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한 손에 들린 칼, 하나님은 예상 밖의 사람을 구원의 도구로 쓰십니다
- 매일성경 묵상 사사기 3:12-31
오늘도 저는 말씀 앞에 조용히 앉아 제 생각보다 크신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봅니다. 사사기 3장 12절부터 31절에는 모압 왕 에글론의 압제와 왼손잡이 에훗을 통한 구원, 그리고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친 삼갈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에는 낯설고 거친 장면들이 많지만, 그 중심에는 분명한 진리가 흐릅니다. 이스라엘은 또다시 죄에 빠졌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셨고,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한 인물과 도구를 사용하여 구원하셨습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제 약함을 바라보는 시선,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길, 그리고 모든 사사를 넘어서는 참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반복되는 죄보다 더 오래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삿 3:12-18)
본문은 매우 익숙하면서도 안타까운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저는 여기서 “또”라는 한 글자가 마음에 무겁게 내려앉습니다.
사사기 3장 앞부분에서 이스라엘은 이미 죄를 지었고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압제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자 하나님은 옷니엘을 세워 구원하셨고, 땅은 사십 년 동안 평온했습니다.
그런데 옷니엘이 죽자 다시 죄를 짓습니다.
은혜를 받았는데 또 넘어집니다.
구원을 경험했는데 또 하나님을 떠납니다.
저는 이 모습을 보면서 남의 이야기를 읽는 것 같지 않습니다.
제 신앙에도 “또”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염려합니다.
또 교만해집니다.
또 사람의 평가에 흔들립니다.
또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합니다.
기도하면서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붙듭니다.
회개했다고 생각했던 죄가 다른 모습으로 다시 올라오기도 합니다.
저는 때때로 이런 반복을 보며 스스로에게 실망합니다.
“나는 왜 또 이러는가.”
그런데 사사기는 인간의 반복되는 실패를 숨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주 솔직하게 기록합니다.
이는 죄를 가볍게 여기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얼마나 깊이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지를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단순히 정보 부족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도 알고 있었고, 조상들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큰 일도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압 왕 에글론을 강하게 하셔서 이스라엘을 치게 하십니다.
여기서 저는 중요한 신학적 사실을 봅니다.
이스라엘의 대적이 강해진 것조차 하나님의 주권 밖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은 에글론이 스스로 강해졌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압 왕 에글론을 강성하게 하사 이스라엘을 대적하게 하시매”라고 기록합니다.
저는 이 표현이 불편하면서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는 모든 고난을 무조건 사탄의 공격으로만 설명하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훨씬 더 깊습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돌이키기 위해 어려움을 허락하시고, 심지어 이방의 세력까지 징계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물론 오늘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을 “죄 때문에 하나님이 벌하신 것”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욥처럼 죄와 직접적인 인과관계 없이 고난받는 의인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맹인의 고통을 개인의 특정한 죄 때문이라고 단정하는 사고를 거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고난당하는 사람에게 쉽게 심판을 말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저는 제 삶에 찾아오는 어려움 속에서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는 있습니다.
“주님, 이 일을 통해 제게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제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이 질문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글론을 중심으로 모압과 암몬과 아말렉을 연합하게 하시고, 그들이 이스라엘을 쳐서 종려나무 성읍을 점령하게 하십니다.
‘종려나무 성읍’은 일반적으로 여리고와 관련된 표현으로 이해합니다.
저는 이 지명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집니다.
여리고는 여호수아 시대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얻었던 첫 승리의 상징과도 같은 곳입니다.
성벽이 무너졌던 곳입니다.
인간의 군사력보다 하나님의 능력이 앞섰던 곳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지역이 다시 이방 세력의 손에 들어갑니다.
과거의 승리가 현재의 순종을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듯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며 제 과거의 은혜 체험에 기대어 오늘의 순종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과거에 많이 기도했다고 오늘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젊은 시절 뜨거웠다고 지금의 냉랭함이 정당화되는 것도 아닙니다.
어제의 믿음은 감사한 자산이지만 오늘의 믿음을 대신하지 못합니다.
신앙은 과거형만으로 살 수 없습니다.
오늘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 순종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모압 왕 에글론을 십팔 년 동안 섬깁니다.
십팔 년은 짧지 않은 시간입니다.
