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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6장 주해와 강해

돌아온 언약궤 앞에서 기쁨과 두려움을 배우십시오

사무엘상 6장은 블레셋 땅에 머물던 언약궤가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과정을 기록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의 무거운 손을 견디지 못해 언약궤를 돌려보내지만, 벧세메스 사람들은 돌아온 궤를 기뻐하면서도 하나님의 거룩함을 가볍게 여겨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 숭배자에게만 거룩하신 분이 아니라 언약 백성에게도 거룩하십니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는 주권적인 은혜로 주어지지만, 그 은혜를 경외함 없이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기 원합니다.

죄책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께 온전히 돌아오지는 않았습니다(삼상 6:1-9)

여호와의 궤는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일곱 달 동안 머물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일곱 달은 영광이 떠난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언약궤를 빼앗겼고 엘리의 가문은 무너졌으며, 블레셋의 압제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에게 그 일곱 달은 자신들의 승리가 재앙으로 변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블레셋은 언약궤를 전리품처럼 가져와 아스돗에 있는 다곤의 신전에 두었습니다. 그들은 다곤이 여호와를 이겼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다곤은 언약궤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쓰러져 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다곤을 다시 세웠지만 그다음 날에는 머리와 두 손목이 끊어진 채 문지방에 놓여 있었습니다.

다곤의 손은 잘렸지만 여호와의 손은 블레셋을 무겁게 눌렀습니다. 아스돗과 가드와 에그론에 재앙이 임했고, 사람들은 독한 종기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성읍마다 옮겨 보았지만 장소를 바꾼다고 하나님의 손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자랑스러운 전리품이었던 언약궤가 이제는 누구도 곁에 두고 싶지 않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소유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언약궤로 인해 사로잡힌 상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영광을 높이려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일곱 달이 지난 후 블레셋 사람들은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렀습니다. 여기서 제사장들은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이 아니라 블레셋의 신들을 섬기던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복술자들은 여러 징조와 점술을 통해 신들의 뜻을 알아내려 했던 사람들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에게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엇과 함께 본래의 장소로 돌려보내야 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들은 언약궤를 자신들에게서 떠나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말씀을 아는 선지자나 율법이 없었으므로 자신들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방법을 구했습니다.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은 언약궤를 거저 보내지 말고 반드시 속건제를 드려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속건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샴(אָשָׁם)은 죄책, 배상 또는 죄책을 처리하기 위해 드리는 제사를 가리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임한 재앙이 단순한 불운이 아니라 여호와께 범한 잘못과 관련되어 있다고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속건제를 드리면 병이 낫고 여호와의 손이 자신들에게서 떠나지 않는 이유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제 여호와의 손이 자신들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다곤이 무너지고 성읍마다 같은 재앙이 일어났으므로 우연이라고만 설명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죄책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것과 참으로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은 다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재앙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다곤을 버리고 여호와만을 섬기겠다고 고백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인정했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지는 않았습니다.

사람은 죄의 결과가 괴로워지면 잘못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곧 회개는 아닙니다. 참된 회개는 벌만 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역한 죄 자체를 슬퍼하고 그 죄를 버리며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어떤 속건제를 드려야 하는지 묻자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은 블레셋 통치자들의 수에 따라 금으로 만든 독한 종기 다섯과 금쥐 다섯을 드리라고 합니다. 블레셋은 아스돗과 가사, 아스글론과 가드, 에그론이라는 다섯 주요 성읍을 중심으로 다섯 방백이 다스리는 연합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금으로 만든 종기와 쥐는 자신들에게 임한 재앙을 형상화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재앙의 모양을 본떠 속건제물로 드리면 여호와의 손이 가벼워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대 사회에는 질병이나 재앙의 형상을 만들어 신에게 바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던 종교적 방식으로 여호와께 배상하려 했습니다.

본문은 블레셋 종교 지도자들의 방법을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정당한 제사 규례로 승인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속건제는 율법에 따라 흠 없는 짐승을 드리고 필요한 배상을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금으로 종기와 쥐의 형상을 만들어 바치는 일은 모세의 율법이 명령한 제사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사람들이 제한된 지식 안에서 자신의 죄책을 인정하고 언약궤를 돌려보내도록 섭리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종교적 방식이 모두 옳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불완전한 인간의 판단까지 사용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셨다는 의미입니다.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은 블레셋 전역에 내린 재앙이 같으므로 다섯 방백을 위한 속건제도 같은 종류로 드려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어느 한 성읍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작은 자와 큰 자, 성벽이 있는 도시와 시골 마을 모두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권고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여호와께서 의로우시며 능력이 크시다는 사실을 고백하라는 뜻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이겼다는 교만한 생각을 버리고 실제로는 여호와의 손 아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은 찬송의 말을 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교만과 잘못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높이는 것입니다. 죄를 숨기면서 입술로만 하나님을 높이는 것은 참된 영광 돌림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그분의 의로운 판단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복술자들은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블레셋 사람들과 그들의 신들과 그들의 땅을 누르던 손을 가볍게 하실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확신에 찬 언약의 언어가 아니라 가능성을 말합니다. 여호와를 인격적으로 아는 사람들이 아니었으므로 그분의 자비와 약속을 확실히 붙들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던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자신들의 제물을 받으실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두려움 속에서 가능성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언약 백성은 하나님의 성품과 약속을 근거로 은혜를 구할 수 있습니다. 특히 신약의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애굽 사람들과 바로처럼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을 치신 후에야 그들이 이스라엘을 보내 주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여러 세대가 지난 후에도 주변 민족들에게 알려져 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애굽에 재앙을 내리고 이스라엘을 해방하신 일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4장에서도 블레셋 군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애굽을 재앙으로 치신 분이라는 소문을 기억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을 아는 것과 그 사실 앞에서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은 다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출애굽 이야기를 알고도 여호와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내용을 알고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마음을 완고하게 할 수 있습니다.

