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2장

 1. 창세기 12장 개요

창세기 12장은 성경의 시대 구분이나 창세기 안에서의 역사나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장이다. 일반적으로 창세기 1-11장까지를 창조시대로 규명하고, 12장부터는 족장시대로 구분한다. 11장에도 아브람이 등장하지만 명확한 구분은 12장에서 시작된다. 창세기 11장에서 흩어진 바벨 공동체 안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냄으로 시작한다. 마치 무에서 유를 불러내시고, 어둠에서 빛을 내게 하시고, 물속에서 마른땅을 부르시는 창조적 능력과 흡사하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생명의 약속이며, 새로운 것의 '있게 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세기 12장 서론 부분을 읽을 때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이 어떻게 사용되는가를 봐야 한다. 이제 들어가 보자.

창세기 12장 구조

1-12절 하나님이 소명과 순종하는 아브람

13-20절 기근과 애굽에서 당한 일


2. 주해

1-12절 하나님이 소명과 순종하는 아브람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신다. 앞의 '너의' 소유격은 이후의 문장을 이끈다. '너의 고향' '너의 친척'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명하신다. 떠남은 분리이며 관계없음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기 위한 첫 번째 조건으로 '떠남'으로 제시한다. 떠나지 않고 도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의'라는 표현은 지금까지 아브람이 쌓아 놓은 명성, 부, 권위, 관계 등을 벗어나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버리로 혈혈단신으로 가라는 말은 아니다. 아브라함은 부유하며 많은 재산을 가지고 가나안에 도착한다. 물론 이후 더 많은 재물을 얻기를 하지만. 1절은 '너는 독립적인 존재가 되라'라는 뜻이다.

소명은 존재를 규명하고, 존재를 한계 짓는다. 부르심으로 모호한 것이 사라지고 삶의 방향과 목적, 그리고 방식까지 정확하게 정해진다.

*아버지의 집
성경에서 아버지의 집은 다양성을 가지고 있지만 보호와 권위, 그리고 기업을 잇는다는 의미를 포괄적으로 가지고 있다. 아버지를 떠나는 아버지의 집을 떠남과 같다. 이 말은 아버지의 보호를 벗어나 유랑한다. 또는 처량한 신세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또한 아버지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 전체를 뜻하기도 한다.

  • 창세기 20장 13절 하나님이 나를 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 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  창세기 50장 8절 요셉의 온 집과 그의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가고 그들의 어린 아이들과 양 떼와 소 떼만 고센 땅에 남겼으며

창세기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2절을 약속이다. 큰 민족, 이름, 복.이 된다. 민족은 후손이고, 이름은 11장에서 사람들이 '우리들의 이름을 내자'라는 울림이다. 히브리어 셈은 이름이란 뜻인데, 노아의 아들 셈과 11장의이름(셈), 그리고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약속한 이름(셈)은 다분히 언어유희적이다. 창세기 기자는 유명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란 사실을 강조한다.

이후 모세오경은 12장 2절의 주석과도 있다. 때로는 실패한 듯보이고, 때로는 막막해 보이지만 결국 모세오경이 끝날 즈음 거대한 민족이 탄생하고, 아브라함의 이름이 존귀케 되며, 아브라함은 복의 사람이 된다. 하지만 지금은 시작이고 내일이 보지 않는다.

창세기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복을 준다'는 표현이 다시 등장한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고,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를 내린다'고 약속하신다. 아브람을 축복하는 자가 누구일까? 또한 저주하는 자는?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고, 하나님을 거절하는 자들이다. 아브람은 말씀에 순종하는 자이기에 아브람은 곧 하나님이다.
  • 마태복음 10장 25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이러한 맥락은 아브람이 이 땅에서 왕 같은 제사장처럼 살아갈 것을 말한다. 아브람과 하나님은 다르지 않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자신의 이름을 주었다. 마치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것처럼.

아브람으로 인해 땅을 복을 받는다. 아담의 창조와 타락 역시 이 부분을 강조한다. 아담으로 인해 땅이 복을 받고 저주를 받는다. 소명자들은 이땅의 운명을 지고 간다.

창세기 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아브람은 곧 실행에 옮긴다.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다'는 표현은 굉장히 특이하다. 번역은 '따라갔다'라고 했지만 히브리어는 '걷다' '동행하다'의 뜻인 '할라크'이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에서꼭 외어 두어야 할 단어다. 에녹이 하나님께 동행(할라크)한 것처럼 아브라함 역시 하나님을 따랐고(할라크) 하나님과 동행(할라크)한다.

조카 롯도 함께 아브람과 동행한다. 아브람이 권유한 것인지를 확실치 않으나 결국 하나님을 따르는 삶을 함께 동참한다. 롯의 시작은 이처럼 아름답지만 결국 믿음의 길에서 벗어난다.

아브람이 소명을 길을 떠날 때 그의 나이는 75세였다.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었음에도 기꺼이 그 길을 걸었다. 하란에서 떠났다는 표현도 염두에 두자. 후에 이 부분을 다시 언급할 것이다.

창세기 12:5-6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아브람은 아내 사래와 조카 롯을 데리고 가나안에 도착한다.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란 표현은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는 것과 그가 성공한 삶을 살았다는 뜻을 의미한다. 하지만 성공적인 삶이라 할지라도 아브라함은 그곳에 안주하지 않고 믿음의 모험을 떠났다. 

1절에서 '보여줄 땅'에서 5절에서는 '가나안 땅'으로 구체화되었다. 믿음의 삶이란 처음에 모호함과 불투명만이 가득하지만 하루하루 순종의 삶을 통해 구체화된다는 점을 망각하면 된다. 우리는 모든 알고, 모든 것을 이해하고 시작하려 하지만 믿음의 삶은 그렇지 않다. 지금 내가 아는 작은 계명에 순종할 때 더 크고 원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룰 수 있다.

세겜 땅은 후에 에브라임 지파의 것이 된다. 야곱의 딸인 디나가 강간을 당한 곳이기도 하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후에 [성서지리-세겜]에서 다룰 예정이다.
  • 창세기 48:21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 창세기 48:22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세겜 땅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
출애굽 후에 가나안을 정복한 후 요셉의 뼈를 세겜에 묻는다.
  • 여호수아 24장 32절 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 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백 크시타를 주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산 밭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이 구절을 처음 읽을 때 정말 놀랐다.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지만 어느 순간 알 수 없는 답답함이 밀려왔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라고 왔는데 그 땅은 빈 땅도 아니고,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도 아니었다. 그곳에는 그곳의 땅 주인이 따로 있었다. 아브람은 평생은 나그네로 살아가야 했다. 이 부분에대해서는 히브리서 기자가 잘 표현한다.
  • 히브리서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 히브리서 11: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 히브리서 11: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창 12:7-9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가나안 땅에 도착하자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셔서 약속을 하신다.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신다는 것이다. 분명 '네 자손'이라고 했다. 아직 없는, 태어나지 않은 아들을 하나님은 미리 말씀하신다. 아브라함이 이 약속을 들었을 때 얼마나 설렜을까? 

아브람은 약속을 믿고 그곳에 제단을 쌓는다. 굳이 예배로 번역하지 않아도 아브람의 믿음이 얼마니 대단한가를 잘 보여준다. 그는 하나님을 경험한 후 그대로 멈추지 않고 예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를 표했다. 제사는 공짜가 아니다. 자신 소유의 일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양이나 염소 한마리를 현재 돈으로 환산하면 적어도 20-50만 원 정도 가격이다. 요즘이라면 매주마다 이런 예물을 가지고 간다면 아마 폭동이 일어날 것이다.

13-20절 기근과 애굽에서 당한 일


창세기 12:10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놀라운 설명이다. 약속에 땅에도 기근은 온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에 형통만 존재할 거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어쩌면 믿음 이후 더 가정이 어렵고 힘들 수도 있다. 기근을 통해 아브람은 생존 방법을 찾아야 했다. 결국 그는 애굽을 선택한다. 이 부분 역시 안타깝다. 처음 당하는 일이라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왜 기도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 일로 말미암아 아브람은 큰 어려움에 처한다.


창세가 12:11-13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이 부분은 놀랍도 못해 경악스럽다. 물론 현대인의 관점으로 말이다. 아브람은 사래에게 당신을 빼앗으려고 자신을 죽일 수 있다고 말하며, 차라리 먼저 누이라고 거짓말 하겠다고 말한다. 후에 이삭도 부전자전이라고 그대로 따라 한다.
  • 창세기 26장 7절 그 곳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 대하여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내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내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창세기 12:14-17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결국 아브람이 걱정한 일이 그대로 이루어진다. 사실 이 부분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몇 권의 창세기 주석을 봐도 딱히 동의할만한 설명을 못한다. 사래의 얼굴이 검은색톤의 이집트 인에게 하얗게 보여 이쁘게 보였을 것이라는 황당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곳도 있다. 탈북자들이 한국에 내려와 남자의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다고 한다. 그들이 보기에 너무 젊어 보인다고 한다. 잘 먹고 잘살아서? 아니면 사래가 동안이라서? 알 길은 없다. 다만 그렇다는 것이다.

사래가 얼마나 예뻤던지 애굽 사람들이 수근거리 시작했고, 그 소문이 바로에게까지 들린다. 결국 바로가 사래를 데려간다. 대신 사래이 오빠?인 아브람에게 많은 선물을 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바로의 집에 재앙을 내린다. 아브람은 철저히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


창세기 12:18-20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와 함께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깜짝 놀란 바로는 바로 아브람을 불러 야단을 친다. 왜 거짓말을 했냐고. 결국 바로는 재앙을 겪고 나서야 아브람을 내보낸다. 후에 출애굽 사건과 너무나 닮지 않았는가. 지중해 근안에 큰 기근이 오자 야곱의 가족이 요셉의 도움으로 애굽으로 내려가고 430년 후에 모세를 통해 열 가지 재앙이 일어나고 결국 애굽을 나온다. 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많은 재물을 가지고 나온다.
  • 출애굽기 12:35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 출애굽기 12:36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

믿음의 길은 순탄하지만 않다. 때로는 폭풍우도 있고, 사막을 만나기도하고, 목마름과 갈증이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마침내 약속하신 것들을 이루실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환경에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한다.

사도행전 장별 요약

 1. 사도행전 개요

사도행전의 누가의 작품이며, 누가복음 이후 사도들의 생애를 중심으로 복음이 어떻게 세상에 퍼져 나가는가를 보여준다.

예수의 천상통치와 유대인과 예루살렘이라는 특별화에서 사마리아와 땅끝까지라는 보편화로 넘어간다. 초기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관원들과 사도들, 기존의 유대종교지도자들과의 갈등이 기록된다. 하지만 12장에서 헤롯의 핍박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온 세계로 퍼져 나가는 계기가 만들어지면서 급속하게 이방에 전파된다. 바로 이 즈음에 바울의 등장과 함께 13장이 시작된다. 9장에서 다메색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바울은 잠시 사라진다. 13장에서 공식적으로 등장하면서 선교여행이 시작된다. 이후 바울은 적어도 3번의 전도 여행을 한다.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서원을 행해다 유대인들에게 붙들려 결국 로마행을 한다. 사도행전은 바울에 로마에 도착한 이야기로 막을 내린다.


2. 사도행전 장별요약

사도행전 1장

데오빌로에게 전에 쓴 글에 대해 이야기한 다음,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라 말한다.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는 하늘로 승천한다. 두 천사가 나타나 본 그대로 오리라 말한다. 제자들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들어가 기도하고 죽은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도로 맛디아를 뽑는다.


사도행전 2장

오순절 날에 성령이 임하고 다른 방언으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큰 일을 전한다. 사람들을 놀라면서 새술에 취했다고 놀린다. 베드로가 일어나 구약 성경은 인용하며 예수의 부활을 논증한다. 사람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고 삼천 명이 제자가 되기로 한다.


사도행전 3장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못 걷는 사람을 고친다.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6절) 말하면서 오른손을 잡이 이끌아 곧 일어나 걷는다. 사람들이 놀라자 베드로는 솔로몬 행각에서 설교한다.  베드로는 구약을 인용하여 너희들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다고 말한다. 


사도행전 4장

예수가 부활했더 설교한 베드로가 싫은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은 그들을 잡아 가둔다. 누가는 그날 설교를 듣고 오 천명이 예수가 제자되었다고 말한다. 이튿날 모인 관로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사도들에게 예수가 죽었다 살았나다는 설교를 하지 말라 협박한다. 하지만 사도들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20절)고 말한다. 놓임을 받은 사도들은 공동체로 돌아가 기도한다. 사람들은 서로 물건을 통용하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눈다. 요셉이라하는 바나바가 소개된다.


사도행전 5장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거짓말하여 죽임을 당한다. 사도들이 기적을 일으키고 수많은 사람이 모인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사도들이 부활을 전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와 그들을 다시 가둔다.. 이번에 공회를 열어 재판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이번에도 역시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30절)리셨다고 말한다. 화가 난 사람들이 사도들을 죽이려 하자 가말리엘이 일어나 이성적으로 말하여 풀려난다. 그들은 풀어주면서 채찍질하여 다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금한다. 사도들은 능욕을 오히려 기뻐하고 성전에서나 집에서나 예수는 그리스도라 전한다.


사도행전 6장

제자들이 폭발적으로 많아지만 헬라파 유대인들이 구제에서 빠졌다며 원망한다. 사도들은 도저히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없어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일곱 집사를 추천하여 뽑는다.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다 공회에 붙들려 간다.


사도행전 7장

7장은 60절까지 이어지는 기난긴 장이며 모두 스데반의 설교이다 설교의 핵심은 이스라엘은 한 번도 하나님은 제대로 섬긴 적이 없다 말한다.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개론적으로 소개하면서 그러한 결론에 도달한다. 결국 화가난 군중들은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다. 이 때 사울이 스데반의 옷을 지켰다.


사도행전 8장

사울(바울)이 핍박에 앞장선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아 옥에 가둔다. 더는 예수의 제자들을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한 산헤드린 공회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곳곳으로 흩어진다. 하지만 흩어진 그곳에서 복음을 전한다. 빌립은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고 침례를 준다.


사도행전 9장

바울에 다메섹으로 가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바울은 완전히 돌아선다. 베드로가 중풍병자를 고치고, 죽은 도르가를 살린다. 베드로의 기적들은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있다.


사도행전 10장

이야기는 바울을 떠나 고넬료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환상을 통해 베드로를 청하라라는 계시를 받고 욥바에서 베드로를 청한다. 고넬료가 보낸 종이 도착하기 전 베드로는 기도 중에 환상을 본다. 환상을 부정한 짐승을 잡아 먹으러나는 하나님의 음성과 환상이었다. 베드로는 그럴 수 없다고 말하지만 고넬료의 집에 가서야 환상의 의미를 깨닫는다. 고넬료의 집에서 설교할 때 성령이 임한다.


사도행전  11장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임한 모습을 보고 베드로가 놀라 예루살렘에 갔을 이 사실을 알린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성령을 우리가 막을 수 없다며 말하며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안디옥의 많은 사람들이 모여 교회가 만들어진다.


사도행전  12장

헤롯이 유대인들을 기쁘게 하려고 야고보 사도을 잡아 죽인다. 베드로까지 잡으려 했으나 뮤거절 기간이 잡이 옥에만 가둔다. 밤에 천사에 잠자는 베드로를 깨워 탈옥 시킨다. 헤롯이 연설을 하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아 충에게 먹혀 죽임을 당한다.


사도행전  13장

드디어 성령이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 전도자로 보낸다. 이미 그 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필요에 따라 전도했다. 하지만 이번은 매우 공식적이며, 성령의 주도하에 일어난 선교여행이다.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전도한다. 아쉽게도 이때 요한(마가)이 그들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린다. 비시디옥 안디옥에서 바울을 전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 하지만 유대인들 두 사람을 배척하여 바울은 발의 티끌을 털고 이고니온으로 간다.


