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신 하나님
사무엘상 7장은 언약궤가 기럇여아림에 머문 뒤 이스라엘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과정을 기록합니다. 사무엘상 4장에서 이스라엘은 회개 없이 언약궤를 앞세우다가 패했지만, 7장에서는 말씀을 듣고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함으로 승리를 얻습니다. 승리의 비결은 새로운 종교적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데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참된 회개의 의미와 기도에 응답하시며 자기 백성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기 원합니다.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고 우상을 제거하십시오(삼상 7:1-4)
사무엘상 6장의 마지막에서 벧세메스 사람들은 돌아온 언약궤를 보고 크게 기뻐했지만 하나님의 거룩함을 가볍게 여겨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라고 탄식하면서 언약궤를 자신들에게서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했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기럇여아림 주민들에게 사람을 보내 블레셋이 여호와의 궤를 돌려보냈으니 내려와 가져가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에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겼습니다.
기럇여아림은 예루살렘 서쪽 산지에 있던 성읍입니다. 블레셋 평야와 이스라엘 산지의 경계에 가까운 곳이어서 언약궤를 보관하기에 비교적 안전한 장소였을 것입니다. 언약궤는 실로로 돌아가지 않고 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 집으로 옮겨졌습니다.
실로는 오랫동안 이스라엘의 중심 성소였지만 엘리 가문이 심판받고 블레셋의 침략을 겪으면서 이전의 역할을 잃게 되었습니다. 언약궤가 실로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사실은 한 시대가 끝났음을 보여 줍니다. 제사장 가문과 성소의 외형은 존재했지만 하나님의 거룩함과 말씀을 멸시한 결과 이전 질서를 그대로 유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기럇여아림 사람들은 언약궤를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았습니다. 본문의 ‘산’은 높은 지대나 언덕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아비나답의 아들 엘르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했습니다.
본문은 엘르아살이 제사장 가문의 사람이었는지 명확하게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의 혈통이나 구체적인 직무를 본문 이상의 내용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분명한 것은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그를 특별히 구별하여 언약궤를 보호하고 관리하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언약궤는 오랫동안 기럇여아림에 머물렀습니다. 본문은 궤가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머물렀다고 말합니다. 언약궤는 이후 다윗 시대에 예루살렘으로 옮겨지므로 실제로 기럇여아림에 머문 전체 기간은 이십 년보다 길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기서 이십 년은 언약궤가 옮겨진 후 이스라엘에 영적 회복의 움직임이 일어나기까지의 기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언약궤가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왔다고 모든 문제가 즉시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언약궤의 물리적인 귀환과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인 회복은 같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거룩한 상징물이 돌아왔지만 백성의 마음은 아직 하나님께 온전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패한 원인은 언약궤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우상을 섬기면서도 거룩한 언약궤를 이용해 승리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언약궤가 돌아온 것만으로 언약 관계가 자동으로 회복될 수는 없었습니다. 백성의 마음이 하나님께 돌아와야 했습니다.
우리도 외적인 종교 생활의 회복을 영적인 회복과 동일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다시 출석하고 예배의 자리에 앉았다고 해서 마음까지 하나님께 돌아온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형식을 회복했어도 마음속 우상을 그대로 붙들고 있다면 참된 회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고 말합니다. ‘사모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나하(נָהָה)는 슬퍼하다, 탄식하다 또는 간절히 뒤따르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스라엘이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슬퍼하며 여호와를 찾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십 년 동안 블레셋의 압제와 영적 공허를 경험했습니다. 언약궤는 돌아왔지만 하나님의 임재가 주는 평안과 능력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자신들의 문제를 군사력이나 언약궤라는 물건에서 찾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기 시작했습니다.
고난이 길어진다고 모든 사람이 자동으로 회개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더욱 원망하고 마음을 완고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사용하여 자기 백성의 거짓된 의지처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을 갈망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사모하게 된 것은 그들 안에 본래 선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의 은혜로 그들의 마음을 깨우고 자신을 찾게 하셨습니다. 참된 회개의 시작에도 하나님의 선행하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개혁주의 신앙은 회개와 믿음이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임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회개를 주신다는 사실이 인간의 책임을 없애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마음을 깨우실 때 우리는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했습니다.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사무엘이 선지자로서 온 이스라엘에 선포한 핵심은 회개였습니다.