바로는 재앙이 임할 때마다 모세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재앙이 멈추면 다시 마음을 완고하게 했습니다. 그는 고통을 피하고 싶었지만 여호와의 주권에는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블레셋 사람들도 그 길을 반복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마음을 완고하게 한다는 것은 단지 감정이 차갑다는 뜻이 아닙니다. 분명한 하나님의 경고를 받고도 자기 뜻을 굽히지 않는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을 무너뜨리고 삶을 흔들어 깨우실 때 계속 이전의 길을 고집하는 것이 완고함입니다.

블레셋의 종교 지도자들은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를 메어 보지 않은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준비하라고 합니다. 송아지들은 어미에게서 떼어 집에 가두고, 두 암소에게 수레를 메워 언약궤와 금으로 만든 속건제물을 싣도록 했습니다.

새 수레는 다른 용도로 사용되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멍에를 메어 보지 않은 암소도 일반적인 노동에 사용되지 않은 짐승이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언약궤에 대한 특별한 존중을 나타내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에는 하나님의 뜻을 시험하려는 요소도 있었습니다. 젖 나는 암소는 본능적으로 집에 갇힌 송아지에게 돌아가려 할 것입니다. 더욱이 한 번도 멍에를 메지 않은 두 소가 서로 보조를 맞추어 정해진 길로 가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일입니다.

그들은 암소들이 언약궤를 싣고 이스라엘의 벧세메스로 곧장 가면 자신들에게 임한 재앙이 여호와께서 내리신 것임을 인정하고, 그렇지 않으면 우연히 일어난 일로 판단하겠다고 했습니다. ‘우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크레(מִקְרֶה)는 뜻밖에 일어난 사건이나 우발적인 일을 의미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여러 차례 분명한 표징을 경험하고도 마지막 확인을 원했습니다. 다곤이 두 번이나 쓰러졌고 성읍마다 같은 재앙이 일어났지만 여전히 우연의 가능성을 남겨 두었습니다. 믿지 않으려는 마음은 아무리 많은 증거를 보아도 또 다른 시험을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정한 시험에 종속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원하는 표징을 제시하며 하나님께 증명하라고 요구할 권리는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실험하여 확률을 확인하는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이 특별한 상황에서 블레셋 사람들이 세운 조건을 사용하셔서 재앙이 우연이 아니며 자신이 살아 계신 하나님임을 분명히 드러내십니다. 이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를 일반적으로 허용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긍휼과 섭리를 보여 줍니다.

언약궤의 귀환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였습니다(삼상 6:10-18)

블레셋 사람들은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이 말한 대로 행했습니다.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었습니다. 수레 위에는 여호와의 궤와 금쥐와 독한 종기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실었습니다.

암소들은 벧세메스로 가는 길로 곧장 나아갔습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큰길을 따라갔습니다. 송아지들을 집에 둔 어미 소들은 울면서 걸었습니다. 본문이 암소들의 울음을 기록한 것은 그들이 자연적인 본능을 느끼면서도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정해진 길을 갔다는 사실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암소들은 송아지에게 돌아가고 싶은 본능이 있었을 것입니다. 멍에를 메어 본 적도 없고 수레를 끌어 본 경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두 암소는 함께 보조를 맞추어 이스라엘 땅을 향해 곧장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그들의 길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언약궤의 귀환은 이스라엘 군대가 블레셋을 공격하여 되찾은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사무엘이 군사를 일으켜 구출한 것도 아니고 제사장들이 협상을 통해 돌려받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으로 언약궤를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궤를 지키지 못했고 되찾을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언약과 영광을 스스로 보존하셨습니다. 언약궤의 귀환은 이스라엘의 공로나 군사력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구원도 이와 같습니다. 죄인은 자신의 힘으로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사람은 스스로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시고 구원의 길을 여셔야 합니다. 구원은 인간이 하나님을 되찾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죄인을 찾아오시는 은혜입니다.

