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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장 강해

 창세기 2장 개요

창세기 2장은 1장의 확장이자 사람의 창조를 상세히 다룹니다. 그러므로 2장은 1장의 마지막날 사건으로 넣는 것이 적합합니다. 전반부는 사람 없는 창조 세계와 후반부는 세계를 대리 통치하는 사람의 창조를 설명합니다.


  • 1-3절 창조의 마무리와 안식
  • 4-17절 에덴동산과 아담
  • 18-25절 여자의 창조


2장 주해 및 강해


1-3절 창조의 마무리와 안식


1-3절까지는 안식의 기원을 설명한다. 창조는 안식일까지이다. 안식은 쉼과 종말을 동시에 내포한다. 그렇다면 창세기 1장과 2장 1-3절은 역사의 전반적인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암축된 문장이라고 봐야 한다.


안식은 끝이다. 일의 끝, 역사의 끝. 이후 모든 시간과 역사는 7일과 7년을 회기로 돌아간다. 매주는 7일이며, 희년은 7*7년인 49년으로 채워지고 50으로 완성된다. 기독교의 주일과 구약의 안식은 같은 듯 다르다. 안식은 끝이지만 주의 날은 시작이다. 안식일은 완성일이지만, 주일은 모든 날이 주일임을 의미한다. 신약에서는 안식일이 없다. 모든 날이 안식일이기 때문이다.


복되다는 말은 전형적인 복을 말한다. 하지만 복과 거룩이 연결된다. 거룩은 구별되다 구분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후에 바리새인들을 '구별된 존재'로 여긴다. 바리새가 구별되다는 뜻이다.


구약에서 거룩은 하나님께 드려지다는 의미다. 여리고 성도, 성막의 기구들도 구별되어 하나님께 드려진 것들이다. 레위인 여기 구별된 존재들이다. 구별은 거룩이고, 거룩은 하나님께서만 사용하신다는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드려진 존재들이다.


4-17절 에덴동산과 아담


내력이니


톨레도트. 족보 계보의 뜻을 가진다. 어떤 학자는 이 단어에 무척 심혈을 기울인다. 하지만 아직까지 명확한 증거는 없다.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 된다. 


땅을 갈 사람도 없으므로


경작 -아바드는 명사형으로 종 노예의 뜻이고 동사는 섬기다 경작하다 (밭을) 갈다는 뜻이다. 에덴 동산은 지키고 경작되어야 한다. 사람은 땅을 경작해야 한다.(15절) 후에 아담의 첫 아들 가인은 땅을 경작(섬기는) 농사꾼이 된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흙은 '아파르'로 먼지란 뜻입니다. 땅을 의미하는 에레츠는 사람들이 기거할 땅을 의미하고, 아다마는 흙, 아파르는 먼지입니다. 사람은 흙의 먼지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먼지로 돌아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생령이 된다. 생령은 살아있는 영이다. 바울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고전 15:45에서 아담과 비교한다.

  • 고전 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에덴 동산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신다.  그냥 에덴의, 동쪽의 뜻이다. 동쪽에 있으니 그냥 에덴동산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동쪽


동쪽이 처음 등장한다. 성경에서 동쪽은 저주 받은 곳, 징계의 장소, 버려진 곳, 심판의 장소 등의 의미다. 종종 동방풍속, 동방사람들을 통해 이스라엘과 구별된 또는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을 일컫기도 한다.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나무는 매우 상징적이다. 생명과 죽음을 상징한다. 올리브 나무는 생명의 나무이다. 사람을 죽일 때 나무에 달아 놓는다. 저주의 나무가 된다.


강이 에덴에서


에덴은 생명의 근원이다. 물이 나오는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후에 시편1편과 에스겔 등에서 생명이 강이 다시 등장합니다. 이것은 에덴동산이 생명의 근원이자 시작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에덴에서 시작하는 네 개의 강이 있다. 첫째강은 비손강으로 금이 있는 하윌라를 흐른다. 둘째 강은 기혼강으로 구스를 흐른다. 세 번째 강은 힛데겔이며 앗수르 동쪽으로 흐른다. 네 번째 강은 유르라데강이다. 이 부분은 지질학자들이 유심하게 보는데, 대륙이동설과 깊은 연관이 있어 보인다.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경작하다 아바드, 지키다 샤마르. 두 단어는 아담의 소명, 즉 아담이 해야할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은 소명과도 같다. 아바드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이어가는 것이며, 샤마르는 계명을 지키는 것과 연결된다.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을 경작해야 하는 동시에 자신을 지켜야 한다. 


먹지 말라

첫 계명이 주어집니다. 계명은 본질적으로 금기입니다. 하지 말라는 금기계명은 보다 많은 자유를 전제한다. 하라는 그것만 하지만, 하지 말라는 그것만 하지 않고 다른 모든 것은 해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금기 계명은 하나님이 보다 많은 자유와 자율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모든 실과는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하십니다. 그것만 지키면 됩니다. 만약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 엄히 경고하십니다.(17절)


18-25절 여자의 창조


돕는 배필


아담은 부족한 존재입니다. 그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돕는 배필이 필요합니다.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한다면 굳이 둘이 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둘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객관화'를 위한 것입니다. 상대는 또 다른 나이며, 그 나를 봄으로 실제의 나를 바로 볼 수 있습니다. 일종의 거울입니다. 나를 알려면, 나의 주면을 봐야하고, 내가 소유하고, 가는 곳, 먹는 것 등을 보면 그것이 나입니다. 여성은 남성의 '나'입니다.


하지만 돕는 배필이 없어 드디어 아담의 갈비뼈에서 하나를 취하여 여자를 만든다. 둘 하나 였고,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돕는다는 개념은 상호보완적 존재라는 뜻입니다. 여자는 남자를 도움으로 존재의 의미가 생기고, 남자는 여자의 도움을 받아야 온전하 존재가 됩니다.


