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5:18-30 해설과 묵상

죄의 수레를 끌고 어둠을 향해 가는 사람들

이사야 5:18-30 해설과 묵상

이사야는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가 유다를 다스리던 시대에 활동했습니다. 웃시야 시대의 번영은 유다 사회에 안정과 풍요를 가져왔지만, 그 이면에서는 토지 독점과 빈부 격차, 사법적 부패와 종교적 위선이 깊어지고 있었습니다. 아하스 시대에는 앗수르의 위협이 거세졌으며, 유다는 하나님보다 외교적 동맹과 군사력을 의지했습니다. 성전에서는 예배가 계속되었지만 삶의 자리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했습니다.

이사야 1-5장은 이사야서 전체의 서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불러 언약 백성의 죄를 고발하시고, 소와 나귀보다 주인을 알지 못하는 백성의 무지를 탄식하셨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병든 몸처럼 유다 전체가 죄에 물들었고, 지도자들은 소돔과 고모라의 관원들처럼 불의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주홍 같은 죄도 눈처럼 희게 하겠다고 약속하시며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사야 5장 전반부에서는 하나님께서 정성껏 가꾸신 포도원에서 좋은 포도 대신 들포도가 맺혔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18절부터는 그 들포도의 실체가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죄를 끌고 다니면서도 하나님의 심판을 조롱하는 태도, 선과 악을 뒤집는 도덕적 혼란, 자기 지혜에 취한 교만, 술과 뇌물에 빠져 정의를 왜곡하는 지도자들의 모습입니다.

본문은 네 차례의 “화 있을진저”와 세 차례의 “그러므로”를 통해 죄와 심판의 필연적인 관계를 보여 줍니다. 죄는 가벼운 장난처럼 시작되지만 점점 굵은 줄이 되고, 마침내 한 사람과 공동체 전체를 심판의 수레에 묶어 버립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이 들려옵니다. 우리는 죄를 내려놓으려 합니까, 아니면 그것을 끌고 다니며 익숙해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불편할 때 자신을 돌이킵니까, 아니면 선과 악의 이름을 바꾸어 자신의 삶을 정당화합니까.

거짓의 줄로 죄악을 끄는 사람들 (사 5:18)

이사야는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같이 죄악을 끄는 자”에게 화가 있다고 선언합니다. 이 장면은 사람이 짐승처럼 수레를 끄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처음에는 가느다란 줄이지만, 죄를 반복하며 합리화할수록 그 줄은 무거운 수레를 끌 만한 굵은 밧줄이 됩니다.

죄악(עָוֹן, 아본)은 단순히 규칙 하나를 어긴 행동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비뚤어짐’이라는 의미를 지니며,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관계가 왜곡된 상태와 그에 따른 죄책과 결과까지 포함합니다. 죄는 한순간의 행동으로 끝나지 않고 마음의 방향을 비틀며, 관계와 사회의 구조까지 왜곡합니다.

본문에서 사람들이 죄를 끌고 간다는 표현은 역설적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죄가 사람을 끌고 간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서는 사람들이 스스로 죄를 붙들고 끌어당깁니다. 죄가 자신을 떠나지 못하게 오히려 죄와 연결된 줄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변명과 합리화가 그 줄이 됩니다. 모두 그렇게 산다는 생각,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는 주장, 나보다 더 악한 사람이 많다는 비교가 죄를 붙들어 매는 끈이 됩니다.