아이 한 명이 태어나 성인이 될 만큼의 세월입니다.
한 세대의 상당 부분이 압제 속에서 지나갑니다.
저는 이 긴 시간을 묵상하면서 죄의 결과가 얼마나 오래갈 수 있는지를 생각합니다.
죄는 순간의 즐거움을 약속하지만 결과는 길 수 있습니다.
한 번의 잘못된 선택이 수년의 상처를 만들기도 합니다.
잘못된 습관 하나가 오랜 시간 삶을 얽어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십팔 년이 지나고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이 장면에서 다시 하나님의 긍휼이 시작됩니다.
본문에서 구원자를 뜻하는 말은 ‘모시아’(מוֹשִׁיעַ)입니다. ‘구원하다’는 뜻의 동사에서 나온 표현으로, 압제와 위기에서 건져 내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자를 세우십니다.
그 사람이 바로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에훗입니다.
여기서 본문은 에훗에게 특이한 설명을 붙입니다.
개역개정은 그를 “왼손잡이”라고 번역합니다.
히브리어 표현은 ‘이쉬 잇테르 야드 예미노’(אִישׁ אִטֵּר יַד־יְמִינוֹ)인데, 문자적으로는 오른손이 제한된 사람이라는 뉘앙스를 가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실제로 오른손에 장애나 제약이 있어 왼손을 주로 사용했는지, 혹은 단순히 왼손 사용에 능한 사람이었는지를 두고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왼손을 사용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에훗은 베냐민 지파 사람입니다.
‘베냐민’은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입니다.
오른손의 아들 지파에서 왼손잡이 구원자가 나옵니다.
저는 이 역설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사람이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을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통로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당시 전투 문화에서 오른손 사용이 일반적이었다면 왼손잡이라는 특징은 사회적으로 특별하거나 때로는 약점으로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에훗의 왼손은 곧 결정적인 장점이 됩니다.
그가 칼을 오른쪽 허벅지에 찰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검사나 경계의 시선은 오른손잡이가 칼을 차는 왼쪽을 더 주목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에훗은 자신의 특성을 사용해 에글론에게 접근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며 제 약함을 바라보는 태도를 다시 생각합니다.
저는 제게 없는 것을 바라보며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합니다.
“저 사람은 말을 잘하는데 나는 부족하다.”
“저 사람은 성격이 적극적인데 나는 그렇지 않다.”
“저 사람은 조건이 좋은데 나는 왜 이런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 모습을 받아들이기보다 없는 것을 부러워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에훗에게 오른손을 더 강하게 만들어 주신 것이 아니라 그의 왼손을 사용하셨습니다.
저는 여기서 중요한 믿음의 원리를 배웁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제 약점을 먼저 없앤 다음 사용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때로는 그 약함 그대로 사용하십니다.
바울에게서도 비슷한 원리를 봅니다.
바울은 자신의 육체의 가시를 없애 달라고 세 번이나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제거하지 않으시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약할 그때에 강하다고 고백합니다.
저는 이것이 기독교의 역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강해야 쓰임받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기도 합니다.
세상은 부족함을 숨기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부족함 속에서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그렇다고 약함 자체가 무조건 미덕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배워야 할 것은 배우고, 고쳐야 할 것은 고쳐야 합니다.
준비해야 할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 한계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까지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오늘 제 ‘왼손’이 무엇인지 생각합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부족함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는 제 경험이 무엇인지 생각합니다.
실패의 경험이 상처 입은 사람을 이해하는 능력이 될 수 있습니다.
오랜 외로움이 외로운 사람 곁에 머물 수 있는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가난을 경험한 사람이 가난한 이의 마음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함부로 정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 역시 인간의 눈으로 보면 약함의 상징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에서 십자가는 패배와 수치와 죽음의 도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십자가를 구원의 능력으로 바꾸셨습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에훗의 왼손을 보며 십자가의 역설을 떠올립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강하다고 여기는 방식으로만 일하지 않으십니다.
때로는 가장 약해 보이는 곳에서 가장 강력하게 일하십니다.
에훗은 길이가 한 규빗 정도 되는 좌우에 날선 칼을 만들어 오른쪽 허벅지 옷 속에 찹니다.
그리고 모압 왕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칩니다.
