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사사기 6:25-40

먼저 무너뜨려야 할 것은 미디안이 아니라 내 안의 바알입니다

  • 매일성경 묵상 사사기 6:25-40

오늘도 저는 말씀 앞에 앉아 하나님의 구원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를 묵상합니다. 기드온은 미디안 군대를 무너뜨리기 전에 자기 아버지 집에 있는 바알의 제단부터 헐어야 했습니다. 밖의 적보다 안의 우상을 먼저 처리하라는 명령입니다. 그 순종 뒤에 미디안의 대군이 몰려오고,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을 감싸며 새로운 싸움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여전히 두려워 양털 표징을 구합니다. 저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이 두려움 많은 사람을 단번에 완벽하게 만들기보다 순종의 자리에서 조금씩 믿음의 사람으로 빚으신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제가 먼저 허물어야 할 제단은 무엇인지, 그리고 불완전한 믿음을 붙드시며 끝까지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미디안과 싸우기 전에 네 아버지 집의 바알 제단부터 헐라 (삿 6:25-32)

기드온이 “여호와 샬롬”이라는 제단을 쌓은 바로 그날 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첫 번째 사명을 주십니다.

그런데 명령의 방향이 뜻밖입니다.

기드온은 미디안과 싸워야 할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먼저 군사를 모으라고 하시거나 무기를 준비하라고 하실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목하신 첫 번째 전쟁터는 미디안의 진영이 아니라 기드온의 집입니다.

“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며 그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저는 이 순서가 오늘 본문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외부의 적을 무너뜨리기 전에 내부의 우상을 무너뜨리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미디안 때문에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농사를 지어도 빼앗겼고, 가축도 약탈당했으며, 산과 굴에 숨어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는 근본 문제는 미디안보다 더 깊은 곳에 있었습니다.

바알입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떠나 가나안의 신들을 섬겼기 때문에 미디안의 압제 아래 들어갔습니다. 그러므로 미디안만 몰아내고 바알을 그대로 둔다면 문제는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압제자는 바뀌어도 영적인 종살이는 계속될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제 기도의 방향을 돌아봅니다.

저는 외부 문제가 해결되기를 쉽게 기도합니다.

“주님, 이 사람을 바꾸어 주십시오.”

“경제적인 어려움을 없애 주십시오.”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제게 먼저 물으실 수 있습니다.

“그 문제보다 먼저 네 안에서 허물어야 할 것이 무엇이냐?”

밖에 있는 미디안보다 안에 있는 바알이 더 근본적인 문제일 수 있습니다.

‘바알’(בַּעַל)은 본래 ‘주인’, ‘소유자’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가나안 종교에서는 비와 풍요, 농경의 생산력을 관장한다고 여겨진 신을 가리켰습니다.

이스라엘이 바알을 섬겼다는 것은 단순히 다른 종교 행사에 참여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누가 내 삶을 책임지는 주인인가의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이스라엘은 풍년과 안전을 위해 바알을 의지했습니다.

저는 그래서 오늘의 바알이 무엇인지 생각합니다.

반드시 신상이 있어야 우상인 것은 아닙니다.

내가 가장 깊이 의지하는 것,

그것을 잃으면 삶 전체가 무너질 것처럼 느끼는 것,

하나님의 뜻보다 더 높은 자리에 놓는 것이 제게 바알이 될 수 있습니다.

돈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인정일 수도 있습니다.

자녀의 성공,

건강,

명예,

연애와 관계,

심지어 목회적인 성공도 바알이 될 수 있습니다.

좋은 것 자체가 우상은 아닙니다. 그러나 좋은 것이 하나님보다 커질 때 문제가 시작됩니다.

아세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세라는 가나안 종교에서 풍요와 다산과 연결된 여신 숭배와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알의 제단만 남겨 두고 종교를 조금 정리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헐라.”

“찍으라.”

죄와 우상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분명합니다.