죄는 언제나 끔찍한 얼굴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작고 유익해 보이며, 우리의 상처와 욕망을 이해해 주는 것처럼 다가옵니다. 그러나 내려놓지 않은 죄는 시간이 흐를수록 무거운 수레가 됩니다. 사람은 자신이 죄를 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순간 그 수레가 사람의 방향과 속도를 결정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습을 드러내시는 것은 우리를 수치 속에 가두기 위함이 아닙니다. 더 굵은 줄이 되기 전에 끊으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회개는 이미 일어난 일을 지우는 마술이 아니라, 죄의 수레를 더 이상 끌고 가지 않겠다고 방향을 바꾸는 일입니다. 때로는 오랫동안 형성된 습관과 관계, 욕망의 방식을 끊는 데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그 느리고 아픈 걸음 속에서도 우리를 붙드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재촉하며 조롱하다 (사 5:19)

죄를 끌고 가는 사람들은 “그가 자기의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가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의 계획이 속히 이루어져 우리가 알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경건한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말 계시다면 심판을 당장 보여 달라는 조롱입니다.

그들은 심판이 즉시 나타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선지자가 경고한 일이 지연되자, 하나님의 인내를 하나님의 무능이나 부재로 해석했습니다. 심판이 보이지 않으니 죄도 심각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라는 호칭은 이사야서에서 특별히 중요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거룩하다(קָדוֹשׁ)는 것은 하나님께서 피조물과 구별되는 절대적인 분이며, 죄와 불의를 용납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언약 백성 가운데 임재하시고 그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유다 백성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라는 표현을 입에 올렸지만 그 거룩하심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경건한 언어가 불신앙을 감추는 조롱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죄에 대한 무관심이 아닙니다. 심판의 지연은 회개할 시간을 주시는 긍휼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시간을 돌이킴의 기회가 아니라 죄를 계속해도 된다는 허락으로 오해합니다. 하나님께서 즉시 응답하지 않으신다고 해서 말씀의 진실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늦어진다고 취소된 것도 아닙니다.

오늘의 교회도 종말과 심판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그 말씀을 먼 이야기처럼 취급할 수 있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고백하면서 선택의 순간에는 하나님의 뜻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께 표적을 재촉하는 태도가 아니라, 아직 보이지 않는 말씀 앞에서 삶의 방향을 조정하는 순종입니다.

악을 선이라 부르는 뒤집힌 세계 (사 5:20)

세 번째 화는 가장 잘 알려진 선언입니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에게 화가 있습니다.

이 구절은 세 쌍의 대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선과 악, 빛과 어둠, 단맛과 쓴맛입니다. 반복되는 대조는 유다 사회의 도덕적 감각이 완전히 뒤집혔음을 보여 줍니다. 문제는 죄를 지었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죄를 선이라 부르고, 선을 악이라 부르면서 판단의 기준 자체를 바꾼 데 있습니다.

악하다(רַע)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생명과 관계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을 뜻하고, 선하다(טוֹב)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며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과 악은 힘 있는 사람이 편의에 따라 붙이는 이름이 아닙니다. 그 기준은 거룩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있습니다.

도덕적 전도는 대개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죄를 지은 뒤 양심의 불편함을 피하기 위해 죄의 이름부터 바꿉니다. 탐욕을 성취욕이라 부르고, 무관심을 현실적 판단이라 하며, 비겁한 침묵을 지혜라고 포장합니다. 반대로 정직한 책망은 사랑 없음이라 하고, 절제는 시대착오적 태도라 하며, 약자를 보호하는 정의는 불필요한 편들기로 취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도구로만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선과 동일시하고, 자신에게 불리한 진실을 악으로 규정하기 쉽습니다. 종교적 확신까지 자기 욕망을 정당화하는 장막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먼저 타인의 어둠을 비추는 손전등이 아니라 내면의 뒤바뀐 명칭을 바로잡는 빛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려면 목소리만 높일 것이 아니라 선을 선으로 살아 내야 합니다. 정직과 긍휼, 약자를 향한 보호와 원수까지 품는 사랑이 교회의 삶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가 선을 어떻게 정의하는가보다 그 선이 한 사람의 생명을 어떻게 살리는가를 통해 복음의 진실을 보게 됩니다.

