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친 채로도 추격하되, 분노가 믿음을 삼키지 않게 하소서
- 매일성경 묵상 사사기 8:1-21
오늘도 저는 말씀 앞에 앉아 승리 이후의 기드온을 바라봅니다. 사사기 7장에서 그는 삼백 명으로 미디안 대군을 무너뜨렸지만, 8장에서는 전혀 다른 시험을 만납니다. 전쟁보다 어려운 관계의 갈등, 지친 몸으로 계속해야 하는 추격, 동족의 냉소와 거절, 그리고 마지막에는 복수와 분노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저는 이 본문을 통해 믿음의 사람도 승리 직후 무너질 수 있음을 배웁니다. 외부의 적을 이기는 것보다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 속 기드온의 지혜와 위험한 변화를 함께 살펴보며, 끝까지 하나님을 닮아 가는 믿음이 무엇인지 묵상하고자 합니다.
부드러운 대답은 전쟁보다 더 큰 갈등을 멈추게 했습니다 (삿 8:1-3)
본문은 전쟁터가 아니라 같은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의 갈등으로 시작합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따집니다.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찌 됨이냐.”
그들은 기드온을 심하게 책망합니다.
사사기 7장을 보면 기드온은 미디안 군대가 도망하기 시작한 뒤 에브라임 사람들을 불러 요단 나루를 차단하게 했습니다. 에브라임은 그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미디안의 두 방백 오렙과 스엡을 사로잡아 죽였습니다.
그런데도 마음이 상했습니다.
왜 처음부터 자신들을 부르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공동체 안에서 갈등이 생기는 이유가 꼭 악한 목적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합니다.
에브라임은 이스라엘의 적이 아닙니다.
같은 편입니다.
함께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승리를 거둔 직후 갈등이 생겼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광과 인정의 문제 때문입니다.
사람은 일을 하지 못해서만 섭섭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중요한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했다고 느낄 때도 마음이 상합니다.
교회 공동체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누가 더 많이 섬겼는가,
누구의 이름이 먼저 언급되었는가,
왜 나는 처음부터 의논하지 않았는가,
누구의 공이 더 큰가를 따지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일을 함께하고서도 서로 다투게 됩니다.
저는 이 본문 앞에서 제 안의 인정욕구를 살펴봅니다.
사역 자체보다 “내가 인정받고 있는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는가.
하나님의 나라가 잘되는 것보다 제 역할이 크게 보이는 것을 더 원하는 순간은 없는가.
에브라임의 문제는 단순히 성격이 거칠어서가 아니라 자기 위치에 대한 자존심이 상한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의 대응이 놀랍습니다.
그는 맞서지 않습니다.
“너희가 처음부터 어디 있었느냐.”
“내가 목숨 걸고 싸울 때 너희는 나중에 왔지 않느냐.”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사실 기드온에게도 할 말은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낮춥니다.
“내가 한 일이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그리고 에브라임의 포도 끝물 수확이 아비에셀의 포도 맏물 수확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당시 농경사회에서 이해하기 쉬운 비유입니다.
끝물 포도라도 양이 많으면 작은 포도원의 첫 수확보다 풍성할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에브라임이 붙잡은 오렙과 스엡을 높이 평가합니다.
“하나님이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으니 내가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가 한 것과 같겠느냐.”
이 말을 듣자 에브라임의 분노가 풀립니다.
저는 여기에서 잠언의 말씀을 떠올립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한다.”
기드온은 전쟁에서 나팔과 횃불을 사용했지만, 공동체의 갈등에서는 부드러운 말이 더 강력한 무기가 되었습니다.
‘분노’와 연결되는 히브리어 ‘루아흐’(רוּחַ)는 본래 영, 바람, 기운을 의미하며 문맥에 따라 격앙된 마음이나 노여움을 표현하는 데도 사용됩니다. 에브라임의 마음이 들끓고 있었지만 기드온의 겸손한 말이 그 기운을 가라앉혔습니다.
저는 이것이 지도자의 중요한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실관계에서 내가 옳음을 증명하는 것이 항상 최선은 아닙니다.
관계를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거짓을 진실이라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당한 요구를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도 지혜는 아닙니다.
그러나 자존심 때문에 반드시 이겨야 하는 논쟁은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에브라임에게 자신의 공을 설명하기보다 그들의 공을 인정했습니다.
저는 이런 태도가 얼마나 어려운지 압니다.
사람은 자기가 한 수고를 알아주기를 원합니다.
특히 실제로 고생한 사람이 무시당한다고 느끼면 더 억울합니다.
그때 상대의 기여를 먼저 인정하는 것은 상당한 자기 절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한마디가 공동체를 살릴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제 말의 목적을 돌아봅니다.