‘돌아오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슈브(שׁוּב)는 방향을 돌이켜 되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회개는 단순히 잘못을 후회하거나 슬픈 감정을 느끼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죄와 우상에게서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완전히 잊고 우상만 섬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를 섬긴다고 하면서 바알들과 아스다롯도 함께 섬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기보다 하나님께 다른 신들을 더하려 했습니다. 신앙과 우상 숭배를 혼합하는 혼합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바알은 가나안 사람들이 풍요와 비, 농사의 결실을 관장한다고 믿었던 신이었습니다. ‘바알들’이라는 복수형은 지역마다 다양한 이름과 형태로 섬기던 바알 숭배를 나타냅니다. 농사를 짓는 이스라엘 백성은 비와 풍년을 얻기 위해 바알 숭배에 유혹받았습니다.
아스다롯은 아스다롯 또는 아스타르테로 알려진 여신의 여러 지역적 형태를 가리키는 복수 표현입니다. 풍요와 다산, 성적인 숭배 의식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현실적인 풍요와 번영을 얻기 위해 주변 민족의 신들을 받아들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는 단순히 신학적인 지식이 부족해서 생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보다 안정과 풍요를 더 사랑했기 때문에 생긴 문제였습니다. 여호와만 의지하기에는 불안하여 눈에 보이는 다른 보장책을 더하려 했습니다.
우상은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종교적인 형태로 만들어 낸 것입니다.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긴 목적은 그 신들 자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비와 풍요, 자녀와 성적인 욕망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우상 숭배의 중심에는 하나님보다 자신의 욕망을 더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바알과 아스다롯의 신상을 세워 놓고 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고 사랑하며 그것이 없으면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대상이 있다면 그것이 우리의 우상이 됩니다. 돈과 성공, 건강과 자녀, 권력과 명예, 사람의 인정도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면 우상입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우상을 마음으로만 미워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너희 중에서 제거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회개에는 구체적인 제거가 필요합니다. 죄를 슬퍼한다고 말하면서 죄로 이끄는 환경과 습관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온전한 회개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탐욕을 회개한다면 돈을 사용하는 방식이 달라져야 합니다. 음란을 회개한다면 죄를 부추기는 관계와 매체를 끊어야 합니다. 사람의 인정을 우상으로 섬겼다면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는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해야 합니다. 회개는 마음에서 시작하지만 삶의 변화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우상을 제거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무엘은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라”고 말합니다. 죄를 버리고 생긴 빈자리를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우상을 버렸다고 하면서 마음의 중심이 여전히 자기 자신에게 있다면 다른 우상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향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쿤(כּוּן)은 굳게 세우다, 준비하다, 확정하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한다는 것은 일시적인 감정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마음을 굳게 정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그만을 섬기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신 가운데 가장 높은 신으로 섬김받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전적인 사랑과 순종을 받으십니다. 하나님과 우상을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주인으로 모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입술로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실제로는 돈과 성공의 명령에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참된 회개는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이 전심으로 돌아와 하나님만 섬기면 하나님께서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건져 주실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이 약속은 이스라엘이 우상을 제거한 공로로 구원을 산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에 따라 회개하는 백성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다는 뜻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는 값이 아니라 은혜로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이 보이는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말씀으로 백성을 부르시고 돌아올 길을 열어 주십니다. 이스라엘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겼습니다.
이 짧은 기록에는 참된 회개의 구조가 담겨 있습니다. 죄를 슬퍼하고, 우상을 제거하며,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후회만 있고 삶의 방향이 바뀌지 않는다면 아직 회개의 열매가 충분히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죄를 고백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삼상 7:5-11)
이스라엘이 우상을 제거하자 사무엘은 모든 백성을 미스바로 모으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그들을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미스바는 ‘망대’ 또는 ‘파수하는 곳’이라는 의미를 가진 지명으로, 이스라엘 공동체가 중요한 일을 위해 모이던 장소였습니다.
사무엘은 선지자로서 말씀을 전했을 뿐 아니라 백성을 위해 중보했습니다. 그는 회개를 명령하고 멀리 서서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말씀을 선포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영적 지도자는 사람의 죄를 지적하는 데서 책임이 끝나지 않습니다. 죄인이 회개하고 회복되도록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의 칼로 상처만 내는 사람이 아니라 복음의 은혜로 싸매고 하나님께 중보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날 금식했습니다. 물을 붓는 행위의 정확한 의미는 본문이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명과 마음을 물처럼 하나님 앞에 쏟는 회개를 상징했거나, 정결과 겸비를 나타내는 의식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행위를 후대의 특정 관습과 직접 연결하여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중요한 것은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죄를 인정하는 외적인 표현으로 물을 부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이전처럼 언약궤를 이용하여 하나님을 조종하려 하지 않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았습니다.
