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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0장 강해

 마태복음 10장 개요

10장은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에게 나가서 복음을 전하도록 하는 사명과 함께 주어지는 설교다. 열두 제자에게 나누어 주신 능력은 주님이 직접 행하신 기적이다. 


1-42절 열두 제자 파송설교


1절  열두 제자와 권능

주님은 제자들 중에서 특별해 열 둘을 택하셨다. 열둘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서 기원하며 완전한 공동체를 말한다. 열두 지파는 야곱의 열두 아들이지만, 레위와 요셉이 빠지고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들어가 열둘이 된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종종 요셉의 후손이란 표현을 두 지파를 묶기도 하지만 에브라임은 므낫세를 약한 지파라하며 무시한다. 이러한 정서는 므낫세 지파의 사사인 기드온이 에브라임 지파가 찾아와 항의할 때 잘 드러난다.


2-15절 열두 제자와 사역 방법

열두 제자

열두 사도의 이름은 베드로, 안드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그의 형제 요한, 빌립, 바돌로매, 도마,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 갸룟 유다이다.


베드로는 바위라는 뜻의 히브리어 페트로의 헬라식 이름이다. 원래 이름을 시몬이다.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이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형제이다.

빌립은 모호한 인물이다. 사도행전에서 사도 빌립과 집사 빌립이 겹친다. 후반부로 가면 사도인지 집사인지 알길 이 모호하다.

바돌로매는 요한복에 등장하는 나다나엘인 것으로 추측되지만 불확실하다.

마태는 세리로 소개된다. 세리와 창녀는 죄인으로 취급된다.

알패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다. 세배다의 아들 야고보는 큰 야고보이고,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작은 야고보로 불린다.

두 번째 시몬은 가나안인으로 나온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남겨진 가나안 족속일 것이다. 정말 그렇다면 그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도가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복음은 이방인에게 먼저 가지 않는다. 먼저 유대인 안에 전파된다. 잃어버린 양은 이스라엘 안에서 소외되고 버림 받은 이들을 향한 것이다. 주님은 친히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눅 19:10)이라 자신의 사역을 소개한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

임박한 종말론적 삶은 코람데오의 삶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은 자는 늘 종말을 염두에 두고 살아간다. 하지만 나태한 자는 종말을 인식하지 못한다. 마태는 유난히 '천국'을 좋아한다. '하나님의 나라'보다는 천국이 히브리즘에 더 가깝나다. 여기서 '국' '나라'는 kingdom'으로 왕들이 다스리는 나라를 말한다. 하늘의 왕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왔으니 회개하라는 것이다.


고치며

치유와 회복이다. 처음 하나님이 만드시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아담의 모습이 아니다. 신약에서의 회복은 더 이상 죄 지을 수 없는 완전한 의인의 상태이다.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혀진 상태이다.


평안하기를 빌라

평안은 구약의 '샬롬'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이스라엘의 샬롬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샬롬이며, 나아가 전쟁과 경제적 자유 등을 포함하는 포괄적 자유다.


발의 먼지

발은 땅(세속)과 닿는 부분이다. 발의 먼지는 떠는 행위는 일종의 씻는 행위이자 정결행위다.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림으로 그곳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단절을 의미한다.


16-23절 이렇게 대처하라

양을 이리 가운데로

양은 무지하고 어리석다. 하지만 순수하다. 이리는 양을 공격하는 존재이다. 원수들 가운데 보내는 것 같다는 의미다. 아무런 힘도 없고, 공격할 수도 없다.


뱀 같이 지혜롭다는 말은 모든 상황을 잘 파악하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보 같이 행동하는 것이 미덕이라 생각하지만 아니다. 지혜롭게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진정한 힘은 비둘기 같은 순수함이다. 결국 순수함이 이긴다. 순수함은 무지가 아니다. 뱀 같은 지혜의 순수다.


나로 말미암아

사람들을 삼가라는 말은 주의하라는 말이다. 주의하라는 분별하라는 말이다. 만나는 사람이 누구인지 바로 알아야 한다. 그들과 과도하게 친밀하게 지내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다. 그냥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되는 일이다. 

주님은 자신으로 인해 핍박을 받게 될 것을 말한다. 거짓의 세상에 진리는 항상 핍박을 받는다.


말하는 이는 - 성령이시니라

우리가 말하는 것 같지만 성령이 말씀하신다. 성령께서 우리의 사정을 아시고 대언하실 것이다.


대적하는 세대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종말의 때에는 형제간, 부모 자식간, 대적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거짓과 진리의 싸움이다. 


24-42절 나를 따르라.


두려워하지 말라.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은 당연히 주님의 제자들을 얕잡아 볼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께 파리들의 왕이란 뜻을 바알세불이라 불렀다. 모독적인 표현이다. 하지만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을 드러날 것이다.


너희는 참새보다 귀한니라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종종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 자신이 너무 작게 보인다. 하지만 주님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참새 보다 못한 인생이라 말하지만, 주님은 '너희는 참새 보다 귀하니라' 말씀하신다.


검을 주러 왔노라

진리는 어둠과 불가피한 전쟁이다. 주님이 주시는 검은 성령의 검, 즉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은 검으로 어둠을 격파한다. 말씀이 뿌리 내리는 자들은 결코 어둠에 휘둘리지 않는다.


