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24장 강해: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들어가는 말 (24:1-33)
여호수아 24장은 여호수아서의 마지막 장이며, 여호수아의 마지막 언약 갱신 설교가 담긴 장이다. 23장에서 여호수아가 지도자들에게 마지막 권면을 했다면, 24장에서는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아 하나님 앞에 세운다.(수 24:1)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전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는지를 회고하게 한다.(수 24:2-13)
이 장의 중심은 선택이다. 여호수아는 백성에게 묻는다.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수 24:15)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자율적 종교 선택을 말하는 가벼운 문장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선택하시고, 먼저 부르시고, 먼저 구원하시고, 먼저 땅을 주셨기 때문에 이제 백성이 언약적 응답으로 누구를 섬길지 결단해야 한다는 뜻이다.
여호수아 24장은 은혜와 책임, 구원과 섬김, 기억과 결단, 언약과 증언이 함께 흐르는 장이다. 하나님은 신실하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신실해야 한다. 하나님이 먼저 은혜를 베푸셨다. 그러므로 백성은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만 섬겨야 한다.
세겜에 모인 이스라엘: 언약의 기억이 있는 장소 (24:1)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장로들과 수령들과 재판장들과 관리들을 부른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선다.(수 24:1)
세겜은 단순한 모임 장소가 아니다. 구속사적으로 깊은 의미를 가진 장소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 세겜 근처 모레 상수리나무였다.(창 12:6-7) 야곱도 세겜에 이르러 제단을 쌓고 그곳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다.(창 33:18-20) 또한 여호수아는 이전에 에발산과 그리심산에서 율법을 낭독하고 축복과 저주를 선포했다.(수 8:30-35)
그러므로 세겜은 언약의 기억이 쌓인 장소다. 여호수아는 백성을 아무 곳에나 모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약속하셨고, 이스라엘이 율법 앞에 섰던 장소로 그들을 부른다.
신앙에는 기억의 장소가 필요하다. 하나님이 나를 만나 주셨던 말씀, 회개의 자리, 은혜의 시간, 기도의 응답을 기억해야 한다. 기억을 잃으면 신앙도 흐려진다. 이스라엘은 세겜에서 자기들의 역사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음을 다시 들어야 했다.
강 저쪽의 우상숭배에서 부르신 하나님 (24:2-3)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한다. 조상 데라와 아브라함과 나홀이 옛적에 강 저쪽에 살며 다른 신들을 섬겼다고 말한다.(수 24:2)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강 저쪽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고, 그의 씨를 번성하게 하셨다.(수 24:3)
이 시작은 매우 중요하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인간의 경건함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아브라함의 가문도 본래 우상숭배의 배경 속에 있었다.(수 24:2) 하나님이 먼저 부르셨다. 이것이 은혜다.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자격 때문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먼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다.(창 12:1)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자기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근거한다.
성도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요일 4:19) 우리는 죄와 우상의 자리에서 부름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시작은 자랑이 아니라 감사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디서 건져 내셨는지 기억하는 사람이 겸손하다.
족장들의 역사: 약속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흐른다 (24:3-4)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셨고, 이삭에게는 야곱과 에서를 주셨다.(수 24:3-4) 에서에게는 세일 산을 기업으로 주셨고, 야곱과 그의 자손은 애굽으로 내려갔다.(수 24:4)
하나님의 구속사는 한 세대 안에 모두 완성되지 않는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았지만 가나안 땅 전체를 소유하지 못했다. 이삭도, 야곱도 나그네처럼 살았다.(히 11:9)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을 끊지 않으셨다. 세대가 바뀌어도 하나님의 언약은 계속 흘렀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표를 배운다. 하나님은 느린 듯 보이지만 신실하시다. 우리는 한 순간에 모든 결과를 보고 싶어 하지만, 하나님은 세대를 통해 일하신다. 아브라함에게 시작된 약속이 여호수아 시대에 땅의 기업으로 나타난다.
