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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사사기 5:1-18

자원하는 백성이 일어설 때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 매일성경 묵상 사사기 5:1-18

오늘도 저는 말씀 앞에 앉아 전쟁이 끝난 뒤 울려 퍼지는 한 편의 노래를 듣습니다. 사사기 4장이 시스라와의 전쟁을 사건으로 기록했다면, 5장은 그 사건을 믿음의 눈으로 해석하는 노래입니다. 드보라와 바락은 승리의 영광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하나님께 올려 드립니다. 동시에 누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자원하여 나섰고, 누가 머뭇거리며 자기 자리에 남았는지도 노래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며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여 찬송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부르심 앞에 실제로 나서는 순종임을 배웁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을 다시 기억하고, 제 삶의 자리에서 기꺼이 주님께 자신을 드리는 믿음을 배우고자 합니다.

백성이 즐거이 헌신할 때 가장 먼저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삿 5:1-5)

사사기 5장은 매우 아름다운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이 날에 드보라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노래하여 이르되.”

전쟁이 끝난 날, 드보라와 바락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승전 기념비에 자기 이름을 새기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그 노래의 대상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저는 이 시작이 참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된 뒤에는 기도가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살려 달라고 기도할 때는 간절합니다.

길을 열어 달라고 부르짖을 때는 눈물이 납니다.

그런데 일이 해결되고 나면 어느 순간 하나님의 은혜보다 결과를 누리는 데 마음이 더 많이 갑니다.

드보라와 바락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 그들은 전쟁을 다시 해석합니다.

“우리가 잘 싸워서 이겼다”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고백입니다.

저는 이것이 찬양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찬양은 단지 아름다운 음악을 부르는 행위가 아닙니다.

내 삶에서 일어난 일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다시 해석하는 일입니다.

세상은 말합니다.

“운이 좋았다.”

“전략이 뛰어났다.”

“바락의 군대가 용감했다.”

그러나 드보라는 말합니다.

“여호와를 찬송하라.”

사사기 5장 2절은 이 노래 전체의 중요한 주제를 제시합니다.

“이스라엘의 영도자들이 영도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기서 “즐거이 헌신하다”는 의미와 관련된 히브리어가 ‘나다브’(נָדַב)입니다. 스스로 원하여 드리다, 자원하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억지로 끌려 나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누가 강제로 등을 떠밀어서 전쟁터에 나온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백성이 자원했습니다.

저는 이 표현 앞에서 제 신앙의 태도를 돌아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제게 기쁨입니까, 부담입니까?

예배가 기다려지는 자리입니까, 의무를 수행하는 시간입니까?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입니까, 해야 하니까 하는 종교적인 숙제입니까?

헌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어떤 일을 맡았을 때 “왜 내가 해야 합니까?”라는 마음이 먼저 나올 수 있습니다.

누군가 알아주지 않으면 섭섭할 수도 있습니다.

칭찬이 없으면 힘이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드보라의 노래는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 표현이 제 마음에 오래 남습니다.

진정한 헌신은 외부의 강요보다 내부의 은혜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알면 드리고 싶어집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자원하여 드립니다.

바울도 고린도후서에서 하나님께서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 말합니다.

헌금만의 원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마지못해 끌려오는 종보다 사랑 때문에 기꺼이 자신을 드리는 자녀를 원하십니다.

저는 여기서 복음의 순서를 다시 생각합니다.

우리가 헌신해서 하나님께 사랑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헌신합니다.

우리가 봉사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구원을 이루셨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자신을 드립니다.

십자가가 빠진 헌신은 쉽게 율법주의가 됩니다.

“더 많이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다.”

“더 헌신해야 내가 더 좋은 신앙인이 될 것이다.”

그런데 복음은 말합니다.

“이미 사랑받았다.”

“이미 값으로 산 바 되었다.”

“그러므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

은혜가 먼저입니다.

헌신은 그 은혜에 대한 반응입니다.

드보라는 왕들과 통치자들에게도 자신의 노래를 들으라고 외칩니다.

“너희 왕들아 들으라 통치자들아 귀를 기울이라.”

저는 이 장면이 놀랍습니다.

드보라는 작은 공동체 안에서만 노래하지 않습니다.