저는 이 단호함이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죄를 제거하기보다 관리하고 싶어 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통제할 수 있으니 두어도 되겠지.”

그러나 우상은 관리 대상이 아닙니다.

무너뜨려야 할 대상입니다.

기드온은 바알 제단을 헐고 그 자리에 하나님을 위한 제단을 쌓아야 했습니다.

이것도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바알을 없애라”고만 하지 않으십니다.

바알의 제단이 있던 자리에 여호와의 제단을 세우라고 하십니다.

신앙은 나쁜 것을 비우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탐욕을 내려놓는다면 하나님을 공급자로 신뢰하는 믿음이 그 자리를 채워야 합니다.

사람의 인정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다면 하나님께 사랑받는 정체성이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합니다.

잘못된 관계를 끊었다면 말씀과 건강한 공동체가 마음을 채워야 합니다.

우상만 제거하고 마음을 비워 두면 다른 우상이 다시 들어올 수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빈 집의 비유도 떠올립니다. 더러운 귀신이 나간 뒤 집이 비어 있으면 더 악한 것들이 들어올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기독교적 변화는 단순한 금욕이 아닙니다.

더 큰 사랑으로 작은 사랑을 밀어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더 귀해지면서 우상이 힘을 잃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아버지의 수소와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사용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찍어낸 아세라 나무를 땔감 삼아 번제를 드리도록 명령하십니다.

이 장면에는 강한 상징성이 있습니다.

한때 우상을 섬기던 나무가 이제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의 불쏘시개가 됩니다.

우상의 권세가 완전히 뒤집힙니다.

저는 이것이 회개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죄와 관련된 것을 조금 개조하여 계속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주권 자체가 바뀌는 것입니다.

제가 죄를 위해 사용하던 시간과 재능과 물질도 하나님께 돌려드릴 수 있습니다.

과거의 실패조차 은혜 안에서 새로운 사명의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상처가 다른 상처 입은 사람을 이해하는 통로가 되고,

실패가 겸손을 배우는 자리가 되며,

탐욕스럽게 사용했던 물질이 나눔의 도구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복음은 과거를 지워 없애는 것만이 아니라 과거까지도 새로운 방향으로 돌려놓습니다.

기드온은 종 열 명을 데리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합니다.

그러나 낮에는 하지 못합니다.

“아버지의 가족과 그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므로 이 일을 감히 낮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하니라.”

저는 이 기록이 참 솔직해서 좋습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 갑자기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밤에 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결국 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것을 불완전한 순종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완벽하게 담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두려움 때문에 명령을 포기하지도 않았습니다.

성경의 믿음은 두려움을 전혀 느끼지 않는 강철 같은 정신이 아닙니다.

두렵지만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저도 어떤 순종 앞에서는 주저할 수 있습니다.

사과해야 하지만 두렵습니다.

잘못된 관계를 정리해야 하지만 외로울까 두렵습니다.

정직하게 말해야 하지만 손해가 두렵습니다.

신앙적인 원칙을 지키면 사람을 잃을까 걱정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저는 “두려움이 없어질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밤에라도 순종했습니다.

믿음이 완전해진 뒤 순종한 것이 아니라 순종하면서 믿음이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성읍 사람들은 바알의 제단이 무너지고 아세라가 찍혀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범인을 찾아냅니다.

기드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의 아버지 요아스에게 요구합니다.

“네 아들을 끌어내라 그는 당연히 죽을지니.”

저는 이 장면에서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얼마나 뒤집혀 있었는지를 봅니다.

바알을 섬기는 일이 정상이고,

바알의 제단을 허무는 일이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가 되었습니다.

언약 백성이 우상을 보호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사람을 죽이려 합니다.

죄가 오래 지속되면 기준 자체가 뒤집힙니다.

성경이 죄라고 하는 것을 정상이라고 말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을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할 수 있습니다.