블레셋의 다섯 방백은 암소들이 가는 모습을 벧세메스 경계까지 따라갔습니다. 그들은 소들이 정말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는지 확인했습니다. 암소들은 그들이 정한 조건대로 움직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자신들에게 임한 재앙이 여호와의 손에서 왔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골짜기에서 밀을 베고 있었습니다. 밀을 거두는 평범한 일상 가운데 언약궤가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눈을 들어 언약궤를 보고 크게 기뻐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영광이 완전히 떠난 것처럼 보였던 일곱 달이 지나고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언약궤가 돌아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때로 우리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중에 찾아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언약궤를 되찾기 위해 전쟁을 준비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밭에서 밀을 베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계산과 노력보다 앞서 일하시고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벧세메스는 유다 지파의 경계에 있는 성읍이며 레위 사람들에게 주어진 성읍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따라서 그곳에는 레위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본문도 레위 사람들이 언약궤를 수레에서 내려놓았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궤가 돌아올 장소까지 섭리 가운데 인도하셨습니다.

수레는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이르러 큰 돌이 있는 곳에 멈췄습니다. 이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와는 다른 인물입니다. 당시에는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 있으므로 두 사람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수레의 나무를 패고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렸습니다. 언약궤를 운반한 수레와 암소들이 곧바로 제사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들은 언약궤의 귀환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이고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레위 사람들은 여호와의 궤와 금으로 만든 물건들이 담긴 상자를 내려 큰 돌 위에 두었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그날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렸습니다. 기쁨은 자연스럽게 예배로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 보일 가장 바른 반응은 예배입니다. 은혜를 자신의 만족으로만 소비하지 않고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려야 합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밀을 거두던 일을 잠시 멈추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블레셋의 다섯 방백은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본 후 그날 에그론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암소들이 곧장 벧세메스로 가는 일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언약궤를 맞아 제사를 드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자신들의 땅에 내린 재앙이 우연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들이 여호와를 믿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증거를 보았지만 블레셋으로 돌아갔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확실한 증거를 보는 것과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믿음은 다릅니다. 믿음은 단순히 사실을 확인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금으로 만든 독한 종기는 블레셋의 다섯 주요 성읍, 곧 아스돗과 가사와 아스글론과 가드와 에그론을 대표했습니다. 금쥐들은 성벽이 있는 성읍과 시골 마을을 포함하여 블레셋 전역에 임한 재앙을 상징했습니다. 본문에는 금쥐의 수와 범위에 관한 표현이 다소 복합적으로 나타나지만, 블레셋의 넓은 지역이 여호와의 손 아래 있었다는 핵심은 분명합니다.

언약궤를 내려놓았던 큰 돌은 본문이 기록될 당시까지 여호수아의 밭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 돌은 하나님의 궤가 돌아온 사건을 기억하게 하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돌을 볼 때마다 자신들이 언약궤를 되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스스로 돌아오게 하셨음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는 것은 신앙에서 중요합니다. 인간은 고난은 오래 기억하면서 은혜는 쉽게 잊습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어떻게 인도하고 건지셨는지를 기억하면 현재의 어려움 속에서도 그분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은혜를 기념하는 표지 자체를 우상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돌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억하게 하는 수단일 뿐 하나님 자체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부적처럼 이용했던 잘못을 기억해야 합니다. 은혜의 표지는 하나님을 가리켜야 하며 그 자체가 하나님을 대신해서는 안 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새 수레에 언약궤를 실어 보냈습니다. 이것은 모세의 율법이 이스라엘에게 명령한 운반 방식은 아니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언약궤는 고핫 자손이 채를 사용하여 메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은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이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불완전한 방법을 사용하여 언약궤를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이 사건이 이후 이스라엘 사람들도 언약궤를 수레에 실어도 된다는 허락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를 받지 못한 이방인의 무지를 참으신 것과 말씀을 받은 언약 백성이 고의로 명령을 어기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받은 계시와 특권이 클수록 책임도 무겁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는 경외함으로 서야 합니다(삼상 6:19-21)

벧세메스 사람들은 언약궤가 돌아온 것을 보고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심판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벧세메스 사람들을 치셨는데, 그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보았기 때문입니다.

개역개정은 전통적인 히브리어 본문을 따라 하나님께서 백성 가운데 오만 칠십 명을 치셨다고 번역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의 숫자는 구약성경의 본문비평에서 오래 논의되어 온 어려운 부분입니다. 히브리어 표현과 일부 고대 사본 및 번역의 차이로 인해 어떤 번역은 칠십 명으로 제시하기도 합니다.

정확한 사망자 수에 관한 본문상의 문제는 신중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상당수의 사람이 심판받았으며 그 일로 백성이 크게 애곡했다는 본문의 중심 내용은 분명합니다. 숫자의 차이가 이 사건의 신학적 의미를 바꾸지는 않습니다.

