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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4장 강해

 

광야의 식탁과 풍랑의 바다 위에 서신 긍휼의 왕

마태복음 14장은 하나님 나라의 왕이 어떤 분이신지를 세 장면으로 보여 줍니다. 헤롯의 궁정에서는 하나님의 선지자가 죽임을 당하고, 광야에서는 주님이 굶주린 무리를 먹이시며, 밤바다에서는 제자들이 두려움 가운데 주님을 만납니다. 이 장의 중심 명제는 분명합니다. 세상의 권세는 두려움과 욕망으로 의인을 죽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긍휼과 주권으로 자기 백성을 먹이시고 지키시는 참된 왕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불의한 세상과 흔들리는 현실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통치를 믿고, 그분께 순종하며,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예배해야 합니다.

두려움의 왕궁에서 드러난 죄의 권세와 선지자의 증언(마 14:1-12)

마태복음 14장은 “그 때에 분봉 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여기서 헤롯은 헤롯 대왕이 아니라 갈릴리와 베뢰아 지역을 다스리던 헤롯 안티파스로 이해됩니다. 개역개정의 “분봉 왕”은 헬라어 테트라아르케스(τετραάρχης, 테트라아르케스)로, 본래 한 지역의 네 분의 일 통치자를 뜻하지만 당시에는 로마의 승인 아래 제한된 권력을 행사하는 지방 통치자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습니다. 그는 왕처럼 보였지만 참된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권세는 로마의 허락 위에 있었고,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헤롯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신하들에게 말합니다. “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도다.” 그의 말은 신앙고백이 아니라 불안한 양심의 소리입니다. 그는 요한을 죽였고, 그 죽음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묻어 둔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 양심은 시간이 지나도 완전히 잠들지 않습니다. 헤롯은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메시아를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죽인 요한을 떠올렸습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도 자기 두려움의 그림자 속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마태는 이제 세례 요한의 죽음을 회상 형식으로 설명합니다. 헤롯이 그의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에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습니다. 요한이 “당신이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이 옳지 않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옳지 않다”는 말은 단순한 개인 의견이 아닙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왕의 죄를 지적했습니다. 선지자는 권세자에게 아첨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왕도 백성도 함께 세우는 사람입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백성에게 회개를 외쳤고, 궁정 앞에서도 같은 말씀을 증언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가난한 사람에게만 엄격하고 권력자에게는 침묵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요한의 증언은 불편했습니다. 헤롯은 요한을 죽이려 했지만 무리를 두려워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두려워하다”와 관련된 헬라어 포베오마이(φοβέομαι, 포베오마이)는 공포나 경외, 혹은 사람을 의식하는 두려움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헤롯의 문제는 두려움이 없다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했고, 진리보다 체면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죄는 사람을 대담하게 만드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깊은 두려움의 종으로 만듭니다.

헤롯의 생일 잔치에서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했습니다. 헤롯은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합니다. 왕궁의 잔치는 화려했지만 그 안에는 욕망과 허세와 경솔한 맹세가 가득했습니다. 맹세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을 세우기 위한 것이어야 하지만, 죄인의 입에서는 자기 체면을 붙들기 위한 올무가 될 수 있습니다. 헤롯은 자기 말의 무게를 감당할 의로움이 없었습니다. 그는 왕의 옷을 입고 있었지만 자기 욕망과 사람들의 시선에 끌려가는 노예였습니다.

헤로디아의 딸은 어머니의 지시를 받아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여기서 내게 주소서”라고 요구합니다. 이 장면은 매우 어둡습니다. 생일 잔치, 춤, 맹세, 소반이라는 일상적이고 화려한 요소들이 의인의 피와 결합됩니다. 마태는 이 잔혹함을 과장된 감정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절제된 문장으로 죄의 무서움을 보여 줍니다. 죄는 때로 광기처럼 폭발하지만, 때로는 잔치의 절차와 왕궁의 예법 속에서 차갑게 실행됩니다.

왕은 근심했지만 자기 맹세와 함께 앉은 사람들 때문에 주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헤롯의 근심은 회개가 아닙니다. 참된 회개는 죄의 실행을 멈추고 하나님께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헤롯은 근심하면서도 죄를 행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비참함입니다. 죄가 나쁜 줄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고, 말씀을 들으면서도 자기 체면을 선택하며, 양심의 경고를 받으면서도 사람들의 평가를 더 두려워합니다. 개혁주의가 말하는 인간의 전적 부패는 사람이 언제나 가능한 한 최악의 행동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가 인간의 지성, 감정, 의지, 관계, 권력 사용 전체를 왜곡하여 하나님께 순종할 능력과 뜻을 잃게 한다는 뜻입니다. 헤롯은 바로 그 왜곡된 인간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요한은 옥에서 목 베임을 당합니다. 그의 머리는 소반에 얹혀 소녀에게 주어지고, 소녀는 그것을 어머니에게 가져갑니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세상의 잔치에서 이렇게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 죽음이 하나님의 실패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요한의 죽음은 세상 권세의 폭력성을 드러내고, 동시에 예수님의 길을 어둡게 예고합니다. 요한은 메시아가 아닙니다. 요한의 죽음을 예수님의 죽음과 세부적으로 무리하게 동일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흐름에서 의로운 선지자가 악한 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사건은, 장차 의로우신 그리스도께서 불의한 재판과 조롱 속에서 십자가로 가실 길을 독자에게 생각하게 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예수께 알립니다. 이 마지막 장면은 조용하지만 깊습니다. 제자들은 스승의 시신을 거두었습니다. 악한 권세는 선지자의 목소리를 끊은 듯 보였지만, 그의 증언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 있었고, 그의 죽음은 헤롯의 궁정이 얼마나 어두운지를 드러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에서 항상 안전하게 보호받는 방식으로만 인도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증인을 잊지 않으십니다. 순교와 고난은 하나님이 무력하시다는 증거가 아니라, 죄악의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타협하지 않고 증언된다는 표지입니다.

이 단락은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두려워합니까. 하나님입니까, 사람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지키려고 합니까. 진리입니까, 체면입니까. 헤롯의 궁정은 멀리 있는 정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 안에도 작은 왕궁이 있습니다. 그 안에서 욕망이 춤추고, 체면이 맹세하며, 양심이 근심하면서도 진리를 침묵시킬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처럼 담대해야 한다는 도덕적 결심만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헤롯의 두려움을 이길 더 큰 왕이 필요합니다. 사람의 평가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귀히 여기게 하시는 은혜, 죄를 근심만 하다가 실행하지 않고 진정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빈 들에서 자기 백성을 먹이시는 긍휼의 왕(마 14:13-21)

예수님은 요한의 죽음 소식을 들으시고 배를 타고 따로 빈 들에 가십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내면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어떤 감정으로 물러가셨는지를 지나치게 상상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마태는 예수님이 홀로 계시려는 자리로 물러가셨다는 것과, 무리가 그 소식을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헤롯의 궁정에서는 죽음의 잔치가 벌어졌고, 이제 빈 들에서는 생명의 식탁이 펼쳐집니다. 이 두 장면은 강하게 대조됩니다.

예수님은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십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기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 스플랑크니조마이)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움직이는 긍휼을 뜻합니다. 단순한 동정이나 순간적 감상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긍휼은 행동하는 긍휼입니다. 그분은 무리를 보시고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병든 자들을 고치십니다. 세상의 권세자는 자기 잔치와 체면을 지키기 위해 의인을 죽이지만, 참 왕이신 예수님은 굶주리고 병든 무리를 보시고 생명을 베푸십니다.

저녁이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말합니다.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제자들의 말은 현실적으로 보입니다. 빈 들에는 먹을 것이 없고, 시간은 늦었습니다. 그들은 문제를 정확히 보았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는 아직 충분히 보지 못했습니다. 현실 인식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현실 인식이 주님의 능력을 계산 밖에 두면 믿음은 쉽게 인간적 합리성 안에 갇힙니다.

예수님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을 난처하게 하시는 말이 아니라, 그들을 하나님 나라의 사역 안으로 참여시키시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뿐”이라는 말 속에 인간의 한계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 “뿐”은 끝이 아닙니다. 주님의 손에 올려질 때, 우리의 부족함은 은혜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작은 헌신이 하나님의 능력을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부족한 것을 사용하셔서 자신의 풍성함을 드러내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신앙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부족한 것을 감추지 않고 주님께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충분해진 뒤에야 주님께 쓰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족한 그대로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다섯 개와 두 마리는 무리를 먹이기에 턱없이 부족했지만, 주님께 가져온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제자들의 계산 안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권능과 긍휼 안에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십니다. 그리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시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십니다. “축사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율로게오(εὐλογέω, 율로게오)는 복을 빌거나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뜻을 가집니다.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께 감사와 찬송의 자세로 음식을 받으십니다. 그분의 능력은 아버지와 분리된 독자적 과시가 아닙니다. 성자께서는 아버지의 뜻 안에서 자기 백성을 먹이십니다. 삼위 하나님의 구원 경륜 안에서 예수님의 사역은 언제나 아버지께 대한 순종과 신뢰 속에 있습니다.

주님은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고, 제자들은 무리에게 줍니다. 여기서 ‘떡’은 헬라어 아르토스(ἄρτος, 아르토스)입니다. 본문은 이 사건을 단순한 상징으로만 축소하지 않습니다. 실제 굶주림이 있었고, 실제 먹이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동시에 더 깊은 성경적 울림을 가집니다.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주셨던 일이 떠오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 적은 음식으로 많은 사람이 먹었던 사건들도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순히 옛 선지자들 중 하나가 아닙니다. 그분은 광야에서 자기 백성을 먹이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능력을 몸소 드러내시는 왕입니다.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습니다.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남자만 오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마태는 숫자를 통해 사건의 풍성함을 강조합니다. “배불리” 먹었다는 말은 겨우 허기를 면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의 공급은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남은 조각 열두 바구니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떠올리게 할 수 있으며, 적어도 하나님 나라의 공급이 결핍이 아니라 충만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계산보다 크시고, 결핍보다 풍성하십니다.

이 사건을 단순히 “나눔의 기적”으로만 해석하면 본문의 중심이 흐려집니다. 물론 제자들이 가진 것을 주님께 가져왔고, 주님은 그것을 통해 무리를 먹이셨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주체는 제자들의 나눔 정신이 아니라 예수님의 긍휼과 능력입니다. 복음은 인간의 선한 마음을 확대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무능한 인간 가운데 오신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먹이시는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은 분배자로 쓰임 받았지만, 떡의 근원은 주님께 있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생명의 떡을 만들어 내는 기관이 아닙니다. 주님께 받은 것을 나누는 공동체입니다.

이 장면은 성찬의 언어를 직접 제정하는 본문은 아니지만, 마태복음 전체의 흐름에서 예수님이 떡을 가지시고 축사하시고 떼어 주시는 모습은 장차 마지막 만찬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성급하게 이 본문을 성찬 제정으로 동일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 자체가 먼저 말하는 것은 광야의 무리를 향한 예수님의 긍휼과 왕적 공급입니다. 다만 정경적·구속사적으로 보면, 자기 백성을 먹이시는 예수님의 사역은 결국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내어 주시는 구원의 절정으로 나아갑니다. 그분은 떡을 주시는 분일 뿐 아니라, 생명의 떡이 되시는 분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도 빈 들이 있습니다. 시간이 저물고, 가진 것은 적고, 사람들의 필요는 커 보이는 자리입니다. 가정의 빈 들, 교회의 빈 들, 마음의 빈 들, 사역의 빈 들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제자들처럼 “여기 있는 것은 이것뿐입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부족을 모르고 명령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부족함을 아시면서도 “내게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믿음은 부족함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함을 주님의 손에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자기 백성을 먹이시는 방식으로 우리의 계산을 넘어서는 은혜를 드러내십니다.

풍랑 위를 걸으시는 하나님의 아들 앞에서 배우는 믿음과 예배(마 14:22-36)

예수님은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그동안 무리를 보내십니다. 그리고 무리를 보내신 뒤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십니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셨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큰 사건 뒤에 예수님은 사람들의 열광 속에 머물지 않으시고 아버지 앞에 홀로 서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이 군중의 반응에 의해 움직이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사람들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으시지만, 사람들의 기대에 붙잡히지도 않으십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 안에서 사역하십니다.

한편 배는 이미 육지에서 멀리 떠나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합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명령을 따라 배를 탔습니다. 그런데 순종의 길에도 풍랑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도의 고난을 무조건 불순종의 결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재촉받아 배에 올랐고, 그 길에서 바람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순종의 길도 때로 어둡고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내신 길이라면, 주님은 그 풍랑 속에서도 자기 백성을 잊지 않으십니다.

밤 사경에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밤 사경은 새벽 깊은 시간대를 가리킵니다. 가장 어둡고 지친 때, 제자들이 바람과 물결에 시달릴 때 주님이 오십니다. 바다는 성경에서 종종 혼돈과 두려움의 이미지로 나타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바다를 다스리시는 창조주로 계시됩니다.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으시는 장면은 그분이 단순한 선생이나 기적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창조 질서를 다스리시는 주권자이심을 드러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즉시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여기서 “안심하라”는 말은 헬라어 다르세이테(θαρσεῖτε, 다르세이테)로, 용기를 내라는 뜻입니다. “나니”는 헬라어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 에고 에이미)입니다. 이 표현은 문맥에 따라 단순히 “나다”라는 자기 확인의 뜻으로 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다 위에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주시는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임재와 주권을 깊이 떠올리게 합니다. 주님은 풍랑을 설명하기보다 먼저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믿음은 풍랑의 원인을 다 아는 데서 시작되지 않고, 풍랑 속에 오시는 주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데서 시작됩니다.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베드로의 말은 믿음과 연약함이 함께 섞인 모습으로 보입니다. 그는 주님께 나아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만일”이라는 표현 속에는 아직 흔들림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라”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갑니다.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스스로 용감해서 물 위를 걸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걸었다는 점입니다. 믿음은 자기 확신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갑니다. 그는 소리 질러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합니다. 이 짧은 기도는 신앙의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구원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소조(σῴζω, 소조)는 위험에서 건지다, 구원하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긴 설명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믿음이 약해질 때도 성도에게 남아야 할 것은 주님께 부르짖는 방향입니다. 물에 빠지는 순간에도 주님을 향해 외치는 사람은 버려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십니다. 그리고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하십니다. “믿음이 작은 자”는 헬라어 올리고피스토스(ὀλιγόπιστος, 올리고피스토스)로, 믿음이 전혀 없는 자가 아니라 믿음이 작고 흔들리는 자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책망은 베드로를 버리기 위한 정죄가 아닙니다. 그를 붙잡으신 뒤 주시는 회복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먼저 손을 내미시고, 그 다음 믿음의 연약함을 다루십니다. 이것이 은혜의 질서입니다. 주님은 물에 빠진 제자를 설교로만 건지지 않으십니다. 손으로 붙잡으시고, 말씀으로 믿음을 세우십니다.

예수님과 베드로가 배에 함께 오르자 바람이 그칩니다.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말합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여기서 “절하다”는 헬라어 프로스퀴네오(προσκυνέω, 프로스퀴네오)로, 경배하거나 엎드려 존경을 나타내는 행위를 뜻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이 고백은 매우 중요합니다. 제자들은 떡을 먹은 무리처럼 배부름만 경험한 것이 아니라, 풍랑 속에서 예수님의 신적 권위를 보고 예배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하나님 나라의 목적은 단지 우리의 필요가 채워지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필요와 두려움의 자리에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그분을 예배하는 데 있습니다.

