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11장 강해

 사사기 11장 개요

여호와 앞에서 범죄 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그들은 암몬 자손에 팔아 버립니다. 이스라엘은 다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하나님은 길르앗 사람 입다는 사사로 세우셔서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십니다. 하지만 전쟁에 나갈 때 서원한 딸을 하나님께 드려야 했습니다.


사사기의 전체 구조 상에서 기드온이  사사로서의 최고의 정점을 찍었다면 입다는 두 번째 봉우리와 같습니다. 하지만 입다는 기드온과 현저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그것은 입다는 출신이 불분명하고, 에브라임 지파를 엄청나게 학살했다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숙곳 사람들을 학살한 점을 닮아 있으면서도 그 정도가 수백 배에 이릅니다. 이러한 점을 볼 때 기드온 사사라는 높은 봉우리와 같아 앞면은 밝은 빛이 비추지만 뒷면은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기드온 이후 사사들은 기드온의 그림자를 상당부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점점 깊은 침체로 빠져들어갑니다.


사사 입다는 이후에 입산과 압돈이 나오기는 하지만 희미한 존재이고, 곧 삼손으로 넘어갑니다. 삼손은 엄밀히 사사로서의 개념이 없습니다. 그는 홀로 싸웠고, 누군가와 연합하여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표면상의 현상들은 입바가 사사기 안에서 마지막 사사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입다 안에서는 이후 이스라엘과 단지파와의 내전이 일어날 징후들이 전조 증상처럼 드리워져 있습니다. 전쟁의 달인? 이기는 하지만 인격적으로 전해 준비다 되지 않은 사사였습니다. 이제 사사기 11장 안으로 들어가 봅시다.


사사기 11장 구조

  • 1-3절 쫓겨나는 입다
  • 4-11절 입다와 거래하는 길르앗 장로들
  • 12-28절 암몬 왕과 타협하는 입다
  • 29-33절 전쟁에서 승리하는 입다
  • 34-40절 입다의 서원과 딸의 눈물


사사기 11장 강해


기생이 낳은 아들 입다

입다의 아버지는 길르앗으로 나옵니다.(1절) 지역 이름과 동일한 것을 볼 때는 그는 길르앗의 이름을 가져올 만큼의 큰 가문의 후손으로 보입니다. 조선시대로 치면 양반 중의 양반이며, 고관대작의 서생 출신 정도입니다. 출신 자체가 문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러한 출생은 길르앗이 정식적인 아내가 임신하면서 입다가 쫓겨났다는데 있습니다. 이것은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과 닮아 있습니다.


결국 본처의 아들들이 자라자 그들은 입다를 집에서 쫓아냅니다. 그들은 입다를 향해 '다른 여인의 자식'(2절)이라 말하며 그는 쫓아 냅니다. 결국 입다는 그들에게 쫓겨남을 당하고 돕(Tob) 땅에 거주하며 잡류들과 함께 지내게 됩니다.


   *아버지의 집

  • 성경에서 아버지의 집은 기업을 물려 받는 곳으로 소개됩니다. 이것은 명예와 권력 등을 물려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아버지의 기업을 잇지 못'(3절)한다는 말은 이러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청하다


암몬 사람들이 길르앗을 공격해 옵니다. 같이 붙어 있는 암몬은 자주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요단강 동편에 있던 길르앗 지방은 당연히 본토보다 더 먼저 침략을 당했습니다. 이번에도 이전과 달았습니다. 전면적으로 나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정도였습니다. 벌벌 떨떨 그들은 결국 다시 돕(Tob) 땅에 있던 입다를 찾아가 도움을 구합니다.


길르앗 장로들은 입다에게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6절) 말합니다. 왕이라는 말을 돌려서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입다는 불안합니다. 7절에 의하면 아버지의 쫓아낸 장본인들이 길르앗 장로들이었습니다. 아마도 본처의 아들들이 자신들이 힘이 없자 장로자들의 힘을 빌러 입다를 추방한 것으로 보입니다. 모든 사정을 알고 있던 입다는 당연히 그들의 말에 신용이 가지 않고, 굉장히 기분 나빠합니다. 쫓아낼 때는 언제고 이제 자신들이 어려움에 처하니 도움을 달라하다니.


몇 절 되지 않은 구절이지만 장로들과 입다는 계속해서 자신들의 요구를 서로에게 관철 시키고 있습니다. 6절에서 '장관이 되라' 말하고, '머리가 되리라'(8절), 말합니다. 입다도 장로들에게 '어찌하여'(7절), '내가 과연 너희의 머리가 되겠느냐'(9절) 결국 11절에서 입다는 길르앗 사람들의 '머리와 장관'이 됩니다.


이 부분을 유심히 살펴보면, 이스라엘이 기드온에게 했던 말입니다. 하지만 기드온은 거절합니다. 하지만 기드온은 왕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들에게 '우리의 아버지는 왕이다'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기드온의 숨은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 세겜 사람들과 연합하여 기드온의 70 아들을 모두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됩니다. 하지만 그는 이스라엘의 왕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제 입다가 등장하면서 진짜 왕은 아니지만 왕에 가까운 존재가 됩니다. 길르앗 장로들이 머리와 장관이 되어 달라 말했고, 본인도 머리가 되겠다고 말합니다. 


사사기의 핵심은 '왕'입니다. 하나님이 왕이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음으로 왕이 되기를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은 사사들을 통하여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입다 스토리 안에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교제하는 내용이 없다는 것으로 기드온과 확연한 차이가 납니다. 또한 잘못된 서원은 그의 딸을 궁지로 몰아 넣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서원은 후에 사울의 어리석은 서원과 너무나 닮아 있습니다. 지식이 없는 믿음은 어리석은 충동에 불과하다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입다와 암몬 왕과의 협상


길르앗에 쳐들어 온 이유


입다가 여러부분에서 부족하기는 하지만 사사는 사사다라는 말이 나오는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입다를 사용하셨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입다는 먼저 암몬 왕에게 사자를 보내 왜 쳐들어 왔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암몬 왕은 너희(이스라엘)가 우리 땅을 쳐들어 왔기 때문이라 말합니다. 그러면서 출애굽 당시의 상황들을 이야기하면 그곳이 본래 자신들의 땅이었다고 말합니다.(13절)


첫 번째 반박, 이곳은 너희들의 땅이 아니다.

15절에서 22절까지에서 입다는 왜 이스라엘이 요단 동편 땅에 머물게 되었는가를 정확히 말해 줍니다. 하나님이 모압을 공격하지 못하게 한 것(17절)과 그 지역들이 아모리 왕 시혼의 것이었음을 말합니다.(21절) 즉 이 땅은 암몬 왕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들의 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입다의 이러한 주장은 그가 살아가고 있는 땅에 대한 이해, 하나님께서 이 땅을 차지하기까지의 과정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두 번째 반박, 여호와와 그모스가 준 땅?

입다의 주장은 명약관화합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여 얻은 땅이다. 그래서 얻은 것이다.(21-23절) 그렇다면 너희는 너희가 섬기는 그모스가 너희에게 준 땅이라면 너희가 얻을 것이 아니냐?(24절) 신들이 준 땅으로 네가 와서 달라고 하면 안 된다.


세 번째 반박, 네가 십볼의 아들 발락보다 나으냐?

세 번째 반박으로 출애굽 당시에 십볼의 아들 발락이 이스라엘과 싸우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도 감히 무서워서 싸우지 않는데 니가 뭔데 우리와 싸우려 하느냐는 것입니다.(25절) 니가 발락보다 낫다고 우기는 것이냐? 따져 묻는 것이죠. 


네 번째 반박, 왜 지금까지는 빼앗지 않았느냐?

네 번째는 우리가 길르앗에 거한지 삼백 년이 넘었다. 여기가 정말 너희 땅이었다면 왜 지금까지는 단 한 번도 뺏을 생각을 하지 않았느냐? 그러므로 네가 이곳에 쳐들어와 땅을 달라고 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다섯 번째 반박, 네게 악을 행하지 않았다.

27절에서 입다는 마지막으로 '내가 네게 죄를 짓지 아니하였거늘' 왜 쳐들어 왔다고 묻습니다. 즉 이곳에 쳐들어 올 이유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입다의 주장을 보면 그가 얼마나 논리적이고 명석한가를 보여줍니다. 그는 단지 싸움을 잘하는 무식한 싸움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바른 믿음과 뛰어난 머리를 가진 사사였습니다. 만약 입다가 감정적인 부분을 절제 했다면 기드온을 뛰어 넘는 위대한 사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의 명석함은 다음 장에 나오는 에브라임 지파는 학살하는 데에도 사용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결국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옵니다.


입다의 서원과 딸


입다는 암몬과의 전쟁을 시작하면서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서원을 하나님께 하게 됩니다. 30-3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입다의 서원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학자들은 정말 제물로 바쳤다 아니다 논란이 많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맥락을 보면 그가 얼마나 어리석고 충동적인가를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사람을 제물로 드리지 않습니다. 그런 제물은 받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일부의 학자들은 그냥 성전에서 봉사하는 여자가 되게 했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하지만 '번제물'(31절)이란 표현은 제단에 드리는 제물을 말합니다.


결국 입다가 전쟁에서 승리한 후 돌아왔을 때 무남독녀인 그 의 딸이 소고 치며 춤을 추며 아버지를 반깁니다.(34절)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자신의 즉흥적 생각으로 서원하는 어리석음 범하고 있습니다. 


입다의 잘못된 서원을 통해 진정한 왕의 필요성을 대두하게 됩니다. 사사기를 왕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왜 왕이 필요한가를 설명합니다. 그래서 사사기는 사무엘성를 보조하기 위한 문서로 보기도 합니다.


사사기 장별요약 및 강해


사사기 10장 강해

사사기 10장 개요

아비멜렉의 죽음 이후 사사기 10장에서는 돌라와 야일이 간략하게 언급된 다음 기드온에 맞먹는 길르앗 지방의 사사 입다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입다의 이야기는 10장 6절에서12장까지 이어집니다. 분량도 기드온과 거의 비슷하고, 전체적인 흐름도 기드온과 닮아 있습니다. 하지만 입다는 전체적인 면에서 기존의 사사들과는 다른 포악성이 강조되어 드러납니다.


사사기 10장 구조

  • 1-2절 사사 돌라
  • 3-5절 사사 야일
  • 6-9절 악을 행하는 이스라엘
  • 10-16절 회개하는 이스라엘
  • 17-18절 암몬과의 전쟁 준비


사사기 10장 강해


1-5절 돌라 야일


잇사갈 돌라


돌라는 잇사갈 사람입니다. 그는 도도으 순자이며, 부아의 아들로 소개됩니다. 돌라의 뜻은 '곤충' '벌레'입니다. '부아'는 '입' '말'이란 뜻입니다. 특이하게 잇사갈 지파이면서 그는 에브라임 산지 사밀에 거주합니다. 사밀이 어딘지는 알 수 없습니다.


돌라의 스토리 안에는 그가 어떤 적과 싸웠는지 소개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두 가지를 생각하나는 아비멜렉과 같은 내전의 가능성, 다른 하나는 큰 전쟁이 아닌 극히 작은 국지전과 같은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왜 성경이 이 부분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의 분배 받은 지파의 땅을 벗어 났다는 것입니다. 그가 성공을 위해선 한 것인지, 적들의 공격을 피해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그는 자신의 고향을 떠났고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사사기 기자는 그에 대해 매우 짧게 서술함으로 굳이 강조하고 싶지 않은 것을 보입니다. 사사로서 활약을 했지만 거룩하지 못한 삶, 탐욕에 이끌려 살았던 그의 삶은 결코 좋아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죽어서도 에브라임 사밀에 장사 됩니다.


길르앗 야일


돌라처럼 야일도 사사가 되어 이십 년 동안 치리합니다. 하지만 그 역시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 성경은 침묵합니다. 언급할 만한 가치가 없는 사사라는 뜻입니다.  그는 아들이 삼십 명이고, 어린 나귀 삼십을 탓고, 성급 삼십을 가졌다고 말합니다.(4절) 이것이 정확하게 뭘 의미하는지 모호합니다. 하지만 전반적인 글의 맥락에서 보면 그는 왕처럼 군림하며 살았음을 보여줍니다.


기드온 이후 사사들이 변화가 기드온의 좋지 않은 점만을 쏙 빼서 닮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기드온이 사시기의 정점이자 중요한 인물인가를 잘 보여줍니다. 앞으로 소개될 입다 역시 이들보다는 조금 낫지만 포악한 사사라는 점에서 기드온이 숙곳 사람들에게 행한 것을 기억 나게 합니다.


6-18절 이스라엘의 범죄와 회개


여호와의 목전에서


늘상 반복되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다시' '또'라는 단어입니다. 초범이 아닌 재범입니다. 동일한 죄를 지어도 재범은 형벌이 더 중합니다.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는 재범을 너머 재재재재범자들입니다.


목전은 '앞'이란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은 것이죠.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모욕하고 멸시했는가를 보여줍니다.


우상을 섬긴다는 것


우상을 섬기는 것을 단지 바알과 아스다롯에게 절하는 행위로만 보면 안 됩니다. 정신과 마음, 행위와 삶 자체를 우상에게 맞춘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을 버리고 욕망과 탐욕, 미움과 반목, 살인과 악을 저지르는 모든 행위가 우상 숭배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기준이 말씀이 아닌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원수의 손에 팔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블레셋과 암몬 사람들의 손에 팔았습니다.(7절) 이들은 이스라엘이 섬기는 우상들의 본고장입니다. 6절에서 이스라엘이 바알, 아스다롯, 아람의 신들, 시돈의 신들, 모압의 신들, 암몬 자손의 신들,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을 섬겼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신들을 섬겼을까요? 수십 개의 우상들이 있었습니다. 이 신에게 기도하고 안들어주면, 저 신에게하고, 저신이 안들어 주면 또 다른 신에게 기도하는 식이었습니다. 많은 신을 섬기면, 많은 복이 올거라고 생각하지만 하지만 모두 거짓입니다. 신들은 복수형이고, 하나님은 단수형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유일하신 한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이 빌었던 그 신들의 민족들에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팔아 고통을 받게 하셨습니다. 모든 고통은 자신들이 만든 것이며, 진정한 신인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는 어리석은 것이며, 피곤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회개와 하나님의 고민


이스라엘이 회개합니다. 고통이 더해지니 참을 수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나이다'(10절) 고백합니다. 놀라운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죄를 압니다. 아니 기억해 냈습니다. 사사기 초기에 하나님은 '다른 세대'의 등장으로 그들에게 여호와를 알게 하려는 목적으로 가나안 족속들을 남겨 두고, 가시를 두겠다고 하셨습니다. 고통을 통해 그들은 각성하고 하나님을 기억해 냈습니다.


사사기 장별요약 및 강해목록


사사기 9장 강해

 사사기 9장 개요

사사기9장은 기드온의 사망 이후를 다룹니다. 기드온의 아들 중에 세겜의 여인과 결혼하여 낳은 아비멜렉이 세겜 사람들과 결탁하여 기드온의 다른 형제들을 모두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됩니다. 하지만 얼마 후 세겜 사람들은 가알의 말에 넘어가 아비멜렉과 싸우게 됩니다. 


사사기 9장은 기드온이란 걸출한 사사의 내면에 숨겨진 욕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사기는 기드온을 정점으로 기드온 전과 후로 나뉘게 됩니다. 기드온 후의 영적 흐름을 보여주는 사건이 아비멜렉의 반역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스라엘은 내전 아닌 내전에 치르게 되고, 영적으로 엄청난 퇴보를 보여줍니다. 왜 그러한 퇴보가 나타나는지를 사사기 9장의 아비멜렉이란 인물과 요담의 저주 비유를 통해 풀어가 봅시다.


