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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3장 강해

 사도행전 3장 개요

사도행전 3장은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갈 때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이를 예수의 이름으로 고쳐준 사건을 다룹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 있아 있던 앉은 뱅이가 일어나 걷자 사람들이 놀라 베드로를 주목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주목한 사람들에게 너희가 죽이기로 결의한 예수 그리스도가 낫게 했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에 죽었다가 살아날 것을 이미 예언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3장 구조

  • 1-10절 구걸하는 앉은 뱅이를 치유하다.
  • 11-26절 예수는 성경에서 약속한 메시아다.


사도행전 3장 강해


1-10절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러 올라가는 두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제 구시 시간에 성전에 올라갑니다.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 기도합니다. 구시는 아침에 드리는 기도이며 번제를 드리는 시간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갔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유대교를 완전히 버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삶으로서의 유대교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에게 기도는 집이나 거리에서도 하지만 그러한 기도와 성전에서 하는 기도는 차원이 다른 개념입니다. 성전은 정식적인 것이고, 다른 곳은 불가피하게 기도하는 장소 정도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가능한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는 것을 기뻐했고, 또 그렇게 했습니다.


성전 미문의 앉은 뱅이


이 때 나면서 못 걷게 된 사람들을 사람들이 메고 와서 미문 앞에 놓습니다. 구걸하기 위해서입니다. 미문은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장애인은 율법적으로 흠이 있어 성전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전으로 들어가는 이들에게 구걸하기 위해 문 앞에서 구걸했습니다.

  • 신 23:1 고환이 상한 자나 음경이 잘린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 신 23:2 사생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십 대에 이르기까지도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 신 23:3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제3성전인 헤롯성전에는 헤롯에 의해 개축과 증축이 이루어지면서 아담했던 성전이 화려해졌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의 구역을 나눔으로 엄격하게 관리했습니다. 지성소는 1년에 딱 한 번 대 제사장만 들어갑니다. 성소는 제사장들이 떡상과 금잔대를 위해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들어갑니다. 


성전의 안뜰은 유대인의 온전한 남성만 들어가고, 바깥뜰은 여성과 장애인 유대인, 이방인들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애인이었던 이 남자는 바깥들(엄밀하게 말하면 성전이 아닙니다.)에 늘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는 베드로와 요한을 발견하고 구걸합니다. 구걸은 늘 해왔고, 구걸을 통해 그는 생존해 왔기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에게도 여전히 구걸합니다. 앉은뱅이에게 있는 삶의 관성을 주의해 봐야 합니다. 우리도 여전히 죄의 관성에 붙들려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어나 걸으라


두 사도가 구절하는 사람을 주목합니다. 베드로 그 사람을 향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베드로의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물질의 소유는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있습니다. 그 이름인 앉은뱅이를 낫게 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이


뒤에 베드로가 다시 길게 설명하지만 이 부분에서 조금 생각해 봅시다. 앉은뱅이는 날 때부터 장애를 가졌기 때문에 단 한 번도 성전 안뜰 안으로 들어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늘 성전의 바깥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그는 발목의 힘을 얻어 일어나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과정은 '성전으로 들어가면서'(8절) 한 것입니다. 즉 그는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정말 성전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것이 기적이고,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참으로 차별의 담을 허물고, 긍휼의 성전을 세웠습니다.

11-26절 예수의 이름이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 붙잡았습니다. 사람들이 그 사람의 모습을 깜짝 놀랍니다. 사람들은 두 사도에게 달려들어 솔로몬 행각이라는 곳에 모였습니다. 베드로가 그들이 모인 것을 보고 설교를 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12절)


사람들이 왜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注目) 했을까요?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눈으로 직접 보고 너무나 놀랬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일어난 기적과 이적은 구약 시대에서만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선지자들이 일으켰던 놀라운 기적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입니다.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본 것이죠.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기 전 사람인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기적과 이적을 보면서 그것을 행하는 사람에게 주목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과 이해력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인간들이 실수와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서 설교하기 시작합니다.


