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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5장 강해

 사도행전 5장 개요

5장은 교회의 확장으로 인한 내부적 문제와 외부적 문제에 직면하는 것을 다룹니다. 초반부는 아나니아 삽비라가 성령을 속이는 일이 일어나고, 공회 앞에서 부활의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사도행전에 소개되는 베드로의 세 번째 설교입니다. 베드로는 한 결같이 부활의 주님을 증언함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성경에서 예언하고 기대했던 바로 그 메시아라고 소개합니다. 유대인들이 죽였지만 사흘만에 부활하셨음을 강조합니다.


사도행전 5장 구조

  • 1-6절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죽음
  • 12-16절 사도들의 치유 사건
  • 17-32절 붙잡힌 사도들와 베드로의 변증
  • 33-42절 가말리엘의 중재


사도행전 5장 강해


1-6절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죽음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의 이야기는 교회의 부흥을 통해 일어나는 잘못된 신앙에 대한 경계입니다. 시작은 좋지만 그릇된 방법으로 신앙심을 포장하려는 잘못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소유를 팔아


두 사람은 시작은 좋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 교회에 바치기로 합니다. 4장 36-37절을 보면 구브로에서 온 바나바가 자신의 재산을 팔아 교회에 바친 것을 소개합니다. 이러한 일이 많은 사람들에게 본이 되었고, 칭송을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두 사람도 기꺼이 자신들의 재산을 팔아 하나님께 드리려고 합니다. 문제는 그다음에 일어납니다. 재산이 너무 아까운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부만 바쳐도 됩니다. 하지만 이들은 전부를 바친 사람으로 칭송받고 있은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시작은 좋았지만 결국 나쁜 결말을 맞이하고 맙니다.

  • 아나니아,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
  • 삽비라, 아름답다
 
두 사람의 이름은 매우 아름다우며 은혜롭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름처럼 행동하지 못했습니다.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는 서로 공모하지 않았지만 암묵적으로 합의 했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말입니다. 누군가 잘못을 했다면 말려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죄악을 행하다면 동조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흥하는 교회 안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집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감추다'(챙기다)의 '에노스피사토(ἐνοσφίσατο)'는 여리고성에서 전리품을 훔친 아간의 범죄를 표현하던 단어와 일치하고 있습니다.(LXX)

  • ἐνοσφίσατο : 원형은 노스피조(νοσφίζω)이며, 5:2,3, 딛 2:10에서 세 번 사용되었다. 일반 문학에서는 '훔치다' '횡령하다' '은밀하게 자신의 용도에 맞게 조작하다' 등의 의미를 사용되었습니다.
 

성령을 속이고


참 무서운 말입니다. 베드로는 칭찬을 하지 않고 아나니아의 마음 속에서 사단이 그를 조종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선하고 아름다운 행위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속에는 악의적인 것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현시적 착함에 속지 않습니다. 그 안에 숨겨진 악과 죄를 보십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나
4절을 보면 아나니아가 얼마나 긴 시간 이 문제를 고민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짧은 한 문장으로 표현되어 곧바로 실행된 우발적 판단으로 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땅이 그대로 있을 때' '판 후에도' 즉 긴 시간 땅을 팔기 위해 땅을 내 놓는 기간 동안, 팔고 나서 교회에 돈을 바치기 전까지의 모든 시간 동안 생각하고 결정한 시간이 충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나니아는 속일 마음을 바꾸지 않은 것입니다. 교회가 바치라고 한 것도 아닌데고 아나니아는 계속하여 속일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것은 아나이가 더 이상 돌이킬 마음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각적인 심판


놀라운 것은 '혼이 떠나다'는 '죽다'는 뜻으로 현재분사 형태로 '에케쉬켄(ἐξέψυξεν)'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말이 나오자 즉각 숨을 거두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을 모릅니다. 누군가는 발작이니 심장마비니 하는 말을 하지만 아무도 모릅니다. 결과론적으로 그가 곧바로 숨을 거두었다는 것입니다.

삽비라의 죽음


아나니아가 죽고 곧 이어 삽비라가 들어옵니다. 베드로는 삽비라를 보고 동일한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삽비라 역시 아나니아처럼 '예 이것뿐이라'(8절) 말합니다. 성령을 시험한다는 말은 성령의 능력와 지혜에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성령을 속이자 자신의 죄를 숨기려는 탐욕으로 거룩한 공동체에 머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교회는 한 성령을 받은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시신을 싸고(6절),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고대 이스라엘에서 남성의 시신은 쌌지만 여성의 시신은 남성들이 싸지 않았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은 탐욕으로 감추어진 기만행위를 폭로함으로 교회의 거룩성을 윻지하는 역할을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교회는 얼마든지 죄의 공격을 받을 수 있으며, 계속 될 것을 암시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교회가 죄에 대해 즉각적으로 처리하지 않으면 타락할 수 밖에 없음을 말해 줍니다.


12-16절 사도들의 치유 사건


표적과 기사가


사도들은 작은 예수들입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시고, 자신의 능력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너희가 나보다 더한 일을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들이 손을 통해 병든 자가 일어나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14절)아 졌습니다.