사사기 9장 구조

  • 1-6절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의 추악한 결탁
  • 7-21절 요담의 저주 예언
  • 22-57절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의 전쟁


사사기 9장 강해


1-6절 불의하고 악한 결탁


아비멜렉


9장이 시작되면서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갑니다. 기드온의 한 아들인 아비멜렉이 어머니의 고향인 세겜을 찾아가 내가 너희를 다스리는 것이 낫느냐 기드온의 70명이 너희를 다스리는 것이 낫느냐고 말하며, '나는 너희와 골육'(2절)이라고 강조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난 사사기 8장에서 기드온의 전쟁 후 말기 인생에 대해 언급하면서 기드온이 왕이 되는 것은 거절했지만 마음은 왕이 되고 싶었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 근거가 무엇일가?


먼저는 아비멜렉이란 이름에 들어가 있습니다. 아비멜렉의 뜻은 '나의 아버지는 왕이다'입니다. 아들의 이름을 누가 지을까요? 아버지가 짓습니다. 그런데 아들의 이름을 지으면서 '나의 아버지는 왕이다'라고 짓는다면 '나는 왕이다'라는 뜻이 됩니다. 기드온은 위대한 사사였지만 말로는 좋지 않았습니다. 그는 차마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시기에 왕이라고 호칭을 붙일수 없었지만 이미 왕이었고, 왕처럼 군림했습니다. 이것이 '아비멜렉'이란 이름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골육과 형제


자 두 번째 문제로 넘어가 봅시다. 아비멜렉은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하여 '어머니의 형제'(1절)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2절에서 '나는 너희와 골육'이라 말합니다. 그러자 세겜 사람들은 서로 말하며 '그는 우리 형제'라고 말합니다. 아비멜렉은 자신이 어머니의 가족, 형제, 민족들에게 같은 혈육임을 강조하며 도움을 구합니다. 결국 이러한 아비멜렉의 강조는 세겜의 피가 있는 아비멜렉과 전혀 피가 섞이지 않는 다른 기드온의 아들들과 구분 짓고 차별하게 합니다.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의 말에 수긍하고 그와 한 배를 탑니다. 가장 치졸하고 악하고 교활한 방법입니다.


왕이 된 아비멜렉


6절에서 세겜 사람들과 밀로 모든 족속들이 모여 세겜의 상수리 나무 아래 곁에서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습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왕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왕이시기 때문에 왕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 삼상 8: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그렇다고 왕을 세우지 않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신명기 17:14-20에 의하면 하나님은 후에 왕이 세워야 할 때가 되면 이러한 조건을 통해 왕을 세워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신 17:14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이르러 그 땅을 차지하고 거주할 때에 만일 우리도 우리 주위의 모든 민족들 같이 우리 위에 왕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나거든
  • 신 17:15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을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
  • 신 17:16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 신 17:17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 신 17:18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 신 17:19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 신 17:20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의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이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그런데 아비멜렉은 아직 시기가 아님에도 스스로 왕이 되고 싶어 외가를 찾아가 사람들을 교묘히 설득한 것입니다. 아비멜렉의 이러한 왕이 되려는 욕망은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기드온이 심어 놓은 것이다. 하지만 기드온은 차마 왕이 될 수 없었습니다. 최소한의 신앙양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죠. 아비멜렉은 달랐습니다. 그는 신앙도 없고, 양심도 없는 교활하고 악한 자입니다. 그는 왕이 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불의한 자들과 결탁하고 불의한 자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모두 죽인 것입니다.


7-21절 요담의 나무 비유


요담의 비유를 잘 들어보면 이스라엘 안에서 나무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열매를 통해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었죠. 하지만 가시나무는 아무런 열매도 없고, 오히려 고통을 줍니다. 그런데 가시나무가 스스로 왕이 되겠다고 나섭니다. 결국 가시나무를 왕으로 만들면 고통이 따를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가시나무는 아비멜렉입니다.


삼을 삼으려 함


요일하게 살아남은 요담은 그리심 산 꼭대기에 올라가 세겜 사람들에게 나무의 비유를 통해 그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합니다. 나무들이 왕을 삼으려는 시도는 8장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을 찾아 한 말입니다. 그들은 왕이 있어 자신들을 다스릴 때 평화가 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나무의 비유는 곧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나무들의 거절


올리브 나무를 찾아가 왕이 되어 달라 말합니다. 하지만 올리브 나무는 거절합니다. 거절의 이유를 읽어 봅시다.

내게 있는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9절)


감람 나무는 자신의 기름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버릴 수 없고, 또한 나무들 '위에 우쭐'대는 것을 몹시 경계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굳이 왕이 될 이유가 없는 것이죠. 올리브 유는 정말 많은 곳에 사용되었습니다. 식용으로 사용하기도하고, 하나님의 등불을 켜고, 상처를 치유하는 약품으로 사용됩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너무나 좋고 행복한 것이죠. 그것을 버리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번에는 무화과 나무를 찾아갑니다. 무화과 나무도 비슷한 말을 합니다. 

나의 단 것과 나의 아름다운 열매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11절)


무화과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식량이고 간식입니다. 익은 무화과도 맛있고, 적당히 말리면 그야말로 최고의 과자가 됩니다. 이렇게 중요한 일을 하는데 이것을 버리고 왕이 되고 싶지 않다 말합니다.


포도나무를 찾아갑니다. 포도나무도 동일한 답변을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내 포도주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13절)


포도나무는 포도 열매를 맺고, 그것으로 포도주를 만들어 사람들을 즐겁게 합니다. 이것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며, 다른 나무들 위에 우쭐대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올리브, 무화과, 포도 나무 모두 왕이 되는 것을 거절하니다. 이들은 가나안에서 가장 중요한 산물이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나무들입니다.


가시나무의 제안


그런데 가시나무에게 왕이 되라 하자 놀랍게도 가시나무는 왕이 되겠다고 말하며, 자신의 그늘에 와서 피하라고 말합니다. 가시나무에 그늘이 거의 없는 데 말이죠. 만약 자신의 그늘 아래 오지 않으면 자신에게서 불이 나와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라 말합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모든 나무 중의 으뜸이요 거대한 나무입니다. 값비싼 나무이며, 왕궁과 성전을 지을 때 사용하기도 합니다. 감히 백향목과 가시나무는 비교 조차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가시나무는 레바논의 백향목까지 태울 것이라 협박을 합니다.


여룹바알 기드온


요담은 이어 자신의 아버지 기드온이 어떤 희생을 통해 미디안의 손에서 너희를 건졌는가를 상기시킵니다. 그런데 세겜 사람들은 기드온의 은혜를 저버리고 아비멜렉과 손을 잡고 기드온의 아들들을 죽이고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았습니다. 이제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 세겜 사람들을 죽일 것입니다.


22-57절 아비벨렘과 세겜 사람들의 전쟁


악한 영을 보내시매


아비멜렉이 왕이 된 지 삼 년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냅니다.(23절) 사사기 기자는 이유를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이 기드온의 아들들에게 행한 악한 일 때문이라 말합니다.


악한 영이 어떤 일을 하는 지를 나타나지 않지만 25절을 보면, 그들의 마음에 나쁜 마음이 들게 한 것이 분명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고 적대시하게 함으로 서로 싸우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정말 무서운 것이죠. 자중지란 사자성어처럼 아군끼리 서로 싸우면 결국 자멸의 길로 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악한 영을 보내심으로 심판하려는 것입니다.


전쟁의 서막, 가알이 신뢰를 깨다


에벳의 아들 가알이 등장합니다. 26절에서 그의 형제들과 함께 가일이 등장하니다. 그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세겜 사람들이 그를 신뢰했고(26절), 가알은 아비멜렉을 저주합니다.(27) 왜 우리(세겜)가 아비멜렉을 섬겨야 하느냐?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죠. 그는 백성들이 내 수하에 있다면 아비멜렉을 제거했을 것이라 호언장담하기도 합니다.(29절) 가알의 말에는 세겜 사람들과 아비멜렉 사이에 깊은 골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가알은 그것을 간파하며, 세겜 사람들의 입이 되어 주고 있습니다.


아비멜렉의 반격


세겜을 다스리는 아비멜렉의 수하 스불이 가알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아비멜렉에게 고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네 때에 나누어 밤에 매복하고 날이 밝자 가알과 세겜 성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을 공격하자 세겜 사람들의 일부가 엘브릿 신전의 보루로 들어갑니다. 아비멜렉은 분노하여 그곳에 올라간 사람들을 모두 죽이려 합니다. 그는 살몬은 산에 올라 나뭇가지를 찍어 보루 아래에 놓고 불을 지를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세겜 망대에 있는 천 명이 죽게 됩니다. 


더베스까지 추격하여 그곳 사람들까지 죽일 생각을 합니다. 그곳에 견고한 망대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도망합니다. 아비멜력은 이번에도 그곳에 불을 지르려 합니다. 그런데 그 때 한 여인이 멧돌 윗짝을 던져 아비멜렉의 머리를 깨뜨립니다. 아비멜렉은 자신이 살 수 없음을 알고 무기든 청년에게 자신을 죽이라 말합니다. 결국 아비멜렉은 죽임을 당하고 전쟁은 끝이 납니다.


저주가 임함


가짜 왕의 삼 년 천하는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지 않는 스스로 왕이 된 가짜 왕 아비멜렉은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사기 기자는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의 악행을 이렇게 갚으셨다 말하며 9장을 마무리합니다. 하나님은 악을 두고 보지 않고 반드시 응징하는 분임을 말해 줍니다.


사사기 장별요약 및 강해목록



사사기 8장 강해

 사사기 8장 개요

삼백용사와 함께 미디안의 전쟁을 시작한 기드온은 두 장수 오렙과 스엡을 죽이고 추격을 계속합니다. 이때 에브람이 지파 사람들이 기드온을 찾아와 항의하자 기드온은 달래 줍니다.  삼백용사는 도망가는 미디안 군사들을 끝까지 추격하여 그들을 전멸시킵니다.


사사기 8장 구조

  • 1-3절 에브라임 지파의 항의
  • 4-9절 숙곳 사람들의 거절
  • 10-21절 세바와 살문나를 죽이고 전멸시키다.
  • 22-28 마지막의 기드온
  • 29-35절 기드온의 사후 타락하는 이스라엘


사사기 8장 강해


1-3절 에브라임 지파의 항의


항의하는 에브라임 지파

전쟁을 어느 정도 마치고 나자 갑자기 에브라임 지파가 기드온을 찾아옵니다. 그들은 기드온에게 미다안과 싸울 때 왜 우리를 부르지 않았느냐 따집니다. 이것은 자신들을 대우하지 못한 것이라 말합니다. 어느 정도 일리는 있습니다. 하지만 기드온이 나설 때까지 무서워서 벌벌 떨던 에브라임 지파가 갑자기 기드온을 찾아오는 것은 정말 활당한 일입니다. 그들은 비겁하고 나쁜 사람들입니다.


기드온의 위로

2-3절은 기드온이 에브라임 지파를 위로하며 돌려보내는 장면입니다. 2-3절을 먼저 이해해야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 내가 이제 행한 일이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으니 내가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포도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가 비교됩니다. 여기서 아비에셀은 므낫세 지파를 말합니다. 전쟁을 시작하는 것은 기드온이므로 맏물포도입니다. 하지만 전쟁을 마무리한 것은 에브라임 지파로 끝물포도입니다. 하지만 끝물포도는 미디안의 강력한 두 왕인 오렙과 스엡을 에브라임이 지파가 잡아 죽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에브라임 지파의 거만과 자만이 뼛속 깊이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후에 에브라임 지파는 입다를 찾아 다시 항의하지만 그때는 가차없이 살육을 당하고 맙니다.


굳이 입다 때와 비교할 필요는 없지만 짚고 넘어갈 부분은 기드온 때는 기드온이 필요에 의해 에브라임 지파를 불렀습니다. 7장 24절을 보면 기드온이 사람을 보내 에브라임 지파를 불렀고, 그들은 전쟁이 동참하여 미디안을 무찔렀습니다. 즉 업적이 있는 것이죠. 그 일로 기드온은 미워도 별다른 항의를 하지 않고 돌로 보냅니다. 하지만 입다 때는 전혀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입다는 엄청난 수치와 분노를 느낀 것입니다.


4-9, 13-17절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의 거절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


기드온은 전쟁이 아직 마무리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남은 패잔병인 세바와 산문나의 군사들을 추격합니다. 이때 숙곳에 이르러 그곳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달라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말이 가관입니다.

  • 삿 8:6 숙곳의 방백들이 이르되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네 손 안에 있다는거냐 어찌 우리가 네 군대에게 떡을 주겠느냐 하는지라
이들의 말은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고, 그들늘 네(기드온)가 죽이지 않았는데 뭘 믿고 너에게 도움을 주느냐는 것입니다. 잘못하여 그들이 되돌아와 자신들을 공격하면 난처하다는 것입니다. 문제의 심각성은 그들의 변명이 아니라, 그들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로 길르앗 지방에서 이방민족들을 주시해야하는 '망대'(9절)가 있었던 곳입니다. 기드온은 그들의 말을 듣고 화가나서 다시 돌아올 때 망대를 헐고, 그들을 죽이겠다 말합니다.

기드온의 복수


세바와 살문나를 포로로 붙잡고 숙곳과 브니엘을 찾아갑니다. 한 사람을 붙잡아 숙곳이 장로들 칠십 명의 명단을 받고 그들을 들가시와 찔레로 징벌하고 브니엘 망대를 헐어 버립니다. 적들을 살펴야할 망대가 아무런 가치도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분노는 기드온을 보게 됩니다. 비록 숙곳과 브니엘이 잘못하기는 했지만 굳이 복수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기드온은 자신을 모독한 자들을 그대로 두지 않고 처단하는 복수의 화신이 됩니다. 이러한 기드온의 성향은 기드온 이전과 이후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특징입니다. 기드온이 뿌린 내전의 씨는 입다와 그리고 레위인의 첩 사건들을 통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10-12, 18-21절 세바와 살문나를 죽이고 전멸시키다.


그들이 안전할 때에


세바와 날문가가 갈골에 있을 때 아직 만오천 명이 있었습니다.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기드온은 그들을 격파하기에 이릅니다. 마지막까지 자신들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충성을 다합니다.


11절을 보면 '적군이 안심하고 있는 중'에 기드온과 삼백용사가 급습합니다. 왜 안전하다고 느낄까요? 요단강을 건너 먼 곳까지 왔기 때문에 설마 이곳까지 오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현재 성서지리학자들은 갈골을 현재의 카르카르 지역이며, 암만 남동쪽으로 190km 정도 떨어진 지역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곳은 얍복강의 어느 부분에 속합니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때에 급습해 오자 그들은 반격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질겁하여 도망가고 맙니다. 기드온과 용사들은 이때를 노려 세바와 살문나를 포로로 사로 잡게 됩니다.