내 말이 상대를 이기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공동체를 살리기 위한 것인가.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권리를 끝까지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빌립보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본체이셨지만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고 말합니다.
십자가는 자기 권리를 포기한 가장 극적인 사건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자기 비움은 무기력한 굴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능동적인 순종입니다.
저는 그래서 갈등 속에서 무조건 참기만 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공동체를 깨뜨리는 선택도 복음적이지 않습니다.
기드온은 이 순간 적어도 그 지혜를 보여 줍니다.
자기 이름보다 이스라엘의 연합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저도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의 자존심이 상했을 때 먼저 인정하고 세워 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서로 경쟁하지 않겠습니다.
누가 더 큰 공을 세웠는지를 따지기보다 하나님께서 모두를 어떻게 사용하셨는지를 보겠습니다.
지쳤으나 계속 추격했습니다, 그러나 동족은 떡 한 조각도 주지 않았습니다 (삿 8:4-12)
4절은 짧지만 강한 문장입니다.
“기드온과 그를 따르는 삼백 명이 요단에 이르러 건너고 비록 피곤하나 추격하며.”
저는 이 말씀 가운데 “피곤하나 추격하며”라는 표현을 오래 묵상하게 됩니다.
그들은 이미 큰 전투를 치렀습니다.
밤새 움직였습니다.
미디안 진영을 혼란에 빠뜨렸고,
도망하는 군대를 추격했습니다.
그러니 지치는 것이 당연합니다.
믿음이 있다고 피곤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사명을 감당한다고 몸의 한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 점이 참 현실적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초인처럼 묘사하지 않습니다.
피곤합니다.
두려워합니다.
배고픕니다.
그런데도 계속 갑니다.
‘추격하다’를 뜻하는 ‘라다프’(רָדַף)는 뒤쫓다, 추적하다라는 뜻입니다. 기드온과 삼백 명은 이미 중요한 승리를 얻었지만 남은 미디안 왕 세바와 살문나를 끝까지 추격합니다.
저는 여기서 끈기를 배웁니다.
어떤 일은 한 번의 결단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죄와 싸우는 일도 그렇습니다.
오래된 습관은 한 번의 감동으로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관계를 회복하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사역도 처음 열정만으로는 지속하기 어렵습니다.
결국 필요한 것은 지친 상태에서도 다시 한 걸음을 내딛는 충성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조건 버텨라”는 정신론이 아닙니다.
기드온과 삼백 명은 실제로 배가 고팠습니다.
그래서 숙곳 사람들에게 떡을 요청합니다.
“나를 따르는 백성이 피곤하여서 그들에게 떡 덩이를 주라.”
저는 이 요청이 지나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전체를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숙곳 사람들에게도 미디안의 위협이 사라지는 것은 이익입니다.
그런데 숙곳의 방백들은 냉소적으로 대답합니다.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네 손 안에 있다는 것이냐 우리가 네 군대에게 떡을 주겠느냐.”
즉 아직 최종 승리가 확인되지 않았으니 기드온을 도울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에서 두려움과 계산을 봅니다.
숙곳은 요단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미디안의 보복을 두려워했을 수 있습니다.
만약 기드온이 패배한다면 세바와 살문나가 돌아와 자신들을 처벌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의 편인지 확실해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으려 한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현실적인 계산입니다.
그러나 그 계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브누엘 사람들도 똑같이 거절합니다.
저는 이 장면을 묵상하며 믿음에는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하는 요소가 있음을 생각합니다.
모든 결과가 확정된 뒤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은 믿음이라 부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승자가 분명해진 다음 편을 선택하는 것은 계산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면 결과가 완전히 보이지 않아도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은 떡을 거절했습니다.
떡 한 덩이는 작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 작은 행동이 그들이 어느 편에 서 있는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작은 섬김을 가볍게 여기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지친 사람에게 물 한 잔 주는 것,
격려 한마디를 건네는 것,
조용히 식사를 준비하는 것,
기도로 동역하는 것도 사역입니다.
모든 사람이 기드온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누군가는 떡을 주면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전쟁의 최전선만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지친 사람을 먹이는 일도 거룩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결단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래서 사역을 눈에 띄는 역할 중심으로만 평가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설교만 사역이 아닙니다.
기도도 사역이고,
식탁을 준비하는 것도 사역이며,
지친 사람을 쉬게 하는 것도 사역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의 반응은 점점 거칠어집니다.
그는 숙곳 사람들에게 승리하고 돌아오면 들가시와 찔레로 그들의 살을 찢겠다고 말합니다.
브누엘 사람들에게는 망대를 헐겠다고 선언합니다.
저는 여기에서 기드온의 마음에 변화가 시작되는 것을 느낍니다.
1-3절에서 에브라임의 거친 항의를 부드러운 대답으로 풀어냈던 사람과 같은 사람인가 싶습니다.