본문은 에글론이 매우 비대한 사람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이 묘사는 뒤에 일어날 사건과 연결되지만, 저는 동시에 사사기 특유의 풍자적인 분위기도 느낍니다.
이스라엘을 압제하던 왕은 크고 무겁습니다.
반면 구원자는 한쪽 손의 특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겉으로 보면 누가 더 강한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누구와 함께하시는가가 결정적인 차이를 만듭니다.
저는 이 장면을 묵상하며 세상의 크기보다 하나님의 주권을 보려고 합니다.
문제는 커 보일 수 있습니다.
사람은 강해 보일 수 있습니다.
환경은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단단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문제의 크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에훗은 공물을 바친 뒤 공물을 메고 온 사람들을 돌려보냅니다.
그리고 혼자 다시 돌아옵니다.
구원의 결정적인 순간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한 가지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에훗을 사용하시지만 에훗 역시 준비하고 행동합니다.
칼을 만들었습니다.
숨겼습니다.
때를 기다렸습니다.
사람들을 돌려보냈습니다.
은혜는 인간의 책임을 제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시겠지” 하며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는 것은 믿음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으면서도 자신에게 맡겨진 준비를 성실히 감당합니다.
저도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기도하면서 준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공부하고,
성령을 의지하면서 말씀을 연구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기다리면서 오늘 해야 할 일을 성실하게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압제자의 왕좌보다 더 강했습니다 (삿 3:19-26)
에훗은 길갈 근처의 돌 뜨는 곳에서 되돌아와 에글론에게 말합니다.
“왕이여 내가 은밀한 일을 왕에게 아뢰려 하나이다.”
개역개정에는 “돌 뜨는 곳”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원문 표현은 ‘페실림’(פְּסִילִים)으로 새긴 형상이나 우상을 뜻할 수도 있어 해석상 논의가 있습니다. 장소를 표시하는 석상이나 우상 형상이 있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길갈이라는 장소를 다시 생각합니다.
길갈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요단강을 건넌 뒤 열두 돌을 세웠던 곳입니다.
할례를 행하고 언약을 새롭게 했던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수치를 굴러가게 하셨다고 말씀하신 곳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주변은 이방의 형상들과 연결된 장소가 되어 있을 가능성이 보입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얼마나 변했는지를 암시하는 장면처럼 다가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던 장소가 우상의 흔적으로 덮일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제 신앙에도 가능한 일임을 압니다.
과거에 은혜받았던 자리가 오늘 자동으로 거룩한 것은 아닙니다.
한때 뜨거웠던 교회도 복음을 잃을 수 있습니다.
한때 간절히 기도했던 사람도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신앙의 역사는 소중하지만 과거의 역사가 현재의 충실함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계속해서 복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계속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계속 회개해야 합니다.
에훗은 에글론에게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왕에게 아뢸 일이 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직역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왕에게 있습니다”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표현이 매우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왕은 에훗의 말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모압의 왕좌에 앉아 이스라엘을 십팔 년 동안 압제했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일어납니다.
그 순간 저는 한 가지를 생각합니다.
세상의 왕보다 말씀이 높습니다.
권력보다 하나님이 높습니다.
인간의 왕좌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강합니다.
저는 세상의 힘 앞에서 쉽게 작아집니다.
권력 있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돈이 많은 사람을 크게 보고,
영향력이 큰 사람의 말을 지나치게 의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반복해서 말합니다.
왕도 하나님의 말씀 아래 있습니다.
국가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교회 지도자도 말씀 아래 있습니다.
목회자도 말씀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말씀 앞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저 역시 설교를 하면서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을 제 목적을 위해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을 통해 사람을 조종해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제가 먼저 말씀에 심판받아야 합니다.
설교자는 말씀 위에 서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 아래 서는 사람입니다.
에글론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에훗은 왼손으로 오른쪽 허벅지에서 칼을 빼어 왕의 몸을 찌릅니다.
본문은 매우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칼자루까지 들어가고 살이 칼날을 덮으며 칼을 몸에서 빼내지 못했다고 기록합니다.
이 장면은 현대 독자에게 상당히 거칠고 불편합니다.
