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사사기 3:1-11

시험의 땅에서 다시 하나님을 배우다

  • 매일성경 묵상 사사기 3:1-11

오늘도 저는 말씀 앞에 앉아 제 삶을 비추어 봅니다. 사사기 3장 1절부터 11절에는 이스라엘이 왜 가나안 족속들 가운데 남겨졌는지, 그 시험 속에서 어떻게 우상숭배에 빠졌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옷니엘을 세워 다시 구원하시는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본문에서 시험은 단지 나를 힘들게 하는 사건이 아니라 내 믿음의 실체를 드러내는 자리임을 배웁니다. 동시에 실패한 백성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자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긍휼도 발견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제 안에 남아 있는 타협과 우상을 살펴보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순종의 길을 다시 선택하고 싶습니다.

남겨진 민족들은 이스라엘의 믿음을 시험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삿 3:1-4)

사사기 3장은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여러 민족들을 왜 남겨 두셨는지를 설명하면서 시작합니다. 본문은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보여 줍니다. 첫째는 가나안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이스라엘 세대에게 전쟁을 가르치기 위함이었고, 둘째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에 순종하는지를 시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먼저 ‘남겨진 것’의 의미를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정복을 완전히 이루지 못했습니다. 사사기 1장에서 이미 여러 지파가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지 못하거나, 쫓아낼 수 있었음에도 노역을 시키며 남겨 두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인간의 불순종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사기 3장에서는 그 남겨진 민족들이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시험의 도구가 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긴장입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이스라엘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실패 때문에 자신의 목적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실패의 결과까지도 백성을 훈련하고 시험하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저는 여기서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깊은지를 생각합니다.

저는 제 삶의 실패를 돌아보며 종종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그때 그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더 순종했더라면.”

후회되는 일이 있습니다.

분명 제 책임으로 일어난 결과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일하실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제 잘못을 선이라고 부르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나 제 실패보다 크신 분입니다.

인간의 실수도, 죄도, 약함도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궁극적으로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저는 이 사실에서 위로를 얻습니다.

회개해야 할 것은 회개해야 합니다.

책임져야 할 것은 책임져야 합니다.

하지만 과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실 수 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남겨 둔 민족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블레셋의 다섯 군주, 모든 가나안 족속, 시돈 족속, 바알 헤르몬 산에서부터 하맛 어귀까지 레바논 산에 거주하는 히위 족속입니다.

저는 이런 지명과 민족의 목록을 읽을 때 그냥 지나가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 목록은 실제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이 마주해야 했던 현실적인 적들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의 시험은 관념적인 시험이 아니었습니다.

실제 힘을 가진 민족들이 주변에 있었습니다.

실제 전쟁이 있었고, 실제 문화적 압력이 있었으며, 실제 종교적 유혹이 있었습니다.

믿음은 언제나 현실 속에서 시험받습니다.

저 역시 추상적으로는 얼마든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돈이 걸리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인정이 걸리면 마음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관계가 깨질 위험이 생기면 진리를 타협하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건강이 무너지거나 계획이 틀어지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믿음은 실제 상황 속에서 드러납니다.

그래서 시험은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시험은 제 믿음을 드러냅니다.

본문 1절과 4절에 반복되는 ‘시험’이라는 개념은 히브리어 ‘나사’(נָסָה)와 연결됩니다. 이 말은 시험하다, 검증하다, 어떤 상태를 드러내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행동할지 몰라서 시험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시험을 통해 그들의 마음이 드러납니다.

무엇을 사랑하는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누구의 말을 따르는지,

하나님의 언약을 실제로 신뢰하는지가 드러납니다.

저는 시험받을 때 제 안에서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나타나는 경험을 합니다.

평소에는 제가 인내심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짜증이 올라옵니다.

평소에는 돈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불안해지면 온 마음이 돈에 붙잡힙니다.

평소에는 사람들의 평가에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나를 비판하면 며칠 동안 그 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시험은 제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만났을 때 저는 단순히 “이 문제를 빨리 없애 주세요”라고만 기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고통이 사라지기를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기도를 더 해야 합니다.

“주님, 이 시험을 통해 제 마음을 보여 주소서.”

“제가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지 드러내 주소서.”

“제가 어디에서 약한지 보게 하소서.”

저는 이 기도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제 모습이 제가 기대했던 모습과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은혜는 진실을 피하지 않습니다.

진실을 보게 하고, 그 진실을 십자가로 가져가게 합니다.

