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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사사기 8:22-35

 

왕이 되지 않겠다고 했지만, 왕처럼 살기 시작했습니다

  • 매일성경 묵상 사사기 8:22-35

오늘도 저는 말씀 앞에 앉아 승리한 사람의 마지막을 바라봅니다. 미디안을 무너뜨린 기드온에게 이스라엘은 왕이 되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기드온은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고 바르게 대답하지만, 이후 그의 삶에는 왕과 같은 부와 권력의 흔적이 나타납니다. 더구나 그가 만든 에봇은 이스라엘에게 올무가 되고 맙니다. 사람의 입술이 하나님을 높인다고 해서 마음까지 항상 같은 방향으로 가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큰 승리보다 더 어려운 것이 승리 이후의 믿음이며, 좋은 시작보다 중요한 것이 끝까지 하나님만 왕으로 모시는 삶임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실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다른 왕국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삿 8:22-27)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드온에게 매우 파격적인 제안을 합니다.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이는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이다.”

이것은 단순히 기드온을 지도자로 인정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기드온뿐 아니라 아들과 손자까지 다스려 달라고 요청합니다.

사사 시대의 일시적인 지도력을 세습 왕조로 바꾸자는 제안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닙니다.

미디안의 압제는 혹독했습니다.

곡식을 빼앗겼고,

가축을 잃었으며,

산과 굴에 숨어 살았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나타난 뒤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삼백 명으로 미디안 군대를 무너뜨렸고, 오렙과 스엡에 이어 세바와 살문나까지 제거했습니다.

백성의 눈에는 기드온이 자신들을 구원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당신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 신앙의 위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일하시면 우리는 그 사람을 하나님의 자리까지 높이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도구를 하나님처럼 의지하기 시작합니다.

훌륭한 목회자가 있으면 그 사람 없이는 교회가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지도자를 통해 큰 변화가 일어나면 그 사람 자체가 구원의 근원인 것처럼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사기 7장은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삼만 이천 명을 삼백 명으로 줄이신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이스라엘이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고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미디안을 이긴 궁극적인 주체는 기드온이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기드온도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백성의 요청을 거절합니다.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여기서 ‘다스리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샬’(מָשַׁל)은 통치하다, 지배하다는 뜻을 가집니다.

기드온의 대답은 신학적으로 정확합니다.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사사는 왕이 아닙니다.

사사는 하나님께서 특정한 시대에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세운 도구입니다.

기드온은 그 한계를 알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는 이 대답을 읽으며 감탄하다가도 곧 이어지는 그의 행동 때문에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말은 정확한데 삶은 점점 그 고백과 어긋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은 왕이 되지는 않겠다고 말한 뒤 백성에게 한 가지를 요구합니다.

전리품 가운데 금 귀고리를 자신에게 달라는 것입니다.

이스마엘 사람들은 금 귀고리를 하는 관습이 있었고, 백성은 기꺼이 그것을 내놓습니다.

기드온이 받은 금의 무게는 천칠백 세겔이나 되었습니다. 여기에 초승달 장식과 패물, 미디안 왕들이 입었던 자색 의복, 낙타 목에 둘렀던 사슬도 있었습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미묘한 변화를 느낍니다.

기드온은 왕의 직함은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왕에게 어울릴 만한 부와 전리품은 그의 손으로 들어옵니다.

본문이 여기서 그의 동기를 직접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기드온이 처음부터 탐욕 때문에 이 모든 것을 요구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사기 전체 흐름에서 보면 분명한 경고가 있습니다.

입술로 왕권을 거절하는 것과 마음에서 권력과 영광을 내려놓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제게 적용할 때 아주 조심스럽고 정직해지고 싶습니다.

저는 하나님만 높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그런데 실제 마음에서는 사람들이 저를 알아주기를 원할 수 있습니다.

칭찬받고 싶고,

영향력을 갖고 싶으며,

내 이름이 오래 기억되기를 바랄 수도 있습니다.

신앙적인 언어가 마음의 욕망을 자동으로 제거해 주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제 동기를 계속 살펴야 합니다.

기드온은 그 금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 자신의 성읍 오브라에 둡니다.

‘에봇’(אֵפוֹד)은 본래 제사장의 의복과 관련된 용어입니다. 출애굽기에서는 대제사장이 착용하는 특별한 의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기드온이 만든 에봇이 정확히 어떤 형태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제사장의 의복을 본뜬 실제 의복이었는지, 혹은 금으로 만들어진 종교적 상징물이나 제의적 대상으로 기능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구체적인 모습을 단정하기보다 본문이 분명히 평가하는 결과에 집중해야 합니다.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의 집에 올무가 되니라.”

이 말이 중요합니다.

기드온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결과적으로 에봇은 우상숭배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것처럼 시작된 일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이것이 교회와 신앙생활에서 매우 위험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해 만든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보다 중요해질 수 있습니다.

건물도 그렇습니다.

전통도 그렇습니다.

직분도 그렇고,

특정한 예배 방식이나 프로그램도 그럴 수 있습니다.

좋은 목회자나 신앙의 지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할 것이 어느 순간 그 자체로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신앙에서 좋은 것의 우상화를 더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쁜 것을 우상으로 만들면 비교적 쉽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해 시작한 것을 우상으로 만들면 그것을 경건이라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에봇을 “음란하게 위하였다”고 표현합니다.

여기 사용되는 ‘자나’(זָנָה)는 본래 음행하다라는 뜻이지만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이나 종교적 대상을 따르는 영적 배신을 표현할 때 자주 사용됩니다.

언약 관계의 관점에서 우상숭배는 단순한 종교적 취향이 아닙니다.

배우자를 버리고 다른 사랑을 찾는 것과 같은 언약적 배신입니다.

저는 그래서 하나님께 묻고 싶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섬긴다는 이름으로 만들어 놓고 오히려 주님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 있습니까?”

이 질문을 피하지 않겠습니다.

기드온의 에봇은 결국 기드온 자신의 집에도 올무가 되었습니다.

‘올무’를 뜻하는 ‘모케쉬’(מוֹקֵשׁ)는 사람이나 짐승을 붙잡는 덫을 뜻합니다.

처음에는 내가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것이 나를 붙잡습니다.

우상의 본질이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돈을 사용합니다.

나중에는 돈이 제 선택을 지배합니다.

처음에는 사람의 인정을 기뻐합니다.

나중에는 인정받지 못하면 살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처음에는 사역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사역의 성과가 제 존재 가치를 결정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만든 것이 제 올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십자가 앞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십자가는 제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보여 주어 인정받는 곳이 아니라, 아무 자격 없는 저를 하나님께서 은혜로 받아 주셨다는 자리입니다.

거기에서는 성공도 실패도 제 정체성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저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입니다.

이 정체성이 분명할수록 세상의 에봇은 제 마음을 덜 붙잡습니다.

사십 년의 평화 속에서도 기드온은 점점 왕처럼 살아갔습니다 (삿 8:28-32)

28절은 미디안 전쟁의 결과를 정리합니다.

“미디안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복종하여 다시는 그 머리를 들지 못하였으므로 기드온이 사는 날 동안 그 땅이 사십 년 동안 평온하였더라.”

외적인 결과만 보면 성공입니다.

미디안은 완전히 꺾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사십 년의 안식을 누립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사용하여 백성을 구원하신 것은 분명합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한 사람의 부족함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 행하신 선한 일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드온이 이후 여러 문제를 보였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이루신 구원을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하나님께 쓰임받았다는 사실이 기드온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균형이 중요합니다.

성경의 인물들은 대부분 흑백으로 단순하게 나눌 수 없습니다.

믿음도 있고 연약함도 있습니다.

순종하면서도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께 쓰임받으면서도 자기 욕망에 흔들립니다.

이것이 성경이 인간을 매우 현실적으로 묘사하는 방식입니다.

저는 이 점에서 위로와 경고를 동시에 받습니다.

제가 불완전하다고 하나님께서 전혀 사용하지 못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과거에 하나님께 쓰임받았다고 현재의 모든 행동이 옳은 것도 아닙니다.

어제의 순종으로 오늘의 교만을 덮을 수 없습니다.

매일 말씀 앞에 다시 서야 합니다.

29절부터 기드온의 개인 생활이 기록됩니다.

기드온은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아내가 많았으며 그의 몸에서 낳은 아들이 칠십 명이나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칠십 명의 아들을 두었다는 사실은 단순히 가족이 컸다는 말 이상으로 당시 고대 근동의 왕적 생활방식을 떠올리게 합니다.

많은 아내와 많은 자손은 권력과 부를 가진 통치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기드온은 왕이 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점차 왕과 비슷한 모습을 띠기 시작합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공식적인 직함”과 “실제 마음의 태도”를 생각합니다.

왕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아도 왕처럼 살 수 있습니다.

높은 자리를 거절하면서도 실제로는 영향력과 특권을 즐길 수 있습니다.

겸손한 말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다른 사람 위에 서고 싶어 할 수 있습니다.

기드온의 변화는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사사기 8장을 따라가면 조금씩 진행됩니다.

승리합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습니다.

금이 모입니다.

에봇이 만들어집니다.

가족은 왕가처럼 커집니다.

저는 죄의 변화가 이처럼 점진적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기보다 작은 선택들이 쌓이면서 방향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큰 죄를 짓지 않는 것만 중요하지 않습니다.

작은 욕망을 어떻게 다루는지가 중요합니다.

기드온에게는 세겜에 첩도 있었고, 그 여인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들의 이름이 아비멜렉입니다.

‘아비멜렉’(אֲבִימֶלֶךְ)은 흔히 “내 아버지는 왕이다” 혹은 “아버지가 왕이다”라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저는 이 이름이 사사기 8장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부분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기드온은 백성에게 분명히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않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실 것이다.”

그런데 그의 아들의 이름은 “내 아버지는 왕이다”라는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물론 고대 이름의 의미와 실제 작명 동기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사사기 서사의 흐름 속에서는 기드온의 삶이 왕권과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암시하는 강력한 문학적 장치로 읽힙니다.

그리고 이 아비멜렉은 다음 장에서 끔찍한 비극의 중심 인물이 됩니다.

기드온의 아들들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합니다.

오늘의 작은 타협이 다음 세대에서는 훨씬 큰 죄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부모와 신앙 공동체의 관점에서도 생각합니다.

제가 자녀에게 무엇을 말하느냐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보여 주느냐는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치면서 실제 삶에서는 돈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면 자녀는 말보다 삶을 배울 것입니다.

겸손을 가르치면서 제가 끊임없이 사람들의 인정을 구하면 그 모습이 전달됩니다.

예배를 강조하면서 실제로 하나님보다 성공을 더 사랑한다면 다음 세대는 그 모순을 봅니다.

기드온은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정에는 왕 같은 생활방식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제 신앙이 말과 삶 사이에서 얼마나 일치하는지를 살펴보고 싶습니다.

32절은 기드온의 죽음을 기록합니다.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나이가 많아 죽으매.”

그는 좋은 나이에 죽고 아버지 요아스의 묘에 장사됩니다.

사사기에서 한 시대가 끝납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모든 인간 지도자의 한계를 다시 느낍니다.

기드온도 죽었습니다.

옷니엘도 죽었고,

에훗도 죽었으며,

드보라와 바락의 시대도 지나갔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은 사람도 영원히 공동체를 지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한 인간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면 위험합니다.

훌륭한 목회자는 귀한 선물입니다.

그러나 목회자가 교회의 주인은 아닙니다.

그가 떠나도 교회는 존재해야 합니다.

교회의 머리는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기드온과 예수님의 차이는 결정적입니다.

기드온은 백성을 구원했지만 죽었습니다.

그가 죽자 백성은 다시 하나님을 떠납니다.

예수님도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통치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살아 계시기 때문에 그의 제사장 직분도 영원하다고 말합니다.

저의 궁극적인 소망은 훌륭한 인간 지도자가 아닙니다.

죽음을 이기신 왕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기드온이 죽자 백성은 다시 바알에게 돌아갔고, 은혜도 잊었습니다 (삿 8:33-35)

33절은 기드온이 죽은 뒤 이스라엘의 모습을 기록합니다.

“기드온이 이미 죽으매 이스라엘 자손이 돌이켜 바알들을 따라가 음행하였으며.”

또다시 반복입니다.

사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어느 정도 신앙이 유지됩니다.

그가 죽으면 백성은 다시 우상에게 돌아갑니다.

저는 여기서 빌린 신앙의 한계를 봅니다.

기드온이 있을 때는 하나님을 섬깁니다.

기드온이 사라지자 바알에게 돌아갑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믿음이 정말 하나님께 뿌리를 내린 것이었는지 묻게 됩니다.

저도 특정한 사람의 신앙에만 기대어 살아서는 안 됩니다.

좋은 목회자가 있을 때만 기도하고,

좋은 공동체가 있을 때만 믿음이 유지되며,

누군가 격려해 줄 때만 하나님을 따른다면 제 믿음의 뿌리는 아직 깊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신앙은 결국 제가 하나님을 직접 아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특별히 “바알브릿”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습니다.

‘바알브릿’(בַּעַל בְּרִית)은 문자적으로 “언약의 바알”, “언약의 주”라는 의미입니다.