언약궤를 ‘들여다보았다’는 행위의 정확한 모습에도 논의가 있습니다. 개역개정은 언약궤 안을 들여다본 것으로 번역합니다. 히브리어 표현은 언약궤를 함부로 바라보았거나 거룩한 경계를 침범한 행동으로 이해될 여지도 있습니다. 어떤 방식이었든 그들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거룩한 질서를 무시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민수기에서는 고핫 자손이라도 성물을 직접 보거나 만지면 죽을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언약궤는 인간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종교적 유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와 언약을 나타내는 성물이었으므로 정해진 방식에 따라 다루어야 했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언약궤의 귀환을 기뻐했지만 기쁨이 경외함을 대신하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돌아오셨다는 사실은 기쁜 일이지만, 돌아오신 하나님은 여전히 거룩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다고 해서 거룩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를 함부로 다루었을 때 하나님의 손이 그들을 치셨습니다. 그런데 언약 백성인 벧세메스 사람들이 언약궤를 함부로 다루었을 때에도 심판이 임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에게만 거룩하고 자기 백성에게는 가볍게 대해도 되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언약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과 거룩함을 더 많이 알았으므로 더 큰 책임을 가집니다. 선택받았다는 사실은 죄를 지어도 심판받지 않는 특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고 그 말씀에 순종하도록 부름받았다는 뜻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무지 가운데 새 수레를 만들어 언약궤를 보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수레를 사용하셨습니다. 반면 율법과 성소 가까이에 살던 벧세메스 사람들은 거룩한 경계를 침범하여 심판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맡기신 빛과 책임에 따라 판단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분을 가볍게 대할 근거가 아닙니다. 은혜를 깊이 알수록 더욱 경외해야 합니다. 값없이 받은 은혜라고 해서 값싼 은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셨다는 사실을 안다면 죄를 가볍게 여길 수 없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하나님의 큰 심판을 보고 애곡하며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무엘상 6장의 핵심 질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인이 어떻게 설 수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거룩하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도시(קָדוֹשׁ)는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시며 죄와 악으로부터 완전히 순결하신 분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그분의 여러 성품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 능력과 지혜도 모두 거룩합니다.

죄인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의 공로나 의로 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대할수록 자신의 죄와 부정함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의 거룩한 능력을 경험한 후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누가 능히 서리요”라는 질문에 인간은 자기 힘으로 답할 수 없습니다. 종교적인 열심이나 도덕적인 행위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을 만들어 주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중보자와 속죄의 길을 마련해 주셔야 합니다.

구약의 제사장과 희생 제사는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중보와 속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짐승의 피는 죄를 완전하게 제거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장차 오실 완전한 대제사장과 희생 제물을 바라보게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신 완전한 속건제물이십니다. 이사야는 고난받는 종의 생명이 속건제물로 드려질 것을 말합니다. 사무엘상 6장에서 블레셋이 드린 금 형상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완전한 속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에서 인간의 죄책은 마침내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만 온전히 해결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피로 우리 죄를 씻으시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롭고 산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입고 하나님 앞에 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속죄입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정죄의 두려움에서는 해방되었지만 자녀로서 아버지를 경외해야 합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되 경솔하거나 무례하게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이어서 “그가 우리에게서 누구에게로 올라가실까”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은 “누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가”라는 바른 질문에서 시작했지만, 그들이 선택한 해결책은 하나님의 궤를 자신들에게서 다른 곳으로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도 언약궤를 자신들에게서 떠나보내려 했습니다. 이제 언약 백성인 벧세메스 사람들도 같은 반응을 보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서 회개하며 바른 관계를 회복하기보다 하나님의 임재를 다른 곳으로 옮겨 위험을 피하려 했습니다.

죄인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길을 찾기보다 하나님을 멀리 보내려 할 때가 많습니다. 말씀을 듣고 죄가 드러나면 회개하기보다 그 말씀을 전한 사람을 피합니다. 양심이 불편해지면 삶을 바꾸기보다 예배와 교회에서 멀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거리를 둔다고 죄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기럇여아림 주민들에게 전령을 보내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돌려보냈으니 내려와 가져가라고 요청했습니다. 언약궤는 다음 장에서 기럇여아림으로 옮겨져 아비나답의 집에 머물게 됩니다.

사무엘상 6장은 언약궤가 실로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실로의 제사장 체제는 이미 심판받고 있었습니다. 언약궤는 새로운 장소로 이동하고 이스라엘은 오랜 시간 영적 회복을 기다리게 됩니다. 외적인 언약궤의 귀환만으로 이스라엘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언약궤의 물리적 귀환만이 아니라 마음이 여호와께 돌아오는 일이었습니다. 이어지는 사무엘상 7장에서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분만 섬기라고 촉구합니다. 참된 회복은 거룩한 물건을 되찾는 데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는 데서 시작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무엘상 6장은 언약궤가 이스라엘로 돌아온 것이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였음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구출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암소들의 걸음까지 다스리시며 자신의 언약과 영광을 스스로 보존하셨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언약궤 앞에서 벧세메스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큰 기쁨이지만 동시에 거룩한 두려움으로 받아야 합니다. 은혜는 하나님을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허락이 아닙니다. 값없이 받은 구원일수록 그 은혜의 값이 얼마나 큰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라는 질문에 대한 복음의 대답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자신의 의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지만 그리스도의 피와 의를 의지하여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담대함은 경솔함이 아니라 감사와 경외가 담긴 담대함입니다.

