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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1장 강해

여호수아 1장 개요

여호수아 1장은 모세의 죽음 이후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소명을 받은 내용과 요단강을 건널 준비를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가 죽은 후 이스라엘을 이끌어야 했지만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도움을 구했습니다. 여호수아 1:1-9절은 여호수아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하나님께 응답받은 여호수아는 곧 요단강을 건널 준비를 합니다.

여호수아 1장 구조

  • 1-9절 하나님의 위로
  • 10-18절 요단 건널 준비를 시키는 여호수아


여호수아 1장 강해


말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가 죽은 후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사실은 너무나 단순하면서도 놀랍습니다. 모세는 죽었지만 하나님은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나약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약속이 취소되지 않음을 분명해 보여줍니다. 우리는 종종 지도자의 죽음에 슬퍼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든지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살아계셔서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약속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여호수아에 다시 약속하십니다. 


수 1:3-4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

하나님의 약속을 절대 취소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도 이것은 분명히 아십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다시 말씀하심으로 두려워하는 여호수아는 위로하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분명히 하십니다.


어디로 가든 형통하리라

가나안 정복 전쟁은 이미 끝난 전쟁입니다. 하지만 아무런 조건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조건이 있는 승리입니다. 그것은 여호수아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것입니다.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좌로라 우로나 치우치지 않은 것은 문자대로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해석해도 안되고, 너무 문자적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읽는 것입니다.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여호수아는 담대해졌습니다. 그는 장로들과 관리들을 불러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주셨으니 준비하라고 명령합니다. 여호수아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담대하게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그대로 하는 자였습니다. 


요단 동편 지파들에게

여호수아는 전쟁에 앞서서 먼저 요단 동편 지파들에게 전합니다.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는 요단 동편에 이미 기업을 받았습니다.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가족들은 남겨두고 무장하고 먼저 요단강을 건너도록 명령합니다.(14절) 그들로 하여금 모범을 보이게 합니다. 실제로 그들은 전쟁이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 수 22:9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 실로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떠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받은 땅 곧 그들의 소유지 길르앗으로 가니라


그들은 기꺼이 여호수아의 명령에 순종했고, 함께 동행하기로 합니다.


여호수아는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세의 죽음으로 인해 두려웠지만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약하지만 하나님은 강하십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담대해졌습니다.


여호수아 장별요약 및 강해목록



창세기 2장 강해

 창세기 2장 개요

창세기 2장은 1장의 확장이자 사람의 창조를 상세히 다룹니다. 그러므로 2장은 1장의 마지막날 사건으로 넣는 것이 적합합니다. 전반부는 사람 없는 창조 세계와 후반부는 세계를 대리 통치하는 사람의 창조를 설명합니다.


  • 1-3절 창조의 마무리와 안식
  • 4-17절 에덴동산과 아담
  • 18-25절 여자의 창조


2장 주해 및 강해


1-3절 창조의 마무리와 안식


1-3절까지는 안식의 기원을 설명한다. 창조는 안식일까지이다. 안식은 쉼과 종말을 동시에 내포한다. 그렇다면 창세기 1장과 2장 1-3절은 역사의 전반적인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암축된 문장이라고 봐야 한다.


안식은 끝이다. 일의 끝, 역사의 끝. 이후 모든 시간과 역사는 7일과 7년을 회기로 돌아간다. 매주는 7일이며, 희년은 7*7년인 49년으로 채워지고 50으로 완성된다. 기독교의 주일과 구약의 안식은 같은 듯 다르다. 안식은 끝이지만 주의 날은 시작이다. 안식일은 완성일이지만, 주일은 모든 날이 주일임을 의미한다. 신약에서는 안식일이 없다. 모든 날이 안식일이기 때문이다.


복되다는 말은 전형적인 복을 말한다. 하지만 복과 거룩이 연결된다. 거룩은 구별되다 구분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후에 바리새인들을 '구별된 존재'로 여긴다. 바리새가 구별되다는 뜻이다.


구약에서 거룩은 하나님께 드려지다는 의미다. 여리고 성도, 성막의 기구들도 구별되어 하나님께 드려진 것들이다. 레위인 여기 구별된 존재들이다. 구별은 거룩이고, 거룩은 하나님께서만 사용하신다는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드려진 존재들이다.


4-17절 에덴동산과 아담


내력이니


톨레도트. 족보 계보의 뜻을 가진다. 어떤 학자는 이 단어에 무척 심혈을 기울인다. 하지만 아직까지 명확한 증거는 없다.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 된다. 


땅을 갈 사람도 없으므로


경작 -아바드는 명사형으로 종 노예의 뜻이고 동사는 섬기다 경작하다 (밭을) 갈다는 뜻이다. 에덴 동산은 지키고 경작되어야 한다. 사람은 땅을 경작해야 한다.(15절) 후에 아담의 첫 아들 가인은 땅을 경작(섬기는) 농사꾼이 된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흙은 '아파르'로 먼지란 뜻입니다. 땅을 의미하는 에레츠는 사람들이 기거할 땅을 의미하고, 아다마는 흙, 아파르는 먼지입니다. 사람은 흙의 먼지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먼지로 돌아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생령이 된다. 생령은 살아있는 영이다. 바울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고전 15:45에서 아담과 비교한다.

  • 고전 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에덴 동산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신다.  그냥 에덴의, 동쪽의 뜻이다. 동쪽에 있으니 그냥 에덴동산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동쪽


동쪽이 처음 등장한다. 성경에서 동쪽은 저주 받은 곳, 징계의 장소, 버려진 곳, 심판의 장소 등의 의미다. 종종 동방풍속, 동방사람들을 통해 이스라엘과 구별된 또는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을 일컫기도 한다.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나무는 매우 상징적이다. 생명과 죽음을 상징한다. 올리브 나무는 생명의 나무이다. 사람을 죽일 때 나무에 달아 놓는다. 저주의 나무가 된다.