사도행전  14장

이고니온에 두 사도가 왔다는 소식을 들은 유대인들이 몰려와서 다른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악감을 품게 한다.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다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한다. 사람들이 바나바를 제우스라 하고, 바울을 헤르메스라 말하며 신으로 모시려 한다. 하지만 두 사도가 만류한다. 얼마 후에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발견하고 돌로 쳐 죽인다. 그런데 바울이 다시 일어나 성으로 들어간다.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가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았다고 전한다.


사도행전  15장

첫 번째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린다. 많은 이야기들이 오가지만 결국 이방인들은 율법이나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선언한다.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은 것과 피를 멀리하라 권하는 수준으로 정하고 편지하게 한다. 2차 선교여행이 시작된다. 이때 바나바가 다시 요한(마가)을 데려가자 하지만 바울은 1차 여행 때 중도 포기한 사람을 데려갈 수 없다 말하고 심하게 다툰다. 결구 바나바는 요한을 데리고 떠나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각자의 길을 떠난다.


사도행전  16장

바울이 실라를 데리고루스드라에 이른다. 여기서 디모데를 만난다. 어머니가 유대인고로 디모데를 유대인으로 인정받는다. 바울이 환상을 보고 마케도냐로 건너간다. 최초로 아시아를 너머 유럽으로 들어간다. 빌립보에 이르러 귀신들린 여자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낸다. 이 일로 화가 난 주인이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실라를 옥에 가두게 한다. 두 전도자는 밤이 되자 옥중에서 찬양한다. 그때 갑자기 옥 터가 진동하며 옥문이 열린다. 깜짝 놀란 간수가 자결하려 하자 바울이 아무도 도망가지 않았으니 참으라고 한다. 깜짝 놀란 간수가 "선생들이어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묻자 바울은 그 유명한 말을 한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며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31절)

이후 바울과 실라는 풀려나 빌립보를 떠난다.


사도행전  17장

빌립보를 떠난 바울과 실라는 암비볼리와 아볼리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도착한다.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한다. 많은 이들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설교를 듣고 받아 들이지만 유대인들이 싫어하여 두 사람을 영접한 영접한 야손의 집에 들어가 소란을 피운다. 그들은 바울과 실라가 없자 야손과 다른 사람들을 잡아 가이사가 아닌 다른 왕 예수를 전한다고 거짓 고소한다.  형제들이 바울과 실라는 뵈레아로 보낸다. 다시 아덴(아테네)으로 가서 당시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과 변증하며 예수의 부활을 증언한다.


사도행전  18장

바울은 에덴을 떠나 고린도로 향한다. 그곳에서 로마를 떠나온 아굴라와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를 만난다. 잠깐 헤어졌던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와서 고린도에서 바울과 합류한다. 고린도에서 디도 유스도를 만나 들어간다. 그의 곁에 유대인인 회당이 있다. 하나님이 꿈에 바울에게 나타나 두워하지 말고 복음을 전하라 말한다. 바울이 안디록으로 내려간다. 아볼로가 처음 등장하여 에베소서 복음을 전한다.


사도행전  19장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한다. 2년 동안 에베소에 머물면서 두란도 서원에서 열심히 복을 전하여 에베소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 들인다. 복음을 받은 사람들이 고가의 마술책을 모아 불태운다. 이때 에베소의 은장색 데메드리오가 바울 때문에 장사가 안 되자 사람들을 선동하여 고발한다. 하지만 서기장이 정식으로 재판을 청구하라 말하고 해산시킨다.


사도행전  20장

소란이 잠잠해지자 바울은 다시 에베소의 제자들을 불러 권면한 후 마케도냐로 향한다. 아마도 빌립보 등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한 듯하다. 다시 헬라로 내려가 석 달(3절)을 머물다 수리아로 가려 했으나 유대인들이 훼방을 놓자 다시 마케도냐로 갈 계획을 세운다. 배를 타고 드로아로 가서 떡을 떼교 교제한다. 그날 바울이 밤늦게 강론하자 창틀에 앉아 듣던 유두고가 졸다가 떨어져 사망한다. 사람들이 놀라자 바울이 가서 그를 살려 준다. 드로아를 떠나 멜레도로 향한다.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초청하여 권면한다. 이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떠난다.


사도행전  21장

밀레도에서 배를 타고 고스, 로스, 바다라, 베니게로 향한다. 마지막으로 두로에 상륙한다. 두렝서 이레를 머문다. 이곳에서 제자들이 바울을 찾아와 성령의 감동으로 예루살렘에 가지 말 것을 청한다. 성령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큰 고난이 있을 거라 알려준다. 하지만 바울은 다시 떠난다. 두로를 떠나 돌레마이에 이른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은 야고보를 만나러 간다. 야고보와 예루살렘 장로들에게 지금까지 자신이 행하고 겪었던 일들을 다 전한다.  하지만 이때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했다는 이야기는 전해 듣고 바울에게 따지는 이들도 있었다. 바울은 오해를 풀고 서원을 행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성전에서 서원을 행하던 바울을 발견한 유대인들이 난동을 부린다. 이 일로 천부장이 들려와 바울을 보호한다.


사도행전  22장

바울은 천부장의 허락을 받고 유대인들에게 변명한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부활한 예수를 만났고, 자신은 하늘의 뜻을 받고 행한다고 말한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더 흥분하여 소리지르고, 옷을 벗고 바울을 죽이라고 한다. 천부장이 채찍질을 하려고 하자 바울은 자신을 로마시민이라 밝히고 정식재판을 요구한다. 천부장은 바울이 로마시민임을 알고 두려워한다.(29절) 천부장은 이튿날 결박을 풀고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한다.


사도행전  23장

바울은 천부장의 호의를 받으며 산헤드린 앞에서 자신의 소견을 명확히 밝힌다. 변증을 마무리하면서 자신을 바리새인으로 소개하며 이 사건은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6절)로 심문을  받는다고 밝힌다. 그러자 산헤드린 안에 부활을 믿는 바리새파와 믿지 않는 사도 개인 간의 논쟁이 일어난다. 바울을 죽이려 맹세한 자들이 사십 명이 된다. 천부장은 바울을 가이사라 벨릭스에게 보낸다.


사도행전  24장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장로들과 변사를 데리고 와서 바울을 고소한다. 바울은 그에대해 다시 부활의 소망 때문에 심문을 받는다고 말한다. 벨릭스 총독은 사건 자체가 종교적인 별 의미가 없어 바울은 보호하기 위한 조처로 바울을 다시 옥게 가둔다. 하지만 별다른 구속을 하지 않고 자유롭게 둔다.


사도행전  25장

이년 후에 벨릭스가 물러나고 베스도가 후임 총독으로 온다. 부임 후 사흘 후에 베스도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과 귀족들이 바울을 풀어 달라고 한다. 그들은 길에 매복했다 바울을 죽이려는 계획이었다. (3절)  가이사랴로 내려온 베스도는 바울을 재판석에 부른다. 바울은 자신이 죄가 없다고 말하고 가이사에게 호소한다.(11절) 로마시민이 가이사에게 상소하면 지방에서 재판하지 못하고 로마에 이송되어 재판을 받게 된다. 결국, 바울은 가이사랴를 떠나 로마로 이송될 것이다. 로마로 떠나기 전 헤롯 아그립바와 버니게 앞에서 바울이 자신을 소개한다.


사도행전  26장

베스도 앞에서 바울이 변명한다. 26장은 전체가 바울의 변증이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말하고, 베스도에게 복음을 전한다. 유대교를 잘 아는 아그립바에게 바울은 선지자를 언급한다. 그러자 놀란 아그립바가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라고 말한다.(28절) 바울은 이야기를 마치고 다시 감옥으로 돌아간다. 왕과 총독은 아무런 죄가 없지만 가이사에게 호소하여 로마로 압송한다고 말한다.


사도행전  27장

바울의 로마 압송이 시작된다. 하지만 가는 길에 풍랑으로 배가 깨진다. 


사도행전  28장

폭풍으로 배가 깨져 죽을 지경에 이르지만 겨우 바다에서 구출되어 밀레도 섬에 오른다. 그곳에서 불을 피우다 뱀이 바울을 물지만 죽지 않는다. 원주민이 깜짝 놀라 바울을 신으로 숭배하려 하지만 그러지 말라 만류한다. 보블리오라는 높은 신분의 사람이 바울을 영접하고 사흘 동안 머물게 한다. 그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 바울이 안수하여 낫게 한다. 바울은 다시 배를 타고 로마로 들어간다. 로마에 도착에 바울 옥에 갇히지만, 출입이 자유로운 곳이다. 로마에서도 복음을 전한다는 이야기로 사도행전은 마무리된다.

목사가 글쓰기 실력을 높이는 방법

1. 글 못쓰는 목사들


목사들은 전체적으로 글을 잘 못쓴다. 목사들은 자의든 타의든 글을 써야하고 쓸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목사는 왜 그렇게 글을 못쓰는 것일까? 이유는 단 하나. 배우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승리해야합니다. 어떤 상황에도 믿음을 가지고 승리합니다.

뭐 이정도 수준의 글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또 하나 치명적인 약점, 어디서 많어 본 듯 예화를 가져와서 글 속에 집어 넣는것이다. 너무나도 뻔한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이러한 창의성 없는 글이 글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목사들이 글을 못 쓰는 이유는 배우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하나는 목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렇게 글을 써도 누구나 읽어 줄 거라 생각한다. 정말 심각한 수준이다. 

그렇다면 목사들이 글을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답도 정말 간단하다.
글쓰기를 배워라!
글을 많이 써라!
교만한 마음을 버려라!
자꾸 가르치려 들지 마라!
이 말이 저 말이고, 저 말이 이 말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말 중요하다. 글쓰기를 배워야 한다.

2. 글을 잘 쓰기 위한 기본 연습들


1) 일기 쓰기

나는 항상 글쓰기를 배우려는 이들에게 가장 글쓰기를 배우고 싶다면 일기부터 쓰라고 한다. 일기를 쓰다보면 글을 결국 쓰게 된다. 일기는 다양한 폭을 가지고있어서, 개인적인 감정이나 여행, 관찰, 사색 등의 주제로 다양한 글을 쓸 수 있다는 점에서 최고의 방법이다.

2) 주제를 정해서 글을 써보기 주기적으로

글을 배워 가면서 항상 글쓰기가 뭔지를 제대로 배우러면 쓰는 것이다. 쓰지 않고 글쓰기를 배우는 방법은 없다.
목사는 설교자이기 때문에 수많은 설교를 해야한다. 설교는 대단히 논증적이다. 일종의 증명이자 주장이다. 설교를 명료하게 잘하기 위해서는 주제를 정하고 글쓰기를 해보기를 추천한다. 

3) 책을 많이 일어라

목사의 글쓰기는 한계가 있다. 일반글을 쓰기 힘들다. 하지만 목회적 관점에서 다독이는 글을 쓰고 싶다면 그런 글을 많이 읽어야 한다. 다른 목사들은 어떤 주제로, 어떤 형식으로 글을 쓰는지를 읽고 배워야 한다.

4) 검열을 받아라

처음부터 검열 받으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느 수준이 되면 반드시 글쓰기을 잘 하는 이들에게 배워야 한다. 

3. 글은 곧 자신이다.

글은 자신이다. 무엇을 어떻게 쓰든 글은 자신이다. 하지만 글을 쓰지 않아면 생각이나 이성이 명료화되지 못한다. 글은 쓰면 쓸수록 늘고, 이성과 생각의 틀도 잡혀 간다. 물론 좋지 않을 수도 있지만. 결국 글을 많이 쓰고, 많이 연습해야 늘게 된다.




마태복음 13장 일곱 가지 천국 비유

마태복음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표현은 거의 사용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천국(τῆς βασιλείας τῶν οὐρανῶν)’를 사용한다. 마태는 유난히 ‘하늘’이란 단어를 좋아하는 것 같다. 13장에는 천국에 대한 7가지 비유가 등장한다.

① 씨뿌리는 비유

② 가라지의 비유

③ 겨자씨의 비유

④ 누룩의 비유

⑤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

⑥ 진주 장사의 비유

⑦ 그물의 비유


1-4는 생물과 관련된 비유이고, 5-7은 무생물이다. 여기서 5-6은 보화에 대한 비유이고, 마지막 7번째 비유는 그물로 물고기를 가르는 비유이다. 가장 많은 부분은 첫 번째 씨 뿌리는 비유이지만 점진적으로 종말으로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모든 비유는 종말론적이다. 7가지 비유에서 말하고 싶은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임했으니 너희들이 그것을 취하라는 것이다. 지금이 종말의 때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유는 철저히 종말론적이다.


종말론적 삶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천국을 얻기 위해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하고, 어떤 방식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이제 7가지 비유를 간략하게 살펴보자.


1. 씨 뿌리는 비유

마태복음 13:1~9, 13:18~23

씨 뿌리는 비유는 마지막 땅인 좋은 땅에 대한 것이다. 이전의 세 밭은 바르지 않은, 잘못된 땅이다. 네 밭이라는 표현은 옳지 않다. 농부는 길 가에 씨를 뿌릴 만큼 어리석지 않다. 하지만 씨를 뿌리다보면 씨는 길 가에, 돌 위에, 가시덤불에 떨어지기 마련이다. 이런 곳에 떨어진 씨앗을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한다. 




2.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

마태복음 13:24~30, 13:36~43

가라지의 비유는 상당히 신화적으로 읽힌다. 하지만 농사를 지어본 이들이라면 가라지의 비유가 얼마나 현실적인지를 알 것이다. 분명히 벼만 뿌렸지만 얼마가지 않아 수많은 피와 잡초들이 나기 시작한다. 농부가 의도하지 않은 것들이다. 종이 와서 가라지가 자라는 것을 보고 뽑자고 한다. 하지만 주인은 가리지를 뽑다가 곡식도 뽑히게 될지 모르니 그대로 두라고 한다. 하지만 마지막 때에 추수할 때 가라지를 먼저 뽑아 묶어 불사를 것이다. 현재가 전부가 아니다. 이 비유는 철저히 종말론적 비유이다. 하지만 지금여기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종말론적 시각을 가져야 함을 일러준다. 가라지가 흥황하는 지금 여기의 현실은 암담하기만 하다. 하지만 마지막 날에 하나님은 세상을 새롭게 할 것이다.


3. 겨자씨의 비유

마태복음 13:31-32

겨자는 히브리인들에게 ‘가장 작다’는 표현의 하나이다. 우리나라의 깨알처럼 작다는 표현과 비슷하다. 처음 하나님의 나라는 작고 보잘 것 없지만 결국에는 장대하게 될 것을 이야기한다. 아무리 작아도 생명이 있다면 발화할 것이고, 결국 거대하게 부풀려 질 것이다.




4. 누룩에 관한 비유

마태복음 13:33

누룩은 섞여진다. 아무도 모르게. 감추어진 존재로 있지만 사람들도 모르는 사이에 부풀어 오를 것이다. 이것이 교회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누룩처럼 살아간다. 하지만 어느 순간 세상을 뒤집어엎을 것이다.


5.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

마태복음 13:44

하나님의 나라는 우연히 발견된다. 그렇지 않은가. 사람의 수고와 노력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숨겨져 있다. 하지만 그것을 발견할 때는 그 기쁨을 말로 형언하기 힘들다. 우리는 발견이란 단어 속에서 가치에 대한 인식이 들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보화인지 돌덩이인지 모른다면 진정한 기쁨도 없으며, 자신의 소유를 팔지 않을 것이다. 영원한 가치를 안다면 그는 곧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 밭을 살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남는 장사이기 때문이다.


6.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의 비유

마태복음 13:45-46

마태복음 7:7에서 주님은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좋은 진주장사는 밭의 감추인 보화의 비유처럼 가치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구하는 자는 받는다’는 응답의 원리가 전제되어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찾는 자들에게 결국 드러날 것이다.



7. 그물의 비유

마태복음 13:47-50

마지막 그물 비유는 확실히 종말에 관한 경고다. 마지막 때가 되면 하나님은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가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우편에, 어떤 사람은 좌편에 모이게 한다. 그리고 죄인은 영벌에, 의인은 영생을 선물로 준다.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

 1. 성경 해석이란 무엇인가.

성경 해석을 암호 풀 듯 풀거나 고대문서 푸는 정도로 생각하면 안된다. 물론 전문 과정으로 들어가면 히브리어와 아람어, 헬라어를 공부하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해야 하지만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그런 것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말씀을 대하라.

