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삼손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삼손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사사기 16장 강해 삼손 나실인

사사기 16장 강해: 무너진 나실인과 끝까지 붙드시는 하나님

들어가는 말 (16:1-31)

사사기 16장은 삼손 이야기의 절정이자 결말입니다. 이 장에는 삼손의 타락, 들릴라의 유혹, 머리털이 잘림, 능력의 상실, 두 눈이 뽑힘, 감옥의 맷돌, 마지막 기도, 그리고 블레셋 신전의 붕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사기 13장에서 삼손은 태에서부터 나실인으로 구별된 사람이었습니다.(삿 13:5) 그러나 16장에 이르면 그는 구별된 삶의 표지를 잃고, 두 눈이 뽑힌 채 원수의 감옥에서 맷돌을 돌리는 비참한 자리에 이릅니다.(삿 16:21)

그러나 사사기 16장은 단순히 삼손의 실패담이 아닙니다. 이 장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지, 인간의 은사가 거룩 없이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무너진 사람의 마지막 부르짖음까지도 어떻게 사용하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삼손은 실패한 사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패한 사사를 통해서도 블레셋의 권세를 치십니다.

가사로 내려간 삼손 (16:1-3)

삼손은 가사에 가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 들어갑니다.(삿 16:1) 14장에서 삼손의 문제가 “눈”으로 시작되었듯이, 16장도 다시 “봄”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딤나의 블레셋 여인을 보았고,(삿 14:1) 이제 가사의 기생을 봅니다.(삿 16:1) 삼손의 눈은 늘 그의 영적 약점이었습니다.

가사는 블레셋의 주요 성읍 중 하나입니다. 삼손은 원수의 땅 깊숙이 들어갑니다. 나실인으로 구별된 사람이 블레셋의 성읍, 그것도 기생의 집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도덕적 실수가 아니라 소명의 경계가 무너진 사건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이 가사에 왔다는 말을 듣고 밤새 성문에 매복합니다.(삿 16:2) 그러나 삼손은 밤중에 일어나 성문짝들과 두 문설주와 빗장을 빼어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 꼭대기까지 갑니다.(삿 16:3) 이것은 엄청난 힘의 과시입니다. 성문은 고대 도시의 방어와 권세의 상징입니다. 삼손은 블레셋 성읍의 문을 뽑아 그들의 안전과 자존심을 조롱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깊은 비극이 있습니다. 삼손은 성문을 뽑을 힘은 있었지만 자기 욕망을 뽑을 힘은 없었습니다. 외적 결박은 끊을 수 있었지만 내적 욕망의 결박은 끊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무서운 모순입니다. 큰일을 할 수 있으나 작은 죄를 이기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은사가 많아도 절제가 없으면 무너질 수 있습니다.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 (16:4-5)

그 후 삼손은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는 여인을 사랑합니다.(삿 16:4) 들릴라는 삼손 이야기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녀의 출신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삼손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블레셋 지도자들이 그녀를 이용했다는 사실입니다.

블레셋 방백들은 들릴라에게 와서 말합니다. “삼손을 꾀어서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 큰 힘이 생기는지,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를 결박하여 굴복하게 할 수 있을지 알아보라.”(삿 16:5) 그리고 각각 은 천백 개씩 주겠다고 약속합니다.(삿 16:5) 블레셋은 삼손의 힘의 비밀을 돈으로 사려 합니다.

여기서 들릴라는 유혹의 도구가 됩니다. 그녀의 사랑은 헌신이 아니라 거래가 됩니다. 삼손은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들릴라는 삼손을 팔고 있습니다. 죄의 세계는 언제나 사랑의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사람을 상품처럼 다룹니다.

삼손은 블레셋을 이기기 위해 부름받았지만, 블레셋 여인에게 마음을 내어줍니다. 그가 이겨야 할 세계가 그의 마음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성도의 가장 큰 전쟁은 바깥의 블레셋과의 싸움이 아니라, 내 마음 안에 자리 잡은 블레셋과의 싸움입니다.

첫 번째 거짓말: 마르지 않은 활줄 (16:6-9)

들릴라는 삼손에게 힘의 비밀을 묻습니다.(삿 16:6) 삼손은 마르지 않은 새 활줄 일곱으로 자신을 결박하면 약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삿 16:7) 들릴라는 그대로 해 보고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고 외칩니다.(삿 16:9) 삼손은 활줄을 불탄 삼실처럼 끊어 버립니다.(삿 16:9)

이 첫 번째 장면에서 삼손은 아직 장난처럼 대응합니다. 그는 들릴라의 의도를 모를 수 없었습니다. 그녀가 실제로 그를 묶고 블레셋 사람들을 숨겨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삼손은 그 관계를 끊지 않습니다. 유혹은 한 번에 사람을 무너뜨리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처음에는 놀이처럼, 실험처럼, 괜찮은 척 다가옵니다.

삼손은 힘이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는 언제든 끊을 수 있다.” 이것이 죄 앞에서 인간이 흔히 갖는 착각입니다. 그러나 죄는 끊을 수 있을 때 끊어야 합니다. 반복해서 가까이 가면 어느 순간 끊을 힘을 잃습니다. 바울은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말합니다.(살전 5:22)

두 번째와 세 번째 거짓말: 반복되는 유혹 (16:10-14)

들릴라는 삼손이 자신을 희롱했다고 말하며 다시 비밀을 묻습니다.(삿 16:10) 삼손은 이번에는 쓰지 않은 새 밧줄로 결박하면 약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삿 16:11) 그러나 이번에도 그는 밧줄을 실처럼 끊어 버립니다.(삿 16:12)

세 번째로 삼손은 자기 머리털 일곱 가닥을 베틀 날실에 섞어 짜면 약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삿 16:13) 들릴라는 그대로 하고 다시 블레셋 사람이 왔다고 외치지만, 삼손은 베틀의 바디와 날실을 뽑아 버립니다.(삿 16:14)

여기서 유혹이 점점 핵심에 가까워집니다. 처음에는 활줄, 그다음은 새 밧줄, 이제는 머리털입니다. 머리털은 나실인의 외적 표지였습니다.(민 6:5) 삼손은 아직 직접 비밀을 말하지 않았지만, 점점 자기 소명의 중심부를 농담거리로 만들고 있습니다.

성도는 여기서 배워야 합니다. 죄는 경계선을 조금씩 옮깁니다. 처음에는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다가, 점점 거룩의 핵심에 가까이 옵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이지만, 나중에는 예배와 소명과 정체성을 건드립니다.

삼손은 머리털을 장난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하나님께 구별된 표지를 유혹의 대화 속에 끌어들인 것입니다. 거룩한 것을 장난으로 만들 때, 마음은 이미 많이 무너진 상태입니다.

들릴라의 압박: 사랑의 언어로 무너뜨리는 유혹 (16:15-17)

들릴라는 말합니다.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냐.”(삿 16:15) 이것은 14장에서 삼손의 아내가 사용했던 방식과 비슷합니다.(삿 14:16) 삼손은 같은 약점에 다시 걸려듭니다.

들릴라는 날마다 말로 재촉하여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 되게 합니다.(삿 16:16) 결국 삼손은 마음속의 모든 것을 털어놓습니다. “내 머리 위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삿 16:17)

여기서 삼손은 드디어 자신의 정체성을 말합니다. 그는 자신이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몰라서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알면서도 무너진 것입니다. 지식은 있었지만 절제가 없었습니다. 소명 의식은 있었지만 사랑의 질서가 무너졌습니다.

들릴라의 말은 사랑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실제로는 파괴의 언어입니다. 유혹은 종종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이라는 말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참 사랑은 사람을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배반하게 만드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유혹입니다.