세바와 살문나의 처형식

기드온은 이제 세바와 살문나를 처형합니다. 그런데 그의 맏아들 여델에게 시킵니다. 하지만 여델은 아직 어려서 살인을 잘 못합니다.(20절) 결국 기드온이 그들을 처형합니다. 우리는 다시 기드온의 이상한 행동을 보게 됩니다. 그는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자신의 아들에게 시켜 자랑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겸손하고 순진하게 보이는 기드온 안에 숨겨진 탐욕과 교만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그의 복수도 그렇고, 이젠 아들을 부추겨 피를 묻히게 하려는 행동도 드러냅니다. 기드온의 숨겨진 욕망을 그의 말년에, 그리고 사후에도 계속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22-35 마지막의 기드온과 사후의 이스라엘


왕이 되어 달라


기드온이 집으로 돌아오자 금의환양합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드온에게 자신들을 다스려 달라고 말합니다. 즉 왕이 되어 달라는 것이죠. 하지만 기드온은 겸손하게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 8:23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하니라


기드온의 타락


처음은 참 좋았지만 기드온의 결말은 결코 좋지 않습니다. 그는 차마 왕이 되는 것은 거절했지만 왕처럼 사는 것은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쟁을 통해 얻을 귀금속들을 달라고 말하니다.(24-26절) 그리고 그것으로 금에봇을 만들어 음란하게 섬기게 됩니다. 에봇은 제사장들이 입는 곳으로 하나님께 물을 때 사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금으로 만든 에봇은 실제 에봇도 아님에도 기드온이 왜 만들었을까요? 이것이 기드온의 허상입니다. 그는 자신 안에 거대한 욕망을 숨겼고, 그것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온의 에봇을 상상한 그림



다시 타락하는 이스라엘


기드온의 사후에 이스라엘은 다시 타락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 볼 부분이 있습니다. 기드온이 많은 아내를 두었고, 무려 칠십 명의 자녀를 두었다는 것입니다. 왕처럼 군림하며 살았던 기드온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기드온이 죽자 다시 이스라엘은 타락의 길로 접어 듭니다. 타락은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지우는 것입니다.(34절) 결국 이것은 기드온의 가족을 홀대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바알브릿은 자신드의 신으로 삼고 하나님을 대신해 섬깁니다.


바알브릿(Baal-Berith)
바알은 주인이고, 브릿은 '언약'의 히브리어 베릿트입니다. 언약의 주라는 뜻입니다. 바알과 언약을 맺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망각하고 타락하는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지적하는 표현입니다.


사도행전 6장 강해

 사도행전 6장 개요


5장에서 교회의 외부적 문제가 발생했다면 6장은 내부적 문제에 직면한다. 외부적 문제도 힘들지만 내부적 분열은 더욱 큰 문제를 가져온다. 내부의 갈등은 스스로를 붕괴시키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사도행전 6장 구조

  • 1-6절 일곱 집사를 세움
  • 7-15절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다 붙잡힘


사도행정 6장 강해

1-6절 일곱 집사를 세움


그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교회가 부흥하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항상 강한 빛은 강한 그림자를 동반하기 마련입니다. 모든 일은 장단점이 존재합니다. 교회가 부흥하자 문제들이 하나씩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항상 사건을 볼 때 양면성을 동시에 보아야 합니다. 좋은 점이 있으면 나쁜 점이 있고,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는 법입니다. 그것을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건 그럼에도 교회가 점점 성장해 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문제 발생을 극단적으로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대로 둔다면 그것은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원망하니


이 구절은 약간 모호합니다. 전통적으로는 헬라 과부들에 구제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지만, 헬라파 과부들이 구제에 동참하지 못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선한 일에서 제외하여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을 말합니다. 어느 것이 정확한지는 문맥에서 파악하기 힘듭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든 헬라파 유대인들이 차별을 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 이 사건은 사도행전의 전부의 핵심적인 의미를 부여합니다. 현재까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유대인들 안에 헬라파와 히브리파가 나뉘어져 있으며, 이것이 교회의 분란의 소지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헬라파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로 유대인들이지만 아람어(히브리어)를 잘 모르고, 그리스어를 사용합니다. 이들은 또한 율법에 철저하지 않고 관용적인 편입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히브리파 유대인들에게 차별아닌 차별을 당했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습니다.


일의 우선순위


당시만 해도 사도들이 교회의 재정, 손님 접대, 구제 등등이 모든 관리들을 도맡아 했습니다. 사람들이 적을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은 위기를 가져왔고 결국 교회 안의 갈등이 조성된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 문제를 억지로 덮으려 하지 않고 자신들의 사역을 성찰하기에 이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직접 모든 일을 하기에 부적합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자신이 반드시 해야 할 일과 타인에게 맡겨도 되는 일을 구분하고 분리했습니다. 그리고 지도자를 뽑아 자신들이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구제나 행정의 일부를 맡기기로 한 것입니다.


교회가 성장하려면 권리의 위임 또는 리더십의 증여가 불가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정체기를 맞이하고 결국 몰락의 길로 떨어지기 십상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도들이 기도하지 않았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모든 일에 기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나는 사도들이 기도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기도에 대한 언급이 없는 이유는, 모든 문제를 영적으로 풀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과 영적 안목도 주셨지만 이성적인 판단력과 상식도 주셨습니다. 위대한 모세도 재판석에 하루 종일 앉아 있는 어리석음을 행할 때 이드로가 조언하여 조직을 효율적으로 바꾸었다는 점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3절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사도들이 자신들 마음대로 임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일곱 집사를 선택하는 권리를 교인들에게 위임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목사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자신 가까이에 두면서


하나님의 뜻'이라는 거짓말로 교인들을 억압하는지 모릅니다. 성령에 충만했던 사도들도 교회의 직분자를 뽑을 때 관여하지 않고 교인들이 합의하여 원하는 대로 선출하게 했다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도자의 조건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며,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말하며, 지혜는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며, 결국 이러한 조건들은 사람들로부터 칭찬받게 한다는 점입니다. 즉 평신도 지도자들은 주변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일곱 집사의 선택으로 결과는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보이지 않는 영적 능력이나 힘에만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해도 하나님의 것이고, 바다도 하나님의 것이며,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제사장만 거룩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 사용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역은 구분되어 있고,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사도들이 자신들의 본업인 기도와 말씀에 집중하자 놀라운 일이 발생합니다. 말씀이 더욱 왕성해진 것입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구경하게 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에 동참하게 하십시오.


7-15절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다 붙잡힘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스데반은 일곱 집사 중 한 명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집사 중에서도 매우 탁월한 능력을 가진 제자로 보입니다. 그는 교회 안에서의 사역뿐 아니라 표적을 행하는 능력을 가진 자였습니다. 7장으로 넘어가면 긴 스데반의 설교가 나오고 후에 돌에 맞아 죽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예루살렘 안에서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유대인을 분리하여, 헬라파 유대인들은 이방 지역으로 흩어지게 하여 복음이 폭발적으로 널리 증거 되게 됩니다. 스데반은 말씀을 깊이 파고들었고,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열심을 품은 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와 더불의 권능을 가진 자였습니다.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스데반은 외부에서 온 사람들과 논쟁했습니다. 주의하여 읽으면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라고 말합니다. 즉 그들은 전통적인 유대교를 신봉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스데반과 논쟁하여 이기지 못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사람들을 매수하여'(11절) 말하게 합니다. 아마도 말 잘하는 변사를 대동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데려온 사람들은 논쟁이 아닌 거짓 증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스데반이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말합니다. 논쟁에서 이기지 못하자 거짓 증인으로 스데반을 몰아갑니다.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스데반을 공회에 세워 거짓 증인들로 하여금 증언하게 합니다. 그들은 성전과 율법을 모독하는 말을 했다고 말합니다. 성전 모독에 대한 것은 예수님께 해당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무너뜨리면 자신이 사흘 만에 일으키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요한은 후에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었음을 밝힙니다.


  • 요 2:19-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스데반은 성령에 충만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공회의 사람들이 스데반을 보자 천사와 같았습니다. 거짓으로 스데반을 죽이려 하고 모독하지만 하나님은 스데반을 천사와 같게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5장 강해

 사도행전 5장 개요

5장은 교회의 확장으로 인한 내부적 문제와 외부적 문제에 직면하는 것을 다룹니다. 초반부는 아나니아 삽비라가 성령을 속이는 일이 일어나고, 공회 앞에서 부활의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사도행전에 소개되는 베드로의 세 번째 설교입니다. 베드로는 한 결같이 부활의 주님을 증언함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성경에서 예언하고 기대했던 바로 그 메시아라고 소개합니다. 유대인들이 죽였지만 사흘만에 부활하셨음을 강조합니다.


사도행전 5장 구조

  • 1-6절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죽음
  • 12-16절 사도들의 치유 사건
  • 17-32절 붙잡힌 사도들와 베드로의 변증
  • 33-42절 가말리엘의 중재


사도행전 5장 강해


1-6절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죽음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의 이야기는 교회의 부흥을 통해 일어나는 잘못된 신앙에 대한 경계입니다. 시작은 좋지만 그릇된 방법으로 신앙심을 포장하려는 잘못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소유를 팔아


두 사람은 시작은 좋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 교회에 바치기로 합니다. 4장 36-37절을 보면 구브로에서 온 바나바가 자신의 재산을 팔아 교회에 바친 것을 소개합니다. 이러한 일이 많은 사람들에게 본이 되었고, 칭송을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두 사람도 기꺼이 자신들의 재산을 팔아 하나님께 드리려고 합니다. 문제는 그다음에 일어납니다. 재산이 너무 아까운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부만 바쳐도 됩니다. 하지만 이들은 전부를 바친 사람으로 칭송받고 있은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시작은 좋았지만 결국 나쁜 결말을 맞이하고 맙니다.

  • 아나니아,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
  • 삽비라, 아름답다
 
두 사람의 이름은 매우 아름다우며 은혜롭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름처럼 행동하지 못했습니다.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는 서로 공모하지 않았지만 암묵적으로 합의 했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말입니다. 누군가 잘못을 했다면 말려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죄악을 행하다면 동조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흥하는 교회 안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집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감추다'(챙기다)의 '에노스피사토(ἐνοσφίσατο)'는 여리고성에서 전리품을 훔친 아간의 범죄를 표현하던 단어와 일치하고 있습니다.(LXX)

  • ἐνοσφίσατο : 원형은 노스피조(νοσφίζω)이며, 5:2,3, 딛 2:10에서 세 번 사용되었다. 일반 문학에서는 '훔치다' '횡령하다' '은밀하게 자신의 용도에 맞게 조작하다' 등의 의미를 사용되었습니다.
 

성령을 속이고


참 무서운 말입니다. 베드로는 칭찬을 하지 않고 아나니아의 마음 속에서 사단이 그를 조종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선하고 아름다운 행위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속에는 악의적인 것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현시적 착함에 속지 않습니다. 그 안에 숨겨진 악과 죄를 보십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나
4절을 보면 아나니아가 얼마나 긴 시간 이 문제를 고민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짧은 한 문장으로 표현되어 곧바로 실행된 우발적 판단으로 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땅이 그대로 있을 때' '판 후에도' 즉 긴 시간 땅을 팔기 위해 땅을 내 놓는 기간 동안, 팔고 나서 교회에 돈을 바치기 전까지의 모든 시간 동안 생각하고 결정한 시간이 충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나니아는 속일 마음을 바꾸지 않은 것입니다. 교회가 바치라고 한 것도 아닌데고 아나니아는 계속하여 속일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것은 아나이가 더 이상 돌이킬 마음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각적인 심판


놀라운 것은 '혼이 떠나다'는 '죽다'는 뜻으로 현재분사 형태로 '에케쉬켄(ἐξέψυξεν)'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말이 나오자 즉각 숨을 거두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을 모릅니다. 누군가는 발작이니 심장마비니 하는 말을 하지만 아무도 모릅니다. 결과론적으로 그가 곧바로 숨을 거두었다는 것입니다.

삽비라의 죽음


아나니아가 죽고 곧 이어 삽비라가 들어옵니다. 베드로는 삽비라를 보고 동일한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삽비라 역시 아나니아처럼 '예 이것뿐이라'(8절) 말합니다. 성령을 시험한다는 말은 성령의 능력와 지혜에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성령을 속이자 자신의 죄를 숨기려는 탐욕으로 거룩한 공동체에 머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교회는 한 성령을 받은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시신을 싸고(6절),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고대 이스라엘에서 남성의 시신은 쌌지만 여성의 시신은 남성들이 싸지 않았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은 탐욕으로 감추어진 기만행위를 폭로함으로 교회의 거룩성을 윻지하는 역할을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교회는 얼마든지 죄의 공격을 받을 수 있으며, 계속 될 것을 암시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교회가 죄에 대해 즉각적으로 처리하지 않으면 타락할 수 밖에 없음을 말해 줍니다.


12-16절 사도들의 치유 사건


표적과 기사가


사도들은 작은 예수들입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시고, 자신의 능력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너희가 나보다 더한 일을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들이 손을 통해 병든 자가 일어나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14절)아 졌습니다.


그의 그림자라도


사람들이 병든 사람을 메고 와 거리에 누일 때 베드로가 지날 때 그림자라도 덮일까 기대했습니다. 베드로에게 많은 능력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그 시대가 고통스럽고 아픈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아픔을 보듬어 주는 살마들은 없었습니다. 제사장드로 사두개인들도 바리새인들도 모두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존재하는 이익집단이었습니다. 그동안 백성들은 넘어지고 헐벗고 고통을 당했습니다. 사도들은 그들의 중심으로 들어갔고, 주님의 능력으로 그들을 치유해 나갔습니다.


칭송을 받았더라


사람들은 사도들과 친해지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권세자들이 사도들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사도들을 칭송했습니다. 사도들이 옳은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아무나 오는 곳이 아니라 악의 권세 대항하고, 정의와 공의를 위해 철저히 희생하는 집단입니다. 교회는 필연적으로 자기 부인을 통하 자멸적 집단입니다. 교회는 스스로 죽기를 각오해야 하고, 권력의 억압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들과 타협하는 순간 교회는 사단의 회가 되고 맙니다.


17-32절 붙잡힌 사도들와 베드로의 변증


시기가 가득하여


놀랍습니다. 이 단어는 예수님께도 사용된 단어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받아야 할 칭송과 인기를 사도들이 가져가자 분노하고 시기합니다. 그다음은 불 보듯 뻔합니다. 핍박할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은 소위 가장 높은 직급을 가진 자들이고 성전에서 일하는 자들이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물속에 있지만 물이 조금도 스며들지 않는 단단한 돌과 같습니다.

가서 성전에 서서


그들을 옥에 가둡니다. 하지만 주이 천사가 베드로를 꺼내 주면서 성정에 가서 생명의 말씀을 전하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사도의 일입니다. 핍박 속에스도 두려워하지 않고 주의 복음을 전하는 것.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 일이 어찌될까?



사도들이 사라진 것을 보고 그들은 속으로 무척 놀랐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함이 마땅하도다


사도들을 공회 앞에 끌고 와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도록 엄히 경고합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께 순종함이 마땅하다 말하며 거절합니다. 예수를 '너희가' 죽였고, 하나님이 살리셨고, 하나님께서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닥 말합니다. 즉 우리가 순종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오른손
29절부터 31절까지는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부분은 '오른손'인데, 하나님의 오른손을 말합니다. 오른손은 그 사람의 전부를 뜻하는 동시에 강력한 힘을 뜻합니다. 특히 이 표현이 하나님께 사용될 때는 구원하심으로 해석합니다.
  • 출애굽기 15장 6절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 시편 17장 7절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
  • 시편 20장 6절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의 오른손의 구원하는 힘으로 그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 응답하시리로다
  • 이사야 62장 8절 여호와께서 그 오른손, 그 능력의 팔로 맹세하시되 내가 다시는 네 곡식을 네 원수들에게 양식으로 주지 아니하겠고 네가 수고하여 얻은 포도주를 이방인이 마시지 못하게 할 것인즉


33-42절 가말리엘의 중재


크게 노하여


베드로의 변명을 들은 그들은 분노하여 사도들을 죽이려 듭니다. 결국 모든 잘못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베드로의 말에 동조할 수 없었고,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그들의 실체입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탐욕이 가득하고 시기가 가득한 자들입니다.