강이 에덴에서


에덴은 생명의 근원이다. 물이 나오는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후에 시편1편과 에스겔 등에서 생명이 강이 다시 등장합니다. 이것은 에덴동산이 생명의 근원이자 시작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에덴에서 시작하는 네 개의 강이 있다. 첫째강은 비손강으로 금이 있는 하윌라를 흐른다. 둘째 강은 기혼강으로 구스를 흐른다. 세 번째 강은 힛데겔이며 앗수르 동쪽으로 흐른다. 네 번째 강은 유르라데강이다. 이 부분은 지질학자들이 유심하게 보는데, 대륙이동설과 깊은 연관이 있어 보인다.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경작하다 아바드, 지키다 샤마르. 두 단어는 아담의 소명, 즉 아담이 해야할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은 소명과도 같다. 아바드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이어가는 것이며, 샤마르는 계명을 지키는 것과 연결된다.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을 경작해야 하는 동시에 자신을 지켜야 한다. 


먹지 말라

첫 계명이 주어집니다. 계명은 본질적으로 금기입니다. 하지 말라는 금기계명은 보다 많은 자유를 전제한다. 하라는 그것만 하지만, 하지 말라는 그것만 하지 않고 다른 모든 것은 해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금기 계명은 하나님이 보다 많은 자유와 자율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모든 실과는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하십니다. 그것만 지키면 됩니다. 만약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 엄히 경고하십니다.(17절)


18-25절 여자의 창조


돕는 배필


아담은 부족한 존재입니다. 그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돕는 배필이 필요합니다.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한다면 굳이 둘이 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둘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객관화'를 위한 것입니다. 상대는 또 다른 나이며, 그 나를 봄으로 실제의 나를 바로 볼 수 있습니다. 일종의 거울입니다. 나를 알려면, 나의 주면을 봐야하고, 내가 소유하고, 가는 곳, 먹는 것 등을 보면 그것이 나입니다. 여성은 남성의 '나'입니다.


하지만 돕는 배필이 없어 드디어 아담의 갈비뼈에서 하나를 취하여 여자를 만든다. 둘 하나 였고,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돕는다는 개념은 상호보완적 존재라는 뜻입니다. 여자는 남자를 도움으로 존재의 의미가 생기고, 남자는 여자의 도움을 받아야 온전하 존재가 됩니다.


그 이름이 되었더라


배필을 언급한 이후 아담의 사역을 소개한다. 아담으로 하여금 동물들의 이름을 짓게 한다. 이름이 없다면 UFO다. 이름이 있어야 부를 수 있다. 이름은 존재의 규명이자 소명이다. 이 부분은 창세기 1장을 참조하시길. 하나님이 하시던 일을 아담은 하고 있다. 경작과 연관된다. 아담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연장선상에 있다.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

최고의 비교급입니다. 즉 최고로 좋다는 뜻입니다. 뼈는 힘과 능력, 기준을 뜻합니다. 여자는 남자에게서 나왔다. 둘은 원래 하나였습니다. 뼈는 사람을 세웁니다. 뼈가 없으면 바로 설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자는 남자의 뼈와 같은 존재입니다.


부모를 떠나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종속되어서는 안됩니다. 사람은 독립적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한 개인으로 만드셨습니다. 하지만 공동체로 살아갑니다. 부모를 떠나는 것은 의존적 존재에서 독립적 존재로의 바로서기입니다.


부끄러워

수치는 이후 계속 등장합니다. 수치를 모르는 건 두 가지다. 하나는 죄인들에게 있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수치를 가려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수치는 타락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존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의 옷으로 가려 주셨습니다. 하지만 타락 이후 빛의 옷이 가려지자 그들의 수치를 가려줄 것이 없자 그대로 드러납니다.



창세기 장별 요약 및 장별 강해


마태복음 10장 강해

 마태복음 10장 개요

10장은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에게 나가서 복음을 전하도록 하는 사명과 함께 주어지는 설교다. 열두 제자에게 나누어 주신 능력은 주님이 직접 행하신 기적이다. 


1-42절 열두 제자 파송설교


1절  열두 제자와 권능

주님은 제자들 중에서 특별해 열 둘을 택하셨다. 열둘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서 기원하며 완전한 공동체를 말한다. 열두 지파는 야곱의 열두 아들이지만, 레위와 요셉이 빠지고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들어가 열둘이 된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종종 요셉의 후손이란 표현을 두 지파를 묶기도 하지만 에브라임은 므낫세를 약한 지파라하며 무시한다. 이러한 정서는 므낫세 지파의 사사인 기드온이 에브라임 지파가 찾아와 항의할 때 잘 드러난다.


2-15절 열두 제자와 사역 방법

열두 제자

열두 사도의 이름은 베드로, 안드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그의 형제 요한, 빌립, 바돌로매, 도마,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 갸룟 유다이다.


베드로는 바위라는 뜻의 히브리어 페트로의 헬라식 이름이다. 원래 이름을 시몬이다.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이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형제이다.

빌립은 모호한 인물이다. 사도행전에서 사도 빌립과 집사 빌립이 겹친다. 후반부로 가면 사도인지 집사인지 알길 이 모호하다.

바돌로매는 요한복에 등장하는 나다나엘인 것으로 추측되지만 불확실하다.

마태는 세리로 소개된다. 세리와 창녀는 죄인으로 취급된다.

알패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다. 세배다의 아들 야고보는 큰 야고보이고,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작은 야고보로 불린다.