자기 눈에 지혜로운 자들의 어둠 (사 5:21)

네 번째 화는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을 향합니다. 지혜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지혜를 귀하게 여기며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고 가르칩니다. 문제는 “자기 눈에” 지혜로운 것입니다. 하나님과 말씀의 판단을 거부하고 자신의 생각을 최종 기준으로 삼는 태도입니다.

지혜(חָכָם)는 성경에서 삶을 하나님의 질서에 맞게 살아가는 능력을 뜻합니다. 지식이 많고 논리가 정교하더라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성경이 말하는 지혜에 이르지 못합니다. 지혜의 반대는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자신이 모든 것을 안다고 확신하여 더 이상 들으려 하지 않는 교만입니다.

자기 지혜에 갇힌 사람은 회개하기 어렵습니다.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이 세워 온 자아상이 무너질 것처럼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는 모든 사건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고, 비판하는 사람의 동기를 공격하며, 하나님의 말씀까지 자기 입장을 뒷받침하는 재료로 사용합니다.

신앙생활이 길어질수록 이러한 위험은 오히려 커질 수 있습니다. 익숙한 교리와 성경 지식이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을 대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많이 아는 것과 말씀에 의해 자신이 판단받는 것은 다릅니다. 성경을 통제하는 사람은 많지만 성경에 의해 통제받으려는 사람은 적습니다.

참된 지혜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잘못 볼 수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며 말씀과 공동체의 권면에 귀를 기울이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생각하지 않는 믿음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자기 확신을 우상화하지 않고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 앞에 내려놓는 겸손한 지성을 원하십니다.

술에는 용감하지만 정의에는 비겁한 자들 (사 5:22-23)

다섯 번째 화는 포도주를 마시는 데에는 용감하고 독주를 잘 빚는 데에는 유력하지만, 뇌물 때문에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공의를 빼앗는 사람들을 향합니다. 이사야는 전쟁에서 사용되어야 할 ‘용사’의 언어를 술자리의 능력에 적용합니다. 공동체를 지키고 불의를 막는 데에는 무능하면서 쾌락을 즐기는 데에는 영웅처럼 행동하는 지도자들을 풍자한 것입니다.

술 자체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그들의 술자리가 공적 책임과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감각적 쾌락에 취한 지도자들은 뇌물을 받고 판결을 왜곡했습니다. 악인을 의롭다고 선언하고, 의로운 사람의 정당한 권리를 빼앗았습니다. 법이 약한 사람의 보호막이 아니라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의롭다 하다(צָדַק)는 법정에서 어떤 사람이 옳다고 선언되는 것을 뜻합니다. 재판관은 진실에 따라 의로운 사람을 의롭다 하고 악한 사람을 유죄로 판단해야 합니다. 그러나 뇌물이 들어오자 판결이 뒤집혔습니다. 앞 절에서 선과 악의 이름이 바뀐 도덕적 전도가 이제 법정에서 구체적인 폭력으로 나타납니다.

형식적 예배의 위선은 여기서 선명해집니다. 제사를 드리면서도 재판에서는 돈을 따라 판결하고, 기도하면서도 약한 사람의 권리를 빼앗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이웃을 향한 정의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오늘의 교회도 힘과 지위에 따라 사람을 다르게 대하지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영향력 있는 사람의 잘못에는 침묵하면서 힘없는 사람에게만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다면, 우리의 판단도 뇌물 받은 법정과 다르지 않습니다. 정의는 누구에게나 같은 말을 하는 냉정함을 넘어, 말할 힘조차 없는 사람의 권리가 사라지지 않게 하는 책임입니다.

말씀을 멸시한 뿌리에서 피어난 먼지 (사 5:24-25)

본문은 “그러므로”라는 말과 함께 심판의 결과를 선언합니다. 불꽃이 그루터기를 삼키고 마른 풀이 불 속에 떨어지는 것처럼 그들의 뿌리는 썩고 꽃은 티끌처럼 날릴 것입니다. 뿌리와 꽃은 시작과 결과, 보이지 않는 내면과 겉으로 드러난 영광을 함께 가리킵니다. 뿌리가 썩으면 화려한 꽃도 오래 남지 못합니다.

