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사사기 3:1-11

시험의 땅에서 다시 하나님을 배우다

  • 매일성경 묵상 사사기 3:1-11

오늘도 저는 말씀 앞에 앉아 제 삶을 비추어 봅니다. 사사기 3장 1절부터 11절에는 이스라엘이 왜 가나안 족속들 가운데 남겨졌는지, 그 시험 속에서 어떻게 우상숭배에 빠졌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옷니엘을 세워 다시 구원하시는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본문에서 시험은 단지 나를 힘들게 하는 사건이 아니라 내 믿음의 실체를 드러내는 자리임을 배웁니다. 동시에 실패한 백성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자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긍휼도 발견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제 안에 남아 있는 타협과 우상을 살펴보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순종의 길을 다시 선택하고 싶습니다.

남겨진 민족들은 이스라엘의 믿음을 시험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삿 3:1-4)

사사기 3장은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여러 민족들을 왜 남겨 두셨는지를 설명하면서 시작합니다. 본문은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보여 줍니다. 첫째는 가나안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이스라엘 세대에게 전쟁을 가르치기 위함이었고, 둘째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에 순종하는지를 시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먼저 ‘남겨진 것’의 의미를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정복을 완전히 이루지 못했습니다. 사사기 1장에서 이미 여러 지파가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지 못하거나, 쫓아낼 수 있었음에도 노역을 시키며 남겨 두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인간의 불순종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사기 3장에서는 그 남겨진 민족들이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시험의 도구가 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긴장입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이스라엘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실패 때문에 자신의 목적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실패의 결과까지도 백성을 훈련하고 시험하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저는 여기서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깊은지를 생각합니다.

저는 제 삶의 실패를 돌아보며 종종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그때 그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더 순종했더라면.”

후회되는 일이 있습니다.

분명 제 책임으로 일어난 결과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일하실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제 잘못을 선이라고 부르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나 제 실패보다 크신 분입니다.

인간의 실수도, 죄도, 약함도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궁극적으로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저는 이 사실에서 위로를 얻습니다.

회개해야 할 것은 회개해야 합니다.

책임져야 할 것은 책임져야 합니다.

하지만 과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실 수 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남겨 둔 민족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블레셋의 다섯 군주, 모든 가나안 족속, 시돈 족속, 바알 헤르몬 산에서부터 하맛 어귀까지 레바논 산에 거주하는 히위 족속입니다.

저는 이런 지명과 민족의 목록을 읽을 때 그냥 지나가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 목록은 실제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이 마주해야 했던 현실적인 적들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의 시험은 관념적인 시험이 아니었습니다.

실제 힘을 가진 민족들이 주변에 있었습니다.

실제 전쟁이 있었고, 실제 문화적 압력이 있었으며, 실제 종교적 유혹이 있었습니다.

믿음은 언제나 현실 속에서 시험받습니다.

저 역시 추상적으로는 얼마든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돈이 걸리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인정이 걸리면 마음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관계가 깨질 위험이 생기면 진리를 타협하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건강이 무너지거나 계획이 틀어지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믿음은 실제 상황 속에서 드러납니다.

그래서 시험은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시험은 제 믿음을 드러냅니다.

본문 1절과 4절에 반복되는 ‘시험’이라는 개념은 히브리어 ‘나사’(נָסָה)와 연결됩니다. 이 말은 시험하다, 검증하다, 어떤 상태를 드러내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행동할지 몰라서 시험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시험을 통해 그들의 마음이 드러납니다.

무엇을 사랑하는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누구의 말을 따르는지,

하나님의 언약을 실제로 신뢰하는지가 드러납니다.

저는 시험받을 때 제 안에서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나타나는 경험을 합니다.

평소에는 제가 인내심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짜증이 올라옵니다.

평소에는 돈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불안해지면 온 마음이 돈에 붙잡힙니다.

평소에는 사람들의 평가에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나를 비판하면 며칠 동안 그 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시험은 제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만났을 때 저는 단순히 “이 문제를 빨리 없애 주세요”라고만 기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고통이 사라지기를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기도를 더 해야 합니다.

“주님, 이 시험을 통해 제 마음을 보여 주소서.”

“제가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지 드러내 주소서.”

“제가 어디에서 약한지 보게 하소서.”

저는 이 기도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제 모습이 제가 기대했던 모습과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은혜는 진실을 피하지 않습니다.

진실을 보게 하고, 그 진실을 십자가로 가져가게 합니다.

본문은 또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 전쟁을 가르치기 위해 이 민족들을 남겨 두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저는 ‘전쟁을 배운다’는 말이 단순히 군사 기술을 습득한다는 뜻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문자적으로는 실제 가나안 전쟁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전쟁의 배후에는 더 깊은 신앙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힘으로 땅을 차지한 민족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백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을 배운다는 것은 결국 자기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전쟁이 없다면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저는 제 삶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모든 일이 평탄할 때는 제가 꽤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제가 계획을 잘 세웠고, 제가 지혜롭게 선택했기 때문에 일이 잘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비로소 제 한계를 봅니다.

그때 기도하게 됩니다.

그때 말씀을 붙들게 됩니다.

그때 제가 얼마나 연약한 사람인지 인정하게 됩니다.

이것이 고난의 역설입니다.

고난 자체가 선한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선한 일을 이루십니다.

바울이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진다고 고백한 것도 같은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시험이 없는 삶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시험을 통해 저를 성숙하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날 때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시험 자체가 즐겁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오해하지 않으려 합니다.

고난당하는 사람에게 쉽게 “감사하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고통에는 눈물이 필요합니다.

위로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다는 소망은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사사기 3장은 이스라엘의 시험이 말씀에 순종하는지를 확인하는 시험이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결국 시험의 핵심은 순종입니다.

‘순종하다’와 연결되는 히브리적 사고에서 ‘듣다’는 매우 중요합니다. ‘샤마’(שָׁמַע)는 듣는 것과 순종하는 것을 함께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은 단순히 귀로 소리를 들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저는 말씀을 많이 듣습니다.

성경을 읽고, 설교하고, 신학적인 내용을 공부합니다.

하지만 말씀을 많이 안다고 해서 자동으로 순종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을 많이 아는 사람이 더 큰 책임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알고도 하지 않은 것”이 많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제게 묻습니다.

“나는 말씀을 알고 있는가, 아니면 말씀을 따르고 있는가?”

이 두 질문은 다릅니다.

용서하라는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용서하는가는 다른 문제입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는가는 다른 문제입니다.

정직해야 한다는 말씀을 압니다.

하지만 손해가 예상될 때도 정직한가는 다른 문제입니다.

시험은 그 차이를 보여 줍니다.

본문 속 이스라엘이 전쟁을 배우고 시험을 받은 것처럼 저 역시 매일 작은 영적 전쟁을 겪습니다.

신약은 그리스도인의 싸움이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죄와 거짓과 사탄의 유혹을 향한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정복을 오늘 문자적으로 반복하는 식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새 언약의 백성은 사람을 정복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러나 죄에 대해서는 단호해야 합니다.

제 안의 탐욕과 싸워야 합니다.

음욕과 싸워야 합니다.

교만과 싸워야 합니다.

거짓과 싸워야 합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과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이 싸움은 하루 만에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제 삶에 불편한 환경을 남겨 두심으로 제 믿음을 훈련하실 수도 있습니다.

사람을 통해 인내를 배우게 하시고,

경제적 한계를 통해 의존을 배우게 하시고,

질병이나 연약함을 통해 겸손을 배우게 하시며,

응답이 늦어지는 시간을 통해 기다림을 배우게 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시험이 올 때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는 질문만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주님, 이 상황에서 제가 무엇을 배우기를 원하십니까?”

이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험을 통과하는 힘이 제 의지에만 있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려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광야에서 시험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실패한 자리에서 예수님은 말씀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시험했고 우상에 빠졌지만, 예수님은 아버지께 끝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실패하지 않은 참 이스라엘이십니다.

그래서 저는 제 시험 앞에서 단지 “더 강해져야지”라고 결심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시험을 이기신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그분이 제 의가 되시고, 성령으로 저를 도우신다는 사실을 붙듭니다.

타협은 결혼으로 이어지고 결국 예배의 대상을 바꾸었습니다 (삿 3:5-7)

5절부터는 시험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가운데 거주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딸들을 아내로 맞이하고, 자신들의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며, 그들의 신들을 섬깁니다.

저는 이 세 문장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거주합니다.

결혼합니다.

섬깁니다.

타협의 과정이 단계적으로 나타납니다.

처음부터 우상을 섬기겠다고 결심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먼저 함께 살았습니다.

그 다음 관계가 깊어졌습니다.

그리고 결국 예배의 대상이 바뀝니다.

저는 죄가 들어오는 방식도 종종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처음에는 가까이 둡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조금 익숙해집니다.

그 다음에는 관계를 맺습니다.

마음이 붙습니다.

나중에는 그것을 섬기게 됩니다.

그래서 죄의 첫 단계에서 경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의 결혼 문제가 왜 그렇게 심각했을까요?

성경이 민족이나 인종이 다른 사람과의 결혼 자체를 무조건 금지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성경 안에서도 라합과 룻처럼 이방 출신이면서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고 언약 공동체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신앙이었습니다.

가나안의 신들을 섬기는 사람들과 언약적 결합을 맺으며 그들의 종교를 받아들인 것이 핵심입니다.

결혼은 단순한 개인적 감정의 결합이 아닙니다.

가정과 문화와 신앙이 깊이 얽히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가나안 사람들과 결혼하며 가나안의 신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오늘의 관계에도 적용해 봅니다.

사람은 자신이 가까이하는 사람에게 영향을 받습니다.

친구에게 영향을 받습니다.

배우자에게 영향을 받습니다.

공동체에 영향을 받습니다.

심지어 반복해서 보는 콘텐츠에도 영향을 받습니다.

저는 제가 무엇을 가까이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내 마음에 매일 무엇이 들어오는가.

누구의 말을 오래 듣는가.

어떤 가치관을 반복해서 접하는가.

그것이 결국 제 예배를 바꿀 수 있습니다.

예배는 단지 주일에 찬송하는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제가 가장 많은 시간과 마음과 돈을 바치는 것이 무엇인지 보면 제 실제 예배 대상이 드러납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겼다고 말합니다.

저는 여기서 “잊어버렸다”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히브리어 ‘샤카흐’(שָׁכַח)는 기억하지 않다, 잊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잊는다는 것은 단순한 기억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언약을 삶의 중심에서 밀어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름을 완전히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출애굽 이야기를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조상들의 하나님이 누구인지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 더 이상 삶을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망각’입니다.

저는 이 부분이 매우 두렵습니다.

저도 하나님을 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하나님을 잊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사역하면서도 하나님을 잊을 수 있습니다.

기도라는 행위를 하면서도 실제로는 제 욕망만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말하면서도 하나님 없이 살 수 있습니다.

신앙의 가장 큰 위기는 무신론자가 되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하나님이 없어도 되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계속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광야에서 먹이신 하나님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주신 은혜를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신약의 교회는 무엇을 기억해야 합니까?

십자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찬을 주시면서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십자가를 반복해서 기억해야 할까요?

우리는 너무 쉽게 다른 복음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성공이 복음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건강이 복음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부유함이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는 기준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인정이 구원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중심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저는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기억하면 제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도 기억합니다.

동시에 얼마나 큰 사랑을 받은 사람인지도 기억합니다.

그래서 교만할 수 없고 절망할 수도 없습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은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바알은 주로 풍요와 폭풍, 비와 관련된 가나안 신으로 숭배되었고, 아세라는 풍요와 다산과 연결된 여신 숭배와 관련됩니다.

저는 이 우상들이 결국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을 건드렸다고 생각합니다.

먹고사는 문제,

풍요롭게 살고 싶은 욕망,

생명과 생산,

안정과 번영입니다.

우상은 인간의 욕망과 연결됩니다.

그래서 우상은 단순히 “나쁜 신”을 믿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없이도 원하는 것을 얻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저는 오늘의 우상도 비슷하다고 봅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돈을 통해 하나님 없이 안전하려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성공이 문제라기보다 성공을 통해 제 가치를 증명하려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사람의 사랑이 문제라기보다 그 사랑이 하나님보다 더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상은 좋은 것을 궁극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팀 켈러가 자주 설명했듯이, 인간의 마음은 좋은 것을 ‘궁극적인 것’으로 바꾸어 우상화하기 쉽습니다.

저는 그래서 어떤 것을 좋아하는가만 보지 않고, 무엇을 잃었을 때 제 삶 전체가 무너지는지를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제 우상일 가능성이 큽니다.

돈을 잃으면 인생이 끝난 것처럼 느끼는가.

사람의 사랑을 잃으면 존재 가치가 사라진 것처럼 느끼는가.

직장을 잃으면 하나님도 나를 버리신 것처럼 느끼는가.

자녀의 성공이 좌절되면 내 삶 전체가 실패한 것처럼 느끼는가.

그 지점에 제 우상이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스라엘이 왜 바알에게 갔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보이는 신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즉각적인 풍요를 약속하는 종교가 매력적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선택은 결국 하나님을 잊는 일이었습니다.

저 역시 눈에 보이는 것을 더 신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기다려야 하지만 돈은 당장 숫자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는 불확실하게 느껴지지만 사람의 힘은 구체적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보이는 것보다 말씀을 더 신뢰하는 결단입니다.

저는 여기서 예수님의 광야 시험을 다시 떠올립니다.

사탄은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했습니다.

성전에서 뛰어내리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나라와 영광을 보여 주며 절하라고 했습니다.

결국 핵심은 동일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는 대신 즉각적인 만족과 권력과 안전을 선택하라는 유혹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으로 거부하셨습니다.

아버지께 순종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실패한 자리에서 그리스도는 승리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우상과 싸울 때 제 의지보다 그리스도의 순종을 의지합니다.

십자가는 제 우상을 깨뜨립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하나님만이 제 구원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돈도 나를 죄에서 구하지 못합니다.

사람의 사랑도 죽음을 이기지 못합니다.

성공도 죄책을 씻어 주지 못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구원하십니다.

저는 오늘 제 마음에 세워진 아세라와 바알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하나씩 이름을 붙여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싶습니다.

“주님, 이것이 제게 주님보다 더 중요해졌습니다.”

그 고백이 회개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르짖는 백성에게 성령을 입은 옷니엘을 세우셨습니다 (삿 3:8-11)

8절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고, 이스라엘은 팔 년 동안 그를 섬깁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다시 죄의 역설을 봅니다.

이스라엘은 자유를 얻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종살이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져 다른 신을 선택했지만, 결국 다른 왕을 섬기게 됩니다.

이것이 죄의 구조입니다.

죄는 자유를 약속하지만 노예 상태를 가져옵니다.

예수님도 죄를 범하는 자는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자유를 “내가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하는 것”으로 정의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적 자유는 다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선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죄를 거절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사랑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진리를 따라 살 수 있는 자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떠난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닙니다.

주인을 바꾸는 것일 뿐입니다.

이스라엘은 구산 리사다임을 팔 년 동안 섬깁니다.

‘구산 리사다임’이라는 이름은 해석상 여러 논의가 있지만,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외세의 왕으로 등장합니다.

저는 여기서 사사기의 패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을 봅니다.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합니다.

압제를 받습니다.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이 사사를 세우십니다.

구원받습니다.

평화를 누립니다.

그리고 다시 죄로 돌아갑니다.

이 반복이 사사기 전체를 관통합니다.

9절은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저는 이 한 문장이 참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그들이 완전하게 회개했다고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히브리어 ‘자아크’(זָעַק)는 심한 고통 속에서 도움을 청해 외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잊었지만 고통이 깊어지자 다시 하나님을 찾습니다.

저는 인간이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평안할 때 하나님을 잊습니다.

그러다가 어려워지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잘될 때는 제 능력으로 사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면 갑자기 기도가 깊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저를 보시면 답답하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필요할 때만 나를 찾느냐”며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구원자를 세우십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하나님의 긍휼 앞에 멈추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자격이 있어서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완벽한 회개를 증명했기 때문에 사사를 주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의 긍휼 때문에 구원자를 세우셨습니다.

구원은 언제나 은혜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을 사사로 세우십니다.

사사기 1장에서 이미 옷니엘을 만났습니다.

그는 기럇 세벨을 공격하여 점령했고 갈렙의 딸 악사를 아내로 얻었습니다.

그때 이미 용기와 믿음의 모습을 보여 주었던 인물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의 첫 사사로 사용하십니다.

저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준비시키는 방식을 봅니다.

사사기 1장의 한 지역 전투가 사소한 사건처럼 보였지만, 그것이 훗날 더 큰 사명을 위한 준비였을 수 있습니다.

오늘 제가 맡은 작은 일이 내일의 사명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작은 순종이 중요합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 정직하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작은 기도를 계속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해도 맡은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시간을 사용하십니다.

10절은 옷니엘 사역의 핵심을 보여 줍니다.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영’을 뜻하는 히브리어 ‘루아흐’(רוּחַ)는 바람, 숨, 영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영이 옷니엘에게 임하여 사사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능력을 주신 것을 말합니다.

저는 이 구절에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옷니엘이 구원자가 된 이유는 그의 타고난 능력 때문만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영이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감당한 것입니다.

저는 목회와 신앙생활에서 이것을 계속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은 능력을 개발해야 합니다.

공부도 해야 합니다.

준비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을 인간의 능력만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문제가 시작됩니다.

설교도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기도도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죄와 싸우는 것도 성령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성령의 열매입니다.

저는 제 힘으로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의욕이 넘치지만 지칩니다.

사람을 사랑하려고 하지만 상처를 받으면 마음이 닫힙니다.

죄를 끊겠다고 결심하지만 다시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더 강한 결심만이 아닙니다.

성령의 능력입니다.

옷니엘에게 임한 성령은 구약 시대 특정한 사명을 위해 능력을 부어 주시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신약에 이르면 성령의 역사는 더욱 풍성하게 펼쳐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후 오순절에 성령이 교회에 임합니다.

새 언약의 백성은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거하시며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죄를 깨닫게 하시며, 거룩하게 하시고, 복음을 증언하도록 힘을 주십니다.

저는 그래서 옷니엘 이야기를 읽으며 성령을 더욱 의지하고 싶습니다.

“주님, 제가 제 힘으로 믿으려 하지 않게 하소서.”

“제 힘으로 사람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게 하소서.”

“성령께서 제 생각과 말과 선택을 다스려 주소서.”

본문은 옷니엘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전쟁에 나가고,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의 손에 넘겨주셨다고 말합니다.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옷니엘이 싸웠지만 승리를 주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이것은 사사기 전체에서 반복되는 중요한 신학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속합니다.

사사는 도구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지도자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배웁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좋은 지도자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사람 자체가 구원자는 아닙니다.

옷니엘도 결국 죽습니다.

모든 사사는 죽습니다.

그리고 사사가 죽으면 백성은 다시 타락합니다.

인간 지도자의 한계가 분명합니다.

저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예수님은 사사들과 같으면서도 완전히 다른 구원자입니다.

사사들은 외부의 적에게서 잠시 구원했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하십니다.

사사들은 한 시대에만 활동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히 살아 계십니다.

사사들의 구원은 반복적으로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번에 이루어진 완전한 속죄입니다.

사사들은 결국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셨지만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구원은 구원자가 죽으면 끝나는 구원이 아닙니다.

부활로 확증된 영원한 구원입니다.

11절은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그 땅이 평온한 지 사십 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

사십 년의 평화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평화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옷니엘이 죽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 본문에서 다시 이스라엘의 타락을 만나게 됩니다.

사사기의 평화는 언제나 임시적입니다.

이 사실은 더 큰 안식을 기다리게 합니다.

히브리서가 말하는 참된 안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성될 안식입니다.

저는 오늘 제 삶의 평안도 영원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건강할 때가 있고 아플 때가 있습니다.

형편이 좋아질 때가 있고 어려워질 때가 있습니다.

좋은 사람과 함께할 때가 있고 이별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궁극적인 평화는 상황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평화입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립니다.

이 화평은 외부의 모든 문제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문제도 저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확신입니다.

저는 그래서 옷니엘의 사십 년 평화를 보면서 더 큰 평화를 바라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새 창조에서 완성될 영원한 안식입니다.