이 이름은 사사기 9장의 세겜 이야기와도 연결됩니다.

저는 이 이름이 특히 아이러니하게 느껴집니다.

이스라엘에게 이미 언약의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셨으며,

시내산에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참 언약의 하나님을 버리고 “언약의 바알”이라는 이름의 다른 신을 선택합니다.

가짜가 진짜의 언어를 흉내 냅니다.

우상은 언제나 노골적으로 악한 모습으로만 찾아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과 비슷한 것을 약속합니다.

안전,

평안,

풍요,

사랑,

정체성을 약속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 그것을 얻으라고 말합니다.

저는 오늘의 우상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돈은 안전을 약속합니다.

성공은 가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사랑은 “누군가에게 사랑받으면 네 존재가 완성된다”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하나님 자리를 차지하면 결국 바알브릿이 됩니다.

하나님이 주셔야 할 언약적 안정과 정체성을 다른 대상에게서 찾는 것입니다.

34절은 이스라엘의 문제를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주위에 있는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 자기들을 건져내신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하지 아니하며.”

핵심은 ‘기억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기억은 단순한 뇌의 작용이 아닙니다.

구원의 사건이 현재의 삶을 지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원을 정말 기억했다면 바알에게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미디안에게서 누가 건졌는지 기억한다면 금으로 만든 종교적 대상이나 가나안 신에게 마음을 줄 수 없었습니다.

저도 복음을 잊으면 우상으로 돌아갑니다.

십자가를 잊으면 사람의 인정으로 제 가치를 확인하려 합니다.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잊으면 돈이 하나님처럼 보입니다.

부활을 잊으면 죽음과 실패가 모든 것의 끝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에는 끊임없는 복음의 기억이 필요합니다.

저는 매일 새로운 복음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같은 복음을 새롭게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나는 값으로 산 사람입니다.”

이 사실이 오늘의 욕망과 두려움을 다스리게 해야 합니다.

35절에서는 또 하나의 망각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은 기드온이 베푼 은혜를 따라 그의 집을 후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잊자 사람에게 받은 은혜도 잊었습니다.

저는 이 두 가지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은 감사할 줄 압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혼자 이룬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잊으면 사람의 도움도 당연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은혜’ 혹은 인애와 충성을 뜻하는 중요한 히브리어 ‘헤세드’(חֶסֶד)는 언약적 사랑, 신실한 자비, 충성을 나타냅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기드온의 집에 그에 합당한 인애를 베풀지 않았음을 지적합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사람에게 배은망덕하게 사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관계 속에서 감사와 신실함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서 한 가지 더 깊은 문제를 봅니다.

기드온이 살아 있는 동안에도 이스라엘의 신앙은 이미 위험한 씨앗을 품고 있었습니다.

오브라의 에봇이 존재했습니다.

왕적 생활방식도 자리 잡았습니다.

그의 죽음 이후 갑자기 모든 문제가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작은 균열들이 이미 있었습니다.

신앙의 붕괴는 대개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조금 더 사랑하기 시작하고,

말씀의 권위를 조금씩 낮추며,

죄를 작은 것으로 여기다가 어느 순간 방향 전체가 바뀝니다.

그래서 저는 큰 배교만 두려워하기보다 작은 망각을 경계하고 싶습니다.

오늘 한 번의 기도를 미루는 것이 곧 배교는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 살아도 괜찮다는 습관이 만들어지면 위험합니다.

작은 탐욕 하나가 즉시 사람을 망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계속 정당화하면 마음의 주인이 바뀔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기억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디에서 저를 건지셨는지,

어떻게 붙드셨는지,

누구를 통해 은혜를 주셨는지를 기억하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드온보다 더 크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겠습니다.

기드온은 왕이 되는 것을 거절했지만 왕 같은 삶의 유혹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참된 왕이시지만 왕권을 자기 이익을 위해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종의 형체를 입으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기드온에게는 많은 금과 가족과 명예가 남았지만,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셨고 마지막에는 옷까지 나누어졌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분이 참된 왕이십니다.

십자가 위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가 붙었습니다.

사람들은 조롱했지만 복음은 그 조롱 속에 진실이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그분은 힘으로 백성을 지배하지 않고 자기 생명을 주어 백성을 살리시는 왕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영원히 다스리십니다.

저는 그 왕을 섬기고 싶습니다.

인간 지도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제 믿음의 중심에 두겠습니다.

좋은 지도자를 감사히 여기되 우상으로 만들지 않겠습니다.

좋은 전통을 사랑하되 복음보다 높이지 않겠습니다.

무엇보다 제 마음 안에 작은 왕국을 만들지 않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리라.”

기드온이 했던 이 고백이 말에 머물지 않고 제 삶 전체의 고백이 되기를 원합니다.

마무리

사사기 8장 22절부터 35절을 묵상하며 저는 승리보다 승리 이후가 더 어렵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기드온은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고 고백했지만 에봇은 올무가 되었고, 그의 삶에는 점점 왕과 같은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그가 죽자 백성은 다시 바알에게 돌아가 하나님의 구원과 사람에게 받은 은혜까지 잊었습니다. 오늘 저는 신앙적인 말만 남기지 않고 삶에서도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겠습니다. 성취와 영향력을 우상으로 만들지 않고,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 주시고 부활하신 참된 왕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끝까지 충성하는 믿음을 구하겠습니다.


매일성경 묵상 사사기 8:1-21

지친 채로도 추격하되, 분노가 믿음을 삼키지 않게 하소서

  • 매일성경 묵상 사사기 8:1-21

오늘도 저는 말씀 앞에 앉아 승리 이후의 기드온을 바라봅니다. 사사기 7장에서 그는 삼백 명으로 미디안 대군을 무너뜨렸지만, 8장에서는 전혀 다른 시험을 만납니다. 전쟁보다 어려운 관계의 갈등, 지친 몸으로 계속해야 하는 추격, 동족의 냉소와 거절, 그리고 마지막에는 복수와 분노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저는 이 본문을 통해 믿음의 사람도 승리 직후 무너질 수 있음을 배웁니다. 외부의 적을 이기는 것보다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 속 기드온의 지혜와 위험한 변화를 함께 살펴보며, 끝까지 하나님을 닮아 가는 믿음이 무엇인지 묵상하고자 합니다.

부드러운 대답은 전쟁보다 더 큰 갈등을 멈추게 했습니다 (삿 8:1-3)

본문은 전쟁터가 아니라 같은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의 갈등으로 시작합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따집니다.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찌 됨이냐.”

그들은 기드온을 심하게 책망합니다.

사사기 7장을 보면 기드온은 미디안 군대가 도망하기 시작한 뒤 에브라임 사람들을 불러 요단 나루를 차단하게 했습니다. 에브라임은 그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미디안의 두 방백 오렙과 스엡을 사로잡아 죽였습니다.

그런데도 마음이 상했습니다.

왜 처음부터 자신들을 부르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공동체 안에서 갈등이 생기는 이유가 꼭 악한 목적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합니다.

에브라임은 이스라엘의 적이 아닙니다.

같은 편입니다.

함께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승리를 거둔 직후 갈등이 생겼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광과 인정의 문제 때문입니다.

사람은 일을 하지 못해서만 섭섭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중요한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했다고 느낄 때도 마음이 상합니다.

교회 공동체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누가 더 많이 섬겼는가,

누구의 이름이 먼저 언급되었는가,

왜 나는 처음부터 의논하지 않았는가,

누구의 공이 더 큰가를 따지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일을 함께하고서도 서로 다투게 됩니다.

저는 이 본문 앞에서 제 안의 인정욕구를 살펴봅니다.

사역 자체보다 “내가 인정받고 있는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는가.

하나님의 나라가 잘되는 것보다 제 역할이 크게 보이는 것을 더 원하는 순간은 없는가.

에브라임의 문제는 단순히 성격이 거칠어서가 아니라 자기 위치에 대한 자존심이 상한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의 대응이 놀랍습니다.

그는 맞서지 않습니다.

“너희가 처음부터 어디 있었느냐.”

“내가 목숨 걸고 싸울 때 너희는 나중에 왔지 않느냐.”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사실 기드온에게도 할 말은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낮춥니다.

“내가 한 일이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그리고 에브라임의 포도 끝물 수확이 아비에셀의 포도 맏물 수확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당시 농경사회에서 이해하기 쉬운 비유입니다.

끝물 포도라도 양이 많으면 작은 포도원의 첫 수확보다 풍성할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에브라임이 붙잡은 오렙과 스엡을 높이 평가합니다.

“하나님이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으니 내가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가 한 것과 같겠느냐.”

이 말을 듣자 에브라임의 분노가 풀립니다.

저는 여기에서 잠언의 말씀을 떠올립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한다.”

기드온은 전쟁에서 나팔과 횃불을 사용했지만, 공동체의 갈등에서는 부드러운 말이 더 강력한 무기가 되었습니다.

‘분노’와 연결되는 히브리어 ‘루아흐’(רוּחַ)는 본래 영, 바람, 기운을 의미하며 문맥에 따라 격앙된 마음이나 노여움을 표현하는 데도 사용됩니다. 에브라임의 마음이 들끓고 있었지만 기드온의 겸손한 말이 그 기운을 가라앉혔습니다.

저는 이것이 지도자의 중요한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실관계에서 내가 옳음을 증명하는 것이 항상 최선은 아닙니다.

관계를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거짓을 진실이라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당한 요구를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도 지혜는 아닙니다.

그러나 자존심 때문에 반드시 이겨야 하는 논쟁은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에브라임에게 자신의 공을 설명하기보다 그들의 공을 인정했습니다.

저는 이런 태도가 얼마나 어려운지 압니다.

사람은 자기가 한 수고를 알아주기를 원합니다.

특히 실제로 고생한 사람이 무시당한다고 느끼면 더 억울합니다.

그때 상대의 기여를 먼저 인정하는 것은 상당한 자기 절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한마디가 공동체를 살릴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제 말의 목적을 돌아봅니다.

내 말이 상대를 이기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공동체를 살리기 위한 것인가.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권리를 끝까지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빌립보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본체이셨지만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고 말합니다.

십자가는 자기 권리를 포기한 가장 극적인 사건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자기 비움은 무기력한 굴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능동적인 순종입니다.

저는 그래서 갈등 속에서 무조건 참기만 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공동체를 깨뜨리는 선택도 복음적이지 않습니다.

기드온은 이 순간 적어도 그 지혜를 보여 줍니다.

자기 이름보다 이스라엘의 연합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저도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의 자존심이 상했을 때 먼저 인정하고 세워 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서로 경쟁하지 않겠습니다.

누가 더 큰 공을 세웠는지를 따지기보다 하나님께서 모두를 어떻게 사용하셨는지를 보겠습니다.

지쳤으나 계속 추격했습니다, 그러나 동족은 떡 한 조각도 주지 않았습니다 (삿 8:4-12)

4절은 짧지만 강한 문장입니다.

“기드온과 그를 따르는 삼백 명이 요단에 이르러 건너고 비록 피곤하나 추격하며.”

저는 이 말씀 가운데 “피곤하나 추격하며”라는 표현을 오래 묵상하게 됩니다.

그들은 이미 큰 전투를 치렀습니다.

밤새 움직였습니다.

미디안 진영을 혼란에 빠뜨렸고,

도망하는 군대를 추격했습니다.

그러니 지치는 것이 당연합니다.

믿음이 있다고 피곤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사명을 감당한다고 몸의 한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 점이 참 현실적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초인처럼 묘사하지 않습니다.

피곤합니다.

두려워합니다.

배고픕니다.

그런데도 계속 갑니다.

‘추격하다’를 뜻하는 ‘라다프’(רָדַף)는 뒤쫓다, 추적하다라는 뜻입니다. 기드온과 삼백 명은 이미 중요한 승리를 얻었지만 남은 미디안 왕 세바와 살문나를 끝까지 추격합니다.

저는 여기서 끈기를 배웁니다.

어떤 일은 한 번의 결단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죄와 싸우는 일도 그렇습니다.

오래된 습관은 한 번의 감동으로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관계를 회복하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사역도 처음 열정만으로는 지속하기 어렵습니다.

결국 필요한 것은 지친 상태에서도 다시 한 걸음을 내딛는 충성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조건 버텨라”는 정신론이 아닙니다.

기드온과 삼백 명은 실제로 배가 고팠습니다.

그래서 숙곳 사람들에게 떡을 요청합니다.

“나를 따르는 백성이 피곤하여서 그들에게 떡 덩이를 주라.”

저는 이 요청이 지나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전체를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숙곳 사람들에게도 미디안의 위협이 사라지는 것은 이익입니다.

그런데 숙곳의 방백들은 냉소적으로 대답합니다.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네 손 안에 있다는 것이냐 우리가 네 군대에게 떡을 주겠느냐.”

즉 아직 최종 승리가 확인되지 않았으니 기드온을 도울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에서 두려움과 계산을 봅니다.

숙곳은 요단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미디안의 보복을 두려워했을 수 있습니다.

만약 기드온이 패배한다면 세바와 살문나가 돌아와 자신들을 처벌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의 편인지 확실해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으려 한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현실적인 계산입니다.