13-16절 부활하신 그리스도


13절을 보면 ‘베드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예정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자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했다고 말합니다. 입으로는 예수님을 살리신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부활이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신 사건입니다. 베드로는 너희가 죽게 빌라도에게 넘겨주어 죽게 한 그리스도 예수가 이 사람을 살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를 빌라도에게 넘겨줌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주를 죽었다 설교합니다. 그들의 죄를 감추지 않고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17-26절 회개하고 돌이키라


너희가 알지 못했다.(17절)


베드로는 너희가 알지 못해서 그랬다고 말합니다. 또한 너희 관리들도 모르고 했다는 것입니다. ‘모른다’라는 말은 ‘그들이 죄가 없다’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그 뜻과 계획을 알지 못했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의 역사는 우리가 알지 못하게, 우리가 생각지 못 하게, 또한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선지자의 예언(18절)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것이 아무런 죄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권한 받으실 것을 우리에게 이미 알렸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성경에 깊이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고 내 생각대로 내 계획대로 욕심대로 살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말씀대로 살 수 있는 능력과 지혜와 믿음이 없습니다 이것이 자연적인 인간의 한계입니다.


회개하고 돌이키라(19절)


베드로는 이제는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이것은 새롭게 되는 날이라고 표현하는데 주로부터 이를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의 헬라어 '퀴리오스'는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원래 구약 히브리어 ‘주’를 뜻하는 ‘아도나이’는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그 ‘주’라는 말을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예수님께로 옮겨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를 보내리니(20절)


주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시니 여러분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다는 일 놀라운 계획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 보면 말씀과 하나님이 곧 하나라는 사실 올 얘기해 주고 있는데 베드로는 구약의 하나님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다라는 표현을 통해서 성부와 성자 하나님의 관계를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하나님이다 또한 성령 하나님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내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신 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21절 - 26절


베드로는 구약에서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21절은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라고 말합니다. 구약의 말씀을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갑자기 오신 것이 아니라 이미 선지자들 통해서 하나님께서 오래전에 약속하셨고 그 약속하신 것이 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나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말합니다.


‘받아준다 ’라는 말은 아직까지 ‘계시하지 아니한다’ ‘드러내지 아니한다’ ‘때를 기다리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때가 되자 예수 그리스도를 땅에 보내주셨고 그 보내 주신 예수 그리스도 너희가 죽였고, 너희가 죽인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살리셨고, 그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이 사람을 낫게 했다’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장별강해 및 강해목록


사사기 3장 강해

 사사기 3장


개요

사사기 3장 강해 사사기 3장은 각 지파별로 시작되는 가나안 정복에 대한 뒷이야기로 시작됩니다. 가나안의 남겨진 족속들과 유다지파의 공격, 그리고 옷니엘과 에훗, 삼갈의 사사 활동이 소개됩니다.


  • 1-6절 그 땅에 남겨진 족속들 
  • 7-11절 사사 옷니엘 
  • 12-30절 사사 에훗 
  • 31절 사 삼갈


1-6절 그 땅에 남겨진 족속들


1-6절은 이후에 일어날 사사시대의 서론이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남겨진 족속들 통해 이스라엘을 시험하십니다.(1절) ‘가나안 전쟁’은 가난 전쟁을 왜 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왜 이 땅에 존재해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말해 줍니다. 하나님은 이방 족속을 그곳에 남겨 두심으로 전쟁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전쟁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전쟁'은 단순한 전쟁의 경험이 아니라 가나남을 정복해야 하는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목적과 의미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남겨진 족속은 블레셋 다섯 군주, 모든 가나안 족속, 시돈 족속, 바엘 헤르몬 산서 하맛 입구까지의 레바논 산에 거주하는 히위 족속들입니다.(3절) 실제로는 미디안 족속과 모암, 암몬 족속도 포함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숨이 가나안 족속들을 몰아내지 않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경험하는 법을 배우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이들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삶과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망각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배움은 아프고 고통스러운 역사적 사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불행히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거주하면서 가나안 거주민들과 혼인을 치릅니다. 혼인을 치른다는 말은 결국 그들과 교제하며 산다는 말입니다. 사사기 기자는 통혼과 더불어 ‘그들의 신을 섬겼다’(6절)고 폭로합니다.


가능하다고 모든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작은 것 하나가 모든 인생을 망칠 수 있습니다. 작은 편리함이 영적 세계를 망가뜨리기도 합니다.


7-11절 사사 옷니엘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목적에서 악을 행합니다. 하나님을 잊어 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하나님을 잊는다는 말은 지식의 부재가 아니라 영적 각성이 사라졌다는 말입니다. 믿음은 지식에 머물지 않고 삶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그 땅의 거주민이 섬기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이 말은 그 땅 주민과 통한 결과(6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이스라엘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팝니다. 구산 리사다임은 ‘두 배로 악하다’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굉장히 포악하고 잔인한 왕으로 보입니다. 앞으로 ‘손에 팔다’라는 말일 자주 등장합니다. 이 말은 대적의 손, 즉 그들이 마음대로 좌지우지한다는 말입니다. 8년 동안 구산 리사다임에게 괴롭힘을 당합니다.