열방의 왕들을 향해 여호와의 승리를 선포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작은 부족의 지역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역사와 열방을 다스리는 하나님입니다.

시스라의 철 병거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었습니다.

가나안 왕 야빈도 하나님의 통치 밖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드보라는 세상의 왕들에게 말합니다.

“들으라.”

세상 권력보다 더 크신 왕이 계십니다.

저는 이것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세상의 권력은 커 보입니다.

정치 권력도,

경제 권력도,

거대한 기업도,

여론도,

수많은 사람이 가진 영향력도 저를 압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왕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권력을 무시할 필요는 없지만 절대화해서도 안 됩니다.

국가도 하나님이 아닙니다.

정치 지도자도 하나님이 아닙니다.

돈도 하나님이 아닙니다.

교회 지도자도 하나님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 궁극적인 왕이십니다.

드보라는 이어서 하나님의 과거 행하심을 기억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도 물을 내리고 구름도 물을 내렸나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나타나셨던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신현’, 곧 하나님의 현현 이미지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임하실 때 산이 진동하고 하늘이 반응하는 장면이 자주 나타납니다.

드보라는 현재의 승리를 과거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연결합니다.

시스라와의 전쟁만 따로 떼어 보지 않습니다.

출애굽의 하나님,

시내산의 하나님,

광야에서 인도하신 하나님이 지금도 자기 백성을 위해 싸우신다고 고백합니다.

저는 이것이 믿음의 기억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위기가 너무 커 보일 때 과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저는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에만 시선이 고정됩니다.

“이번 일은 너무 어렵다.”

“이번에는 방법이 없다.”

하지만 믿음은 질문합니다.

“지금까지 나를 인도하신 분은 누구인가?”

제가 지나온 삶에도 하나님의 흔적이 있습니다.

막막했던 순간에 길을 열어 주셨던 일,

무너졌을 때 다시 일으켜 주셨던 은혜,

상상하지 못했던 사람을 보내 주셨던 경험,

기도조차 제대로 할 수 없을 때 붙들어 주셨던 순간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과거 신실하심은 현재의 믿음을 위한 자산입니다.

그렇다고 과거 경험을 절대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일하셨던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오늘도 일하셔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과거에 신실하셨던 하나님의 성품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방식은 달라질 수 있지만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4절과 5절의 시적 묘사에는 비와 물의 이미지가 나타납니다.

사사기 4장에서 시스라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철 병거였습니다.

하지만 사사기 5장의 노래는 하나님께서 자연을 움직이시는 분임을 보여 줍니다.

이후 20절과 21절에서는 별들이 싸우고 기손 강이 적들을 휩쓴다고 노래합니다.

철 병거가 강한 이유는 평탄하고 단단한 땅에서 빠르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폭우로 땅이 진흙이 되면 병거의 강함이 약함으로 바뀝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인간의 교만이 얼마나 상대적인지를 생각합니다.

사람은 자기 장점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돈이 많으면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식이 많으면 모든 문제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건강하면 오래 살 것 같습니다.

기술이 발전하면 인간이 무엇이든 통제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힘에는 항상 한계가 있습니다.

시스라의 철 병거 구백 대도 비 앞에서 무력해질 수 있습니다.

저는 제 삶의 병거를 너무 믿지 않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을 감사히 사용하되 그것을 하나님 자리에 두지 않겠습니다.

능력이 있으면 하나님께 드리고,

재물이 있으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며,

건강이 있으면 섬기는 데 쓰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드보라의 노래를 읽으며 저는 더 큰 하나님의 현현을 생각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산을 진동시키며 임하십니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십니다.

시내산의 하나님이 갈릴리 길을 걸으십니다.

천둥과 불 가운데 나타나시던 하나님이 어린아이로 오십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는 인간의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가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땅이 진동합니다.

성전 휘장이 찢어집니다.

그리고 부활의 아침에도 큰 지진이 일어납니다.

저는 사사기 5장의 떨리는 산에서 십자가와 부활까지 이어지는 구속사의 큰 흐름을 봅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 들어오시는 분입니다.

멀리 계시며 인간의 고통을 구경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압제를 보셨고,

애굽의 노예들이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셨고,

마침내 자기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찬송합니다.

