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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6장 강해

 마태복음 6장 개요

5장부터 시작된 산상수훈이 6장에서 정점에 이른다. 가장 중요한 내용들이 6장에서 다루어진다. 산상수훈의 구조상 주기도문은 메시지의 중심에 있다. 주기도문을 중심으로 앞 부분과 뒷부분으로 나누어진다. 5장이 주로 천국 시민이 행한 자세에 대한 것들이라면 6장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조한다. 7장으로 넘어가면 이웃과의 관계, 선한 삶에 대한 부분이 언급된다.


  • 1-4절 구제에 관하여
  • 5-15절 기도에 관하여
  • 16-18절 금식에 관하여
  • 19-24절 보물은 하늘에 쌓아라
  • 25-34절 염려하지 말라


1-4절 구제에 관하여


사람에게 보이려고


목적과 의도가 다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하는 것인데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기도가 아닙니다. 구제는 사람에게 보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보이려는 의도는 목표가 잘못된 것입니다. 구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다. 하지만 그 목적이 사람에게 사람에게 보이려는 것은 사람을 향한 것이기에 잘못된  것이다.


대개 처음은 순수하게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나 사람의 관심을 받으려 합니다. 순수한 마음이 사라진 것이죠. 이러한 행위는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 마음을 잃으면 안 됩니다.  제가 아는 어떤 장로님도 처음에는 주님을 위해서 일을 한다고 해 놓고 온갖 불법을 다 저질러 교도소에 들어갔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돈을 벌어 교회에 내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기괴한 고백을 하는 것들을 들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람에게 영광을 받으려고


1절에서 '사람에게 보이려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다.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구제하는 행위를 '외식'이라 말합니다. 외식은 겉과 속이 다른 거짓행위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 처럼 하지만 실제로는 거짓으로 속이고 사람에게 행하는 것이다. 결국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2절) 사람들이 보이는 곳에서 한다. 반대로 그는 사람들이 보지 않으면 구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영광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왼손이 모르게 하여


오른손은 전체 전부를 뜻한다. 또한 얼굴처럼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왼손은 부정한 손이며, 하찮은 것이다. 그런데 대표격에 있는, 모든 것이 드러난 오른손이 자신의 하는 일을 어떻게 숨길 수 있을까? 그만큼 은밀해야 한다는 말이다.


은밀하게 해야 하는 이유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서 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은밀함이란 사람에게 숨기고 하나님께 드러낸다는 말이다. 구제를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것이다. 은밀한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 6장 전반에 걸쳐 일어난다.


5-15절 기도에 관하여


외식하는 자와 같이


다시 외식이 드러난다. 외식은 가면이다. 속과 겉이 다르다. 왜 그렇게 할까? 속이려는 이유다. 기도할 때 외식하지 마라. 속이지 말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외식하는 자들은 기도를 '사람에게 보이려고'(5절) 한다. 기도는 하나님께 하지 않나? 그런데 왜 사람에게 보이려는 것일까? 자신이 경건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은 허영심, 명예 때문이다. 거짓된 자들의 특징이다. 그렇다면 그는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기도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이 많은 회당이나 큰 거리 어귀에서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 많은 사람들이 지나는 곳에서 기도하여 자신이 얼마나 경건한 사람인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보여주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상을 받았다고 말한다.


네 골방에 들어가


'네 골방'이다. 기도는 자기만의 기도 처소가 있어야 한다. 그곳은 단지 장소 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배타적 장소와 배타적 시간도 함께 의미한다.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지는 장소와 시간이 있을 때 진정한 기도가 시작된다.


골방의 헬라어 타메이온(ταμεῖον) 신약에서 네 번 사용된 단어다. 한 번은 이곳에서 다른 세 곳은 마 24:26, 눅 12:3, 12:24에서 사용된다. 큰 의미 있는 단어는 아니다. 조용하고 숨겨지고 은밀한 깊은 방을 뜻한다. 특히 눅 12:3은 골방의 의미를 잘 드러낸다.

