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아내지 못한 것이 아니라 남겨 두었습니다
- 매일성경 묵상 사사기 1:22-36
오늘도 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씀 앞에 앉습니다. 사사기 1장 후반부를 읽으면 처음의 힘찬 정복 이야기가 점점 어두운 방향으로 기울어 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함께하셨다”는 말로 시작하지만, 곧 “쫓아내지 못하였다”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더 정확히 들여다보면 힘이 없어서 실패한 것만도 아닙니다. 힘이 생긴 뒤에도 가나안 사람을 남겨 두고 노역을 시켰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죄와 타협하는 제 마음을 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순종이 무엇인지, 작은 타협이 어떻게 신앙 전체를 흔들 수 있는지, 그리고 불완전한 우리를 끝까지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함께 묵상해 보려 합니다.
벧엘을 얻었지만 옛 질서는 다른 곳에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삿 1:22-26)
본문은 요셉 가문이 벧엘을 치러 올라가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22절의 첫 문장이 중요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며 잠시 멈추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무엇을 이루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함께하셨습니다. 전쟁의 승리보다 하나님의 임재가 먼저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시작은 언제나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능력이 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는가가 중요합니다.
벧엘은 본래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히브리어 ‘베이트 엘’(בֵּית־אֵל)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집’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 성의 옛 이름이 루스였다고 말합니다.
이 이름을 보는 순간 저는 창세기의 야곱을 떠올립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도망하던 밤, 돌을 베고 잠을 자다가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와 하나님의 천사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그는 그곳을 벧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벧엘이라는 이름에는 하나님의 임재와 언약의 기억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이 야곱에게 이어지고,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이 이제 그 땅을 차지하는 장면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봅니다.
세대는 바뀝니다.
아브라함도 죽고, 이삭도 죽고, 야곱도 죽었으며, 모세도 여호수아도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죽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생애보다 하나님의 언약은 깁니다.
저는 제 인생을 너무 짧은 시간 안에서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한 해의 결과를 보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판단하고, 몇 달의 어려움만으로 하나님이 나를 잊으셨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벧엘을 바라보면 하나님의 시간은 제 시간보다 훨씬 길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야곱이 돌베개를 베었던 그 땅을 수백 년 후 그의 후손들이 다시 밟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잊지 않으십니다.
요셉 가문은 벧엘을 정탐하게 합니다. 정탐꾼들은 성에서 나오는 한 사람을 만나 성읍의 입구를 알려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면 그에게 선대하겠다고 약속합니다.
그 사람은 입구를 알려 주었고, 이스라엘은 성읍을 칼로 치되 그 사람과 그의 가족은 살려 줍니다.
겉으로 보면 여리고에서 라합이 정탐꾼을 숨겨 주었던 사건과 비슷해 보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고백했습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심을 인정했고, 결국 이스라엘 공동체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벧엘의 이 사람에게서는 그러한 신앙 고백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본문은 그가 헷 사람의 땅으로 가서 성읍을 건축하고 그 이름을 다시 ‘루스’라고 불렀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 대목이 매우 의미심장하게 느껴집니다.
벧엘에서 제거된 루스가 다른 곳에서 다시 세워집니다.
하나님의 집이라는 이름이 자리 잡았지만, 과거의 질서를 상징하는 이름도 다른 장소에서 다시 살아납니다.
본문은 이 행동을 장황하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사기 전체의 흐름 속에서 보면 이 장면은 앞으로 반복될 불완전한 정복과 타협의 분위기를 암시합니다.
저는 여기에서 제 신앙생활을 돌아봅니다.
혹시 저는 어떤 죄를 한 자리에서만 옮겨 놓고 제거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묻게 됩니다.
겉으로는 끊은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방식으로 다시 세우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합니다.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하나 내려놓았지만, 다른 방식으로 인정욕구를 채우고 있을 수 있습니다.
돈에 대한 탐욕을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성공에 대한 집착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세울 수도 있습니다.
육체적인 욕망을 끊었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속 상상과 은밀한 습관을 그대로 품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미움을 버렸다고 말하지만 상대가 실패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 미움을 다른 자리에 다시 세울 수도 있습니다.
루스는 다른 땅에서 다시 세워졌습니다.
죄는 이름을 바꾸고 형태를 바꾸어 살아남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신앙을 단순한 행동 수정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것은 장소를 옮긴 죄가 아니라 죽은 죄입니다.
신약의 언어로 말하면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는 것입니다.
바울은 죄를 관리하라고 하지 않고 죽이라고 말합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권면합니다.