그러나 그 계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브누엘 사람들도 똑같이 거절합니다.

저는 이 장면을 묵상하며 믿음에는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하는 요소가 있음을 생각합니다.

모든 결과가 확정된 뒤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은 믿음이라 부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승자가 분명해진 다음 편을 선택하는 것은 계산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면 결과가 완전히 보이지 않아도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은 떡을 거절했습니다.

떡 한 덩이는 작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 작은 행동이 그들이 어느 편에 서 있는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작은 섬김을 가볍게 여기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지친 사람에게 물 한 잔 주는 것,

격려 한마디를 건네는 것,

조용히 식사를 준비하는 것,

기도로 동역하는 것도 사역입니다.

모든 사람이 기드온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누군가는 떡을 주면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전쟁의 최전선만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지친 사람을 먹이는 일도 거룩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결단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래서 사역을 눈에 띄는 역할 중심으로만 평가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설교만 사역이 아닙니다.

기도도 사역이고,

식탁을 준비하는 것도 사역이며,

지친 사람을 쉬게 하는 것도 사역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의 반응은 점점 거칠어집니다.

그는 숙곳 사람들에게 승리하고 돌아오면 들가시와 찔레로 그들의 살을 찢겠다고 말합니다.

브누엘 사람들에게는 망대를 헐겠다고 선언합니다.

저는 여기에서 기드온의 마음에 변화가 시작되는 것을 느낍니다.

1-3절에서 에브라임의 거친 항의를 부드러운 대답으로 풀어냈던 사람과 같은 사람인가 싶습니다.

에브라임에게는 겸손했습니다.

숙곳과 브누엘에게는 위협합니다.

물론 숙곳과 브누엘의 행동은 분명 비겁했고 공동체적 책임을 저버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기드온의 말 속에는 개인적 분노가 섞여 있는 듯합니다.

이 점은 이후 본문에서 더 뚜렷해집니다.

저는 이 장면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명을 감당하다 지치면 마음이 거칠어질 수 있습니다.

몸이 피곤하면 영적인 분별력도 약해지기 쉽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싸웠는데 어느 순간 나를 무시한 사람에게 화를 내며 싸울 수 있습니다.

사명의 열심과 개인적 분노가 섞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목회와 사역에서도 매우 조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도움을 기대했는데 거절당하고,

수고가 인정받지 못하면 마음에 보복심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 순간 나는 여전히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내 상처를 갚는 일을 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지친 상태에서 중요한 판단을 할 때 더욱 조심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피곤함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피곤함을 핑계로 분노와 보복을 정당화해서는 안 됩니다.

기드온과 삼백 명은 계속 추격하여 세바와 살문나의 군대를 기습합니다.

적군은 십오만 명 가운데 살아남은 만 오천 명 정도였습니다.

여전히 기드온의 군대보다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미 승리의 길을 여셨고, 미디안 진영은 무너집니다.

세바와 살문나도 붙잡힙니다.

저는 여기서 다시 “피곤하나 추격하며”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끝까지 간 사람이 열매를 봅니다.

하지만 그 열매를 보는 과정에서 마음까지 잘 지켜야 합니다.

사역을 완수하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마음으로 완수하는지도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제 손의 결과뿐 아니라 제 마음의 방향도 보십니다.

승리가 복수로 변할 때, 기드온의 마음은 위험한 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삿 8:13-21)

기드온은 승리한 뒤 돌아옵니다.

그리고 숙곳의 한 소년을 붙잡아 성읍의 방백과 장로 칠십칠 명의 이름을 알아냅니다.

그는 숙곳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너희가 전에 나를 희롱하여 이르기를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네 손에 있기에 우리가 네 피곤한 사람들에게 떡을 주겠느냐 하였도다.”

그리고 실제로 장로들을 들가시와 찔레로 징계합니다.

브누엘의 망대도 헐고 성읍 사람들을 죽입니다.

저는 이 장면을 읽으면서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숙곳과 브누엘이 잘못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기드온의 대응은 단순한 공적 징계와 개인적 보복의 경계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특히 “너희가 나를 희롱하였다”는 그의 표현에서 개인적인 상처가 강조됩니다.

처음 전쟁의 핵심은 하나님의 백성을 미디안의 압제에서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기드온의 관심은 자신을 무시한 사람들에게 돌아갑니다.

저는 여기서 승리 이후의 위험을 봅니다.

큰 실패 다음에도 사람이 무너질 수 있지만 큰 성공 다음에도 무너질 수 있습니다.

성공하면 힘이 생깁니다.

영향력도 커집니다.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하는가가 다음 시험입니다.

기드온이 포도주 틀에 숨어 있을 때에는 다른 사람을 처벌할 힘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있습니다.

그리고 그 힘이 복수의 수단으로 사용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목회적으로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약할 때의 신앙만큼 강해진 뒤의 신앙이 중요합니다.

지위가 낮을 때 겸손한 것은 상대적으로 쉽습니다.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을 때는 권력을 남용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내 말을 듣기 시작하고,

결정을 내릴 권한이 생기며,

누군가를 평가할 수 있는 위치에 서면 그때 비로소 제 마음의 깊은 모습이 드러납니다.

저는 힘을 가졌을 때 어떻게 사용하는 사람인가.

나를 반대한 사람을 누르는 데 사용하는가.

아니면 약한 사람을 살리는 데 사용하는가.

이 질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구약의 사사들에게는 당시의 언약적·정치적 상황 속에서 심판을 집행하는 역할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기준으로 모든 행위를 단순하게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사기 자체가 기드온을 완벽한 영웅으로 그리지 않는다는 사실도 분명합니다.

앞으로 갈수록 그의 모습에는 어두운 면이 더욱 나타납니다.

사사기는 인간 사사의 한계를 보여 줌으로써 더 나은 왕, 더 완전한 구원자를 기다리게 합니다.

17절 이후 기드온은 세바와 살문나를 심문합니다.

그가 다볼에서 죽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느냐고 묻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답합니다.

“그들이 너와 같아서 하나같이 왕자들의 모습과 같더라.”

그러자 기드온은 그 사람들이 자기 형제들이었다고 밝힙니다.

“그들은 내 형제들이며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니라.”

여기서 전쟁은 더욱 개인적인 복수의 성격을 띠기 시작합니다.

세바와 살문나는 단순한 이스라엘의 적이 아니라 기드온의 형제들을 죽인 사람들입니다.

기드온은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며 형제들을 살렸다면 자신도 그들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 맏아들 여델에게 그들을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저는 이 장면이 매우 불편합니다.

여델은 아직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본문은 그가 두려워 칼을 빼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기드온의 복수가 다음 세대에게까지 넘겨질 위험을 봅니다.

자기 상처를 자녀에게 물려주는 일입니다.

자신이 받은 모욕과 분노를 자녀에게 대신 갚도록 요구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어떤 사람을 미워하면 자녀에게도 그 사람을 미워하도록 가르칩니다.

가정의 오랜 갈등과 원한이 다음 세대로 이어집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전 세대의 감정과 파벌이 다음 세대에 전달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끊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은 상처를 상속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상속하게 합니다.

분노를 다음 세대에 넘기는 것이 아니라 용서의 길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세바와 살문나는 오히려 기드온에게 직접 자신들을 죽이라고 말합니다.

“네가 일어나 우리를 치라 사람이 어떠하면 그의 힘도 그러하니라.”

고대 사회에서는 어린아이에게 죽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들은 기드온 자신의 손에 죽기를 요구합니다.

기드온은 결국 그들을 죽이고 낙타 목에 있던 초승달 장식을 취합니다.

이 장면에서 저는 사사기 서사가 미묘하게 변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7장에서 삼백 명의 전쟁은 명백히 하나님의 승리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자랑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8장으로 들어오면서 기드온 개인의 이름과 분노와 전리품이 점점 더 두드러집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셨던 사람이 어느 순간 자기 힘을 느끼기 시작할 위험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인간 지도자의 한계입니다.

기드온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도 그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러나 완전한 사람은 아닙니다.

믿음의 영웅이라고 해서 그의 모든 행동이 본받아야 할 모범은 아닙니다.

성경은 사람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드온을 보며 제 자신도 경계합니다.

어제 하나님의 도구였다고 오늘도 자동으로 바른 것은 아닙니다.

과거의 은혜가 현재의 분별력을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매일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드온은 자신을 모욕한 사람들에게 보복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기드온은 형제들의 죽음에 대한 피의 복수를 실행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배반하고 죽이는 원수를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기드온은 승리한 뒤 힘을 행사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권세를 가지셨지만 그 권세를 섬김을 위해 사용하셨습니다.

이 차이가 매우 큽니다.

사사들은 부분적인 구원자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구원자이십니다.

사사들은 자신도 죄와 분노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십니다.

그래서 인간 지도자가 아무리 훌륭해도 궁극적으로 우리의 소망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저는 십자가에서 참된 왕의 모습을 봅니다.

세상의 왕은 힘을 가지고 원수를 굴복시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내어 주어 원수를 화목하게 만드십니다.

바울은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새 언약의 길입니다.

그래서 오늘 그리스도인은 기드온의 복수 방식을 따라 살아갈 수 없습니다.

신약은 분명히 말합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최종적인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악을 선으로 이겨야 합니다.

이것은 불의를 방치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정의는 필요합니다.

범죄에는 법적 책임이 따라야 합니다.

교회 안의 악도 적절히 다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정의와 개인적 복수는 다릅니다.

정의는 질서를 회복하려 하지만 복수는 상대가 고통받는 것을 원합니다.

저는 이 차이를 제 마음에서 분별하고 싶습니다.

누군가 잘못했을 때 제가 원하는 것은 정의인가, 아니면 그 사람이 무너지는 모습인가.

이 질문이 제 분노의 성격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기드온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만으로도 한 가지 분명합니다.

전쟁에서 이기는 것보다 자기 마음을 끝까지 지키는 일이 더 어렵습니다.

저는 외부의 미디안만 두려워하지 않고 내 안의 교만과 분노도 경계하겠습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누구도 자기 의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저 역시 원수였지만 은혜로 용서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무리

사사기 8장 1절부터 21절을 묵상하며 저는 기드온 안에서 지혜와 위험을 동시에 봅니다. 에브라임의 분노는 부드러운 말로 풀었지만, 숙곳과 브누엘의 거절 앞에서는 분노가 보복으로 기울었고, 세바와 살문나를 향해서는 개인적인 복수까지 더해졌습니다. 오늘 저는 “피곤하나 추격하는” 충성은 배우되, 피곤함과 상처가 제 마음을 거칠게 만들지 않도록 경계하겠습니다. 성공과 권한이 생길수록 더 낮아지고, 판단은 정의롭게 하되 복수는 하나님께 맡기겠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을 죽이는 자까지 용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사람을 이기는 승리보다 제 마음이 복음 안에 머무는 승리를 더 소중히 여기겠습니다.


매일성경 묵상 사사기 7:15-25

나팔과 항아리와 횃불, 승리는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 매일성경 묵상 사사기 7:15-25

오늘도 저는 말씀 앞에 앉아 하나님께서 약한 사람과 평범한 도구를 통해 어떻게 승리를 이루시는지를 묵상합니다. 기드온은 적진에서 보리떡 꿈의 해석을 들은 뒤 가장 먼저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그리고 삼백 명을 세 부대로 나누어 나팔과 빈 항아리, 횃불을 들게 합니다. 전쟁터에 어울리지 않는 도구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사용하여 미디안 진영에 큰 혼란을 일으키십니다. 이스라엘의 칼보다 먼저 하나님의 손이 움직였습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에서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들은 뒤 예배하고, 작은 순종으로 움직이며, 승리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임을 배웁니다.

승리를 확신한 기드온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예배였습니다 (삿 7:15-18)

기드온은 미디안 병사가 말하는 꿈과 그 해석을 들었습니다.

보리떡 한 덩이가 미디안 진영으로 굴러 들어와 장막을 뒤집어엎는 꿈이었고, 그 병사의 동료는 그것을 기드온의 승리로 해석했습니다.

기드온은 그 말을 듣고 무엇을 했습니까?

곧바로 군사 회의를 연 것이 아닙니다.

전략을 수정한 것도 아닙니다.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드온이 그 꿈과 해몽하는 말을 듣고 경배하고.”

저는 이 순서가 참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기드온의 믿음은 먼저 예배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다시 확증해 주셨을 때 기드온은 승리의 가능성을 계산하기보다 하나님께 엎드립니다.

‘경배하다’라는 의미와 연결되는 히브리어 ‘샤하’(שָׁחָה)는 몸을 낮추어 엎드리고 경배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감정적 감동이 아닙니다.

자기보다 크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행동입니다.

저는 이 장면을 묵상하며 제 신앙의 반응을 돌아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 저는 무엇을 먼저 합니까?

기쁜 일이 생기면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먼저일 때가 있습니다.

기도 응답을 받으면 결과를 누리는 데 마음이 더 갑니다.

문제가 해결되면 기도하던 때의 간절함을 쉽게 잊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먼저 예배했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받아내는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그분께 엎드리는 관계입니다.