  • 눅 12:3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 되리라


골방은 자기만의 은밀한 공간을 뜻한다. 구제나 기도는 골방에서 하든 은밀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은밀곳의 일도 모두 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비밀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보신다.


중언부언


기도의 또 다른 어폐는 사람에게 보이려 하지 않지만 잘못된 방법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그중의 하나가 '많은 말'이다. 많은 말은 업적을 뜻한다. 기도의 양과 응답이 정비례라고 생각하며 많이 기도하면 응답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기도는 양보다 질이 우선이다. 


하지만 분명히 일어야 할 것은 기도가 깊어지면 질과 함께 양도 늘어난다는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오래 있고 싶어하든 하나님과 친밀해지면 오래 기도하게 된다. 하지만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기도가 응답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많은 말로 하나님께 자신의 기도를 관철 시키려는 마음은 매우 인간적인 생각이며 탐욕적이다.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께 있다.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본받지 말라'(8절) 하신다. 그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외식이든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한 생각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노력을 무시하지 않지만 그것으로 통제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을 초월해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이미 알고 계신다고 하신다. 하나님은 이미 아신다. 기도의 의도도, 목적도 아신다. 하나님은 사람들과 진정한 친교를 원하신다.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연약하면 연약한 대로 그대로 나아가면 됩니다.


이렇게 기도하라


9-13절까지의 주기도문은 산상수훈의 중심이자 핵심이다. 주기도문 이전과 이후로 갈리면서 진정한 기도가 무엇인지를 핵심과 목적을 보여주신다. '이렇게 기도하라'는 앞선 '본받지 말라'는 말과 역으로 '본받으라'는 뜻이다. 우리가 본받아야할 기도는 주기도문에 담겨 있다. (여기서는 간략하게 다루고 후에 주기도문을 깊이 다룰 것이다.)


아버지여 하늘에 계신


원문은 정확이 '아버지여 우리의 하늘에 계신'이다.

Πάτερ ἡμῶν ὁ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 

아버지란 호칭은 혁명적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곳이 몇 곳이 있지만 그곳은 직접 부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향해 직접적으로 '아버지'라고 부르는 곳은 예수가 처음이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혁명적 사건이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 아버지는 친밀함을 뜻한다. 관계의 변화가 일어났다.


하늘은 초월적 장소다. 유대인들은 하늘에 삼층으로 되어 있다 믿었다. 가장 높은 삼층에 하나님에 계신다. 그곳은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하나님만의 배타적 공간이다. 하지만 이제 초월적 존재이신 하나님이 지금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며, 엄밀하게 '하나님의 왕국'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주신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이 통치하는 곳이다.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도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말씀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기를 기도한다.


일용할 양식


20년 전에 어떤 목사님 요즘은 굶은 사람이 없다고 말한 적으로 들은 적이 있다. 불과 수년 전에도 어떤 목사님이 그런 말을 하셨다. 세상을 참 모르는 사람이다. 지금도 세상에는 굶은 사람이 정말 많다. 예전처럼 많지 않아도 많이 굶는다. 다만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자존심 때문에 숨기기도 하고, 의도적으로 나라에서 숨기기도 하기 때문이다.


일용한 양식은 하루하루 살아갈 음식을 뜻하지만, 날마다의 하나님의 은혜를 뜻하기도 하다. 6장 후반부에서 먹고 사는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우리의 생 전체가 먹고 사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일요한 양식을 언급할 때 곧바로 출애굽 당시의 광야에서 만나를 먹던 이스라엘을 기억한다. 그들은 먹을 것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 굶지 않게 하셨다.