가말리엘이



그때 가말리엘이 일어나 제안을 하니다. 가말리엘은 지금의 문제만 보지 말고 하나님께서 일하고 있음을 보자는 것입니다. 굉장히 지혜롭고 차분한 사람입니다.

가말리엘 덕분에 사도들은 무사히 놓임을 받게 됩니다. 가말리엘은 냉청하고 신신한 믿음의 소유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는 도달하지 못합니다. 좋은 성품과 많은 지식이 분명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생명을 주지는 못합니다.


 



사도행전 4장 강해

 사도행전 4장


개요

성전에서 예수님의 부할을 전하던 사도들을 발견한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이 사도들을 붙잡아 옥에 가둡니다. 이튿날 그들은 사도들을 불러 누구의 이름으로 하느냐고 묻자 베드로는 예수의 이름으로 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전하지 못하도록 경고하고 돌려 보냅니다.


사도행전 4장은 교회의 시작 이후 공권력의 첫 저항에 부딪히는 내용입니다. 그들은 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싫어 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결국 자신들의 욕망을 위하여 진리를 부정하고, 진실을 거절하게 됩니다.


구조

  • 1-4절 옥에 갇힌 사도들
  • 5-12절 베드로의 변증
  • 13-22절 공회의 경고
  • 23-31절 신자들의 기도
  • 32-37절 신자들의 생활


사도행전 4장 강해


1-4절 붙잡힌 사도들


사도들을 붙잡은 사람들의 정체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 사두개인들이 들이 닥쳤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전하는 두 사도가 너무 싫었습니다. 사도들을 잡으러 온 이들은 사두개인으로 대표되는 인물들로 친로마적 정치꾼들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죽음 이후 부활을 믿지 않는 현세 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죽이라고 외친 주범들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기이한 것은 평민 출신의 바리새파는 철저히 율법을 지키고 끊임없이 새롭게 해석하여 부활을 믿은 반면 유대교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은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은 부활도 영적인 것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 요즘 유대인들이 우리 눈에 보기에 거의 무신론자와 비슷해 보이는 가는 이러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남자의 수가 오천이나 되었어라(4절)


당시에 사람의 숫자는 성인 남자가 기준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린아이와 여자들은 숫자에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숫자 개념은 유대인뿐 아니라 모든 세계가 통용되는 일반적인 방법입니다. 하지만 숫자에 들어가는 기준은 조금 다릅니다. 고대 세계에서 숫자는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숫자지만 유대인들은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개념입니다. 율법에도 20세부터 60세까지의 남자는 속전으로 매년 50세겔을 내야 했습니다. 남자의 숫자 오천은 적어도 3배수를 하면 일만오천 명 정도로 보입니다.


5-12절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공회가 모였습니다. 관리들과 장로들, 서시관들로 표현합니다. 이들은 대부분 사두개인들이 친로마적 정치인들입니다.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대제사장 문중이 모두 참여합니다.

무슨 권세로


사도들에게 던진 첫번째 심문은 '무슨 권세'로 부활을 전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묻는 이유는 자신들이 성전의 책임자고 통제할 권리가 있는데 도대체 누구로부터 허락을 받고 복음을 전하느냐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곧바로 응답합니다. 베드로는 예수의 부활을 언급하면 그 예수가 부활하였고, 그 이름으로 병자를 고쳤다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시편 118편 22절을 인용하여 건축자의 버린 돌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가 결국 집 모퉁이 머릿돌이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집의 기초이자 완성은 머릿돌입니다. 모든 역사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12절)


건축자의 버린 돌


성경 안에서 '건축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사도행전 4장 안에서 건축자는 유대인 관리들로 보입니다. 하지만 두 가지 모두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께 버림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버림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간섭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관리 또한 건축자 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죽기까지 한 장본인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핵심은 건축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머릿돌에 있습니다. 모든 건물은 기초이자 완성은 머릿돌에 있습니다. 머릿돌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건물의 크기가 정해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머릿돌은 네 축에 들어가는 모퉁이돌을 말하며, 기둥의 힘을 받치는 가장 크고 단단한 돌을 말합니다. 즉 기초석이자 건물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이 모퉁이돌입니다.


13-22절 공회의 결정


베드로의 담대한 변증에 모두가 놀랍니다. 그들은 베드로는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지만 예상외의 답변에 뒤로 물러납니다. 그들은 서로 의논합니다. 누가는 그들이 변명한 여지가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말을 사실이며, 치유를 받은 사람이 곁에 있기 때문이고, 이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회는 명백한 사실 앞에서도 진리를 거절합니다. 오히려 베드로에 경고하고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 명합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담대하고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면 반박합니다. 성령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진리를 위해 뒤로 물러서지 않는 베드로의 모습을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우리를 각성 시킵니다.


23-31절 함께 기도하다


두 사도는 놓임을 받고 함께 하는 동료들에게 갑니다. 성전에서 행한 기적과 당한 일을 보고합니다. 그리고 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고백


그들은 먼저 하나님께 대해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대주재시며,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신 분입니다. 주재는 헬라어로 데스포테스(δεσπότης) 주관자란 뜻으로 주인과 통치자의 의미를 포괄합니다. 창조주요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심을 명백히 합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고백이 필요합니다. 
 

분노하는 열방


이제 시편 2편을 인용하여 하나님께 대항하는 이방민족들과 군왕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유대지도자들로 변했다고 말합니다. 겉으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고 제사장이지만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다. 헤롯과 본디로 빌라도는 예수님을 정치적으로 죽인 원흉들입니다. 참으로 그들은 자신의 정치적 야욕과 욕망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27절)를 대적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고 어리석은 일인지요.


하나님의 권능을 보이소서


이제 사도들인 하나님의 권을 나타내도록 간구합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2.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고, 
  3. 표적과 기사가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사도들의 기도는 예수님이 행하신 것을 그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작은 예수 살아갑니다. 사도행전은 오순절을 통해 성령의 강림이 이루어지고, 그 성령을 받은 자들은 땅 끝까지 이르러 부활의 증인이 됩니다. 증인은 '권능'을 갖고 말씀을 전하고, 치유하고, 표적과 기사를 행합니다. 성전 미문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도 그렇고, 그로 인해 부활의 주님을 증언하는 사도들의 삶을 통해 드러납니다.


진동하더니


기도를 마치자 모인 곳이 진동했습니다. 구약에서 진동은 하나님의 현현과 능력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다른 표현입니다.


32-37절 물건을 통용하다.


이곳에 초대교회 특징 세 가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 세 가지는 한 마음이 되고, 증언하며, 나누는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1) 한 마음의 공동체


욕심은 생각을 갈리게 합니다. 욕망을 서로를 헐뜯게 합니다. 하지만 성령 안에서 모든 것이 하나입니다. 진리를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한 마음을 품게 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교회가 하나임을 강조하며, 한 성령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 중 일부입니다.

  • 고전 12: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 고전 12:8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 고전 12: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 고전 12:10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 고전 12: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2) 증언하는 공동체

33절에서 사도들은 공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공동체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 참 생명이 있고, 진정한 소망이 있다면 당연히 전해야 합니다.


3) 나누는 공동체


초대교회는 놀라웠습니다. 그들은 서로 문건을 서로 통용하여 자기의 재물을 자기 것이라 말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사도들은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사도행전 안에서 증거 또는 증인은 1:8의 성령 충만의 결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밭과 집을 팔아 교회 가져왔습니다. 이때 구브로 출신 레위족 바나바가 재물을 바칩니다.

사도행전 3장 강해

 사도행전 3장 개요

사도행전 3장은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갈 때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이를 예수의 이름으로 고쳐준 사건을 다룹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 있아 있던 앉은 뱅이가 일어나 걷자 사람들이 놀라 베드로를 주목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주목한 사람들에게 너희가 죽이기로 결의한 예수 그리스도가 낫게 했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에 죽었다가 살아날 것을 이미 예언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3장 구조

  • 1-10절 구걸하는 앉은 뱅이를 치유하다.
  • 11-26절 예수는 성경에서 약속한 메시아다.


사도행전 3장 강해


1-10절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러 올라가는 두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제 구시 시간에 성전에 올라갑니다.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 기도합니다. 구시는 아침에 드리는 기도이며 번제를 드리는 시간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갔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유대교를 완전히 버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삶으로서의 유대교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에게 기도는 집이나 거리에서도 하지만 그러한 기도와 성전에서 하는 기도는 차원이 다른 개념입니다. 성전은 정식적인 것이고, 다른 곳은 불가피하게 기도하는 장소 정도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가능한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는 것을 기뻐했고, 또 그렇게 했습니다.


성전 미문의 앉은 뱅이


이 때 나면서 못 걷게 된 사람들을 사람들이 메고 와서 미문 앞에 놓습니다. 구걸하기 위해서입니다. 미문은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장애인은 율법적으로 흠이 있어 성전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전으로 들어가는 이들에게 구걸하기 위해 문 앞에서 구걸했습니다.

  • 신 23:1 고환이 상한 자나 음경이 잘린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 신 23:2 사생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십 대에 이르기까지도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 신 23:3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제3성전인 헤롯성전에는 헤롯에 의해 개축과 증축이 이루어지면서 아담했던 성전이 화려해졌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의 구역을 나눔으로 엄격하게 관리했습니다. 지성소는 1년에 딱 한 번 대 제사장만 들어갑니다. 성소는 제사장들이 떡상과 금잔대를 위해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들어갑니다. 


성전의 안뜰은 유대인의 온전한 남성만 들어가고, 바깥뜰은 여성과 장애인 유대인, 이방인들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애인이었던 이 남자는 바깥들(엄밀하게 말하면 성전이 아닙니다.)에 늘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는 베드로와 요한을 발견하고 구걸합니다. 구걸은 늘 해왔고, 구걸을 통해 그는 생존해 왔기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에게도 여전히 구걸합니다. 앉은뱅이에게 있는 삶의 관성을 주의해 봐야 합니다. 우리도 여전히 죄의 관성에 붙들려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어나 걸으라


두 사도가 구절하는 사람을 주목합니다. 베드로 그 사람을 향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베드로의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물질의 소유는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있습니다. 그 이름인 앉은뱅이를 낫게 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이


뒤에 베드로가 다시 길게 설명하지만 이 부분에서 조금 생각해 봅시다. 앉은뱅이는 날 때부터 장애를 가졌기 때문에 단 한 번도 성전 안뜰 안으로 들어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늘 성전의 바깥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그는 발목의 힘을 얻어 일어나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과정은 '성전으로 들어가면서'(8절) 한 것입니다. 즉 그는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정말 성전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것이 기적이고,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참으로 차별의 담을 허물고, 긍휼의 성전을 세웠습니다.

11-26절 예수의 이름이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 붙잡았습니다. 사람들이 그 사람의 모습을 깜짝 놀랍니다. 사람들은 두 사도에게 달려들어 솔로몬 행각이라는 곳에 모였습니다. 베드로가 그들이 모인 것을 보고 설교를 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12절)


사람들이 왜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注目) 했을까요?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눈으로 직접 보고 너무나 놀랬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일어난 기적과 이적은 구약 시대에서만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선지자들이 일으켰던 놀라운 기적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입니다.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본 것이죠.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기 전 사람인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기적과 이적을 보면서 그것을 행하는 사람에게 주목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과 이해력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인간들이 실수와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서 설교하기 시작합니다.


13-16절 부활하신 그리스도


13절을 보면 ‘베드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예정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자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했다고 말합니다. 입으로는 예수님을 살리신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부활이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신 사건입니다. 베드로는 너희가 죽게 빌라도에게 넘겨주어 죽게 한 그리스도 예수가 이 사람을 살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를 빌라도에게 넘겨줌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주를 죽었다 설교합니다. 그들의 죄를 감추지 않고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17-26절 회개하고 돌이키라


너희가 알지 못했다.(17절)


베드로는 너희가 알지 못해서 그랬다고 말합니다. 또한 너희 관리들도 모르고 했다는 것입니다. ‘모른다’라는 말은 ‘그들이 죄가 없다’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그 뜻과 계획을 알지 못했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의 역사는 우리가 알지 못하게, 우리가 생각지 못 하게, 또한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선지자의 예언(18절)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것이 아무런 죄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권한 받으실 것을 우리에게 이미 알렸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성경에 깊이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고 내 생각대로 내 계획대로 욕심대로 살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말씀대로 살 수 있는 능력과 지혜와 믿음이 없습니다 이것이 자연적인 인간의 한계입니다.


회개하고 돌이키라(19절)


베드로는 이제는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이것은 새롭게 되는 날이라고 표현하는데 주로부터 이를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의 헬라어 '퀴리오스'는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원래 구약 히브리어 ‘주’를 뜻하는 ‘아도나이’는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그 ‘주’라는 말을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예수님께로 옮겨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를 보내리니(20절)


주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시니 여러분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다는 일 놀라운 계획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 보면 말씀과 하나님이 곧 하나라는 사실 올 얘기해 주고 있는데 베드로는 구약의 하나님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다라는 표현을 통해서 성부와 성자 하나님의 관계를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하나님이다 또한 성령 하나님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내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신 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21절 - 26절


베드로는 구약에서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21절은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라고 말합니다. 구약의 말씀을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갑자기 오신 것이 아니라 이미 선지자들 통해서 하나님께서 오래전에 약속하셨고 그 약속하신 것이 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나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말합니다.


‘받아준다 ’라는 말은 아직까지 ‘계시하지 아니한다’ ‘드러내지 아니한다’ ‘때를 기다리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때가 되자 예수 그리스도를 땅에 보내주셨고 그 보내 주신 예수 그리스도 너희가 죽였고, 너희가 죽인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살리셨고, 그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이 사람을 낫게 했다’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장별강해 및 강해목록


사도행전 2장 강해

 사도행전 2장 개요

2장은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한 사건과 그로인해 사람들이 회개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예수의 천상통치의 시작이자, 방법이다. 성령은 각 제자들에게 임함으로 각자의 위치에서 예수의 사역을 감당하게 된다. 각자 다른 몸을 지녔지만 한 성령으로 하나 된다. 신약교회의 가장 핵심이 성령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필자는 아래와 같이 2장을 구분했다. 여기서 14-42절까지는 하나로 묶어야 하지만 분량이 너무 많이 두 부분으로 구분한 것이다.


사도행전 2장 구조

  • 1-13 오순절의 성령강림 
  • 14-36절 베드로의 설교 
  • 37-42절 회개와 세례 
  • 43-47절 새로운 공동체


사도행전 2장 강해


1-13 오순절의 성령강림


오순절(Πεντηκοστή)


오순절(펜테코스테, Πεντηκοστή)은 유월절 이후 7주가 지난 다음날로 만 50일이 되는 날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삼대 절기가 있는 데 유월절(Passover) 칠칠절(Pentecost 오순절) 초막절(Tabernacle day) 또는 장막절입니다. 유월절은 유대력으로 1월(태양력 3,4월경)이고, 칠칠절은 유대력으로 3월(태양력으로 5.6월)이고, 초막절은 유대력을 7월 15일(태양력 9.10월)에 있다. 이중 가장 중요한 절기를 우리나라 설과 같은 유월절이다. 3대 절기는 반드시 지켜야 할 절기들입니다.


