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실로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실로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사무엘상 1장 주해와 묵상

 

눈물로 시작된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

사무엘상은 왕궁이나 전쟁터가 아니라 한 여인의 눈물과 기도에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등불이 희미해지고 제사장 가문마저 타락하던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자녀가 없어 고통받던 한나를 통하여 새로운 역사를 준비하셨습니다. 사무엘상 1장은 고난이 하나님의 부재를 의미하지 않으며, 하나님께 드린 기도는 우리의 문제만 아니라 우리 자신까지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본문을 통하여 우리의 눈물을 들으시고 가장 연약한 자리에서 구원의 일을 시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기 원합니다.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께 올라가는 믿음(삼상 1:1-8)

사무엘상 1장은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의 새로운 역사는 예루살렘의 왕궁이나 유명한 전쟁터가 아니라 에브라임 산지의 한 평범한 가정에서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역사를 움직이는 힘이 권력과 군대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름 없는 가정과 한 사람의 기도를 통하여 한 시대를 바꾸십니다.

엘가나는 여로함의 아들이며 에브라임 산지에 거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역대상에 기록된 계보에 따르면 사무엘의 가문은 레위 지파의 고핫 계열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엘가나를 에브라임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반드시 혈통이 에브라임 지파였다는 뜻이라기보다 그가 에브라임 지역에 거주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엘가나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이름은 한나이고 다른 사람의 이름은 브닌나였습니다. 성경이 일부다처제의 현실을 기록한다고 해서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승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 질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성경은 일부다처 가정에서 발생한 갈등과 상처를 숨기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서는 사라와 하갈이 갈등했고, 야곱의 가정에서는 레아와 라헬이 경쟁했습니다. 엘가나의 가정에서도 두 아내 사이의 질투와 상처가 깊어졌습니다.

브닌나에게는 자녀가 있었지만 한나에게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한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한나(חַנָּה)이며 ‘은혜’ 또는 ‘호의’라는 뜻을 가집니다. 은혜라는 이름을 가진 한나의 현실은 은혜와 정반대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름은 은혜였지만 그의 마음에는 오랜 눈물이 있었고, 가정 안에는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가 있었습니다.

우리도 이와 비슷한 모순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만 현실에서는 버림받은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은혜를 고백하면서도 고통을 겪고, 기도하면서도 응답을 기다리며, 믿음으로 살아가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결핍을 만납니다. 그러나 사무엘상 1장은 우리가 느끼는 현실의 모순이 하나님의 은혜를 부정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오히려 은혜는 우리의 결핍 속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습니다.

엘가나는 해마다 자기 성읍에서 나와 실로에 올라가 만군의 여호와께 예배하며 제사를 드렸습니다. 당시 실로에는 성막과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사사 시대의 혼란과 가정의 갈등 속에서도 엘가나는 가족을 데리고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본문은 그가 한두 번 올라갔다고 말하지 않고 “매년” 올라갔다고 기록합니다. 신앙은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라 반복되는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삶이 평안할 때만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사무엘상에서 하나님은 처음으로 “만군의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히브리어로 여호와 체바오트(יְהוָה צְבָאוֹת)입니다. 체바오트는 군대들 또는 하늘의 무리를 뜻합니다. 만군의 여호와라는 칭호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스리시는 주권자라는 사실을 선언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압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지파들은 분열되어 있었고, 하나님의 백성을 이끌 영적 지도자도 부족했습니다.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이라는 직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제사를 멸시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진정한 소망은 인간의 지도자나 군사 조직에 있지 않았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여전히 역사를 통치하고 계셨습니다.

실로에서 제사장으로 섬기던 엘리의 두 아들은 이미 타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엘가나는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실로로 올라갔습니다. 지도자의 타락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폐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실망했다고 해서 하나님까지 떠나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불완전함과 지도자의 부족함은 슬픈 일이지만, 그것이 예배를 포기할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자기 백성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엘가나는 제사를 드린 후 브닌나와 그의 자녀들에게 제물의 몫을 나누어 주고 한나에게는 특별한 몫을 주었습니다. 개역개정은 이를 “갑절”이라고 번역합니다. 히브리어로는 마나트 아파임(מָנָה אַחַת אַפָּיִם)이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견해가 나뉘지만, 엘가나가 한나를 특별히 사랑하여 좋은 몫을 주었다는 뜻은 분명합니다.