먼저 해석이란 의미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한다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또한 순종의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

영적으로 대하라.

영적이라함은 이상한 신기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의 가치와 기준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기준과 관점을 가지라는 말이다. 영적은 성령의 인도함에 따라 말씀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적용을 위하여 읽으라

너무 성급하게 적용으로 나아가면 안 되지만 결론은 적용이어야 한다. 히브리어로 '들어라'(쉐마)는 '귀로 들어라'는 뜻도 있지만 '순종하라'는 뜻이기도 하다. 히브리즘은 '듣다'와 '행하다'가 하나로 묶여 있다.

2. 성경 해석의 원리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성경 해석 원리는 세 가지다. 하나는 언어적, 둘째는 역사적, 셋째는 신학적 해석이다. 세 가지는 따로따로 구분학기는 했지만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책에 따라 언어적 부분을 강조할지, 역사적인 부분을 강조할지, 신학적 부분을 강조할지는 상황 속에서 판달해야 한다. 이제 세 가지 원리를 알아보자.

언어적 해석

언어적 해석법은 기록된 언어를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구약은 히브리어이고, 신약은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다. 가끔 다른 언어가 일부 섞여 있지만 두 언어가 대부분이다. 한글은 한글만의 독특한 문법적 특징이나 용례가 있듯 히브리어도 마찬가지다. 히브리어의 경우 동사가 우선시 되며, 만약 동사가 문장의 가장 앞으로 나온 문장은 동사가 강조되어 있고, 문장 전체를 이끄는 역할을 한다.

평행 법이나 반복법 등 다양한 히브리어의 특징을 이해하는 것이 좋다. 만약 히브리어를 모른다면 그러한 일차적 분석은 어쩔 수 없으니 넘어가야 한다. 번역된 문장 안에서 최대한 바르게 해석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1)문맥적 해석, 2) 문자적 해석, 3) 문법적 해석을 사용한다.


역사적 해석

역사적 해석은 역사적 맥락에서 해석하라는 말이다. 비근한 예로 형수취수제와 같은 제도를 지금도 옹호한다면 어떻게 될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또 다른 예로 바울이 여자가 교회에서 머리를 가리라는 말 역시 역사적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역사 안에서 기록된 글이며, 문자와 문화를 통해 계시 되기 때문이다.


신학적 해석

신학적 해석은 성경의 기록 목적과 의도에 맞게 해석하라를 뜻이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고, 하나님은 어떤 일을 행하시고 등등에 맞게 해석을 해야 한다. 하지만 과도한 신학적 해석은 매우 위험한 해석법이다. 전체적으로 균형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시편 2편

1. 시편 2편 개요

 시편 2편 구조

1-3절 열왕들의 연합

4-6절 하나님의 비웃음과 선언

7-9절 시온의 왕

10-12 아들과 화해하라

2. 시편 2편 주해

1-3절 열왕들의 연합

시편 2:1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למה רגשו גוים ולאמים יהגו־ריק׃

시편 2편을 하나님의 놀람으로 시작한다. '아니 어떻게 된 일인가?'의 뜻이다. 이유는 나라가 분노하고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기 때문이다. 그들의 헛된 일이란 2-3절에서 설명된다. 먼저는 여호와와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는 것이며,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는 것이다. 신약적 관점으로 보면 하나님의 통치와 영향력으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다윗시대의 관점으로 읽는다면 이스라엘의 통치권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에돔과 모압, 암몬이 반역을 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들은 온전치 못하고, 본문을 분명하게 해석하기는 쉽지 않다.

누가는 사도들이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당한 일을 회상하며, 함께 기도하는 장면에서 시편 2편을 끌고 온다.

  • 행 4: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 행 4: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 행 4: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 행 4: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헤롯과 빌라도가 합하여 하나님께 종 예수를 거스른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도행전 4장은 산헤들린, 즉 유대인들이 예수 믿는 이들을 핍박한 상황 아래 아래 있다. 그렇다면 26절에서 '세상의 군왕들과 관리'들을 산헤드린을 말할 것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시편 2편을 다시 읽는다면 세상과 이방은 문자적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의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실제로 시편뿐 아니라 많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고 대적하는 이들에게 이방인과 같은 존재로 그리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 문자적으로 나라와 민족을 구분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분노는 하나님께 계명에 순종하는 것에대한 부당함이다. 죄인들은 항상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에 대한 분노가 서려 있다. 왜 우리가 당신(하나님)에게 순종해야 하지?라는 불만으로 가득한다. 고대에나 지금에나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이러한 분노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이자 반역이다.

시편 2: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יתיצבו ׀ מלכי־ארץ ורוזנים נוסדו־יחד על־יהוה ועל־משיחו׃

2절은 1절의 구체적인 해석이자 행위이다. 그들은 이제 '나선다' 앞으로 나아가서 뭔가 일을 꾸미고 있다. 

나서며

번역에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지만 히브리 원어는 '나선다'는 '아짜브'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기록되어 있다. 이 구조를 이후의 모든 내용이 이 동사가 끌고 간다는 뜻이다. 주동사로서 역할을 하는 것이다. 히브리어에서 뭔가를 강조할 때 항상 중요한 동사를 앞세운다. '아짜브'는 '서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왕들과 권련자들이 서서 회의를 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서다'라는 표현은 긴박성과 의지를 드러낼 때 사용된다.

  • 창세기 28장 13절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 출애굽기 34장 5절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에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실새

나서며 서로 꾀하여

'꾀하다'라는 히브리어는 '하사드'라는 히브리어로 '서로 말하다' '서로 조언하다'라는 뜻이다.  서로라는 말에도 유의해 보자. 이들은 누군가에 의해 강압적으로 모인 것이 아니라 자원한 것이다. 스스로 원하여 모인 것이다. '서로'는 이 점을 분명히 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다. 그들은 이것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은 자를 대적하며

그들의 분노의 대상이자 벗어나야할 대상이다. 여호와라는 단어가 이방인이나 대적을 향할 때는 심판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시편 기자는 의도적으로 엘이 아닌 여호와를 등장시킴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암시하고 있다. 

시편 2:3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ננתקה את־מוסרותימו ונשליכה ממנו עבתימו׃

2절이 생각과 언어의 문제였다면 3절은 실제적 행위의 문제로 넘어간다 .매우 짧고 간략하지만 핵심이 들어가 있다.

그들의 맨 것, 그의 결박

시편 2편 안에서 맨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을 말한다. 이들은 탐욕과 악을 즐기고 싶은데 하나님의 계명을 그것을 금지 한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끊고 싶어한다. 맨 것과 결박이란 표현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그들의 해석이라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시편 1편에서 의인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한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자신들을 구속하는 존재로 말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명을 지믕로 여기는 것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 미가 6:3 이르시기를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슨 일로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언하라

4-6절 하나님의 비웃음과 선언

두 번째 연은 하나님의 선언이다. 1-3절이 사람들의 작당과 모의, 그리고 선언이라면 이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비웃음으로 시작하며,  시온의 왕으로 세웠다고 선언하신다. 1절과 4절과 5절 초반에 대응하고, 2-3절은 5-6절에 대응한다.
사람들의 분노가 하나님의 진노로 바뀌고, 사람의 꾀와 모의가 하나님의 비웃음과  선언으로 대체된다.

시편 2:4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하늘에 계신은 신적 존재를 말한다. 군왕과 관원들은 땅에 있다. 그들의 모의와 계획이 아무리 높아도 하늘에 이르지 못한다. 인간의 지혜보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능하다.

  • 고전 1: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의 비웃음 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시편 2:5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인간들의 분노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통치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반항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의 부당한 분노에 대한 정의과 공의다. 인간의 분노는 탐욕적이고, 이기적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의 진노를 정죄한다.


시편 2: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왕을 세우신다. 그러니까 반역자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나려는 모의에 대한 분명한 선언으로, 오히려 더욱 강력한 통치를 할 것임을 선언한다. 그는 이 땅을 다스리는 왕이 될 것이다.
왕이 세워진 장소는 시온이다. 시온은 거룩한 산으로 표현된다. 원래 이곳은 성전이 세워진 작은 돌산이었다. 예루살렘에 거대한 바위산 위에 성전과 다윗의 성이 세워져 있다.


7-9절 시온의 왕

이제 세 번째 연으로 넘어간다. 세 번째 연은 시온에 왕을 세우시고, 그가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를 설명하나.

시편 2:7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하나님은 시온의 왕을 양자로 입양한다. 고대 세계에서 정통성을 가지려면 그는 신의 아들이어야 한다. 로마의 황제를 비롯하여 고대의 수많은 왕들은 조서를 내리거나 율령을 반포할 때 '나는  ~~신의 아들이다.'를 선언한 후 시작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자신의 아들로 입양한 적도 없고 선포한 적도 없다. 오직 이스라엘의  왕만이 하나님의 전정한 아들이다. 신약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되며, 예수를 믿는 자들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 마태복음 3장 17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 마태복음 4장 6절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 마태복음 5장 45절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사역은 곧 이 땅에서 왕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예수는 왕이며, 그리스도인 역시 왕으로 소개된다. 예수는 이 땅에서 왕적 능력으로 사단의 세력과 싸우며 귀신을 몰아낸다. 그리스도인 역시 예수의 이름으로 사단의 세력과 싸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의 공격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 에베소서 6장 17절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 히브리서 4장 12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시편 2:8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내게 구하라

'내게 구하라'는 응답을 약속한다. 모든 권한이 하나님께 있음을 말한다. 다른 의미에서 구하지 않으면 주지 않는다는 뜻도 포함된다. 믿음은 능동적이어야 한다. 생명이 있다면 생존의 욕구가 있고, 성장의 갈망이 있듯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선한 갈망을 가져야 한다. 영적 갈망은 거듭난 자의 본성이다.

  • 누가복음 11장 10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이방 나라를 .. 주리니
모든 세계를 갈망해야 한다. 이것은 야망이 아니다. 온 땅에 충만하여 다스리라는 소명이다. 세상의 어느 곳도 불의과 악이 있어서는 안 된다. 모든 나라와 민족들이 하나님을 섬길 때까지,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

시편 2:9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통치의 도구는 철장이며, 방식을 깨뜨림이다. '질그릇 같이'는 쉽게, 아주 쉽게 부순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들을 철장의 질그릇처럼 부서질 것이다.

  • 요한계시록 2장 27절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 요한계시록 12장 5절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 요한계시록 19장 15절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10-12 아들과 화해하라

이제 마지막 경고 또는 권고다. 

시편 2:10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지어다

다시 군왕들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다. 그들을 지혜를 얻어야 한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알고, 어떻게 처신해야 바른 성공적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시편 2: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들이 배워야 할 교훈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고 떨며 즐거워해야 한다. 이질적인 세 표현은 경외라는 단어에 들어가 있다. 하나님을 얕잡아 보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로운 자들에게 복을 주니, 너희들이 의롭다면 즐거워해야 한다. 하지만 불의한 자들은 하나님을 싫어할 것이다.


시편 2:12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그의 아들은 시온의 왕이다. 입맞춤은 화해의 인사다. 만약 화해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급하게 그들에게 임하여 그들을 멸망시킬 것이다. 여기서 '길에서'라는 표현은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급작스러운 상황이다.
결론은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다.

마태복음 2장 동방박사의 방문

 1. 마태복음 2장 개요

마태복음 2장의 예수의 탄생과 동방박사들의 방문이 소개된다. 동방박사들이 가고 난 후 헤롯이 베들레헴 주변의 두살 아래의 아이들을 학살하는 하는 사건을 소개한다. 이후 헤롯이 죽자 아들 아켈라오가 다시 유대의 왕이 되자 요셉은 가나안에 머물기를 두려워하여 갈릴리 나사렛 동네로 돌아간다. 2장은 아래와 같이 분석했다.

  • 1-12절 동박박사들의 경배
  • 13-18절 헤롯의 유아학살사건
  • 19-23절 애굽에서 갈릴리로


2. 강해

1-12절 동박박사들의 경배

  • 마태복음 2: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 마태복음 2: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 마태복음 2: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 마태복음 2: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 마태복음 2:5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 마태복음 2: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 마태복음 2:7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 마태복음 2:8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 마태복음 2: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 마태복음 2:10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 마태복음 2: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 마태복음 2:12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헤롯 왕 때에

2장은 헤롯 왕때에 시작한다. 헤롯은 이두매 사람으로 마카비 시대에 에돔 지역에 사람던 사람들을 강제적으로 할례를 시켜 반유대화 시킨 사람들이다. 당시 이두매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부러워하는 동시에 적대시했다. 자신들의 열등한 신분을 만회하기 위해 온갖 비열한 방법을 사용했다. 아버지 헤롯이 로마에 돈을 주고 입지를 다지고, 헤롯대제가 유대지역의 왕위를 받게 된다. 신약에 등장하는 헤롯들이다. 헤롯 안티파터 1-2세는 등장하지 않고 아켈라오 세대는 이름만 몇 번 등장한다. 헤롯 아그립바1세가 예수가 '여우'라 부른 사람이다. 아그립바로 번역된 헤롯은 헤롯 아그립바 2세로 사도행전 바울과 이야기한다. 마태복음 2장은 헤롯대제를 말한다.

헤롯 안티파터 1세

헤롯 안티파터 2세

헤롯대제(예수님 탄생)

아켈라오-헤롯 안디바-빌립2세

헤롯 아그립바1세(공생애 기간)

헤롯 아그립바2세(바울, 사도행전)

헤롯 왕 때라는 표현은 로마의 식민지 아래의 암울한 시대적 배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다윗의 후손이 아닌 이두매인에의해 지배 당하는 유대인들의 목자 없는 시대이다. 헤롯 안에는 이두매인들의 열등감과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하여 잔인하게 가족들까지 학살하는 폭력성이 공존하는 인물이었다.


동방박사들의 방문

동방막사는 마고스(μάγος)인데 현대의 과학자, 인문학자, 천문학자, 사제 등이 조합된 인물이다. 이러한 조합은 중세까지 엄격하게 분리되지 않았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이르러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말한다.

동방 박사들의 말은 헤롯과 예루살렘을 소동케했다. 이미 헤롯 왕이 엄연히 있는데 유대인의 왕에게 경배하러 왔다는 소식은 경악스러운 것이었다. 소동하다는 표현은 트랏소(ταράσσω)마태복음 14:12에서 괴성을 지르고 미친듯이 날뛰는 상태를 말한다.


선지자로 기록된 바

헤롯은 곧 댜제사장고과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묻는다. 그러자 그들은 너무나 쉽게 미가 5:2을 인용하여 베들레헴이라 말한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이다.

  • 마태복음 2: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 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마태복음의 인용은 70인경에서 가져온 것이다. 70인경 미가 5:2과 마태복음을 비교하면 완전히 일치하지 않고 응용하여 변형했음을 알 수 있다.

  • LXX διὰ τοῦτο δώσει αὐτοὺς ἕως καιροῦ τικτούσης τέξεται καὶ οἱ ἐπίλοιποι τῶν ἀδελφῶν αὐτῶν ἐπιστρέψουσιν ἐπὶ τοὺς υἱοὺς ισραηλ
  • 마 2:6 Καὶ σύ, Βηθλέεμ γῆ Ἰούδα, οὐδαμῶς ἐλαχίστη εἶ ἐν τοῖς ἡγεμόσιν Ἰούδα· ἐκ σοῦ γὰρ ἐξελεύσεται ἡγούμενος, ὅστις ποιμανεῖ τὸν λαόν μου τὸν Ἰσραήλ.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예수의 탄생을 성경이 이미 기록하고 있고, 예언했음에도 그들은 아무도 관심이 없다. 심지어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을 찾아 경배하러 갈 때도 아무도 동행하지 않는다. 율법을 가지고 있고, 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사용하지 않는, 존중하지 않는 이들을 발견한다.


헤롯의 술수

헤롯은 자신을 가장한다. 그는 동방박사들에게 만약 찾거든 자신에게도 말하여 자신도 경배하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는 과연 거짓의 사람이며 악의 사람이다. 그는 후에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죄없는 수많은 아이들을 학살할 것이다.