왜 이렇게 강하게 말할까요?
죄는 그대로 두면 자라기 때문입니다.
조금의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때때로 죄를 너무 합리적으로 다루려 합니다.
“이 정도는 내 삶에 큰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다.”
“적당히 통제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도 이 정도는 가지고 산다.”
그러나 사사기를 읽으면 죄와 우상에 대한 작은 양보가 이후 이스라엘 전체를 얼마나 깊은 혼란으로 끌고 가는지 보게 됩니다.
여기서 저는 ‘쫓아내다’라는 중요한 히브리어를 생각합니다. ‘야라쉬’(יָרַשׁ)는 어떤 경우에는 소유하다, 차지하다라는 뜻을 가지며, 정복의 문맥에서는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한다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그러나 기업을 차지하려면 그 땅에 자리 잡은 우상숭배적 질서와 분리되어야 했습니다.
여기에는 구속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가나안 정복을 오늘의 교회가 문자적으로 반복해야 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성취와 가나안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특정한 구속사적 상황 안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새 언약 시대의 교회가 싸우는 대상은 민족이나 사람 자체가 아닙니다.
우리의 싸움은 죄와 거짓과 사탄의 권세를 향한 영적인 싸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죽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오늘 ‘쫓아내야 할 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제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교만입니다.
탐욕입니다.
음욕입니다.
질투입니다.
사람을 이용하려는 욕망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기충족의 마음입니다.
이것들은 내 마음 안에서 ‘루스’라는 옛 성을 다시 세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저를 단순히 조금 나은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는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 안에서 새로운 생명이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인의 변화는 외부의 몇 가지 행동을 고치는 수준을 넘어섭니다.
중심이 바뀌는 것입니다.
왕이 바뀌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었던 삶에서 그리스도께서 주인이 되시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제 안에 다시 세워진 루스가 없는지 살펴보고 싶습니다.
과거에는 분명 끊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다른 모습으로 다시 살아나 있지는 않은지, 회개했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장소만 옮겨 둔 것은 아닌지 묵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옛 이름을 다른 곳에서 다시 세우지 않게 하소서. 벧엘을 벧엘답게 하시고, 제 삶 전체가 하나님의 집이 되게 하소서.”
그리스도 안에서 제 삶의 일부만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관계와 돈과 욕망과 말과 시간까지 새롭게 되기를 원합니다.
강해졌는데도 쫓아내지 않은 이유를 제 마음에서 찾습니다 (삿 1:27-30)
27절부터 분위기가 급격하게 무거워집니다.
므낫세는 벧스안과 그 주변 마을의 주민을 쫓아내지 못합니다. 다아낙도 그렇고, 돌도 그렇고, 이블르암도 그렇고, 므깃도도 그렇습니다.
본문은 반복해서 말합니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
여기에서 ‘결심하고’라는 표현이 눈에 들어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 땅에 계속 거주하려 했습니다.
죄 역시 그렇습니다.
저는 죄가 가만히 기다렸다가 제가 원하면 떠나는 손님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죄는 자리를 차지하려 합니다.
마음을 점령하려 합니다.
한 번 허용한 틈을 거점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죄와의 싸움에는 단호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28절에서 더 중요한 사실이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저는 이 구절에서 사사기 1장 전체의 핵심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를 봅니다.
처음에는 “쫓아내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강해진 후에도 쫓아내지 않습니다.
이제는 능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의지의 문제가 됩니다.
못한 것이 아니라 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강해졌습니다.
원한다면 가나안 족속을 제거할 수 있는 위치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들을 남겨 두고 노역을 시킵니다.
노역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스’(מַס)는 강제 노동이나 부역, 조공의 성격을 가진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의 생각은 현실적으로 매우 합리적으로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굳이 쫓아낼 필요가 있는가?”
“일꾼으로 사용하면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가?”
“우리에게 세금을 내고 노동력을 제공한다면 오히려 유익하지 않은가?”
저는 이것이야말로 타협의 가장 위험한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죄를 버리지 않는 이유가 단순히 죄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때로는 죄가 유익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죄가 내게 어떤 이익을 주기 때문에 남겨 둡니다.
정직하게 살면 손해 보는 것 같아서 작은 거짓말을 남겨 둡니다.
관계를 끊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외로움을 달래 주기 때문에 잘못된 관계를 계속 붙잡습니다.
지나친 욕심이라는 것을 알지만 성공을 가져다줄 것 같아 내려놓지 않습니다.
미움을 품고 있으면 내가 강한 사람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용서를 거부하기도 합니다.