사사기는 반복되는 실패를 보여 주지만 성경의 마지막은 실패로 끝나지 않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옵니다.

다시는 압제자가 없습니다.

다시는 우상숭배가 없습니다.

다시는 죽음이 없습니다.

다시는 구원자가 죽어서 백성이 다시 혼란에 빠지는 일도 없습니다.

부활하신 어린양이 영원히 왕으로 다스리실 것입니다.

저는 그 소망을 붙들고 오늘의 영적 전쟁을 감당하고 싶습니다.

시험이 있다고 낙심하지 않겠습니다.

시험을 통해 제 믿음을 돌아보겠습니다.

우상이 드러나면 변명하지 않고 회개하겠습니다.

실패했을 때 하나님께 다시 부르짖겠습니다.

그리고 제 힘이 아니라 성령을 의지해 다시 순종하겠습니다.

마무리

사사기 3장 1절부터 11절을 묵상하며 저는 시험과 타협, 우상숭배와 구원이라는 제 삶의 현실을 함께 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시험하셨고, 그들은 가나안 문화와 타협하여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그러나 고통 가운데 부르짖자 하나님은 옷니엘을 세우시고 성령으로 능력을 주셔서 구원하셨습니다. 오늘 저는 제 시험을 불평만 하지 않고 제 믿음을 비추는 거울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마음속의 바알과 아세라를 찾아 내려놓고, 제 힘보다 성령을 의지하겠습니다. 잠시 구원하는 옷니엘보다 더 크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와 부활로 영원한 구원을 이루신 주님을 바라보며 오늘도 순종의 길을 걷겠습니다.

매일성경 묵상 사사기 2:11-23 다시 바알에게

하나님을 떠난 자리에서도 긍휼은 멈추지 않습니다

  • 매일성경 묵상 사사기 2:11-23

오늘도 저는 말씀 앞에 앉아 제 마음의 방향을 살펴봅니다. 사사기 2장 11절부터 23절은 사사기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와도 같은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은 그들을 대적의 손에 넘기십니다. 고통이 깊어질 때 하나님은 사사를 세워 건지시지만, 사사가 죽으면 백성은 다시 더 깊은 타락으로 돌아갑니다. 죄와 심판, 부르짖음과 구원, 그리고 다시 배교로 이어지는 슬픈 반복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반복 가운데서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발견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인간의 죄가 얼마나 집요한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그리고 결국 우리에게 왜 완전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지를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버리자 섬기던 우상이 오히려 주인이 되었습니다 (삿 2:11-15)

11절은 짧지만 무거운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저는 이 문장에서 가장 먼저 “여호와의 목전에”라는 표현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죄는 하나님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눈을 피할 수는 있었지만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저 역시 사람 앞에서는 얼마든지 제 모습을 관리할 수 있습니다.

경건한 말을 할 수 있고, 신앙적인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모르는 생각과 욕망을 숨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숨겨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진실성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보다 하나님 앞에서 제가 누구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악을 행하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악’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라’(רַע)는 단순한 실수나 부족함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함, 언약의 관계를 깨뜨리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그 악의 구체적인 모습은 바알들을 섬긴 것입니다.

바알은 가나안의 대표적인 풍요와 폭풍의 신으로 숭배되었습니다. 농경사회에서 비는 생존과 직결되었기 때문에 가나안 사람들에게 바알 숭배는 단순한 종교 행위가 아니라 농사와 경제, 생존을 보장받기 위한 종교 체계였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이스라엘이 왜 바알의 유혹에 빠졌는지를 생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해서 바알을 섬긴 것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여호와도 믿고 바알도 의지하려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광야에서는 만나를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했지만, 가나안 농경사회에 정착하면서는 “비와 풍요는 바알이 더 잘 주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왔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혼합주의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을 완전히 버렸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외에 다른 안전장치를 하나 더 두는 것입니다.

저는 이 모습이 오늘의 제 신앙과도 멀지 않다고 느낍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돈을 더 신뢰할 수 있습니다.

기도한다고 말하면서도 결정의 마지막 기준은 사람들의 평가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미래를 맡긴다고 하면서도 세상의 안정과 성공이 확보되지 않으면 불안해합니다.

바알의 이름은 바뀌었지만 인간의 마음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바알은 통장 잔고일 수도 있습니다.

직장일 수도 있습니다.

부동산일 수도 있습니다.

명예일 수도 있고, 자녀의 성공일 수도 있습니다.

연애와 인간관계가 바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목회자에게는 교회의 성장이나 자신의 영향력이 우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상은 반드시 신상을 세워 절해야만 우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더 깊이 의지하는 것, 하나님이 없어도 이것만 있으면 살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우상입니다.

12절은 이스라엘의 죄를 더욱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그들은 애굽 땅에서 자신들을 인도하여 내신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갔습니다.

저는 “버렸다”는 표현이 참 아프게 들립니다.

이스라엘은 낯선 신을 찾아간 것만이 아닙니다.

자신들을 노예의 집에서 건져 내신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입니다.

광야에서 먹이신 하나님입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입니다.

약속의 땅을 주신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갑니다.

히브리어 ‘아자브’(עָזַב)는 버리다, 떠나다, 포기하다는 뜻을 가집니다.

저는 이 단어를 묵상하며 죄가 단지 잘못된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법 몇 조항을 위반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상숭배를 종종 영적 간음으로 묘사합니다.

언약의 하나님을 두고 다른 신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죄를 너무 법적인 문제로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해도 되는가, 하면 안 되는가.”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 깊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이 선택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선택인가, 하나님을 떠나는 선택인가.”

그 질문을 하면 죄가 다르게 보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 의무를 빼먹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볍게 여기는 일이 됩니다.

말씀을 무시하는 것은 성경 읽기 목표를 실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귀히 여기지 않는 태도가 됩니다.

탐욕은 단순한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습니다.

‘섬기다’는 뜻의 히브리어 ‘아바드’(עָבַד)는 일하다, 봉사하다, 종으로 섬기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저는 이 단어가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은 자유를 얻기 위해 우상을 섬겼을지 모르지만 결국 우상의 종이 되었습니다.

죄는 언제나 자유를 약속하며 다가옵니다.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라.”

“말씀에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살라.”

“욕망을 억제하지 마라.”

그러나 죄의 끝은 자유가 아니라 종살이입니다.

돈을 사랑하면 돈에 묶입니다.

사람의 인정을 사랑하면 평가에 묶입니다.

쾌락을 사랑하면 쾌락에 묶입니다.

분노를 붙잡으면 어느 순간 분노가 나를 지배합니다.

이스라엘이 바알을 섬긴 순간, 사실상 바알의 종이 된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

14절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셔서 노략하는 자들의 손에 그들을 넘겨주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저는 하나님의 진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의 충동적인 분노와 다릅니다.

우리는 기분이 상하면 화를 내고, 감정이 격해지면 과도하게 반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거룩하심에서 나오는 의로운 반응입니다.

사랑이 죄에 무관심할 수 없듯이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를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심판하지 않으신다면 그분은 선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폭력도, 불의도, 배신도, 우상숭배도 결국 아무 의미가 없다면 정의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사랑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룩한 사랑의 다른 측면입니다.

본문에서 특히 무서운 표현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파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상을 선택하자 다시 대적의 손 아래로 들어갑니다.

이것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자유를 얻으려 했지만 오히려 종이 됩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인간 죄의 구조를 봅니다.

하나님 없이 자유롭게 살겠다는 인간의 선택은 결국 다른 주인에게 자신을 넘기는 일이 됩니다.

인간은 완전히 주인 없이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것도 섬기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다른 무엇인가를 섬깁니다.

바울도 로마서에서 죄의 종과 의의 종을 말합니다.

문제는 내가 누구의 종인가입니다.

15절은 더욱 강하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셨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맹세하신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저는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의 신실성을 두렵게 묵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 약속은 잘 기억합니다.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

“너를 지키겠다.”

이런 말씀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경고도 말씀입니다.

언약의 축복과 저주는 모두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율법에서 우상숭배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경고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경고를 가볍게 여겼지만 결국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성경을 선택적으로 믿는 태도를 경계하게 됩니다.

위로가 되는 말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회개를 요구하는 말씀은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저를 위로할 뿐만 아니라 깨뜨립니다.

격려할 뿐 아니라 책망합니다.

약속할 뿐 아니라 경고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말씀은 저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 위한 은혜입니다.

이스라엘은 “심히 괴로웠습니다.”

그 고통을 바라보며 저는 죄의 결과가 얼마나 현실적인지 생각합니다.

죄는 처음에는 달콤하지만 끝은 고통입니다.

우상숭배는 풍요를 약속했지만 가난과 압제를 가져왔습니다.

바알은 안전을 약속했지만 이스라엘을 안전하게 지켜 주지 못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십자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인간의 죄가 만나는 결정적인 자리가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이 받아야 할 심판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우리를 죄의 종살이에서 건져 내시기 위해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바울은 우리를 값으로 샀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죄 때문에 대적의 손에 팔렸다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피로 다시 사신 바 된 사람입니다.

저는 그래서 복음을 단순히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감정적인 문장으로 축소하고 싶지 않습니다.

복음은 훨씬 깊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실 만큼 거룩하시고, 그 심판을 자기 아들이 담당하게 하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함께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제 우상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려고 합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무리 익숙하고 유익해 보여도 하나님 자리에 있다면 내려놓겠습니다.

왜냐하면 저를 살리는 것은 바알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사사를 세우신 하나님, 심판 가운데서도 긍휼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삿 2:16-19)

16절에서 분위기가 갑자기 바뀝니다.

“여호와께서 사사들을 세우사 노략자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하게 하셨으나.”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의 마음 앞에서 놀라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먼저 완전히 회개했다는 설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증명해서 구원을 얻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우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실패 이후에도 하나님의 구원 행동이 먼저 시작됩니다.

‘사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쇼페트’(שֹׁפֵט)는 재판관이라는 뜻을 가지지만 사사기에서의 사사는 오늘날 법정의 판사보다 훨씬 넓은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특정한 시대에 세워 이스라엘을 외세의 압제에서 구원하도록 사용하신 지도자입니다.

그들은 왕은 아니었지만 군사적·정치적·영적 지도력을 행사했습니다.

사사기의 중심 인물들은 바로 이 역할을 수행합니다.

옷니엘, 에훗, 드보라, 기드온, 입다, 삼손 등이 이어서 등장합니다.

그런데 저는 사사기를 영웅 이야기로 읽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사기에는 완전한 영웅이 없습니다.

사사들 자신도 점점 더 불완전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초기의 사사들은 비교적 긍정적으로 그려지지만, 뒤로 갈수록 사사들 역시 이스라엘의 혼란과 타락을 반영합니다.

이것은 의도적인 문학적·신학적 흐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도 아니다.”

“저 사람도 궁극적인 구원자가 아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더 나은 구원자를 기다리게 합니다.

그런데 사사의 불완전함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사용하십니다.

저는 여기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봅니다.

하나님은 완벽한 사람만 사용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약한 사람을 사용하시고, 부족한 사람을 사용하시며, 때로는 흠이 많은 사람조차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죄와 결함을 정당화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이 인간의 완전함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저는 이것이 목회자에게도 중요한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사역자는 자기가 교회의 구원자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내 설교가 사람을 살리는 것처럼 착각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사람을 사용하실 뿐입니다.

사사가 죽으면 이스라엘이 다시 타락했다는 사실은 인간 지도자의 한계를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17절은 하나님의 구원이 있어도 백성이 사사들에게 순종하지 않고 다른 신들을 따라 음행했다고 말합니다.

저는 여기서 죄가 얼마나 뿌리 깊은지를 봅니다.

외부의 환경을 바꾼다고 인간의 마음이 자동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압제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적이 사라졌습니다.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충성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상황이 좋아져도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다시 죄로 돌아갑니다.

이 사실은 저에게 중요한 영적 교훈을 줍니다.

“환경만 바뀌면 나는 더 잘 믿을 것이다.”

저도 그렇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경제 문제가 해결되면 기도할 것 같습니다.

건강이 좋아지면 감사하며 살 것 같습니다.

사람과의 갈등이 사라지면 마음이 평안해질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근본 문제는 환경만이 아닙니다.

마음입니다.

이스라엘은 압제 때문만에 죄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뒤에도 죄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외적 해방 이상의 구원이 필요합니다.

새 마음이 필요합니다.

18절은 사사기 전체에서 가장 따뜻한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호와께서 사사들을 세우실 때 그 사사와 함께하시고, 사사가 사는 날 동안 백성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로움을 당하며 슬피 부르짖는 것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뜻을 돌이키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마음이 드러납니다.

이스라엘은 반복해서 배신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의 신음을 들으십니다.

저는 이 장면을 출애굽기와 연결해 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도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을 보셨고, 부르짖음을 들으셨으며, 그들의 아픔을 아셨습니다.

사사기에서도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백성이 하나님을 잊어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완전히 잊지 않으십니다.

여기서 ‘긍휼히 여기다’ 혹은 ‘뜻을 돌이키다’의 배경에는 하나님의 깊은 연민이 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을 이렇게 묘사한다는 사실이 저를 위로합니다.

하나님은 차가운 재판관이 아닙니다.

물론 죄를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고통받는 백성을 바라보며 마음 아파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저는 여기서 하나님의 심판과 긍휼을 함께 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 넘기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괴로워하자 다시 사사를 세워 구하십니다.

이것을 모순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징계하면서도 그 자녀의 고통을 기뻐하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의 징계 목적은 파괴가 아니라 회복입니다.

저는 제 삶에서 겪는 모든 고통을 무조건 하나님의 직접적인 징계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는 의인이 겪는 고난도 있고, 이해할 수 없는 고통도 있습니다.

욥의 고난을 죄의 결과라고 단정했던 친구들은 잘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어려움을 “내가 죄를 지어서 이런 일이 생겼다”고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고난은 하나님께서 제 삶을 돌이키시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고난이 아니었다면 멈추지 않았을 길을 멈추게 하시고, 잊었던 하나님을 다시 찾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저는 고난 속에서 “왜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만 묻기보다 한 가지 질문을 더 하고 싶습니다.

“주님, 이 일을 통해 제게 무엇을 보여 주십니까?”

사사는 백성을 잠시 구원합니다.

하지만 그 구원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19절은 사사가 죽은 후의 모습을 말합니다.

백성은 돌이켜 그 조상들보다 더 타락합니다.

다른 신들을 따라 섬기며 절하고, 자기들의 행위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않습니다.

여기서 저는 사사기의 악순환이 단순한 원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가는 나선형과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죄를 짓습니다.

심판을 받습니다.

구원받습니다.

잠시 평화를 누립니다.

다시 죄를 짓습니다.

그런데 다음 죄는 이전보다 더 깊어집니다.

본문은 “그 조상들보다 더욱 타락하였다”고 말합니다.

죄를 반복하면 같은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점점 더 굳어질 수 있습니다.

처음 죄를 지었을 때는 마음이 아픕니다.

두 번째에는 조금 덜 아픕니다.

반복되면 익숙해집니다.

어느 순간에는 죄를 죄라고 느끼지 못합니다.

이것이 영적 무감각입니다.

저는 이것을 가장 두려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죄를 짓고 마음이 아픈 사람에게는 회복의 가능성이 보입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도 아무렇지 않은 상태는 위험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 양심이 말씀 앞에서 민감하기를 기도합니다.

작은 거짓말에도 마음이 불편하기를 원합니다.

사람을 미워할 때 성령의 책망을 느끼고 싶습니다.

교만한 말을 했을 때 즉시 돌이킬 수 있기를 원합니다.

죄에 익숙해지고 싶지 않습니다.

19절에서 “패역한 길”이라는 표현도 주목하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의 행위와 완고한 길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죄는 단순히 순간적인 실수가 아니라 하나의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한 번의 선택이지만 반복되면 습관이 되고, 습관이 성향이 되고, 성향이 삶의 길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생을 자주 ‘길’로 묘사합니다.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이 있습니다.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제가 어느 방향으로 걷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싶습니다.

한두 번 넘어졌는가만 묻지 않겠습니다.

삶 전체가 어느 쪽으로 향하고 있는지를 보겠습니다.

그리고 이 반복되는 악순환을 보면서 저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왜 필요한지를 다시 깨닫습니다.

사사는 백성을 잠깐 구원합니다.

그러나 사사가 죽으면 구원이 무너집니다.

예수님은 다릅니다.

그분도 죽으셨지만 죽음에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구원은 구원자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성됩니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살아 계시기 때문에 그의 구원이 영원하다고 말합니다.

사사들은 외부의 적에게서 백성을 구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하십니다.

사사들은 잠시 평화를 주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의 화평을 주십니다.

사사들은 결국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여 영원히 왕으로 다스리십니다.

저는 이 차이 앞에서 복음의 영광을 봅니다.

제가 반복해서 넘어지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 완전한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제 결심이 약하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중보자가 필요합니다.

제가 하나님께 매달리는 힘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저를 붙들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오늘 다시 죄와 싸우겠습니다.

하지만 제 의지력만 믿고 싸우지 않겠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겠습니다.

남겨진 민족들까지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시험하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삿 2:20-23)

20절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다시 언급됩니다.

이스라엘이 조상들에게 명령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고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사기 2장의 문제가 다시 ‘언약’으로 돌아옵니다.

이스라엘의 죄는 단순한 도덕적 실패가 아니라 언약의 배신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저는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는 표현을 묵상합니다.

성경에서 ‘듣다’는 말은 단순히 소리를 청각적으로 인식한다는 뜻에 그치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샤마’(שָׁמַע)는 듣다와 순종하다라는 의미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하면서 순종하지 않는다면 성경적 의미에서 온전히 들은 것이 아닙니다.

저는 설교를 많이 듣는 것이 반드시 믿음이 좋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기서 배웁니다.

성경을 많이 읽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얼마나 많이 들었느냐보다 그 말씀에 얼마나 순종했는가가 중요합니다.

저는 말씀을 아는 것으로 스스로를 위로할 때가 있습니다.

신학적 내용을 이해하고, 성경의 구조를 알고, 원어를 설명할 수 있으면 신앙이 깊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지식만이 아닙니다.

“네가 내 목소리를 들었느냐?”

즉 “순종했느냐?”는 질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 말씀을 읽고도 제 고집을 그대로 붙들 수 있습니다.

용서하라는 말씀을 알면서 용서하지 않습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알면서 끊임없이 염려합니다.

정직하라는 말씀을 알면서 작은 거짓을 합리화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알면서 사실은 제 성공을 먼저 구합니다.

그때 말씀은 제 머리에는 들어왔지만 삶에는 들어오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여호수아가 죽을 때 남겨 둔 민족들을 더 이상 급히 쫓아내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가 22절에 나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조상들이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을 시험하려 함이라.”

‘시험하다’는 히브리어 ‘나사’(נָסָה)는 어떤 사람의 상태를 드러내고 검증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셔서 시험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시험을 통해 그들의 실제 상태를 드러내십니다.

저는 여기서 인생의 여러 어려움이 제 믿음을 드러내는 순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합니다.

평안할 때는 누구나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손해를 볼 때 어떤 선택을 하는가가 믿음을 드러냅니다.

사람에게 오해받을 때 어떤 말을 하는지가 제 마음을 드러냅니다.

돈이 부족할 때 무엇을 의지하는지가 제 신앙을 보여 줍니다.

기도 응답이 늦어질 때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제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가가 드러납니다.

시험은 믿음을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숨어 있던 믿음의 실체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저는 그래서 어려움을 만날 때 단순히 빨리 없어지기만을 기도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물론 고통에서 건져 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렇게 기도하고 싶습니다.

“주님, 이 상황을 통하여 제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여 주소서.”

제가 돈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돈을 잃을 때 무너진다면 제 마음의 실제 주인이 드러납니다.

제가 사람의 인정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비판을 받을 때 잠을 이루지 못한다면 인정욕구가 얼마나 깊었는지 알게 됩니다.

제가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말하면서도 미래가 불확실해질 때 극심한 불안에 사로잡힌다면 제 믿음의 약한 부분이 보입니다.

시험은 아픕니다.

그러나 은혜가 될 수 있습니다.