백성은 금식했습니다. 금식은 음식 자체를 악하게 여기거나 고행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 방법이 아닙니다. 자신의 죄와 영적인 필요가 일상의 즐거움과 음식보다 더 절박하다는 사실을 몸으로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금식이 회개 없는 종교적 과시로 변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진실한 금식은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는 데 도움을 주는 신앙적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금식의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낮아진 마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패배의 원인을 언약궤의 부재나 군사력의 부족에서 찾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무너뜨렸음을 인정했습니다.
참된 죄 고백에는 변명이 없습니다. “환경이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다른 민족도 그렇게 했습니다”, “지도자들이 잘못했기 때문입니다”라고 책임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했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타(חָטָא)는 목표를 빗나가다, 죄를 범하다는 뜻을 가집니다. 죄는 단순한 실수나 사회적 규칙의 위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하나님과의 언약을 거스르는 행동입니다. 모든 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범하는 죄입니다.
죄를 고백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판단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라고 느끼는 것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라고 말씀하신 것을 죄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과 시대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죄의 기준입니다.
본문은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렸다고 말합니다. ‘다스리다’에 해당하는 샤파트(שָׁפַט)는 재판하다, 판결하다, 사사로 통치하다는 뜻입니다. 사무엘은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이면서 백성을 지도하고 분쟁을 해결하는 사사의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백성의 회개와 미스바 집회 소식을 들은 블레셋 방백들은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왔습니다. 이스라엘이 미스바에 모인 것을 군사적 반란이나 전쟁 준비로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이 다시 힘을 모으기 전에 공격하려 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블레셋 사람들이 올라온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이 회개했다고 모든 두려움이 즉시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도 위협 앞에서 두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믿음은 두려움이 전혀 없는 상태가 아니라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4장에서도 이스라엘은 블레셋을 두려워했습니다. 당시에는 언약궤를 가져오면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무엘에게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라고 요청합니다.
4장에서는 언약궤를 가져오라고 했지만 7장에서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전에는 거룩한 물건을 의지했지만 이제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외적인 방법에 대한 의존이 기도와 믿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사무엘의 기도를 의지했지만 사무엘 자체를 구원자로 여긴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사무엘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주기를 요청했습니다. 구원의 능력은 사무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서 기도하는 중보자였습니다.
사무엘은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부르짖었습니다. ‘온전한 번제’는 제물 전체를 태워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는 전적인 헌신과 속죄,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의존을 나타냅니다.
사무엘과 이스라엘이 제사라는 행위로 하나님을 조종한 것은 아닙니다. 사무엘상 4장의 언약궤처럼 제물을 승리의 도구로 사용한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제사와 기도의 방법으로 나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이유는 어린 양 자체에 어떤 마법적인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구약의 희생 제사는 죄인이 자기 공로로 하나님께 설 수 없으며, 대신 죽는 제물과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무엘은 어린 양을 드리며 이스라엘을 위해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셨습니다. ‘응답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나(עָנָה)는 부름이나 간구에 대답한다는 뜻입니다.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였던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백성의 기도에 행동으로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은 백성이 완전해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두려워했고 군사적으로 블레셋보다 약했습니다. 그러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 돌아온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언약의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왔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전투 대형을 갖추기보다 회개하고 제사를 드리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셨습니다. 블레셋 군대는 이스라엘 앞에서 패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승리를 결정한 것은 군사 전략이나 병력의 수가 아니라 여호와의 개입이었습니다.
한나의 노래는 이미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라고 선포했습니다(삼상 2:10). 사무엘상 7장에서 그 노래가 역사 속에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우레를 발하여 이스라엘의 대적을 혼란에 빠뜨리셨습니다.
