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사사기 6:11-24

두려움 속에 숨은 사람을 하나님은 큰 용사라 부르셨습니다

  • 매일성경 묵상 사사기 6:11-24

오늘도 저는 말씀 앞에 앉아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시는지를 묵상합니다.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의 눈을 피해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현실만 보면 그는 용사가 아니라 숨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는 그를 “큰 용사”라고 부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침묵을 묻고 자신의 부족함을 말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조건보다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는 약속을 앞세우십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에서 믿음은 내가 충분히 강해진 뒤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속에서도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데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포도주 틀에 숨은 사람을 하나님은 큰 용사라 부르셨습니다 (삿 6:11-12)

본문은 여호와의 사자가 오브라에 이르러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의 상수리나무 아래 앉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밀을 타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장소가 이상합니다.

밀은 보통 넓고 바람이 잘 부는 타작마당에서 타작합니다. 곡식을 두드린 뒤 바람에 날려 겨와 알곡을 가려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습니다.

포도주 틀은 원래 포도를 밟아 즙을 내기 위해 낮고 움푹 파인 곳에 마련됩니다. 밀을 타작하기에는 좋은 장소가 아닙니다.

왜 이런 불편한 곳에서 밀을 타작했을까요?

본문이 직접 이유를 말합니다.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기드온은 숨어 있었습니다.

사사기 6장 앞부분에서 미디안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농사한 곡식을 추수 때마다 빼앗았습니다. 백성은 산과 굴로 숨어들었고, 가축과 농산물은 약탈당했습니다.

기드온도 그 공포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밀이 있다는 사실을 들키면 빼앗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타작마당이 아닌 포도주 틀을 선택했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며 기드온을 비겁하다고 쉽게 판단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는 현실적으로 살아남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곡식을 지키고 가족을 먹여 살리려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장면은 이스라엘의 현재 상태를 너무나 잘 보여 줍니다.

약속의 땅을 받은 백성이 자기 땅에서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찾아오십니다.

여기에서 저는 중요한 복음의 원리를 봅니다.

하나님은 강한 사람만 찾아오시지 않습니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에게만 사명을 맡기지도 않으십니다.

숨어 있는 사람을 찾아오십니다.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기드온에게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용사’를 뜻하는 히브리어 ‘깁보르’(גִּבּוֹר)는 힘 있는 사람, 용맹한 전사를 뜻합니다. 여기에 힘이나 능력을 뜻하는 표현이 결합되어 “큰 용사”, “용맹한 자”라는 의미가 됩니다.

저는 이 호칭이 기드온의 현재 모습과 너무 다르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그는 전쟁터에 있지 않습니다.

미디안 군대를 향해 칼을 들고 있지도 않습니다.

포도주 틀에 숨어 밀을 타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큰 용사라고 부르십니다.

왜입니까?

기드온 안에 이미 모든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다음 말이 답입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기드온이 큰 용사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기질이나 체력이나 전투 경험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이 오늘 제 삶에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자꾸 제 모습을 먼저 봅니다.

“나는 이것밖에 안 된다.”

“내 성격으로는 어렵다.”

“나이가 너무 많다.”

“능력이 부족하다.”

“과거에 실패했다.”

이런 판단이 현실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은 제 현실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제 현실보다 큽니다.

하나님은 현재의 모습만 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과 함께할 때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보십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름과 정체성이 바뀌는 장면들이 중요합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고,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며,

시몬이 베드로로 불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현재 상태에만 가두어 두지 않으십니다.

저는 제 안에도 포도주 틀이 있음을 생각합니다.

실패가 두려워 숨어 있는 영역이 있습니다.

다시 상처받을까 봐 관계를 피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평가가 두려워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사역에서도 “이제는 어렵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한계를 정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먼저 포도주 틀에서 나와라. 네가 강해지면 내가 부르겠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한다.”

저는 여기에서 믿음의 출발을 배웁니다.

