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사사기 9:22-45

악으로 세운 왕국은 결국 서로를 삼킵니다

  • 매일성경 묵상 사사기 9:22-45

오늘도 저는 말씀 앞에 앉아 죄로 맺어진 관계가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바라봅니다.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은 서로의 욕망을 위해 손을 잡았습니다. 세겜은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웠고, 아비멜렉은 형제 칠십 명의 피를 흘려 왕좌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불의로 세운 연대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사이에 불화가 일어나게 하시자 동맹은 배신으로 바뀌고, 세겜은 반역하며, 아비멜렉은 자신을 왕으로 만든 성읍을 파괴합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에서 죄가 품은 자기파괴성과 하나님의 공의를 봅니다. 동시에 폭력의 왕국과 정반대 방식으로 세워진 십자가의 나라를 바라보며, 제 관계와 선택이 진실과 사랑 위에 서 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형제의 피 위에 세운 동맹은 삼 년 만에 갈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삿 9:22-25)

아비멜렉은 이스라엘을 삼 년 동안 다스립니다.

본문은 그를 이스라엘의 정당한 왕으로 높여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도 없고, 선지자의 부르심도 없습니다. 그는 혈연을 이용하고 바알브릿 신전의 돈으로 사람을 고용한 뒤 자기 형제 칠십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여 권력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삼 년 동안은 그의 왕국이 유지됩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악이 즉시 무너지지 않는 현실을 생각합니다.

불의한 사람이 성공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거짓으로 얻은 권력이 오랫동안 유지될 수도 있습니다.

악한 방법으로 세운 조직이 한동안 번성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저는 쉽게 묻게 됩니다.

“하나님은 왜 가만히 계십니까?”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침묵처럼 보이는 시간이 하나님의 부재를 뜻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아비멜렉이 삼 년 동안 권력을 유지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행동을 인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요담은 이미 말했습니다.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 세겜을 사르고, 세겜에게서 불이 나와 아비멜렉을 사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의 성취가 이제 시작됩니다.

23절은 매우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시매.”

이 구절을 읽을 때 저는 조심해야 합니다.

‘악한 영’에 해당하는 표현은 ‘루아흐 라아’(רוּחַ רָעָה)입니다. 여기서 ‘라아’는 악한, 해로운, 재앙을 가져오는이라는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자신이 도덕적으로 악하시거나 사람에게 죄를 짓도록 유혹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악에 시험받지도 않으시고 친히 아무도 악으로 시험하지 않으신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본문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아비멜렉과 세겜 사이의 죄악된 동맹에 불화와 적대가 일어나도록 심판의 상황을 허락하시고 주권적으로 사용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진실과 언약적 신실함으로 하나가 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아비멜렉은 세겜의 지원이 필요했고,

세겜은 자기 혈족 출신의 왕을 원했습니다.

서로 사랑해서 맺어진 관계가 아니라 서로 이용하기 위해 결탁했습니다.

그런 관계 안에는 이미 붕괴의 씨앗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드러나게 하십니다.

저는 여기서 죄의 자기파괴성을 봅니다.

거짓으로 맺어진 관계에는 불신이 숨어 있습니다.

욕심으로 모인 사람들은 더 큰 이익이 생기면 쉽게 돌아섭니다.

미움으로 연대한 사람들은 어느 순간 서로를 미워할 수 있습니다.

권력으로 묶인 집단은 권력이 흔들리면 함께 무너집니다.

처음에는 서로를 이용하면 모두 이익을 얻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죄는 결국 관계를 태웁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방식 가운데 하나가 사람이 선택한 죄의 결과를 그대로 맛보게 하시는 것임을 저는 성경에서 자주 봅니다.

아비멜렉은 형제의 피를 흘려 권력을 얻었습니다.

이제 그 권력 안에서 다시 배신과 피가 흐르기 시작합니다.

본문은 그 이유를 더욱 분명히 설명합니다.