엘가나는 한나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의 사랑도 한나의 깊은 상처를 완전히 채워 주지는 못했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소중하지만 전능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하거나 모든 상처를 치유할 수 없습니다. 사랑받고 있으면서도 슬플 수 있고, 가족이 곁에 있어도 외로울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서 받을 수 없는 위로가 있으며 오직 하나님께서만 만지실 수 있는 마음의 자리가 있습니다.

본문은 한나에게 자녀가 없는 현실을 설명하면서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라고 기록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우리를 당황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한나의 불임을 우연이나 운명의 장난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고난까지도 하나님의 주권 밖에 있지 않다고 증언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질병이나 불임을 개인의 죄에 대한 형벌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한나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자녀를 낳지 못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는 것은 고난을 겪는 사람에게 함부로 죄의 책임을 묻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한나는 자신에게 왜 이런 고통이 주어졌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단지 한 가정에 아들을 주시는 것보다 훨씬 큰 일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닫힌 태를 여심으로써 이스라엘의 닫힌 시대를 여실 것이었습니다. 한나가 원한 것은 아들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은 한 시대를 깨우는 선지자였습니다.

성경의 구속사는 인간의 불가능에서 하나님의 가능성이 시작되는 장면을 반복해서 보여 줍니다. 사라의 태가 닫혀 있을 때 이삭이 태어났고, 리브가와 라헬의 기다림 가운데서 언약의 자녀들이 태어났습니다. 삼손의 어머니도 자녀를 낳지 못하던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자랑할 수 없는 자리에서 생명과 구원을 시작하십니다. 구원은 인간의 힘이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브닌나는 한나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했습니다. 본문의 표현은 한두 번의 말다툼이 아니라 반복적이고 의도적으로 한나의 상처를 자극했다는 뜻입니다. 특히 온 가족이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이런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예배의 자리가 한나에게는 은혜의 자리인 동시에 자신의 결핍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브닌나는 자신이 받은 자녀라는 선물을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는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감사의 이유로 삼지 않고 자신이 한나보다 우월하다는 증거로 삼은 것입니다. 은혜가 자랑으로 변하면 다른 사람을 찌르는 칼이 됩니다. 건강과 자녀, 재산과 학력, 재능과 직분은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할 근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감사하며 섬길 이유입니다.

한나는 울고 먹지 않았습니다. 그의 슬픔은 마음을 넘어 몸에까지 영향을 주었습니다. 엘가나는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고 말합니다. 이 말에는 한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 있지만 그의 아픔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한계도 나타납니다.

엘가나는 자신이 한나를 특별히 사랑하므로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상처는 논리로만 해결되지 않습니다. “좋은 것이 많은데 왜 그것만 생각합니까?”라는 말은 위로처럼 보이지만 상대방의 아픔을 축소할 수 있습니다. 참된 위로는 상대방의 슬픔을 평가하거나 서둘러 답을 주는 데 있지 않습니다.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아픔 곁에 조용히 머물러 주는 데서 시작합니다.

한나는 남편의 사랑을 받고 있었지만 여전히 아팠습니다. 이는 엘가나의 사랑이 가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사랑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만 채우실 수 있는 자리를 사람에게 요구하면 사랑하는 사람도 지치고 우리도 실망하게 됩니다. 사람은 곁에 서 줄 수 있지만 우리의 가장 깊은 공허를 채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한나의 고통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고통은 한나를 하나님께로 이끄는 길이 되었습니다. 고난 자체가 자동으로 사람을 성숙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고난을 겪으며 더 완고해지고 다른 사람을 원망합니다. 중요한 것은 고난을 누구에게 가지고 가느냐입니다. 한나는 자신의 상처를 브닌나에게 되갚는 데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을 끝없이 원망하는 데 머물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픔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마음을 쏟아 놓을 때 시작되는 변화(삼상 1:9-18)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 한나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한나가 일어나니”라는 표현은 단순한 신체 동작 이상의 울림을 줍니다. 그는 울고 먹지 못할 정도로 괴로웠지만 그 슬픔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일어났습니다. 믿음은 전혀 아프지 않은 상태가 아닙니다. 아픔이 있어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한나는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했습니다. “마음이 괴롭다”는 표현에는 히브리어 마라트 나페쉬(מָרַת נָפֶשׁ)가 사용됩니다. 이는 영혼이 쓰리고 비통한 상태를 뜻합니다. 한나는 자신의 감정을 경건한 말로 포장하지 않았습니다. 아프면 아픈 대로, 서러우면 서러운 대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개혁주의 신앙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는 것은 감정을 억누르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숙명론이 아닙니다. 성경의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고 믿었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지 않으신다면 기도할 이유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시기에 우리는 그분께 우리의 사정을 아뢸 수 있습니다.