내 삶에서 가장 먼저 드려야 할 고백은 “내가 해냈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길이 끊기고 마을이 비었을 때 하나님은 한 사람을 일으키셨습니다 (삿 5:6-11)

6절부터 드보라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 이스라엘의 비참한 상황을 노래합니다.

“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큰 길들이 비었고 행인들은 오솔길로 다녔도다.”

저는 이 표현을 읽으며 당시 사회가 얼마나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를 상상합니다.

사람들이 큰길로 다니지 못했습니다.

적들의 약탈과 폭력 때문에 안전한 길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상업도 위축되었을 것이고,

여행도 어려웠을 것이며,

사람들은 숨어서 작은 길로 다녀야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군사 문제만이 아닙니다.

사회 전체가 무너진 상태입니다.

길이 사라지면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지 못합니다.

경제가 무너집니다.

공동체가 고립됩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공포가 자리 잡습니다.

저는 “큰 길들이 비었다”는 말을 읽으며 죄와 억압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위축시키는지를 생각합니다.

두려움은 사람을 좁은 길로 몰아넣습니다.

삶의 반경이 줄어듭니다.

누군가에게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은 사람을 믿기 어려워집니다.

실패를 반복한 사람은 도전하기가 두려워집니다.

오랫동안 비판받은 사람은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죄와 상처와 두려움은 사람의 길을 좁게 만듭니다.

이스라엘은 그런 상태였습니다.

7절은 더욱 처참한 현실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에는 마을 사람들이 그쳤으니 나 드보라가 일어나기까지 그쳤도다.”

“마을 사람들이 그쳤다”는 표현은 해석상 여러 논의가 있지만, 핵심은 이스라엘의 정상적인 공동생활과 안정이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마을을 지키지 못했고,

농사를 안전하게 짓기도 어려웠으며,

사회 질서가 붕괴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드보라가 일어납니다.

그녀는 자신을 “이스라엘의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저는 이 표현이 참 인상적입니다.

드보라는 자신을 여왕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장군이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어머니”라고 합니다.

성경의 지도력에는 권위와 돌봄이 함께 있습니다.

어머니는 생명을 돌봅니다.

약한 사람을 품습니다.

자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합니다.

드보라의 지도력은 단순한 권력 행사가 아니었습니다.

무너진 백성을 다시 일으키는 돌봄의 지도력이었습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이 표현을 깊이 생각합니다.

목회의 권위는 사람을 지배하는 힘이 아닙니다.

사람을 살리는 힘이어야 합니다.

말씀을 이용하여 사람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상처 입은 사람을 회복시키는 일입니다.

목사가 자신의 권위를 증명하려 들기보다 성도가 믿음으로 서도록 돕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도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했다고 말했습니다.

목회는 아버지의 책임과 어머니의 돌봄을 함께 품습니다.

드보라는 백성이 무너졌을 때 일어났습니다.

저는 “일어나다”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어둠이 깊어졌다고 모두 함께 주저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일으키셨습니다.

역사를 보면 시대가 어두울 때 하나님께서는 종종 한 사람을 깨우십니다.

한 사람의 기도,

한 사람의 말씀 순종,

한 사람의 용기가 공동체를 바꾸는 출발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때때로 세상이 너무 커 보여 무력감을 느낍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사회가 바뀌고,

문화가 바뀌고,

교회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사람들의 가치관이 달라지는 것을 보며 작은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한 사람을 가볍게 보지 않습니다.

모세 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사무엘 한 사람을 깨우십니다.

다윗을 부르십니다.

에스더를 사용하십니다.

드보라를 일으키십니다.

물론 영웅주의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이들을 위대하게 만든 것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순종을 통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실 수 있다는 사실도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오늘 이렇게 기도하고 싶습니다.

“주님, 시대가 어둡다고 불평만 하지 않게 하시고 제가 먼저 일어서게 하소서.”

가정이 무너졌다고 말하기 전에 제가 먼저 가정에서 말씀대로 살고,

교회가 약해졌다고 비판하기 전에 제가 먼저 기도하고,

사람들이 사랑이 없다고 말하기 전에 제가 먼저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8절에서는 이스라엘이 “새 신들을 택하였다”고 말합니다.

그 결과 전쟁이 성문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이 연결을 주의 깊게 봅니다.

우상숭배와 사회적 혼란이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새로운 신들을 선택하자 삶의 질서도 무너졌습니다.