숨겨진 우상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23절은 하나님께서 그 민족들을 속히 쫓아내지 않고 남겨 두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저는 사사기 1장과 2장의 관계를 생각하게 됩니다.

사사기 1장에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않은 책임이 강조됩니다.

사사기 2장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불순종을 심판하시며 남은 민족들을 시험의 도구로 사용하셨다고 설명합니다.

이 둘은 모순이 아닙니다.

인간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주권이 동시에 역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책임으로 불순종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불순종조차 자신의 심판과 훈련의 목적 속에서 사용하십니다.

저는 여기서 하나님의 섭리의 깊이를 봅니다.

하나님은 죄의 원인이 아니십니다.

인간의 악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실패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이 무너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불순종 속에서도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 사실은 저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제가 실수하면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 선택 때문에 내 인생은 망쳤다.”

“내가 그때 제대로 했더라면.”

과거를 돌아보며 후회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잘못한 것은 회개해야 합니다.

잘못의 결과도 책임져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제 실패보다 큽니다.

하나님께서는 잘못된 선택을 선한 것으로 부르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 실패조차 회복의 도구로 바꾸실 수 있습니다.

십자가가 그 가장 놀라운 증거입니다.

인간 역사에서 가장 큰 불의는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건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했고, 종교 지도자들은 시기했으며, 빌라도는 불의한 판결을 내렸고, 로마 군인들은 그를 못 박았습니다.

인간의 죄가 극도로 드러난 사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십자가를 구원의 사건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악을 선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악한 인간의 행위조차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무너뜨릴 수 없었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최악의 죄를 하나님께서 구원의 문으로 바꾸신 사건입니다.

그리고 부활은 하나님의 계획이 죄와 죽음보다 강하다는 선언입니다.

저는 그래서 제 과거의 실패를 하나님의 은혜보다 크게 만들지 않으려고 합니다.

회개할 것은 회개하겠습니다.

책임질 것은 책임지겠습니다.

하지만 절망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십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시험하십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를 보십니다.

‘도’는 길입니다.

신앙은 결국 길을 걷는 것입니다.

한 번의 감동이 아닙니다.

한 번의 결단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걷는 지속적인 삶입니다.

저는 사사기를 읽으면서 일시적인 신앙의 위험을 봅니다.

사사가 나타나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위기가 지나가면 다시 우상으로 돌아갑니다.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는 신앙입니다.

저도 그러지 않는지 돌아봅니다.

문제가 생기면 기도하고, 해결되면 기도가 줄어듭니다.

건강이 나빠지면 하나님을 찾고, 회복되면 다시 일상에 묻힙니다.

관계가 어려워지면 말씀을 찾고, 평안해지면 영적 긴장이 느슨해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위기 때만 찾는 관계가 아닙니다.

길을 함께 걷는 관계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문제 해결사로만 믿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응답이 없어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공하지 않아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삶이 평안할 때도 하나님을 잊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여기서 새 언약과 새 창조의 소망을 다시 바라봅니다.

사사기의 사람들은 반복해서 언약을 깨뜨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국 인간의 연약함에만 달려 있지 않은 새로운 언약을 약속하십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기록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에스겔을 통해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새 마음을 주며 성령을 그 속에 두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졌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도록 변화시키십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도 여전히 시험을 받습니다.

여전히 넘어집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우리를 끝까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 가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새 창조가 완성됩니다.

사사기의 반복되는 죄와 전쟁과 압제가 끝나는 날이 옵니다.

다시는 사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완전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는 우상의 유혹이 없습니다.

죄도 없습니다.

죽음도 없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영원히 함께하십니다.

저는 그 완성을 바라보며 오늘을 살아갑니다.

오늘의 시험이 마지막이 아닙니다.

오늘의 싸움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부활하셨기 때문에 마지막은 승리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주어진 시험 속에서도 충실하게 하나님을 선택하겠습니다.

편안한 길보다 주님의 길을 선택하고, 즉각적인 이익보다 순종을 선택하겠습니다.

그리고 넘어질 때마다 다시 십자가로 돌아가겠습니다.

마무리

사사기 2장 11절부터 23절을 묵상하며 저는 제 안에도 사사기의 반복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다가도 다른 것을 붙들고, 어려울 때 부르짖다가 평안해지면 다시 마음이 느슨해집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제 죄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긍휼을 보여 줍니다. 심판 가운데서도 사사를 세우셨고, 신음하는 백성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저는 오늘 제 마음의 바알을 내려놓고, 말씀을 듣는 데서 그치지 않고 순종하겠습니다. 잠시 구원하는 사사가 아니라 죄와 죽음을 영원히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겠습니다. 시험 속에서도 하나님의 길을 걷고, 넘어질 때마다 십자가로 돌아가며, 부활과 새 창조의 소망을 붙들고 끝까지 믿음으로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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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산 것 같은데

 우연히 이 블로그의 이전 글들을 보게 되었다.

첫 시작은 2021년 5월 24일.

세상에 벌써 5년 전이라니 믿기지가 않는다. 

지금까지 모든 포스팅 개수는 590개이다.

결코 많지 않다. 1년에 백포만 해도 이정도할 수 있는 분량이다.

참 열심히 한 것 같은데 이 정도 밖에 안 되다니....

하루에 5포만 해도 1년이면 거의 1800포 인데, 

많이 게을렀다.

뭐 다른 블로그도 있으니 그려러니 하겠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리 많은 글을 쓰지는 않았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요즘은 블로그를 계속 해야하나 싶은 마음이 계속 해서 일어난다.

투자금보다 얻는 수익이 현저히 줄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계속 적자 상태이다.

이제 블로그 애드포스트 수익과 애드센스 수익이 비슷해 지는 수준까지 오고 말았다.

문득 다시 5년이 흐른 후에 나는 어떤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일단 내 계획은 60세 전까지 100억을 모으는 것이다.

1년 안에 아파트에 입주할 것이고,

글쓰기와 강의, 상담으로 한달에 1만원 이상의 수익을 올리는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주식을 가진 돈의 10배 이상을 올려 천억 정도의 재산을 70 세까지는 만들 생각이다.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알려준 비밀이다.



매일성경 묵상 사사기 2:1-10

울음의 자리에서 다음 세대의 믿음을 묻습니다

  • 매일성경 묵상 사사기 2:1-10

오늘도 저는 말씀 앞에 마음을 내려놓고 앉습니다. 사사기 2장에 들어서면 분위기가 갑자기 무거워집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책망하자 백성은 소리 높여 울고 제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그 눈물이 곧 지속적인 순종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에는 여호수아의 죽음과 함께 한 세대가 사라지고, 마침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가 일어났다는 두려운 기록이 등장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회개란 무엇인지, 믿음은 어떻게 다음 세대로 이어져야 하는지, 그리고 인간의 결심을 넘어 새 마음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왜 필요한지를 깊이 살펴보고 싶습니다. 말씀 앞에 함께 서서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제 신앙의 현재와 다음을 정직하게 비추어 보기를 원합니다.

언약을 깨뜨린 백성에게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삿 2:1-5)

사사기 2장은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올라와 말하되”라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저는 먼저 이 장면의 시작이 이스라엘의 움직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찾아오심이라는 사실에 눈길이 갑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가지고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사사기 1장 후반을 보면 이스라엘의 모습은 분명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족속과 언약을 맺지 말고 그들의 제단을 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 지파는 가나안 족속을 완전히 쫓아내지 않았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힘이 없어서라기보다 힘이 생긴 뒤에도 그들을 남겨 두고 노역을 시켰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보다 현실적인 이익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찾아옵니다.

‘여호와의 사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말아크 야훼’(מַלְאַךְ יְהוָה)입니다. ‘말아크’는 기본적으로 사자, 전달자라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때로 하나님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사자로 나타나면서도, 어떤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권위와 임재를 매우 직접적으로 나타냅니다.

사사기 2장에서도 여호와의 사자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며”, “내가 너희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였다”고 하나님의 행위를 일인칭으로 말합니다.

저는 이 신비로운 표현 앞에서 지나치게 단정하기보다, 최소한 한 가지는 분명히 붙잡게 됩니다.

이스라엘을 찾아오신 말씀은 단순한 인간의 충고가 아니었습니다.

언약의 하나님 자신이 자기 백성을 책망하고 계셨습니다.

그 말씀의 첫 내용은 정죄보다 먼저 은혜의 기억입니다.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며.”

하나님께서는 곧바로 “너희가 잘못했다”라고 시작하지 않으십니다.

먼저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했는가”를 상기시키십니다.

저는 이 순서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의 순종은 언제나 구원받기 위한 조건으로 먼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은 백성에게 주어지는 응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내 말을 잘 들으면 애굽에서 꺼내 주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먼저 애굽에서 건져 내셨습니다.

홍해를 건너게 하셨습니다.

광야에서 먹이셨습니다.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받은 백성에게 언약에 합당하게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의 복음적 질서입니다.

은혜가 먼저이고 순종이 뒤따릅니다.

저는 이 순서를 잊을 때 신앙을 두 방향으로 왜곡하기 쉽습니다.

하나는 율법주의입니다.

“내가 잘해야 하나님이 사랑하실 것이다.”

“기도를 많이 해야 복을 주실 것이다.”

“실수하지 않아야 하나님께 인정받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신앙이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성과를 증명해야 하는 노동이 됩니다.

다른 하나는 값싼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어차피 용서하시니 어떻게 살아도 괜찮다.”

그러나 본문은 두 극단을 모두 거부합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순종하라고 하십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계속해서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한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언약’을 뜻하는 히브리어 ‘베리트’(בְּרִית)는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단어입니다. 언약은 단순한 계약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관계를 맺으시고 약속을 주시며, 백성을 자신의 소유로 삼으시는 신실한 관계입니다.

여기서 저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놀라운 대조를 봅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어기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언약을 어겼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신실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약속을 쉽게 잊었습니다.

저는 이 대조 속에서 제 자신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 인생에서 수없이 신실하셨습니다.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지켜 주셨고, 제가 하나님께 등을 돌렸던 순간에도 말씀으로 다시 불러 주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얼마나 쉽게 변하는지 모릅니다.

어려울 때는 하나님만 의지하겠다고 고백하다가 문제가 해결되면 기도가 줄어듭니다.

은혜를 받을 때는 모든 것을 드리겠다고 결단하지만 일상으로 돌아가면 다시 제 욕망이 중심이 됩니다.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신데 저는 상황에 따라 변합니다.

그래서 언약은 제 신실함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핑계로 불순종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2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가나안 족속과 언약을 맺지 말라는 것은 단순히 민족적인 배타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핵심은 우상숭배입니다.

그들의 제단을 헐라는 말이 바로 이어지는 것이 이를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사람의 종교적 질서를 받아들이면 결국 여호와와 바알을 함께 섬기는 혼합주의에 빠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삶 한가운데에 다른 신들의 제단을 남겨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 앞에서 제 마음 안에 세워진 제단들을 생각합니다.

제단은 단지 돌을 쌓아 놓은 종교 시설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가장 신뢰하며, 가장 많은 것을 희생하는 대상 앞에 사실상의 제단을 세웁니다.

돈이 제단이 될 수 있습니다.

성공이 제단이 될 수 있습니다.

자녀가 제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인정이 제단이 될 수 있습니다.

연애와 관계가 제단이 되기도 하고, 자신의 명예와 자존심이 제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입으로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실제 선택의 순간에는 다른 제단 앞에 절할 수 있습니다.

“이것만큼은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을 하는 대상이 어쩌면 제 우상일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단을 조금 줄여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물으십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 일을 행하였느냐?”

저는 이 질문이 마음 아프게 들립니다.

하나님께서 정보를 얻기 위해 물으시는 질문이 아닙니다.

죄를 지은 사람을 자기 자신 앞에 세우는 질문입니다.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던 것처럼,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질문을 통해 인간의 마음을 드러내십니다.

저도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 질문을 듣습니다.

“너는 왜 그랬느냐?”

“왜 알면서도 내려놓지 않았느냐?”

“왜 말씀보다 사람의 시선을 더 두려워했느냐?”

“왜 내가 충분하지 않은 것처럼 다른 것을 붙들었느냐?”

저는 이 질문 앞에서 변명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환경이 어려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결국 제 선택을 인정해야 합니다.

“제가 그렇게 했습니다.”

회개의 출발은 자기 죄를 정확히 자기 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지 않고, 시대 탓으로만 돌리지 않고, 환경 탓으로만 돌리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대해 결과를 말씀하십니다.

가나안 족속을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지 않으시겠으며 그들이 이스라엘의 옆구리에 가시가 되고 그들의 신들이 올무가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올무’는 사람이나 짐승을 붙잡는 덫입니다.

처음에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을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노역시키면 경제적으로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이용하려 했던 것이 결국 너희를 붙잡을 것이다.

저는 이것이 죄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죄는 처음에는 자유를 약속합니다.

“이것을 하면 더 행복해질 것이다.”

“조금만 타협하면 편해질 것이다.”

“이 정도 욕망을 채우는 것이 무슨 문제인가.”

그러나 결국 죄는 자유를 주지 않습니다.

속박합니다.

우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우상을 이용하지만 나중에는 우상이 나를 지배합니다.

돈을 사용하던 사람이 돈의 노예가 됩니다.

인정을 즐기던 사람이 사람들의 평가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쾌락을 선택하던 사람이 쾌락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말씀을 들은 백성은 소리를 높여 웁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보김’이라고 부릅니다.

‘보김’은 우는 자들, 곧 ‘울음’과 관련된 이름이며 히브리어 동사 ‘바카’(בָּכָה), 울다에서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은 울었습니다.

제사도 드렸습니다.

겉으로 보면 훌륭한 회개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저는 사사기 전체를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장면을 조심스럽게 읽게 됩니다.

그들은 울었지만 곧 다시 타락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저는 눈물과 회개의 차이를 생각합니다.

눈물은 귀합니다.

죄 때문에 마음이 아프고,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눈물 자체가 회개는 아닙니다.

감정의 움직임과 삶의 방향 전환은 같지 않습니다.

회개는 슬퍼하는 것 이상입니다.

마음과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입니다.

저도 설교를 듣고 울 수 있습니다.

기도하다 감동받을 수 있습니다.

죄를 생각하며 마음이 아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가 끝난 뒤 동일한 죄를 아무런 싸움 없이 다시 선택한다면 제 눈물은 삶을 변화시키는 회개까지 나아가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하나님께 눈물보다 더 깊은 회개를 구하고 싶습니다.

감정의 순간이 아니라 방향의 변화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단지 미안해하는 것을 넘어 죄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저는 새 언약의 필요성을 봅니다.

인간의 결심만으로는 오래가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울어도 다시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 새 언약을 약속하셨습니다.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며,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기록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그 새 언약을 여는 사건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깨뜨린 언약의 저주를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은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 안에서 새로운 순종을 가능하게 하십니다.

저는 오늘 보김에서 우는 이스라엘을 보면서 십자가 앞으로 나아갑니다.

“주님, 울기만 하고 돌아가지 않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제 눈물이 순종이 되게 하시고, 제 회개가 삶의 방향을 바꾸게 하소서.”

한 세대의 믿음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기억하는 데서 지속됩니다 (삿 2:6-7)

6절부터 시간은 잠시 뒤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전에 여호수아가 백성을 보내매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그들의 기업으로 가서 땅을 차지하였고.”

이 내용은 여호수아서 마지막 부분과 연결됩니다. 사사기 기자는 여호수아 시대의 마지막을 다시 언급하면서 지금 이스라엘이 왜 이러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저는 이 대목을 사사기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봅니다.

사사기는 단순히 여러 영웅의 이야기를 모아 놓은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세대가 어떻게 하나님을 잊는 세대로 변해 갔는지를 보여 주는 책입니다.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백성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들이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섬기다’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아바드’(עָבַד)는 일하다, 봉사하다, 섬기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 행사에 참여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삶의 주인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그분께 충성을 드렸다는 뜻입니다.

여호수아와 장로들이 살아 있는 동안 백성은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그 이유를 본문은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들”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신앙에서 기억의 중요성을 생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보았습니다.

요단강이 갈라진 것을 보았습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쟁 가운데 도우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실제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 기억이 그들의 신앙을 붙들어 주었습니다.

성경의 신앙은 기억하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반복해서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출애굽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광야의 길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게 기억이 중요할까요?

인간은 은혜를 너무 쉽게 잊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어려울 때 하나님의 도움을 간절히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시면 너무 감사해서 평생 잊지 않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은혜가 당연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과거에는 기도 응답이었던 것이 오늘은 내 능력의 결과처럼 느껴집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건강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교회와 말씀과 예배의 자리까지 당연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신앙생활에서 의도적으로 기억하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감사도 기억에서 나옵니다.

예배도 기억에서 깊어집니다.

성찬 역시 기억의 예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적 기억은 단순히 옛날 일을 회상하는 심리 작용이 아닙니다.

과거에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이 오늘 나의 정체성과 삶을 결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고백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애굽에서 종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지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로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죄와 사망 아래 있었지만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다.”

십자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이 오래전 죽으셨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십자가가 오늘의 나를 규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유혹을 받을 때 기억합니다.

“나는 값으로 산 사람이구나.”

절망할 때 기억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버리지 않으셨구나.”

사람을 용서하기 어려울 때 기억합니다.

“나도 용서받은 사람이구나.”

죽음이 두려울 때 기억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구나.”

이 기억이 신앙을 살립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조금 불안한 표현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믿음이 여호수아와 장로들이 “사는 날 동안” 유지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사람의 영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사람에게만 의존하는 신앙의 한계를 봅니다.

좋은 지도자가 있을 때는 잘 믿습니다.

믿음 좋은 부모가 있을 때는 함께 예배합니다.

존경하는 목회자가 있을 때는 교회를 잘 다닙니다.

좋은 공동체 안에서는 열심히 신앙생활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사라졌을 때에도 나는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여호수아가 살아 있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가 섬겼던 하나님을 내가 직접 알아야 합니다.

저는 목회와 다음 세대 교육에서도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에게 부모의 믿음을 빌려주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아이들에게 규칙만 물려줘서도 안 됩니다.

“주일에는 교회에 가야 한다.”

“기도해야 한다.”

“성경을 읽어야 한다.”

이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행하셨는지를 전해야 합니다.

복음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설명해야 합니다.

부모 자신이 실제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기도가 형식이 아니라 생명임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면서 손해를 감수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을 복음 때문에 용서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저는 여기서 시편 78편의 정신을 떠올립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자녀들에게 숨기지 말고 후대에 전하라고 합니다.

신앙은 유전자로 자동 전달되지 않습니다.

직분도 세습된다고 믿음이 세습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증언되어야 하고, 가르쳐져야 하며, 삶으로 보여져야 합니다.

그렇다고 다음 세대의 불신앙에 대한 책임을 모두 부모 세대에게만 돌리는 것도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각 세대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책임을 집니다.

부모가 아무리 훌륭해도 자녀가 스스로 하나님을 거부할 수 있고, 반대로 부모의 신앙이 부족했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믿음의 사람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핵심은 단순한 세대 비난이 아닙니다.

신앙이 자동적으로 지속되지 않는다는 경고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제게 먼저 적용하고 싶습니다.

“나는 누구의 믿음 때문에 서 있는가?”

좋은 신앙 전통도 감사한 일입니다.

좋은 스승도 축복입니다.

그러나 결국 저는 하나님 앞에 홀로 서야 합니다.

부모가 믿었던 하나님이 아니라 제가 믿는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스승이 사랑했던 말씀이 아니라 제가 사랑하는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목회자가 경험했던 은혜가 아니라 제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은혜여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혼자 믿는 신앙에 빠지지 않으려 합니다.

신앙은 개인적이지만 개인주의적이지 않습니다.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교회는 기억의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매주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십자가와 부활을 선포하며, 다음 세대와 함께 찬송합니다.

이것이 교회가 존재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세상이 다른 이야기를 반복할 때 교회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반복해야 합니다.

세상은 말합니다.

“네가 가진 것이 너다.”

복음은 말합니다.

“너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다.”

세상은 말합니다.

“성공해야 가치가 있다.”

십자가는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너를 사랑하셨다.”

세상은 말합니다.

“죽으면 끝이다.”

부활은 말합니다.

“죽음은 마지막이 아니다.”

