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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장 동방박사의 방문

 1. 마태복음 2장 개요

마태복음 2장의 예수의 탄생과 동방박사들의 방문이 소개된다. 동방박사들이 가고 난 후 헤롯이 베들레헴 주변의 두살 아래의 아이들을 학살하는 하는 사건을 소개한다. 이후 헤롯이 죽자 아들 아켈라오가 다시 유대의 왕이 되자 요셉은 가나안에 머물기를 두려워하여 갈릴리 나사렛 동네로 돌아간다. 2장은 아래와 같이 분석했다.

  • 1-12절 동박박사들의 경배
  • 13-18절 헤롯의 유아학살사건
  • 19-23절 애굽에서 갈릴리로


2. 강해

1-12절 동박박사들의 경배

  • 마태복음 2: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 마태복음 2: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 마태복음 2: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 마태복음 2: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 마태복음 2:5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 마태복음 2: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 마태복음 2:7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 마태복음 2:8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 마태복음 2: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 마태복음 2:10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 마태복음 2: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 마태복음 2:12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헤롯 왕 때에

2장은 헤롯 왕때에 시작한다. 헤롯은 이두매 사람으로 마카비 시대에 에돔 지역에 사람던 사람들을 강제적으로 할례를 시켜 반유대화 시킨 사람들이다. 당시 이두매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부러워하는 동시에 적대시했다. 자신들의 열등한 신분을 만회하기 위해 온갖 비열한 방법을 사용했다. 아버지 헤롯이 로마에 돈을 주고 입지를 다지고, 헤롯대제가 유대지역의 왕위를 받게 된다. 신약에 등장하는 헤롯들이다. 헤롯 안티파터 1-2세는 등장하지 않고 아켈라오 세대는 이름만 몇 번 등장한다. 헤롯 아그립바1세가 예수가 '여우'라 부른 사람이다. 아그립바로 번역된 헤롯은 헤롯 아그립바 2세로 사도행전 바울과 이야기한다. 마태복음 2장은 헤롯대제를 말한다.

헤롯 안티파터 1세

헤롯 안티파터 2세

헤롯대제(예수님 탄생)

아켈라오-헤롯 안디바-빌립2세

헤롯 아그립바1세(공생애 기간)

헤롯 아그립바2세(바울, 사도행전)

헤롯 왕 때라는 표현은 로마의 식민지 아래의 암울한 시대적 배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다윗의 후손이 아닌 이두매인에의해 지배 당하는 유대인들의 목자 없는 시대이다. 헤롯 안에는 이두매인들의 열등감과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하여 잔인하게 가족들까지 학살하는 폭력성이 공존하는 인물이었다.


동방박사들의 방문

동방막사는 마고스(μάγος)인데 현대의 과학자, 인문학자, 천문학자, 사제 등이 조합된 인물이다. 이러한 조합은 중세까지 엄격하게 분리되지 않았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이르러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말한다.

동방 박사들의 말은 헤롯과 예루살렘을 소동케했다. 이미 헤롯 왕이 엄연히 있는데 유대인의 왕에게 경배하러 왔다는 소식은 경악스러운 것이었다. 소동하다는 표현은 트랏소(ταράσσω)마태복음 14:12에서 괴성을 지르고 미친듯이 날뛰는 상태를 말한다.


선지자로 기록된 바

헤롯은 곧 댜제사장고과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묻는다. 그러자 그들은 너무나 쉽게 미가 5:2을 인용하여 베들레헴이라 말한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이다.

  • 마태복음 2: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 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마태복음의 인용은 70인경에서 가져온 것이다. 70인경 미가 5:2과 마태복음을 비교하면 완전히 일치하지 않고 응용하여 변형했음을 알 수 있다.

