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사사기 1:1 - 1:10

 

누가 먼저 올라가리이까, 하나님의 뜻을 묻고 순종하는 믿음

오늘도 저는 말씀 앞에 앉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뒤 이스라엘은 익숙한 지도자를 잃고 새로운 시대의 문턱에 섭니다. 사사기의 첫 장면은 전쟁보다 먼저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누가 먼저 올라가야 하는지를 하나님께 묻는 것입니다. 저는 이 짧은 장면에서 신앙의 중요한 질서를 배웁니다. 앞날이 보이지 않을 때 먼저 움직이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묻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말씀하시면 올라가야 하고, 약속하시면 순종해야 합니다. 오늘도 사사기 1장 1절에서 10절 말씀을 천천히 묵상하며,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제가 누구의 뜻을 따라 움직이고 있는지 살펴보려 합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고, 그 말씀 앞에서 제 삶의 방향도 새롭게 정돈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지도자가 사라진 자리에서 하나님께 묻다 (삿 1:1-3)

본문은 매우 중요한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라는 표현입니다. 저는 이 문장을 읽을 때마다 한 시대가 끝났다는 사실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여호수아는 단순한 행정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었던 지도자였고, 요단강을 건너게 했으며,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고 가나안 정복 전쟁을 지휘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여호수아가 이제 없습니다.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누가 우리를 이끌 것인가?” “앞으로 남아 있는 가나안 족속들과의 싸움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여호수아는 죽었지만 하나님은 죽지 않으셨습니다. 지도자는 사라졌지만 언약의 주님은 그대로 계십니다. 사람은 바뀌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자주 이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저는 어떤 사람이 곁에 있을 때 안심하고, 어떤 환경이 유지될 때 평안을 느낍니다. 익숙한 관계와 익숙한 질서가 무너지면 하나님까지 멀어진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제게 묻습니다. “네가 의지했던 것은 정말 하나님이었느냐, 아니면 하나님이 사용하셨던 사람이었느냐?”

사사기는 바로 그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여호와께 “여쭈었습니다.” 여기 사용되는 히브리어 ‘샤알’(שָׁאַל)은 묻다, 요청하다, 뜻을 구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스라엘은 군사회의부터 열지 않았습니다. 어느 지파가 병력이 많고 어느 지파가 전투 경험이 풍부한지를 먼저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묻습니다.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저는 이 질문이 참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우리가 이길 수 있습니까?”라고 묻지 않습니다. “싸워야 합니까?”라고 묻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에게 주신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순종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라 “누가 먼저 순종할 것인가”였습니다.

여기서 ‘올라가다’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알라’(עָלָה)에서 나온 말입니다. 단순히 지리적으로 높은 곳에 올라간다는 뜻도 있지만,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싸움의 자리로 나아가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저는 이 말씀 앞에서 제 기도의 내용을 돌아보게 됩니다. 저는 하나님께 종종 “이 일이 잘되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손해를 보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이 나를 인정하겠습니까?” “결과가 좋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보다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이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주님,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믿음은 결과를 먼저 확인하고 움직이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고 그 말씀을 따라 움직이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에게 말씀하십니다.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그리고 매우 중요한 약속을 덧붙이십니다.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

여기서 ‘넘겨주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나탄’(נָתַן), 곧 주다라는 뜻입니다. 아직 전투는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완료된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유다가 싸워서 스스로 쟁취하는 땅이라기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땅입니다.

저는 여기서 은혜와 순종의 관계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셨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반대로 내가 열심히 싸워야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먼저 약속이 있고 그 약속에 대한 순종이 뒤따릅니다.

이것은 복음의 질서와도 같습니다.

우리가 순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순종합니다. 우리가 선하게 살아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새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은혜가 먼저이고 순종은 그 은혜에 대한 응답입니다.

저는 이 순서를 잊으면 신앙이 쉽게 율법주의가 된다는 사실을 압니다. “더 열심히 해야 하나님께 인정받을 것이다”라는 생각에 붙들립니다. 그러나 복음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이루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죄의 값을 담당하셨고, 부활하셔서 새 생명의 길을 여셨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구원을 얻기 위해 싸우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죄와 싸웁니다.

유다는 시므온에게 함께 올라가자고 제안합니다. 자신의 기업에서 싸우는 일을 도와주면 자신도 시므온의 기업에서 함께 싸우겠다고 말합니다.

이 장면을 묵상하면서 저는 믿음의 싸움이 반드시 혼자서만 감당해야 하는 싸움이 아니라는 사실도 생각합니다.

우리는 서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자의 기업과 사명을 주셨지만 그 사명을 고립된 상태에서 감당하라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교회는 서로의 싸움을 함께 싸우는 공동체입니다. 누군가 믿음이 흔들릴 때 곁에 서 주고, 누군가 삶의 무게에 눌릴 때 함께 기도하고, 누군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두려워할 때 손을 붙잡아 주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나 저는 동시에 조심스럽게 제 마음을 살펴봅니다.

