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암나귀를 통해 왕을 찾으시는 하나님
사무엘상 9장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게 되는 과정을 기록합니다. 사울은 왕이 되기 위해 길을 떠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는 평범한 사건과 작은 만남을 연결하여 사울을 사무엘에게 이끄셨습니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상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며, 인간의 불완전한 요구 속에서도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고 구원의 도구를 준비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기 원합니다.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는 길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었습니다(삼상 9:1-10)
사무엘상 8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나라들처럼 자신들을 다스리고 전쟁을 수행할 왕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에게 공정한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는 정당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늙었고 그의 아들들은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으며 재판을 굽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과 때를 기다리지 않고 눈에 보이는 왕과 군사력을 의지하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요구가 사무엘을 거절한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행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백성의 요구를 허락하시고 왕을 세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사무엘상 9장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될 사람의 가문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베냐민 지파에 기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계보는 아비엘과 스롤과 베고랏과 아비아로 이어집니다. 성경은 사울의 출현이 막연한 전설이 아니라 구체적인 지파와 가문 안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임을 보여 줍니다.
기스는 “유력한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히브리어 깁보르 하일(גִּבּוֹר חָיִל)은 용맹한 전사, 능력 있는 사람 또는 재산과 사회적 영향력을 갖춘 사람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문맥상 기스가 베냐민 지파 안에서 상당한 지위와 재산을 가진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기스에게 사울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사울’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샤울(שָׁאוּל)이며 ‘구하여 얻은 자’ 또는 ‘요청된 자’라는 의미와 연결됩니다. 이 이름은 왕을 요청한 이스라엘의 상황과 묘한 울림을 이룹니다. 백성이 구한 왕이 이제 역사 속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준수한 소년이었습니다. 개역개정의 ‘소년’이라는 표현은 반드시 어린 나이를 뜻하지 않고 젊은 남자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사울은 이미 아버지의 중요한 일을 맡아 먼 지역을 다닐 수 있는 성인이었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울보다 더 준수한 사람이 없었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다고 말합니다. 사울은 외모와 체격에서 사람들의 눈을 끌 만한 인물이었습니다. 다른 나라처럼 강한 왕을 원한 이스라엘 백성의 기대에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습니다.
사울의 뛰어난 외모가 곧 잘못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건강한 체격과 준수한 용모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인간이 외적인 조건만으로 지도자의 내면과 신앙을 판단하는 데 있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키와 용모가 먼저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십니다.
사무엘상은 이후 사울과 다윗을 대조하면서 외모와 중심의 문제를 더욱 분명히 드러냅니다. 사무엘도 이새의 아들 엘리압의 키와 외모를 보고 그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왕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여호와는 중심을 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무엘상 9장은 아직 사울의 실패를 서둘러 보여 주지 않습니다. 그가 이 시점부터 교만하고 악한 사람이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사울의 장점과 순종, 겸손한 반응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우리는 이후의 실패를 알고 있다는 이유로 현재 본문이 말하는 모습을 왜곡해서는 안 됩니다.
어느 날 사울의 아버지 기스가 암나귀들을 잃어버렸습니다. 암나귀는 농사와 운송에 사용되는 중요한 재산이었습니다. 여러 마리의 암나귀를 잃어버린 것은 가정 경제에 적지 않은 손실이었을 것입니다. 기스는 아들 사울에게 종 한 명을 데리고 가서 암나귀들을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을 세우는 과정이 왕궁이나 전쟁터가 아니라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사울은 왕권을 얻기 위해 정치적 계획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여 집안의 재산을 찾으러 길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종종 매우 평범한 일 속에서 움직입니다. 우리는 기적적이고 특별한 사건에서만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일상의 책임과 우연처럼 보이는 만남을 사용하여 자신의 계획을 이루십니다. 잃어버린 암나귀도 하나님의 통치 밖에 있지 않았습니다.