  • LXX διὰ τοῦτο δώσει αὐτοὺς ἕως καιροῦ τικτούσης τέξεται καὶ οἱ ἐπίλοιποι τῶν ἀδελφῶν αὐτῶν ἐπιστρέψουσιν ἐπὶ τοὺς υἱοὺς ισραηλ
  • 마 2:6 Καὶ σύ, Βηθλέεμ γῆ Ἰούδα, οὐδαμῶς ἐλαχίστη εἶ ἐν τοῖς ἡγεμόσιν Ἰούδα· ἐκ σοῦ γὰρ ἐξελεύσεται ἡγούμενος, ὅστις ποιμανεῖ τὸν λαόν μου τὸν Ἰσραήλ.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예수의 탄생을 성경이 이미 기록하고 있고, 예언했음에도 그들은 아무도 관심이 없다. 심지어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을 찾아 경배하러 갈 때도 아무도 동행하지 않는다. 율법을 가지고 있고, 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사용하지 않는, 존중하지 않는 이들을 발견한다.


헤롯의 술수

헤롯은 자신을 가장한다. 그는 동방박사들에게 만약 찾거든 자신에게도 말하여 자신도 경배하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는 과연 거짓의 사람이며 악의 사람이다. 그는 후에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죄없는 수많은 아이들을 학살할 것이다.


동방박사들의 경배

박사들이 예루살렘을 나와 베들레헴으로 향할 때 다시 별이 그들을 인도한다. 성경 안에서 별은 종종 하나님의 천사나 그와 비슷한 신적인 존재들을 표현할 때 사용된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R.T 프랜스는 별의 뜨고 짐은 사람의 운명과도 상관이 있음을 잠깐 언급하고 지나간다. 분명 의미 있는 일이나 여기서는 그냥 넘어가자. 별은 베들레헴의 마구간으로 인도했을 것이다. 그곳에 아기 예수가 태어나 뉘어져 있었다.

박사들은 아기 예수를 발견하고 경배한다. 가져온 보배 함을 열어 황금, 유향, 몰약을 예물로 드린다. 황금은 왕권을, 유향은 제사장직을, 몰약은 십자가의 죽음을 상징한다고 한다. 좀 너무 과한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은 어디에도 지지를 받지 못한 이후의 교부들이 헬라 적 전통 아래에서 해석한 것이다. 당시 헬라의 신이나 왕들에게 경배할 때 황금과 몰약을 드리는 것이 예의라고 한다. 이유야 어떻든 세 가지 예물은 당시로써 최고의 가치를 지는 사치품과 고가품이었다. 박사들은 아기 예수를 왕으로 경배했고, 예물도 왕에게 드리는 예물을 드린 것이다.

박사들의 경배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찰스 스펄전은 본문을 강해하면서 동박 박사들이 치렀을 무한한 희생을 강조한다. 그들은 수천 Km을 걸어왔다. 여행이 위험했던 시기에 그 길은 목숨을 담보로 한 위험한 여행이었다. 또한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것을 예수에게 드렸다. 최고의 경배이다. 그러나 진작 경배해야 할 유대인들은 아무도 경배하지 않았다. 요한복음은 1:11이 참으로 가슴에 와 닿는다.

  • 요한복음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동방박사들은 꿈에서 헤롯에게 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고향으로 돌아간다.


13-18절 헤롯의 유아학살사건

박사들이 떠난 후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애굽으로 피난하게 한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누가복음을 조금 비교할 필요가 있다. 누가복음에는 예수의 부모가 아기 예수를 성전에 데려가 할례를 받게하는 장면이 나온다. 16절을 보면 헤롯이 죽인 아이들의 나이는 '두살 아래'이다. 이것은 헤롯의 아이 학살 사건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적어도 2년 정도가 흘렀다는 말이다. 요셉이 아기 예수를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간 때는 아이가 어느 정도 자랐을 시기일 것이다. 최소한 100일은 지나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 있다. 더 늦었을 수도 있다. 하여튼 요셉은 헤롯의 칼을 피해 애굽으로 피신한다. 마태는 즉각적으로 요셉의 피신은 출애굽 사건과 결부 시킨다.

야곱의 때에 가나안에 엄청난 기근이 찾아온다. 마침 애굽에 야곱의 잃어버린 아들 요셉이 총리로 있으면서 곡물을 저장한다. 이후 야곱의 가족들은 애굽으로 내려가 400년이 넘도록 그곳에 머문다. 때가 되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 내신다.  마태가 인용한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는 구절은 호세아 11:1이다.