믿음은 자신감을 끌어올리는 일이 아닙니다.

“나는 할 수 있다”를 반복하는 자기암시도 아닙니다.

성경의 믿음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약속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자기 확신보다 하나님 확신에 가깝습니다.

제가 약해도 괜찮다는 말은 아닙니다.

배울 것은 배우고 훈련할 것은 훈련해야 합니다.

그러나 능력을 갖춘 뒤 하나님께 쓰임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과정에서 능력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

기드온이 그랬습니다.

저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떠올립니다.

갈릴리 어부들,

세리,

사회적으로 이름 없는 사람들이 부름받았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위대한 사도가 아니었습니다.

두려워했고,

실수했고,

십자가 앞에서는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성령을 받은 뒤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들을 변화시킨 핵심은 원래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함께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며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신 것도 그래서 중요합니다.

기드온에게 주셨던 “내가 너와 함께한다”는 약속은 신약에서 임마누엘의 복음으로 더 깊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죄로 인해 끊어진 관계를 회복하시고,

부활하신 뒤 성령으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제 부족함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만 바라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포도주 틀의 현실보다 저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더 크게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면 왜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라는 질문 앞에 서다 (삿 6:13-16)

기드온은 여호와의 사자의 인사를 듣고 즉시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질문합니다.

“오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저는 이 질문이 매우 인간적으로 느껴집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신앙생활을 오래해도 이 질문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면 왜 고난이 있습니까?

기도했는데 왜 응답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교회를 사랑하신다면 왜 교회가 어려움을 겪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면 왜 실패하고 병들고 상실합니까?

기드온의 질문은 단순한 불평이라기보다 믿음과 현실 사이의 충돌에서 나온 질문입니다.

그는 조상들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그는 출애굽의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

바로의 군대를 무너뜨리신 하나님,

광야에서 백성을 인도하신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현재는 전혀 다릅니다.

미디안 사람에게 곡식을 빼앗기고,

백성은 굴에 숨어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말합니다.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우리를 넘겨 주셨나이다.”

저는 이 장면에서 신앙적으로 중요한 구분을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 질문하는 것과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은 다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 질문한 사람이 많습니다.

욥도 질문했습니다.

예레미야도 질문했습니다.

시편 기자들은 “어찌하여”, “언제까지”라고 반복해서 묻습니다.

믿음은 질문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해 질문하는 것입니다.

불신앙은 하나님 없이 답을 찾는 방향으로 갈 수 있지만, 믿음은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질문합니다.

저는 힘들 때 질문 자체를 죄책감으로 억누르지 않으려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언제까지입니까?”

정직하게 물을 수 있습니다.

다만 기드온이 놓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앞선 6장 1-10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이 왜 우리를 버리셨습니까?”라고 묻지만, 하나님은 먼저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고난에 대한 질문이 필요하지만, 동시에 자기 성찰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고난이 죄의 직접적 결과는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을 떠난 결과로 생긴 문제까지 하나님께 책임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때로 우리는 잘못된 선택을 해놓고 하나님께 묻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게 하셨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조용히 물으실 수 있습니다.

“내가 이미 경고하지 않았느냐.”

저는 그래서 기도할 때 두 질문을 함께 드리고 싶습니다.

“주님, 왜 이런 일이 있습니까?”

그리고

“주님, 제가 보아야 할 제 책임은 무엇입니까?”

그러나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기드온의 질문에 긴 설명으로 답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14절에서 여호와께서 기드온을 보시며 말씀하십니다.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논쟁 속에 오래 머물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를 사명으로 부르십니다.

저는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질문은 설명을 통해서 해결되지만, 어떤 질문은 순종의 길을 걸으면서 이해되기도 합니다.

기드온은 “왜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라고 묻습니다.

하나님은 “그렇다면 너를 통해 내가 일을 시작하겠다”고 답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불평하던 사람을 해결의 일부로 부르십니다.

저는 여기서 제 기도를 돌아봅니다.