개혁주의 신앙은 하나님의 섭리가 크고 중요한 사건에만 미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작은 피조물과 일상의 움직임까지 자신의 지혜롭고 거룩한 뜻에 따라 보존하고 다스리십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 아버지의 허락 없이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암나귀가 사라진 일 자체가 선하거나 편안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기스에게는 경제적 손실이었고 사울에게는 여러 지역을 헤매야 하는 수고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불편하고 예상하지 못한 일을 사용하여 사울을 사무엘에게 인도하셨습니다.
우리는 계획이 어그러지거나 잃어버리는 일이 생기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막힌 길과 지연, 손실과 수고도 선하신 목적을 위해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현재의 불편함만 보고 하나님의 섭리 전체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사울과 종은 에브라임 산지와 살리사 땅, 사알림 땅과 베냐민 사람의 땅을 두루 다녔습니다. 정확한 지명들의 위치에는 논의가 있지만, 그들이 상당한 지역을 부지런히 찾아다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사울은 아버지의 명령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러 지역을 다녔지만 암나귀를 찾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사무엘에게 인도하시면서 그 목적을 처음부터 알려 주지 않으셨습니다. 사울에게 보인 것은 계속되는 실패뿐이었습니다. 한 지역에서 찾지 못하면 다른 지역으로 가고, 그곳에서도 찾지 못하면 다시 이동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당사자에게 즉시 설명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일이 끝난 뒤에야 왜 그 길을 지나야 했는지 깨닫기도 합니다. 믿음은 모든 이유를 미리 아는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현재 맡겨진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사울과 종이 숩 땅에 이르렀을 때 사울은 돌아가자고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암나귀에 대한 걱정보다 자신들을 염려할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잃어버린 재산만 생각하지 않고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렸습니다.
이 장면에서 사울은 무책임하거나 이기적인 사람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성실하게 암나귀를 찾았고, 시간이 오래 걸리자 아버지가 자신들을 걱정할 것을 염려했습니다. 사울의 초기 모습에는 부모에 대한 순종과 책임감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함께 있던 종이 새로운 제안을 합니다. 가까운 성읍에 존경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있으며 그가 말하는 것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알려 줍니다. 그에게 가면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알려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사울보다 종이 그 지역의 하나님의 사람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본문은 사울이 사무엘을 전혀 몰랐는지, 단지 그 성읍에 사는 선견자가 사무엘인 줄 몰랐는지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울에게 신앙적 관심이 전혀 없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이 장면에서는 사회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던 종이 사울에게 올바른 방향을 제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인보다 종을 먼저 깨닫게 하여 길을 안내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지위와 신분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거나 지위가 낮은 사람의 말을 가볍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상하지 못한 사람을 통해 필요한 조언을 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말했는가만이 아니라 그 말이 진실하고 지혜로운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갈 때 드릴 예물이 없다고 염려했습니다. 당시 선지자나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갈 때 감사와 존중의 표시로 작은 선물을 준비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돈을 주고 예언을 사는 행위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사울은 그릇에 있던 음식도 다 떨어졌으므로 무엇을 드려야 할지 걱정했습니다. 그러자 종은 자신에게 은 한 세겔의 사분의 일이 있으니 그것을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리자고 말했습니다. 종은 돈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돈을 사울을 돕는 일에 기꺼이 사용하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이 가진 작은 은 조각도 섭리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에는 눈에 띄는 큰 자원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준비한 작은 물질과 사려 깊은 제안이 역사의 방향을 바꾸는 일에 사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진 것이 적어서 하나님의 일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적은 물질과 작은 친절, 평범한 조언도 선한 목적에 사용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크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시는가입니다.