교만은 나를 높여 주고, 탐욕은 더 많은 것을 얻어 줄 것 같고, 분노는 상대를 통제할 힘을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죄를 노역시키는 것입니다.
죄를 제거하지 않고 이용하려 합니다.
저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면서 제 마음의 구조를 발견합니다.
“이것은 나쁜 것이기는 하지만 내게 쓸모가 있어.”
바로 그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지 말씀은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의 우상적 문화와 타협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보다 경제적인 효용을 선택했습니다.
순종보다 이익을 택했습니다.
이것이 사사기의 비극을 여는 문입니다.
저는 여기서 신앙의 매우 중요한 문제를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할 때도 자꾸 손익을 계산합니다.
“이렇게 하면 나에게 무엇이 좋은가?”
“이 명령을 따르면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용서하면 상대가 달라질까?”
“정직하게 살면 성공할 수 있을까?”
하지만 성경적 순종의 근거는 유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생명과 복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순종하는 순간에는 손해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 자체가 그렇습니다.
인간적인 계산으로 보면 십자가는 실패였습니다.
예수님은 권력을 얻지 않으셨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힘으로 제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종을 통해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빌립보서는 예수께서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순종은 조건부 순종이 아니었습니다.
“이 일이 내게 유익한가?”를 먼저 묻는 순종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 드리는 순종이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순종을 바라보며 제 불순종이 얼마나 쉽게 계산으로 포장되는지를 봅니다.
저는 종종 지혜롭다고 생각하며 타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지혜가 아니라 불순종일 수 있습니다.
29절에서는 에브라임이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들이 가운데 거주합니다.
30절에서는 스불론도 기드론과 나할롤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들에게 노역을 시킵니다.
반복되는 문장을 읽다 보면 답답함이 생깁니다.
“왜 계속 쫓아내지 못하는가?”
그러나 저는 이 질문을 이스라엘에게만 던질 수 없습니다.
“나는 왜 계속 같은 죄를 남겨 두는가?”
저 역시 반복합니다.
한 번 회개했다고 끝나지 않습니다.
어제 내려놓은 것을 오늘 다시 붙듭니다.
한때 뜨겁게 기도했지만 다시 냉랭해집니다.
말씀 앞에서 감동받았지만 생활로 돌아오면 이전의 습관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저는 복음이 단순히 과거의 죄를 한 번 용서받는 소식 이상이라는 사실을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과거의 죄책만 해결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현재 죄의 권세와 싸우게 하시며, 장차 죄의 존재 자체에서 우리를 완전히 해방하실 분입니다.
신학적으로 구원은 칭의만이 아니라 성화와 영화까지 포함합니다.
십자가로 의롭다 하시고,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시며, 마지막 날에 완전하게 하십니다.
저는 여전히 가나안을 남겨 두는 사람처럼 불완전합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제 안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화는 하루아침의 정복이 아니라 매일의 전쟁입니다.
오늘 탐욕을 죽이고, 내일 다시 올라오는 탐욕과 싸웁니다.
오늘 교만을 회개하고, 내일 다른 모습으로 찾아오는 교만을 발견합니다.
이 반복이 지겨울 때도 있습니다.
“나는 왜 아직도 이 모양인가?”
그러나 여기서 낙심하면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죄가 다시 나타나지 않는 완벽함이 아니라 죄와 평화를 맺지 않는 것입니다.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노역시키며 곁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실패할 수는 있지만 타협을 정당화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오늘 제 삶 속에서 “강해졌는데도 남겨 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싶습니다.
끊을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실은 버리기 싫어서 붙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정직하게 묻고 싶습니다.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하지만 사실은 다른 것을 더 좋아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용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사실은 분노를 내려놓기 싫어서일 수 있습니다.
검소하게 살 수 없다고 하지만 사실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 때문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제 변명보다 제 마음의 중심을 아십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렇게 기도하고 싶습니다.
“주님, 제가 ‘못한다’고 말하며 숨겨 둔 ‘하기 싫다’를 보여 주소서.”
이 기도가 조금 두렵습니다.
하지만 은혜는 진실을 피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죄를 덮어 감추는 은혜가 아니라 죄를 드러내고 용서하며 새롭게 하는 은혜입니다.
타협이 반복되자 하나님의 백성이 오히려 밀려나기 시작했습니다 (삿 1:31-36)
31절부터 상황은 더욱 심각해집니다.
아셀은 악고 주민과 시돈 주민과 알랍과 악십과 헬바와 아빅과 르홉 주민을 쫓아내지 못합니다.
