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하는 믿음과 멈추는 믿음 사이에서
- 매일성경 묵상 사사기 1:11-21
오늘도 저는 조용히 말씀 앞에 앉습니다. 사사기 1장 11절부터 21절은 옷니엘과 악사의 믿음, 겐 사람의 동행, 유다 지파의 계속되는 승리, 그리고 철 병거 앞에서 멈춘 순종과 예루살렘을 완전히 차지하지 못한 베냐민의 모습을 한 장면 안에 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약속을 붙잡고 더 구하며, 어떤 사람은 이미 주어진 약속 앞에서도 현실의 장벽을 크게 바라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며 “하나님이 주신 것은 무엇이며, 나는 어디까지 순종하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오늘 말씀 속 인물들의 선택을 천천히 살펴보면서, 제 삶의 부족함까지 비추시는 하나님의 뜻을 함께 발견하고 싶습니다.
약속된 땅을 얻고도 샘물을 구하는 믿음입니다 (삿 1:11-15)
유다 자손은 헤브론을 정복한 후 드빌 주민에게로 나아갑니다. 드빌의 옛 이름은 기럇 세벨이었습니다. 갈렙은 기럇 세벨을 공격하여 점령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딸 악사를 아내로 주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러자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그 성을 점령했고, 갈렙은 약속대로 딸 악사를 그에게 아내로 줍니다.
이 대목을 읽을 때 저는 먼저 옷니엘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후 사사기 3장에서 그는 이스라엘의 첫 번째 사사로 등장합니다. 사사기 1장에서는 아직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사사로 소개되지 않지만, 그의 믿음과 용기가 이미 작은 장면 속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람의 큰 사명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작은 순종의 현장에서 사람을 준비시키십니다. 아무도 크게 주목하지 않는 자리에서 믿음으로 한 발을 내딛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사람이 훗날 더 큰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저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제게 큰 일을 맡기시기를 바라면서도 오늘 제 앞에 놓인 작은 순종은 가볍게 여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오늘의 작은 순종과 내일의 큰 사명이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옷니엘이 드빌을 점령한 사건은 군사적인 용맹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 배경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의 땅이라는 언약적 의미가 있습니다. 땅을 차지한다는 것은 단순히 영토를 확장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기업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었습니다.
구약에서 기업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나할라’(נַחֲלָה)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선물로 나누어 주시는 몫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은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 낸 성공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적 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선물이라고 해서 아무 행동도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셨으니 들어가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니 싸워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업이라 하셨으니 실제로 차지해야 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은혜와 책임이 서로 반대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배웁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아는 사람일수록 더 적극적으로 순종합니다. 은혜가 순종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순종의 이유가 됩니다.
그리고 본문은 옷니엘보다 악사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듯한 흥미로운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악사는 출가하면서 아버지에게 밭을 구합니다. 그리고 또다시 아버지 갈렙에게 말합니다.
“내게 복을 주소서.”
이미 남방 땅을 받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남방 지역은 상대적으로 건조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땅이 있어도 물이 없다면 농경 생활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악사는 말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네겝 땅으로 보내시오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그러자 갈렙은 윗샘과 아랫샘을 그녀에게 줍니다.
저는 이 짧은 이야기가 참 인상적으로 다가옵니다.
악사는 탐욕스러운 사람이 아닙니다. 주어진 것을 감사하지 못해 더 요구한 것도 아닙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업이 실제로 살아 있는 땅이 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땅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물이 필요했습니다.
성경에서 물은 생명을 상징하는 매우 중요한 이미지입니다. 물이 없는 땅은 오래 버틸 수 없습니다. 특히 팔레스타인과 같은 건조한 지역에서 샘은 곧 생존과 번영을 의미했습니다.
본문에서 샘물을 가리키는 표현은 ‘굴롯’(גֻּלֹּת)이라는 말과 연결되는데, 물이 솟아나거나 흘러나오는 샘을 뜻합니다. 갈렙은 한두 번 사용할 물을 준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흘러나오는 생명의 근원을 준 것입니다.
이 장면을 묵상하면서 저는 제 신앙을 돌아봅니다.
혹시 저는 땅만 받고 만족하려 하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합니다.
외형적인 신앙의 자리는 있지만 내면을 적시는 샘이 말라 있지는 않은가 돌아봅니다.
교회에 출석하고, 말씀을 읽고, 사역을 하고, 여러 신앙 활동을 하지만 정작 영혼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과의 생생한 교제가 마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땅은 있는데 샘이 없는 것입니다.
직분은 있는데 기도가 없습니다.
지식은 있는데 감격이 없습니다.
사역은 있는데 사랑이 없습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있지만 그 말씀이 제 내면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악사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샘물도 내게 주소서.”
저는 이 간청을 제 기도로 삼고 싶습니다.
“하나님, 제게 땅만 주지 마시고 샘도 주십시오.”
“할 일을 주실 뿐 아니라 그것을 감당할 영적인 생명력도 주십시오.”
“말씀을 주실 뿐 아니라 말씀을 깨닫고 사랑하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도 주십시오.”
