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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2장 주해와 강해

거룩하신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낮추고 충실한 종을 세우십니다

사무엘상 2장은 한나의 찬송으로 시작하여 엘리 가문에 대한 심판 선언으로 끝납니다. 한나가 노래한 역전의 하나님은 실제 역사 속에서 교만한 제사장들을 낮추시고 어린 사무엘을 높이십니다. 이 장은 거룩한 직분이 인간의 죄를 가려 주지 못하며,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멸시하는 자를 심판하시고 자신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는 종을 세우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살피고, 은혜로 받은 직분과 예배를 거룩하게 지켜야 함을 깨닫기 원합니다.

인간의 높고 낮음을 결정하시는 하나님(삼상 2:1-10)

사무엘상 1장에서 한나는 아들을 달라고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기억하시고 사무엘을 주시자 한나는 약속대로 아이를 실로에 데려와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사무엘상 2장은 바로 그 자리에서 드린 한나의 기도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한나의 기도는 단순히 아들을 얻은 어머니의 개인적인 감사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의 노래는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 강한 자와 약한 자, 죽음과 생명, 인간의 교만과 하나님의 왕권을 아우르는 장엄한 신앙고백으로 확장됩니다.

한나는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라고 노래합니다. 한나의 기쁨은 사무엘 자체에만 있지 않고 사무엘을 주신 여호와께 있습니다. 그는 “아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한다”고 하지 않고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한다”고 고백합니다. 선물을 주신 하나님보다 선물 자체를 더 사랑한다면 그 선물은 쉽게 우상이 됩니다. 한나는 응답을 받았지만 응답에 머물지 않고 응답하신 하나님께로 시선을 돌립니다.

‘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케렌(קֶרֶן)은 동물의 힘과 위엄을 상징합니다. “내 뿔이 높아졌다”는 말은 한나가 다른 사람을 지배할 힘을 얻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수치 속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던 한나에게 하나님께서 새로운 힘과 존귀를 주셨다는 고백입니다. 브닌나의 조롱 앞에서 입을 열지 못했던 한나가 이제 원수들을 향하여 입을 크게 엽니다. 그러나 그의 승리는 자신이 강해진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하는 데 있습니다.

한나의 기도에는 “여호와로 말미암아”라는 고백이 반복됩니다. 한나를 높인 것은 그의 공로나 끈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는 자신의 기도 능력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서원을 지켰기 때문에 복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기쁨과 존귀와 구원이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고백합니다.

개혁주의 신앙의 중심에는 이러한 하나님 중심성이 있습니다. 인간의 구원과 회복은 인간의 가능성이나 공로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찾아오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낮은 자를 들어 올리십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이유도 믿음이 남보다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믿음 자체도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의 자랑은 자신에게 있지 않고 오직 주님께 있습니다.

한나는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거룩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도시(קָדוֹשׁ)는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시며 도덕적으로 완전하신 분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인간보다 조금 더 능력 있고 선한 존재가 아닙니다.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한 창조주이며 모든 존재와 가치의 기준이십니다.

하나님은 또한 반석이십니다. 반석에 해당하는 추르(צוּר)는 변하지 않는 견고함과 피난처를 나타냅니다. 한나의 형편은 오랫동안 흔들렸지만 하나님은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의 사랑은 한계가 있고 세상의 평가는 수시로 바뀌지만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은 변하지 않습니다. 성도의 안전은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데 있지 않고 변하지 않는 하나님께 피하는 데 있습니다.

거룩하고 견고하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교만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한나는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라고 경고합니다. 이 말은 한나를 격분하게 했던 브닌나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한나의 노래는 개인적인 복수를 위한 선언을 넘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높이는 모든 사람을 향합니다.

교만은 자신을 크게 생각하는 감정만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도 자신의 인생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태도이며, 하나님께 받은 것을 자신의 공로처럼 여기는 마음입니다. 브닌나는 자녀라는 선물을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는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제사장 직분을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는 특권으로 사용했습니다. 서로 다른 모습처럼 보이지만 모두 하나님께 받은 것을 자신을 높이는 데 사용한 교만입니다.

한나는 여호와를 “지식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겉모습만 보지 않으시고 마음과 동기를 아십니다. 사람은 행동의 일부만 보고 평가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감추어진 욕망까지 살피십니다. 사람에게 경건하게 보이면서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의 유익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직분을 수행하고 종교적 언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마음의 부패가 가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행위를 정확하게 평가하신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판단에는 편견과 실수가 있지만 하나님의 판단에는 오류가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악한 사람이 인정받고 정직한 사람이 손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의 하나님께서 모든 행동을 달아 보시므로 마지막 판단은 반드시 의롭습니다.