저는 오늘 제 삶에서도 이 순서를 배우고 싶습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먼저 감사하고,

길이 열렸으면 먼저 예배하며,

응답을 받았으면 결과보다 하나님을 더 기뻐하고 싶습니다.

기드온은 예배한 뒤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와 말합니다.

“일어나라 여호와께서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이 말은 이미 사사기 7장 앞부분에서 하나님께서 하셨던 말씀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기드온이 그 말씀을 백성에게 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드온 안에서 확신으로 바뀌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영적 지도자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도자는 자신의 불안을 공동체에 퍼뜨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공동체가 믿음으로 일어서도록 돕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물론 지도자도 두려울 수 있습니다.

기드온 역시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부라를 데리고 적진에 내려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확인한 뒤에는 그 두려움 속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이제 다른 사람을 격려합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이 부분이 마음에 남습니다.

제가 말씀 앞에서 먼저 확신을 얻지 못하면 성도에게 확신을 전하기 어렵습니다.

설교자는 자신이 듣지 않은 말씀을 단지 전달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먼저 말씀에 붙들려야 합니다.

먼저 말씀 앞에서 무너져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약속으로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그 뒤에야 “일어나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삼백 명을 세 부대로 나눕니다.

그리고 각 사람의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와 항아리 안에 감춘 횃불을 줍니다.

저는 이 장면이 너무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전쟁을 하러 가는데 칼과 창보다 나팔과 항아리와 횃불이 더 강조됩니다.

인간의 상식으로 보면 부적절한 무기입니다.

나팔은 소리를 내는 도구이고,

항아리는 쉽게 깨집니다.

횃불은 밤을 밝히는 도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것들을 사용하십니다.

저는 여기서 하나님의 방식이 인간의 방식과 다르다는 사실을 다시 배웁니다.

우리는 강한 것을 찾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약한 것을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화려한 것을 원합니다.

하나님은 평범한 것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이것은 삼백 명을 남기신 이유와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승리한 뒤 자기 힘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기드온은 군사들에게 말합니다.

“나를 보며 내가 하는 대로 하되.”

이 말은 지도자의 책임을 보여 줍니다.

그는 뒤에서 명령만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먼저 행동합니다.

“내가 하면 너희도 그렇게 하라.”

저는 여기서 신앙의 본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합니다.

말로만 기도하라고 하는 것보다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강합니다.

희생하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희생해야 합니다.

정직을 가르치기 전에 자신이 정직해야 합니다.

용서를 설교하기 전에 자신이 용서해야 합니다.

신앙은 설명만으로 전수되지 않습니다.

삶을 통해 보이는 부분이 있습니다.

기드온은 자신과 함께 있는 자들이 나팔을 불면 삼백 명도 사방에서 나팔을 불며 외치라고 합니다.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이 표현은 자칫 기드온과 하나님을 같은 수준에 놓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전쟁의 구호로서 기드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지휘자임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사사기 전체의 중심은 기드온이 아닙니다.

승리의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기드온의 이름이 들어가도 영광의 최종적인 주인은 여호와입니다.

저는 이것을 사역에서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이름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어떤 목회자를 통해,

어떤 교회를 통해,

어떤 지도자를 통해 일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면 문제가 시작됩니다.

사역자는 도구입니다.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십자가의 복음도 바로 이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 약함과 수치의 자리에서 구원을 이루셨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 공로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근거는 우리의 능력이나 헌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 쓰임받기를 원하지만 제 이름이 중심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드러나고 저는 도구로 남고 싶습니다.

항아리가 깨질 때 횃불이 드러났고, 하나님께서 적진을 혼란하게 하셨습니다 (삿 7:19-22)

기드온과 백 명의 군사는 한밤중 경계병이 교대할 즈음 미디안 진영의 끝에 도착합니다.

시간 선택도 중요했습니다.

경계병이 막 교대하는 순간은 진영의 집중력이 흐트러질 수 있는 때입니다.

그때 기드온과 그의 부대는 나팔을 불고 손에 든 항아리를 깨뜨립니다.

나머지 두 부대도 동일하게 행동합니다.

삼백 개의 나팔 소리,

동시에 깨지는 항아리 소리,

갑자기 드러나는 횃불,

사방에서 들려오는 함성이 한밤중의 미디안 진영을 뒤흔듭니다.

저는 이 장면을 상상하면서 하나님의 지혜를 봅니다.

삼백 명이라는 작은 군대가 밤의 어둠과 소리와 빛을 활용하여 훨씬 큰 군대에게 자신들이 포위되었다는 착각을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단순한 심리전의 성공으로 전쟁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22절이 핵심입니다.

“삼백 명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와께서 그 온 진영에서 친구끼리 칼로 치게 하시므로.”

다시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삼백 명이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러나 적진을 혼란에 빠뜨린 분은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이 해야 할 일이 있었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믿음과 순종의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만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삼백 명은 정해진 자리에 섰습니다.

나팔을 불었습니다.

항아리를 깨뜨렸습니다.

횃불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이 미디안 대군을 직접 무너뜨린 것은 아닙니다.

결정적인 역사는 하나님께서 일으키셨습니다.

저는 제 삶에서도 이 구분이 필요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과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저는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은 성령의 일입니다.

자녀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녀에게 믿음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사람에게 사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관계의 모든 결과까지 제가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병원에 가고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궁극적인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제 책임을 다하면서도 모든 결과를 통제하려는 집착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저는 항아리가 깨지는 모습에서도 묵상의 의미를 발견합니다.

물론 본문에서 항아리는 군사 전략에 사용된 도구이므로 그것을 무조건 영적 상징으로 바꾸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말한 것을 떠올리면, 깨지기 쉬운 인간과 하나님의 능력 사이의 대비를 생각하게 됩니다.

항아리가 온전할 때는 그 안의 횃불이 보이지 않습니다.

항아리가 깨지자 빛이 드러납니다.

저는 제 삶에서도 하나님께서 제 강함보다 제 연약함을 통해 그리스도의 빛을 드러내실 때가 있음을 압니다.

실패를 겪은 사람이 다른 실패한 사람을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깊은 상실을 지나온 사람이 슬퍼하는 사람 곁에 오래 머물 수 있습니다.

자기 약함을 아는 목회자는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고난 자체를 미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항아리가 깨지는 것은 아픕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깨어짐까지도 버리지 않고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십자가가 그 궁극적인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몸이 찢기고 피 흘리는 사건은 인간의 눈으로 보면 처참한 실패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깨어짐을 통해 생명의 빛이 세상에 비쳤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 주셨고, 부활하심으로 어둠이 마지막 승자가 아님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자신이 깨지지 않는 단단한 사람이 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깨질 수 있지만 그 안에서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삶입니다.

삼백 명은 나팔을 불고 외칩니다.

본문 20절에서는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다”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정작 그들이 적진으로 뛰어들어 직접 칼을 휘두르는 모습이 중심이 아닙니다.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적들을 서로 치게 하십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때로는 ‘서 있는 것’도 순종임을 배웁니다.

무조건 많이 움직이는 것이 믿음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리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급하게 결과를 만들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만큼 행하고,

그 뒤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저는 조급함 때문에 하나님보다 앞서갈 때가 있습니다.

기도한 뒤 기다리지 못합니다.

제가 직접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합니다.

그러나 기드온의 군대는 명령대로 자리를 지켰고 하나님께서 진영 안에서 일하셨습니다.

저는 오늘 제게 필요한 순종이 ‘더 많은 행동’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믿고 자리를 지키는 것’인지 분별하고 싶습니다.

미디안 군대는 혼란에 빠져 도망합니다.

벧 싯다와 스레라 방향으로, 답밧에 가까운 아벨므홀라 경계까지 도망갑니다.

한때 메뚜기 떼처럼 이스라엘을 짓밟던 군대가 이제 흩어져 달아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전입니다.

사사기 6장에서 이스라엘은 미디안을 피해 굴속으로 도망했습니다.

7장에서는 미디안이 도망갑니다.

누가 상황을 바꾸셨습니까?

하나님입니다.

저는 이 대조를 마음에 담습니다.

현재의 모습이 영원한 모습은 아닙니다.

오늘 내가 약하다고 영원히 약한 것이 아니며,

오늘의 어려움이 마지막 장면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바꾸실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변화의 방식과 때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합니다.

저는 결과를 강요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겠습니다.

승리는 삼백 명에게서 끝나지 않았고 공동체 전체의 싸움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삿 7:23-25)

미디안이 도망하기 시작하자 납달리와 아셀과 므낫세 사람들도 소집되어 그들을 추격합니다.

이 장면은 의미가 있습니다.

처음 전쟁의 핵심에는 삼백 명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승리의 길을 여시자 더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 싸움에 참여합니다.

삼백 명만이 모든 것을 독점하지 않습니다.

승리는 공동체 전체로 확장됩니다.

저는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한 사람이나 작은 공동체를 통해 시작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더 많은 사람에게 확장될 수 있습니다.

처음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모든 영광을 가져갈 필요는 없습니다.

기드온이 먼저 시작했지만 다른 지파가 뒤이어 참여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한 사람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저는 사역에서 이 사실을 잊지 않기를 원합니다.

내가 시작한 일을 다른 사람이 이어갈 수 있습니다.

내가 심은 씨앗을 다른 사람이 거둘 수도 있습니다.

내가 가르친 사람이 나보다 더 크게 쓰임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경쟁으로 보면 섭섭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보면 기쁨입니다.

바울도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공동체적인 일입니다.

기드온은 또 에브라임 산지에 사자들을 보내 미디안보다 앞서 내려가 물길과 요단 나루를 점령하도록 요청합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응답합니다.

그들은 중요한 퇴로를 차단하고 미디안의 두 방백 오렙과 스엡을 사로잡습니다.

오렙은 오렙 바위에서 죽고,

스엡은 스엡 포도주 틀에서 죽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계속 미디안을 추격하여 두 방백의 머리를 기드온에게 가져옵니다.

본문은 전쟁의 잔혹성을 숨기지 않습니다.

현대 독자인 저는 이런 장면을 읽을 때 불편함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을 오늘 그리스도인이 사람을 향해 폭력을 행사하는 모델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사사기의 전쟁은 고대 이스라엘의 구속사적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압제 세력을 심판하시고 백성을 구원하신 사건입니다.

새 언약의 교회는 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고, 칼을 사용한 베드로에게 칼을 거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라 죄와 악과 거짓을 향한 영적 싸움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죽여야 할 것은 사람이 아니라 죄입니다.

미움,

탐욕,

거짓,

음욕,

교만을 끊어 내야 합니다.

특히 오렙과 스엡의 이름은 이후 시편 83편에서도 하나님의 원수에 대한 심판의 기억과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에게 이 사건은 단순한 전투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압제자를 무너뜨리셨다는 역사적 기억이 되었습니다.

저는 신앙에서 이런 기억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어떻게 도우셨는지를 기억하면 현재의 두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과거의 승리를 자랑거리로만 간직해서는 안 됩니다.

“그때 내가 잘했다”가 아니라

“그때 하나님께서 도우셨다”는 기억이어야 합니다.

그 기억이 다음 순종을 가능하게 합니다.

기드온의 승리 역시 결국 더 큰 구원을 기다리게 합니다.

미디안 군대는 패배했지만 죄의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기드온 자신도 뒤의 이야기에서 여러 한계를 드러냅니다.

사사기의 구원자는 모두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더 큰 구원자를 향해 나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기드온은 삼백 명을 이끌어 외부의 적을 물리쳤지만, 예수님은 홀로 십자가를 지시고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기드온의 승리는 한 시대의 평안을 가져왔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은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기드온의 군대는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라고 외쳤지만, 그리스도인의 최종적인 구원은 칼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저는 이 차이를 깊이 기억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는 원수를 죽이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원수 된 죄인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새 창조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따라서 오늘 제가 승리의 삶을 산다는 것은 사람을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제 안의 죄와 싸우며,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사랑으로 진리를 실천하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리에서 충성하는 것입니다.

삼백 명의 승리가 공동체로 확장되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도 교회를 통해 세상으로 흘러갑니다.

교회는 그 승리를 독점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복음을 나누고,

상처 입은 사람을 품으며,

정의와 자비를 실천하고,

그리스도의 평화를 드러내야 합니다.

저는 오늘 제 작은 순종이 어디까지 영향을 미칠지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계산하기 전에 제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깨뜨리고, 횃불을 들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하나님께 맡기겠습니다.

마무리

사사기 7장 15절부터 25절을 묵상하며 저는 기드온의 승리가 예배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깁니다. 삼백 명의 손에는 나팔과 항아리와 횃불이 있었지만, 실제로 미디안 진영을 무너뜨리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오늘 저는 결과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조급함보다 맡겨진 순종에 충실하겠습니다. 제 약함과 깨어짐까지 사용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승리가 찾아와도 “내 손이 나를 구원했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무엇보다 십자가와 부활로 죄와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사람을 이기려 하기보다 죄를 이기고 사랑으로 복음을 살아내는 길을 선택하겠습니다.