한나는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라고 기도합니다. 그는 자신의 기도에서 세 번이나 자신을 “주의 여종”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요구할 권리가 있는 사람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비천함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도 고통을 숨김없이 아룁니다. 참된 기도에는 하나님을 향한 담대함과 피조물로서의 겸손이 함께 있습니다.

한나는 하나님께 자신의 고통을 돌보시고, 자신을 기억하시며, 잊지 말아 달라고 간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실제로 한나를 잊으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다는 말은 잊었던 정보를 다시 떠올리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기억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자카르(זָכַר)는 하나님께서 언약에 따라 구원하는 행동을 시작하신다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기억하셨을 때 홍수의 물이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을 때 롯을 심판 가운데서 건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라헬을 기억하셨을 때 그의 태를 여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기억하소서”라는 기도는 “주님의 언약과 은혜에 따라 나를 위하여 일하여 주십시오”라는 간구입니다.

고난이 길어지면 우리는 하나님께 잊힌 것처럼 느낍니다. 다른 사람의 기도에는 응답하시면서 내 기도에는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침묵은 망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일하시며 자신의 때에 뜻을 드러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붙들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언약의 손으로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한나는 아들을 주시면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않겠다고 서원합니다.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는다는 표현은 민수기 6장의 나실인 규례를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본문은 포도주를 금하는 것과 같은 나실인의 모든 규정을 명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무엘을 전형적인 나실인이라고 단정하기보다는 태어나기 전부터 평생 하나님께 구별되어 드려질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한나의 기도에서 놀라운 점은 그가 아들을 구하면서도 아들을 자신의 소유로 붙잡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한나는 아들을 얻어 브닌나를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상처 입은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아들을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을 평생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했습니다.

기도하는 동안 한나의 소원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헌신으로 변화되어 갔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결핍 때문에 울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쏟으면서 자신이 받을 선물을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드릴 것을 결단했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중요한 사역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설득하여 내 뜻을 이루게 하는 기술이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의 마음과 소원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새롭게 정돈되는 은혜의 자리입니다.

한나의 서원을 하나님과의 거래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아들을 하나님께 드릴 테니 반드시 아들을 주셔야 합니다”라는 흥정이 아닙니다. 한나는 자신도 하나님의 여종이고 자신이 받을 자녀도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했습니다. 참된 서원과 헌신은 하나님을 움직이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받은 은혜가 본래 하나님께 속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한나가 오래 기도하는 동안 엘리는 그의 입을 주목했습니다. 한나는 속으로 말하므로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일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엘리는 한나가 술에 취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고 책망했습니다.

이 장면에는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현실이 역설적으로 나타납니다. 제사장은 술에 취한 사람과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을 구별하지 못했습니다. 엘리는 한나의 움직이는 입술은 보았지만 그 안에 있는 상한 영혼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한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기 전에 판단부터 내렸습니다.

우리도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성급하게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말이 없는 사람을 교만하다고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믿음이 부족하다고 판단합니다. 예배 중에 표정이 어두운 사람을 은혜가 없는 사람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는 차마 말하지 못하는 고통이 있을 수 있고, 그 눈물 속에는 하나님을 놓치지 않으려는 믿음이 담겨 있을 수 있습니다. 영적인 분별은 사람을 빨리 정죄하는 능력이 아니라 그 영혼의 아픔을 오래 바라보는 사랑에서 시작합니다.