한나는 이어지는 노래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놀라운 역전을 선포합니다.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두릅니다. 풍족하던 자는 양식을 얻기 위해 품을 팔지만 주리던 자는 다시 주리지 않습니다. 임신하지 못하던 여인은 일곱을 낳지만 많은 자녀를 둔 여인은 쇠약해집니다.

여기서 ‘일곱’은 반드시 한나가 실제로 일곱 자녀를 낳았다는 뜻이라기보다 충만함을 나타내는 시적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본문 뒤에서는 한나가 사무엘 외에 세 아들과 두 딸을 낳았다고 기록합니다. 한나의 개인적인 경험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형편을 뒤집으시는 보편적인 통치의 표지가 됩니다.

하나님의 역전은 단순히 가난한 사람과 부자의 자리를 기계적으로 바꾸는 일이 아닙니다. 모든 가난한 사람이 자동으로 부자가 되고 모든 부자가 반드시 몰락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핵심은 인간의 힘과 현재의 형편이 영원하지 않으며 높고 낮음을 결정하는 최종 권한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지금 가진 것이 영원할 것처럼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현재의 연약함이 영원할 것처럼 절망해서도 안 됩니다. 용사의 활이 꺾일 수 있고 넘어진 자가 다시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고정된 평가와 가능성을 넘어 일하십니다.

한나는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라고 노래합니다. 스올(שְׁאוֹל)은 구약에서 죽은 자들이 내려가는 영역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이 구절은 문맥상 생명과 죽음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선언합니다. 여기에서 완성된 형태의 부활 교리를 직접 끌어내는 것은 신중해야 하지만, 죽음조차 하나님의 통치 밖에 있지 않다는 고백은 이후 성경에서 드러날 부활 소망을 바라보게 합니다.

생명은 우연히 발생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출생과 죽음, 건강과 질병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이 고백은 인간의 생명을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자신의 생명과 이웃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맡겨진 날들을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십니다. 한나는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고 궁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들어 올려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신다고 노래합니다. 진토와 거름더미는 인간적으로 가장 낮고 비참한 자리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있는 사람도 존귀한 자리에 앉히실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며 하나님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한나가 믿은 하나님은 한 가정의 문제만 해결하는 지역 신이 아닙니다. 세계의 기초를 세우시고 모든 역사를 통치하시는 창조주입니다. 한나의 기도는 개인적인 감사에서 우주적인 하나님의 통치로 확장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지만 악인들을 흑암 중에서 잠잠하게 하십니다. ‘거룩한 자들’은 죄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 안에 있는 신실한 백성을 가리킵니다. 이들이 보존되는 이유는 자신의 힘 때문이 아닙니다. 한나는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라고 선언합니다.

성도의 견인은 인간의 의지가 강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붙드시고 끝까지 지키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성도는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넘어질 때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사람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결심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를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합니다.

한나의 노래는 갑자기 왕과 기름 부음 받은 자에 대한 선언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아직 이스라엘에 왕이 세워지기 전인데 한나는 하나님께서 주실 왕을 바라봅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히브리어 메시호(מְשִׁיחוֹ), 곧 ‘그의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메시아라는 말은 기름부음을 받아 하나님께 구별된 왕이나 제사장을 가리킵니다. 이 구절은 사무엘서 전체를 여는 중요한 문과 같습니다. 사무엘은 장차 사울과 다윗에게 기름을 부을 것이며, 사무엘서는 하나님께서 어떤 왕을 세우시고 어떤 왕을 버리시는지를 보여 줄 것입니다.

한나의 노래는 인간 왕을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왕에게 힘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며 왕의 뿔을 높이시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왕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절대군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아래 놓인 종입니다. 이스라엘 왕권의 정당성은 군사력이나 혈통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과 말씀에 대한 순종에 달려 있습니다.

이 메시아적 소망은 다윗 왕조를 거쳐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힘으로 권력을 차지한 왕이 아니라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아버지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참된 왕입니다. 한나가 노래한 역전의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세상의 권력과 지혜를 뒤집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버린 돌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시고, 죽임당하신 그리스도를 부활과 영광의 자리로 높이셨습니다.

