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의 식탁과 풍랑의 바다 위에 서신 긍휼의 왕
마태복음 14장은 하나님 나라의 왕이 어떤 분이신지를 세 장면으로 보여 줍니다. 헤롯의 궁정에서는 하나님의 선지자가 죽임을 당하고, 광야에서는 주님이 굶주린 무리를 먹이시며, 밤바다에서는 제자들이 두려움 가운데 주님을 만납니다. 이 장의 중심 명제는 분명합니다. 세상의 권세는 두려움과 욕망으로 의인을 죽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긍휼과 주권으로 자기 백성을 먹이시고 지키시는 참된 왕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불의한 세상과 흔들리는 현실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통치를 믿고, 그분께 순종하며,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예배해야 합니다.
두려움의 왕궁에서 드러난 죄의 권세와 선지자의 증언(마 14:1-12)
마태복음 14장은 “그 때에 분봉 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여기서 헤롯은 헤롯 대왕이 아니라 갈릴리와 베뢰아 지역을 다스리던 헤롯 안티파스로 이해됩니다. 개역개정의 “분봉 왕”은 헬라어 테트라아르케스(τετραάρχης, 테트라아르케스)로, 본래 한 지역의 네 분의 일 통치자를 뜻하지만 당시에는 로마의 승인 아래 제한된 권력을 행사하는 지방 통치자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습니다. 그는 왕처럼 보였지만 참된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권세는 로마의 허락 위에 있었고,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헤롯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신하들에게 말합니다. “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도다.” 그의 말은 신앙고백이 아니라 불안한 양심의 소리입니다. 그는 요한을 죽였고, 그 죽음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묻어 둔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 양심은 시간이 지나도 완전히 잠들지 않습니다. 헤롯은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메시아를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죽인 요한을 떠올렸습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도 자기 두려움의 그림자 속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마태는 이제 세례 요한의 죽음을 회상 형식으로 설명합니다. 헤롯이 그의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에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습니다. 요한이 “당신이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이 옳지 않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옳지 않다”는 말은 단순한 개인 의견이 아닙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왕의 죄를 지적했습니다. 선지자는 권세자에게 아첨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왕도 백성도 함께 세우는 사람입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백성에게 회개를 외쳤고, 궁정 앞에서도 같은 말씀을 증언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가난한 사람에게만 엄격하고 권력자에게는 침묵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요한의 증언은 불편했습니다. 헤롯은 요한을 죽이려 했지만 무리를 두려워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두려워하다”와 관련된 헬라어 포베오마이(φοβέομαι, 포베오마이)는 공포나 경외, 혹은 사람을 의식하는 두려움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헤롯의 문제는 두려움이 없다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했고, 진리보다 체면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죄는 사람을 대담하게 만드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깊은 두려움의 종으로 만듭니다.
헤롯의 생일 잔치에서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했습니다. 헤롯은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합니다. 왕궁의 잔치는 화려했지만 그 안에는 욕망과 허세와 경솔한 맹세가 가득했습니다. 맹세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을 세우기 위한 것이어야 하지만, 죄인의 입에서는 자기 체면을 붙들기 위한 올무가 될 수 있습니다. 헤롯은 자기 말의 무게를 감당할 의로움이 없었습니다. 그는 왕의 옷을 입고 있었지만 자기 욕망과 사람들의 시선에 끌려가는 노예였습니다.
헤로디아의 딸은 어머니의 지시를 받아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여기서 내게 주소서”라고 요구합니다. 이 장면은 매우 어둡습니다. 생일 잔치, 춤, 맹세, 소반이라는 일상적이고 화려한 요소들이 의인의 피와 결합됩니다. 마태는 이 잔혹함을 과장된 감정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절제된 문장으로 죄의 무서움을 보여 줍니다. 죄는 때로 광기처럼 폭발하지만, 때로는 잔치의 절차와 왕궁의 예법 속에서 차갑게 실행됩니다.