저는 이런 본문을 읽을 때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에훗의 행동을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개인적 폭력의 모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사사기의 전쟁과 구원 사건은 구약 이스라엘이라는 독특한 언약적·역사적 상황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의 교회는 에훗처럼 정치적 적을 암살하라고 부름받은 공동체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고, 칼을 든 베드로에게 칼을 도로 집에 꽂으라고 하셨습니다.
새 언약의 교회는 물리적 폭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지 않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제가 붙들어야 할 핵심은 암살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압제에서 자기 백성을 건지셨다는 구속사적 의미입니다.
에훗은 하나님께서 특정한 시대에 사용하신 사사입니다.
그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은 외적 압제에서 해방됩니다.
그러나 이 해방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에훗의 구원은 더 큰 구원을 기다리게 합니다.
저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에훗은 원수를 죽임으로 백성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죽으심으로 백성을 구하셨습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에훗은 칼을 적의 몸에 찔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이 찔림을 받으셨습니다.
에훗은 압제자의 피를 흘렸습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구약의 사사들은 적을 쓰러뜨려 승리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스스로 죽음에 내어 주심으로 죄와 사망을 이기셨습니다.
세상의 방식으로 보면 십자가는 패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식에서는 십자가가 승리입니다.
저는 이것이 복음의 놀라운 역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원수를 제거해야 자신이 산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 원수 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로마서는 우리가 아직 원수 되었을 때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저는 에훗 이야기를 읽으면서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에서 완성된 더 높은 구원을 봅니다.
예수님은 궁극적인 사사이시지만 에훗보다 훨씬 크신 구원자입니다.
죄의 세력을 죽이셨고 죄인을 살리셨습니다.
본문에서 에글론은 죽고, 에훗은 문을 잠그고 현관으로 나갑니다.
왕의 신하들이 돌아왔을 때 문이 잠겨 있는 것을 보고 왕이 서늘한 다락방에서 용변을 보는 것으로 생각하며 기다립니다.
본문에는 당시 상황을 사실적이면서도 풍자적으로 묘사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이스라엘 위에 군림했던 강력한 왕이 죽었지만 신하들은 한동안 그 사실조차 알지 못합니다.
권력의 허무함이 느껴집니다.
에글론은 십팔 년 동안 사람들을 지배했습니다.
누구도 그에게 대항하기 어려워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의 통치는 끝납니다.
저는 이 장면을 통해 세상의 권력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합니다.
아무리 강한 제국도 지나갑니다.
아무리 유명한 사람도 죽습니다.
돈과 지위와 명예는 영원한 왕좌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세상의 힘을 지나치게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고 동시에 제게 작은 힘이 있다고 교만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모든 인간의 권세에는 끝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신하들이 오래 기다린 뒤 열쇠를 가져와 문을 열자 주인이 죽어 땅에 쓰러져 있습니다.
그들이 지체하는 동안 에훗은 피합니다.
본문은 에훗이 돌 뜨는 곳을 지나 스이라로 도망했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섭리가 인간의 작은 시간 차이와 판단까지 사용하시는 모습을 봅니다.
신하들은 기다렸습니다.
그 기다림이 에훗에게 탈출할 시간을 주었습니다.
인간의 눈에는 우연처럼 보이는 순간들이 하나님의 큰 역사 속에서는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저는 제 삶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그때는 왜 일이 늦어지는지 몰랐습니다.
왜 만나지 못했는지 몰랐습니다.
왜 길이 막혔는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돌아보면 그 지연이 보호였거나, 다른 길로 인도하시는 섭리였음을 깨닫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모든 사건의 이유를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우연만으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습니다.
그 섭리는 제가 이해할 수 없을 때에도 계속됩니다.
십자가도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는 실패처럼 보였습니다.
제자들은 도망갔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흘째 되는 날 무덤이 열렸습니다.
인간의 가장 어두운 금요일을 하나님께서는 부활의 아침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해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성급히 결론 내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직 일하고 계십니다.
나팔을 불자 백성이 일어났고, 작은 막대기도 하나님의 손에서 무기가 되었습니다 (삿 3:27-31)
에훗은 에브라임 산지에 이르러 나팔을 붑니다.
그 소리를 듣고 이스라엘 자손이 산지에서 그를 따라 내려옵니다.
저는 여기서 에훗의 역할이 개인적인 암살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봅니다.
그는 백성을 일으킵니다.
