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나무를 왕으로 세우면 그 그늘 아래 평안할 수 없습니다
- 매일성경 묵상 사사기 9:7-21
오늘도 저는 말씀 앞에 앉아 어떤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고, 또 제 마음의 왕좌에 무엇을 올려놓고 살아가는지를 묵상합니다. 형제들을 죽이고 왕이 된 아비멜렉을 향해 유일하게 살아남은 요담은 칼을 들지 않고 한 편의 우화로 진실을 선포합니다.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는 자신의 열매를 버리고 왕이 되기를 거절하지만, 아무 열매도 없는 가시나무는 기꺼이 왕이 되겠다고 나섭니다. 저는 이 말씀에서 참된 지도력은 자리를 탐하는 힘이 아니라 맡겨진 열매를 충실히 맺는 데 있으며, 잘못된 왕을 선택한 공동체 역시 그 선택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음을 배웁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제 안의 권력욕과 잘못된 의존을 살피며, 섬김으로 다스리시는 참된 왕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자 합니다.
열매 맺는 나무는 자리를 탐하지 않았고 가시나무만 왕이 되겠다고 나섰습니다 (삿 9:7-15)
아비멜렉이 세겜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요담은 그리심 산 꼭대기에 올라갑니다.
그리심 산은 이스라엘의 기억 속에서 매우 중요한 장소입니다. 신명기에서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도록 했고, 여호수아 시대에도 언약의 축복과 저주가 선포된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산에서 요담은 세겜 사람들을 향해 심판의 경고를 외칩니다.
언약의 축복을 기억해야 할 자리에서 언약을 배반한 백성을 향한 경고가 들려오는 것입니다.
요담은 말합니다.
“세겜 사람들아 내 말을 들으라 그리하여야 하나님이 너희의 말을 들으시리라.”
저는 이 첫 문장부터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자기 기도를 들어 달라고 요구하면서 정작 하나님의 말씀은 듣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듣고 싶은 부분만 듣습니다.
요담의 말은 그 순서를 바로 세웁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원한다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듣다’는 것은 성경에서 단순히 소리를 듣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저는 기도하면서 제 소원만 많이 말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니다.
기도는 제가 하나님을 설득하는 시간이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제 마음을 열어 놓는 시간이어야 합니다.
요담은 갑자기 나무들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 이야기는 성경의 지혜 문학적 전통에서 ‘마샬’(מָשָׁל), 곧 비유·잠언·우화와 같은 교훈적 이야기의 성격을 가집니다.
나무들이 왕을 세우려고 합니다.
먼저 감람나무에게 말합니다.
“너는 우리 위에 왕이 되라.”
그러자 감람나무는 거절합니다.
“내게 있는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감람나무는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매우 귀한 나무였습니다.
감람유는 음식에 사용되었고,
등불을 밝히는 데 사용되었으며,
의약과 미용에도 쓰였고,
제사와 기름 부음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감람나무는 이미 자기 자리에서 충분히 귀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왕이 되지 않아도 존재의 가치가 있습니다.
저는 이 대목이 참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사람은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직급이 올라가야 성공한 것 같고,
사람들이 많이 알아주어야 의미 있는 삶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감람나무는 자기 열매를 버리고 높은 자리를 얻는 일을 거절합니다.
“나는 이미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저는 이것이 소명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충실히 감당하는 사람은 모든 높은 자리를 탐하지 않습니다.
자리가 커지는 것보다 사명을 잃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에는 무화과나무를 찾아갑니다.
그러나 무화과나무도 거절합니다.
“나의 단 것과 나의 아름다운 열매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무화과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중요한 식량이었습니다.
달고 영양이 풍부했으며, 성경에서는 종종 평안과 풍요를 상징하는 이미지로도 사용됩니다.
무화과나무 역시 자신이 가진 열매를 알고 있습니다.
왕좌 때문에 자기 본분을 버리지 않습니다.
저는 여기서 또 하나를 배웁니다.