본문은 옛날 이스라엘에서 하나님께 물으러 가는 사람이 “선견자에게로 가자”고 말했다고 설명합니다. 지금 선지자라고 부르는 사람을 옛날에는 선견자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선견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로에(רֹאֶה)는 ‘보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것을 보고 백성에게 전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선지자’에 해당하는 나비(נָבִי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선견자와 선지자는 완전히 다른 직분이라기보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전달하는 사역의 서로 다른 측면을 보여 줍니다. 선견자는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것을 보고,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전합니다.
사울은 종의 제안을 좋게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 성읍으로 향했습니다. 그는 종의 조언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왕으로 세워지는 길에는 아버지의 명령에 대한 순종과 종의 지혜로운 제안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우리의 책임 있는 행동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사울은 암나귀를 찾으러 실제로 걸었고, 여러 지역을 수고롭게 다녔으며, 종의 조언을 듣고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교리가 아니라 맡겨진 일을 성실히 감당하게 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보다 먼저 사무엘에게 모든 일을 알리셨습니다(삼상 9:11-17)
사울과 종은 성읍으로 올라가는 비탈길에서 물을 길으러 나오는 소녀들을 만났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성읍 밖의 샘이나 우물로 물을 길으러 가는 일은 주로 여성들이 맡았습니다. 사울은 그들에게 선견자가 그곳에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소녀들은 선견자가 성읍에 있으며 마침 오늘 그곳에 왔다고 대답했습니다. 백성이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기 때문에 사무엘이 성읍에 온 것입니다. 사울이 도착한 날과 사무엘이 제사를 위해 그곳에 온 날이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그들은 사울에게 서둘러 들어가면 사무엘을 만날 수 있다고 알려 줍니다. 사무엘이 산당으로 식사하러 올라가기 전에 성읍 안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백성은 사무엘이 제물을 축복한 뒤에야 식사를 시작할 것이므로 지금 가면 늦지 않을 것이라고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사울이 암나귀를 찾지 못한 일, 종이 하나님의 사람을 떠올린 일, 은 한 조각을 가지고 있었던 일, 사무엘이 바로 그날 성읍에 온 일, 물을 길으러 나온 소녀들을 적절한 순간에 만난 일이 하나로 연결됩니다. 어느 하나만 어긋났어도 사울은 사무엘을 만나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우연이 연속된 것처럼 보이지만 본문은 그 배후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인 표적만으로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평범한 사람과 자연스러운 대화, 시간과 장소의 일치를 통해서도 뜻을 이루십니다.
소녀들은 이스라엘 왕정의 시작을 자신들이 안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길을 묻는 여행자에게 아는 내용을 알려 주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평범한 친절이 사울을 사무엘에게 연결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역사적인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우리를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길을 알려 주는 한마디, 필요한 정보를 나누는 일, 낯선 사람에게 베푸는 작은 친절이 누군가의 삶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습니다.
성읍의 산당은 예배와 제사를 위해 사용되던 높은 장소였습니다. 후대의 열왕기에서는 산당이 우상 숭배나 잘못된 예배와 연결되어 자주 책망받습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는 실로의 중심 성소가 이전의 역할을 잃은 상태였고 사무엘이 직접 제사를 주관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 산당의 제사를 죄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후대에 정죄받은 모든 산당 예배와 동일하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의 사건은 각각의 역사적·언약적 상황 안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사울과 종이 성읍으로 들어갈 때 사무엘이 산당으로 올라가려고 그들을 향해 나오고 있었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을 찾고 있었지만 사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사울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사울이 우연히 하나님의 사람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만남을 준비하셨습니다.
본문은 전날 여호와께서 사무엘의 귀에 알리셨다고 말합니다. “귀에 알리다”는 히브리어 표현은 문자적으로 귀를 열거나 드러낸다는 뜻을 가집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감추어진 뜻을 계시하시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음 날 이때쯤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보내실 것이며, 사무엘이 그에게 기름을 부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은 암나귀를 찾는 자신의 결정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내가 한 사람을 네게 보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계획과 하나님의 섭리는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사울은 자발적으로 아버지의 명령을 따랐고 종의 제안을 받아들여 성읍으로 왔습니다. 동시에 그 모든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사울을 사무엘에게 보내셨습니다.