그 이름이 되었더라


배필을 언급한 이후 아담의 사역을 소개한다. 아담으로 하여금 동물들의 이름을 짓게 한다. 이름이 없다면 UFO다. 이름이 있어야 부를 수 있다. 이름은 존재의 규명이자 소명이다. 이 부분은 창세기 1장을 참조하시길. 하나님이 하시던 일을 아담은 하고 있다. 경작과 연관된다. 아담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연장선상에 있다.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

최고의 비교급입니다. 즉 최고로 좋다는 뜻입니다. 뼈는 힘과 능력, 기준을 뜻합니다. 여자는 남자에게서 나왔다. 둘은 원래 하나였습니다. 뼈는 사람을 세웁니다. 뼈가 없으면 바로 설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자는 남자의 뼈와 같은 존재입니다.


부모를 떠나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종속되어서는 안됩니다. 사람은 독립적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한 개인으로 만드셨습니다. 하지만 공동체로 살아갑니다. 부모를 떠나는 것은 의존적 존재에서 독립적 존재로의 바로서기입니다.


부끄러워

수치는 이후 계속 등장합니다. 수치를 모르는 건 두 가지다. 하나는 죄인들에게 있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수치를 가려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수치는 타락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존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의 옷으로 가려 주셨습니다. 하지만 타락 이후 빛의 옷이 가려지자 그들의 수치를 가려줄 것이 없자 그대로 드러납니다.



창세기 장별 요약 및 장별 강해


창세기 9장 강해

 창세기 9장 개요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린 노아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언약을 맺으신다. 먼저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을 주시고, 육고기를 먹도록 허락한다. 무지개를 두어 물로 심판하지 않을 것이라 약속하신다. 땅에 정착한 노아는 포도나무를 심고 포도주를 마시고 옷을 벗는 추태를 행한다. 함이 노아의 벗은 모습을 보고 형제들에게 고자질하며 놀리지만 셈과 야벳을 아버지의 수치를 보지 않고 덮어 준다. 노아는 함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한다. 950세에 생을 마감한다.


  • 1-7절 다시 언약을 맺는 하나님
  • 8-17절 심판과 무지개
  • 18-29절 술취한 노아와 죽음


1-7절 다시 언약을 맺는 하나님


하나님이 복을 주시며

이 구절은 창세기 1장의 내용을 그대로 반복한다.

  •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어떤 의민에서 노아는 새로운 아담이다. 그에게서 다시 인류가 번성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제2의 아담처럼 노아에게 아담에게 주었던 복을 다시 반복하고 있다. 사람에게뿐만  아니라 다른 피조물에 대한 통치까지 거의 비슷하게 주어진다.


산 동물은 너희 먹을 것이

성경에서 가장 처음을 육신을 허락하는 구절이다. 하지만 이 구절이 그 전부터 육식을 먹었는지 먹지 않았는지 알게 하지는 못한다. 적지 않은 학자들은 이 구절 이전에서 육식이 있었을 것이라 말한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좀더 다른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피다. 피에 생명이 있으며, 피째 먹지 말 것을 경고하신다.(4절) 또한 피흘림에 대해 피는 피로 갚겠다 하신다. 즉 피는 생명이다.(6절)


8-17절 심판과 무지개


내 언약을

하나님의 언약은 노아와 후손들 그리고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과 땅의 모든 짐승을 포함한다.(10절) 하나님의 언약의 핵심은 모든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징계는 악을 잠시 멈출 수는 있으나 없게 하지는 못한다. 본성이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고양이를 잠깐 우리에 가둘 수는 있으나 생선을 좋아하는 습성을 바꾸지 못한 것과 같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다시는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 하신다. 결국 진정한 승리는 새로운 마음의 변화, 본성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무지개

무지개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케쉐트(קֶשֶׁת)로 직역하면 활이다. 무지개는 활처럼 초승달처럼 휘어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단어가 삼상 2:4에서는 활로 번역된다. 어떤 이들은 이 단어에 유난을 떨지만 그리 중요한 단어가 아니다. 휘어진 것을 말하는 것이다.


18-29절 술취한 노아와 죽음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9장의 마지막 단락은 노아의 실수와 죽음이 기록되어 있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는 포도원을 가꾼다. 어느 날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 옷을 벗고 눕는다. 어떤 사람은 술에 취하면 옷을 다 벗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그런데 함이 아버지의 벗은 모습을 보고 두 형제에게 고자질 한다. 셈과 야벳은 이야기를 듣고 뒷걸음쳐 가서 아버지의 하체를 덮어 준다. 수치를 가려준 것이다. 수치를 가리는 것은 인간의 타락 이후 생겨난 지식이다.


18절에서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로 소개되고, 함이 저주를 받지 않고 함의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는다. 가나안은 이스라엘이 들어가야 할 땅의 이름의 기원이 되는 이름이다. 그들은 저주 받은 백성임을 말해준다.


노아가 죽었더라

노아는 950세에 죽는다. 정말 오래 살았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 노아도 결국은 죽는다. 이것이 인생이다. 이 생은 본디 짧고 빠르다. 우리는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될까? 가장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집중하고 가치 있는 일에 투자해야 한다.



창세기 장별 요약 및 장별 강해


창세기 8장 강해

창세기 8장 개요

6장부터 시작된 홍수 이야기는 8장에서 절정을 이룬다. 7장에서는 방주로 들어가는 이야기와 홍수가 일어난 상황을 다룬다. 8장은 홍수가 일어나고 물이 줄어들어 방주에서 나와 아라랏산에서 제사를 드리는 장면까지 이어진다. 홍수로 모든 호흡하는 생물이 죽는다. 노아는 방주에서 나와 가장 먼저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드린다.


  • 1-5절 홍수가 끝이 나고 물이 줄어들기 시작함
  • 6-12절 까마귀와 비둘기를 보내 상황을 알아봄
  • 13-19절 방주에서 나오는 노아의 가족
  • 20-22절 하나님께 제사하는 노아



1-5절 홍수가 끝이 나고 물이 줄어들기 시작함


기억하사

이전에는 권념하사이다. 히브리어 '자카르'는 기억하다 마음을 채우다 등으로 생각을 지우지 않고 담아두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노아의 가족을 잊지 않으시고 항상 마음에 두셨다. 하나님께서 기억해 주시는 사람, 그는 세상에서 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이다.


바람을 땅 위에

홍해를 건널 때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종종 해로운 존재지만 이곳에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위하여 사용되고 있다.


하늘의 창문이 닫히고

참으로 멋진 시적 표현이다. 하늘에 창이 있다니.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죄를 지을 때 하늘을 닫으신다. 비를 멈추게 하시고 은혜를 멈추신다.