이 이야기를 반복해서 다음 세대의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저는 오늘 제 자신에게 묻습니다.

내가 다음 세대에게 남길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돈도 필요합니다.

교육도 필요합니다.

좋은 환경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잊어버린 채 세상의 모든 것을 갖는다면 무엇이 남겠습니까?

저는 다음 세대가 저를 기억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제가 사랑했던 하나님을 그들이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제가 읽었던 성경이 그들의 손에서도 펼쳐지기를 원합니다.

제가 의지했던 십자가의 복음이 그들의 삶에서도 가장 귀한 소식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 믿음을 말로만 전하지 않고 삶으로 보여 주기를 결단합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대가 일어났습니다 (삿 2:8-10)

8절은 매우 담담한 문장으로 여호수아의 죽음을 기록합니다.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

저는 여기서 여호수아에게 붙은 호칭을 눈여겨봅니다.

“여호와의 종.”

여호수아는 위대한 군사 지도자였습니다.

요단을 건넜고, 여리고를 무너뜨렸으며, 가나안 정복을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 마지막에 가장 중요하게 남는 호칭은 영웅도, 장군도, 지도자도 아닙니다.

“여호와의 종”입니다.

저는 이 표현이 참 부럽습니다.

제 인생이 끝났을 때 무엇으로 평가받고 싶은가 생각하게 됩니다.

많은 일을 했다는 평가보다 하나님께 충성했다는 평가를 받고 싶습니다.

유명했다는 말보다 주님의 종이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많이 가졌다는 말보다 맡겨진 것을 충실히 감당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인생에서 중요한 질문은 “얼마나 컸는가”가 아니라 “누구를 섬겼는가”입니다.

여호수아는 백십 세에 죽었고 자기 기업의 경내 딤낫 헤레스에 장사됩니다.

위대한 지도자도 죽습니다.

모세도 죽었고 여호수아도 죽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인간 지도자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여기서 인간에게 지나친 기대를 거는 것이 왜 위험한지를 다시 배웁니다.

교회도 특정 사람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면 안 됩니다.

좋은 목회자는 귀합니다.

좋은 지도자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목회자가 교회의 주인은 아닙니다.

그도 언젠가는 떠납니다.

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다음에도 하나님은 살아 계셨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떠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은 것입니다.

10절은 사사기의 가장 비극적인 문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한 세대가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알지 못했습니다.

‘알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다’(יָדַע)는 단순히 정보를 머리로 알고 있다는 것 이상의 폭넓은 의미를 가집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관계적으로 알고, 그의 권위를 인정하고, 언약 안에서 그를 섬기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대가 여호와라는 이름조차 들어 본 적이 없었다고 단순하게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있었으니 하나님의 이름과 출애굽 이야기를 어느 정도 들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살아 있는 언약적 신앙이 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정보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 차이가 오늘 교회에도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경 이야기를 많이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자랐다는 것과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신학 용어를 잘 아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같지 않습니다.

저는 설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신학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하나님과의 실제 관계가 메말라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생각은 저를 두렵게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나는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아는가?”보다 더 깊은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알고 있는가?”

그분의 거룩하심 앞에서 떨고 있는가.

그분의 은혜 때문에 감사하는가.

말씀하실 때 순종하는가.

죄를 지었을 때 마음이 아픈가.

하나님 없는 성공보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고난을 더 귀하게 여기는가.

그분을 실제로 사랑하는가.

10절은 또 말합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다.”

하나님을 잊는 것과 하나님의 일을 잊는 것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앞 세대는 하나님의 큰 일을 보았습니다.

뒤 세대는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여기에는 분명 다음 세대로 신앙을 전수해야 한다는 심각한 경고가 있습니다.

저는 오늘 교회가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전하고 있는지 생각합니다.

교회에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문화적으로 세련된 환경을 만드는 것도 필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행하셨는지를 들려주어야 합니다.

창조하신 하나님을 가르쳐야 합니다.

인간의 죄와 타락을 설명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을 선포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르쳐야 합니다.

성령과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오실 그리스도와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을 전해야 합니다.

다음 세대가 교회의 문화를 기억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여호수아와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생각합니다.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라는 의미를 품고 있으며 신약의 ‘예수’와 이름의 뿌리가 같습니다.

구약의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죽었습니다.

그가 준 안식도 완전한 안식이 아니었습니다.

히브리서는 여호수아가 참되고 최종적인 안식을 준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더 큰 안식이 남아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더 큰 여호수아를 기다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구약의 여호수아는 죽어 무덤에 묻혔습니다.

예수님도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이 그분을 붙잡아 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는 구원은 지도자의 죽음과 함께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살아 계십니다.

저는 이 사실이 얼마나 큰 위로인지 모릅니다.

세대는 바뀝니다.

부모는 떠납니다.

목회자도 떠납니다.

믿음의 스승들도 언젠가는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교회의 희망은 뛰어난 한 세대에게 있지 않습니다.

영원히 살아 계신 주님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옛 이스라엘의 반복되는 실패를 보면서 저는 왜 새 언약이 필요한지를 깨닫습니다.

외부의 명령만으로는 인간의 마음을 바꿀 수 없었습니다.

돌판에 쓰인 말씀은 거룩했지만 인간의 마음이 돌처럼 굳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자신의 법을 마음에 기록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에스겔을 통해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시고 성령을 그 속에 두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됩니다.

십자가에서 새 언약의 피가 흘렀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소망은 교육 기술만이 아닙니다.

물론 가르쳐야 합니다.

성실하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반복해서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한 사람의 마음을 열어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저는 자녀와 다음 세대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설명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이 아이들의 마음을 열어 주십시오.”

“부모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들의 하나님으로 만나게 하십시오.”

“십자가의 복음이 단지 익숙한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죄와 구원을 해석하는 복음이 되게 하십시오.”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다음 세대만 염려하지 않으려 합니다.

저 자신이 먼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부모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자녀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하면 그 말은 힘을 잃습니다.

목회자가 말씀에 감격하지 않으면서 성도에게 말씀을 사랑하라고 말하면 공허해질 수 있습니다.

기성세대가 교회 안에서는 신앙을 말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돈과 성공과 세상의 인정을 더 사랑한다면 다음 세대는 우리의 말이 아니라 삶을 배울 것입니다.

이 생각 앞에서 저는 깊이 회개하게 됩니다.

다음 세대의 위기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먼저 제 믿음이 진실한가를 묻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다음 세대가 왜 교회를 떠나는가”라고만 묻기보다 “나는 그들에게 어떤 하나님을 보여 주고 있는가”라고 묻고 싶습니다.

엄격하기만 한 하나님인가.

복을 주는 도구 같은 하나님인가.

주일에만 필요한 하나님인가.

아니면 십자가에서 죄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시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살아 계신 주님인가.

저는 후자를 보여 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 삶 전체로 말하고 싶습니다.

“나는 이 하나님 때문에 살아왔다.”

“내가 무너지지 않은 것은 내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다.”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이었다.”

이것이 제가 다음 세대에 남겨야 할 가장 중요한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무리

사사기 2장 1절부터 10절을 묵상하며 저는 세 가지 질문을 제 마음에 남깁니다. 나는 보김에서 울기만 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실제로 방향을 돌이키는 사람인가. 나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은혜를 기억하며 살아가는가. 그리고 내가 떠난 뒤에도 다음 세대가 하나님을 알도록 무엇을 남기고 있는가. 오늘 저는 눈물에 머무르지 않고 순종으로 나아가겠습니다. 십자가에서 새 언약을 세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알고, 그 복음을 삶으로 전하겠습니다. 제 신앙이 다음 세대의 추억으로만 남지 않고 그들이 스스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도록 말씀을 가르치고 기도하며 본을 보이겠습니다. “주님, 저부터 주님을 바르게 알고 끝까지 섬기게 하소서.”

매일성경 묵상 사사기 1:1 - 1:10

 

누가 먼저 올라가리이까, 하나님의 뜻을 묻고 순종하는 믿음

오늘도 저는 말씀 앞에 앉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뒤 이스라엘은 익숙한 지도자를 잃고 새로운 시대의 문턱에 섭니다. 사사기의 첫 장면은 전쟁보다 먼저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누가 먼저 올라가야 하는지를 하나님께 묻는 것입니다. 저는 이 짧은 장면에서 신앙의 중요한 질서를 배웁니다. 앞날이 보이지 않을 때 먼저 움직이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묻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말씀하시면 올라가야 하고, 약속하시면 순종해야 합니다. 오늘도 사사기 1장 1절에서 10절 말씀을 천천히 묵상하며,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제가 누구의 뜻을 따라 움직이고 있는지 살펴보려 합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고, 그 말씀 앞에서 제 삶의 방향도 새롭게 정돈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지도자가 사라진 자리에서 하나님께 묻다 (삿 1:1-3)

본문은 매우 중요한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라는 표현입니다. 저는 이 문장을 읽을 때마다 한 시대가 끝났다는 사실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여호수아는 단순한 행정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었던 지도자였고, 요단강을 건너게 했으며,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고 가나안 정복 전쟁을 지휘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여호수아가 이제 없습니다.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누가 우리를 이끌 것인가?” “앞으로 남아 있는 가나안 족속들과의 싸움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여호수아는 죽었지만 하나님은 죽지 않으셨습니다. 지도자는 사라졌지만 언약의 주님은 그대로 계십니다. 사람은 바뀌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자주 이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저는 어떤 사람이 곁에 있을 때 안심하고, 어떤 환경이 유지될 때 평안을 느낍니다. 익숙한 관계와 익숙한 질서가 무너지면 하나님까지 멀어진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제게 묻습니다. “네가 의지했던 것은 정말 하나님이었느냐, 아니면 하나님이 사용하셨던 사람이었느냐?”

사사기는 바로 그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여호와께 “여쭈었습니다.” 여기 사용되는 히브리어 ‘샤알’(שָׁאַל)은 묻다, 요청하다, 뜻을 구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스라엘은 군사회의부터 열지 않았습니다. 어느 지파가 병력이 많고 어느 지파가 전투 경험이 풍부한지를 먼저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묻습니다.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저는 이 질문이 참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우리가 이길 수 있습니까?”라고 묻지 않습니다. “싸워야 합니까?”라고 묻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에게 주신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순종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라 “누가 먼저 순종할 것인가”였습니다.

여기서 ‘올라가다’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알라’(עָלָה)에서 나온 말입니다. 단순히 지리적으로 높은 곳에 올라간다는 뜻도 있지만,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싸움의 자리로 나아가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저는 이 말씀 앞에서 제 기도의 내용을 돌아보게 됩니다. 저는 하나님께 종종 “이 일이 잘되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손해를 보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이 나를 인정하겠습니까?” “결과가 좋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보다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이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주님,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믿음은 결과를 먼저 확인하고 움직이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고 그 말씀을 따라 움직이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에게 말씀하십니다.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그리고 매우 중요한 약속을 덧붙이십니다.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

여기서 ‘넘겨주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나탄’(נָתַן), 곧 주다라는 뜻입니다. 아직 전투는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완료된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유다가 싸워서 스스로 쟁취하는 땅이라기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땅입니다.

저는 여기서 은혜와 순종의 관계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셨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반대로 내가 열심히 싸워야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먼저 약속이 있고 그 약속에 대한 순종이 뒤따릅니다.

이것은 복음의 질서와도 같습니다.

우리가 순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순종합니다. 우리가 선하게 살아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새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은혜가 먼저이고 순종은 그 은혜에 대한 응답입니다.

저는 이 순서를 잊으면 신앙이 쉽게 율법주의가 된다는 사실을 압니다. “더 열심히 해야 하나님께 인정받을 것이다”라는 생각에 붙들립니다. 그러나 복음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이루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죄의 값을 담당하셨고, 부활하셔서 새 생명의 길을 여셨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구원을 얻기 위해 싸우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죄와 싸웁니다.

유다는 시므온에게 함께 올라가자고 제안합니다. 자신의 기업에서 싸우는 일을 도와주면 자신도 시므온의 기업에서 함께 싸우겠다고 말합니다.

이 장면을 묵상하면서 저는 믿음의 싸움이 반드시 혼자서만 감당해야 하는 싸움이 아니라는 사실도 생각합니다.

우리는 서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자의 기업과 사명을 주셨지만 그 사명을 고립된 상태에서 감당하라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교회는 서로의 싸움을 함께 싸우는 공동체입니다. 누군가 믿음이 흔들릴 때 곁에 서 주고, 누군가 삶의 무게에 눌릴 때 함께 기도하고, 누군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두려워할 때 손을 붙잡아 주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나 저는 동시에 조심스럽게 제 마음을 살펴봅니다.

유다가 시므온을 부른 것이 믿음의 연대였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약속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던 인간적인 보완이었는지 본문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시므온과의 동행보다 먼저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도움이 아무리 귀해도 약속의 근거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이것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사람과 함께 가되 사람을 하나님 자리에 두지 않겠습니다. 좋은 동역자를 감사히 여기되 그 사람이 없어졌다고 사명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어도 하나님은 살아 계셨던 것처럼, 제가 의지했던 환경이 바뀌어도 하나님은 여전히 제 앞길을 인도하십니다.

오늘 저는 중요한 결정을 앞두었을 때 먼저 계산하기보다 묻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주님, 누가 먼저 올라가야 합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하다면 더 이상 끝없는 계산 속에 머물지 않고 믿음으로 올라가고 싶습니다.

승리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발견하다 (삿 1:4-7)

유다와 시므온이 올라가자 하나님께서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그들의 손에 넘겨주십니다. 본문은 벧세겔에서 만 명을 쳤다고 기록합니다.

제가 이 부분을 읽을 때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은 전쟁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어려움입니다. 성경을 피상적으로 읽으면 가나안 정복을 단순한 민족 간의 영토 전쟁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보면 이것은 이스라엘의 민족적 우월성을 증명하는 전쟁이 아닙니다.

가나안 정복은 하나님의 심판과 언약의 성취라는 신학적 틀 속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 시대부터 가나안 땅을 그의 후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동시에 창세기 15장에서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의 때가 기다려지고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정복은 하나님께서 어떤 민족을 충동적으로 미워하셔서 일으킨 사건이 아닙니다. 오랜 인내 뒤에 시행된 심판이며 동시에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언약을 성취하시는 사건입니다.

이 사실은 저를 두렵게 합니다.

하나님의 인내가 하나님의 무관심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를 오래 참으신다고 해서 죄를 인정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저는 때때로 세상을 바라보며 묻습니다. 왜 악한 사람이 잘되는가, 왜 불의가 즉시 심판받지 않는가, 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는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인내와 하나님의 심판을 동시에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십니다. 그러나 영원히 죄를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벧세겔에서 유다 사람들은 아도니 베섹을 만납니다. ‘아도니 베섹’은 개인의 고유한 이름이라기보다 “베섹의 주”라는 의미를 가진 칭호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주변의 여러 왕들을 정복하고 잔혹하게 다루었던 강력한 통치자였습니다.

유다는 그와 싸워 승리합니다.

도망가던 아도니 베섹을 붙잡아 그의 손과 발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릅니다.

오늘의 독자에게 이 장면은 불편합니다. 저 역시 편안하게 읽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잔혹성을 미화하기보다 곧바로 아도니 베섹 자신의 입을 통해 사건을 해석하게 합니다.

그는 자신이 과거에 칠십 명의 왕들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르고 자신의 상 아래에서 음식 부스러기를 줍게 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내가 행한 대로 하나님이 내게 갚으심이로다.”

여기서 ‘갚다’는 의미는 행위에 상응하는 보응을 가리킵니다. 히브리 성경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공의, 곧 ‘미쉬파트’(מִשְׁפָּט)는 단순한 감정적 복수가 아니라 무너진 질서를 바로잡는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과 연결됩니다.

아도니 베섹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행했던 폭력을 자신이 당하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무서운 영적 원리를 발견합니다.

죄는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가한 상처, 내가 권력을 이용하여 짓밟은 사람, 내가 무시한 약자, 내가 아무렇지 않게 던진 잔인한 말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사람은 잊어도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칼로 사용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 자신을 돌아보는 거울로 삼고 싶습니다.

혹시 저는 누군가를 제 식탁 아래로 밀어 넣고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실제로 사람을 식탁 밑에 두지는 않지만 관계 속에서는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직책을 이용해 사람을 작게 만들 수 있고, 말로 상대를 굴복시킬 수 있으며, 상대의 실수를 오래 기억하면서 자존심을 꺾어 놓을 수도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부부 사이에서,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힘의 차이는 존재합니다. 그리고 저는 힘을 가진 순간 무엇을 하는지를 통해 제 신앙의 깊이가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아도니 베섹은 힘을 가진 동안 칠십 명의 왕을 모욕했습니다.

그는 승리를 누렸지만 긍휼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권력을 얻었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자신이 만든 질서 속으로 자신이 들어갑니다.

이 장면을 묵상하면서 저는 갈라디아서의 말씀도 떠올립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행위가 아무 의미 없이 사라진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저는 복음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제가 행한 그대로만 제게 갚으신다면 저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아도니 베섹의 고백은 사실 모든 인간이 해야 할 고백입니다.

“내가 행한 대로 갚음을 받는다면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질문 앞에서 십자가의 의미가 선명해집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는 하나님의 공의가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가 철저히 드러납니다. 죄의 심판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죄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그 심판을 담당하셨습니다.

제가 받아야 할 저주의 자리에 예수께서 서셨습니다.

제가 받아야 할 정죄를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사랑만을 말하는 사건도 아니고 심판만을 말하는 사건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공의와 깊은 사랑이 만나는 자리입니다.

저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죄를 가볍게 여길 수 없습니다.

동시에 절망할 수도 없습니다.

심판을 받아 마땅한 저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아는 사람은 보복의 사람이 아니라 용서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행한 대로 갚아 주겠다”라는 마음은 인간적으로 자연스럽습니다. 상처받으면 상처를 돌려주고 싶고, 모욕당하면 모욕하고 싶으며, 배신당하면 상대도 고통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 서면 질문이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내가 행한 그대로 다루지 않으셨다면, 나는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이것이 복음이 만들어 내는 새로운 윤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심판하신다는 사실은 제가 심판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최종적인 심판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제 마음속의 작은 아도니 베섹을 발견합니다.

나를 힘들게 한 사람에게 언젠가 똑같이 갚아 주고 싶은 마음,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 상대가 실패하면 속으로 통쾌해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저를 다른 길로 부릅니다.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저는 정의와 자비를 함께 선택해야 합니다.

아도니 베섹의 이야기는 결국 예루살렘에서 끝납니다.

세상의 권력은 그렇게 끝납니다.

아무리 많은 왕들을 발아래 두었던 사람도 결국 죽습니다. 아무리 강력한 힘을 가졌던 사람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무력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더욱 겸손해지고 싶습니다.

오늘 제게 작은 권한이 주어져 있다면 그것을 사람을 눌러 놓는 데 사용하지 않고 사람을 살리는 데 사용하고 싶습니다.

말 한마디를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면 정죄보다 세우는 말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저 역시 하나님의 자비 없이는 설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점령한 땅보다 중요한 것은 끝까지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삿 1:8-10)

8절부터는 유다 자손의 정복 과정이 계속됩니다. 유다는 예루살렘과 싸워 그 성을 점령하고 칼날로 치고 불사릅니다. 이후 산지와 남방, 평지에 거주하는 가나안 사람들과 싸우기 위해 내려갑니다.

이 장면에서 저는 하나님의 약속이 추상적인 개념으로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주었다”고 말씀하셨지만 유다는 실제로 움직여야 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야 했고, 산지로 가야 했고, 남방으로 가야 했으며, 평지로 가야 했습니다.

신앙은 언제나 구체적인 삶으로 내려옵니다.

“하나님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 고백은 결국 월요일의 직장과 가정과 인간관계와 돈의 사용과 말의 습관과 욕망의 자리에서 검증됩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오래 할수록 말의 신앙과 삶의 신앙 사이에 얼마나 큰 간격이 생길 수 있는지를 느낍니다.

말씀을 많이 알고, 신학적 용어를 많이 이해하고, 설교를 오래 들어도 실제 삶의 영역을 하나님께 내어 드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본문 속 유다는 산지와 남방과 평지로 이동합니다.

