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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사사기 9:1-6

하나님이 왕이신 자리에 사람이 왕이 되려 할 때

  • 매일성경 묵상 사사기 9:1-6

오늘도 저는 말씀 앞에 앉아 한 세대의 작은 타협이 다음 세대에서 어떤 비극으로 자라나는지를 바라봅니다. 기드온은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고 고백했지만 그의 삶에는 점차 왕과 같은 흔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아비멜렉은 아버지가 거절했던 왕의 자리를 폭력으로 차지합니다. 형제 칠십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이고 세겜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 왕이 됩니다. 저는 이 짧고 어두운 말씀에서 권력욕이 어떻게 신앙의 언어를 이용하고, 돈과 혈연과 여론이 악과 결탁할 수 있는지를 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제 안에 작은 왕국을 세우려는 욕망은 없는지 살피며, 섬김으로 다스리시는 참된 왕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자 합니다.

“나는 너희의 골육이다”, 아비멜렉은 관계를 이용해 권력을 얻었습니다 (삿 9:1-3)

사사기 9장은 기드온이 죽은 뒤 그의 아들 아비멜렉이 세겜으로 가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아비멜렉은 기드온과 세겜 출신 첩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입니다. 사사기 8장 31절은 이미 그의 출생을 특별히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부터 의미심장합니다.

‘아비멜렉’(אֲבִימֶלֶךְ)은 일반적으로 “내 아버지는 왕이다” 혹은 “아버지는 왕이다”라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저는 이 이름을 볼 때 사사기 8장에서 기드온이 했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기드온과 그의 아들과 손자가 자신들을 다스려 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는 분명히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말은 정확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이름은 “아버지는 왕이다”라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드온의 삶도 점차 왕처럼 변해 갔습니다. 많은 아내를 두었고 아들이 칠십 명이나 되었으며 많은 금과 전리품을 소유했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부모 세대의 작은 모순이 다음 세대에서 훨씬 크게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합니다.

기드온은 공식적으로 왕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왕과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아비멜렉은 그 모호함을 더 이상 유지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왕이 되려고 합니다.

한 세대에서 타협으로 남아 있던 것이 다음 세대에서는 노골적인 욕망이 됩니다.

저는 이 사실이 두렵습니다.

제 삶에서 제가 가볍게 허용한 것이 다음 세대에게는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돈을 조금 지나치게 사랑하면 자녀는 돈을 인생의 절대 기준으로 배울 수 있습니다.

제가 사람들의 평가를 지나치게 의식하면 다음 세대는 인정받지 못하면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입으로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실제 선택에서는 세상의 성공을 가장 높이면 자녀들은 제 말보다 제 선택을 배울 것입니다.

신앙은 말로만 전수되지 않습니다.

삶의 우선순위로 전달됩니다.

아비멜렉은 세겜으로 가서 외가의 형제들에게 접근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의 온 가족에게 한 가지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게 합니다.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아비멜렉의 전략은 교묘합니다.

그는 먼저 선택지를 왜곡합니다.

기드온의 아들 칠십 명이 실제로 함께 왕 노릇하려 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비멜렉은 마치 선택지가 두 가지밖에 없는 것처럼 말합니다.

칠십 명에게 지배받을 것인가,

한 사람에게 지배받을 것인가.

그리고 그 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고 암시합니다.

저는 여기서 권력욕이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봅니다.

욕망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기보다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구성합니다.

사람의 두려움을 자극하고,

복잡한 현실을 단순한 두 편으로 나누고,

자신을 유일한 해결책으로 제시합니다.

저도 제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비슷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선택을 이미 마음속으로 결정해 놓고 하나님께 묻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다.

제 행동에 유리한 성경구절만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상대의 잘못은 크게 설명하고 제 책임은 작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중요한 선택을 할 때 제 언어부터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지금 사실을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욕망을 정당화하고 있는가?”

아비멜렉은 이어서 아주 강력한 말을 덧붙입니다.

“또 내가 너희의 골육임을 기억하라.”

혈연을 내세웁니다.

그는 자신이 세겜 사람들과 같은 피를 나눈 사람이라고 강조합니다.

‘골육’이라는 표현은 문자 그대로 뼈와 살이라는 뜻을 담고 있으며 가까운 친족 관계를 강조합니다.

아비멜렉이 내세우는 기준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인격도 아닙니다.

공의로운 통치 능력도 아닙니다.

“나는 너희 편이다”라는 혈연적 소속감입니다.

세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매력적인 제안이었을 것입니다.