두 번째 시몬은 가나안인으로 나온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남겨진 가나안 족속일 것이다. 정말 그렇다면 그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도가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복음은 이방인에게 먼저 가지 않는다. 먼저 유대인 안에 전파된다. 잃어버린 양은 이스라엘 안에서 소외되고 버림 받은 이들을 향한 것이다. 주님은 친히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눅 19:10)이라 자신의 사역을 소개한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

임박한 종말론적 삶은 코람데오의 삶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은 자는 늘 종말을 염두에 두고 살아간다. 하지만 나태한 자는 종말을 인식하지 못한다. 마태는 유난히 '천국'을 좋아한다. '하나님의 나라'보다는 천국이 히브리즘에 더 가깝나다. 여기서 '국' '나라'는 kingdom'으로 왕들이 다스리는 나라를 말한다. 하늘의 왕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왔으니 회개하라는 것이다.


고치며

치유와 회복이다. 처음 하나님이 만드시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아담의 모습이 아니다. 신약에서의 회복은 더 이상 죄 지을 수 없는 완전한 의인의 상태이다.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혀진 상태이다.


평안하기를 빌라

평안은 구약의 '샬롬'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이스라엘의 샬롬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샬롬이며, 나아가 전쟁과 경제적 자유 등을 포함하는 포괄적 자유다.


발의 먼지

발은 땅(세속)과 닿는 부분이다. 발의 먼지는 떠는 행위는 일종의 씻는 행위이자 정결행위다.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림으로 그곳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단절을 의미한다.


16-23절 이렇게 대처하라

양을 이리 가운데로

양은 무지하고 어리석다. 하지만 순수하다. 이리는 양을 공격하는 존재이다. 원수들 가운데 보내는 것 같다는 의미다. 아무런 힘도 없고, 공격할 수도 없다.


뱀 같이 지혜롭다는 말은 모든 상황을 잘 파악하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보 같이 행동하는 것이 미덕이라 생각하지만 아니다. 지혜롭게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진정한 힘은 비둘기 같은 순수함이다. 결국 순수함이 이긴다. 순수함은 무지가 아니다. 뱀 같은 지혜의 순수다.


나로 말미암아

사람들을 삼가라는 말은 주의하라는 말이다. 주의하라는 분별하라는 말이다. 만나는 사람이 누구인지 바로 알아야 한다. 그들과 과도하게 친밀하게 지내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다. 그냥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되는 일이다. 

주님은 자신으로 인해 핍박을 받게 될 것을 말한다. 거짓의 세상에 진리는 항상 핍박을 받는다.


말하는 이는 - 성령이시니라

우리가 말하는 것 같지만 성령이 말씀하신다. 성령께서 우리의 사정을 아시고 대언하실 것이다.


대적하는 세대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종말의 때에는 형제간, 부모 자식간, 대적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거짓과 진리의 싸움이다. 


24-42절 나를 따르라.


두려워하지 말라.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은 당연히 주님의 제자들을 얕잡아 볼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께 파리들의 왕이란 뜻을 바알세불이라 불렀다. 모독적인 표현이다. 하지만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을 드러날 것이다.


너희는 참새보다 귀한니라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종종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 자신이 너무 작게 보인다. 하지만 주님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참새 보다 못한 인생이라 말하지만, 주님은 '너희는 참새 보다 귀하니라' 말씀하신다.


검을 주러 왔노라

진리는 어둠과 불가피한 전쟁이다. 주님이 주시는 검은 성령의 검, 즉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은 검으로 어둠을 격파한다. 말씀이 뿌리 내리는 자들은 결코 어둠에 휘둘리지 않는다.


나를 위하여

주님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 합당하지 않다고 말한다. 주님의 제자의 자격이다. 주님의 십자가가 아니라 '자신의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사형틀이다. 즉 죽음을 각오하고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구절은 다음 구절인 39절에서 목숨과 연결된다. 결국 자신을 내어 놓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제자의 절박성을 말한다.


마태복음 장별 요약 및 강해 목록


마태복음 4장 강해

 마태복음 4장 개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은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로 나가십니다. 40일 동안 금식 하신 후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지만 기록된 말씀으로 물리치십니다. 천국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시고,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십니다. 이후 사람들을 고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십니다.


  • 1-11절 금식과 광야의 시험
  • 12-17절 복음을 전파하시다.
  • 18-22절 네 제자를 부르시다.
  • 23-25절 치유와 천국 복음 전파


1-11절 금식과 광야의 시험


"성령에 이끌려"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신다. 광야를 고난의 현장으로 생각한다면 그 고난으로 이끄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에 들어간 곳이다. 과거의 이스라엘이 불순종으로 일관했다면 이제 예수님은 순종의 모범을 보이실 것이다. 이러한 사역을 위해 예수님은 광야로 가셔야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곧바로 가나안을 향하지 않고 홍해 앞으로 가고, 광야를 배회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곳으로 인도하셨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할 일이 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정말 무서운 말이다. 마귀는 인간 안에 내재한 자기 증명 의혹을 부추긴다. 이 질문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자기를 증명하라는 뜻인 동시에 '너는 가까가 아니냐?'라는 의혹을 부추긴다. 사람은 자신의 의혹을 받을 때 억울해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목숨을 버리기도 한다. 명예는 존재의 의미와 방식까지 혼란에 빠뜨린다.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예수님은 평생 '하나님의 아들되심'에 대한 의혹을 받아야 했다. 심지어 가족들에게까지. 예수님의 생애 자체, 아니 복음서의 목적이다. 오직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에 대한 증명이었다. 요한은 요한복음을 마무리 지으면 이렇게 말한다.

  •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떡덩이가 되게 하라


마귀의 첫 번째 시험은 돌이 떡이 되는 것이다. 이 시험은 곧바로 광야의 사건으로 넘어간다. 예수님도 그것을 알았다. 먹고 사는 것은 가장 중요한 본질이다. 지금도 표를 받는 대통령은 경제 문제를 잘 해결하는 사람이다. 마귀는 너는 인간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이 질문은 속임수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떡임을 아신다. 즉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인류를 구원할 것이다. 하지만 땅의 문제로 머물게하고, 그것이 전부라고 마귀는 말하고 있다. 무서운 유혹이다. 떡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할 것이 아니요.