심판의 근본적인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멸시하였음이라.” 율법(תּוֹרָה)은 단순한 규칙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가르쳐 주신 생명의 길입니다. 본래 ‘가르침’과 ‘교훈’이라는 뜻을 지니며,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방향을 제시하는 언약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 율법을 버렸습니다. 버리다(מָאַס)는 단순히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을 넘어 가치 없다고 여기고 거절한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몰라서만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욕망을 방해하는 말씀을 의도적으로 멸시했습니다. 죄의 뿌리에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판단이 더 옳다는 교만이 자리합니다.

그 결과 여호와의 진노가 백성을 향하여 타오르고, 산들이 진동하며 시체가 거리의 쓰레기처럼 놓이게 됩니다. 이것은 전쟁과 국가적 재난의 참혹함을 보여 줍니다. 그럼에도 “그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느니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죄가 계속되는 한 심판도 끝나지 않았다는 엄중한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감정 조절에 실패한 폭발이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와 불의에 보이시는 일관된 반응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학대와 거짓, 뇌물과 억울한 피를 보고도 아무런 분노를 느끼지 않으신다면 그분은 선하신 하나님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약자를 짓밟는 악을 영원히 허용하지 않으신다는 거룩한 사랑의 다른 모습입니다.

먼 나라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주권 (사 5:26-29)

하나님께서는 먼 나라들을 향하여 깃발을 세우시고 휘파람을 불어 그들을 부르십니다. 그러자 그들이 신속하게 달려옵니다. 문맥상 이 군대는 당시 고대 근동을 위협하던 앗수르를 내다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앗수르는 자기 욕망과 제국적 야심을 따라 움직이지만, 이사야는 그 역사적 움직임 너머에서 심판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봅니다.

그 군대에는 피곤하거나 넘어지는 자가 없고 졸거나 자는 자도 없습니다. 허리띠는 풀리지 않고 신발 끈도 끊어지지 않습니다. 화살은 날카롭고 활은 당겨졌으며, 말발굽은 차돌 같고 병거 바퀴는 회오리바람 같습니다. 사자처럼 부르짖으며 먹이를 움켜잡고 가지만 구해 낼 자가 없습니다.

이 묘사는 유다 백성이 가졌던 거짓된 안전감을 무너뜨립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 달라고 조롱했지만, 막상 심판이 닥칠 때에는 피할 틈조차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셨다고 해서 심판하실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사용하신다는 말은 앗수르의 잔혹함이 선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은 뒤에서 앗수르의 교만과 폭력도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악한 제국의 행동에 책임을 지지 않으시면서도, 그들의 자율적인 욕망을 넘어 자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십니다. 이것은 인간의 악이 하나님의 주권 밖으로 벗어나지 못한다는 신비를 보여 줍니다.

역사의 격랑 속에서도 하나님은 무력한 관찰자가 아니십니다. 다만 우리가 모든 사건을 쉽게 하나님의 직접적인 형벌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특정한 역사적 위기를 해석했습니다. 오늘의 재난을 두고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죄에 대한 형벌이라고 성급히 판단하는 것은 신중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타인을 심판하는 추측이 아니라,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믿으며 자신의 삶을 말씀 앞에 세우는 겸손입니다.

빛마저 구름에 가려지는 날 (사 5:30)

마지막 장면은 온 땅을 뒤덮는 어둠입니다. 적군은 바다 물결이 치는 것처럼 유다를 향해 부르짖습니다. 땅을 바라보아도 흑암과 고난뿐이며, 빛조차 구름에 가려집니다. 바다는 성경에서 통제하기 어려운 혼돈과 위협을 상징할 때가 많습니다. 유다가 의지하던 모든 질서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무너집니다.

