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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사사기 4:11-24

철 병거가 무너지던 날, 하나님은 예상 밖의 길로 승리를 이루셨습니다

  • 매일성경 묵상 사사기 4:11-24

오늘도 저는 말씀 앞에 앉아 인간의 힘과 하나님의 능력이 어떻게 다른지를 묵상합니다. 시스라에게는 철 병거 구백 대가 있었고 바락에게는 급히 모인 이스라엘 군대가 있었습니다. 눈으로만 보면 승패는 이미 결정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병거가 아니라 말씀으로 전쟁의 결과를 결정하셨고, 도망친 시스라의 마지막은 이름 없는 장막과 한 여인의 손에서 맞이하게 하셨습니다. 저는 이 본문을 읽으며 제가 강하다고 믿는 것은 무엇인지, 반대로 너무 약하다고 포기하는 것은 무엇인지 돌아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승리는 힘의 크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음을 배우고, 십자가와 부활로 죄와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를 다시 바라보고자 합니다.

철 병거가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하나님은 이미 승리를 선언하셨습니다 (삿 4:11-16)

11절에는 전쟁 이야기의 흐름을 잠시 끊는 듯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중 겐 사람 헤벨이 다른 겐 사람에게서 떠나 게데스에 가까운 사아난님 상수리나무 곁에 이르러 장막을 쳤더라.”

처음 읽을 때는 왜 전쟁 직전에 갑자기 헤벨의 이야기를 기록했는지 의아합니다.

바락과 시스라의 전쟁이 중요한 것 같은데 성경은 한 겐 사람의 이동을 굳이 알려 줍니다.

하지만 뒤의 이야기를 읽으면 이유를 알게 됩니다.

이 작은 정보가 시스라의 마지막과 연결됩니다.

저는 여기서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건을 바라볼 때 눈앞에서 가장 큰 움직임만 봅니다.

군대의 숫자,

철 병거,

전쟁의 전략,

지도자의 결정에 관심을 둡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전혀 다른 곳에서 이미 일을 준비하고 계실 수 있습니다.

시스라가 철 병거 구백 대를 움직이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사아난님 상수리나무 곁에 한 장막을 준비해 두고 계셨습니다.

헤벨의 이동은 당시에는 별 의미 없어 보였을 것입니다.

그저 한 사람이 가족과 함께 거처를 옮긴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에서는 그 이동조차 중요한 자리가 됩니다.

저는 제 삶에서도 이런 순간들을 자주 지나칩니다.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만남,

원하지 않았던 이동,

계획에 없었던 변화,

우연처럼 보였던 작은 사건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하나님의 더 큰 인도 속에 있었음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일을 억지로 의미화하고 싶지는 않지만, 동시에 제 눈에 의미 없어 보인다고 해서 하나님께도 의미 없는 것이라고 단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제가 즉시 이해할 수 있는 범위보다 큽니다.

‘섭리’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창조세계를 유지하시고 역사 가운데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통치를 의미합니다.

성경에서는 인간의 선택과 하나님의 주권이 신비롭게 함께 나타납니다.

헤벨은 자신의 이유로 이동했을 것입니다.

시스라는 자신의 군사 전략에 따라 병거를 움직였습니다.

바락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다볼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각 사람은 자신의 선택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인간의 행동 위에서 하나님의 뜻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저는 이것이 참 큰 위로가 됩니다.

제 인생이 제 계산 하나 잘못했다고 완전히 하나님의 손 밖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잘못된 선택은 회개해야 하고 그 결과를 책임져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제 실수보다 큽니다.

12절부터 시스라의 움직임이 시작됩니다.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다볼 산에 오른다는 소식을 들은 시스라는 모든 병거, 곧 철 병거 구백 대와 자기와 함께 있는 온 군대를 기손 강으로 집결시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엄청난 군사적 압박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철 병거 구백 대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두려움 그 자체였습니다.

이전 본문에서도 이스라엘이 철 병거 때문에 골짜기 주민을 쫓아내지 못했다는 기록이 나왔습니다.

병거는 평지 전투에서 보병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였습니다.

시스라의 자신감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을 압제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한 번도 결정적인 패배를 경험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반복해서 성공하면 자신이 무너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권력이 오래 지속되면 그 권력이 영원할 것처럼 느낍니다.

돈이 계속 들어오면 돈이 자신을 지켜 줄 것처럼 생각합니다.

건강할 때는 죽음을 잊습니다.

사람들의 칭찬이 이어지면 자신의 이름이 영원히 남을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시스라에게 철 병거는 그런 확신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성경을 읽으며 반복해서 한 가지를 배웁니다.

인간이 가장 강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십니다.

애굽은 병거를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홍해에서 병거가 무력해졌습니다.

골리앗은 갑옷과 창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물맷돌 앞에서 무너졌습니다.

앗수르와 바벨론은 제국의 힘을 자랑했지만 그들의 시대 역시 지나갔습니다.

로마 제국은 십자가로 예수님을 제거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십자가가 제국보다 오래 남은 복음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저는 시스라의 병거를 보면서 제가 의지하는 ‘철 병거’는 무엇인지 묻게 됩니다.

통장 잔액일 수 있습니다.

건강일 수 있습니다.

학력과 경력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인맥일 수 있습니다.

목회자라면 자신의 설교 능력이나 교회의 규모가 철 병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들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만 있으면 나는 안전하다.”

그 순간 철 병거는 우상이 됩니다.