우리는 말슴이 신명기 8:3에서 인용한 것임을 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모세의 말이다. 신명기 8장 2-3절을 읽어보자.

  • 신 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 신 8: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모세가 '만나를 먹이신'이라고 표현한 것을 주목해보자. 만나는 하나님께서 기적을 통해 광야의 생활 동안 베풀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영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다.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신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고난 가운데 두신다는 말이다. 사람은 떡이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이 필요한 존재이다.


"기록 되었으되"

이 부분을 따로 다루는 것이 좋지만 일단 넣어 보자.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처음 시험에서 예수님은 신명기 말씀을 인용하면서 '기록되었으되'라고 말씀하신다. 기록은 구약에 기록된 말씀을 말한다. 마귀를 이기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기록된 말씀을 인용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기회가 되면 따로 다룰 것이다.


마귀는 다음 시험에서 자신도 말씀을 인용한다. 그는 시편 91:11,12을 인용한다.

  • 시 91:11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 시 91:12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들을 붙들어 주신다는 약속이다. 하지만 마귀는 이 구절을 예수님의 시험에 이용한다. 동일하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을 이용한다. 즉 네가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면 하나님께서 널 지켜 주실 테이니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라는 것이다. 마귀는 말씀의 숨겨진 의도는 간파했고, 그것을 이용한다.


얼마나 놀라운가? 마귀도 하나님의 말씀을 자유자재로 인용하며, 그 안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야고보가 말한 귀신의 지식이다.

  • 야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예수님은 곧바로 신 6:16을 인용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십니다. 즉 마귀가 인용한 구절은 성도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그것을 악용하여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한다면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시험하는 악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경배와 신뢰의 대상이지 시험의 대상이 아닙니다. 시험은 이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사람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으시며 시험 당하지도 않으십니다.

  • 신 6:16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세 번째 시험이 시작된다. 헬라어 원문은 순서가 다르다. 

네게 주겠다. 내게 경배하면.

Ταῦτά σοι πάντα δώσω, ἐὰν πεσὼν προσκυνήσῃς μοι.

( 것   너에게   모두   주겠다   만약   엎드려   절하면   내게)


얼마나 놀라운 말인가? 이것이 마귀의 본심이다. 그는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다. 물론  잠시 동안 그가 이 땅의 주인처럼 행세하지만 마귀는 엄밀하게 주인이 아니다. 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곳이며, 하나님이 주인이시다. 그런데 마귀는 세상을 창조하신 예수님께 자신의 것인 양 주겠다고 거짓말하며, 자신에게 경배하라  유혹한다. 경배해야 할 대상이 경배를 받으려 한다. 


예수님은 곧바로 기록된 말씀으로 반격하신다.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라.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한다는 뜻이며, 하나님의 말씀의 원대로 살아간다는 뜻이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자를 지배하도로 해야 한다.


12-17절 복음을 전파하시다.


요한이 잡혔음을

세례 요한을 말한다. 세례 요한이 헤롯이 빌립의 아내를 빼앗았다는 것으로 비판을 하자 화가난 헤롯이 요한을 옥에 가두어 버린다. 일부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은 정치와 종교와 상관 없어야 한다 하지만 거짓말이다. 기독교는 시작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정치적이었다. 정치적이라 함은 특정 당을 지원하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약자를 보호하고,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는 당을 지지하고, 정책을 지지해야 한다. 불의에 항거하여 당당게 목소리를 내야 한다.


가버나움에 가시니


지금까지 예수님은 특별한 사역을 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이제 나설 때가 되셨다고 판단하신다. 고향인 나사렛을 떠나 갈릴리의 부유한 도시에 가버나움으로 가신다. 후에 가버나움은 예수님을 배척한다. 이제 세상으로 나아가 목소리를 발하실 때가 된 것이다. 저자는 이사야의 말씀이 응했다고 말한다.
  • 사 9:1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사 9: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이사야의 구절은 묘하다. 8장은 하나님의 율법의 사라져 어둔 시대를 말하고, 9장이 시작되면서 갈릴리가 등장한다. 아마도 갈릴리 주변 북쪽 지파들은 북왕국으로 분리되면서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상실되면서 칠흑같은 어둠이 찾아오지 않았나 싶다. 결국 말씀의 부재는 북,남의 멸망으로 기나긴 중간기를 거치면서 심화된다. 즉 한 지파나 지역이 아닌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상태가 된 것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라

회개하라는 현대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감정적 회개가 아니다. 헬라어의 회개 메타노에오(μετανοέω)는 '되돌아서다'라는 뜻으로 유턴을 뜻한다. 회개는 생각의 돌아섬과 행위의 돌아섬이 함께 동반된 전인격적 삶의 변화를 뜻한다. 눈물 흘리며 회개했다고 말하는면서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자기기만이자 하나님을 모욕하는 행위다. 기독교인들이 가식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8-22절 네 제자를 부르시다.


그물 던지는 것은 보시니


가장 먼저 안드레와 베드로를 부르신다. 두 사람은 형제로 베드로의 본명은 시몬이다. 베드로는 히브리어 페트로이다. 페트로는 반석, 거대한 바위란 뜻이다. 에서의 후손들이 살았던 에돔 지역은 바위가 많아 페트라로 불렸다.

주님은 길을 가다 베드로와 안드레를 만나 그들을 제자로 부르신다. 우리는 제자들을 들을 부를 때 전혀 모른 사람이 갑자기 '나를 따라 오너라'하며 부른다고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을 만나 복음을 전하고 수많은 이야기를 한 다음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하도록 부르신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즉각적으로 부르고 호흥하는 것은 당시 글쓰기의 방식이지 현대의 의미처럼 부른 것이 절대 아니다. 이러한 부분은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의 부르심의 방식을 비교 분석하여 분명해 진다.