악사가 아버지에게 복을 구한 모습은 신약의 기도와도 연결하여 묵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아버지께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고 말씀하셨고, 누가복음에서는 그 좋은 것을 성령과 연결하여 말씀하십니다.
물론 사사기의 악사 이야기를 곧바로 성령에 대한 직접적인 예언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구속사적 흐름 안에서 ‘생명을 공급하는 물’이라는 이미지는 점점 깊어집니다.
광야에서 반석에서 물이 나옵니다.
시편은 하나님을 생명의 원천이라고 고백합니다.
선지자들은 메마른 땅에 물이 흐르는 회복의 날을 예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오는 자가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을 믿는 자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올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요한복음은 이것을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라고 설명합니다.
저는 여기에서 악사가 구한 샘보다 더 깊고 영원한 샘을 바라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열린 새 언약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단지 살아갈 공간만 주신 것이 아니라 그 공간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갈 생명까지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주셨고, 성령을 부어 주셔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저는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물론 욕망을 채우기 위한 탐욕스러운 요구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필요한 은혜를 구하는 것은 다릅니다.
악사는 자신이 받은 땅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 샘을 구했습니다.
저도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지혜가 부족하면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사랑이 메말랐다면 사랑할 힘을 구해야 합니다.
용서하기 어렵다면 용서할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목회가 메말랐다면 다시 말씀과 기도의 샘을 구해야 합니다.
삶이 지쳐 있다면 성령께서 새롭게 하시는 힘을 구해야 합니다.
저는 때때로 하나님께 많이 구하는 것을 믿음 없음처럼 생각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믿음의 사람들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구합니다.
다윗은 구합니다.
선지자들이 구합니다.
제자들이 구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구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문제는 구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무엇을 왜 구하느냐입니다.
오늘 제 마음에서 이런 기도가 나옵니다.
“주님, 제가 받은 땅을 메마른 채 방치하지 않게 하소서. 윗샘과 아랫샘을 주시듯 제 삶의 위와 아래, 보이는 곳과 보이지 않는 곳, 공적인 사역과 개인적인 마음까지 은혜의 물로 적셔 주소서.”
그리고 저는 한 가지를 더 묵상합니다.
갈렙은 악사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딸이 이미 땅을 받았으니 욕심내지 말라고 꾸짖지 않았습니다. 필요한 것을 아는 딸의 요청에 윗샘과 아랫샘을 모두 주었습니다.
저는 이 모습에서 하늘 아버지의 선하심을 생각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겨우 살아남을 만큼만 주시는 인색한 아버지가 아닙니다.
그분은 자기 아들까지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풍성함을 보여 주는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저는 오늘 악사처럼 담대하게 구하고 싶습니다.
“아버지, 제게 샘물을 주소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제 삶에 이미 주신 은혜의 샘을 귀하게 여기며 살고 싶습니다.
함께 걸어가는 사람과 끝까지 밀어붙이는 순종입니다 (삿 1:16-18)
본문 16절에는 모세의 장인이 속한 겐 사람의 자손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종려나무 성읍에서 유다 광야로 올라가 아랏 남방에 이르렀고, 유다 자손과 함께 그 백성 가운데 거주합니다.
겐 사람은 이스라엘의 혈통에 속한 지파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와의 관계를 통해 이스라엘 역사 속으로 들어왔고, 이후 여러 장면에서 이스라엘과 연결되어 나타납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을 때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혈통의 폐쇄성 속에 갇혀 있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합니다.
구약의 언약은 분명히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처음부터 그 목적에는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지만 이스라엘만 사랑하기 위해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통하여 열방을 복 주시기 위해 선택하셨습니다.
겐 사람의 자손들이 유다와 함께 거주하는 모습은 이후 신약에서 훨씬 크게 펼쳐질 열방의 구원을 희미하게 미리 보여 주는 장면처럼 다가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의 새 백성을 이룹니다.
에베소서는 그리스도께서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둘을 하나로 만드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혈연이나 민족의 우월성으로 구성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부름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묵상하면서 교회가 어떤 공동체여야 하는지를 생각합니다.
교회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만 편안하게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배경도 다르고, 살아온 환경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사회적 위치도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 한 분 때문에 형제와 자매가 되는 곳입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저는 얼마나 쉽게 사람을 구분하는지 모릅니다.
나와 말이 잘 통하는 사람에게 마음이 갑니다.
내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을 가까이합니다.
경제적 수준이나 학력이나 사회적 위치에 따라 사람을 다르게 바라볼 위험도 있습니다.
그런 저에게 십자가는 말합니다.
“너 역시 은혜로 들어온 사람이다.”
누구도 하나님의 나라에 자기 자격으로 들어오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조차 자신의 의 때문에 가나안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명기는 그 사실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다른 사람보다 나아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저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문을 열어야 합니다.
17절에서는 유다 지파가 형제 시므온과 함께 나아가 스밧에 거주하는 가나안 사람을 치고 그 성을 진멸합니다. 그리고 그 성의 이름을 호르마라고 부릅니다.
‘호르마’는 ‘헤렘’(חֵרֶם), 곧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것, 심판 아래 놓여 진멸된 것이라는 의미와 연결됩니다.