예배를 멸시하는 자와 하나님 앞에서 자라는 아이(삼상 2:11-26)

한나의 찬송이 끝난 후 엘가나는 라마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아이 사무엘은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깁니다. 아직 어린아이였지만 그가 섬긴 궁극적인 대상은 엘리가 아니라 여호와였습니다. 엘리는 사무엘을 감독하고 가르치는 사람이었지만 사무엘의 삶은 하나님께 드려진 삶이었습니다.

본문은 곧바로 사무엘과 엘리의 아들들을 대조합니다. 사무엘은 어린아이지만 여호와를 섬겼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이지만 여호와를 알지 못했습니다. 성경은 엘리의 아들들을 “행실이 나쁜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어로는 베네 벨리야알(בְּנֵי בְלִיָּעַל), 곧 ‘벨리야알의 아들들’이라는 표현입니다. 이는 무가치하고 사악하며 무법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제사장의 직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호와를 알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알다’에 해당하는 야다(יָדַע)는 단순히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소유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언약적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의 규례와 절차를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거나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종교적인 직분과 구원의 믿음은 자동으로 일치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봉사하고 성경에 관한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신앙과 직분도 자녀의 구원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엘리가 제사장이라는 사실이 그의 아들들을 자동으로 경건하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살펴야 합니다.

홉니와 비느하스의 죄는 제물을 다루는 방식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났습니다. 율법은 화목제 가운데 일정한 부분을 제사장의 몫으로 정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의 아들들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기름을 태우기 전에 고기를 요구했고, 원하는 대로 주지 않으면 강제로 빼앗았습니다.

제사에서 기름은 여호와께 태워 드려야 할 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의 몫보다 자신의 배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제사를 통해 하나님을 섬겨야 할 사람들이 제사를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채웠습니다. 예배를 맡은 사람이 예배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밀어내고 자기 유익을 차지한 것입니다.

그들의 종은 제사를 드리는 사람에게 삶은 고기가 아니라 날고기를 요구했습니다.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먼저 기름을 태운 후 가져가라고 말하면 종은 억지로라도 빼앗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순간적인 실수나 무지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규례를 알고도 반복적으로 무시한 완고한 범죄였습니다.

본문은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고 평가합니다. ‘멸시하다’는 말은 가볍게 여기고 업신여긴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제물의 일부를 더 가져간 것이 아닙니다. 제사를 자기 욕망의 도구로 만들면서 제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멸시했습니다.

예배의 타락은 형식이 조금 잘못된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배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입니다. 교회가 예배를 사람의 욕망과 명예, 돈과 권력을 위한 수단으로 바꿀 때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게 됩니다. 특히 예배를 인도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은 자신의 유익보다 하나님의 영광과 성도의 유익을 먼저 구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짐승의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구약의 제사를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배를 멸시할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예배를 자기 과시의 무대로 삼거나, 직분을 지배의 권리로 여기거나, 복음을 이익의 수단으로 이용한다면 홉니와 비느하스의 죄를 다른 모습으로 반복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다시 사무엘에게 시선을 돌립니다. “사무엘은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섬겼더라”고 말합니다. 세마포 에봇은 제사장적 섬김과 관련된 옷이지만, 여기서 사무엘이 대제사장의 모든 직무를 수행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린 사무엘이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구별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 신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제사를 멸시했고, 사무엘은 어린아이이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나이나 직위보다 그가 누구 앞에서 살아가는지를 보십니다. 사무엘을 설명하는 중요한 표현은 “여호와 앞에서”입니다. 그는 엘리와 사람들의 눈앞에서만 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섬겼습니다.

한나는 해마다 남편과 함께 제사를 드리러 올라갈 때 작은 겉옷을 만들어 사무엘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해서 어머니의 사랑과 책임을 잊은 것이 아닙니다. 한나는 서원을 지키면서도 해마다 자라나는 아들의 몸에 맞는 옷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봉헌과 사랑은 서로 대립하지 않았습니다.

한나의 작은 겉옷에는 말없는 사랑과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아들을 매일 곁에 두지는 못했지만 하나님께 맡긴 아이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하나님께 누군가를 맡긴다는 것은 무관심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으면서도 사랑과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엘리는 엘가나와 한나를 축복하며 여호와께 드린 아들을 대신하여 다른 자녀를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나를 돌보셔서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낳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헌신에 반드시 물질적·수적인 보상으로 응답하신다는 공식으로 이 사건을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본문은 한나가 하나님께 드린 일을 잃어버린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한 투자처럼 헌신해서도 안 됩니다. 한나는 더 많은 자녀를 받기 위해 사무엘을 드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약속을 지켰습니다. 이후에 주어진 자녀들은 한나의 공로에 대한 임금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였습니다.