섭리 신앙은 인간의 선택이 가짜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욕망에 따라 실제로 선택하며 그 선택에 책임을 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선택과 여러 사건을 넘어 자신의 뜻을 정확하게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지도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기드(נָגִיד)는 앞에 선 자, 통치자 또는 지도자를 뜻합니다. 여기서는 왕으로 세워질 사람을 가리키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절대적인 소유자가 아니라 백성을 맡아 다스릴 지도자로 부르십니다.
이스라엘은 사울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왕은 백성을 자기 소유처럼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맡아 말씀에 따라 돌보는 청지기입니다. 인간 지도자의 권위는 하나님에게서 위임받은 것이므로 하나님의 말씀 아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자기 백성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샤(יָשַׁע)는 위험과 압제에서 건지다는 뜻입니다. 사울이 왕으로 세워지는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블레셋의 위협에서 이스라엘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무엘상 8장에서 백성은 자신들을 위해 전쟁할 왕을 요구했습니다. 그 요구에는 하나님을 왕으로 신뢰하지 않는 죄악 된 동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그들을 블레셋의 손에서 건질 지도자를 준비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죄가 하나님의 긍휼을 완전히 막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잘못된 동기로 왕을 요구한 백성을 즉시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고통을 보시고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심판 가운데서도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되었으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돌보다’는 표현은 단순히 바라본다는 뜻이 아니라 고통에 관심을 가지고 구원하기 위해 행동하신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이스라엘은 왕을 요구하며 하나님을 버렸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여전히 “내 백성”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들의 죄를 인정하면서도 언약적 관계를 완전히 끊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자기 백성을 버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닫고 돌아오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언약에 신실하십니다. 이것이 죄를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긍휼을 깨달을수록 더욱 깊이 회개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보았을 때 여호와께서 “보라 이는 내가 네게 말한 사람이니 이가 내 백성을 다스리리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의 키와 외모만 보고 그를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계시하셨기 때문에 사울이 선택된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적인 조건에 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의 외적인 장점도 사용하셨지만 그 외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하신 것은 아닙니다. 선택의 궁극적인 근거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사울을 선택하셨다는 사실과 이후 사울이 불순종하여 버림받는 사건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역사적 왕으로 세움을 받아 특별한 직무와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왕으로 선택되었다는 직무적 은혜가 그의 개인적인 구원이나 끝까지의 순종을 자동으로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직분을 맡기신 사람도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은사와 직분, 특별한 기회는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그것을 충실하게 사용해야 할 책임이 따릅니다. 과거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험했다는 사실만으로 현재의 불순종이 정당화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 왕의 자리에 오를 수 없습니다(삼상 9:18-27)
사울은 성문 안에서 사무엘에게 다가가 선견자의 집이 어디인지 물었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찾던 사람이 바로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사무엘은 자신이 선견자라고 밝히고 사울에게 앞서 산당으로 올라가라고 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과 종이 그날 자신과 함께 먹을 것이며, 아침에는 사울의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알려 주고 보내겠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사울의 마음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본문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왕정에 관한 생각인지, 암나귀와 아버지에 대한 염려인지, 그의 미래에 관한 문제인지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사흘 전에 잃어버린 암나귀들을 염려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미 찾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아직 그 소식을 듣지 못했지만 사무엘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알고 있었습니다.
사울이 사무엘을 찾아온 표면적인 이유는 암나귀의 행방을 묻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작은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동시에 사울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더 큰 사명을 알리려 하셨습니다. 사울은 암나귀를 찾으러 왔지만 왕권에 관한 말씀을 듣게 됩니다.