그런데 14절에서 드보라는 바락에게 말합니다.

“일어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넘겨 주신 날이라.”

저는 여기서 “오늘”의 믿음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승리의 날을 정하셨습니다.

시스라가 병거를 모은 날이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를 넘겨주시는 날입니다.

시스라에게는 자신이 전쟁을 시작하는 날이었지만 하나님께는 그의 권세가 끝나는 날이었습니다.

같은 날을 인간과 하나님은 전혀 다르게 보고 계십니다.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날이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날일 수도 있습니다.

문이 닫혔다고 생각한 날이 새로운 길이 열리는 날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모든 위기가 즉시 성공으로 바뀐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적 믿음은 막연한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보다 상황을 최종적인 것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드보라는 바락에게 다시 묻습니다.

“여호와께서 너에 앞서 나가지 아니하시느냐.”

이 한 문장이 제 마음을 붙듭니다.

바락이 먼저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가십니다.

하나님이 앞서시고 바락이 뒤따릅니다.

저는 제 인생의 순서도 이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먼저 계획하고 하나님께 따라와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를 보고 따라가야 합니다.

신앙은 하나님께 제 계획을 승인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제 삶을 맞추는 것입니다.

‘앞서 가다’라는 의미에는 하나님께서 이미 전쟁의 현장에 먼저 계신다는 확신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출애굽의 하나님을 떠올리게 합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백성 앞에서 길을 인도하셨습니다.

요단을 건널 때도 언약궤가 앞섰습니다.

여리고 성 앞에서도 하나님께서 먼저 승리를 약속하셨습니다.

저는 자꾸 미래에 하나님이 계실지를 걱정합니다.

“내가 저 길을 가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실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부르신 길이라면 질문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그곳에 앞서 가고 계시지 않은가?”

그 확신이 있으면 저는 두려움 속에서도 발을 내딛을 수 있습니다.

바락은 다볼 산에서 내려갑니다.

그를 따르는 사람은 만 명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구백 대의 철 병거를 상대하기에 충분하지 않아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전투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바락 앞에서 시스라와 그의 모든 병거와 그의 온 군대를 칼날로 혼란에 빠지게 하시매.”

‘혼란에 빠뜨리다’는 의미의 히브리어 ‘하맘’(הָמַם)은 공포에 빠뜨리다, 혼란시키다, 무너뜨리다는 뜻을 가집니다.

이 단어는 출애굽과 정복 전쟁의 문맥에서도 하나님께서 적들을 혼란하게 하시는 장면과 연결됩니다.

전쟁을 뒤집으신 분은 바락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혼란하게 하셨습니다.

사사기 5장의 노래를 함께 읽으면 이 전쟁에는 자연현상까지 개입된 것으로 보입니다.

하늘에서 별들이 싸웠다고 노래하고, 기손 강이 적군을 휩쓸었다고 말합니다.

많은 해석자들은 폭우로 인해 기손 강 주변의 평지가 진흙탕이 되었고, 그 결과 철 병거의 기동력이 크게 제한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합니다.

본문이 상세한 기상 보고를 주는 것은 아니므로 지나치게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시스라가 의지했던 병거가 결정적인 순간에 힘을 쓰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의 역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스라에게 가장 강한 것이 오히려 가장 무거운 것이 됩니다.

마른 평지에서는 병거가 강합니다.

그러나 진흙 속에서는 그 무거움이 약점이 됩니다.

인간은 강점을 절대화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환경 하나로 그 강점을 약점으로 바꾸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능력을 자랑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의 강점이 내일의 한계가 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오늘의 약점이 하나님의 손에서는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에훗의 왼손이 그랬고, 삼갈의 소 모는 막대기가 그랬으며, 이제 시스라의 철 병거는 무력해집니다.

하나님 나라의 방식은 인간의 상식과 자주 다릅니다.

시스라는 병거에서 내려 도보로 도망합니다.

저는 이 장면의 역설이 참 큽니다.

철 병거 구백 대의 군대 장관이 병거를 버리고 두 발로 도망갑니다.

자기가 의지했던 것을 버리고 달아나는 것입니다.

우상이 무너질 때 인간의 모습도 이렇습니다.

돈이 모든 것을 지켜 줄 것처럼 생각하지만 돈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순간이 옵니다.

사람의 힘을 의지하지만 그 사람도 떠납니다.

건강을 절대시하지만 몸은 늙습니다.

명성을 붙들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옮겨 갑니다.

세상의 모든 철 병거는 언젠가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영원히 붙들 수 있는 것을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바락은 시스라의 군대를 추격합니다.

하로셋 학고임까지 쫓아가고 시스라의 온 군대가 칼에 엎드러져 한 사람도 남지 않습니다.

저는 이 승리를 보면서 다시 한 번 질문합니다.

누가 이겼습니까?

바락이 싸웠습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칼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중심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혼란에 빠뜨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넘겨주셨습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인간이 참여하지만 구원의 영광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죄와 싸워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결단해야 합니다.

그러나 제 구원의 근거는 제 싸움의 성실함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죄의 값을 담당하셨고 부활로 죽음을 깨뜨리셨습니다.

저의 싸움은 이미 결정적인 승리를 이루신 왕을 따라가는 싸움입니다.

그래서 저는 실패했을 때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승리했을 때 교만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속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안전해 보였던 장막이 시스라에게 마지막 장소가 되었습니다 (삿 4:17-22)

시스라의 군대는 무너졌지만 시스라는 살아 도망합니다.