사사기 9장 강해

 사사기 9장 개요

사사기9장은 기드온의 사망 이후를 다룹니다. 기드온의 아들 중에 세겜의 여인과 결혼하여 낳은 아비멜렉이 세겜 사람들과 결탁하여 기드온의 다른 형제들을 모두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됩니다. 하지만 얼마 후 세겜 사람들은 가알의 말에 넘어가 아비멜렉과 싸우게 됩니다. 


사사기 9장은 기드온이란 걸출한 사사의 내면에 숨겨진 욕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사기는 기드온을 정점으로 기드온 전과 후로 나뉘게 됩니다. 기드온 후의 영적 흐름을 보여주는 사건이 아비멜렉의 반역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스라엘은 내전 아닌 내전에 치르게 되고, 영적으로 엄청난 퇴보를 보여줍니다. 왜 그러한 퇴보가 나타나는지를 사사기 9장의 아비멜렉이란 인물과 요담의 저주 비유를 통해 풀어가 봅시다.


사사기 9장 구조

  • 1-6절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의 추악한 결탁
  • 7-21절 요담의 저주 예언
  • 22-57절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의 전쟁


사사기 9장 강해


1-6절 불의하고 악한 결탁


아비멜렉


9장이 시작되면서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갑니다. 기드온의 한 아들인 아비멜렉이 어머니의 고향인 세겜을 찾아가 내가 너희를 다스리는 것이 낫느냐 기드온의 70명이 너희를 다스리는 것이 낫느냐고 말하며, '나는 너희와 골육'(2절)이라고 강조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난 사사기 8장에서 기드온의 전쟁 후 말기 인생에 대해 언급하면서 기드온이 왕이 되는 것은 거절했지만 마음은 왕이 되고 싶었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 근거가 무엇일가?


먼저는 아비멜렉이란 이름에 들어가 있습니다. 아비멜렉의 뜻은 '나의 아버지는 왕이다'입니다. 아들의 이름을 누가 지을까요? 아버지가 짓습니다. 그런데 아들의 이름을 지으면서 '나의 아버지는 왕이다'라고 짓는다면 '나는 왕이다'라는 뜻이 됩니다. 기드온은 위대한 사사였지만 말로는 좋지 않았습니다. 그는 차마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시기에 왕이라고 호칭을 붙일수 없었지만 이미 왕이었고, 왕처럼 군림했습니다. 이것이 '아비멜렉'이란 이름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골육과 형제


자 두 번째 문제로 넘어가 봅시다. 아비멜렉은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하여 '어머니의 형제'(1절)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2절에서 '나는 너희와 골육'이라 말합니다. 그러자 세겜 사람들은 서로 말하며 '그는 우리 형제'라고 말합니다. 아비멜렉은 자신이 어머니의 가족, 형제, 민족들에게 같은 혈육임을 강조하며 도움을 구합니다. 결국 이러한 아비멜렉의 강조는 세겜의 피가 있는 아비멜렉과 전혀 피가 섞이지 않는 다른 기드온의 아들들과 구분 짓고 차별하게 합니다.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의 말에 수긍하고 그와 한 배를 탑니다. 가장 치졸하고 악하고 교활한 방법입니다.


왕이 된 아비멜렉


6절에서 세겜 사람들과 밀로 모든 족속들이 모여 세겜의 상수리 나무 아래 곁에서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습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왕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왕이시기 때문에 왕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 삼상 8: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그렇다고 왕을 세우지 않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신명기 17:14-20에 의하면 하나님은 후에 왕이 세워야 할 때가 되면 이러한 조건을 통해 왕을 세워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신 17:14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이르러 그 땅을 차지하고 거주할 때에 만일 우리도 우리 주위의 모든 민족들 같이 우리 위에 왕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나거든
  • 신 17:15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을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
  • 신 17:16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 신 17:17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 신 17:18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 신 17:19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 신 17:20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의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이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그런데 아비멜렉은 아직 시기가 아님에도 스스로 왕이 되고 싶어 외가를 찾아가 사람들을 교묘히 설득한 것입니다. 아비멜렉의 이러한 왕이 되려는 욕망은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기드온이 심어 놓은 것이다. 하지만 기드온은 차마 왕이 될 수 없었습니다. 최소한의 신앙양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죠. 아비멜렉은 달랐습니다. 그는 신앙도 없고, 양심도 없는 교활하고 악한 자입니다. 그는 왕이 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불의한 자들과 결탁하고 불의한 자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모두 죽인 것입니다.


7-21절 요담의 나무 비유


요담의 비유를 잘 들어보면 이스라엘 안에서 나무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열매를 통해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었죠. 하지만 가시나무는 아무런 열매도 없고, 오히려 고통을 줍니다. 그런데 가시나무가 스스로 왕이 되겠다고 나섭니다. 결국 가시나무를 왕으로 만들면 고통이 따를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가시나무는 아비멜렉입니다.


삼을 삼으려 함


요일하게 살아남은 요담은 그리심 산 꼭대기에 올라가 세겜 사람들에게 나무의 비유를 통해 그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합니다. 나무들이 왕을 삼으려는 시도는 8장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을 찾아 한 말입니다. 그들은 왕이 있어 자신들을 다스릴 때 평화가 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나무의 비유는 곧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나무들의 거절


올리브 나무를 찾아가 왕이 되어 달라 말합니다. 하지만 올리브 나무는 거절합니다. 거절의 이유를 읽어 봅시다.

내게 있는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9절)


감람 나무는 자신의 기름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버릴 수 없고, 또한 나무들 '위에 우쭐'대는 것을 몹시 경계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굳이 왕이 될 이유가 없는 것이죠. 올리브 유는 정말 많은 곳에 사용되었습니다. 식용으로 사용하기도하고, 하나님의 등불을 켜고, 상처를 치유하는 약품으로 사용됩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너무나 좋고 행복한 것이죠. 그것을 버리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번에는 무화과 나무를 찾아갑니다. 무화과 나무도 비슷한 말을 합니다. 

나의 단 것과 나의 아름다운 열매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11절)


무화과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식량이고 간식입니다. 익은 무화과도 맛있고, 적당히 말리면 그야말로 최고의 과자가 됩니다. 이렇게 중요한 일을 하는데 이것을 버리고 왕이 되고 싶지 않다 말합니다.


포도나무를 찾아갑니다. 포도나무도 동일한 답변을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내 포도주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13절)


포도나무는 포도 열매를 맺고, 그것으로 포도주를 만들어 사람들을 즐겁게 합니다. 이것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며, 다른 나무들 위에 우쭐대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올리브, 무화과, 포도 나무 모두 왕이 되는 것을 거절하니다. 이들은 가나안에서 가장 중요한 산물이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나무들입니다.


가시나무의 제안


그런데 가시나무에게 왕이 되라 하자 놀랍게도 가시나무는 왕이 되겠다고 말하며, 자신의 그늘에 와서 피하라고 말합니다. 가시나무에 그늘이 거의 없는 데 말이죠. 만약 자신의 그늘 아래 오지 않으면 자신에게서 불이 나와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라 말합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모든 나무 중의 으뜸이요 거대한 나무입니다. 값비싼 나무이며, 왕궁과 성전을 지을 때 사용하기도 합니다. 감히 백향목과 가시나무는 비교 조차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가시나무는 레바논의 백향목까지 태울 것이라 협박을 합니다.


여룹바알 기드온


요담은 이어 자신의 아버지 기드온이 어떤 희생을 통해 미디안의 손에서 너희를 건졌는가를 상기시킵니다. 그런데 세겜 사람들은 기드온의 은혜를 저버리고 아비멜렉과 손을 잡고 기드온의 아들들을 죽이고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았습니다. 이제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 세겜 사람들을 죽일 것입니다.


22-57절 아비벨렘과 세겜 사람들의 전쟁


악한 영을 보내시매


아비멜렉이 왕이 된 지 삼 년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냅니다.(23절) 사사기 기자는 이유를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이 기드온의 아들들에게 행한 악한 일 때문이라 말합니다.


악한 영이 어떤 일을 하는 지를 나타나지 않지만 25절을 보면, 그들의 마음에 나쁜 마음이 들게 한 것이 분명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고 적대시하게 함으로 서로 싸우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정말 무서운 것이죠. 자중지란 사자성어처럼 아군끼리 서로 싸우면 결국 자멸의 길로 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악한 영을 보내심으로 심판하려는 것입니다.


전쟁의 서막, 가알이 신뢰를 깨다


에벳의 아들 가알이 등장합니다. 26절에서 그의 형제들과 함께 가일이 등장하니다. 그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세겜 사람들이 그를 신뢰했고(26절), 가알은 아비멜렉을 저주합니다.(27) 왜 우리(세겜)가 아비멜렉을 섬겨야 하느냐?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죠. 그는 백성들이 내 수하에 있다면 아비멜렉을 제거했을 것이라 호언장담하기도 합니다.(29절) 가알의 말에는 세겜 사람들과 아비멜렉 사이에 깊은 골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가알은 그것을 간파하며, 세겜 사람들의 입이 되어 주고 있습니다.


아비멜렉의 반격


세겜을 다스리는 아비멜렉의 수하 스불이 가알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아비멜렉에게 고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네 때에 나누어 밤에 매복하고 날이 밝자 가알과 세겜 성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을 공격하자 세겜 사람들의 일부가 엘브릿 신전의 보루로 들어갑니다. 아비멜렉은 분노하여 그곳에 올라간 사람들을 모두 죽이려 합니다. 그는 살몬은 산에 올라 나뭇가지를 찍어 보루 아래에 놓고 불을 지를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세겜 망대에 있는 천 명이 죽게 됩니다. 


더베스까지 추격하여 그곳 사람들까지 죽일 생각을 합니다. 그곳에 견고한 망대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도망합니다. 아비멜력은 이번에도 그곳에 불을 지르려 합니다. 그런데 그 때 한 여인이 멧돌 윗짝을 던져 아비멜렉의 머리를 깨뜨립니다. 아비멜렉은 자신이 살 수 없음을 알고 무기든 청년에게 자신을 죽이라 말합니다. 결국 아비멜렉은 죽임을 당하고 전쟁은 끝이 납니다.


저주가 임함


가짜 왕의 삼 년 천하는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지 않는 스스로 왕이 된 가짜 왕 아비멜렉은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사기 기자는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의 악행을 이렇게 갚으셨다 말하며 9장을 마무리합니다. 하나님은 악을 두고 보지 않고 반드시 응징하는 분임을 말해 줍니다.


사사기 장별요약 및 강해목록



사사기 8장 강해

 사사기 8장 개요

삼백용사와 함께 미디안의 전쟁을 시작한 기드온은 두 장수 오렙과 스엡을 죽이고 추격을 계속합니다. 이때 에브람이 지파 사람들이 기드온을 찾아와 항의하자 기드온은 달래 줍니다.  삼백용사는 도망가는 미디안 군사들을 끝까지 추격하여 그들을 전멸시킵니다.


사사기 8장 구조

  • 1-3절 에브라임 지파의 항의
  • 4-9절 숙곳 사람들의 거절
  • 10-21절 세바와 살문나를 죽이고 전멸시키다.
  • 22-28 마지막의 기드온
  • 29-35절 기드온의 사후 타락하는 이스라엘


사사기 8장 강해


1-3절 에브라임 지파의 항의


항의하는 에브라임 지파

전쟁을 어느 정도 마치고 나자 갑자기 에브라임 지파가 기드온을 찾아옵니다. 그들은 기드온에게 미다안과 싸울 때 왜 우리를 부르지 않았느냐 따집니다. 이것은 자신들을 대우하지 못한 것이라 말합니다. 어느 정도 일리는 있습니다. 하지만 기드온이 나설 때까지 무서워서 벌벌 떨던 에브라임 지파가 갑자기 기드온을 찾아오는 것은 정말 활당한 일입니다. 그들은 비겁하고 나쁜 사람들입니다.


기드온의 위로

2-3절은 기드온이 에브라임 지파를 위로하며 돌려보내는 장면입니다. 2-3절을 먼저 이해해야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 내가 이제 행한 일이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으니 내가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포도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가 비교됩니다. 여기서 아비에셀은 므낫세 지파를 말합니다. 전쟁을 시작하는 것은 기드온이므로 맏물포도입니다. 하지만 전쟁을 마무리한 것은 에브라임 지파로 끝물포도입니다. 하지만 끝물포도는 미디안의 강력한 두 왕인 오렙과 스엡을 에브라임이 지파가 잡아 죽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에브라임 지파의 거만과 자만이 뼛속 깊이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후에 에브라임 지파는 입다를 찾아 다시 항의하지만 그때는 가차없이 살육을 당하고 맙니다.


굳이 입다 때와 비교할 필요는 없지만 짚고 넘어갈 부분은 기드온 때는 기드온이 필요에 의해 에브라임 지파를 불렀습니다. 7장 24절을 보면 기드온이 사람을 보내 에브라임 지파를 불렀고, 그들은 전쟁이 동참하여 미디안을 무찔렀습니다. 즉 업적이 있는 것이죠. 그 일로 기드온은 미워도 별다른 항의를 하지 않고 돌로 보냅니다. 하지만 입다 때는 전혀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입다는 엄청난 수치와 분노를 느낀 것입니다.