사사기 전체가 보여 주는 중요한 신학입니다.

하나님을 버리면 인간이 더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주인을 섬기게 됩니다.

우상은 인간을 해방시키지 않습니다.

결국 억압합니다.

오늘의 우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하나님처럼 섬기면 돈 때문에 사람을 잃습니다.

성공을 우상으로 삼으면 성공하지 못한 자신을 미워하게 됩니다.

사람의 인정을 우상으로 삼으면 타인의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쾌락을 우상으로 삼으면 쾌락을 통제하지 못하게 됩니다.

우상은 처음에는 내가 선택하지만 나중에는 나를 지배합니다.

이스라엘은 새 신들을 선택했지만 그 신들은 철 병거에서 그들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제 우상이 위기의 날에 저를 구할 수 있는지 묻습니다.

돈이 죄를 용서해 줄 수 있습니까?

명예가 죽음을 이길 수 있습니까?

사람의 사랑이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습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구원하십니다.

8절 후반에는 “이스라엘 사만 명 중에 방패와 창이 보였던가”라고 노래합니다.

군사적으로 무장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를 시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시스라에게는 철 병거가 구백 대인데 이스라엘에는 방패와 창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불균형이 극심합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복음의 역설을 다시 봅니다.

이스라엘에게 승리의 근거가 자기 무기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승리의 근거입니다.

저 역시 제 신앙에서 자꾸 ‘무기’를 확인합니다.

능력이 있는가.

돈이 있는가.

사람이 있는가.

준비가 충분한가.

물론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부르신 일을 감당하는 궁극적인 능력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질그릇에 보배를 가졌다고 말합니다.

왜 질그릇입니까?

심히 큰 능력이 우리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질그릇임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려 합니다.

깨지기 쉽고 연약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 복음이라는 보배가 있습니다.

9절에서 드보라는 다시 자원한 사람들을 향해 마음을 둡니다.

“내 마음이 이스라엘의 방백들을 사모함은 그들이 백성 중에서 즐거이 헌신하였음이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이 노래에서 자원하는 헌신이 반복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귀하게 보시는지를 느낍니다.

능력만이 아닙니다.

마음입니다.

“내가 가겠습니다.”

이 고백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이사야도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말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저는 이 고백이 제 기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거대한 일을 맡기셔야만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일에도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외로운 사람에게 전화하는 일,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일,

가족에게 먼저 사과하는 일,

교회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맡는 것,

힘든 사람 곁에 앉아 주는 것,

이런 작은 헌신도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10절과 11절에서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여호와의 의로운 일을 이야기하라고 권합니다.

흰 나귀를 타는 자,

양탄자에 앉은 자,

길을 걷는 자,

물 긷는 곳에 있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귀한 자와 평범한 자가 모두 하나님의 구원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저는 여기에서 공동체의 증언을 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은 개인의 비밀로만 남아서는 안 됩니다.

말해야 합니다.

다음 세대에게 전해야 합니다.

예배에서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특히 11절은 “여호와의 공의로우신 일”을 전하라고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의’와 관련된 히브리어 ‘체다카’(צְדָקָה)는 문맥에서 하나님의 의로운 구원 행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의는 차가운 법적 공정함만이 아닙니다.

언약에 신실하시게 자기 백성을 구하시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저는 십자가에서 이 하나님의 의를 가장 깊이 봅니다.

로마서는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의 형벌을 담당하셨습니다.

동시에 죄인을 구원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만납니다.

그래서 저는 그리스도인의 찬양이 막연한 감정이 아니라 구원의 사건에 뿌리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물 긷는 곳에서도, 길 위에서도, 예배당에서도 반복해야 할 이야기입니다.

누군가는 목숨을 걸었고 누군가는 양 떼 사이에 머물렀습니다 (삿 5:12-18)

12절에서 노래의 분위기가 다시 힘차게 바뀝니다.

“깰지어다 깰지어다 드보라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너는 노래할지어다 일어날지어다 바락이여.”

저는 이 반복되는 명령에서 영적 각성의 소리를 듣습니다.

“깨어라.”

“일어나라.”

드보라는 노래해야 합니다.

바락은 사로잡은 자를 끌고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셨지만 사람은 그 승리에 참여해야 합니다.