머리털이 잘리고 여호와께서 떠나심 (16:18-20)

들릴라는 삼손이 진심을 털어놓은 것을 보고 블레셋 방백들을 부릅니다.(삿 16:18) 삼손이 자기 무릎 위에서 잠들자 사람을 불러 그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밀게 합니다.(삿 16:19) 그리고 괴롭게 하여 그의 힘이 없어지게 합니다.(삿 16:19)

들릴라가 다시 외칩니다.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삼손은 전처럼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고 생각합니다.(삿 16:20) 그러나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삿 16:20)

이 구절은 사사기 16장에서 가장 두려운 말씀입니다. 삼손의 비극은 머리털이 잘린 것보다 더 깊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떠나셨는데, 그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전처럼 될 줄 알았습니다. 습관적으로 힘이 나올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능력의 근원은 머리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머리털은 구별의 표지였고, 그 표지를 멸시한 삼손은 하나님의 임재를 가볍게 여긴 것입니다.

성도에게 가장 무서운 상태는 죄를 짓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졌는데도 모르는 것입니다. 예배는 드리지만 임재가 없고, 말은 하지만 생명이 없고, 활동은 하지만 성령의 능력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고 했지만, 주님은 그들이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고 하셨습니다.(계 3:17)

삼손은 강한 사람이었지만 영적으로 무감각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떠나신 것을 깨닫지 못하는 강함은 가장 위험한 약함입니다.

두 눈이 뽑히고 맷돌을 돌림 (16:21)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붙잡아 그의 두 눈을 뽑고 가사로 끌고 내려갑니다.(삿 16:21) 그들은 놋 줄로 그를 매고 감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합니다.(삿 16:21)

삼손의 죄는 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딤나의 여인을 보았고,(삿 14:1) 가사의 기생을 보았으며,(삿 16:1) 들릴라에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이제 그의 두 눈이 뽑힙니다. 이것은 단순한 형벌이 아니라 상징적 심판처럼 보입니다. 자기 눈에 좋은 대로 살던 사람이 결국 눈을 잃습니다.

맷돌을 돌리는 일은 보통 종이나 짐승이 하는 비천한 노동이었습니다. 한때 성문을 뽑아 어깨에 메고 올라갔던 삼손이 이제 원수의 감옥에서 맷돌을 돌립니다. 구별된 나실인이 블레셋의 조롱거리가 됩니다.

죄는 사람을 높여 주는 것처럼 약속하지만 결국 낮춥니다. 자유를 줄 것처럼 말하지만 결국 결박합니다. 기쁨을 줄 것처럼 말하지만 결국 수치와 종살이를 줍니다. 예수님은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8:34)

삼손은 블레셋에게 잡힌 것이지만, 더 깊게 보면 자기 욕망에 먼저 잡힌 것입니다. 바깥의 놋 줄보다 무서운 것은 마음의 정욕입니다.

다시 자라기 시작한 머리털 (16:22)

그러나 본문은 조용히 희망의 한 줄을 넣습니다.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삿 16:22)

이 구절은 짧지만 놀랍습니다. 삼손의 실패는 실제입니다. 그의 눈은 뽑혔고, 그는 감옥에 있습니다. 그러나 머리털이 다시 자랍니다. 이것은 단순한 생리 현상이 아니라 은혜의 암시입니다. 나실인의 표지가 다시 자라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히 끝내지 않으셨다는 신호입니다.

회복은 종종 아주 작게 시작됩니다. 아직 감옥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아직 눈은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아직 블레셋은 삼손을 조롱합니다. 그러나 머리털이 자랍니다. 하나님은 무너진 사람에게도 은혜의 싹을 주십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징계는 끝장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는 이유는 멸망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돌이키게 하시기 위함입니다.(히 12:6) 삼손의 머리털은 다시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은혜는 때로 감옥 안에서도 자랍니다.

다곤의 신전과 거짓 승리의 찬양 (16:23-24)

블레셋 방백들이 모여 그들의 신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며 즐거워합니다.(삿 16:23) 그들은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 삼손을 우리 손에 넘겨주었다”고 말합니다.(삿 16:23) 백성들도 삼손을 보고 자기 신을 찬양합니다.(삿 16:24)

여기서 영적 전쟁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블레셋은 삼손을 이긴 것을 단순한 군사적 승리로 보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곤이 여호와의 사람 삼손을 이겼다고 해석합니다. 삼손의 실패는 하나님의 이름이 조롱받는 자리로 이어졌습니다.

성도의 죄는 개인에게만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 가운데 조롱받게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 사건을 범했을 때, 나단은 그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삼하 12:14)

삼손의 무너짐은 블레셋에게 다곤을 찬양할 이유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구별된 자의 책임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의 이름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이름과 연결됩니다.(마 5:16)

조롱거리로 끌려 나온 삼손 (16:25-27)

블레셋 사람들이 마음이 즐거울 때 삼손을 불러 재주를 부리게 하자고 합니다.(삿 16:25) 삼손은 그들 앞에서 조롱거리가 됩니다. 그는 신전의 두 기둥 사이에 서게 됩니다.(삿 16:25)

한때 블레셋을 두렵게 했던 사람이 이제 블레셋의 오락거리가 되었습니다. 죄의 결과는 이토록 비참합니다. 하나님께 쓰임받던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대신 원수의 웃음거리가 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마지막 역전을 준비하십니다. 신전에는 남녀가 가득했고, 블레셋 모든 방백이 거기 있었습니다. 지붕에도 삼천 명가량이 삼손이 재주 부리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삿 16:27) 블레셋의 교만이 최고조에 이른 순간, 하나님의 심판도 가까이 옵니다.

성경에서 교만의 절정은 심판의 직전일 때가 많습니다. 바벨탑도 인간의 이름을 내려는 교만의 자리였고,(창 11:4) 느부갓네살의 교만도 낮아짐으로 이어졌습니다.(단 4:30-33) 블레셋은 다곤의 승리를 확신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신전 한복판에서 심판하십니다.

삼손의 마지막 기도 (16:28)

삼손은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삿 16:28)

이 기도에는 회개와 복수의 감정이 함께 섞여 있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을 부릅니다. “주 여호와여”, “하나님이여”라고 부릅니다. 그는 자기 힘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이제 분명히 압니다. “나를 강하게 하소서”라고 구합니다. 예전처럼 자기 힘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에는 여전히 “내 두 눈을 뺀 원수에게 갚게 하소서”라는 개인적 복수의 언어가 있습니다. 삼손은 마지막 순간까지 완전히 정제된 인물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사용하십니다. 이것이 사사기의 현실성입니다. 하나님은 완벽한 사람만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 무너지고 뒤섞이고 부족한 사람의 부르짖음도 긍휼히 들으십니다.

삼손의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나를 생각하옵소서”입니다.(삿 16:28) 그는 하나님께 기억되기를 구합니다. 죄로 무너진 사람이 다시 하나님께 기억되기를 구하는 것, 이것이 은혜의 시작입니다. 십자가 옆 강도도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구했습니다.(눅 23:42)

신전의 붕괴와 삼손의 죽음 (16:29-30)

삼손은 집을 받친 두 가운데 기둥을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끌어안습니다.(삿 16:29) 그리고 말합니다.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삿 16:30) 힘을 다해 몸을 굽히자 신전이 무너지고, 그 안의 방백들과 온 백성이 죽습니다. 삼손이 죽을 때 죽인 자가 살았을 때 죽인 자보다 많았습니다.(삿 16:30)

삼손의 마지막은 승리이면서 비극입니다. 그는 블레셋에게 결정적 타격을 줍니다. 그러나 그 승리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는 살아서보다 죽어서 더 큰 일을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삼손을 믿음의 사람들 가운데 포함합니다.(히 11:32) 그의 생애는 혼탁했지만, 마지막 순간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그를 통해 원수의 권세를 치셨습니다.

