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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2장 강해

 사사기 2장 개요


사사기 2장 개요


각 지파별로 자신들이 제비 뽑은 지역을 정복해 나갔지만 완전히 이기지 못하고 일부 가나안 주민을 남겨 두게 됩니다. 이 때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 보김으로 와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책망합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지 말라한 가나안 주민들과 언약을 맺었기에 그들이 옆구의 가시가 되고 그들의 신의 너희에게 올무가 될 것이라 말합니다. 

여호수아가 죽고 다음 세대들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호와의 언쟁을 알지 못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악을 행하고 바알을 섬기자 하나님은 이방 민족들에게 그들을 넘겨 줍니다. 사사기 2장은 사사기의 전체 내용을 요약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 1-5절 여호와의 사자와 보김의 통곡
  • 6-10절 여호수아의 죽음
  • 11-23절 여호와를 버린 이스라엘


1-5절 여호와의 사자와 보김의 통곡


갑자기 여호와의 사자가 찾아옵니다. 그는 길갈에서부터 보김까지 올라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의 말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여 맹세한 땅에 들어오게 했다.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고 그들의 제단을 헐라. 그러나 너희는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았다. 이일로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지 않고 옆구리의 가시와 올무가 되게 하겠다고 말합니다. 이 부분을 좀 더 살펴봅시다.


길갈에서 올라온 선지자


우리는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 올라왔다는 것을 주의해 봐야 합니다. 그가 올라온 길갈은 어떤 곳입니다.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성 앞에서 할례를 행한 곳입니다. 할례를 행하면 고통 때문에 3일 정도는 꼼짝을 하지 못합니다. 만약 그때 가나안 족속이 쳐들어 왔다면 꼼짝없이 당했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의 모험을 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할례를 마쳤고, 이후의 모든 정복 과정 속에서 대 승리를 거두었다. 길갈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첫사랑과 같은 곳입니다. 처음 은혜 받은 곳, 정말 무식했지만 순수했던 열정이 있던 곳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그러한 길갈에서 올라옴으로 안일한 마음으로 가나안 원주민과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가는 그들에게 영적 각성을 일으킨 것입니다.


  • 길갈 : 길갈은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 처음으로 숙식하고 할례를 행한 곳이다. 뜻은 '굴러가다'이다.
  • 보김 : 보김이 정확히 어디지 알 수 없다. 일부 학자들은 실제 지명이 아닌 상징적인 의미로 불려진 곳이 아닌가 추측한다. 이후에 등장한 것을 보면 보김은 이 사건 이후 그 지역이 '보김'으로 불려진 것으로 추측되는 것이 타당하다. 길갈 근처이며, 벧엘과 실로 사이의 어는 곳이다. 보김의 뜻은 '우는 자들'이다.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라


가나안에 오기 전부터 하나님은 이 땅의 거민과 언약을 맺지 못하게 금합니다. 언약은 서로 적당히 타협하며 지내자는 것입니다. 서로 왕래하며 상부상조하자는 것이죠. 그러나 이라한 언약을 맺지 말고 오히려 그들의 가진 제산을 파괴하고 그들을 쫓아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짧은 기간에 그들은 벌써 언약을 맺고 가나안 주민과 친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이스라엘이 어디서 왔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가르치려 했는지를 말합니다.


왜 언약을 맺지 말아야 하는가. 답은 간단합니다. 그것이 더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이런 겁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가나안 주민과 언약을 맺고, 그들의 신들을 섬기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징계합니다. 이것이 사사기의 시작과 끝입니다. 앞으로 사사기는 죄-징계-회개-사사-평안 사이클이 계속 돌아갑니다. 그럼에도 결국 사사기의 마지막은 패망입니다. 암울하기 그지없습니다. 여호와의 사자의 경고를 들은 이스라엘은 크게 웁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우는 자들’이란 뜻의 ‘보김’이라 짓습니다.