성도는 조급함을 내려놓아야 한다. 내가 기도한 것이 내 생전에 다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을 잊지 않으신다. 요셉도 죽을 때 하나님이 반드시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었다.(창 50:24-25, 히 11:22)
출애굽의 하나님: 종살이에서 건져 내신 은혜 (24:5-7)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보내 애굽에 재앙을 내리셨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다.(수 24:5) 애굽 사람들이 병거와 마병을 거느리고 홍해까지 추격했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애굽 사람 사이에 흑암을 두시고 바다를 덮어 애굽 군대를 멸하셨다.(수 24:6-7)
출애굽은 이스라엘 정체성의 중심 사건이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자유를 얻은 민족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종살이하던 백성을 강한 손과 편 팔로 구속하셨다.(출 6:6)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모든 순종은 구원받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백성의 응답이다.
신약의 성도도 출애굽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하셨다.(롬 6:17-18) 그는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이시다.(고전 5:7) 십자가와 부활은 새 출애굽의 중심 사건이다.
이스라엘은 자기 눈으로 하나님이 애굽에서 행하신 일을 보았다.(수 24:7) 신앙은 기억 위에 선다. 우리가 어디서 구원받았는지 잊으면, 다시 애굽을 그리워하게 된다. 광야의 이스라엘은 자유를 얻고도 애굽의 음식을 그리워했다.(출 16:3) 그러므로 구원받은 백성은 은혜의 기억을 계속 새롭게 해야 한다.
광야와 요단 동편: 길 위에서 지키신 하나님 (24:7-10)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오랫동안 살았다.(수 24:7) 하나님은 그들을 아모리 사람의 땅으로 인도하셨고, 그들을 이스라엘 손에 넘기셨다.(수 24:8) 또한 모압 왕 발락이 발람을 불러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지만, 하나님은 발람의 말을 듣지 않으시고 오히려 이스라엘을 축복하셨다.(수 24:9-10)
여기서 하나님은 길 위의 하나님으로 나타난다. 애굽에서만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도 지키셨다. 전쟁에서도 도우셨고, 보이지 않는 저주의 시도에서도 보호하셨다.
이스라엘은 발람이 자신들을 저주하려 했던 모든 영적 위험을 다 알지 못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모르는 곳에서도 일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보호다. 성도는 자신이 아는 은혜보다 모르는 은혜가 더 많다. 하나님은 내가 보지 못한 위험에서 나를 지키셨고, 내가 알지 못한 길에서 나를 인도하셨다.
발람 사건은 하나님께서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시는 분임을 보여 준다.(민 23:20, 신 23:5) 그리스도 안에서도 하나님은 죄와 저주의 자리를 은혜와 생명의 자리로 바꾸신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다.(갈 3:13)
가나안 정복: 하나님이 넘겨주신 땅 (24:11-12)
이스라엘은 요단을 건너 여리고에 이르렀고, 여리고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 브리스 사람, 가나안 사람, 헷 사람, 기르가스 사람, 히위 사람, 여부스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웠다.(수 24:11)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스라엘 손에 넘겨주셨다.(수 24:11) 하나님은 왕벌을 보내 두 아모리 왕을 쫓아내셨고, 그것은 이스라엘의 칼이나 활로 된 것이 아니었다.(수 24:12)
하나님은 반복해서 “내가” 행했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이끌었고, 내가 주었고, 내가 보냈고, 내가 넘겨주었다.” 여호수아 24장의 역사 회고는 인간의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도권을 강조한다.
이스라엘은 싸웠지만 승리의 근원은 하나님이었다. 그들의 칼과 활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결정적이었다.(수 24:12) 이것은 인간의 책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실제로 싸웠다. 그러나 싸움의 결과는 하나님의 은혜였다.