그가 향한 곳은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입니다.

17절은 그 이유를 알려 줍니다.

하솔 왕 야빈과 겐 사람 헤벨의 집 사이에는 화평이 있었습니다.

시스라의 입장에서는 이보다 안전한 장소가 없어 보였을 것입니다.

적군의 장막이 아닙니다.

자신의 왕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집입니다.

전쟁터에서 도망친 시스라는 아마 “여기라면 살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인간이 생각하는 안전과 하나님의 판단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를 봅니다.

시스라가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한 장소가 그의 죽음의 장소가 됩니다.

사람은 자기 경험을 따라 안전지대를 만듭니다.

돈이 많으면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권력 있는 사람과 연결되어 있으면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계약서가 있으면 안전하고, 지위가 있으면 안전하며, 자신의 계획이 치밀하면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현실적인 준비는 필요합니다.

하지만 궁극적인 안전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시편은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고 말합니다.

파수꾼이 깨어 있어도 하나님께서 지키지 않으시면 인간의 경계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운명론적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준비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보험도 필요하고, 건강관리도 필요하며, 계획도 필요합니다.

다만 그것을 하나님처럼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 생명은 결국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야엘은 장막에서 나와 시스라를 맞이하며 말합니다.

“나의 주여 들어오소서 내게로 들어오시고 두려워하지 마소서.”

시스라는 장막 안으로 들어갑니다.

야엘은 그를 이불로 덮습니다.

시스라가 물을 요구하자 야엘은 우유를 담은 부대를 열어 마시게 한 뒤 다시 덮습니다.

이 장면은 묘한 긴장감을 가집니다.

시스라의 관점에서는 보호와 환대가 이어집니다.

장막,

이불,

우유,

휴식.

전쟁터와 정반대의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독자는 이미 드보라가 바락에게 했던 말을 기억합니다.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 성취되어 가고 있습니다.

저는 말씀의 성취가 항상 제가 예상한 모양으로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합니다.

바락은 아마 자신이 시스라와 정면으로 싸워 그를 죽일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스라는 전쟁터가 아니라 장막으로 도망갑니다.

그리고 군인이 아니라 한 여성의 손에 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이루시지만 인간의 예상대로만 이루시지는 않습니다.

저는 기도하면서 응답의 모양까지 정해 놓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 단, 이런 방식으로 해 주십시오.”

사실상 하나님께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지시하는 셈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제 생각보다 지혜로우십니다.

응답은 올 수 있지만 제가 생각한 사람을 통해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예상한 시간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제가 기대한 방식과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것이지 하나님의 방법을 통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스라는 야엘에게 장막 문에 서 있다가 누가 찾아와 사람이 있느냐고 물으면 없다고 대답하라고 부탁합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철 병거 구백 대를 지휘했던 장군의 초라한 마지막을 봅니다.

조금 전까지 수많은 군인을 지휘하던 사람이 이제 한 여인에게 자기 존재를 숨겨 달라고 부탁합니다.

권력의 허무함입니다.

사람이 가졌던 지위와 명예는 상황이 바뀌면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높은 자리에 있을 때 더욱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사람들이 나를 찾는다고 내일도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오늘 제 말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인다고 그것이 제 존재의 가치를 보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영광은 풀과 같습니다.

베드로전서가 말하듯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습니다.

꽃은 떨어집니다.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습니다.

시스라는 피곤함 때문에 깊이 잠듭니다.

야엘은 장막 말뚝과 방망이를 손에 듭니다.

그리고 조용히 다가가 말뚝을 그의 관자놀이에 박아 땅에까지 박히게 합니다.

시스라는 죽습니다.

현대의 독자에게 이 장면은 매우 충격적입니다.

저 역시 이 본문을 읽으면서 폭력성 때문에 불편함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적용할 때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야엘의 행동을 개인적인 복수나 오늘날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사례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사사기는 고대 이스라엘의 독특한 구속사적 상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빈과 시스라는 하나님의 백성을 이십 년 동안 혹독하게 압제한 세력이었고, 야엘의 행위는 그 압제를 끝내는 하나님의 심판 사건 속에 위치합니다.

이 사건이 오늘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적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약의 교회는 칼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칼을 든 베드로를 말리셨고, 원수를 사랑하며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씨름이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제가 싸워야 할 대상은 사람이 아닙니다.

제 안의 죄와 거짓입니다.

복음을 대적하는 영적 세력입니다.

교만과 탐욕, 음욕과 미움, 불신앙과 싸워야 합니다.

하지만 저는 야엘의 행동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현실이라는 사실도 가볍게 넘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죄를 영원히 방치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시스라는 이십 년 동안 백성을 압제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고통받았을 것입니다.

가정이 무너지고, 재산을 빼앗기고, 자유를 잃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 억압받는 자들의 눈물을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저는 현대 사회에서도 악을 너무 개인적인 차원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폭력,

착취,

부패,

권력 남용,

약자를 짓밟는 구조도 하나님 앞에서 심판의 대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억울한 자의 부르짖음을 들으십니다.

십자가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가장 깊이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대충 넘기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죄의 대가가 아무것도 아니라면 십자가는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십자가는 하나님의 심판이 죄인에게 마지막 말이 되지 않도록 한 구원의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여기에서 사사기의 전쟁과 복음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가 드러납니다.

야엘의 말뚝은 압제자의 머리를 관통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는 죄 없는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못에 박힙니다.