4-9, 13-17절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의 거절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


기드온은 전쟁이 아직 마무리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남은 패잔병인 세바와 산문나의 군사들을 추격합니다. 이때 숙곳에 이르러 그곳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달라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말이 가관입니다.

  • 삿 8:6 숙곳의 방백들이 이르되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네 손 안에 있다는거냐 어찌 우리가 네 군대에게 떡을 주겠느냐 하는지라
이들의 말은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고, 그들늘 네(기드온)가 죽이지 않았는데 뭘 믿고 너에게 도움을 주느냐는 것입니다. 잘못하여 그들이 되돌아와 자신들을 공격하면 난처하다는 것입니다. 문제의 심각성은 그들의 변명이 아니라, 그들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로 길르앗 지방에서 이방민족들을 주시해야하는 '망대'(9절)가 있었던 곳입니다. 기드온은 그들의 말을 듣고 화가나서 다시 돌아올 때 망대를 헐고, 그들을 죽이겠다 말합니다.

기드온의 복수


세바와 살문나를 포로로 붙잡고 숙곳과 브니엘을 찾아갑니다. 한 사람을 붙잡아 숙곳이 장로들 칠십 명의 명단을 받고 그들을 들가시와 찔레로 징벌하고 브니엘 망대를 헐어 버립니다. 적들을 살펴야할 망대가 아무런 가치도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분노는 기드온을 보게 됩니다. 비록 숙곳과 브니엘이 잘못하기는 했지만 굳이 복수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기드온은 자신을 모독한 자들을 그대로 두지 않고 처단하는 복수의 화신이 됩니다. 이러한 기드온의 성향은 기드온 이전과 이후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특징입니다. 기드온이 뿌린 내전의 씨는 입다와 그리고 레위인의 첩 사건들을 통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10-12, 18-21절 세바와 살문나를 죽이고 전멸시키다.


그들이 안전할 때에


세바와 날문가가 갈골에 있을 때 아직 만오천 명이 있었습니다.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기드온은 그들을 격파하기에 이릅니다. 마지막까지 자신들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충성을 다합니다.


11절을 보면 '적군이 안심하고 있는 중'에 기드온과 삼백용사가 급습합니다. 왜 안전하다고 느낄까요? 요단강을 건너 먼 곳까지 왔기 때문에 설마 이곳까지 오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현재 성서지리학자들은 갈골을 현재의 카르카르 지역이며, 암만 남동쪽으로 190km 정도 떨어진 지역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곳은 얍복강의 어느 부분에 속합니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때에 급습해 오자 그들은 반격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질겁하여 도망가고 맙니다. 기드온과 용사들은 이때를 노려 세바와 살문나를 포로로 사로 잡게 됩니다.


세바와 살문나의 처형식

기드온은 이제 세바와 살문나를 처형합니다. 그런데 그의 맏아들 여델에게 시킵니다. 하지만 여델은 아직 어려서 살인을 잘 못합니다.(20절) 결국 기드온이 그들을 처형합니다. 우리는 다시 기드온의 이상한 행동을 보게 됩니다. 그는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자신의 아들에게 시켜 자랑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겸손하고 순진하게 보이는 기드온 안에 숨겨진 탐욕과 교만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그의 복수도 그렇고, 이젠 아들을 부추겨 피를 묻히게 하려는 행동도 드러냅니다. 기드온의 숨겨진 욕망을 그의 말년에, 그리고 사후에도 계속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22-35 마지막의 기드온과 사후의 이스라엘


왕이 되어 달라


기드온이 집으로 돌아오자 금의환양합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드온에게 자신들을 다스려 달라고 말합니다. 즉 왕이 되어 달라는 것이죠. 하지만 기드온은 겸손하게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 8:23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하니라


기드온의 타락


처음은 참 좋았지만 기드온의 결말은 결코 좋지 않습니다. 그는 차마 왕이 되는 것은 거절했지만 왕처럼 사는 것은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쟁을 통해 얻을 귀금속들을 달라고 말하니다.(24-26절) 그리고 그것으로 금에봇을 만들어 음란하게 섬기게 됩니다. 에봇은 제사장들이 입는 곳으로 하나님께 물을 때 사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금으로 만든 에봇은 실제 에봇도 아님에도 기드온이 왜 만들었을까요? 이것이 기드온의 허상입니다. 그는 자신 안에 거대한 욕망을 숨겼고, 그것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온의 에봇을 상상한 그림



다시 타락하는 이스라엘


기드온의 사후에 이스라엘은 다시 타락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 볼 부분이 있습니다. 기드온이 많은 아내를 두었고, 무려 칠십 명의 자녀를 두었다는 것입니다. 왕처럼 군림하며 살았던 기드온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기드온이 죽자 다시 이스라엘은 타락의 길로 접어 듭니다. 타락은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지우는 것입니다.(34절) 결국 이것은 기드온의 가족을 홀대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바알브릿은 자신드의 신으로 삼고 하나님을 대신해 섬깁니다.


바알브릿(Baal-Berith)
바알은 주인이고, 브릿은 '언약'의 히브리어 베릿트입니다. 언약의 주라는 뜻입니다. 바알과 언약을 맺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망각하고 타락하는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지적하는 표현입니다.


사사기 7장 강해

 사사기 7장 개요

양털 시험을 통해 확신하게 된 기드온은 드디어 전쟁을 개시합니다. 나팔을 불어 이만이천 명이 모였지만 300명 만을 남기고 돌려 보냅니다. 삼백용사는 항아리에 햇불을 숨기고 미디안이 깊은 잠을 자던 밤에 습격을 하여 승리합니다.


사사기 7장 강해


1-8절 삼백 용사를 선별하다


여룹바알


바알과 싸우다는 이름을 가진 기드온의 별명입니다. 6장에서 바엘의 제단을 허물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미디안 연합군과의 싸움은 엄밀히 말하면 바알과의 전쟁입니다. 적은 외부에 있지 않고 내부에 있습니다. 내부의 바알을 제거한 기드온은 반드시 미디안을 이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너무 많다.


드디어 전쟁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2절)다며 추려내라 하십니다. 많은 수로 싸우며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라 자신들의 능력으로 구원했다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합해도 미디안 연합군과 싸워 이길 승산이 없습니다. 미디안 연합군은 전쟁에 능한 용병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걸 모르실 리 없지만 그럼에도 '너무 많다'하십니다.

먼저 '두려워 떠는 자'는 길르앗 산에서 떠나 가라 하십니다. 길르앗 산이 어디인지 모호하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당시 그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이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길르앗에 있던 산인지, 별칭으로서의 '길르앗 산'인지 알 수 없지만 당시 기드온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요한 산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2만 2천 명이 떠납니다. 남은 자는 만 명입니다.

둘째 물 가로 내려가 물을 마시게 합니다. 엎드려 마시는 자는 모두 떠나게 합니다. 손으로 물을 떠 먹는 자는 남게 합니다. 전쟁 시에 물을 먹기 위해 정신을 파는 것은 정산 상태가 온전치 않은 것입니다. 절제의 힘이 없습니다. 아무리 목이 말라도 주변을 보며 물을 마시는 것은 군사의 기본입니다. 결국 삼백 명만 남고 모두 떠납니다.


모두 돌아가고


삼백 명은 양식과 나팔을 주고 기다리게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전쟁이 마치 삼백 명에서 모든 전쟁을 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삼백 명은 선발대 역할을 했을 뿐이지 나머지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간 것이 아닙니다. 24절을 보면 기드온이 아브라엠 산지에서 나팔을 불러 전쟁할 사람들을 급하게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로 이 일로 에브라함의 횡포가 있었지만 잘 넘어갑니다.

23절에도 납달리, 아셀, 므낫세에서도 함께 전쟁에 동참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디안과 의 전쟁은 지금까지 일부 지파의 연합이 아닌 북부 전 지파가 이 전쟁에 동참한 것임을 알 수있습니다.


9-18절 미디안 초병의 고백


적진으로 가보라.


진영으로 돌아온 기드온에게 적진에 몰래 들어가하십니다. 아마도 하나님은 기드온 안에 있는 두려움이 아직 가시지 않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대장이 두려우면 전쟁은 이미 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전쟁이 단지 물리적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바른 믿음과 확신이라는 것을 말해 주려하십니다. 결국 기드온은 부하 부라와 함께 미디안 적진 가까이 갑니다.


전병 초병의 꿈


적진 가까이 가니 미디안과 아말렉 등 동방 사람들의 연합군이 떼를 이루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메뚜기의 많은 수와 같도 낙타는 해변의 모래와 같다고 합니다. 즉 셀 수 없을 정도록 많은 것입니다. 기드온은 얼마나 두려울까요? 하나님은 미디안 연합군의 실상을 보여주며 이 전쟁은 실제로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때 적병이 다른 병사에게 자신이 꾼 꿈 이야기를 그러자 꿈을 들은 병사는 보리떡을 기드온이라 말하며 두려워 합니다. 겉으로는 크고 많이 보이지만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이미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만들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했습니다. 꿈 이야기들은 기드온은 다시 돌아와 전쟁의 확신을 병사들에게 알립니다.


19-25절 전쟁이 시작되다.


전쟁의 시작


밤이 깊었습니다 이경 초에 초병들이 교대할 시간에 항아리에 숨긴 햇불과 나팔을 준비합니다. 기드온의 명령이 떨어지자 항아리를 깨고 횃불을 들고, 나팔을 불기 시작합니다. 한 목소리로 여호와를 위하여 기드온을 위하여를 외칩니다. 그러자 깜짝 놀란 미디안 연합군은 미친 듯이 도망치기 시작합니다. 초병 외에 모두 잠든 시간이니 기습해 온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삼백 명만 전쟁 했는가?

종종 우리는 기드온과 삼백 용사만이 전쟁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은 훨씬 많습니다. 23절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싸웠다고 말합니다. 24절에서는 기드온이 에브라임 산지에 나팔을 불게하여 사람을 불러 모았습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자존심이 매우 강하고 이기적인 지파입니다. 비슷한 사건이 입다 사건에 일어나는데 입다는 에브라임 지파를 살해합니다. 므낫세 지파였던 기드온에게 행패를 부리는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자존심이 강한 자들인가를 잘 보여 줍니다.



자중지란의 미디안 연합군


22절에서 매우 흥미로운 상황을 읽을 수 있습니다. 삼백 용사가 나팔을 불자 미디안 연합군들이 혼비백산하여 적과 아군을 분간하지 못하고 서로를 죽이게 됩니다.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공포에 빠지자 그들은 서로를 죽이게 됩니다. 즉 자중지란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이 가장 무섭습니다. 힘을 모아서 적을 공격해야 하지만 서로 싸우게 된다면 적들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승리를 얻게 됩니다. 기드온에게는 삼백 명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능가할 수 있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적들이 아무리 많고 위대해도 하나님 한 분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사사기 장별요약 및 강해목록


 


사사기 6장 강해

사사기 6장 개요

사사기 6장 사사 기드온 6장부터 8장까지는 사사 기드온의 이야기입니다. 사사 기드온은 약한 므낫세 지파였지만 용기를 내어 300 용사와 더불어 미디안을 물리칩니다. 6장은 기드온 스토리의 서막을 여는 장면이 소개됩니다. 기드온은 요셉의 첫째 아들인 므낫세의 후손 므낫세 지파 소속입니다. 므낫세 지파는 항상 에브라임 지파에게 무시당했습니다. 이 부분은 8:1-3절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사사기는 기드온 이야기를 마지막 전반부가 마무리됩니다. 기드온의 아들인 아비멜렉 이야기부터는 이전보다 훨씬 암울하고 부정적인 스토리가 전개됩니다.


서론부에 해당되는 6장에서는 죄로 인해 고통 받는 이스라엘과 기드온이 소명을 받게 되는 과정을 다룹니다. 기드온은 므낫세 지파로 약한 지파이자 가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기드온을 통해 상상도 못할 강력한 힘과 많은 군대를 지닌 미디안 연합군을 격파합니다. 6장에서는 기드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소심하고 약한 기드온이 어떻게 강한 용사로 거듭나는가를 보여줍니다.

사사기 6장 구조

  • 1-6절 고통 받는 이스라엘
  • 7-10절 한 선지자의 경고
  • 11-24절 기드온을 만나는 천사
  • 25-32절 우상을 제거하는 기드온
  • 33-40절 하나님을 시험하는 기드온


사사기 6장 강해


1-6절 또 악을 행하고


또 악을 행하였으므로


이스라엘이 또 악을 행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이 손에 넘깁니다. 상황이 얼마나 열악했으면 이스라엘이 산에서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 만들어 지냈다고 말합니다. 미다인은 파종할 때면 치러 올라와 토지소산을 멸하고 모두 가져갑니다. 고통이 너무 심한 이스라엘이 부르짖습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은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조상들이 그렇게 당하는 것을 보고도 교훈을 얻지 못합니다.