사람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잘하고 있는 일을 버리고 ‘더 커 보이는 자리’를 탐하기 시작할 때일 수 있습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한 교회와 한 영혼을 충실히 돌보는 것보다 더 큰 이름과 영향력을 얻는 데 마음이 끌릴 수 있습니다.
사역이 소명에서 자기 확장으로 바뀌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무화과나무의 질문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내가 왜 하나님께서 주신 열매를 버리고 우쭐거리려 하는가.”
세 번째는 포도나무입니다.
포도나무 역시 거절합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내 포도주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는 모두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말합니다.
“내가 이것을 버리고 왜 나무들 위에서 우쭐대겠는가.”
여기에서 반복되는 ‘우쭐대다’라는 이미지는 왕권 자체보다 권력을 자기 높임의 수단으로 삼는 위험을 풍자합니다.
성경은 모든 통치와 지도력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후 다윗을 왕으로 세우십니다.
따라서 요담의 우화가 “왕이라는 자리 자체는 악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핵심은 누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방식으로 다스리는가입니다.
좋은 나무들은 열매를 포기하고 권력을 얻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등장하는 가시나무는 다릅니다.
모든 나무가 가시나무에게 말합니다.
“너는 와서 우리 위에 왕이 되라.”
그러자 가시나무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합니다.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의 왕으로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저는 이 대목에서 요담의 풍자를 느낍니다.
가시나무를 뜻하는 히브리어 ‘아타드’(אָטָד)는 건조한 지역에서 자라는 가시덤불과 같은 관목을 가리킵니다.
가시나무는 감람나무처럼 기름을 주지 않습니다.
무화과처럼 단 열매도 없습니다.
포도주도 만들지 못합니다.
그런데 왕은 되겠다고 합니다.
더 우스운 것은 자기 그늘에 피하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키가 낮고 가시가 많은 덤불이 레바논의 백향목까지 포함한 큰 나무들에게 “내 그늘로 들어오라”고 합니다.
실제로 보호할 그늘은 거의 없습니다.
이것이 잘못된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자신에게 실제로 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는데 큰 약속을 합니다.
사람을 보호할 능력은 부족하지만 충성을 요구합니다.
섬기기보다 지배하고 싶어 합니다.
열매보다 자리를 원합니다.
저는 여기서 아비멜렉의 모습을 정확히 봅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미디안에게서 구원한 사람이 아닙니다.
백성을 위해 희생한 기록도 없습니다.
형제들을 죽였고,
혈연을 이용했고,
바알브릿 신전의 돈으로 추종자를 고용했습니다.
아무런 열매 없이 왕이 되려 한 가시나무와 같습니다.
그런데 더욱 무서운 것은 세겜 사람들이 그 가시나무를 스스로 왕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입니다.
잘못된 지도자의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를 원하는 공동체의 욕망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닮은 지도자를 선택할 때가 있습니다.
진리를 말하는 사람보다 내 욕망을 만족시켜 줄 사람을 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기준보다 “우리 편”이라는 이유로 사람을 지지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도자의 타락과 공동체의 타락은 서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가시나무는 마지막에 이렇게 경고합니다.
“그리하지 아니하면 가시나무에서 불이 나와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가시덤불은 건조한 지역에서 쉽게 불이 붙고, 불이 붙으면 주변으로 빠르게 번질 수 있습니다.
그늘을 약속했던 나무가 결국 불을 내는 나무가 됩니다.
거짓 권력의 마지막은 이렇습니다.
처음에는 보호를 약속합니다.
결국 공동체를 태웁니다.
저는 제 삶에서도 어떤 것을 왕으로 세우고 있는지 묻게 됩니다.
돈을 왕으로 세우면 처음에는 안전을 약속하지만 결국 삶 전체를 돈의 기준으로 태울 수 있습니다.
인정을 왕으로 세우면 처음에는 기분을 좋게 하지만 결국 다른 사람의 시선에 묶이게 합니다.
성공을 왕으로 세우면 성취감을 주지만 실패했을 때 존재 전체가 무너질 수 있습니다.
가시나무의 그늘은 실제 그늘이 아닙니다.