그들이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릅니다. 그곳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려옵니다. 그리고 다만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습니다. “옷자락”은 헬라어 크라스페돈(κράσπεδον, 크라스페돈)으로, 옷의 가장자리나 술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의 권능이 얼마나 풍성하게 흘러나가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핵심은 옷자락 자체의 마술적 효능이 아닙니다. 병든 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왔고, 주님은 그들을 고치셨습니다. 믿음은 물건에 능력이 있다고 붙드는 미신이 아니라, 예수님께 긍휼과 권능이 있음을 알고 그분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단락은 광야의 식탁과 바다의 풍랑을 하나로 묶습니다. 예수님은 빈 들에서 무리를 먹이시는 왕이시고, 바다 위에서 제자들을 찾아오시는 주님이시며, 게네사렛에서 병든 자를 고치시는 긍휼의 구주이십니다. 그분의 통치는 궁정의 권력처럼 두려움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분의 권위는 생명을 살리고, 연약한 믿음을 붙들며, 병든 자를 회복시키는 권위입니다. 그리고 그 권위의 절정은 십자가에서 드러납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을 먹이시기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시고, 죄와 죽음의 깊은 바다 속으로 들어가셨다가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참된 구원으로 건져 내셨습니다.

오늘 성도는 풍랑 없는 삶을 약속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말씀을 따라 배에 올랐는데도 바람이 거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풍랑을 최종 현실로 보지 않습니다. 풍랑 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을 봅니다. 때로 우리는 베드로처럼 주님을 바라보다가도 바람을 보고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작아지고 의심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손은 우리의 믿음이 충분히 강해진 뒤에야 내밀어지는 손이 아닙니다. 빠져 가는 자를 즉시 붙잡으시는 은혜의 손입니다.

결론

마태복음 14장은 세상의 왕과 하나님 나라의 왕을 대조합니다. 헤롯은 두려움과 욕망에 사로잡혀 의로운 선지자를 죽였지만, 예수님은 긍휼로 병든 자를 고치시고 빈 들의 무리를 먹이셨으며 풍랑 속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세상 권세는 잔치 자리에서도 죽음을 만들지만, 그리스도는 빈 들에서도 생명의 식탁을 여십니다. 제자들은 부족한 떡과 물고기 앞에서 한계를 보았고, 밤바다에서는 바람을 보고 두려워했지만, 주님은 그 한계와 두려움 속에서 자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내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의 시선과 체면을 두려워하는 헤롯의 길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부족한 것을 주님께 가져가고, 풍랑 속에서도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작아 흔들릴 때에도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부르짖으십시오. 주님은 상한 자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굶주린 자를 먹이시며, 빠져 가는 제자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오늘도 그리스도의 긍휼과 주권을 신뢰하며, 두려움이 아니라 예배로 주님께 응답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 13장 강해

감추어진 씨앗으로 임하는 나라와 드러날 영광의 추수

마태복음 13장은 예수님의 사역이 점점 더 선명한 반응의 갈림길로 들어가는 자리에서 주어진 말씀입니다. 12장에서 종교 지도자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나타난 하나님 나라를 보고도 완고하게 거부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바닷가에 앉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이 장의 중심 명제는 분명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씀의 씨앗으로 은밀하게 시작되지만,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에게는 그 비밀이 열리고, 마지막 날에는 참된 열매와 거짓된 반응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말씀의 씨앗 앞에서 드러나는 마음과 하나님 나라의 비밀(마 13:1-23)

마태복음 13장은 “그 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라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집에서 바닷가로, 가까운 자리에서 넓은 무리의 자리로 장면이 열립니다. 큰 무리가 모여들자 예수님은 배에 올라 앉으시고 무리는 해변에 섭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풍경 묘사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선생으로 앉아 말씀하시고, 무리는 듣는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같은 말씀을 듣는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마태복음 13장은 바로 그 신비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갈릴리 주변의 농경 현실을 떠올리게 하는 비유입니다. 씨는 여러 곳에 떨어집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는 새들이 와서 먹어 버립니다.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진 씨는 곧 싹이 나지만 뿌리가 없어 해가 돋은 뒤 말라 버립니다. 가시떨기 위에 떨어진 씨는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겉으로 보면 농부의 일상적인 풍경이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비유’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볼레(παραβολή, 파라볼레)는 어떤 사실을 곁에 놓아 비교하게 하는 말입니다. 비유는 단순히 쉬운 예화만은 아닙니다. 듣는 자의 마음을 드러내는 말씀의 형식입니다. 마음이 열린 자에게 비유는 하나님 나라를 보게 하는 창이 되지만, 완고한 자에게는 오히려 자신이 보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거울이 됩니다. 예수님은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듣는다는 것은 소리를 인식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말씀 앞에서 마음을 열고 하나님께 응답하는 전인격적 들음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예수님의 대답은 매우 중요합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비밀’에 해당하는 헬라어 뮈스테리온(μυστήριον, 뮈스테리온)은 인간이 스스로 추리하여 찾아내는 감추어진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하실 때 알게 되는 구원의 뜻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지혜와 종교적 열심으로 자동으로 이해되는 세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열어 주셔야 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책임을 지우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깨닫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니에미(συνίημι, 쉬니에미)는 단순히 정보를 아는 것이 아니라 뜻을 함께 붙잡아 이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백성의 마음은 완악하여졌고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겼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계시가 부족한 데 있지 않고, 하나님께 돌이키기를 싫어하는 마음의 둔함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완고함을 심판 가운데 드러내시고, 동시에 자기 백성에게는 은혜로 들을 귀와 볼 눈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라고 하십니다. 이 복은 제자들의 지적 능력이나 도덕적 우월성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은혜로 허락된 복입니다.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보고자 해도 보지 못하고 듣고자 해도 듣지 못한 것을 제자들은 보고 듣습니다. 구약의 약속과 예언이 바라보던 하나님 나라의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 앞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전체의 흐름에서 보면, 하나님은 창세 이후 언약을 따라 자기 백성을 보존하시고,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주신 약속을 따라 메시아를 보내셨습니다. 이제 그 약속의 왕이 말씀의 씨앗을 뿌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를 풀어 주십니다. 길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는 것입니다. 말씀은 들렸지만 마음속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단단한 길처럼 마음이 굳어 있으면 말씀은 표면에 머뭅니다. 이때 악한 자는 말씀의 씨를 빼앗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적 전쟁의 현실을 봅니다. 복음 선포는 단순한 강연이나 지식 전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마음에 뿌려질 때, 사탄은 그 말씀을 빼앗으려 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는 일은 거룩한 싸움입니다.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지만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 넘어지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넘어지다’와 연결되는 헬라어 스칸달리조(σκανδαλίζω, 스칸달리조)는 걸려 넘어지거나 실족한다는 뜻입니다. 처음의 감정적 반응이 참된 믿음의 깊이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뿌리 없는 기쁨은 고난 앞에서 쉽게 마릅니다. 신앙은 순간의 감동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뿌리내리는 생명입니다. 개혁주의 신앙은 참된 믿음이 하나님의 보존하시는 은혜 안에서 끝까지 견디게 된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 고백은 얕은 신앙을 방치하는 핑계가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말씀에 깊이 뿌리내리게 하는 부르심입니다.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염려’는 마음을 여러 방향으로 찢어 놓고, ‘재물의 유혹’은 하나님 아닌 것을 안전의 근거로 삼게 합니다. 말씀은 들었으나 마음의 밭에 다른 주인들이 함께 자랍니다. 그 결과 말씀의 기운이 막힙니다. 이것은 노골적인 불신앙보다 더 조용하고 위험한 모습일 수 있습니다. 예배도 드리고 말씀도 들으나, 실제 마음의 중심은 염려와 욕망이 차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런 나뉜 마음을 드러냅니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입니다. 그는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를 맺습니다. 여기서 결실의 차이는 성도들 사이의 우열을 세우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받아들여질 때 반드시 생명의 열매를 맺는다는 뜻입니다. 좋은 땅은 스스로 자신을 좋은 땅으로 만든 인간의 공로를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 전체의 빛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실 때 말씀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본문은 듣는 자의 책임을 분명히 합니다. 듣고 깨닫고 열매 맺어야 합니다.

이 첫 단락은 우리에게 매우 실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말씀을 어떤 마음으로 듣고 있습니까. 길가처럼 굳은 마음입니까, 돌밭처럼 얕은 마음입니까, 가시떨기처럼 나뉜 마음입니까, 좋은 땅처럼 말씀을 받아 결실하는 마음입니까. 이 질문은 우리를 절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정직하게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씀의 씨앗으로 임합니다. 그 씨앗은 작아 보이지만 생명을 품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말씀 앞에서 마음이 드러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말씀을 뿌리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그 말씀을 통해 굳은 마음을 갈아엎고, 얕은 마음을 깊게 하시며, 염려와 욕망의 가시를 뽑아 내십니다.

감추어진 성장 속에서도 반드시 이루어질 왕의 추수(마 13:24-43)

예수님은 또 다른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좋은 씨를 자기 밭에 뿌린 사람과 같습니다. 사람들이 잘 때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갑니다. 싹이 나고 결실할 때 가라지도 보입니다. 종들이 와서 묻습니다.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은 원수가 이렇게 하였다고 말합니다. 종들은 가라지를 뽑기를 원하지만 주인은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고 합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추수 때에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곳간에 넣게 됩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가 현재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악이 즉시 사라질 것이라고 기대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좋은 씨와 가라지가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는 현실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악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모르시거나 통제하지 못하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원수의 행위를 아시며, 마지막 추수의 때를 정하십니다. 다만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조급한 판단과 다르게 역사합니다. 하나님은 종말의 심판을 유예하시며, 자기 백성을 보존하시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가라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지자니온(ζιζάνιον, 지자니온)은 곡식과 비슷하게 자라다가 나중에 구별되는 잡초로 이해됩니다. 처음에는 곡식과 가라지가 쉽게 구별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와 세상,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의 현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급하게 모든 것을 판정하려 할 때 위험이 있습니다. 주인은 추수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분별을 포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는 말씀에 따라 바르게 분별해야 합니다. 다만 최종 심판자의 자리에 인간이 앉아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판단은 주님의 것입니다.

이어 예수님은 겨자씨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과 같습니다. 겨자씨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으로 표현되지만 자란 뒤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고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입니다. 이 표현은 당시 사람들이 작은 것과 큰 것을 대조할 때 사용하는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초점은 식물학적 크기 비교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시작과 완성의 대조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방식으로 시작됩니다. 갈릴리의 한 선생, 소수의 제자들, 비유로 뿌려지는 말씀, 십자가를 향한 낮아짐 속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마침내 열방이 깃드는 큰 나무처럼 드러날 것입니다.

누룩 비유도 같은 방향을 보여 줍니다. 천국은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습니다. ‘누룩’에 해당하는 헬라어 쥐메(ζύμη, 쥐메)는 문맥에 따라 부정적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하나님 나라의 은밀하고 전체를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누룩은 겉으로 요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속에서 퍼져 전체를 변화시킵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눈에는 작고 느리고 감추어진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는 말씀과 성령으로 사람의 마음과 공동체와 역사를 깊이 변화시킵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다고 밝히며, 시편의 말씀을 따라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유가 우연한 교육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 역사 안에 있다는 점입니다. ‘감추인 것들’은 하나님께서 구속사의 때를 따라 드러내시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입니다. 구약의 약속은 이미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게 했지만, 그 충만한 의미는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오래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방식으로 임하는지 열어 보이십니다.

무리를 떠나 집에 들어가셨을 때 제자들이 가라지 비유를 설명해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라고 하십니다. 밭은 세상이고,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며,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입니다. 원수는 마귀이고, 추수 때는 세상 끝이며, 추수꾼은 천사들입니다. 여기서 ‘세상 끝’은 헬라어 쉰텔레이아 투 아이오노스(συντέλεια τοῦ αἰῶνος, 쉰텔레이아 투 아이오노스)로, 이 시대의 완결을 뜻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현재 역사 안에 들어왔지만, 아직 최종 완성은 미래의 심판과 영광을 기다립니다. 이 ‘이미’와 ‘아직’의 긴장이 마태복음 13장의 중요한 신학적 흐름입니다.

예수님은 가라지가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고 하십니다.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어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그 나라에서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을 것이며,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가볍게 다룰 수 없는 심판의 선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위로만이 아니라 심판의 현실도 함께 선포합니다. 죄와 악은 영원히 애매하게 남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지만 무관심하지 않으십니다. 마지막 날에는 감추어진 것이 드러나고, 섞여 있던 것이 구별되며, 불법은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심판의 말씀은 동시에 의인들의 소망을 밝힙니다.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여기서 의인은 자기 공로로 의로워진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 전체의 빛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은혜로 의롭다 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하신 백성입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는 가라지와 함께 자라며 때로 약하고 숨겨진 존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입니다. 이는 성도의 영화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바라보게 합니다. 지금은 씨앗의 시간이고 기다림의 시간이지만, 마지막은 추수와 영광의 시간입니다.

이 단락은 오늘의 교회에 중요한 균형을 줍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은밀한 성장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작아 보이는 말씀, 보잘것없어 보이는 순종, 조용한 기도, 이름 없는 섬김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는 자라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마지막 심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금 악을 즉시 제거하지 않으신다고 해서 악이 승리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추수 때를 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조급한 분노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지 않고, 냉소적 체념으로 현실을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말씀의 씨가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마지막 추수를 바라보며 충성합니다.

감추어진 보화를 발견한 제자의 기쁨과 배척받는 왕의 길(마 13:44-58)

예수님은 천국을 밭에 감추인 보화에 비유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자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삽니다. 이 비유의 초점은 소유권의 세부 절차에 있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발견한 자의 기쁨과 결단에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감추인 보화와 같습니다. 세상의 눈에는 평범한 밭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안에는 모든 것을 팔아도 아깝지 않은 가치가 있습니다. 참된 제자는 억지로 손해를 감수하는 사람이 아니라, 더 큰 기쁨을 보았기 때문에 작은 것을 내려놓는 사람입니다.

이어 천국은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습니다. 그는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자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삽니다. 밭의 보화 비유가 뜻밖의 발견을 강조한다면, 진주 비유는 찾는 과정 속에서 발견한 궁극의 가치를 강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비유의 중심은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비교 불가능한 가치입니다. 여기서 자기 소유를 다 판다는 말은 구원을 사기 위한 인간의 공로를 뜻하지 않습니다. 은혜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본 사람은 이전에 절대적이라 여겼던 것들을 상대화하게 됩니다. 구원은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이지만, 그 은혜를 참으로 받은 사람은 삶 전체의 방향이 바뀝니다.

이것이 복음의 역설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얻기 위해 자기 의를 지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얻은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의와 세상 욕망을 붙들고 살 수 없습니다. 사도적 복음의 빛에서 보면, 그리스도는 우리를 값없이 부르시지만, 그 부르심은 우리 전체를 요구합니다. 이는 공로의 요구가 아니라 왕의 은혜로운 소유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자기 것이 아닙니다. 보화를 발견한 사람의 중심 감정은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입니다. “기뻐하며”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복음적 헌신은 억지로 빼앗기는 상실이 아니라, 더 큰 영광을 발견한 자의 자유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그물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습니다. 그물에 가득하자 물가로 끌어내고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립니다. 세상 끝에도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을 것이며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이 비유는 앞선 가라지 비유와 연결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현재 역사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현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확장은 최종적 심판 없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교회의 외적 소속만으로 안심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그물 안에 들어왔다고 해서 모두 좋은 물고기인 것은 아닙니다. 보이는 공동체 안에 들어오는 것과 참으로 그리스도께 속하는 것은 구별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고는 성도를 불안 속에 던져 넣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려는 말씀입니다. 참된 믿음은 그리스도를 보화로 알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열매로 나타납니다. 심판은 우리의 구원을 인간의 공로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이루신 참된 생명을 드러내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이 “그러하오이다”라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다고 하십니다. ‘제자 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테튜오(μαθητεύω, 마테튜오)는 단순히 정보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스승의 가르침 아래 삶이 형성되는 것을 뜻합니다. 천국의 제자는 옛것과 새것을 함께 꺼내는 사람입니다. 이는 구약과 신약을 억지로 대립시키지 않고, 구약의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드러나는 것을 아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러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는 옛 언약의 말씀을 버리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 깊은 의미를 새롭게 깨닫습니다.

