린 양은 이스라엘 안에서 소외되고 버림 받은 이들을 향한 것이다. 주님은 친히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눅 19:10)이라 자신의 사역을 소개한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

임박한 종말론적 삶은 코람데오의 삶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은 자는 늘 종말을 염두에 두고 살아간다. 하지만 나태한 자는 종말을 인식하지 못한다. 마태는 유난히 '천국'을 좋아한다. '하나님의 나라'보다는 천국이 히브리즘에 더 가깝나다. 여기서 '국' '나라'는 kingdom'으로 왕들이 다스리는 나라를 말한다. 하늘의 왕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왔으니 회개하라는 것이다.


고치며

치유와 회복이다. 처음 하나님이 만드시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아담의 모습이 아니다. 신약에서의 회복은 더 이상 죄 지을 수 없는 완전한 의인의 상태이다.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혀진 상태이다.


평안하기를 빌라

평안은 구약의 '샬롬'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이스라엘의 샬롬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샬롬이며, 나아가 전쟁과 경제적 자유 등을 포함하는 포괄적 자유다.


발의 먼지

발은 땅(세속)과 닿는 부분이다. 발의 먼지는 떠는 행위는 일종의 씻는 행위이자 정결행위다.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림으로 그곳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단절을 의미한다.


16-23절 이렇게 대처하라

양을 이리 가운데로

양은 무지하고 어리석다. 하지만 순수하다. 이리는 양을 공격하는 존재이다. 원수들 가운데 보내는 것 같다는 의미다. 아무런 힘도 없고, 공격할 수도 없다.


뱀 같이 지혜롭다는 말은 모든 상황을 잘 파악하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보 같이 행동하는 것이 미덕이라 생각하지만 아니다. 지혜롭게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진정한 힘은 비둘기 같은 순수함이다. 결국 순수함이 이긴다. 순수함은 무지가 아니다. 뱀 같은 지혜의 순수다.


나로 말미암아

사람들을 삼가라는 말은 주의하라는 말이다. 주의하라는 분별하라는 말이다. 만나는 사람이 누구인지 바로 알아야 한다. 그들과 과도하게 친밀하게 지내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다. 그냥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되는 일이다. 

주님은 자신으로 인해 핍박을 받게 될 것을 말한다. 거짓의 세상에 진리는 항상 핍박을 받는다.


말하는 이는 - 성령이시니라

우리가 말하는 것 같지만 성령이 말씀하신다. 성령께서 우리의 사정을 아시고 대언하실 것이다.


대적하는 세대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종말의 때에는 형제간, 부모 자식간, 대적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거짓과 진리의 싸움이다. 


24-42절 나를 따르라.


두려워하지 말라.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은 당연히 주님의 제자들을 얕잡아 볼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께 파리들의 왕이란 뜻을 바알세불이라 불렀다. 모독적인 표현이다. 하지만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을 드러날 것이다.


너희는 참새보다 귀한니라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종종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 자신이 너무 작게 보인다. 하지만 주님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참새 보다 못한 인생이라 말하지만, 주님은 '너희는 참새 보다 귀하니라' 말씀하신다.


검을 주러 왔노라

진리는 어둠과 불가피한 전쟁이다. 주님이 주시는 검은 성령의 검, 즉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은 검으로 어둠을 격파한다. 말씀이 뿌리 내리는 자들은 결코 어둠에 휘둘리지 않는다.


나를 위하여

주님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 합당하지 않다고 말한다. 주님의 제자의 자격이다. 주님의 십자가가 아니라 '자신의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사형틀이다. 즉 죽음을 각오하고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구절은 다음 구절인 39절에서 목숨과 연결된다. 결국 자신을 내어 놓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제자의 절박성을 말한다.


마태복음 장별 요약 및 강해 목록


마태복음 3장 세례 요한

마태복음 3장 개요

요셉이 애굽을 떠나 갈릴리로 돌아간지 약 27년 정도가 흐르고 나서 세례 요한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소년 시대는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고, 다른 곳에는 전혀 기록이 없습니다. 요셉이 애굽에서 약 3년 정도 있었을 것으로 보고 갈릴리에서 약 27년 정도 지나 30세가 되었을 때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고 공생애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성경에 예수님의 나이가 30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서른 즈음이란 표현은 나이를 말하기보다 사역을 위한 적절한 나이임을 드러낼 때 사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문자대로 해석하여 서른으로 보고 본문을 접근합니다.