나를 위하여

주님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 합당하지 않다고 말한다. 주님의 제자의 자격이다. 주님의 십자가가 아니라 '자신의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사형틀이다. 즉 죽음을 각오하고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구절은 다음 구절인 39절에서 목숨과 연결된다. 결국 자신을 내어 놓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제자의 절박성을 말한다.


마태복음 장별 요약 및 강해 목록


마태복음 9장 강해

 마태복음 9장 개요


마태복음 9장은 마태를 부르신 사건을 제외하면 모두 병자들을 치유하는 사건들입니다. 마지막 단락에서는 추수할 일꾼을 하나님께 달라고 기도하라는 권면이 주어집니다.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치심으로 그들은 온전케 하십니다.


마태복음 9장 구조

1-8절 중풍병자를 고침

9-13절 마태를 부르심

14-17절 금식에 관하여

18-26절 혈루증 여인과 관리의 딸을 살림

27-34절 맹인과 벙어리를 고침

35-38절 일꾼을 달라 하라


1-8절 중풍병자를 고침


죄 사함을 받았다.


다시 배를 타고 본 동네(own town)에 이릅니다. 이 때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데려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2절)이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지붕을 뜯는 그 사건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은 지붕을 뜯는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향하여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하는 부분입니다. 이 때 서기관들은 충격을 받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신성을 모독'(3절) 했다고 생각합니다. 죄사함은 오직 하나님만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정말 신성 모독자였습니다. 보통 사람의 눈으로 예수님은 그저 사람일 뿐입니다. 선지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모세도 스스로 죄를 사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직접 죄를 사하십니다. 이러니 신성 모독으로 느끼는 것이 당연합니다.


어느 것이 쉽겠느냐


5절을 잘 못 이해하면 둘 중의 하나가 더 '쉽다' '어렵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잘못된 생각입니다. 죄사함의 문제는 하나님의 영역이고,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 역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럼에도 치유는 선지자들도 했지만 죄사함의 영역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하지만 둘이 쉽다 어렵다가 아니라 모두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6절에서 예수님은 인자의 죄사함 권능과 치유의 명령을 함께 하심으로 둘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죄를 사할 뿐 아니라 그는 치유하심으로 신분적으로 영적으로 온전케 하시는 분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9-13절 마태를 부르심


나를 따르라


그곳을 떠나 가시다 세관에 앉은 마태를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를 보시고 '나를 따르라'하십니다. 그러자 마태는 곧바로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현대의 관점에서 당시의 시간 개념을 이해하면 안 됩니다. 당시는 시계도 없기에, 어느날 어디서 만나자 그러면 그곳에서 가서 하루종일 기다립니다. 그들의 시간은 현대의 3시간 정도를 하나의 단위로 보기 때문에 적지 않은 시간이 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마태는 세리입니다. 다시 세리와 창기는 '죄인들'입니다. 10절은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님과 제자들과 함께 앉았다고 말합니다. 당시 함께 식사하는 것은 친구로 받아 들인다는 말입니다. 이 부분은 갈라디아서 베드로가 식사 하다 도망친 것을 이해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죄인들이라 말하는 이들을 친구로 받아 들였습니다.


의사는 누구에 필요한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판합니다. 왜 죄인들과 같이 식사하느냐는 것이죠. 예수님은 그들에게 의사 누구에게 필요한지를 묻습니다. 의사는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 병든 자에게 필요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세리가 괜찮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진짜 죄인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을 사랑합니다. 그들은 병이 들었지만 고치면 건강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고치기 힘든 부류는 자신들이 병이 들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치료를 받지 않는 바리새인들과 같은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삼상 15:22를 인용하여 제사가 필요하게 아니라 긍휼이 필요함을 역설합니다.


14-17절 금식에 관하여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금식에 대해 묻습니다. 금식은 음식을 먹지 않음으로 경건을 유지하고, 거룩한 자의 삶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혼인집의 비유를 통해 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지금은 신랑과 함께 하는 날이며, 즐거운 때라 금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때가 오면 그때에는 금식할 때가 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말씀 이유 특이한 비유가 주어집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조각에 붙이지 않고,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않은 것처럼 둘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모순처럼 들리는 표현은 금식이 구약을 표현하고, 신약은 신랑과 함께하는 때임을 말합니다.


18-26절 혈루증 여인과 관리의 딸을 살림


요한복음에만 실리지 않고 공관복음서에 실린 이 사건은 혈루증 여인과 회당장 딸의 치유 사건이 겹쳐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한 관리'(18절)로 소개됩니다. 그가 예수님을 찾아와 절을 하며 죽어가는 딸을 고쳐 달라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를 따라 갑니다. 이때 갑자기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아온 여인이 예수님을 따라가다 옷자락을 만지며 혈루병이 낳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알고 여인에게 축복하며 보냅니다. 이 사건으로 예수님은 지체하게 되고 결국 관리의 딸은 죽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죽은 아이의 집으로 들어가 소녀를 살려 냅니다. 다른 복음서에 비해 유난히 적은 분량과 간소화된 내용은 조금 의아하게 만듭니다. 심지어 소녀에게 들어갈 때 제자들이 함께 했다는 언급도 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은 이 사건을 상세히 설명하기 보다는 치유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며, 예수님이 모든 치유의 중심이자 원이며, 치유자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27-34절 맹인과 벙어리를 고침


다윗의 자손이여


예수님이 그곳에서 떠나실 때 두 맹인이 예수님이 따라옵니다. 보이지 않는 사람이 어찌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을까요? 마태는 이들의 열정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정상적인 눈으로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책망합니다.