한나는 억울한 오해를 받았지만 엘리에게 거칠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라고 대답합니다.

“심정을 통하였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내 영혼을 쏟아 놓았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쏟다’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샤파크(שָׁפַךְ)는 물을 붓듯이 쏟아 내는 동작을 나타냅니다. 네페쉬(נֶפֶשׁ)는 단순한 감정의 한 부분이 아니라 생명과 영혼, 존재 전체를 가리킵니다. 한나는 종교적인 말 몇 마디를 반복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전체를 하나님 앞에 쏟았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새로운 정보를 전달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하기 전에 우리의 형편과 필요를 아십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 닫혀 있던 마음을 열어 드리고, 두려움과 상처와 소원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행위입니다.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말할 수 없습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도 끝내 설명할 수 없는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정리된 문장으로 기도하지 못해도 됩니다. 말보다 눈물이 먼저 흘러도 되고, 깊은 탄식만 나와도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문의 완성도나 유창함을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한나는 자신을 불량한 여자로 여기지 말아 달라고 말합니다. ‘불량한 여자’라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벨리야알의 딸이라는 말입니다. 벨리야알(בְּלִיַּעַל)은 무가치함이나 사악함, 무법함을 뜻합니다. 한나는 술에 취하여 무질서하게 행동한 것이 아니라 원통함과 격분됨이 많아 지금까지 기도했다고 설명합니다.

엘리는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고 축복합니다. 엘리가 한나의 기도에 반드시 아들이 주어질 것을 예언한 것인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축복을 한 것인지는 본문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나가 그 말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입니다.

한나는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하고 돌아가서 먹었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다시 근심 빛이 없었습니다. 아직 아이를 얻지 못했습니다. 외적인 상황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브닌나는 그대로 있었고, 닫힌 태도 아직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나의 얼굴이 달라졌습니다.

기도의 첫 번째 응답은 때로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마음의 변화로 찾아옵니다. 기도하기 전에는 한나가 문제를 붙들고 있었지만, 기도한 후에는 그 문제를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는 응답을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기 시작했습니다.

참된 평안은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스스로 확신하는 데서 오지 않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내가 정한 방법과 시간에 반드시 응답하실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결과가 하나님의 손에 있고 그분의 뜻이 선하다는 사실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평안은 원하는 결과를 손에 넣은 데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선하신 하나님의 손에 맡긴 데서 옵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도 계속 문제를 움켜쥐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입술로는 맡긴다고 말하면서 마음으로는 수많은 결과를 계산합니다. 기도한 뒤에도 불안이 찾아올 수 있지만, 그때마다 다시 하나님의 성품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보다 지혜로우시고, 우리보다 멀리 보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나의 얼굴이 달라진 것은 상황을 가볍게 생각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아들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소원보다 하나님을 더 크게 보기 시작했습니다. 문제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문제보다 커진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가 우리 안에 일으키는 변화입니다.

기억하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삼상 1:19-28)

엘가나의 가족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라마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한나는 아직 응답을 확인하지 못했지만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 소원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예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예배했습니다. 참된 예배는 응답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응답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엘가나가 그의 아내 한나와 동침하자 본문은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에서도 ‘기억하다’라는 뜻의 자카르가 사용됩니다. 하나님께서 한나를 기억하셨다는 것은 한나의 존재를 잠시 잊었다가 다시 떠올리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한나를 위하여 은혜의 행동을 시작하셨다는 뜻입니다.