죄 지은 자를


기독교인의 용서를 말한다. 나에게 죄를 지은 자를 먼저 용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라 하신다. 하지만 이런 기독교인이 있을까?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지만 결국 자신을 위한 삶을 살지 않는다. 또한  죄 지은 자를 용서하는 것이 맞을까? 이 부분은 많은 고민과 생각이 필요하다. 예수님도 친히 저주하셨고, 심판을 경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악에 빠지지 않게'로 직역 된다. 그래서 종종 영어 및 다른 번역은 악을 인격체로 보고 '사탄' '마귀' 등으로 번역한다. 악에 빠진다는 말은 악에게 지배 당한다는 뜻이다. 악에게 조종 당하기 때문에 악을 인격체로 보면 사탄과 마귀가 된다. 


이 부분은 정확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치 되는 나라와 반대되는 것으로 악에게 지배 당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16-18절 금식에 관하여


이 부부은 1-4절과 대응한다. 구제와 기도에 이어 금식으로 이어진다. 금식은 하나님께 하는 기도와 동일한 맥락이다. 여기서 '사람들에게'가 빠져 있다. 하지만 하반부에 '사람에게 보이려고'가 등장하면서 외식에 관한 것임을 보여준다.


금식은 일종의 헌신이다. 특별한 이유 때문에 금식하기도 하지만, 모든 것을 끊고 하나님만을 보기 위하여 금식하기도 한다. 세상(음식)이 주는 쾌락을 끊고 죽기를 각오하고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뜻이다. 


19-24절 보물은 하늘에 쌓아라


보물을 어디에 쌓을까


여기서는 두 가지가 주제다. 하나는 '보물', 다른 하나는 '어디'이다. 보물을 쌓아둘 곳이 하늘인가 땅인가. 하지만 문장을 잘 살피면 보물이라기보다는 어떤 것을 보물이라 생각하느냐의 문제다. 왜냐하면 땅에 쌓은 보물은 하늘에 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전혀 다른 개념이다. 대부부의 주석가들은 하늘에 쌓은 보물은 앞서 소개된 구제와 기도 등으로 돌린다. 이런 것은 상에서 쌓을 수 없다. 또한 땅에서 권력, 보석, 등을 보석으로 생각하는 것과 반대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보물은 무엇을 보물로 보느냐의 문제다.


하늘에 쌓아 두라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는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이다. 즉 하나님이 보물로 여기시는 것을 하라는 말이다. 땅은 도적이 많고 동록, 즉 썩는다. 우리는 잊으면 안 된다. 이 땅은 도둑이 있다. 도둑질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어리석은 자는 이 땅에 보물을 쌓음으로 모두 잃어 버린다. 하지만 지혜로운 자는 하늘에 쌓음으로 그대로 보존된다.


보물과 마음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하신다. 마음이 있는 곳은 보물이 있는 곳이다. 무엇을 보물로 생각하느냐가 그 사람의 행위를 결정한다. 세상의 부와 권력이 보물이라면 땅에 쌓을 것이고, 구제와 선이 보물이라면 하늘에 쌓을 것이다. 예수님은 영생을 묻는 젊은 관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확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눅 18:22)


두 주인


보물의 문제는 결국 주인의 문제로 돌아간다. 보물은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자신이 소유 당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땅과 하늘은 단지 장소의 개념이 아닌 종속의 문제요 소속의 문제다. 땅에 속한 자는 물질을 주인으로 섬기고, 하늘에 속한 자는 구제하고 사랑을 실천한다. 땅을 주인으로 섬기는 자는 땅이 요구하는 대로 해야 한다. 축적하고 자신의 재산과 부를 불려 간다. 하지만 하늘에 보물을 쌓으려면 이 땅에서 헤쳐야 한다. 나누고 섬김으로 땅에서 재물을 소유하지 못한다. 문제는 땅에서는 쌓지만 도둑질을 당하고, 하늘은 흩지만 점점 보물을 쌓아간다.


두 주인을 같이 섬길 수 없다. 길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착각한다. 같이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어느 순간 서로 다른 길을 걸어야할 때가 온다. 그 때는 많이 늦었다.