사람을 낚는 어부


예수님은 사람들을 부르실 때 전혀 엉뚱한 무엇으로 부르거나 설명하지 않으신다. 그들의 직업인 어부를 비유적으로 설명하며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신다. 부르심은 멀리 있지 않다. 나와 아무 상관 없어 보이는 것도 실제는 나의 삶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이다. 부르심은 현재의 삶과 멀지 않다. 바로 그 자리에서 부르신다.


되게 하리라


우리는 이 부분에 주목해야 한다. '되다'(ποιέω)는 어떻게 만들겠다는 뜻이다. 마치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듯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세우신다. 이것은 새로운 창조이다. 소명은 창조다! 주체는 예수님이시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만드신다. 베드로는 스스로 되는 것이 아니다. 미래직설법을 사용하여 강한 의지를 드러내신다.


야고보와 요한도 부르신다. 세베대는 예수님과 친척간이다. 이들은 예수님과 친족 간이다. 후에 이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직전 어머니가 와서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 자리를 요구한다. 친족 간이라는 이유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정하지 않으신다.

부르심은 소명이며, 창조이다. 하나님께서 부르심으로 죽은 자가 살아나며,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23-25절 치유와 천국 복음 전파

23-24절은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사역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준 상징적인 구절이다. 먼저 예수님은 갈릴리를 두루 다니셨다. 예수님의 중반기까지 사역은 모두 갈릴리에 집중 되어 있다. 

διδάσκων ἐν ταῖς συναγωγαῖς αὐτῶν 
καὶ 
κηρύσσων τὸ εὐαγγέλιον τῆς βασιλείας 
καὶ 
θεραπεύων πᾶσαν νόσον καὶ πᾶσαν μαλακίαν ἐν τῷ λαῷ.

가르치시며(디다스코 διδάσκω)


먼저 가르치신다. 가르침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전파한다는 의미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예수님과 같은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다. 가르침을 회당에서 이루어졌다. 사실 이 부분은 논쟁 거리다. 회당에서 가르치기 위해서는 랍비가 되어야 하며 적지 않은 나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나이를 적어도 50정로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종종 랍비로 불렸다. 랍비는 아무에게나 주는 호칭이 아니다. 


전파하시며(케룻소 κηρύσσω)


케룻소는 일방전 선포에 가깝니다. 마치 전쟁을 선포한 것처럼. 선포된 것은 천국복음이다. 케룻소는 대부분 복음이 전파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강력한 힘을 가진 단어로이다. 설득하고 대화하는 것과는 약간이 차이가 있다. 설득의 개념보다는 선포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고대 헬라어는 전령들이 왕이나 황제의 명령을 선포하는 개념으로 이 단어가 종종 사용되었다. 즉 공개적인 선포의 의미가 강한 단어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하나님이 계시하신 복음을 선포하신 것이라 할 수 있다.

고치시니(떼라페우 θεραπεύω)


예수님의 힐링, 즉 고침은 부정에서 정함으로의 전환이 일어난다. 율법적으로 부정한 자들을 정하게 바꾸신다. 질병에 걸리면 부정한 자가 되어 공동체로부터 분리 된다. 이들은 정결 의식을 통해 다시 공동체로 들어오지만 회복되지 않으면 영원히 부정하게 된다. 예수님은 이들을 고치심으로 복음으로 모든 이들이 정결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창세기 9장 강해

 창세기 9장 개요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린 노아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언약을 맺으신다. 먼저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을 주시고, 육고기를 먹도록 허락한다. 무지개를 두어 물로 심판하지 않을 것이라 약속하신다. 땅에 정착한 노아는 포도나무를 심고 포도주를 마시고 옷을 벗는 추태를 행한다. 함이 노아의 벗은 모습을 보고 형제들에게 고자질하며 놀리지만 셈과 야벳을 아버지의 수치를 보지 않고 덮어 준다. 노아는 함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한다. 950세에 생을 마감한다.


  • 1-7절 다시 언약을 맺는 하나님
  • 8-17절 심판과 무지개
  • 18-29절 술취한 노아와 죽음


1-7절 다시 언약을 맺는 하나님


하나님이 복을 주시며

이 구절은 창세기 1장의 내용을 그대로 반복한다.

  •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어떤 의민에서 노아는 새로운 아담이다. 그에게서 다시 인류가 번성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제2의 아담처럼 노아에게 아담에게 주었던 복을 다시 반복하고 있다. 사람에게뿐만  아니라 다른 피조물에 대한 통치까지 거의 비슷하게 주어진다.


산 동물은 너희 먹을 것이

성경에서 가장 처음을 육신을 허락하는 구절이다. 하지만 이 구절이 그 전부터 육식을 먹었는지 먹지 않았는지 알게 하지는 못한다. 적지 않은 학자들은 이 구절 이전에서 육식이 있었을 것이라 말한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좀더 다른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피다. 피에 생명이 있으며, 피째 먹지 말 것을 경고하신다.(4절) 또한 피흘림에 대해 피는 피로 갚겠다 하신다. 즉 피는 생명이다.(6절)


8-17절 심판과 무지개


내 언약을

하나님의 언약은 노아와 후손들 그리고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과 땅의 모든 짐승을 포함한다.(10절) 하나님의 언약의 핵심은 모든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징계는 악을 잠시 멈출 수는 있으나 없게 하지는 못한다. 본성이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고양이를 잠깐 우리에 가둘 수는 있으나 생선을 좋아하는 습성을 바꾸지 못한 것과 같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다시는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 하신다. 결국 진정한 승리는 새로운 마음의 변화, 본성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무지개

무지개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케쉐트(קֶשֶׁת)로 직역하면 활이다. 무지개는 활처럼 초승달처럼 휘어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단어가 삼상 2:4에서는 활로 번역된다. 어떤 이들은 이 단어에 유난을 떨지만 그리 중요한 단어가 아니다. 휘어진 것을 말하는 것이다.