동방박사들의 경배

박사들이 예루살렘을 나와 베들레헴으로 향할 때 다시 별이 그들을 인도한다. 성경 안에서 별은 종종 하나님의 천사나 그와 비슷한 신적인 존재들을 표현할 때 사용된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R.T 프랜스는 별의 뜨고 짐은 사람의 운명과도 상관이 있음을 잠깐 언급하고 지나간다. 분명 의미 있는 일이나 여기서는 그냥 넘어가자. 별은 베들레헴의 마구간으로 인도했을 것이다. 그곳에 아기 예수가 태어나 뉘어져 있었다.

박사들은 아기 예수를 발견하고 경배한다. 가져온 보배 함을 열어 황금, 유향, 몰약을 예물로 드린다. 황금은 왕권을, 유향은 제사장직을, 몰약은 십자가의 죽음을 상징한다고 한다. 좀 너무 과한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은 어디에도 지지를 받지 못한 이후의 교부들이 헬라 적 전통 아래에서 해석한 것이다. 당시 헬라의 신이나 왕들에게 경배할 때 황금과 몰약을 드리는 것이 예의라고 한다. 이유야 어떻든 세 가지 예물은 당시로써 최고의 가치를 지는 사치품과 고가품이었다. 박사들은 아기 예수를 왕으로 경배했고, 예물도 왕에게 드리는 예물을 드린 것이다.

박사들의 경배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찰스 스펄전은 본문을 강해하면서 동박 박사들이 치렀을 무한한 희생을 강조한다. 그들은 수천 Km을 걸어왔다. 여행이 위험했던 시기에 그 길은 목숨을 담보로 한 위험한 여행이었다. 또한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것을 예수에게 드렸다. 최고의 경배이다. 그러나 진작 경배해야 할 유대인들은 아무도 경배하지 않았다. 요한복음은 1:11이 참으로 가슴에 와 닿는다.

  • 요한복음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동방박사들은 꿈에서 헤롯에게 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고향으로 돌아간다.


13-18절 헤롯의 유아학살사건

박사들이 떠난 후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애굽으로 피난하게 한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누가복음을 조금 비교할 필요가 있다. 누가복음에는 예수의 부모가 아기 예수를 성전에 데려가 할례를 받게하는 장면이 나온다. 16절을 보면 헤롯이 죽인 아이들의 나이는 '두살 아래'이다. 이것은 헤롯의 아이 학살 사건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적어도 2년 정도가 흘렀다는 말이다. 요셉이 아기 예수를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간 때는 아이가 어느 정도 자랐을 시기일 것이다. 최소한 100일은 지나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 있다. 더 늦었을 수도 있다. 하여튼 요셉은 헤롯의 칼을 피해 애굽으로 피신한다. 마태는 즉각적으로 요셉의 피신은 출애굽 사건과 결부 시킨다.

야곱의 때에 가나안에 엄청난 기근이 찾아온다. 마침 애굽에 야곱의 잃어버린 아들 요셉이 총리로 있으면서 곡물을 저장한다. 이후 야곱의 가족들은 애굽으로 내려가 400년이 넘도록 그곳에 머문다. 때가 되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 내신다.  마태가 인용한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는 구절은 호세아 11:1이다.

  • 호세아 11장 1절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호세아 11:1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겨 그들은 애굽에서 불러내 자녀 삼으셨지만,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싫어하는 장면 속에 등장한다. 결국 그들을 앗수르에 줄 것이라 말씀하신다. 마태는 호세아의 구절을 통해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는 동시에  고통 당하는 백성들을 구원하시겠다는 결의도 드러내신다.

우린 여기서 한 가지에 주목해야 한다. 이스라엘 역사는 가나안의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피신한다. 하지만 마태가 인용한 부분을 출애굽 사건이며, 출애굽에서의 유아학살사건과 헤롯의 유아학살 사건을 동일시한다. 모세는 그 살육의 현장을 벗어나 애굽에서 빠져나온다. 하지만 요셉은 학살사건이 가나안에서 일어났고 반대로 애굽으로 피신한다. R.T 프랜스는 결정적 결함으로 보지만, 이건 역설이다. 즉 안식의 땅이요 축복의 땅인 가나안이 애굽이 되어 버린 것이다. 헤롯은 출애굽 시대의 포악한 바로와 동일시된다. 영적인 애굽은 바로 팔레스타인 땅이다.


라마의 통곡

마태는 헤롯의 학살 사건을 예레미야 31:15에서 인용하여 통곡의 기원을 살핀다. 베들레험에서 통곡은 베냐민의 어머니 라헬의 슬픔과 통곡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창세기 35장에서  벧엘에서 제단을 쌓고 내려오면서 에브랏(베들레헴) 근처에서 베냐민을 낳으면서 난산을 한다. 결국 베냐민을 낳고 라헬은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라헬의 통곡을 라마의 통곡으로 바꾸어 설명한다.

라마는 베냐민 지파에 속하는 장소이다. 이들은 기원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하고 포로로 끌려가게 된다. 이때 라마에 포로들이 모여 손발이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간다. 바벨론은 모든 사람을 끌고 가지 않고 건장하고 젊은 사람들, 왕족과 귀족들을 끌고 갔다. 남겨진 건 힘없고 나이 든 사람들이었다. 즉 대부분은 연로한 부모들이었다. 자식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면 부모들을 자녀를 잃은 슬픔에 통곡을 한 것이다. 예레미야는 당시의 사건을 라헬의 통곡에서 가져다 사용했다.


학살사건은 정말 있던 것일까?

주석이나 인터넷 자료를 찾아보면 헤롯의 유아학살 사건에 대해 대단히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이유는 성경 이외의 어떤 문헌에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의 의심을 충분히 공감하지만 많이 어리석다. 우린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외부의 문헌은 모든 것을 기록할까? 절대 아니다. 우리가 일기를 쓴다고 생각해보자. 그럼 하루에 일어난 모든 일을 다 기록할까? 아니다. 그럼 왜 다른 외부 문헌에 유아학살사건이 기록되어있지 않다하여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단정하는 것일까?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이다. 차라리 일어났는지 일어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라고 하는 것이 더 정직한 표현이 아닐까?


19-23절 애굽에서 갈릴리로

2장 종결부는 짧게 언급된다. 헤롯이 죽자 요셉은 다시 유대로 돌아 온다. 하지만 아들 아켈라오가 다시 왕이 되자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꿈에 지시를 받아 갈릴리 돌아간다. 마태는 선자가의 기록을 따라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는 말로 마무리 한다. 

문제는 구약성경 어디에도 나사렛이란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원어적 의미로 살펴야 한다. 

나사렛(Ναζαρέτ)이라 단어는 신약에서 12번 정도 언급된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나사렛이 히브리어 네체르(사 11:1)를 직역한 것으로 추측한다. 하지만 이 단어가 과연 헬라어 나사넷과 같은 의미인지는 알 길이 없다. 또한 네체르와 지명인 나사렛이 어떻게 동일시되었는지도 상당히 모호하다. 2천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당시의 의미를 파헤치기는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현대인들이 이해하지 못한 의미가 당시에는 충분히 통용되었을 것이다. 

마태복음 1장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와 탄생

 1. 마태복음 1장의 개요

마태복음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나라'는 '왕국'을 뜻한다. 마태복음 1장은 예수님의 족보(기원)와 탄생을 설명하여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한다. 족보는 다윗의 후손으로서 왕으로 드러내고, 탄생은 사람의 성이 아닌 성령에 의해 탄생했음을 말한다. 족보는 모두 14라는 숫자에 맞춰져 있으며, 다윗을 드러낸다. 1장의 구조는 1-17절까지 족보, 18-25절까지는 탄생 설화를 말한다.

  • 1-17절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 18-25절 성령에 의한 잉태와 탄생


2. 강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아브라함과 다윗은 유대인들에게 두 가지 기원자이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민족의 기원자이며, 다윗은 국가로서의 진정한 왕을 뜻한다. 다윗의 후손이란 구절을 통해 알듯이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며, 이스라엘은 다윗의 후손을 통해 통치 된다고 믿는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정통성은 다윗의 후손인가 아닌가로 결정된다.

다윗언약(The Davidic Covenant) 

다윗 언약은 삼하 7:1-17까지의 내용이며, 가장 핵심적인 구절은 16절이다.

  • 삼하 7: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나님은 다윗에게 사울처럼 왕위를 주고 뺏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뺏지 않겠다고 하신다. 이후의 모든 왕들, 정통성을 오직 다윗의 후손일 때 가능하다. 북이스라엘이 정통성을 상실한 이유는 성전을 버린 것도 있지만 첫 왕인 여로보암이 다윗의 후손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카비 시절 왕은 레위지파 제사장들이었다. 이후 헤롯도 이두매인이기에 다윗의 후손에 대한 열망은 신약시대의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는 가장 먼저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임을 밝히고 시작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된 것이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아브라함 - 2이삭- 3야곱 - 4유다(다말) - 5베레스 - 6헤스론 - 7람 - 8아미나답 - 9나손 - 10살몬(라합) - 11보아스(룻) - 12오벳 - 13이새 - 14다윗

  • 마태복음 1: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 마태복음 1: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 마태복음 1: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 마태복음 1: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 마태복음 1: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나그네 인생

첫번째 단계의 14대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가나안에서 애굽까지의 여정을 그린다.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부름을 받고 가나안으로 향한다. 가나안에 지내면서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는다. 족장세대로 일컬어지는 가나안 방랑 생활은 이후의 모든 신앙의 정체성을 제공한다. 신약 성경 역시 '나그네'에 대한 개념을 가져와 적용합니다. 이스라엘이 나그네라는 점과 나그네를 잘 대접하는 것이 신자의 모습이라 말한다.

  • 사도행전 7장 6절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후손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리니 그 땅 사람들이 종으로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 디모데전서 5장 10절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으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 것이요
  • 히브리서 11장 13절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 베드로전서 1장 17절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나와 하란에서 오래 거주했다. 그리고 다시 가나안으로 들어갔다. 인생 자체가 방랑의 세월이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백 세가 되어 낳은 아들이며 아무런 형제도 없이 홀로 지내다 리브가와 결혼한다. 이삭은 마흔에 결혼하여 예순에 에서와 야곱을 낳는다. 리브가는 불임의 여성이었다. 야곱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애굽에서 숨을 거둔다. 이들은 장막에 거하면서 평생을 살았던 사람들이다.

다말과 라합, 그리고 우리야의 아내

우리야의 아내 즉 밧세바는 두 번째 14대로 넘어가지만 주의하여 볼 만한 이름들이다. 중요한 사실은 이 여인들은 모두 가나안 여인들이라는 점이다.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는 헷족속이다.
  • 사무엘하 11장 3절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
모두 여인들이 이방인이란 점과 정상적인 과정이 아니라는 점도 기이하다. 일반 왕의 족보라며 감히 이런 사실을 숨겼을 것이다. 다말은 시아버지와 그걸 했고, 라합은 창기였다. 밧세바는 정말 믿음의 여인이었을까? 그럼 왜 아무런 말도 없이 다윗에게 갔을까? 낮은 신분을 버리고 왕후가 되고 싶은 욕망의 여인은 아니었을까? 충분히 가능하다. 사실, 예수의 족보는 결코 깨끗한 족보가 아니다. 그런데 왜 이런 사실까지 숨기지 않고 적나라하게 공개하는 것일까?

다윗부터 바벨론 포로까지

요시야 때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다. 우리는 족보가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족보에는 구약에 기록된 인물 중에 몇 명이 빠져있다. 마태는 이러한 누락을 의도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1다윗(밧세바, 우리아의 아내)-2솔로몬-3르호보암-4아비야-5아사-6여호사밧-7요람-8웃시야-9요담-10아하스-11히스기야-12므낫세-13아몬-14요시야

  • 마태복음 1: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 마태복음 1: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 마태복음 1:8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 마태복음 1:9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 마태복음 1:10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 마태복음 1:11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으니라

다윗부터 요시야까지는 왕국 시대다. 모세에 의해 출애굽과 광야 시절을 보내고, 여호수아가 인도하며 요단강을 건너 7년 정복 전쟁을 치른다. 이후 사사 시대가 시작된다. 그리고 사울이 왕이 되고, 다윗이 이스라엘 2대 왕이 된다. 이후 솔로몬이 왕이 되고, 솔로몬의 우상숭배로 인해 나라는 북과 남으로 갈라진다. 북 왕국은 기원전 722년에 앗수르에 망하고, 남유다는 기원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고 포로로 끌려간다. 여기까지의 역사적 배경이 두 번째 열네 대의 의미다.

이 시대는 기간적으로는 50년이 조금 넘는 기간이지만 성경 안에서 굉장히 중요한 시기다. 구약 성경의 4/4의 역사적 배경 시기다. 이 시기는 망각의 시간이다. 약속의 땅에서 도착한 이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한 것인가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결론은 실패다. 성공하지 못했고, 결국 죄를 짓고 멸망 당한다. 족보의 의미에서 본다면 소망없는 이스라엘이다. 인간의 역사는 정말이지 소망이 없다.

바벨론에서 그리스도까지

  • 마태복음 1:12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 마태복음 1:13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 마태복음 1:14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 마태복음 1:15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 마태복음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1여고냐 - 2스알디엘 - 3스룹바벨 - 4아비훗 - 5엘리아김 - 6아소르 - 7사독 - 8아킴 - 9엘리웃 - 10엘르아살 - 11맛단 - 12야곱 - 13요셉(마리아) - 14그리스도

이 시기의 포로의 시기다. 잠깐 독립하긴 했지만 다윗의 후손이 왕이 된 적은 없는 시기다. 북왕국는 포악한 앗수르의 정책으로 인해 안전히 파괴되어 역사에서 사라진다. 후에 섞인 민족들이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하지만 정통성을 상실한다.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바벨론은 이주 정책을 펴기를 했지만 대단히 자유로웠다. 한 곳에서 정착하도록 촌을 형성하게 했고, 포로지만 자유민처럼 공적으로 일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다니엘과 세 친구처럼.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가나안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에스라나 느헤미야, 역대기에 기록론 족보와 이름들은 이런 배경속에서 귀향한 자들을 추켜 세우는 일종의 칭송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18-25절까지는 예수의 탄생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리아에 대한 요셉의 의로운 행위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 마태복음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 마태복음 1: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 마태복음 1: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 마태복음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 마태복음 1: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 마태복음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 마태복음 1: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 마태복음 1: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요셉과 마리아는 약혼한 사이다. 그런데 마리아가 잉태했다는 사실을 요셉이 듣게 된다. 약혼은 이미 결혼한 사이로 본다. 그렇기 때문에 요셉에게 마리아의 임신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는 차마 죽일 수 없어서 조용히 혼인 관계를 끊으려 한다. 하지만 바로 이때 천사가 나타나 요셉에게 마리아의 임신 정체를 밝힌다.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 세상을 구원할 것임을 밝힌다. 환상을 본 것이다. 이제 환상과 현실 사이에 놓여 있다. 요셉은 어떻게 했을까? 그는 결정적 순간에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환상을 선택한다.

하나님의 구속사는 하나님께서 이루시지만 홀로 행하시지 않고 사람들을 사용하신다. 참으로 놀라운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연약하고 흠 많은 사람들을 사용하시며 그들의 결단과 헌신을 기꺼이 받아 주신다.


마태는 예수의 탄생을 이사야의 예언에서 끌고 온다.
  • 마태복음 1장 23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 이사야 7장 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은 히브리어도 동일하다. 임마누엘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 요한은 이 이미지를 가져와 예수의 성육신에 적용한다.

  •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에 '거하신다'는 헬라어 스케노-(σκηνόω)는 '장막을 치고 살다(live in a tent)'는 뜻으로 광야에 장막에 거하시던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이것이 임마누엘의 뜻이다.

나가면서

은혜의 족보

족보의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가 왕임을 분명해 보여준다. 하지만 흠 많은 족보다. 아니 부끄러운 족보다. 숨기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그럼에도 왜 숨기지 않을까? 그것은 '은혜'라는 단어 외는 해석할 방법이 없다.

