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사사기 5:19-31

별들이 싸우고 기손 강이 휩쓸던 날, 하나님 편에 선다는 것

  • 매일성경 묵상 사사기 5:19-31

오늘도 저는 말씀 앞에 앉아 드보라의 노래 후반부를 천천히 듣습니다. 앞부분이 자원하여 일어난 백성을 노래했다면,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시스라의 군대를 무너뜨리셨는지, 누가 그 싸움에 참여했고 누가 외면했는지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하늘의 별들과 기손 강까지 하나님의 전쟁에 참여하고, 이름 없는 장막의 여인 야엘은 강대한 장군 시스라의 마지막을 결정합니다. 반면 시스라의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며 여전히 승리의 전리품을 상상합니다. 저는 이 대조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 참여와 방관, 인간의 헛된 기대와 하나님의 최종 승리를 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제가 어느 편에 서 있는지를 살피며, 어둠 속에서도 해처럼 힘 있게 떠오르는 믿음의 길을 배우고자 합니다.

별들이 싸우고 기손 강이 휩쓸다, 승리의 주인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삿 5:19-23)

19절은 가나안 왕들이 다아낙에서, 므깃도 물가에서 싸웠다고 노래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은을 탈취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전쟁을 시작했지만 기대했던 전리품을 얻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무너졌습니다.

저는 이 짧은 표현에서 인간 욕망의 허무함을 봅니다.

전쟁에 참여한 가나안 왕들에게 이 싸움은 더 많은 권력과 부를 얻는 기회였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강한 군대와 철 병거를 믿었습니다. 승리 후 얻을 재물까지 계산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개입하시자 그들의 계산은 아무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사람은 결과를 손에 넣기 전에 이미 마음속에서 전리품을 나누곤 합니다.

“이 일만 성공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이 사람만 내 편이 되면 안전할 것이다.”

“돈이 이만큼 모이면 걱정 없이 살 것이다.”

계획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제외한 확신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습니다.

본문의 시선은 곧 땅에서 하늘로 올라갑니다.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우되 그들이 다니는 길에서 시스라와 싸웠도다.”

이것은 드보라의 노래가 가진 웅대한 시적 표현입니다. 전쟁이 단순히 바락의 군대와 시스라 군대 사이의 충돌이 아니었음을 보여 줍니다. 온 창조세계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싸우셨다는 신학적 선언입니다.

고대 근동 사람들은 별과 천체를 신적 존재와 연결하여 숭배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별을 신으로 높이지 않습니다. 별들조차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가나안의 신들이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늘과 땅을 다스리십니다.

저는 이 장면을 묵상하면서 신앙이 제 문제를 지나치게 크게 만들어 놓는 습관을 교정해 준다고 느낍니다.

시스라에게 철 병거 구백 대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라보면 너무 큰 적입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그 병거들조차 하나님의 창조세계 한가운데 놓여 있을 뿐입니다.

제가 오늘 두려워하는 문제도 그렇습니다.

가까이서 보면 삶 전체를 삼킬 만큼 커 보입니다. 경제의 문제, 건강의 문제, 관계의 갈등, 해결되지 않는 오래된 상처가 전부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 문제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시선을 더 높이 듭니다.

“이 문제 위에도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 한 문장이 믿음의 방향을 바꿉니다.

21절에서는 전쟁의 결정적인 장소가 등장합니다.

“기손 강은 그 무리를 표류시켰으니 이 기손 강은 옛 강이라.”

‘강’ 또는 급류를 뜻하는 히브리어 ‘나할’(נַחַל)은 계절에 따라 물의 양이 크게 달라지는 하천이나 골짜기의 물길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사사기 4장에서는 시스라가 철 병거들을 기손 강으로 집결시켰습니다. 그런데 드보라의 노래는 바로 그 기손 강이 적군을 휩쓸었다고 노래합니다.

시스라에게 가장 유리해야 할 전장이 오히려 그의 패배를 불러온 장소가 되었습니다.