그러나 삼손을 예수님과 단순히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삼손은 자기 죄와 복수심이 뒤섞인 죽음을 맞습니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의인으로 자기 백성을 위해 죽으셨습니다.(벧전 2:22-24) 삼손은 원수와 함께 죽었지만, 예수님은 원수를 살리기 위해 죽으셨습니다.(롬 5:10)

그럼에도 삼손의 죽음은 우리에게 더 큰 구원자를 바라보게 합니다. 하나님은 삼손의 죽음을 통해 블레셋의 신전을 무너뜨리셨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무너뜨리셨습니다.(골 2:15, 히 2:14)

장사와 사사직의 마무리 (16:31)

삼손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내려와 그의 시체를 가져다가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그의 아버지 마노아의 장지에 장사합니다.(삿 16:31) 삼손은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지냈습니다.(삿 16:31)

삼손은 고향으로 돌아와 묻힙니다. 그의 시작은 약속과 복이었습니다.(삿 13:24) 그의 끝은 장례입니다. 그러나 그 장례는 완전한 실패의 표지만은 아닙니다. 그의 가족이 그를 거두어 장사했다는 것은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로 기억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삼손의 삶은 경고와 위로를 동시에 줍니다. 경고는 이것입니다. 거룩을 잃으면 은사도 무너집니다. 위로는 이것입니다. 무너진 자가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사사기 16장의 신학적 의미 (16:1-31)

첫째, 구별된 사람도 죄 앞에서 방심하면 무너질 수 있습니다. 삼손은 모태에서부터 나실인이었지만, 눈의 욕망을 다스리지 못했습니다.(삿 13:5, 삿 16:1)

둘째, 은사와 임재는 구별해야 합니다. 삼손은 능력에 익숙했지만, 여호와께서 떠나신 줄 깨닫지 못했습니다.(삿 16:20)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능력의 습관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실제 관계입니다.

셋째, 죄는 사람을 결박하고 눈멀게 합니다. 삼손은 자기 눈에 좋은 대로 살다가 결국 두 눈을 잃고 감옥에서 맷돌을 돌렸습니다.(삿 16:21)

넷째, 하나님의 은혜는 감옥에서도 다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삼손의 머리털은 다시 자라기 시작했습니다.(삿 16:22) 실패가 마지막 단어는 아닙니다.

다섯째, 하나님은 무너진 자의 마지막 부르짖음도 들으십니다. 삼손은 “나를 생각하옵소서”라고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를 마지막으로 사용하셨습니다.(삿 16:28-30)

그리스도 안에서 보는 사사기 16장 (16:1-31)

삼손은 불완전한 구원자입니다. 그는 강했지만 거룩하지 못했고, 쓰임받았지만 절제하지 못했으며, 원수를 쳤지만 자기 죄에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삼손은 우리에게 참된 구원자가 필요함을 보여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삼손보다 크신 구원자입니다. 삼손은 자기 죄의 결과로 결박되었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스스로 결박당하셨습니다.(마 27:2) 삼손은 두 눈이 뽑혀 조롱당했지만, 예수님은 침 뱉음과 조롱과 채찍을 당하시며 십자가로 가셨습니다.(마 27:29-31) 삼손은 원수와 함께 죽었지만, 예수님은 원수를 용서하며 죽으셨습니다.(눅 23:34)

삼손의 죽음은 블레셋 신전을 무너뜨렸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무너뜨렸습니다.(고전 15:55-57) 삼손은 죽음으로 끝났지만,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마 28:6)

그러므로 우리는 삼손의 힘을 부러워하는 데서 멈추면 안 됩니다. 우리는 삼손의 실패를 통해 그리스도의 완전함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의 적용 (16:1-31)

첫째, 눈을 지켜야 합니다. 삼손의 무너짐은 보는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성도는 눈으로 들어오는 욕망을 말씀으로 다스려야 합니다.(욥 31:1)

둘째, 유혹을 장난으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삼손은 들릴라의 반복된 유혹을 알면서도 머물렀습니다. 피해야 할 자리를 영적 자신감으로 버티면 위험합니다.(고전 10:12)

셋째, 하나님이 떠나신 줄도 모르는 무감각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가장 두려운 상태는 죄를 짓고도 아무렇지 않은 상태입니다.(삿 16:20)

넷째, 실패 후에도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삼손의 머리털이 다시 자란 것처럼, 하나님은 회복의 시작을 주실 수 있습니다.(삿 16:22)

다섯째, 참된 능력은 성령 안에 있습니다. 삼손의 힘은 머리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성도는 자기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살아야 합니다.(슥 4:6)

결론: 무너진 사람도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16:1-31)

사사기 16장은 무서운 장입니다. 삼손은 구별된 나실인이었지만 욕망을 따라갔고, 들릴라의 품에서 비밀을 잃었고, 여호와께서 떠나신 줄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두 눈이 뽑히고 감옥에서 맷돌을 돌리는 자리까지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이 장은 절망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머리털이 다시 자라기 시작했습니다.(삿 16:22) 삼손은 마지막 순간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주 여호와여 나를 생각하옵소서.”(삿 16:28)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셨고, 삼손을 마지막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죄는 무섭습니다. 은사를 무너뜨리고, 눈을 멀게 하고, 사람을 결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더 깊습니다. 회개하며 부르짖는 자를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삼손에게서 멈추지 않습니다. 삼손은 실패한 구원자였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구원자이십니다. 삼손은 죽으며 원수를 무너뜨렸지만, 예수님은 죽고 부활하셔서 죄와 사망을 영원히 무너뜨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기도는 이것입니다. “주여, 나를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을 말씀으로 지켜 주소서. 나의 은사를 거룩으로 붙들어 주소서. 나의 실패보다 크신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살게 하소서.”

사사기 14장 강해: 욕망의 길에서도 섭리하시는 하나님

사사기 14장 강해: 욕망의 길에서도 섭리하시는 하나님

들어가는 말 (14:1-20)

사사기 14장은 삼손의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는 장입니다. 13장에서 삼손은 태어나기 전부터 나실인으로 구별되었습니다.(삿 13:5)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셨고,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셨습니다.(삿 13:24-25) 그러나 14장에 들어오면 우리는 곧바로 당혹스러운 장면을 만납니다. 삼손은 블레셋 여인을 보고 그녀를 아내로 삼겠다고 합니다.(삿 14:1-2)

삼손은 구별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눈은 구별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지만, 그의 욕망은 블레셋 여인에게 끌립니다. 삼손의 이야기는 그래서 긴장으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한 사람인데, 동시에 육체의 충동에 쉽게 흔들립니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이지만, 그 인격과 욕망은 아직 깊이 다듬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사사기 14장은 삼손의 실패만 말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삼손의 연약하고 위험한 선택 속에서도 블레셋을 치실 기회를 찾고 계셨다고 말합니다.(삿 14:4) 이것이 어려운 신학적 지점입니다. 하나님은 삼손의 욕망을 선하다고 인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비뚤어진 동기와 미숙한 선택까지도 자신의 주권적 섭리 안에서 사용하십니다.

딤나로 내려간 삼손: 눈으로 시작된 욕망 (14:1-2)

삼손은 딤나로 내려갔다가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 한 여자를 봅니다.(삿 14:1) 그리고 부모에게 돌아와 말합니다. “내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이제 그를 맞이하여 내 아내로 삼게 하소서.”(삿 14:2)

여기서 강조되는 동사는 “보았다”입니다. 삼손은 그녀를 봅니다. 그리고 곧바로 “내 아내로 삼게 하라”고 요구합니다. 사사기에서 눈은 중요한 주제입니다. 사사기의 결론은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입니다.(삿 21:25) 삼손도 자기 눈에 좋아 보이는 대로 움직입니다.

이것은 에덴동산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보았고, 그 나무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것을 보고 열매를 따먹었습니다.(창 3:6) 눈으로 본 것이 욕망이 되고, 욕망이 행동이 되고, 행동이 죄와 죽음의 길로 이어집니다.

삼손의 문제는 단순히 결혼 상대의 국적만이 아닙니다. 그의 선택 방식입니다. 그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습니다. 부모의 지혜를 진지하게 듣지 않습니다. 그는 “내가 보았다, 그러니 내게 데려오라”고 말합니다. 자기 눈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는 것에 의해 욕망이 형성되는 시대를 삽니다. 화면, 이미지, 광고, 타인의 삶, 순간적 매력은 우리의 판단을 흔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눈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욥은 “내가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고 말했습니다.(욥 31:1) 거룩은 마음의 문제이지만, 눈에서 시작될 때가 많습니다.

부모의 질문: 언약 백성의 경계를 기억하라 (14:3)

삼손의 부모는 말합니다. “네 형제들의 딸들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맞이하려 하느냐.”(삿 14:3)

부모의 질문은 단순한 민족주의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언약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민족과 무분별하게 혼인하여 그들의 신들을 따르게 되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출 34:15-16, 신 7:3-4) 혼인은 단지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신앙과 예배의 방향을 좌우할 수 있는 언약적 사건입니다.

