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5장 개요
5장은 사람들의 번성이다. 악의 계보이든, 셋의 계보이든 번성하고 충만하라는 축복에 순응한다. 5장은 아담과 셋으로 이어지는 계보로 노아의 탄생까지 이어진다. 노아의 홍수는 5장의 족보에 종속되며,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갈등'이 내재되어 있다. 5장의 족보는 하나님의 인내의 시간이자 용서의 기간이다. 하지만 영원하지 않다. 곧 징계가 시작될 것이다. 홍수가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세상을 족보를 통해 드러낸다.
- 1-5절 아담부터 셋까지
- 6-24절 셋부터 에녹까지
- 25-32절 므두셀라부터 노아까지
1-5절 아담부터 셋까지
계보니라
계보는 톨레도트.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필자는 톨레도트는 그리 중요하게 보지 않기 때문에 패스한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자료가 많으니 직접 찾아 보시길. 원어는 "제흐 세페르 톨레도트"(이것은 책이다 계보의)로 기록되어 있다. 긴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것이다. 최초의 창세기가 어디에 적혀있었는지 알 길은 없다. 토판과 양피지 중 하나 일 것이다. 토판이나 파피루스라면 볼륨 형식 것이고, 양피지라면 두루마리 형태일 것이다. 어떻든 1-4장까지 끊어지고, 5장부터 어느 부분까지 이어질 것이다. 다음 톨레도트가 6:9장인 것을 볼 때 노아의 홍수 이전까지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니 넘어가자.
고신대 강화구 논문에서 가져옴 |
하나님의 모양대로
1장의 내용이 다시 언급된다. 1절의 아담과 사람은 모두 히브리어 '아담'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모양(데무트)대로 만드셨다. 즉 사람은 하나님의 붕어빵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대리한다. 하지만 인간의 타락으로 많은 부분 훼손 되었다.
복을 주시고
사람이 창조는 6일 째이다. 안식을 제하면 가장 늦은 날이다. 바로 그날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복을 주셨다. 그들을 사람(아담)이라 불렀다. 사람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존재이다. 하지만 타락했다는 하나님의 슬픔이 내재되어 있다. 이것은 5장 전체에 이어진다.
아담은 형상과 같은
아담도 아들을 낳는다. 첫째 아들은 가인이며, 둘째는 아벨이다. 하지만 가인은 살인자가 되어 버려졌고, 아벨은 가인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아담도 하나님처럼 자신을 닮은 아들을 낳는다. 여기서 형상은 1절의 모양과 동일한 단어 데무트이다. 그런데 왜 하나는 모양으로 하나는 형상으로 번역하는지... 세 번째 아들은 셋이다. 모양과 형상은 기원 자체가 하나님께 있음을 말합니다. 아담은 하나님을 닮고, 셋은 아담을 닮고.. 이어지는 족보도 '모양' '형상'이란 단어가 없어도 데무트로 이어질 것을 전제한다.
자녀들을 낳았으며
아담은 셋만 놓고 죽은 것이 아니다. 다른 수많은 자녀들을 낳았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들어난다.
구백삼십 세
아담이 죽은 나이다. 거의 천년에 가까운 그의 나이는 현재의 나이로 보면 신비롭기 그지 없다. 나이에 너무 과하게 기대지 말고 넘어가자. 우리가 알 수 도 없는 노릇이다.
백삼십 세에
아담이 셋을 낳은 나이다. 그렇다면 가인과 아벨은 언제 낳았을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추측해보면 수십 년이 지났을 수도 있다.
6-24절 셋부터 에녹까지
셋은
셋도 자녀들을 낳았다. 하지만 모양이나 형상이 없다. 하지만 이미 내재되어 있다. 우리는 계보 이야기를 교회의 확장과 연결 시킬 필요가 있다.
생명은 생명으로 이어진다. 죽음은 생명을 낳지 못하다. 생명은 생명에서 나온다. 하지만 죄인은 죽는다. 죽음은 필연이다. 피할 수 없기에 또 다른 자신을 복제하여 생명을 물려주고 죽음을 맞이 한다. 죄의 값은 사망이다.
야렛은 에녹을 낳았고
에녹이 출생과 승천은 기존의 족보 패턴을 깬다. 출생하고 지내고 죽는다. 하지만 에녹은 태어나 살다 하늘로 올라간다. 죽음을 맞이하지 않는다. 죽지 않고 하늘에 올라간 이는 에녹과 엘리야 두 사람 뿐이다.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하지만 죽지 않는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풀어야 할 숙제다. 죄 값을 누군가 대신 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원죄를 믿지 않는다. 승천은 사람의 한계를 너머 가는 것이다. 후일에 다시 생각해 보자.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동행은 같이 걷다로 '할라크'이다. 하지만 해석 상의 난제가 존재한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과 걸었다는 것이다.
동행이란?
동행이란 뭘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어찌 같이 걸을까? 우리는 이 단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동행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하는 삶을 말한다. 그렇다면 순종은 계명이 전제 된다. 계명이 당시에 존재했을까? 실제로 존재했다. 이 부분은 따로 고민해 보자. 출애굽기를 보면 십계명 이전에도 하나님의 계명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출 15: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 출 16:2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25-32절 므두셀라부터 노아까지
므두셀라는
므두셀라의 죽음은 홍수 해와 정확이 맞아 떨어진다. 그가 홍수로 죽은 것인지, 직전에 죽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보수 학자들은 홍수로 죽었다고 믿지 않는다. 하여튼 그는 첫 인류의 종말을 같이 한다.
라멕은
에녹, 라멕은 가인의 후손들에게도 존재한다. 이름은 같지만 너무나 다른 삶을 살아간다. 라멕은 노아를 낳는다. 그는 노아를 낳고 수고하는 이 땅에서 안식을 줄 것이라 말한다. 그가 말하는 안식은 심판을 통한 악으로부터의 쉼을 말할 것이다. 5장의 족보에 등장하는 이들은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승 해 갔을 확율이 높다. 아니면 하나님께서 직접 개인들에게 말씀하셨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노아는
노아의 출생으로 5장이 마무리 된다. 흥미로운 점은 지금까지 한 명 만을 언급하다 노아는 셈 함 야벳 세 명의 자녀를 언급한다.
5장은
1) 악의 팽창과 세상의 타락이 내밀 하게 숨겨져 있다.
2) 죽어야 하지만 세대를 거쳐 생명을 이어가게 하신다.
3) 생이 고통임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