사사기 5장 4-5절의 비와 20-21절의 하늘과 강에 대한 시적 묘사를 함께 보면, 폭우와 불어난 물이 전투 상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큽니다. 철 병거는 단단한 평지에서는 위력적이지만 땅이 진흙으로 변하면 기동력을 잃습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의 역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강점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강점을 한순간에 무력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철 병거가 너무 강해서 이스라엘이 두려워했는데, 바로 그 무거운 병거가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저는 이 말씀을 “하나님을 믿으면 언제나 상황이 극적으로 뒤집힌다”는 식으로 단순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보장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본문의 승리는 하나님께서 분명히 약속하신 구원 역사 안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오늘 제게 필요한 믿음은 “내가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릴 것이다”라는 자신감이 아닙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하나님의 통치는 무너지지 않는다”는 신뢰입니다.

저는 이것이 훨씬 깊은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드보라는 전쟁의 한복판에서 자신에게 말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힘 있는 자를 밟았도다.”

이 말은 자기 능력을 과시하는 승리 선언이라기보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에 참여한 기쁨으로 들립니다. 조금 전까지 두려움에 짓눌렸던 백성이 이제 강한 자를 추격합니다.

죄의 권세와 싸우는 제 삶도 이와 비슷합니다.

복음은 제가 죄와 싸워 이긴 뒤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승리하셨기 때문에 그 승리를 의지해 죄와 싸우는 삶입니다.

십자가에서 죄의 형벌이 담당되었고, 부활을 통해 죽음의 권세가 결정적으로 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영적 싸움은 승리를 만들어 내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승리를 삶에 드러내는 싸움입니다.

저는 넘어질 수 있습니다.

여전히 유혹받습니다.

하지만 죄를 제 영원한 주인으로 인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왕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22절에서는 말발굽 소리가 들립니다. 적의 군마들이 달아나는 모습입니다. 한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공포를 주었던 병거와 말들이 이제 도망갑니다.

그리고 갑자기 23절에서 전혀 다른 이름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거듭 그 주민들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

‘저주하다’는 의미의 히브리어 ‘아라르’(אָרַר)는 언약적 심판의 선언과 관련된 강한 말입니다.

메로스가 정확히 어디인지 오늘날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분명한 것은 전쟁이 그들 가까이에서 벌어졌고, 하나님의 구원 싸움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들이 나서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조심스럽게 묵상합니다.

메로스가 저주받은 이유는 힘이 약해서가 아닙니다.

전쟁에서 실패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앞부분에서 자원한 스불론과 납달리와 강한 대조를 이룹니다.

저는 신앙의 반대말이 언제나 적극적인 악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합니다.

때로는 방관입니다.

해야 할 선을 알면서 하지 않는 것입니다.

고통받는 사람을 보고도 지나치는 것,

불의 앞에서 자신의 안전만 지키는 것,

용서해야 할 사람을 계속 외면하는 것,

하나님께서 분명히 맡기신 일을 다른 누군가가 하겠지 하며 미루는 것 역시 신앙의 문제입니다.

야고보서는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죄라고 말합니다.

저는 메로스를 보며 묻습니다.

“혹시 제 신앙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는 것에만 머물러 있지 않은가?”

그리스도인의 삶은 단순히 악을 피하는 삶이 아닙니다.

선을 행하는 삶입니다.

사랑해야 하고,

돕고,

말해야 할 때 말하며,

함께 울고,

필요할 때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메로스의 저주를 오늘의 정치적·군사적 문제에 곧바로 적용해서 “우리 편의 행동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저주받는다”고 사용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분명히 명령하신 구속사적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속합니다.

오늘 새 언약의 교회가 참여해야 할 싸움은 사람을 제거하는 전쟁이 아닙니다.

진리와 사랑,

거룩과 정의,

복음과 섬김의 싸움입니다.

우리의 적은 혈과 육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메로스를 읽으며 누군가를 저주하기보다 저 자신을 돌아봅니다.

하나님이 제게 맡기신 자리에서 침묵과 무관심으로 빠져 있지는 않은가.

그 질문을 피하지 않겠습니다.