함께 싸우도록 이끕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따르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수들인 모압을 너희의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이 문장에서 승리의 주체가 다시 분명해집니다.
에훗은 “내가 에글론을 죽였으니 이제 나를 영웅으로 따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넘겨 주셨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것이 참된 지도자의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를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자신의 명예로 바꾸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자기에게 묶지 않고 하나님께 시선을 돌립니다.
목회자도 그래야 합니다.
성도가 말씀을 통해 변화되었다면 목회자의 공로가 아닙니다.
교회가 성장했다면 목회자의 왕국이 커진 것이 아닙니다.
한 영혼이 믿음으로 일어났다면 하나님이 일하신 것입니다.
저는 사역을 하면서 얼마나 쉽게 하나님의 영광을 제 만족으로 바꾸는지 경계해야 합니다.
칭찬을 받고 싶습니다.
성과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내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갖고 싶습니다.
하지만 에훗의 고백은 제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하셨다.”
이 고백이 제 사역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에훗을 따라 내려가 요단강의 모압 나루를 장악합니다.
나루를 차지했다는 것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습니다.
모압 군대가 본국으로 퇴각하거나 지원군을 받는 길을 차단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모압 사람 약 만 명을 죽입니다.
본문은 그들이 모두 강하고 용맹한 사람들이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도 피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다시 역전이 일어납니다.
십팔 년 동안 압제당했던 이스라엘이 이제 승리합니다.
강하고 용맹한 모압 사람들이 패배합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단순히 마음의 위로가 아니라 실제적인 해방으로 나타나는 것을 봅니다.
성경의 구원은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실제 역사 속에서 자기 백성을 건지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승리를 오늘의 정치·군사적 승리와 직접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신약의 교회는 국가 전쟁의 승패를 곧바로 하나님 나라의 승리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어느 민족의 군사적 정복을 복음의 확장과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모든 민족 가운데서 부름받습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적은 혈과 육이 아닙니다.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을 제게 적용한다면 모압 사람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연결해야 합니다.
저를 오랫동안 붙잡은 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십팔 년이 아니라 그보다 더 긴 습관일 수도 있습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다”라고 체념한 영역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죄의 지배가 영원하지 않다고 선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죄와 사망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는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에게 죄의 유혹은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왕권이 바뀌었습니다.
과거에는 죄가 주인이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십니다.
저는 이것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죄와 싸우면서 “나는 절대로 못 이긴다”고 말하는 것도 믿음의 언어는 아닐 수 있습니다.
제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 안에서는 싸울 수 있습니다.
넘어질 수 있지만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죄를 정상이라고 부르지 않고 계속 싸울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화의 길입니다.
30절은 말합니다.
“그 날에 모압이 이스라엘 수하에 굴복하매 그 땅이 팔십 년 동안 평온하였더라.”
팔십 년입니다.
옷니엘 시대의 사십 년보다 두 배나 긴 평화입니다.
사사기에서 가장 긴 평온 기간으로 기록됩니다.
저는 이 팔십 년을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로 봅니다.
이스라엘은 십팔 년 동안 압제를 받았지만 하나님께서는 팔십 년의 안식을 주십니다.
물론 단순히 “고난보다 네 배의 복을 주신다”는 수학 공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그런 기계적인 원리를 약속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이 넉넉하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겨우 숨만 쉬게 하는 정도로 회복시키지 않으십니다.
평온을 주십니다.
‘평온하다’는 말은 전쟁이 그치고 안식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사사기의 안식은 그러나 잠정적입니다.
팔십 년이 지나면 다시 문제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사사들의 한계입니다.
그들의 구원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또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에훗이 주는 안식은 팔십 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안식은 영원합니다.
에훗은 모압의 압제에서 구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십니다.
에훗은 한 민족을 위한 사사였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자기 백성을 불러 모으시는 구원자이십니다.
에훗의 승리는 다시 위기를 맞지만 십자가와 부활의 승리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안식할 때가 남아 있다고 말합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아직 싸웁니다.
질병과 싸웁니다.
죄와 싸웁니다.
슬픔과 싸웁니다.
죽음의 현실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영원한 안식이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곳에서는 더 이상 사사를 반복해서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에훗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31절에는 아주 짧게 삼갈이 등장합니다.
“에훗 후에는 아낫의 아들 삼갈이 있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였고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
한 절뿐입니다.
