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장 개요
첫 사람인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야기가 담겨 있다. 사람의 타락은 뱀의 유혹으로 촉발된다. 작은 의심으로부터 시작하여 계명을 전면적으로 부인하기까지 이른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게 된다. 하지만 여인의 후손을 통한 구원을 약속한다.
- 1-7절 뱀의 유혹과 인간의 타락
- 8-21절 하나님의 징계와 저주
- 22-24절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하와
1-7절 뱀의 유혹과 인간의 타락
간교하다
아롬은 부정적 의미와 부정적 의미가 동시에 사용되는 단어다. 단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지혜가 간교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부분은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바울이 말하는 '양심'의 이중적 의미와도 맞닿아 있다. 어떻든 뱀은 지혜롭다. 예수님도 친히 '뱀처럼 지혜롭고'라고 하셨다. 분명 창세기 3장을 염두에 둔 것이 것이다. 그렇다면 지혜는 어떤 상황을 돌파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안타깝게 뱀은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데 사용한다. 그런 점에서 뱀의 유혹은 악의적이고 사탄적이다.
- 마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물어 가로되
질문하면 답해야 한다. 그러므로 질문은 대화를 주도하게 된다. 질문은 그만큼 무섭다.
어제 학교에 갔었니? 네/아니요
당신이 어제 편의점에서 우유를 훔치지 않았습니까? 네/아니요.
이처럼 질문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교묘하게 속이기도 한다.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질문으로 시작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질문을 받았다. 질문한 사람이 누구인지 의도는 무엇인지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으며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먹지 말라 하더냐
맞는 질문이다. 하지만 저의가 나쁘다. 뱀이 그것을 왜 물을까? 그것은 하와의 마음 속을 테스트하기 위함이다. 질문은 보이지 않는 마음을 끄집어 낸다. 뱀도 하나님의 금지 계명을 알고 있었다. 누구에게 들었을까? 아담에게 들었을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계명을 받고 아내에게 전했고, 다른 동물들에게도 전한 것으로 보인다. 참으로 기묘한 질문이다.
뱀은 상담가처럼 하와에게 접근하다. 뱀의 혀를 달콤하고 부드럽다. 하지만 그 안에 독이 있다. 하아와는 이것을 알았지만 속아 넘어갔다.
여자가 말하되
여자가 뱀에게 대답한다. 그녀는 동산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고 말한다. 아마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외의 열매를 말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들은 먹도록 하셨다.
만지지도 말라
먹지도 말라는 말씀은 하셨다. 하지만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는 했는지 모른다.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아담이 했을 수도 있고, 하와가 자기 혼자 생각한 것일 수도 있다. 이 대답이 잘못되었다고 해서는 안 된다. 위험한 곳은 접근 금지하듯, 죄를 범할 수 있는 곳은 가지 않는 게 상책이다. 하여튼 하와는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드러낸다. 그녀는 뱀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냈고, 뱀은 그녀의 빈 틈을 파고 들어 독침을 쏜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결코'는 하와를 안심 시키기 위한 뱀의 간교함이다. 뱀은 자신의 거짓을 숨기기 위해 확신을 강조한다. 사기꾼은 항상 자신의 속임수를 감추기 위해 자신이 진실한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자는 거의 대부분 거짓말 쟁이고 사기꾼이다.
하나님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지만 뱀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극단에 선다. 진리와 거짓은 거의 동일하다는 것을 잊지 말라.
하나님과 같이 되어
뱀의 대답은 지식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과 같은 지식에 이를 것이다. 고대 아담과 하와에 대한 이야기 핵심은 '지식'이다. 특별히 나무에 관한 신화는 지식에 관한 것이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이다. 즉 '알게 하는' 지식이다.
- 유대교 신비주의 종파인 카발라에서 사용하는 세피로트 나무에 대해 알아보라.