25-34절 염려하지 말라


무엇이 중한가


25절부터는 결론에 해당된다.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소유하지 않을 수 없다. 물질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보물을 하늘에 쌓아야 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누가 책임질 것이다. 주님은 그것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 하신다.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염려하지 않아야 하는가?


첫 번째 근거는 무엇이 중한가를 생각하라. 목숨과 음식, 몸과 의복을 비교하지만 우선순위를 말한다. 음식도 목숨을 위해 먹는 거다. 의복도 몸을 위해 입는다. 순서가 바뀌면 안 된다. 결국 33절으로 가면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두 번째 근거는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이다.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는 스스로 크고 자란다. 정말 그럴까? 아니다.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시다. 공중의 새는 먹이심으로 음식에 관한 걱정을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제공하고, 들의 백합화는 입히심으로 의복에 대한 걱정을 하지 말라 하신다.


하물며


공주의 새도 먹이시고, 들의 풀도 꽃도 입히신다. 그렇다면 나의 자녀들인 너희는 '하물며' 더 사랑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굉장히 논리적 질문이자 답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 모른다'이다.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들을 사랑하시고 돌보신다. 절대 그대로 두지 아니하신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이다.


내일 위하여


내일은 내가 할 수 없습니다. 나의 시간도 아닙니다. 내일 내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것이 사람의 운명입니다. 그런데 내일을 걱정 하다니요. 그저 오늘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마태복음 장별요약 및 장별강해 목록


마태복음 5장 강해

 마태복음 5장 개요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는 산상수훈으로 불려지는 곳입니다. 마태복음은 다른 공관 복음서와 다르게 예수님의 사역을 요약한 다음 기나긴 강론을 사역의 초반부에 넣음으로 가르침을 앞세웁니다. 마태복음의 주제가 하나님의 나라인 것을 감안하며, 산상수훈은 하나님 나라를 통치하는 법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를 세 장에 담아둔 것이죠. 이러한 구조를 보면 마태복음은 확실히 체계적으로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제 산상수훈을 살펴 보도록 합시다.


마태복음 5장의 구조

  • 1-12절 팔복 강론
  • 13-16절 소금과 빛
  • 17-20절 율법의 완성
  • 21-26절 화목하라
  • 27-30절 간음과 지옥불
  • 31-37절 이혼, 맹세
  • 38-48절 동해보복, 원수 사랑


1-12절 팔복 강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히브리인들에게 산은 신들이 계신 곳이다. 우리나라도 신령은 산에 있듯. 특히 히브리인들에게 산은 곧 시내산과 연결되며, 시온산으로 불리는 예루살렘 역시 산이다. 산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다.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 앉으심으로 진정한 왕이심을 드러내신다.

  • 시 2: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가르쳐

가르치다는 4:23의 가르침을 가져왔다. ἐδίδασκεν는 미완료 직설법 3칭으로 오래전부터 가르쳐 왔고 아직도 여전히 가르치고 있음을 의도한다. 이 가르침은 사도들과 제자들을 통해 계속하여 이루어져야 할 사명이 된다.


3절 심령이 가는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Μακάριοι οἱ πτωχοὶ τῷ πνεύματι, ὅτι αὐτῶν ἐστιν ἡ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


복이 있나니

Μακάριοι는 그냥 우리가 아는 복이다. 70인역도 구약의 복을 μακάριος로 번역했다. 너무 큰 의미는 두지 말아야 한다. 복은 매우 포괄적이며, 상대적이다. 신약에 있어서는 복이 대부분이 육신적인 의미보다 영적인 부분에서 사용되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복이 아닌 복들로 복수형태로 사용되었다.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다. 이 구절은 시편 1편 1절을 연상시킨다.