저는 이 지리적 표현을 억지로 영적인 비유로 바꾸고 싶지는 않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실제 가나안 땅의 여러 지형입니다. 그러나 그 역사적 사실 속에서 저는 하나님의 약속이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중요한 원리를 배웁니다.

하나님은 제 삶의 한 부분만 다스리는 분이 아닙니다.

주일만 하나님의 땅이고 월요일부터 토요일은 제 땅이 아닙니다.

교회만 하나님의 영역이고 돈과 관계와 욕망은 제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내 삶의 모든 지경을 그분의 통치 아래 두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기업’ 또는 ‘유업’이라는 개념은 중요합니다. 히브리어 ‘나할라’(נַחֲלָה)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분배하여 주신 기업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은 단순한 부동산이 아니었습니다. 언약의 약속이 역사 속에 구체적으로 나타난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신약으로 넘어가면서 이 유업의 의미는 더욱 깊고 넓어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지는 궁극적인 기업은 특정한 영토에만 갇히지 않습니다. 베드로전서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유업을 말합니다. 신약의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궁극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 곧 새 창조의 완성으로 나아갑니다.

이렇게 보면 사사기 1장의 땅 이야기는 단순히 고대 이스라엘의 국토 확장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약속하신 기업을 주시고 그 약속을 역사 속에서 이루어 가시는 구속사의 한 장면입니다.

그러나 저는 동시에 사사기의 전체 흐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승리를 마냥 낙관적으로만 바라볼 수 없습니다.

사사기 1장의 초반은 유다의 승리로 시작하지만 장 전체를 읽어 가다 보면 이스라엘의 불완전한 순종이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쫓아내야 할 가나안 족속을 완전히 몰아내지 못하고 함께 거주하게 됩니다.

그 작은 타협들이 결국 사사기 전체의 비극적인 순환을 만들어 냅니다.

저는 이 점이 두렵습니다.

신앙의 무너짐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는 경우보다 작은 타협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별것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한 번쯤은 괜찮겠지.”

“다들 그렇게 사는데 무엇이 문제인가.”

하지만 마음속에 남겨 둔 작은 우상이 시간이 지나면서 삶을 지배하기도 합니다.

죄를 완전히 몰아내야 할 자리에서 적당히 공존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면 결국 죄가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제 삶에도 그런 ‘남겨 둔 가나안’이 없는지 묻게 됩니다.

끊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붙들고 있는 습관은 없는가.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계속 간직하고 있는 미움은 없는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하는 무엇인가가 없는

2026년 9월 첫째 주일 대표기도문

2026년 9월 첫째 주일 대표기도문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시며 우리의 모든 날과 계절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9월의 첫 주일을 허락하시고 사랑하는 성도들이 한자리에 모여 주님의 이름을 높이며 예배드리게 하시니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길고 뜨거웠던 여름의 열기가 아직 남아 있지만,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서서히 다가오는 가을을 느끼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계절이 바뀌고 들판의 곡식이 여물어 가듯 우리의 믿음도 날마다 성숙하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하옵소서. 변하는 세상 가운데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며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드리는 이 예배를 기쁘게 받아 주옵소서.

거룩하신 하나님, 지난 한 주간 우리의 삶을 돌아보며 주님 앞에 회개합니다. 주님의 뜻을 구하기보다 우리의 생각과 경험을 앞세웠고, 감사하기보다 불평했으며, 사랑으로 품어야 할 사람을 쉽게 판단했습니다. 기도해야 할 때 걱정했고, 말씀을 붙들어야 할 때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며, 해야 할 선을 알면서도 편안함을 선택했던 저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입술과 생각과 행동으로 지은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깨끗이 씻어 주시고, 정결한 마음과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다른 사람의 허물보다 먼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시고, 말씀 앞에 겸손히 서서 고칠 것은 고치고 버릴 것은 버리며 새롭게 출발하게 하옵소서.

신실하신 하나님, 새로운 달 9월을 주셨으니 믿음으로 하반기를 힘차게 살아가게 하옵소서. 연초에 세웠던 믿음의 결단이 흐려졌다면 다시 회복시켜 주시고, 처음 사랑과 처음 열심을 되찾게 하옵소서.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는 것을 보며 세월을 아끼게 하시고, 우리에게 맡겨진 가정과 일터와 교회에서 작은 일에도 충성하게 하옵소서.

특별히 느헤미야를 기억합니다.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의 소식을 듣고 앉아 울며 금식하고 하나님께 기도했던 느헤미야처럼, 우리도 교회와 가정과 이 나라의 아픔을 보고 외면하지 않게 하옵소서. 문제를 비판하는 데 머물지 않고 먼저 무릎 꿇어 기도하며, 맡겨진 자리에서 무너진 곳을 다시 세우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그의 종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리라” 고백했던 믿음처럼, 우리도 주님을 의지하여 다시 세우고 회복하는 일에 힘쓰게 하옵소서.

주님, 여름사역을 은혜 가운데 마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여름성경학교와 수련회, 단기선교와 여러 교육 사역을 통해 받은 은혜가 잠시의 감동으로 끝나지 않게 하시고, 일상의 삶 속에서 순종의 열매로 나타나게 하옵소서. 수고한 교역자들과 교사들, 봉사자들에게 하늘의 위로와 새 힘을 더하여 주옵소서.

새 학기를 시작한 다음세대를 주님의 손에 맡겨드립니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지혜와 건강을 주시고, 좋은 친구와 좋은 스승을 만나게 하옵소서. 경쟁과 비교 속에서도 자신의 가치를 잃지 않게 하시며, 하나님께서 주신 꿈과 달란트를 발견하여 선하게 사용하게 하옵소서. 청년들의 진로와 취업의 길도 열어 주시고, 조급함과 두려움 대신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신뢰하게 하옵소서.

우리 교회가 하반기 사역을 새롭게 시작합니다. 목장과 구역 모임, 양육과 훈련, 각 기관의 사역을 축복하여 주옵소서. 모일 때마다 말씀과 기도가 풍성하게 하시고, 서로의 형편을 살피며 함께 울고 함께 웃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목자와 구역장, 교사와 각 기관의 일꾼들에게 지혜와 인내를 주시며, 사람의 인정이나 칭찬을 구하지 않고 주님께 하듯 기쁨으로 섬기게 하옵소서.

가을 심방과 목회적 돌봄의 모든 발걸음도 인도하여 주옵소서. 목회자들이 성도들의 가정을 찾아 말씀을 전하고 기도할 때마다 위로와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있게 하시며, 심방 받는 가정마다 하늘의 평안과 믿음의 새 힘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 경제적인 어려움과 자녀 문제, 관계의 아픔으로 기도하는 가정들의 탄식을 들으시고 가장 선한 길을 열어 주옵소서.

대한민국을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정치와 이념, 세대와 지역의 갈등이 미움과 분열로 깊어지지 않게 하시고,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며 대화와 양보로 공동의 선을 이루어 가게 하옵소서. 대통령과 모든 위정자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지혜를 주셔서 자신의 유익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과 미래를 먼저 생각하게 하옵소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가정과 소상공인들을 돌보시고, 청년들에게 일자리와 희망을 주시며, 약한 이들이 보호받는 따뜻하고 정의로운 나라가 되게 하옵소서.

담임목사님과 모든 교역자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붙드시고 영육 간에 강건함을 더하여 주옵소서.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하며 성도들을 돌볼 때 하늘의 지혜와 사랑을 공급하시고, 시대를 분별하며 교회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선한 목자가 되게 하옵소서.

이 시간 말씀을 전하시는 목사님께 성령으로 기름 부어 주셔서 선포되는 말씀이 우리의 굳은 마음을 깨뜨리고, 낙심한 영혼을 일으키며, 삶의 방향을 바로잡는 생명의 말씀이 되게 하옵소서. 듣는 저희에게 겸손한 마음을 주시고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 순종으로 응답하게 하옵소서.

정성을 다하여 드리는 찬양과 예물을 기쁘게 받아 주시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예배를 위해 수고하는 모든 손길을 기억하여 복 내려 주옵소서. 9월의 모든 날을 주님의 손에 맡겨 드리오니 가을의 들판이 풍성한 열매를 준비하듯 우리의 삶에도 믿음과 사랑과 충성의 열매가 풍성히 맺히게 하옵소서.

우리의 반석이시며 영원한 소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매일성경 묵상 사사기 1:22-36

 

쫓아내지 못한 것이 아니라 남겨 두었습니다

  • 매일성경 묵상 사사기 1:22-36

오늘도 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씀 앞에 앉습니다. 사사기 1장 후반부를 읽으면 처음의 힘찬 정복 이야기가 점점 어두운 방향으로 기울어 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함께하셨다”는 말로 시작하지만, 곧 “쫓아내지 못하였다”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더 정확히 들여다보면 힘이 없어서 실패한 것만도 아닙니다. 힘이 생긴 뒤에도 가나안 사람을 남겨 두고 노역을 시켰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죄와 타협하는 제 마음을 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순종이 무엇인지, 작은 타협이 어떻게 신앙 전체를 흔들 수 있는지, 그리고 불완전한 우리를 끝까지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함께 묵상해 보려 합니다.

벧엘을 얻었지만 옛 질서는 다른 곳에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삿 1:22-26)

본문은 요셉 가문이 벧엘을 치러 올라가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22절의 첫 문장이 중요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며 잠시 멈추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무엇을 이루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함께하셨습니다. 전쟁의 승리보다 하나님의 임재가 먼저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시작은 언제나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능력이 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는가가 중요합니다.

벧엘은 본래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히브리어 ‘베이트 엘’(בֵּית־אֵל)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집’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 성의 옛 이름이 루스였다고 말합니다.

이 이름을 보는 순간 저는 창세기의 야곱을 떠올립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도망하던 밤, 돌을 베고 잠을 자다가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와 하나님의 천사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그는 그곳을 벧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벧엘이라는 이름에는 하나님의 임재와 언약의 기억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이 야곱에게 이어지고,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이 이제 그 땅을 차지하는 장면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봅니다.

세대는 바뀝니다.

아브라함도 죽고, 이삭도 죽고, 야곱도 죽었으며, 모세도 여호수아도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죽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생애보다 하나님의 언약은 깁니다.

저는 제 인생을 너무 짧은 시간 안에서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한 해의 결과를 보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판단하고, 몇 달의 어려움만으로 하나님이 나를 잊으셨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벧엘을 바라보면 하나님의 시간은 제 시간보다 훨씬 길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야곱이 돌베개를 베었던 그 땅을 수백 년 후 그의 후손들이 다시 밟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잊지 않으십니다.

요셉 가문은 벧엘을 정탐하게 합니다. 정탐꾼들은 성에서 나오는 한 사람을 만나 성읍의 입구를 알려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면 그에게 선대하겠다고 약속합니다.

그 사람은 입구를 알려 주었고, 이스라엘은 성읍을 칼로 치되 그 사람과 그의 가족은 살려 줍니다.

겉으로 보면 여리고에서 라합이 정탐꾼을 숨겨 주었던 사건과 비슷해 보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고백했습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심을 인정했고, 결국 이스라엘 공동체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벧엘의 이 사람에게서는 그러한 신앙 고백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본문은 그가 헷 사람의 땅으로 가서 성읍을 건축하고 그 이름을 다시 ‘루스’라고 불렀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 대목이 매우 의미심장하게 느껴집니다.

벧엘에서 제거된 루스가 다른 곳에서 다시 세워집니다.

하나님의 집이라는 이름이 자리 잡았지만, 과거의 질서를 상징하는 이름도 다른 장소에서 다시 살아납니다.

본문은 이 행동을 장황하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사기 전체의 흐름 속에서 보면 이 장면은 앞으로 반복될 불완전한 정복과 타협의 분위기를 암시합니다.

저는 여기에서 제 신앙생활을 돌아봅니다.

혹시 저는 어떤 죄를 한 자리에서만 옮겨 놓고 제거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묻게 됩니다.

겉으로는 끊은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방식으로 다시 세우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합니다.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하나 내려놓았지만, 다른 방식으로 인정욕구를 채우고 있을 수 있습니다.

돈에 대한 탐욕을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성공에 대한 집착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세울 수도 있습니다.

육체적인 욕망을 끊었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속 상상과 은밀한 습관을 그대로 품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미움을 버렸다고 말하지만 상대가 실패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 미움을 다른 자리에 다시 세울 수도 있습니다.

루스는 다른 땅에서 다시 세워졌습니다.

죄는 이름을 바꾸고 형태를 바꾸어 살아남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신앙을 단순한 행동 수정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것은 장소를 옮긴 죄가 아니라 죽은 죄입니다.

신약의 언어로 말하면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는 것입니다.

바울은 죄를 관리하라고 하지 않고 죽이라고 말합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권면합니다.

왜 이렇게 강하게 말할까요?

죄는 그대로 두면 자라기 때문입니다.

조금의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때때로 죄를 너무 합리적으로 다루려 합니다.

“이 정도는 내 삶에 큰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다.”

“적당히 통제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도 이 정도는 가지고 산다.”

그러나 사사기를 읽으면 죄와 우상에 대한 작은 양보가 이후 이스라엘 전체를 얼마나 깊은 혼란으로 끌고 가는지 보게 됩니다.

여기서 저는 ‘쫓아내다’라는 중요한 히브리어를 생각합니다. ‘야라쉬’(יָרַשׁ)는 어떤 경우에는 소유하다, 차지하다라는 뜻을 가지며, 정복의 문맥에서는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한다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그러나 기업을 차지하려면 그 땅에 자리 잡은 우상숭배적 질서와 분리되어야 했습니다.

여기에는 구속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가나안 정복을 오늘의 교회가 문자적으로 반복해야 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성취와 가나안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특정한 구속사적 상황 안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새 언약 시대의 교회가 싸우는 대상은 민족이나 사람 자체가 아닙니다.

우리의 싸움은 죄와 거짓과 사탄의 권세를 향한 영적인 싸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죽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오늘 ‘쫓아내야 할 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제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교만입니다.

탐욕입니다.

음욕입니다.

질투입니다.

사람을 이용하려는 욕망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기충족의 마음입니다.

이것들은 내 마음 안에서 ‘루스’라는 옛 성을 다시 세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저를 단순히 조금 나은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는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 안에서 새로운 생명이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인의 변화는 외부의 몇 가지 행동을 고치는 수준을 넘어섭니다.

중심이 바뀌는 것입니다.

왕이 바뀌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었던 삶에서 그리스도께서 주인이 되시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제 안에 다시 세워진 루스가 없는지 살펴보고 싶습니다.

과거에는 분명 끊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다른 모습으로 다시 살아나 있지는 않은지, 회개했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장소만 옮겨 둔 것은 아닌지 묵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옛 이름을 다른 곳에서 다시 세우지 않게 하소서. 벧엘을 벧엘답게 하시고, 제 삶 전체가 하나님의 집이 되게 하소서.”

그리스도 안에서 제 삶의 일부만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관계와 돈과 욕망과 말과 시간까지 새롭게 되기를 원합니다.

강해졌는데도 쫓아내지 않은 이유를 제 마음에서 찾습니다 (삿 1:27-30)

27절부터 분위기가 급격하게 무거워집니다.

므낫세는 벧스안과 그 주변 마을의 주민을 쫓아내지 못합니다. 다아낙도 그렇고, 돌도 그렇고, 이블르암도 그렇고, 므깃도도 그렇습니다.

본문은 반복해서 말합니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

여기에서 ‘결심하고’라는 표현이 눈에 들어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 땅에 계속 거주하려 했습니다.

죄 역시 그렇습니다.

저는 죄가 가만히 기다렸다가 제가 원하면 떠나는 손님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죄는 자리를 차지하려 합니다.

마음을 점령하려 합니다.

한 번 허용한 틈을 거점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죄와의 싸움에는 단호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28절에서 더 중요한 사실이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저는 이 구절에서 사사기 1장 전체의 핵심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를 봅니다.

처음에는 “쫓아내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강해진 후에도 쫓아내지 않습니다.

이제는 능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의지의 문제가 됩니다.

못한 것이 아니라 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강해졌습니다.

원한다면 가나안 족속을 제거할 수 있는 위치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들을 남겨 두고 노역을 시킵니다.

노역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스’(מַס)는 강제 노동이나 부역, 조공의 성격을 가진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의 생각은 현실적으로 매우 합리적으로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굳이 쫓아낼 필요가 있는가?”

“일꾼으로 사용하면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가?”

“우리에게 세금을 내고 노동력을 제공한다면 오히려 유익하지 않은가?”

저는 이것이야말로 타협의 가장 위험한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죄를 버리지 않는 이유가 단순히 죄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때로는 죄가 유익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죄가 내게 어떤 이익을 주기 때문에 남겨 둡니다.

정직하게 살면 손해 보는 것 같아서 작은 거짓말을 남겨 둡니다.

관계를 끊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외로움을 달래 주기 때문에 잘못된 관계를 계속 붙잡습니다.

지나친 욕심이라는 것을 알지만 성공을 가져다줄 것 같아 내려놓지 않습니다.

미움을 품고 있으면 내가 강한 사람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용서를 거부하기도 합니다.

교만은 나를 높여 주고, 탐욕은 더 많은 것을 얻어 줄 것 같고, 분노는 상대를 통제할 힘을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죄를 노역시키는 것입니다.

죄를 제거하지 않고 이용하려 합니다.

저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면서 제 마음의 구조를 발견합니다.

“이것은 나쁜 것이기는 하지만 내게 쓸모가 있어.”

바로 그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지 말씀은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의 우상적 문화와 타협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보다 경제적인 효용을 선택했습니다.

순종보다 이익을 택했습니다.

이것이 사사기의 비극을 여는 문입니다.

저는 여기서 신앙의 매우 중요한 문제를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할 때도 자꾸 손익을 계산합니다.

“이렇게 하면 나에게 무엇이 좋은가?”

“이 명령을 따르면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용서하면 상대가 달라질까?”

“정직하게 살면 성공할 수 있을까?”

하지만 성경적 순종의 근거는 유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생명과 복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순종하는 순간에는 손해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 자체가 그렇습니다.

인간적인 계산으로 보면 십자가는 실패였습니다.

예수님은 권력을 얻지 않으셨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힘으로 제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종을 통해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빌립보서는 예수께서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순종은 조건부 순종이 아니었습니다.

“이 일이 내게 유익한가?”를 먼저 묻는 순종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 드리는 순종이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순종을 바라보며 제 불순종이 얼마나 쉽게 계산으로 포장되는지를 봅니다.

저는 종종 지혜롭다고 생각하며 타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지혜가 아니라 불순종일 수 있습니다.

29절에서는 에브라임이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들이 가운데 거주합니다.

30절에서는 스불론도 기드론과 나할롤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들에게 노역을 시킵니다.

반복되는 문장을 읽다 보면 답답함이 생깁니다.

“왜 계속 쫓아내지 못하는가?”

그러나 저는 이 질문을 이스라엘에게만 던질 수 없습니다.

“나는 왜 계속 같은 죄를 남겨 두는가?”

저 역시 반복합니다.

한 번 회개했다고 끝나지 않습니다.

어제 내려놓은 것을 오늘 다시 붙듭니다.

한때 뜨겁게 기도했지만 다시 냉랭해집니다.

말씀 앞에서 감동받았지만 생활로 돌아오면 이전의 습관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저는 복음이 단순히 과거의 죄를 한 번 용서받는 소식 이상이라는 사실을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과거의 죄책만 해결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현재 죄의 권세와 싸우게 하시며, 장차 죄의 존재 자체에서 우리를 완전히 해방하실 분입니다.

신학적으로 구원은 칭의만이 아니라 성화와 영화까지 포함합니다.

십자가로 의롭다 하시고,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시며, 마지막 날에 완전하게 하십니다.

저는 여전히 가나안을 남겨 두는 사람처럼 불완전합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제 안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화는 하루아침의 정복이 아니라 매일의 전쟁입니다.

오늘 탐욕을 죽이고, 내일 다시 올라오는 탐욕과 싸웁니다.

오늘 교만을 회개하고, 내일 다른 모습으로 찾아오는 교만을 발견합니다.

이 반복이 지겨울 때도 있습니다.

“나는 왜 아직도 이 모양인가?”