기드온의 다른 아들들은 세겜과 직접적인 혈연관계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비멜렉은 자신들의 친족입니다.

그가 권력을 잡으면 세겜에 유리할 것이라 기대할 수 있습니다.

결국 3절은 세겜 사람들의 마음이 아비멜렉에게로 기울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는 우리 형제라.”

저는 이 장면을 보며 인간이 옳고 그름보다 ‘우리 편인가’를 더 중요하게 여길 수 있음을 생각합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매우 강한 유혹입니다.

가족이니까 무조건 편들 수 있습니다.

내 지역 사람이라는 이유로 판단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잘못은 작게 보고 싫어하는 사람의 잘못은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냐,

내 편이냐,

나에게 호의적인 사람이냐에 따라 동일한 행동을 다르게 평가한다면 공의가 무너집니다.

성경적 공동체는 혈연과 친분을 넘어 진리와 공의를 기준으로 해야 합니다.

야고보서는 사람을 외모로 차별하지 말라고 강하게 경고합니다.

하나님은 편견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종과 자유인이라는 인간의 우월성 기준이 무너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가족이 형성됩니다.

저는 그래서 인간관계가 소중하지만 그것이 진리보다 높은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내 사람”이라는 이유로 악을 악이라 말하지 못한다면 관계가 우상이 된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혈연을 이용합니다.

그는 가족을 사랑하기 위해 세겜을 찾은 것이 아니라 가족을 권력 획득의 발판으로 사용합니다.

저는 이 차이를 중요하게 봅니다.

사랑은 사람 자체를 목적으로 대합니다.

욕망은 사람을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저 역시 사람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필요할 때만 연락하고,

도움이 될 사람에게만 잘하며,

내 계획에 필요한 사람에게 관심을 보일 수 있습니다.

목회에서도 성도를 숫자나 사역 자원으로만 보면 위험합니다.

한 영혼은 교회 성장을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피로 사신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이용해 자기 왕국을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내어 주어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이 차이가 세상의 권력과 하나님 나라의 권력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아비멜렉은 사람을 사용해 왕이 되려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어 백성을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우십니다.

저는 오늘 제 관계 속에서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지, 이용하고 있는지 정직하게 살펴보고 싶습니다.

바알의 돈으로 형제를 죽이다, 우상숭배와 폭력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삿 9:4-5)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지지하면서 실제적인 행동이 시작됩니다.

그들은 바알브릿 신전에서 은 칠십 개를 꺼내 아비멜렉에게 줍니다.

이 장면은 매우 충격적입니다.

기드온이 죽은 뒤 이스라엘이 바알브릿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이미 사사기 8장 마지막에서 기록되었습니다.

이제 그 우상의 신전에서 나온 돈이 형제들을 살해하는 자금으로 사용됩니다.

저는 여기서 우상숭배와 폭력이 얼마나 깊이 연결될 수 있는지를 봅니다.

잘못된 예배는 잘못된 삶을 만들어 냅니다.

사람은 자기가 섬기는 것을 닮아 갑니다.

참 하나님을 예배하면 하나님의 거룩과 자비와 공의를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을 투사하여 만든 우상을 섬기면 결국 그 욕망이 삶을 지배합니다.

‘바알브릿’(בַּעַל בְּרִית)은 “언약의 바알”이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 자체가 아이러니합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이미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가 계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고,

애굽에서 백성을 구원하셨으며,

시내산에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참된 언약의 하나님을 버리고 “언약의 바알”을 선택했습니다.

가짜가 진짜의 이름을 흉내 낸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우상의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상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좋은 것을 흉내 냅니다.

안전을 약속합니다.

풍요를 약속합니다.

정체성을 주겠다고 합니다.

관계와 행복을 보장해 줄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그 중심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오늘도 비슷합니다.

돈은 “내가 너를 안전하게 해주겠다”고 말합니다.

명예는 “사람들이 너를 인정하면 가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권력은 “네가 통제권을 가지면 두려울 것이 없다”고 속삭입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언약의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필요한 도구일 수는 있지만 제 영혼을 책임질 주인은 아닙니다.

더 심각한 것은 세겜 사람들이 우상의 돈을 아비멜렉에게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종교와 정치적 욕망이 결합합니다.

신앙의 이름을 가진 장소에서 나온 자원이 살인과 권력 장악에 사용됩니다.

저는 이 장면이 오늘 교회에도 무서운 경고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적인 이름을 사용한다고 모든 행동이 거룩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라는 말을 붙였다고 하나님의 뜻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

신앙,

성경이라는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실제 목적은 인간의 권력과 이익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목적뿐 아니라 방법도 하나님 앞에서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방식으로 이루려 한다면 이미 문제가 시작된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그 은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을 고용합니다.