이에 이스라엘은 고통에 이기지 못하고 부르짓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옷니엘을 보내 구원하십니다. 중요한 패턴이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게 함으로 하나님을 향하도록 만드십니다. 고통을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없습니다. 고통을 통해 우린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며, 망각한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삶의 실존에서 망각되어서는 안 되는 분이십니다.


12-30절 사사 에훗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합니다. 이번에는 모압 왕 에글론에게 넘깁니다. 모압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에서 빠져나와 동굴로 들어가서 큰 딸 상관하여 낳은 아들의 후손들입니다.


창세기 19장 37절 큰 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의 조상이요 요단 동편에 자리한 모압은 목축을 하는 족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악을 행하자 모압을 강성하게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모든 나라들의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강력한 나라가 되고, 하나님께서 싫으시면 패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모압 왕 에글론은 혼자 오지 않고 연합군을 편성했습니다. 아말렉 자손들을 끌어 모아 함께 온 것입니다.(13절) 그들이 점령한 곳은 종려나무 성읍입니다. 이곳은 여리고의 다른 말입니다.


에글론의 지배는 무려 18년이나 지속되었습니다.(13절) 그러자 이스라엘은 다시 부르짖기 시작합니다. 이번에는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은 왼손잡이 에훗입니다. '왼손잡이'는 오른손이 묶인 또는 장애가 있는 이란 뜻을 의역한 것입니다. 에글론에게 곡물을 바칠 때 에훗은 한 규빗(약 45cm)가 되는 칼을 만들어 오른쪽 허벅지 옷 속에 차고 들어갑니다. 에글론은 몹시 비둔한 자였습니다.


곡물을 바친 후에 에훗은 돌아갔다 길갈 근처 돌 뜨는 곳에서 돌아와 왕에게 할말이 있다며 면대를 청합니다. 왕은 뭔가 얻을 것이 있는가 싶어 주변을 물리치고 자기의 방에서 독대를 합니다. 왕이 서늘한 다락방에 있자 그는 들어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할 말이 있다고 하자 에글론이 일어납니다. 에훗을 곧바로 달려가 에글론을 준비해 간 칼로 찌릅니다. 이후 에훗은 다락문을 뒤에서 닫자 잠그고 빠져나옵니다.


신하들은 왕을 기다리지만 아무런 소식이 없고 문이 닫혀 있자 발을 가린다 생각하고 기다립니다. 아무리 오래 기다려도 나오지 않자 열쇠를 가지고 열고 들어가니 왕이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에훗은 스이라로 도망갑니다. 에브라임 산지에서 나팔을 불려 군사를 모으고 모압 연합군을 공격하여 몰아냅니다. 에훗은 먼저 요단강 나루터를 장악하고 그곳을 지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발을 가리다.
발을 가린다는 표현은 약간 모호합니다. 일반적으로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하나는 큰 변을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낮잠을 자는 것을 말합니다. 이곳에서 낮잠을 잔다는 표현으로 보입니다. 모압 사람들을 만 명을 죽이고, 한 사람도 도망가지 못하게 합니다. 이후 모압은 이스라엘에 굴복하여 한 동안 일어서지 못합니다. 이후 팔십 년 동안 평안합니다.


우리는 에훗의 헌신을 보면서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비록 장애를 가지고 있었지만 거룩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때 모든 것이 준비되고 온전할 때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일하시고, 뜻 밖의 사람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31절 사사 삼갈


삼간은 한 구절로 마무리합니다. 그는 '아낫의 아들'로 표기됩니다. 삼갈은 소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입니다. 아낫은 우가릿 문서에 바알의 아내인데, 어떻게 사사기 이런 이름을 가질 수 있는지 의아합니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당시 이스라엘의 얼마나 가나안 문화에 빠져 있는가를 말해 줍니다. 비록 하나님께 쓰임받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가나안 문화에 깊이 물든 이스라엘의 타락상을 '아낫의 아들'이란 표현을 통해 보게 됩니다. 인간은 언제나 불안합니다.


*아낫의 아들

아낫의 아들은 표현인 대단히 특이합니다. 우가릿 문헌에 의하면 아낫은 가나안의 주신 바알의 아내입니다. 성경 안에서는 바알과 아세라가 한 쌍으로 나옵니다. 아낫은 아세라의 다른 이름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지역에 따라 아세라가 아낫이란 다른 이름으로 변경되었을 수 있습니다.


사사기 장별요약 및 강해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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