이 장면은 설교자와 교사에게도 깊은 책임을 줍니다. 말씀을 맡은 사람은 자기 생각을 꺼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곳간에서 새것과 옛것을 바르게 꺼내는 집주인과 같아야 합니다. 성경의 오랜 약속을 알고,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새 계시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나누어야 합니다. 교회는 시대의 유행을 따라 새로운 것만 좇아서도 안 되고, 전통의 껍데기만 붙들고 살아서도 안 됩니다. 옛 약속과 새 성취를 함께 붙들 때, 우리는 정경 전체가 증언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르게 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가십니다. 회당에서 가르치시자 사람들이 놀라 말합니다.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그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능력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곧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들은 예수님을 너무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익숙함이 믿음의 문이 아니라 불신앙의 장벽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낮아진 모습 때문에 실족합니다.

여기서 “배척한지라”와 연결되는 표현은 예수님을 걸림돌로 여기는 반응을 보여 줍니다. 앞서 11장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능력을 보고도 그분의 평범한 배경을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육신의 신비 앞에서 인간의 교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영광의 왕을 낮은 자리로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너무 평범해 보이는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속담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가 가까운 곳에서 오히려 배척받는 현실을 보여 줍니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종종 자기 백성에게 거부당했습니다. 이제 참 선지자이시며 왕이신 예수님도 고향에서 배척을 받으십니다. 마태는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고 마무리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의 불신앙 속에서 예수님은 기적을 호기심의 대상으로 소비하지 않으셨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믿음 없는 곳에서 기적은 더 깊은 회개로 이어지지 않고 더 큰 책임만 남길 수 있습니다.

이 마지막 장면은 마태복음 13장 전체와 깊이 연결됩니다. 씨는 뿌려졌지만 모든 밭이 열매 맺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선포되지만 모두가 깨닫지 않습니다. 보화는 감추어져 있고, 진주는 발견되어야 하며, 그물 안에서도 마지막 분리가 있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말씀의 씨를 가까이서 들었지만 좋은 땅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천국의 보화를 눈앞에 두고도 평범한 밭만 보았습니다. 그들은 솔로몬보다 크신 지혜를 들었지만 목수의 아들이라는 익숙한 판단에 갇혔습니다.

그러므로 이 단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가치를 보았는지 묻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보화로 발견했습니까. 아니면 익숙한 종교 언어와 오래된 편견 속에서 그분을 가볍게 여기고 있습니까.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새것과 옛것을 꺼내시는 주님의 곳간 앞에 서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지식 때문에 더 이상 놀라지 못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는 감추어진 방식으로 임하지만, 그 가치를 본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새롭게 평가하게 하는 능력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참 보화로 아는 사람은 세상을 미워해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더 큰 기쁨을 보았기 때문에 세상의 자리를 바르게 정합니다.

결론

마태복음 13장은 하나님 나라가 씨앗처럼 작고 감추어진 방식으로 임하지만, 결코 약하거나 실패하지 않는 나라임을 보여 줍니다. 말씀은 여러 마음 밭에 뿌려지고, 어떤 마음은 빼앗기고 어떤 마음은 말라 버리며 어떤 마음은 막히지만, 좋은 땅에서는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가라지와 곡식은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지만, 마지막 날 주님은 의인과 악인을 분명히 가르실 것입니다. 겨자씨와 누룩처럼 하나님 나라는 은밀히 자라고 퍼지며,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처럼 그 가치를 본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말씀을 익숙하게만 듣지 마시고 깨닫는 마음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막지 못하게 하십시오. 악이 함께 자라는 현실 때문에 낙심하지 말고 추수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가장 귀한 보화로 붙드십시오. 오늘도 주님께서 말씀의 씨를 우리 마음에 뿌리실 때, 성령께서 우리를 좋은 땅 되게 하시고, 마지막 날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는 백성으로 세워 주시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 12장 강해

 

안식일의 주인이 드러내시는 나라와 마음의 심판

마태복음 12장은 예수님을 향한 반응이 더욱 선명하게 갈라지는 장입니다. 11장에서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셨고, 12장에서는 그 안식을 주시는 분이 누구신지를 안식일 논쟁과 성령의 능력, 표적 논쟁과 참 가족 선언을 통해 드러내십니다. 이 장의 중심 명제는 분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안식일의 주인이시며 성령으로 하나님 나라를 임하게 하시는 참된 종-왕이시므로, 사람은 종교적 완고함을 버리고 회개와 믿음으로 그분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율법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는 참된 안식(마 12:1-21)

마태복음 12장은 안식일의 밀밭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제자들의 배고픔이 아니라 안식일 규정이었습니다. 구약 율법은 이웃의 밭에서 손으로 이삭을 따 먹는 일을 허용했습니다. 문제는 그 행위 자체가 도둑질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것을 안식일 노동으로 볼 수 있느냐는 해석의 문제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킨다고 생각했지만, 율법의 중심에 계신 하나님과 그분의 긍휼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일을 들어 대답하십니다. 다윗과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 진설병을 먹었습니다. 진설병은 제사장 외에는 먹는 것이 합당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행위를 가볍게 여기신 것이 아니라, 성경 안에서도 의식법의 규정이 인간의 생명과 하나님의 구속사적 목적 앞에서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십니다. 다윗은 기름 부음 받은 왕이었으나 아직 고난 중에 있었고, 그의 일행은 굶주림 속에 있었습니다. 이제 다윗보다 크신 왕, 참 메시아께서 자기 제자들과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이 보아야 할 것은 단순한 행위의 외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임재였습니다.

예수님은 또 안식일에 성전 안에서 제사장들이 일을 해도 죄가 없다는 점을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도 성전 제사는 계속되었습니다. 성전 봉사는 안식일의 의미를 깨뜨리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질서 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대단히 놀라운 선언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와 속죄 제사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이 가리키던 하나님의 임재와 속죄의 실체가 자신 안에 있음을 드러내십니다. 성전보다 크신 분이 오셨다면, 그분 안에서 안식일도 새롭게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호세아의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여기서 ‘자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세드(חֶסֶד, 헤세드)는 단순한 감정적 동정이 아니라 언약적 사랑과 신실한 긍휼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폐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제사의 형식은 있으나 하나님의 언약적 긍휼을 잃어버린 종교를 책망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지킨다고 하면서 배고픈 제자들을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사람을 짓누르는 종교적 우월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생명을 살리는 자비입니다.

예수님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선언하십니다. ‘주인’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오스(κύριος, 퀴리오스)는 권위와 주권을 가진 분을 뜻합니다. 안식일은 창조 때부터 하나님의 안식과 연결되어 있고, 출애굽 이후에는 구원받은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쉬는 표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이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해석하고 완성하는 권위를 가지신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이 안식일 규정보다 자유롭다는 말이 아닙니다. 안식일이 가리키던 창조의 완성, 구원의 쉼, 하나님과의 교제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는 선언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회당으로 들어가십니다. 거기에는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묻습니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본문은 그들의 질문 속에 이미 악한 의도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고통받는 사람을 보고도 긍휼보다 고발할 근거를 먼저 찾았습니다. 종교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을 잃어버리면, 사람의 아픔조차 논쟁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양 한 마리가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지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고 하십니다. 이것은 창조 질서의 회복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죄로 인해 그 형상이 훼손되었지만, 인간의 존엄성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방치하는 날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날임을 밝히십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여기서 선은 인간적 선행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목적에 합당한 생명의 회복입니다.

주님은 손 마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라”고 하십니다. 그는 손을 내밀었고,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었습니다. 이 장면은 은혜와 순종의 질서를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손 마른 사람은 스스로 자기 손을 고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이 먼저 임했고, 그 말씀 안에서 순종이 일어났습니다.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은 은혜로 먼저 부르시고 그 부르심 안에서 인간의 응답을 일으키십니다. 순종은 구원의 공로가 아니라 은혜가 사람 안에서 맺는 열매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까 의논합니다. 생명을 회복하신 예수님 앞에서 그들은 죽음을 계획합니다. 이것이 죄의 역설입니다. 죄는 종교적 언어를 사용할 수 있고, 율법의 이름을 빌릴 수 있으며, 경건의 얼굴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그리스도를 거부하면 결국 생명의 주님을 대적하는 자리로 흘러갑니다. 인간의 죄는 단지 도덕적 실수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거부하는 완고함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아시고 물러가십니다. 많은 사람이 따랐고, 주님은 그들의 병을 다 고치셨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나타내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메시아 사역의 방식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정치적 열광이나 기적에 대한 호기심에 의해 움직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때와 뜻 안에서 십자가를 향해 가십니다. 마태는 이 사건을 이사야의 종의 노래와 연결합니다.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예수님은 힘으로 소리치며 사람을 압도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성령을 받아 정의를 이방에 알리시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여기서 ‘종’은 헬라어 파이스(παῖς, 파이스)로, 종 또는 아들을 가리킬 수 있는 표현입니다. 마태는 이 단어를 통해 예수님이 아버지께 순종하는 종이면서 동시에 사랑받는 아들이심을 드러냅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사역 방식이 어떤지를 보여 줍니다. 주님은 약한 자를 함부로 부수지 않으십니다. 꺼져 가는 믿음의 불씨를 경멸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온유는 무능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방식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정의가 이기게 하실 때까지 그 일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종은 조용하지만 약하지 않고, 온유하지만 패배하지 않습니다. 결국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의 사역은 이스라엘 안에 갇히지 않고 열방을 향해 열립니다. 안식일 논쟁으로 시작된 본문은 성전보다 크신 분, 안식일의 주인이신 분, 성령으로 세움을 받은 종-왕이 열방의 소망이 되신다는 선언으로 확장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안식은 율법의 형식에 갇힌 종교적 자부심에서 오지 않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상한 자를 고치시고 죄인을 품으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옵니다.

성령의 나라를 거부하는 완고한 마음과 말의 심판(마 12:22-37)

이제 본문은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의 치유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이 그를 고치시자 그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되었습니다. 눈먼 자가 보고 말 못하던 자가 말하게 된 사건은 단순한 개인 치유를 넘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보여 줍니다. 앞선 11장에서 예수님은 맹인이 보고 못 듣는 사람이 듣는 일을 메시아의 표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12장에서도 그 표지가 다시 나타납니다. 어둠과 침묵에 묶인 사람이 예수님의 능력으로 회복됩니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죄와 사탄의 권세 아래 묶인 인간을 회복하시는 표지입니다.

무리는 놀라며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다윗의 자손”은 왕적 메시아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무리의 반응은 완전한 신앙고백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예수님의 사역이 메시아적 질문을 불러일으켰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정반대로 반응합니다.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그들은 명백한 회복의 사건을 보고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고, 오히려 성령의 역사를 사탄의 역사로 왜곡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그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는 논리입니다. 여기서 ‘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바실레이아(βασιλεία, 바실레이아)는 통치와 왕권의 영역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단지 귀신 하나를 쫓아낸 사건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두 나라의 충돌을 보여 주십니다. 사탄의 나라는 사람을 눈멀게 하고 말 못하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못하게 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그 결박을 풀고 사람을 회복시킵니다.

예수님은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하십니다. ‘성령’은 헬라어 프뉴마 데우(πνεῦμα θεοῦ, 프뉴마 데우), 곧 하나님의 영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의 사역은 성령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셨고, 세례 때 성령이 임하셨으며, 이제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단지 미래의 천국만이 아니라, 왕이신 그리스도의 통치가 죄와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며 현재 속에 침투하는 하나님의 구원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축귀는 사탄의 협력이 아니라 사탄의 패배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고 하십니다. 강한 자는 사탄의 권세를 가리키며, 그를 결박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단순한 치유자가 아니라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는 더 강한 왕이심을 보여 줍니다. 십자가는 겉으로 보기에는 약함과 패배처럼 보이지만, 정경 전체의 빛에서 보면 그리스도께서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결정적으로 이기시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 앞에는 궁극적인 중립이 없습니다. 사람은 종교적으로 관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 앞에서 마음은 드러납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그분의 통치를 거부하든지 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폭력적 선택 강요가 아니라 존재의 진실을 밝히는 선언입니다. 생명의 주님을 거부하는 것은 단순한 보류가 아니라 생명 밖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매우 엄중합니다.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모독’에 해당하는 헬라어 블라스페미아(βλασφημία, 블라스페미아)는 하나님을 거슬러 말하거나 거룩한 것을 모독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성령 모독은 단순히 연약함 중에 잘못 말한 한마디를 가리키는 것으로 가볍게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의 문맥에서 그것은 성령으로 나타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알고도 완고하게 사탄의 일로 돌리는 고의적이고 지속적인 거부로 이해해야 합니다. 견해가 나뉘는 세부 논의가 있지만, 마태복음 12장의 흐름은 분명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회복된 사람을 보고도 그 일을 악으로 왜곡했습니다.

이 말씀은 양심이 민감한 성도들을 절망시키기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를 두려워하고 주님께 돌아가기를 원하는 마음 자체가 성령께서 그 영혼을 깨우고 계시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완고한 종교적 확신 속에서 성령의 증거를 거부하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경고합니다. 은혜를 거부하면서 은혜의 자리 안에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 가장 위험합니다. 회개는 인간의 공로가 아니지만, 회개를 거부하는 완고함은 인간의 책임입니다.

예수님은 나무와 열매의 비유로 마음과 말의 관계를 밝히십니다.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나쁘고 열매도 나쁘다 하든지.” 좋은 열매는 좋은 나무에서 나오고, 나쁜 열매는 나쁜 나무에서 나옵니다. 여기서 문제의 중심은 입술만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고 하십니다. ‘마음’은 헬라어 카르디아(καρδία, 카르디아)로, 단지 감정의 자리가 아니라 생각과 의지와 욕망을 포함한 인격의 중심입니다. 말은 마음의 창입니다. 입술은 마음의 저장고에서 흘러나옵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인간의 죄가 표면적 행동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뿌리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사람은 말 몇 마디만 고쳐서 새로워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마음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좋은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냅니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 선한 저장고를 만들어 구원을 얻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마음이 은혜로 변화되지 않으면 말과 삶도 근본적으로 변화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새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고, 그 은혜가 말과 삶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라”고 하십니다. ‘무익한’이라는 말은 목적 없이 비어 있고 책임 없는 말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말은 가볍게 사라지는 연기 같아 보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마음을 드러내는 증거가 됩니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말로 정죄함을 받는다는 말씀은 말 자체가 공로가 되어 구원을 만든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은 마음의 상태를 드러내며, 그 마음이 그리스도 앞에서 어떤 자리에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신앙고백도 입술로 하지만, 그 입술의 고백은 성령께서 마음에 주신 믿음의 열매여야 합니다.

이 단락은 우리에게 깊은 두려움과 소망을 동시에 줍니다. 두려움은 종교적 지식과 외적 경건이 마음의 완고함을 감출 수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소망은 그리스도께서 사탄의 나라보다 강하시며, 성령으로 묶인 자를 풀어 주시는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말이 마음의 더러움을 드러낸다면, 우리는 단순히 말버릇을 고치는 데서 멈출 수 없습니다. 주님께 새 마음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완고함을 깨뜨리시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보게 하시며, 입술이 저주와 비난의 도구가 아니라 복음과 찬송의 그릇이 되게 하셔야 합니다.

표적을 구하는 세대 앞에 주어진 요나의 표적과 참 가족의 순종(마 12:38-50)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이 요청은 겉으로는 정중해 보입니다. 그러나 문맥상 그들은 이미 많은 권능을 보았습니다. 안식일에 병든 자가 고침을 받았고,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하던 사람이 회복되었습니다. 문제는 표적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는 마음이었습니다. ‘표적’에 해당하는 헬라어 세메이온(σημεῖον, 세메이온)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어떤 진리를 가리키는 표지를 뜻합니다. 그러나 완고한 마음은 표지를 보아도 그 표지가 가리키는 분께 나아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음란하다’는 말은 단지 성적 죄만이 아니라 언약적 불충성을 가리키는 예언자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따를 때, 선지자들은 그것을 영적 간음으로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도 계속 다른 표적을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를 거부하는 언약적 불신실함입니다.