우리는 눈앞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나님께 나아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문제보다 더 깊은 뜻을 보여 주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상황의 변화를 구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부르시고 새로운 책임을 맡기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일상의 문제 뒤에 반드시 특별하고 거대한 사명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울의 사건은 구속사의 특별한 전환점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시야보다 넓은 뜻을 가지고 일하신다는 원리는 기억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은 이어서 “온 이스라엘이 사모하는 자가 누구냐 너와 네 아버지의 온 집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이스라엘의 관심과 기대가 장차 사울과 그의 가문에 향할 것임을 암시합니다. 백성이 요청한 왕의 자리에 사울이 세워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울은 자신이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인 베냐민 사람이며, 자신의 가족도 베냐민 지파의 모든 가족 가운데 가장 미약한데 왜 그런 말을 하느냐고 대답했습니다. 베냐민 지파는 사사기 마지막 부분에서 벌어진 내전으로 거의 소멸할 뻔한 지파였습니다. 다른 지파보다 수가 적고 정치적 영향력도 약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가문은 앞에서 유력한 가문으로 소개되었습니다. 따라서 “가장 미약하다”는 그의 말이 객관적인 경제 상황을 정확히 설명하는지, 겸손과 놀라움에서 나온 관습적인 표현인지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분명한 것은 사울이 사무엘의 말을 듣고 즉시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사울은 자신이 왕이 될 만한 사람이라고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자신과 가문의 작음을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 태도는 중요합니다. 참으로 하나님께 부름받은 사람은 직분을 자기 능력을 증명하는 기회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처음의 겸손이 끝까지 유지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사람은 작은 자리에 있을 때 겸손해 보이지만 권력과 성공을 얻은 뒤에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분을 맡기실 때의 낮은 마음을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사무엘은 사울과 그의 종을 객실로 인도했습니다. 그곳에는 약 삼십 명의 초대받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과 종에게 가장 높은 자리를 주었습니다. 사울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사람들 앞에 특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높은 자리는 사울이 스스로 차지한 것이 아니라 사무엘이 마련해 준 자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왕권을 주시는 것도 그가 경쟁하여 빼앗은 결과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맡기시는 직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리는 자랑의 근거가 아니라 책임의 자리입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얻었다고 생각하면 사람 위에 군림하지만 하나님께서 맡기셨다고 믿으면 두려움으로 섬기게 됩니다. 높은 자리에 앉을수록 더 깊이 자신을 낮춰야 합니다.
사무엘은 요리인에게 미리 맡겨 두었던 특별한 부분을 가져오라고 말했습니다. 요리인은 넓적다리와 거기에 붙은 것을 가져다가 사울 앞에 놓았습니다. 제사 음식에서 넓적다리는 특별한 몫으로 여겨질 수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이 오기 전부터 그의 자리를 준비하고 음식을 따로 남겨 두었습니다.
사울에게는 모든 일이 갑작스럽게 일어난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과 사무엘에게는 이미 준비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도착하기 전날 사무엘에게 그를 보낼 것을 말씀하셨고, 사무엘은 식탁의 자리와 음식까지 준비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처음 발견하는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깨달음이 하나님의 계획의 시작은 아닙니다. 우리가 알기 전에 하나님께서 알고 계셨고,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필요한 자리를 준비하셨습니다.
사무엘은 그날 사울과 함께 먹었습니다. 식탁의 교제는 단순히 배를 채우는 행위가 아니라 환대와 관계, 인정의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사울은 왕으로 공개적으로 세워지기 전에 사무엘의 식탁에서 존중받고 앞으로의 말씀을 들을 준비를 했습니다.