  • 78:23 그러나 그가 위의 궁창을 명령하시며 하늘 문을 여시고
  • 78:24 그들에게 만나를 비 같이 내려 먹이시며 하늘 양식을 그들에게 주셨나니
  • 78:25 사람이 힘센 자의 떡을 먹었으며 그가 음식을 그들에게 충족히 주셨도다


  • 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이스라엘이 우상에 빠질 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하늘을 닫기도 하고 열기도 하셨다. 이사야 61:1에서 하나님은 하늘을 가르시고 우리에게 오신다. 가르다는 히브리어 카라는 '찟다'는 뜻이다. 하늘을 찢으시고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내려오시는 것이다.


6-12절 까마귀와 비둘기를 보내 상황을 알아봄


일곱 째 달 열 이렛날

  • 호수의 시작은 둘째 달 열이렛날(7:11)이다. 5개월이 흘렀다.
  • 열째달 초하루(1일) 봉우리가 보임
  • 사십일 후 창문을 열고 까마귀를 보냄
  • 육백일 년 첫째 달 초 하룻날 물이 걷힘(13절)
  • 둘째 달 스무 이렛날(27일) 땅이 마름(14절) 방주에서 나옴(16절)
현대 태양력으로 하면 1년 10일을 방주 안에 있었다. 이스라엘 달력은 현대와 조금 다르다.


까마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까마귀다. 아직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지만 율법상 까마귀는 부정한 새다. 하지만 엘리야에게 먹이를 주었듯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하는 새다. 까마귀가 나가서 안 왔다는 말은 오류가 있다. 까마귀는 왕래했다. 즉 나가다 들어오기를 반복했다는 말이다. 까마귀가 부정한 새고 시체를 좋아해 들어오지 않았다는 억지스러운 설교는 하지 마시길...


비둘기

비둘기는 세 번 나갔다. 한 번은 발 붙일 곳이 없어 돌아왔고, 칠 일 후에 나갔을 때는 감람나무 잎을 물고 가져왔다. 생명이 움트기 시작한 것이다. 비둘기는 대한민국에서 해로운 새로 지정되어 있다. 비둘기가 해로운 균을 옮기기 때문이며 특히 비둘기 똥은 마르면서 공기 중으로 해로운 균을 옮긴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도 인간의 편의에 따른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 나갔을 때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유는 모른다. 비둘기가 살만한 환경이 만들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비둘기는 잡식성이다. 곤충이나 벌레, 과일, 곡물 등을 먹는다.


노아는 왜 까마귀와 비둘기를 보냈을까? 궁금해서이다. 언제 비가 그치는지, 땅은 마르고 있는지 등이 궁금했을 것이다.


13-19절 방주에서 나오는 노아의 가족


물이 걷힌 지라

드디어 물이 거의 사라졌다. 일년 가까이 방주에 있던 노아 가족들에게 희소식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물러나고 있는 증거이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은 참으로 안타깝다.


방주에서 나오라

물이 물러가고 땅이 말랐지만 노아는 방주에서 기다렸다.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하나님께서 드디어 노아에게 방주에서 나오도록 명령하신다. 노아는 얼마나 긴장했을까. 세상이 궁금하기도하고 두렵기도 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기까지 방주에서 나오지 않는 노아. 순종의 사람이다.


생육하고 번성하라(17절)

하나님은 아담에게 주었던 복을 노아에게 다시 준다.  하나님의 긍휼이다. 


20-22절 하나님께 제사하는 노아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첫 행위, 그것은 제단을 쌓고 제사하는 일이다. 감사와 희생의 제사였을 것이다. 번제 히브리어 '알라'(עָלָה)는 올리다는 뜻이다. 불을 피워 제물을 드리면 향이 올라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은 노아의 제사를 받으시고 약속하신다. 다시는 사람으로 인해 땅을 저주하지 않을 것이라고. 사람이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에(21절) 홍수가 사람의 본질을 바꾸지 못한다. 후에 노아도 자손들도 하나님께 범죄한다.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님이시다.


창세기 장별 요약 및 장별 강해


창세기 7장 강해

 창세기 7장 개요

6장이 홍수 이전 상황과 노아로 하여금 방주를 만드는 것까지 이야기라면 7장은 홍수의 시작과 과정을 담고 있다. 홍수는 창조 이전의 상황으로 만들어 모든 것이 혼합되고 뒤섞어 버린다. 죄는 반창조로 이끈다. 7장은 이상하리 만치 기이한 날짜가 많다.


  • 1-5절 홍수 직전의 명령
  • 6-12절 홍수의 시작
  • 13-24절 홍수의 과정들


1-5절 홍수 직전의 명령


방주로 들어가라

방주가 지어지고 홍수의 때가 가까워 오자 하나님은 노아와 가족들에게 방주로 들어가라 말한다. 믿음이 필요합니다. 과연 비가 올까? 지금까지도 힘들었지만 이젠 진짜 방주로 들어가야 한다.


내가 보았음이니라

하나님은 노아를 보았다. 우연히 본 것도 아니고 잘 못 본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숨겨진 의도와 목적까지 간파하신다. 하나님께는 비밀이 없다.

  • 4:12-1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요나서에도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자 하나님은 그들을 보시고 징계를 철회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계신다. 하갈이 사라를 피해 도망 갈때도 하나님은 보셨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보고 계시는 감찰하시는 분이시다.


암수 둘씩

생존을 위해서 최소한의 동물들을 준비하신다.


칠 일이면

곧바로 비가 내리지 않는다. 칠 일을 기다려야 한다. 10절에서 방주로 들어간 후 정확히 7일 후 그러니까 한 주의 첫 날 폭우가 쏟아진다. 칠 일은 충만한 시간이자 인내의 시간이다.


노아가 명하신대로

노아는 순종의 사람이다. 그는 오직 믿음으로 행한 사람이다. 자기부인이 없다면 순종은 불가능하다. 우리의 경험과 지식으로 우리는 종종 엄청난 실패와 불행을 맞이하기도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노아는 철저히 하나님의 명령에만 순종했다.


6-12절 홍수의 시작

육백 세

육백이란 나이가 유난히 강조된다. 하지만 홍사건 안에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호하다. 성경 안에서 육은 사람을 뜻한다. 하지만 육 백이 사람을 뜻하는지는 모호하다.