구약의 사사 시대에는 원수가 죽음으로써 백성이 구원을 얻는 장면이 반복됩니다.

그러나 복음에서는 구원자가 죽으심으로 원수 된 우리가 생명을 얻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놀라운 반전입니다.

로마서는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저는 그래서 야엘 이야기를 읽으면서 결국 더 크신 구원자 예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의 최종적인 구원은 적을 제거하는 폭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22절에서 바락이 시스라를 추격하여 야엘의 장막에 도착합니다.

야엘은 나와서 말합니다.

“오라 네가 찾는 그 사람을 네게 보이리라.”

바락이 들어가 보니 시스라가 죽어 누워 있고 말뚝이 관자놀이에 박혀 있습니다.

드보라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바락은 시스라를 추격했습니다.

그러나 시스라를 죽이는 영광은 야엘에게 돌아갔습니다.

저는 여기서 다시 인간의 영광을 내려놓는 법을 배웁니다.

나는 최선을 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열매가 반드시 제 손을 통해 나타나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락은 군대를 이끌었습니다.

야엘은 결정적인 마지막 역할을 했습니다.

드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수많은 이름 없는 이스라엘 병사들이 싸웠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사람을 서로 다른 자리에서 사용하십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누군가는 설교합니다.

누군가는 기도합니다.

누군가는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누군가는 식사를 준비합니다.

누군가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교회를 청소합니다.

누군가는 한 영혼에게 조용히 복음을 전합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중요하지 않은 순종이 없습니다.

저는 제 이름이 남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하고 싶습니다.

제가 심었는데 다른 사람이 거둘 수 있습니다.

제가 오래 기도한 열매를 다른 사람이 볼 수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시스라의 죽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야빈의 권세를 꺾으신 것입니다 (삿 4:23-24)

23절은 오늘 본문의 신학적 결론을 매우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와 같이 이 날에 하나님이 가나안 왕 야빈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 굴복하게 하신지라.”

저는 여기서 주어를 다시 확인합니다.

누가 야빈을 굴복시켰습니까?

드보라라고 하지 않습니다.

바락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야엘이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굴복하게 하셨습니다.

사사기에서 계속 반복되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십니다.

사람은 도구입니다.

이 사실을 놓치면 우리는 사사기의 인물들을 영웅으로만 읽게 됩니다.

드보라는 훌륭합니다.

바락도 결국 순종했습니다.

야엘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을 연결하여 구원을 이루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저는 이것을 제 신앙과 사역에 깊이 새기고 싶습니다.

제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교회를 살리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설교를 잘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저는 그 일에 참여하는 종입니다.

이것을 잊으면 사역은 쉽게 자기 왕국이 됩니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기를 원합니다.

내가 세운 교회,

내가 키운 사람,

내가 만든 결과라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시면 인간이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는 그래서 사역이 잘될 때 “하나님이 하셨습니다”라는 말을 단순한 종교적 인사말로 하지 않고 정말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실패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을 제 책임으로 끌어안고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충성해야 할 몫은 있습니다.

반성할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께 속합니다.

23절은 “이 날”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표현에서 하나님의 때를 생각합니다.

야빈의 압제는 이십 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마 수없이 물었을 것입니다.

“언제까지입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지금 바로 우리를 구하지 않으십니까?”

하지만 하나님께는 정하신 날이 있었습니다.

저는 기다림이 참 어렵습니다.

기도하면 빨리 응답받고 싶습니다.

문제는 즉시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변하기를 기도했다면 다음 주쯤 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은 제 시간과 다를 때가 많습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아들을 오래 기다렸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오랜 세월 고통받았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시간도 길었습니다.

그러나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갈라디아서의 표현처럼 하나님의 구원에는 ‘때가 참’이 있습니다.

매일성경 묵상 사사기 4:1-10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은 사람을 부르시고 길을 여십니다

  • 매일성경 묵상 사사기 4:1-10

오늘도 저는 말씀 앞에 앉아 제 마음에 자리한 두려움과 믿음을 함께 바라봅니다. 사사기 4장 1절부터 10절에는 에훗이 죽은 후 다시 악을 행한 이스라엘, 철 병거 구백 대로 백성을 압제한 야빈과 시스라,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드보라와 전쟁터로 부름받은 바락이 등장합니다. 인간의 눈에는 시스라의 병거가 너무 강해 보이지만 하나님은 이미 승리를 선언하십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하며 눈앞의 현실이 하나님의 약속보다 크게 보일 때 어떻게 믿음으로 일어서야 하는지, 그리고 두려움 많은 사람까지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깊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철 병거 구백 대 앞에서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삿 4:1-3)

사사기 4장은 익숙하면서도 안타까운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에훗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저는 가장 먼저 “또”라는 단어에 마음이 머뭅니다.

사사기 3장에서 이스라엘은 모압 왕 에글론의 압제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왼손잡이 에훗을 세워 구원하셨습니다. 모압이 굴복하고 땅은 무려 팔십 년 동안 평온했습니다.

팔십 년이면 한 사람의 평생에 가까운 긴 세월입니다.

한 세대가 태어나 늙어 갈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만큼 오랫동안 평화를 누렸다면 이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에훗이 죽자 그들은 다시 악을 행합니다.

저는 이 말씀 앞에서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쉽게 은혜를 잊는지를 생각합니다.

고난이 있을 때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습니다.