왕은 근심했지만 자기 맹세와 함께 앉은 사람들 때문에 주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헤롯의 근심은 회개가 아닙니다. 참된 회개는 죄의 실행을 멈추고 하나님께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헤롯은 근심하면서도 죄를 행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비참함입니다. 죄가 나쁜 줄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고, 말씀을 들으면서도 자기 체면을 선택하며, 양심의 경고를 받으면서도 사람들의 평가를 더 두려워합니다. 개혁주의가 말하는 인간의 전적 부패는 사람이 언제나 가능한 한 최악의 행동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가 인간의 지성, 감정, 의지, 관계, 권력 사용 전체를 왜곡하여 하나님께 순종할 능력과 뜻을 잃게 한다는 뜻입니다. 헤롯은 바로 그 왜곡된 인간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요한은 옥에서 목 베임을 당합니다. 그의 머리는 소반에 얹혀 소녀에게 주어지고, 소녀는 그것을 어머니에게 가져갑니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세상의 잔치에서 이렇게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 죽음이 하나님의 실패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요한의 죽음은 세상 권세의 폭력성을 드러내고, 동시에 예수님의 길을 어둡게 예고합니다. 요한은 메시아가 아닙니다. 요한의 죽음을 예수님의 죽음과 세부적으로 무리하게 동일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흐름에서 의로운 선지자가 악한 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사건은, 장차 의로우신 그리스도께서 불의한 재판과 조롱 속에서 십자가로 가실 길을 독자에게 생각하게 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예수께 알립니다. 이 마지막 장면은 조용하지만 깊습니다. 제자들은 스승의 시신을 거두었습니다. 악한 권세는 선지자의 목소리를 끊은 듯 보였지만, 그의 증언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 있었고, 그의 죽음은 헤롯의 궁정이 얼마나 어두운지를 드러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에서 항상 안전하게 보호받는 방식으로만 인도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증인을 잊지 않으십니다. 순교와 고난은 하나님이 무력하시다는 증거가 아니라, 죄악의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타협하지 않고 증언된다는 표지입니다.
이 단락은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두려워합니까. 하나님입니까, 사람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지키려고 합니까. 진리입니까, 체면입니까. 헤롯의 궁정은 멀리 있는 정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 안에도 작은 왕궁이 있습니다. 그 안에서 욕망이 춤추고, 체면이 맹세하며, 양심이 근심하면서도 진리를 침묵시킬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처럼 담대해야 한다는 도덕적 결심만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헤롯의 두려움을 이길 더 큰 왕이 필요합니다. 사람의 평가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귀히 여기게 하시는 은혜, 죄를 근심만 하다가 실행하지 않고 진정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빈 들에서 자기 백성을 먹이시는 긍휼의 왕(마 14:13-21)
예수님은 요한의 죽음 소식을 들으시고 배를 타고 따로 빈 들에 가십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내면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어떤 감정으로 물러가셨는지를 지나치게 상상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마태는 예수님이 홀로 계시려는 자리로 물러가셨다는 것과, 무리가 그 소식을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헤롯의 궁정에서는 죽음의 잔치가 벌어졌고, 이제 빈 들에서는 생명의 식탁이 펼쳐집니다. 이 두 장면은 강하게 대조됩니다.
예수님은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십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기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 스플랑크니조마이)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움직이는 긍휼을 뜻합니다. 단순한 동정이나 순간적 감상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긍휼은 행동하는 긍휼입니다. 그분은 무리를 보시고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병든 자들을 고치십니다. 세상의 권세자는 자기 잔치와 체면을 지키기 위해 의인을 죽이지만, 참 왕이신 예수님은 굶주리고 병든 무리를 보시고 생명을 베푸십니다.
저녁이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말합니다.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제자들의 말은 현실적으로 보입니다. 빈 들에는 먹을 것이 없고, 시간은 늦었습니다. 그들은 문제를 정확히 보았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는 아직 충분히 보지 못했습니다. 현실 인식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현실 인식이 주님의 능력을 계산 밖에 두면 믿음은 쉽게 인간적 합리성 안에 갇힙니다.
예수님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을 난처하게 하시는 말이 아니라, 그들을 하나님 나라의 사역 안으로 참여시키시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뿐”이라는 말 속에 인간의 한계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 “뿐”은 끝이 아닙니다. 주님의 손에 올려질 때, 우리의 부족함은 은혜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작은 헌신이 하나님의 능력을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부족한 것을 사용하셔서 자신의 풍성함을 드러내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신앙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부족한 것을 감추지 않고 주님께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충분해진 뒤에야 주님께 쓰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족한 그대로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다섯 개와 두 마리는 무리를 먹이기에 턱없이 부족했지만, 주님께 가져온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제자들의 계산 안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권능과 긍휼 안에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십니다. 그리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시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십니다. “축사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율로게오(εὐλογέω, 율로게오)는 복을 빌거나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뜻을 가집니다.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께 감사와 찬송의 자세로 음식을 받으십니다. 그분의 능력은 아버지와 분리된 독자적 과시가 아닙니다. 성자께서는 아버지의 뜻 안에서 자기 백성을 먹이십니다. 삼위 하나님의 구원 경륜 안에서 예수님의 사역은 언제나 아버지께 대한 순종과 신뢰 속에 있습니다.