주님은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속에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을 가리킵니다. 요나의 사건을 예수님의 직접적 예표로 과도하게 세부까지 맞추려 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이 분명히 연결하는 핵심은 사흘의 낮아짐과 다시 나타남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뒤 니느웨에 심판과 회개의 메시지를 전한 것처럼, 예수님은 죽음의 깊은 자리로 내려가셨다가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결정적 표적이 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나보다 크십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했습니다. ‘회개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타노에오(μετανοέω, 메타노에오)는 하나님께로 마음과 방향을 돌이키는 것을 뜻합니다. 니느웨는 이방 도시였고, 요나는 온전한 열심으로 보이기 어려운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말씀을 듣고 돌이켰습니다. 그런데 지금 요나보다 크신 분,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시는데도 이 세대는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심판 때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를 정죄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이방인의 회개가 특권을 가진 이스라엘의 완고함을 드러내는 증거가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남방 여왕도 언급하십니다. 그는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습니다. 그런데 솔로몬보다 더 크신 분이 여기 계십니다. 솔로몬은 지혜의 왕으로 알려졌지만, 그의 지혜도 하나님이 주신 제한된 선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지혜를 받은 왕을 넘어 하나님의 지혜가 인격적으로 드러난 분입니다.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성전보다 크시고, 요나보다 크시고, 솔로몬보다 크신 분으로 제시됩니다. 성전의 실체, 선지자적 선포의 완성, 왕적 지혜의 충만이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어지는 더러운 귀신의 비유는 매우 엄중합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가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지만 얻지 못하고, 다시 나온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돌아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어 있습니다. 그러자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고 하십니다.

이 비유는 단순히 개인의 도덕적 개혁이 얼마나 위험한지 말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문맥상 예수님을 거부하는 세대에 대한 경고입니다. 어떤 외적 변화가 있을 수 있습니다. 종교적 정화가 있을 수 있고, 도덕적 질서가 있을 수 있으며, 겉보기에 집이 정돈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집이 “비어” 있다면 위험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거하지 않는 빈 종교는 더 큰 어둠의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죄를 잠시 몰아내는 듯한 도덕주의는 사람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참된 구원은 비어 있는 집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정도가 아니라,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음의 왕좌에 앉으셔야 합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깊이 적용됩니다. 사람은 신앙을 자기 개선의 도구로 만들 수 있습니다. 예배를 통해 마음을 정돈하고, 말씀을 통해 생활 습관을 다듬고,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어느 정도 품위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지 않는다면, 그 정돈된 집은 여전히 비어 있습니다. 복음은 단순한 도덕적 청소가 아닙니다. 복음은 죽은 자를 살리고, 죄의 주권 아래 있던 사람을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로 옮기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서서 예수님께 말하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 사실을 알리자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고 물으십니다. 이 말씀은 가족을 멸시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뜻을 폐하지 않으셨고, 부모 공경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하나님 나라 안에서 혈연보다 더 근본적인 관계가 무엇인지를 밝히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리켜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말은 인간의 행위로 하나님의 가족이 된다는 공로주의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전체의 흐름에서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순종은 은혜의 조건이 아니라 은혜로 맺히는 가족의 표지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은혜로 부르시고, 그 부르심 안에서 새로운 가족을 이루십니다. 이 가족은 혈통과 지위와 민족의 경계를 넘어,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자들로 세워집니다.

이 장의 마지막은 처음과 깊이 연결됩니다. 처음에는 바리새인들이 율법의 이름으로 배고픈 제자들을 정죄했고,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는 예수님을 고발하려 했습니다. 중간에서는 성령의 역사를 사탄의 일로 돌렸고, 마지막에는 표적을 요구하면서도 이미 주어진 계시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시는 왕으로, 요나보다 크고 솔로몬보다 크신 분으로, 하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새 가족의 중심으로 서 계십니다.

따라서 마태복음 12장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앞에서 마음의 방향을 묻습니다. 우리는 표적을 더 요구하는 사람입니까, 이미 주어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앞에서 회개하는 사람입니까. 우리는 외적 정돈에 만족하는 사람입니까, 그리스도께 마음의 왕좌를 내어 드리는 사람입니까. 우리는 혈연과 전통과 종교적 자부심에 기대어 자신을 안전하다고 여기는 사람입니까, 하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함으로 그리스도의 가족 됨을 드러내는 사람입니까. 하나님 나라는 보는 자에게만 열리는 나라가 아닙니다. 성령께서 눈을 여시고, 마음을 새롭게 하시며,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게 하시는 은혜의 나라입니다.

결론

마태복음 12장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선명하게 증언합니다. 그분은 안식일의 주인이시며 성전보다 크신 분입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종이시며, 성령의 능력으로 사탄의 결박을 푸시는 왕입니다. 요나보다 크고 솔로몬보다 크신 분이며, 죽음과 부활의 표적으로 하나님의 최종 계시가 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동시에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완고할 수 있는지도 보여 줍니다. 사람은 율법의 이름으로 긍휼을 거부할 수 있고,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을 수 있으며, 성령의 역사를 악하게 왜곡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많이 들었다는 사실에 안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안식 안으로 들어가고, 성령께서 드러내신 하나님 나라 앞에 회개하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의 집이 단지 청소된 빈집으로 남지 않도록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셔야 합니다. 오늘도 상한 갈대 같은 우리를 꺾지 않으시는 주님께 나아가, 하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그리스도의 가족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11장 강해

 

낮아지신 메시아 안에서 드러나는 하나님 나라의 안식

마태복음 11장은 메시아의 사역이 기대와 오해 사이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세례 요한은 감옥에서 질문하고, 무리는 요한과 예수님을 판단하며, 많은 성읍은 권능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어둠 한가운데서 주님은 아버지의 주권적 계시를 찬송하시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자신의 안식으로 부르십니다. 이 장의 중심 명제는 분명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의 기대를 만족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낮아지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 은혜로 열리며, 참된 안식은 그리스도의 멍에 아래에서 주어집니다.

기대와 의심 속에서도 드러나는 메시아의 표지(마 11:1-19)

마태복음 11장은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앞 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본문은 그 복음이 세상 속에서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 보여 줍니다. 하나님 나라는 선포되지만 모든 사람이 즉시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단순한 정보 습득이 아니라 하나님이 열어 주시는 은혜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보는 일입니다.

세례 요한은 감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묻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여기서 “오실 그이”는 단순히 미래에 올 어떤 인물이 아니라 구약의 약속 속에서 기다려 온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요한은 이미 예수님을 증언한 사람입니다. 그는 요단강에서 예수님을 알아보았고, 메시아의 길을 예비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감옥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면 왜 악한 권세는 여전히 힘을 갖고 있으며, 왜 의로운 선지자는 쇠창살 안에 있는가 하는 질문이 그의 현실 속에 놓여 있습니다.

본문은 요한을 불신앙의 사람으로 단순화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도 어두운 감옥 속에서는 질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든 사람도 현실의 무게 앞에서 떨릴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요한이 자기 의심을 세상으로 가져가지 않고 예수님께 가져갔다는 점입니다. 신앙의 질문은 주님께 가지고 나아갈 때 무너짐이 아니라 더 깊은 계시의 자리로 들어가는 통로가 됩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질문에 직접 “내가 그다”라고만 답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너희가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라”고 하십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십니다. 이 대답은 이사야의 예언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를 추상적 선언이 아니라 성경의 약속이 성취되는 사건으로 보여 주십니다. 메시아는 로마를 즉시 무너뜨리는 정치적 정복자로 먼저 오신 것이 아니라, 죄와 죽음과 저주 아래 있는 자들을 회복시키는 구원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여기서 “복음이 전파된다”는 표현의 핵심은 헬라어 유앙겔리조마이(εὐαγγελίζομαι), 곧 “좋은 소식을 전하다”입니다. 이 좋은 소식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하나님께 올라가는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낮은 자들에게 찾아오셨다는 소식입니다. 가난한 자는 단지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게 의가 없고, 스스로 구원을 만들어 낼 수 없음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개혁주의 신앙이 강조하는 은혜의 원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자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십니다. “실족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칸달리조(σκανδαλίζω)는 걸려 넘어지게 되거나 걸림돌에 걸리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기대와 다른 방식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은 권력의 중심부에서 영광을 과시하지 않으셨고, 병든 자와 가난한 자와 죄인 곁에 서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예수님은 은혜의 구주가 아니라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교만은 강한 메시아는 원하지만 십자가로 낮아지는 메시아는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낮아지심 속에서 구원의 지혜를 드러내십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뒤 예수님은 무리에게 요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요한은 시대의 바람에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부드러운 옷을 입은 궁중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광야의 선지자였습니다. 그의 삶은 화려하지 않았지만 하나님 앞에 선명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을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는 단지 메시아를 멀리서 예언한 사람이 아니라 메시아 앞에서 그 길을 준비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라기적 약속을 떠올리게 하며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고 하십니다. 요한의 위대함은 그의 인격적 탁월함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의 위치가 구속사의 경계선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옛 언약의 예언자적 흐름을 마감하며 새 언약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가리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놀라운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이는 요한을 낮추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열린 하나님 나라의 충만함이 얼마나 큰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문 앞에서 왕을 가리킨 사람이고, 신약의 성도는 십자가와 부활 이후 왕의 은혜 안에 들어온 사람입니다.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는 말씀은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여기서 “침노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비아조마이(βιάζομαι)는 강한 힘이 작용한다는 뜻을 가집니다. 견해가 나뉘지만, 본문의 흐름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세상 속에서 격렬한 반응과 충돌을 일으킨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감옥에 갇혔고, 예수님은 오해와 배척을 받으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 나라는 무기력하게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는 인간의 반대 속에서도 전진합니다. 은혜는 조용하지만 약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낮아 보이지만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을 “오리라 한 엘리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요한이 문자적으로 엘리야의 환생이라는 뜻이 아니라,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적 사명으로 메시아의 길을 예비했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는 말씀은 단순히 청각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시 앞에서 마음을 열고 순종하는 들음을 요구하십니다. 성경에서 참된 들음은 언제나 순종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그 세대는 듣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장터에 앉아 친구를 부르는 아이들에 비유하십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 아이들입니다. 요한은 금욕적인 모습으로 왔으나 사람들은 “귀신이 들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먹고 마시며 죄인들과 함께하셨으나 사람들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결국 문제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의 완고함이 문제였습니다. 회개하기 싫은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 말씀하셔도 핑계를 찾습니다.

예수님은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당장 모든 사람의 박수를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열매와 성취 속에서 참됨이 드러납니다. 요한의 광야 사역도, 예수님의 죄인들과 함께하시는 사역도, 사람의 기준으로는 모순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는 하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의 외침으로 죄를 드러내시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인을 부르십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를 폭로하고, 복음은 그 죄인을 그리스도께 인도합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내 기대에 맞추려 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주님, 내가 정한 시간에 응답하시는 주님, 내가 상상한 영광으로 나타나시는 주님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감옥 같은 현실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사역을 보고 듣고 믿을 수 있는가. 낮아지신 주님 때문에 실족하지 않고, 오히려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볼 수 있는가. 믿음은 하나님을 내 계획 안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내 계획이 무너지는 자리에서도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일하고 계심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권능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는 성읍들 앞에 선 거룩한 책임(마 11:20-24)

이제 본문은 예수님의 탄식과 책망으로 전환됩니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여기서 “권능”은 헬라어 뒤나미스(δύναμις)로, 단순한 기적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 속에 드러난 표지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놀라운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표지였습니다. 그런데 그 표지를 가장 많이 본 성읍들이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회개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타노에오(μετανοέω)는 마음과 생각의 방향이 바뀌는 것을 뜻합니다. 성경적 회개는 단순한 후회가 아닙니다. 죄를 죄로 인정하고 하나님께 돌아서는 전인격적 전환입니다. 본문에서 문제는 정보 부족이 아닙니다. 그들은 보았습니다. 들었습니다. 권능의 현장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죄가 단지 무지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완고함과 하나님을 거부하는 책임의 문제임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고라신과 벳새다를 향해 화를 선포하십니다. “화 있을진저”라는 표현은 단순한 저주나 감정적 분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선 상태를 선지자적으로 선언하는 말입니다. 이 성읍들은 갈릴리 지역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가까이 접한 곳으로 이해됩니다. 정확한 세부 위치나 모든 사건을 본문이 다 설명하지는 않지만, 마태는 이들이 예수님의 권능을 충분히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두로와 시돈을 언급하십니다. 구약에서 두로와 시돈은 이방의 교만과 우상숭배, 부와 권세의 상징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실제 역사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뜻이 아니라, 갈릴리 성읍들의 책임이 얼마나 큰지를 드러내는 비교입니다. 더 많은 빛을 받은 사람에게는 더 큰 책임이 따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집니다. 인간은 스스로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불신앙이 책임 없는 것이 되지는 않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는 성읍들을 책망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책임을 지우지 않고, 인간의 책임은 하나님의 주권을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 둘을 억지로 대립시키지 않고 함께 증언합니다.

가버나움에 대한 말씀은 더욱 엄중합니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에서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많은 말씀과 권능이 그곳 가까이에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은혜의 가까움이 자동으로 구원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특권은 회개와 믿음으로 응답하지 않을 때 더 무거운 책임이 됩니다. 교회 가까이에 있는 것, 성경을 많이 듣는 것, 예배에 익숙한 것이 그 자체로 사람을 살리는 것은 아닙니다. 은혜의 수단은 귀하지만, 그 은혜의 수단을 통해 그리스도께 나아가지 않는다면 익숙함은 오히려 영적 무감각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소돔까지 언급하십니다. 소돔은 성경에서 극심한 죄와 심판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행한 권능이 소돔에서 행해졌다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심판 날에 소돔 땅이 가버나움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심판의 정도와 책임의 무게가 계시의 빛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임의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의로우십니다. 많이 받은 자에게 많이 요구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복음을 가까이 들은 사람은 더 깊은 책임 앞에 섭니다.

이 대목은 오늘 교회에 매우 엄중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많이 들었다는 사실로 자신을 위로하기 쉽습니다. 신앙의 언어에 익숙하고, 예배의 형식에 익숙하고, 복음의 표현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익숙함이 회개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신학적 지식이 믿음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은혜라는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실제로 은혜 앞에 무릎 꿇은 것은 아닙니다. 회개 없는 은혜 이해는 값싼 자기 위로가 될 수 있고, 순종 없는 지식은 영혼을 교만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망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책망은 파괴하려는 분노가 아니라 돌이키게 하시는 거룩한 경고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는 은혜의 적이 아니라 은혜가 우리 안에 일으키는 첫 열매입니다. 참된 은혜는 죄를 덮어 두는 허락증이 아니라 죄인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능력입니다. 죄를 죄로 보게 하고, 그리스도 없이는 살 수 없음을 고백하게 하며, 자기 의를 내려놓고 주의 긍휼을 붙들게 합니다.

마태복음 전체에서 이 장은 중요한 전환점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의 권능과 가르침이 분명해질수록 사람들의 반응도 갈라집니다. 어떤 사람은 따르고, 어떤 사람은 의심하며, 어떤 사람은 완고하게 거부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중립 지대를 남기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결국 응답해야 합니다. 회개와 믿음으로 나아가든지, 익숙한 종교성과 자기 의 속에 머물든지 해야 합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은혜의 빛을 받았습니까. 얼마나 자주 말씀을 들었습니까. 얼마나 많이 주님의 선하심을 경험했습니까. 그런데도 여전히 돌이키지 않는 마음의 영역은 없습니까. 복음은 단지 위로의 말이 아니라 왕의 부르심입니다. 그 왕 앞에서 죄인은 자기 자리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은혜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를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죄인을 내쫓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는 완고함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냥 지나치지도 않으십니다.