그들이 산당에서 내려와 성읍에 들어간 뒤 사무엘은 지붕 위에서 사울과 대화했습니다. 당시 평평한 지붕은 조용히 쉬거나 대화하고 잠을 자는 공간으로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본문의 세부적인 문장 형태와 일부 고대 번역에는 차이가 있지만, 사무엘과 사울이 사람들의 소란에서 벗어나 중요한 대화를 나누었다는 흐름은 분명합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말을 했는지는 기록되지 않습니다. 본문이 말하지 않는 대화의 내용을 상상하여 사실처럼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다음 날 사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고 기름을 붓기 위한 준비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새벽이 되었을 때 사무엘은 지붕 위의 사울을 불러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을 성읍 밖까지 배웅했습니다. 성읍 끝에 이르렀을 때에는 종을 앞서 보내라고 말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네게 들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울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기 전에 먼저 들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권은 인간이 임의로 행사하는 절대 권력이 아닙니다. 왕은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서 백성을 다스려야 합니다. 왕보다 말씀이 먼저이며 왕의 권위보다 하나님의 권위가 높습니다.
사울의 외모와 체격은 백성의 눈을 끌 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왕이 될 수는 없습니다. 사무엘의 기름부음과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했습니다. 왕의 정당성은 외적인 조건이나 대중의 환호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과 말씀에 대한 순종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지도자도 말씀 위에 설 수 없습니다. 목회자와 장로, 교사는 자신의 경험과 권위로 교회를 다스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 아래에서 공동체를 섬겨야 합니다. 말씀을 듣지 않는 지도자가 능력과 영향력만으로 사람을 이끌면 결국 공동체를 자기 뜻에 종속시킬 수 있습니다.
모든 성도 역시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멈추어 서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과 감정에 따라 서둘러 움직이기 전에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계획을 승인하는 장식이 아니라 계획과 욕망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사울의 기름부음은 다음 장에서 이루어집니다. 사무엘상 9장은 사울이 왕관을 쓰는 장면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서 있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이것이 왕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자세였습니다.
사울의 미래도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선택하고 기름을 부으시며 성령으로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받은 은혜에 믿음과 순종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책임은 서로 대립하지 않습니다. 사울이 왕으로 세워지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이지만, 왕으로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사울에게 맡겨진 실제적인 책임입니다. 은혜는 순종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순종할 수 있는 자리로 부릅니다.
사울은 블레셋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지도자로 세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구원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후 그의 불순종과 몰락은 인간 왕의 한계를 보여 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 이후 다윗을 세우시고 그의 왕조를 통해 영원한 왕에 대한 약속을 주십니다. 그 약속은 마침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됩니다.
사울은 뛰어난 외모와 큰 키를 가진 왕이었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이 흠모할 만한 외적인 모양으로 왕권을 얻으신 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자신을 낮추셨으며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사울은 백성을 블레셋의 손에서 일시적으로 구원할 지도자로 세워졌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영원히 구원하십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왕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말씀을 완전히 순종하신 왕이며 육신이 되신 영원한 말씀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불완전한 요구 속에서도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사울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 왕들의 실패를 넘어 완전한 왕이신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어떤 인간 지도자의 외모와 능력에 있지 않고 자기 생명을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무엘상 9장은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세밀하고 신실한지를 보여 줍니다. 사울은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으러 길을 떠났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통해 사무엘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종의 조언과 작은 은 조각, 우물가의 소녀들과 정확한 만남의 시간까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었습니다.
우리 눈에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도 하나님의 통치 밖에 있지 않습니다. 계획이 어그러지고 찾던 것을 얻지 못할 때도 하나님께서는 다른 길을 준비하고 계실 수 있습니다. 모든 이유를 즉시 알 수는 없지만 현재 맡겨진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하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잘못된 요구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사울을 세워 블레셋의 손에서 건지려 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는 결코 가볍지 않지만 인간의 실패가 하나님의 긍휼과 구원 계획을 무너뜨리지는 못합니다.
외모와 능력만으로 지도자를 판단하지 마십시오. 높은 자리에 오르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직분과 권력은 자랑할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섬기라고 맡기신 책임입니다.
무엇보다 인간 왕을 넘어 참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어 죄인을 구원하시고 말씀으로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평범한 일상까지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말씀 앞에 멈추어 듣고 충실히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