문제가 해결되면 감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평안이 오래 지속되면 어느 순간 평안 자체를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합니다.

기도 응답이 은혜였다는 사실을 잊습니다.

건강도 당연하고, 가족도 당연하고, 교회도 당연하며, 일상의 평화도 당연하다고 느낍니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을 누리면서 선물을 주신 하나님은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저는 제 삶도 돌아봅니다.

어려울 때는 새벽부터 기도하다가 문제가 해결되면 기도 시간이 줄어들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무너질 때는 말씀 한 구절을 붙들고 살다가 형편이 좋아지면 말씀을 대하는 마음이 느슨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가장 위험한 때가 반드시 고난의 때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모든 것이 잘될 때가 더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고난은 하나님을 찾게 하지만 평안은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착각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그들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악입니다.

사람의 눈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경제가 돌아가고, 농사가 이루어지고, 사람들은 일상을 살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삶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우상숭배와 불순종을 보셨습니다.

저는 이 표현을 묵상하며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시선은 결국 하나님의 시선이라는 사실을 배웁니다.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평가하는가보다 하나님께서 저를 어떻게 보시는지가 중요합니다.

사람에게는 경건해 보이면서 하나님 앞에서는 다른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사람들에게 큰 인정을 받지 못해도 하나님 앞에 진실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제 외면보다 내면을 살피고 싶습니다.

“주님, 사람들이 모르는 제 마음을 주님은 아십니다. 제 안에 숨은 우상과 타협을 보여 주십시오.”

이스라엘이 다시 악을 행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넘기십니다.

야빈은 하솔에서 통치했고 그의 군대 장관은 시스라였습니다.

성경에서 “넘겨주다”는 표현은 단순히 이스라엘이 군사적으로 패배했다는 사실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배반한 백성을 징계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고난은 하나님의 주권 밖에서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났고, 하나님께서는 그 선택의 무게를 경험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저는 여기서 하나님의 징계를 두렵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징계가 하나님의 버리심과 같지는 않다는 사실도 기억합니다.

히브리서가 말하듯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십니다.

징계의 목적은 파괴가 아니라 돌이킴입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을 개인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징계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는 욥처럼 의롭게 살다가 고난받는 사람도 있고,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이나 부모의 특정한 죄 때문이라고 단정하는 제자들의 생각을 바로잡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고난을 보고 “죄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라고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내게 어려움이 찾아왔을 때 스스로를 하나님 앞에서 살펴보는 것은 필요합니다.

“주님, 혹시 제가 돌아서야 할 길이 있습니까?”

“말씀보다 다른 것을 붙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질문은 신앙을 건강하게 만듭니다.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에게는 철 병거 구백 대가 있었습니다.

저는 본문이 이 숫자를 굳이 기록한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당시 철 병거는 평지 전투에서 압도적인 군사력을 의미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제대로 갖추어진 상비군도 없었고, 철제 무기에 있어서도 가나안 세력보다 열세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스라엘의 눈앞에는 단순한 적군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압도적인 전력이 있었습니다.

철 병거 구백 대.

저는 이 숫자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어떤 느낌이었을지 상상해 봅니다.

병거가 달려오는 소리만 들어도 두려웠을 것입니다.

평원에서는 도망칠 곳도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시스라의 군사력은 단순한 정치적 압제를 넘어 심리적 공포가 되었을 것입니다.

본문은 야빈이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하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학대하다’는 의미는 강하게 압박하고 짓누르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히브리어 ‘라하츠’(לָחַץ)는 압박하다, 억누르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스라엘은 하루 이틀이 아니라 이십 년 동안 그 압박을 견뎠습니다.

저는 십팔 년 동안 모압을 섬겼던 이전 사건에 이어 또다시 긴 압제를 당하는 이스라엘을 보며 죄의 종살이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생각합니다.

죄는 처음에는 자유처럼 다가옵니다.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라.”

“하나님의 말씀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

“조금 타협한다고 무슨 일이 생기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자유의 끝에는 또 다른 주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섬기기를 거부하자 야빈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것도 섬기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돈을 섬길 수 있습니다.

사람의 평가를 섬길 수 있습니다.

성공을 섬길 수 있습니다.

쾌락을 섬길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내가 그것을 이용한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순간 그것이 나를 지배합니다.

돈을 사용하는 사람이 돈에 의해 선택을 결정받습니다.

사람의 인정을 원하는 사람이 사람의 평가 없이는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

쾌락을 선택한 사람이 결국 그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죄는 언제나 철 병거를 만들어 냅니다.

처음에는 작은 선택처럼 보였지만 시간이 지나면 혼자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세력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죄를 초기에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작은 타협을 가볍게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마음에 들어온 작은 미움을 그대로 두지 않아야 합니다.

은밀한 욕망을 “이 정도는 괜찮다”고 합리화하지 않아야 합니다.

죄가 습관이 되기 전에 십자가 앞으로 가져가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인간의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부르짖다’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차아크’(צָעַק)는 극심한 고통 가운데 도움을 요청하며 외치는 것을 말합니다.

이십 년 동안 견디던 사람들이 마침내 하나님을 찾습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봅니다.

하나님을 떠난 것은 이스라엘입니다.

다른 신들을 선택한 것도 그들입니다.

그 결과 압제를 받은 것도 그들의 불순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시 부르짖자 하나님은 귀를 막지 않으십니다.

“이제 와서 나를 찾느냐”고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저는 이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저도 하나님을 너무 늦게 찾을 때가 있습니다.