그러나 여기서 낙심하면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죄가 다시 나타나지 않는 완벽함이 아니라 죄와 평화를 맺지 않는 것입니다.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노역시키며 곁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실패할 수는 있지만 타협을 정당화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오늘 제 삶 속에서 “강해졌는데도 남겨 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싶습니다.

끊을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실은 버리기 싫어서 붙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정직하게 묻고 싶습니다.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하지만 사실은 다른 것을 더 좋아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용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사실은 분노를 내려놓기 싫어서일 수 있습니다.

검소하게 살 수 없다고 하지만 사실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 때문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제 변명보다 제 마음의 중심을 아십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렇게 기도하고 싶습니다.

“주님, 제가 ‘못한다’고 말하며 숨겨 둔 ‘하기 싫다’를 보여 주소서.”

이 기도가 조금 두렵습니다.

하지만 은혜는 진실을 피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죄를 덮어 감추는 은혜가 아니라 죄를 드러내고 용서하며 새롭게 하는 은혜입니다.

타협이 반복되자 하나님의 백성이 오히려 밀려나기 시작했습니다 (삿 1:31-36)

31절부터 상황은 더욱 심각해집니다.

아셀은 악고 주민과 시돈 주민과 알랍과 악십과 헬바와 아빅과 르홉 주민을 쫓아내지 못합니다.

그 결과 매우 의미 있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아셀 족속이 그 땅 주민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하였으니.”

앞에서는 가나안 사람들이 이스라엘 가운데 거주한다고 표현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문장의 중심이 뒤집힌 듯합니다.

이스라엘 지파가 가나안 사람들 가운데 거주합니다.

저는 이 작은 문장 변화가 사사기의 영적 추락을 보여 주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중심이고 가나안 사람들이 남아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타협이 계속되면서 어느 순간 하나님의 백성이 주변부로 밀려납니다.

죄의 특징이 바로 이렇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죄를 통제한다고 생각합니다.

“원할 때 멈출 수 있다.”

“내가 이것을 이용하는 것이다.”

“내가 주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관계가 역전됩니다.

내가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이 나를 지배하고, 내가 돈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나를 끌고 갑니다.

내가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이 내 시간을 통제합니다.

내가 분노를 이용해 상대를 통제한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분노가 내 삶을 지배합니다.

죄를 종으로 삼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내가 죄의 종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죄에는 중립지대가 없습니다.

죄와 동거하면서 내가 끝까지 주도권을 유지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33절에서는 납달리가 벧세메스 주민과 벧아낫 주민을 쫓아내지 못합니다.

그들 가운데 거주하다가 결국 그 주민들이 납달리에게 노역하게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여전히 어느 정도 힘을 행사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처음 명령과는 멀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34절에서 상황은 더욱 극적으로 뒤집힙니다.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하지 아니하였으며.”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사사기 1장의 비극이 절정에 이르는 것을 느낍니다.

누가 누구를 몰아내야 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차지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스라엘이 쫓겨납니다.

단 지파가 산지로 밀려나고 골짜기로 내려오지 못합니다.

순종해야 할 백성이 밀려나고 있습니다.

정복의 주체였어야 할 사람이 압박받는 대상이 됩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영적 타협의 마지막 결과를 봅니다.

죄를 남겨 두면 결국 죄가 내 삶의 영역을 좁혀 갑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부분만 차지합니다.

그러나 서서히 기도의 영역을 밀어냅니다.

말씀의 시간을 밀어냅니다.

건강한 관계를 밀어냅니다.

정직을 밀어냅니다.

감사를 밀어냅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 안에서 살아야 할 사람이 두려움과 욕망과 습관 속에 갇히게 됩니다.

저는 그래서 죄를 단순히 도덕적 실수 정도로 가볍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죄는 인간을 노예로 만듭니다.

성경에서 구원은 죄책의 용서인 동시에 종살이에서의 해방입니다.

출애굽이 그것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단순히 잘못한 것을 용서받은 것이 아닙니다.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더 큰 출애굽을 이루십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건져 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너를 용서한다”고 말씀하시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 자유롭게 살아라”고 부르십니다.

죄의 종으로 살지 말고 의의 종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35절에서는 아모리 족속이 헤레스 산과 아얄론과 사알빔에 계속 거주하려고 버팁니다. 그러나 요셉 가문의 힘이 강해지자 그들에게 노역을 시킵니다.

여기서 다시 같은 문제가 반복됩니다.

힘이 생겼지만 완전히 쫓아내지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이 반복을 왜 이렇게 자세히 기록하셨는지 생각합니다.

단순히 고대 부족의 정착 상황을 알려 주려는 것만은 아닙니다.

사사기 전체의 원인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사기의 반복되는 배교와 우상숭배와 압제는 갑자기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1장에서 이미 씨앗이 뿌려졌습니다.

불완전한 순종입니다.

적당한 타협입니다.

말씀보다 현실적인 이익을 더 중요하게 여긴 선택입니다.

“조금 남겨 두어도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여기서 작은 선택의 중요성을 배웁니다.

인생의 큰 붕괴는 대개 작은 균열에서 시작됩니다.

부부 관계도 한 번의 큰 사건보다 오랜 시간 쌓인 작은 무관심 때문에 무너지기도 합니다.

신앙도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기도를 미루고,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죄를 합리화하면서 서서히 약해집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보다 성공을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하고, 진리보다 사람의 인기를 더 중요하게 여기며, 거룩보다 규모와 성과를 우선하기 시작하면 겉으로는 강해 보여도 중심에서는 이미 타협이 진행될 수 있습니다.

저는 특히 목회자로서 이 말씀을 두렵게 받습니다.

교회가 강해지는 것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사람이 많고, 재정이 안정되고, 프로그램이 많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스라엘도 강해졌습니다.

그런데 강해진 뒤에 오히려 하나님의 명령을 자기 방식대로 바꾸었습니다.

힘이 약할 때보다 힘이 강할 때 더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약할 때는 하나님을 의지하지만 강해지면 하나님 없이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래서 하나님께 성공보다 충성을 구하고 싶습니다.

“주님, 저를 크게 쓰소서”라는 기도보다 “주님, 끝까지 순종하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더 많이 드리고 싶습니다.

본문 마지막 36절은 아모리 족속의 경계를 설명하며 마무리됩니다.

지리적인 경계선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저는 여기서 ‘경계’라는 개념을 생각하게 됩니다. 히브리어로 경계를 뜻하는 ‘게불’(גְּבוּל)은 땅의 한계와 영역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주신 경계를 확장하며 약속의 땅을 차지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불순종 때문에 오히려 원수의 경계가 남아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제 마음에 적용해 봅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려야 할 마음의 영역에 아직 다른 경계선이 그어져 있지는 않은가 묻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하나님께 드리지만 이 부분은 제가 간섭받고 싶지 않습니다.”

돈 문제는 내 방식대로 하고 싶고, 관계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고, 성적 욕망은 말씀의 기준에서 조금 벗어나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삶의 대부분을 드리고 작은 방 하나만 잠가 둡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제 삶의 일부만의 주님이 아닙니다.

그분은 모든 것의 주님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제게 끊임없이 묻습니다.

“아직 누구의 경계가 네 안에 남아 있느냐?”

저는 이 질문 앞에서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됩니다.

사사기 1장을 읽으면 인간의 불완전함이 선명해집니다.

유다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요셉 가문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므낫세도 에브라임도 스불론도 아셀도 납달리도 단도 실패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온전히 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사기는 점점 한 가지 질문을 만들어 냅니다.

“누가 하나님의 백성을 완전히 구원할 것인가?”

사사들이 일어납니다.

옷니엘도, 에훗도, 드보라도, 기드온도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제한된 구원자들입니다.

그들이 살아 있을 때 잠시 평화가 있지만 죽으면 다시 백성은 타락합니다.

이 반복은 궁극적으로 완전한 구원자를 기다리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실패했던 순종을 완전히 이루셨습니다.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지만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사람의 인기와 권력의 유혹에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도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승리는 가나안의 특정 도시를 정복한 승리보다 훨씬 큽니다.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를 깨뜨린 승리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새 창조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불완전한 순종을 바라보며 절망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완전하게 순종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그분의 의가 제 의가 되고, 그분의 승리가 제 구원의 근거가 됩니다.

하지만 은혜는 저를 타협 속에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저를 자유롭게 하셨기 때문에 이제 자유인답게 살라고 부르십니다.

성령께서 제 안에서 죄와 싸우게 하십니다.

새 언약은 돌판에 명령만 기록하는 언약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새기는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 새 마음을 주시고 새 영을 넣어 주시며 그의 율례를 따라 살도록 성령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화는 제가 홀로 가나안을 정복하는 일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제 안에서 이루시는 새 창조의 역사입니다.

오늘 저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아직 남아 있는 죄가 있다고 그것을 정상이라고 부르지 않겠습니다.

아직 넘어지는 부분이 있다고 타협을 정당화하지 않겠습니다.

매일 회개하고, 매일 복음을 붙들고, 매일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이 보여 주는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더 이상 죄의 경계가 없습니다.

죽음도 애통도 곡하는 것도 아픈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하고,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십니다.

벧엘, 곧 ‘하나님의 집’이라는 이름이 궁극적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날을 바라보며 오늘 제 마음의 작은 경계 하나를 더 하나님께 내어 드리고 싶습니다.

마무리

사사기 1장 후반부를 묵상하며 저는 한 번의 큰 불순종보다 반복되는 작은 타협이 더 두렵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처음에는 쫓아내지 못했다고 말하지만, 강해진 뒤에도 남겨 두었고, 결국 어떤 지파는 가나안 사람들 가운데 살았으며 단 지파는 오히려 산지로 밀려났습니다. 오늘 저는 제 안에 남겨 둔 ‘가나안’과 다른 곳에 다시 세운 ‘루스’를 정직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죄를 이용하거나 관리하려 하지 않고 십자가 앞으로 가져가겠습니다. 완전한 순종으로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성령의 도우심으로 작은 타협 하나라도 끊어 내겠습니다. 오늘 제 결단은 단순합니다. “주님, 제 삶에 주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경계를 남겨 두지 않게 하소서.”

매일성경 묵상 사사기 1:11-21

구하는 믿음과 멈추는 믿음 사이에서

  • 매일성경 묵상 사사기 1:11-21

오늘도 저는 조용히 말씀 앞에 앉습니다. 사사기 1장 11절부터 21절은 옷니엘과 악사의 믿음, 겐 사람의 동행, 유다 지파의 계속되는 승리, 그리고 철 병거 앞에서 멈춘 순종과 예루살렘을 완전히 차지하지 못한 베냐민의 모습을 한 장면 안에 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약속을 붙잡고 더 구하며, 어떤 사람은 이미 주어진 약속 앞에서도 현실의 장벽을 크게 바라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며 “하나님이 주신 것은 무엇이며, 나는 어디까지 순종하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오늘 말씀 속 인물들의 선택을 천천히 살펴보면서, 제 삶의 부족함까지 비추시는 하나님의 뜻을 함께 발견하고 싶습니다.

약속된 땅을 얻고도 샘물을 구하는 믿음입니다 (삿 1:11-15)

유다 자손은 헤브론을 정복한 후 드빌 주민에게로 나아갑니다. 드빌의 옛 이름은 기럇 세벨이었습니다. 갈렙은 기럇 세벨을 공격하여 점령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딸 악사를 아내로 주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러자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그 성을 점령했고, 갈렙은 약속대로 딸 악사를 그에게 아내로 줍니다.

이 대목을 읽을 때 저는 먼저 옷니엘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후 사사기 3장에서 그는 이스라엘의 첫 번째 사사로 등장합니다. 사사기 1장에서는 아직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사사로 소개되지 않지만, 그의 믿음과 용기가 이미 작은 장면 속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람의 큰 사명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작은 순종의 현장에서 사람을 준비시키십니다. 아무도 크게 주목하지 않는 자리에서 믿음으로 한 발을 내딛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사람이 훗날 더 큰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저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제게 큰 일을 맡기시기를 바라면서도 오늘 제 앞에 놓인 작은 순종은 가볍게 여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오늘의 작은 순종과 내일의 큰 사명이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옷니엘이 드빌을 점령한 사건은 군사적인 용맹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 배경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의 땅이라는 언약적 의미가 있습니다. 땅을 차지한다는 것은 단순히 영토를 확장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기업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었습니다.

구약에서 기업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나할라’(נַחֲלָה)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선물로 나누어 주시는 몫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은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 낸 성공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적 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선물이라고 해서 아무 행동도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셨으니 들어가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니 싸워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업이라 하셨으니 실제로 차지해야 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은혜와 책임이 서로 반대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배웁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아는 사람일수록 더 적극적으로 순종합니다. 은혜가 순종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순종의 이유가 됩니다.

그리고 본문은 옷니엘보다 악사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듯한 흥미로운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악사는 출가하면서 아버지에게 밭을 구합니다. 그리고 또다시 아버지 갈렙에게 말합니다.

“내게 복을 주소서.”

이미 남방 땅을 받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남방 지역은 상대적으로 건조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땅이 있어도 물이 없다면 농경 생활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악사는 말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네겝 땅으로 보내시오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그러자 갈렙은 윗샘과 아랫샘을 그녀에게 줍니다.

저는 이 짧은 이야기가 참 인상적으로 다가옵니다.

악사는 탐욕스러운 사람이 아닙니다. 주어진 것을 감사하지 못해 더 요구한 것도 아닙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업이 실제로 살아 있는 땅이 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땅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물이 필요했습니다.

성경에서 물은 생명을 상징하는 매우 중요한 이미지입니다. 물이 없는 땅은 오래 버틸 수 없습니다. 특히 팔레스타인과 같은 건조한 지역에서 샘은 곧 생존과 번영을 의미했습니다.

본문에서 샘물을 가리키는 표현은 ‘굴롯’(גֻּלֹּת)이라는 말과 연결되는데, 물이 솟아나거나 흘러나오는 샘을 뜻합니다. 갈렙은 한두 번 사용할 물을 준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흘러나오는 생명의 근원을 준 것입니다.

이 장면을 묵상하면서 저는 제 신앙을 돌아봅니다.

혹시 저는 땅만 받고 만족하려 하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합니다.

외형적인 신앙의 자리는 있지만 내면을 적시는 샘이 말라 있지는 않은가 돌아봅니다.

교회에 출석하고, 말씀을 읽고, 사역을 하고, 여러 신앙 활동을 하지만 정작 영혼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과의 생생한 교제가 마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땅은 있는데 샘이 없는 것입니다.

직분은 있는데 기도가 없습니다.

지식은 있는데 감격이 없습니다.

사역은 있는데 사랑이 없습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있지만 그 말씀이 제 내면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악사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샘물도 내게 주소서.”

저는 이 간청을 제 기도로 삼고 싶습니다.

“하나님, 제게 땅만 주지 마시고 샘도 주십시오.”

“할 일을 주실 뿐 아니라 그것을 감당할 영적인 생명력도 주십시오.”

“말씀을 주실 뿐 아니라 말씀을 깨닫고 사랑하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도 주십시오.”

악사가 아버지에게 복을 구한 모습은 신약의 기도와도 연결하여 묵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아버지께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고 말씀하셨고, 누가복음에서는 그 좋은 것을 성령과 연결하여 말씀하십니다.

물론 사사기의 악사 이야기를 곧바로 성령에 대한 직접적인 예언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구속사적 흐름 안에서 ‘생명을 공급하는 물’이라는 이미지는 점점 깊어집니다.

광야에서 반석에서 물이 나옵니다.

시편은 하나님을 생명의 원천이라고 고백합니다.

선지자들은 메마른 땅에 물이 흐르는 회복의 날을 예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오는 자가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을 믿는 자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올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요한복음은 이것을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라고 설명합니다.

저는 여기에서 악사가 구한 샘보다 더 깊고 영원한 샘을 바라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열린 새 언약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단지 살아갈 공간만 주신 것이 아니라 그 공간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갈 생명까지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주셨고, 성령을 부어 주셔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저는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물론 욕망을 채우기 위한 탐욕스러운 요구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필요한 은혜를 구하는 것은 다릅니다.

악사는 자신이 받은 땅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 샘을 구했습니다.

저도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지혜가 부족하면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사랑이 메말랐다면 사랑할 힘을 구해야 합니다.

용서하기 어렵다면 용서할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목회가 메말랐다면 다시 말씀과 기도의 샘을 구해야 합니다.

삶이 지쳐 있다면 성령께서 새롭게 하시는 힘을 구해야 합니다.

저는 때때로 하나님께 많이 구하는 것을 믿음 없음처럼 생각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믿음의 사람들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구합니다.

다윗은 구합니다.

선지자들이 구합니다.

제자들이 구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구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문제는 구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무엇을 왜 구하느냐입니다.

오늘 제 마음에서 이런 기도가 나옵니다.

“주님, 제가 받은 땅을 메마른 채 방치하지 않게 하소서. 윗샘과 아랫샘을 주시듯 제 삶의 위와 아래, 보이는 곳과 보이지 않는 곳, 공적인 사역과 개인적인 마음까지 은혜의 물로 적셔 주소서.”

그리고 저는 한 가지를 더 묵상합니다.

갈렙은 악사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딸이 이미 땅을 받았으니 욕심내지 말라고 꾸짖지 않았습니다. 필요한 것을 아는 딸의 요청에 윗샘과 아랫샘을 모두 주었습니다.

저는 이 모습에서 하늘 아버지의 선하심을 생각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겨우 살아남을 만큼만 주시는 인색한 아버지가 아닙니다.

그분은 자기 아들까지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풍성함을 보여 주는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저는 오늘 악사처럼 담대하게 구하고 싶습니다.

“아버지, 제게 샘물을 주소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제 삶에 이미 주신 은혜의 샘을 귀하게 여기며 살고 싶습니다.

함께 걸어가는 사람과 끝까지 밀어붙이는 순종입니다 (삿 1:16-18)

본문 16절에는 모세의 장인이 속한 겐 사람의 자손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종려나무 성읍에서 유다 광야로 올라가 아랏 남방에 이르렀고, 유다 자손과 함께 그 백성 가운데 거주합니다.

겐 사람은 이스라엘의 혈통에 속한 지파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와의 관계를 통해 이스라엘 역사 속으로 들어왔고, 이후 여러 장면에서 이스라엘과 연결되어 나타납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을 때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혈통의 폐쇄성 속에 갇혀 있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합니다.

구약의 언약은 분명히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처음부터 그 목적에는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지만 이스라엘만 사랑하기 위해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통하여 열방을 복 주시기 위해 선택하셨습니다.

겐 사람의 자손들이 유다와 함께 거주하는 모습은 이후 신약에서 훨씬 크게 펼쳐질 열방의 구원을 희미하게 미리 보여 주는 장면처럼 다가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의 새 백성을 이룹니다.

에베소서는 그리스도께서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둘을 하나로 만드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혈연이나 민족의 우월성으로 구성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부름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묵상하면서 교회가 어떤 공동체여야 하는지를 생각합니다.

교회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만 편안하게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배경도 다르고, 살아온 환경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사회적 위치도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 한 분 때문에 형제와 자매가 되는 곳입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저는 얼마나 쉽게 사람을 구분하는지 모릅니다.

나와 말이 잘 통하는 사람에게 마음이 갑니다.

내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을 가까이합니다.

경제적 수준이나 학력이나 사회적 위치에 따라 사람을 다르게 바라볼 위험도 있습니다.

그런 저에게 십자가는 말합니다.

“너 역시 은혜로 들어온 사람이다.”

누구도 하나님의 나라에 자기 자격으로 들어오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조차 자신의 의 때문에 가나안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명기는 그 사실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다른 사람보다 나아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저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문을 열어야 합니다.

17절에서는 유다 지파가 형제 시므온과 함께 나아가 스밧에 거주하는 가나안 사람을 치고 그 성을 진멸합니다. 그리고 그 성의 이름을 호르마라고 부릅니다.

‘호르마’는 ‘헤렘’(חֵרֶם), 곧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것, 심판 아래 놓여 진멸된 것이라는 의미와 연결됩니다.