숨겨진 계시와 온유한 멍에 안에서 주어지는 참된 안식(마 11:25-30)

예수님의 책망 뒤에 놀라운 찬송이 이어집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심판의 경고 다음에 감사가 나오는 것은 뜻밖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본문의 신학적 절정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불신앙과 거부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복음이 거절당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숨기시고, 또한 주권적으로 나타내십니다.

“나타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칼륍토(ἀποκαλύπτω)는 가려진 것을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계시는 인간이 스스로 발견해 낸 종교적 통찰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열어 보이시는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아버지의 뜻”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지적 능력이나 사회적 지위나 종교적 자부심에 매이지 않으십니다.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자들은 보지 못하고, 어린아이처럼 의존하는 자들은 봅니다.

여기서 “어린아이”는 지적으로 미숙한 상태를 이상화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의존적 존재로 아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복음은 교만한 지성에 닫히고 겸손한 믿음에 열립니다. 물론 성경은 생각을 버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지성을 주셨고, 우리는 말씀을 깊이 연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성이 하나님 앞에서 무릎 꿇지 않을 때, 그것은 빛을 보는 눈이 아니라 자기 의를 세우는 도구가 됩니다. 개혁주의 전통이 말하는 인간의 전적 부패는 인간이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로 인해 인간의 전 인격이 하나님을 바르게 사랑하고 의지하는 일에서 뒤틀려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이르는 참된 앎은 은혜의 계시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성자께 주어진 구속 사역의 권위와 중보적 통치를 보여 줍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셨고, 아들은 아버지를 계시하십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은 기독론의 깊은 신비를 담고 있습니다. 아들은 단순히 하나님에 대해 가르치는 선생이 아닙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유일하게 아시고, 아버지를 참되게 나타내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길은 추상적 종교심이 아니라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열립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헬라어 에피기노스코(ἐπιγινώσκω)의 의미와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정보 인식이 아니라 관계적이고 참된 인식을 가리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 지식은 피조물이 흉내 낼 수 없는 신적 친교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들이 자기 뜻대로 계시하시는 자들이 아버지를 알게 됩니다. 구원은 삼위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역입니다. 아버지는 뜻하시고, 아들은 계시하시며, 성령은 그 계시를 우리 마음에 적용하십니다. 본문은 성령을 직접 언급하지 않지만, 정경 전체의 빛에서 볼 때 참된 계시는 성령의 조명 없이는 우리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높은 신학의 절정에서 예수님은 가장 부드러운 초청을 주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늘과 땅의 주재, 아버지와 아들의 신비, 주권적 계시의 깊은 교리가 갑자기 삶에 지친 사람들을 향한 초청으로 내려옵니다. 이것이 복음의 아름다움입니다. 가장 높은 하나님 지식은 가장 낮은 자를 부르는 은혜로 나타납니다.

“수고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피아오(κοπιάω)는 지칠 정도로 애쓰고 고단해진 상태를 뜻합니다. “무거운 짐 지다”는 포르티조(φορτίζω)와 관련된 표현으로, 짐을 지워진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짐은 삶의 일반적 피곤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죄의 짐, 율법을 자기 의로 감당하려는 짐, 종교 지도자들이 사람들에게 지운 무거운 규례의 짐, 죽음과 두려움의 짐을 포함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먼저 더 노력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먼저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구원은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쉬게 하리라”는 말씀에서 “쉼”은 헬라어 아나파우오(ἀναπαύω)의 의미로, 단순한 휴식 이상의 회복과 안식을 포함합니다. 이 안식은 창조의 안식과도 연결되고, 출애굽 이후 약속의 땅에서 기대되던 안식과도 연결되며,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 구원의 안식과 연결됩니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 쉬지 못합니다. 죄인은 자기 욕망을 이루어도 쉬지 못하고, 자기 의를 쌓아도 쉬지 못합니다. 참된 안식은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될 때 시작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안식은 환경의 어려움이 즉시 사라지는 얕은 평안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정죄가 끝난 자에게 주어지는 깊은 평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초청은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역설적입니다. 쉬게 하신다면서 멍에를 메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멍에는 죄와 자기 의의 멍에와 다릅니다. “멍에”는 헬라어 쥐고스(ζυγός)입니다. 당시 멍에는 짐승이 짐을 끌거나 밭을 갈 때 메는 도구였습니다. 유대적 배경에서는 율법의 멍에라는 표현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책임한 자유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께 속한 제자의 길로 부르십니다. 그러나 그 길은 억압의 길이 아니라 생명의 길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는 말씀은 마태복음 11장의 가장 깊은 자기 계시 중 하나입니다. “온유하다”는 헬라어 프라위스(πραΰς)는 약함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다스려진 힘, 자기 뜻을 폭력적으로 관철하지 않는 겸손한 왕의 성품을 뜻합니다. “겸손하다”는 타페이노스(ταπεινός)로 낮아진 마음, 낮은 자리에 서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짓누르는 주인이 아니라 온유하고 겸손한 주님입니다. 그분의 권위는 잔인한 지배가 아니라 은혜로운 통치입니다. 그분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왕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단지 위로의 말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 자신이 안식의 근거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의 죄 짐을 담당하실 메시아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은 이미 예수님의 이름을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로 소개했습니다. 이제 11장에서 예수님은 죄와 율법적 부담 아래 지친 자들을 자신에게로 부르십니다. 이 초청은 십자가를 향해 열려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지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 안에서 쉼을 얻습니다.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는 말씀은 예레미야의 표현을 떠올리게 합니다. 옛길, 선한 길로 가면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는 약속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약속의 성취자로 자신을 제시하십니다. 길을 가르치는 선지자를 넘어, 그 길 자체가 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순종은 구원을 얻기 위한 노동이 아니라 이미 은혜로 부름받은 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배우는 삶입니다. 제자도는 무거운 형벌이 아니라 안식의 질서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하십니다. “쉽다”는 헬라어 크레스토스(χρηστός)로, 적합하고 선하며 은혜롭다는 뉘앙스를 가집니다. 그리스도의 멍에는 부담이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제자의 길에는 자기 부인과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멍에는 우리를 파괴하지 않습니다. 죄의 멍에는 사람을 속박하고 결국 죽음으로 끌고 가지만, 그리스도의 멍에는 우리를 참된 자유로 이끕니다. 자기 의의 짐은 끝없는 불안을 낳지만, 그리스도의 짐은 은혜 안에서 순종하는 기쁨을 낳습니다.

오늘 많은 영혼이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성취해야 한다는 짐, 인정받아야 한다는 짐, 실패하면 버림받을 것 같은 짐, 신앙마저 완벽해야 한다는 짐을 집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사람들을 향해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다”는 아무 조건 없는 방종의 선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모든 죄인에게 충분한 은혜가 있다는 선언입니다. 자신의 죄를 알고, 자기 힘의 한계를 알고, 더 이상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음을 아는 사람은 주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 나아온 사람은 다시 자기 주인이 되어 살지 않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주님의 멍에 아래에서 배웁니다.

복음은 우리를 짐 없는 허공으로 던지지 않습니다. 더 선한 주인의 멍에 아래로 옮깁니다. 아담 안에서 죄와 죽음의 멍에를 메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와 생명의 멍에를 메게 됩니다. 이것이 참된 자유입니다.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주님께 바르게 속하는 것이 자유입니다. 그리스도의 멍에 아래에서 우리는 비로소 쉼을 배웁니다. 주님을 알수록 우리는 더 깊이 낮아지고, 더 깊이 안식하며, 더 신실하게 순종하게 됩니다.

결론

마태복음 11장은 낮아지신 메시아 앞에서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요한은 감옥에서 질문했지만 그 질문을 주님께 가져갔고, 예수님은 성경의 약속이 성취되는 사역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은 권능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고, 그 완고함은 더 큰 책임을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그 어두운 반응 속에서도 예수님은 아버지의 주권적 뜻을 찬송하시며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의 중심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기대나 자격으로 열리지 않고, 아들이 계시하시는 은혜 안에서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자에게 열립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의 길에서 질문이 생길 때 주님께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많이 들은 만큼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의와 두려움과 죄의 짐을 홀로 지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리스도께 나아가십시오. 그분의 멍에는 우리를 억누르지 않고 살립니다. 오늘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은혜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며, 주님의 멍에 아래 순종의 길을 걷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 10장 강해

 마태복음 10장 개요

10장은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에게 나가서 복음을 전하도록 하는 사명과 함께 주어지는 설교다. 열두 제자에게 나누어 주신 능력은 주님이 직접 행하신 기적이다. 


1-42절 열두 제자 파송설교


1절  열두 제자와 권능

주님은 제자들 중에서 특별해 열 둘을 택하셨다. 열둘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서 기원하며 완전한 공동체를 말한다. 열두 지파는 야곱의 열두 아들이지만, 레위와 요셉이 빠지고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들어가 열둘이 된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종종 요셉의 후손이란 표현을 두 지파를 묶기도 하지만 에브라임은 므낫세를 약한 지파라하며 무시한다. 이러한 정서는 므낫세 지파의 사사인 기드온이 에브라임 지파가 찾아와 항의할 때 잘 드러난다.


2-15절 열두 제자와 사역 방법

열두 제자

열두 사도의 이름은 베드로, 안드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그의 형제 요한, 빌립, 바돌로매, 도마,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 갸룟 유다이다.


베드로는 바위라는 뜻의 히브리어 페트로의 헬라식 이름이다. 원래 이름을 시몬이다.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이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형제이다.

빌립은 모호한 인물이다. 사도행전에서 사도 빌립과 집사 빌립이 겹친다. 후반부로 가면 사도인지 집사인지 알길 이 모호하다.

바돌로매는 요한복에 등장하는 나다나엘인 것으로 추측되지만 불확실하다.

마태는 세리로 소개된다. 세리와 창녀는 죄인으로 취급된다.

알패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다. 세배다의 아들 야고보는 큰 야고보이고,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작은 야고보로 불린다.

두 번째 시몬은 가나안인으로 나온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남겨진 가나안 족속일 것이다. 정말 그렇다면 그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도가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복음은 이방인에게 먼저 가지 않는다. 먼저 유대인 안에 전파된다. 잃어버린 양은 이스라엘 안에서 소외되고 버림 받은 이들을 향한 것이다. 주님은 친히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눅 19:10)이라 자신의 사역을 소개한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

임박한 종말론적 삶은 코람데오의 삶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은 자는 늘 종말을 염두에 두고 살아간다. 하지만 나태한 자는 종말을 인식하지 못한다. 마태는 유난히 '천국'을 좋아한다. '하나님의 나라'보다는 천국이 히브리즘에 더 가깝나다. 여기서 '국' '나라'는 kingdom'으로 왕들이 다스리는 나라를 말한다. 하늘의 왕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왔으니 회개하라는 것이다.


고치며

치유와 회복이다. 처음 하나님이 만드시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아담의 모습이 아니다. 신약에서의 회복은 더 이상 죄 지을 수 없는 완전한 의인의 상태이다.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혀진 상태이다.


평안하기를 빌라

평안은 구약의 '샬롬'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이스라엘의 샬롬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샬롬이며, 나아가 전쟁과 경제적 자유 등을 포함하는 포괄적 자유다.


발의 먼지

발은 땅(세속)과 닿는 부분이다. 발의 먼지는 떠는 행위는 일종의 씻는 행위이자 정결행위다.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림으로 그곳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단절을 의미한다.


16-23절 이렇게 대처하라

양을 이리 가운데로

양은 무지하고 어리석다. 하지만 순수하다. 이리는 양을 공격하는 존재이다. 원수들 가운데 보내는 것 같다는 의미다. 아무런 힘도 없고, 공격할 수도 없다.


뱀 같이 지혜롭다는 말은 모든 상황을 잘 파악하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보 같이 행동하는 것이 미덕이라 생각하지만 아니다. 지혜롭게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진정한 힘은 비둘기 같은 순수함이다. 결국 순수함이 이긴다. 순수함은 무지가 아니다. 뱀 같은 지혜의 순수다.


나로 말미암아

사람들을 삼가라는 말은 주의하라는 말이다. 주의하라는 분별하라는 말이다. 만나는 사람이 누구인지 바로 알아야 한다. 그들과 과도하게 친밀하게 지내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다. 그냥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되는 일이다. 

주님은 자신으로 인해 핍박을 받게 될 것을 말한다. 거짓의 세상에 진리는 항상 핍박을 받는다.


말하는 이는 - 성령이시니라

우리가 말하는 것 같지만 성령이 말씀하신다. 성령께서 우리의 사정을 아시고 대언하실 것이다.


대적하는 세대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종말의 때에는 형제간, 부모 자식간, 대적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거짓과 진리의 싸움이다. 


24-42절 나를 따르라.


두려워하지 말라.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은 당연히 주님의 제자들을 얕잡아 볼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께 파리들의 왕이란 뜻을 바알세불이라 불렀다. 모독적인 표현이다. 하지만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을 드러날 것이다.


너희는 참새보다 귀한니라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종종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 자신이 너무 작게 보인다. 하지만 주님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참새 보다 못한 인생이라 말하지만, 주님은 '너희는 참새 보다 귀하니라' 말씀하신다.


검을 주러 왔노라

진리는 어둠과 불가피한 전쟁이다. 주님이 주시는 검은 성령의 검, 즉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은 검으로 어둠을 격파한다. 말씀이 뿌리 내리는 자들은 결코 어둠에 휘둘리지 않는다.


나를 위하여

주님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 합당하지 않다고 말한다. 주님의 제자의 자격이다. 주님의 십자가가 아니라 '자신의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사형틀이다. 즉 죽음을 각오하고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구절은 다음 구절인 39절에서 목숨과 연결된다. 결국 자신을 내어 놓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제자의 절박성을 말한다.


마태복음 장별 요약 및 강해 목록


마태복음 9장 강해

 마태복음 9장 개요


마태복음 9장은 마태를 부르신 사건을 제외하면 모두 병자들을 치유하는 사건들입니다. 마지막 단락에서는 추수할 일꾼을 하나님께 달라고 기도하라는 권면이 주어집니다.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치심으로 그들은 온전케 하십니다.


마태복음 9장 구조

1-8절 중풍병자를 고침

9-13절 마태를 부르심

14-17절 금식에 관하여

18-26절 혈루증 여인과 관리의 딸을 살림

27-34절 맹인과 벙어리를 고침

35-38절 일꾼을 달라 하라


1-8절 중풍병자를 고침


죄 사함을 받았다.


다시 배를 타고 본 동네(own town)에 이릅니다. 이 때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데려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2절)이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지붕을 뜯는 그 사건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은 지붕을 뜯는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향하여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하는 부분입니다. 이 때 서기관들은 충격을 받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신성을 모독'(3절) 했다고 생각합니다. 죄사함은 오직 하나님만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정말 신성 모독자였습니다. 보통 사람의 눈으로 예수님은 그저 사람일 뿐입니다. 선지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모세도 스스로 죄를 사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직접 죄를 사하십니다. 이러니 신성 모독으로 느끼는 것이 당연합니다.