  • LXX 시편 1:1 μακάριος ἀνήρ ὃς οὐκ ἐπορεύθη ἐν βουλῇ ἀσεβῶν καὶ ἐν ὁδῷ ἁμαρτωλῶν οὐκ ἔστη καὶ ἐπὶ καθέδραν λοιμῶν οὐκ ἐκάθισεν


가난한 자는

구약에서 가난은 저주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이들에 대한 저주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역설하신다. 복음 안에서 가난은 저주가 복이 되어 바뀐다. 하나님의 나라의 법칙의 시작이다. 가난은 양식의 부재와 권력과 친구의 부재 등 다양한 사회학적 요소까지 포괄한다. 즉 사회적 약자인 동시에 하나님께 버림 받은 자다. 하지만 복음 안에서 가난은 역치된다.


심령이

누가복음은 심령이 빠지고 가난한 자로 소개된다. 하지만 마태는 심령을 넣음으로 좀더 다른 의미로 해석하려 한다. 심령은 마음 그 자체다. 심령으로 번역된 단어는 프뉴마(πνεῦμα)이다. 영으로 번역되는 단어다. 이사야 66:2절과 비교하면 신약적 의미가 보강된다.

  • 사 66: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가난은 제2성전기 문헌에서는 긍정적 의미로 사용되다는 점에서 신약의 의미를 제공한다. 즉 부유한 자들은 로마와 결탁하여 부를 쌓지만 가난은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자들이 치르는 대가로 받아들여졌다. 솔로몬의 시편이나 다마스커스 문헌(쿰란 문헌)에 의하여 가난은 종종 의로운 자로 치환된다.


천국이 저희 것이요

천국을 소유하게 된다. 엄밀하게 천국의 백성이 되지만 능동형으로 사용하여 천국을 소유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천국(ἡ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은  왕국이다. 바실레이아(ἡ βασιλεία)는 왕들이 다스리는 왕의 나라를 뜻한다. 하나님의 나라도 하나님의 왕국이다. 나라는 썩 좋은 번역이 아니다. 하나님의 왕국이 자신의 소유가 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다'는 ἐστιν을 사용하여 현재형으로 이미 왕국을 소유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가난한 자가 가장 많은 부와 능력이 있는 하나님의 왕국을 소유하게 된다는 놀라운 역설이다.


애통하는 자


애통은 가난한 자의 애통이다. 아무도 돌볼 사람이 없음으로 버려진 존재이다. 고아의 눈물, 과부의 애통과 상통한다. 하지만 이제 그러한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한다. 그들의 위로를 받을 것이다. 위로는 하나님의 위로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제는 그들의 보호자가 되시고, 남편이 되어 주실 것이다. 애통을 죄에 대한 애통으로 과도하게 축소 시켜서는 안 된다.


온유한 자

가난과 애통이 내재적 요소라면 온유는 타인을 대하는 방식이다. 온유는 타인을 대할 때 부드럽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을 말한다. 타인을 부드럽게 대하는 자들은 땅을 얻게 될 것이다. 땅은 영역이며 영향력이다. 타인의 비방과 모욕을 부드럽게 받아 들이는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의는 곧다 바르다는 뜻이다. 구약적 의미는 하나님의 계명, 율법 대로 행하는 것이 의다. 신약에서 의는 죄를 없이함을 뜻한다. 의롭게 된자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자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의롭게 된 자이다. 신약의 의가 구약의 츠타카를 번역한 것을 보면 이것이 더욱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구절의 의의 주림은 하나님의 말씀을 살려는 욕망,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열정을 뜻한다.


13-16절 소금과 빛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은 짜다. 부패를 방지한다. 하지만 구약에서 소금은 불변성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언약의 소재로 소개된다. 

  • 레위기 2:13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 민수기 18:1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소금 언약이니라
  • 역대하 13:5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 아니냐


세상은 하나님께 드려질 제물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소금이 되어 하나님께 드려진다. 소금이 없다면 제물은 드려질 수 없다. 소금의 다양한 의미를 너머 본문 안에서 소금은 제의적 의미를 가진다.