그의 그림자라도


사람들이 병든 사람을 메고 와 거리에 누일 때 베드로가 지날 때 그림자라도 덮일까 기대했습니다. 베드로에게 많은 능력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그 시대가 고통스럽고 아픈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아픔을 보듬어 주는 살마들은 없었습니다. 제사장드로 사두개인들도 바리새인들도 모두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존재하는 이익집단이었습니다. 그동안 백성들은 넘어지고 헐벗고 고통을 당했습니다. 사도들은 그들의 중심으로 들어갔고, 주님의 능력으로 그들을 치유해 나갔습니다.


칭송을 받았더라


사람들은 사도들과 친해지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권세자들이 사도들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사도들을 칭송했습니다. 사도들이 옳은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아무나 오는 곳이 아니라 악의 권세 대항하고, 정의와 공의를 위해 철저히 희생하는 집단입니다. 교회는 필연적으로 자기 부인을 통하 자멸적 집단입니다. 교회는 스스로 죽기를 각오해야 하고, 권력의 억압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들과 타협하는 순간 교회는 사단의 회가 되고 맙니다.


17-32절 붙잡힌 사도들와 베드로의 변증


시기가 가득하여


놀랍습니다. 이 단어는 예수님께도 사용된 단어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받아야 할 칭송과 인기를 사도들이 가져가자 분노하고 시기합니다. 그다음은 불 보듯 뻔합니다. 핍박할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은 소위 가장 높은 직급을 가진 자들이고 성전에서 일하는 자들이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물속에 있지만 물이 조금도 스며들지 않는 단단한 돌과 같습니다.

가서 성전에 서서


그들을 옥에 가둡니다. 하지만 주이 천사가 베드로를 꺼내 주면서 성정에 가서 생명의 말씀을 전하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사도의 일입니다. 핍박 속에스도 두려워하지 않고 주의 복음을 전하는 것.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 일이 어찌될까?



사도들이 사라진 것을 보고 그들은 속으로 무척 놀랐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함이 마땅하도다


사도들을 공회 앞에 끌고 와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도록 엄히 경고합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께 순종함이 마땅하다 말하며 거절합니다. 예수를 '너희가' 죽였고, 하나님이 살리셨고, 하나님께서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닥 말합니다. 즉 우리가 순종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오른손
29절부터 31절까지는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부분은 '오른손'인데, 하나님의 오른손을 말합니다. 오른손은 그 사람의 전부를 뜻하는 동시에 강력한 힘을 뜻합니다. 특히 이 표현이 하나님께 사용될 때는 구원하심으로 해석합니다.
  • 출애굽기 15장 6절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 시편 17장 7절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
  • 시편 20장 6절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의 오른손의 구원하는 힘으로 그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 응답하시리로다
  • 이사야 62장 8절 여호와께서 그 오른손, 그 능력의 팔로 맹세하시되 내가 다시는 네 곡식을 네 원수들에게 양식으로 주지 아니하겠고 네가 수고하여 얻은 포도주를 이방인이 마시지 못하게 할 것인즉


33-42절 가말리엘의 중재


크게 노하여


베드로의 변명을 들은 그들은 분노하여 사도들을 죽이려 듭니다. 결국 모든 잘못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베드로의 말에 동조할 수 없었고,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그들의 실체입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탐욕이 가득하고 시기가 가득한 자들입니다.


가말리엘이



그때 가말리엘이 일어나 제안을 하니다. 가말리엘은 지금의 문제만 보지 말고 하나님께서 일하고 있음을 보자는 것입니다. 굉장히 지혜롭고 차분한 사람입니다.

가말리엘 덕분에 사도들은 무사히 놓임을 받게 됩니다. 가말리엘은 냉청하고 신신한 믿음의 소유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는 도달하지 못합니다. 좋은 성품과 많은 지식이 분명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생명을 주지는 못합니다.


 



사도행전 3장 강해

 사도행전 3장 개요

사도행전 3장은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갈 때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이를 예수의 이름으로 고쳐준 사건을 다룹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 있아 있던 앉은 뱅이가 일어나 걷자 사람들이 놀라 베드로를 주목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주목한 사람들에게 너희가 죽이기로 결의한 예수 그리스도가 낫게 했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에 죽었다가 살아날 것을 이미 예언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3장 구조

  • 1-10절 구걸하는 앉은 뱅이를 치유하다.
  • 11-26절 예수는 성경에서 약속한 메시아다.


사도행전 3장 강해


1-10절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러 올라가는 두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제 구시 시간에 성전에 올라갑니다.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 기도합니다. 구시는 아침에 드리는 기도이며 번제를 드리는 시간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갔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유대교를 완전히 버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삶으로서의 유대교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에게 기도는 집이나 거리에서도 하지만 그러한 기도와 성전에서 하는 기도는 차원이 다른 개념입니다. 성전은 정식적인 것이고, 다른 곳은 불가피하게 기도하는 장소 정도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가능한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는 것을 기뻐했고, 또 그렇게 했습니다.