고통만 피하려 했던 블레셋 사람들처럼 행동하지 말고 죄 자체를 버리십시오. 하나님의 거룩함이 불편하다고 그분을 멀리 보내려 했던 벧세메스 사람들처럼 물러서지 마십시오. 완전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며, 기쁨과 경외함으로 그분을 섬기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무엘상 5장 주해와 강해

 

언약궤는 사로잡혔지만 하나님은 사로잡히지 않으셨습니다

사무엘상 5장은 언약궤가 블레셋에게 빼앗긴 뒤 일어난 일을 기록합니다. 이스라엘의 군대도 제사장도 등장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홀로 다곤을 무너뜨리고 블레셋의 성읍들을 심판하십니다. 언약궤가 포로가 된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로 포로가 된 것은 블레셋과 그들의 우상이었습니다. 이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조종되거나 우상 곁에 놓일 수 있는 분이 아니며, 자신의 거룩함과 영광을 스스로 지키시는 유일한 주권자이심을 깨닫기 원합니다.

여호와 앞에 엎드러진 다곤은 다시 일어설 수 없었습니다(삼상 5:1-5)

사무엘상 4장에서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크게 패했습니다. 보병 삼만 명이 죽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전사했으며, 하나님의 언약궤마저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겼습니다. 전쟁의 소식을 들은 엘리는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죽었고, 비느하스의 아내는 아들을 낳으며 그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는 언약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고 탄식했습니다.

사무엘상 5장은 이가봇의 탄식 이후 언약궤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궤를 에벤에셀에서 아스돗으로 가져갔습니다. 에벤에셀은 이스라엘이 진을 쳤던 곳이고 아스돗은 블레셋의 대표적인 다섯 성읍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블레셋은 아스돗을 비롯하여 가사와 아스글론, 가드와 에그론을 중심으로 연합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고대 근동의 전쟁에서 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신상이나 종교적 상징물을 빼앗는 것은 단순한 전리품 획득 이상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승리한 나라의 신이 패배한 나라의 신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과시하는 행동으로 여겨졌습니다. 블레셋 사람들도 이스라엘의 언약궤를 빼앗은 일을 자신들의 신 다곤이 여호와를 이긴 증거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다곤의 신전으로 가져가 다곤 곁에 두었습니다. 언약궤를 다곤 신상 옆에 둔 것은 여호와를 다곤의 지배 아래 들어온 포로 신처럼 취급한 행동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도 이제 블레셋의 신전에 종속되었다는 승리의 표시로 삼으려 했던 것입니다.

다곤은 블레셋 사람들이 섬긴 주요 신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다곤이라는 이름의 어원을 곡식과 관련하여 이해하는 견해가 있으며, 물고기와 연결하는 대중적인 해석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의 정확한 어원과 신의 성격에 대해서는 논의가 있으므로 어느 하나를 확정하여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다곤의 외형이나 기원이 아니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다곤의 신전 안에 언약궤를 가져다 놓았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실제로 붙잡아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거룩한 표징이었지만 하나님 자신과 동일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작은 상자 안에 갇혀 이동하시는 분도 아니었습니다.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하나님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져오면 하나님을 자신들의 계획에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블레셋은 언약궤를 빼앗으면 이스라엘의 하나님까지 소유하고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민족은 서로 적대했지만 하나님을 자신들의 욕망에 따라 다루려 했다는 점에서는 닮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궤를 승리의 부적처럼 사용했고, 블레셋은 정복한 신의 전리품처럼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종교적 욕망에도, 블레셋의 승리 선언에도 붙들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어느 민족의 소유물이 아니며 인간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아스돗 사람들이 이튿날 일찍 일어나 다곤의 신전으로 들어갔을 때 예상하지 못한 장면을 보았습니다.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아 있었습니다. 다곤이 우연히 기울어진 정도가 아니라 경배하는 사람처럼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러져 있었습니다.

‘엎드러지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팔(נָפַל)은 넘어지다, 쓰러지다라는 뜻입니다. 사무엘상 3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떨어지지 않았지만 다곤은 하나님의 궤 앞에서 땅에 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굳게 서고 우상은 쓰러집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다곤 앞에 두었다고 생각했지만, 아침이 되자 다곤이 언약궤 앞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지가 뒤집혔습니다. 포로가 된 것처럼 보였던 여호와의 궤 앞에 승리자라고 여긴 다곤이 굴복했습니다.

다곤이 엎드러진 것은 생명이 없는 우상이 스스로 움직였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권적인 능력으로 다곤 신상을 쓰러뜨리셨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모두 잠든 밤, 이스라엘 군대의 도움 없이 하나님께서 홀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패했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패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심판하기 위해 언약궤가 빼앗기도록 허락하셨을 뿐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이 여호와를 다곤의 신전에 가두었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신전을 자신의 주권을 드러내는 심판의 장소로 바꾸셨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쓰러진 다곤을 다시 일으켜 본래 자리에 놓았습니다. 이 장면에는 우상의 무력함이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다곤은 자신을 믿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기는커녕 자신이 넘어졌을 때 인간의 손에 의해 일으킴을 받아야 했습니다.

참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일으키시지만 거짓 신은 숭배자가 일으켜 주어야 합니다. 참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고 붙드시지만 우상은 인간이 만들고 관리해야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신을 만들고, 넘어지면 일으키며, 깨지면 고쳐야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을 형상화한 물건에 불과합니다.