그 맛을 잃으면

이 부분은 바위 소금을 언급한다. 바위 소금은 돌과 섞여 있어 염화나트륨이 빠져 나가도 유지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바위 소금만을 사용하고 일반 바다에서 나오는 소금을 모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서쪽이 지중해이고, 요단강 하류에 소금이 모여 있는 염해 또는 사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금이 맛을 잃는다는 것은 그런 소금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소금이 제 기능을 잃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에둘러 말하는 것이다.


소금이 짜지 않다면 소금이 가지는 목적,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에 쓸모 없어진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소금으로서의 짠 맛을 유지해야 한다. 그것은 거룩이다.


세상의 빛

빛은 분별하는 것이다. 빛이 없다면 모든 것이 분별되지 않는다. 하지만 빛이 오면 모든 것이 명확하게 구분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진리를 행함으로 세상이 악하다고 심판한다. 빛은 옳은 행위며, 진리를 드러내는 삶이다. 16절에서 '착한 행실'를 보는 것을 빛으로 소개하고 있으므로 더욱 명확해 진다.


17-20절 율법의 완성


율법을 완전하게

신약 시대에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흔하게 주장하는 구절이다. 터무니 없는 주장이다. 이 부분은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을 지켜서는 안 되는 이유를 말한다. 율법의 목적이 무엇인가? 거룩이다. 거룩은 하나님의 계명대로 사는 것이다. 거룩을 이상한 의미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거룩은 말씀대로의 삶이다. 그렇다면 율법의 목적은 말씀대로 살도록 하는 것이다.


완성하다의 헬라어 프렐레오-(πληρόω)은 영어성경은 채우다( fill, fulfill) 또는 마치다(complete) 란 의미로 번역했다. 완성은 부족한 상태였지만 완전히 채워져 더 이상 채울 필요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완성의 의미를 갖는다. 즉 완성된 것이다.


율법의 완성이 무엇일까? 율법이 요구하는 것, 목적하는 바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다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거룩'으로 되돌아 간다. 문제는 그것을 일반 사람들이 아닌 예수님이 모두를 위해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율법의 완성 안에 있게 되고 효력을 발생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십자가의 사건을 말한다. 그렇다면 율법의 완성은 거룩한 삶을 요구했지만 그렇게 살지 못한 사람들을 정죄하고, 죽임으로 율법의 효력이 더 이상 미치지 않는다는 으미가 된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죽었기 때문에.


R. T. 프랜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 과정 속에서 율법의 특정 요소가 모든 현실적 목적에서 '폐지된' 것처럼 보일 수 있을지라도, 이는 율법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지위를 상실한 것 때문이 아니라 성취의 시대에 이들의 역할이 변화되었기 때문이고, 이 시대에는 성취자인 예수, 율법이 그에 대해 미리 말하고 있던 예수가 궁극적인 권위자인 것이다." ( 마태복음 (부흥과개혁사))


해설이 시원하지 않다. 프랜스는 '성취'라는 단어를 선호하다. 일단 다름 구절로 넘어가 보자.


율법 - 다 이루리라


18절은 앞선 구절인 17절을 보강한다. 예수는 율법의 폐지가 아닌 성취로 해석했고, 다 이루어지리라 말씀하신다. 율법은 버려지지 않고 완성됨으로 목적을 달성하게 되고 다 이루어 진다.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계명이며 약속이다. 발화된 말씀은 그 목적을 달성한다. 율법도 하나님의 말씀이니 반드시 그 목적을 달성할 것이다. 율법이 의도한 바는 명확하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 받는 것이다. 여기서 자꾸 율법의 점과 획에 신경 쓰면 안 된다. 히브리어는 모음을 쓰지 않는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리 작아도 반드시 실행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 실현,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내용은 19절에서 재차 강조된다.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동등하게 소중하다. 모두가 진리고, 모두가 가치가 있다. 어떤 말씀을 버리고 자신이 편한대로, 욕망대로 취사선택하는 것은 악이고 죄이다.