두 맹인은 예수님을 따라가며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릅니다. 이 부분은 1장의 족보와 정확히 일치 합니다. 당시 유대의 왕은 에돔 족속이고, 마카비 시대에도 레위인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다윗의 자손들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입니다. 사람들은 신경쓰지 않지만 두 맹인 정확하게 예수님의 유대인 진정한 왕, 정통성이 있는 왕의 후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5-38절 일꾼을 달라 하라


예수님은 도시와 촌을 다니시며 치유하시고. 회당에서 복음을 전파하십니다. 제자들에게 추수할 것은 많으니 추수할 일꾼을 하나님 아버지께 달라고 말합니다.


마태복음 장별 강해 및 강해 목록



마태복음 8장 강해

 마태복음 8장 개요

8장은 산 위에서 말씀 하시던 주님이 산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산에서 내려오시자 곧바로 나병 환자가 찾아와 고쳐 달라 간구하고, 백부장이 찾아와 자신의 하인을 고쳐 달라 말합니다. 예수님은 산 위에만 계시지 않고 산 아래로 내려와 사람들에게 들어가십니다. 사람 사이를 지나시면서 병든 자를 치유하시며 회복하십니다. 8장은 많은 치유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 1-4절 나병환자를 치유하심
  • 5-13절 백부장의 믿음
  • 14-17절 이사야의 예언
  • 18-22절 제자도를 가르치심
  • 23-27절 폭풍을 잠잠케 하심
  • 28-34절 가다라 지방에서 축사하심


1-4절 나병환자를 치유하심


산에서 내려 오시니


마태복음에서 산은 매우 중요한 상징입니다. 산상수훈이 시작되는 5장에서 예수님은 산에 오르시고(참 마 5:1) 이제는 내려 오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산상수훈은 출애굽 당시 시내산에 올라 모세가 받았던 율법과 같은 권위가 부여됩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말씀을 '권위 있는 자와 같고'(7:29)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제 산에서 내려오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내가 원하노니


나병은 부정한 병입니다. 병든 자를 만지면 부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3절) 치유하십니다. 부정한 자를 만지지만 부정하게되지 않고 부정한 자를 온전케 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능력이며, 구약과 신약의 현저한 차이입니다.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율법에 의하면 제사장이 병에 걸린 자를 판별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관습을 파괴하지 않습니다. 제사장의 선언으로 그는 성전에 다시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회복합니다.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버려진 그가 다시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5-13절 백부장의 믿음


백부장의 간구


로마의 백부장입니다. 당시 로마의 백부장은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께 직접 와서 자신의 하인을 고쳐 달라 말합니다. 얼마든지 사람들을 들일 수 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치유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명예가 깎이는 것을 감내하고 자신의 하인을 치료하고 싶어합니다. 아마도 참으로 아끼는 하인으로 보입니다. 주인이 하인을 아끼는 것은 일상적이나 자신의 명예까지 포기하면서 간구하는 것은 독특한 사건입니다.

백부장의 믿음만 강조되지만 그 믿음 이전에 그의 성품과 사람 됨이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바른 믿음은 바른 성품 위에서 생깁니다. 악한 성품은 믿음이 있어도 악한 삶을 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씀으로만


예수님께서 직접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7절) 하자 백부장은 손사례를 치며 자신의 집에 들어오는 것을 감당할 수 없으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8절)라고 말합니다. 당시 병을 치유하는 것은 직접 가서 뭔가를 해야 합니다. 굿도하고 하여튼 뭔가를 해야 병이 낫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백부장은 놀랍게도 다만 말씀으로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가라 하면 가고


군인의 생각입니다. 군인은 명령에 복종함으로 자신의 직무을 합니다. 백부장은 사회적으로 예수님보다 월등한 위치에 있음에도 예수님의 종이나 부하와 같다고 스스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명령함으로 순종하듯, 하인의 중풍병 또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 치유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존재들로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기원이 되는 인물들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말할 때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혈통을 따라 난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12절)게 되고, 오히려 이방인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14-17절 이사야의 예언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치다.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신 주님은 베드로의 집에 갑니다. 베드로는 처가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자 예수님께서 고쳐 주십니다. 장모 뿐 아니라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쳐 주십니다. 에수님은 치유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처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온전한 모습으로 회복되길 원합니다.


18-22절 제자도를 가르치심


인자는


한 서기관이 와서 예수님을 따른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십니다. 이번에는 아버지를 먼저 장사하게 해달라고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 하시며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이것은 우선 순위에 대한 것입니다. 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묻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를 때 자신이 해보고 싶은 거 다하고 그 다음 예수님을 따르려고 합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남은 시간, 여분의 시간, 짜투리 시간을 드려서는 안 되됩니다. 당신의 중심, 당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드려야 합니다.


23-27절 폭풍을 잠잠케 하심



예수님께서 파도를 잠잠케 하십니다. 모든 만물을 통치하시는 예수님의 능력과 권위를 보여주십니다.


28-34절 가다라 지방에서 축사하심


무덤 사이에서


가다라 지방에 도착하자 귀신들린 사람이 찾아옵니다. 그는 무덤 사이에 거합니다. 또한 몹시 사납습니다. 무덤은 죽은 시체가 있는 것으로 부정한 곳입니다. 온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납다는 말은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곳으로 찾아가십니다.

돼지 떼


돼지는 부정한 동물입니다. 부정한 곳에 귀신들이 들어가 삽니다. 