구스타보 도레의 보김을 찾은 선지자


 


6-10절 여호수아의 죽음


여호수아의 죽음


다음 이야기는 여호수아의 죽음입니다. 자 보십시오. 3장부터 본격적인 5사이클이 돌아가는데 그러기 전에 모든 것들이 차근차근 준비됩니다. 두 번째는 최고의 권위를 지닌 여호수아의 죽음입니다. 6절은 여호수아가 각 지파를 제비 뽑은 땅으로 보내 싸우게 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7절에서 의미심장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여호수아가 사는 달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일을 본 자들이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여호수아와 가나안 전쟁의 의미를 아는, 그것을 경험한 가나안 1세대가 죽으면 여호와를 섬기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납니다. 결국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습니다.(8절)


여호수아의 무덤은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산 북쪽 딤낫 헤레스입니다. 여호수아서에는 ‘딤낫 세라’로 소개됩니다. 두 곳은 동일한 곳입니다.


  • 여호수아 24:29-30 이 일 후에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를 그의 기업의 경내 딤낫 세라에 장사하였으니 딤낫 세라는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쪽이었더라.


여호수아의 죽음은 권위의 죽음이며, 왕의 부재를 뜻합니다. 여호수아는 왕은 아니었지만 왕적 리더십으로 그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습니다. 모든 장로들이 그의 권위에 순복했습니다. 모세가 죽었을 때 여호수아가 이어 받았지만 여호수아는 가나안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더 이상 후계자를 세울 필요가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안타깝게 이러한 리더십의 부재는 이스라엘을 타락으로 이끄는 이유가 됩니다. 여호수아의 죽음은 사무엘이 등장하기까지 리더십의 부재로 인해 혼돈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물론 사사들이 일부 여호수아의 리더십은 감당하지만 그들의 힘은 미약했고, 체계적이지도 않았습니다.


다른 세대


여호수아의 죽음 이후 사사기 기자는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남깁니다. 바로 ‘다른 세대’(10절)가 일어나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여호와를 알지 못함은 지식이 아닌 경험이며, 비전의 상실입니다. 여호와를 경험하는 것은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또는 위기로부터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경험을 말합니다. 더 이상 큰 전쟁이 없으니 큰 위기도 없으며, 그로 인해 하나님의 기적 또한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평안히 살아갈 좋은 기회였지만, 정말 무서운 위기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여호와를 가르쳐 주기 위해 가나안 거민과 이방민족들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11-23절 여호와를 버린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악행


2장 후반부는 기나긴 이야기는 들려줍니다. 사사기의 전반적인 상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망각한 후 세대가 어떤 일을 행했는가 말합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고, 여호와를 버리고, 가나안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진노하게 합니다. 그들이 섬기 중요한 신들은 바알과 아스다롯입니다. 이러한 악행을 저지르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노략하는 자들의 손에 넘겨줍니다. 또한 그들이 어디고 가는지 하나님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립니다. 결국 보김에서 올라온 여호와의 사자의 예언대로 고통이 더해집니다.


손에 팔다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 속에서 ‘손에 팔다’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마치 물건처럼 누군가에게 팔아버리는 것이죠.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에서 물건이 되어버린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그대로 두지 아니하시고, 사사들을 세워 구원하십니다.(16절) 하지만 그들은 사사들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다시 우상에게로 치우칩니다.

하나님께서 적들과 가나안 족속을 남겨둔 이유는 이것이 이스라엘에게 가시가 되어 여호와께 부르짖게 하려는 것입니다.(18절) 이것을 여호와를 아는 것,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이렇게 힘이 들고 고통스럽다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타락함 심성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떠나려 하지만 그러면 하나님은 이방 민족을 통해 채찍질하심으로 바로 세우십니다.


 
몰렉신에게 경배하는 이스라엘





 


창세기 3장 강해

 창세기 3장 개요

첫 사람인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야기가 담겨 있다. 사람의 타락은 뱀의 유혹으로 촉발된다. 작은 의심으로부터 시작하여 계명을 전면적으로 부인하기까지 이른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게 된다. 하지만 여인의 후손을 통한 구원을 약속한다.