사십 주야

비가 내리는 기간은 사십일이다. 성경에서 40은 고난의 시기, 인내의 시기,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의 준비 기간 등으로 이해된다. 또한 충만을 뜻하기도 한다. 이스라엘의 40년 광야 생활과 엘리야의 40일 동안 도주, 예수님의 40일 금식 등은 고난과 역경의 시기를 뜻한다. 40일의 홍수는 인간들이 완전히 멸절하는 저주의 시간이다.


깊음의 샘 하늘의 창문

은유적 표현이다. 하지만 1장에서 둘 째날 물과 물이 나뉘었다는 것을 기억하다. 하늘의 물이 흘러 내린다면 끔찍하다. 최근들어 우리나라에도 하루에 수백mm가 내리자 도심이 물에 잠기기도 했다. 이것이 40일 동안 계속 된다고 생각해 보라. 정말 무서운 일이다. 하늘뿐 아니라 깊음에서도 물이 솟구쳐 온다면 그야말로 참사다.


13-24절 홍수의 과정들

방주에 들어갔고

방주로 들어간 사람은 노아와 노아의 아내, 세 아들과 세 며느리 모두 8명이다. 베드로 심판에 대해 말하면서 노아의 가족을 언급한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지만 영원히 참지는 않으시다. 심판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다. 물론 준비 되지 않는 자들에게만.

  • 베드로전서 3: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여호와께서 - 문을 받으시니라(16절)

방주의 문을 받은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문은 항상 열려 있지 않다. 문이 닫히면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한다. 그런데 왜 아무도 노아의 가족과 함께 방주로 들어가지 않았을까? 아마도 그들은 노아를 미친 사람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믿음의 길은 종종 미치광이로 보인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문을 닫으면 누구도 구원의 방주로 들어가지 못한다.


방주가 물 위에

엄청난 비가 쏟아지자 방주가 떠 올랐다. 구원을 뜻한다. 죄악을 행하는 모든 사람들이 죽었다. 그들은 비가 쏟아지는 순간까지 홍수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구원은 악에 대한 심판과 함께 이루어진다. 동일한 날, 누군가는 심판을 받고, 누군가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다 죽었더라(22절)

코로 호흡하는 모든 생물은 다 죽었다. 하지만 물속 생물은 죽지 않았다. 홍수 사건에서 악을 행하는 자들은 코로 호흡하는 것과 연결된다. 이 부분은 연구가 필요하다.




창세기 장별 요약 및 장별 강해




창세기 5장 강해

 창세기 5장 개요

5장은 사람들의 번성이다. 악의 계보이든, 셋의 계보이든 번성하고 충만하라는 축복에 순응한다. 5장은 아담과 셋으로 이어지는 계보로 노아의 탄생까지 이어진다. 노아의 홍수는 5장의 족보에 종속되며,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갈등'이 내재되어 있다. 5장의 족보는 하나님의 인내의 시간이자 용서의 기간이다. 하지만 영원하지 않다. 곧 징계가 시작될 것이다. 홍수가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세상을 족보를 통해 드러낸다.


  • 1-5절 아담부터 셋까지
  • 6-24절 셋부터 에녹까지
  • 25-32절 므두셀라부터 노아까지


1-5절 아담부터 셋까지


계보니라

계보는 톨레도트.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필자는 톨레도트는 그리 중요하게 보지 않기 때문에 패스한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자료가 많으니 직접 찾아 보시길. 원어는 "제흐 세페르 톨레도트"(이것은 책이다 계보의)로 기록되어 있다. 긴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것이다. 최초의 창세기가 어디에 적혀있었는지 알 길은 없다. 토판과 양피지 중 하나 일 것이다. 토판이나 파피루스라면 볼륨 형식 것이고, 양피지라면 두루마리 형태일 것이다. 어떻든 1-4장까지 끊어지고, 5장부터 어느 부분까지 이어질 것이다. 다음 톨레도트가 6:9장인 것을 볼 때 노아의 홍수 이전까지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니 넘어가자.

고신대 강화구 논문에서 가져옴


하나님의 모양대로

1장의 내용이 다시 언급된다. 1절의 아담과 사람은 모두 히브리어 '아담'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모양(데무트)대로 만드셨다. 즉 사람은 하나님의 붕어빵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대리한다. 하지만 인간의 타락으로 많은 부분 훼손 되었다. 


복을 주시고

사람이 창조는 6일 째이다. 안식을 제하면 가장 늦은 날이다. 바로 그날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복을 주셨다. 그들을 사람(아담)이라 불렀다. 사람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존재이다. 하지만 타락했다는 하나님의 슬픔이 내재되어 있다. 이것은 5장 전체에 이어진다.


아담은 형상과 같은

아담도 아들을 낳는다. 첫째 아들은 가인이며, 둘째는 아벨이다. 하지만 가인은 살인자가 되어 버려졌고, 아벨은 가인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아담도 하나님처럼 자신을 닮은 아들을 낳는다. 여기서 형상은 1절의 모양과 동일한 단어 데무트이다. 그런데 왜 하나는 모양으로 하나는 형상으로 번역하는지...  세 번째 아들은 셋이다. 모양과 형상은 기원 자체가 하나님께 있음을 말합니다. 아담은 하나님을 닮고, 셋은 아담을 닮고.. 이어지는 족보도 '모양' '형상'이란 단어가 없어도 데무트로 이어질 것을 전제한다.


자녀들을 낳았으며

아담은 셋만 놓고 죽은 것이 아니다. 다른 수많은 자녀들을 낳았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들어난다. 


구백삼십 세

아담이 죽은 나이다. 거의 천년에 가까운 그의 나이는 현재의 나이로 보면 신비롭기 그지 없다. 나이에 너무 과하게 기대지 말고 넘어가자. 우리가 알 수 도 없는 노릇이다.


백삼십 세에

아담이 셋을 낳은 나이다. 그렇다면 가인과 아벨은 언제 낳았을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추측해보면 수십 년이 지났을 수도 있다. 


6-24절 셋부터 에녹까지


셋은

셋도 자녀들을 낳았다. 하지만 모양이나 형상이 없다. 하지만 이미 내재되어 있다. 우리는 계보 이야기를 교회의 확장과 연결 시킬 필요가 있다.