저는 시대의 분위기가 언제나 진리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수가 동의한다고 옳은 것은 아닙니다.

오랫동안 유지된 관습이라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인은 세상의 모든 문화를 적대시할 필요는 없지만, 말씀을 통해 끊임없이 분별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기드온을 보호합니다.

아버지 요아스입니다.

그의 집에 바알 제단이 있었으니 그도 우상숭배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성읍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다투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참으로 날카로운 질문입니다.

신이라면 자기 자신을 스스로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제단을 무너뜨렸다는 이유로 사람이 그 신을 대신해 복수해야 한다면 그 신은 얼마나 무력합니까?

요아스는 말합니다.

“그가 신일진대 그의 제단을 파괴하였은즉 그가 자신을 위해 다툴 것이니라.”

그래서 기드온은 ‘여룹바알’이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여룹바알’(יְרֻבַּעַל)은 “바알이 그와 다툴지어다”, 혹은 “바알이 스스로 변호하게 하라”는 의미를 담습니다.

저는 이 이름이 기드온의 새로운 정체성을 보여 준다고 느낍니다.

포도주 틀에 숨어 있던 사람이 이제 바알과 대립하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하지만 그 변화의 시작은 대군과 싸운 데 있지 않았습니다.

자기 집의 제단을 무너뜨린 데 있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오늘 이렇게 묻습니다.

“제가 미디안을 이기기를 원하면서 바알은 그대로 두고 있지 않은가?”

큰 사명을 원하면서 작은 우상은 붙잡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의 능력을 원하면서 하나님과 경쟁하는 욕망을 보호하고 있지는 않은가.

기드온에게 첫 전쟁은 집 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제 영적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을 바꾸기 전에 제 마음의 제단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을 감싸자 숨어 있던 사람이 나팔을 불었습니다 (삿 6:33-35)

33절에서 외부의 위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함께 모여 요단을 건너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칩니다.

이제 기드온이 실제로 맞서야 할 적들이 나타났습니다.

그 수는 많고 세력은 강합니다.

앞선 5절에서는 미디안 사람과 낙타의 수가 메뚜기 떼처럼 셀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오늘 본문의 결정적인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히브리어 원문은 더욱 생생합니다. ‘입다’, ‘옷을 입히다’를 뜻하는 ‘라바쉬’(לָבַשׁ)가 사용됩니다. 문자적인 이미지는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을 옷 입으셨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표현이 참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단순히 기드온에게 조금의 용기가 더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를 감싸십니다.

이제 기드온의 싸움은 기드온 개인의 능력만으로 감당하는 싸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자신의 도구로 입으시는 것과 같은 장면입니다.

조금 전까지 기드온은 밤에 바알 제단을 헐었습니다.

사람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이 이제 나팔을 붑니다.

숨는 사람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나팔’을 뜻하는 ‘쇼파르’(שׁוֹפָר)는 전쟁의 소집이나 중요한 선언에 사용되던 도구입니다.

포도주 틀에서 조용히 밀을 타작하던 사람이 이제 공개적으로 나팔을 붑니다.

무엇이 바뀌었습니까?

적의 숫자가 줄어든 것이 아닙니다.

기드온이 갑자기 군사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여호와의 영이 임하셨습니다.

저는 여기서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의욕만으로 오래 사역하기 어렵습니다.

성격이 강하다고 영적 싸움에서 이기는 것도 아닙니다.

많이 공부하고 준비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목회도,

설교도,

죄와의 싸움도,

사랑과 용서도 성령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기드온의 이야기는 인간의 자신감을 높이는 성공담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붙들린 약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 점에서 신약의 오순절을 떠올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두려움 속에 문을 닫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시자 그들이 밖으로 나가 복음을 선포합니다.

사람 자체가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기보다 하나님의 영이 그들에게 능력을 주셨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성령께서 특정한 사명을 위해 사사들에게 임하시는 모습이 두드러집니다. 새 언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에게 성령이 내주하십니다.