에브라임에게는 겸손했습니다.
숙곳과 브누엘에게는 위협합니다.
물론 숙곳과 브누엘의 행동은 분명 비겁했고 공동체적 책임을 저버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기드온의 말 속에는 개인적 분노가 섞여 있는 듯합니다.
이 점은 이후 본문에서 더 뚜렷해집니다.
저는 이 장면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명을 감당하다 지치면 마음이 거칠어질 수 있습니다.
몸이 피곤하면 영적인 분별력도 약해지기 쉽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싸웠는데 어느 순간 나를 무시한 사람에게 화를 내며 싸울 수 있습니다.
사명의 열심과 개인적 분노가 섞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목회와 사역에서도 매우 조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도움을 기대했는데 거절당하고,
수고가 인정받지 못하면 마음에 보복심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 순간 나는 여전히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내 상처를 갚는 일을 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지친 상태에서 중요한 판단을 할 때 더욱 조심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피곤함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피곤함을 핑계로 분노와 보복을 정당화해서는 안 됩니다.
기드온과 삼백 명은 계속 추격하여 세바와 살문나의 군대를 기습합니다.
적군은 십오만 명 가운데 살아남은 만 오천 명 정도였습니다.
여전히 기드온의 군대보다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미 승리의 길을 여셨고, 미디안 진영은 무너집니다.
세바와 살문나도 붙잡힙니다.
저는 여기서 다시 “피곤하나 추격하며”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끝까지 간 사람이 열매를 봅니다.
하지만 그 열매를 보는 과정에서 마음까지 잘 지켜야 합니다.
사역을 완수하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마음으로 완수하는지도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제 손의 결과뿐 아니라 제 마음의 방향도 보십니다.
승리가 복수로 변할 때, 기드온의 마음은 위험한 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삿 8:13-21)
기드온은 승리한 뒤 돌아옵니다.
그리고 숙곳의 한 소년을 붙잡아 성읍의 방백과 장로 칠십칠 명의 이름을 알아냅니다.
그는 숙곳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너희가 전에 나를 희롱하여 이르기를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네 손에 있기에 우리가 네 피곤한 사람들에게 떡을 주겠느냐 하였도다.”
그리고 실제로 장로들을 들가시와 찔레로 징계합니다.
브누엘의 망대도 헐고 성읍 사람들을 죽입니다.
저는 이 장면을 읽으면서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숙곳과 브누엘이 잘못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기드온의 대응은 단순한 공적 징계와 개인적 보복의 경계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특히 “너희가 나를 희롱하였다”는 그의 표현에서 개인적인 상처가 강조됩니다.
처음 전쟁의 핵심은 하나님의 백성을 미디안의 압제에서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기드온의 관심은 자신을 무시한 사람들에게 돌아갑니다.
저는 여기서 승리 이후의 위험을 봅니다.
큰 실패 다음에도 사람이 무너질 수 있지만 큰 성공 다음에도 무너질 수 있습니다.
성공하면 힘이 생깁니다.
영향력도 커집니다.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하는가가 다음 시험입니다.
기드온이 포도주 틀에 숨어 있을 때에는 다른 사람을 처벌할 힘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있습니다.
그리고 그 힘이 복수의 수단으로 사용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목회적으로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약할 때의 신앙만큼 강해진 뒤의 신앙이 중요합니다.
지위가 낮을 때 겸손한 것은 상대적으로 쉽습니다.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을 때는 권력을 남용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내 말을 듣기 시작하고,
결정을 내릴 권한이 생기며,
누군가를 평가할 수 있는 위치에 서면 그때 비로소 제 마음의 깊은 모습이 드러납니다.
저는 힘을 가졌을 때 어떻게 사용하는 사람인가.
나를 반대한 사람을 누르는 데 사용하는가.
아니면 약한 사람을 살리는 데 사용하는가.
이 질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구약의 사사들에게는 당시의 언약적·정치적 상황 속에서 심판을 집행하는 역할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기준으로 모든 행위를 단순하게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사기 자체가 기드온을 완벽한 영웅으로 그리지 않는다는 사실도 분명합니다.
앞으로 갈수록 그의 모습에는 어두운 면이 더욱 나타납니다.
사사기는 인간 사사의 한계를 보여 줌으로써 더 나은 왕, 더 완전한 구원자를 기다리게 합니다.
17절 이후 기드온은 세바와 살문나를 심문합니다.
그가 다볼에서 죽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느냐고 묻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답합니다.
“그들이 너와 같아서 하나같이 왕자들의 모습과 같더라.”
그러자 기드온은 그 사람들이 자기 형제들이었다고 밝힙니다.
“그들은 내 형제들이며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니라.”
여기서 전쟁은 더욱 개인적인 복수의 성격을 띠기 시작합니다.