너희의 의


신약에서 의는 종종 거룩한 삶,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하다. 그 삶은 '구제'이다. 이 부분은 후에 따로 다룰 것이다. 예수가 말하는 '너희의 의'는 율법이 의도한 수동적 삶을 너머 적극적으로 이웃을 도와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서기관들은 무엇을 하지 않았으므로 부정한 것을 만지지 않았음으로 '거룩하다' 말한다. 하지만 제자들-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능동적으로 선을 행함으로 기존의 수동적 의를 넘어서야 한다. 복음을 받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들은 종이 아니라 아들이다. 그는 능동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21-26절 화목하라


옛 사람 - 나는

예수님은 자신을 구약의 율법과 비교한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을 새로운 율법의 창시자로 소개한다. 나는 율법을 대신할 새로운 계명을 선포한다.


노하는 자마다

살인은 타인을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부정하고, 그를 통해 이루시고자하는 하나님의 의도를 무너뜨린다. 예수님은 이제 노하고 라가라 하는 자들에게 저주를 내리신다. 결국 형제를 몹쓸 자로 비판하고 차별하는 자는 그를 있게 하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다.


먼저 가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삶이 받쳐 주어야 한다. 삶이 없는 예배는 열납 되지 않는다. 예배보다 먼저 할 일이 있다. 그것은 형제와 화목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화목하러 이 땅에 오셨다. 먼저는 하나님과 죄인들을, 그 다음은 사람과 사람들이 화목하기를 바라신다. 화목 없는 제사는 열납 되지 않는다.


27-30절 간음과 지옥불

이 부분은 보는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고, 오른 눈이 언급된다. 눈은 보는 기관이다. 봄으로 마음의 욕망이 나온다. 간음은 보는 것과 연관되어 숨겨진 마음이 밖으로 드러나는 역할을 한다. 하와의 타락과 구약의 수많은 악들이 '보는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은 지적한다.


간음하지 말라

간음(μοιχεύω)은 결혼한 여자나 약혼한 여자와 성**를 맺는 것이다. 결혼 제도를 파괴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제 음욕의 문제로 들어간다. 음욕으로 번역된 에피뚜메오(ἐπιθυμέω)는 갈망 욕구를 뜻한다. 인간이 욕구를 가지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많은 목사나 학자들이 이 부분을 여자를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괜찮지만 성적 갈망을 가지는 것은 안 된다고 말한다.

 그릇된 해석이다. 난 그게 가능한지 알 수 없으며, 예수님 또한 그렇게 의도하지 않으셨다. 이곳은 욕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옛사람이 욕구는 있으나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죄가 아니라고 했지만 이제는 욕구 자체를 가진 것을 정죄함으로 모든 사람들이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시사한다. 결국 변화된 본성, 성령이 지배하는 새로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욕망은 이미 행동한 것이기 때문이다.


찍어 내버리라

무서운 말씀이다.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 범죄 하는 것보다 지옥불에 던져 지지 않은 것이 나을 것이라 하신다. 눈을 빼고 손발을 찍어 내도 욕망을 사라지지 않는다. 즉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 부분은 모순을 안고 있으며, 예수님은 그것을 이미 알고 계신다. 아마 다른 의도로 이 말씀을 하신 것이 분명하다.


오른 눈(29절)과 오른 손(30절)은 전체를 대표한다. 즉 오른 눈과 오른 손이 아니라 전체를 말한다. 어느 지체이든 죄를 범하는 데 사용되었다면 버려야 한다. 실제로 눈과 손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주님은 여기서 '백체 중 하나' 와 '온 몸'을 비교하고 있다. 온 몸은 삶 전체로 전위 되어 죄에 종속된 상태를 뜻한다. 그렇다면 오른 눈과 오른 손은 시작, 처음, 초기를 뜻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31-37절 이혼, 맹세


이혼증서

모세에 의하여 시작된 제도이다. 이 제도는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이다. 여성이 이혼 증서 없이 쫓겨나면 갈 곳이 없다. 모세는 이혼 증서를 줌으로 합법적으로 갈라서도록 허락했다. 이혼 증서를 가진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되지 않는 법적 독립성을 갖게 되고, 재가 할 수 있다.