마태복음 7장 강해

 마태복음 7장 개요


7장은 산상수훈의 마지막 부분이자 마무리 부분이다. 산상수훈은 주기도문을 중심으로 이전과 이후로 구분이 됩니다. 5장이 광의적 의미가 강하다면 6장 후반부부터는 개인의 신앙생활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내용이 주를 이룬다.


1-6절 판단하지 말라

7-12절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13-14절 좁은 문과 넓은 문

15-27절 열매로 알리라

28-29절 무리들의 반응


1-6절 판단하지 말라


비판하지 말라


가장 오해가 많은 구절이다. 판단 또는 비판을 하지 말라는 말로 설교 또는 인용한다.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예수님도 판단했고 비판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으로 매우 민감하여 잘 판단해야 한다. 비둘기처럼 순결해야 하나 뱀처럼 지혜로워야 한다. 지혜는 타자에 대한 평가가 불가피하다. 저 사람이 사기꾼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며, 지혜이다. 사단에게 속으면서 '나는 판단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자는 착한 사람이 아니라 게으른 사람이며 악한 자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비판 또는 판단은 무엇을 말하는가. 4절에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언급한다. 판단하는 자들은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을 말한다. 1-2절의 말은 율법사들을 향한 것이니 그 부분을 이해하고 들으면 정확히 들어 맞는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는 자신은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서 마치 자신이 하나님처럼 사람들을 정죄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긍휼'의 마음과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어찌하여


놀라움의 표시다. 니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것이다. '형제'와 '네' 즉 비판자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한다. 티는 잘 보이지 않는다. 유심히 봐야 겨우 보인다. 타인에게 있는 티를 보면서 자신 안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한다. 들보가 눈 속에 있을리 없다. 티와 들보를 비교함으로 비판하는 자의 어리석음을 폭로한다. 타락한 인간은 '내로남불'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


빼게 하라


놀라운 표현이다. 자신이 직접 고쳐 주겠다는 말이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똥 묻은 개가 재 묻은 개를 나무란다'가 있다. 그는 '외식하는 자'(5절)다. 자신은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타인의 작은 실수와 허물을 고치려는 죄를 범한다. 자신의 알지 못하는 자는 교만하기 때문이다. 타인을 고치기 전에 자신을 먼저 고치라. 사람은 항상 자신을 낮춰야 한다.


개에게 주지 말며


개와 돼지는 부정한 존재다. 그들에게 '거룩한 것'과 '진주'를 주지 말라 경고한다. 가치 판단에 대한 것이다. 개와 돼지는 거룩한 것과 진주에 대한 가치를 알지 못한다. 개와 돼지가 누눌까? 남을 판단하는 자들이며, 그들은 외식하는 자들이다. 겉으로는 거룩한 체하나 뒤로는 온갖 더러운 짓을 행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함부로 대한다. 예수님은 후에 이들에 대해 반복적으로 경고하신다.


7-12절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구하고 찾고 두드리고


7-8절은 기도에 대한 설교를 자주하지만 기도가 아니다. 물론 기도와 상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세 동사에 주목하자. 구하다. 찾다. 두드리다. 구하다는 마음과 생각. 계획이다. 찾다는 행동을 말한다. 시도하는 것이다. 이곳저곳을 찾아 다닌다. 세 번째 두드리다는 찾은 후 문 앞에서 문을 노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것은 구체화이자 과정이다. 


그런데 무엇을 구하고 찾고 두드릴까? 9절과 10절에서 '달라'에 나온다. 특히 11절에서 하나님 아버지가 언급된다. 그러니 기도와도 상관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구절은 하나님을 뜻을 구하는 자들에 대한 것이다. 핵심은 12절에 나오며, 황금율로 알려진 것이다. 모든 것은 주는 대로 돌아오는 것이다. 받고 싶다며 주라. 이것이 답이다.


하물며


하물며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허물 많은 너희도 자식을 사랑하지 않느냐. 그렇다면 하늘의 아버지는 너희를 얼마나 더 사랑하겠는가? 묻는 것이다. 이 부분은 6장 19-34절과 연관이 있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들을 사랑하시고 돌보신다.


13-14절 좁은 문과 넓은 문


좁은 문


다마스커스 문서를 참조하면 좁은 문은 절제와 선택이다. 세상에서 누리는 쾌락과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이다. 넓은 문은 멸망으로 가는 길이고, 좁은 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다. 문은 시작과 끝이다. 여기서는 시작의 문이다. 문을 열고 그곳으로 향한다. 어떤 길은 끝에 사망이 있고, 어떤 길은 생명이 있다. 넓은 문은 편한 문이고, 좁은 문은 힘든 문이다. 


그렇다면 문은 길로 통하고 길은 결국 삶의 방식을 말한다. 끝은 '열매'(16절)이고, 열매는 '행하는'(21,24절) 것이다. 말씀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욕망을 따를 것인가? 시작이 좋다고 끝이 좋은 것이 아니다. 시작이 힘들다고 끝이 나쁜 것도 아니다.


15-27절 열매로 알리라


거짓 선지자


그들은 선지자들이다. 하지만 거짓 선지자다. 그렇다면 그들은 선지자들이 아닌데 선지자들처럼 거짓으로 행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양의 옷을 입으나 속은 노략질하는 이리다. 양은 초식 동물이고, 이리는 육식 동물이다. 양과 이리를 비교하는 것은 타인에 대한 것이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느냐 그렇지 않느냐이다. 이리는 약한 동물을 잡아 먹는다. 양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거짓 선지자를 이리로 표현한 것은 타인을 잡아 먹기 위해 자신을 선지자로 포장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이들을 구분할까?