개역개정이 그렇게 번역한 표현은 가치 없고 무모하며 쉽게 폭력에 동원될 수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들은 아비멜렉을 따릅니다.

돈으로 모은 사람들이고 권력욕을 위해 조직된 집단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진정한 공동체와 권력 집단의 차이를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는 진리와 사랑에 의해 묶입니다.

그러나 아비멜렉의 집단은 돈과 이해관계로 묶였습니다.

이런 관계는 목적이 끝나면 쉽게 무너집니다.

오늘 저는 누구와 왜 함께하는지 돌아봅니다.

신앙 공동체는 무엇 때문에 함께합니까?

나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입니까?

내 의견을 지지해 주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때문에 서로 형제와 자매가 되었습니까?

교회의 중심은 동일한 취향도,

정치적 생각도,

사회적 배경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입니다.

5절에서 이야기는 비극의 절정으로 들어갑니다.

아비멜렉은 오브라에 있는 아버지 집으로 가서 자기 형제 칠십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입니다.

한 사람씩 죽였음을 암시하는 매우 잔혹한 표현입니다.

왕권을 얻기 위한 조직적인 학살입니다.

아비멜렉에게 형제는 경쟁자가 되었습니다.

같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기 왕좌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제거합니다.

저는 권력욕의 본질이 여기에서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권력 자체가 항상 악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도 사람에게 책임과 권한을 맡기십니다.

문제는 권력을 자기 존재를 확립하는 수단으로 사용할 때입니다.

그때 사람은 경쟁자가 됩니다.

다른 사람의 성공이 위협처럼 느껴지고,

다른 사람의 영향력을 줄여야 내가 커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의 길은 극단적이지만 그 씨앗은 제 마음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합니다.

그 사람이 칭찬받으면 마음이 불편합니다.

누군가 잘되는 모습을 순수하게 기뻐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것이 자라면 관계를 깎아내리고,

비판하고,

심지어 상대가 실패하기를 바라게 됩니다.

형제를 실제로 죽이지는 않아도 마음으로 그의 자리를 죽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의 뿌리를 마음의 분노와 멸시까지 깊이 추적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비멜렉의 살인을 멀리 있는 극악한 사건으로만 보지 않고, 제 안의 경쟁과 질투를 살펴보는 거울로 삼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멸절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막내아들 요담이 숨었으므로 살아남습니다.

요담은 이후 아비멜렉의 악을 고발하는 사람이 됩니다.

저는 이 작은 문장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봅니다.

악이 모든 것을 장악한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께서는 증언의 씨앗을 남겨 두십니다.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사람을 남겨 두셨던 것처럼,

왕의 학살 속에서 모세를 살리셨던 것처럼,

헤롯의 위협 속에서도 예수님의 생명을 지키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악보다 크십니다.

그렇다고 요담의 생존이 형제들의 죽음을 가볍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성경은 악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 주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마지막 말은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저는 이 사실을 붙듭니다.

세상이 어두워 보여도 악이 최종 승자가 아닙니다.

십자가가 그것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인간의 악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습니다.

정치 권력과 종교 권력, 군중의 욕망과 제자의 배신이 결합했습니다.

겉으로 보면 악이 승리한 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십자가를 구원의 자리로 바꾸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습니다.

악은 죽일 수 있었지만 부활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담 한 사람의 생존에서도 더 멀리 부활의 소망을 바라봅니다.

한 바위에서 형제를 죽이고 한 상수리나무에서 왕이 되었습니다 (삿 9:6)

6절은 아비멜렉의 정치적 욕망이 마침내 완성되는 장면입니다.

“세겜의 모든 사람과 밀로의 모든 족속이 모여 가서 세겜에 있는 기둥 상수리나무 곁에서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으니라.”

저는 이 한 절 안에 들어 있는 역설을 생각합니다.

아비멜렉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하나님의 선택된 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없습니다.

선지자의 부름도 없습니다.

백성의 회개도 없습니다.

돈,

혈연,

폭력,

정치적 결탁을 통해 왕이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를 왕으로 인정합니다.

다수의 지지가 반드시 하나님의 인정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사람이 많이 모였다고 항상 옳은 것은 아닙니다.

절차를 통해 결정되었다고 그것이 자동으로 하나님의 뜻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에서 인간의 판단과 하나님의 판단이 다른 장면은 반복됩니다.

이스라엘은 사울의 외모를 보고 왕답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셨습니다.