유월절은 무교절 하루 전날이고, 무교절은 일주일동안 계속됩니다. 3대 절기에는 속하지 않지만 무교절 안에 초실절이 있습니다. 유월절은 유대력으로 1월 14일이고, 무교절은 15부터 21일까지 이어지는 초실절은 유월절을 지난 후 첫 안식후 첫 날입니다. 태양력으로 하면 월요일이 되는 것입니다. 세 절기는 8일에 걸쳐 치러지는 큰 절기인 것이다. 

오순절은 첫 이삭을 드린 후 오십일일 때 되는 날이며 추수가 마무리되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오순절은 추수와 깊은 연관이 있으며, 열매를 거두는 날로 축제의 시간인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오순절 사건을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초실절(Feast of Firstfruits)

초실절의 유래가 성경에는 정확히 표현되어 있지만 학자들은 초실절이 유월절의 어린양이 죽은 후 안식 후 첫날이기에 신약의 저자들은 예수님의 부활과 초실절을 연관지어 설명했습니다. 바울은 고전 15:20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바벨론 포로 이후 이스라엘의 절기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유월절은 가장 중요하게 여겼고, 귀환 이후 지켜집니다. 하지만 다른 절기는 잘 지켜지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신앙심이 깊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위해 예루살렘에 들르면 대체로 한 달반 정도를 기다렸다 오순절까지 지키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외국에 있는 사람들이 한하여. 그래서 유월절만큼은 아니지만 오순절을 다른 절기에 비해 상당히 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상주했습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


오순절 날이 이르자 이들은 한 곳에 제자들이 한 곳에 모였다. 이들은 모인 곳은 마가의 다락방이 아니라 성전입니다. 그들은 기도하게 위하여 성전에 모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은 성전을 배경으로 합니다. 사람들이 큰 착각하는 것의 하나가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할 때 성령이 임했다고 하고 하지만 전혀 아닙니다. 그들이 다락에 있었다면 성령 충만한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었고, 그들은 비판도 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성전에 오순절을 기념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일 때 갑자기 하늘로부터 강한 바람이 불고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충만을 받고 곧바로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른 언어로’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 소리를 천하 각국에서 모인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듣는다. 그들은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란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유의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른 언어는 우리가 교회에서 이상한 소리로 말하는 방언이 아니라 그냥 다른 지방의 언어였기 때문입니다. 즉 로마어, 아람어, 헬라어, 페르시아어를 말한다. 깜짝 놀랐던 이유는 토박이 유대인들이 외국의 언어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당시 로마의 식민지라 교류가 많아 다른 언어를 쉽게 구사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후에 바울이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서원을 마치는 의식을 행할 때 유대인들이 바울을 발견하고 그를 죽이려 합니다. 천부장이 소동이 일어난 것을 알고 달려옵니다. 그때 바울이 천부장에게 헬라 말을 하자 천부장이 놀라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고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 행 21:37 바울을 데리고 영내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 이르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이것은 유대인들이 다른 언어를 말하는 것은 굉장히 특이한 것 중의 하나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강한 바람과 불의 이미지는 갈멜산의 엘리야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구약 안에서 이러한 현상들은 종말론적 현상으로 하나님의 임재와 심판 등에 관련되어 하나님의 현현의 한 증상들입니다. 종말은 이전 시대의 종말이며,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큰일


11절에서 하나님의 큰일(μεγαλεῖα τοῦ Θεοῦ)을 말한다고 합니다. 구약 속에서 하나님의 큰일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를 말합니다. 그래서 ‘큰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등의 표현들은 적국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회복시키는 일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역사를 ‘하나님의 큰일’로 표현했을 것입니다.


언어의 통일


사람들은 놀랐고, 어떤 사람은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했습니다. 여기서 놀란 것은 ‘갈릴리 사람’(7절)들이 각 국 즉 외국어로 복음을 전하기 때문이다. 누가는 오순절 성령 강림이 이미 약속된 것이며, 구약에서 예언한 것임을 강조합니다. 즉 이것은 갑자기 일어난 황당한 사건이 아닌 것입니다. 그들의 조롱 속에는 말씀에 대한 무지와 형식에 치우친 외형적 신앙의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언어의 통일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를 곧장 창세기 11장으로 돌아가 '언어의 혼잡'을 일으킨 바벨탑 사건을 생각나게 합니다. 악은 흩어지게 하시고, 선은은 모아 힘을 발휘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봅니다.


14-36절 베드로의 설교


베드로가 그들의 조롱과 의구심을 풀기 위해 일어나 설교한다. 베드로의 설교 핵심은 구약의 예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응했다는 것이다.


첫 번째 논증 지금은 제 삼시다.


즉 오전 9입니다. 그러니 이들이 아침부터 술을 마시고 성전에 온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술은 인간의 이성을 마비 시키고 잘못된 행동을 유발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에 술을 마시며 중언부언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한 때 한나가 기도할 때 엘리는 술취한 여자로 보았습니다. 이처럼 성전에서 술 취하는 것은 대단히 큰 실례를 범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논증, 요엘의 예언


두 번째 논증은 요엘 2:28-32을 인용합니다. 그곳에서 마지막 날에 성령을 부어주실 것을 약속하고 있다. 바로 그 약속이 성취 것이다. 요엘은 마지막 때에 성령이 부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현현이 드러날 것임을 예고한다. 요엘서의 인용은 출애굽기의 재앙과 깊은 연관이 있으며, 세상을 심판하고 택하신 백성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획이 시작되었음을 말한다.


사도행전 2:17-21 

  • 사도행전 2: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 사도행전 2:18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 사도행전 2:19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 사도행전 2: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 사도행전 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요엘 2:28-32 

  • 요엘 2: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 요엘 2: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 요엘 2: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 요엘 2: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 요엘 2: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하나님의 영은 남종과 여종에게 임한다. 구약에서 여종에 성령이 임하는 경우는 없다. 사실 부분은 주의해서 독해할 필요가 있지만 문자적으로 본다며 신약에서는 구약의 차별이나 구분이 명백히 사라질 것임을 말한다. 해가 빛을 내지 못하고, 달이 피로 변한다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 파괴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현현 앞에서 모든 만물은 자신의 힘과 능력을 상실한다. 종말론적 환상은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었음을 말한다. 출애굽 재앙 때 흑암재앙은 이러한 하나님의 현현으로 인한 세상의 종말을 뜻한다. 십자가의 사건 때 잠시 동안 빛이 사라진 사건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세 번째 논증, 다윗의 예언


세 번째는 다윗이 시편 16편에서 고백한 내용을 바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았단 다윗을 통해 앞으로 일어날 일을 계시했다고 말한다. 다윗이 예언한 곳은 시편 16:8-11이다.


  • 시편 16: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 시편 16:9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 시편 16:10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 시편 16: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베드로는 이 본문을 통해 부활을 증명합니다.(31절) 시편 16편은 메시아 시편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시편 16편은 사실 많은 연구가 필요한 시편 중의 하나입니다. 분명한 것은 다윗은 자신의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않으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학자들마다 해석의 폭이 넓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다윗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듯한 표현은 예수에게 적용 시킴으로 다윗과 예수를 동일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고백한 내용이 곧 예수의 고백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31절에서 다윗의 예언을 그리스도의 부활을 미리 본 것으로 해석합니다. 다윗은 1500년 전에 미리 예수의 부활을 환상을 통해 본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해석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갖는 정통성을 옹호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의지로 실현된 것으로 주장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 논증, 다윗의 시편 110:1


  • 시편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원수가 '네 발판'이 된다는 표현은 전쟁에서 승리한 왕을 밟로 밟음으로 승리했음을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베드로는 시편 110편을 인용하여 원수를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죽음을 정복했음을 강조합니다. 부활은 죽음까지 완전히 이겨 승리한 것입니다.


37-42절 회개와 세례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아 ‘우리가 어찌할꼬’를 외친다.(37절) 베드로는 그들에게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고 말한다. 그 후에 성령의 선물을 받을 것이라 말한다. 그날에 세례 받은 이들이 삼천이었다.(41절)


마음의 찔림은 각성이요 완전한 생각의 전환이다.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면 가장 먼저 고통을 느낀다. 고통은 살아 있다는 증거다. 그들이 무지에서 벗어나고 영혼이 살아나자 지금까지 느끼지 못한 고통을 느낀다. 영적으로 더 깊어 질수록 사람은 작은 죄에도 예민해지고 고통을 느낀다.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느끼는 것을 크게 느낀다.


그들이 세례를 받고 행한 것은 1)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고, 2) 서로 교제했고, 3) 떡을 뗐고, 4) 기도했다. 하지만 원어는 떡을 떼며 교제했다고 말하나. 교제는 성만찬을 통한 교제를 말한다.


ἦσαν δὲ προσκαρτεροῦντες τῇ διδαχῇ τῶν ἀποστόλων καὶ τῇ κοινωνίᾳ, τῇ κλάσει τοῦ ἄρτου καὶ ταῖς προσευχαῖς.


43-47절 새로운 공동체


오순절 이후 새로운 공동체가 된 이들을 설명합니다. 새로운 공동체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고정된 특징이 아니라 임시적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럼에도 기독교 교회가 갖는 고유한 정신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항상 주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물건을 통용


첫 번째 특징은 그들이 물건을 통용한 것입니다. 그들은 다 함께 있었고, 물건을 서로 통용하여 한 공동체로 모이게 됩니다. 자신들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러한 특징들은 자신들의 목적이 소유에 있지 않고 나눔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간다는 것입니다. 주의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은 이들의 나눔과 통용은 누군가의 강요나 권유가 아니라 자의대로 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나누기에도 너도 너의 소유를 나누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자발적으로 나눔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 것입니다.


2) 마음을 나눔


46절에서는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하여 성전에 모였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여러가지 어려움과 힘듦이 있었음에도 성전에 모였습니다. 성전에 모여 찬양하며 예배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면 유대교를 떠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전에서 예배하는 것은 일종의 문화로서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은 신앙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3) 집에서 떡을 떼며 음식을 먹는다.


초대교회는 성찬식과 식사가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예는 고린도교회와 야고보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식사를 가져와서 교회에서 함께 거내 먹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일찍 먹고, 누군가는 과하게 비싼 음식을 가져와 분쟁이 있었습니다.


초기에 예수님을 믿은 이들은 집에서 식사를 같이 함으로 한 공동체로서의 직무를 다했고, 한 몸을 이루어 갔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한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장별요약 및 강해목록





사도행전 1장 강해

 사도행전 1장 개요

사도행전 1장은 데오빌로에게 전에 쓴 편지인 누가복음을 언급하고 예수님의 승천으로부터 맛디아가 뽑히는 것까지 다룹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 40일 동안 천국 복음을 전하시다 승천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승천 후 함께 모여 맛디아를 뽑고, 기도에 전념합니다.


사도행전 1장 구조

  • 1-11절 인사와 예수님의 승천
  • 12-26절 맛디아를 뽑다.

사도행전 1장 강해


1-11절 예수님의 승천


데오빌로


사도행전은 편지입니다. 사도행전 뿐 아니라 모든 신약은 편지입니다. 우리가 이 부분을 유념하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의 수신자는 데오빌로입니다. 데오빌로가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학자들은 다양한 의견을 내놓지만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몇 가지 염두에 둘 부분은 있습니다. 데오빌로는 귀족이나 왕족 등 신분이 높은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인일 가능성이 높고, 후에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살아 생전 다양한 일과 사도들이 행한 일들에 대해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 분명합니다. 신앙의 지적 호기심은 매우 건전한 것이며, 살아 있는 믿음의 증거입니다. 사랑하면 알고 싶어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승천하실 날까지


누가복음은 탄생과 어린 시절, 공생애 기간을 다루고, 마지막 부분에서 승천까지를 다룹니다. 마지막은 올라가시면서 '위로부터 능력을 입혀질 때까지'(눅 24:49)로 기다리는 말로 마무리됩니다. 2장에 등장하는 오순절 성령을 말합니다. 

사도행전 1장은 에수님의 승천 직전의 이야기를 드러내어 누가복음에서 듣지 못한 새로운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승천하시는 그 날까지 최선을 다하여 복음을 전하고, 제자들을 가르쳤음을 말해 줍니다. 하지만 육신적 예수님은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이제 곧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것입니다.


사십일 동안


부활 후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이후 승천하십니다. 40일은 이스라엘의 광야 시절을 상징합니다. 공생애를 시작할 때 40일을 금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처음과 끝이 40일로 감싸고 있습니다. 40일은 예수님의 철저한 순종과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신뢰를 의미합니다.


요한의 물세례, 예수님의 성령 세례


물은 씻음과 정결, 죽음과 탄생을 말합니다. 율법에서 물은 외부로부터 묻혀온 부정을 씻는 역할을 합니다. 정결의식을 통해 정결하게 되고 거룩한 삶으로, 공동체로 회귀합니다. 세례 요한의 물세례는 구약을 바탕으로 하는 동시에 신약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성령 세례는 물처럼 외부적 정결이 아니라 마음과 심령의 본질적 변화를 말합니다. 성령의 내주 하심으로 새롭게 태어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


이들이 말하는 회복은 마카비 시대처럼 지리적 정치적 독립을 말합니다. 그들은 아직도 하나님의 나라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기나긴 시간 동안 수많은 설교와 기적을 보았음에도 말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사도들입니다. 사도들조차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가를 잘 보여 줍니다.

진정한 회복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며, 새로운 물리적 땅이 아닌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고, 되고 있음을 그들은 알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그들 안에 있습니다.
  • 마태복음 12장 28절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때와 시기

이 구절은 모호합니다. 정말 후에라도 회복된단 말일까? 누군가는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을 말할런지 모르지만 그것과는 아무 상관없다. 일단 이스라엘의 독립은 예수님이 생각하시고 계획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와 아무 상관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것은 너희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단언하신다.


증인이 되리라


수동태형으로 성령이 임함으로 원하든 원하지 않든 증인이 될 것이다 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강권적으로 임합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뛰어넘어 역사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권능은 강력한 힘을 말합니다. 성령과 힘이 일치합니다. 증인은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다시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퍼져 나갑니다. 가장 먼저 예루살렘입니다. 이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증인은 변호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착각하여 예수님을 변호합니다. 잘못된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증인입니다. 증인은 자신이 보고 경험한 것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논리적이든 그렇지 않든 먼저는 자신이 경험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철저히 경험적 종교입니다. 경험 되지 않는 기독교는 거짓이며, 그는 증인이 아닙니다.


구름과 증인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며, 숨어 계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으로의 복귀, 천상통치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후에 구름 타고 다시 오십니다. 구름은 임재이며,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을 숨기는 동시에 드러냅니다. 시내산에서 어둠 속에서, 구름 속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기억해 봅시다.


흰 옷은 거룩과 결백, 순결을 의미합니다. 두 사람은 최소의 증인의 숫자입니다. 이들은 다시 오리라는 말씀을 합니다. 즉 증인입니. 이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다시 들려줌으로 확신 시킵니다. 흰옷과 증인은 동일한 맥락입니다. 증인은 거짓이 없어야 하고, 사실과 경험을 토대로 증언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말씀을 증언할 때 ' 두 사람의 증언'을 언급합니다. 예수님이 인용한 곳은 신명기 17:6 말씀으로 최소한의 증인 두 사람의 증언을 요구하여 재판하도록 명시하고 있습니다. 