본문은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고 다시 말합니다. 사무엘은 육체적으로만 자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반면 엘리의 아들들에 관한 소문은 점점 더 악해졌습니다. 한 장 안에서 두 방향의 성장이 나타납니다. 한쪽에서는 사무엘이 하나님 앞에서 자라고, 다른 쪽에서는 홉니와 비느하스의 죄악이 심판을 향해 자랍니다.

엘리는 매우 늙은 상태에서 두 아들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과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했다는 소문을 듣습니다. 그들의 죄는 제물을 탐한 데서 그치지 않고 성적 범죄로까지 확대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욕망은 스스로 멈추지 않습니다. 회개로 끊어 내지 않으면 더 넓은 영역을 파괴합니다.

엘리는 아들들에게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라고 책망합니다. 그는 아들들의 행동이 좋지 않으며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죄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엘리가 아들들의 죄를 전혀 몰랐거나 완전히 승인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죄를 알고 말로는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뒤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평가에 따르면 엘리의 대응은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제사장과 아버지로서 아들들을 직무에서 물러나게 하거나 실질적으로 제지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상 3장은 엘리가 아들들의 죄를 알고도 금하지 않았다고 밝힙니다. 말로 잘못을 지적하는 것만으로 책임이 끝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권한과 책임이 있는 사람은 악이 계속되지 않도록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합니다.

엘리는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만일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구하겠느냐”고 말합니다. 사람 사이의 분쟁에는 재판을 통한 중재가 가능하지만, 하나님을 직접 멸시한 죄는 인간의 중재로 가볍게 해결할 수 없다는 엄중한 경고입니다.

그러나 아들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본문은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더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죄 없는 사람들을 임의로 악하게 만들어 죽이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이미 오랫동안 고의적이고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했습니다. 그들이 권면을 듣지 않은 것은 완고한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사법적 심판이 나타난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그들의 책임은 대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작정하셨다고 해서 그들의 죄에 대한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따라 자발적으로 악을 행했습니다. 동시에 그들의 완고함조차 거룩하신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었습니다.

죄를 반복하면서 언제든 원할 때 회개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회개는 인간이 마음대로 꺼내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계속 무시하면 양심이 굳어지고 말씀을 듣는 귀가 닫힐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죄를 깨닫게 하실 때 미루지 말고 돌이켜야 합니다.

엘리의 아들들이 심판을 향해 가는 동안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고 기록됩니다. 이 표현은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성장을 설명하는 말과 닮아 있습니다. 그렇다고 사무엘을 곧바로 예수님의 직접적인 예표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누가는 경건하게 성장하는 사무엘의 언어를 사용하여 예수님의 지혜와 은혜로운 성장을 묘사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무엘은 완전한 구원자가 아니었지만 타락한 제사장 가문과 대조되는 충실한 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둠 속에서도 자신의 사람을 준비하셨습니다. 성소가 타락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계획까지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제사를 더럽히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어린 사무엘을 자라게 하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시대가 어둡고 교회가 부족한 모습을 보일 때 쉽게 절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인간 지도자의 능력으로 보존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자기 백성을 지키십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자리에서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사랑하고 정직하게 섬길 사람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멸시한 집을 심판하고 충실한 제사장을 세우시는 하나님(삼상 2:27-36)

한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찾아옵니다. 그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적 사명을 수행합니다. 그는 엘리 가문에 갑작스럽게 심판을 선언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 가문에 베푸신 은혜를 먼저 상기시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에게 “너희 조상의 집이 애굽에서 바로의 집에 속하였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 나타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론의 가문을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선택하여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제단에 올라 분향하고 에봇을 입으며 이스라엘 자손이 드리는 제물 가운데 정해진 몫을 받게 하셨습니다.

엘리 가문의 직분은 스스로 쟁취한 권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선택하여 맡기신 특권이었습니다. 그러나 은혜로 받은 특권에는 거룩한 책임이 따릅니다. 많이 받은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다는 사실이 죄를 가려 주는 면허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받은 은혜가 클수록 그것을 멸시한 죄의 책임도 무거워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라고 책망하십니다. ‘밟다’에 해당하는 표현은 발로 차듯이 멸시하고 업신여기는 태도를 나타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제물을 탐한 행동은 결국 하나님을 발로 차는 것과 같았습니다.