성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순종하고 수고하고 싸워야 한다. 그러나 구원과 승리의 근원은 하나님이다. 바울은 자신이 수고했지만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한 것이라고 고백했다.(고전 15:10)
수고하지 않은 땅과 심지 않은 포도원 (24:13)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또 너희가 수고하지 아니한 땅과 너희가 건설하지 아니한 성읍들을 너희에게 주었더니 너희가 그 가운데 거주하며 너희가 또 자기들이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원의 열매를 먹는다.”(수 24:13)
이 구절은 은혜의 절정을 보여 준다. 이스라엘은 수고하지 않은 땅, 건설하지 않은 성읍, 심지 않은 포도원과 감람원을 받았다. 물론 그들이 전쟁을 치르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가나안은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은혜는 내가 만든 것보다 더 큰 것을 받는 것이다. 구원은 내가 쌓은 공로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엡 2:8-9) 성도는 심지 않은 포도원의 열매를 먹는 사람이다. 그리스도께서 수고하시고, 우리는 은혜의 열매를 받는다.
이것은 감사와 겸손을 낳아야 한다. 받은 것이 많을수록 자랑할 것이 아니라 감사해야 한다. “내가 이룬 것”이라고 말하기 전에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고백해야 한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섬기라 (24:14)
하나님이 이렇게 은혜를 베푸셨으므로, 여호수아는 이제 결단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수 24:14)
여기서 순종은 은혜에 대한 응답이다. 하나님이 먼저 구원하시고, 먼저 인도하시고, 먼저 땅을 주셨다. 그러므로 백성은 여호와를 섬겨야 한다. 성경의 윤리는 항상 은혜 위에 선다. “구원받기 위해 섬기라”가 아니라, “구원받았으니 섬기라”이다.
“온전함과 진실함”은 겉모양의 종교가 아니라 마음의 충성을 뜻한다. 여호수아는 우상을 버리라고 말한다.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라고 한다.(수 24:14)
놀라운 점은 약속의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에게 아직 버려야 할 우상이 있다는 사실이다. 출애굽을 경험했고, 홍해를 건넜고, 가나안에 들어왔지만, 마음속에는 여전히 강 저쪽의 신들, 애굽의 신들이 남아 있다. 이것이 인간의 죄성이다. 장소는 가나안인데 마음은 아직 애굽일 수 있다.
성도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버려야 할 우상이 있다. 성공, 돈, 인정, 쾌락, 자기 의, 두려움이 마음의 신이 될 수 있다. 참된 언약 갱신은 우상을 버리는 데서 시작된다.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24:15)
여호수아는 말한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수 24:15)
이 말씀은 선택의 엄중함을 보여 준다. 사람은 중립으로 살 수 없다. 여호와를 섬기든지 우상을 섬기든지 해야 한다. 예수님도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셨다.(마 6:24)
여호수아는 이어 위대한 고백을 한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 그는 백성 전체를 강제로 움직일 수는 없다. 그러나 자기 집의 방향은 분명히 세운다. 지도자의 신앙은 공적 자리에서만이 아니라 가정에서 드러나야 한다.
이 고백은 오늘 모든 가정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세상이 무엇을 섬기든지, 우리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습니다.” 신앙은 개인적 결단이지만 동시에 가정적 방향이기도 하다. 부모는 자녀에게 무엇을 섬길지 삶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신 6:6-7)
백성의 응답과 여호수아의 경고 (24:16-20)
백성은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일을 결코 하지 않겠다고 대답한다.(수 24:16) 그들은 하나님이 애굽에서 인도하셨고, 큰 이적을 행하셨고, 길에서 보호하셨으며, 가나안 민족들을 쫓아내셨다고 고백한다.(수 24:17-18)
백성의 고백은 옳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쉽게 안심하지 않는다. 그는 말한다.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수 24:19)
이 말씀은 백성의 결단을 꺾으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하는 말이다. 여호와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다. 우상 하나쯤 곁에 두고 섬길 수 있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언약적 사랑을 배반하는 우상숭배를 용납하지 않으신다.(출 20:5)
신앙 결단은 감정적 구호가 아니다. “주님을 섬기겠습니다”라는 말은 아름답지만, 그 말에는 거룩한 책임이 따른다. 예수님도 제자가 되려는 자에게 먼저 비용을 계산하라고 하셨다.(눅 14:28)
“아니니이다 우리가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24:21-24)
백성은 다시 말한다. “아니니이다 우리가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수 24:21) 여호수아는 그들이 스스로 증인이 되었다고 말한다.(수 24:22) 그리고 이방 신들을 치워 버리고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고 명한다.(수 24:23)
여기서 핵심은 마음이다. 우상은 외부 물건만이 아니다. 마음의 방향이다. 여호수아는 이방 신들을 치우라고 하면서 동시에 마음을 여호와께 향하라고 한다.(수 24:23) 우상을 버리는 것과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는 것은 함께 가야 한다.