그 결과 매우 의미 있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아셀 족속이 그 땅 주민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하였으니.”
앞에서는 가나안 사람들이 이스라엘 가운데 거주한다고 표현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문장의 중심이 뒤집힌 듯합니다.
이스라엘 지파가 가나안 사람들 가운데 거주합니다.
저는 이 작은 문장 변화가 사사기의 영적 추락을 보여 주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중심이고 가나안 사람들이 남아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타협이 계속되면서 어느 순간 하나님의 백성이 주변부로 밀려납니다.
죄의 특징이 바로 이렇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죄를 통제한다고 생각합니다.
“원할 때 멈출 수 있다.”
“내가 이것을 이용하는 것이다.”
“내가 주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관계가 역전됩니다.
내가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이 나를 지배하고, 내가 돈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나를 끌고 갑니다.
내가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이 내 시간을 통제합니다.
내가 분노를 이용해 상대를 통제한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분노가 내 삶을 지배합니다.
죄를 종으로 삼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내가 죄의 종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죄에는 중립지대가 없습니다.
죄와 동거하면서 내가 끝까지 주도권을 유지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33절에서는 납달리가 벧세메스 주민과 벧아낫 주민을 쫓아내지 못합니다.
그들 가운데 거주하다가 결국 그 주민들이 납달리에게 노역하게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여전히 어느 정도 힘을 행사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처음 명령과는 멀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34절에서 상황은 더욱 극적으로 뒤집힙니다.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하지 아니하였으며.”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사사기 1장의 비극이 절정에 이르는 것을 느낍니다.
누가 누구를 몰아내야 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차지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스라엘이 쫓겨납니다.
단 지파가 산지로 밀려나고 골짜기로 내려오지 못합니다.
순종해야 할 백성이 밀려나고 있습니다.
정복의 주체였어야 할 사람이 압박받는 대상이 됩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영적 타협의 마지막 결과를 봅니다.
죄를 남겨 두면 결국 죄가 내 삶의 영역을 좁혀 갑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부분만 차지합니다.
그러나 서서히 기도의 영역을 밀어냅니다.
말씀의 시간을 밀어냅니다.
건강한 관계를 밀어냅니다.
정직을 밀어냅니다.
감사를 밀어냅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 안에서 살아야 할 사람이 두려움과 욕망과 습관 속에 갇히게 됩니다.
저는 그래서 죄를 단순히 도덕적 실수 정도로 가볍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죄는 인간을 노예로 만듭니다.
성경에서 구원은 죄책의 용서인 동시에 종살이에서의 해방입니다.
출애굽이 그것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단순히 잘못한 것을 용서받은 것이 아닙니다.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더 큰 출애굽을 이루십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건져 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너를 용서한다”고 말씀하시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 자유롭게 살아라”고 부르십니다.
죄의 종으로 살지 말고 의의 종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35절에서는 아모리 족속이 헤레스 산과 아얄론과 사알빔에 계속 거주하려고 버팁니다. 그러나 요셉 가문의 힘이 강해지자 그들에게 노역을 시킵니다.
여기서 다시 같은 문제가 반복됩니다.
힘이 생겼지만 완전히 쫓아내지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이 반복을 왜 이렇게 자세히 기록하셨는지 생각합니다.
단순히 고대 부족의 정착 상황을 알려 주려는 것만은 아닙니다.
사사기 전체의 원인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사기의 반복되는 배교와 우상숭배와 압제는 갑자기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1장에서 이미 씨앗이 뿌려졌습니다.
불완전한 순종입니다.
적당한 타협입니다.
말씀보다 현실적인 이익을 더 중요하게 여긴 선택입니다.
“조금 남겨 두어도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여기서 작은 선택의 중요성을 배웁니다.
인생의 큰 붕괴는 대개 작은 균열에서 시작됩니다.
부부 관계도 한 번의 큰 사건보다 오랜 시간 쌓인 작은 무관심 때문에 무너지기도 합니다.
신앙도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기도를 미루고,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죄를 합리화하면서 서서히 약해집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보다 성공을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하고, 진리보다 사람의 인기를 더 중요하게 여기며, 거룩보다 규모와 성과를 우선하기 시작하면 겉으로는 강해 보여도 중심에서는 이미 타협이 진행될 수 있습니다.
저는 특히 목회자로서 이 말씀을 두렵게 받습니다.
교회가 강해지는 것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사람이 많고, 재정이 안정되고, 프로그램이 많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스라엘도 강해졌습니다.