‘어지럽게 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맘(הָמַם)은 혼란에 빠뜨리다, 두려움에 떨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의 전쟁에서도 하나님께서 대적을 혼란에 빠뜨리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싸우시는 거룩한 전쟁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미스바에서 나가 블레셋을 추격하여 벧갈 아래까지 쳤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블레셋을 어지럽히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도 그 뒤를 따라 싸웠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이 인간의 책임과 행동을 제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셨으므로 이스라엘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대적을 무너뜨리실 때 백성은 믿음으로 나아가 추격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을 수동적이고 게으르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확신 속에서 담대히 순종하게 합니다.
사무엘상 4장과 7장의 대조는 분명합니다. 4장에서 이스라엘은 큰 함성을 질렀고 언약궤를 앞세웠지만 하나님께 패했습니다. 7장에서는 죄를 고백하고 우상을 버리며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하늘의 우레로 승리를 주셨습니다.
차이는 종교적 기술에 있지 않았습니다. 언약궤 대신 제물을 사용했기 때문에 이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달라졌습니다. 4장에서는 하나님을 자신들의 승리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려 했지만, 7장에서는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자신을 맡겼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기도와 예배도 하나님을 움직이는 기술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이용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기 위해 기도합니다. 참된 기도는 하나님을 변화시키기보다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킵니다.
사무엘이 어린 양을 드리고 백성을 위해 중보한 모습은 성경 전체의 구속사에서 더 완전한 중보자를 바라보게 합니다. 사무엘을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예표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지만 그의 중보와 어린 양의 희생은 죄인이 구원받기 위해 중보자와 희생 제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중보자일 뿐 아니라 자신을 제물로 드리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사무엘은 어린 양을 드리며 부르짖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드리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죽으셨다가 부활하시고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자기 백성을 위해 간구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사무엘에게 “우리를 위하여 쉬지 말고 부르짖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신약의 성도에게는 영원히 살아서 중보하시는 대제사장이 계십니다. 우리가 연약하고 두려울 때에도 그리스도의 중보는 중단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기도가 완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중보가 완전하기 때문에 안전합니다.
에벤에셀을 세우고 은혜의 역사를 기억하십시오(삼상 7:12-17)
승리가 끝난 후 사무엘은 돌 하나를 가져다가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돌의 이름을 에벤에셀이라고 지었습니다. 에벤에셀은 히브리어 에벤 하에제르(אֶבֶן הָעֵזֶר)로서 ‘도움의 돌’이라는 뜻입니다.
사무엘이 돌을 세운 것은 돌 자체에 신비한 능력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도움을 기억하게 하는 기념물로 세운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돌을 볼 때마다 자신들의 군사력이나 지혜가 아니라 여호와의 도움으로 승리했음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사무엘은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고 말했습니다. ‘돕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자르(עָזַר)는 위험에 처한 사람을 지원하고 구원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블레셋의 손 아래 있던 이스라엘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도우셨습니다.
“여기까지”라는 말에는 지나온 은혜에 대한 감사가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실패와 불순종으로 얼룩졌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회개하도록 말씀하시고, 기도에 응답하시며, 대적의 손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고백은 과거만 회상하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도우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언약에 따라 인도하실 것이라는 신뢰를 포함합니다. 그러나 과거에 도움을 받았으므로 앞으로 어떤 죄를 지어도 자동으로 보호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계속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에 순종해야 했습니다.
에벤에셀은 자기 자랑의 기념비가 아니라 은혜의 기념비였습니다. 세상은 인간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비석을 세우지만 사무엘은 하나님의 도움을 기억하기 위해 돌을 세웠습니다. 그 돌은 “우리가 해냈다”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도우셨다”고 증언했습니다.
우리도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에벤에셀의 고백을 해야 합니다.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실패와 눈물,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있었지만 그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시고 믿음에서 완전히 떠나지 않도록 지키셨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까지 믿음 안에 서 있는 것은 의지가 강하고 선택을 잘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붙드셨기 때문입니다. 넘어졌을 때 일으키시고 길을 잃었을 때 돌이키셨으며, 필요한 사람과 말씀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도의 견인은 하나님의 보존하시는 은혜에 근거합니다.
그러나 에벤에셀을 우상으로 만들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사용하신 방법과 장소를 절대화해서는 안 됩니다. 기념물의 목적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데 있습니다. 돌 자체를 의지하면 사무엘상 4장에서 언약궤를 부적으로 사용한 잘못을 반복하게 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에게 굴복하고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사무엘이 사는 동안 여호와의 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막으셨습니다. 앞에서는 여호와의 손이 블레셋 성읍들을 무겁게 눌렀고, 이제는 그 손이 이스라엘을 보호하십니다.