생명은 생명으로 이어진다. 죽음은 생명을 낳지 못하다. 생명은 생명에서 나온다. 하지만 죄인은 죽는다. 죽음은 필연이다. 피할 수 없기에 또 다른 자신을 복제하여 생명을 물려주고 죽음을 맞이 한다. 죄의 값은 사망이다.


야렛은 에녹을 낳았고

에녹이 출생과 승천은 기존의 족보 패턴을 깬다. 출생하고 지내고 죽는다. 하지만 에녹은 태어나 살다 하늘로 올라간다. 죽음을 맞이하지 않는다. 죽지 않고 하늘에 올라간 이는 에녹과 엘리야 두 사람 뿐이다.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하지만 죽지 않는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풀어야 할 숙제다. 죄 값을 누군가 대신 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원죄를 믿지 않는다. 승천은 사람의 한계를 너머 가는 것이다. 후일에 다시 생각해 보자.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동행은 같이 걷다로 '할라크'이다. 하지만 해석 상의 난제가 존재한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과 걸었다는 것이다.


동행이란?

동행이란 뭘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어찌 같이 걸을까? 우리는 이 단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동행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하는 삶을 말한다. 그렇다면 순종은 계명이 전제 된다. 계명이 당시에 존재했을까? 실제로 존재했다. 이 부분은 따로 고민해 보자. 출애굽기를 보면 십계명 이전에도 하나님의 계명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15: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 16:2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25-32절 므두셀라부터 노아까지


므두셀라는

므두셀라의 죽음은 홍수 해와 정확이 맞아 떨어진다. 그가 홍수로 죽은 것인지, 직전에 죽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보수 학자들은 홍수로 죽었다고 믿지 않는다. 하여튼 그는 첫 인류의 종말을 같이 한다.


라멕은

에녹, 라멕은 가인의 후손들에게도 존재한다. 이름은 같지만 너무나 다른 삶을 살아간다. 라멕은 노아를 낳는다. 그는 노아를 낳고 수고하는 이 땅에서 안식을 줄 것이라 말한다. 그가 말하는 안식은 심판을 통한 악으로부터의 쉼을 말할 것이다. 5장의 족보에 등장하는 이들은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승 해 갔을 확율이 높다. 아니면 하나님께서 직접 개인들에게 말씀하셨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노아는

노아의 출생으로 5장이 마무리 된다. 흥미로운 점은 지금까지 한 명 만을 언급하다 노아는 셈 함 야벳 세 명의 자녀를 언급한다.


5장은 

1) 악의 팽창과 세상의 타락이 내밀 하게 숨겨져 있다. 

2) 죽어야 하지만 세대를 거쳐 생명을 이어가게 하신다.

3) 생이 고통임을 보여준다.


창세기 장별 요약 및 장별 강해



창세기 3장 강해

 창세기 3장 개요

첫 사람인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야기가 담겨 있다. 사람의 타락은 뱀의 유혹으로 촉발된다. 작은 의심으로부터 시작하여 계명을 전면적으로 부인하기까지 이른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게 된다. 하지만 여인의 후손을 통한 구원을 약속한다.


  • 1-7절 뱀의 유혹과 인간의 타락
  • 8-21절 하나님의 징계와 저주
  • 22-24절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하와


1-7절 뱀의 유혹과 인간의 타락


간교하다

아롬은 부정적 의미와 부정적 의미가 동시에 사용되는 단어다. 단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지혜가 간교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부분은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바울이 말하는 '양심'의 이중적 의미와도 맞닿아 있다. 어떻든 뱀은 지혜롭다. 예수님도 친히 '뱀처럼 지혜롭고'라고 하셨다. 분명 창세기 3장을 염두에 둔 것이 것이다. 그렇다면 지혜는 어떤 상황을 돌파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안타깝게 뱀은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데 사용한다. 그런 점에서 뱀의 유혹은 악의적이고 사탄적이다.

  •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물어 가로되

질문하면 답해야 한다. 그러므로 질문은 대화를 주도하게 된다. 질문은 그만큼 무섭다. 

어제 학교에 갔었니? 네/아니요

당신이 어제 편의점에서 우유를 훔치지 않았습니까? 네/아니요.

이처럼 질문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교묘하게 속이기도 한다.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질문으로 시작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질문을 받았다. 질문한 사람이 누구인지 의도는 무엇인지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으며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먹지 말라 하더냐

맞는 질문이다. 하지만 저의가 나쁘다. 뱀이 그것을 왜 물을까? 그것은 하와의 마음 속을 테스트하기 위함이다. 질문은 보이지 않는 마음을 끄집어 낸다. 뱀도 하나님의 금지 계명을 알고 있었다. 누구에게 들었을까? 아담에게 들었을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계명을 받고 아내에게 전했고, 다른 동물들에게도 전한 것으로 보인다. 참으로 기묘한 질문이다.


뱀은 상담가처럼 하와에게 접근하다. 뱀의 혀를 달콤하고 부드럽다. 하지만 그 안에 독이 있다. 하아와는 이것을 알았지만 속아 넘어갔다.


여자가 말하되

여자가 뱀에게 대답한다. 그녀는 동산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고 말한다. 아마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외의 열매를 말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들은 먹도록 하셨다. 


만지지도 말라

먹지도 말라는 말씀은 하셨다. 하지만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는 했는지 모른다.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아담이 했을 수도 있고, 하와가 자기 혼자 생각한 것일 수도 있다. 이 대답이 잘못되었다고 해서는 안 된다. 위험한 곳은 접근 금지하듯, 죄를 범할 수 있는 곳은 가지 않는 게 상책이다. 하여튼 하와는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드러낸다. 그녀는 뱀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냈고, 뱀은 그녀의 빈 틈을 파고 들어 독침을 쏜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결코'는 하와를 안심 시키기 위한 뱀의 간교함이다. 뱀은 자신의 거짓을 숨기기 위해 확신을 강조한다. 사기꾼은 항상 자신의 속임수를 감추기 위해 자신이 진실한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자는 거의 대부분 거짓말 쟁이고 사기꾼이다.


하나님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지만 뱀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극단에 선다. 진리와 거짓은 거의 동일하다는 것을 잊지 말라. 