우상도 같습니다.
피난처처럼 보이지만 진정한 피난처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진짜 왕이 누구인지 다시 묻습니다.
진실과 온전함 없이 세운 왕국은 결국 서로를 삼키게 됩니다 (삿 9:16-20)
요담은 우화를 끝낸 뒤 그 의미를 세겜 사람들에게 직접 적용합니다.
“이제 너희가 아비멜렉을 세워 왕으로 삼았으니 너희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
여기에 매우 중요한 두 개념이 등장합니다.
‘진실’에 해당하는 ‘에메트’(אֱמֶת)는 진실함, 신실함, 확실함을 뜻합니다.
‘온전함’ 또는 정직함의 의미를 가진 ‘타밈’(תָּמִים)은 흠 없이 온전하고 성실하게 행하는 태도를 나타냅니다.
요담의 질문은 단순합니다.
“너희의 선택은 진실했느냐.”
“정직했느냐.”
저는 신앙적인 결정을 내릴 때 이 두 질문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결과가 좋을 것 같은가보다 먼저,
내게 이익이 되는가보다 먼저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것이 진실한가.”
“이 과정이 정직한가.”
세상에서는 좋은 결과만 나오면 과정의 문제를 쉽게 덮어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목적이 방법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방식으로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겜 사람들은 왕이라는 결과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는 배신과 돈과 살인이 있었습니다.
요담은 그들에게 아버지 기드온의 은혜를 상기시킵니다.
기드온은 그들을 위해 싸웠습니다.
목숨을 걸었습니다.
미디안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기드온의 아들 칠십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이고, 그의 첩에게서 난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저는 이 말씀에서 ‘망각’이 죄의 중요한 출발점임을 다시 확인합니다.
은혜를 잊으면 배은망덕이 쉬워집니다.
이스라엘은 기드온이 죽자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미디안에게서 구원하신 일도 잊었고, 기드온의 집이 베푼 수고도 잊었습니다.
감사가 사라진 자리에 욕망이 들어왔습니다.
저는 제 신앙에서도 은혜를 기억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내가 여기까지 혼자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고,
기도해 준 사람들이 있었으며,
도움을 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것을 잊으면 모든 것이 당연하게 느껴집니다.
감사 대신 권리를 주장합니다.
신앙의 기억은 과거에 묶여 사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를 겸손하게 만드는 힘입니다.
요담은 세겜 사람들의 선택이 정말 진실하고 정직했다면 그 결과를 누리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기드온과 그의 집을 대접한 것이 그의 행한 대로 한 것이면 아비멜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라.”
그러나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요담과 청중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20절에서 무서운 선언이 나옵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 세겜 사람들과 밀로 족속을 사를 것이요 세겜 사람들과 밀로 족속에게서도 불이 나와 아비멜렉을 사를 것이니라.”
저는 이 말씀에서 죄의 자기 파괴성을 봅니다.
악으로 맺어진 연대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서로의 필요 때문에 손을 잡습니다.
아비멜렉은 세겜의 지지가 필요했고,
세겜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왕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서로 이용했습니다.
하지만 이용관계에는 언약적 신실함이 없습니다.
필요가 사라지면 관계도 무너집니다.
조금 뒤 사사기 9장에서 이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불신과 적대가 생기고,
서로를 공격하며,
결국 양쪽 모두 파멸합니다.
가시나무의 불이 실제 역사 속으로 번진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죄가 단순히 하나님께서 밖에서 내려 주시는 형벌 때문에만 파괴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합니다.
죄 자체 안에 파괴의 씨앗이 있습니다.
거짓으로 맺은 관계에는 불신이 생깁니다.
탐욕으로 모인 사람들은 더 큰 이익 앞에서 서로 배신할 수 있습니다.
권력으로 유지한 공동체는 권력이 약해지면 무너집니다.
미움으로 연대한 사람들은 결국 서로에게도 미움을 돌릴 수 있습니다.
죄의 열매는 결국 죽음입니다.