이것은 엄청난 은혜입니다.

저는 기드온처럼 특별한 순간에만 하나님의 영이 임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께서 제 안에 거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권면합니다.

제 문제는 성령이 전혀 계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보다 제 욕망과 두려움을 따르는 데 있을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나팔을 불고 먼저 아비에셀 족속을 부릅니다.

그리고 므낫세 전체에 사자를 보내며, 아셀과 스불론과 납달리에도 사람을 보내 군사를 소집합니다.

이 장면도 주목할 만합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비에셀 사람들은 기드온을 죽일 수 있는 위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기드온을 따라 나섭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순종을 통해 공동체의 방향을 바꾸고 계십니다.

처음에는 기드온 한 사람이 바알의 제단을 무너뜨렸습니다.

이제 여러 지파가 전쟁에 동참합니다.

저는 이것이 순종의 영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의 순종이 언제나 큰 결과를 가져온다고 공식화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순종은 결코 사소하지 않습니다.

가정에서 한 사람이 기도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먼저 사과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정직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교회에서 이름 없이 섬길 수 있습니다.

그 작은 순종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용하실지는 제가 다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열매를 계산하기 전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바알 제단을 헐 때 미디안 전쟁이 어떻게 전개될지 알지 못했습니다.

다음 명령에 순종했을 뿐입니다.

저도 모든 미래를 알아야 오늘 순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신 한 가지를 행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 순종을 통해 하나님께서 다음 길을 보여 주실 수 있습니다.

저는 동시에 기드온의 변화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성령이 임했고,

나팔을 불었으며,

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면에서 기드온은 다시 표징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한 순간에는 담대하고 다음 순간에는 흔들립니다.

그래서 성령의 충만은 인간이 다시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기계적 상태가 아닙니다.

믿음은 계속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관계입니다.

저는 어제 은혜받았다는 이유로 오늘 하나님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오늘도 성령을 의지해야 합니다.

양털의 표징을 구하는 기드온, 연약한 믿음을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입니다 (삿 6:36-40)

기드온은 군사들이 모이는 것을 보고도 다시 하나님께 확인을 요청합니다.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하시거든.”

이 문장에서 저는 기드온의 마음속 긴장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

“네가 미디안을 한 사람처럼 치게 될 것이다.”

여호와의 영도 임했습니다.

군사들도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도 기드온은 확신이 흔들립니다.

그래서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고 표징을 구합니다.

첫 번째는 양털에만 이슬이 있고 땅은 마르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다음 날 그렇게 됩니다.

기드온은 양털을 짜서 물 한 그릇을 채울 만큼의 이슬을 얻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충분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요청합니다.

이번에는 반대로 양털만 마르고 온 땅에 이슬이 있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다시 그대로 이루십니다.

저는 이 본문을 읽을 때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기드온의 양털” 방식을 사용하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이 일이 주님의 뜻이면 오늘 특정한 일이 일어나게 해주십시오.”

“내일 누군가 이 말을 하면 하나님의 뜻으로 알겠습니다.”

하지만 기드온의 행동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반적인 모범으로 삼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드온은 이미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있던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문제는 계시의 부족이 아니라 기드온의 확신 부족이었습니다.

따라서 양털 사건의 중심은 “우리도 표징을 만들어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자”가 아니라, 두려워하는 종의 약한 믿음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드온 자신도 자신이 지나친 요구를 하고 있음을 압니다.

“주여 내게 노하지 마옵소서.”

그는 두 번째 표징을 요구하면서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저는 여기서 기드온의 믿음을 이상화하지 않으면서도 그를 함부로 정죄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앞에는 메뚜기 떼처럼 많은 군대가 있습니다.

전쟁은 곧 시작됩니다.

자기의 결정 때문에 수많은 사람의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자신을 통해 일하시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책망하며 버리지 않으십니다.