세바와 살문나는 단순한 이스라엘의 적이 아니라 기드온의 형제들을 죽인 사람들입니다.
기드온은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며 형제들을 살렸다면 자신도 그들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 맏아들 여델에게 그들을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저는 이 장면이 매우 불편합니다.
여델은 아직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본문은 그가 두려워 칼을 빼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기드온의 복수가 다음 세대에게까지 넘겨질 위험을 봅니다.
자기 상처를 자녀에게 물려주는 일입니다.
자신이 받은 모욕과 분노를 자녀에게 대신 갚도록 요구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어떤 사람을 미워하면 자녀에게도 그 사람을 미워하도록 가르칩니다.
가정의 오랜 갈등과 원한이 다음 세대로 이어집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전 세대의 감정과 파벌이 다음 세대에 전달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끊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은 상처를 상속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상속하게 합니다.
분노를 다음 세대에 넘기는 것이 아니라 용서의 길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세바와 살문나는 오히려 기드온에게 직접 자신들을 죽이라고 말합니다.
“네가 일어나 우리를 치라 사람이 어떠하면 그의 힘도 그러하니라.”
고대 사회에서는 어린아이에게 죽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들은 기드온 자신의 손에 죽기를 요구합니다.
기드온은 결국 그들을 죽이고 낙타 목에 있던 초승달 장식을 취합니다.
이 장면에서 저는 사사기 서사가 미묘하게 변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7장에서 삼백 명의 전쟁은 명백히 하나님의 승리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자랑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8장으로 들어오면서 기드온 개인의 이름과 분노와 전리품이 점점 더 두드러집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셨던 사람이 어느 순간 자기 힘을 느끼기 시작할 위험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인간 지도자의 한계입니다.
기드온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도 그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러나 완전한 사람은 아닙니다.
믿음의 영웅이라고 해서 그의 모든 행동이 본받아야 할 모범은 아닙니다.
성경은 사람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드온을 보며 제 자신도 경계합니다.
어제 하나님의 도구였다고 오늘도 자동으로 바른 것은 아닙니다.
과거의 은혜가 현재의 분별력을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매일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드온은 자신을 모욕한 사람들에게 보복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기드온은 형제들의 죽음에 대한 피의 복수를 실행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배반하고 죽이는 원수를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기드온은 승리한 뒤 힘을 행사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권세를 가지셨지만 그 권세를 섬김을 위해 사용하셨습니다.
이 차이가 매우 큽니다.
사사들은 부분적인 구원자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구원자이십니다.
사사들은 자신도 죄와 분노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십니다.
그래서 인간 지도자가 아무리 훌륭해도 궁극적으로 우리의 소망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저는 십자가에서 참된 왕의 모습을 봅니다.
세상의 왕은 힘을 가지고 원수를 굴복시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내어 주어 원수를 화목하게 만드십니다.
바울은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새 언약의 길입니다.
그래서 오늘 그리스도인은 기드온의 복수 방식을 따라 살아갈 수 없습니다.
신약은 분명히 말합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최종적인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악을 선으로 이겨야 합니다.
이것은 불의를 방치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정의는 필요합니다.
범죄에는 법적 책임이 따라야 합니다.
교회 안의 악도 적절히 다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정의와 개인적 복수는 다릅니다.
정의는 질서를 회복하려 하지만 복수는 상대가 고통받는 것을 원합니다.
저는 이 차이를 제 마음에서 분별하고 싶습니다.
누군가 잘못했을 때 제가 원하는 것은 정의인가, 아니면 그 사람이 무너지는 모습인가.
이 질문이 제 분노의 성격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기드온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만으로도 한 가지 분명합니다.
전쟁에서 이기는 것보다 자기 마음을 끝까지 지키는 일이 더 어렵습니다.
저는 외부의 미디안만 두려워하지 않고 내 안의 교만과 분노도 경계하겠습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누구도 자기 의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저 역시 원수였지만 은혜로 용서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무리
사사기 8장 1절부터 21절을 묵상하며 저는 기드온 안에서 지혜와 위험을 동시에 봅니다. 에브라임의 분노는 부드러운 말로 풀었지만, 숙곳과 브누엘의 거절 앞에서는 분노가 보복으로 기울었고, 세바와 살문나를 향해서는 개인적인 복수까지 더해졌습니다. 오늘 저는 “피곤하나 추격하는” 충성은 배우되, 피곤함과 상처가 제 마음을 거칠게 만들지 않도록 경계하겠습니다. 성공과 권한이 생길수록 더 낮아지고, 판단은 정의롭게 하되 복수는 하나님께 맡기겠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을 죽이는 자까지 용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사람을 이기는 승리보다 제 마음이 복음 안에 머무는 승리를 더 소중히 여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