하나님과 같이 되어

뱀의 대답은 지식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과 같은 지식에 이를 것이다. 고대 아담과 하와에 대한 이야기 핵심은 '지식'이다. 특별히 나무에 관한 신화는 지식에 관한 것이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이다. 즉 '알게 하는' 지식이다.

  • 유대교 신비주의 종파인 카발라에서 사용하는 세피로트 나무에 대해 알아보라.


인간의 지식은 경험에서 나온다. 경험되지 않는 지식은 죽은 지식이다.(야고보서 참조)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경험이 아니라 믿음으로 온다.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한 영혼의 창조와 각성으로 구원을 받는다. 믿음은 반드시 행위가 동반된다. 행위 없는 믿음은 귀신의 믿음이다.


뱀의 주장은 '너희가 하나님처럼 되는 것을 하나님이 싫어 하신다'이다. 이 말이 사실일까? 사실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선악을 아는 것을 싫어 하신다. 왜?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뱀의 말은 거짓이 아니라 사실이다. 그럼에도 뱀이 교활한 이유는 하나님의 본래의 의도, 마음을 알려 주지 않고 오해하도록 호도한 것이다. 일부의 사실은 충분히 거짓이 되기도 하고, 속일 수 있다.


여자가 보고

드디어 여자가 본다. 시선은 마음의 방향이다. 보는 것 자체가 아니라 마음이 더 문제다. 하지만 보는 것으로 마음은 더욱 충동적으로 변하고 결국 생각하게 된다. 보니 더 좋아 보였다. 결국 선악과에 손을 댄다. 보고 마음이 더 생기고 결국 행동으로 옮긴다.

견물생심이란 사자성어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눈으로 보면 더 욕심이 발현된다. 그러니 보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차 안에 돈이 보인다면 차 유리를 깨고 돈을 훔치는 경우가 많다.


남편에게도 주매

여자는 혼자만 먹지 않았다. 남편에게도 주었다. 남편도 낼름 받아 먹었다. 아담도 하나님께 불만이 있었다.


아담은 어디 있었나?

우리는 종종 하와 혼자 사고를 쳤다고 생각하지만 아니다. 아담도 그 자리에서 뱀의 말을 듣고 있었다. 4절에서 '너희'라고 했고, 6절에는 '함께 있는'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아담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하다.


돕는 배필이었지만 타락하게 하는 원흉이 된 하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엉뚱하게 사용되었다.


눈이 밝아져

드디어 그들은 정말 하나님처럼 지식이 생겼다.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 인간이 얻는 지식은 경험을 통한 것이다. 좋은 경험이 아니다. 마치 마약을 한 다음, 마약의 고통을 아는 것과 같아 빠져 나올 수가 없다. 참으로 무서운 지식이다. 이러한 지식을 알아서는 안 되는 지식이다. 하지만 사단은 그렇게 우리를 속인다. 그게 너무 좋다. 그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찰나적 쾌락 후 찾아오는 파멸적 삶은 말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일부의 지식은 교묘한 속임수 있 수 있다.


무화과나무 잎

눈이 밝아진 그들은 부끄러워한다. 2:25, 그들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움을 몰랐다. 부끄러움을 가리는 것은 사랑과 긍휼이다. 수치를 인식하는 것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의 자각이자, 악의적 시선에 대한 자각이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무화과나무 잎으로 그들의 치부를 가린다. 하지만 그것은 임시적이며 찰나적이다. 후에 하나님은 가족으로 그곳을 가린다.


8-21절 하나님의 징계와 저주


바람이 불 때

한글개역판은 '서늘하다'고 표현하다. 바람이 맞다. 히브리어는 루아흐로 바람 (하나님의) 영 등으로 번역된다. 즉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며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신 것이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둘이 아닌 하나다. 하와가 아니라 아담에게 종속된 '그의 아내' 즉 '아담의 아내'라는 뜻이다. 여기서는 아담이 대표로 등장한다. 하와가 아니라 아담이 주범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부르시지 하와를 부르시지 않는다.(9절)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아신다. 하지만 부르신다. 알면서 부르신다. 회개의 자리로 나오라는 뜻이다. 죄는 드러난다. 하나님은 우리를 종말의 때에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부르실 것이다. 우리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아담은 하나님을 피해 숨었다. 지옥은 하나님이 보내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피하여 가는 곳이다.


내가 벗었으므로

이건 지식이다. 그의 지식은 두려움을 가져왔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피해 숨었다. 


누가 - 알렸느냐

그 지식은 어디서 왔을까? 하나님께서 물으신다. '내가 네게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금지의 명령을 어김으로 지식을 습득했다. 고통스러운 지식을. 하나님은 그 지식의 출처를 아신다. 타락은 스스로 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유혹이 아니다. 탐심이 죄를 짓게 한다. 탐심은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우상숭배다.


여자가 주므로

아담이 변명하다. 구차하며 비열하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여자가 자신에게 주었다고 한다. 왜 아담은 '제가 잘못 했습니다'라고 하지 않았을까? 죄인이기 때문이다. 죄인들을 자신들의 죄를 경감하기 위해 또 다른 죄를 짓는다. 그러므로 죄는 죄를 부르고, 악은 악을 부른다. 그는 죄의 구렁텅이에 빠졌다.


뱀이 나를 꾀므로

여자에게 묻는다. 여자는 '뱀이 나를 꾀므로' 먹었다고 변명하다. 확실히 부부는 하나다. 여자도 자신이 원인 아니라 뱀에게 원인을 돌린다.


뱀에게 이르시되

뱀에게 묻지 않는다. 물을 필요도 없다. 곧바로 저주하신다. 뱀은 평생 기어 다녀야하며, 흙을 먹게 하신다. 흙은 '아파르'로 아담을 만들 때 사용한 흙이다. 즉 먼지라는 뜻이다. 구약에서 110번 사용된 이 단어는 회개할 때 뒤집이 쓰는 그 먼지이며(수 7:6 티끌), 비참한 상태의 먼지(삼상 2:8)이다. 즉 뱀은 비참한 상태로 살아가야 함을 말하고 있다.