“교회가 왜 이렇습니까?”

“사람들이 왜 이렇게 변했습니까?”

“사회가 왜 이렇습니까?”

말하기는 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제게 물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 너는 무엇을 하겠느냐?”

저는 비판하는 사람보다 참여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문제를 설명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제게 맡겨진 작은 책임을 감당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또 다른 이유를 말합니다.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그는 자신의 집안이 므낫세 중에 가장 약하고 자신은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말합니다.

기드온이 실제로 경제적으로 가장 가난한 가문이었는지, 혹은 겸손과 두려움에서 자신을 그렇게 표현한 것인지는 논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드온 자신이 자기 조건을 매우 낮게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집안이 약합니다.”

“저는 작은 사람입니다.”

저는 이 말을 너무 잘 이해합니다.

사람은 사명 앞에서 이유를 찾습니다.

환경,

가정 배경,

교육,

나이,

성격,

과거의 실패를 봅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는데 저는 “저는 이래서 어렵습니다”라고 답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기드온의 자기평가를 길게 반박하지 않으십니다.

“아니다, 너는 사실 대단한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훨씬 단순합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하리니.”

기드온의 질문은 “나는 누구입니까?”였지만 하나님의 대답은 “내가 누구인가를 보라”입니다.

저는 이 차이가 믿음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내가 얼마나 강한가”가 아니라 “누가 나와 함께하시는가”입니다.

모세도 비슷했습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겠습니까?”

하나님은 모세의 자존감을 높여 주는 연설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적 소명은 자기 확신보다 하나님의 임재에 기초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 약함을 인정하되 약함을 핑계로 삼지는 않으려 합니다.

“저는 부족합니다.”

여기까지는 겸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므로 하나님도 저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결론이 됩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이 약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해진다고 배웠습니다.

십자가 역시 이 원리의 가장 깊은 표현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십자가는 약함과 수치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곳에서 죄와 사망을 이기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약해 보이는 죽음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제 삶에서도 강함만 찾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약함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상처를 사용하실 수도 있고,

실패를 통해 겸손을 가르치신 뒤 누군가를 돕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가 얼마나 큰 사람이냐가 아니라 하나님께 제 삶을 맡기는 것입니다.

16절에서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승리를 약속하십니다.

미디안을 “한 사람을 치듯” 치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미디안은 메뚜기 떼처럼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한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문제의 크기를 제 능력과 비교하면 늘 두렵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하지만 문제를 하나님과 비교하면 시선이 달라집니다.

믿음은 문제를 축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르게 보는 것입니다.

표징을 구한 기드온에게 하나님은 평강으로 자신을 보여 주셨습니다 (삿 6:17-24)

기드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여전히 확신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표징을 구합니다.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표징’을 뜻하는 히브리어 ‘오트’(אוֹת)는 어떤 사실을 확인하게 하는 표식이나 증거를 의미합니다.

기드온은 불신앙으로 하나님을 조롱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정말 하나님이신지를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그는 염소 새끼 하나와 무교병을 준비하여 가져옵니다.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이것은 결코 작은 음식이 아닙니다.

미디안의 약탈 때문에 먹을 것이 귀한 시대였습니다.

그런 때에 염소 새끼와 많은 양의 밀가루로 만든 무교병을 준비한다는 것은 상당한 정성이 들어간 행동입니다.

저는 여기서 기드온에게 두려움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봅니다.

그는 아직 확신이 부족하지만 하나님께 반응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때때로 이런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완전한 확신은 없지만 말씀을 더 알고 싶어 합니다.

두렵지만 한 걸음 가까이 갑니다.

질문하면서도 예배의 자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믿음을 너무 쉽게 무시하지 않으려 합니다.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강한 믿음을 보입니다.

다른 사람은 오랜 질문 끝에 하나님을 신뢰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의 연약함을 아시고 그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확신을 주십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고기와 무교병을 바위 위에 두고 국을 부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손에 든 지팡이 끝으로 그것을 대자 바위에서 불이 나와 제물을 살라 버립니다.