“이는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에게 행한 포악한 일을 갚되.”

하나님의 심판에는 도덕적 이유가 있습니다.

칠십 명의 피가 잊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정치적 성공을 위해 제거된 이름 없는 희생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피를 기억하십니다.

저는 이 사실이 두렵고 동시에 위로가 됩니다.

사람들은 피해자의 고통을 쉽게 잊을 수 있습니다.

역사는 승자의 이야기로 기록될 수 있습니다.

힘 있는 사람이 자기 잘못을 숨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잊지 않으십니다.

권력 뒤에 감춰진 눈물도 아십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난 부당함도 알고 계십니다.

가정에서 아무도 보지 못한 폭력도 보십니다.

사람이 기억하지 않는 피해자의 이름을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은 단순한 분노의 폭발이 아닙니다.

무너진 공의를 바로잡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읽으면서 저는 다른 사람의 심판을 기다리는 데만 마음을 두고 싶지 않습니다.

먼저 제 삶을 돌아봐야 합니다.

혹시 누군가의 희생 위에 제 편안함을 세워 놓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사람의 마음을 이용하지는 않았는가.

내 결정으로 상처 입은 사람의 고통을 너무 쉽게 잊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께서는 결과만 보시지 않습니다.

그 결과에 이르는 방식도 보십니다.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을 배신하기 시작합니다.

산꼭대기에 사람을 매복시켜 길을 지나는 사람들을 약탈합니다.

왕국의 질서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왕으로 세운 아비멜렉에 대한 신뢰가 사라진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잘못된 지도자를 세운 공동체도 그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봅니다.

사사기 9장은 아비멜렉만의 악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를 왕으로 세운 세겜 사람들의 죄도 함께 다룹니다.

그들은 형제 칠십 명이 죽는 것을 알고도 아비멜렉을 지지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 형제”였기 때문입니다.

진리보다 혈연과 이익을 선택했습니다.

결국 자신들이 세운 가시나무의 불이 자신들을 향해 타오릅니다.

저는 선택의 책임을 생각합니다.

누구를 지지하는가,

어떤 가치에 힘을 실어 주는가,

내 돈과 말과 행동이 어떤 일을 가능하게 하는가도 신앙의 문제입니다.

“나는 직접 하지 않았다”고 모든 책임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악을 알고도 지지하거나 침묵으로 돕는다면 그 악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선택을 하나님 앞에서 신중히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어두운 본문 속에서도 저는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아비멜렉의 왕국은 형제의 피 위에 세워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도 피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아비멜렉은 다른 사람의 피를 흘려 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피를 흘려 왕이 되셨습니다.

거짓 왕은 사람을 희생시켜 자신을 높입니다.

참된 왕은 자신을 희생하여 백성을 살립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나라는 배신과 공포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은혜와 진리로 세워집니다.

저는 오늘 어떤 왕국을 만들고 있는지 묻게 됩니다.

내가 편해지기 위해 사람을 희생시키는 왕국인가,

아니면 내가 낮아져 다른 사람을 살리는 그리스도의 나라에 참여하고 있는가.

가알의 큰소리는 용기처럼 보였지만 교만한 말은 사람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삿 9:26-33)

26절부터 새로운 인물이 등장합니다.

에벳의 아들 가알이 그의 형제들과 함께 세겜에 들어옵니다.

아비멜렉과 세겜 사이에 갈등이 깊어지는 틈을 타 새로운 권력자가 등장한 것입니다.

세겜 사람들은 가알을 신뢰하기 시작합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권력의 공백에는 언제나 또 다른 욕망이 들어올 수 있음을 생각합니다.

아비멜렉이 악하다고 해서 그를 반대하는 사람이 자동으로 선한 것은 아닙니다.

악한 권력을 비판한다고 내가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무엇을 반대하는가만큼 무엇을 위해 움직이는가가 중요합니다.