이 표현 역시 현대 독자에게는 쉽지 않은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본문을 읽을 때 폭력을 미화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성경의 역사적·언약적 맥락을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가나안에 대한 진멸은 이스라엘에게 일반적으로 모든 이방 민족을 파괴하라는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특정한 구속사적 시기에 가나안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시행된 독특한 사건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심판을 이스라엘이 자기 민족적 욕망을 위해 마음대로 반복할 권리를 받은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이후 이스라엘 자신도 가나안과 같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어느 민족을 편들고 어느 민족을 본질적으로 미워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이스라엘에게도 동일한 기준을 적용합니다.
저는 이 사실 앞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이 죄를 가볍게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는 더 큰 책임이 따릅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많이 안다고 해서 저절로 거룩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새 언약에서는 그 거룩함의 길이 십자가와 성령 안에서 더욱 깊게 열립니다.
저는 죄를 죽여야 합니다.
그러나 죄인을 죽이는 방식으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제 안의 죄를 죽이는 것입니다.
탐욕을 끊고, 음욕을 끊고, 교만을 끊고, 미움을 끊고, 거짓을 끊는 영적 싸움을 해야 합니다.
신약의 언어로 말하면 “육신의 행실을 죽이는” 싸움입니다.
그 싸움은 성령으로 가능합니다.
18절에서는 유다가 가사와 그 지역, 아스글론과 그 지역, 에그론과 그 지역을 점령했다고 기록합니다. 이 도시들은 이후 블레셋의 중요한 성읍으로 계속 등장하게 됩니다.
여기서 저는 사사기의 기록이 매우 현실적이라는 사실을 생각합니다.
어떤 순간에는 승리가 분명합니다.
유다는 전진합니다.
성읍을 점령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기서 이야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곧이어 19절에서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나타납니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 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저는 이 전환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성공한 이야기만 읽고 싶어 합니다.
믿음으로 순종하면 모든 것이 즉시 잘되고, 문제가 사라지고, 어떤 장애물도 남지 않는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단순한 성공담을 쓰지 않습니다.
믿음의 역사 안에도 승리와 한계가 동시에 기록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셨고 실제로 승리했지만, 그 다음에는 철 병거가 등장합니다.
저는 이 사실에서 제 신앙생활의 모습도 봅니다.
어제는 믿음으로 잘 견뎠는데 오늘은 흔들릴 수 있습니다.
어떤 문제에서는 담대했지만 다른 문제에서는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사역의 한 영역에서는 큰 믿음을 보이면서 개인적인 관계에서는 믿음 없이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제의 순종이 오늘의 순종을 대신해 주지는 않습니다.
믿음은 매일 새롭게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삶입니다.
유다와 시므온이 함께 나아가는 장면을 보면서 저는 공동체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홀로 영웅이 되는 신앙보다 서로를 붙들며 함께 가는 신앙을 원하십니다.
제가 강할 때 누군가를 도울 수 있고, 제가 약할 때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도움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귀찮아하지 않는 신앙인이 되고 싶습니다.
십자가 역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만 회복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새로운 공동체를 만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한 몸입니다.
저는 오늘 제 곁의 믿음의 동역자들을 소중히 여기고 싶습니다.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교만을 내려놓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울며 함께 싸우는 믿음의 관계를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철 병거 앞에서 멈춘 믿음, 끝까지 이루실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삿 1:19-21)
19절은 오늘 본문 가운데 가장 강한 질문을 던지는 구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 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셨는데 왜 쫓아내지 못했을까?
하나님보다 철 병거가 강했을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출애굽의 하나님은 애굽의 병거를 홍해에 수장시키신 분입니다. 하나님께 철 병거는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사사기 전체의 문맥에서 이 구절은 이스라엘의 제한된 순종과 믿음의 부족을 보여 주는 쪽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쫓아내다’ 또는 ‘차지하다’라는 의미로 반복되는 히브리어 ‘야라쉬’(יָרַשׁ)는 소유하다, 차지하다, 몰아내다는 의미를 함께 가집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기업을 차지하는 일과 그 땅을 점유하고 있는 세력을 몰아내는 일이 같은 단어의 세계 안에 있습니다.
이것이 제게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삶을 누리려면 옛것을 밀어내는 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받았지만 미움을 그대로 붙들고 있다면 새 삶을 충분히 누리기 어렵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었지만 여전히 죄의 습관을 사랑한다면 그 자유를 실제 삶에서 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주셨지만 그 안의 우상을 그대로 두면 언젠가 그 우상이 다시 사람을 지배합니다.
그런데 유다는 철 병거 앞에서 멈춥니다.
당시 철제 전차는 군사적으로 매우 강력한 무기였습니다. 특히 평지에서는 보병 중심의 군대에게 큰 위협이 되었을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충분히 이해할 만한 두려움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이 믿음이 필요한 자리였습니다.
저는 제 삶의 ‘철 병거’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은 문제일 수 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일 수 있습니다.
사람의 평가일 수도 있습니다.
이미 여러 번 실패한 경험일 수도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는 현실일 수도 있고,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