블레셋은 당시 이스라엘을 압제하던 민족입니다.(삿 13:1) 삼손은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할 사람으로 부름받았습니다.(삿 13:5) 그런데 그가 첫 행보로 블레셋 여인을 아내로 삼으려 합니다. 이것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구원자로 부름받은 사람이 구원해야 할 압제자의 세계에 매혹됩니다.

부모는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이라고 말합니다.(삿 14:3) 할례는 언약의 표지입니다.(창 17:10-14) 부모의 말은 “네가 언약의 경계를 잊고 있느냐”는 신앙적 질문입니다. 삼손은 나실인의 표지를 몸에 가지고 있지만, 언약의 분별력은 흐려져 있습니다.

성도에게도 결혼과 관계는 영적 분별의 영역입니다. 사랑은 감정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누구와 함께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어떤 방향으로 삶이 흘러갈 것인가, 내 신앙의 중심이 지켜질 것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바울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 권면합니다.(고후 6:14)

“그가 내 눈에 들었나이다”: 자기 소견의 언어 (14:3)

부모의 만류에도 삼손은 말합니다.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 그가 내 눈에 들었나이다.”(삿 14:3) 이것은 사사기 전체를 압축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사사기의 시대정신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입니다.(삿 21:25) 삼손은 지금 자기 눈에 좋은 것을 하나님의 뜻보다 앞세웁니다.

“내 눈에 들었다”는 말은 현대적으로 말하면 “내 마음에 든다”는 뜻입니다. 물론 마음에 드는 것이 모두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성도의 문제는 마음에 드는 것을 곧 하나님의 뜻으로 착각하는 데 있습니다. 원하는 것과 옳은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끌리는 것과 거룩한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잠언은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라고 말합니다.(잠 14:12) 삼손의 길이 바로 그렇습니다. 눈에는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갈등, 배신, 폭력, 복수로 이어집니다. 사사기 14장은 욕망이 열어 놓은 길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 줍니다.

성도는 자기 눈을 절대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눈은 죄로 인해 흐려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의 빛 아래서 보아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라고 고백했습니다.(시 119:105)

하나님의 섭리: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일 (14:4)

본문은 매우 놀라운 해석을 덧붙입니다. “그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이는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들을 칠 틈을 타시고자 하셨음이었더라.”(삿 14:4)

이 구절은 조심스럽게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삼손의 정욕적 선택을 도덕적으로 승인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은 삼손의 방식이 지혜롭거나 경건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선택은 계속 문제를 낳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미숙하고 위험한 선택 속에서도 블레셋을 치는 계기를 마련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죄로 두시면서도, 그 죄와 어리석음까지 자신의 선한 목적 아래 다스리십니다. 요셉의 형들은 악한 마음으로 요셉을 팔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어 많은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창 50:20) 예수님의 십자가도 인간의 악한 손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된 일이었습니다.(행 2:23)

그러나 섭리를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결국 사용하시니 내가 내 욕망대로 살아도 된다”는 결론은 불경건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사용하실 수 있다는 사실은 죄의 핑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찬양하게 하는 이유입니다. 바울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고 묻고 “그럴 수 없느니라”고 단호히 말합니다.(롬 6:1-2)

삼손의 욕망은 위험했지만, 하나님은 그 위험한 길에서도 블레셋 압제를 깨뜨릴 틈을 여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십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크신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 방종의 변명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포도원과 사자: 나실인의 길 위의 시험 (14:5-6)

삼손이 부모와 함께 딤나로 내려가 딤나의 포도원에 이르렀을 때, 젊은 사자가 그를 향해 소리 지릅니다.(삿 14:5) 그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셨고, 삼손은 손에 아무것도 없이 염소 새끼를 찢듯 사자를 찢습니다.(삿 14:6)

여기서 배경이 포도원이라는 점이 눈에 띕니다. 삼손은 나실인입니다. 나실인은 포도주와 독주뿐 아니라 포도나무 소산을 멀리해야 합니다.(민 6:3-4) 그런데 삼손은 포도원 근처에 있습니다. 본문이 그가 포도를 먹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포도원은 나실인인 삼손에게 위험한 경계의 장소입니다.

사자는 강력한 위협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여호와의 영으로 그것을 이깁니다. 이것은 그의 힘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보여 줍니다. 삼손의 능력은 근육의 자연적 힘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입니다. 사사기에서 여호와의 영은 사사들에게 임하여 구원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십니다.(삿 3:10, 삿 6:34, 삿 11:29)

그러나 삼손은 이 일을 부모에게 알리지 않습니다.(삿 14:6) 이 침묵은 이후 문제의 씨앗이 됩니다. 삼손의 삶에는 은밀한 행동이 많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받은 능력으로 사자를 이겼지만, 그 사건을 신앙적 간증으로 공동체에 나누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중에는 그 사자의 주검에서 꿀을 취해 먹는 부정한 행동으로 이어집니다.(삿 14:8-9)

은사는 은밀한 자기 과시가 아니라 하나님께 돌려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승리를 자기만의 비밀스러운 경험으로 소비하면, 그것은 곧 유혹의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삼손의 대화와 결혼의 진행 (14:7)

삼손은 내려가서 그 여자와 말했고, 그 여자가 삼손의 눈에 들었습니다.(삿 14:7) 다시 “눈”의 언어가 반복됩니다. 삼손은 계속 눈에 이끌립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보다 자기 시각적 만족에 의해 움직이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성경은 이 여인의 신앙이나 성품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삼손이 그녀에게서 본 것은 깊은 언약적 동반자가 아니라 자기 눈에 맞는 매력이었습니다. 이것은 관계의 위험한 출발점입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지 않고 자기 욕망의 대상으로 볼 때, 관계는 쉽게 깨어집니다.

오늘 시대도 사람을 이미지로 소비합니다. 그러나 성경적 사랑은 상대를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 앞의 인격으로 봅니다. 결혼은 단순한 끌림의 제도가 아니라 언약적 헌신입니다.(창 2:24, 엡 5:31-32) 삼손의 결혼 시도는 언약적 결혼의 깊이보다 순간적 매력에 기초해 있습니다.

사자의 주검과 꿀: 부정한 것에서 단맛을 취하다 (14:8-9)

얼마 후 삼손이 그 여자를 맞이하려고 다시 가다가, 전에 죽인 사자의 주검을 봅니다. 그런데 그 주검 안에 벌 떼와 꿀이 있습니다.(삿 14:8) 삼손은 손으로 꿀을 떠서 먹고, 부모에게도 주어 먹게 합니다. 그러나 그 꿀이 사자의 주검에서 나온 것임을 부모에게 알리지 않습니다.(삿 14:9)

이 장면은 삼손의 영적 상태를 매우 강하게 드러냅니다. 나실인은 시체를 가까이하지 말아야 합니다.(민 6:6) 그런데 삼손은 죽은 사자의 주검에 가까이 가고, 그 안에서 꿀을 취해 먹습니다. 그는 부정한 것에서 단맛을 얻습니다.

이것은 죄의 속성을 보여 줍니다. 죄는 처음부터 쓰게만 다가오지 않습니다. 죄는 종종 달콤합니다. 금지된 것에서 단맛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 단맛은 죽음의 주검 안에 있습니다. 잠언은 음녀의 입술이 꿀을 떨어뜨리나 나중은 쑥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같이 날카롭다고 말합니다.(잠 5:3-4)

삼손은 부모에게도 그 꿀을 줍니다. 그러나 출처는 말하지 않습니다. 죄는 혼자만 오염시키지 않습니다. 감추어진 죄는 주변 사람까지 부정함에 참여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삼손의 문제는 단순히 개인적 일탈이 아니라, 구별된 자로서 공동체와 가정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입니다.

성도에게도 이런 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달콤하지만 영적으로는 죽은 것에서 나온 즐거움, 하나님께 숨기고 싶은 만족, 사람들에게 출처를 말할 수 없는 이익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물어야 합니다. “이 단맛은 어디서 온 것인가?” 단맛보다 중요한 것은 출처입니다.