가알은 세겜 사람들의 불만을 자기 영향력 확대에 사용합니다.

수확철이 되자 백성은 밭에 나가 포도를 따고 밟아 잔치를 엽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신전에 들어가 먹고 마시며 아비멜렉을 저주합니다.

이 장면이 의미심장합니다.

바알브릿 신전은 아비멜렉의 정치적 출발점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나온 은 칠십 개가 그의 권력을 만드는 자금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같은 신전에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저주합니다.

우상이 사람을 묶어 주는 영원한 언약이 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바알브릿은 이름으로는 “언약의 주”였지만 실제로는 아무 언약도 지켜 주지 못했습니다.

참된 신실함은 언약의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하나님이 아닌 것을 절대적으로 의지할 때 생기는 불안을 생각합니다.

돈은 좋은 도구이지만 충성스러운 주인이 아닙니다.

사람의 인기는 오늘 있다가 내일 사라집니다.

권력은 내 손에 있을 때만 친구를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상황이 바뀌면 사람들이 돌아섭니다.

오직 하나님의 ‘헤세드’, 곧 신실한 언약적 사랑만 변하지 않습니다.

가알은 술과 잔치 분위기 속에서 큰소리를 냅니다.

“아비멜렉이 누구이며 세겜이 누구이기에 우리가 아비멜렉을 섬기리요.”

그는 세겜의 조상 하몰을 언급하며 지역 정체성을 자극합니다.

아비멜렉은 기드온의 아들이며 그의 관리 스불이 성읍을 다스리고 있으니, 세겜 사람들은 자신들의 전통적인 혈통과 정체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저는 여기서 아비멜렉과 가알이 닮았다는 사실을 봅니다.

아비멜렉도 혈연을 이용했습니다.

“나는 너희의 골육이다.”

가알도 세겜의 혈통과 지역 정체성을 이용합니다.

둘 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소속감과 불만을 자신의 권력에 이용합니다.

한 사람은 왕이 되었고,

다른 사람은 왕을 끌어내리려 합니다.

그러나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정치적·사회적 선동의 구조를 생각하게 되지만, 먼저 제 자신에게 적용하고 싶습니다.

저도 사람들의 불만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받은 사람에게 다가가 그 감정을 부추겨 내 편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갈등이 있을 때 중재하기보다 그것을 통해 영향력을 키울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목회적 돌봄이 아니라 조종입니다.

진정한 지도자는 사람의 상처를 자기 힘으로 바꾸지 않습니다.

그 상처를 치유하도록 돕습니다.

가알은 더욱 대담해집니다.

“이 백성이 내 수하에 있었더라면 내가 아비멜렉을 제거하였으리라.”

그리고 아비멜렉에게 도전장을 던집니다.

“네 군대를 증강하여 나오라.”

자신감이 넘칩니다.

하지만 저는 그의 말에서 참된 용기보다 과신을 봅니다.

용기와 허세는 다릅니다.

용기는 위험을 알면서도 옳은 일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허세는 자기 능력을 실제보다 크게 믿는 것입니다.

가알의 큰소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그의 사명도 아닙니다.

그저 자신이 아비멜렉을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저는 제 믿음이 이런 자기확신과 혼동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기독교적 믿음은 “나는 할 수 있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므로 순종한다”는 고백입니다.

기드온이 미디안과 싸울 때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삼백 명으로 싸울 때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가알에게는 그런 말씀이 없습니다.

자기 욕망과 자신감만 있습니다.

그의 말을 성읍의 지도자 스불이 듣습니다.

스불은 아비멜렉에게 은밀히 사람을 보내 가알과 그의 형제들이 세겜을 선동한다고 보고합니다.

그리고 전략을 제시합니다.

밤에 군대를 데리고 와 들에 매복하고, 아침에 성읍을 기습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죄로 얽힌 공동체에는 끊임없는 불신과 음모가 생긴다는 사실을 봅니다.