문제를 제가 해결해 보려고 애씁니다.

사람을 찾아가고, 계산하고, 고민하고, 여러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러다가 다 안 되면 마지막에 하나님께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첫 번째가 되어야 하는데 마지막 선택이 되곤 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제 기도를 들으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의 긍휼을 이용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차피 하나님이 들어주시니 마음대로 살다가 어려울 때 찾으면 된다는 태도는 은혜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렇게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더욱 하나님 곁에 머물고 싶습니다.

저는 오늘 제 삶의 철 병거를 생각해 봅니다.

도저히 바뀌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래된 죄의 습관일 수도 있습니다.

경제적인 압박일 수도 있고 건강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깊은 상처나 두려움일 수도 있습니다.

구백 대의 철 병거처럼 제가 보기에는 너무 큰 현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 믿음은 병거가 없다고 우기는 것이 아닙니다.

병거보다 크신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필요했던 것은 더 많은 병거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었습니다.

저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를 해결할 방법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하나님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제가 왜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저 사이의 죄의 장벽을 제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철 병거 앞에서 절망만 하지 않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제가 할 수 없는 것을 주님께서 하실 수 있음을 믿습니다.”

종려나무 아래의 드보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두려운 시대를 깨웁니다 (삿 4:4-7)

4절에서 아주 인상적인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드보라는 사사기에서 매우 독특한 인물입니다.

그녀는 사사이면서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여성입니다.

고대 근동 사회의 문화적 환경을 고려하면 이 장면은 더욱 두드러집니다.

본문은 드보라가 사사가 된 사실을 변명하지도 않고 특별한 문제처럼 다루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셨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기록합니다.

저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는 방식이 인간의 고정된 기대보다 넓다는 사실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때로 사람들이 예상했던 사람을 사용하시고, 때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에훗은 왼손잡이였습니다.

삼갈에게는 소 모는 막대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드보라를 세우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틀에 갇히지 않습니다.

‘드보라’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벌’을 의미하는 ‘데보라’(דְּבוֹרָה)에서 옵니다.

이름의 의미를 지나치게 상징적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지만, 저는 한편으로 꿀과 침을 함께 가진 벌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됩니다.

드보라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지혜로운 지도자이면서 동시에 불순종과 두려움을 향해 날카로운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였습니다.

본문은 그녀가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앉았고 이스라엘 자손이 재판을 받으러 그녀에게 나아왔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철 병거 구백 대가 나라를 압박하고 있습니다.

국가적으로는 매우 불안한 시대입니다.

그러나 한편에는 종려나무 아래 앉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의 문제를 판단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말씀의 자리가 살아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교회의 역할과도 연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혼란할수록 교회는 더 많은 소음으로 경쟁하기보다 말씀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정치가 혼란하고 경제가 어려우며 사람들의 마음이 불안할 때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분노를 증폭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이 장면을 볼 때 제 책임을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말만 해서는 안 됩니다.

인기 있는 주제만 전해서도 안 됩니다.

말씀으로 사람을 조종하거나 제 생각을 하나님의 뜻처럼 포장해서도 안 됩니다.

선지자의 역할은 자기 의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드보라가 권위를 가진 이유도 개인적인 카리스마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를 뜻하는 히브리어 ‘나비’(נָבִי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달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선지자는 미래를 예언하는 사람이라는 대중적 이미지보다 훨씬 넓은 의미를 가집니다.

현재 하나님의 뜻을 백성에게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죄를 죄라고 말하고,

약속을 약속이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백성이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를 말씀으로 알려 주는 역할입니다.

드보라는 납달리 게데스에 사람을 보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부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지 아니하셨느냐.”

이 문장이 중요합니다.

드보라의 계획이 아닙니다.

바락의 전략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바락은 납달리와 스불론 자손 만 명을 이끌고 다볼 산으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스라와 그의 병거들과 그의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내어 바락의 손에 넘겨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저는 여기서 사사기에서 계속 반복되는 중요한 표현을 다시 만납니다.

“내가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이스라엘은 병거가 없습니다.

시스라는 철 병거 구백 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결과를 선언하십니다.

“내가 넘겨 주리라.”

여기서 믿음의 본질을 생각하게 됩니다.

믿음은 현실을 무시하는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철 병거가 있는데도 없는 척하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철 병거가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더 크게 보는 것입니다.

바락이 다볼 산에 올라가야 하는 이유는 자신의 군사력이 충분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현실이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말씀은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염려할 이유가 가득합니다.

말씀은 정직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정직하면 손해 보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말씀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상대가 너무 밉습니다.

말씀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당장 내 생존과 성공을 챙기는 것이 더 급하게 느껴집니다.

그때 저는 무엇을 따라야 할까요?

믿음은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마지막 권위를 말씀에 두는 것입니다.

저는 특히 “기손 강”이라는 장소를 눈여겨봅니다.

이후 5장에서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를 보면 하나님께서 자연현상까지 사용하셔서 시스라의 병거들을 무력하게 하신 정황을 볼 수 있습니다. 기손 강이 넘치고 전쟁터가 진흙탕이 되었을 가능성을 많은 해석자들이 생각합니다.

철 병거의 강점은 단단한 평지에서 드러납니다.

하지만 땅이 물에 젖어 진흙이 되면 병거는 오히려 무거운 짐이 됩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인간이 가장 강하다고 자랑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얼마나 쉽게 무력해질 수 있는지 생각합니다.