본문은 또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 전쟁을 가르치기 위해 이 민족들을 남겨 두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저는 ‘전쟁을 배운다’는 말이 단순히 군사 기술을 습득한다는 뜻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문자적으로는 실제 가나안 전쟁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전쟁의 배후에는 더 깊은 신앙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힘으로 땅을 차지한 민족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백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을 배운다는 것은 결국 자기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전쟁이 없다면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저는 제 삶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모든 일이 평탄할 때는 제가 꽤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제가 계획을 잘 세웠고, 제가 지혜롭게 선택했기 때문에 일이 잘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비로소 제 한계를 봅니다.

그때 기도하게 됩니다.

그때 말씀을 붙들게 됩니다.

그때 제가 얼마나 연약한 사람인지 인정하게 됩니다.

이것이 고난의 역설입니다.

고난 자체가 선한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선한 일을 이루십니다.

바울이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진다고 고백한 것도 같은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시험이 없는 삶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시험을 통해 저를 성숙하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날 때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시험 자체가 즐겁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오해하지 않으려 합니다.

고난당하는 사람에게 쉽게 “감사하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고통에는 눈물이 필요합니다.

위로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다는 소망은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사사기 3장은 이스라엘의 시험이 말씀에 순종하는지를 확인하는 시험이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결국 시험의 핵심은 순종입니다.

‘순종하다’와 연결되는 히브리적 사고에서 ‘듣다’는 매우 중요합니다. ‘샤마’(שָׁמַע)는 듣는 것과 순종하는 것을 함께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은 단순히 귀로 소리를 들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저는 말씀을 많이 듣습니다.

성경을 읽고, 설교하고, 신학적인 내용을 공부합니다.

하지만 말씀을 많이 안다고 해서 자동으로 순종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을 많이 아는 사람이 더 큰 책임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알고도 하지 않은 것”이 많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제게 묻습니다.

“나는 말씀을 알고 있는가, 아니면 말씀을 따르고 있는가?”

이 두 질문은 다릅니다.

용서하라는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용서하는가는 다른 문제입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는가는 다른 문제입니다.

정직해야 한다는 말씀을 압니다.

하지만 손해가 예상될 때도 정직한가는 다른 문제입니다.

시험은 그 차이를 보여 줍니다.

본문 속 이스라엘이 전쟁을 배우고 시험을 받은 것처럼 저 역시 매일 작은 영적 전쟁을 겪습니다.

신약은 그리스도인의 싸움이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죄와 거짓과 사탄의 유혹을 향한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정복을 오늘 문자적으로 반복하는 식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새 언약의 백성은 사람을 정복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러나 죄에 대해서는 단호해야 합니다.

제 안의 탐욕과 싸워야 합니다.

음욕과 싸워야 합니다.

교만과 싸워야 합니다.

거짓과 싸워야 합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과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이 싸움은 하루 만에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제 삶에 불편한 환경을 남겨 두심으로 제 믿음을 훈련하실 수도 있습니다.

사람을 통해 인내를 배우게 하시고,

경제적 한계를 통해 의존을 배우게 하시고,

질병이나 연약함을 통해 겸손을 배우게 하시며,

응답이 늦어지는 시간을 통해 기다림을 배우게 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시험이 올 때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는 질문만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주님, 이 상황에서 제가 무엇을 배우기를 원하십니까?”

이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험을 통과하는 힘이 제 의지에만 있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려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광야에서 시험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실패한 자리에서 예수님은 말씀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시험했고 우상에 빠졌지만, 예수님은 아버지께 끝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실패하지 않은 참 이스라엘이십니다.

그래서 저는 제 시험 앞에서 단지 “더 강해져야지”라고 결심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시험을 이기신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그분이 제 의가 되시고, 성령으로 저를 도우신다는 사실을 붙듭니다.

타협은 결혼으로 이어지고 결국 예배의 대상을 바꾸었습니다 (삿 3:5-7)

5절부터는 시험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가운데 거주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딸들을 아내로 맞이하고, 자신들의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며, 그들의 신들을 섬깁니다.

저는 이 세 문장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거주합니다.

결혼합니다.

섬깁니다.

타협의 과정이 단계적으로 나타납니다.

처음부터 우상을 섬기겠다고 결심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먼저 함께 살았습니다.

그 다음 관계가 깊어졌습니다.

그리고 결국 예배의 대상이 바뀝니다.

저는 죄가 들어오는 방식도 종종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처음에는 가까이 둡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조금 익숙해집니다.

그 다음에는 관계를 맺습니다.