가알은 아비멜렉을 끌어내리려 하고,

스불은 가알을 제거하기 위해 아비멜렉에게 비밀 정보를 보냅니다.

누구도 서로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합니다.

이것이 죄의 왕국입니다.

겉으로는 권력이 있어 보이지만 내면에는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세우신 공동체의 본질은 전혀 다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누가 큰 자인가를 다투는 제자들에게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십자가는 상대를 제거하여 내가 안전해지는 길이 아니라 내가 자신을 내어 주어 다른 사람과 화해하는 길입니다.

새 언약 공동체는 음모가 아니라 진실,

이용이 아니라 사랑,

두려움이 아니라 신뢰를 배워야 합니다.

물론 교회도 죄인들의 공동체이기에 갈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해결 방식은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뒤에서 사람을 모으고,

감정을 부추기며,

상대를 무너뜨리는 방식이 아니라 직접 말하고, 회개하고, 용서하고, 진리를 따라 해결해야 합니다.

저는 오늘 제 관계 방식이 세겜의 방식인지 그리스도의 방식인지 묻고 싶습니다.

왕이 된 아비멜렉은 자신을 세운 세겜을 무너뜨렸습니다 (삿 9:34-45)

아비멜렉은 스불의 말을 듣고 밤에 군대를 이끌어 세겜 근처에 매복합니다.

가알은 아침에 성문에 나갔다가 산에서 내려오는 군대를 발견합니다.

그는 스불에게 말합니다.

“보라 사람들이 산꼭대기에서부터 내려오는도다.”

하지만 스불은 처음에는 산 그림자를 사람으로 잘못 본 것이라고 말합니다.

조금 뒤 군대가 여러 방향에서 내려오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가알은 자신이 큰소리쳤던 순간을 곧 현실에서 마주합니다.

그때 스불은 가알에게 되묻습니다.

“아비멜렉이 누구이기에 우리가 그를 섬기리요 하던 네 입이 이제 어디 있느냐.”

참으로 뼈아픈 말입니다.

말은 쉬웠습니다.

잔치 자리에서는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그러나 실제 전투가 시작되자 상황이 달라집니다.

저는 여기에서 말과 삶의 거리를 생각합니다.

저도 쉽게 장담할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이 와도 믿음을 지키겠습니다.”

“나는 사람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돈 때문에 신앙을 타협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손해가 눈앞에 오면 제 고백의 깊이가 드러납니다.

그래서 저는 큰 말을 많이 하기보다 작은 순종을 꾸준히 하고 싶습니다.

베드로도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몇 시간 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버리지 않으시고 부활 후 다시 찾아가 회복시키셨습니다.

이 점에서 복음은 가알의 비극과 다른 길을 보여 줍니다.

인간의 허세는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은혜는 무너진 사람을 다시 세울 수 있습니다.

가알과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과 싸우지만 패배합니다.

많은 사람이 상하여 쓰러지고 가알과 그의 형제들은 성읍에서 쫓겨납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건이 끝나지 않습니다.

다음 날 세겜 사람들이 다시 밭으로 나갑니다.

아비멜렉은 이 소식을 듣고 백성을 세 부대로 나누어 매복했다가 성읍 사람들을 공격합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세겜을 쳐서 점령하고 그 안의 사람들을 죽이며 성읍을 헐어 버립니다.

마지막에는 그곳에 소금을 뿌립니다.

저는 이 장면이 요담의 우화가 현실이 되는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시나무가 말했습니다.

“내게서 불이 나와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다.”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운 세겜은 결국 그 아비멜렉에게 파괴됩니다.

자신들이 세운 왕이 자신들을 죽입니다.

죄의 아이러니입니다.

인간은 우상을 선택할 때 그것이 자신을 섬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이 우상의 종이 됩니다.

돈을 왕으로 세우면 돈이 내 삶을 지배합니다.