성취하시는 하나님

족보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까지의 약 2200년의 기나간 세월을 관통한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건과 사연이 있었을까? 말로 다 못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위중한 시대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취소되지 않도록 모든 것들을 통치하시고 만들어 가신다.

요셉의 헌신

요셉은 마리아가 앉은 문제는 떠안는다. 그가 아무리 성령에 의해 잉태되었다고 주장한들 믿을까? 요셉은 환상을 따를 것인지 세상의 방법대로 처리할 것인지 갈림길에 섰다. 결국, 그는 하나님의 환상을 따랐다. 홀로 그곳에 그 길을 가기로 했다. 믿음의 길은 고독한 것이다. 아무리 설명해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요셉의 위대한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렸다. 기꺼이. 그는 진정 고독한 왕과 같다.


요나서 개요 및 장별 요약

 1. 요나서 개요

요나서의 저자는 요나로 알려져 있지만 확실치가 않습니다. 요나서의 주제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불타는 사랑입니다. 겉으로는 이방인인 니느웨 백성들을 사랑하는 하나님이 모습을 보여주지만 내면에는 이방인을 이토록 사랑한다면 이스라엘백성들은 얼마나 더 사랑하겠느냐는 하나님의 반문이 담겨 있습니다.

요나서는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B.C. 793-753년) 때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여로보암 2세 때 북이스라엘은 권력의 공백기로 인해 부흥기를 맞이했습니다. 남쪽의 애굽도, 동쪽의 앗수르도 자체적인 문제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어 다른 나라에 힘을 쏟지 못했습니다. 여러보암 2세는 이것을 기회로 삼아 주변국들은 정복했고, 경제적으로 흥황기를 이루었습니다.

이러한 흥황은 독이되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죄를 짓는 기회로 삼고 말았습니다. 요나는 북이스라엘의 죄악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심판이 멀지 않았음을 직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때 요나는 니느웨로 보내심으로 악한 죄인들까지도 회개하면 용서하신다는 메시지를 줍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회개하지 않았고, 결국 기원전 722년 앗수르에의해 멸망 당하게 됩니다.  니느웨는 앗수르의 제2의 수도와 같은 거대한 도시입니다.

2. 요나서 장별 요약

요나 1장

하나님이 요나를 부르신다. 요나에게 앗수르의 제2의 수도인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지 않고 동쪽인 니느웨가 아니라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려고 욥바로 향한다.

욥바에 가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배에 올라탄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엄청난 폭풍이 몰려오고 위기에 놓인다. 사람들은 각기 자신이 믿는 신을 부르지만 폭풍은 잠잠해 지지 않는다. 그러다 제비를 뽑아보자 제안한다. 그런데 제비는 배 밑창에서 자던 요나에게 뽑힙니다.

요나는 자신이 히브리 사람이고, 여호와를 섬기지만 계명에 불순종해 도망가고 있다고 말한다. 자신을 바다에 던져야 폭풍이 잠잠해질 것일 말한다. 하지만 뱃사람은 착한 건지 던지지 않고 계속 노를 저어 육지로 향한다. 하지만 배가 거의 파손될 지경에 이르자 결국 요나를 바다에 던진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바다는 잠잠해진다.

요나 2장

요나는 바다에 빠져 물고기 뱃속에 갇힌다. 요나는 그곳에서 삼일밤을 보내면서 하나님께 기도한다. 요나의 기도는 4절과 9절이 핵심이다. 비록 여호와께 쫓겨났을지라도 성전을 향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을 믿고 기도한다. 결국 구원은 여호와께 있음을 고백하며 기도를 마친다. 기도를 마치자 물고기가 요나를 육지에 토한다.

2장 기도문에는 중요한 성전 신학이 담겨있습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봉허하면서 포로가 되어 타국에서 성전을 향해 기도하며 응답해 달라고 기도한다. 다니엘도 성전을 향해 기도했다. 결국 회개하고 돌이키게 하신하는 하나님의 선함이 담겨있다.

  • 왕상 8:33 만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주께 범죄하여 적국 앞에 패하게 되므로 주께로 돌아와서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이 성전에서 주께 기도하며 간구하거든
  • 왕상 8:34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요나 3장

물고기가 요나를 육지에 토하자 하나님의 말씀 다시 임한다. 내용은 동일하다.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라 하신다. 요나는 순종한다. 요나는 니느웨 성읍에 들어가 40일이 지나면 이 도시가 멸망하고 말한다.  그러자 갑자기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한다. 심지어 왕도 그 쇠를 듣고 회개하고 전 국민에게 금식을 선포한다. 일사불란하게 모두가 회개에 동참한다. 기이할 정도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습을 보시고 용서하신다.

3장의 핵심은 이방인의 회개도 받으시는 하나님이 소개된다. 솔로몬의 봉헌 기도에는 이방인의 기도까지 응답해 달라고 기도한다.

  • 왕상 8:43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이방인이 주께 부르짖는 대로 이루사 땅의 만민이 주의 이름을 알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처럼 경외하게 하시오며 또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을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줄을 알게 하옵소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지만 모든 민족과 나라의 하나님이시기도하다. 이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 요나서는 모든 나라의 하나님이심을 선포한다.

요나 4장

요나가 이 사실을 알고 성을 낸다. 차라리 자신을 죽여달라고 기도한다. 요나는 하나님의 은혜롭고 자비로움을 비아냥거리듯이 말하며 이럴 줄 알고 다시스로 도망갔다고 말한다. 즉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들을 용서하신다는 것을 안 것이다. 요나는 기도를 마치고 성읍 동쪽에 초막을 짓고 앉아 성이 망하기를 기대한다. 하나님은 요나를 교훈하신다. 초막에 박넝쿨이 자라게 하여 시원하게 해준다. 그런데 갑자기 벌레가 나타나 덩굴을 먹게 한다. 해가 뜨자 죽을 것만 같다. 요나는 다시 투덜거리며 죽겠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요나가 박넝쿨을 아낀 것처럼 나도 이 니느웨 사람들을 아낀다고 말한다.

성경을 읽는 자세

 성경이란?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성경은 무엇인가입니다. 너무나 생각없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답하지만 그렇게만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한 것들이 있습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정의하신 분 가운데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처럼 읽을까요? 조선시대 임금 앞에서 신하들처럼 말입니다. 그럼 한 시간도 못 견디고 다 도망가고 말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단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읽는 것은 다양하고 복잡한 과정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결론적으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생각했다면 그 다음 우리는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성경을  어떤 마음으로 읽어야 하는가?

성경을 읽을 취해야할 마음의 자세입니다.

1. 경건한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경겅한 마음이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기도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이시며, 선의 시작이며, 선을 가르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지전능한 분임을 안다면 당연히 경배와 사랑을 돌려 드려야 합니다.

2. 경청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두 번째 마음 자세는 경철입니다. 경철은 주의를 기울이고 마음을 다해서 듣는다는 뜻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아무렇게나 읽으려 하지만 잘못된 방법입니다. 마음을 집중에서 읽어야 합니다.

3. 지성을 충분히 활용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으면 누군가는 영적으로 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영적으로로는 성령으로 읽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성령으로 읽는다는 것이 도대체 뭘까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체로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는 것을 성령으로 읽는다고 오해합니다. 성경은 문자자체를 너머 많은 은유와 비유, 문학적 방법을 사용하고 서술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는 우리에게 있는 지성을 충분히 활용하여 읽어야 합니다.

4.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주의해서 읽는다'는 말은 자세히, 꼼꼼히 읽으라는 말입니다. 건성건성 읽지 말고 꼼꼼히 읽어 자세히 읽으라는 말입니다. 역사적 배경, 단어, 구절, 문맥 등을 잘 살펴보고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 방법

먼저 성경은 정독해야 합니다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원리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좋은 곳만 골라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음식도 내가 좋아하는 것만 먹으면 편식이 되고 영양의 불균형을 가져와 건강에 문제를 일으키듯 성경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은 골고루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정독한다는 말은 '통독'의 의미와 천천히 읽기를 포함합니다. 정독은 어느 일정 부분을 빠뜨리지 말고 잘 이해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꾸준히 읽어야 합니다. 다른 책은 모두 읽지 않아도 되고, 모두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읽기 편하든 어렵든 모두 읽어야 합니다.

둘째, 성경은 매일 주기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이 부분은 쉬운듯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매일 몇 장씩이라도 꾸준히 읽는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밥을 매일 먹아야 힘이 나듯 하나님의 말씀도 가능한 매일 꾸준한 양을 읽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매일매일 읽어야 잘못된 생각을 교정하고, 악한 생각들을 밀어내고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채울 수 있습니다.

셋째, 평생 읽어야 합니다.

평생은 죽을 때가지 말하니다. 매일, 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함으로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매일의 양식인 동시에 평생의 양식이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한꺼번에 읽어서 끝내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어떤 한 시절, 나이대에 읽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매일 말씀하시고, 또한 평생 말씀하십니다. 성경 읽기를 꾸준히 할 때 바른 영성과 믿음을 소유하게 됩니다. 성경을 읽지 않으면 우리는 잘못된 생각에 사로 잡히고, 그른 생각에 빠져들 수 도 있습니다.

성경을 읽음으로 얻는 유익

그렇다면 성경을 읽음으로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첫째,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은 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세상의 창조와 운행의 방법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인류의 타락과 구속의 방법이 담겨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음으로 하나님을 발견하고 세상원리를 배우게 됩니다.
  • 시편 19: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둘째, 구원을 얻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소개합니다. 성경을 읽음으로 우리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 디모데후서 3장 15절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셋째, 지혜를 얻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을 창조하고 통치하는 수단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의 그 어떤 지식과 지혜보다 탁월합니다.
  • 시편 19: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넷째,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우리안에 기쁨이되고, 평안이 찾아옵니다.
  • 시편 19: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 예레미야 15:16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결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을 때는 우리의 이성과 믿음을 활용하여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 다양한 유익이 있습니다. 이러한 유익을 통해 우리는 영적을 성숙하게 되고, 하나님과 친밀하게 지낼 수있습니다.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란 무엇인가 이미지


아마 그 어떤 기독교 교리보다 더 어려운 것이 기도에 대해 정의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성경적 원리에 의해 기도가 무엇인지를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기도의 기원

기도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아브라함 때에 이미 하나님께 간구하는 이야기가 등장한 것으로 볼 때 이미 오래전부터 기도는 종교의 한 부분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도의 근원은 인간에 본성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에덴동산에서부터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나서 하나님을 피해 숨었습니다. 그러니까 타락 이전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그들 가운데 있을 때 교제했다는 말이 됩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본다면 기도는 인간의 한 속성으로 봐야 마땅합니다. 즉 인간이 가진 종교성은 기도하는 것과 분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 성경에 나타난 다양한 기도자들


그렇다면 성경에 소개되는 기도자들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봅시다. 여기서는 모호하게 표현되는 부분은 제외하고 명확하게 기도라는 의식이나 단어가 등장하는 부분을 언급합니다. 먼저 아브라함까지는 기도하는 장면이나 기도한다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삭 아이를 위해 기도하다

성경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기도는 이삭이 아이를 낳지 못해 기도한다는 내용입니다. 리브가와 결혼한 이삭은 리브가가가 아이를 낳지 못하고 그녀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합니다.(창25:21) 그러자 리브가가 아이를 잉태하는데 쌍태입니다. 에서와 야곱이 그들의 아들들입니다. 얼마 동안 기도했는지 정확하지 않으나 이삭은 40에 결혼했고, 에서야 야곱을 낳을 때는 60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최소 15년 이상은 기도했다는 말이 됩니다.


야곱, 얍복강의 간구

두 번째 등장하는 유명한 기도는 야곱이 에서를 만나기 직전 얍복강에서 드린 기도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복을 구함으로 야곱에서 이스라엘이 되고 에서의 손에서 구원을 얻습니다.


모세의 기도, 백성을 위해 간구하다

모세의 기도는 많기 때문에 어느 한 사건을 주목하기 힘듭니다. 중요한 것은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할 때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중보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백성들 때문에 힘들어 하나님께 원망하기도 합니다. 모세의 사역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모세.아론.훌의 합심기도

출애굽의 과정에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비록 모세가 기도하기 하지만 모세 혼자만의 기도라고 보기는 힘들어 따로 구분합니다.

출애굽기 17장 12절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한나의 기도

사무엘상 1장

자식을 낳지 못하는 한나가 하나님께 구함으로 사무엘을 얻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의 시대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명한 기도로 유명합니다.


솔로몬의 성전 봉헌기도

열왕기상 8장

성전을 마무리한 솔로몬은 하나님께 성전 봉헌기도를 드립니다. 이 기도는 성전에 관련된 그 어떤 기도보다 길고 자세합니다. 또한 앞으로 전개될 기도의 방향과 특징을 잘 보여주는 기도입니다.


엘리야의 기도, 하늘에서 불을 내리다

바알을 섬기던 이스라엘을 향해 엘리야는 기도하여 하늘의 문을 닫고, 다시 기도하여 하늘의 문을 열어 비를 내리게 합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을 바알의 집이라 일컫는 갈멜산에 불러 누가 진정한 신이 누구인지 내기를 합니다.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을 내려 바알의 선지자들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죽이자 비가 내립니다.


히스기야의 기도, 15년을 더 살다

열왕기하 20장

병에 걸린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죽을 병에서 나아 15년을 더 살게 되는 내용입니다. 간절히 구하는 히스기야를 위해 하나님은 응답합니다.


예레미야의 기도

예레미야 1장

예레미야는 생애 전체가 기도의 삶이기 때문에 어느 특정 부분을 고르시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소명에 관련된 기도는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레미야 1장에서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예레미야는 소명에 대한 깊은 두려움으로 힘들어 합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모태에 짓기 전부터 택정했음을 알리고, 그 입술에 하나님의 말씀주어 나라를 세우기도 무너뜨리기도하는 권세를 줍니다.


에스라의 기도, 거룩을 위해 기도하다

에스라 9장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이 또 다시 이방여인들과 결혼하자 깊은 슬픔에 빠진 에스라 자신과 조상과 당시 민족을 위해 기도합니다. 기도를 마친 후 이방 여인을 쫓아냅니다.


예수, 게세마네의 기도

신약에서 예수님의 기도를 빼 놓을 수 없습니다. 비록 고통스럽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기도합니다.

추석 명절 가정 예배 기도문

 추석 명절 가정 예배 기도문

추석 명절에 추도 예배와 가정 예배 시에 드리는 대표 기도문입니다.

추석 명절 기도문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민족 고유 명절인 추석을 맞아 우리 가족들을 한자리에 불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 이 시간 저희에게 복을 주시고, 은혜를 주사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은혜로운 예배의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가정 예배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더 깊이 알고 하나님만을 섬기며 예배하는 가정되기를 원합니다. 살아가면서 상황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다양한 생각과 관점이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한마음으로 주님 안에서 사랑하며 섬기는 가족이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 가정이 믿음의 반석 위에 든든히 세워지기를 원합니다. 날마다 주님을 바라보며 섬기게 하시고, 언제나 주님을 바라보며 소망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오늘도 말씀 전하는 ⃝⃞⃢에게 성령의 은혜로 덧입혀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추석 명절 기도문


온 천지 만물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선하신 뜻과 능력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추석을 맞이해서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하시고 하시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함께 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죽어 마땅한 저희를 사랑하사,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시고, 하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알게 하시는 감사합니다. 이 시간 허물 많은 저희를 용서하시고, 주의 긍휼로 주님 앞에 서게 하옵소서.

함께 예배합니다. 예배를 통해 저희가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깨달아 알아가는 시간 되기를 원합니다.

사업으로 힘들어 하는 이들에게 형통의 은혜를 주시고, 건강이 좋지 않아 힘든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건강을 허락하옵소서.