여자에게

하나님은 여자를 징계하신다. 하나는 임신하는 고통과 남편의 다스림이다. 임신하는 기쁨이 아닌 고통이다. 남편을 갈망하지만 결국 다스림을 받는다. 이 부분은 오해의 소지도 많고 깊이 고민할 내용이다.


아담에게

아담에게는 '네게 네 아내의 말을 듣고 - 먹었은즉' 이라는 조건이 달린다. 땅은 저주를 받고, 수고하여 소산을 먹게 될 것이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

흙에서는 먼지를 뜻하는 아파르고, 흙으로 돌아가라는 '아다마'다. 에레츠, 아다마, 아파르 순서를 기억하자. 에레츠는 기업, 지구 등을 뜻하고, 아다마는 토지, 땅을 의미하며, 아파르는 땅 위의 먼지나 티끌이다.


가죽옷

구속사적으로 성경을 해서가는 이들은 이 단어를 너무나 중요하게 본다. 하지만 진보적 성향의 해석가들은 그리 신경쓰지 않는다. 하지만 이 부분은 구속사적 해석이 맞다. 부끄러움을 덮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 전반에서 수치를 덮는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은혜와 구속과 긴밀여 연결된다. 하지만 제물과 연관 시키는 것은 조금 주저된다. 그럼에도 동물이 죽어야 가죽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22-24절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하와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이 회의 하신다. '선악을 아는 일'은 근본적으로 통찰이다. 하지만 인간의 경험은 불안전하다. 잘못된 방법으로 얻은 지식은 자신들을 파멸시킨다. 하나님은 이것을 아신 것이다. 생명나무 열매는 영생을 준다. 후에 생명나무와 저주의 나무가 결합된다. 예를 들어 출애굽 때의 불뱀 나무, 십자가의 나무 등이다. 저주가 생명이다.


땅을 갈게

에덴 동산에서의 풍요로움이 사라진다. 노동은 신성하지만 대가를 치러야 한다.


에덴 동산 동쪽에

사람들은 에덴의 동쪽으로 추방 당한다. 바벨론은 이스라엘의 동쪽이다. 서에서 동으로의 진행은 징계와 저주를, 서에서 동으로의 진행은 구원, 용서, 회복과 관련된다. 특히 창세기 11장을 본라.




창세기 장별 요약 및 장별 강해 목록


창세기 12장

 1. 창세기 12장 개요

창세기 12장은 성경의 시대 구분이나 창세기 안에서의 역사나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장이다. 일반적으로 창세기 1-11장까지를 창조시대로 규명하고, 12장부터는 족장시대로 구분한다. 11장에도 아브람이 등장하지만 명확한 구분은 12장에서 시작된다. 창세기 11장에서 흩어진 바벨 공동체 안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냄으로 시작한다. 마치 무에서 유를 불러내시고, 어둠에서 빛을 내게 하시고, 물속에서 마른땅을 부르시는 창조적 능력과 흡사하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생명의 약속이며, 새로운 것의 '있게 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세기 12장 서론 부분을 읽을 때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이 어떻게 사용되는가를 봐야 한다. 이제 들어가 보자.

창세기 12장 구조

1-12절 하나님이 소명과 순종하는 아브람

13-20절 기근과 애굽에서 당한 일


2. 주해

1-12절 하나님이 소명과 순종하는 아브람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신다. 앞의 '너의' 소유격은 이후의 문장을 이끈다. '너의 고향' '너의 친척'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명하신다. 떠남은 분리이며 관계없음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기 위한 첫 번째 조건으로 '떠남'으로 제시한다. 떠나지 않고 도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의'라는 표현은 지금까지 아브람이 쌓아 놓은 명성, 부, 권위, 관계 등을 벗어나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버리로 혈혈단신으로 가라는 말은 아니다. 아브라함은 부유하며 많은 재산을 가지고 가나안에 도착한다. 물론 이후 더 많은 재물을 얻기를 하지만. 1절은 '너는 독립적인 존재가 되라'라는 뜻이다.

소명은 존재를 규명하고, 존재를 한계 짓는다. 부르심으로 모호한 것이 사라지고 삶의 방향과 목적, 그리고 방식까지 정확하게 정해진다.

*아버지의 집
성경에서 아버지의 집은 다양성을 가지고 있지만 보호와 권위, 그리고 기업을 잇는다는 의미를 포괄적으로 가지고 있다. 아버지를 떠나는 아버지의 집을 떠남과 같다. 이 말은 아버지의 보호를 벗어나 유랑한다. 또는 처량한 신세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또한 아버지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 전체를 뜻하기도 한다.

  • 창세기 20장 13절 하나님이 나를 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 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  창세기 50장 8절 요셉의 온 집과 그의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가고 그들의 어린 아이들과 양 떼와 소 떼만 고센 땅에 남겼으며

창세기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2절을 약속이다. 큰 민족, 이름, 복.이 된다. 민족은 후손이고, 이름은 11장에서 사람들이 '우리들의 이름을 내자'라는 울림이다. 히브리어 셈은 이름이란 뜻인데, 노아의 아들 셈과 11장의이름(셈), 그리고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약속한 이름(셈)은 다분히 언어유희적이다. 창세기 기자는 유명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란 사실을 강조한다.

이후 모세오경은 12장 2절의 주석과도 있다. 때로는 실패한 듯보이고, 때로는 막막해 보이지만 결국 모세오경이 끝날 즈음 거대한 민족이 탄생하고, 아브라함의 이름이 존귀케 되며, 아브라함은 복의 사람이 된다. 하지만 지금은 시작이고 내일이 보지 않는다.

창세기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복을 준다'는 표현이 다시 등장한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고,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를 내린다'고 약속하신다. 아브람을 축복하는 자가 누구일까? 또한 저주하는 자는?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고, 하나님을 거절하는 자들이다. 아브람은 말씀에 순종하는 자이기에 아브람은 곧 하나님이다.
  • 마태복음 10장 25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이러한 맥락은 아브람이 이 땅에서 왕 같은 제사장처럼 살아갈 것을 말한다. 아브람과 하나님은 다르지 않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자신의 이름을 주었다. 마치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것처럼.

아브람으로 인해 땅을 복을 받는다. 아담의 창조와 타락 역시 이 부분을 강조한다. 아담으로 인해 땅이 복을 받고 저주를 받는다. 소명자들은 이땅의 운명을 지고 간다.