인간의 지식은 경험에서 나온다. 경험되지 않는 지식은 죽은 지식이다.(야고보서 참조)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경험이 아니라 믿음으로 온다.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한 영혼의 창조와 각성으로 구원을 받는다. 믿음은 반드시 행위가 동반된다. 행위 없는 믿음은 귀신의 믿음이다.
뱀의 주장은 '너희가 하나님처럼 되는 것을 하나님이 싫어 하신다'이다. 이 말이 사실일까? 사실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선악을 아는 것을 싫어 하신다. 왜?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뱀의 말은 거짓이 아니라 사실이다. 그럼에도 뱀이 교활한 이유는 하나님의 본래의 의도, 마음을 알려 주지 않고 오해하도록 호도한 것이다. 일부의 사실은 충분히 거짓이 되기도 하고, 속일 수 있다.
여자가 보고
드디어 여자가 본다. 시선은 마음의 방향이다. 보는 것 자체가 아니라 마음이 더 문제다. 하지만 보는 것으로 마음은 더욱 충동적으로 변하고 결국 생각하게 된다. 보니 더 좋아 보였다. 결국 선악과에 손을 댄다. 보고 마음이 더 생기고 결국 행동으로 옮긴다.
견물생심이란 사자성어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눈으로 보면 더 욕심이 발현된다. 그러니 보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차 안에 돈이 보인다면 차 유리를 깨고 돈을 훔치는 경우가 많다.
남편에게도 주매
여자는 혼자만 먹지 않았다. 남편에게도 주었다. 남편도 낼름 받아 먹었다. 아담도 하나님께 불만이 있었다.
아담은 어디 있었나?
우리는 종종 하와 혼자 사고를 쳤다고 생각하지만 아니다. 아담도 그 자리에서 뱀의 말을 듣고 있었다. 4절에서 '너희'라고 했고, 6절에는 '함께 있는'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아담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하다.
돕는 배필이었지만 타락하게 하는 원흉이 된 하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엉뚱하게 사용되었다.
눈이 밝아져
드디어 그들은 정말 하나님처럼 지식이 생겼다.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 인간이 얻는 지식은 경험을 통한 것이다. 좋은 경험이 아니다. 마치 마약을 한 다음, 마약의 고통을 아는 것과 같아 빠져 나올 수가 없다. 참으로 무서운 지식이다. 이러한 지식을 알아서는 안 되는 지식이다. 하지만 사단은 그렇게 우리를 속인다. 그게 너무 좋다. 그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찰나적 쾌락 후 찾아오는 파멸적 삶은 말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일부의 지식은 교묘한 속임수 있 수 있다.
무화과나무 잎
눈이 밝아진 그들은 부끄러워한다. 2:25, 그들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움을 몰랐다. 부끄러움을 가리는 것은 사랑과 긍휼이다. 수치를 인식하는 것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의 자각이자, 악의적 시선에 대한 자각이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무화과나무 잎으로 그들의 치부를 가린다. 하지만 그것은 임시적이며 찰나적이다. 후에 하나님은 가족으로 그곳을 가린다.
8-21절 하나님의 징계와 저주
바람이 불 때
한글개역판은 '서늘하다'고 표현하다. 바람이 맞다. 히브리어는 루아흐로 바람 (하나님의) 영 등으로 번역된다. 즉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며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신 것이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둘이 아닌 하나다. 하와가 아니라 아담에게 종속된 '그의 아내' 즉 '아담의 아내'라는 뜻이다. 여기서는 아담이 대표로 등장한다. 하와가 아니라 아담이 주범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부르시지 하와를 부르시지 않는다.(9절)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아신다. 하지만 부르신다. 알면서 부르신다. 회개의 자리로 나오라는 뜻이다. 죄는 드러난다. 하나님은 우리를 종말의 때에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부르실 것이다. 우리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아담은 하나님을 피해 숨었다. 지옥은 하나님이 보내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피하여 가는 곳이다.
내가 벗었으므로
이건 지식이다. 그의 지식은 두려움을 가져왔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피해 숨었다.