우상의 본질은 반드시 나무나 돌로 만든 형상에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고, 더 사랑하며, 내 삶의 안전과 가치를 보장해 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돈과 성공, 권력과 명예, 가족과 건강도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면 우상이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이 자신을 지켜 줄 것이라고 믿지만 실제로는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바칩니다. 재산이 나를 지켜 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재산을 잃지 않으려고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명예가 나를 높일 것이라고 믿으면서 명예가 떨어질까 두려워 진실을 숨깁니다. 우상은 약속한 자유를 주지 않고 그것을 섬기는 사람을 종으로 만듭니다.

이튿날 아침 블레셋 사람들이 다시 일찍 일어나 신전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번에도 다곤은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있었습니다. 첫날의 일을 우연한 사고라고 생각했을 수 있지만 똑같은 일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더구나 두 번째에는 다곤의 머리와 두 손목이 끊어져 문지방에 놓여 있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머리는 권위와 지배력을, 손은 능력과 행동을 상징합니다. 다곤의 머리와 손이 잘렸다는 것은 그의 통치와 능력이 완전히 무너졌음을 보여 줍니다. 다곤은 생각하고 명령할 권세도, 행동하고 구원할 능력도 없는 우상임이 드러났습니다.

전쟁에서 패한 적장의 머리와 손을 베는 행위는 승리와 완전한 정복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다곤의 머리와 손이 잘려 문지방에 놓인 장면은 다곤이 여호와 앞에서 패배한 적처럼 묘사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전리품으로 가져왔지만 실제로 전리품처럼 쓰러진 것은 다곤이었습니다.

본문은 다곤의 몸뚱이만 남았다고 기록합니다. 이 표현의 세부적인 의미와 본문 형태에 관해서는 논의가 있지만, 다곤 신상이 치명적으로 파괴되었다는 핵심은 분명합니다. 첫날에는 다곤을 다시 세울 수 있었지만 두 번째에는 온전한 모습으로 되돌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한 번에 모든 심판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처음에는 다곤을 넘어뜨리셨고, 그들이 다시 세우자 다음에는 머리와 손을 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복적인 표징을 통해 다곤의 무력함을 분명히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은 이 사건을 보고 다곤을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곤의 머리와 손이 놓였던 문지방을 밟지 않는 관습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의 무력함을 보여 주셨지만 그들은 회개하기보다 새로운 종교적 금기를 추가했습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분명한 경고 앞에서도 회개보다 다른 설명을 찾습니다. 우상이 쓰러졌다면 우상을 버려야 하지만 사람들은 우상을 다시 세우고, 우상이 무너진 자리를 또 다른 종교적 전통으로 보호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워지지 않으면 증거를 많이 본다고 저절로 믿음에 이르지 않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의 능력을 부정할 수 없었지만 여호와를 자신들의 하나님으로 섬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은 다릅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에 관한 정보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다곤과 언약궤를 같은 신전에 나란히 둘 수 없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많은 신 가운데 한 분으로 다곤 옆에 자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다른 모든 신은 거짓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과 영광을 나누지 않으십니다.

우리도 하나님과 우상을 마음속에 함께 모시려 할 수 있습니다. 주일에는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평일에는 돈과 성공을 최고의 가치로 섬깁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서도 내 욕망과 충돌하면 욕망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한쪽 구석을 차지하는 여러 대상 가운데 하나가 되기를 거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들어오실 때 다곤은 쓰러져야 합니다. 자아의 왕좌와 탐욕의 제단, 사람의 인정에 대한 집착이 하나님 앞에 엎드러져야 합니다. 쓰러진 다곤을 다시 일으켜 세우면서 하나님도 함께 섬길 수는 없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블레셋의 성읍들을 무겁게 누르셨습니다(삼상 5:6-9)

다곤의 머리와 손이 끊어진 뒤 본문은 여호와의 손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더하사”라고 기록합니다. 다곤의 손은 잘렸지만 여호와의 손은 능력 있게 역사했습니다.

‘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드(יָד)는 행동하는 능력과 권세를 나타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언약궤를 빼앗았고 다곤을 다시 세웠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손과 우상의 손을 넘어서는 여호와의 손이 그들을 심판하기 시작했습니다.

본문은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임했다고 말합니다. ‘엄중하다’ 또는 ‘무겁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베드(כָּבֵד)는 무겁게 누르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영광을 뜻하는 카보드(כָּבוֹד)와 같은 어근에 속합니다.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것처럼 보였지만 블레셋 땅에서는 하나님의 무거운 손이 그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볍게 여겼지만 하나님의 손은 그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웠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은 결국 그분의 심판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스돗과 그 지역을 치시며 독한 종기의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개역개정이 ‘독한 종기’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표현이 정확히 어떤 질병을 가리키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종양이나 부어오르는 질환, 몸의 특정 부위에 생기는 고통스러운 병으로 이해됩니다.