바울이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한 것은 단지 미래 심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죄는 현재의 관계와 마음과 공동체도 죽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교회 공동체에도 엄중하게 적용하고 싶습니다.
교회가 진리가 아니라 인간적인 이해관계로 묶이면 위험합니다.
목회자를 중심으로 한 개인 숭배,
파벌,
친분,
경제적 이해관계가 복음보다 중요한 연결고리가 되면 언젠가 그 관계에서 불이 날 수 있습니다.
교회를 하나로 묶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그래서 새 언약 공동체의 중심은 혈연도,
지역도,
성향도 아닙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을 이용하여 왕이 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내어 주어 백성을 얻으셨습니다.
아비멜렉은 칠십 형제를 죽여 자기 경쟁자를 제거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생명을 내어 주어 원수였던 우리를 형제와 자매로 만드셨습니다.
아비멜렉의 왕국은 타인의 피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왕 자신의 피 위에 세워졌습니다.
이것이 참된 왕권과 거짓 왕권의 차이입니다.
세상의 폭력적인 왕은 “나를 위해 죽어라”고 명령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를 위해 죽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그대로 행하셨습니다.
저는 이 차이를 마음 깊이 새기고 싶습니다.
제가 어떤 자리에서든 사람을 희생시켜 제 목적을 이루려 한다면 아비멜렉의 길에 가까워집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제 권리와 편의를 내려놓는다면 그리스도의 길을 조금이나마 닮아 가는 것입니다.
참된 지도력은 사람을 태우는 불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섬김이어야 합니다.
요담은 도망했지만 그의 말은 남았고 하나님의 심판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삿 9:21)
요담의 설교는 길지 않았습니다.
그는 강력한 우화를 말하고 세겜 사람들에게 그 의미를 선포한 뒤 즉시 도망합니다.
“요담이 그의 형제 아비멜렉을 두려워하여 달려 도망하여 브엘로 가서 거기에 거주하니라.”
저는 이 마지막 장면에서 인간적인 두려움과 믿음의 용기가 함께 있는 모습을 봅니다.
요담은 두려워합니다.
형제 칠십 명을 죽인 아비멜렉입니다.
요담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도망합니다.
그러나 도망하기 전에 해야 할 말은 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용기란 두려움이 전혀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두려워도 해야 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요담은 아비멜렉과 직접 전쟁을 벌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없는 힘을 가진 척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에 주신 진실을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는 몸을 피합니다.
믿음과 지혜가 함께 있습니다.
저는 때로 “믿음이 있으면 어떤 위험도 피하면 안 된다”는 식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성경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때가 이르지 않았을 때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의 손에서 피하신 적이 있습니다.
바울도 성벽을 통해 광주리를 타고 도망했습니다.
위험을 피하는 것 자체가 불신앙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두려움 때문에 진리 자체를 버리는가입니다.
요담은 피했지만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것을 오늘의 신앙에 적용해 봅니다.
모든 싸움에 뛰어들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논쟁에 참여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반드시 말해야 할 자리에서 편안함 때문에 침묵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상처받는 사람을 보고도 관계가 불편해질까 봐 모른 척할 수 있습니다.
명백한 거짓이 있는데도 내 위치가 흔들릴까 두려워 침묵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아무 때나 공격적으로 말하는 것도 용기는 아닙니다.
요담은 핵심을 말한 뒤 떠났습니다.
진리를 말하는 것과 싸움을 즐기는 것은 다릅니다.
저는 말을 통해 상대를 이기려는 사람이 아니라 필요한 진리를 사랑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요담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세겜의 모든 사람과 밀로의 족속은 이미 아비멜렉 편에 섰습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요담이 졌습니다.
왕좌는 아비멜렉에게 있습니다.
군사도 그에게 있습니다.
돈도,
정치적 지지도 그에게 있습니다.
요담은 도망자입니다.
그러나 사사기 9장을 끝까지 읽으면 누가 옳았는지가 드러납니다.
요담의 말이 성취됩니다.
세겜과 아비멜렉 사이에서 불이 일어납니다.