열매로 알리라


열매는 결과다. 또한 원인이다. 가시나무는 포도를 딸 수 없다. 다른 나무다. 엉겅퀴는 무과화를 맺지 못한다. 여기서 가시나무와 엉겅퀴는 '가시'를 말하며 해로운 존재를 말한다. 열매, 즉 먹을 것을 내지 못한다.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고,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 '아름다운 열매'는 가치 있는 열매를 뜻한다.


17절

οὕτως πᾶν δένδρον ἀγαθὸν καρποὺς καλοὺς ποιεῖ, τὸ δὲ σαπρὸν δένδρον καρποὺς πονηροὺς ποιεῖ·

모든(πᾶν) 

좋은 나무 (δένδρον ἀγαθὸν) 좋은 열매 (καρποὺς καλοὺς)

못된 나무 (σαπρὸν δένδρον) 나쁜 열매 (καρποὺς πονηροὺς)


'나쁜'으로 번역된 σαπρός은 신약에서 8번 언급된다. 엡 4:29외에는 모두 나무의 열매로 표현된다. 

  • 엡 4: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결국 나쁜은 '열매 없음'을 너머 해를 끼치는 존재임이 분명하다. 주님은 여기서 나쁜 열매를 맺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착각하면 안 된다.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즉 본성에 관한 것이며, 그들이 변화될 것이라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일 뿐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고, 다른 세계에 산다. 그것을 분별하라는 말이다. '알지니'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불에 던져


심판을 받을 것이다. 종말론적 표현이다. 궁극적으로 그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 부분은 13장에서 다시 강조된다. 불은 지옥을 말한다. 우리나라는 땅이 비옥하지만 팔레스타인 지역은 결코 그렇지 않다. 한정된 자원 안에서 열매를 맺도록 배려하는 것이 농부가 하는 일이다. 그러려면 쓸모 없는 나무는 빨리 베어 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쁜 나무들이 영양분을 흡수하기 때문이다.


주여주여-뜻대로


말과 행동이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거짓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때 위력을 발휘한다. 지키지 않는 말씀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주님은 누구든지 '행하는 자'(24절)가 되어야 한다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이 곧 존재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 실수하지 않고 발설한 그대로 된다.


악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으로 오직 인간만이 불순종한다. 그러므로 인간만이 악을 행한다.


행하는 자는


모든 말씀을 마치시고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24절)가 지혜로운 사람으로 칭하신다. 지혜는 종말론적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견디는 것이 지혜다. 지혜는 말씀대로 사는 삶이다.


비와 창수, 바람은 시험하는 것으로 존재를 드러낸다. 반석 위에 세워진, 즉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는 결국 하나님의 시험에 통과하지만 그렇지 않는 자는 무너질 것이다. 무너짐은 영원한 형벌을 뜻한다. 지금까지 그들이 행한 모든 것이 가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들은 헛된 삶을 살았다.


28-29절 무리들의 반응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설교다. 본질을 통찰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들의 영혼에 깊은 울림을 주었다. 예수님은 단지 해석이 아니라 '권위'로 가르치셨다.


마태복음 장별 요약 및 강해 목록


마태복음 5장 강해

 마태복음 5장 개요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는 산상수훈으로 불려지는 곳입니다. 마태복음은 다른 공관 복음서와 다르게 예수님의 사역을 요약한 다음 기나긴 강론을 사역의 초반부에 넣음으로 가르침을 앞세웁니다. 마태복음의 주제가 하나님의 나라인 것을 감안하며, 산상수훈은 하나님 나라를 통치하는 법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를 세 장에 담아둔 것이죠. 이러한 구조를 보면 마태복음은 확실히 체계적으로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제 산상수훈을 살펴 보도록 합시다.


마태복음 5장의 구조

  • 1-12절 팔복 강론
  • 13-16절 소금과 빛
  • 17-20절 율법의 완성
  • 21-26절 화목하라
  • 27-30절 간음과 지옥불
  • 31-37절 이혼, 맹세
  • 38-48절 동해보복, 원수 사랑


1-12절 팔복 강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히브리인들에게 산은 신들이 계신 곳이다. 우리나라도 신령은 산에 있듯. 특히 히브리인들에게 산은 곧 시내산과 연결되며, 시온산으로 불리는 예루살렘 역시 산이다. 산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다.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 앉으심으로 진정한 왕이심을 드러내신다.

  • 시 2: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가르쳐

가르치다는 4:23의 가르침을 가져왔다. ἐδίδασκεν는 미완료 직설법 3칭으로 오래전부터 가르쳐 왔고 아직도 여전히 가르치고 있음을 의도한다. 이 가르침은 사도들과 제자들을 통해 계속하여 이루어져야 할 사명이 된다.


3절 심령이 가는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Μακάριοι οἱ πτωχοὶ τῷ πνεύματι, ὅτι αὐτῶν ἐστιν ἡ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


복이 있나니

Μακάριοι는 그냥 우리가 아는 복이다. 70인역도 구약의 복을 μακάριος로 번역했다. 너무 큰 의미는 두지 말아야 한다. 복은 매우 포괄적이며, 상대적이다. 신약에 있어서는 복이 대부분이 육신적인 의미보다 영적인 부분에서 사용되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복이 아닌 복들로 복수형태로 사용되었다.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다. 이 구절은 시편 1편 1절을 연상시킨다.