생명의 탄생에는 엘가나와 한나의 정상적인 부부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합니다. 인간의 책임과 하나님의 주권은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하신 질서와 인간의 일상적인 행동을 통하여 뜻을 이루십니다. 우리가 일하고 선택하며 책임을 다하지만 그 모든 일을 붙드시고 열매 맺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때가 이르러 한나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사무엘이라고 지었습니다. 한나는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구하다’라는 의미로 샤알(שָׁאַל)이라는 동사가 사용됩니다. 사무엘이라는 이름의 정확한 어원과 이 동사의 언어적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본문은 사무엘이라는 이름을 한나의 간구와 하나님의 응답에 연결합니다. 사무엘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께서 한나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살아 있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한나 개인의 기쁨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기도를 사용하여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이자 선지자가 될 사람을 준비하셨습니다. 한나는 자기 가정에 아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전체에 말씀을 전할 선지자가 필요함을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대부분 눈앞의 필요에서 시작됩니다. 건강을 회복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자녀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간구하며,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기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때로 우리가 구한 것보다 훨씬 넓은 목적을 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아픔을 공동체를 위한 은혜의 통로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엘가나와 온 집이 매년 드리는 제사와 서원제를 드리기 위해 실로로 올라갈 때 한나는 함께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이가 젖을 뗄 때까지 기다린 뒤 사무엘을 여호와 앞에 뵙게 하고 거기에 영원히 있게 하겠다고 말합니다. 당시에는 오늘날보다 늦은 나이에 젖을 떼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한나는 서원을 잊어서 올라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약속을 온전히 이행하기 위해 사무엘을 준비시키고 있었습니다.

믿음에는 즉각적인 순종이 필요하지만 지혜롭게 때를 기다리는 일도 필요합니다. 성급함이 항상 믿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책임을 충실히 감당하면서 약속을 실행할 적절한 때를 기다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돌보는 일과 하나님께 드리는 일을 서로 대립시키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성소에서 지낼 수 있을 때까지 사랑으로 양육했습니다.

엘가나는 한나에게 “그대의 소견에 좋은 대로 하여 그를 젖 떼기까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의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합니다. 엘가나는 한나의 서원을 존중하고 그의 헌신에 동참했습니다. 한 사람의 믿음으로 시작된 일이 가정 전체의 순종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아이가 젖을 떼자 한나는 제물과 함께 사무엘을 데리고 실로의 여호와의 집으로 올라갔습니다. 한나는 빈손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울며 기도했지만 이제 응답받은 아들과 감사의 제물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을 붙잡고 집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약속한 대로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다시 실로로 올라갔습니다.

한나는 엘리에게 “내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내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고 말합니다. 엘리는 한나를 기억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한나는 자신이 기도했던 자리를 잊지 않았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자신이 어디에서 울었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건지셨는지를 기억합니다.

우리는 응답을 받으면 고통의 시간을 너무 빨리 잊을 때가 있습니다. 응답받기 전에는 간절히 기도했지만 문제가 해결되면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흐려집니다. 그러나 한나는 기도한 자리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응답을 자신의 능력이나 우연으로 돌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들으셨음을 고백했습니다.

한나는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고 말합니다. 이 고백의 중심은 한나의 기도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한나는 자신이 오래 기도했으므로 아들을 얻을 자격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고 고백합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 공로를 쌓는 행위가 아닙니다. 기도는 빈손으로 은혜를 구하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많이 울고 오랫동안 기도했다고 해서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요구할 권리를 얻는 것은 아닙니다. 응답은 언제나 하나님의 자유롭고 선하신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일하시지만 기도 자체가 하나님의 주권을 지배하지는 못합니다.

한나는 이어서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구절에서는 ‘구하다’라는 말과 연결된 표현이 반복됩니다. 한나는 하나님께 구하여 받은 사무엘을 다시 하나님께 드립니다. 여기서 드린다는 것은 잠시 빌려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무엘의 평생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인정하여 온전히 맡긴다는 뜻입니다.

한나에게 사무엘은 단순한 자녀가 아니었습니다. 오랜 눈물과 기다림 끝에 받은 기도 응답이었습니다. 그런 아들을 어린 나이에 실로에 남겨 두는 일은 결코 쉬운 순종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한나가 믿음이 좋았기 때문에 아무런 슬픔도 느끼지 않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은 감정이 사라진 상태가 아닙니다. 눈물이 있어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구할 때는 간절하지만 응답받은 후에는 그것을 자기 소유로 붙잡기 쉽습니다. 자녀를 달라고 기도한 뒤에는 자녀를 자신의 뜻대로 살게 하려 합니다. 물질을 구한 뒤에는 자신의 만족만을 위하여 사용합니다. 재능과 직분을 받은 뒤에는 자신의 이름을 높이는 도구로 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받은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맡겨진 것입니다.