권력을 왕으로 세우면 권력을 잃을까 두려워 모든 것을 희생하게 됩니다.

사람의 인정을 왕으로 세우면 사람들의 평가에 갇힙니다.

쾌락을 왕으로 세우면 나중에는 그 욕망이 나를 끌고 갑니다.

처음에는 내가 선택합니다.

나중에는 그것이 나를 다스립니다.

세겜이 아비멜렉을 왕으로 선택했지만 마지막에는 그 왕의 칼 아래 무너집니다.

저는 “소금을 뿌렸다”는 마지막 행동도 생각해 봅니다.

고대 세계에서 정복한 성읍에 소금을 뿌리는 행위는 완전한 파괴와 저주의 상징적 행동으로 이해되곤 합니다. 반드시 농경지를 실제로 영구 불모지로 만들 만큼 대량의 소금을 살포했다는 의미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겜의 몰락이 철저했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수아 시대에 언약을 새롭게 했던 세겜,

한때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고백했던 그 장소가 이제 폐허가 됩니다.

저는 신앙의 전통만으로 현재의 순종을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배웁니다.

과거에 은혜받았던 장소도 오늘 하나님을 떠나면 안전하지 않습니다.

오래된 교회라고 자동으로 건강한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가 훌륭한 신앙인이었다고 자녀의 믿음이 자동으로 보장되지 않습니다.

과거의 신앙은 귀한 유산이지만 오늘의 순종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저는 본문의 가장 무서운 역설을 바라봅니다.

아비멜렉은 자신을 왕으로 세워 준 세겜을 уничтож합니다— 아니, 무너뜨립니다. 그를 높인 사람들을 보호하지 않았습니다.

거짓 왕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자신의 권력을 위해 백성을 사용하고, 필요 없어지면 제거합니다.

여기에서 저는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봅니다.

아비멜렉은 자기 왕좌를 지키기 위해 백성을 죽입니다.

예수님은 백성을 살리기 위해 왕좌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아비멜렉은 자기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비멜렉의 왕권은 공포를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왕권은 평화를 만듭니다.

그리스도는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거짓 목자는 양을 자기 생명을 위해 사용합니다.

선한 목자는 자신의 생명을 양을 위해 내어 줍니다.

십자가에서 이 차이가 완전히 드러납니다.

세상의 왕들은 백성의 피로 왕좌를 지켜 왔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피로 백성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아비멜렉의 왕국은 불안하기 때문에 계속 사람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부활의 생명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영원합니다.

그래서 저는 누구의 그늘 아래 살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가시나무의 가짜 그늘인가,

그리스도의 실제 피난처인가.

세겜 사람들은 잘못된 왕을 세웠고 그 선택의 열매를 먹었습니다.

저는 오늘 제 마음의 왕좌를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무엇이 제 결정을 지배하는가.

돈인가,

사람의 시선인가,

자존심인가,

두려움인가.

그것들이 왕이 되면 결국 저를 태울 수 있습니다.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왕 예수 그리스도만이 저를 죽이지 않고 살리시는 왕입니다.

마무리

사사기 9장 22절부터 45절을 묵상하며 저는 죄로 맺어진 연대가 결국 서로를 삼키는 모습을 봅니다. 아비멜렉과 세겜은 형제의 피 위에서 손을 잡았지만 삼 년 만에 서로를 대적했고, 가알의 허세와 반역도 새로운 구원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결국 아비멜렉은 자신을 왕으로 세운 세겜을 파괴했습니다. 오늘 저는 욕망으로 관계를 만들거나 사람을 이용하지 않겠습니다. 큰소리보다 작은 순종을 선택하고, 악의 성공을 부러워하지 않겠습니다. 무엇보다 백성을 죽여 왕좌를 지킨 아비멜렉과 달리 자신을 죽음에 내어 주어 백성을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 유일한 왕으로 모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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