어느 것이 쉽겠느냐


5절을 잘 못 이해하면 둘 중의 하나가 더 '쉽다' '어렵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잘못된 생각입니다. 죄사함의 문제는 하나님의 영역이고,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 역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럼에도 치유는 선지자들도 했지만 죄사함의 영역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하지만 둘이 쉽다 어렵다가 아니라 모두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6절에서 예수님은 인자의 죄사함 권능과 치유의 명령을 함께 하심으로 둘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죄를 사할 뿐 아니라 그는 치유하심으로 신분적으로 영적으로 온전케 하시는 분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9-13절 마태를 부르심


나를 따르라


그곳을 떠나 가시다 세관에 앉은 마태를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를 보시고 '나를 따르라'하십니다. 그러자 마태는 곧바로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현대의 관점에서 당시의 시간 개념을 이해하면 안 됩니다. 당시는 시계도 없기에, 어느날 어디서 만나자 그러면 그곳에서 가서 하루종일 기다립니다. 그들의 시간은 현대의 3시간 정도를 하나의 단위로 보기 때문에 적지 않은 시간이 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마태는 세리입니다. 다시 세리와 창기는 '죄인들'입니다. 10절은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님과 제자들과 함께 앉았다고 말합니다. 당시 함께 식사하는 것은 친구로 받아 들인다는 말입니다. 이 부분은 갈라디아서 베드로가 식사 하다 도망친 것을 이해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죄인들이라 말하는 이들을 친구로 받아 들였습니다.


의사는 누구에 필요한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판합니다. 왜 죄인들과 같이 식사하느냐는 것이죠. 예수님은 그들에게 의사 누구에게 필요한지를 묻습니다. 의사는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 병든 자에게 필요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세리가 괜찮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진짜 죄인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을 사랑합니다. 그들은 병이 들었지만 고치면 건강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고치기 힘든 부류는 자신들이 병이 들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치료를 받지 않는 바리새인들과 같은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삼상 15:22를 인용하여 제사가 필요하게 아니라 긍휼이 필요함을 역설합니다.


14-17절 금식에 관하여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금식에 대해 묻습니다. 금식은 음식을 먹지 않음으로 경건을 유지하고, 거룩한 자의 삶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혼인집의 비유를 통해 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지금은 신랑과 함께 하는 날이며, 즐거운 때라 금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때가 오면 그때에는 금식할 때가 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말씀 이유 특이한 비유가 주어집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조각에 붙이지 않고,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않은 것처럼 둘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모순처럼 들리는 표현은 금식이 구약을 표현하고, 신약은 신랑과 함께하는 때임을 말합니다.


18-26절 혈루증 여인과 관리의 딸을 살림


요한복음에만 실리지 않고 공관복음서에 실린 이 사건은 혈루증 여인과 회당장 딸의 치유 사건이 겹쳐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한 관리'(18절)로 소개됩니다. 그가 예수님을 찾아와 절을 하며 죽어가는 딸을 고쳐 달라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를 따라 갑니다. 이때 갑자기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아온 여인이 예수님을 따라가다 옷자락을 만지며 혈루병이 낳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알고 여인에게 축복하며 보냅니다. 이 사건으로 예수님은 지체하게 되고 결국 관리의 딸은 죽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죽은 아이의 집으로 들어가 소녀를 살려 냅니다. 다른 복음서에 비해 유난히 적은 분량과 간소화된 내용은 조금 의아하게 만듭니다. 심지어 소녀에게 들어갈 때 제자들이 함께 했다는 언급도 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은 이 사건을 상세히 설명하기 보다는 치유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며, 예수님이 모든 치유의 중심이자 원이며, 치유자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27-34절 맹인과 벙어리를 고침


다윗의 자손이여


예수님이 그곳에서 떠나실 때 두 맹인이 예수님이 따라옵니다. 보이지 않는 사람이 어찌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을까요? 마태는 이들의 열정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정상적인 눈으로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책망합니다.


두 맹인은 예수님을 따라가며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릅니다. 이 부분은 1장의 족보와 정확히 일치 합니다. 당시 유대의 왕은 에돔 족속이고, 마카비 시대에도 레위인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다윗의 자손들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입니다. 사람들은 신경쓰지 않지만 두 맹인 정확하게 예수님의 유대인 진정한 왕, 정통성이 있는 왕의 후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5-38절 일꾼을 달라 하라


예수님은 도시와 촌을 다니시며 치유하시고. 회당에서 복음을 전파하십니다. 제자들에게 추수할 것은 많으니 추수할 일꾼을 하나님 아버지께 달라고 말합니다.


마태복음 장별 강해 및 강해 목록



마태복음 8장 강해

 마태복음 8장 개요

8장은 산 위에서 말씀 하시던 주님이 산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산에서 내려오시자 곧바로 나병 환자가 찾아와 고쳐 달라 간구하고, 백부장이 찾아와 자신의 하인을 고쳐 달라 말합니다. 예수님은 산 위에만 계시지 않고 산 아래로 내려와 사람들에게 들어가십니다. 사람 사이를 지나시면서 병든 자를 치유하시며 회복하십니다. 8장은 많은 치유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 1-4절 나병환자를 치유하심
  • 5-13절 백부장의 믿음
  • 14-17절 이사야의 예언
  • 18-22절 제자도를 가르치심
  • 23-27절 폭풍을 잠잠케 하심
  • 28-34절 가다라 지방에서 축사하심


1-4절 나병환자를 치유하심


산에서 내려 오시니


마태복음에서 산은 매우 중요한 상징입니다. 산상수훈이 시작되는 5장에서 예수님은 산에 오르시고(참 마 5:1) 이제는 내려 오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산상수훈은 출애굽 당시 시내산에 올라 모세가 받았던 율법과 같은 권위가 부여됩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말씀을 '권위 있는 자와 같고'(7:29)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제 산에서 내려오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내가 원하노니


나병은 부정한 병입니다. 병든 자를 만지면 부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3절) 치유하십니다. 부정한 자를 만지지만 부정하게되지 않고 부정한 자를 온전케 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능력이며, 구약과 신약의 현저한 차이입니다.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율법에 의하면 제사장이 병에 걸린 자를 판별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관습을 파괴하지 않습니다. 제사장의 선언으로 그는 성전에 다시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회복합니다.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버려진 그가 다시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5-13절 백부장의 믿음


백부장의 간구


로마의 백부장입니다. 당시 로마의 백부장은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께 직접 와서 자신의 하인을 고쳐 달라 말합니다. 얼마든지 사람들을 들일 수 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치유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명예가 깎이는 것을 감내하고 자신의 하인을 치료하고 싶어합니다. 아마도 참으로 아끼는 하인으로 보입니다. 주인이 하인을 아끼는 것은 일상적이나 자신의 명예까지 포기하면서 간구하는 것은 독특한 사건입니다.

백부장의 믿음만 강조되지만 그 믿음 이전에 그의 성품과 사람 됨이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바른 믿음은 바른 성품 위에서 생깁니다. 악한 성품은 믿음이 있어도 악한 삶을 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씀으로만


예수님께서 직접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7절) 하자 백부장은 손사례를 치며 자신의 집에 들어오는 것을 감당할 수 없으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8절)라고 말합니다. 당시 병을 치유하는 것은 직접 가서 뭔가를 해야 합니다. 굿도하고 하여튼 뭔가를 해야 병이 낫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백부장은 놀랍게도 다만 말씀으로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가라 하면 가고


군인의 생각입니다. 군인은 명령에 복종함으로 자신의 직무을 합니다. 백부장은 사회적으로 예수님보다 월등한 위치에 있음에도 예수님의 종이나 부하와 같다고 스스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명령함으로 순종하듯, 하인의 중풍병 또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 치유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존재들로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기원이 되는 인물들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말할 때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혈통을 따라 난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12절)게 되고, 오히려 이방인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14-17절 이사야의 예언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치다.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신 주님은 베드로의 집에 갑니다. 베드로는 처가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자 예수님께서 고쳐 주십니다. 장모 뿐 아니라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쳐 주십니다. 에수님은 치유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처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온전한 모습으로 회복되길 원합니다.


18-22절 제자도를 가르치심


인자는


한 서기관이 와서 예수님을 따른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십니다. 이번에는 아버지를 먼저 장사하게 해달라고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 하시며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이것은 우선 순위에 대한 것입니다. 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묻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를 때 자신이 해보고 싶은 거 다하고 그 다음 예수님을 따르려고 합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남은 시간, 여분의 시간, 짜투리 시간을 드려서는 안 되됩니다. 당신의 중심, 당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드려야 합니다.


23-27절 폭풍을 잠잠케 하심



예수님께서 파도를 잠잠케 하십니다. 모든 만물을 통치하시는 예수님의 능력과 권위를 보여주십니다.


28-34절 가다라 지방에서 축사하심


무덤 사이에서


가다라 지방에 도착하자 귀신들린 사람이 찾아옵니다. 그는 무덤 사이에 거합니다. 또한 몹시 사납습니다. 무덤은 죽은 시체가 있는 것으로 부정한 곳입니다. 온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납다는 말은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곳으로 찾아가십니다.

돼지 떼


돼지는 부정한 동물입니다. 부정한 곳에 귀신들이 들어가 삽니다. 




마태복음 7장 강해

 마태복음 7장 개요


7장은 산상수훈의 마지막 부분이자 마무리 부분이다. 산상수훈은 주기도문을 중심으로 이전과 이후로 구분이 됩니다. 5장이 광의적 의미가 강하다면 6장 후반부부터는 개인의 신앙생활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내용이 주를 이룬다.


1-6절 판단하지 말라

7-12절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13-14절 좁은 문과 넓은 문

15-27절 열매로 알리라

28-29절 무리들의 반응


1-6절 판단하지 말라


비판하지 말라


가장 오해가 많은 구절이다. 판단 또는 비판을 하지 말라는 말로 설교 또는 인용한다.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예수님도 판단했고 비판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으로 매우 민감하여 잘 판단해야 한다. 비둘기처럼 순결해야 하나 뱀처럼 지혜로워야 한다. 지혜는 타자에 대한 평가가 불가피하다. 저 사람이 사기꾼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며, 지혜이다. 사단에게 속으면서 '나는 판단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자는 착한 사람이 아니라 게으른 사람이며 악한 자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비판 또는 판단은 무엇을 말하는가. 4절에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언급한다. 판단하는 자들은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을 말한다. 1-2절의 말은 율법사들을 향한 것이니 그 부분을 이해하고 들으면 정확히 들어 맞는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는 자신은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서 마치 자신이 하나님처럼 사람들을 정죄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긍휼'의 마음과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어찌하여


놀라움의 표시다. 니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것이다. '형제'와 '네' 즉 비판자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한다. 티는 잘 보이지 않는다. 유심히 봐야 겨우 보인다. 타인에게 있는 티를 보면서 자신 안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한다. 들보가 눈 속에 있을리 없다. 티와 들보를 비교함으로 비판하는 자의 어리석음을 폭로한다. 타락한 인간은 '내로남불'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


빼게 하라


놀라운 표현이다. 자신이 직접 고쳐 주겠다는 말이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똥 묻은 개가 재 묻은 개를 나무란다'가 있다. 그는 '외식하는 자'(5절)다. 자신은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타인의 작은 실수와 허물을 고치려는 죄를 범한다. 자신의 알지 못하는 자는 교만하기 때문이다. 타인을 고치기 전에 자신을 먼저 고치라. 사람은 항상 자신을 낮춰야 한다.


개에게 주지 말며


개와 돼지는 부정한 존재다. 그들에게 '거룩한 것'과 '진주'를 주지 말라 경고한다. 가치 판단에 대한 것이다. 개와 돼지는 거룩한 것과 진주에 대한 가치를 알지 못한다. 개와 돼지가 누눌까? 남을 판단하는 자들이며, 그들은 외식하는 자들이다. 겉으로는 거룩한 체하나 뒤로는 온갖 더러운 짓을 행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함부로 대한다. 예수님은 후에 이들에 대해 반복적으로 경고하신다.


7-12절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구하고 찾고 두드리고


7-8절은 기도에 대한 설교를 자주하지만 기도가 아니다. 물론 기도와 상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세 동사에 주목하자. 구하다. 찾다. 두드리다. 구하다는 마음과 생각. 계획이다. 찾다는 행동을 말한다. 시도하는 것이다. 이곳저곳을 찾아 다닌다. 세 번째 두드리다는 찾은 후 문 앞에서 문을 노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것은 구체화이자 과정이다. 


그런데 무엇을 구하고 찾고 두드릴까? 9절과 10절에서 '달라'에 나온다. 특히 11절에서 하나님 아버지가 언급된다. 그러니 기도와도 상관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구절은 하나님을 뜻을 구하는 자들에 대한 것이다. 핵심은 12절에 나오며, 황금율로 알려진 것이다. 모든 것은 주는 대로 돌아오는 것이다. 받고 싶다며 주라. 이것이 답이다.


하물며


하물며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허물 많은 너희도 자식을 사랑하지 않느냐. 그렇다면 하늘의 아버지는 너희를 얼마나 더 사랑하겠는가? 묻는 것이다. 이 부분은 6장 19-34절과 연관이 있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들을 사랑하시고 돌보신다.


13-14절 좁은 문과 넓은 문


좁은 문


다마스커스 문서를 참조하면 좁은 문은 절제와 선택이다. 세상에서 누리는 쾌락과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이다. 넓은 문은 멸망으로 가는 길이고, 좁은 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다. 문은 시작과 끝이다. 여기서는 시작의 문이다. 문을 열고 그곳으로 향한다. 어떤 길은 끝에 사망이 있고, 어떤 길은 생명이 있다. 넓은 문은 편한 문이고, 좁은 문은 힘든 문이다. 


그렇다면 문은 길로 통하고 길은 결국 삶의 방식을 말한다. 끝은 '열매'(16절)이고, 열매는 '행하는'(21,24절) 것이다. 말씀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욕망을 따를 것인가? 시작이 좋다고 끝이 좋은 것이 아니다. 시작이 힘들다고 끝이 나쁜 것도 아니다.


15-27절 열매로 알리라


거짓 선지자


그들은 선지자들이다. 하지만 거짓 선지자다. 그렇다면 그들은 선지자들이 아닌데 선지자들처럼 거짓으로 행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양의 옷을 입으나 속은 노략질하는 이리다. 양은 초식 동물이고, 이리는 육식 동물이다. 양과 이리를 비교하는 것은 타인에 대한 것이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느냐 그렇지 않느냐이다. 이리는 약한 동물을 잡아 먹는다. 양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거짓 선지자를 이리로 표현한 것은 타인을 잡아 먹기 위해 자신을 선지자로 포장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이들을 구분할까?


열매로 알리라


열매는 결과다. 또한 원인이다. 가시나무는 포도를 딸 수 없다. 다른 나무다. 엉겅퀴는 무과화를 맺지 못한다. 여기서 가시나무와 엉겅퀴는 '가시'를 말하며 해로운 존재를 말한다. 열매, 즉 먹을 것을 내지 못한다.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고,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 '아름다운 열매'는 가치 있는 열매를 뜻한다.


17절

οὕτως πᾶν δένδρον ἀγαθὸν καρποὺς καλοὺς ποιεῖ, τὸ δὲ σαπρὸν δένδρον καρποὺς πονηροὺς ποιεῖ·

모든(πᾶν) 

좋은 나무 (δένδρον ἀγαθὸν) 좋은 열매 (καρποὺς καλοὺς)

못된 나무 (σαπρὸν δένδρον) 나쁜 열매 (καρποὺς πονηροὺς)


'나쁜'으로 번역된 σαπρός은 신약에서 8번 언급된다. 엡 4:29외에는 모두 나무의 열매로 표현된다. 

  • 엡 4: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결국 나쁜은 '열매 없음'을 너머 해를 끼치는 존재임이 분명하다. 주님은 여기서 나쁜 열매를 맺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착각하면 안 된다.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즉 본성에 관한 것이며, 그들이 변화될 것이라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일 뿐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고, 다른 세계에 산다. 그것을 분별하라는 말이다. '알지니'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불에 던져


심판을 받을 것이다. 종말론적 표현이다. 궁극적으로 그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 부분은 13장에서 다시 강조된다. 불은 지옥을 말한다. 우리나라는 땅이 비옥하지만 팔레스타인 지역은 결코 그렇지 않다. 한정된 자원 안에서 열매를 맺도록 배려하는 것이 농부가 하는 일이다. 그러려면 쓸모 없는 나무는 빨리 베어 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쁜 나무들이 영양분을 흡수하기 때문이다.