일부 고대 번역과 이어지는 6장의 금쥐 이야기를 근거로 전염병의 구체적인 종류를 추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이 질병의 의학적 명칭을 밝히는 데 목적을 두지 않으므로 지나치게 특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견디기 어려운 재앙을 받았고 그 재앙이 여호와의 손에서 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근거로 오늘날 발생하는 모든 질병과 재난을 특정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형벌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이 어떤 사건을 하나님의 특별한 심판이라고 분명히 해석할 때에는 그렇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계시받지 않은 개별적인 고난의 원인을 임의로 판단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의 상태를 그 사람이나 부모의 특정한 죄와 직접 연결하는 해석을 거부하셨습니다. 고난을 당한 사람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정죄가 아니라 사랑과 돌봄입니다. 우리는 모든 고난이 죄가 들어온 세상과 관련되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특정인의 고난을 함부로 죄의 형벌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사무엘상 5장은 블레셋의 재앙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밝힙니다. 하나님께서는 다곤을 무너뜨리는 표징을 보여 주셨지만 블레셋 사람들은 우상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계속 가볍게 여기자 심판이 사람들의 몸과 성읍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아스돗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을 보고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와 함께 있게 하지 못할지라 그의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다곤의 패배와 자신들에게 임한 재앙이 우연이 아니라 여호와의 손에서 왔음을 인정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능력을 부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믿고 다곤을 버리는 대신 언약궤를 자신들에게서 멀리 보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견딜 수 없는 위협으로 느꼈습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서 두 가지 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합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은혜를 구하거나, 하나님께 자신에게서 떠나 달라고 요구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회개보다 거리를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아스돗 사람들은 블레셋 방백들을 불러 모으고 이스라엘 신의 궤를 어떻게 할 것인지 물었습니다. 방백들은 언약궤를 가드로 옮기자고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재앙의 원인이 언약궤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문제를 다른 지역으로 옮기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죄의 근원을 제거하기보다 불편한 결과만 다른 곳으로 옮기려 합니다. 마음의 탐욕은 그대로 둔 채 환경을 바꾸고, 잘못된 선택을 인정하기보다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넘깁니다. 그러나 장소를 바꾼다고 하나님 앞에서 해결되지 않은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언약궤가 가드에 도착하자 여호와의 손이 그 성읍에도 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성읍을 치셔서 매우 큰 환난이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작은 자와 큰 자가 모두 독한 종기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작은 자와 큰 자’라는 표현은 사회적 지위나 나이에 상관없이 재앙이 성읍 전체에 임했다는 뜻입니다. 왕족과 평민,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가 모두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었습니다. 인간 사회에는 높고 낮음이 있지만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누구도 특권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아스돗 사람들이 언약궤를 가드로 옮겼지만 여호와의 손도 가드에서 역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특정한 지역에 제한된 신이 아니셨습니다. 고대 사람들은 신들의 권세가 특정한 민족과 영토에 묶여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이스라엘 땅에서만 능력을 행사하는 지역 신이 아니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블레셋, 성소와 이방 신전을 모두 다스리십니다. 언약궤가 실로를 떠났다고 하나님의 권세가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아스돗에서 가드로 옮겨져도 하나님의 손은 동일하게 역사했습니다. 온 땅은 여호와께 속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궤가 자신들의 진영에 있으면 하나님도 반드시 자신들 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블레셋은 언약궤를 자신들의 영토로 옮기면 그 안에 담긴 신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장소나 민족, 물건에 붙들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교회 건물 안에만 제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당뿐 아니라 우리의 가정과 일터, 경제와 정치, 은밀한 생각과 관계까지 다스리십니다. 예배당에서만 경건한 모습을 보이고 삶의 다른 영역에서는 자기 뜻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손이면서 죄를 심판하는 손입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는 강한 손으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지셨습니다. 같은 손이 완고한 바로와 애굽에는 심판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무엘상에서도 하나님의 손은 언약을 멸시한 이스라엘을 징계하고 우상을 높인 블레셋을 심판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 자체로 모든 사람에게 위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에게 그분의 전능은 보호와 소망이지만,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운 심판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능력이 있으신가가 아니라 우리가 그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입니다.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은혜의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무조건적인 심판 속에 버려 두지 않으시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화목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보내려는 외침은 구원의 기도가 되지 못했습니다(삼상 5:10-12)

가드에서도 큰 재앙이 일어나자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에그론으로 보냈습니다. 언약궤는 아스돗에서 가드로, 가드에서 에그론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러나 언약궤가 이동할 때마다 재앙도 따라갔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문제의 장소만 바꾸었을 뿐 하나님 앞에서 태도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언약궤가 에그론에 도착하자 에그론 사람들이 크게 부르짖었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 한다”고 외쳤습니다. 아스돗과 가드에서 일어난 일이 이미 알려졌으므로 에그론 사람들은 언약궤를 받아들이는 순간 죽음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언약궤는 더 이상 자랑스러운 전리품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다곤의 승리를 증명하는 기념물처럼 신전에 가져왔지만 이제는 누구도 곁에 두고 싶지 않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이용해 자신을 높이려 하면 그 영광은 결국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다가옵니다.