야엘의 장막에서 강한 장군이 무너지다, 하나님은 작은 자를 통해 역전하셨습니다 (삿 5:24-27)

24절부터 노래의 중심은 야엘에게로 이동합니다.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은 다른 여인들보다 복을 받을 것이니 장막에 있는 여인들보다 더욱 복을 받을 것이로다.”

사사기 4장에서 우리는 이미 사건을 읽었습니다. 시스라가 전쟁에서 패한 뒤 도망하여 야엘의 장막으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사사기 5장은 같은 사건을 시의 언어로 다시 들려줍니다.

먼저 드보라는 야엘을 “복을 받을 여인”이라고 노래합니다.

저는 이 표현이 누가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했는지를 다시 강조한다고 봅니다.

메로스는 가까이 있으면서도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야엘은 이스라엘 군대의 정규 병사도 아니었고 전쟁터에 있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심판 역사에 참여합니다.

사람이 예상하는 중심과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중심은 다를 수 있습니다.

전쟁의 주역이라고 하면 보통 장군과 군대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시스라의 마지막을 결정한 사람은 장막 안에 있던 한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유명한 사람만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강한 사람만 사용하지도 않으십니다.

사사기 전체에서 이 특징은 반복됩니다.

왼손잡이 에훗,

소 모는 막대기를 든 삼갈,

여선지자 드보라,

그리고 야엘입니다.

저는 이것을 보며 하나님께 쓰임받는 조건을 세상이 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위로를 얻습니다.

사람이 보기에 특별하지 않은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충실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유명한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에 얼마나 깨어 있는가입니다.

25절은 야엘이 시스라를 맞이한 장면을 노래합니다.

“시스라가 물을 구하매 우유를 주되 엉긴 젖을 귀한 그릇에 담아 주었고.”

시스라는 안전하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물을 요구했는데 더 좋은 우유를 받았습니다.

전쟁터에서 도망쳐 온 사람에게 장막과 음식과 휴식은 안전의 신호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기대한 안전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인간의 판단이 얼마나 제한적인지를 생각합니다.

사람은 “여기는 안전하다”고 판단합니다.

“이 정도 재산이면 괜찮다.”

“이 사람과 관계만 유지하면 안전하다.”

“이 직위가 있으면 걱정없다.”

하지만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안전한 피난처는 없습니다.

시편이 하나님을 피난처라고 반복해서 부르는 이유가 있습니다.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이 최종적인 안전입니다.

26절에서 야엘은 장막 말뚝과 일꾼의 방망이를 잡습니다.

시적인 표현은 매우 강렬합니다.

그는 시스라의 머리를 치고 관자놀이를 꿰뚫습니다.

27절은 시스라의 죽음을 세 번에 가까운 반복으로 묘사합니다.

“그가 야엘의 발 앞에 꿇어 엎드러지고 누웠고… 쓰러져 죽었도다.”

한때 철 병거 구백 대를 지휘하던 군대 장관이 한 여인의 발 아래 누워 있습니다.

이 장면은 단순히 한 사람의 죽음을 넘어 강자의 몰락을 극적으로 보여 줍니다.

시스라는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을 압제한 체제의 중심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무너졌다는 것은 인간을 짓누르던 권력이 영원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억압받는 사람들의 울음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악이 오래 지속될 수는 있습니다.

시스라의 압제가 무려 이십 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래 계속되었다고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악이 즉시 심판받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악을 인정하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내와 무관심은 다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판단하십니다.

이 사실은 저에게 위로인 동시에 두려움입니다.

억울한 일을 겪을 때는 모든 판단을 제가 직접 이루려 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께서 보십니다.

반대로 제가 가진 힘으로 다른 사람을 억압한다면 하나님께서 그것도 보십니다.

저는 힘이 없을 때보다 힘이 있을 때 제 신앙이 더 정확히 드러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직책이 있을 때,

돈이 있을 때,

나보다 약한 사람을 대할 때,

상대방이 내 결정에 의존할 때 제가 어떻게 행동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시스라의 이야기는 권력의 영원성을 믿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야엘의 행동을 오늘날 개인적인 폭력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사사기의 전쟁은 고대 이스라엘의 독특한 언약 역사 안에서 벌어진 사건입니다. 신약의 교회는 사람에게 장막 말뚝을 드는 공동체가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며 복음으로 악을 이기는 공동체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잡으러 온 사람에게 칼을 휘두른 베드로에게 칼을 거두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오늘 제가 죽여야 할 것은 사람이 아니라 제 안의 죄입니다.