저는 신앙이 수동적인 상태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다는 이유로 가만히 있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은혜를 받은 사람이 일어납니다.

바울도 에베소서에서 말합니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저는 제 신앙 안에도 잠든 부분이 있는지 묻습니다.

기도가 습관적인 형식만 남아 있지는 않은가.

말씀을 읽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가.

죄를 보아도 아무렇지 않은가.

사람의 아픔에 무감각해지지는 않았는가.

한때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명이 이제는 귀찮은 의무가 되지는 않았는가.

그렇다면 저에게도 드보라의 노래가 필요합니다.

“깰지어다.”

신앙의 잠은 눈을 감고 있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도 잘 살아가는 것처럼 느끼는 상태입니다.

영적으로 가장 위험한 사람은 넘어지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잠들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 제 영혼을 깨워 달라고 기도하고 싶습니다.

14절부터 여러 지파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에브라임,

베냐민,

마길,

스불론,

잇사갈이 전쟁에 참여합니다.

드보라와 함께 내려온 자들이 있고, 바락과 함께 골짜기로 뛰어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명단은 단순한 군사 기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실제로 응답한 사람들의 이름입니다.

저는 성경에 이런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사실이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누가 참여했는지를 아십니다.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해도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

스불론과 납달리는 18절에서 특별한 찬사를 받습니다.

“스불론은 죽음을 무릅쓰고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아니한 백성이요 납달리도 들의 높은 곳에서 그러하도다.”

목숨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 표현은 그들의 헌신이 단순한 감정이 아니었음을 보여 줍니다.

위험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철 병거가 있었습니다.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나갔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헌신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합니다.

헌신은 여유가 있을 때 조금 나누는 것만이 아닙니다.

때로는 대가를 치르는 것입니다.

순종하면 손해 볼 수 있습니다.

정직하면 이익을 놓칠 수 있습니다.

용서하면 자존심이 상할 수 있습니다.

사역하면 시간을 써야 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상처받을 위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실 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제자도에는 대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대가보다 더 큰 은혜가 있습니다.

스불론과 납달리가 죽음을 무릅썼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승리에 참여했습니다.

저는 반대로 르우벤을 보게 됩니다.

15절과 16절에서 르우벤 지파는 마음에 큰 결정을 했던 것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네가 양의 우리 가운데에 앉아서 목자가 피리 부는 것을 들음은 어찌 됨인가.”

이 질문이 제 마음을 찌릅니다.

르우벤은 생각은 많이 했습니다.

고민했습니다.

마음의 결단도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양 떼 사이에 그대로 남았습니다.

저는 이 모습에서 저 자신을 봅니다.

저도 결심은 많이 합니다.

“더 기도해야겠다.”

“성경을 규칙적으로 읽어야겠다.”

“이 사람에게 사과해야겠다.”

“이 일을 시작해야겠다.”

“더 나누며 살아야겠다.”

생각합니다.

감동도 받습니다.

결심도 합니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르우벤처럼 양 떼 사이에서 생각만 합니다.

저는 신앙에서 결심과 순종의 차이가 크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좋은 생각이 자동으로 좋은 삶이 되지는 않습니다.

감동이 순종은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울었다고 삶이 변한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한 걸음을 내딛어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합니다.

저는 이 구절을 묵상하며 “마음에 큰 결심”만 쌓아 놓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 돌아봅니다.

기도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제 기도하지 않은 일,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연락하지 않은 사람,

도와야 한다고 느꼈지만 지나친 상황,

써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미룬 글,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고 느끼면서도 현실적인 손익 때문에 포기한 선택들이 있습니다.

오늘 저는 하나라도 행동으로 옮기고 싶습니다.

17절에서는 길르앗이 요단 저편에 머물렀고, 단은 배에 머물렀으며, 아셀은 해변과 항만에 거주했다고 말합니다.

각자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길르앗은 지리적으로 멀었을 수 있습니다.

단은 해상 활동과 관계된 현실적인 사정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아셀도 해안 지역의 경제적 기반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저는 그들의 모든 사정을 쉽게 무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드보라의 노래는 분명한 대비를 만듭니다.

누군가는 이유가 있어서 남았고,

누군가는 이유가 있어도 나갔습니다.