  • 1-7절 뱀의 유혹과 인간의 타락
  • 8-21절 하나님의 징계와 저주
  • 22-24절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하와


1-7절 뱀의 유혹과 인간의 타락


간교하다

아롬은 부정적 의미와 부정적 의미가 동시에 사용되는 단어다. 단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지혜가 간교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부분은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바울이 말하는 '양심'의 이중적 의미와도 맞닿아 있다. 어떻든 뱀은 지혜롭다. 예수님도 친히 '뱀처럼 지혜롭고'라고 하셨다. 분명 창세기 3장을 염두에 둔 것이 것이다. 그렇다면 지혜는 어떤 상황을 돌파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안타깝게 뱀은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데 사용한다. 그런 점에서 뱀의 유혹은 악의적이고 사탄적이다.

  •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물어 가로되

질문하면 답해야 한다. 그러므로 질문은 대화를 주도하게 된다. 질문은 그만큼 무섭다. 

어제 학교에 갔었니? 네/아니요

당신이 어제 편의점에서 우유를 훔치지 않았습니까? 네/아니요.

이처럼 질문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교묘하게 속이기도 한다.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질문으로 시작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질문을 받았다. 질문한 사람이 누구인지 의도는 무엇인지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으며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먹지 말라 하더냐

맞는 질문이다. 하지만 저의가 나쁘다. 뱀이 그것을 왜 물을까? 그것은 하와의 마음 속을 테스트하기 위함이다. 질문은 보이지 않는 마음을 끄집어 낸다. 뱀도 하나님의 금지 계명을 알고 있었다. 누구에게 들었을까? 아담에게 들었을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계명을 받고 아내에게 전했고, 다른 동물들에게도 전한 것으로 보인다. 참으로 기묘한 질문이다.


뱀은 상담가처럼 하와에게 접근하다. 뱀의 혀를 달콤하고 부드럽다. 하지만 그 안에 독이 있다. 하아와는 이것을 알았지만 속아 넘어갔다.


여자가 말하되

여자가 뱀에게 대답한다. 그녀는 동산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고 말한다. 아마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외의 열매를 말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들은 먹도록 하셨다. 


만지지도 말라

먹지도 말라는 말씀은 하셨다. 하지만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는 했는지 모른다.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아담이 했을 수도 있고, 하와가 자기 혼자 생각한 것일 수도 있다. 이 대답이 잘못되었다고 해서는 안 된다. 위험한 곳은 접근 금지하듯, 죄를 범할 수 있는 곳은 가지 않는 게 상책이다. 하여튼 하와는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드러낸다. 그녀는 뱀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냈고, 뱀은 그녀의 빈 틈을 파고 들어 독침을 쏜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결코'는 하와를 안심 시키기 위한 뱀의 간교함이다. 뱀은 자신의 거짓을 숨기기 위해 확신을 강조한다. 사기꾼은 항상 자신의 속임수를 감추기 위해 자신이 진실한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자는 거의 대부분 거짓말 쟁이고 사기꾼이다.


하나님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지만 뱀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극단에 선다. 진리와 거짓은 거의 동일하다는 것을 잊지 말라. 


하나님과 같이 되어

뱀의 대답은 지식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과 같은 지식에 이를 것이다. 고대 아담과 하와에 대한 이야기 핵심은 '지식'이다. 특별히 나무에 관한 신화는 지식에 관한 것이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이다. 즉 '알게 하는' 지식이다.

  • 유대교 신비주의 종파인 카발라에서 사용하는 세피로트 나무에 대해 알아보라.


인간의 지식은 경험에서 나온다. 경험되지 않는 지식은 죽은 지식이다.(야고보서 참조)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경험이 아니라 믿음으로 온다.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한 영혼의 창조와 각성으로 구원을 받는다. 믿음은 반드시 행위가 동반된다. 행위 없는 믿음은 귀신의 믿음이다.