잔치와 세상 문화 속으로 들어감 (14:10-11)

삼손의 아버지가 그 여자에게로 내려가고, 삼손은 거기서 잔치를 베풉니다. 이는 청년들이 그렇게 행하는 풍속이었기 때문입니다.(삿 14:10) 사람들이 삼손을 보고 삼십 명을 데려와 친구로 삼아 함께 있게 합니다.(삿 14:11)

잔치는 결혼의 기쁨을 나타내지만, 여기서는 위험한 분위기를 품습니다. 나실인인 삼손이 블레셋 풍속의 잔치 한가운데 들어갑니다. “청년들이 그렇게 행하는 풍속”이라는 말은 삼손이 하나님의 구별된 방식보다 세상의 관습에 자연스럽게 섞이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또한 삼십 명의 친구는 진정한 친구라기보다 감시자처럼 보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경계합니다. 삼손은 블레셋 세계에 들어가고 싶어 하지만, 그 세계는 그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성도가 세상과 타협하려 할 때도 비슷합니다. 세상은 성도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고, 성도 역시 하나님 앞에서 평안을 잃습니다.

야고보는 세상과 벗 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라고 경고합니다.(약 4:4) 이것은 세상 사람을 미워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성도는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요 3:16) 그러나 세상의 가치관과 욕망과 풍속에 동화되어서는 안 됩니다.(롬 12:2)

수수께끼: 은밀한 죄를 놀이로 만들다 (14:12-14)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수수께끼를 냅니다. 칠 일 잔치 동안 맞히면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주겠고, 맞히지 못하면 그들이 자신에게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삿 14:12-13) 수수께끼는 이렇습니다.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삿 14:14)

이 수수께끼의 배경은 사자의 주검에서 꿀을 취한 사건입니다. 삼손은 자신의 부정한 행동을 감추면서, 그것을 지적 놀이와 내기의 소재로 삼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위험합니다. 죄를 회개하지 않고 농담과 게임으로 만들 때, 사람의 양심은 무뎌집니다.

삼손의 수수께끼는 겉으로는 재치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부정함과 은폐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구별된 자로서 경계해야 할 일을 오히려 자랑거리처럼 사용합니다. 이것은 은사의 왜곡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사자를 이긴 사건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간증이 아니라 블레셋 잔치의 내기거리가 되었습니다.

성도도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경험과 은사를 자기 과시의 재료로 만들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죄의 경험을 재치와 이야기거리로 소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룩은 죄를 미화하지 않습니다. 빛 가운데 사는 사람은 어둠의 일을 장난으로 만들지 않습니다.(엡 5:11-12)

블레셋 사람들의 협박: 세상의 우정은 이해관계에 약하다 (14:15)

칠 일째에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아내에게 말합니다. “너는 네 남편을 꾀어 그 수수께끼를 우리에게 알려 주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와 네 아버지의 집을 불사르리라.”(삿 14:15)

여기서 블레셋 사람들의 폭력성이 드러납니다. 그들은 잔치의 친구처럼 앉아 있었지만, 손해가 걸리자 곧 협박합니다. 삼손이 들어가고 싶어 했던 세계는 사랑과 신뢰의 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해관계와 위협으로 움직이는 세계였습니다.

세상의 우정은 종종 유익이 있을 때 유지됩니다. 물론 세상에도 귀한 우정과 선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는 공동체는 궁극적으로 자기 이익 앞에서 쉽게 무너집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아내를 보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녀를 협박해 자기 손해를 피하려 합니다.

이것은 죄의 구조를 보여 줍니다. 죄는 사람을 이용합니다. 처음에는 매력적으로 다가오지만, 나중에는 협박합니다. 처음에는 즐거움처럼 보이지만, 결국 사람을 두려움의 종으로 만듭니다. 예수님은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8:34)

삼손의 아내의 눈물과 관계의 균열 (14:16-17)

삼손의 아내는 울며 말합니다.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이요 사랑하지 아니하는도다.”(삿 14:16) 그녀는 칠 일 동안 울며 삼손을 압박합니다. 결국 삼손은 일곱째 날에 수수께끼의 답을 알려 줍니다.(삿 14:17)

이 장면은 삼손의 관계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 줍니다. 결혼은 아직 완성되기도 전에 불신과 조작과 압박으로 흔들립니다. 삼손의 아내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협박받고 있고, 삼손은 그녀에게 마음을 열지 않다가 결국 감정적 압박에 무너집니다.

삼손의 삶에는 반복되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는 여인의 압박 앞에서 비밀을 지키지 못합니다. 이 패턴은 훗날 들릴라 사건에서 더 치명적으로 반복됩니다.(삿 16:15-17) 사사기 14장은 삼손의 약점이 이미 초기부터 드러났음을 보여 줍니다.

죄의 패턴은 작은 사건에서 먼저 나타납니다. 회개하지 않은 약점은 시간이 지나면 더 큰 붕괴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작은 균열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반복되는 약점 앞에서 “나는 괜찮다”고 말하지 말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시 139:23-24)

“내 암송아지로 밭 갈지 아니하였더라면”: 관계를 소유로 보는 언어 (14:18)

블레셋 사람들이 수수께끼를 맞히자 삼손은 말합니다. “너희가 내 암송아지로 밭 갈지 아니하였더라면 내 수수께끼를 능히 풀지 못하였으리라.”(삿 14:18)

이 말은 삼손의 분노와 모욕감을 드러냅니다. 그는 아내를 “내 암송아지”에 비유합니다. 물론 고대적 표현의 관용성을 감안하더라도, 이 말에는 관계를 인격적으로 존중하기보다 소유와 도구의 언어로 보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속았고, 아내에게 배신당했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의 반응은 관계의 깊은 문제를 보여 줍니다. 욕망으로 시작한 관계는 쉽게 소유욕과 분노로 변합니다. 사랑이 언약적 헌신이 아니라 자기 만족의 연장일 때, 상대가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분노가 폭발합니다.

성경적 사랑은 상대를 소유물로 대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고전 13:5)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방식은 지배가 아니라 자기희생입니다.(엡 5:25)

여호와의 영과 아스글론의 삼십 명 (14:19)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자, 그는 아스글론으로 내려가 그곳 사람 삼십 명을 죽이고 그들의 옷을 빼앗아 수수께끼를 맞힌 자들에게 줍니다.(삿 14:19) 그리고 심히 노하여 자기 아버지의 집으로 올라갑니다.(삿 14:19)

이 구절도 신학적으로 어렵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임하셨고,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을 죽입니다. 본문은 이것이 블레셋을 칠 틈을 찾으신 하나님의 섭리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삿 14:4) 그러나 동시에 삼손의 감정은 분노로 가득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전쟁을 수행하는 동시에 개인적 모욕감에 반응하고 있습니다.

사사기에서 하나님은 불완전한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 주지만, 인간의 불완전함을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삼손은 하나님께 쓰임받지만, 그의 방식은 거칠고 감정적입니다. 그는 블레셋을 치지만, 자기 분노와 하나님의 사명이 뒤섞여 있습니다.

오늘 성도도 사역과 감정이 뒤섞일 때를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내 분노를 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진리를 지킨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내 자존심을 지키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움직이는가, 아니면 내 상처와 분노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포장하는가?”

깨어진 결혼과 더 큰 갈등의 씨앗 (14:20)

삼손의 아내는 삼손의 친구였던 사람에게 주어집니다.(삿 14:20) 이렇게 사사기 14장은 결혼의 성취가 아니라 관계의 파탄으로 끝납니다. 삼손이 원했던 여인, 부모를 설득하고 블레셋 땅으로 내려가 얻으려 했던 관계는 깨어집니다.

이 사건은 15장의 더 큰 갈등으로 이어집니다. 삼손은 나중에 아내를 찾아가지만,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주어진 것을 알고 분노합니다.(삿 15:1-3) 그 결과 블레셋의 곡식을 불태우고, 블레셋은 삼손의 아내와 장인을 불사릅니다.(삿 15:4-6) 처음의 욕망이 점점 폭력의 연쇄로 번집니다.