이 표현 역시 현대 독자에게는 쉽지 않은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본문을 읽을 때 폭력을 미화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성경의 역사적·언약적 맥락을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가나안에 대한 진멸은 이스라엘에게 일반적으로 모든 이방 민족을 파괴하라는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특정한 구속사적 시기에 가나안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시행된 독특한 사건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심판을 이스라엘이 자기 민족적 욕망을 위해 마음대로 반복할 권리를 받은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이후 이스라엘 자신도 가나안과 같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어느 민족을 편들고 어느 민족을 본질적으로 미워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이스라엘에게도 동일한 기준을 적용합니다.

저는 이 사실 앞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이 죄를 가볍게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는 더 큰 책임이 따릅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많이 안다고 해서 저절로 거룩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새 언약에서는 그 거룩함의 길이 십자가와 성령 안에서 더욱 깊게 열립니다.

저는 죄를 죽여야 합니다.

그러나 죄인을 죽이는 방식으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제 안의 죄를 죽이는 것입니다.

탐욕을 끊고, 음욕을 끊고, 교만을 끊고, 미움을 끊고, 거짓을 끊는 영적 싸움을 해야 합니다.

신약의 언어로 말하면 “육신의 행실을 죽이는” 싸움입니다.

그 싸움은 성령으로 가능합니다.

18절에서는 유다가 가사와 그 지역, 아스글론과 그 지역, 에그론과 그 지역을 점령했다고 기록합니다. 이 도시들은 이후 블레셋의 중요한 성읍으로 계속 등장하게 됩니다.

여기서 저는 사사기의 기록이 매우 현실적이라는 사실을 생각합니다.

어떤 순간에는 승리가 분명합니다.

유다는 전진합니다.

성읍을 점령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기서 이야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곧이어 19절에서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나타납니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 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저는 이 전환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성공한 이야기만 읽고 싶어 합니다.

믿음으로 순종하면 모든 것이 즉시 잘되고, 문제가 사라지고, 어떤 장애물도 남지 않는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단순한 성공담을 쓰지 않습니다.

믿음의 역사 안에도 승리와 한계가 동시에 기록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셨고 실제로 승리했지만, 그 다음에는 철 병거가 등장합니다.

저는 이 사실에서 제 신앙생활의 모습도 봅니다.

어제는 믿음으로 잘 견뎠는데 오늘은 흔들릴 수 있습니다.

어떤 문제에서는 담대했지만 다른 문제에서는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사역의 한 영역에서는 큰 믿음을 보이면서 개인적인 관계에서는 믿음 없이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제의 순종이 오늘의 순종을 대신해 주지는 않습니다.

믿음은 매일 새롭게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삶입니다.

유다와 시므온이 함께 나아가는 장면을 보면서 저는 공동체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홀로 영웅이 되는 신앙보다 서로를 붙들며 함께 가는 신앙을 원하십니다.

제가 강할 때 누군가를 도울 수 있고, 제가 약할 때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도움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귀찮아하지 않는 신앙인이 되고 싶습니다.

십자가 역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만 회복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새로운 공동체를 만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한 몸입니다.

저는 오늘 제 곁의 믿음의 동역자들을 소중히 여기고 싶습니다.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교만을 내려놓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울며 함께 싸우는 믿음의 관계를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철 병거 앞에서 멈춘 믿음, 끝까지 이루실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삿 1:19-21)

19절은 오늘 본문 가운데 가장 강한 질문을 던지는 구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 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셨는데 왜 쫓아내지 못했을까?

하나님보다 철 병거가 강했을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출애굽의 하나님은 애굽의 병거를 홍해에 수장시키신 분입니다. 하나님께 철 병거는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사사기 전체의 문맥에서 이 구절은 이스라엘의 제한된 순종과 믿음의 부족을 보여 주는 쪽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쫓아내다’ 또는 ‘차지하다’라는 의미로 반복되는 히브리어 ‘야라쉬’(יָרַשׁ)는 소유하다, 차지하다, 몰아내다는 의미를 함께 가집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기업을 차지하는 일과 그 땅을 점유하고 있는 세력을 몰아내는 일이 같은 단어의 세계 안에 있습니다.

이것이 제게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삶을 누리려면 옛것을 밀어내는 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받았지만 미움을 그대로 붙들고 있다면 새 삶을 충분히 누리기 어렵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었지만 여전히 죄의 습관을 사랑한다면 그 자유를 실제 삶에서 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주셨지만 그 안의 우상을 그대로 두면 언젠가 그 우상이 다시 사람을 지배합니다.

그런데 유다는 철 병거 앞에서 멈춥니다.

당시 철제 전차는 군사적으로 매우 강력한 무기였습니다. 특히 평지에서는 보병 중심의 군대에게 큰 위협이 되었을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충분히 이해할 만한 두려움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이 믿음이 필요한 자리였습니다.

저는 제 삶의 ‘철 병거’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은 문제일 수 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일 수 있습니다.

사람의 평가일 수도 있습니다.

이미 여러 번 실패한 경험일 수도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는 현실일 수도 있고, 건

2026년 9월 둘째 주일 낮 대표기도문

2026년 9월 둘째 주일 낮 대표기도문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시며 우리의 모든 날과 계절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9월 둘째 주일을 허락하시고 주님의 백성들이 한자리에 모여 찬양과 경배를 올려드리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한낮에는 아직 여름의 열기가 남아 있지만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고, 높아진 하늘과 익어가는 들판을 바라보며 계절을 때에 따라 아름답게 바꾸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찬양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호흡과 생명을 붙드시고 거룩한 예배의 자리로 불러 주신 주님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예배드리오니 홀로 영광 받아 주옵소서.

거룩하신 하나님, 지난 한 주간 우리의 삶을 말씀 앞에 비추어 봅니다. 주님의 뜻보다 우리의 생각을 앞세웠고, 감사해야 할 자리에서 불평했으며, 사랑으로 품어야 할 사람을 쉽게 판단했습니다. 기도해야 할 때 염려했고, 말씀을 붙들어야 할 때 세상의 소리에 마음을 빼앗겼으며, 다른 사람의 허물은 쉽게 보면서 자신의 부족함에는 관대했습니다. 우리의 교만과 욕심과 무관심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깨끗이 씻어 주시고 정결한 마음과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신실하신 주님, 결실의 계절을 향해 가는 자연을 바라보며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게 하옵소서. 씨를 뿌리고 때를 기다려야 열매를 거둘 수 있듯이, 믿음의 삶에도 인내와 충성이 필요함을 깨닫게 하옵소서. 말로만 믿음을 고백하지 않고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충성의 열매를 맺게 하시며, 우리의 말과 행동과 선택 속에서 예수님의 성품이 나타나게 하옵소서.

하반기의 모든 교회 사역을 축복하여 주옵소서. 다시 시작된 목장과 구역 모임, 양육과 훈련, 각 기관과 부서의 모임마다 말씀과 기도가 풍성하게 하시고, 서로의 형편을 살피며 함께 울고 함께 기뻐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목자와 구역장, 교사와 각 기관의 일꾼들에게 지혜와 인내를 더하시고, 사람의 인정이나 칭찬을 구하지 않고 주님께 하듯 기쁨으로 섬기게 하옵소서.

새 학기를 시작한 다음세대를 주님의 손에 맡겨드립니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지혜와 건강을 주시고 좋은 친구와 좋은 스승을 만나게 하옵소서. 비교와 경쟁 속에서도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잊지 않게 하시고, 세상의 가치에 흔들리지 않고 말씀 위에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게 하옵소서. 진로와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들에게도 길을 열어 주시며,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오늘 해야 할 일을 성실히 준비하게 하옵소서.

사랑의 하나님, 우리 교회가 지역과 이웃을 품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외롭고 소외된 사람,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힘들어하는 가정, 질병으로 고통받는 성도들을 돌아보게 하시며, 말로만 위로하지 않고 실제적인 사랑과 섬김으로 함께하게 하옵소서. 가을 심방과 목회적 돌봄의 모든 발걸음을 축복하시고, 심방하는 가정마다 말씀의 위로와 회복의 은혜가 임하게 하옵소서. 가정의 갈등이 풀리고, 자녀의 문제가 해결되며, 병든 몸과 상한 마음이 회복되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리 가운데 질병과 고통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성도들을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치료 중에 있는 이들에게 회복을 주시고, 수술을 앞둔 이들에게 평안을 허락하시며, 의료진에게 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경제적인 문제와 사업의 어려움, 관계의 갈등으로 남몰래 눈물 흘리는 이들의 탄식을 들으시고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낙심한 자에게 소망을 주시고 지친 자에게 새 힘을 공급하여 주옵소서.

대한민국을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정치와 이념, 세대와 지역의 갈등이 더욱 깊어지지 않게 하시고,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며 대화하고 양보할 수 있는 성숙한 사회가 되게 하옵소서. 대통령과 모든 위정자들에게 지혜와 정직함을 주셔서 자신의 유익이나 권력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 정의와 평화를 먼저 생각하게 하옵소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가정과 소상공인들을 돌아보시고 청년들에게 일자리와 희망을 허락하시며, 약한 이들이 보호받고 정직한 수고가 존중받는 나라가 되게 하옵소서. 남과 북의 긴장을 낮추시고 한반도에 전쟁의 위협이 사라지며 평화의 길이 열리게 하옵소서.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재난으로 고통받는 이들도 기억하여 주옵소서. 삶의 터전을 잃고 눈물 흘리는 이들에게 위로와 필요한 도움을 허락하시며, 교회가 세상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복음과 사랑으로 섬기게 하옵소서.

담임목사님과 모든 교역자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붙드시고 영육 간에 강건함을 더하여 주옵소서.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하며 성도들을 돌볼 때 하늘의 지혜와 사랑을 공급하시고, 시대의 흐름에 흔들리지 않고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는 선한 목자가 되게 하옵소서.

이 시간 말씀을 전하시는 목사님께 성령으로 충만하게 기름 부어 주셔서 선포되는 말씀이 우리의 굳은 마음을 깨뜨리고, 낙심한 영혼을 일으키며, 믿음의 길을 밝히는 생명의 말씀이 되게 하옵소서. 듣는 저희에게 겸손한 마음과 순종의 믿음을 주셔서 아멘으로 받고 삶으로 실천하게 하옵소서.

정성을 다해 드리는 찬양과 예물을 기쁘게 받아 주시고, 안내와 방송, 주차와 식사, 교회학교와 여러 자리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모든 손길을 기억하여 복 내려 주옵소서.

가을의 들판이 햇빛과 비와 바람을 지나 풍성한 열매를 맺듯이, 우리의 삶도 기쁨과 어려움의 모든 시간을 믿음으로 지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하옵소서.

우리의 목자가 되시며 영원한 소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6년 9월 셋째 주 주일 대표기도문

2026년 9월 셋째 주 주일 대표기도문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시며 우리의 모든 날을 선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9월 셋째 주일을 허락하시고 주님의 백성들이 한자리에 모여 찬양과 경배를 올려드리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한낮에는 아직 여름의 기운이 남아 있지만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과 높아진 하늘을 바라보며, 계절을 때에 따라 아름답게 바꾸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찬양합니다. 익어가는 들판과 조금씩 빛깔을 바꾸어 가는 자연처럼 우리의 믿음도 날마다 성숙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하옵소서.

거룩하신 하나님, 지난 한 주간의 삶을 말씀 앞에 비추어 봅니다. 주님의 뜻보다 우리의 생각을 앞세웠고, 감사하기보다 부족한 것만 헤아렸으며, 사랑으로 품어야 할 사람을 쉽게 판단했습니다. 기도해야 할 때 염려했고, 말씀을 붙들어야 할 때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며, 우리의 유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아픔을 외면했던 모습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의 모든 허물을 씻어 주시고 정결한 마음과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신실하신 주님, 결실의 계절을 향해 가는 이때에 우리의 신앙에도 성령의 열매가 풍성히 맺히기를 원합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나게 하시고, 말로만 믿음을 고백하지 않고 삶으로 복음을 드러내게 하옵소서. 작은 일에도 충성하게 하시며,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맡겨진 자리에서 성실하게 하옵소서.

우리 교회의 하반기 사역을 축복하여 주옵소서. 다시 시작된 목장과 구역 모임, 각종 양육과 훈련, 기관과 부서의 사역 가운데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게 하옵소서. 모일 때마다 서로의 형편을 살피고 말씀과 기도로 세워 주며, 함께 울고 함께 기뻐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목자와 구역장, 교사와 각 기관의 일꾼들에게 지혜와 인내를 더하시고 사람의 칭찬보다 주님의 기쁨을 구하며 충성하게 하옵소서.



다음세대를 특별히 주님의 손에 맡겨드립니다. 새 학기를 살아가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지혜와 건강을 더하시고, 좋은 친구와 좋은 스승을 만나게 하옵소서. 경쟁과 비교 속에서도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잊지 않게 하시며, 세상의 가치에 흔들리지 않고 말씀 위에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게 하옵소서. 진로와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들에게도 길을 열어 주시고, 조급함과 두려움 대신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신뢰하게 하옵소서.

사랑의 하나님, 가을 심방과 목회적 돌봄의 모든 발걸음을 인도하여 주옵소서. 목회자들이 성도들의 가정을 찾아 말씀을 전하고 기도할 때마다 위로와 치유와 회복의 은혜가 임하게 하옵소서.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 경제적인 어려움과 자녀 문제, 관계의 상처로 눈물 흘리는 가정들의 탄식을 들으시고 가장 선한 길을 열어 주옵소서. 교회가 성도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실제적인 사랑으로 곁을 지키게 하옵소서.

우리 가운데 몸과 마음이 지친 성도들을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오랜 치료와 병원 생활로 힘든 이들에게 회복의 은혜를 베푸시고, 수술을 앞둔 이들에게 평안을 주시며 의료진에게 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경제적 어려움과 일터의 문제로 근심하는 가정에 필요한 길을 열어 주시고, 외롭고 낙심한 이들에게 하늘의 위로와 새 힘을 공급하여 주옵소서.

대한민국을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정치와 이념, 세대와 지역의 차이가 미움과 분열로 깊어지지 않게 하시고, 서로의 말을 경청하며 공동체의 선을 이루어 가게 하옵소서. 대통령과 모든 위정자들에게 지혜와 정직함을 주셔서 자신의 이익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 정의와 평화를 먼저 생각하게 하옵소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가정과 소상공인들을 돌보시고, 청년들에게 일자리와 희망을 주시며, 정직한 수고가 존중받고 약한 이들이 보호받는 나라가 되게 하옵소서. 남과 북의 긴장을 낮추시고 한반도에 평화의 길을 열어 주옵소서.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재난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기억하여 주시고, 삶의 터전을 잃고 눈물 흘리는 이들에게 필요한 도움과 위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교회가 세상의 아픔에 무관심하지 않고 복음과 함께 사랑과 섬김을 실천하게 하옵소서.

담임목사님과 모든 교역자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붙드시고 영육 간에 강건함을 더하여 주옵소서.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하며 성도들을 돌볼 때 하늘의 지혜와 사랑을 공급하시고, 시대의 흐름에 흔들리지 않고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는 선한 목자가 되게 하옵소서.

이 시간 말씀을 전하시는 목사님께 성령으로 충만하게 기름 부어 주셔서 선포되는 말씀이 우리의 굳은 마음을 깨뜨리고, 낙심한 영혼을 일으키며, 믿음의 길을 밝히는 생명의 말씀이 되게 하옵소서. 듣는 저희에게 겸손한 마음과 순종의 믿음을 주셔서 말씀을 아멘으로 받고 삶으로 실천하게 하옵소서.

정성을 다해 드리는 찬양과 예물을 기쁘게 받아 주시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예배를 위해 수고하는 모든 손길을 기억하여 복 내려 주옵소서. 가을의 들판이 햇빛과 비와 바람을 지나 풍성한 열매를 맺듯이, 우리의 삶도 모든 시간을 믿음으로 견디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하옵소서.

우리의 목자가 되시며 영원한 소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9월 초등부 대표기도문 모음

9월 초등부 대표기도문 모음


초등부 대표기도문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아름다운 9월을 허락하시고 오늘도 친구들과 함께 예배드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무더운 여름을 잘 보내게 하시고 새 학기를 시작하게 하신 것도 감사합니다.

지난 한 주 동안 부모님 말씀을 잘 듣지 못하고, 친구를 미워하거나 나쁜 말을 했던 것을 용서해 주세요.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고 예수님처럼 사랑하고 배려하는 어린이가 되게 해 주세요.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게 하시고 좋은 친구들을 만나게 하시며, 선생님 말씀을 잘 듣고 정직하게 생활하게 해 주세요. 아픈 친구들과 어려움을 겪는 친구들도 지켜 주시고 힘을 주세요.

우리 초등부가 예배와 말씀과 기도를 좋아하게 하시고, 선생님들에게도 건강과 지혜를 주세요. 오늘 말씀을 전하시는 전도사님을 붙들어 주시고, 말씀을 잘 듣고 한 주간 그대로 살아가게 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9월 초등부 대표기도문 2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 높아진 하늘과 선선한 바람을 주시고 9월에도 건강하게 예배드릴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새로운 학기를 시작하면서 학교와 교회에서 즐겁게 생활하게 해 주세요.

하나님, 우리가 욕심을 부리고 친구와 다투며, 해야 할 일을 미루었던 것을 용서해 주세요. 내 생각만 앞세우지 않고 다른 친구의 마음도 생각할 줄 아는 어린이가 되게 해 주세요.

공부할 때 지혜와 집중력을 주시고, 어려운 문제가 있어도 쉽게 포기하지 않게 해 주세요.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며 외로운 친구가 있으면 먼저 다가가 손을 잡아 주게 해 주세요.

우리 초등부 친구들이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고 매일 기도하며 믿음이 쑥쑥 자라게 해 주세요. 우리를 사랑으로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들을 축복해 주시고, 오늘 들려주시는 말씀을 마음에 잘 새기게 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9월 초등부 대표기도문 3

우리의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9월의 복된 주일에 초등부 친구들이 한자리에 모여 찬양하고 예배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루하루 우리를 지켜 주시고 학교와 가정에서도 함께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지난 한 주 동안 감사하지 못하고 짜증 내며, 친구에게 상처 주는 말을 했던 잘못을 용서해 주세요. 마음속의 미움과 욕심을 버리고 착하고 따뜻한 마음을 갖게 해 주세요.

새 학기를 보내는 우리 친구들에게 지혜와 건강을 주시고, 학교에서 맡은 일을 성실히 하게 해 주세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친구를 도우며, 어디에서나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 주는 어린이가 되게 해 주세요.

아픈 친구들을 낫게 해 주시고, 우리 가정마다 평안과 기쁨을 주세요. 초등부 선생님들과 전도사님께 힘과 지혜를 주시며, 오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우리가 되게 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매일성경 묵상 사사기 3:1-11

시험의 땅에서 다시 하나님을 배우다

  • 매일성경 묵상 사사기 3:1-11

오늘도 저는 말씀 앞에 앉아 제 삶을 비추어 봅니다. 사사기 3장 1절부터 11절에는 이스라엘이 왜 가나안 족속들 가운데 남겨졌는지, 그 시험 속에서 어떻게 우상숭배에 빠졌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옷니엘을 세워 다시 구원하시는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본문에서 시험은 단지 나를 힘들게 하는 사건이 아니라 내 믿음의 실체를 드러내는 자리임을 배웁니다. 동시에 실패한 백성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자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긍휼도 발견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제 안에 남아 있는 타협과 우상을 살펴보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순종의 길을 다시 선택하고 싶습니다.

남겨진 민족들은 이스라엘의 믿음을 시험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삿 3:1-4)

사사기 3장은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여러 민족들을 왜 남겨 두셨는지를 설명하면서 시작합니다. 본문은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보여 줍니다. 첫째는 가나안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이스라엘 세대에게 전쟁을 가르치기 위함이었고, 둘째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에 순종하는지를 시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먼저 ‘남겨진 것’의 의미를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정복을 완전히 이루지 못했습니다. 사사기 1장에서 이미 여러 지파가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지 못하거나, 쫓아낼 수 있었음에도 노역을 시키며 남겨 두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인간의 불순종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사기 3장에서는 그 남겨진 민족들이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시험의 도구가 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긴장입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이스라엘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실패 때문에 자신의 목적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실패의 결과까지도 백성을 훈련하고 시험하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저는 여기서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깊은지를 생각합니다.