에그론 사람들은 블레셋의 모든 방백을 모아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본래 있던 곳으로 보내라고 요구했습니다. 자신들과 백성이 죽음을 면하게 해 달라고 외쳤습니다. 온 성읍에 죽음의 환난이 임했고 하나님의 손이 매우 엄중했습니다.

여기에서도 ‘엄중하다’는 말은 여호와의 손이 무겁게 임했다는 뜻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옮길 수는 있었지만 하나님의 손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임재를 물리적인 거리로 통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디에나 계시며 모든 사람의 마음과 행동을 아십니다.

죽지 않은 사람들도 독한 종기로 고통을 받았고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습니다. 블레셋 성읍의 환호는 사라지고 비명만 남았습니다. 이스라엘을 이겼다고 기뻐했던 승리의 도시는 죽음과 고통의 성읍으로 변했습니다.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다”는 표현은 그들의 고통이 극심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들이 여호와께 회개하며 구원을 구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했지만 하나님과 화목하기를 구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돌려보내어 자신들에게서 멀리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과 죄에서 돌이키고 싶은 마음은 같지 않습니다. 사람은 죄의 결과는 싫어하면서 죄 자체는 계속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피하고 싶지만 하나님을 주님으로 섬기기는 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바로도 재앙이 임할 때마다 모세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재앙이 그치면 마음을 완고하게 하고 약속을 뒤집었습니다. 그는 고통이 사라지기를 원했지만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하기는 원하지 않았습니다. 블레셋 사람들도 여호와의 능력을 경험했지만 다곤을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오지는 않았습니다.

참된 회개는 단순히 벌을 두려워하는 감정이 아닙니다. 죄가 하나님의 거룩함과 사랑을 거스른 것임을 인정하고 죄를 버리며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죄의 결과만 제거해 달라고 구하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죄의 지배에서 구원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는 죄인에게 두려움을 일으킵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여호와의 영광을 보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의 거룩한 능력을 경험한 후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떠나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죄인을 단순히 멀리 쫓아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죄를 깨닫게 하여 은혜로 나오게 하는 데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보내라”고 외쳤지만, 복음은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내게로 오라”고 부르신다는 소식입니다. 죄인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갈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중보자를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죄인 사이의 화목을 이루셨습니다.

사무엘상 5장의 언약궤 사건을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예표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정경 전체의 관점에서 이 사건은 우상을 무너뜨리고 자신의 영광을 스스로 지키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보여 줍니다. 이 통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궁극적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세상의 권세에 패배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그분을 조롱했고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패배가 아니라 죄와 사망과 악의 권세를 무너뜨린 승리였습니다.

다곤의 머리와 손이 언약궤 앞에서 끊어진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장 해제하시고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승리는 단지 원수를 파괴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원수 되었던 죄인을 회개시켜 하나님의 자녀로 삼는 구원의 승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땅에서도 자신의 영광을 지키셨지만, 그들에게 언약궤의 거룩함을 알게 하시는 과정에서 즉시 모두를 멸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다곤을 쓰러뜨리고 재앙을 단계적으로 확대하시며 그들이 잘못을 깨달을 기회를 주셨습니다. 심판 속에서도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영원히 죄를 허용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경고를 받고도 우상을 다시 세우며 회개를 미루면 심판은 더욱 무거워집니다. 다곤이 처음 쓰러졌을 때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께 돌아왔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곤을 다시 세웠고 마침내 성읍 전체가 고통을 겪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삶의 우상을 흔드실 때 그것을 다시 세우려 할 수 있습니다. 돈과 성공에 대한 확신이 무너졌는데도 더 강하게 붙들고, 인간관계가 우상이었음을 깨달았는데도 하나님보다 사람의 인정에 더 매달립니다. 하나님께서 무너뜨리신 다곤을 다시 세우는 일은 결국 더 깊은 속박을 가져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좋은 것을 무조건 빼앗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하여 우리를 종으로 만드는 우상을 무너뜨리십니다. 우상이 쓰러지는 일은 아프지만 그것은 우리를 참된 자유와 예배로 이끄시는 은혜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을 피하려 하지 말고 그 손 아래 겸손히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심판의 손에서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못 자국 난 그리스도의 손을 붙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손은 정죄가 아니라 용서와 회복의 손이 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무엘상 5장은 언약궤가 사로잡혔어도 하나님은 결코 사로잡히지 않으셨음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모두 물러난 블레셋 땅에서 하나님께서는 홀로 다곤을 쓰러뜨리고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능력으로 유지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영광도 인간의 도움으로 보존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의 다곤을 하나님과 나란히 세워 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돈과 성공, 가족과 명예에 조금 더 보태는 종교적 장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님이 되시면 다른 모든 것은 그분의 뜻 아래 놓여야 합니다. 무너진 우상을 다시 세우지 말고 그것이 차지했던 자리를 하나님께 내어 드려야 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을 멀리 보내려 했습니다. 우리는 고통만 사라지기를 구하는 데 머물지 말고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참된 회개는 하나님의 손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 손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인간의 실패와 세상의 악이 하나님의 영광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모든 우상은 마침내 주님 앞에 엎드러질 것입니다. 홀로 영광받으실 하나님만을 예배하며, 그분의 말씀 아래 겸손히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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