양털의 표징을 허락하십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의 인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마다 믿음이 자라는 속도를 아십니다.

기드온은 아브라함이 아닙니다.

모세도 아닙니다.

각 사람을 동일한 방식으로 다루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그 연약함을 그대로 방치하시지도 않습니다.

기드온은 앞으로 더 큰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7장에서는 하나님께서 기드온의 군사를 오히려 줄이십니다.

삼만 이천 명이던 군사를 최종적으로 삼백 명까지 줄이십니다.

왜입니까?

기드온이 양털을 통해 하나님을 확신하려 했다면 이제는 눈에 보이는 군사의 숫자마저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단계적으로 훈련하십니다.

저는 제 신앙도 그렇게 성장해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에는 보이는 증거를 많이 원했습니다.

기도하면 즉시 응답되어야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상황이 잘 풀려야 하나님의 사랑을 믿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자라면서 하나님은 저를 더 깊은 자리로 부르십니다.

아무 표징이 없어도 말씀 때문에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기도한 대로 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밤이 길어도 아침이 온다는 약속을 붙드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마에게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증거 없는 맹목적인 믿음은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에는 역사적 복음의 중심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러나 그 복음을 믿은 뒤 매 순간 새로운 초자연적 표징을 받아야만 순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이 있다면 말씀 자체가 충분한 근거가 됩니다.

저는 그래서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임의적인 표징보다 성경의 분명한 원칙을 먼저 살피고 싶습니다.

이 선택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가.

사랑과 거룩과 정직에 합당한가.

지혜로운 공동체의 조언은 어떠한가.

하나님께서 주신 책임과 형편은 무엇인가.

이런 것을 충분히 살핀 뒤 기도로 결정해야 합니다.

우연한 사건 하나를 하나님의 확정적인 음성처럼 사용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이 본문은 두려움 많은 저에게 큰 위로를 줍니다.

기드온의 믿음이 흔들렸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때때로 “이만큼 믿었는데 왜 아직도 의심하지?”라며 자신에게 실망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저보다 제 연약함을 더 잘 아십니다.

중요한 것은 의심이 전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심을 품고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미디안에게 표징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그의 두려움은 여전히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습니다.

저도 불안할 때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고 싶습니다.

“주님, 제가 두렵습니다.”

“제 믿음이 약합니다.”

정직하게 말하겠습니다.

그러나 결국 신앙의 근거를 제 감정에 두지는 않겠습니다.

그리스도께 두겠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하신다는 가장 확실한 표징입니다.

바울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고 말합니다.

저는 계속 새로운 양털을 요구하기 전에 십자가를 바라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십니까?”

십자가가 대답합니다.

“그렇다.”

“죄와 죽음을 정말 이기실 수 있습니까?”

빈 무덤이 대답합니다.

“그렇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보다 더 큰 표징은 없습니다.

그리고 새 언약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시고 말씀을 깨닫게 하며 순종하도록 도우십니다.

기드온은 양털 위의 이슬로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했지만, 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성령의 내주 안에서 더 확실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흔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흔들리는 순간마다 표징을 찾아 세상을 헤매기보다 복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십자가를 기억하고,

말씀을 다시 읽으며,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겠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순종하겠습니다.

마무리

사사기 6장 25절부터 40절을 묵상하며 저는 하나님의 구원이 밖의 미디안을 치는 일보다 안의 바알을 무너뜨리는 일에서 먼저 시작된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오늘 저는 큰 문제의 해결만 구하기 전에 제 마음에서 하나님과 경쟁하는 제단이 무엇인지 살피겠습니다. 두려움이 있어도 기드온처럼 말씀에 순종하고, 제 힘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겠습니다. 또한 끊임없는 표징보다 이미 주어진 십자가와 부활을 더 확실한 믿음의 근거로 붙들겠습니다. 제 믿음이 약할 때에도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작은 순종에서 시작하여 더 깊은 믿음으로 나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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