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4장 강해

 마태복음 4장 개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은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로 나가십니다. 40일 동안 금식 하신 후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지만 기록된 말씀으로 물리치십니다. 천국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시고,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십니다. 이후 사람들을 고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십니다.


  • 1-11절 금식과 광야의 시험
  • 12-17절 복음을 전파하시다.
  • 18-22절 네 제자를 부르시다.
  • 23-25절 치유와 천국 복음 전파


1-11절 금식과 광야의 시험


"성령에 이끌려"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신다. 광야를 고난의 현장으로 생각한다면 그 고난으로 이끄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에 들어간 곳이다. 과거의 이스라엘이 불순종으로 일관했다면 이제 예수님은 순종의 모범을 보이실 것이다. 이러한 사역을 위해 예수님은 광야로 가셔야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곧바로 가나안을 향하지 않고 홍해 앞으로 가고, 광야를 배회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곳으로 인도하셨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할 일이 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정말 무서운 말이다. 마귀는 인간 안에 내재한 자기 증명 의혹을 부추긴다. 이 질문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자기를 증명하라는 뜻인 동시에 '너는 가까가 아니냐?'라는 의혹을 부추긴다. 사람은 자신의 의혹을 받을 때 억울해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목숨을 버리기도 한다. 명예는 존재의 의미와 방식까지 혼란에 빠뜨린다.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예수님은 평생 '하나님의 아들되심'에 대한 의혹을 받아야 했다. 심지어 가족들에게까지. 예수님의 생애 자체, 아니 복음서의 목적이다. 오직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에 대한 증명이었다. 요한은 요한복음을 마무리 지으면 이렇게 말한다.

  •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떡덩이가 되게 하라


마귀의 첫 번째 시험은 돌이 떡이 되는 것이다. 이 시험은 곧바로 광야의 사건으로 넘어간다. 예수님도 그것을 알았다. 먹고 사는 것은 가장 중요한 본질이다. 지금도 표를 받는 대통령은 경제 문제를 잘 해결하는 사람이다. 마귀는 너는 인간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이 질문은 속임수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떡임을 아신다. 즉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인류를 구원할 것이다. 하지만 땅의 문제로 머물게하고, 그것이 전부라고 마귀는 말하고 있다. 무서운 유혹이다. 떡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할 것이 아니요.


우리는 말슴이 신명기 8:3에서 인용한 것임을 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모세의 말이다. 신명기 8장 2-3절을 읽어보자.

  • 신 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 신 8: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모세가 '만나를 먹이신'이라고 표현한 것을 주목해보자. 만나는 하나님께서 기적을 통해 광야의 생활 동안 베풀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영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다.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신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고난 가운데 두신다는 말이다. 사람은 떡이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이 필요한 존재이다.


"기록 되었으되"

이 부분을 따로 다루는 것이 좋지만 일단 넣어 보자.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처음 시험에서 예수님은 신명기 말씀을 인용하면서 '기록되었으되'라고 말씀하신다. 기록은 구약에 기록된 말씀을 말한다. 마귀를 이기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기록된 말씀을 인용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기회가 되면 따로 다룰 것이다.


마귀는 다음 시험에서 자신도 말씀을 인용한다. 그는 시편 91:11,12을 인용한다.

  • 시 91:11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 시 91:12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들을 붙들어 주신다는 약속이다. 하지만 마귀는 이 구절을 예수님의 시험에 이용한다. 동일하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을 이용한다. 즉 네가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면 하나님께서 널 지켜 주실 테이니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라는 것이다. 마귀는 말씀의 숨겨진 의도는 간파했고, 그것을 이용한다.


얼마나 놀라운가? 마귀도 하나님의 말씀을 자유자재로 인용하며, 그 안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야고보가 말한 귀신의 지식이다.

  • 야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예수님은 곧바로 신 6:16을 인용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십니다. 즉 마귀가 인용한 구절은 성도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그것을 악용하여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한다면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시험하는 악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경배와 신뢰의 대상이지 시험의 대상이 아닙니다. 시험은 이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사람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으시며 시험 당하지도 않으십니다.

  • 신 6:16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세 번째 시험이 시작된다. 헬라어 원문은 순서가 다르다. 

네게 주겠다. 내게 경배하면.

Ταῦτά σοι πάντα δώσω, ἐὰν πεσὼν προσκυνήσῃς μοι.

( 것   너에게   모두   주겠다   만약   엎드려   절하면   내게)


얼마나 놀라운 말인가? 이것이 마귀의 본심이다. 그는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다. 물론  잠시 동안 그가 이 땅의 주인처럼 행세하지만 마귀는 엄밀하게 주인이 아니다. 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곳이며, 하나님이 주인이시다. 그런데 마귀는 세상을 창조하신 예수님께 자신의 것인 양 주겠다고 거짓말하며, 자신에게 경배하라  유혹한다. 경배해야 할 대상이 경배를 받으려 한다. 


예수님은 곧바로 기록된 말씀으로 반격하신다.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라.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한다는 뜻이며, 하나님의 말씀의 원대로 살아간다는 뜻이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자를 지배하도로 해야 한다.


12-17절 복음을 전파하시다.


요한이 잡혔음을

세례 요한을 말한다. 세례 요한이 헤롯이 빌립의 아내를 빼앗았다는 것으로 비판을 하자 화가난 헤롯이 요한을 옥에 가두어 버린다. 일부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은 정치와 종교와 상관 없어야 한다 하지만 거짓말이다. 기독교는 시작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정치적이었다. 정치적이라 함은 특정 당을 지원하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약자를 보호하고,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는 당을 지지하고, 정책을 지지해야 한다. 불의에 항거하여 당당게 목소리를 내야 한다.