그 순간 여호와의 사자는 사라집니다.

기드온은 비로소 자신이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두려워합니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저는 여기서 기드온의 두려움이 바뀌는 것을 봅니다.

앞에서는 미디안이 두려웠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변화입니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두려워하며 삽니다.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실패를 두려워하거나,

돈이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르게 경외하면 다른 두려움의 크기가 달라집니다.

성경이 말하는 ‘여호와를 경외함’은 공포에 사로잡힌 상태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거룩과 권위를 인정하고 그분을 삶의 중심에 두는 태도입니다.

기드온은 이제 미디안보다 크신 하나님을 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선 그는 오히려 자신의 생명을 걱정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평강’을 뜻하는 히브리어 ‘샬롬’(שָׁלוֹם)은 단순히 마음이 편안하다는 의미보다 훨씬 넓습니다. 온전함, 관계의 회복, 안전, 충만한 안녕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기드온은 그래서 그곳에 제단을 쌓고 이름을 붙입니다.

“여호와 샬롬.”

“여호와는 평강이시다.”

저는 이 이름이 오늘 본문의 절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드온에게 평강이 필요한 이유는 상황이 평화로워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직 미디안은 그대로 있습니다.

철저한 압제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군대도 모으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여호와 샬롬”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성경적 평강입니다.

문제가 사라졌기 때문에 누리는 평안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평강입니다.

저는 평안을 자꾸 환경에서 찾습니다.

돈 걱정이 없어지면 평안할 것 같습니다.

건강하면 평안할 것 같습니다.

관계가 좋아지면 평안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환경에서 얻는 평안은 환경이 변하면 함께 흔들립니다.

기드온의 평강은 미디안이 사라진 뒤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난 자리에서 왔습니다.

저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떠올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앞두고 제자들에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의 상황은 곧 더 나빠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체포되고,

십자가에 달리며,

제자들은 흩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평안을 약속하십니다.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평안입니다.

그 평안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성됩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됩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고 말합니다.

저는 기드온의 “여호와 샬롬”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더 깊은 평강을 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적대가 끝난 자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도망하지 않아도 됩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을 보고 “죽게 되었다”고 두려워했지만, 복음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갑니다.

이것이 새 언약의 놀라운 특권입니다.

더 나아가 부활은 하나님께서 죽음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평강은 단순한 심리적 안정이 아닙니다.

죽음조차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지 못한다는 확신입니다.

그리고 이 평강은 새 창조에서 완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전쟁도,

미디안도,

두려움도,

죽음도 없는 세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시고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는 나라입니다.

기드온은 아직 그 완성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샬롬”이라는 이름을 통해 그 평강을 미리 맛봅니다.

저도 오늘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다린 뒤 평안하려 하지 않겠습니다.

문제 한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라보겠습니다.

저를 부르시는 하나님,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시는 하나님,

죽지 않을 것이라고 평강을 선포하시는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에 하나의 제단을 세우고 싶습니다.

실제 돌 제단이 아니라 기억의 제단입니다.

“이 자리에서 하나님이 나를 붙드셨다.”

“이때 하나님이 평강을 주셨다.”

그 은혜를 기억하며 다음 싸움으로 나아가겠습니다.

마무리

사사기 6장 11절부터 24절을 묵상하며 저는 기드온의 두려움과 질문 속에서 제 모습을 봅니다. 저는 자꾸 부족한 조건과 해결되지 않은 현실을 보지만, 하나님은 먼저 “내가 너와 함께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포도주 틀에 숨어 있던 사람을 큰 용사라 부르신 것은 기드온이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는 제 약함을 핑계 삼지 않겠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일은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묻되, 말씀하신 자리에서는 순종하겠습니다. 무엇보다 환경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주어진 “여호와 샬롬”을 붙들며, 두려움보다 하나님의 임재를 더 크게 바라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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