저는 여기서 사명과 편안함이 충돌할 때 무엇을 선택하는지를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남을 이유가 있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돈이 부족합니다.

나이가 많습니다.

능력이 없습니다.

가족이 있습니다.

몸이 피곤합니다.

상처받았습니다.

환경이 좋지 않습니다.

모든 이유가 거짓은 아닙니다.

실제 제약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일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더 많이 해야 한다는 죄책감을 줄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분명할 때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셨는데 나는 편안함 때문에 머물고 있지는 않은가를 묻는 것입니다.

르우벤에게 양 떼가 나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에게 배가 나쁜 것도 아닙니다.

아셀에게 해변 생활이 죄도 아닙니다.

문제는 좋은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보다 중요해질 때입니다.

우상은 꼭 나쁜 것에서만 나오지 않습니다.

좋은 것도 하나님보다 높아지면 우상이 됩니다.

가정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가족이 절대적인 것이 되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일도 좋습니다.

하지만 직장이 하나님의 뜻보다 더 중요하면 우상이 됩니다.

안정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안전 때문에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길을 계속 거절한다면 안전이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르우벤과 단과 아셀을 바라보며 제 마음에 묻습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

하나님께서 일어나라고 하시는데 양 떼 사이에 앉아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께서 건너가라고 하시는데 배 옆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가.

반대로 스불론과 납달리는 생명을 아끼지 않습니다.

저는 이 대조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에 머물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낮아지셨습니다.

빌립보서는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말합니다.

스불론과 납달리가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고 노래하지만, 예수님은 실제로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분은 겟세마네에서 십자가를 앞두고 극심한 고통을 경험하셨지만 도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리고 골고다로 가셨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완전한 순종을 봅니다.

바락의 순종도 불완전했고,

각 지파의 순종도 달랐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순종은 완전했습니다.

우리가 순종하지 못한 자리에서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셨습니다.

우리가 자기 생명을 지키려는 자리에서 그리스도는 자기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습니다.

부활은 십자가의 순종이 패배가 아니었다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헌신도 부활의 소망 속에서 가능합니다.

내가 내려놓는 것이 마지막 손실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주를 위해 잃는 것이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생명을 잃는 자가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오해하여 무분별한 자기희생을 미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지혜도 주셨습니다.

건강한 경계를 세우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자기보존이 삶의 최고의 가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을 위해 감수해야 할 불편이 있고,

사랑을 위해 내려놓아야 할 권리가 있으며,

진리를 위해 감당해야 할 손해가 있습니다.

저는 그 순간 르우벤이 아니라 스불론과 납달리 편에 서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결국 이 모든 이야기를 연결하는 중심은 하나님입니다.

드보라가 노래하지만 하나님께서 깨우셨습니다.

바락이 달려갔지만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지파들이 자원했지만 그들에게 용기를 주신 분도 하나님입니다.

저는 이것을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헌신조차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제가 어떤 희생을 했다고 하나님께 빚을 지운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이만큼 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더 헌신했습니다.”

그 순간 헌신이 교만으로 변합니다.

복음은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자기 아들을 주셨습니다.

제가 시간을 드리기 전에 영원하신 하나님이 저를 위해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제가 작은 희생을 하기 전에 예수님이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헌신은 언제나 감사의 대답일 뿐입니다.

저는 오늘 이렇게 기도하고 싶습니다.

“주님, 제 마음의 르우벤을 깨워 주소서. 생각만 하고 머물지 말게 하시고, 부르심이 분명할 때 일어나게 하소서. 그러나 제 헌신을 자랑하지 않게 하시고, 십자가에서 자신을 먼저 내어 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기쁨으로 순종하게 하소서.”

마무리

사사기 5장 1절부터 18절을 묵상하며 저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여 노래하는 믿음과, 그 은혜에 응답하여 실제로 일어서는 믿음이 함께 가야 함을 배웁니다. 드보라와 바락은 승리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찬송했고, 스불론과 납달리는 생명을 아끼지 않고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반면 르우벤은 마음에 큰 결심이 있었지만 양 떼 사이에 머물렀습니다. 오늘 저는 결심에 머물지 않겠습니다. 제게 주어진 작은 순종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겠습니다. 무엇보다 죽기까지 순종하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억지가 아니라 은혜에 감사하여 기꺼이 제 삶을 주님께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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