죄의 길은 처음부터 끝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삼손은 처음에 단지 “내 눈에 든 여인”을 원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거짓, 협박, 살인, 분노, 복수, 파탄으로 이어집니다. 욕망은 작게 시작되지만, 그 열매는 크게 번집니다.

야고보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말합니다.(약 1:15) 사사기 14장은 이 말씀의 이야기적 예입니다.

사사기 14장의 신학적 의미 (14:1-20)

사사기 14장은 첫째, 구별된 소명과 육체적 욕망의 충돌을 보여 줍니다. 삼손은 나실인이지만, 그의 눈은 블레셋 여인에게 사로잡혔습니다.(삿 14:1-3) 소명이 있어도 욕망이 다스려지지 않으면 삶은 위험해집니다.

둘째,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어리석음보다 큽니다. 하나님은 삼손의 미숙한 선택 속에서도 블레셋을 칠 기회를 찾으셨습니다.(삿 14:4) 그러나 이것은 죄의 면허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셋째, 부정한 것에서 단맛을 취하는 위험을 보여 줍니다. 삼손은 사자의 주검에서 꿀을 먹었습니다.(삿 14:8-9) 죄는 달콤할 수 있지만, 그 출처는 죽음입니다.

넷째, 세상과의 타협은 평안을 주지 못합니다. 삼손은 블레셋 세계로 들어가려 했지만, 그곳에서 협박과 배신과 분노를 경험했습니다.(삿 14:15-20)

다섯째, 은사와 성품은 다를 수 있습니다. 삼손은 여호와의 영으로 큰 능력을 행했지만, 그의 성품은 미숙하고 충동적이었습니다.(삿 14:19) 성도는 능력보다 거룩을 더 사모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보는 사사기 14장 (14:1-20)

삼손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한 사사였지만, 그는 불완전한 구원자입니다.(삿 13:5) 그는 자기 눈에 좋은 것을 따라갔고, 부정한 것에 가까이 갔으며, 분노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구원자이십니다.

삼손은 블레셋 여인에게 내려갔지만, 그리스도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낮아져 이 땅에 오셨습니다.(빌 2:6-8) 삼손은 부정한 주검에서 꿀을 취했지만, 그리스도는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참 생명을 주셨습니다.(고전 15:54-57) 삼손은 분노 속에서 블레셋 사람들을 죽였지만, 그리스도는 원수 된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기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롬 5:8-10)

삼손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인간 구원자의 한계를 보여 줍니다. 아무리 힘이 강해도 마음이 거룩하지 않으면 완전한 구원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자는 힘만 강한 분이 아니라, 거룩하고 온유하며 자기희생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의 적용 (14:1-20)

첫째, 내 눈에 좋은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삼손은 “내 눈에 들었다”고 말했습니다.(삿 14:3) 성도는 눈의 욕망보다 말씀의 빛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둘째, 관계와 결혼은 신앙의 문제입니다. 삼손의 블레셋 결혼 시도는 개인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언약 정체성과 연결된 문제였습니다. 성도는 누구와 어떤 방향으로 하나님을 섬길지 깊이 분별해야 합니다.

셋째, 달콤함의 출처를 물어야 합니다. 사자의 주검에서 나온 꿀처럼, 어떤 즐거움은 달지만 부정한 곳에서 나옵니다.(삿 14:8-9) 성도는 단맛보다 거룩함을 선택해야 합니다.

넷째, 은사를 성품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삼손은 능력이 있었지만 절제는 부족했습니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일수록 더 깊은 거룩과 절제가 필요합니다.

다섯째,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보다 크십니다. 삼손의 미숙함 속에서도 하나님은 블레셋을 치실 길을 여셨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핑계로 죄에 머물지 말고, 오히려 회개와 감사로 나아가야 합니다.

결론: 욕망의 눈에서 믿음의 눈으로 (14:1-20)

사사기 14장은 삼손의 힘보다 삼손의 눈을 보여 줍니다. 그는 보았고, 원했고, 내려갔고, 얻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기쁨이 아니라 갈등과 파탄으로 끝났습니다. 구별된 사람이 자기 눈에 좋은 대로 살 때, 그의 능력조차 위험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어두운 장에서도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삼손의 미숙함보다 크시고, 블레셋의 압제보다 크시며, 인간의 뒤엉킨 욕망 속에서도 자신의 구속 계획을 이루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눈이 말씀으로 씻겨야 합니다. 내 눈에 좋은 길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삼손보다 크신 구원자, 자기 욕망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까지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눅 22:42)

삼손은 자기 눈에 좋은 것을 따라 내려갔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낮아지셨습니다. 삼손의 길은 파탄으로 이어졌지만, 그리스도의 길은 구원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욕망의 눈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사기 장별요약 및 강해목록

 사사기 개요


1. 개요


사사시대는 여호수아의 죽음과 사울이 세워지기 직전까지입니다. 사사기에 기록된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정황상 엘리 제사장 직전까지의 시간대로 보입니다. 사사기는 연대기 순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간대를 정확히 짚어낼 수 없습니다. 여호수아의 죽음 이후 각 지파별로 흩어져 할당 받은 땅을 정복합니다. 하지만 명령대로 순종하기보다 가나안 주민들과 적당하게 타협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됩니다. 결국 진노한 하나님은 적들에게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하고, 이스라엘은 다시 회개하면 사사를 보내 구원하는 역사가 되풀이됩니다.


사사기는 초반부와 사사들의 이야기, 후반부는 레위지파 첩 사건과 베냐민 지파의 몰락으로 구분됩니다. 사사들의 중심에 기드온이 자리하며 기드온 이전 사사와 시대, 기드온 이후 사사와 시대로 구분이 될 만큼 중요한 인물입니다.  각장은 중요한 부분만을 스토리 형식으로 요약했습니다.


2. 장별요약


사사기 1장


각 지파별로 가나안 전쟁이 시작된다. 유다 지파는 형제 지파인 시므온 지파와 연합하여 아도니 베섹을 공격한다. 예루살렘에 올라가 아낙 자손 세새, 아히만, 달매를 죽인다. 옷니엘이 드빌을 쳐서 갈렙의 딸인 악사와 결혼한다. 에브라임은 므낫세 지파와 연합하여 벧엘을 공격한다. 하지만 다른 지파들은 다 쫓아내지 못한다.


사사기 2장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 올라와 이스라엘을 책망하여 경고한다. 여호수아가 110 세에 사망하고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산 북쪽 딤낫 헤레스에 장사된다. 여호수아와 당대 장로들이 죽자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잊고 우사을 섬기기 시작한다.


사사기 3장


3장의 시작은 여호와께서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하는 세대를 시험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하나님은 이방 민족과 가나안 족속을 통해 율법을 순종하는지 않지 않는 지를 시험하신다. 안타깝게 그들은 가나안 주민과 언약을 맺고 그들의 딸들을 아내 삼고 자신들의 아들들을 그들에게 준다.


사사 옷니엘/ 여호와 목전에 악을 행하자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에게 판다. 8년 동안 괴롭힌다. 이스라엘이 부르짖자 유다 지파 옷니엘을 사사로 세운다. 이후 40년 동안 평안하다.


사사 에훗/ 또 이스라엘이 악을 행하자 이번에 모압 왕 에글론의 손에 판다. 에글론은 종려나무 성읍(여리고)을 차지하고 18년 동안 괴롭힌다. 이번에는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을 사사로 세워 구원한다.


사사 삼갈/ 아낫의 아들 삼갈이 소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구원 한다.


사사기 4장


에훗이 죽자 또 이스라엘 자손이 죄를 짓는다. 이번에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판다. 야빈은 갈릴리 바다 위쪽에 자리한 하솔에 자리하면서 전 이스라엘을 괴롭힌다. 랍비돗의 여선지 드보라가 사사가 되어 사람들을 가르친다. 드보라가 사람을 보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온다. 다볼산에서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와 전쟁을 치러 큰 승리를 거둔다. 하지만 드보라에게 완전히 순종하지 않아 시스라는 겐 사람 야엘을 죽이게 된다.