탐욕을 죽이고,

거짓을 죽이며,

교만을 죽이고,

미움을 끊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야엘의 사건은 저를 더 큰 구속사적 질문으로 이끕니다.

“하나님은 최종적으로 어떻게 악을 이기시는가?”

그 답은 십자가에서 완전히 드러납니다.

사사기에서는 원수가 죽어 백성이 살아납니다.

십자가에서는 구원자가 죽어 원수 된 우리가 살아납니다.

이 차이는 결정적입니다.

예수님은 시스라와 같은 죄인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지 않으셨습니다. 죄인을 위해 자기 몸을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며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면서 동시에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야엘의 발 아래 쓰러진 시스라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골고다에 쓰러지신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깨뜨리고 일어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최종적인 역전입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패배시켰다고 생각한 순간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강함과 약함을 세상의 기준으로만 판단하지 않으려 합니다.

십자가가 보여 주듯 하나님의 능력은 때때로 인간이 가장 약하다고 생각하는 자리에서 완전하게 드러납니다.

창가에서 기다리는 시스라의 어머니, 사라지는 세상과 해처럼 떠오르는 사람들입니다 (삿 5:28-31)

28절부터 드보라의 노래는 갑자기 장소를 바꿉니다.

전쟁터도 아니고 야엘의 장막도 아닙니다.

시스라의 집입니다.

그곳에서 그의 어머니가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시스라의 어머니가 창문으로 바라보며 살창에서 부르짖기를 그의 병거가 어찌하여 더디 오는가 그의 병거들의 걸음이 어찌하여 늦어지는가 하매.”

저는 이 장면이 사사기에서 가장 문학적으로 강렬한 장면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독자는 이미 시스라가 죽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모릅니다.

그녀는 기다립니다.

병거 소리를 기다립니다.

승전 소식을 기다립니다.

아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장면에는 인간적인 슬픔도 있습니다.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모습 자체는 안타깝습니다.

성경은 전쟁을 낭만적인 이야기로만 만들지 않습니다. 승리의 반대편에는 누군가의 죽음과 기다림이 있습니다.

그러나 노래는 여기서 더 깊은 아이러니를 보여 줍니다.

시스라의 어머니와 지혜로운 시녀들은 병거가 늦는 이유를 자신들 방식으로 해석합니다.

“그들이 어찌 노략물을 얻지 못하였으랴.”

승리한 뒤 전리품을 나누느라 늦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사람마다 한두 처녀를 얻었으리로다”라고 말합니다. 개역개정의 ‘처녀’ 뒤에는 전쟁에서 여성을 전리품처럼 취급하던 고대 전쟁문화의 잔혹함이 숨어 있습니다.

시스라의 세계에서는 사람이 물건이 됩니다.

여성은 전리품이 됩니다.

권력을 가진 자가 약한 자를 소유합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야빈과 시스라의 압제가 단순한 정치적 지배가 아니었음을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것은 인간을 짓밟고 착취하는 폭력의 질서였습니다.

시스라의 어머니는 아름답게 수놓은 옷도 기대합니다.

전쟁에 나간 아들이 승리하여 돌아와 자신에게 값진 전리품을 가져다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독자는 압니다.

그 병거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전리품도 없습니다.

시스라는 장막 바닥에 죽어 있습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인간의 자기기만을 봅니다.

현실은 이미 달라졌는데 인간은 여전히 자신에게 익숙한 이야기를 반복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도 이겼으니 이번에도 이길 것이다.”

“내가 의지한 것이 지금까지 나를 지켜 주었으니 앞으로도 그렇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역사를 뒤집으시면 과거의 공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이 모습은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한 부자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는 곡식을 쌓아 둘 더 큰 창고를 계획하며 여러 해 쓸 물건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날 밤 그의 영혼을 요구하셨습니다.