  • [신 24:1-4] 1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2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3 그의 둘째 남편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또는 그를 아내로 맞이한 둘째 남편이 죽었다 하자 4 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보낸 전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하게 하지 말지니라


모세는 여기서 재가한 여성이 다시 이혼을 당해 홀로 있을 때 전 남편이 그녀를 데려오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성적으로 문란해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이혼은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합법적이며, 구약에서도 이혼은 보편화 되어 있었고, 신약에서도 여전히 당연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아내를 버리면

다시 음행의 문제로 나아간다. 예수님은 음행 외의 일로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합의 이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이다. 당시 유대 사회는 아내를 마음대로 버렸다. 좋은 싫든 남편이 버리면 끝이다. 버림 받은 여성은 아무런 법적 보호를 받지 못했다. 이 부분은 예수님께서 이혼을 금지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당시의 상황 속에서 너무나 흔한 이혼이 아닌 아내의 버려짐을 금지하기 위해 반대하신 것처럼 하신 것이다. 여성을 보호하려는 목적에서, 성적인 차원에서 여성을 보호하여 거룩한 백성의 삶을 살도록 하셨다.


헛 맹세

구약에서는 맹세가 허락되었다. 아니 권면 사항이었다. 하지만 오용되었다.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했고, 조롱하듯 맹세했다.

  • 신 10: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

맹세의 피폐를 아셨기에 이제 맹세를 금지하신다. 맹세는 자신의 말에 신용이 없을 때 타인의 이름을 빌려 오는 것이다. 문제는 그 이름이 온 천지 만물의 주인이신 여호와이시다. 함부로 여호와의 이름을 빌려 맹세를 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음으로 여호와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불명예를 준다. 이것은 악이다. 이제는 옳은 것은 옳다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하라고 명하신다.


38-48절 동해보복, 원수 사랑


눈은 눈으로

동해보복은 피해를 받은 만큼 그대로 돌려주는 것이다. 동해보복이 잔인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지만 동해보복은 잔인한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보복을 하는 것으로 복수심을 갖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누군가 당신의 뺨을 한 때 때렸다고 생각해 보라. 당신은 상대방의 빰을 한  대 때리면 분이 풀릴까? 그렇지 않다. 세 대 네 대를 때려 분이 풀린다. 아니 그래도 풀리지 않는다. 그래서 동해보복은 피해자를 보호하는 동시에 가해자를 보호하는 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대의 법은 어떤가? 누군가 나의 돈 100만 원을 훔쳤다면 법은 훔쳐간 사람을 약소한 벌금으로 벌하고 나에게는 100만 원을 돌려 주지 않아도 된다. 얼마나 잘못된 법인가? 그러니 가해자만 좋은 세상인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훔친 물건은 세 배 네 배 다섯 배를 더해 보상해야 한다. 피해를 줄 경우는 피해를 받은 그대로 돌려 줌으로 상해를 입히는 것을 금지함으로 감정의 악순환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πονηρός는 악한 자 또는 악을 말한다. 뿌리가 되는 πόνος는 '갈망', '욕망에 사로잡힌'의 뜻과 '고통'이 함께 있다. 이것은 마치 마약에 중독되어 헤어 나오지 못하고 계속하여 마약을 갈구하는 것과 비슷하다. 문제는 그러한 악한 자가 나에게 해를 가할 때 대항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들이 구하는 것을 다 주고 거절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수고하여 모은 재산을 거지가 달라고 하면 다 주어야 하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예수님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계신다. 이 구절들은 결국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를 위한 것으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라

유대인들의 이웃은 유대인들이다. 그들은 사마리아인들이나 헬라인 등 이방인들은 이웃으로 보지 않는다. 이 부분은 율법사의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에서 잘 드러난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원수로 생각하는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이웃의 개념을 완전히 바꾸신다. 그러므로 원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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