  • LXX 시편 1:1 μακάριος ἀνήρ ὃς οὐκ ἐπορεύθη ἐν βουλῇ ἀσεβῶν καὶ ἐν ὁδῷ ἁμαρτωλῶν οὐκ ἔστη καὶ ἐπὶ καθέδραν λοιμῶν οὐκ ἐκάθισεν


가난한 자는

구약에서 가난은 저주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이들에 대한 저주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역설하신다. 복음 안에서 가난은 저주가 복이 되어 바뀐다. 하나님의 나라의 법칙의 시작이다. 가난은 양식의 부재와 권력과 친구의 부재 등 다양한 사회학적 요소까지 포괄한다. 즉 사회적 약자인 동시에 하나님께 버림 받은 자다. 하지만 복음 안에서 가난은 역치된다.


심령이

누가복음은 심령이 빠지고 가난한 자로 소개된다. 하지만 마태는 심령을 넣음으로 좀더 다른 의미로 해석하려 한다. 심령은 마음 그 자체다. 심령으로 번역된 단어는 프뉴마(πνεῦμα)이다. 영으로 번역되는 단어다. 이사야 66:2절과 비교하면 신약적 의미가 보강된다.

  • 사 66: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가난은 제2성전기 문헌에서는 긍정적 의미로 사용되다는 점에서 신약의 의미를 제공한다. 즉 부유한 자들은 로마와 결탁하여 부를 쌓지만 가난은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자들이 치르는 대가로 받아들여졌다. 솔로몬의 시편이나 다마스커스 문헌(쿰란 문헌)에 의하여 가난은 종종 의로운 자로 치환된다.


천국이 저희 것이요

천국을 소유하게 된다. 엄밀하게 천국의 백성이 되지만 능동형으로 사용하여 천국을 소유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천국(ἡ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은  왕국이다. 바실레이아(ἡ βασιλεία)는 왕들이 다스리는 왕의 나라를 뜻한다. 하나님의 나라도 하나님의 왕국이다. 나라는 썩 좋은 번역이 아니다. 하나님의 왕국이 자신의 소유가 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다'는 ἐστιν을 사용하여 현재형으로 이미 왕국을 소유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가난한 자가 가장 많은 부와 능력이 있는 하나님의 왕국을 소유하게 된다는 놀라운 역설이다.


애통하는 자


애통은 가난한 자의 애통이다. 아무도 돌볼 사람이 없음으로 버려진 존재이다. 고아의 눈물, 과부의 애통과 상통한다. 하지만 이제 그러한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한다. 그들의 위로를 받을 것이다. 위로는 하나님의 위로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제는 그들의 보호자가 되시고, 남편이 되어 주실 것이다. 애통을 죄에 대한 애통으로 과도하게 축소 시켜서는 안 된다.


온유한 자

가난과 애통이 내재적 요소라면 온유는 타인을 대하는 방식이다. 온유는 타인을 대할 때 부드럽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을 말한다. 타인을 부드럽게 대하는 자들은 땅을 얻게 될 것이다. 땅은 영역이며 영향력이다. 타인의 비방과 모욕을 부드럽게 받아 들이는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의는 곧다 바르다는 뜻이다. 구약적 의미는 하나님의 계명, 율법 대로 행하는 것이 의다. 신약에서 의는 죄를 없이함을 뜻한다. 의롭게 된자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자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의롭게 된 자이다. 신약의 의가 구약의 츠타카를 번역한 것을 보면 이것이 더욱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구절의 의의 주림은 하나님의 말씀을 살려는 욕망,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열정을 뜻한다.


13-16절 소금과 빛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은 짜다. 부패를 방지한다. 하지만 구약에서 소금은 불변성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언약의 소재로 소개된다. 

  • 레위기 2:13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 민수기 18:1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소금 언약이니라
  • 역대하 13:5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 아니냐


세상은 하나님께 드려질 제물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소금이 되어 하나님께 드려진다. 소금이 없다면 제물은 드려질 수 없다. 소금의 다양한 의미를 너머 본문 안에서 소금은 제의적 의미를 가진다.


그 맛을 잃으면

이 부분은 바위 소금을 언급한다. 바위 소금은 돌과 섞여 있어 염화나트륨이 빠져 나가도 유지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바위 소금만을 사용하고 일반 바다에서 나오는 소금을 모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서쪽이 지중해이고, 요단강 하류에 소금이 모여 있는 염해 또는 사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금이 맛을 잃는다는 것은 그런 소금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소금이 제 기능을 잃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에둘러 말하는 것이다.


소금이 짜지 않다면 소금이 가지는 목적,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에 쓸모 없어진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소금으로서의 짠 맛을 유지해야 한다. 그것은 거룩이다.


세상의 빛

빛은 분별하는 것이다. 빛이 없다면 모든 것이 분별되지 않는다. 하지만 빛이 오면 모든 것이 명확하게 구분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진리를 행함으로 세상이 악하다고 심판한다. 빛은 옳은 행위며, 진리를 드러내는 삶이다. 16절에서 '착한 행실'를 보는 것을 빛으로 소개하고 있으므로 더욱 명확해 진다.