저는 제 삶의 실패를 돌아보며 종종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그때 그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더 순종했더라면.”

후회되는 일이 있습니다.

분명 제 책임으로 일어난 결과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일하실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제 잘못을 선이라고 부르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나 제 실패보다 크신 분입니다.

인간의 실수도, 죄도, 약함도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궁극적으로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저는 이 사실에서 위로를 얻습니다.

회개해야 할 것은 회개해야 합니다.

책임져야 할 것은 책임져야 합니다.

하지만 과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실 수 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남겨 둔 민족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블레셋의 다섯 군주, 모든 가나안 족속, 시돈 족속, 바알 헤르몬 산에서부터 하맛 어귀까지 레바논 산에 거주하는 히위 족속입니다.

저는 이런 지명과 민족의 목록을 읽을 때 그냥 지나가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 목록은 실제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이 마주해야 했던 현실적인 적들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의 시험은 관념적인 시험이 아니었습니다.

실제 힘을 가진 민족들이 주변에 있었습니다.

실제 전쟁이 있었고, 실제 문화적 압력이 있었으며, 실제 종교적 유혹이 있었습니다.

믿음은 언제나 현실 속에서 시험받습니다.

저 역시 추상적으로는 얼마든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돈이 걸리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인정이 걸리면 마음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관계가 깨질 위험이 생기면 진리를 타협하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건강이 무너지거나 계획이 틀어지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믿음은 실제 상황 속에서 드러납니다.

그래서 시험은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시험은 제 믿음을 드러냅니다.

본문 1절과 4절에 반복되는 ‘시험’이라는 개념은 히브리어 ‘나사’(נָסָה)와 연결됩니다. 이 말은 시험하다, 검증하다, 어떤 상태를 드러내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행동할지 몰라서 시험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시험을 통해 그들의 마음이 드러납니다.

무엇을 사랑하는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누구의 말을 따르는지,

하나님의 언약을 실제로 신뢰하는지가 드러납니다.

저는 시험받을 때 제 안에서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나타나는 경험을 합니다.

평소에는 제가 인내심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짜증이 올라옵니다.

평소에는 돈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불안해지면 온 마음이 돈에 붙잡힙니다.

평소에는 사람들의 평가에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나를 비판하면 며칠 동안 그 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시험은 제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만났을 때 저는 단순히 “이 문제를 빨리 없애 주세요”라고만 기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고통이 사라지기를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기도를 더 해야 합니다.

“주님, 이 시험을 통해 제 마음을 보여 주소서.”

“제가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지 드러내 주소서.”

“제가 어디에서 약한지 보게 하소서.”

저는 이 기도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제 모습이 제가 기대했던 모습과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은혜는 진실을 피하지 않습니다.

진실을 보게 하고, 그 진실을 십자가로 가져가게 합니다.

본문은 또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 전쟁을 가르치기 위해 이 민족들을 남겨 두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저는 ‘전쟁을 배운다’는 말이 단순히 군사 기술을 습득한다는 뜻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문자적으로는 실제 가나안 전쟁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전쟁의 배후에는 더 깊은 신앙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힘으로 땅을 차지한 민족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백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을 배운다는 것은 결국 자기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전쟁이 없다면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저는 제 삶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모든 일이 평탄할 때는 제가 꽤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제가 계획을 잘 세웠고, 제가 지혜롭게 선택했기 때문에 일이 잘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비로소 제 한계를 봅니다.

그때 기도하게 됩니다.

그때 말씀을 붙들게 됩니다.

그때 제가 얼마나 연약한 사람인지 인정하게 됩니다.

이것이 고난의 역설입니다.

고난 자체가 선한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선한 일을 이루십니다.

바울이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진다고 고백한 것도 같은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시험이 없는 삶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시험을 통해 저를 성숙하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날 때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시험 자체가 즐겁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오해하지 않으려 합니다.

고난당하는 사람에게 쉽게 “감사하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고통에는 눈물이 필요합니다.

위로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다는 소망은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사사기 3장은 이스라엘의 시험이 말씀에 순종하는지를 확인하는 시험이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결국 시험의 핵심은 순종입니다.

‘순종하다’와 연결되는 히브리적 사고에서 ‘듣다’는 매우 중요합니다. ‘샤마’(שָׁמַע)는 듣는 것과 순종하는 것을 함께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은 단순히 귀로 소리를 들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저는 말씀을 많이 듣습니다.

성경을 읽고, 설교하고, 신학적인 내용을 공부합니다.

하지만 말씀을 많이 안다고 해서 자동으로 순종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을 많이 아는 사람이 더 큰 책임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알고도 하지 않은 것”이 많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제게 묻습니다.

“나는 말씀을 알고 있는가, 아니면 말씀을 따르고 있는가?”

이 두 질문은 다릅니다.

용서하라는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용서하는가는 다른 문제입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는가는 다른 문제입니다.

정직해야 한다는 말씀을 압니다.

하지만 손해가 예상될 때도 정직한가는 다른 문제입니다.

시험은 그 차이를 보여 줍니다.

본문 속 이스라엘이 전쟁을 배우고 시험을 받은 것처럼 저 역시 매일 작은 영적 전쟁을 겪습니다.

신약은 그리스도인의 싸움이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죄와 거짓과 사탄의 유혹을 향한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정복을 오늘 문자적으로 반복하는 식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새 언약의 백성은 사람을 정복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러나 죄에 대해서는 단호해야 합니다.

제 안의 탐욕과 싸워야 합니다.

음욕과 싸워야 합니다.

교만과 싸워야 합니다.

거짓과 싸워야 합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과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이 싸움은 하루 만에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제 삶에 불편한 환경을 남겨 두심으로 제 믿음을 훈련하실 수도 있습니다.

사람을 통해 인내를 배우게 하시고,

경제적 한계를 통해 의존을 배우게 하시고,

질병이나 연약함을 통해 겸손을 배우게 하시며,

응답이 늦어지는 시간을 통해 기다림을 배우게 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시험이 올 때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는 질문만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주님, 이 상황에서 제가 무엇을 배우기를 원하십니까?”

이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험을 통과하는 힘이 제 의지에만 있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려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광야에서 시험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실패한 자리에서 예수님은 말씀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시험했고 우상에 빠졌지만, 예수님은 아버지께 끝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실패하지 않은 참 이스라엘이십니다.

그래서 저는 제 시험 앞에서 단지 “더 강해져야지”라고 결심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시험을 이기신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그분이 제 의가 되시고, 성령으로 저를 도우신다는 사실을 붙듭니다.

타협은 결혼으로 이어지고 결국 예배의 대상을 바꾸었습니다 (삿 3:5-7)

5절부터는 시험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가운데 거주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딸들을 아내로 맞이하고, 자신들의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며, 그들의 신들을 섬깁니다.

저는 이 세 문장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거주합니다.

결혼합니다.

섬깁니다.

타협의 과정이 단계적으로 나타납니다.

처음부터 우상을 섬기겠다고 결심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먼저 함께 살았습니다.

그 다음 관계가 깊어졌습니다.

그리고 결국 예배의 대상이 바뀝니다.

저는 죄가 들어오는 방식도 종종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처음에는 가까이 둡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조금 익숙해집니다.

그 다음에는 관계를 맺습니다.

마음이 붙습니다.

나중에는 그것을 섬기게 됩니다.

그래서 죄의 첫 단계에서 경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의 결혼 문제가 왜 그렇게 심각했을까요?

성경이 민족이나 인종이 다른 사람과의 결혼 자체를 무조건 금지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성경 안에서도 라합과 룻처럼 이방 출신이면서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고 언약 공동체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신앙이었습니다.

가나안의 신들을 섬기는 사람들과 언약적 결합을 맺으며 그들의 종교를 받아들인 것이 핵심입니다.

결혼은 단순한 개인적 감정의 결합이 아닙니다.

가정과 문화와 신앙이 깊이 얽히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가나안 사람들과 결혼하며 가나안의 신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오늘의 관계에도 적용해 봅니다.

사람은 자신이 가까이하는 사람에게 영향을 받습니다.

친구에게 영향을 받습니다.

배우자에게 영향을 받습니다.

공동체에 영향을 받습니다.

심지어 반복해서 보는 콘텐츠에도 영향을 받습니다.

저는 제가 무엇을 가까이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내 마음에 매일 무엇이 들어오는가.

누구의 말을 오래 듣는가.

어떤 가치관을 반복해서 접하는가.

그것이 결국 제 예배를 바꿀 수 있습니다.

예배는 단지 주일에 찬송하는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제가 가장 많은 시간과 마음과 돈을 바치는 것이 무엇인지 보면 제 실제 예배 대상이 드러납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겼다고 말합니다.

저는 여기서 “잊어버렸다”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히브리어 ‘샤카흐’(שָׁכַח)는 기억하지 않다, 잊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잊는다는 것은 단순한 기억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언약을 삶의 중심에서 밀어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름을 완전히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출애굽 이야기를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조상들의 하나님이 누구인지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 더 이상 삶을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망각’입니다.

저는 이 부분이 매우 두렵습니다.

저도 하나님을 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하나님을 잊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사역하면서도 하나님을 잊을 수 있습니다.

기도라는 행위를 하면서도 실제로는 제 욕망만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말하면서도 하나님 없이 살 수 있습니다.

신앙의 가장 큰 위기는 무신론자가 되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하나님이 없어도 되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계속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광야에서 먹이신 하나님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주신 은혜를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신약의 교회는 무엇을 기억해야 합니까?

십자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찬을 주시면서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십자가를 반복해서 기억해야 할까요?

우리는 너무 쉽게 다른 복음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성공이 복음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건강이 복음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부유함이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는 기준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인정이 구원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중심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저는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기억하면 제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도 기억합니다.

동시에 얼마나 큰 사랑을 받은 사람인지도 기억합니다.

그래서 교만할 수 없고 절망할 수도 없습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은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바알은 주로 풍요와 폭풍, 비와 관련된 가나안 신으로 숭배되었고, 아세라는 풍요와 다산과 연결된 여신 숭배와 관련됩니다.

저는 이 우상들이 결국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을 건드렸다고 생각합니다.

먹고사는 문제,

풍요롭게 살고 싶은 욕망,

생명과 생산,

안정과 번영입니다.

우상은 인간의 욕망과 연결됩니다.

그래서 우상은 단순히 “나쁜 신”을 믿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없이도 원하는 것을 얻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저는 오늘의 우상도 비슷하다고 봅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돈을 통해 하나님 없이 안전하려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성공이 문제라기보다 성공을 통해 제 가치를 증명하려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사람의 사랑이 문제라기보다 그 사랑이 하나님보다 더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상은 좋은 것을 궁극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팀 켈러가 자주 설명했듯이, 인간의 마음은 좋은 것을 ‘궁극적인 것’으로 바꾸어 우상화하기 쉽습니다.

저는 그래서 어떤 것을 좋아하는가만 보지 않고, 무엇을 잃었을 때 제 삶 전체가 무너지는지를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제 우상일 가능성이 큽니다.

돈을 잃으면 인생이 끝난 것처럼 느끼는가.

사람의 사랑을 잃으면 존재 가치가 사라진 것처럼 느끼는가.

직장을 잃으면 하나님도 나를 버리신 것처럼 느끼는가.

자녀의 성공이 좌절되면 내 삶 전체가 실패한 것처럼 느끼는가.

그 지점에 제 우상이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스라엘이 왜 바알에게 갔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보이는 신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즉각적인 풍요를 약속하는 종교가 매력적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선택은 결국 하나님을 잊는 일이었습니다.

저 역시 눈에 보이는 것을 더 신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기다려야 하지만 돈은 당장 숫자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는 불확실하게 느껴지지만 사람의 힘은 구체적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보이는 것보다 말씀을 더 신뢰하는 결단입니다.

저는 여기서 예수님의 광야 시험을 다시 떠올립니다.

사탄은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했습니다.

성전에서 뛰어내리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나라와 영광을 보여 주며 절하라고 했습니다.

결국 핵심은 동일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는 대신 즉각적인 만족과 권력과 안전을 선택하라는 유혹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으로 거부하셨습니다.

아버지께 순종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실패한 자리에서 그리스도는 승리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우상과 싸울 때 제 의지보다 그리스도의 순종을 의지합니다.

십자가는 제 우상을 깨뜨립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하나님만이 제 구원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돈도 나를 죄에서 구하지 못합니다.

사람의 사랑도 죽음을 이기지 못합니다.

성공도 죄책을 씻어 주지 못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구원하십니다.

저는 오늘 제 마음에 세워진 아세라와 바알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하나씩 이름을 붙여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싶습니다.

“주님, 이것이 제게 주님보다 더 중요해졌습니다.”

그 고백이 회개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르짖는 백성에게 성령을 입은 옷니엘을 세우셨습니다 (삿 3:8-11)

8절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고, 이스라엘은 팔 년 동안 그를 섬깁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다시 죄의 역설을 봅니다.

이스라엘은 자유를 얻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종살이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져 다른 신을 선택했지만, 결국 다른 왕을 섬기게 됩니다.

이것이 죄의 구조입니다.

죄는 자유를 약속하지만 노예 상태를 가져옵니다.

예수님도 죄를 범하는 자는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자유를 “내가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하는 것”으로 정의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적 자유는 다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선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죄를 거절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사랑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진리를 따라 살 수 있는 자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떠난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닙니다.

주인을 바꾸는 것일 뿐입니다.

이스라엘은 구산 리사다임을 팔 년 동안 섬깁니다.

‘구산 리사다임’이라는 이름은 해석상 여러 논의가 있지만,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외세의 왕으로 등장합니다.

저는 여기서 사사기의 패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을 봅니다.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합니다.

압제를 받습니다.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이 사사를 세우십니다.

구원받습니다.

평화를 누립니다.

그리고 다시 죄로 돌아갑니다.

이 반복이 사사기 전체를 관통합니다.

9절은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저는 이 한 문장이 참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그들이 완전하게 회개했다고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히브리어 ‘자아크’(זָעַק)는 심한 고통 속에서 도움을 청해 외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잊었지만 고통이 깊어지자 다시 하나님을 찾습니다.

저는 인간이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평안할 때 하나님을 잊습니다.

그러다가 어려워지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잘될 때는 제 능력으로 사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면 갑자기 기도가 깊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저를 보시면 답답하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필요할 때만 나를 찾느냐”며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구원자를 세우십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하나님의 긍휼 앞에 멈추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자격이 있어서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완벽한 회개를 증명했기 때문에 사사를 주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의 긍휼 때문에 구원자를 세우셨습니다.

구원은 언제나 은혜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을 사사로 세우십니다.

사사기 1장에서 이미 옷니엘을 만났습니다.

그는 기럇 세벨을 공격하여 점령했고 갈렙의 딸 악사를 아내로 얻었습니다.

그때 이미 용기와 믿음의 모습을 보여 주었던 인물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의 첫 사사로 사용하십니다.

저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준비시키는 방식을 봅니다.

사사기 1장의 한 지역 전투가 사소한 사건처럼 보였지만, 그것이 훗날 더 큰 사명을 위한 준비였을 수 있습니다.

오늘 제가 맡은 작은 일이 내일의 사명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작은 순종이 중요합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 정직하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작은 기도를 계속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해도 맡은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시간을 사용하십니다.

10절은 옷니엘 사역의 핵심을 보여 줍니다.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영’을 뜻하는 히브리어 ‘루아흐’(רוּחַ)는 바람, 숨, 영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영이 옷니엘에게 임하여 사사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능력을 주신 것을 말합니다.

저는 이 구절에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옷니엘이 구원자가 된 이유는 그의 타고난 능력 때문만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영이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감당한 것입니다.

저는 목회와 신앙생활에서 이것을 계속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은 능력을 개발해야 합니다.

공부도 해야 합니다.

준비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을 인간의 능력만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문제가 시작됩니다.

설교도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기도도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죄와 싸우는 것도 성령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성령의 열매입니다.

저는 제 힘으로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의욕이 넘치지만 지칩니다.

사람을 사랑하려고 하지만 상처를 받으면 마음이 닫힙니다.

죄를 끊겠다고 결심하지만 다시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더 강한 결심만이 아닙니다.

성령의 능력입니다.

옷니엘에게 임한 성령은 구약 시대 특정한 사명을 위해 능력을 부어 주시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신약에 이르면 성령의 역사는 더욱 풍성하게 펼쳐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후 오순절에 성령이 교회에 임합니다.

새 언약의 백성은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거하시며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죄를 깨닫게 하시며, 거룩하게 하시고, 복음을 증언하도록 힘을 주십니다.

저는 그래서 옷니엘 이야기를 읽으며 성령을 더욱 의지하고 싶습니다.

“주님, 제가 제 힘으로 믿으려 하지 않게 하소서.”

“제 힘으로 사람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게 하소서.”

“성령께서 제 생각과 말과 선택을 다스려 주소서.”

본문은 옷니엘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전쟁에 나가고,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의 손에 넘겨주셨다고 말합니다.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옷니엘이 싸웠지만 승리를 주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이것은 사사기 전체에서 반복되는 중요한 신학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속합니다.

사사는 도구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지도자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배웁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좋은 지도자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사람 자체가 구원자는 아닙니다.

옷니엘도 결국 죽습니다.

모든 사사는 죽습니다.

그리고 사사가 죽으면 백성은 다시 타락합니다.

인간 지도자의 한계가 분명합니다.

저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예수님은 사사들과 같으면서도 완전히 다른 구원자입니다.

사사들은 외부의 적에게서 잠시 구원했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하십니다.

사사들은 한 시대에만 활동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히 살아 계십니다.

사사들의 구원은 반복적으로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번에 이루어진 완전한 속죄입니다.

사사들은 결국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셨지만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구원은 구원자가 죽으면 끝나는 구원이 아닙니다.

부활로 확증된 영원한 구원입니다.

11절은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그 땅이 평온한 지 사십 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

사십 년의 평화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평화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옷니엘이 죽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 본문에서 다시 이스라엘의 타락을 만나게 됩니다.

사사기의 평화는 언제나 임시적입니다.

이 사실은 더 큰 안식을 기다리게 합니다.

히브리서가 말하는 참된 안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성될 안식입니다.

저는 오늘 제 삶의 평안도 영원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건강할 때가 있고 아플 때가 있습니다.

형편이 좋아질 때가 있고 어려워질 때가 있습니다.

좋은 사람과 함께할 때가 있고 이별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궁극적인 평화는 상황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평화입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립니다.

이 화평은 외부의 모든 문제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문제도 저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확신입니다.

저는 그래서 옷니엘의 사십 년 평화를 보면서 더 큰 평화를 바라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새 창조에서 완성될 영원한 안식입니다.

사사기는 반복되는 실패를 보여 주지만 성경의 마지막은 실패로 끝나지 않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옵니다.

다시는 압제자가 없습니다.

다시는 우상숭배가 없습니다.

다시는 죽음이 없습니다.

다시는 구원자가 죽어서 백성이 다시 혼란에 빠지는 일도 없습니다.

부활하신 어린양이 영원히 왕으로 다스리실 것입니다.

저는 그 소망을 붙들고 오늘의 영적 전쟁을 감당하고 싶습니다.

시험이 있다고 낙심하지 않겠습니다.

시험을 통해 제 믿음을 돌아보겠습니다.

우상이 드러나면 변명하지 않고 회개하겠습니다.

실패했을 때 하나님께 다시 부르짖겠습니다.

그리고 제 힘이 아니라 성령을 의지해 다시 순종하겠습니다.

마무리

사사기 3장 1절부터 11절을 묵상하며 저는 시험과 타협, 우상숭배와 구원이라는 제 삶의 현실을 함께 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시험하셨고, 그들은 가나안 문화와 타협하여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그러나 고통 가운데 부르짖자 하나님은 옷니엘을 세우시고 성령으로 능력을 주셔서 구원하셨습니다. 오늘 저는 제 시험을 불평만 하지 않고 제 믿음을 비추는 거울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마음속의 바알과 아세라를 찾아 내려놓고, 제 힘보다 성령을 의지하겠습니다. 잠시 구원하는 옷니엘보다 더 크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와 부활로 영원한 구원을 이루신 주님을 바라보며 오늘도 순종의 길을 걷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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