유다가 시므온을 부른 것이 믿음의 연대였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약속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던 인간적인 보완이었는지 본문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시므온과의 동행보다 먼저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도움이 아무리 귀해도 약속의 근거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이것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사람과 함께 가되 사람을 하나님 자리에 두지 않겠습니다. 좋은 동역자를 감사히 여기되 그 사람이 없어졌다고 사명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어도 하나님은 살아 계셨던 것처럼, 제가 의지했던 환경이 바뀌어도 하나님은 여전히 제 앞길을 인도하십니다.

오늘 저는 중요한 결정을 앞두었을 때 먼저 계산하기보다 묻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주님, 누가 먼저 올라가야 합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하다면 더 이상 끝없는 계산 속에 머물지 않고 믿음으로 올라가고 싶습니다.

승리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발견하다 (삿 1:4-7)

유다와 시므온이 올라가자 하나님께서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그들의 손에 넘겨주십니다. 본문은 벧세겔에서 만 명을 쳤다고 기록합니다.

제가 이 부분을 읽을 때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은 전쟁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어려움입니다. 성경을 피상적으로 읽으면 가나안 정복을 단순한 민족 간의 영토 전쟁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보면 이것은 이스라엘의 민족적 우월성을 증명하는 전쟁이 아닙니다.

가나안 정복은 하나님의 심판과 언약의 성취라는 신학적 틀 속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 시대부터 가나안 땅을 그의 후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동시에 창세기 15장에서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의 때가 기다려지고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정복은 하나님께서 어떤 민족을 충동적으로 미워하셔서 일으킨 사건이 아닙니다. 오랜 인내 뒤에 시행된 심판이며 동시에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언약을 성취하시는 사건입니다.

이 사실은 저를 두렵게 합니다.

하나님의 인내가 하나님의 무관심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를 오래 참으신다고 해서 죄를 인정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저는 때때로 세상을 바라보며 묻습니다. 왜 악한 사람이 잘되는가, 왜 불의가 즉시 심판받지 않는가, 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는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인내와 하나님의 심판을 동시에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십니다. 그러나 영원히 죄를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벧세겔에서 유다 사람들은 아도니 베섹을 만납니다. ‘아도니 베섹’은 개인의 고유한 이름이라기보다 “베섹의 주”라는 의미를 가진 칭호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주변의 여러 왕들을 정복하고 잔혹하게 다루었던 강력한 통치자였습니다.

유다는 그와 싸워 승리합니다.

도망가던 아도니 베섹을 붙잡아 그의 손과 발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릅니다.

오늘의 독자에게 이 장면은 불편합니다. 저 역시 편안하게 읽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잔혹성을 미화하기보다 곧바로 아도니 베섹 자신의 입을 통해 사건을 해석하게 합니다.

그는 자신이 과거에 칠십 명의 왕들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르고 자신의 상 아래에서 음식 부스러기를 줍게 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내가 행한 대로 하나님이 내게 갚으심이로다.”

여기서 ‘갚다’는 의미는 행위에 상응하는 보응을 가리킵니다. 히브리 성경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공의, 곧 ‘미쉬파트’(מִשְׁפָּט)는 단순한 감정적 복수가 아니라 무너진 질서를 바로잡는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과 연결됩니다.

아도니 베섹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행했던 폭력을 자신이 당하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무서운 영적 원리를 발견합니다.

죄는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가한 상처, 내가 권력을 이용하여 짓밟은 사람, 내가 무시한 약자, 내가 아무렇지 않게 던진 잔인한 말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사람은 잊어도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칼로 사용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 자신을 돌아보는 거울로 삼고 싶습니다.

혹시 저는 누군가를 제 식탁 아래로 밀어 넣고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실제로 사람을 식탁 밑에 두지는 않지만 관계 속에서는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직책을 이용해 사람을 작게 만들 수 있고, 말로 상대를 굴복시킬 수 있으며, 상대의 실수를 오래 기억하면서 자존심을 꺾어 놓을 수도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부부 사이에서,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힘의 차이는 존재합니다. 그리고 저는 힘을 가진 순간 무엇을 하는지를 통해 제 신앙의 깊이가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아도니 베섹은 힘을 가진 동안 칠십 명의 왕을 모욕했습니다.

그는 승리를 누렸지만 긍휼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권력을 얻었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자신이 만든 질서 속으로 자신이 들어갑니다.

이 장면을 묵상하면서 저는 갈라디아서의 말씀도 떠올립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행위가 아무 의미 없이 사라진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저는 복음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제가 행한 그대로만 제게 갚으신다면 저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아도니 베섹의 고백은 사실 모든 인간이 해야 할 고백입니다.

“내가 행한 대로 갚음을 받는다면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질문 앞에서 십자가의 의미가 선명해집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는 하나님의 공의가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가 철저히 드러납니다. 죄의 심판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죄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그 심판을 담당하셨습니다.

제가 받아야 할 저주의 자리에 예수께서 서셨습니다.

제가 받아야 할 정죄를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사랑만을 말하는 사건도 아니고 심판만을 말하는 사건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공의와 깊은 사랑이 만나는 자리입니다.

저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죄를 가볍게 여길 수 없습니다.

동시에 절망할 수도 없습니다.