인간은 내일의 전리품을 계산하지만 자기 생명의 길이를 알지 못합니다.

저는 이 말씀 앞에서 제 기대를 살펴봅니다.

무엇이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고 믿고 있는가.

무엇을 당연한 미래로 여기고 있는가.

건강도,

재산도,

관계도,

사역도,

내일도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미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는 태도입니다.

계획하되 교만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는 야고보서의 고백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드보라의 노래는 마지막 31절에서 개인적인 장면을 넘어 다시 우주적·언약적 선언으로 확장됩니다.

“여호와여 주의 원수들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들은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

이 구절이 사사기 5장의 결론입니다.

시스라의 이야기는 한 장군의 몰락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드보라는 세상을 두 부류로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대적하는 자들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사랑하다”는 히브리어 ‘아하브’(אָהַב)는 단순한 감정적 호감보다 관계적 충성과 애정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말로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말씀을 귀하게 여기고,

부르심 앞에서 순종하며,

하나님보다 다른 힘을 더 높이지 않는 삶입니다.

저는 특히 “해가 힘 있게 돋음 같다”는 표현을 오래 묵상하고 싶습니다.

밤이 아무리 길어도 해가 뜨면 어둠은 물러갑니다.

해가 어둠과 협상하지 않습니다.

조용히 떠오르지만 그 빛 자체로 밤을 끝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삶이 이와 같기를 드보라는 기도합니다.

저는 이것이 단순한 형통의 약속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모든 일이 잘되고 세상에서 강자가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결국 하나님의 최종적인 승리에 참여한다는 소망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이 소망은 부활과 새 창조로 완성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때 세상의 눈으로는 빛이 꺼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실제로 복음서는 십자가 사건 가운데 어둠이 임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사흘째 되는 날 새벽에 무덤이 열렸습니다.

부활의 아침입니다.

저는 사사기 5장의 “해가 힘 있게 돋음”이라는 이미지에서 부활의 아침을 멀리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죽음의 밤을 뚫고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의 마지막도 어둠이 아닙니다.

죽음이 마지막 문장이 아닙니다.

새 창조의 아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세상이 어둡다고 해서 절망하지 않습니다.

악이 강해 보여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시스라의 철 병거가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을 짓눌렀지만 하루아침에 무너졌습니다.

십자가를 이긴 것처럼 보였던 죽음도 부활 앞에서 무너졌습니다.

마지막에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원수를 발아래 두실 것입니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더 이상 압제도, 전쟁도, 인간을 전리품으로 취급하는 폭력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백성과 함께하시고 죽음과 애통과 고통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것이 새 창조의 완성입니다.

본문 마지막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 땅이 사십 년 동안 평온하였더라.”

하나님의 구원으로 이스라엘에 안식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사십 년의 평화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다음 장에서 이스라엘은 다시 죄를 짓습니다.

그래서 사사기의 안식은 언제나 더 큰 안식을 기다리게 합니다.

완전한 사사,

영원한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안식입니다.

저는 오늘 세상의 일시적인 평안만을 최고의 복으로 구하지 않으려 합니다.

환경이 좋아지는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은혜입니다.

하지만 더 큰 복은 하나님과 화목하고 그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흔들려도 그리스도 안에 뿌리내리는 것,

밤이 길어도 부활의 아침을 믿는 것,

그것이 제가 붙들고 싶은 평안입니다.

마무리

사사기 5장 19절부터 31절을 묵상하며 저는 승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다시 분명하게 봅니다. 별들이 싸우고 기손 강이 적군을 휩쓸었으며, 강대한 시스라는 한 여인의 장막에서 무너졌습니다. 메로스의 방관과 야엘의 참여, 시스라의 어머니가 기대한 헛된 전리품은 제가 무엇을 의지하고 어느 편에 서 있는지를 묻게 합니다. 오늘 저는 선을 알고도 머무는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다. 세상의 철 병거보다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며 제게 맡겨진 순종을 감당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십자가와 부활로 죄와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어둠이 길어도 마지막에는 해처럼 떠오를 하나님의 새 창조를 소망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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