마음이 붙습니다.

나중에는 그것을 섬기게 됩니다.

그래서 죄의 첫 단계에서 경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의 결혼 문제가 왜 그렇게 심각했을까요?

성경이 민족이나 인종이 다른 사람과의 결혼 자체를 무조건 금지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성경 안에서도 라합과 룻처럼 이방 출신이면서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고 언약 공동체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신앙이었습니다.

가나안의 신들을 섬기는 사람들과 언약적 결합을 맺으며 그들의 종교를 받아들인 것이 핵심입니다.

결혼은 단순한 개인적 감정의 결합이 아닙니다.

가정과 문화와 신앙이 깊이 얽히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가나안 사람들과 결혼하며 가나안의 신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오늘의 관계에도 적용해 봅니다.

사람은 자신이 가까이하는 사람에게 영향을 받습니다.

친구에게 영향을 받습니다.

배우자에게 영향을 받습니다.

공동체에 영향을 받습니다.

심지어 반복해서 보는 콘텐츠에도 영향을 받습니다.

저는 제가 무엇을 가까이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내 마음에 매일 무엇이 들어오는가.

누구의 말을 오래 듣는가.

어떤 가치관을 반복해서 접하는가.

그것이 결국 제 예배를 바꿀 수 있습니다.

예배는 단지 주일에 찬송하는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제가 가장 많은 시간과 마음과 돈을 바치는 것이 무엇인지 보면 제 실제 예배 대상이 드러납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겼다고 말합니다.

저는 여기서 “잊어버렸다”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히브리어 ‘샤카흐’(שָׁכַח)는 기억하지 않다, 잊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잊는다는 것은 단순한 기억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언약을 삶의 중심에서 밀어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름을 완전히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출애굽 이야기를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조상들의 하나님이 누구인지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 더 이상 삶을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망각’입니다.

저는 이 부분이 매우 두렵습니다.

저도 하나님을 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하나님을 잊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사역하면서도 하나님을 잊을 수 있습니다.

기도라는 행위를 하면서도 실제로는 제 욕망만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말하면서도 하나님 없이 살 수 있습니다.

신앙의 가장 큰 위기는 무신론자가 되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하나님이 없어도 되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계속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광야에서 먹이신 하나님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주신 은혜를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신약의 교회는 무엇을 기억해야 합니까?

십자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찬을 주시면서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십자가를 반복해서 기억해야 할까요?

우리는 너무 쉽게 다른 복음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성공이 복음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건강이 복음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부유함이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는 기준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인정이 구원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중심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저는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기억하면 제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도 기억합니다.

동시에 얼마나 큰 사랑을 받은 사람인지도 기억합니다.

그래서 교만할 수 없고 절망할 수도 없습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은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바알은 주로 풍요와 폭풍, 비와 관련된 가나안 신으로 숭배되었고, 아세라는 풍요와 다산과 연결된 여신 숭배와 관련됩니다.

저는 이 우상들이 결국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을 건드렸다고 생각합니다.

먹고사는 문제,

풍요롭게 살고 싶은 욕망,

생명과 생산,

안정과 번영입니다.

우상은 인간의 욕망과 연결됩니다.

그래서 우상은 단순히 “나쁜 신”을 믿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없이도 원하는 것을 얻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저는 오늘의 우상도 비슷하다고 봅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돈을 통해 하나님 없이 안전하려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성공이 문제라기보다 성공을 통해 제 가치를 증명하려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사람의 사랑이 문제라기보다 그 사랑이 하나님보다 더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상은 좋은 것을 궁극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팀 켈러가 자주 설명했듯이, 인간의 마음은 좋은 것을 ‘궁극적인 것’으로 바꾸어 우상화하기 쉽습니다.

저는 그래서 어떤 것을 좋아하는가만 보지 않고, 무엇을 잃었을 때 제 삶 전체가 무너지는지를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제 우상일 가능성이 큽니다.

돈을 잃으면 인생이 끝난 것처럼 느끼는가.

사람의 사랑을 잃으면 존재 가치가 사라진 것처럼 느끼는가.

직장을 잃으면 하나님도 나를 버리신 것처럼 느끼는가.

자녀의 성공이 좌절되면 내 삶 전체가 실패한 것처럼 느끼는가.

그 지점에 제 우상이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스라엘이 왜 바알에게 갔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보이는 신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즉각적인 풍요를 약속하는 종교가 매력적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선택은 결국 하나님을 잊는 일이었습니다.