18-29절 술취한 노아와 죽음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9장의 마지막 단락은 노아의 실수와 죽음이 기록되어 있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는 포도원을 가꾼다. 어느 날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 옷을 벗고 눕는다. 어떤 사람은 술에 취하면 옷을 다 벗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그런데 함이 아버지의 벗은 모습을 보고 두 형제에게 고자질 한다. 셈과 야벳은 이야기를 듣고 뒷걸음쳐 가서 아버지의 하체를 덮어 준다. 수치를 가려준 것이다. 수치를 가리는 것은 인간의 타락 이후 생겨난 지식이다.


18절에서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로 소개되고, 함이 저주를 받지 않고 함의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는다. 가나안은 이스라엘이 들어가야 할 땅의 이름의 기원이 되는 이름이다. 그들은 저주 받은 백성임을 말해준다.


노아가 죽었더라

노아는 950세에 죽는다. 정말 오래 살았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 노아도 결국은 죽는다. 이것이 인생이다. 이 생은 본디 짧고 빠르다. 우리는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될까? 가장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집중하고 가치 있는 일에 투자해야 한다.



창세기 장별 요약 및 장별 강해


창세기 8장 강해

창세기 8장 개요

6장부터 시작된 홍수 이야기는 8장에서 절정을 이룬다. 7장에서는 방주로 들어가는 이야기와 홍수가 일어난 상황을 다룬다. 8장은 홍수가 일어나고 물이 줄어들어 방주에서 나와 아라랏산에서 제사를 드리는 장면까지 이어진다. 홍수로 모든 호흡하는 생물이 죽는다. 노아는 방주에서 나와 가장 먼저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드린다.


  • 1-5절 홍수가 끝이 나고 물이 줄어들기 시작함
  • 6-12절 까마귀와 비둘기를 보내 상황을 알아봄
  • 13-19절 방주에서 나오는 노아의 가족
  • 20-22절 하나님께 제사하는 노아



1-5절 홍수가 끝이 나고 물이 줄어들기 시작함


기억하사

이전에는 권념하사이다. 히브리어 '자카르'는 기억하다 마음을 채우다 등으로 생각을 지우지 않고 담아두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노아의 가족을 잊지 않으시고 항상 마음에 두셨다. 하나님께서 기억해 주시는 사람, 그는 세상에서 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이다.


바람을 땅 위에

홍해를 건널 때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종종 해로운 존재지만 이곳에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위하여 사용되고 있다.


하늘의 창문이 닫히고

참으로 멋진 시적 표현이다. 하늘에 창이 있다니.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죄를 지을 때 하늘을 닫으신다. 비를 멈추게 하시고 은혜를 멈추신다.


  • 78:23 그러나 그가 위의 궁창을 명령하시며 하늘 문을 여시고
  • 78:24 그들에게 만나를 비 같이 내려 먹이시며 하늘 양식을 그들에게 주셨나니
  • 78:25 사람이 힘센 자의 떡을 먹었으며 그가 음식을 그들에게 충족히 주셨도다


  • 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이스라엘이 우상에 빠질 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하늘을 닫기도 하고 열기도 하셨다. 이사야 61:1에서 하나님은 하늘을 가르시고 우리에게 오신다. 가르다는 히브리어 카라는 '찟다'는 뜻이다. 하늘을 찢으시고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내려오시는 것이다.


6-12절 까마귀와 비둘기를 보내 상황을 알아봄


일곱 째 달 열 이렛날

  • 호수의 시작은 둘째 달 열이렛날(7:11)이다. 5개월이 흘렀다.
  • 열째달 초하루(1일) 봉우리가 보임
  • 사십일 후 창문을 열고 까마귀를 보냄
  • 육백일 년 첫째 달 초 하룻날 물이 걷힘(13절)
  • 둘째 달 스무 이렛날(27일) 땅이 마름(14절) 방주에서 나옴(16절)
현대 태양력으로 하면 1년 10일을 방주 안에 있었다. 이스라엘 달력은 현대와 조금 다르다.


까마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까마귀다. 아직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지만 율법상 까마귀는 부정한 새다. 하지만 엘리야에게 먹이를 주었듯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하는 새다. 까마귀가 나가서 안 왔다는 말은 오류가 있다. 까마귀는 왕래했다. 즉 나가다 들어오기를 반복했다는 말이다. 까마귀가 부정한 새고 시체를 좋아해 들어오지 않았다는 억지스러운 설교는 하지 마시길...


비둘기

비둘기는 세 번 나갔다. 한 번은 발 붙일 곳이 없어 돌아왔고, 칠 일 후에 나갔을 때는 감람나무 잎을 물고 가져왔다. 생명이 움트기 시작한 것이다. 비둘기는 대한민국에서 해로운 새로 지정되어 있다. 비둘기가 해로운 균을 옮기기 때문이며 특히 비둘기 똥은 마르면서 공기 중으로 해로운 균을 옮긴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도 인간의 편의에 따른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 나갔을 때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유는 모른다. 비둘기가 살만한 환경이 만들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비둘기는 잡식성이다. 곤충이나 벌레, 과일, 곡물 등을 먹는다.


노아는 왜 까마귀와 비둘기를 보냈을까? 궁금해서이다. 언제 비가 그치는지, 땅은 마르고 있는지 등이 궁금했을 것이다.