가버나움에 가시니


지금까지 예수님은 특별한 사역을 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이제 나설 때가 되셨다고 판단하신다. 고향인 나사렛을 떠나 갈릴리의 부유한 도시에 가버나움으로 가신다. 후에 가버나움은 예수님을 배척한다. 이제 세상으로 나아가 목소리를 발하실 때가 된 것이다. 저자는 이사야의 말씀이 응했다고 말한다.
  • 사 9:1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사 9: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이사야의 구절은 묘하다. 8장은 하나님의 율법의 사라져 어둔 시대를 말하고, 9장이 시작되면서 갈릴리가 등장한다. 아마도 갈릴리 주변 북쪽 지파들은 북왕국으로 분리되면서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상실되면서 칠흑같은 어둠이 찾아오지 않았나 싶다. 결국 말씀의 부재는 북,남의 멸망으로 기나긴 중간기를 거치면서 심화된다. 즉 한 지파나 지역이 아닌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상태가 된 것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라

회개하라는 현대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감정적 회개가 아니다. 헬라어의 회개 메타노에오(μετανοέω)는 '되돌아서다'라는 뜻으로 유턴을 뜻한다. 회개는 생각의 돌아섬과 행위의 돌아섬이 함께 동반된 전인격적 삶의 변화를 뜻한다. 눈물 흘리며 회개했다고 말하는면서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자기기만이자 하나님을 모욕하는 행위다. 기독교인들이 가식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8-22절 네 제자를 부르시다.


그물 던지는 것은 보시니


가장 먼저 안드레와 베드로를 부르신다. 두 사람은 형제로 베드로의 본명은 시몬이다. 베드로는 히브리어 페트로이다. 페트로는 반석, 거대한 바위란 뜻이다. 에서의 후손들이 살았던 에돔 지역은 바위가 많아 페트라로 불렸다.

주님은 길을 가다 베드로와 안드레를 만나 그들을 제자로 부르신다. 우리는 제자들을 들을 부를 때 전혀 모른 사람이 갑자기 '나를 따라 오너라'하며 부른다고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을 만나 복음을 전하고 수많은 이야기를 한 다음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하도록 부르신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즉각적으로 부르고 호흥하는 것은 당시 글쓰기의 방식이지 현대의 의미처럼 부른 것이 절대 아니다. 이러한 부분은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의 부르심의 방식을 비교 분석하여 분명해 진다.


사람을 낚는 어부


예수님은 사람들을 부르실 때 전혀 엉뚱한 무엇으로 부르거나 설명하지 않으신다. 그들의 직업인 어부를 비유적으로 설명하며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신다. 부르심은 멀리 있지 않다. 나와 아무 상관 없어 보이는 것도 실제는 나의 삶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이다. 부르심은 현재의 삶과 멀지 않다. 바로 그 자리에서 부르신다.


되게 하리라


우리는 이 부분에 주목해야 한다. '되다'(ποιέω)는 어떻게 만들겠다는 뜻이다. 마치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듯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세우신다. 이것은 새로운 창조이다. 소명은 창조다! 주체는 예수님이시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만드신다. 베드로는 스스로 되는 것이 아니다. 미래직설법을 사용하여 강한 의지를 드러내신다.


야고보와 요한도 부르신다. 세베대는 예수님과 친척간이다. 이들은 예수님과 친족 간이다. 후에 이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직전 어머니가 와서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 자리를 요구한다. 친족 간이라는 이유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정하지 않으신다.

부르심은 소명이며, 창조이다. 하나님께서 부르심으로 죽은 자가 살아나며,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23-25절 치유와 천국 복음 전파

23-24절은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사역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준 상징적인 구절이다. 먼저 예수님은 갈릴리를 두루 다니셨다. 예수님의 중반기까지 사역은 모두 갈릴리에 집중 되어 있다. 

διδάσκων ἐν ταῖς συναγωγαῖς αὐτῶν 
καὶ 
κηρύσσων τὸ εὐαγγέλιον τῆς βασιλείας 
καὶ 
θεραπεύων πᾶσαν νόσον καὶ πᾶσαν μαλακίαν ἐν τῷ λαῷ.

가르치시며(디다스코 διδάσκω)


먼저 가르치신다. 가르침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전파한다는 의미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예수님과 같은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다. 가르침을 회당에서 이루어졌다. 사실 이 부분은 논쟁 거리다. 회당에서 가르치기 위해서는 랍비가 되어야 하며 적지 않은 나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나이를 적어도 50정로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종종 랍비로 불렸다. 랍비는 아무에게나 주는 호칭이 아니다. 


전파하시며(케룻소 κηρύσσω)


케룻소는 일방전 선포에 가깝니다. 마치 전쟁을 선포한 것처럼. 선포된 것은 천국복음이다. 케룻소는 대부분 복음이 전파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강력한 힘을 가진 단어로이다. 설득하고 대화하는 것과는 약간이 차이가 있다. 설득의 개념보다는 선포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고대 헬라어는 전령들이 왕이나 황제의 명령을 선포하는 개념으로 이 단어가 종종 사용되었다. 즉 공개적인 선포의 의미가 강한 단어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하나님이 계시하신 복음을 선포하신 것이라 할 수 있다.

고치시니(떼라페우 θεραπεύω)


예수님의 힐링, 즉 고침은 부정에서 정함으로의 전환이 일어난다. 율법적으로 부정한 자들을 정하게 바꾸신다. 질병에 걸리면 부정한 자가 되어 공동체로부터 분리 된다. 이들은 정결 의식을 통해 다시 공동체로 들어오지만 회복되지 않으면 영원히 부정하게 된다. 예수님은 이들을 고치심으로 복음으로 모든 이들이 정결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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