저 역시 눈에 보이는 것을 더 신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기다려야 하지만 돈은 당장 숫자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는 불확실하게 느껴지지만 사람의 힘은 구체적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보이는 것보다 말씀을 더 신뢰하는 결단입니다.

저는 여기서 예수님의 광야 시험을 다시 떠올립니다.

사탄은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했습니다.

성전에서 뛰어내리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나라와 영광을 보여 주며 절하라고 했습니다.

결국 핵심은 동일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는 대신 즉각적인 만족과 권력과 안전을 선택하라는 유혹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으로 거부하셨습니다.

아버지께 순종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실패한 자리에서 그리스도는 승리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우상과 싸울 때 제 의지보다 그리스도의 순종을 의지합니다.

십자가는 제 우상을 깨뜨립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하나님만이 제 구원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돈도 나를 죄에서 구하지 못합니다.

사람의 사랑도 죽음을 이기지 못합니다.

성공도 죄책을 씻어 주지 못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구원하십니다.

저는 오늘 제 마음에 세워진 아세라와 바알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하나씩 이름을 붙여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싶습니다.

“주님, 이것이 제게 주님보다 더 중요해졌습니다.”

그 고백이 회개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르짖는 백성에게 성령을 입은 옷니엘을 세우셨습니다 (삿 3:8-11)

8절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고, 이스라엘은 팔 년 동안 그를 섬깁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다시 죄의 역설을 봅니다.

이스라엘은 자유를 얻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종살이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져 다른 신을 선택했지만, 결국 다른 왕을 섬기게 됩니다.

이것이 죄의 구조입니다.

죄는 자유를 약속하지만 노예 상태를 가져옵니다.

예수님도 죄를 범하는 자는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자유를 “내가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하는 것”으로 정의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적 자유는 다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선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죄를 거절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사랑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진리를 따라 살 수 있는 자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떠난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닙니다.

주인을 바꾸는 것일 뿐입니다.

이스라엘은 구산 리사다임을 팔 년 동안 섬깁니다.

‘구산 리사다임’이라는 이름은 해석상 여러 논의가 있지만,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외세의 왕으로 등장합니다.

저는 여기서 사사기의 패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을 봅니다.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합니다.

압제를 받습니다.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이 사사를 세우십니다.

구원받습니다.

평화를 누립니다.

그리고 다시 죄로 돌아갑니다.

이 반복이 사사기 전체를 관통합니다.

9절은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저는 이 한 문장이 참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그들이 완전하게 회개했다고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히브리어 ‘자아크’(זָעַק)는 심한 고통 속에서 도움을 청해 외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잊었지만 고통이 깊어지자 다시 하나님을 찾습니다.

저는 인간이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평안할 때 하나님을 잊습니다.

그러다가 어려워지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잘될 때는 제 능력으로 사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면 갑자기 기도가 깊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저를 보시면 답답하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필요할 때만 나를 찾느냐”며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구원자를 세우십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하나님의 긍휼 앞에 멈추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자격이 있어서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완벽한 회개를 증명했기 때문에 사사를 주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의 긍휼 때문에 구원자를 세우셨습니다.

구원은 언제나 은혜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을 사사로 세우십니다.

사사기 1장에서 이미 옷니엘을 만났습니다.

그는 기럇 세벨을 공격하여 점령했고 갈렙의 딸 악사를 아내로 얻었습니다.

그때 이미 용기와 믿음의 모습을 보여 주었던 인물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의 첫 사사로 사용하십니다.

저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준비시키는 방식을 봅니다.

사사기 1장의 한 지역 전투가 사소한 사건처럼 보였지만, 그것이 훗날 더 큰 사명을 위한 준비였을 수 있습니다.

오늘 제가 맡은 작은 일이 내일의 사명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작은 순종이 중요합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 정직하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작은 기도를 계속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해도 맡은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시간을 사용하십니다.

10절은 옷니엘 사역의 핵심을 보여 줍니다.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영’을 뜻하는 히브리어 ‘루아흐’(רוּחַ)는 바람, 숨, 영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영이 옷니엘에게 임하여 사사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능력을 주신 것을 말합니다.

저는 이 구절에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옷니엘이 구원자가 된 이유는 그의 타고난 능력 때문만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영이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감당한 것입니다.

저는 목회와 신앙생활에서 이것을 계속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은 능력을 개발해야 합니다.

공부도 해야 합니다.

준비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을 인간의 능력만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문제가 시작됩니다.

설교도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기도도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죄와 싸우는 것도 성령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성령의 열매입니다.