사사기 5장


5장은 전쟁에서 승리한 드로라의 노래가 담겨 있다. 이스라엘은 새 신을 섬기고, 모든 사람들이 숨이 지낼 때 드보라가 나서서 앞장선다. 다볼 산에 운집하여 시스라와 전쟁을 시작할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내려 시스라의 병거들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되어 전쟁에 승리한다. 시스라의 어머니는 아들 시스라가 오기를 기다리지만 아들은 이미 야엘의 손에 죽었다. 드보라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고백한다.


"여호와의 주의 원수들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들은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31절)


사사기 6장


6장에서 8장까지는 사사 기드온을 다룬다. 사사기 안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며, 기드온 이전과 나눌 정도로 중요하다.


이스라엘이 악을 행하자 7년 동안 미디안의 손에 넘겨준다. 미디안으로 이스라엘이 부르짖자 한 선지자를 보내 이스라엘을 책망한다. 애굽에서 학대받을 때 구해 줬는데 또 악을 행한다고 말한다. 그리고서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 속한 오브라에 간다. 이때 기드온이 포도주 틀에서 밀을 추수 한다. 미디안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이다. 여호와의 사자는 기드온에게 이스라엘을 구원하라 한다. 하지만 겁이 많은 기드온은 듣지 않는다. 자신은 너무나 작은 지파에, 작은 집안이라고 말한다. 여호와의 사지인 줄 알고 제사하려 하나 가져온 고기와 무교병을 바위에 놓으라고 하고 지팡이 끝으로 제물에 대니 바위에서 불이 나와 불사르고 사자는 보이지 않는다. 기드온은 거기서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죽지 않았다 하여 '여호와 살롬'이라 말한다. 그 후 종을 데리고 바알의 제단을 파괴하고 아세라상을 찍어 버린다. 아침에 일어나 제단이 파괴된 것을 보고 기드온을 찾아 죽이려 한다. 이때 기드온의 아버지가 나와 막는다.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여 전쟁에 나갈 사람들을 모은다.


사사기 7장


기드온이 공격하기 위해 하롯 샘 곁에 진을 친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따르는 사람이 많다면 보내라 하신다 두려워 떠는 이만 이천 명이 돌아간다. 만 명만 남습니다. 이번에는 물가로 내려가 엎드려 먹는 자 외 손으로 물을 떠서 먹는 300명만 남기고 돌려보낸다. 기드온은 두려움에 빠져 전쟁을 시작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밤에 미디안 진영에 몰래 가게 하여 그들이 꿈을 꾸고 나눈 이야기를 듣게 한다. 결국 300명으로 전쟁이 시작된다. 하지만 전쟁은 300명만 한 게 아니다. 24절을 보면 기존에 돌아간 자들과 에브라임 지파 사람을 불러 함께 전쟁한다.


사사기 8장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을 찾아와 항의한다. 매우 교만한 자들이다. 기드온은 전쟁 중이니 논쟁할 수 없어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다 말하며 다독인다. 곧바로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추적한다. 요단 동편 속곳에 갔을 때 배가 고프니 떡을 달라 하지만 거절한다. 이들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기드온에게 살인을 당한다. 결국 더 힘을 내서 쫓아가 미디안을 완전히 쳐부순다. 전쟁에서 승리한 기드온은 타락한다. 아내를 많이 두고 첩도 둔다. 나이가 많아 죽자 아버지 요아스의 묘실에 들어간다.


사사기 9장


기드온이 죽자 그의 아들 중의 한 명인 아비멜렉이 어머니의 고향인 세겜으로 들어가 그들과 모의한다. 여룹바알(기드온)의 아들 70명을 섬기는 것이 편하냐 당신들의 피가 흐르는 나 혼자를 섬기는 것이 편하냐고 묻는다. 그는 세겜 사람들에게 자신이 당신들과 골육이라 말하고 그들을 유혹한다. 세겜 사람들은 바알브릿 신전에서 은 칠십 개를 꺼내 아비멜렉에게 주고 기드온의 아들들을 죽이게 한다. 아비멜렉은 세겜을 등에 업고 불량자들을 데리고 기드온의 아들을 모두 죽인다. 다행히 요담만 살아남는다. 요담은 도망가면서 사람들에게 아비멜렉의 무모하고 교만한 행동을 지적하면서 결국 너희(세겜)들도 아비멜렉에게서 나온 불로 화를 당할 것이라 말하고 도망간다. 그리고 삼 년 후에 하나님은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 그들이 싸우게 만든다. 세겜 사람과 아비멜렉이 서로 싸우게 된다. 아비멜렉은 세겜을 쳐들어가고, 세겜 사람들은 세겜 망대로 도망간다. 세겜 망대로 아비멜렉이 가까이 갔을 때 한 여성이 맷돌 윗짝을 던져 아비멜렉의 머리를 깨뜨린다. 요담의 저주대로 그들은 서로 죽여 자멸의 길을 간다.


사사기 10장


잇사갈 사람 도도의 손자 부아의 아들 돌라가 사사가 된다. 에브라임 산지 사밀에 거하며 사사로 23년 동안 활동하다 죽는다.(1-2절) 이후 길르앗 야일이 일어나 22년을 사사로 지낸다.(3절) 그는 아들 삼십 명이 있었고, 아들들을 나귀 삼십에 태워 성읍 삼십을 다스리게 한다. 이스라엘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자 이번에는 블레셋 사람들과 암몬의 손에 판다. 18년 동안 억압당한다. 시시 때대로 암몬이 쳐들어와 괴롭힌다. 신돈 사람들도 괴롭힌다. 다시 암몬 사람들이 쳐들어 오는데 이번에는 잠깐 싸우다 가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군대를 끌고 와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것처럼 쳐들어 왔다.


사사기 11장


이스라엘이 암몬으로 말미암아 부르짖자 하나님은 입다를 사사로 세운다. 입다는 길르앗의 아들인데 본처가 아닌 첩의 자식이었다. 본처의 아들들이 자라나 입다는 박해 하며 쫓아내 버린다. 입다는 돕 땅에서 산적처럼 지낸다. 그런데 암몬 사람들이 쳐들어오자 누구도 나서지 않아 입다를 찾아간다. 입다는 과거에 자신을 쫓아낸 이야기를 하며 만약 전쟁에서 이기면 내가 너희를 다스리게 하겠냐고 하자 그렇게 하기로 하고 전쟁에 나간다. 입다는 곧바로 공격하지 않고 사절을 암몬 군대에 보내 협상하며 왜 남의 땅에 쳐들어오냐고 따진다. 하지만 암몬 왕은 말을 듣지 않고 공격한다. 드디어 전쟁이 일어나고 입다는 암몬 군대를 완전히 멸절시켜 버린다. 하지만 입다는 전쟁을 시작할 때 하나님께 서원하기를 자신을 가장 먼저 환영하러 나온 이를 하나님께 드리고 한다. 안타깝게 입다는 가장 먼저 맞이하러 온 사람은 무남독녀였다.


사사기 12장


전쟁이 끝나자 갑자기 에브라임 사람들이 입다를 찾아와 따져 묻는다. 왜 우리에게 암몬 사람이 싸울 때 부르지 않았냐고 야단을 친다. 우리가 너와 네 집을 불사르겠다며 협박한다. 에브라임 지파는 자신들이 열두 지파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장자와 같다는 착각에 빠져 사는 자들이었다. 기드온 때는 그냥 넘어갔지만 길르앗 사람 입다는 기드온처럼 착하지 않았다. 입다는 그들에게 가서 우리가 싸울 때 너희를 불렀지만 오지 않아 우리 힘으로 싸워 겨우 이겼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협박하며 따져 묻느냐고 야단을 친다. 결국, 길르앗 사람과 에브라임 지파 간의 내전이 일어난다.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 지파를 미워했던 이유는 에브라임 지파가 길르앗 사람들에게 '너희들은 에브라임 지파에서 도망간 자들이다'라고 모욕했기 때문이었다. 에브라임 지파는 요단 동편에 자리한 길르앗 사람들을 강아지 무시했다. 여기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느낀 길르앗 사람들은 에브라임을 공격한다. 그들은 요단 나루터를 지키고 그곳을 건너는 사람들에게 쉽볼렛이라 말하게 하고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십볼렛이라 말하면 그를 잡아 죽였다. 그 수가 사만 이천 명이었다.