  • 요한복음  8:17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되었으니
  • 신명기 17:6 죽일 자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으로 죽일 것이요 한 사람의 증언으로는 죽이지 말 것이며

승천하시는 예수님



12-14절 오로지 기도에 힘쓰다


감람원


올리브산을 말합니다. 이곳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모여 종종 기도했던 자리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걸을 수 있는 걸음을 이천 규빗으로 정했습니다. 감람원은 거기에 알맞은 거리라는 것입니다. 1규빗은 일반적으로 45cm이며, 길게는 50cm 정도입니다.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


학자들은 이곳이 마가의 다락방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추측일 뿐 분명한 것이 없습니다. 성경에는 여러 번 그들이 다락방에 모였다고 말합니다. 특히 예수님의 부활 이후를 소개하는 요한복음에는 부활 당일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떤 방에 들어가 있을 때 예수님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와 인사기도 합니다.(요 20:19)

  • 요 20: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제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사람들을 보면 모두 120명 정도로 소개합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 빌립 도마 바돌로매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곱의 아들 유다. 그리고 여자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까지 있습니다. 이 부분은 놀라운 부분입니다. 예수의 가족들은 예수님을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죽음과 부활 후 그들은 예수님을 믿은 듯합니다.


15-26절


베드로가 일어서서


베드로가 일어나 가룟 유다를 대신 하여 궐이난 사도를 뽑자고 제안한다.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뽑는 것이 옳은가는 학자들 간에도 논란이 많지만 잘한 것이다. 12는 완성수이며, 완전체다.


유다를 가리켜


유다의 죽음에 대해 성경이 예언한 부분을 언급한다. 시편 69:25와 시편 109:8을 언급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의를 기울일 부분은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입니다. 이 구절은 궐이 난 유다의 자리를 누군가 메꾸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 시 69:25 그들의 거처가 황폐하게 하시며 그들의 장막에 사는 자가 없게 하소서
  • 시 109:8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게 하시며

누군가는 맛디아를 뽑을 필요가 없다 말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들의 인식 속에 12에서 1가 사라지면 나머지도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완전체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1명을 추가하여 12를 채워야 합니다.

사도의 자격


사도는 요한의 세례부터 승천까지 예수님과 함께한 사람입니다. 즉 예수님의 모든 공생애를 함께한 자가 사도의 자격이 있습니다. 이것은 열두 사도 외에도 초기 공생애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했음을 말합니다. 22절에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입니다. 동거동락하면서 예수님과 함께 했던 자가 사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도는 '부활의 증인'이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십자가로 끝나지 않습니다. 부활이 있고, 승천이 있습니다. 부활을 통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제비 뽑아


두 사람을 추천합니다. 한 명은 바사바라 하는 유스도 요셉이고, 다른 한 명은 맛디아압니다. 그들은 기도하고 제비를 뽑습니다. 왜 민주적으로 투표하지 않을까? 제비는 하나님께서 응하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 잠언 16장 33절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잠언 18장 18절 제비 뽑는 것은 다툼을 그치게 하여 강한 자 사이에 해결하게 하느니라


이제 모든 것이 준비되었습니다. 이들은 열두 사도로서 복음을 증거 하게 될 것압니다. 



사사기 7장 강해

 사사기 7장 개요

양털 시험을 통해 확신하게 된 기드온은 드디어 전쟁을 개시합니다. 나팔을 불어 이만이천 명이 모였지만 300명 만을 남기고 돌려 보냅니다. 삼백용사는 항아리에 햇불을 숨기고 미디안이 깊은 잠을 자던 밤에 습격을 하여 승리합니다.


사사기 7장 강해


1-8절 삼백 용사를 선별하다


여룹바알


바알과 싸우다는 이름을 가진 기드온의 별명입니다. 6장에서 바엘의 제단을 허물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미디안 연합군과의 싸움은 엄밀히 말하면 바알과의 전쟁입니다. 적은 외부에 있지 않고 내부에 있습니다. 내부의 바알을 제거한 기드온은 반드시 미디안을 이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너무 많다.


드디어 전쟁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2절)다며 추려내라 하십니다. 많은 수로 싸우며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라 자신들의 능력으로 구원했다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합해도 미디안 연합군과 싸워 이길 승산이 없습니다. 미디안 연합군은 전쟁에 능한 용병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걸 모르실 리 없지만 그럼에도 '너무 많다'하십니다.

먼저 '두려워 떠는 자'는 길르앗 산에서 떠나 가라 하십니다. 길르앗 산이 어디인지 모호하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당시 그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이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길르앗에 있던 산인지, 별칭으로서의 '길르앗 산'인지 알 수 없지만 당시 기드온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요한 산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2만 2천 명이 떠납니다. 남은 자는 만 명입니다.

둘째 물 가로 내려가 물을 마시게 합니다. 엎드려 마시는 자는 모두 떠나게 합니다. 손으로 물을 떠 먹는 자는 남게 합니다. 전쟁 시에 물을 먹기 위해 정신을 파는 것은 정산 상태가 온전치 않은 것입니다. 절제의 힘이 없습니다. 아무리 목이 말라도 주변을 보며 물을 마시는 것은 군사의 기본입니다. 결국 삼백 명만 남고 모두 떠납니다.


모두 돌아가고


삼백 명은 양식과 나팔을 주고 기다리게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전쟁이 마치 삼백 명에서 모든 전쟁을 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삼백 명은 선발대 역할을 했을 뿐이지 나머지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간 것이 아닙니다. 24절을 보면 기드온이 아브라엠 산지에서 나팔을 불러 전쟁할 사람들을 급하게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로 이 일로 에브라함의 횡포가 있었지만 잘 넘어갑니다.

23절에도 납달리, 아셀, 므낫세에서도 함께 전쟁에 동참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디안과 의 전쟁은 지금까지 일부 지파의 연합이 아닌 북부 전 지파가 이 전쟁에 동참한 것임을 알 수있습니다.


9-18절 미디안 초병의 고백


적진으로 가보라.


진영으로 돌아온 기드온에게 적진에 몰래 들어가하십니다. 아마도 하나님은 기드온 안에 있는 두려움이 아직 가시지 않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대장이 두려우면 전쟁은 이미 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전쟁이 단지 물리적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바른 믿음과 확신이라는 것을 말해 주려하십니다. 결국 기드온은 부하 부라와 함께 미디안 적진 가까이 갑니다.


전병 초병의 꿈


적진 가까이 가니 미디안과 아말렉 등 동방 사람들의 연합군이 떼를 이루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메뚜기의 많은 수와 같도 낙타는 해변의 모래와 같다고 합니다. 즉 셀 수 없을 정도록 많은 것입니다. 기드온은 얼마나 두려울까요? 하나님은 미디안 연합군의 실상을 보여주며 이 전쟁은 실제로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때 적병이 다른 병사에게 자신이 꾼 꿈 이야기를 그러자 꿈을 들은 병사는 보리떡을 기드온이라 말하며 두려워 합니다. 겉으로는 크고 많이 보이지만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이미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만들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했습니다. 꿈 이야기들은 기드온은 다시 돌아와 전쟁의 확신을 병사들에게 알립니다.


19-25절 전쟁이 시작되다.


전쟁의 시작


밤이 깊었습니다 이경 초에 초병들이 교대할 시간에 항아리에 숨긴 햇불과 나팔을 준비합니다. 기드온의 명령이 떨어지자 항아리를 깨고 횃불을 들고, 나팔을 불기 시작합니다. 한 목소리로 여호와를 위하여 기드온을 위하여를 외칩니다. 그러자 깜짝 놀란 미디안 연합군은 미친 듯이 도망치기 시작합니다. 초병 외에 모두 잠든 시간이니 기습해 온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삼백 명만 전쟁 했는가?

종종 우리는 기드온과 삼백 용사만이 전쟁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은 훨씬 많습니다. 23절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싸웠다고 말합니다. 24절에서는 기드온이 에브라임 산지에 나팔을 불게하여 사람을 불러 모았습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자존심이 매우 강하고 이기적인 지파입니다. 비슷한 사건이 입다 사건에 일어나는데 입다는 에브라임 지파를 살해합니다. 므낫세 지파였던 기드온에게 행패를 부리는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자존심이 강한 자들인가를 잘 보여 줍니다.



자중지란의 미디안 연합군


22절에서 매우 흥미로운 상황을 읽을 수 있습니다. 삼백 용사가 나팔을 불자 미디안 연합군들이 혼비백산하여 적과 아군을 분간하지 못하고 서로를 죽이게 됩니다.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공포에 빠지자 그들은 서로를 죽이게 됩니다. 즉 자중지란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이 가장 무섭습니다. 힘을 모아서 적을 공격해야 하지만 서로 싸우게 된다면 적들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승리를 얻게 됩니다. 기드온에게는 삼백 명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능가할 수 있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적들이 아무리 많고 위대해도 하나님 한 분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사사기 장별요약 및 강해목록


 


사사기 6장 강해

사사기 6장 개요

사사기 6장 사사 기드온 6장부터 8장까지는 사사 기드온의 이야기입니다. 사사 기드온은 약한 므낫세 지파였지만 용기를 내어 300 용사와 더불어 미디안을 물리칩니다. 6장은 기드온 스토리의 서막을 여는 장면이 소개됩니다. 기드온은 요셉의 첫째 아들인 므낫세의 후손 므낫세 지파 소속입니다. 므낫세 지파는 항상 에브라임 지파에게 무시당했습니다. 이 부분은 8:1-3절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사사기는 기드온 이야기를 마지막 전반부가 마무리됩니다. 기드온의 아들인 아비멜렉 이야기부터는 이전보다 훨씬 암울하고 부정적인 스토리가 전개됩니다.


서론부에 해당되는 6장에서는 죄로 인해 고통 받는 이스라엘과 기드온이 소명을 받게 되는 과정을 다룹니다. 기드온은 므낫세 지파로 약한 지파이자 가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기드온을 통해 상상도 못할 강력한 힘과 많은 군대를 지닌 미디안 연합군을 격파합니다. 6장에서는 기드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소심하고 약한 기드온이 어떻게 강한 용사로 거듭나는가를 보여줍니다.

사사기 6장 구조

  • 1-6절 고통 받는 이스라엘
  • 7-10절 한 선지자의 경고
  • 11-24절 기드온을 만나는 천사
  • 25-32절 우상을 제거하는 기드온
  • 33-40절 하나님을 시험하는 기드온


사사기 6장 강해


1-6절 또 악을 행하고


또 악을 행하였으므로


이스라엘이 또 악을 행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이 손에 넘깁니다. 상황이 얼마나 열악했으면 이스라엘이 산에서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 만들어 지냈다고 말합니다. 미다인은 파종할 때면 치러 올라와 토지소산을 멸하고 모두 가져갑니다. 고통이 너무 심한 이스라엘이 부르짖습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은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조상들이 그렇게 당하는 것을 보고도 교훈을 얻지 못합니다.


동방 사람들이


성경에서 동방 사람은 우상과 이방인,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즉 이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사람들로 소개됩니다. 하나님께서 다시스로 도망가는 요나를 동풍으로 징계하듯 범죄 한 이스라엘은 동방 사람들을 통해 징계하십니다. 동방은 이방의 땅이자 저주 받은 곳으로 종종 사용됩니다. 하지만 동방에서 구원자가 온다는 것은 매우 역설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이 부분은 후에 성경의 동쪽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메뚜기 떼 같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메뚜기 떼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를 것입니다. 출애굽 당시에도 등장하는 메뚜기떼는 현재도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무섭게 활동합니다.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정도의 엄청난 수를 말합니다. 메뚜기 떼가 오면 먹을 수 있는 대부분의 식물과 풀을 순식간에 먹어버립니다.


7-10절 한 선지자


부르짖으므로


이스라엘이 괴로워 부르짖자 하나님이 움직이십니다. 어찌 보면 하나님은 너무나 착하고 무능해 보이고 답답해 보입니다. 우리 같으면 거의 죽을 지경까지 내버려 두고 싶지만 하나님은 그대로 두지 못하고 다시 구원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긍휼이 많으신 분입니다. 사람은 변하지 않습니다. 노아의 홍수를 보십시오. 모든 사람들을 멸절 시켰지만 노아의 후손들은 완전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타인에게 냉정하게 대하는 것은 절대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고통을 당하는 입장에서 생각하며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한 선지자


이스라엘이 부르짖자 하나님께서 한 선지자를 보냅니다. 그는 기드온을 찾아가 이스라엘을 구원하라 합니다. 하지만 기드온을 찾아가기 전에 먼저 이스라엘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 내셨습니다. 학대하는 자의 손에서 건져 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땅의 신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했지만 이스라엘이 말을 듣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애굽의 군대와 미디안은 비교할 바가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세계 최강국이었던 애굽에게서 구원하셨는데 한낮 미디안에서 손에서 구할 수 없겠습니까? 충분히 구원하십니다. 그럼에도 미디안에게 당하는 이유가 뭘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미다인의 손에 넘겨 주'(1절)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는 누구도 이길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미다인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떠난 것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선지자는 이 부분을 깨닫게 하고 떠나갑니다.

11-24절 여호와의 사자와 여호와 샬롬


큰 용사여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을 찾아갑니다. 포도주 틀에서 숨어서 밀타작을 하는 기드온에게 '큰 용사'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기드온에게 이스라엘을 구원하라 합니다. 하지만 기드온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떠났다고 말합니다.

선지자는 계속하여 기드온을 설득합니다. 기드온에 선지자에게 예물을 드리지만 사자는 지팡이로 그것들을 불태우고 하늘로 올라갑니다. 기드온은 그제야 하나님인 줄 알고 놀랍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보고도 죽지 않은 것에 감사하여 여호와 샬롬이라 말합니다.

25-32절 우상의 제단을 헐고


우상의 단을 헐라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명을 내립니다.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끌고 와 바알의 제단을 헐고 그곳에서 제사하도록 합니다. 겁이 많은 기드온은 낮에 하지 못하고 밤에 종 열과 올라가서 그것을 행합니다.  여기서 정말 놀라운 점은 이스라엘 안에 우상의 제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모두가 섬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을 징벌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사사시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우상에 깊이 빠져 있었던 시대였음을 보여줍니다.




칠 년 된 제물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칠 년 된 제물을 바치라 하십니다.(25절) 그런데 칠 년은 정확히 미다인이 이스라엘을 지배하기 시작한 시간과 같습니다.(1절) 하나님은 칠 년된 제물을 통해 그동안의 모든 고통과 아픔을 제물처럼 태워 사라지게 하겠다는 선언으로 보입니다.


바알을 위한 변증


날이 밝자 성읍 사람들이 놀라 범인을 찾고 기드온인 것을 발견합니다. 동네 사람들이 기드온을 죽이려 하자 기드온의 아버지가 나서서 바알이 진짜 신이라며 자신을 지킬 것이라며 방어합니다. 저는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신기하고 의아합니다. 앞서서 말한 것처럼 어떻게 이렇게까지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처럼 떠 받을 수 있었는지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만큼 이스라엘의 죄가 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기드온이 잘못하여 죽을 위기에 처하자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가 재치를 발휘합니다. 바알이 만약 진짜 신이라며 그가 '자신을 위해 다툴 것이니라'(31절) 말합니다. 즉 바알은 자신이 신임을 스스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마을 사람들은 요아스의 논리에 반박하지 못하고 조용히 물러 납니다.