삼갈이 어느 지파인지, 언제 태어났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사역했는지 자세한 설명이 없습니다.
그에게 특별한 칼이나 군사 조직이 있었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의 손에 있었던 것은 “소 모는 막대기”였습니다.
소 모는 막대기는 농사에서 소를 몰거나 통제할 때 사용하는 길고 뾰족한 농기구였습니다.
전문적인 전쟁 무기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사용하십니다.
저는 삼갈의 이야기가 에훗의 왼손과 묘하게 연결되어 보입니다.
에훗에게는 사람들이 예상한 오른손이 아니라 왼손이 있었습니다.
삼갈에게는 칼이나 창이 아니라 소 모는 막대기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예상 밖의 것을 사용하십니다.
저는 이 말씀에서 큰 위로를 얻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 무엇인가 대단한 것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돈,
더 뛰어난 능력,
더 좋은 학력,
더 넓은 인맥,
더 화려한 재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 내 손에 있는 것을 작게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묻는 것 같습니다.
“네 손에 무엇이 있느냐?”
모세에게는 지팡이가 있었습니다.
다윗에게는 물맷돌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과부에게는 작은 기름병이 있었습니다.
소년에게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삼갈에게는 소 모는 막대기가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도구의 크기가 아니라 그것을 누가 사용하시는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며 제 손에 이미 있는 것을 다시 보게 됩니다.
제가 가진 시간,
제가 아는 말씀,
제가 경험한 아픔,
제가 만나는 몇 사람,
제가 쓸 수 있는 글,
제가 드릴 수 있는 기도,
이것들은 작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려지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습니다.
저는 “더 좋은 것이 생기면 순종하겠다”고 미루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가진 것으로 순종하고 싶습니다.
지금 할 수 있는 사랑을 하겠습니다.
지금 드릴 수 있는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지금 쓸 수 있는 글을 쓰겠습니다.
지금 만나는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겠습니다.
하나님은 종종 작은 것을 통해 큰 일을 이루십니다.
그렇다고 삼갈의 행위를 오늘 물리적 폭력의 모델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그 역시 구약의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압제에서 구원한 사사입니다.
신약 시대의 우리는 사람을 해치는 무기를 드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도구를 듭니다.
진리의 말씀,
기도,
사랑,
인내,
섬김,
용서가 우리의 무기입니다.
세상은 이것들을 약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도 세상의 눈에는 약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다고 말합니다.
저는 그래서 에훗의 왼손과 삼갈의 막대기 끝에서 결국 십자가를 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교만을 뒤집으신 구원의 방식입니다.
인간은 강자가 승리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죽으신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셨습니다.
인간은 높아지는 것이 승리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낮아지셨습니다.
인간은 원수를 제거하는 것이 승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는 원수를 사랑하고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죄와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그래서 제 구원의 근거는 제 강함이 아닙니다.
제가 얼마나 많이 알고, 얼마나 오래 믿고, 얼마나 훌륭한 일을 했는가가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입니다.
이 복음을 붙들 때 저는 제 약함 때문에 절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동시에 제 능력 때문에 교만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구원이 주께 속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는 제 왼손을 부끄러워하지 않겠습니다.
제 소 모는 막대기를 하찮게 여기지 않겠습니다.
다만 그것을 하나님의 손에 드리고 싶습니다.
“주님, 제게 없는 것만 바라보지 않게 하시고 지금 제 손에 주신 것을 충성스럽게 사용하게 하소서.”
그리고 무엇보다 제 삶의 참된 구원자는 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임을 기억하겠습니다.
마무리
사사기 3장 12절부터 31절을 묵상하며 저는 반복해서 넘어지는 인간과, 그럼에도 다시 구원자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봅니다. 에훗의 왼손과 삼갈의 소 모는 막대기는 제 약함과 부족함도 하나님의 손에서는 쓰임받을 수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저는 인간 사사들에게 머물지 않겠습니다. 에훗은 원수를 죽여 백성을 구했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죽으심으로 원수 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오늘 저는 제 약점을 핑계 삼지 않고, 제 능력을 자랑하지도 않으며, 지금 제 손에 주어진 것으로 충성하겠습니다. 그리고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영원한 안식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제 참된 구원자로 의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