자녀도 부모의 절대적인 소유가 아닙니다. 부모는 자녀의 인생을 대신 살아 주거나 마음대로 결정하는 주인이 아닙니다. 자녀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도록 양육하는 청지기입니다. 자녀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반드시 목회자나 선교사가 되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직업과 자리에서 살아가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며 자신의 삶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도록 양육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장의 마지막은 그곳에서 여호와께 경배했다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한나의 기도는 자녀를 얻는 데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을 세우는 데까지 이어졌습니다. 기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의 소원을 이루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있습니다.

이 장의 표면적인 중심인물은 한나와 사무엘이지만 실제 중심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한나의 형편을 아셨고, 기도를 들으셨으며, 그를 기억하시고 태를 여셨습니다. 한나는 기도하고 서원하며 순종했지만 그 모든 과정의 처음과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가 있습니다.

사무엘상 1장은 인간의 절망이 하나님의 역사를 막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는 어두웠고, 제사장 가문은 타락했으며, 한나의 태는 닫혀 있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가장 작고 은밀한 자리에서 구원의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강한 왕과 군대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먼저 기도하는 여인과 어린아이를 준비하셨습니다. 세상은 권력과 숫자와 외적인 조건을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상한 마음과 순종하는 사람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나 세상이 주목하는 방식으로만 임하지 않습니다.

사무엘은 장차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로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가 됩니다. 그는 사울과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정 시대를 열 것입니다. 그러나 사무엘도 이스라엘을 완전히 구원할 궁극적인 구원자는 아닙니다. 그의 사역은 더 크고 완전한 선지자이며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입니다. 사무엘이 왕들에게 기름을 부었다면 예수님은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참된 메시아이십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회개하도록 불렀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내어 주시고 죄인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인간의 가능성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언약의 은혜로 우리를 기억하셨고,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구원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무엘상 1장은 우리의 눈물이 믿음의 반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한나의 눈물은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 흘린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자신의 마음을 맡길 분이 없다는 믿음의 눈물이었습니다. 그의 눈물은 하나님께로 흘러가 기도가 되었고, 그 기도는 한나의 얼굴을 바꾸었으며 마침내 이스라엘의 역사를 바꾸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아픔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응답되지 않은 기도가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평범하게 주어진 것이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결핍이 있습니다. 가까운 가족도 내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영적 지도자에게조차 오해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움직이는 입술만 보지 않으시고 그 안에서 탄식하는 영혼을 보십니다.

고난이 하나님의 부재를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에도 그분은 자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고 계십니다. 우리는 닫힌 문을 보며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닫힌 문을 통하여 더 큰 역사의 문을 여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아야 합니다. 상처를 숨긴 채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쓰지 말아야 합니다. 원통함과 두려움, 분노와 소망을 정직하게 아뢰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돈된 문장보다 진실한 마음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기도한 후에는 그 문제를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합니다. 상황이 아직 달라지지 않았어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또한 응답받은 것을 자기 소유로만 붙잡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녀와 물질, 건강과 시간, 지식과 재능을 하나님께 다시 드려야 합니다. 은혜는 소유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헌신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용할 때 우리의 작은 삶도 예상하지 못한 구원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한나는 한 아들을 구했지만 하나님께서는 한 시대를 위한 선지자를 준비하셨습니다. 한나는 자신의 가정에 임할 응답을 기다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새롭게 하실 계획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작아 보여도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시야보다 큽니다.

지금 울고 있다면 그 눈물을 하나님께 가져가십시오. 잊힌 것처럼 느껴진다면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기도하십시오. 응답받았다면 받은 것을 다시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상한 마음을 외면하지 않으시며, 인간의 불가능 속에서도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하고, 기다리며, 받은 은혜를 다시 드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 블로그 목록

추천 게시물

사무엘상 4장 주해와 강해

하나님의 임재는 인간의 욕망에 붙들리지 않습니다 사무엘상 4장은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앞세우고 블레셋과 싸웠으나 참혹하게 패배하는 사건을 기록합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죽고 언약궤는 빼앗기며, 엘리와 비느하스의 아내까지 죽음에 이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