그런데 강해진 뒤에 오히려 하나님의 명령을 자기 방식대로 바꾸었습니다.
힘이 약할 때보다 힘이 강할 때 더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약할 때는 하나님을 의지하지만 강해지면 하나님 없이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래서 하나님께 성공보다 충성을 구하고 싶습니다.
“주님, 저를 크게 쓰소서”라는 기도보다 “주님, 끝까지 순종하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더 많이 드리고 싶습니다.
본문 마지막 36절은 아모리 족속의 경계를 설명하며 마무리됩니다.
지리적인 경계선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저는 여기서 ‘경계’라는 개념을 생각하게 됩니다. 히브리어로 경계를 뜻하는 ‘게불’(גְּבוּל)은 땅의 한계와 영역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주신 경계를 확장하며 약속의 땅을 차지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불순종 때문에 오히려 원수의 경계가 남아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제 마음에 적용해 봅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려야 할 마음의 영역에 아직 다른 경계선이 그어져 있지는 않은가 묻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하나님께 드리지만 이 부분은 제가 간섭받고 싶지 않습니다.”
돈 문제는 내 방식대로 하고 싶고, 관계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고, 성적 욕망은 말씀의 기준에서 조금 벗어나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삶의 대부분을 드리고 작은 방 하나만 잠가 둡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제 삶의 일부만의 주님이 아닙니다.
그분은 모든 것의 주님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제게 끊임없이 묻습니다.
“아직 누구의 경계가 네 안에 남아 있느냐?”
저는 이 질문 앞에서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됩니다.
사사기 1장을 읽으면 인간의 불완전함이 선명해집니다.
유다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요셉 가문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므낫세도 에브라임도 스불론도 아셀도 납달리도 단도 실패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온전히 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사기는 점점 한 가지 질문을 만들어 냅니다.
“누가 하나님의 백성을 완전히 구원할 것인가?”
사사들이 일어납니다.
옷니엘도, 에훗도, 드보라도, 기드온도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제한된 구원자들입니다.
그들이 살아 있을 때 잠시 평화가 있지만 죽으면 다시 백성은 타락합니다.
이 반복은 궁극적으로 완전한 구원자를 기다리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실패했던 순종을 완전히 이루셨습니다.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지만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사람의 인기와 권력의 유혹에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도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승리는 가나안의 특정 도시를 정복한 승리보다 훨씬 큽니다.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를 깨뜨린 승리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새 창조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불완전한 순종을 바라보며 절망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완전하게 순종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그분의 의가 제 의가 되고, 그분의 승리가 제 구원의 근거가 됩니다.
하지만 은혜는 저를 타협 속에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저를 자유롭게 하셨기 때문에 이제 자유인답게 살라고 부르십니다.
성령께서 제 안에서 죄와 싸우게 하십니다.
새 언약은 돌판에 명령만 기록하는 언약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새기는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 새 마음을 주시고 새 영을 넣어 주시며 그의 율례를 따라 살도록 성령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화는 제가 홀로 가나안을 정복하는 일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제 안에서 이루시는 새 창조의 역사입니다.
오늘 저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아직 남아 있는 죄가 있다고 그것을 정상이라고 부르지 않겠습니다.
아직 넘어지는 부분이 있다고 타협을 정당화하지 않겠습니다.
매일 회개하고, 매일 복음을 붙들고, 매일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이 보여 주는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더 이상 죄의 경계가 없습니다.
죽음도 애통도 곡하는 것도 아픈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하고,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십니다.
벧엘, 곧 ‘하나님의 집’이라는 이름이 궁극적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날을 바라보며 오늘 제 마음의 작은 경계 하나를 더 하나님께 내어 드리고 싶습니다.
마무리
사사기 1장 후반부를 묵상하며 저는 한 번의 큰 불순종보다 반복되는 작은 타협이 더 두렵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처음에는 쫓아내지 못했다고 말하지만, 강해진 뒤에도 남겨 두었고, 결국 어떤 지파는 가나안 사람들 가운데 살았으며 단 지파는 오히려 산지로 밀려났습니다. 오늘 저는 제 안에 남겨 둔 ‘가나안’과 다른 곳에 다시 세운 ‘루스’를 정직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죄를 이용하거나 관리하려 하지 않고 십자가 앞으로 가져가겠습니다. 완전한 순종으로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성령의 도우심으로 작은 타협 하나라도 끊어 내겠습니다. 오늘 제 결단은 단순합니다. “주님, 제 삶에 주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경계를 남겨 두지 않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