17-20절 율법의 완성


율법을 완전하게

신약 시대에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흔하게 주장하는 구절이다. 터무니 없는 주장이다. 이 부분은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을 지켜서는 안 되는 이유를 말한다. 율법의 목적이 무엇인가? 거룩이다. 거룩은 하나님의 계명대로 사는 것이다. 거룩을 이상한 의미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거룩은 말씀대로의 삶이다. 그렇다면 율법의 목적은 말씀대로 살도록 하는 것이다.


완성하다의 헬라어 프렐레오-(πληρόω)은 영어성경은 채우다( fill, fulfill) 또는 마치다(complete) 란 의미로 번역했다. 완성은 부족한 상태였지만 완전히 채워져 더 이상 채울 필요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완성의 의미를 갖는다. 즉 완성된 것이다.


율법의 완성이 무엇일까? 율법이 요구하는 것, 목적하는 바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다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거룩'으로 되돌아 간다. 문제는 그것을 일반 사람들이 아닌 예수님이 모두를 위해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율법의 완성 안에 있게 되고 효력을 발생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십자가의 사건을 말한다. 그렇다면 율법의 완성은 거룩한 삶을 요구했지만 그렇게 살지 못한 사람들을 정죄하고, 죽임으로 율법의 효력이 더 이상 미치지 않는다는 으미가 된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죽었기 때문에.


R. T. 프랜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 과정 속에서 율법의 특정 요소가 모든 현실적 목적에서 '폐지된' 것처럼 보일 수 있을지라도, 이는 율법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지위를 상실한 것 때문이 아니라 성취의 시대에 이들의 역할이 변화되었기 때문이고, 이 시대에는 성취자인 예수, 율법이 그에 대해 미리 말하고 있던 예수가 궁극적인 권위자인 것이다." ( 마태복음 (부흥과개혁사))


해설이 시원하지 않다. 프랜스는 '성취'라는 단어를 선호하다. 일단 다름 구절로 넘어가 보자.


율법 - 다 이루리라


18절은 앞선 구절인 17절을 보강한다. 예수는 율법의 폐지가 아닌 성취로 해석했고, 다 이루어지리라 말씀하신다. 율법은 버려지지 않고 완성됨으로 목적을 달성하게 되고 다 이루어 진다.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계명이며 약속이다. 발화된 말씀은 그 목적을 달성한다. 율법도 하나님의 말씀이니 반드시 그 목적을 달성할 것이다. 율법이 의도한 바는 명확하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 받는 것이다. 여기서 자꾸 율법의 점과 획에 신경 쓰면 안 된다. 히브리어는 모음을 쓰지 않는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리 작아도 반드시 실행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 실현,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내용은 19절에서 재차 강조된다.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동등하게 소중하다. 모두가 진리고, 모두가 가치가 있다. 어떤 말씀을 버리고 자신이 편한대로, 욕망대로 취사선택하는 것은 악이고 죄이다.


너희의 의


신약에서 의는 종종 거룩한 삶,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하다. 그 삶은 '구제'이다. 이 부분은 후에 따로 다룰 것이다. 예수가 말하는 '너희의 의'는 율법이 의도한 수동적 삶을 너머 적극적으로 이웃을 도와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서기관들은 무엇을 하지 않았으므로 부정한 것을 만지지 않았음으로 '거룩하다' 말한다. 하지만 제자들-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능동적으로 선을 행함으로 기존의 수동적 의를 넘어서야 한다. 복음을 받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들은 종이 아니라 아들이다. 그는 능동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21-26절 화목하라


옛 사람 - 나는

예수님은 자신을 구약의 율법과 비교한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을 새로운 율법의 창시자로 소개한다. 나는 율법을 대신할 새로운 계명을 선포한다.


노하는 자마다

살인은 타인을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부정하고, 그를 통해 이루시고자하는 하나님의 의도를 무너뜨린다. 예수님은 이제 노하고 라가라 하는 자들에게 저주를 내리신다. 결국 형제를 몹쓸 자로 비판하고 차별하는 자는 그를 있게 하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다.


먼저 가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삶이 받쳐 주어야 한다. 삶이 없는 예배는 열납 되지 않는다. 예배보다 먼저 할 일이 있다. 그것은 형제와 화목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화목하러 이 땅에 오셨다. 먼저는 하나님과 죄인들을, 그 다음은 사람과 사람들이 화목하기를 바라신다. 화목 없는 제사는 열납 되지 않는다.


27-30절 간음과 지옥불

이 부분은 보는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고, 오른 눈이 언급된다. 눈은 보는 기관이다. 봄으로 마음의 욕망이 나온다. 간음은 보는 것과 연관되어 숨겨진 마음이 밖으로 드러나는 역할을 한다. 하와의 타락과 구약의 수많은 악들이 '보는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은 지적한다.


간음하지 말라

간음(μοιχεύω)은 결혼한 여자나 약혼한 여자와 성**를 맺는 것이다. 결혼 제도를 파괴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제 음욕의 문제로 들어간다. 음욕으로 번역된 에피뚜메오(ἐπιθυμέω)는 갈망 욕구를 뜻한다. 인간이 욕구를 가지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많은 목사나 학자들이 이 부분을 여자를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괜찮지만 성적 갈망을 가지는 것은 안 된다고 말한다.