13-19절 방주에서 나오는 노아의 가족


물이 걷힌 지라

드디어 물이 거의 사라졌다. 일년 가까이 방주에 있던 노아 가족들에게 희소식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물러나고 있는 증거이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은 참으로 안타깝다.


방주에서 나오라

물이 물러가고 땅이 말랐지만 노아는 방주에서 기다렸다.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하나님께서 드디어 노아에게 방주에서 나오도록 명령하신다. 노아는 얼마나 긴장했을까. 세상이 궁금하기도하고 두렵기도 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기까지 방주에서 나오지 않는 노아. 순종의 사람이다.


생육하고 번성하라(17절)

하나님은 아담에게 주었던 복을 노아에게 다시 준다.  하나님의 긍휼이다. 


20-22절 하나님께 제사하는 노아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첫 행위, 그것은 제단을 쌓고 제사하는 일이다. 감사와 희생의 제사였을 것이다. 번제 히브리어 '알라'(עָלָה)는 올리다는 뜻이다. 불을 피워 제물을 드리면 향이 올라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은 노아의 제사를 받으시고 약속하신다. 다시는 사람으로 인해 땅을 저주하지 않을 것이라고. 사람이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에(21절) 홍수가 사람의 본질을 바꾸지 못한다. 후에 노아도 자손들도 하나님께 범죄한다.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님이시다.


창세기 장별 요약 및 장별 강해


창세기 7장 강해

 창세기 7장 개요

6장이 홍수 이전 상황과 노아로 하여금 방주를 만드는 것까지 이야기라면 7장은 홍수의 시작과 과정을 담고 있다. 홍수는 창조 이전의 상황으로 만들어 모든 것이 혼합되고 뒤섞어 버린다. 죄는 반창조로 이끈다. 7장은 이상하리 만치 기이한 날짜가 많다.


  • 1-5절 홍수 직전의 명령
  • 6-12절 홍수의 시작
  • 13-24절 홍수의 과정들


1-5절 홍수 직전의 명령


방주로 들어가라

방주가 지어지고 홍수의 때가 가까워 오자 하나님은 노아와 가족들에게 방주로 들어가라 말한다. 믿음이 필요합니다. 과연 비가 올까? 지금까지도 힘들었지만 이젠 진짜 방주로 들어가야 한다.


내가 보았음이니라

하나님은 노아를 보았다. 우연히 본 것도 아니고 잘 못 본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숨겨진 의도와 목적까지 간파하신다. 하나님께는 비밀이 없다.

  • 4:12-1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요나서에도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자 하나님은 그들을 보시고 징계를 철회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계신다. 하갈이 사라를 피해 도망 갈때도 하나님은 보셨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보고 계시는 감찰하시는 분이시다.


암수 둘씩

생존을 위해서 최소한의 동물들을 준비하신다.


칠 일이면

곧바로 비가 내리지 않는다. 칠 일을 기다려야 한다. 10절에서 방주로 들어간 후 정확히 7일 후 그러니까 한 주의 첫 날 폭우가 쏟아진다. 칠 일은 충만한 시간이자 인내의 시간이다.


노아가 명하신대로

노아는 순종의 사람이다. 그는 오직 믿음으로 행한 사람이다. 자기부인이 없다면 순종은 불가능하다. 우리의 경험과 지식으로 우리는 종종 엄청난 실패와 불행을 맞이하기도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노아는 철저히 하나님의 명령에만 순종했다.


6-12절 홍수의 시작

육백 세

육백이란 나이가 유난히 강조된다. 하지만 홍사건 안에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호하다. 성경 안에서 육은 사람을 뜻한다. 하지만 육 백이 사람을 뜻하는지는 모호하다.


사십 주야

비가 내리는 기간은 사십일이다. 성경에서 40은 고난의 시기, 인내의 시기,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의 준비 기간 등으로 이해된다. 또한 충만을 뜻하기도 한다. 이스라엘의 40년 광야 생활과 엘리야의 40일 동안 도주, 예수님의 40일 금식 등은 고난과 역경의 시기를 뜻한다. 40일의 홍수는 인간들이 완전히 멸절하는 저주의 시간이다.


깊음의 샘 하늘의 창문

은유적 표현이다. 하지만 1장에서 둘 째날 물과 물이 나뉘었다는 것을 기억하다. 하늘의 물이 흘러 내린다면 끔찍하다. 최근들어 우리나라에도 하루에 수백mm가 내리자 도심이 물에 잠기기도 했다. 이것이 40일 동안 계속 된다고 생각해 보라. 정말 무서운 일이다. 하늘뿐 아니라 깊음에서도 물이 솟구쳐 온다면 그야말로 참사다.


13-24절 홍수의 과정들

방주에 들어갔고

방주로 들어간 사람은 노아와 노아의 아내, 세 아들과 세 며느리 모두 8명이다. 베드로 심판에 대해 말하면서 노아의 가족을 언급한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지만 영원히 참지는 않으시다. 심판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다. 물론 준비 되지 않는 자들에게만.

  • 베드로전서 3: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여호와께서 - 문을 받으시니라(16절)

방주의 문을 받은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문은 항상 열려 있지 않다. 문이 닫히면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한다. 그런데 왜 아무도 노아의 가족과 함께 방주로 들어가지 않았을까? 아마도 그들은 노아를 미친 사람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믿음의 길은 종종 미치광이로 보인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문을 닫으면 누구도 구원의 방주로 들어가지 못한다.


방주가 물 위에

엄청난 비가 쏟아지자 방주가 떠 올랐다. 구원을 뜻한다. 죄악을 행하는 모든 사람들이 죽었다. 그들은 비가 쏟아지는 순간까지 홍수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구원은 악에 대한 심판과 함께 이루어진다. 동일한 날, 누군가는 심판을 받고, 누군가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다 죽었더라(22절)

코로 호흡하는 모든 생물은 다 죽었다. 하지만 물속 생물은 죽지 않았다. 홍수 사건에서 악을 행하는 자들은 코로 호흡하는 것과 연결된다. 이 부분은 연구가 필요하다.