치료의 하나님, 오늘도 함께 예배할 때 크신 은혜로 채우실 것을 믿으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마태복음 개요 및 장별 요약


 

1.마태복음 개요


마태복음은 신약의 가장 앞부분에 자리하지만, 기록 연대는 상당히 늦은 시기에 해당합니다. 학자마다 의견의 차이가 조금 있지만 대체로 주 후 70년 직전 직후로 봅니다. 일부는 더 늦게 보기도 합니다. 이유는 마태복음이 갖는 문체와 신학적 독특성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신약의 가장 이른 문서는 데살로니가 전서와 갈라디아서로 보며, 이들은 주 후 45년경 전후로 봅니다. 그러니까 상당히 이른 복음서에 해당하는 마가복음도 60년 이후로 보기 때문에 복음서 자체는 서신들보다 늦게 저술된 것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교회 간의 신학적 합의와 체계가 거의 완성된 시기에 마태복음이 기록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90년대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요한복음의 경우는 앞선 공관복음인 마태-마가-누가복음과는 상당히 다른 서술방식을 사용합니다.


마태복음은 다양한 주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천국’이란 단어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땅에 임했다는 것을 유독 강조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안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표현은 극히 적고 ‘천국’이란 단어가 무려 36번 정도 사용되었습니다. 그에 비해 하나님의 나라는 고작 5번 정도입니다. (한글번역 기준)


마태복음은 다분히 유대 적이며 히브리적 전통을 전제로 기록되었습니다. 즉 다수의 이방인이 포함되기를 하겠지만 마태복음의 주 수신자들은 유대인으로서 예수님을 믿게 된 그리스도인들일 가능성이 매우 농후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2천 년 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 확정은 하지 맙시다. 그러한 가능성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주제는 천국이란 단어의 부속적인 주제이지만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바로 예수님을 ‘왕’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장 족보에서 예수님을 ‘다윗의 후손’으로 선포함으로 그동안 그렇게 고대하던 다윗의 후손을 통한 유대의 통치가 실현된 것입니다. 또한 누가복음의 경우 갈릴리는 호수나 작은 담수지로 설정하지만, 마태복음은 유독 거대한 바다처럼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사 앉다’(5:1) 등의 표현들은 왕이 보좌에 앉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마태복음이 예수님을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의 왕으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마치 시편 2편의 예언대로 하늘 하나님이 시온에 자기 아들을 왕으로 세우고 통치하게 만든 실제 사건처럼 표현하는 것이 마태복음입니다. 더 많은 주제가 있지만, 마태복음의 핵심은 천국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나라로 읽는다면 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이제 각 장 요약을 하겠습니다.


2. 마태복음 각장 요약

마태복음의 각 장을 중요한 사건 중심으로 요약했습니다. 각장 강해는 제목을 클릭하시면 됩니다. 

마태복음 1장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다룬다. 저자는 의도적으로 족보를 14라는 숫자에 맞춘다. 일부 학자들은 히브리어 다윗이 숫자 14라고 말한다. 즉 예수의 다윗의 후소됨, 왕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논란이 있지만 충분히 가능하다. 요셉과 마리아의 혼인과 임신의 과정을 통해 예수가 태어난다.


마태복음 2장

동방의 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온다. 헤롯이 듣고 깜짝 놀라지만 교활한 헤롯은 아기를 찾으면 자신도 경배할 테니 알려달라고 말한다. 동박 박사들은 별의 인도함을 받고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가서 아기 예수를 만나 경배하고 헤롯을 만나지 않고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헤롯은 두 살 아래의 아이를 모두 죽인다. 요셉은 천사의 지사로 애굽으로 피신했다. 헤롯이 죽자 갈릴리 나사렛 동네로 돌아간다.


마태복음 3장

세례 요한이 사역을 시작한다. 그의 첫 말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이다. 그는 요단강에서 죄사함이 세례를 베푼다. 세례를 베풀면서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려으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 예언한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물세례를 받는다. 


마태복음 4장

예수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한 후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다. 하지만 기록된 말씀으로 물리친다. 첫 번째 시험은 금식 후 돌로 떡을 만들라는 시험이다. 두 번째 시험은 성의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라 말한다. 세 번째 시험은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을 보여주면 자신에게 절하면 모둔 것을 주겠다 거질말을 한다. 사역을 시작하면서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를 제자로 부른다.


마태복음 5장

5~7장은 산상수훈 부분이다. 1-12절은 팔복을 설명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 예수는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 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맹세하지 말라.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원수를 사랑하라. 구제는 은밀하게 하라.


마태복음 6장

기도의 방법을 가르치신다.(주기도문 포함) 외식으로 금식하지 말라. 보물을 땅에 쌓지 말로 하늘에 쌓아두라.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마태복음 7장

비판하지 말라.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열매로 그들을 안다. 말씀을 마치자 사람들은 가르침에 놀란다. 서기관들과 같지 않은 권위가 있었다.


마태복음 8장

산에서 내려와 나병 환자를 고친다.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신다. 베드로의 장모를 고친다. 인자는 머리들 곳이 없다. 갈릴리 바다에서 큰 물결을 만나 예수님께서 잠잠케 하신다. 무덤 사이에 귀신들인 사람을 고친다. 마태복음은 두 사람으로 나온다.


마태복음 9장

중풍 병자를 고친다. 세관에 앉아있던 세리 마태(레위)를 부른다. 예수께서 마태의 초대를 받아 그들과 식사를 하자 바리새인들이 찾아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한다고 비방한다. 이때 예수는 건강한 자에게 의원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쓸모 있다고 말한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예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아 논쟁이 일어난다. 맹인들의 눈을 뜨게 한다. 말 못 하는 사람을 고친다. 따르는 무리를 불쌍히 여기고 일꾼을 보내 달라 말한다.


마태복음 10장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에게 권능을 주신다. 파송하기 전에 설교를 한다. 먼저 유대인에게 전하라. 미움을 받을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라. 너희는 참새보다 귀하고 하나님은 너희의 머리털까지 세신다. 나는 검을 주러왔다. 적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다.


마태복음 11장

세례 요한이 옥에 갇히고 예수님이 세례 요한이 누구인지 설명하신다. 회개하지 않는 도시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마태복음 12장

안식일에 밀을 자르다.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치시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낸다 비판하다. 악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 진정한 가족과 형제자매를 하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다.


마태복음 13장

13장은 천국장으로 불리는 곳으로 모두 7개의 비유가 소개된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밭에 가라지 씨를 뿌림, 겨자씨 비유, 누룩 비유, 밭에 감추인 보화 비유, 진주장사 비유, 그물 비유, 마지막으로 고향으로 돌아가나 배척당하신다.


마태복음 14장

세례요한이 헤롯에 붙들려 죽는다. 헤롯의 생일에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고, 헤롯이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자 딸이 어머니에게 묻고 세례요한의 목숨을 구한다. 오천 명을 먹이시고, 열두 바구니를 거둔다. 밤에 갈릴리를 지나다 폭풍을 만나 힘들 때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오신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다 바람을 보고 빠지나 예수님이 구해준다.


마태복음 15장

예루살렘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내려와 예수의 제자들이 떡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는다하여 비판한다. 예수는 사람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지 말라 한다. 가나안 여자가 찾아와 귀신들린 딸을 구해 달라고 한다. 사천 명을 먹이시고, 일곱 광주리를 거둔다.


마태복음 16장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 배를 타고 가면서 바리새인가 사두개인의 누룩을 조심하라 경계한다. 바리새인의 누룩은 외식이고, 사두개인의 누룩은 세속성이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예수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다. 처음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예언한다. 베드로가 말리자 사탄의 자식이라고 야단친다. 


마태복음 17장

산에 올라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바뀌신다. 그 때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이야기 한다. 산에서 내려오자 귀신 들린 아이를 내쫓는 문제로 논쟁이 일어난다. 믿음 없는 패역한 세대라 책망하며 고쳐 고신다. 제자들이 묻자 믿음이 작은 까닭이라 말한다. 두 번째 죽음과 부활을 예언한다. 가버나움에서 베드로가 낚시하여 한 세겔을 물고기에서 빼내어 성전세를 낸다.


마태복음 18장

천국에서 큰 자는 어린아이와 같고 자신을 낮추는 자이다. 죄를 범한 지체를 내어 버리라. 작은 자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형제 죄를 범하면 증인을 세우고, 교회에 알리고 그래도 회개하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처럼 대하라. 용서하지 않는 자의 비유,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옥에 가둔다.


마태복음 19장

이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어린 아이에게 안수하시다. 재물이 많은 청년의 고민. 소유를 팔아 천국을 사라. 


마태복음 20장

포도원 품꾼의 비유, 포도원 주인이 장터에 나가 일꾼을 구함. 나중에 늦게 온자도 일찍 온 자도 한 데나리온을 주자 불평함.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된 사람이 있다. 세 번째 죽음과 부활을 예언한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두 아들을 청탁한다. 다른 제자들이 시기한다. 예수는 으뜸이 되고자 하면 종이 되라고 하신다. 맹인 두 사람이 고쳐 달라 소리친다.


마태복음 21장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다. 성전의 장사치들을 쫓아 낸다. 무화가 나무를 저주하자 마른다. 예수의 권에 대해 묻자 예수는 오히려 세례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왔냐며 묻는다. 순종한 둘 째 아들의 비유,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베푼다.


마태복음 22장

혼인잔치의 비유를 들려준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문제로 시험한다. 예수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니므이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답을 준다. 형수 취수제로 인해 부활 논쟁에 답한다. 하늘에서는 다시 죽지도 결혼도 없다. 너희가 성경을 잘못 읽었다. 가장 큰 계명을 묻다. 예수가 바리새인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묻고 ‘다윗의 자손’이라고 답하자. 그럼 왜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말했는지 되묻는다. 그러자 아무도 대답하지 못한다.


마태복음 23장

제자들에게 바리새인의 외식에 잘못에 대해 길게 설교한다. 예루살렘이 버림 받았다는 슬퍼하신다.


마태복음 24장

종말에 나타날 재난의 징조들. 불법이 성하고, 환난이 일어나고, 거짓 그리스도가 일어난다. 무화가 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마지막 때는 아무도 모른다.


마태복음 25장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해 종말을 준비하라 하신다. 달란트 비유를 통해 종말에 준비하라 하신다. 종말에는 모든 것을 판단되고 구별될 것이다.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내(예수)게 한 것이라 하신다. 의인들은 영생에 악인들은 영벌에 들어간다.


마태복음 26장

예수를 죽이려고 의논한다. 베다니 마리아가 옥함의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다. 유다가 대제사장에게 가서 예수를 팔고 은 삼십을 받는다. 마지만 만찬이 행한다. 만찬을 마치고 감람산으로 올라가신다.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군인을 이끌고 찾아와 배신의 키스를 한다. 예수가 공회에 잡혀간다.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한다.


마태복음 27장

공회는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긴다. 유다가 스스로 목매어 죽는다. 빌라도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준다. 로마 군병들이 예수를 희롱한다. 골고다로 가는 길에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다. 십자가에서 운명하신다. 아리마대 요셉이 자신의 무덤에 예수를 장사한다. 경비병이 무덤을 지킨다.


마태복음 28장

안식일이 지난 첫날 새벽 예수가 부활한다. 여인들이 무덤에 찾아와 천사를 본다. 예수는 여인들에게 무서워하지 말라며 갈릴리고 가라 명한다. 경비병들이 부활 사실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리자 대제사장들이 돈을 주며 제자들이 시체를 도둑질 해갔다고 말하라 한다. 갈릴리의 산에서 제자들에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제자 삼으라 명한다.


룻기 개요 및 장별 요약

 1. 룻기 개요

룻기는 사사 시대라는 시간적 배경과 베들레헴과 모압이라는 공간적 배경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룻기의 목적은 다윗왕의 조상이 누구인가를 밝히는 데 있다. 궁극적으로 룻기는 하나님의 은혜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는 두 사람의 헌신을 통해 소망을 얻게 된다는 내용이다.

룻기는 수많은 문예가에게 영향을 줬다. 단체를 룻을 '다윗의 조상으로 온유한 여인이요 이삭 줍는 소녀'라는 표현한다. 괴테는 룻기에대해 구약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은 스토리'라고 말했다. 텅 빈 삶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채워져 가는 한 여인을 통해 암울한 사사 시대에서 번성한 왕국 국가로의 전환점이 룻이라는 한 여인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밝힌다.

2. 룻기 장별 요약

룻기 1장

베들레헴에 살던 엘리멜렉 가족은 흉년이 들자 고향을 버리고 모압으로 이사를 한다. 가족은 아내 나오미와 아들 말론과 기룐이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엘리멜렉이 사망하고 두 아들과 나오미만 남는다. 또 말론과 기룐도 결혼을 한다. 하지만 두 아들 모압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죽고 나오미와 두 며느리만 남게 된다. 두 며느리의 이름은 오르바와 룻이다. 나오미는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 어려움에 봉착한다.

나오미에게 고향 베들레헴 소식이 들려온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다시 회복되었다는 이야기다. 고향 소식을 들은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된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8절)고 말한다. 그러나 두 며느리는 거절하고 나오미를 따라간다. 그러자 잠시 후 나오미는 다시 두 며느리를 설득하여 고향으로 돌라가라 말한다. 결국, 동서인 오르바는 이별의 키스를 하고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15절) 간다. 하지만 롯을 돌아가지 않는다. 그녀는 이렇게 나오미에게 말한다.

  • 룻기 1:16-17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결국 두 사람은 베들레헴으로 간다. 나오미가 베들레헴 도착하자 수많은 여성이 나와 나오미를 환영 아닌 환영을 한다. 나오미는 자신을 나오미(기쁨)라 부르지 말고 말라 하여(고통)라 부르라고 말한다.

룻기 2장

2장이 시작되자 곧바로 엘리멜렉의 친족인 보아스가 소개된다. 놀랍게 베들레헴에 온 룻은 어머니 나오미에게 부탁해 밭으로 가서 이삭을 줍겠다고 한다. 모세의 율법에는 농사를 짓는 사람이 수확할 때 밭의 모든 곡식을 깨끗하게 거두지 않도록 당부한다. 밭의 모퉁이의 곡물을 남기거나, 베다가 바닥에 떨어진 것들은 줍지 않게 한다. 그러한 것들은 가난한 이들이 가져가도록 했다.

  • 레위기 19:9-10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룻이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줍기를 할 때 마침 보아스가 일하는 하인들을 찾아오고 룻을 발견한다. 사환에게 누구냐고 묻자 나오미와 함께 모암에서 온 여인이라고 말한다.  룻을 긍휼히 본 보아스는 다른 밭에 가지 말고 여기서 주우라고 말하고, 일꾼들에게는 이삭을 일부러 흘리라고 이른다.

이삭줍기를 마친 룻은 나오미에게 간다. 나오미는 너무 많은 이삭을 보며 깜짝 놀란다. 룻이 그동안의 사연을 이야기해주자 나오미는 보아스를 소개하고 그에게 감사를 표한다. 그렇게 추수의 시가가 거의 끝나간다.

룻기 3장

추수기가 거의 마칠 때가 되자 나오니는 룻을 부른다. 추수가 마무리되면 곡식을 한곳에 모아 타작을 한다. 이날은 기쁨과 잔치의 날이다. 나오미는 이날 보아스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타작마당 한 쪽에 자리한 텐트에서 잠을 잔다는 것을 알고 룻을 그곳으로 보낼 계획을 짠다. 룻은 나오미가 시키는 대로 텐트 안으로 들어간다. 잠을 자다 인기척에 놀란 보아스가 룻을 발견한다. 룻은 보아스에게 기업 무를 자임을 밝히고 받아 주라고 말한다. 보아스는 지금은 때가 아니라 많은 곡식을 주며 돌려보낸다.

룻기 4장

보아스가 룻의 청을 받고 자신보다 우선순위가 있는 사람들에게 엘리멜렉의 기업을 무를지를 묻는다. 처음에 그가 기업을 무르겠다고 했지만, 사정을 이야기하고 아이가 자라면 모두 돌려주어야 한다고 하자 손해 보는 장사라며 하지 않겠다고 한다. 그는 기업을 무르지 않겠다는 증표로 자신의 신을 벗어 준다. 결국 보아스가 엘리멜렉의 기업을 무르기로 하고 룻과 결혼을 한다. 얼마 후에 룻이 아이를 낳고 이름을 오벳이라 한다. 오벳은 다윗의 아버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는다.