동방 사람들이


성경에서 동방 사람은 우상과 이방인,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즉 이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사람들로 소개됩니다. 하나님께서 다시스로 도망가는 요나를 동풍으로 징계하듯 범죄 한 이스라엘은 동방 사람들을 통해 징계하십니다. 동방은 이방의 땅이자 저주 받은 곳으로 종종 사용됩니다. 하지만 동방에서 구원자가 온다는 것은 매우 역설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이 부분은 후에 성경의 동쪽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메뚜기 떼 같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메뚜기 떼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를 것입니다. 출애굽 당시에도 등장하는 메뚜기떼는 현재도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무섭게 활동합니다.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정도의 엄청난 수를 말합니다. 메뚜기 떼가 오면 먹을 수 있는 대부분의 식물과 풀을 순식간에 먹어버립니다.


7-10절 한 선지자


부르짖으므로


이스라엘이 괴로워 부르짖자 하나님이 움직이십니다. 어찌 보면 하나님은 너무나 착하고 무능해 보이고 답답해 보입니다. 우리 같으면 거의 죽을 지경까지 내버려 두고 싶지만 하나님은 그대로 두지 못하고 다시 구원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긍휼이 많으신 분입니다. 사람은 변하지 않습니다. 노아의 홍수를 보십시오. 모든 사람들을 멸절 시켰지만 노아의 후손들은 완전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타인에게 냉정하게 대하는 것은 절대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고통을 당하는 입장에서 생각하며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한 선지자


이스라엘이 부르짖자 하나님께서 한 선지자를 보냅니다. 그는 기드온을 찾아가 이스라엘을 구원하라 합니다. 하지만 기드온을 찾아가기 전에 먼저 이스라엘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 내셨습니다. 학대하는 자의 손에서 건져 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땅의 신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했지만 이스라엘이 말을 듣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애굽의 군대와 미디안은 비교할 바가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세계 최강국이었던 애굽에게서 구원하셨는데 한낮 미디안에서 손에서 구할 수 없겠습니까? 충분히 구원하십니다. 그럼에도 미디안에게 당하는 이유가 뭘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미다인의 손에 넘겨 주'(1절)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는 누구도 이길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미다인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떠난 것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선지자는 이 부분을 깨닫게 하고 떠나갑니다.

11-24절 여호와의 사자와 여호와 샬롬


큰 용사여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을 찾아갑니다. 포도주 틀에서 숨어서 밀타작을 하는 기드온에게 '큰 용사'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기드온에게 이스라엘을 구원하라 합니다. 하지만 기드온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떠났다고 말합니다.

선지자는 계속하여 기드온을 설득합니다. 기드온에 선지자에게 예물을 드리지만 사자는 지팡이로 그것들을 불태우고 하늘로 올라갑니다. 기드온은 그제야 하나님인 줄 알고 놀랍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보고도 죽지 않은 것에 감사하여 여호와 샬롬이라 말합니다.

25-32절 우상의 제단을 헐고


우상의 단을 헐라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명을 내립니다.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끌고 와 바알의 제단을 헐고 그곳에서 제사하도록 합니다. 겁이 많은 기드온은 낮에 하지 못하고 밤에 종 열과 올라가서 그것을 행합니다.  여기서 정말 놀라운 점은 이스라엘 안에 우상의 제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모두가 섬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을 징벌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사사시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우상에 깊이 빠져 있었던 시대였음을 보여줍니다.




칠 년 된 제물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칠 년 된 제물을 바치라 하십니다.(25절) 그런데 칠 년은 정확히 미다인이 이스라엘을 지배하기 시작한 시간과 같습니다.(1절) 하나님은 칠 년된 제물을 통해 그동안의 모든 고통과 아픔을 제물처럼 태워 사라지게 하겠다는 선언으로 보입니다.


바알을 위한 변증


날이 밝자 성읍 사람들이 놀라 범인을 찾고 기드온인 것을 발견합니다. 동네 사람들이 기드온을 죽이려 하자 기드온의 아버지가 나서서 바알이 진짜 신이라며 자신을 지킬 것이라며 방어합니다. 저는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신기하고 의아합니다. 앞서서 말한 것처럼 어떻게 이렇게까지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처럼 떠 받을 수 있었는지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만큼 이스라엘의 죄가 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기드온이 잘못하여 죽을 위기에 처하자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가 재치를 발휘합니다. 바알이 만약 진짜 신이라며 그가 '자신을 위해 다툴 것이니라'(31절) 말합니다. 즉 바알은 자신이 신임을 스스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마을 사람들은 요아스의 논리에 반박하지 못하고 조용히 물러 납니다.

33-40절 양털 이슬 실험


이때에 동방 사람들이


드디어 기드온이 용기를 내어 우상을 제거했습니다. 모든 것이 준비된 것 같습니다. 기드온이 우상을 제거하자 신기하게도 미디안 연합군이 전면적으로 개시합니다. 아직 기드온은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예측불허입니다. 적들이 어찌 알고 전쟁을 개시할 것일까요? 하지만 기드온을 서서히 준비해 가고 계십니다.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사사기에서 여호와의 영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의 힘이 약할 때, 도무지 이길 자신이 없을 때, 하나님의 영이 임합니다. 그럼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사람은 변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영이 임하며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두려움에 떨던 열두 사도가 성령을 받고 두렴 없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이 나팔은 전쟁의 나팔입니다. 기드온은 자신이 속한 므낫세 지파만을 모으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셀과 스불론, 납달리 지파까지 사람을 보내어 데려 옵니다. 이들은 갈릴리 서편관 남편에 속한 북지파에 속한 이들입니다. 성령 충만은 무모함이 아니라 지혜입니다. 함께 동역함으로 큰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여쭈되


하지만 기드온은 여전히 부족합니다. 기드온은 겁이 많았습니다. 그는 여러모로 위축되어 있었고,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는 전쟁에 나가야 하지만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기드온은 양털 솜으로 시험을 합니다. 한 번은 양털에만 이슬이 있게 해 달라 하고, 두 번째는 주변에는 있고 양털에만 없게 해 달라고 말합니다.

첫 번째 시험은 양털에만 이슬이 있고, 주변 땅은 마르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이스라엘은 비가 잘 오지 않는 곳입니다. 하지만 주야 일교차가 심해 밤이면 많은 이슬이 내렸습니다. 기드온은 많은 이슬이 내리지만 양털에만 내린다면 하나님의 기적이라 생각했습니다. 정말 그다음 날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기드온은 아직도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주변에는 이슬에 젖고 양털만 젖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사실, 첫 번째보다 두 번째 부탁이 더 어렵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어려움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정말 다음날이 되자 모두 이슬이 있지만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양털 시험은 어떤 면에서 답답한 면이 있습니다. 왜 기드온은 곧바로 순종하지 않고 자꾸 지체할까요? 이렇게 믿음이 없을까요? 여러분은 어떤가요? 하나님의 부르심이 곧바로 응답하십니까? 기드온의 시험을 하나님은 어찌 생각할까요?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모세처럼 화를 내거나 야단치지 않고 요구한 대로 그대로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긍휼이 아닐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기드온의 요구는 하나님의 실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 믿음이 약한 것을 알기에 자신의 믿음이 강해지도록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약할 때, 우리가 두려울 때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주님도 우리에게 구하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찾는 이들을 기뻐하십시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려 하는 이들을 하나님은 기뻐하십시다. 이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 마 7: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 마 7: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 마 7: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 마 7:10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 마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사사기 장별요약 및 강해목록

 사사기 개요


1. 개요


사사시대는 여호수아의 죽음과 사울이 세워지기 직전까지입니다. 사사기에 기록된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정황상 엘리 제사장 직전까지의 시간대로 보입니다. 사사기는 연대기 순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간대를 정확히 짚어낼 수 없습니다. 여호수아의 죽음 이후 각 지파별로 흩어져 할당 받은 땅을 정복합니다. 하지만 명령대로 순종하기보다 가나안 주민들과 적당하게 타협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됩니다. 결국 진노한 하나님은 적들에게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하고, 이스라엘은 다시 회개하면 사사를 보내 구원하는 역사가 되풀이됩니다.


사사기는 초반부와 사사들의 이야기, 후반부는 레위지파 첩 사건과 베냐민 지파의 몰락으로 구분됩니다. 사사들의 중심에 기드온이 자리하며 기드온 이전 사사와 시대, 기드온 이후 사사와 시대로 구분이 될 만큼 중요한 인물입니다.  각장은 중요한 부분만을 스토리 형식으로 요약했습니다.


2. 장별요약


사사기 1장


각 지파별로 가나안 전쟁이 시작된다. 유다 지파는 형제 지파인 시므온 지파와 연합하여 아도니 베섹을 공격한다. 예루살렘에 올라가 아낙 자손 세새, 아히만, 달매를 죽인다. 옷니엘이 드빌을 쳐서 갈렙의 딸인 악사와 결혼한다. 에브라임은 므낫세 지파와 연합하여 벧엘을 공격한다. 하지만 다른 지파들은 다 쫓아내지 못한다.


사사기 2장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 올라와 이스라엘을 책망하여 경고한다. 여호수아가 110 세에 사망하고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산 북쪽 딤낫 헤레스에 장사된다. 여호수아와 당대 장로들이 죽자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잊고 우사을 섬기기 시작한다.


사사기 3장


3장의 시작은 여호와께서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하는 세대를 시험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하나님은 이방 민족과 가나안 족속을 통해 율법을 순종하는지 않지 않는 지를 시험하신다. 안타깝게 그들은 가나안 주민과 언약을 맺고 그들의 딸들을 아내 삼고 자신들의 아들들을 그들에게 준다.


사사 옷니엘/ 여호와 목전에 악을 행하자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에게 판다. 8년 동안 괴롭힌다. 이스라엘이 부르짖자 유다 지파 옷니엘을 사사로 세운다. 이후 40년 동안 평안하다.


사사 에훗/ 또 이스라엘이 악을 행하자 이번에 모압 왕 에글론의 손에 판다. 에글론은 종려나무 성읍(여리고)을 차지하고 18년 동안 괴롭힌다. 이번에는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을 사사로 세워 구원한다.


사사 삼갈/ 아낫의 아들 삼갈이 소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구원 한다.


사사기 4장


에훗이 죽자 또 이스라엘 자손이 죄를 짓는다. 이번에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판다. 야빈은 갈릴리 바다 위쪽에 자리한 하솔에 자리하면서 전 이스라엘을 괴롭힌다. 랍비돗의 여선지 드보라가 사사가 되어 사람들을 가르친다. 드보라가 사람을 보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온다. 다볼산에서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와 전쟁을 치러 큰 승리를 거둔다. 하지만 드보라에게 완전히 순종하지 않아 시스라는 겐 사람 야엘을 죽이게 된다.


사사기 5장


5장은 전쟁에서 승리한 드로라의 노래가 담겨 있다. 이스라엘은 새 신을 섬기고, 모든 사람들이 숨이 지낼 때 드보라가 나서서 앞장선다. 다볼 산에 운집하여 시스라와 전쟁을 시작할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내려 시스라의 병거들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되어 전쟁에 승리한다. 시스라의 어머니는 아들 시스라가 오기를 기다리지만 아들은 이미 야엘의 손에 죽었다. 드보라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고백한다.


"여호와의 주의 원수들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들은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31절)


사사기 6장


6장에서 8장까지는 사사 기드온을 다룬다. 사사기 안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며, 기드온 이전과 나눌 정도로 중요하다.


이스라엘이 악을 행하자 7년 동안 미디안의 손에 넘겨준다. 미디안으로 이스라엘이 부르짖자 한 선지자를 보내 이스라엘을 책망한다. 애굽에서 학대받을 때 구해 줬는데 또 악을 행한다고 말한다. 그리고서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 속한 오브라에 간다. 이때 기드온이 포도주 틀에서 밀을 추수 한다. 미디안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이다. 여호와의 사자는 기드온에게 이스라엘을 구원하라 한다. 하지만 겁이 많은 기드온은 듣지 않는다. 자신은 너무나 작은 지파에, 작은 집안이라고 말한다. 여호와의 사지인 줄 알고 제사하려 하나 가져온 고기와 무교병을 바위에 놓으라고 하고 지팡이 끝으로 제물에 대니 바위에서 불이 나와 불사르고 사자는 보이지 않는다. 기드온은 거기서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죽지 않았다 하여 '여호와 살롬'이라 말한다. 그 후 종을 데리고 바알의 제단을 파괴하고 아세라상을 찍어 버린다. 아침에 일어나 제단이 파괴된 것을 보고 기드온을 찾아 죽이려 한다. 이때 기드온의 아버지가 나와 막는다.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여 전쟁에 나갈 사람들을 모은다.


사사기 7장


기드온이 공격하기 위해 하롯 샘 곁에 진을 친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따르는 사람이 많다면 보내라 하신다 두려워 떠는 이만 이천 명이 돌아간다. 만 명만 남습니다. 이번에는 물가로 내려가 엎드려 먹는 자 외 손으로 물을 떠서 먹는 300명만 남기고 돌려보낸다. 기드온은 두려움에 빠져 전쟁을 시작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밤에 미디안 진영에 몰래 가게 하여 그들이 꿈을 꾸고 나눈 이야기를 듣게 한다. 결국 300명으로 전쟁이 시작된다. 하지만 전쟁은 300명만 한 게 아니다. 24절을 보면 기존에 돌아간 자들과 에브라임 지파 사람을 불러 함께 전쟁한다.