그들은 서로를 파괴합니다.
저는 여기에서 진리의 힘을 생각합니다.
진리는 말하는 사람이 약해 보인다고 약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수가 반대한다고 거짓이 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말하는 사람이 도망자가 되어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 점은 선지자들의 삶에서도 반복됩니다.
예레미야는 조롱받았습니다.
엘리야는 도망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는 결국 남았습니다.
저는 그래서 당장의 결과만으로 순종의 가치를 판단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는데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정직해서 기회를 잃을 수 있고,
진실을 말했기 때문에 관계가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복음을 지켰기 때문에 세상에서 뒤처지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마지막 판단을 현재의 결과에 맡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맡깁니다.
요담이 브엘에 숨어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셨습니다.
아비멜렉의 왕국은 겉으로 멀쩡해 보였지만 그 안에는 이미 파멸의 씨앗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 사실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즉시 벼락을 내려 아비멜렉을 죽이지 않으십니다.
악이 한동안 성공하는 것처럼 보이게 두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악을 인정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인간의 조급함과 다릅니다.
때가 되면 악의 실체가 드러나고 심판이 이루어집니다.
저는 악한 사람이 잘되는 모습을 보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왜 저 사람은 저렇게 살아도 잘되는가.”
“왜 하나님은 바로 심판하지 않으시는가.”
시편 기자도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현재의 번영이 하나님의 최종 판결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아비멜렉은 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왕좌에 앉았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인정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서도 비슷한 역설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이 승리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원하는 것을 얻었고,
빌라도의 권력은 유지되었으며,
예수님은 무덤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나 사흘 만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판결을 뒤집으셨습니다.
부활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죄인처럼 정죄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심으로 의로우신 아들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마지막 판단을 부활의 하나님께 맡깁니다.
저는 이 소망 때문에 지금 모든 것을 제가 직접 해결하려고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정의가 필요하지만 제가 최종 심판자는 아닙니다.
진실을 말해야 하지만 결과까지 제 손에 쥐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요담처럼 맡겨진 말을 하고 하나님께 이후를 맡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요담의 우화를 묵상하며 마지막으로 제 안의 지도력을 돌아봅니다.
저는 감람나무처럼 열매 맺는 사람인가,
아니면 가시나무처럼 자리만 원하는 사람인가.
사람들에게 그늘을 약속하면서 실제로는 불을 품고 있지는 않은가.
제가 가진 위치가 사람을 살리고 있는가,
아니면 사람을 제 목적을 위해 사용하게 만들고 있는가.
이 질문은 목회자와 지도자만의 질문이 아닙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작은 모임에서도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그 영향력을 자기 높임에 사용할 수도 있고 섬김에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사람을 주관하고 권세를 부리지만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 왔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것을 참된 지도력의 기준으로 삼고 싶습니다.
십자가는 왕의 보좌입니다.
가시나무 같은 왕은 사람을 태우지만,
십자가의 왕은 자신이 상처받아 백성을 살립니다.
가시나무는 가짜 그늘을 약속하지만,
그리스도는 실제 피난처가 되십니다.
아비멜렉은 형제를 죽여 왕이 되었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으로 우리를 형제로 삼으셨습니다.
저는 그 왕 아래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게 어떤 권한이 주어지든 그 왕의 방식을 닮고 싶습니다.
마무리
사사기 9장 7절부터 21절을 묵상하며 저는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들은 왕좌를 탐하지 않았지만 아무 열매 없는 가시나무는 기꺼이 왕이 되겠다고 나선 모습을 봅니다. 아비멜렉과 세겜의 결탁은 혈연과 욕망, 폭력 위에 세워졌기에 결국 서로를 태우는 불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저는 높은 자리보다 맡겨진 열매를 충실히 맺는 삶을 선택하겠습니다. 사람을 이용해 제 왕국을 세우지 않고, 필요한 진실은 두려움 속에서도 말하겠습니다. 무엇보다 형제를 죽여 왕이 된 아비멜렉이 아니라 형제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제 왕으로 모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