시스라에게 병거는 절대적인 힘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시면 그 병거가 움직이지 못합니다.

저도 종종 어떤 현실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돈이 없으면 끝이다.”

“이 사람의 도움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 조건을 갖추지 못하면 기회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는 조건을 순식간에 바꾸실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자기 욕망의 근거로 사용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기적을 주실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믿음과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붙들되 약속하지 않으신 결과를 제 욕망대로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바락에게는 분명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근거는 긍정적인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저는 오늘 제 삶에서 말씀에 분명한 부분과 제 욕망을 구분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정직하라고 말씀하셨다면 결과를 계산하기 전에 정직해야 합니다.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면 상대의 반응을 먼저 계산하지 말고 용서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거룩하게 살라고 말씀하셨다면 시대의 분위기보다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드보라가 바락에게 전한 것은 바로 그런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넘겨주실 것이다.”

명령과 약속이 함께 있습니다.

저는 이 두 가지가 신앙생활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합니다.

명령만 있고 약속이 없다면 신앙은 무거운 짐이 됩니다.

약속만 있고 명령이 없다면 신앙은 값싼 위로로 변합니다.

성경은 둘을 함께 줍니다.

“가라.”

그리고

“내가 함께하겠다.”

“싸우라.”

그리고

“내가 넘겨주겠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명령하시면서 마지막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명령과 임재가 함께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순종할 수 있습니다.

제가 강해서가 아니라 주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볼 산에 오르는 바락보다 더 중요한 분은 바락을 보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오늘 제 사명 앞에서 자꾸 제 능력부터 확인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나는 할 수 있는가?”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묻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가?”

그 말씀이 분명하다면 부족함 속에서도 한 걸음을 내딛겠습니다.

“당신이 함께 가면 가겠습니다”, 두려움 많은 바락도 하나님의 손에 쓰임받았습니다 (삿 4:8-10)

바락은 드보라의 말을 듣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도 가지 아니하겠노라.”

저는 이 문장을 읽을 때 바락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잠시 생각하게 됩니다.

한편으로 보면 믿음이 부족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명령하시고 승리를 약속하셨는데도 바락은 드보라가 동행해야만 가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드보라는 함께 가겠다고 하면서도 이번 길에서는 바락이 영광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이 말씀은 이후 야엘을 통해 성취됩니다.

시스라를 실제로 죽이는 사람은 바락이 아니라 헤벨의 아내 야엘입니다.

바락이 얻을 수 있었던 군사적 영예의 결정적인 부분이 한 여성에게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바락의 대답에는 분명히 부족한 믿음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바락을 지나치게 쉽게 정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 안에도 바락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셔도 자꾸 눈에 보이는 사람을 찾습니다.

“누가 같이 가면 하겠습니다.”

“조건이 좀 갖추어지면 시작하겠습니다.”

“조금 더 확신이 들면 순종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라고 말씀하시는데 저는 안전장치를 하나 더 요구합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사람의 동행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압니다.

믿음의 공동체는 중요합니다.

모세에게 아론과 훌이 필요했고, 바울에게 바나바와 실라와 디모데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둘씩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와 함께하려는 것 자체가 불신앙은 아닙니다.

문제는 사람의 동행이 하나님의 약속보다 더 중요한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바락의 말 속에서 그 경계선을 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니 가겠습니다”가 아니라 “당신이 가면 가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제 믿음도 사람에게 지나치게 의존할 때가 있습니다.

존경하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믿음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좋은 목회자가 있으면 신앙생활을 잘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지지하면 용기를 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떠나면 함께 믿음도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결국 사람을 통해 도움받되 하나님께 뿌리내려야 합니다.

드보라는 바락에게 중요한 동역자였습니다.

하지만 바락의 하나님은 드보라가 아닙니다.

전쟁을 이기시는 분도 드보라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저는 이것을 목회 관계에서도 기억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목회자를 사랑하고 신뢰하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성도를 목회자에게 의존하도록 만드는 것은 건강하지 않습니다.

목회자의 역할은 사람을 자신에게 묶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입니다.

결국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말씀을 읽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직접 의지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바락에게 필요한 것도 드보라의 믿음을 빌리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드보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바락에게서 또 다른 면도 봅니다.

그는 두려워했지만 결국 갔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완전한 믿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불완전한 믿음으로라도 순종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드보라가 함께 가겠다고 하자 바락은 게데스로 갑니다.

스불론과 납달리를 소집합니다.

만 명이 그를 따라 올라갑니다.

드보라도 함께합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큰 위로를 얻습니다.

하나님께서 완벽한 믿음을 가진 사람만 사용하신다면 저는 쓰임받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제 믿음에는 의심이 있습니다.

두려움이 있습니다.

계산이 있습니다.

말씀을 들으면서도 “정말 될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바락도 사용하셨습니다.

후에 히브리서 11장은 놀랍게도 바락을 믿음의 사람들 가운데 언급합니다.

기드온과 바락과 삼손과 입다 등을 믿음의 인물로 소개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완벽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들의 실패를 숨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완전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여 행동한 믿음을 기억하십니다.

저는 이것이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제 믿음이 완성된 다음에야 사용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저를 사용하시면서 믿음을 자라게 하십니다.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 순종하라고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안고 한 걸음 나아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두렵지 않아야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려 합니다.

믿음은 두려움이 없는 상태보다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행동에 가깝습니다.