시편 1편

 1. 시편 1편 개요

지혜시, 토라송 1편은 15편, 19편, 119편과 함께 토라시편으로 불린다.

시편 1편은 시편 전체의 서문이다. 짧지만 강력한 내용을 담고 있다.  첫절부터 마지막절까지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를 따라 작시되었다. 1편 전체는 의인과 악인을 비교하고, 대칭적으로 보여주며, 비교 한다.

시편 1편 구조

1-2절 복있는 사람

3절 복된 사람의 특징

4-5절 악인들의 운명

6절 의인과 악인의 종말


2. 시편 1편 주해

1-2절 복있는 사람

  • 시편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1-2절의 구조는

복있는 사람은 
않는다. 
1)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2) 죄인들의 길을 걷지
3) 오만의 자들의 자리에 앉지 
한다.
1)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2) 율법을 주야로 묵상

2절에서 악인의 특징은 점진적 변화이다. 그는 처음에 사람들의 꾀를 듣는다. '따른다'는 말은 한 번 시도해 본다는 말이다. 히브리어는 '동행한다'는 뜻의 할라크가 사용된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할라크)는 말과 같다. 동행은 모방, 따라 해보는 것을 말한다. 아직 몸을 담지 않는 작은 시도이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두 번째 악인은 죄인들의 길을 걷는다. '걷는다'는 단어 데레크(דֶּרֶךְ)는 '행동하다' '길' '도로' 등의 의미다. 창 6:12에서는 '행위' 창 38:12에서는 '길'로 번역된다. 길은 반복적 행위를 뜻한다. 반복된 습관에 의해 몸에 행위가 배인 상태다. 몇 번 연습?을 한 악인은 이제 그것을 본업으로 삼고 악한 행동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 습관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반복된 행동이 습관이 되고, 습관은 운명이 된다.

마지막 '오만하다'는 뜻는 '조롱하다'는 뜻이다. 히브리어 루츠(לוּץ)는 경멸하다. 조롱하다. 는 뜻이다. 누구를 향한 경멸일까? 순진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경멸이다. 악을 행하고, 도둑질을 해보니 쉽게 돈을 벌고 일이 풀리는데 어리석게 정도의 길을 걷고 말씀대로만 살려 하는 이들을 바보라고 조롱하고 경멸하는 것이다.

이제 2절에는 반대로 의인이 어떤 사람인지 설명한다. 그는 율법을 즐거워하고 묵상한다. 즐거움은 마음의 상태며, 묵상은 즐거움의 표출로서 행위이다. 율법이 너무나 좋기 때문에 그것을 계속 묵상한다.

3절 복된 사람의 특징

  • 시편 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3절은 2절의 구체적인 설명이자 서론인 1-2절의 결론에 해당된다. 1절에서 악인의 마지막 장명은 오만의 자리에 앉는 장면이었다. 고착되어 더 이상 헤어나오지 못한 상태다. 3절의 의인도 고정된 상태로 그려진다. 하지만 장소가 현격하게 다르다. 그는 나무이며, 생수의 강이 흐르는 강 곁에 옮겨 심겨졌다. '심은'의 히브리어 '샤탈(שָׁתַל)은 누군가에 의해 옮겨 심겨졌다는 뜻이다. 나무는 홀로 움직이지 못한다. 하지만 염려없다. 자신에게 필요한 물과 양분이 충분이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원하고 주야로 묵상하면 어떤 결론에 이를까?
1) 철을 따라 열매를 맺는다.
2)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다.
3)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다.

'맺는다' '마르지 않는다' '형통하다'는 세 동사가 사용된 것은 1절의 악인과 대칭을 이루기 위한 것인지 않실치 않으나 확실히 강한 자극을 준다. 

  • 열매를 맺는 것은 나무의 목적에 다다른 것이다. 존재의 목적에 합당한 삶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  이사야 5장 4절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 요한복음 15장 5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잎사귀는 종종 열매 없음의 증표지만 여기서는 그늘을 만드는 잎사귀, 또는 나무의 싱싱함을 나타내는 잎사귀이다. 즉 왕성한 활동을 하게 될 것이다.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합당한 삶을 살아낸다는 뜻이다. 요셉은 감옥에서 형통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갔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4-5절 악인들의 운명

4-5절은 강한 부정으로 시작된다. 4절은 3절에 나타난 의인들의 특징에 대해 반대적인 악인들의 특징을 소개한다. 3절과 동일하게 세 가지 특징으로 정의한다.

악인들은 
1)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2)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
3)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한다.

의인은 나무지만 악인들은 겨다. 나무는 바람에 견디지만 겨는 날아간다. 여기서 바람은 하나님의 심판이다. 시편 1편 3-5절은 마탭고음 7장 24-27절과 매우 닮아 있다.

  • 마태복음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 마태복음 7: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 마태복음 7: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 마태복음 7: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심판을 견디는 것은 세상의 지혜와 힘이 아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함으로 오는 하늘의 지혜이다.

6절 의인과 악인의 종말

마지막으로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을 보여준다.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할 것이다.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은 열왕기의 다윗의 길과 여로보암의 길과 비교될 수 있다.
  • 역대하 17장 3절 여호와께서 여호사밧과 함께 하셨으니 이는 그가 그의 조상 다윗의 처음 길로 행하여 바알들에게 구하지 아니하고
  • 열왕기상 15장 34절 바아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였더라


시편 23편

1. 개요

신뢰의 시

시편 23편은 시편 중의 시편이요 가장 사랑 받은 시편이다. 전체 성경을 통털어서도 가장 사랑 받는 시편이다. 헨리 워드 비처는 '시편의 나이팅 게일'이라 불렀고, 찰스 스펄전은 '시편의 진주'라는 표현을 아까지 않았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은 시편이다. 시편은 매우 단순하고 단백하다. 꾸밈이나 현학적 장치가 거의 문학적 상상력이 더해지기는 했으나 팔레스타인인의 일상적 소재를 사용했기 때문에 거부감 없이 누구나 공감을 일으킨다.

시편 23편에 담긴 내용은 일반적으로 아는 내용을 훨씬 뛰어넘는 역사적이고 신학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들로 가득차있다. 1절의 목자의 개념은 시편 23편 전체를 이끌고 있으며,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상징이다. 필자는 아래와 같이 23편의 분석했다.

시편 23편의 구조

1-3절 목자이신 여호와
4절 강한 용사이신 여호와
5-6절 잔치를 베푸시는 여호와


시편 23편 독법

시편 23편은 바벨론 포로의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 시편의 편집시기가 바벨론 포로 이기도 하지만 이스라엘은 항상 포로적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23편 역시 적들에게 쫓기는 상황에서 극한 두려움과 공포의 상황에 놓여 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저자의 현재형이다. 이후의 모든 동사들이 미완료, 즉 미래형을 사용한 것을 볼 때 장차 이루어질 구원과 회복에 대한 꿈과 희망을 노래한 것으로 봐야 한다.


1-3절 목자이신 여호와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מִזְמֹ֥ור לְדָוִ֑ד יְהוָ֥ה רֹ֝עִ֗י לֹ֣א אֶחְסָֽר׃


1절은 히브리인들이라면, 아니 목자와 양의 관계를 조금이라고 아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구절이다. 1절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단어에 모두 들어가 있다. '부족함이 없다'는 '로 헤세르'는 미완료 형이라는 사실에 주의할 필요도 있다. 23편의 한 동사만을 제외한 모든 동사는 미완료, 즉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에 대한 것이다. 유일한 현재형은 5절로 '내 잔이 넘친다'는 표현이다. 마치 고난의 광야를 걸어갈 때 집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니 아직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지금 기쁜 마음으로 광야의 길을 걷는 것과 같다.


다윗은 분명하게 선언한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기 때문에 결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라며 하나님께 신뢰를 고백하고 있다. 1절은 다윗 혼자만의 고백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의 고백이기도 하다.


히브리인들에게 목자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긴밀한 연관성을 갖는 상징적 존재이다. 산양이나 들양이 아닌 일반 양들은 지구의 창조 이후 단 한 번도 사람을 떠나 독립적으로 살아온 적이 없는 기이한 동물이다. 양에게는 야생성이 거의 없다. 목자가 양들을 돌보지 않으면 얼마 가지 않아 죽고 만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성경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서 목자와 양으로 자주 표현된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을 향하여 '나는 너희 목자다'라고 표현하기까지 한다. 신구약을 막론하고 성경 전반에 이러한 목사와 양의 관계가 설정되어 있다.


  • 에스겔 34장 15절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을 누워 있게 할지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시편 28장 9절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그들의 목자가 되시어 영원토록 그들을 인도하소서
  • 시편 80장 1절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
  • 요한복음 10장 11절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 요한계시록 7장 17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목자의 역할


목자는 양의 모든 것을 책임진다. 먹을 것, 쉴곳, 잠잘 곳 등을 모두 책임진다. 이뿐 아니라 다른 늑내나 사자들이 공격해 올 때도 목자는 그들과 대항하여 자신들을 양의 지킨다. 목자는 몇 달에 한 번씩 목장을 옮긴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목초지가 바뀌기 때문이다. 양들이 풀을 먹는 속도를 풀이 자라는 속도를 따르지 못하기 때문에, 온도와 날씨의 변화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옮겨 다닌다. 4절에서 이것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2절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부족함이 없다'는 서술의 이유를 2절에서 제공한다. 2절은 1절의 설명이자 구체화이다. 풀밭과 물가는 양들이 거하는 최적의 장소이다. 양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목자는 이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그들을 그곳으로 인도한다. 다윗은 목자가 해야할, 마땅히 양들을 위해 제공해야할 것을 제시한다.


목자가 제공하는 것


'푸른 풀밭'(여성형 복수) '쉴 만한 물가'(남성형 복수)는 목자가 제공하는 것이다. 이 구절은 3절과 짝을 이룬다. 다윗은 여호와가 자신에게 영적 양식을 제공함으로 자신의 영혼을 소생시키고, 의의 길로 인도하여 생명에 이르게 할 것임을 확신한다. 마지막 장소는 6절에 나온대로 '여호와의 집'일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야 한다. 하지만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마침내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푸른 풀밭과 물가가 아니다. 그래서 시편 23편은 외형적 놀라운 평안함과 대비되어 내면에는 엄청난 긴장과 초조함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여성형과 남성형을 사용하여 짝을 완성함으로 완전함을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누이시다 인도하시다


'누이시다'는 히필형 동사는 히브리인들이 음식을 먹을 취하는 자세다. 우리나라는 앉아서 먹기 때문에 의아해 보이지만 음식을 먹는 것은 생존을 너머 평안과 직결된다. '인도하다'는 피엘형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고한 신뢰가 담겨있다. 히브리어에서 히필형은 '사역 능동'의 의미며, 피엘형은 '강조 능동'이다. 다윗은 두 형태를 사용하며, 일반 강조에서 강한 강조로 넘어가고 있다.


쉴만한 물가는 몇 가지 의미를 전제한다. 먼저는 '잔잔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고요있는 물은 아니다. '흐르는 물'이다. 잔잔하게 흐르는 물가란 뜻이다. 양이나 염소 등은 물이 거세게 흐름면 잘 마시지 못한다. 입과 코가 평평하게 붙어 있어서 물이 요동치며 코로 물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둘째는 쉼이란 단어가 종종 성경 안에서 평안의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김정우는 대상 28:2을 인용하며 하나님의 성전일 가능성을 제공한다. 이러한 주장이 합리적인 이유는 성전 또는 하나님의 보좌는 물이 흘러 나오는 곳이기 때문이다. 에스겔서와 계시록에도 이러한 상징성을 활용하여 생명수가 성전과 보좌에서 흘러나옴을 강조한다.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은유적으로  '쉴만한 물가'로 표현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6절의 '여호와의 집'과 잘 어울린다.


  • 에스겔 47장 1절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 내리더라
  • 요한계시록 21:5-6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3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1-3절은 23편의 1연에 해당되는 단락이다. 1절에서 시작된 목자되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고백이 3절에서 일단 마무리 된다.


소생시킨다는 표현은 돌이킨다는 뜻이다. 히브리어 슈브(שׁוּב)는 영어리의 return과 흡사하다. 180도 완전히 되돌아 간다는 뜻이다. 또는 원래의 그 모습으로 되돌려 놓는다는 뜻이다. 부흥하다는 뜻과 정확히 일치한다. 다윗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혼(나프쉬)을 처음의 상태, 원래의 자리로 돌이킬 것을 확신한다.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는 매우 중요한 상징을 갖는다. 다윗은 자신의 영혼을 소생키는 것이 하나님의 명예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믿음의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기도했다. 자신들이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께 속한 자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수치를 당하고 모욕을 당하면 하나님의 이름에 수치가 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여호수아 7장 9절 가나안 사람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 열왕기상 8장48절 자기를 사로잡아 간 적국의 땅에서 온 마음과 온 뜻으로 주께 돌아와서 주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신 땅 곧 주께서 택하신 성읍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성전 있는 쪽을 향하여 주께 기도하거든
  • 시편 79장 9절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 시편 106장 8절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셨으니 그의 큰 권능을 만인이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
  • 시편 143장 11절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살리시고 주의 의로 내 영혼을 환난에서 끌어내소서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시인을 구원하실 것이다. 시인은 그것을 확신하고 있다.


4절 강한 용사이신 여호와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4절은 시인의 현재 상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목자는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양을 인도하기 위해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야 한다. 그러나 시인은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확신한다. 왜냐하면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자신을 지켜 주기 때문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시인은 비록 자신이 성전으로 가기 위해 고난의 골짜기를 지나야 함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곳은 깊고 깊은 어둠이 지배하는 곳이며, 사망이 가득한 골짜기다. 즉 그곳은 산등성이나 산정산이 아니라 깊은 어둠의 골짜기다.


팔레스타인의 목자들은 계절별로 양들을 이끌었는데 종종 계곡과 산을 건너야 했다. 그것은 불가피한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내리면 큰 위기에 빠지기도 한다. 많은 양들이 죽기도한다. 아무리 예측해도 팔레스타인 날씨는 예측 불허다. 또한 골짜기를 지나는 동안 의외로 강도들이 매복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양들을 훔치기 위해 매목하고 있다 양들을 훔쳐가곤 했다.


시인은 이러한 위기적 상황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들이 두렵지 않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위기를 극복할 방법이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와 함께 하기 때문이고,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자신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1절에서 여호와를 '목자'로 표현하고, 이제는 직설적으로 목자되신 주님이 자신을 지켜줄 것을 확신한다. 그러므로 그는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안위하시는 하나님


안위한다는 표현은 위로하다는 뜻이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할 때(사 66:13), 침대가 나를 외로할 때(욥 21:4), 주께서 외로할 때(시 71ㅣ21, 119:82) 등에서 사용된다. 이러한 용례를 통해 김정우는 '힘을 줍니다'로 번역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말한다.


5-6절 잔치를 베푸시는 여호와


5절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상을 베푸시고


드디어 하나님은 시인에게 상(밥상)을 베푸신다. 그 상은 잔치상이 분명하다. 원수 앞에서 보란 듯이 잔치상을 베푸심으로 통쾌한 복수를 한다. 지금까지 원수들에게 쫓기고 내몰리는 상황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팔을 들어 승리를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 있을 때 하나님께 '광야에서 식탁을 베푸실 수 있으랴'라고 하나님을 불신하고 조롱했다.

  • 시편 78장 19절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식탁을 베푸실 수 있으랴

시인은 목자되신 여호와가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원수 앞에서 잔치상 베푸심으로 푸른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실 것을 확신한다. '베풀다'는 동사는 미완료(미래)형이다.

이 구절을 좀 더 확대한다면 종말론적 환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의인들의 마지막 장면은 항상 잔치로 마무리 된다. 잔치는 기쁨과 보상, 회복을 의미한다. 천상에서의 어린양의 혼인 잔치로 계시록이 마무리 되듯 잔치는 모든 것의 회복을 전제로 한다.

기름을 부으시고


승리의 표는 잔치상과 더불어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기름을 왕이나 제사장에 붓는 기름이 아니라 잔치에 초대된 사람을 주인이 손님의 머리에 발라주는 기름이다. 팔레스타인은 귀한 손님에게 머리에 기름을 바름으로 최고의 대우를 했다고 한다.