더욱 무서운 책망은 엘리가 아들들을 하나님보다 더 중히 여겼다는 말씀입니다. 엘리는 아들들의 잘못을 알고 말로 책망했지만 그들을 제사장 직분에서 제거하지 않았습니다. 아들들과의 관계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거룩함을 희생했습니다. 자녀를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그 사랑은 죄를 막지 않는 잘못된 사랑이 되었습니다.

참된 사랑은 상대방의 죄를 모른 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그 사람과 공동체를 파괴하지 못하도록 진리를 말하고 필요한 책임을 묻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의 잘못을 무조건 감싸는 것이 사랑은 아닙니다. 교회가 지도자의 범죄를 명예와 체면을 지키기 위해 덮는 것도 공동체를 보호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에게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겼다”고 말씀하십니다. ‘중히 여기다’는 말은 무겁게 여기고 존귀하게 대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영광을 뜻하는 카보드(כָּבוֹד)도 ‘무거움’이라는 의미와 연결됩니다. 엘리는 하나님보다 아들들에게 더 큰 무게를 두었습니다. 그의 선택을 결정한 기준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가족의 관계와 이익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입술로 하나님을 가장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실제 결정에서는 사람의 평가와 가족의 욕망, 돈과 성공을 더 무겁게 여길 수 있습니다. 무엇을 잃을 때 가장 두려운지, 누구의 말을 거스르지 못하는지를 살펴보면 마음에서 무엇을 가장 중히 여기는지 드러납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이스라엘이 드리는 모든 제물의 가장 좋은 것으로 자신들을 살찌게 했습니다. 제물을 통해 하나님을 높여야 할 자들이 제물로 자기 몸과 욕망을 키웠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것을 먹으면서 정작 하나님을 멸시했습니다. 외형적으로는 제사가 계속되었지만 그 중심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탐욕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엘리의 집과 조상의 집이 영원히 하나님 앞에 행하리라고 말씀하셨지만 이제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변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제사장직에 관한 약속을 죄를 지어도 자동으로 신분이 보장된다는 특권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지만 언약을 멸시하는 자에게 언약의 심판을 내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의 은혜를 사는 공로가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존중하는 삶은 먼저 은혜를 받은 사람이 보이는 언약적 반응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멸시하는 행동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와 거룩함을 실제로 업신여기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을 존중한다는 것은 종교적인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욕망보다 무겁게 여기고, 예배를 자신의 유익보다 귀하게 여기며, 죄를 합리화하지 않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일상적인 선택과 관계, 돈과 권력을 사용하는 태도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 집의 팔을 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팔은 힘과 능력, 가문의 지속성을 상징합니다. 엘리 가문에는 노인이 없게 되고, 그 후손들은 젊어서 죽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을 사적인 유익을 위해 사용한 가문은 그 직분과 영향력을 잃게 됩니다.

엘리에게 주어진 표징은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같은 날에 죽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사무엘상 4장에서 블레셋과의 전쟁 중 두 사람이 함께 죽음으로 성취됩니다. 그들의 죽음은 우연한 전쟁의 결과만이 아니라 오랫동안 하나님의 거룩함을 멸시한 죄에 대한 심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더디게 보인다고 해서 심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지만 죄를 무관심하게 바라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죄를 계속 지어도 된다는 허락이 아니라 회개하도록 주시는 기회입니다. 은혜의 시간을 완고함으로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심판 선언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소망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엘리 가문을 심판하시지만 제사장직 자체와 이스라엘을 향한 구원의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충실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에만(נֶאֱמָן)은 신뢰할 수 있고 견고하며 충성스럽다는 뜻입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자기 욕망대로 행했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실 제사장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대로 행할 것입니다. 충실한 사역자의 기준은 사람의 인기를 얻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데 있습니다.

이 약속이 역사적으로 누구에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가까운 문맥에서는 어린 사무엘의 충실한 사역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 가문의 교체라는 측면에서는 솔로몬 시대에 엘리 계열의 아비아달이 물러나고 사독이 제사장으로 세워진 사건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열왕기상 2장은 이 일을 엘리의 집에 대하여 하신 여호와의 말씀을 이루는 사건으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역사적 성취는 사무엘의 사역과 사독 계열의 확립을 함께 고려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충실한 제사장을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그가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가까운 역사적 의미에서는 사독 계열의 제사장들이 다윗 왕조의 왕들을 섬기는 모습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사장과 기름부음 받은 왕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함께 섬기는 질서가 제시됩니다.