저는 제 힘으로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의욕이 넘치지만 지칩니다.

사람을 사랑하려고 하지만 상처를 받으면 마음이 닫힙니다.

죄를 끊겠다고 결심하지만 다시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더 강한 결심만이 아닙니다.

성령의 능력입니다.

옷니엘에게 임한 성령은 구약 시대 특정한 사명을 위해 능력을 부어 주시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신약에 이르면 성령의 역사는 더욱 풍성하게 펼쳐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후 오순절에 성령이 교회에 임합니다.

새 언약의 백성은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거하시며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죄를 깨닫게 하시며, 거룩하게 하시고, 복음을 증언하도록 힘을 주십니다.

저는 그래서 옷니엘 이야기를 읽으며 성령을 더욱 의지하고 싶습니다.

“주님, 제가 제 힘으로 믿으려 하지 않게 하소서.”

“제 힘으로 사람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게 하소서.”

“성령께서 제 생각과 말과 선택을 다스려 주소서.”

본문은 옷니엘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전쟁에 나가고,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의 손에 넘겨주셨다고 말합니다.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옷니엘이 싸웠지만 승리를 주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이것은 사사기 전체에서 반복되는 중요한 신학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속합니다.

사사는 도구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지도자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배웁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좋은 지도자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사람 자체가 구원자는 아닙니다.

옷니엘도 결국 죽습니다.

모든 사사는 죽습니다.

그리고 사사가 죽으면 백성은 다시 타락합니다.

인간 지도자의 한계가 분명합니다.

저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예수님은 사사들과 같으면서도 완전히 다른 구원자입니다.

사사들은 외부의 적에게서 잠시 구원했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하십니다.

사사들은 한 시대에만 활동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히 살아 계십니다.

사사들의 구원은 반복적으로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번에 이루어진 완전한 속죄입니다.

사사들은 결국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셨지만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구원은 구원자가 죽으면 끝나는 구원이 아닙니다.

부활로 확증된 영원한 구원입니다.

11절은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그 땅이 평온한 지 사십 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

사십 년의 평화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평화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옷니엘이 죽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 본문에서 다시 이스라엘의 타락을 만나게 됩니다.

사사기의 평화는 언제나 임시적입니다.

이 사실은 더 큰 안식을 기다리게 합니다.

히브리서가 말하는 참된 안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성될 안식입니다.

저는 오늘 제 삶의 평안도 영원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건강할 때가 있고 아플 때가 있습니다.

형편이 좋아질 때가 있고 어려워질 때가 있습니다.

좋은 사람과 함께할 때가 있고 이별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궁극적인 평화는 상황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평화입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립니다.

이 화평은 외부의 모든 문제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문제도 저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확신입니다.

저는 그래서 옷니엘의 사십 년 평화를 보면서 더 큰 평화를 바라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새 창조에서 완성될 영원한 안식입니다.

사사기는 반복되는 실패를 보여 주지만 성경의 마지막은 실패로 끝나지 않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옵니다.

다시는 압제자가 없습니다.

다시는 우상숭배가 없습니다.

다시는 죽음이 없습니다.

다시는 구원자가 죽어서 백성이 다시 혼란에 빠지는 일도 없습니다.

부활하신 어린양이 영원히 왕으로 다스리실 것입니다.

저는 그 소망을 붙들고 오늘의 영적 전쟁을 감당하고 싶습니다.

시험이 있다고 낙심하지 않겠습니다.

시험을 통해 제 믿음을 돌아보겠습니다.

우상이 드러나면 변명하지 않고 회개하겠습니다.

실패했을 때 하나님께 다시 부르짖겠습니다.

그리고 제 힘이 아니라 성령을 의지해 다시 순종하겠습니다.

마무리

사사기 3장 1절부터 11절을 묵상하며 저는 시험과 타협, 우상숭배와 구원이라는 제 삶의 현실을 함께 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시험하셨고, 그들은 가나안 문화와 타협하여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그러나 고통 가운데 부르짖자 하나님은 옷니엘을 세우시고 성령으로 능력을 주셔서 구원하셨습니다. 오늘 저는 제 시험을 불평만 하지 않고 제 믿음을 비추는 거울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마음속의 바알과 아세라를 찾아 내려놓고, 제 힘보다 성령을 의지하겠습니다. 잠시 구원하는 옷니엘보다 더 크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와 부활로 영원한 구원을 이루신 주님을 바라보며 오늘도 순종의 길을 걷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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