이사야 5장은 포도원을 비추던 햇빛으로 시작한 듯하지만, 마지막은 빛이 어두워지는 광경으로 끝납니다. 하나님께서 선물하신 빛을 거절하고 어둠을 빛이라 불렀던 백성이 이제 실제 어둠을 경험합니다. 선과 악의 명칭을 뒤집은 영적 어둠이 역사적 고난의 어둠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죄는 자유를 약속하지만 결국 시야를 빼앗습니다. 죄에 익숙해질수록 사람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선택으로 죄의 수레를 끌었지만, 마지막에는 짙은 구름 속에서 방향을 잃습니다. 영적 무감각이 두려운 까닭은 어둠 속에 있으면서도 어둡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어둠이 성경의 마지막 장면은 아닙니다. 이사야서는 뒤에서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게 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죄를 밝히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그 어둠 속에 빛을 비춥니다. 인간이 만든 빛이 꺼진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빛의 필요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심판의 어둠 속에 비치는 복음의 빛 (사 5:18-30)

이사야 5장 18-30절은 죄가 어떻게 사람과 공동체를 파괴하는지 보여 줍니다. 사람들은 거짓의 줄로 죄악을 끌었고, 하나님의 심판을 조롱했습니다. 악을 선이라 하고 선을 악이라 했으며, 자기 지혜를 절대화했습니다. 술에는 용감했지만 정의에는 비겁했고, 뇌물로 판결을 뒤집었습니다. 그 모든 죄의 뿌리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책망은 무겁지만 단순한 정죄가 아닙니다. 아직 심판이 완전히 닥치기 전에 선지자를 보내어 죄의 이름을 바로 부르게 하신 것은 돌이킬 기회를 주시는 긍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둠을 어둠이라 말씀하심으로 우리가 빛을 찾게 하십니다. 죄의 줄을 보여 주시는 이유는 그 줄을 더 굵게 만들지 말고 끊으라는 부르심입니다.

이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예언하는 구절은 아니지만, 인간이 스스로 죄의 속박을 끊을 수 없으며 심판의 어둠을 통과할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악을 선이라 부르지 않으셨고, 죄의 심각성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십자가에서 죄의 심판을 자신의 몸으로 담당하셨습니다.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대낮에 어둠이 임했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심판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심으로 죄인에게 생명의 빛이 열렸습니다.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라는 약속은 죄의 명칭을 바꾸어 죄가 아니라고 선언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를 죄로 판결하시면서도 그 책임을 그리스도께서 대신 담당하시고, 믿는 자를 용서와 의의 자리로 옮기신다는 복음입니다. 그 보혈은 죄책만 씻는 데서 끝나지 않고 우리의 뒤집힌 가치와 굳어진 욕망을 새롭게 합니다.

회개는 한 번의 감정으로 모든 습관이 즉시 사라지는 일이 아닙니다. 오래 끌어온 죄의 수레에는 여러 겹의 줄이 묶여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줄을 하나씩 풀고, 잘못 부른 이름을 바로잡으며, 빼앗은 권리를 돌려주고, 외면했던 사람의 소리를 듣는 과정은 아프고 느립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정죄받은 죄인을 홀로 두지 않으시고 진리와 순종의 길로 이끄십니다.

주님, 거짓의 줄로 죄를 끌면서도 그것을 자유라 불렀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악을 선으로 포장하고 선을 불편한 것으로 밀어냈던 뒤틀린 마음을 바로잡아 주소서.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며 말씀의 책망을 거부했던 교만을 용서하시고, 약한 자의 권리를 빼앗으면서도 경건한 모습을 지키려 했던 위선을 씻어 주소서. 주홍 같은 죄를 희게 하신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게 하시며, 어둠 속에서도 생명의 빛을 따라 걷게 하소서. 우리의 예배가 삶과 분리되지 않게 하시고, 진실과 정의와 긍휼의 열매로 주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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