주여주여-뜻대로


말과 행동이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거짓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때 위력을 발휘한다. 지키지 않는 말씀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주님은 누구든지 '행하는 자'(24절)가 되어야 한다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이 곧 존재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 실수하지 않고 발설한 그대로 된다.


악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으로 오직 인간만이 불순종한다. 그러므로 인간만이 악을 행한다.


행하는 자는


모든 말씀을 마치시고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24절)가 지혜로운 사람으로 칭하신다. 지혜는 종말론적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견디는 것이 지혜다. 지혜는 말씀대로 사는 삶이다.


비와 창수, 바람은 시험하는 것으로 존재를 드러낸다. 반석 위에 세워진, 즉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는 결국 하나님의 시험에 통과하지만 그렇지 않는 자는 무너질 것이다. 무너짐은 영원한 형벌을 뜻한다. 지금까지 그들이 행한 모든 것이 가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들은 헛된 삶을 살았다.


28-29절 무리들의 반응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설교다. 본질을 통찰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들의 영혼에 깊은 울림을 주었다. 예수님은 단지 해석이 아니라 '권위'로 가르치셨다.


마태복음 장별 요약 및 강해 목록


마태복음 6장 강해

 마태복음 6장 개요

5장부터 시작된 산상수훈이 6장에서 정점에 이른다. 가장 중요한 내용들이 6장에서 다루어진다. 산상수훈의 구조상 주기도문은 메시지의 중심에 있다. 주기도문을 중심으로 앞 부분과 뒷부분으로 나누어진다. 5장이 주로 천국 시민이 행한 자세에 대한 것들이라면 6장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조한다. 7장으로 넘어가면 이웃과의 관계, 선한 삶에 대한 부분이 언급된다.


  • 1-4절 구제에 관하여
  • 5-15절 기도에 관하여
  • 16-18절 금식에 관하여
  • 19-24절 보물은 하늘에 쌓아라
  • 25-34절 염려하지 말라


1-4절 구제에 관하여


사람에게 보이려고


목적과 의도가 다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하는 것인데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기도가 아닙니다. 구제는 사람에게 보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보이려는 의도는 목표가 잘못된 것입니다. 구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다. 하지만 그 목적이 사람에게 사람에게 보이려는 것은 사람을 향한 것이기에 잘못된  것이다.


대개 처음은 순수하게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나 사람의 관심을 받으려 합니다. 순수한 마음이 사라진 것이죠. 이러한 행위는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 마음을 잃으면 안 됩니다.  제가 아는 어떤 장로님도 처음에는 주님을 위해서 일을 한다고 해 놓고 온갖 불법을 다 저질러 교도소에 들어갔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돈을 벌어 교회에 내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기괴한 고백을 하는 것들을 들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람에게 영광을 받으려고


1절에서 '사람에게 보이려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다.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구제하는 행위를 '외식'이라 말합니다. 외식은 겉과 속이 다른 거짓행위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 처럼 하지만 실제로는 거짓으로 속이고 사람에게 행하는 것이다. 결국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2절) 사람들이 보이는 곳에서 한다. 반대로 그는 사람들이 보지 않으면 구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영광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왼손이 모르게 하여


오른손은 전체 전부를 뜻한다. 또한 얼굴처럼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왼손은 부정한 손이며, 하찮은 것이다. 그런데 대표격에 있는, 모든 것이 드러난 오른손이 자신의 하는 일을 어떻게 숨길 수 있을까? 그만큼 은밀해야 한다는 말이다.


은밀하게 해야 하는 이유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서 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은밀함이란 사람에게 숨기고 하나님께 드러낸다는 말이다. 구제를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것이다. 은밀한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 6장 전반에 걸쳐 일어난다.


5-15절 기도에 관하여


외식하는 자와 같이


다시 외식이 드러난다. 외식은 가면이다. 속과 겉이 다르다. 왜 그렇게 할까? 속이려는 이유다. 기도할 때 외식하지 마라. 속이지 말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외식하는 자들은 기도를 '사람에게 보이려고'(5절) 한다. 기도는 하나님께 하지 않나? 그런데 왜 사람에게 보이려는 것일까? 자신이 경건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은 허영심, 명예 때문이다. 거짓된 자들의 특징이다. 그렇다면 그는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기도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이 많은 회당이나 큰 거리 어귀에서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 많은 사람들이 지나는 곳에서 기도하여 자신이 얼마나 경건한 사람인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보여주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상을 받았다고 말한다.


네 골방에 들어가


'네 골방'이다. 기도는 자기만의 기도 처소가 있어야 한다. 그곳은 단지 장소 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배타적 장소와 배타적 시간도 함께 의미한다.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지는 장소와 시간이 있을 때 진정한 기도가 시작된다.


골방의 헬라어 타메이온(ταμεῖον) 신약에서 네 번 사용된 단어다. 한 번은 이곳에서 다른 세 곳은 마 24:26, 눅 12:3, 12:24에서 사용된다. 큰 의미 있는 단어는 아니다. 조용하고 숨겨지고 은밀한 깊은 방을 뜻한다. 특히 눅 12:3은 골방의 의미를 잘 드러낸다.

  • 눅 12:3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 되리라


골방은 자기만의 은밀한 공간을 뜻한다. 구제나 기도는 골방에서 하든 은밀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은밀곳의 일도 모두 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비밀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보신다.


중언부언


기도의 또 다른 어폐는 사람에게 보이려 하지 않지만 잘못된 방법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그중의 하나가 '많은 말'이다. 많은 말은 업적을 뜻한다. 기도의 양과 응답이 정비례라고 생각하며 많이 기도하면 응답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기도는 양보다 질이 우선이다. 


하지만 분명히 일어야 할 것은 기도가 깊어지면 질과 함께 양도 늘어난다는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오래 있고 싶어하든 하나님과 친밀해지면 오래 기도하게 된다. 하지만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기도가 응답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많은 말로 하나님께 자신의 기도를 관철 시키려는 마음은 매우 인간적인 생각이며 탐욕적이다.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께 있다.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본받지 말라'(8절) 하신다. 그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외식이든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한 생각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노력을 무시하지 않지만 그것으로 통제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을 초월해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이미 알고 계신다고 하신다. 하나님은 이미 아신다. 기도의 의도도, 목적도 아신다. 하나님은 사람들과 진정한 친교를 원하신다.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연약하면 연약한 대로 그대로 나아가면 됩니다.


이렇게 기도하라


9-13절까지의 주기도문은 산상수훈의 중심이자 핵심이다. 주기도문 이전과 이후로 갈리면서 진정한 기도가 무엇인지를 핵심과 목적을 보여주신다. '이렇게 기도하라'는 앞선 '본받지 말라'는 말과 역으로 '본받으라'는 뜻이다. 우리가 본받아야할 기도는 주기도문에 담겨 있다. (여기서는 간략하게 다루고 후에 주기도문을 깊이 다룰 것이다.)


아버지여 하늘에 계신


원문은 정확이 '아버지여 우리의 하늘에 계신'이다.

Πάτερ ἡμῶν ὁ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 

아버지란 호칭은 혁명적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곳이 몇 곳이 있지만 그곳은 직접 부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향해 직접적으로 '아버지'라고 부르는 곳은 예수가 처음이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혁명적 사건이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 아버지는 친밀함을 뜻한다. 관계의 변화가 일어났다.


하늘은 초월적 장소다. 유대인들은 하늘에 삼층으로 되어 있다 믿었다. 가장 높은 삼층에 하나님에 계신다. 그곳은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하나님만의 배타적 공간이다. 하지만 이제 초월적 존재이신 하나님이 지금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며, 엄밀하게 '하나님의 왕국'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주신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이 통치하는 곳이다.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도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말씀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기를 기도한다.


일용할 양식


20년 전에 어떤 목사님 요즘은 굶은 사람이 없다고 말한 적으로 들은 적이 있다. 불과 수년 전에도 어떤 목사님이 그런 말을 하셨다. 세상을 참 모르는 사람이다. 지금도 세상에는 굶은 사람이 정말 많다. 예전처럼 많지 않아도 많이 굶는다. 다만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자존심 때문에 숨기기도 하고, 의도적으로 나라에서 숨기기도 하기 때문이다.


일용한 양식은 하루하루 살아갈 음식을 뜻하지만, 날마다의 하나님의 은혜를 뜻하기도 하다. 6장 후반부에서 먹고 사는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우리의 생 전체가 먹고 사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일요한 양식을 언급할 때 곧바로 출애굽 당시의 광야에서 만나를 먹던 이스라엘을 기억한다. 그들은 먹을 것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 굶지 않게 하셨다.


죄 지은 자를


기독교인의 용서를 말한다. 나에게 죄를 지은 자를 먼저 용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라 하신다. 하지만 이런 기독교인이 있을까?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지만 결국 자신을 위한 삶을 살지 않는다. 또한  죄 지은 자를 용서하는 것이 맞을까? 이 부분은 많은 고민과 생각이 필요하다. 예수님도 친히 저주하셨고, 심판을 경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악에 빠지지 않게'로 직역 된다. 그래서 종종 영어 및 다른 번역은 악을 인격체로 보고 '사탄' '마귀' 등으로 번역한다. 악에 빠진다는 말은 악에게 지배 당한다는 뜻이다. 악에게 조종 당하기 때문에 악을 인격체로 보면 사탄과 마귀가 된다. 


이 부분은 정확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치 되는 나라와 반대되는 것으로 악에게 지배 당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16-18절 금식에 관하여


이 부부은 1-4절과 대응한다. 구제와 기도에 이어 금식으로 이어진다. 금식은 하나님께 하는 기도와 동일한 맥락이다. 여기서 '사람들에게'가 빠져 있다. 하지만 하반부에 '사람에게 보이려고'가 등장하면서 외식에 관한 것임을 보여준다.


금식은 일종의 헌신이다. 특별한 이유 때문에 금식하기도 하지만, 모든 것을 끊고 하나님만을 보기 위하여 금식하기도 한다. 세상(음식)이 주는 쾌락을 끊고 죽기를 각오하고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뜻이다. 


19-24절 보물은 하늘에 쌓아라


보물을 어디에 쌓을까


여기서는 두 가지가 주제다. 하나는 '보물', 다른 하나는 '어디'이다. 보물을 쌓아둘 곳이 하늘인가 땅인가. 하지만 문장을 잘 살피면 보물이라기보다는 어떤 것을 보물이라 생각하느냐의 문제다. 왜냐하면 땅에 쌓은 보물은 하늘에 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전혀 다른 개념이다. 대부부의 주석가들은 하늘에 쌓은 보물은 앞서 소개된 구제와 기도 등으로 돌린다. 이런 것은 상에서 쌓을 수 없다. 또한 땅에서 권력, 보석, 등을 보석으로 생각하는 것과 반대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보물은 무엇을 보물로 보느냐의 문제다.


하늘에 쌓아 두라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는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이다. 즉 하나님이 보물로 여기시는 것을 하라는 말이다. 땅은 도적이 많고 동록, 즉 썩는다. 우리는 잊으면 안 된다. 이 땅은 도둑이 있다. 도둑질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어리석은 자는 이 땅에 보물을 쌓음으로 모두 잃어 버린다. 하지만 지혜로운 자는 하늘에 쌓음으로 그대로 보존된다.


보물과 마음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하신다. 마음이 있는 곳은 보물이 있는 곳이다. 무엇을 보물로 생각하느냐가 그 사람의 행위를 결정한다. 세상의 부와 권력이 보물이라면 땅에 쌓을 것이고, 구제와 선이 보물이라면 하늘에 쌓을 것이다. 예수님은 영생을 묻는 젊은 관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확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눅 18:22)


두 주인


보물의 문제는 결국 주인의 문제로 돌아간다. 보물은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자신이 소유 당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땅과 하늘은 단지 장소의 개념이 아닌 종속의 문제요 소속의 문제다. 땅에 속한 자는 물질을 주인으로 섬기고, 하늘에 속한 자는 구제하고 사랑을 실천한다. 땅을 주인으로 섬기는 자는 땅이 요구하는 대로 해야 한다. 축적하고 자신의 재산과 부를 불려 간다. 하지만 하늘에 보물을 쌓으려면 이 땅에서 헤쳐야 한다. 나누고 섬김으로 땅에서 재물을 소유하지 못한다. 문제는 땅에서는 쌓지만 도둑질을 당하고, 하늘은 흩지만 점점 보물을 쌓아간다.


두 주인을 같이 섬길 수 없다. 길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착각한다. 같이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어느 순간 서로 다른 길을 걸어야할 때가 온다. 그 때는 많이 늦었다.


25-34절 염려하지 말라


무엇이 중한가


25절부터는 결론에 해당된다.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소유하지 않을 수 없다. 물질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보물을 하늘에 쌓아야 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누가 책임질 것이다. 주님은 그것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 하신다.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염려하지 않아야 하는가?


첫 번째 근거는 무엇이 중한가를 생각하라. 목숨과 음식, 몸과 의복을 비교하지만 우선순위를 말한다. 음식도 목숨을 위해 먹는 거다. 의복도 몸을 위해 입는다. 순서가 바뀌면 안 된다. 결국 33절으로 가면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두 번째 근거는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이다.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는 스스로 크고 자란다. 정말 그럴까? 아니다.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시다. 공중의 새는 먹이심으로 음식에 관한 걱정을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제공하고, 들의 백합화는 입히심으로 의복에 대한 걱정을 하지 말라 하신다.


하물며


공주의 새도 먹이시고, 들의 풀도 꽃도 입히신다. 그렇다면 나의 자녀들인 너희는 '하물며' 더 사랑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굉장히 논리적 질문이자 답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 모른다'이다.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들을 사랑하시고 돌보신다. 절대 그대로 두지 아니하신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이다.


내일 위하여


내일은 내가 할 수 없습니다. 나의 시간도 아닙니다. 내일 내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것이 사람의 운명입니다. 그런데 내일을 걱정 하다니요. 그저 오늘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마태복음 장별요약 및 장별강해 목록


마태복음 5장 강해

 마태복음 5장 개요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는 산상수훈으로 불려지는 곳입니다. 마태복음은 다른 공관 복음서와 다르게 예수님의 사역을 요약한 다음 기나긴 강론을 사역의 초반부에 넣음으로 가르침을 앞세웁니다. 마태복음의 주제가 하나님의 나라인 것을 감안하며, 산상수훈은 하나님 나라를 통치하는 법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를 세 장에 담아둔 것이죠. 이러한 구조를 보면 마태복음은 확실히 체계적으로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제 산상수훈을 살펴 보도록 합시다.


마태복음 5장의 구조

  • 1-12절 팔복 강론
  • 13-16절 소금과 빛
  • 17-20절 율법의 완성
  • 21-26절 화목하라
  • 27-30절 간음과 지옥불
  • 31-37절 이혼, 맹세
  • 38-48절 동해보복, 원수 사랑


1-12절 팔복 강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히브리인들에게 산은 신들이 계신 곳이다. 우리나라도 신령은 산에 있듯. 특히 히브리인들에게 산은 곧 시내산과 연결되며, 시온산으로 불리는 예루살렘 역시 산이다. 산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다.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 앉으심으로 진정한 왕이심을 드러내신다.

  • 시 2: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가르쳐

가르치다는 4:23의 가르침을 가져왔다. ἐδίδασκεν는 미완료 직설법 3칭으로 오래전부터 가르쳐 왔고 아직도 여전히 가르치고 있음을 의도한다. 이 가르침은 사도들과 제자들을 통해 계속하여 이루어져야 할 사명이 된다.


3절 심령이 가는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Μακάριοι οἱ πτωχοὶ τῷ πνεύματι, ὅτι αὐτῶν ἐστιν ἡ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


복이 있나니

Μακάριοι는 그냥 우리가 아는 복이다. 70인역도 구약의 복을 μακάριος로 번역했다. 너무 큰 의미는 두지 말아야 한다. 복은 매우 포괄적이며, 상대적이다. 신약에 있어서는 복이 대부분이 육신적인 의미보다 영적인 부분에서 사용되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복이 아닌 복들로 복수형태로 사용되었다.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다. 이 구절은 시편 1편 1절을 연상시킨다.