누가 - 알렸느냐
그 지식은 어디서 왔을까? 하나님께서 물으신다. '내가 네게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금지의 명령을 어김으로 지식을 습득했다. 고통스러운 지식을. 하나님은 그 지식의 출처를 아신다. 타락은 스스로 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유혹이 아니다. 탐심이 죄를 짓게 한다. 탐심은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우상숭배다.
여자가 주므로
아담이 변명하다. 구차하며 비열하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여자가 자신에게 주었다고 한다. 왜 아담은 '제가 잘못 했습니다'라고 하지 않았을까? 죄인이기 때문이다. 죄인들을 자신들의 죄를 경감하기 위해 또 다른 죄를 짓는다. 그러므로 죄는 죄를 부르고, 악은 악을 부른다. 그는 죄의 구렁텅이에 빠졌다.
뱀이 나를 꾀므로
여자에게 묻는다. 여자는 '뱀이 나를 꾀므로' 먹었다고 변명하다. 확실히 부부는 하나다. 여자도 자신이 원인 아니라 뱀에게 원인을 돌린다.
뱀에게 이르시되
뱀에게 묻지 않는다. 물을 필요도 없다. 곧바로 저주하신다. 뱀은 평생 기어 다녀야하며, 흙을 먹게 하신다. 흙은 '아파르'로 아담을 만들 때 사용한 흙이다. 즉 먼지라는 뜻이다. 구약에서 110번 사용된 이 단어는 회개할 때 뒤집이 쓰는 그 먼지이며(수 7:6 티끌), 비참한 상태의 먼지(삼상 2:8)이다. 즉 뱀은 비참한 상태로 살아가야 함을 말하고 있다.
여자에게
하나님은 여자를 징계하신다. 하나는 임신하는 고통과 남편의 다스림이다. 임신하는 기쁨이 아닌 고통이다. 남편을 갈망하지만 결국 다스림을 받는다. 이 부분은 오해의 소지도 많고 깊이 고민할 내용이다.
아담에게
아담에게는 '네게 네 아내의 말을 듣고 - 먹었은즉' 이라는 조건이 달린다. 땅은 저주를 받고, 수고하여 소산을 먹게 될 것이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
흙에서는 먼지를 뜻하는 아파르고, 흙으로 돌아가라는 '아다마'다. 에레츠, 아다마, 아파르 순서를 기억하자. 에레츠는 기업, 지구 등을 뜻하고, 아다마는 토지, 땅을 의미하며, 아파르는 땅 위의 먼지나 티끌이다.
가죽옷
구속사적으로 성경을 해서가는 이들은 이 단어를 너무나 중요하게 본다. 하지만 진보적 성향의 해석가들은 그리 신경쓰지 않는다. 하지만 이 부분은 구속사적 해석이 맞다. 부끄러움을 덮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 전반에서 수치를 덮는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은혜와 구속과 긴밀여 연결된다. 하지만 제물과 연관 시키는 것은 조금 주저된다. 그럼에도 동물이 죽어야 가죽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22-24절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하와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이 회의 하신다. '선악을 아는 일'은 근본적으로 통찰이다. 하지만 인간의 경험은 불안전하다. 잘못된 방법으로 얻은 지식은 자신들을 파멸시킨다. 하나님은 이것을 아신 것이다. 생명나무 열매는 영생을 준다. 후에 생명나무와 저주의 나무가 결합된다. 예를 들어 출애굽 때의 불뱀 나무, 십자가의 나무 등이다. 저주가 생명이다.
땅을 갈게
에덴 동산에서의 풍요로움이 사라진다. 노동은 신성하지만 대가를 치러야 한다.
에덴 동산 동쪽에
사람들은 에덴의 동쪽으로 추방 당한다. 바벨론은 이스라엘의 동쪽이다. 서에서 동으로의 진행은 징계와 저주를, 서에서 동으로의 진행은 구원, 용서, 회복과 관련된다. 특히 창세기 11장을 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