그러나 사무엘서와 구약성경 전체의 흐름에서 인간 제사장과 왕은 모두 한계를 드러냅니다. 충실한 제사장들도 완전하지 않았고 다윗의 후손들도 죄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약속은 역사적 성취를 넘어 완전한 제사장과 왕에 대한 필요를 일깨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론 계열의 제사장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십니다. 따라서 사무엘상 2장의 충실한 제사장 약속을 곧바로 예수님만을 가리키는 직접 예언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정경 전체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충실한 제사장직은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으로 완전해집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제물을 빼앗아 자신들의 배를 채웠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백성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몸을 제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그들은 제사장직을 이용해 백성에게서 빼앗았지만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고 도리어 섬기며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보다 욕망을 따랐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반복하여 제사를 드려야 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우리는 불완전한 인간 제사장의 공로가 아니라 완전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교회의 지도자와 직분자는 그리스도의 자리를 대신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 아래에서 교회를 섬기는 종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엘리의 남은 후손들이 와서 은 한 조각과 떡 한 덩이를 구하며 제사장 직분의 하나를 맡겨 달라고 간청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한때 가장 좋은 제물을 강제로 빼앗아 배를 채우던 가문의 후손들이 이제 한 조각의 떡을 구하게 됩니다. 한나의 찬송에서 선포된 역전이 엘리 가문의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풍족한 자가 양식을 위해 품을 팔고 주리던 자가 다시 주리지 않는다는 한나의 노래가 현실이 됩니다. 한나는 비천한 자리에서 높아지고 사무엘은 하나님 앞에서 자라지만, 자신을 높인 엘리의 아들들과 그 가문은 낮아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행동을 달아 보시며 자신을 존중하는 자를 존중하시고 자신을 멸시하는 자를 낮추십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무엘상 2장은 한나의 노래와 엘리 가문의 심판을 통하여 하나의 분명한 진리를 선포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달아 보시며, 교만한 자를 낮추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세우십니다. 사람의 신분과 직분, 현재의 힘과 풍요가 마지막 운명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높고 낮음을 결정하십니다.

한나는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자랑했습니다. 그는 아들을 얻은 기쁨에 머물지 않고 모든 생명과 역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반면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께 받은 제사장직을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가까이에서 일했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거룩한 제물을 다루면서도 거룩하신 하나님을 멸시했습니다.

우리도 교회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직분을 맡고 예배에 참여하며 성경을 안다는 사실이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고 있음을 자동으로 보장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무엇을 가장 무겁게 여기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가족의 욕망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의 체면을, 성도의 유익보다 개인의 이익을 앞세우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특히 교회의 직분과 은사를 맡은 사람은 더욱 두려움으로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직분은 사람 위에 군림하라고 주신 권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섬기라고 맡기신 책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말씀을 자신의 명예와 이익을 위해 사용한다면 엘리의 아들들이 제물을 멸시한 죄와 다르지 않습니다.

엘리의 실패도 깊이 새겨야 합니다. 그는 아들들의 죄를 알고 말로 책망했지만 그 죄를 막기 위해 필요한 책임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죄를 지적하는 말만 하고 실제로는 방치하는 것이 사랑은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중히 여기면 결국 사람도 살리지 못하고 공동체도 지키지 못합니다. 사랑은 진리와 분리될 수 없으며, 참된 사랑은 회개와 거룩함으로 이끕니다.

그러나 이 장은 심판만 말하지 않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이 예배를 더럽히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어린 사무엘을 자라게 하셨습니다. 한 가문이 무너지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킬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인간의 실패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교회가 부족하고 시대가 어두워 보여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교회의 주인은 인간 지도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보존하시며 신실하게 섬길 사람을 준비하십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자리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사무엘을 자라게 하십니다.

우리가 의지할 궁극적인 제사장은 사람에게서 빼앗는 제사장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단번에 제사를 드리셨으며 지금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과 희생을 의지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강함을 자랑하지 말고 구원의 하나님을 자랑하십시오. 받은 은혜와 직분을 자기 욕망을 위해 사용하지 말고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데 사용하십시오. 죄를 깨닫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고 즉시 회개하십시오. 무엇보다 하나님을 가장 무겁고 존귀하게 여기십시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동을 정확하게 달아 보십니다. 자신을 높이는 자를 낮추시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자를 은혜로 붙드십니다. 흔들리는 사람과 제도가 아니라 반석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우리의 왕이자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충실하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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