창세기 장별 요약 및 장별 강해




창세기 6장 강해

 창세기 6장 개요

창세기 6장부터 9장까지는 홍수 심판을 다룹니다. 5장에서 소개된 족보를 통해 수많은 인류가 지구에 거하게 된 것을 봅니다. 아담에게 주신 땅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복이 성취된 것입니다. 문제는 선의 충만이 아니라 악의 충만이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인류의 번성을 슬퍼하시고 홍수로 멸망 시키기로 하십니다.


  • 1-7절 홍수 이전의 세상
  • 8-22절 노아에게 홍수 심판을 알리고 방주를 짓도록 명령함


1-7절 홍수 이전의 세상


사람이 번성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번성했다. 심판이 홍수는 사람들이 많아짐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그들은 모이면 모일수록 악을 행합니다. 번성은 분명 하나님의 축복이지만 죄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죄를 짓는 데 사한다.


하나님의 아들들 사람의 딸들

기묘한 구절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징한다. 사람의 딸들은 이 땅의 사람들을 말한다. 아들은 기업을 무를 자며, 딸들은 순결한 자들을 말한다. 신화적 요소가 다분한 이 구절의 핵심은 '섞임'이다. 창세기 1장 창조에서 질서가 잡아가기 위해서 분리되었고, 자신의 자리에서 구분되어 소명을 감당했다. 그런데 이제는 다시 섞입니다. 죄는 자신의 자리를 떠나 타인의 자리를 침범한다.


아름다움을 보고

아름다움은 창세기 1장에서 피조물을 보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뜻의 '토브'이다.(참 창 1장 강해) 도대체 사람의 아름다움이란 뭘 말하는 것일까? 문제는 바라봄이 창세기 3장에서 하와가 선악과를 보는 것과 불길하게 닮아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6장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소유된 자들이지만 타락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땅의 사람들의 딸들을 탐하여 내려 간다.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하나님의 영이 함께 했지만 다시는 함께 있지 않을 것임을 천명하신다. 육체는 히브리어 바샤로로 2장에서 살 중의 살. 과 한 몸이란 단어에 사용된 것이다. 이 단어는 인간의 육체 자체를 뜻하기 보다는 '하나가 됨'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 즉 분리 되어야 하는데 섞여 하나가 되고 만 것이다.


백이십 년

성경에서 12는 완전수이며, 이스라엘 전체 백성을 일컫는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조성되기 전 120년은 뭘 말하는 것일까? 학자들 간의 적지 않은 논쟁이 있기는 하지만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앞의 육체와 120년은 동일한 의미일 수 없다. 즉 인간의 제한된 삶, 죽음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불쌍한 인생 말이다.


네피림

네피림은 자주 등장하게 된다. 정확히는 민 13:33에 한 번 등장한다. 이곳에서 네피림의 후손 아낙자손이 소개된다. 결국 네피림 거대한 전투적 용사들로 보는 것이 잃다. 헤라클래스와 같이. 전쟁을 위해 길러진 용병 또는 살인병기들인 셈이다.

민수기 1333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네피림은 이후 용사들과 이어진다.


항상 악할 뿐

하나님은 사람들의 깊은 내면을 보셨다. 그들의 생각은 늘 악했다. 마음속의 생각들은 악하여 늘 죄 지을 생각만을 한다. 아담의 타락 이후 죄가 사람들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 첫사람이 가인이다. 이후 사람들은 가인처럼 죄의 욕망에 이끌려 살아가는 죄인들이 되었다.


한탄하사

한탄하다 히브리어 '나함'은 깊이 고민하다 위로하다 (마음을) 되돌리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즉 후회한다는 뜻이다. 참으로 기이한 표현이다. 그릇된 조직신학에 길들여진 개신교는 신이신 하나님이 어떻게 '변질' '변화'할 수 있는가를 의아해 한다. 이것은 사람의 언어다. 하나님의 마음을 담은. 죄인들을 보시고 슬퍼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8-22절 노아에게 홍수 심판을 알리고 방주를 짓도록 명령함


노아는

8절을 직역하면 

노아는 찾았다 은혜를 여호와의 눈에 있는

히브리어와 영어는 동일한 의미다. 하지만 한글 번역은 이상하게 수동태형으로 노아가 여호와의 은혜를 입었다고 번역했다.

'입었다'로 번역한 히브리어 마짜는 찾다 가다 구하다 (일이) 일어나다 만나다 손을 잡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수동태형으로 번역을 했는지...  1-7절에서 타락한 인류를 설명하고 8절은 그들과 전혀 다른 길을 걷는 노아를 설명하니 당연히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다 찾았다는 능동형으로 번역 해야 옳다.


노아의 족보

다시 톨레도트가 등장한다. 노아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노아는 의인이며 완전한 자로 소개된다. 이 부분은 욥의 서두와 매우 비슷하다.


하나님과 동행

동행이 다시 등장한다. 에녹도 하나님과 동행했고, 노아도 하나님과 동행한다. 즉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살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놀랍다. 오직 노아에게만 말씀하신다. 반대로 말하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찾지 않고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찾고 구하면 만나 주실 것이다. 이것은 약속의 계명이다.


  • 신명기 4:29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
  • 역대하 15:2 그가 나가서 아사를 맞아 이르되 아사와 및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들아 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그를 찾으면 그가 너희와 만나게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그를 버리면 그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 마태복음 7: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너는 방주를 만들되

방주는 사각형이다. 배가 아니다. 고페르 나무는 정확히 모른다.


노아가 다 준행하였더라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방주를 짓는다.


창세기 장별 요약 및 장별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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