뱀의 주장은 '너희가 하나님처럼 되는 것을 하나님이 싫어 하신다'이다. 이 말이 사실일까? 사실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선악을 아는 것을 싫어 하신다. 왜?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뱀의 말은 거짓이 아니라 사실이다. 그럼에도 뱀이 교활한 이유는 하나님의 본래의 의도, 마음을 알려 주지 않고 오해하도록 호도한 것이다. 일부의 사실은 충분히 거짓이 되기도 하고, 속일 수 있다.


여자가 보고

드디어 여자가 본다. 시선은 마음의 방향이다. 보는 것 자체가 아니라 마음이 더 문제다. 하지만 보는 것으로 마음은 더욱 충동적으로 변하고 결국 생각하게 된다. 보니 더 좋아 보였다. 결국 선악과에 손을 댄다. 보고 마음이 더 생기고 결국 행동으로 옮긴다.

견물생심이란 사자성어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눈으로 보면 더 욕심이 발현된다. 그러니 보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차 안에 돈이 보인다면 차 유리를 깨고 돈을 훔치는 경우가 많다.


남편에게도 주매

여자는 혼자만 먹지 않았다. 남편에게도 주었다. 남편도 낼름 받아 먹었다. 아담도 하나님께 불만이 있었다.


아담은 어디 있었나?

우리는 종종 하와 혼자 사고를 쳤다고 생각하지만 아니다. 아담도 그 자리에서 뱀의 말을 듣고 있었다. 4절에서 '너희'라고 했고, 6절에는 '함께 있는'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아담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하다.


돕는 배필이었지만 타락하게 하는 원흉이 된 하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엉뚱하게 사용되었다.


눈이 밝아져

드디어 그들은 정말 하나님처럼 지식이 생겼다.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 인간이 얻는 지식은 경험을 통한 것이다. 좋은 경험이 아니다. 마치 마약을 한 다음, 마약의 고통을 아는 것과 같아 빠져 나올 수가 없다. 참으로 무서운 지식이다. 이러한 지식을 알아서는 안 되는 지식이다. 하지만 사단은 그렇게 우리를 속인다. 그게 너무 좋다. 그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찰나적 쾌락 후 찾아오는 파멸적 삶은 말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일부의 지식은 교묘한 속임수 있 수 있다.


무화과나무 잎

눈이 밝아진 그들은 부끄러워한다. 2:25, 그들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움을 몰랐다. 부끄러움을 가리는 것은 사랑과 긍휼이다. 수치를 인식하는 것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의 자각이자, 악의적 시선에 대한 자각이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무화과나무 잎으로 그들의 치부를 가린다. 하지만 그것은 임시적이며 찰나적이다. 후에 하나님은 가족으로 그곳을 가린다.


8-21절 하나님의 징계와 저주


바람이 불 때

한글개역판은 '서늘하다'고 표현하다. 바람이 맞다. 히브리어는 루아흐로 바람 (하나님의) 영 등으로 번역된다. 즉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며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신 것이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둘이 아닌 하나다. 하와가 아니라 아담에게 종속된 '그의 아내' 즉 '아담의 아내'라는 뜻이다. 여기서는 아담이 대표로 등장한다. 하와가 아니라 아담이 주범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부르시지 하와를 부르시지 않는다.(9절)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아신다. 하지만 부르신다. 알면서 부르신다. 회개의 자리로 나오라는 뜻이다. 죄는 드러난다. 하나님은 우리를 종말의 때에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부르실 것이다. 우리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아담은 하나님을 피해 숨었다. 지옥은 하나님이 보내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피하여 가는 곳이다.


내가 벗었으므로

이건 지식이다. 그의 지식은 두려움을 가져왔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피해 숨었다. 