바락은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결국 다볼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저도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걱정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사역이 부담될 수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면 두려움을 안고서라도 순종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드보라의 역할도 깊이 생각합니다.

드보라는 바락의 부족한 믿음을 비웃지 않았습니다.

“그 정도 믿음으로 무슨 지도자가 되겠느냐”고 몰아붙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의 믿음 부족에 따른 결과를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 갑니다.

저는 이것이 영적 지도자의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연약함을 정확히 말하되 그 사람을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책망하되 함께 걷는 것입니다.

진리를 말하면서도 사랑으로 동행하는 것입니다.

목회는 멀리서 명령하는 일이 아니라 함께 걸어 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로 성도는 믿음이 약합니다.

말씀을 들어도 두려워합니다.

한 번에 바뀌지 않습니다.

그때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은 답답하다고 손을 놓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다시 들려주고 함께 걸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그렇게 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두려워 물에 빠졌습니다.

제자들은 풍랑 앞에서 흔들렸습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모두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주시고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저는 드보라와 바락의 동행 속에서 그런 목회적 인내의 한 모습을 봅니다.

하지만 바락이 얻지 못할 영광이 여인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말씀은 인간의 영광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바락은 전쟁을 지휘합니다.

만 명을 소집합니다.

그러나 시스라를 죽이는 최종적인 역할은 야엘이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인간이 독점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저는 사역에서도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시작했다고 내가 열매를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씨를 뿌리고 다른 사람이 거둘 수 있습니다.

제가 오래 기도한 사람을 다른 목회자가 인도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가르쳤던 사람이 다른 자리에서 더 크게 쓰임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누가 더 큰 공을 세웠는가”가 가장 중요한 질문이 아닙니다.

바울도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저는 제 이름이 남는 것보다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바락은 납달리와 스불론 사람 만 명을 소집합니다.

왜 이 두 지파일까요?

이들은 북부 지역에서 야빈과 시스라의 압제를 직접적으로 받던 지파들이었습니다.

가장 큰 고통을 경험한 사람들이 전쟁의 최전선에 서게 됩니다.

저는 여기서 상처가 사명이 될 수 있다는 원리를 생각합니다.

자신이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같은 고통을 겪는 사람을 돕는 사람이 있습니다.

중독을 극복한 사람이 중독된 사람을 돕습니다.

상실을 경험한 사람이 슬픔 속에 있는 사람 곁에 더 오래 머물 수 있습니다.

가난을 겪은 사람이 가난한 사람의 마음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처를 낭비하지 않으십니다.

물론 고통 자체를 낭만적으로 포장해서는 안 됩니다.

아픈 것은 아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상처 입은 삶에서도 구원의 도구를 만들어 내실 수 있습니다.

십자가가 그 궁극적인 증거입니다.

십자가는 인류가 저지른 가장 큰 불의와 폭력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십자가를 구원의 길로 만드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죄 때문에 상처 입으셨지만 그 상처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상처를 마지막 이야기로 여기지 않겠습니다.

그리스도께 가져가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까지 사용하여 누군가를 위로하고 살리는 통로가 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사사기 4장의 드보라와 바락을 보면서 궁극적인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합니다.

드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바락은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나갑니다.

그러나 둘 다 완전한 구원자는 아닙니다.

드보라도 인간이고 바락도 두려움 많은 인간입니다.

사사기의 구원은 계속해서 불완전합니다.

사사가 일어나면 잠시 구원이 오고, 그 사람이 죽으면 백성은 다시 타락합니다.

이 반복은 우리에게 더 큰 구원자를 기다리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전달한 선지자를 넘어 육신이 되신 말씀입니다.

바락처럼 두려워하며 조건을 달지 않으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고통을 느끼셨지만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끝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도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의 도움을 조건으로 순종하지 않으셨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사사들은 적을 죽여 백성을 구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으심으로 원수 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사사들은 외부의 압제자를 꺾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사사들은 한동안 평화를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화평을 주십니다.

그래서 저는 철 병거 구백 대보다 더 두려운 죄와 죽음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세상의 가장 강한 철 병거였던 죽음이 무너졌다는 선언입니다.

죽음조차 예수님을 붙잡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오늘 무엇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물론 인간적인 두려움은 생깁니다.

그러나 두려움이 제 주인이 되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제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바락처럼 이렇게 말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와 함께라면 가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묵상한 뒤에는 조금 다르게 고백하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으니 가겠습니다.”

물론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하겠습니다.

도움을 받고 동역하겠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근거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두겠습니다.

그리고 제 힘으로 할 수 없는 일 앞에서는 이렇게 고백하겠습니다.

“철 병거는 크지만 하나님은 더 크십니다.”

마무리

사사기 4장 1절부터 10절을 묵상하며 저는 제 안에도 이스라엘의 망각과 바락의 두려움이 있음을 봅니다. 평안할 때 하나님을 잊고, 어려움이 닥치면 철 병거만 크게 바라보며, 말씀보다 사람의 동행을 더 의지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부르짖는 백성을 외면하지 않으셨고 드보라를 세워 말씀하시며 두려움 많은 바락까지 사용하셨습니다. 오늘 저는 제 앞의 철 병거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더 크게 보겠습니다. 사람의 도움은 감사히 받되 사람을 하나님 자리에 두지 않겠습니다. 십자가와 부활로 죄와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두려움이 남아 있어도 말씀하신 길이라면 순종의 한 걸음을 내딛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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