  • 1-12절 세례 요한의 사역
  • 13-17절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는 예수


1-12절 세례 요한의 사역


'그때에'


어느 시기를 말하기보다 전환이 의미가 강하다. 2장과 3장 사이는 약 25-28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많은 시간이 흐른 뒤 하나님은 때가 되자 세례 요한을 불러 내신다.
누구에게나 때가 있다. 아무리 힘이 있고 능력이 있어도 하나님의 때가 아니면 이룰 수 없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때를 기다려야 한다.

유대광야에서


광야는 세례 요한이 누구인지 보여준다. 그는 광야에서 메시아를 예비 하는 존재이다. 광야는 인간의 삶을 불허 하는 공간이며 절대 고독의 장소이다. 하나님께 인밀한 대화를 통해 존재를 드러낸다. 광야는 곧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을 상기 시킨다.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이 광야의 길을 걸을 때로 곧장 소환한다.


회개하라


회개하라는 문자적 의미는 유턴하라이며, 오던 길을 멈추고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돌아가야 할 길은 어디일까? 요한은 이사야 말씀을 인용하여 주님의 길을 소개한다. 그렇다면 회개하고 돌아가야 할 길은 주님께서 가시는 길이다.

이사야 구절은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고토인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른 말이다. 이사야 시절, 이미 바벨론의 포로와 귀환을 미리 보고 예언한 것이다.

  • 40:3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요한의 모습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하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 여기에 과도한 해석을 하지 말아야 한다. 1세기 당시 은자들의 모습과 거의 흡사하다. 세례 요한에 대한 표현은 그가 세속적인 것과 멀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 뿐이다. 하지만 이 부분은 인간의 삶에 종속되지 않는 날 것 야생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의 통제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후에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설명하면서 광야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한다. 여기서 중요한 언급은 선지자이다. 선지자는 광야에 있다.

  • 11:7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 11: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 11: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 11:10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 11: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 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 11:13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 11: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 11:15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

회개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로서의 마땅한 삶을 살라는 것이다.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처럼 잎만 무성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백성이 갖추어야 할 거룩 순결 정직 을 가져야 한다.

불에 던져리지라

심판에 대한 언급이다. 이스라엘은 이미 바벨론 포로를 겪은 면서 심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 심판은 진행형이다.

내 뒤에 오시는 이

예수님을 말씀하신다.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신다. 물은 정결을 의미한다. 하지만 본질을 바꾸지 않는다. 하지만 불은 모든 것은 태워 버리고 없앤다. 불은 하나님의 임재이자 심판의 상징이다. 물로 세상은 온전해 지지 못한다. 불은 완전한 소멸이자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신약은 성령과 불의 시대다. 오순절 성령은 불처럼 임한다.

13-17절 세례 받으시는 예수님


갈릴리로부터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에 사셨다. 세례를 받기 위해 세레 요한에게 가신다. 그는 창조주요 구세주 이시지만 사람에게 세례를 받으신다. 겸손의 왕이자 자비의 주님이시다. 갈릴리는 변방이요 이방의 땅이다. 예수님은 친히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가장 천하고 버려진 곳으로 가셨다.

요한이 말려 이르되

요한은 너무 놀라 이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서열상 자신이 낮기에 도무지 할 수 없다 말한다. 하지만 주님은 이렇게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라 말씀하신다. 그렇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일이다.

하늘이 열리고

하늘은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다. 죄를 지으면 하늘이 닫혀 비가 내리지 않는다. 은혜가 닫힌 것이다. 하늘이 열리면 비가 내린다. 은혜의 비다. 이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

  • 창세기 7:11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 에스겔 1: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 말라기 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이제 모든 것이 준비 되었다. 예수님은 왕으로서 사역을 시작할 준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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