주님은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고, 제자들은 무리에게 줍니다. 여기서 ‘떡’은 헬라어 아르토스(ἄρτος, 아르토스)입니다. 본문은 이 사건을 단순한 상징으로만 축소하지 않습니다. 실제 굶주림이 있었고, 실제 먹이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동시에 더 깊은 성경적 울림을 가집니다.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주셨던 일이 떠오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 적은 음식으로 많은 사람이 먹었던 사건들도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순히 옛 선지자들 중 하나가 아닙니다. 그분은 광야에서 자기 백성을 먹이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능력을 몸소 드러내시는 왕입니다.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습니다.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남자만 오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마태는 숫자를 통해 사건의 풍성함을 강조합니다. “배불리” 먹었다는 말은 겨우 허기를 면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의 공급은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남은 조각 열두 바구니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떠올리게 할 수 있으며, 적어도 하나님 나라의 공급이 결핍이 아니라 충만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계산보다 크시고, 결핍보다 풍성하십니다.
이 사건을 단순히 “나눔의 기적”으로만 해석하면 본문의 중심이 흐려집니다. 물론 제자들이 가진 것을 주님께 가져왔고, 주님은 그것을 통해 무리를 먹이셨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주체는 제자들의 나눔 정신이 아니라 예수님의 긍휼과 능력입니다. 복음은 인간의 선한 마음을 확대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무능한 인간 가운데 오신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먹이시는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은 분배자로 쓰임 받았지만, 떡의 근원은 주님께 있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생명의 떡을 만들어 내는 기관이 아닙니다. 주님께 받은 것을 나누는 공동체입니다.
이 장면은 성찬의 언어를 직접 제정하는 본문은 아니지만, 마태복음 전체의 흐름에서 예수님이 떡을 가지시고 축사하시고 떼어 주시는 모습은 장차 마지막 만찬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성급하게 이 본문을 성찬 제정으로 동일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 자체가 먼저 말하는 것은 광야의 무리를 향한 예수님의 긍휼과 왕적 공급입니다. 다만 정경적·구속사적으로 보면, 자기 백성을 먹이시는 예수님의 사역은 결국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내어 주시는 구원의 절정으로 나아갑니다. 그분은 떡을 주시는 분일 뿐 아니라, 생명의 떡이 되시는 분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도 빈 들이 있습니다. 시간이 저물고, 가진 것은 적고, 사람들의 필요는 커 보이는 자리입니다. 가정의 빈 들, 교회의 빈 들, 마음의 빈 들, 사역의 빈 들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제자들처럼 “여기 있는 것은 이것뿐입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부족을 모르고 명령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부족함을 아시면서도 “내게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믿음은 부족함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함을 주님의 손에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자기 백성을 먹이시는 방식으로 우리의 계산을 넘어서는 은혜를 드러내십니다.
풍랑 위를 걸으시는 하나님의 아들 앞에서 배우는 믿음과 예배(마 14:22-36)
예수님은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그동안 무리를 보내십니다. 그리고 무리를 보내신 뒤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십니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셨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큰 사건 뒤에 예수님은 사람들의 열광 속에 머물지 않으시고 아버지 앞에 홀로 서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이 군중의 반응에 의해 움직이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사람들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으시지만, 사람들의 기대에 붙잡히지도 않으십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 안에서 사역하십니다.
한편 배는 이미 육지에서 멀리 떠나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합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명령을 따라 배를 탔습니다. 그런데 순종의 길에도 풍랑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도의 고난을 무조건 불순종의 결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재촉받아 배에 올랐고, 그 길에서 바람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순종의 길도 때로 어둡고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내신 길이라면, 주님은 그 풍랑 속에서도 자기 백성을 잊지 않으십니다.