33-40절 양털 이슬 실험


이때에 동방 사람들이


드디어 기드온이 용기를 내어 우상을 제거했습니다. 모든 것이 준비된 것 같습니다. 기드온이 우상을 제거하자 신기하게도 미디안 연합군이 전면적으로 개시합니다. 아직 기드온은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예측불허입니다. 적들이 어찌 알고 전쟁을 개시할 것일까요? 하지만 기드온을 서서히 준비해 가고 계십니다.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사사기에서 여호와의 영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의 힘이 약할 때, 도무지 이길 자신이 없을 때, 하나님의 영이 임합니다. 그럼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사람은 변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영이 임하며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두려움에 떨던 열두 사도가 성령을 받고 두렴 없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이 나팔은 전쟁의 나팔입니다. 기드온은 자신이 속한 므낫세 지파만을 모으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셀과 스불론, 납달리 지파까지 사람을 보내어 데려 옵니다. 이들은 갈릴리 서편관 남편에 속한 북지파에 속한 이들입니다. 성령 충만은 무모함이 아니라 지혜입니다. 함께 동역함으로 큰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여쭈되


하지만 기드온은 여전히 부족합니다. 기드온은 겁이 많았습니다. 그는 여러모로 위축되어 있었고,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는 전쟁에 나가야 하지만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기드온은 양털 솜으로 시험을 합니다. 한 번은 양털에만 이슬이 있게 해 달라 하고, 두 번째는 주변에는 있고 양털에만 없게 해 달라고 말합니다.

첫 번째 시험은 양털에만 이슬이 있고, 주변 땅은 마르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이스라엘은 비가 잘 오지 않는 곳입니다. 하지만 주야 일교차가 심해 밤이면 많은 이슬이 내렸습니다. 기드온은 많은 이슬이 내리지만 양털에만 내린다면 하나님의 기적이라 생각했습니다. 정말 그다음 날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기드온은 아직도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주변에는 이슬에 젖고 양털만 젖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사실, 첫 번째보다 두 번째 부탁이 더 어렵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어려움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정말 다음날이 되자 모두 이슬이 있지만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양털 시험은 어떤 면에서 답답한 면이 있습니다. 왜 기드온은 곧바로 순종하지 않고 자꾸 지체할까요? 이렇게 믿음이 없을까요? 여러분은 어떤가요? 하나님의 부르심이 곧바로 응답하십니까? 기드온의 시험을 하나님은 어찌 생각할까요?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모세처럼 화를 내거나 야단치지 않고 요구한 대로 그대로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긍휼이 아닐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기드온의 요구는 하나님의 실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 믿음이 약한 것을 알기에 자신의 믿음이 강해지도록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약할 때, 우리가 두려울 때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주님도 우리에게 구하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찾는 이들을 기뻐하십시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려 하는 이들을 하나님은 기뻐하십시다. 이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 마 7: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 마 7: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 마 7: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 마 7:10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 마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사사기 5장 강해

 사사기 5장


개요

사사기 5장은 드보라의 노래로 알려진 시입니다. 내용은 드보라의 신앙고백이며 찬양이자 4장의 전쟁에 대한 기록과 당시 상황을 전반적으로 알려 줍니다. 


1-5절 전쟁의 서막 


성경에 여성들이 지은 노래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홍해를 건넌 후 지은 '미라암의 노래'(출 15:21)가 있고, 불임의 상태에서 기도하여 사무엘을 낳은 후 지은 한나의 노래(삼사 2:1-10)가 있으며, 신약에서 '마리아의 노래'(눅 1:46-55)가 있습니다. 드보라의 노래는 이들의 노래와 상당히 다르면서도 비슷한 맥락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불임과 도무지 이갈 수 없는 상황이 동일한 불가능의 상태를 말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고 아이를 낳게 되는 상황은 비슷하게 흘러갑니다. 즉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의 현현

  • 5:1 이 날에 드보라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노래하여 이르되
  • 5:2 이스라엘의 영솔자들이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 5:3 너희 왕들아 들으라 통치자들아 귀를 기울이라 나 곧 내가 여호와를 노래할 것이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 5:4 여호와여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물을 내리고 구름도 물을 내렸나이다 
  • 5:5 산들이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니 저 시내 산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였도다


4-5절은 단순히 상징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일산, 즉 에서의 족속이 사는 지역에서부터 오실 때 하나님의 현현 앞에서 피조물들이 진동하는 것을 드러내 줍니다. 이스라엘과 시스라가 싸울 때 하나님께서 그 전쟁에 개입하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자연의 기이한 진동이나 현상은 종말론적 현상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일어났음을 말합니다.


2절에서 영솔자들과 백성들의 헌신이 들어가 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은 아닙니다. 이들은 갈릴리를 주변으로 분배를 받은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가 중심이 되어 모인 군사드들입니다. 전쟁이 일어나 군사를 모집할 때 결코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음에도 백성들은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참여 했다는 부분은 언급합니다.


4절에서 등장하는 '세일'과 '에돔 들'은 5절의 '시낸 산'과 연결되어 출애굽 당시의 하나님의 현현을 소개하는 표현입니다. 세일과 에돔은 모두 동일한 지역이며, 에돔 족속이 살아가는 지역입니다. 이곳은 출애굽 당시에 네게브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지나쳐 왔던 곳들입니다. 하나나님께서 위엄과 능력으로 현현하셨음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당시의 상황


  • 5:6 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길의 행인들은 오솔길로 다녔도다 
  • 5:7 이스라엘에는 마을 사람들이 그쳤으니 나 드보라가 일어나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되기까지 그쳤도다


드보라가 사사로 활동했던 이유를 드러낸다. '삼갈의 날' 또는 '야엘의 날'은 대로가 비었다는 표현은 잔혹한 통치를 뜻한다. 당연히 나서야할 남자들은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드보라가 어쩔 수 없이 일어난 것입니다. 성경에서 '삼갈의 날'에 대해 언급하지 않지만 엄청난 핍박과 철권통치 아래에서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대로 나기를 꺼려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드보보라는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일서선 것입니다. 마땅히 나서야할 남성들은 대로를 비우고 뒷길로 숨어 다녔지만 여성이었던 드보라가 일어나 나선 것입니다.


  • 5:8 무리가 새 신들을 택하였으므로 그 때에 전쟁이 성문에 이르렀으나 이스라엘의 사만 명 중에 방패와 창이 보였던가


이스라엘이 고통 당하는 이유가 드러납니다. 그들은 '새 신'을 선택했습니다. 새 신은 우상을 뜻합니다. 하나님만을 섬겨야할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또 우상을 섬길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방민족으로 하여금 고통을 받게 한 것입니다. 결국 모든 고통의 원인은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습니다.


  • 신 32:17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귀신들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이 알지 못하던 신들, 근래에 들어온 새로운 신들 너희의 조상들이 두려워하지 아니하던 것들이로다 전쟁이 일어났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결국 드보라나 일어난다. 안타까운 일이다.


헌신한 사람들


  • 5:9 내 마음이 이스라엘의 방백을 사모함은 그들이 백성 중에서 즐거이 헌신하였음이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 5:10 흰 나귀를 탄 자들, 양탄자에 앉은 자들, 길에 행하는 자들아 전파할지어다
  • 5:11 활 쏘는 자들의 소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물 긷는 곳에서도 여호와의 공의로우신 일을 전하라 이스라엘에서 마을 사람들을 위한 의로우신 일을 노래하라 그 때에 여호와의 백성이 성문에 내려갔도다
  • 5:12 깰지어다 깰지어다 드보라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너는 노래할지어다 일어날지어다 바락이여 아비노암의 아들이여 네가 사로잡은 자를 끌고 갈지어다


하지만 헌신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위기의 순간에 부름에 동참했고, 헌신했습니다. 누군가는 용감한 척 하지만 정작 나서야할 때 뒤로 숨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스블론과 납달리 사람들은 두려움을 떨쳐 내고 용감하게 함께 모여 전쟁에 나갔습니다.


  • 5:13 그 때에 남은 귀인과 백성이 내려왔고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용사를 치시려고 내려오셨도다 

13절은 굉장히 중요하다. 하나님께 직접 내려오신 것입니다. 20절로 이어지는 내용에서 별들이 하늘에서 싸웁니다. 별들은 천사들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연재해를 일으켜 갑자기 폭우를 내린 것입니다. 그리하여 기손 강에 그들을 표류시킵니다. 그들이 믿었던 철병거들은 쓸모가 없어집니다. 기손강은 계절천으로 건기에 여름에는 비가 오지 않아 평지와 같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하나님께서 긴기에 비를 내림으로 철병거를 쓰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동참하지 않는 자들


하지만 전쟁에 동참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 메로스가 누구인지 불명확하다. 문제는 그들이 여호와를 돕지 아니했다 말한다. 즉 적들과 싸우지 않은 것이다.


  • 5:23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거듭 그 주민들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도다


야엘의 업적

  • 5:24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은 다른 여인들보다 복을 받을 것이니 장막에 있는 여인들보다 더욱 복을 받을 것이로다 
  • 5:25 시스라가 물을 구하매 우유를 주되 곧 엉긴 우유를 귀한 그릇에 담아 주었고 
  • 5:26 손으로 장막 말뚝을 잡으며 오른손에 일꾼들의 방망이를 들고 시스라를 쳐서 그의 머리를 뚫되 곧 그의 관자놀이를 꿰뚫었도다 
  • 5:27 그가 그의 발 앞에 꾸부러지며 엎드러지고 쓰러졌고 그의 발 앞에 꾸부러져 엎드러져서 그 꾸부러진 곳에 엎드러져 죽었도다 

여자 야엘이 등장합니다. 도망치는 시스라를 야엘이 영접하여 죽입니다. 결국 바락이 스스로 앞장서지 못하고 여인에게 그 영광을 빼앗긴다는 말이 이루어집니다. 이 전쟁은 여성들에 의해 시작되고 마무리된 전쟁입니다.


원수들의 말로

  • 5:28 시스라의 어머니가 창문을 통하여 바라보며 창살을 통하여 부르짖기를 그의 병거가 어찌하여 더디 오는가 그의 병거들의 걸음이 어찌하여 늦어지는가 하매 
  • 5:29 그의 지혜로운 시녀들이 대답하였겠고 그도 스스로 대답하기를 
  • 5:30 그들이 어찌 노략물을 얻지 못하였으랴 그것을 나누지 못하였으랴 사람마다 한두 처녀를 얻었으리로다 시스라는 채색 옷을 노략하였으리니 그것은 수 놓은 채색 옷이리로다 곧 양쪽에 수 놓은 채색 옷이리니 노략한 자의 목에 꾸미리로다 하였으리라 

마지막으로 시스러의 어머니가 그려진다. 그녀는 아들이 전쟁에서 이기고 탈취물을 취한다는 이야기를 시녀에게 듣는다. 하지만 거짓말이다. 시스라를 죽임을 당했다. 패패 한 사실을 안 시녀들이 그것을 숨기고 거짓된 희망의 말을 건네는 것이다.


사사기 4장 강해

 사사기 4장 개요


사사기 4장과 5장은 여사자 드보라에 대한 것입니다. 에훗의 죽고 나자 이스라엘이 또 악을 행하자 이번에는 하손 왕 야빈에게 이스라엘을 넘깁니다. 무려 20년 동안 핍박을 하자 하나님은 드보라를 일으시키고 사사로 세우십니다. 하나님은 드보라에게 바락을 불러 인도자로 세워 전투하게 합니다. 하지만 겁이 많았든 바락은 혼자 가지 못하고 드보라와 함께 가야 한다고 우깁니다. 


전투가 시작되자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 군대가 진을 친 기손 강에 폭우 폭아져 전차들을 전혀 쓸 수 없게 됩니다. 시스라는 전차를 버리고 도망하여 겐 사람 헤벨의 아내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1-3절 하솔 왕 야빈의 철통치


위대한 에훗도 죽었습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은 계속 살아서 선한 영향력을 미치면 좋겠지만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세워 위대한 일을 행하십니다. 안타깝게 에훗이 죽자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합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습니다. 그의 군대 장관 시스라는 악독한 자였습니다. 야빈은 여호수아 11장에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사사기의 야빈은 누구일까요? 동일한 사람이 아니라 이전의 야빈의 명성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름을 야빈으로 정한 자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고 싶어 이름을 아브라함이라고 정한 사람과 동일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 야빈은 좋은 점이 아닌 악한 점을 본받는 자였습니다. 
  •  여호수아 11장1절 하솔 왕 야빈이 이 소식을 듣고 마돈 왕 요밥과 시므론 왕과 악삽 왕과 
우리는 누구를 본받아야 할까요? 악한 자가 아니라 선한 자를 본 받아야 합니다. 아직도 일부 어떤 젊은이들은 히틀러를 추종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종종 다른 나라 사람을 혐오하고 괴롭힙니다. 이런 일을 하면 안 됩니다.

야빈은 철 병거를 구백 대가 가지고 있는 자였습니다. 출애굽 당시 애굽이 육백승의 병거로 이스라엘을 추격한 것을 비교한다면 이들은 최첨단의 무기를 그 어느 나라보다 강력한 군대를 보유한 군사 대국이었습니다. 이러한 야빈에게 이스라엘은 어쩔 수 없이 고통당해야 했습니다. 그 시간이 무려 20년이었습니다. 오랜 시간 고통이 지속되자 드디어 부르짖기 시작합니다. 고통이 없을 때 순종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변화 시켜 주시길 원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타인의 고통을 보면 교훈을 얻습니다.


4-10절 여사사 드보라와 바락


랍비돗의 여인

'랍비돗'은 '햇불'입니다. 그런데 랍비돗에 사는 드보라라가 등장합니다. 드보라는 '꿀벌'입니다. 5장 드보라의 노래를 보면 당시 남자가 무서워 숨어 아무도 나서지 않지 드보라가 나섰습니다.(5:6-7) 하나님은 전혀 뜻밖의 인물을 등장 시켜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드보라는 꿀벌이고 종려나무의 열매인 대추야자를 꿀처럼 달아 꿀이라 불렀습니다.


  • 대추 야자 열매 대추 야자 열매


드보라와 대추야자는 매우 상징적인 관계입니다. 사사기 기자는 이러한 상징을 활용하여 드보라의 존재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재판을 받는다는 말은 공의로운 또는 공평한 재판을 말합니다. 율법대로 행해지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뜻이기도 한다. 여사사가 그러한 일을 행하는 것이 기이하기만 합니다.






바락을 부르다.


드보라가 바락을 부릅니다. 그에게 시스라와 싸우라 합니다. 하나님께서 넘겨 주리라 약속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드디어 드보라에게 임한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 바락은 용감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앞 서지 못하고 뒤로 숨었습니다. 바락은 드보라에게 함께 가면 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는 바락의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드디어 전쟁이 시작됩니다. 드보라는 바락과 함께 함기로 합니다. 하지만 '가는 길에서 영광을 얻지 못'할 것이라 말합니다. 후에 시스라는 바락의 손이 아닌 겐 족속 야엘이 손에 죽게 됩니다. '여인의 손'ㅇ란 표현을 통해 4장에서 남자는 부끄러운 존재가 되고 맙니다.

바락이 사람을 모읍니다. 스불론, 납달리를 부릅니다. 두 지파는 가나안 최북단 지파입니다. 우리는 전쟁을 할때 종종 믿음을 맹신하여 자신의 힘으로 싸우려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동역자를 주셔서 함께 하도록 했습니다.


11-16절 전쟁이 시작되다.


겐 사람 야엘


모세의 장인 호박의 자손 중에 겐 사람 헤벨이 사아난님 상수리나무 곁으로 와서 장막을 칩니다. 전혀 뜻 밖의 하나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후에 헤벨의 아내 야엘이 시스라를 죽이게 됩니다.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이 아무도 모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야엘 자신고, 시스라도, 심지어 드보라와 바락도 몰랐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일들을 준비하고 행하십니다.


기손강의 범람, 우연일까?


드디어 전쟁이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은 바볼 산에 있었고, 시스라 군대는 기손강에 진을 칩니다. 이때는 건기라 비가 내리지 않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여름에 전혀 비가 내리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처럼 강이 움푹 패인 곳이 몇 되지 않습니다. 평지처럼 평평합니다. 시스라는 비가 오지 않으니 넓은 들판처럼 보이니 기손강에 모인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갑자기 폭우 쏟아지면서 그들의 병거를 힘을 잃고 맙니다. 전쟁은 드보라와 바락의 손에 넘어갑니다. 시스라와 군대는 마차를 써보지도 못하고 병거에서 내려 허겁지겁 도방갑니다.