  • LXX 시편 1:1 μακάριος ἀνήρ ὃς οὐκ ἐπορεύθη ἐν βουλῇ ἀσεβῶν καὶ ἐν ὁδῷ ἁμαρτωλῶν οὐκ ἔστη καὶ ἐπὶ καθέδραν λοιμῶν οὐκ ἐκάθισεν


가난한 자는

구약에서 가난은 저주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이들에 대한 저주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역설하신다. 복음 안에서 가난은 저주가 복이 되어 바뀐다. 하나님의 나라의 법칙의 시작이다. 가난은 양식의 부재와 권력과 친구의 부재 등 다양한 사회학적 요소까지 포괄한다. 즉 사회적 약자인 동시에 하나님께 버림 받은 자다. 하지만 복음 안에서 가난은 역치된다.


심령이

누가복음은 심령이 빠지고 가난한 자로 소개된다. 하지만 마태는 심령을 넣음으로 좀더 다른 의미로 해석하려 한다. 심령은 마음 그 자체다. 심령으로 번역된 단어는 프뉴마(πνεῦμα)이다. 영으로 번역되는 단어다. 이사야 66:2절과 비교하면 신약적 의미가 보강된다.

  • 사 66: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가난은 제2성전기 문헌에서는 긍정적 의미로 사용되다는 점에서 신약의 의미를 제공한다. 즉 부유한 자들은 로마와 결탁하여 부를 쌓지만 가난은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자들이 치르는 대가로 받아들여졌다. 솔로몬의 시편이나 다마스커스 문헌(쿰란 문헌)에 의하여 가난은 종종 의로운 자로 치환된다.


천국이 저희 것이요

천국을 소유하게 된다. 엄밀하게 천국의 백성이 되지만 능동형으로 사용하여 천국을 소유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천국(ἡ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은  왕국이다. 바실레이아(ἡ βασιλεία)는 왕들이 다스리는 왕의 나라를 뜻한다. 하나님의 나라도 하나님의 왕국이다. 나라는 썩 좋은 번역이 아니다. 하나님의 왕국이 자신의 소유가 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다'는 ἐστιν을 사용하여 현재형으로 이미 왕국을 소유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가난한 자가 가장 많은 부와 능력이 있는 하나님의 왕국을 소유하게 된다는 놀라운 역설이다.


애통하는 자


애통은 가난한 자의 애통이다. 아무도 돌볼 사람이 없음으로 버려진 존재이다. 고아의 눈물, 과부의 애통과 상통한다. 하지만 이제 그러한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한다. 그들의 위로를 받을 것이다. 위로는 하나님의 위로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제는 그들의 보호자가 되시고, 남편이 되어 주실 것이다. 애통을 죄에 대한 애통으로 과도하게 축소 시켜서는 안 된다.


온유한 자

가난과 애통이 내재적 요소라면 온유는 타인을 대하는 방식이다. 온유는 타인을 대할 때 부드럽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을 말한다. 타인을 부드럽게 대하는 자들은 땅을 얻게 될 것이다. 땅은 영역이며 영향력이다. 타인의 비방과 모욕을 부드럽게 받아 들이는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의는 곧다 바르다는 뜻이다. 구약적 의미는 하나님의 계명, 율법 대로 행하는 것이 의다. 신약에서 의는 죄를 없이함을 뜻한다. 의롭게 된자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자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의롭게 된 자이다. 신약의 의가 구약의 츠타카를 번역한 것을 보면 이것이 더욱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구절의 의의 주림은 하나님의 말씀을 살려는 욕망,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열정을 뜻한다.


13-16절 소금과 빛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은 짜다. 부패를 방지한다. 하지만 구약에서 소금은 불변성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언약의 소재로 소개된다. 

  • 레위기 2:13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 민수기 18:1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소금 언약이니라
  • 역대하 13:5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 아니냐


세상은 하나님께 드려질 제물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소금이 되어 하나님께 드려진다. 소금이 없다면 제물은 드려질 수 없다. 소금의 다양한 의미를 너머 본문 안에서 소금은 제의적 의미를 가진다.


그 맛을 잃으면

이 부분은 바위 소금을 언급한다. 바위 소금은 돌과 섞여 있어 염화나트륨이 빠져 나가도 유지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바위 소금만을 사용하고 일반 바다에서 나오는 소금을 모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서쪽이 지중해이고, 요단강 하류에 소금이 모여 있는 염해 또는 사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금이 맛을 잃는다는 것은 그런 소금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소금이 제 기능을 잃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에둘러 말하는 것이다.


소금이 짜지 않다면 소금이 가지는 목적,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에 쓸모 없어진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소금으로서의 짠 맛을 유지해야 한다. 그것은 거룩이다.


세상의 빛

빛은 분별하는 것이다. 빛이 없다면 모든 것이 분별되지 않는다. 하지만 빛이 오면 모든 것이 명확하게 구분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진리를 행함으로 세상이 악하다고 심판한다. 빛은 옳은 행위며, 진리를 드러내는 삶이다. 16절에서 '착한 행실'를 보는 것을 빛으로 소개하고 있으므로 더욱 명확해 진다.


17-20절 율법의 완성


율법을 완전하게

신약 시대에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흔하게 주장하는 구절이다. 터무니 없는 주장이다. 이 부분은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을 지켜서는 안 되는 이유를 말한다. 율법의 목적이 무엇인가? 거룩이다. 거룩은 하나님의 계명대로 사는 것이다. 거룩을 이상한 의미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거룩은 말씀대로의 삶이다. 그렇다면 율법의 목적은 말씀대로 살도록 하는 것이다.


완성하다의 헬라어 프렐레오-(πληρόω)은 영어성경은 채우다( fill, fulfill) 또는 마치다(complete) 란 의미로 번역했다. 완성은 부족한 상태였지만 완전히 채워져 더 이상 채울 필요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완성의 의미를 갖는다. 즉 완성된 것이다.


율법의 완성이 무엇일까? 율법이 요구하는 것, 목적하는 바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다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거룩'으로 되돌아 간다. 문제는 그것을 일반 사람들이 아닌 예수님이 모두를 위해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율법의 완성 안에 있게 되고 효력을 발생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십자가의 사건을 말한다. 그렇다면 율법의 완성은 거룩한 삶을 요구했지만 그렇게 살지 못한 사람들을 정죄하고, 죽임으로 율법의 효력이 더 이상 미치지 않는다는 으미가 된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죽었기 때문에.


R. T. 프랜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 과정 속에서 율법의 특정 요소가 모든 현실적 목적에서 '폐지된' 것처럼 보일 수 있을지라도, 이는 율법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지위를 상실한 것 때문이 아니라 성취의 시대에 이들의 역할이 변화되었기 때문이고, 이 시대에는 성취자인 예수, 율법이 그에 대해 미리 말하고 있던 예수가 궁극적인 권위자인 것이다." ( 마태복음 (부흥과개혁사))


해설이 시원하지 않다. 프랜스는 '성취'라는 단어를 선호하다. 일단 다름 구절로 넘어가 보자.


율법 - 다 이루리라


18절은 앞선 구절인 17절을 보강한다. 예수는 율법의 폐지가 아닌 성취로 해석했고, 다 이루어지리라 말씀하신다. 율법은 버려지지 않고 완성됨으로 목적을 달성하게 되고 다 이루어 진다.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계명이며 약속이다. 발화된 말씀은 그 목적을 달성한다. 율법도 하나님의 말씀이니 반드시 그 목적을 달성할 것이다. 율법이 의도한 바는 명확하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 받는 것이다. 여기서 자꾸 율법의 점과 획에 신경 쓰면 안 된다. 히브리어는 모음을 쓰지 않는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리 작아도 반드시 실행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 실현,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내용은 19절에서 재차 강조된다.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동등하게 소중하다. 모두가 진리고, 모두가 가치가 있다. 어떤 말씀을 버리고 자신이 편한대로, 욕망대로 취사선택하는 것은 악이고 죄이다.


너희의 의


신약에서 의는 종종 거룩한 삶,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하다. 그 삶은 '구제'이다. 이 부분은 후에 따로 다룰 것이다. 예수가 말하는 '너희의 의'는 율법이 의도한 수동적 삶을 너머 적극적으로 이웃을 도와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서기관들은 무엇을 하지 않았으므로 부정한 것을 만지지 않았음으로 '거룩하다' 말한다. 하지만 제자들-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능동적으로 선을 행함으로 기존의 수동적 의를 넘어서야 한다. 복음을 받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들은 종이 아니라 아들이다. 그는 능동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21-26절 화목하라


옛 사람 - 나는

예수님은 자신을 구약의 율법과 비교한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을 새로운 율법의 창시자로 소개한다. 나는 율법을 대신할 새로운 계명을 선포한다.


노하는 자마다

살인은 타인을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부정하고, 그를 통해 이루시고자하는 하나님의 의도를 무너뜨린다. 예수님은 이제 노하고 라가라 하는 자들에게 저주를 내리신다. 결국 형제를 몹쓸 자로 비판하고 차별하는 자는 그를 있게 하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다.


먼저 가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삶이 받쳐 주어야 한다. 삶이 없는 예배는 열납 되지 않는다. 예배보다 먼저 할 일이 있다. 그것은 형제와 화목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화목하러 이 땅에 오셨다. 먼저는 하나님과 죄인들을, 그 다음은 사람과 사람들이 화목하기를 바라신다. 화목 없는 제사는 열납 되지 않는다.


27-30절 간음과 지옥불

이 부분은 보는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고, 오른 눈이 언급된다. 눈은 보는 기관이다. 봄으로 마음의 욕망이 나온다. 간음은 보는 것과 연관되어 숨겨진 마음이 밖으로 드러나는 역할을 한다. 하와의 타락과 구약의 수많은 악들이 '보는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은 지적한다.


간음하지 말라

간음(μοιχεύω)은 결혼한 여자나 약혼한 여자와 성**를 맺는 것이다. 결혼 제도를 파괴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제 음욕의 문제로 들어간다. 음욕으로 번역된 에피뚜메오(ἐπιθυμέω)는 갈망 욕구를 뜻한다. 인간이 욕구를 가지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많은 목사나 학자들이 이 부분을 여자를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괜찮지만 성적 갈망을 가지는 것은 안 된다고 말한다.

 그릇된 해석이다. 난 그게 가능한지 알 수 없으며, 예수님 또한 그렇게 의도하지 않으셨다. 이곳은 욕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옛사람이 욕구는 있으나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죄가 아니라고 했지만 이제는 욕구 자체를 가진 것을 정죄함으로 모든 사람들이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시사한다. 결국 변화된 본성, 성령이 지배하는 새로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욕망은 이미 행동한 것이기 때문이다.


찍어 내버리라

무서운 말씀이다.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 범죄 하는 것보다 지옥불에 던져 지지 않은 것이 나을 것이라 하신다. 눈을 빼고 손발을 찍어 내도 욕망을 사라지지 않는다. 즉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 부분은 모순을 안고 있으며, 예수님은 그것을 이미 알고 계신다. 아마 다른 의도로 이 말씀을 하신 것이 분명하다.


오른 눈(29절)과 오른 손(30절)은 전체를 대표한다. 즉 오른 눈과 오른 손이 아니라 전체를 말한다. 어느 지체이든 죄를 범하는 데 사용되었다면 버려야 한다. 실제로 눈과 손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주님은 여기서 '백체 중 하나' 와 '온 몸'을 비교하고 있다. 온 몸은 삶 전체로 전위 되어 죄에 종속된 상태를 뜻한다. 그렇다면 오른 눈과 오른 손은 시작, 처음, 초기를 뜻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31-37절 이혼, 맹세


이혼증서

모세에 의하여 시작된 제도이다. 이 제도는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이다. 여성이 이혼 증서 없이 쫓겨나면 갈 곳이 없다. 모세는 이혼 증서를 줌으로 합법적으로 갈라서도록 허락했다. 이혼 증서를 가진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되지 않는 법적 독립성을 갖게 되고, 재가 할 수 있다.


  • [신 24:1-4] 1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2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3 그의 둘째 남편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또는 그를 아내로 맞이한 둘째 남편이 죽었다 하자 4 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보낸 전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하게 하지 말지니라


모세는 여기서 재가한 여성이 다시 이혼을 당해 홀로 있을 때 전 남편이 그녀를 데려오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성적으로 문란해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이혼은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합법적이며, 구약에서도 이혼은 보편화 되어 있었고, 신약에서도 여전히 당연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아내를 버리면

다시 음행의 문제로 나아간다. 예수님은 음행 외의 일로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합의 이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이다. 당시 유대 사회는 아내를 마음대로 버렸다. 좋은 싫든 남편이 버리면 끝이다. 버림 받은 여성은 아무런 법적 보호를 받지 못했다. 이 부분은 예수님께서 이혼을 금지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당시의 상황 속에서 너무나 흔한 이혼이 아닌 아내의 버려짐을 금지하기 위해 반대하신 것처럼 하신 것이다. 여성을 보호하려는 목적에서, 성적인 차원에서 여성을 보호하여 거룩한 백성의 삶을 살도록 하셨다.


헛 맹세

구약에서는 맹세가 허락되었다. 아니 권면 사항이었다. 하지만 오용되었다.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했고, 조롱하듯 맹세했다.

  • 신 10: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

맹세의 피폐를 아셨기에 이제 맹세를 금지하신다. 맹세는 자신의 말에 신용이 없을 때 타인의 이름을 빌려 오는 것이다. 문제는 그 이름이 온 천지 만물의 주인이신 여호와이시다. 함부로 여호와의 이름을 빌려 맹세를 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음으로 여호와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불명예를 준다. 이것은 악이다. 이제는 옳은 것은 옳다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하라고 명하신다.


38-48절 동해보복, 원수 사랑


눈은 눈으로

동해보복은 피해를 받은 만큼 그대로 돌려주는 것이다. 동해보복이 잔인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지만 동해보복은 잔인한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보복을 하는 것으로 복수심을 갖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누군가 당신의 뺨을 한 때 때렸다고 생각해 보라. 당신은 상대방의 빰을 한  대 때리면 분이 풀릴까? 그렇지 않다. 세 대 네 대를 때려 분이 풀린다. 아니 그래도 풀리지 않는다. 그래서 동해보복은 피해자를 보호하는 동시에 가해자를 보호하는 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대의 법은 어떤가? 누군가 나의 돈 100만 원을 훔쳤다면 법은 훔쳐간 사람을 약소한 벌금으로 벌하고 나에게는 100만 원을 돌려 주지 않아도 된다. 얼마나 잘못된 법인가? 그러니 가해자만 좋은 세상인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훔친 물건은 세 배 네 배 다섯 배를 더해 보상해야 한다. 피해를 줄 경우는 피해를 받은 그대로 돌려 줌으로 상해를 입히는 것을 금지함으로 감정의 악순환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πονηρός는 악한 자 또는 악을 말한다. 뿌리가 되는 πόνος는 '갈망', '욕망에 사로잡힌'의 뜻과 '고통'이 함께 있다. 이것은 마치 마약에 중독되어 헤어 나오지 못하고 계속하여 마약을 갈구하는 것과 비슷하다. 문제는 그러한 악한 자가 나에게 해를 가할 때 대항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들이 구하는 것을 다 주고 거절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수고하여 모은 재산을 거지가 달라고 하면 다 주어야 하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예수님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계신다. 이 구절들은 결국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를 위한 것으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라

유대인들의 이웃은 유대인들이다. 그들은 사마리아인들이나 헬라인 등 이방인들은 이웃으로 보지 않는다. 이 부분은 율법사의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에서 잘 드러난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원수로 생각하는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이웃의 개념을 완전히 바꾸신다. 그러므로 원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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