13-16장 삼손 스토리


13장부터 16장까지는 삼손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삼손이 과연 사사로 넣어야 하나 말아야 하는 논쟁이 있을 만큼 삼소는 기괴한 사람이다. 탄생도 불임의 여성으로 시작하고, 날 때부터 나실인으로 드려진 존재이다. 그 어떤 사사보다 방탕하고 음란하다. 하지만 하나님은 삼손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


사사기 13장


이스라엘 또 악을 행한다. 이번에는 전해 다른 방법으로 구원자를 세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블레셋에 넘겨주어 괴롭힘을 당한다. 단 지파의 소라 땅에 마노아가 있다. 그의 아내는 불임이다. 그의 아내가 일을 하다 하나님의 사자에게 임신할 것을 듣는다. 남편에게 이 말을 한다. 두 번째 하나님의 사자가 오자 남편을 데려와 사자를 대면한다. 마오나는 사자에게 이름을 묻자 '기묘자'라 답한다. 사자에게 제물을 붙이려 하자 지팡으로 제물을 대자 반석에서 불이 나와 태워 버린다. 동시에 사자도 사라진다. 그때서야 하나님을 봤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아내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죽이려 했다면 굳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 말하며 위로한다. 일 년 후 아들을 낳고 이름을 삼손이라 부른다.


사사기 14장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 블레셋 사람의 딸을 보고 자기 부모에게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한다. 반대하지만 삼손은 우겨서 결혼한다. 딤나로 가는 길에 포도원 앞에서 사자를 만나자 맨손으로 잡아 죽인다. 며칠 후에 다시 여인을 만나러 가는 길에 죽은 사자 안에 벌꿀이 있는 것을 보고 가져와 부모에게 드린다. 그러나 출처는 알리지 않는다. 결혼식 남자 들러리들에게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서 괴롭힌다. 알 길이 없자 블레셋 사람들이 딤나의 여인을 괴롭혀 답을 알아낸다. 결국 삼손이 패하고 아스글론에 내려가 그곳 사람 30인을 죽이고 노력하여 옷 30번을 갔다 준다.


사사기 15장


1-8절 삼손의 복수


얼마 후 삼손이 다시 딤나로 내려가 아내를 보려 한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삼손의 아내를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고 하며 동생을 준다고 한다. 화가 난 삼손은 여우 삼백 마리를 잡아 꼬리에 홰를 달고 밭에 불을 놓는다. 블레셋 사람들이 깜짝 놀라 장인의 사람들과 집을 모두 불태워 버린다. 자신의 장인과 집을 불태웠다는 이유는 삼손은 다시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고 에담 바위틈에 숨는다.


9-20절 라맛레히


에담 바위틈에 있는 삼손을 잡으러 블레셋 사람들이 유다 사람들을 겁박한다. 유다 사람들은 삼손을 찾아가 설득하여 줄로 묶어 데려오다. 따라가는 길에 나귀의 턱뼈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이고 그곳은 라맛 레히라 한다. 목말라죽을 지경이 되자 하나님은 한 곳에서 물이 솟아오르게 하여 삼손에게 마시게 한다. 삼손은 그 샘을 엔학고레라 한다.


사사기 16장


1-3절 삼손이 가사 성 문짝과 문설수 빗장을 빼 헤브론 산지로 가져간다.


가사에 내려가 한 기생과 지낸다.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잡으려고 포위하지만 밤에 일어나 가사의 성문짝과 문설주, 빗장을 때서 헤브론 산지까지 가져간다.


4-22절 들릴라와 삼손


이벤에는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를 사랑하여 그 여인과 지낸다. 블레셋 사람들이 들릴라를 협박하여 삼손의 힘의 비밀을 캐라고 한다. 두 번까지 속이지만 세 번째는 괴로워서 실토한다. 결국 세 번째 삼손은 자신의 머리가 밀려 힘을 상실한다. 결국 블레셋 사람들에게 붙잡혀 옥에 갇힌다.


23-31절 삼손의 죽음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붙잡은 것에 대해 기뻐하며 다곤에게 제사하며 삼손을 불러 조롱하려고 한다. 삼소는 하나님께 마지막으로 힘을 달라 기도하며 기둥을 무너뜨려 그곳에 온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죽음을 맞이한다.


사사기 후반분


17-21장은 사사기의 후반부에 속하지만 연대기적으로는 사사기 전반을 아우른다. 가나안에 들어온 목적을 상실하고 헛된 우상을 섬기고 첩을 거느린 레위 사람과 성적 폭력을 가하는 베냐민 지파의 모습을 그린다. 처참하게 무너진 이스라엘의 자멸적 상황을 보여준다.


사사기 17장


1-6절 에브라임 산지 미가의 집안


미가라는 사람이 어머니이 돈을 훔치고 다시 돌려준다. 저주한 돈을 어찌할 줄 몰라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어 섬긴다.


7-13절 레위인 미가의 가정 제사장이 되다.


유다에 살던 레위인이 우연히 미가의 집에 들어가 사연을 듣고 미가 집의 우상을 지키는 개인 제사장이 된다.


사사기 18장


1-6절 단 지파가 미가의 집에 머물다


정탐하러 온 단 지파 사람들이 미가의 집에 머물면서 유다의 말투를 듣고 레위인을 추궁하여 사정을 듣게 된다.


7-26절 단 지파가 라이스를 정탐한다.


라이스를 공격하러 가는 중에 미가의 집에 들러 우상들과 레위인을 데리고 가버린다. 미가가 따라가 달라고 하지만 위협하자 돌아간다.


27-31절 라이스를 공격하여 거주한다.


단 지파가 라이스를 공격하고 그곳에 거주해 살게 된다. 레위인의 정체가 드러난다. 그의 이름은 모세의 손자요 게르솜의 아들인 요나단이다. 그는 라이스에 거하는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된다.


사사기 19장


1-30절 레위인과 첩


에브라임에 살던 레위인에게 첩이 있다. 그 첩이 행음하고 아버지 집이 있는 베들레헴으로 돌아간다. 레위인은 첩을 찾으러 가고 머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베냐민 지파의 기브온에 머문다. 밤이 되자 기브온 청년들이 레위인을 욕보이려 한다. 레위인은 첩을 대신 내준다. 아침에 보니 첩이 죽은 것을 발견하고 열두 조각으로 나누어 알린다.


사사기 20장


1-11절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 모여 의논하다.


레위인 첩의 일로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 모여 의논한다. 이들은 베냐민 지파의 불량배들을 죽어야 한다고 의견을 모은다.


12-16절 베냐민 지파의 거절


사람들을 베냐민 지파에 보내여 악행을 저지른 젊은이들을 내놓으라고 말한다. 그들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베냐민 지파는 거절할 뿐 아니라 온 지파와 전쟁을 하기 위해 군사를 모은다.


17-48절


11지파와 베냐민 지파와 전쟁이 일어난다. 베냐민 지파는 왼손잡이들로 물매를 던지는 선수들이었다. 처음에는 베냐민이 이겼지만 하나님께 기도하여 결국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다. 베냐민 사람 육백 명은 광야로 도망을 치고 나머지는 대부분 죽임을 당해야 한다.


사사기 21장


베냐민 지파를 무찌른 이들은 베냐민 사람들에게 아내를 주지 말자는 섣부른 맹세를 한다. 하지만 이스라엘 12지파 중에 한 지파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몹시 슬퍼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맹세를 깰 수 없어 실로에서 열리는 명절에 여인들을 잡아가도록 계획을 짠다. 베냐민 지파에게 실로에서 춤추는 여인들을 잡아가도록 명령한다. 사사기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이 난다.



  •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행 21:25)


내 블로그 목록

추천 게시물

사무엘상 4장 주해와 강해

하나님의 임재는 인간의 욕망에 붙들리지 않습니다 사무엘상 4장은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앞세우고 블레셋과 싸웠으나 참혹하게 패배하는 사건을 기록합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죽고 언약궤는 빼앗기며, 엘리와 비느하스의 아내까지 죽음에 이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