'기름을 붓다'는 동사는 시편 23편에 사용된 동사 중에 유일하게 완료형(perfect)으로 사용된 동사이다. 히브리어 완료형은 과거에 이루어진 사건이 현재도 여전히 동일하게 유효한 상태를 말한다. 그러므로 현재형으로 봐도 무방하다.


기름을 성령과 하나님의 임재로 상징화 시킨다면, 비록 현재는 어둡고 암울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나에게 축제의 기분을 허락하셨다. 나는 지금 성령으로 충많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이처럼 우리는 시편 기자가 고요한 시기가 아니라 오히려 원수들에게 괴로움을 당하는 때에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표현하는 것을 발견한다. 자신의 임재와 공급을 통해, 하나님은 원수들에게 누구 편에 있는지를 보여준다. [트렘페 롱맨 3 <틴테일 구약주석> CLC]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토브와 헤세드


이제 마지막으로 나아간다. 선하심(토브)과 인자(헤세드)가 따를 것이라 확신한다. 토브라는 히브리어는 창세기 1장에서 사용된 '보시기 좋았더라'에 사용된 단어로 하나님의 행하심의 완전성을 전제하는 표현이다. 토브와 헤세드는 롬 8:28의 구절속에 잘 표현되어 있다.


  •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것이 모순처럼 보이고 부족해 보이지만 결국 하나님은 승리할 것임을 말한다.


여호와의 집


여호와의 집은 설명이 필요 없이 성전인 것을 알 수 있다. 시인이 그토록 갈망하고 가고 싶은 곳은 여호와의 집이다. 여호와의 집에 간다는 말은 장소의 개념이 아니다. 다시 하나님의 전에서 예배하는 것을 꿈구는 말이다. 확장시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어 아버지에 집에 거하기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징계의 시간이고, 고난의 시간이다. 하지만 마침내 하나님께서 자신을 다시 회복시킬 것이고, 아버지의 집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는다.




창세기 1장

1. 개요


창세기 1장은 창세기의 시작이자 서막에 해당합니다. 창세기를 읽을 때는 연대기적으로 읽으면 안 되고 반드시 출애굽의 관점에서 읽어야 합니다. 신약적 관점으로 읽으면 더욱더 좋습니다. 하여튼 창세기 1장은 바로의 질문인 '여호와 누구기에?'라는 질문의 답일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 그는 누구일까? 그 질문의 답이 창세기이고, 창세기 1장입니다. 창세기 1장을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든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2. 강해


1-2절 태초에 하나님

  •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창세기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처음에(베레쉬트)는 '처음'이란 뜻이다. 베는 히브리어 베트이며, 시간과 장소를 의미한다. 로쉬는 '머리''장자''처음' 등의 의미다. 베레쉬트에 무슨 심오한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처음'이란 뜻이다. 하지만 처음은 첫번째라는 뜻이 아닌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이란 의미로 '아루 오래된'이란 뜻이로 해석해야 한다. 모든 것이 없을 때 하나님은 '천지'를 만드셨다. 천지는 한 단어가 아니라 '하샤마임'과 '하 에레츠'로 그하늘들과 그 땅이다. 샤마임은 하늘의 복수형태이다. 이건 여러 하늘들이란 뜻이 아니라 고대 히브리인이 갖는 하늘에 대한 관념이다. 그들은 하늘들이 최소한 3층이 있다고 믿었다. 7단계로 주장하는 이들도있다.


창세기 1장을 유심히 읽어보면 지구의 창조가 없다. 곧바로 빛이 있고, 2일째는 물과 물 사이를 갈라 공간을 만든다. 과도하게 문자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이들은 대단한 오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말하고 싶다. 필자는 1절에 '그 땅(에레츠)'를 지구의 창조로 본다. 하여튼 1장의 창조는 대단히 상징적이다.


2절로 넘어가면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다. 혼돈은 질서가 없다는 뜻이며, 공허는 텅 비어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1장의 창조가 무에서 유로, 무질서에서 질서로 나아가는 것을 본다면 혼돈과 공허는 처음을 뜻하며, 아직 사람이 살 수 없는 원시적 상태임을 말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짓고 바벨론으로 끌려 갈 때 이 단어가 사용된다. 성경 속에서 '공허'와 '혼돈'은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 또는 저주의 결과로 자주 사용된다.


  • 예레미야 4:23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 이사야  24:1 보라 여호와께서 땅을 공허하게 하시며 황폐하게 하시며 지면을 뒤집어엎으시고 그 주민을 흩으시리니
  • 이사야 34:11 당아새와 고슴도치가 그 땅을 차지하며 부엉이와 까마귀가 거기에 살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 위에 혼란의 줄과 공허의 추를 드리우실 것인즉
  • 이사야 45:18 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창조의 관점에서 공허와 혼돈은 저주가 아닌 시작의 상태로 읽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죄로 인하여 인간들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때도 저주의 사용된다는 점은 창조의 시작과 저주는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두 절을 통해서 하나님은 무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음을 읽는다. 또한 언제든지 다시 태고적 혼돈과 공허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인간의 본질이 흙이듯 창조전의 모습은 혼돈과 공허다. 창세기 7장에서 홍수로 인해 혼돈의 세계가 되었다는 점은 인간의 죄가 반(反)창조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3-5절 첫째날의 창조


  • 창세기 1: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 창세기 1: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 창세기 1: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첫째날의 창조는 '빛(오르 אור)'이다. 이 빛은 후에 나오는 광명체와는 성질이 다르다. 학자들 간의 적지 않은 논란의 중심에 3절의 빛이다. 태양이 없는 상태에서 빛으 가능할까 때문입니다. 최근들어 학자들은 북극의 오로라처럼 태양이 없어도 빛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과연 모세는 태양 없는 빛을 말하고 싶어서 3절을 넣은 것일까? 아니라고 본다. 출애굽의 재앙의 하나가 흑암 재앙이라는 점은 빛의 아들이 파라오가 가짜 신임을 드러내는 재앙이자 심판이었다. 빛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3절의 빛을 현대인의 관점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출애굽의 관점에서 읽는 것이 더 우선시 되어야 한다.


부름은 곧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존재가 있다. '빛이 되었다'가 아니라 '빛이 있었다(ויהי־אור)'는 과거형(히 미완료)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말씀은 곧 존재이다. 말씀이 전부라는 사실을 말한다. 출애굽은 신관념에 대한 혁명적 전환을 가져왔다. 애굽은 보이는 형상을 신이라 불렀다. 고대 사람들은 신이 보여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를 죽었다. 하여튼, 히브리인들은 보이는 신은 가짜이고, 말씀하시는 신이 진짜임을 믿어야 했다. 보는 종교에서 듣는 종교로의 혁명적 변환이 일어난다.


보시기에 좋았다. '좋다'는 히브리어 토브는 '선''완전' 등에 사용된다. 하나님의 완전성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피조물은 그 존재 자체로 완전한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족'해야 한다. 참 신앙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신뢰이자 만족이며 감사이다. 죄는 하나님의 베품에 대한 불만족이다. 


빛과 어둠을 나누사. 창조는 섞인 것을 분리하여 나눈다. 하나님은 계속하여 구분하여 질서를 세우고, 모든 것을 각자의 소명을 준다. 낮과 밤을 분리하듯, 이후에 물과 물을 분리하고, 물과 땅을 구분 짓는다. 구분은 차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소명을 위한 것이다. 태양은 낮을 빛을 발하고 낮을 주관한다. 달은 밤을 주관한다. 이처럼 구분은 모든 것을 체계적으로 세워나가는 건축술이다.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하나님이 부르시면 이름이 된다. 이름은 곧 존재의 규명이자 한계을 설정한다. 모든 존재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 하나님은 그들의 이름을 부름으로 이름대로 살아갈 소명을 받는다. 이것이 이름의 신학이 갖는 핵심이다. 성경 안에는 이름을 부르는 것이 종종 선택 받은 백성됨과 구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증명한다. 후에 이 부분은 따로 [ #이름의신학 ]이란 주제로 따로 다룰 것이다.


  • 이사야 40장26절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 이사야 41장25절 내가 한 사람을 일으켜 북방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을 부르는 자를 해 돋는 곳에서 오게 하였나니 그가 이르러 고관들을 석회 같이, 토기장이가 진흙을 밟음 같이 하리니
  • 이사야 65장1절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 사도행전  2장21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 고린도전서  1장2절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첫째 날은 빛을 창조하심으로 어둠과 구분하신다. 빛이 없다면 어둠도 없을 것이다. 창조는 존재하게 함으로 무를 드러낸다. 무는 '아무 것도 없다'가 아니라 그냥 무인 것이다. 존재 만이 무를 드러내며, 빛을 있어야 어둠을 드러낸다. 요한은 자신의 모든 신학을 '빛'의 개념에서 설명한다는 점도 유의하여 볼 만한다. 하나님은 빛이고, 예수님을 빛으로 세상에 오셨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빛의 자녀들이다.


  • 요한복음 1장 5절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 요한복음 3장 19절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 요한복음 8장 12절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 요한1서 1장 5절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  데살로니가전서 5장 5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6-8절 둘째날의 창조


  • 창세기 1:6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 창세기 1: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 창세기 1:8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둘째 날의 창조는 궁창 즉 공간이다. 공간은 물과 물 사이에서 생겨난다.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은 위의물과 아랫물 사이에 존재하는 불안정한 장소이다. 홍수 때 두 장소의 물이 합해진다. 하지만 그 공간은 하나님께서 붙드시므로 안전하다. 무엇이 우리를 안전하게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가. 공간은 인간의 불안정한 인간의 실존을 표명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붙듬으로 안전하게 된다.


하나님은 공간을 하늘(샤마임)이라 부른다. 둘째 날의 창조는 섞인 것들을 분리함으로 공간을 만든다. 결국 이러한 이러한 공간은 다시 채워진다. 창조는 텅빔에서 채움으로 나아간다. 사람을 창조한 이후 이 땅에 번성하고 충만하라는 의미는 창조를 완성하라는 의미다.


9-13절 셋째날의 창조


  • 창세기 1:9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 창세기 1: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 창세기 1:11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 창세기 1:12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 창세기 1:1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셋째 날의 창조는 출애굽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 날은 빛을 만드시고, 둘째 날은 물을 갈라 공간을 만들고, 이젠 아랫물속에 있는 땅을 불러 내신다. 9절에 등장하는 뭍이란 표현은 히브리어로 '하바바샤브'로 말라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단어는 출애굽기 4:9과 요나 1:9에서 사용되어 사람들이 발을 딛고 있는 땅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 있을 때 절망하는 이스라엘을 위해 물 속에서 '마른  땅'을 드러내신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다. 땅은 하나님의 구원의 상징이다. 에덴 동산은 물 속에서 불러낸 땅 위에 세워진다.


10절에서는 이 뭍을 '땅(에레츠)'로 부르신다. 에레츠는 지구라는 의미와 함께 이스라엘이 조상들로부터 물려 받은 기업으로 자주 번역되는 단어로 상속되어야할 재산의 개념이 강하다. 가나안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받은 기업(에레츠)이다. 이스라엘을 에레츠이스라엘라 부르는 이유이다. 땅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그 선물을 망각하면 안 된다.


땅에게도 소명이 주어진다. 땅은 씨(제라) 맺는 식물을 내야 한다. 씨는 다음 세대를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끊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각기 종류대로는 분리와 나눔의 법칙에 속한다. 인간의 성장과 비교하면 창조의 순서와 매우 닮아있다. 처음엔 아무런 기능도 없는 줄기세포지만 분열하는 과정을 통해 각지 다른 세포로 성장한다.


14-19절 넷째날의 창조


  • 창세기 1:14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 창세기 1:15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 창세기 1:16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 창세기 1:17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 창세기 1:18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 창세기 1:19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넷째 날부터는 이전의 삼일 창조와 대칭을 이루며 채움으로 이어간다. 넷째날은 첫날과 대응한다. 첫날 빛을 만드신 하나님은 넷째날 공창에 광명체를 만드심으로 빛을 발하게 하신다. 넷째날이 되서야 드디어 우리가 아는 공전과 자전을 통해 자연의 법칙이 완성된다. 그러므로 계절과 나로가 해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징조는 약간 모호다. 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뜻을 포함하지만 어떤 의인지 부정확하다.


'징조(오트 אוֹת)'라는 던어는 영어 sign과 다른 말이 아니다. 표시 또는 징조로 해석되는 평범한 단어다. 마태는 이 구절에서 종말의 징조를 가져왔느지 모를 일이다.


  • 마태복음 24장 30절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광명체들이 하는 일은 빛을 비추는 일이다. 빛을 비춤으로 땅의 만물은 형상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빛이 없으면 모든 것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16절의 주관한다는 말은 통치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궁창의 빛 아래 두신다. 인간은 하늘의 지배를 받지 않지만 영향을 받는다. 비가 내리면 비를 피할 수없고, 어둠이 찾아오면 막을 방도가 없다.


'궁창에 두었다'(14, 17절)는 장소적 의미로 그곳을 벗어나면 안된다는 말이다. 태양은 자신의 길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가야한다. 이것이 태양의 운명이다. 운명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소명에 관련된 것이다. 넷째 날도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20-23절 다섯째날의 창조


  • 창세기 1:20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 창세기 1:21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 창세기 1: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 창세기 1:2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다섯 째날은 둘째 날과 대응한다. 둘째날은 물과 물 사이를 나누어 공간을 만들었다. 하지만 다섯 째날은 아래의 물과 물과 사이의 공간을 채우신다. 아랫물에는 물고기로 채우시고, 위의 궁창은 새들로 채우신다.


넷째 날에 번성이란 단어가 네 번이 사용되었다는 점은 더 계속하여 충만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아직 하나님의 창조는 완성되지 않았다. 남겨진 부분을 채워가는 것은 인간의 일이다. 우리는 여기서 광명체 등은 '비추라'는 소명의 의무가 주어지지만 생물에 대해서는 번성하여 충말하라는 다른 의미의 소명이 주어짐을 발견한다. 교회는 생명의 공동체이므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해야할 의무를 갖는다. 교회 성장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것이다.


24-31절 여섯째 날의 창조


  • 창세기 1:24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 창세기 1:25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여섯 째날은 동물과 사람의 창조이다. 여섯 날은 땅 위에 존재에 대해 이루어지며, 서로 닮아 있다. 먼저 동물은 식물처럼 땅에게 명령한다. 짐승도 땅에게 명령하여 종류대로 내라 하신다. 짐승과 가축, 등은 용어의 차이로 야생과 사람의 손에 길러질 가축을 대변한다. 이 또한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 창세기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 창세기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 창세기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창세기 1:29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 창세기 1: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 창세기 1: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마지막 사람의 창조는 특이하다. 지금까지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며, 이미 존재한 것으로부터 확장되어 창조된 것이다. 물론 사람도 그렇다. 하지만 창세기 기자는 의도적으로 인간은 하나님께 특별한 관심과 합의, 사랑의 결과로 창조 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형상과 모양(첼렘과 테무스)은 이후 번역을 살펴도 크게 큰 차이를 느낄 수 없는 모호함이 존재한다. 아마도 비슷한 단어를 통해 강조 또는 언어유희를 사용했을 것이라 학자들을 추측한다. 핵심은 '우리의 모양과 우리의 형상' 즉 '우리'라는 표현에 방점에 찍힌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되었다는 점이다. 이전의 피조물 설명과는 상당히 다른 표현이다.

사람의 창조 목적은 지금까지 지은 생물들을 다스리게 하는 것이다.(26절 하)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 창조 된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명한다. 이것은 동물의 창조와 비슷하다. 하지만 사람은 '땅을 정복하라'는 명령과 ...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명령이 추가된다. 즉 생물의 지배권을 갖는다는 말이다.

또한 셋째 날 창조 된 채소가 사람들의 먹을거리가 된다. 육일째의 창조는 동물에게도 사람에게도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표현을 두 번 사용함으로 둘째 날에 빠진 '보시기에 좋았더라'를 추가함으로 7번을 채운다. 이렇게 육일의 창조는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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