누가 - 알렸느냐

그 지식은 어디서 왔을까? 하나님께서 물으신다. '내가 네게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금지의 명령을 어김으로 지식을 습득했다. 고통스러운 지식을. 하나님은 그 지식의 출처를 아신다. 타락은 스스로 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유혹이 아니다. 탐심이 죄를 짓게 한다. 탐심은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우상숭배다.


여자가 주므로

아담이 변명하다. 구차하며 비열하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여자가 자신에게 주었다고 한다. 왜 아담은 '제가 잘못 했습니다'라고 하지 않았을까? 죄인이기 때문이다. 죄인들을 자신들의 죄를 경감하기 위해 또 다른 죄를 짓는다. 그러므로 죄는 죄를 부르고, 악은 악을 부른다. 그는 죄의 구렁텅이에 빠졌다.


뱀이 나를 꾀므로

여자에게 묻는다. 여자는 '뱀이 나를 꾀므로' 먹었다고 변명하다. 확실히 부부는 하나다. 여자도 자신이 원인 아니라 뱀에게 원인을 돌린다.


뱀에게 이르시되

뱀에게 묻지 않는다. 물을 필요도 없다. 곧바로 저주하신다. 뱀은 평생 기어 다녀야하며, 흙을 먹게 하신다. 흙은 '아파르'로 아담을 만들 때 사용한 흙이다. 즉 먼지라는 뜻이다. 구약에서 110번 사용된 이 단어는 회개할 때 뒤집이 쓰는 그 먼지이며(수 7:6 티끌), 비참한 상태의 먼지(삼상 2:8)이다. 즉 뱀은 비참한 상태로 살아가야 함을 말하고 있다.


여자에게

하나님은 여자를 징계하신다. 하나는 임신하는 고통과 남편의 다스림이다. 임신하는 기쁨이 아닌 고통이다. 남편을 갈망하지만 결국 다스림을 받는다. 이 부분은 오해의 소지도 많고 깊이 고민할 내용이다.


아담에게

아담에게는 '네게 네 아내의 말을 듣고 - 먹었은즉' 이라는 조건이 달린다. 땅은 저주를 받고, 수고하여 소산을 먹게 될 것이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

흙에서는 먼지를 뜻하는 아파르고, 흙으로 돌아가라는 '아다마'다. 에레츠, 아다마, 아파르 순서를 기억하자. 에레츠는 기업, 지구 등을 뜻하고, 아다마는 토지, 땅을 의미하며, 아파르는 땅 위의 먼지나 티끌이다.


가죽옷

구속사적으로 성경을 해서가는 이들은 이 단어를 너무나 중요하게 본다. 하지만 진보적 성향의 해석가들은 그리 신경쓰지 않는다. 하지만 이 부분은 구속사적 해석이 맞다. 부끄러움을 덮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 전반에서 수치를 덮는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은혜와 구속과 긴밀여 연결된다. 하지만 제물과 연관 시키는 것은 조금 주저된다. 그럼에도 동물이 죽어야 가죽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22-24절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하와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이 회의 하신다. '선악을 아는 일'은 근본적으로 통찰이다. 하지만 인간의 경험은 불안전하다. 잘못된 방법으로 얻은 지식은 자신들을 파멸시킨다. 하나님은 이것을 아신 것이다. 생명나무 열매는 영생을 준다. 후에 생명나무와 저주의 나무가 결합된다. 예를 들어 출애굽 때의 불뱀 나무, 십자가의 나무 등이다. 저주가 생명이다.


땅을 갈게

에덴 동산에서의 풍요로움이 사라진다. 노동은 신성하지만 대가를 치러야 한다.


에덴 동산 동쪽에

사람들은 에덴의 동쪽으로 추방 당한다. 바벨론은 이스라엘의 동쪽이다. 서에서 동으로의 진행은 징계와 저주를, 서에서 동으로의 진행은 구원, 용서, 회복과 관련된다. 특히 창세기 11장을 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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