백성은 여호와를 섬기고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겠다고 응답한다.(수 24:24) 언약 백성의 삶은 섬김과 청종이다. 섬긴다는 것은 예배와 삶의 충성을 포함하고, 청종한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을 뜻한다.
성도는 주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 주님의 음성을 듣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4:15)
언약을 세우고 돌을 증거로 삼다 (24:25-28)
여호수아는 그날 세겜에서 백성과 언약을 세우고, 율례와 법도를 제정한다.(수 24:25) 그리고 이 말씀을 하나님의 율법책에 기록하고 큰 돌을 가져다가 여호와의 성소 곁 상수리나무 아래 세운다.(수 24:26)
그 돌은 증거가 된다. 여호수아는 그 돌이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들었으므로 백성이 하나님을 부인하지 못하게 하는 증거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수 24:27)
성경에서 증거의 표지는 기억을 돕는다. 인간은 쉽게 잊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월절, 언약궤, 돌기념물, 성찬 같은 표지를 통해 자기 백성이 은혜를 기억하게 하신다.(출 12:14, 수 4:6-7, 눅 22:19)
오늘 우리에게도 기억의 표지가 필요하다. 예배, 성찬, 세례, 말씀 기록, 신앙 고백, 가정 예배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기억하게 하는 은혜의 도구다. 그러나 표지는 하나님을 대신하지 않는다. 표지는 하나님께로 우리를 돌이키게 할 때 의미가 있다.
여호수아의 죽음: 신실한 종의 마침 (24:29-31)
이 일 후에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110세에 죽는다.(수 24:29) 그는 딤낫 세라에 장사된다.(수 24:30) 이스라엘은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그 후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들이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다.(수 24:31)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종”으로 불린다.(수 24:29) 모세에게 주어졌던 영광스러운 호칭이 이제 여호수아에게도 주어진다.(신 34:5) 그는 완전한 사람은 아니지만, 하나님께 충성한 종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 세대다. 여호수아와 장로들이 살아 있는 동안은 여호와를 섬겼지만, 사사기는 그 후 세대가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우상숭배에 빠졌다고 말한다.(삿 2:10-13) 신앙은 한 세대의 기억으로만 유지되지 않는다. 다음 세대가 하나님을 직접 알고 섬기도록 전수되어야 한다.
교회와 가정은 여기서 큰 책임을 본다. 부모 세대의 간증이 자녀 세대의 신앙을 자동 보장하지 않는다. 다음 세대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을 알도록 가르치고 증언해야 한다.(시 78:4-7)
요셉의 뼈와 엘르아살의 죽음: 약속의 마무리 (24:32-33)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가져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한다.(수 24:32) 이것은 요셉의 믿음이 마침내 역사 속에서 성취되었음을 보여 준다. 요셉은 죽기 전에 하나님이 반드시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고 자기 해골을 가지고 올라가라고 명했다.(창 50:25, 히 11:22)
여호수아서의 마지막에 요셉의 뼈가 세겜에 묻히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결론이다. 하나님은 요셉의 믿음을 잊지 않으셨다. 애굽의 관 속에 있던 소망이 가나안 땅에 안식한다.
또한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도 죽고 그의 아들 비느하스의 산에 장사된다.(수 24:33) 지도자도, 제사장도 죽는다. 모세도 죽고, 여호수아도 죽고, 엘르아살도 죽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계속된다. 인간 종은 지나가지만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이것이 여호수아서의 마지막 메시지다. 사람은 죽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세대는 바뀌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계속된다.