  • 호세아 11장 1절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호세아 11:1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겨 그들은 애굽에서 불러내 자녀 삼으셨지만,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싫어하는 장면 속에 등장한다. 결국 그들을 앗수르에 줄 것이라 말씀하신다. 마태는 호세아의 구절을 통해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는 동시에  고통 당하는 백성들을 구원하시겠다는 결의도 드러내신다.

우린 여기서 한 가지에 주목해야 한다. 이스라엘 역사는 가나안의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피신한다. 하지만 마태가 인용한 부분을 출애굽 사건이며, 출애굽에서의 유아학살사건과 헤롯의 유아학살 사건을 동일시한다. 모세는 그 살육의 현장을 벗어나 애굽에서 빠져나온다. 하지만 요셉은 학살사건이 가나안에서 일어났고 반대로 애굽으로 피신한다. R.T 프랜스는 결정적 결함으로 보지만, 이건 역설이다. 즉 안식의 땅이요 축복의 땅인 가나안이 애굽이 되어 버린 것이다. 헤롯은 출애굽 시대의 포악한 바로와 동일시된다. 영적인 애굽은 바로 팔레스타인 땅이다.


라마의 통곡

마태는 헤롯의 학살 사건을 예레미야 31:15에서 인용하여 통곡의 기원을 살핀다. 베들레험에서 통곡은 베냐민의 어머니 라헬의 슬픔과 통곡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창세기 35장에서  벧엘에서 제단을 쌓고 내려오면서 에브랏(베들레헴) 근처에서 베냐민을 낳으면서 난산을 한다. 결국 베냐민을 낳고 라헬은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라헬의 통곡을 라마의 통곡으로 바꾸어 설명한다.

라마는 베냐민 지파에 속하는 장소이다. 이들은 기원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하고 포로로 끌려가게 된다. 이때 라마에 포로들이 모여 손발이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간다. 바벨론은 모든 사람을 끌고 가지 않고 건장하고 젊은 사람들, 왕족과 귀족들을 끌고 갔다. 남겨진 건 힘없고 나이 든 사람들이었다. 즉 대부분은 연로한 부모들이었다. 자식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면 부모들을 자녀를 잃은 슬픔에 통곡을 한 것이다. 예레미야는 당시의 사건을 라헬의 통곡에서 가져다 사용했다.


학살사건은 정말 있던 것일까?

주석이나 인터넷 자료를 찾아보면 헤롯의 유아학살 사건에 대해 대단히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이유는 성경 이외의 어떤 문헌에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의 의심을 충분히 공감하지만 많이 어리석다. 우린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외부의 문헌은 모든 것을 기록할까? 절대 아니다. 우리가 일기를 쓴다고 생각해보자. 그럼 하루에 일어난 모든 일을 다 기록할까? 아니다. 그럼 왜 다른 외부 문헌에 유아학살사건이 기록되어있지 않다하여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단정하는 것일까?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이다. 차라리 일어났는지 일어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라고 하는 것이 더 정직한 표현이 아닐까?


19-23절 애굽에서 갈릴리로

2장 종결부는 짧게 언급된다. 헤롯이 죽자 요셉은 다시 유대로 돌아 온다. 하지만 아들 아켈라오가 다시 왕이 되자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꿈에 지시를 받아 갈릴리 돌아간다. 마태는 선자가의 기록을 따라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는 말로 마무리 한다. 

문제는 구약성경 어디에도 나사렛이란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원어적 의미로 살펴야 한다. 

나사렛(Ναζαρέτ)이라 단어는 신약에서 12번 정도 언급된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나사렛이 히브리어 네체르(사 11:1)를 직역한 것으로 추측한다. 하지만 이 단어가 과연 헬라어 나사넷과 같은 의미인지는 알 길이 없다. 또한 네체르와 지명인 나사렛이 어떻게 동일시되었는지도 상당히 모호하다. 2천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당시의 의미를 파헤치기는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현대인들이 이해하지 못한 의미가 당시에는 충분히 통용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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