창세기 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아브람은 곧 실행에 옮긴다.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다'는 표현은 굉장히 특이하다. 번역은 '따라갔다'라고 했지만 히브리어는 '걷다' '동행하다'의 뜻인 '할라크'이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에서꼭 외어 두어야 할 단어다. 에녹이 하나님께 동행(할라크)한 것처럼 아브라함 역시 하나님을 따랐고(할라크) 하나님과 동행(할라크)한다.

조카 롯도 함께 아브람과 동행한다. 아브람이 권유한 것인지를 확실치 않으나 결국 하나님을 따르는 삶을 함께 동참한다. 롯의 시작은 이처럼 아름답지만 결국 믿음의 길에서 벗어난다.

아브람이 소명을 길을 떠날 때 그의 나이는 75세였다.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었음에도 기꺼이 그 길을 걸었다. 하란에서 떠났다는 표현도 염두에 두자. 후에 이 부분을 다시 언급할 것이다.

창세기 12:5-6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아브람은 아내 사래와 조카 롯을 데리고 가나안에 도착한다.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란 표현은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는 것과 그가 성공한 삶을 살았다는 뜻을 의미한다. 하지만 성공적인 삶이라 할지라도 아브라함은 그곳에 안주하지 않고 믿음의 모험을 떠났다. 

1절에서 '보여줄 땅'에서 5절에서는 '가나안 땅'으로 구체화되었다. 믿음의 삶이란 처음에 모호함과 불투명만이 가득하지만 하루하루 순종의 삶을 통해 구체화된다는 점을 망각하면 된다. 우리는 모든 알고, 모든 것을 이해하고 시작하려 하지만 믿음의 삶은 그렇지 않다. 지금 내가 아는 작은 계명에 순종할 때 더 크고 원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룰 수 있다.

세겜 땅은 후에 에브라임 지파의 것이 된다. 야곱의 딸인 디나가 강간을 당한 곳이기도 하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후에 [성서지리-세겜]에서 다룰 예정이다.
  • 창세기 48:21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 창세기 48:22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세겜 땅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
출애굽 후에 가나안을 정복한 후 요셉의 뼈를 세겜에 묻는다.
  • 여호수아 24장 32절 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 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백 크시타를 주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산 밭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이 구절을 처음 읽을 때 정말 놀랐다.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지만 어느 순간 알 수 없는 답답함이 밀려왔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라고 왔는데 그 땅은 빈 땅도 아니고,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도 아니었다. 그곳에는 그곳의 땅 주인이 따로 있었다. 아브람은 평생은 나그네로 살아가야 했다. 이 부분에대해서는 히브리서 기자가 잘 표현한다.
  • 히브리서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 히브리서 11: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 히브리서 11: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창 12:7-9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가나안 땅에 도착하자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셔서 약속을 하신다.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신다는 것이다. 분명 '네 자손'이라고 했다. 아직 없는, 태어나지 않은 아들을 하나님은 미리 말씀하신다. 아브라함이 이 약속을 들었을 때 얼마나 설렜을까? 

아브람은 약속을 믿고 그곳에 제단을 쌓는다. 굳이 예배로 번역하지 않아도 아브람의 믿음이 얼마니 대단한가를 잘 보여준다. 그는 하나님을 경험한 후 그대로 멈추지 않고 예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를 표했다. 제사는 공짜가 아니다. 자신 소유의 일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양이나 염소 한마리를 현재 돈으로 환산하면 적어도 20-50만 원 정도 가격이다. 요즘이라면 매주마다 이런 예물을 가지고 간다면 아마 폭동이 일어날 것이다.

13-20절 기근과 애굽에서 당한 일


창세기 12:10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놀라운 설명이다. 약속에 땅에도 기근은 온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에 형통만 존재할 거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어쩌면 믿음 이후 더 가정이 어렵고 힘들 수도 있다. 기근을 통해 아브람은 생존 방법을 찾아야 했다. 결국 그는 애굽을 선택한다. 이 부분 역시 안타깝다. 처음 당하는 일이라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왜 기도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 일로 말미암아 아브람은 큰 어려움에 처한다.


창세가 12:11-13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이 부분은 놀랍도 못해 경악스럽다. 물론 현대인의 관점으로 말이다. 아브람은 사래에게 당신을 빼앗으려고 자신을 죽일 수 있다고 말하며, 차라리 먼저 누이라고 거짓말 하겠다고 말한다. 후에 이삭도 부전자전이라고 그대로 따라 한다.
  • 창세기 26장 7절 그 곳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 대하여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내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내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창세기 12:14-17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결국 아브람이 걱정한 일이 그대로 이루어진다. 사실 이 부분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몇 권의 창세기 주석을 봐도 딱히 동의할만한 설명을 못한다. 사래의 얼굴이 검은색톤의 이집트 인에게 하얗게 보여 이쁘게 보였을 것이라는 황당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곳도 있다. 탈북자들이 한국에 내려와 남자의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다고 한다. 그들이 보기에 너무 젊어 보인다고 한다. 잘 먹고 잘살아서? 아니면 사래가 동안이라서? 알 길은 없다. 다만 그렇다는 것이다.

사래가 얼마나 예뻤던지 애굽 사람들이 수근거리 시작했고, 그 소문이 바로에게까지 들린다. 결국 바로가 사래를 데려간다. 대신 사래이 오빠?인 아브람에게 많은 선물을 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바로의 집에 재앙을 내린다. 아브람은 철저히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


창세기 12:18-20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와 함께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깜짝 놀란 바로는 바로 아브람을 불러 야단을 친다. 왜 거짓말을 했냐고. 결국 바로는 재앙을 겪고 나서야 아브람을 내보낸다. 후에 출애굽 사건과 너무나 닮지 않았는가. 지중해 근안에 큰 기근이 오자 야곱의 가족이 요셉의 도움으로 애굽으로 내려가고 430년 후에 모세를 통해 열 가지 재앙이 일어나고 결국 애굽을 나온다. 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많은 재물을 가지고 나온다.
  • 출애굽기 12:35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 출애굽기 12:36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

믿음의 길은 순탄하지만 않다. 때로는 폭풍우도 있고, 사막을 만나기도하고, 목마름과 갈증이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마침내 약속하신 것들을 이루실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환경에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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