사무엘조차 엘리압을 보고 하나님의 기름 부을 자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선택하셨습니다.

저는 그래서 다수의 의견을 존중하되 진리의 최종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대의 여론도 변합니다.

문화의 기준도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제 삶을 판단하는 더 깊은 기준입니다.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운 장소도 주목할 만합니다.

“기둥 상수리나무 곁”입니다.

세겜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장소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뒤 세겜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여호수아 시대에는 이곳에서 이스라엘이 언약을 새롭게 했습니다.

여호수아 24장에서 백성은 세겜에 모여 여호와만 섬기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여호수아는 큰 돌을 상수리나무 아래 세워 언약의 증거로 삼았습니다.

그런 세겜에서 이제 아비멜렉이 왕으로 세워집니다.

저는 이 대조가 매우 슬프게 느껴집니다.

한때 “우리는 여호와를 섬기겠습니다”라고 고백했던 장소에서 인간 왕을 세웁니다.

언약을 기억해야 할 자리가 권력욕의 무대로 변했습니다.

신앙의 장소가 자동으로 사람의 신앙을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교회 건물 안에 있다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책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의 전통이 오래되었다고 현재의 믿음이 건강한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누가 왕인가입니다.

저는 이 질문을 제게 던집니다.

“지금 내 삶의 왕은 누구입니까?”

입으로는 예수님이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실제 결정을 내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두려움입니까?

사람의 인정입니까?

제 욕망입니까?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까지 이용하려 한다면 실제 왕은 하나님이 아니라 저 자신일 수 있습니다.

아비멜렉의 가장 근본적인 죄는 왕이 되고 싶어 했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왕이신 자리에 자신이 올라가려 했습니다.

이것은 에덴동산에서 시작된 인간의 죄와도 닮았습니다.

뱀은 인간에게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유혹했습니다.

죄의 중심에는 늘 자기 왕권이 있습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겠다.”

“선과 악의 기준도 내가 정하겠다.”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 다른 사람을 사용할 수 있다.”

아비멜렉은 그 욕망을 정치적 폭력으로 극단적으로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그 뿌리는 제 안에도 있습니다.

기도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 제 뜻을 이루어 달라고 요구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읽으면서도 순종할 말씀만 골라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부르면서 실제로는 제가 통치하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단순히 죄 몇 가지를 고치는 일이 아닙니다.

왕좌가 바뀌는 사건입니다.

내가 왕이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아비멜렉과 예수 그리스도의 극명한 차이를 봅니다.

아비멜렉은 왕이 되기 위해 형제들을 죽였습니다.

예수님은 형제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죽으셨습니다.

아비멜렉은 피를 흘리게 하고 왕좌에 올랐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피를 흘리시고 십자가라는 왕좌에 오르셨습니다.

아비멜렉은 사람들을 제거해서 경쟁자를 없앴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용서하여 하나님의 가족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아비멜렉의 왕권은 인간의 욕망과 폭력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사랑과 순종과 자기희생 위에 드러났습니다.

빌립보서 2장은 예수님께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세상의 왕은 올라가기 위해 다른 사람을 밟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가셨기 때문에 참된 왕으로 높임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아비멜렉의 왕국은 잠시 지속되다가 비참하게 무너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부활하신 왕은 다시 죽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통치는 폭력과 공포가 아니라 의와 평강과 기쁨의 통치입니다.

저는 그래서 오늘 제 마음의 왕좌를 다시 점검하고 싶습니다.

사람을 이용하여 제 왕국을 세우지 않겠습니다.

혈연과 친분 때문에 진리를 굽히지 않겠습니다.

사람들의 지지를 하나님의 승인으로 착각하지 않겠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왕이 되려는 욕망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겠습니다.

참된 자유는 제가 왕이 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선하신 그리스도가 제 왕이 되시는 데 있습니다.

마무리

사사기 9장 1절부터 6절을 묵상하며 저는 기드온 시대의 작은 균열이 아비멜렉에게서 피비린내 나는 왕권욕으로 자라난 모습을 봅니다. 그는 혈연을 이용하고, 바알의 돈으로 사람을 고용하며, 형제들을 죽이고 왕이 되었습니다. 오늘 저는 목적을 위해 사람을 이용하지 않고, 다수의 지지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중요하게 여기겠습니다. 무엇보다 제 마음속에서 제가 왕이 되려는 욕망을 경계하겠습니다. 형제를 죽이고 왕좌에 오른 아비멜렉이 아니라, 형제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어 주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제 삶의 왕으로 모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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