밤 사경에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밤 사경은 새벽 깊은 시간대를 가리킵니다. 가장 어둡고 지친 때, 제자들이 바람과 물결에 시달릴 때 주님이 오십니다. 바다는 성경에서 종종 혼돈과 두려움의 이미지로 나타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바다를 다스리시는 창조주로 계시됩니다.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으시는 장면은 그분이 단순한 선생이나 기적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창조 질서를 다스리시는 주권자이심을 드러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즉시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여기서 “안심하라”는 말은 헬라어 다르세이테(θαρσεῖτε, 다르세이테)로, 용기를 내라는 뜻입니다. “나니”는 헬라어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 에고 에이미)입니다. 이 표현은 문맥에 따라 단순히 “나다”라는 자기 확인의 뜻으로 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다 위에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주시는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임재와 주권을 깊이 떠올리게 합니다. 주님은 풍랑을 설명하기보다 먼저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믿음은 풍랑의 원인을 다 아는 데서 시작되지 않고, 풍랑 속에 오시는 주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데서 시작됩니다.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베드로의 말은 믿음과 연약함이 함께 섞인 모습으로 보입니다. 그는 주님께 나아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만일”이라는 표현 속에는 아직 흔들림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라”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갑니다.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스스로 용감해서 물 위를 걸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걸었다는 점입니다. 믿음은 자기 확신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갑니다. 그는 소리 질러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합니다. 이 짧은 기도는 신앙의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구원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소조(σῴζω, 소조)는 위험에서 건지다, 구원하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긴 설명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믿음이 약해질 때도 성도에게 남아야 할 것은 주님께 부르짖는 방향입니다. 물에 빠지는 순간에도 주님을 향해 외치는 사람은 버려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십니다. 그리고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하십니다. “믿음이 작은 자”는 헬라어 올리고피스토스(ὀλιγόπιστος, 올리고피스토스)로, 믿음이 전혀 없는 자가 아니라 믿음이 작고 흔들리는 자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책망은 베드로를 버리기 위한 정죄가 아닙니다. 그를 붙잡으신 뒤 주시는 회복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먼저 손을 내미시고, 그 다음 믿음의 연약함을 다루십니다. 이것이 은혜의 질서입니다. 주님은 물에 빠진 제자를 설교로만 건지지 않으십니다. 손으로 붙잡으시고, 말씀으로 믿음을 세우십니다.
예수님과 베드로가 배에 함께 오르자 바람이 그칩니다.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말합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여기서 “절하다”는 헬라어 프로스퀴네오(προσκυνέω, 프로스퀴네오)로, 경배하거나 엎드려 존경을 나타내는 행위를 뜻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이 고백은 매우 중요합니다. 제자들은 떡을 먹은 무리처럼 배부름만 경험한 것이 아니라, 풍랑 속에서 예수님의 신적 권위를 보고 예배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하나님 나라의 목적은 단지 우리의 필요가 채워지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필요와 두려움의 자리에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그분을 예배하는 데 있습니다.
그들이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릅니다. 그곳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려옵니다. 그리고 다만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습니다. “옷자락”은 헬라어 크라스페돈(κράσπεδον, 크라스페돈)으로, 옷의 가장자리나 술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의 권능이 얼마나 풍성하게 흘러나가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핵심은 옷자락 자체의 마술적 효능이 아닙니다. 병든 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왔고, 주님은 그들을 고치셨습니다. 믿음은 물건에 능력이 있다고 붙드는 미신이 아니라, 예수님께 긍휼과 권능이 있음을 알고 그분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단락은 광야의 식탁과 바다의 풍랑을 하나로 묶습니다. 예수님은 빈 들에서 무리를 먹이시는 왕이시고, 바다 위에서 제자들을 찾아오시는 주님이시며, 게네사렛에서 병든 자를 고치시는 긍휼의 구주이십니다. 그분의 통치는 궁정의 권력처럼 두려움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분의 권위는 생명을 살리고, 연약한 믿음을 붙들며, 병든 자를 회복시키는 권위입니다. 그리고 그 권위의 절정은 십자가에서 드러납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을 먹이시기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시고, 죄와 죽음의 깊은 바다 속으로 들어가셨다가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참된 구원으로 건져 내셨습니다.
오늘 성도는 풍랑 없는 삶을 약속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말씀을 따라 배에 올랐는데도 바람이 거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풍랑을 최종 현실로 보지 않습니다. 풍랑 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을 봅니다. 때로 우리는 베드로처럼 주님을 바라보다가도 바람을 보고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작아지고 의심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손은 우리의 믿음이 충분히 강해진 뒤에야 내밀어지는 손이 아닙니다. 빠져 가는 자를 즉시 붙잡으시는 은혜의 손입니다.
결론
마태복음 14장은 세상의 왕과 하나님 나라의 왕을 대조합니다. 헤롯은 두려움과 욕망에 사로잡혀 의로운 선지자를 죽였지만, 예수님은 긍휼로 병든 자를 고치시고 빈 들의 무리를 먹이셨으며 풍랑 속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세상 권세는 잔치 자리에서도 죽음을 만들지만, 그리스도는 빈 들에서도 생명의 식탁을 여십니다. 제자들은 부족한 떡과 물고기 앞에서 한계를 보았고, 밤바다에서는 바람을 보고 두려워했지만, 주님은 그 한계와 두려움 속에서 자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내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의 시선과 체면을 두려워하는 헤롯의 길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부족한 것을 주님께 가져가고, 풍랑 속에서도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작아 흔들릴 때에도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부르짖으십시오. 주님은 상한 자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굶주린 자를 먹이시며, 빠져 가는 제자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오늘도 그리스도의 긍휼과 주권을 신뢰하며, 두려움이 아니라 예배로 주님께 응답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