사사기 8장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을 찾아와 항의한다. 매우 교만한 자들이다. 기드온은 전쟁 중이니 논쟁할 수 없어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다 말하며 다독인다. 곧바로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추적한다. 요단 동편 속곳에 갔을 때 배가 고프니 떡을 달라 하지만 거절한다. 이들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기드온에게 살인을 당한다. 결국 더 힘을 내서 쫓아가 미디안을 완전히 쳐부순다. 전쟁에서 승리한 기드온은 타락한다. 아내를 많이 두고 첩도 둔다. 나이가 많아 죽자 아버지 요아스의 묘실에 들어간다.


사사기 9장


기드온이 죽자 그의 아들 중의 한 명인 아비멜렉이 어머니의 고향인 세겜으로 들어가 그들과 모의한다. 여룹바알(기드온)의 아들 70명을 섬기는 것이 편하냐 당신들의 피가 흐르는 나 혼자를 섬기는 것이 편하냐고 묻는다. 그는 세겜 사람들에게 자신이 당신들과 골육이라 말하고 그들을 유혹한다. 세겜 사람들은 바알브릿 신전에서 은 칠십 개를 꺼내 아비멜렉에게 주고 기드온의 아들들을 죽이게 한다. 아비멜렉은 세겜을 등에 업고 불량자들을 데리고 기드온의 아들을 모두 죽인다. 다행히 요담만 살아남는다. 요담은 도망가면서 사람들에게 아비멜렉의 무모하고 교만한 행동을 지적하면서 결국 너희(세겜)들도 아비멜렉에게서 나온 불로 화를 당할 것이라 말하고 도망간다. 그리고 삼 년 후에 하나님은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 그들이 싸우게 만든다. 세겜 사람과 아비멜렉이 서로 싸우게 된다. 아비멜렉은 세겜을 쳐들어가고, 세겜 사람들은 세겜 망대로 도망간다. 세겜 망대로 아비멜렉이 가까이 갔을 때 한 여성이 맷돌 윗짝을 던져 아비멜렉의 머리를 깨뜨린다. 요담의 저주대로 그들은 서로 죽여 자멸의 길을 간다.


사사기 10장


잇사갈 사람 도도의 손자 부아의 아들 돌라가 사사가 된다. 에브라임 산지 사밀에 거하며 사사로 23년 동안 활동하다 죽는다.(1-2절) 이후 길르앗 야일이 일어나 22년을 사사로 지낸다.(3절) 그는 아들 삼십 명이 있었고, 아들들을 나귀 삼십에 태워 성읍 삼십을 다스리게 한다. 이스라엘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자 이번에는 블레셋 사람들과 암몬의 손에 판다. 18년 동안 억압당한다. 시시 때대로 암몬이 쳐들어와 괴롭힌다. 신돈 사람들도 괴롭힌다. 다시 암몬 사람들이 쳐들어 오는데 이번에는 잠깐 싸우다 가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군대를 끌고 와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것처럼 쳐들어 왔다.


사사기 11장


이스라엘이 암몬으로 말미암아 부르짖자 하나님은 입다를 사사로 세운다. 입다는 길르앗의 아들인데 본처가 아닌 첩의 자식이었다. 본처의 아들들이 자라나 입다는 박해 하며 쫓아내 버린다. 입다는 돕 땅에서 산적처럼 지낸다. 그런데 암몬 사람들이 쳐들어오자 누구도 나서지 않아 입다를 찾아간다. 입다는 과거에 자신을 쫓아낸 이야기를 하며 만약 전쟁에서 이기면 내가 너희를 다스리게 하겠냐고 하자 그렇게 하기로 하고 전쟁에 나간다. 입다는 곧바로 공격하지 않고 사절을 암몬 군대에 보내 협상하며 왜 남의 땅에 쳐들어오냐고 따진다. 하지만 암몬 왕은 말을 듣지 않고 공격한다. 드디어 전쟁이 일어나고 입다는 암몬 군대를 완전히 멸절시켜 버린다. 하지만 입다는 전쟁을 시작할 때 하나님께 서원하기를 자신을 가장 먼저 환영하러 나온 이를 하나님께 드리고 한다. 안타깝게 입다는 가장 먼저 맞이하러 온 사람은 무남독녀였다.


사사기 12장


전쟁이 끝나자 갑자기 에브라임 사람들이 입다를 찾아와 따져 묻는다. 왜 우리에게 암몬 사람이 싸울 때 부르지 않았냐고 야단을 친다. 우리가 너와 네 집을 불사르겠다며 협박한다. 에브라임 지파는 자신들이 열두 지파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장자와 같다는 착각에 빠져 사는 자들이었다. 기드온 때는 그냥 넘어갔지만 길르앗 사람 입다는 기드온처럼 착하지 않았다. 입다는 그들에게 가서 우리가 싸울 때 너희를 불렀지만 오지 않아 우리 힘으로 싸워 겨우 이겼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협박하며 따져 묻느냐고 야단을 친다. 결국, 길르앗 사람과 에브라임 지파 간의 내전이 일어난다.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 지파를 미워했던 이유는 에브라임 지파가 길르앗 사람들에게 '너희들은 에브라임 지파에서 도망간 자들이다'라고 모욕했기 때문이었다. 에브라임 지파는 요단 동편에 자리한 길르앗 사람들을 강아지 무시했다. 여기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느낀 길르앗 사람들은 에브라임을 공격한다. 그들은 요단 나루터를 지키고 그곳을 건너는 사람들에게 쉽볼렛이라 말하게 하고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십볼렛이라 말하면 그를 잡아 죽였다. 그 수가 사만 이천 명이었다.


13-16장 삼손 스토리


13장부터 16장까지는 삼손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삼손이 과연 사사로 넣어야 하나 말아야 하는 논쟁이 있을 만큼 삼소는 기괴한 사람이다. 탄생도 불임의 여성으로 시작하고, 날 때부터 나실인으로 드려진 존재이다. 그 어떤 사사보다 방탕하고 음란하다. 하지만 하나님은 삼손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


사사기 13장


이스라엘 또 악을 행한다. 이번에는 전해 다른 방법으로 구원자를 세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블레셋에 넘겨주어 괴롭힘을 당한다. 단 지파의 소라 땅에 마노아가 있다. 그의 아내는 불임이다. 그의 아내가 일을 하다 하나님의 사자에게 임신할 것을 듣는다. 남편에게 이 말을 한다. 두 번째 하나님의 사자가 오자 남편을 데려와 사자를 대면한다. 마오나는 사자에게 이름을 묻자 '기묘자'라 답한다. 사자에게 제물을 붙이려 하자 지팡으로 제물을 대자 반석에서 불이 나와 태워 버린다. 동시에 사자도 사라진다. 그때서야 하나님을 봤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아내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죽이려 했다면 굳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 말하며 위로한다. 일 년 후 아들을 낳고 이름을 삼손이라 부른다.


사사기 14장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 블레셋 사람의 딸을 보고 자기 부모에게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한다. 반대하지만 삼손은 우겨서 결혼한다. 딤나로 가는 길에 포도원 앞에서 사자를 만나자 맨손으로 잡아 죽인다. 며칠 후에 다시 여인을 만나러 가는 길에 죽은 사자 안에 벌꿀이 있는 것을 보고 가져와 부모에게 드린다. 그러나 출처는 알리지 않는다. 결혼식 남자 들러리들에게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서 괴롭힌다. 알 길이 없자 블레셋 사람들이 딤나의 여인을 괴롭혀 답을 알아낸다. 결국 삼손이 패하고 아스글론에 내려가 그곳 사람 30인을 죽이고 노력하여 옷 30번을 갔다 준다.


사사기 15장


1-8절 삼손의 복수


얼마 후 삼손이 다시 딤나로 내려가 아내를 보려 한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삼손의 아내를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고 하며 동생을 준다고 한다. 화가 난 삼손은 여우 삼백 마리를 잡아 꼬리에 홰를 달고 밭에 불을 놓는다. 블레셋 사람들이 깜짝 놀라 장인의 사람들과 집을 모두 불태워 버린다. 자신의 장인과 집을 불태웠다는 이유는 삼손은 다시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고 에담 바위틈에 숨는다.


9-20절 라맛레히


에담 바위틈에 있는 삼손을 잡으러 블레셋 사람들이 유다 사람들을 겁박한다. 유다 사람들은 삼손을 찾아가 설득하여 줄로 묶어 데려오다. 따라가는 길에 나귀의 턱뼈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이고 그곳은 라맛 레히라 한다. 목말라죽을 지경이 되자 하나님은 한 곳에서 물이 솟아오르게 하여 삼손에게 마시게 한다. 삼손은 그 샘을 엔학고레라 한다.


사사기 16장


1-3절 삼손이 가사 성 문짝과 문설수 빗장을 빼 헤브론 산지로 가져간다.


가사에 내려가 한 기생과 지낸다.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잡으려고 포위하지만 밤에 일어나 가사의 성문짝과 문설주, 빗장을 때서 헤브론 산지까지 가져간다.


4-22절 들릴라와 삼손


이벤에는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를 사랑하여 그 여인과 지낸다. 블레셋 사람들이 들릴라를 협박하여 삼손의 힘의 비밀을 캐라고 한다. 두 번까지 속이지만 세 번째는 괴로워서 실토한다. 결국 세 번째 삼손은 자신의 머리가 밀려 힘을 상실한다. 결국 블레셋 사람들에게 붙잡혀 옥에 갇힌다.


23-31절 삼손의 죽음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붙잡은 것에 대해 기뻐하며 다곤에게 제사하며 삼손을 불러 조롱하려고 한다. 삼소는 하나님께 마지막으로 힘을 달라 기도하며 기둥을 무너뜨려 그곳에 온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죽음을 맞이한다.


사사기 후반분


17-21장은 사사기의 후반부에 속하지만 연대기적으로는 사사기 전반을 아우른다. 가나안에 들어온 목적을 상실하고 헛된 우상을 섬기고 첩을 거느린 레위 사람과 성적 폭력을 가하는 베냐민 지파의 모습을 그린다. 처참하게 무너진 이스라엘의 자멸적 상황을 보여준다.


사사기 17장


1-6절 에브라임 산지 미가의 집안


미가라는 사람이 어머니이 돈을 훔치고 다시 돌려준다. 저주한 돈을 어찌할 줄 몰라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어 섬긴다.


7-13절 레위인 미가의 가정 제사장이 되다.


유다에 살던 레위인이 우연히 미가의 집에 들어가 사연을 듣고 미가 집의 우상을 지키는 개인 제사장이 된다.


사사기 18장


1-6절 단 지파가 미가의 집에 머물다


정탐하러 온 단 지파 사람들이 미가의 집에 머물면서 유다의 말투를 듣고 레위인을 추궁하여 사정을 듣게 된다.


7-26절 단 지파가 라이스를 정탐한다.


라이스를 공격하러 가는 중에 미가의 집에 들러 우상들과 레위인을 데리고 가버린다. 미가가 따라가 달라고 하지만 위협하자 돌아간다.


27-31절 라이스를 공격하여 거주한다.


단 지파가 라이스를 공격하고 그곳에 거주해 살게 된다. 레위인의 정체가 드러난다. 그의 이름은 모세의 손자요 게르솜의 아들인 요나단이다. 그는 라이스에 거하는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된다.


사사기 19장


1-30절 레위인과 첩


에브라임에 살던 레위인에게 첩이 있다. 그 첩이 행음하고 아버지 집이 있는 베들레헴으로 돌아간다. 레위인은 첩을 찾으러 가고 머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베냐민 지파의 기브온에 머문다. 밤이 되자 기브온 청년들이 레위인을 욕보이려 한다. 레위인은 첩을 대신 내준다. 아침에 보니 첩이 죽은 것을 발견하고 열두 조각으로 나누어 알린다.


사사기 20장


1-11절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 모여 의논하다.


레위인 첩의 일로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 모여 의논한다. 이들은 베냐민 지파의 불량배들을 죽어야 한다고 의견을 모은다.


12-16절 베냐민 지파의 거절


사람들을 베냐민 지파에 보내여 악행을 저지른 젊은이들을 내놓으라고 말한다. 그들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베냐민 지파는 거절할 뿐 아니라 온 지파와 전쟁을 하기 위해 군사를 모은다.


17-48절


11지파와 베냐민 지파와 전쟁이 일어난다. 베냐민 지파는 왼손잡이들로 물매를 던지는 선수들이었다. 처음에는 베냐민이 이겼지만 하나님께 기도하여 결국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다. 베냐민 사람 육백 명은 광야로 도망을 치고 나머지는 대부분 죽임을 당해야 한다.


사사기 21장


베냐민 지파를 무찌른 이들은 베냐민 사람들에게 아내를 주지 말자는 섣부른 맹세를 한다. 하지만 이스라엘 12지파 중에 한 지파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몹시 슬퍼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맹세를 깰 수 없어 실로에서 열리는 명절에 여인들을 잡아가도록 계획을 짠다. 베냐민 지파에게 실로에서 춤추는 여인들을 잡아가도록 명령한다. 사사기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이 난다.



  •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행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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