심판을 받아 마땅한 저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아는 사람은 보복의 사람이 아니라 용서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행한 대로 갚아 주겠다”라는 마음은 인간적으로 자연스럽습니다. 상처받으면 상처를 돌려주고 싶고, 모욕당하면 모욕하고 싶으며, 배신당하면 상대도 고통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 서면 질문이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내가 행한 그대로 다루지 않으셨다면, 나는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이것이 복음이 만들어 내는 새로운 윤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심판하신다는 사실은 제가 심판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최종적인 심판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제 마음속의 작은 아도니 베섹을 발견합니다.

나를 힘들게 한 사람에게 언젠가 똑같이 갚아 주고 싶은 마음,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 상대가 실패하면 속으로 통쾌해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저를 다른 길로 부릅니다.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저는 정의와 자비를 함께 선택해야 합니다.

아도니 베섹의 이야기는 결국 예루살렘에서 끝납니다.

세상의 권력은 그렇게 끝납니다.

아무리 많은 왕들을 발아래 두었던 사람도 결국 죽습니다. 아무리 강력한 힘을 가졌던 사람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무력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더욱 겸손해지고 싶습니다.

오늘 제게 작은 권한이 주어져 있다면 그것을 사람을 눌러 놓는 데 사용하지 않고 사람을 살리는 데 사용하고 싶습니다.

말 한마디를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면 정죄보다 세우는 말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저 역시 하나님의 자비 없이는 설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점령한 땅보다 중요한 것은 끝까지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삿 1:8-10)

8절부터는 유다 자손의 정복 과정이 계속됩니다. 유다는 예루살렘과 싸워 그 성을 점령하고 칼날로 치고 불사릅니다. 이후 산지와 남방, 평지에 거주하는 가나안 사람들과 싸우기 위해 내려갑니다.

이 장면에서 저는 하나님의 약속이 추상적인 개념으로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주었다”고 말씀하셨지만 유다는 실제로 움직여야 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야 했고, 산지로 가야 했고, 남방으로 가야 했으며, 평지로 가야 했습니다.

신앙은 언제나 구체적인 삶으로 내려옵니다.

“하나님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 고백은 결국 월요일의 직장과 가정과 인간관계와 돈의 사용과 말의 습관과 욕망의 자리에서 검증됩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오래 할수록 말의 신앙과 삶의 신앙 사이에 얼마나 큰 간격이 생길 수 있는지를 느낍니다.

말씀을 많이 알고, 신학적 용어를 많이 이해하고, 설교를 오래 들어도 실제 삶의 영역을 하나님께 내어 드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본문 속 유다는 산지와 남방과 평지로 이동합니다.

저는 이 지리적 표현을 억지로 영적인 비유로 바꾸고 싶지는 않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실제 가나안 땅의 여러 지형입니다. 그러나 그 역사적 사실 속에서 저는 하나님의 약속이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중요한 원리를 배웁니다.

하나님은 제 삶의 한 부분만 다스리는 분이 아닙니다.

주일만 하나님의 땅이고 월요일부터 토요일은 제 땅이 아닙니다.

교회만 하나님의 영역이고 돈과 관계와 욕망은 제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내 삶의 모든 지경을 그분의 통치 아래 두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기업’ 또는 ‘유업’이라는 개념은 중요합니다. 히브리어 ‘나할라’(נַחֲלָה)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분배하여 주신 기업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은 단순한 부동산이 아니었습니다. 언약의 약속이 역사 속에 구체적으로 나타난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신약으로 넘어가면서 이 유업의 의미는 더욱 깊고 넓어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지는 궁극적인 기업은 특정한 영토에만 갇히지 않습니다. 베드로전서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유업을 말합니다. 신약의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궁극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 곧 새 창조의 완성으로 나아갑니다.

이렇게 보면 사사기 1장의 땅 이야기는 단순히 고대 이스라엘의 국토 확장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약속하신 기업을 주시고 그 약속을 역사 속에서 이루어 가시는 구속사의 한 장면입니다.

그러나 저는 동시에 사사기의 전체 흐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승리를 마냥 낙관적으로만 바라볼 수 없습니다.

사사기 1장의 초반은 유다의 승리로 시작하지만 장 전체를 읽어 가다 보면 이스라엘의 불완전한 순종이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쫓아내야 할 가나안 족속을 완전히 몰아내지 못하고 함께 거주하게 됩니다.

그 작은 타협들이 결국 사사기 전체의 비극적인 순환을 만들어 냅니다.

저는 이 점이 두렵습니다.

신앙의 무너짐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는 경우보다 작은 타협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별것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한 번쯤은 괜찮겠지.”

“다들 그렇게 사는데 무엇이 문제인가.”

하지만 마음속에 남겨 둔 작은 우상이 시간이 지나면서 삶을 지배하기도 합니다.

죄를 완전히 몰아내야 할 자리에서 적당히 공존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면 결국 죄가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제 삶에도 그런 ‘남겨 둔 가나안’이 없는지 묻게 됩니다.

끊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붙들고 있는 습관은 없는가.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계속 간직하고 있는 미움은 없는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하는 무엇인가가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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