같은 하나님의 손이 대적에게는 심판이고 언약 백성에게는 구원이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 자체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의미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에게 그분의 전능은 보호와 소망이지만,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운 심판입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성읍들을 에그론에서 가드까지 되찾았습니다. 그 성읍들에 딸린 지역도 블레셋의 손에서 회복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습니다.
아모리 사람은 좁은 의미에서는 특정한 가나안 민족을 가리키지만 때로는 가나안 주민들을 넓게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여기서는 이스라엘 주변에 남아 있던 비블레셋계 주민들과 평화로운 관계가 형성되었음을 뜻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은 전쟁 한 번의 승리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잃어버린 지역을 회복하고 주변에 평화를 이루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죄는 관계와 삶의 질서를 무너뜨리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무너진 것을 회복하고 평화를 이루십니다.
사무엘은 사는 날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순회하며 그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을 재판했습니다. 그는 한곳에 머물며 백성이 찾아오기만 기다리지 않고 여러 지역을 다니며 말씀과 정의로 섬겼습니다.
벧엘은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관련된 중요한 장소였고, 길갈은 가나안 정착 초기의 기억을 가진 곳이며, 미스바는 회개와 승리가 일어난 장소였습니다. 사무엘은 이러한 중심 지역을 순회하며 백성의 분쟁을 판단하고 영적인 질서를 세웠습니다.
사무엘의 사역은 전쟁에서 승리를 얻어 주는 일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지속해서 백성을 다스리고 말씀에 따른 정의를 세웠습니다. 위기 때 한 번 뜨겁게 기도하는 것보다 평안한 날에 꾸준히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흥은 집회에서 눈물을 흘린 순간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회개 이후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과 정의에 따라 재구성되어야 합니다. 감정적인 결단이 가정과 관계, 경제생활과 공동체 안에서 구체적인 순종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사무엘은 순회를 마치면 자신의 집이 있는 라마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도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습니다. 라마는 사무엘의 일상과 사역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는 공적인 사역의 장소뿐 아니라 자신의 집이 있는 곳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공적인 자리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과 사적인 삶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경건하게 보이면서 가정에서는 말씀을 무시한다면 온전한 신앙이 아닙니다. 사무엘은 순회 사역과 일상의 자리 모두에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사무엘의 지도력은 엘리의 아들들과 대조됩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직을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사용했지만 사무엘은 백성을 위해 기도하고 여러 지역을 다니며 섬겼습니다. 참된 영적 권위는 사람에게서 빼앗는 데서 나오지 않고 하나님과 백성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는 섬김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사무엘도 이스라엘의 완전한 구원자는 아니었습니다. 다음 장에서 그의 아들들도 아버지의 길을 따르지 않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으며 재판을 굽게 합니다. 아무리 충실한 인간 지도자도 다음 세대의 신앙과 구원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사무엘 같은 신실한 인물을 보여 주면서도 인간 지도자에게 궁극적인 소망을 두지 않게 합니다. 이스라엘에는 죄가 없고 영원히 공의로 다스릴 완전한 선지자와 왕이 필요했습니다. 그 필요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하는 선지자이며 자기 백성을 위해 자신을 드린 대제사장이고 공의와 평화로 다스리는 영원한 왕이십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에벤에셀은 돌이나 과거의 체험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로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을 때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도우셨음을 보여 주는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내어 주심으로 죄와 사망의 손에서 우리를 건지셨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를 붙드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하신 구원을 끝까지 이루실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무엘상 7장은 참된 회복이 환경의 변화보다 마음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데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은 언약궤를 되찾고도 이십 년 동안 영적 공허 속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우상을 버리고 마음을 여호와께 향하며 죄를 고백했을 때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에 자리한 바알과 아스다롯을 제거해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돈과 성공, 사람의 인정과 욕망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죄를 후회하는 데 머물지 말고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 돌려 그분만을 섬겨야 합니다.
두려움이 찾아올 때 종교적 방법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오. 우리에게는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고 지금도 중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우리의 구원은 기도의 완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완전한 희생과 중보에 달려 있습니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며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고 고백하십시오. 실패와 눈물 속에서도 믿음을 지켜 주시고 다시 일으키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을 의지하여 오늘도 우상을 버리고, 말씀에 순종하며, 감사와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