모든 것이 준비되어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님을 알려 줍니다. 반대로, 아무 힘도 없고 지혜도 없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산성이시고, 방패이시고, 힘이시고, 능력이십니다. 
 


17-24절 야엘이 시스라를 처형하다.


시스라가 도망하여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에 장막에 이릅니다. 시스라와 겐 족속은 이전부터 교류해서 화평한 관계였습니다. 시스라를 보고 야엘이 영접합니다. 야엘은 그를 장막에 들이고 엇긴젓을 줍니다. 피곤했던 시스라는 곧 잠이 듭니다. 이때 야엘이 말뚝으로 그의 관자놀이를 쳐서 죽입니다. 바락이 뒤쫓아 오지만 시스라는 이미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렇게 전쟁은 끝이나고 전쟁의 시작과 마지막을 여인들이 공을 세웁니다.


 


사사기 3장 강해

 사사기 3장


개요

사사기 3장 강해 사사기 3장은 각 지파별로 시작되는 가나안 정복에 대한 뒷이야기로 시작됩니다. 가나안의 남겨진 족속들과 유다지파의 공격, 그리고 옷니엘과 에훗, 삼갈의 사사 활동이 소개됩니다.


  • 1-6절 그 땅에 남겨진 족속들 
  • 7-11절 사사 옷니엘 
  • 12-30절 사사 에훗 
  • 31절 사 삼갈


1-6절 그 땅에 남겨진 족속들


1-6절은 이후에 일어날 사사시대의 서론이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남겨진 족속들 통해 이스라엘을 시험하십니다.(1절) ‘가나안 전쟁’은 가난 전쟁을 왜 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왜 이 땅에 존재해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말해 줍니다. 하나님은 이방 족속을 그곳에 남겨 두심으로 전쟁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전쟁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전쟁'은 단순한 전쟁의 경험이 아니라 가나남을 정복해야 하는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목적과 의미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남겨진 족속은 블레셋 다섯 군주, 모든 가나안 족속, 시돈 족속, 바엘 헤르몬 산서 하맛 입구까지의 레바논 산에 거주하는 히위 족속들입니다.(3절) 실제로는 미디안 족속과 모암, 암몬 족속도 포함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숨이 가나안 족속들을 몰아내지 않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경험하는 법을 배우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이들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삶과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망각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배움은 아프고 고통스러운 역사적 사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불행히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거주하면서 가나안 거주민들과 혼인을 치릅니다. 혼인을 치른다는 말은 결국 그들과 교제하며 산다는 말입니다. 사사기 기자는 통혼과 더불어 ‘그들의 신을 섬겼다’(6절)고 폭로합니다.


가능하다고 모든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작은 것 하나가 모든 인생을 망칠 수 있습니다. 작은 편리함이 영적 세계를 망가뜨리기도 합니다.


7-11절 사사 옷니엘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목적에서 악을 행합니다. 하나님을 잊어 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하나님을 잊는다는 말은 지식의 부재가 아니라 영적 각성이 사라졌다는 말입니다. 믿음은 지식에 머물지 않고 삶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그 땅의 거주민이 섬기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이 말은 그 땅 주민과 통한 결과(6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이스라엘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팝니다. 구산 리사다임은 ‘두 배로 악하다’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굉장히 포악하고 잔인한 왕으로 보입니다. 앞으로 ‘손에 팔다’라는 말일 자주 등장합니다. 이 말은 대적의 손, 즉 그들이 마음대로 좌지우지한다는 말입니다. 8년 동안 구산 리사다임에게 괴롭힘을 당합니다.


이에 이스라엘은 고통에 이기지 못하고 부르짓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옷니엘을 보내 구원하십니다. 중요한 패턴이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게 함으로 하나님을 향하도록 만드십니다. 고통을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없습니다. 고통을 통해 우린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며, 망각한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삶의 실존에서 망각되어서는 안 되는 분이십니다.


12-30절 사사 에훗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합니다. 이번에는 모압 왕 에글론에게 넘깁니다. 모압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에서 빠져나와 동굴로 들어가서 큰 딸 상관하여 낳은 아들의 후손들입니다.


창세기 19장 37절 큰 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의 조상이요 요단 동편에 자리한 모압은 목축을 하는 족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악을 행하자 모압을 강성하게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모든 나라들의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강력한 나라가 되고, 하나님께서 싫으시면 패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모압 왕 에글론은 혼자 오지 않고 연합군을 편성했습니다. 아말렉 자손들을 끌어 모아 함께 온 것입니다.(13절) 그들이 점령한 곳은 종려나무 성읍입니다. 이곳은 여리고의 다른 말입니다.


에글론의 지배는 무려 18년이나 지속되었습니다.(13절) 그러자 이스라엘은 다시 부르짖기 시작합니다. 이번에는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은 왼손잡이 에훗입니다. '왼손잡이'는 오른손이 묶인 또는 장애가 있는 이란 뜻을 의역한 것입니다. 에글론에게 곡물을 바칠 때 에훗은 한 규빗(약 45cm)가 되는 칼을 만들어 오른쪽 허벅지 옷 속에 차고 들어갑니다. 에글론은 몹시 비둔한 자였습니다.


곡물을 바친 후에 에훗은 돌아갔다 길갈 근처 돌 뜨는 곳에서 돌아와 왕에게 할말이 있다며 면대를 청합니다. 왕은 뭔가 얻을 것이 있는가 싶어 주변을 물리치고 자기의 방에서 독대를 합니다. 왕이 서늘한 다락방에 있자 그는 들어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할 말이 있다고 하자 에글론이 일어납니다. 에훗을 곧바로 달려가 에글론을 준비해 간 칼로 찌릅니다. 이후 에훗은 다락문을 뒤에서 닫자 잠그고 빠져나옵니다.


신하들은 왕을 기다리지만 아무런 소식이 없고 문이 닫혀 있자 발을 가린다 생각하고 기다립니다. 아무리 오래 기다려도 나오지 않자 열쇠를 가지고 열고 들어가니 왕이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에훗은 스이라로 도망갑니다. 에브라임 산지에서 나팔을 불려 군사를 모으고 모압 연합군을 공격하여 몰아냅니다. 에훗은 먼저 요단강 나루터를 장악하고 그곳을 지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발을 가리다.
발을 가린다는 표현은 약간 모호합니다. 일반적으로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하나는 큰 변을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낮잠을 자는 것을 말합니다. 이곳에서 낮잠을 잔다는 표현으로 보입니다. 모압 사람들을 만 명을 죽이고, 한 사람도 도망가지 못하게 합니다. 이후 모압은 이스라엘에 굴복하여 한 동안 일어서지 못합니다. 이후 팔십 년 동안 평안합니다.


우리는 에훗의 헌신을 보면서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비록 장애를 가지고 있었지만 거룩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때 모든 것이 준비되고 온전할 때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일하시고, 뜻 밖의 사람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31절 사사 삼갈


삼간은 한 구절로 마무리합니다. 그는 '아낫의 아들'로 표기됩니다. 삼갈은 소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입니다. 아낫은 우가릿 문서에 바알의 아내인데, 어떻게 사사기 이런 이름을 가질 수 있는지 의아합니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당시 이스라엘의 얼마나 가나안 문화에 빠져 있는가를 말해 줍니다. 비록 하나님께 쓰임받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가나안 문화에 깊이 물든 이스라엘의 타락상을 '아낫의 아들'이란 표현을 통해 보게 됩니다. 인간은 언제나 불안합니다.


*아낫의 아들

아낫의 아들은 표현인 대단히 특이합니다. 우가릿 문헌에 의하면 아낫은 가나안의 주신 바알의 아내입니다. 성경 안에서는 바알과 아세라가 한 쌍으로 나옵니다. 아낫은 아세라의 다른 이름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지역에 따라 아세라가 아낫이란 다른 이름으로 변경되었을 수 있습니다.


사사기 장별요약 및 강해목록

 

사사기 2장 강해

 사사기 2장 개요


사사기 2장 개요


각 지파별로 자신들이 제비 뽑은 지역을 정복해 나갔지만 완전히 이기지 못하고 일부 가나안 주민을 남겨 두게 됩니다. 이 때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 보김으로 와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책망합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지 말라한 가나안 주민들과 언약을 맺었기에 그들이 옆구의 가시가 되고 그들의 신의 너희에게 올무가 될 것이라 말합니다. 

여호수아가 죽고 다음 세대들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호와의 언쟁을 알지 못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악을 행하고 바알을 섬기자 하나님은 이방 민족들에게 그들을 넘겨 줍니다. 사사기 2장은 사사기의 전체 내용을 요약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 1-5절 여호와의 사자와 보김의 통곡
  • 6-10절 여호수아의 죽음
  • 11-23절 여호와를 버린 이스라엘


1-5절 여호와의 사자와 보김의 통곡


갑자기 여호와의 사자가 찾아옵니다. 그는 길갈에서부터 보김까지 올라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의 말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여 맹세한 땅에 들어오게 했다.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고 그들의 제단을 헐라. 그러나 너희는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았다. 이일로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지 않고 옆구리의 가시와 올무가 되게 하겠다고 말합니다. 이 부분을 좀 더 살펴봅시다.


길갈에서 올라온 선지자


우리는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 올라왔다는 것을 주의해 봐야 합니다. 그가 올라온 길갈은 어떤 곳입니다.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성 앞에서 할례를 행한 곳입니다. 할례를 행하면 고통 때문에 3일 정도는 꼼짝을 하지 못합니다. 만약 그때 가나안 족속이 쳐들어 왔다면 꼼짝없이 당했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의 모험을 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할례를 마쳤고, 이후의 모든 정복 과정 속에서 대 승리를 거두었다. 길갈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첫사랑과 같은 곳입니다. 처음 은혜 받은 곳, 정말 무식했지만 순수했던 열정이 있던 곳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그러한 길갈에서 올라옴으로 안일한 마음으로 가나안 원주민과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가는 그들에게 영적 각성을 일으킨 것입니다.


  • 길갈 : 길갈은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 처음으로 숙식하고 할례를 행한 곳이다. 뜻은 '굴러가다'이다.
  • 보김 : 보김이 정확히 어디지 알 수 없다. 일부 학자들은 실제 지명이 아닌 상징적인 의미로 불려진 곳이 아닌가 추측한다. 이후에 등장한 것을 보면 보김은 이 사건 이후 그 지역이 '보김'으로 불려진 것으로 추측되는 것이 타당하다. 길갈 근처이며, 벧엘과 실로 사이의 어는 곳이다. 보김의 뜻은 '우는 자들'이다.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라


가나안에 오기 전부터 하나님은 이 땅의 거민과 언약을 맺지 못하게 금합니다. 언약은 서로 적당히 타협하며 지내자는 것입니다. 서로 왕래하며 상부상조하자는 것이죠. 그러나 이라한 언약을 맺지 말고 오히려 그들의 가진 제산을 파괴하고 그들을 쫓아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짧은 기간에 그들은 벌써 언약을 맺고 가나안 주민과 친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이스라엘이 어디서 왔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가르치려 했는지를 말합니다.


왜 언약을 맺지 말아야 하는가. 답은 간단합니다. 그것이 더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이런 겁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가나안 주민과 언약을 맺고, 그들의 신들을 섬기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징계합니다. 이것이 사사기의 시작과 끝입니다. 앞으로 사사기는 죄-징계-회개-사사-평안 사이클이 계속 돌아갑니다. 그럼에도 결국 사사기의 마지막은 패망입니다. 암울하기 그지없습니다. 여호와의 사자의 경고를 들은 이스라엘은 크게 웁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우는 자들’이란 뜻의 ‘보김’이라 짓습니다.

구스타보 도레의 보김을 찾은 선지자


 


6-10절 여호수아의 죽음


여호수아의 죽음


다음 이야기는 여호수아의 죽음입니다. 자 보십시오. 3장부터 본격적인 5사이클이 돌아가는데 그러기 전에 모든 것들이 차근차근 준비됩니다. 두 번째는 최고의 권위를 지닌 여호수아의 죽음입니다. 6절은 여호수아가 각 지파를 제비 뽑은 땅으로 보내 싸우게 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7절에서 의미심장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여호수아가 사는 달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일을 본 자들이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여호수아와 가나안 전쟁의 의미를 아는, 그것을 경험한 가나안 1세대가 죽으면 여호와를 섬기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납니다. 결국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습니다.(8절)


여호수아의 무덤은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산 북쪽 딤낫 헤레스입니다. 여호수아서에는 ‘딤낫 세라’로 소개됩니다. 두 곳은 동일한 곳입니다.


  • 여호수아 24:29-30 이 일 후에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를 그의 기업의 경내 딤낫 세라에 장사하였으니 딤낫 세라는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쪽이었더라.


여호수아의 죽음은 권위의 죽음이며, 왕의 부재를 뜻합니다. 여호수아는 왕은 아니었지만 왕적 리더십으로 그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습니다. 모든 장로들이 그의 권위에 순복했습니다. 모세가 죽었을 때 여호수아가 이어 받았지만 여호수아는 가나안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더 이상 후계자를 세울 필요가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안타깝게 이러한 리더십의 부재는 이스라엘을 타락으로 이끄는 이유가 됩니다. 여호수아의 죽음은 사무엘이 등장하기까지 리더십의 부재로 인해 혼돈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물론 사사들이 일부 여호수아의 리더십은 감당하지만 그들의 힘은 미약했고, 체계적이지도 않았습니다.


다른 세대


여호수아의 죽음 이후 사사기 기자는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남깁니다. 바로 ‘다른 세대’(10절)가 일어나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여호와를 알지 못함은 지식이 아닌 경험이며, 비전의 상실입니다. 여호와를 경험하는 것은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또는 위기로부터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경험을 말합니다. 더 이상 큰 전쟁이 없으니 큰 위기도 없으며, 그로 인해 하나님의 기적 또한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평안히 살아갈 좋은 기회였지만, 정말 무서운 위기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여호와를 가르쳐 주기 위해 가나안 거민과 이방민족들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11-23절 여호와를 버린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악행


2장 후반부는 기나긴 이야기는 들려줍니다. 사사기의 전반적인 상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망각한 후 세대가 어떤 일을 행했는가 말합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고, 여호와를 버리고, 가나안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진노하게 합니다. 그들이 섬기 중요한 신들은 바알과 아스다롯입니다. 이러한 악행을 저지르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노략하는 자들의 손에 넘겨줍니다. 또한 그들이 어디고 가는지 하나님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립니다. 결국 보김에서 올라온 여호와의 사자의 예언대로 고통이 더해집니다.


손에 팔다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 속에서 ‘손에 팔다’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마치 물건처럼 누군가에게 팔아버리는 것이죠.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에서 물건이 되어버린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그대로 두지 아니하시고, 사사들을 세워 구원하십니다.(16절) 하지만 그들은 사사들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다시 우상에게로 치우칩니다.

하나님께서 적들과 가나안 족속을 남겨둔 이유는 이것이 이스라엘에게 가시가 되어 여호와께 부르짖게 하려는 것입니다.(18절) 이것을 여호와를 아는 것,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이렇게 힘이 들고 고통스럽다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타락함 심성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떠나려 하지만 그러면 하나님은 이방 민족을 통해 채찍질하심으로 바로 세우십니다.


 
몰렉신에게 경배하는 이스라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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