 그릇된 해석이다. 난 그게 가능한지 알 수 없으며, 예수님 또한 그렇게 의도하지 않으셨다. 이곳은 욕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옛사람이 욕구는 있으나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죄가 아니라고 했지만 이제는 욕구 자체를 가진 것을 정죄함으로 모든 사람들이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시사한다. 결국 변화된 본성, 성령이 지배하는 새로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욕망은 이미 행동한 것이기 때문이다.


찍어 내버리라

무서운 말씀이다.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 범죄 하는 것보다 지옥불에 던져 지지 않은 것이 나을 것이라 하신다. 눈을 빼고 손발을 찍어 내도 욕망을 사라지지 않는다. 즉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 부분은 모순을 안고 있으며, 예수님은 그것을 이미 알고 계신다. 아마 다른 의도로 이 말씀을 하신 것이 분명하다.


오른 눈(29절)과 오른 손(30절)은 전체를 대표한다. 즉 오른 눈과 오른 손이 아니라 전체를 말한다. 어느 지체이든 죄를 범하는 데 사용되었다면 버려야 한다. 실제로 눈과 손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주님은 여기서 '백체 중 하나' 와 '온 몸'을 비교하고 있다. 온 몸은 삶 전체로 전위 되어 죄에 종속된 상태를 뜻한다. 그렇다면 오른 눈과 오른 손은 시작, 처음, 초기를 뜻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31-37절 이혼, 맹세


이혼증서

모세에 의하여 시작된 제도이다. 이 제도는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이다. 여성이 이혼 증서 없이 쫓겨나면 갈 곳이 없다. 모세는 이혼 증서를 줌으로 합법적으로 갈라서도록 허락했다. 이혼 증서를 가진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되지 않는 법적 독립성을 갖게 되고, 재가 할 수 있다.


  • [신 24:1-4] 1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2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3 그의 둘째 남편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또는 그를 아내로 맞이한 둘째 남편이 죽었다 하자 4 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보낸 전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하게 하지 말지니라


모세는 여기서 재가한 여성이 다시 이혼을 당해 홀로 있을 때 전 남편이 그녀를 데려오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성적으로 문란해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이혼은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합법적이며, 구약에서도 이혼은 보편화 되어 있었고, 신약에서도 여전히 당연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아내를 버리면

다시 음행의 문제로 나아간다. 예수님은 음행 외의 일로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합의 이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이다. 당시 유대 사회는 아내를 마음대로 버렸다. 좋은 싫든 남편이 버리면 끝이다. 버림 받은 여성은 아무런 법적 보호를 받지 못했다. 이 부분은 예수님께서 이혼을 금지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당시의 상황 속에서 너무나 흔한 이혼이 아닌 아내의 버려짐을 금지하기 위해 반대하신 것처럼 하신 것이다. 여성을 보호하려는 목적에서, 성적인 차원에서 여성을 보호하여 거룩한 백성의 삶을 살도록 하셨다.


헛 맹세

구약에서는 맹세가 허락되었다. 아니 권면 사항이었다. 하지만 오용되었다.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했고, 조롱하듯 맹세했다.

  • 신 10: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

맹세의 피폐를 아셨기에 이제 맹세를 금지하신다. 맹세는 자신의 말에 신용이 없을 때 타인의 이름을 빌려 오는 것이다. 문제는 그 이름이 온 천지 만물의 주인이신 여호와이시다. 함부로 여호와의 이름을 빌려 맹세를 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음으로 여호와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불명예를 준다. 이것은 악이다. 이제는 옳은 것은 옳다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하라고 명하신다.


38-48절 동해보복, 원수 사랑


눈은 눈으로

동해보복은 피해를 받은 만큼 그대로 돌려주는 것이다. 동해보복이 잔인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지만 동해보복은 잔인한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보복을 하는 것으로 복수심을 갖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누군가 당신의 뺨을 한 때 때렸다고 생각해 보라. 당신은 상대방의 빰을 한  대 때리면 분이 풀릴까? 그렇지 않다. 세 대 네 대를 때려 분이 풀린다. 아니 그래도 풀리지 않는다. 그래서 동해보복은 피해자를 보호하는 동시에 가해자를 보호하는 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대의 법은 어떤가? 누군가 나의 돈 100만 원을 훔쳤다면 법은 훔쳐간 사람을 약소한 벌금으로 벌하고 나에게는 100만 원을 돌려 주지 않아도 된다. 얼마나 잘못된 법인가? 그러니 가해자만 좋은 세상인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훔친 물건은 세 배 네 배 다섯 배를 더해 보상해야 한다. 피해를 줄 경우는 피해를 받은 그대로 돌려 줌으로 상해를 입히는 것을 금지함으로 감정의 악순환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πονηρός는 악한 자 또는 악을 말한다. 뿌리가 되는 πόνος는 '갈망', '욕망에 사로잡힌'의 뜻과 '고통'이 함께 있다. 이것은 마치 마약에 중독되어 헤어 나오지 못하고 계속하여 마약을 갈구하는 것과 비슷하다. 문제는 그러한 악한 자가 나에게 해를 가할 때 대항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들이 구하는 것을 다 주고 거절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수고하여 모은 재산을 거지가 달라고 하면 다 주어야 하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예수님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계신다. 이 구절들은 결국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를 위한 것으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라

유대인들의 이웃은 유대인들이다. 그들은 사마리아인들이나 헬라인 등 이방인들은 이웃으로 보지 않는다. 이 부분은 율법사의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에서 잘 드러난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원수로 생각하는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이웃의 개념을 완전히 바꾸신다. 그러므로 원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태복음 장별 요약 및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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