여호수아 24장의 구속사적 의미 (24:1-33)
여호수아 24장은 첫째, 이스라엘의 역사가 하나님의 주도적 은혜로 시작되고 유지되었음을 보여 준다. 아브라함의 부르심, 출애굽, 광야 보호, 가나안 정복은 모두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다.(수 24:2-13)
둘째, 은혜는 결단을 요구한다. 하나님이 먼저 구원하셨기 때문에 백성은 여호와만 섬기도록 부름받는다.(수 24:14-15)
셋째, 언약은 기억과 증언을 필요로 한다. 세겜의 돌은 백성이 한 고백의 증거가 되었다.(수 24:26-27)
넷째, 인간 지도자는 죽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계속된다. 여호수아와 엘르아살은 죽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수 24:29-33)
다섯째, 여호수아의 사역은 더 크신 여호수아, 곧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한다. 여호수아는 땅의 안식으로 이끌었지만, 예수님은 영원한 안식과 하나님 나라의 기업으로 인도하신다.(히 4:8-9, 마 11:28)
그리스도 안에서 보는 여호수아 24장 (24:1-33)
여호수아는 백성에게 섬길 자를 택하라고 했다.(수 24:15) 그러나 신약의 빛에서 보면, 우리는 우리의 결단보다 먼저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음을 본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하셨다.(요 15:16, 요일 4:19)
이스라엘은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를 섬겨야 했다. 신약의 성도도 우상을 버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 돌아서야 한다.(살전 1:9) 그러나 우리는 자기 힘으로 온전히 섬길 수 없다. 그래서 성령의 은혜가 필요하다. 하나님은 새 언약에서 자기 영을 우리 속에 두어 율례를 행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겔 36:26-27)
여호수아는 백성과 언약을 세우고 돌을 증거로 삼았다.(수 24:25-27) 예수님은 자기 피로 새 언약을 세우셨다.(눅 22:20) 돌 증거보다 더 큰 증거는 십자가와 부활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다.(히 8:10)
그러므로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는 고백은 그리스도 안에서 더 깊어진다. 우리는 율법적 자기 결심으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으로 주님을 섬긴다.
오늘의 적용 (24:1-33)
첫째, 하나님이 나를 어디서 부르셨는지 기억해야 한다. 아브라함도 우상숭배의 자리에서 부름받았다. 우리의 신앙도 은혜에서 시작되었다.
둘째, 받은 은혜를 섬김으로 응답해야 한다. 하나님이 먼저 구원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섬겨야 한다.(수 24:14)
셋째, 우상을 구체적으로 버려야 한다. 마음속 애굽의 신들, 강 저쪽의 신들을 치워야 한다. 성공, 돈, 인정, 쾌락이 하나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넷째, 가정의 신앙 방향을 분명히 해야 한다.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는 고백은 오늘의 가정에도 필요하다.(수 24:15)
다섯째, 다음 세대에 하나님의 일을 전해야 한다. 여호수아 세대 이후 신앙이 약해졌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경고가 된다.(삿 2:10)
결론: 오늘 택하라, 그리고 은혜로 섬기라 (24:1-33)
여호수아 24장은 선택을 요구하는 장이다. 그러나 그 선택은 은혜 없는 결단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지셨고, 광야에서 지키셨고, 가나안 땅을 주셨다. 그러므로 이제 백성은 여호와만 섬겨야 한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오늘 선택해야 한다. 세상이 섬기는 신들을 따를 것인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내 욕망을 섬길 것인가, 그리스도를 섬길 것인가. 중립은 없다. 사람은 반드시 무언가를 섬긴다.
그러나 우리의 소망은 우리의 결심의 강함에 있지 않다. 우리의 소망은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 새 언약의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안에서 순종하게 하시는 성령께 있다. 그 은혜 안에서 고백하자.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