성전 미문의 앉은 뱅이


이 때 나면서 못 걷게 된 사람들을 사람들이 메고 와서 미문 앞에 놓습니다. 구걸하기 위해서입니다. 미문은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장애인은 율법적으로 흠이 있어 성전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전으로 들어가는 이들에게 구걸하기 위해 문 앞에서 구걸했습니다.

  • 신 23:1 고환이 상한 자나 음경이 잘린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 신 23:2 사생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십 대에 이르기까지도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 신 23:3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제3성전인 헤롯성전에는 헤롯에 의해 개축과 증축이 이루어지면서 아담했던 성전이 화려해졌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의 구역을 나눔으로 엄격하게 관리했습니다. 지성소는 1년에 딱 한 번 대 제사장만 들어갑니다. 성소는 제사장들이 떡상과 금잔대를 위해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들어갑니다. 


성전의 안뜰은 유대인의 온전한 남성만 들어가고, 바깥뜰은 여성과 장애인 유대인, 이방인들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애인이었던 이 남자는 바깥들(엄밀하게 말하면 성전이 아닙니다.)에 늘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는 베드로와 요한을 발견하고 구걸합니다. 구걸은 늘 해왔고, 구걸을 통해 그는 생존해 왔기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에게도 여전히 구걸합니다. 앉은뱅이에게 있는 삶의 관성을 주의해 봐야 합니다. 우리도 여전히 죄의 관성에 붙들려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어나 걸으라


두 사도가 구절하는 사람을 주목합니다. 베드로 그 사람을 향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베드로의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물질의 소유는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있습니다. 그 이름인 앉은뱅이를 낫게 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이


뒤에 베드로가 다시 길게 설명하지만 이 부분에서 조금 생각해 봅시다. 앉은뱅이는 날 때부터 장애를 가졌기 때문에 단 한 번도 성전 안뜰 안으로 들어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늘 성전의 바깥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그는 발목의 힘을 얻어 일어나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과정은 '성전으로 들어가면서'(8절) 한 것입니다. 즉 그는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정말 성전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것이 기적이고,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참으로 차별의 담을 허물고, 긍휼의 성전을 세웠습니다.

11-26절 예수의 이름이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 붙잡았습니다. 사람들이 그 사람의 모습을 깜짝 놀랍니다. 사람들은 두 사도에게 달려들어 솔로몬 행각이라는 곳에 모였습니다. 베드로가 그들이 모인 것을 보고 설교를 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12절)


사람들이 왜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注目) 했을까요?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눈으로 직접 보고 너무나 놀랬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일어난 기적과 이적은 구약 시대에서만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선지자들이 일으켰던 놀라운 기적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입니다.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본 것이죠.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기 전 사람인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기적과 이적을 보면서 그것을 행하는 사람에게 주목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과 이해력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인간들이 실수와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서 설교하기 시작합니다.


13-16절 부활하신 그리스도


13절을 보면 ‘베드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예정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자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했다고 말합니다. 입으로는 예수님을 살리신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부활이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신 사건입니다. 베드로는 너희가 죽게 빌라도에게 넘겨주어 죽게 한 그리스도 예수가 이 사람을 살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를 빌라도에게 넘겨줌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주를 죽었다 설교합니다. 그들의 죄를 감추지 않고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17-26절 회개하고 돌이키라


너희가 알지 못했다.(17절)


베드로는 너희가 알지 못해서 그랬다고 말합니다. 또한 너희 관리들도 모르고 했다는 것입니다. ‘모른다’라는 말은 ‘그들이 죄가 없다’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그 뜻과 계획을 알지 못했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의 역사는 우리가 알지 못하게, 우리가 생각지 못 하게, 또한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선지자의 예언(18절)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것이 아무런 죄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권한 받으실 것을 우리에게 이미 알렸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성경에 깊이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고 내 생각대로 내 계획대로 욕심대로 살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말씀대로 살 수 있는 능력과 지혜와 믿음이 없습니다 이것이 자연적인 인간의 한계입니다.


회개하고 돌이키라(19절)


베드로는 이제는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이것은 새롭게 되는 날이라고 표현하는데 주로부터 이를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의 헬라어 '퀴리오스'는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원래 구약 히브리어 ‘주’를 뜻하는 ‘아도나이’는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그 ‘주’라는 말을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예수님께로 옮겨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를 보내리니(20절)


주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시니 여러분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다는 일 놀라운 계획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 보면 말씀과 하나님이 곧 하나라는 사실 올 얘기해 주고 있는데 베드로는 구약의 하나님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다라는 표현을 통해서 성부와 성자 하나님의 관계를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하나님이다 또한 성령 하나님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내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신 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21절 - 26절


베드로는 구약에서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21절은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라고 말합니다. 구약의 말씀을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갑자기 오신 것이 아니라 이미 선지자들 통해서 하나님께서 오래전에 약속하셨고 그 약속하신 것이 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나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말합니다.


‘받아준다 ’라는 말은 아직까지 ‘계시하지 아니한다’ ‘드러내지 아니한다’ ‘때를 기다리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때가 되자 예수 그리스도를 땅에 보내주셨고 그 보내 주신 예수 그리스도 너희가 죽였고, 너희가 죽인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살리셨고, 그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이 사람을 낫게 했다’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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